진구 통합검색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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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정보
진구
- 참여 작품
- 사막의 왕 (2022), 형사록 (2022), 마녀 Part2. The Other One (2022), 장아치청 (2021), 리-본 (2021), 내겐 너무 소중한 너 (2021), 원라인 (2016), 연평해전 (2015), 명량 (2014), 쎄시봉 (2014), 봄 (2014), 표적 (2013), 26년 (2012), 모비딕 (2011), 오직 그대만 (2011), 식객: 김치전쟁 (2010), 혈투 (2010), 마더 (2009), 태양을 삼켜라 (2009), 초감각 커플 (2008), 트럭 (2008), 스포트라이트 (2008), 기담 (2007), 사랑따윈 필요없어 (2006), 비열한 거리 (2006), 아이스케키 (2006), TV문학관 : 새야 새야 (2005), 달콤한 인생 (2005), 낭만자객 (2003), 올인 (2003)
이두일
- 참여 작품
- 첫녀 (2016), 강철대오: 구국의 철가방 (2012), 스파이 파파 (2011), 결정적 한방 (2011), 위도 (2011), 천국의 우편배달부 (2009), 나도 잘 모르지만 (2008), 이대근, 이댁은 (2007), 물 좀 주소 (2007), 불멸의 이순신 (2004), 패밀리 (2002), 무사 (2000),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 (1998), 이재수의 난 (1998), 투캅스 3 (1998), 찜 (1998), 비트 (1997), 진짜 사나이 (1996), 모래시계 (1995), 돈을 갖고 튀어라 (1995),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1995), 사랑하기 좋은날 (1994), 세상밖으로 (1994), 그 섬에 가고싶다 (1993), 비명도시 (1993),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 (1992), 시인 구보씨의 하루 (1990), 아스팔트위의 동키호테 (1988)
권해성
- 참여 작품
- 온도의 일치 (2024), 둘, 다시 하나 (2024), 사랑의온도82도 (2023), DMZ 대성동 (2023), 아수라장: 범털들의 전쟁 (2022), 부적: 남의 운을 빼앗는 자 (2022), 고양막걸리사수대작전 (2022), 새끼손가락 (2022), 2퍼센트 (2022), 돼지 공은주 (2021), 타이거 마스크 (2021), 미소 (2020), 비 온 뒤, 차차 (2020), 리얼 파이터 (2019), 아내를 죽였다 (2019), 독서충 (2016), 까시 (2015), 역모 - 반란의 시대 (2015), 낭만파 남편의 편지 (2012), 90분 (2011), 삼인삼색 - 동거동락 (2008), 태양의 이면 (2007), 꽃미남 연쇄 테러사건 (2007), 여름이 가기 전에 (2005), B형 남자친구 (2004), 썸 (2004), 오! 해피데이 (2003), 긴급조치 19호 (2002)
수집자료
극장판 도라에몽 진구와 기적의 섬 : 애니멀 어드벤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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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지털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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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에몽 : 진구의 마계대모험 7인의 마법사 [극장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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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V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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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관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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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판 도라에몽 진구와 기적의 섬 : 애니멀 어드벤처
- 매체규격
- 디지털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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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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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구의 비밀도구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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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구와 기적의 섬 : 애니멀 어드벤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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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에몽: 진구의 마계대모험 7인의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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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크÷스타+]진구, ″′혈투′는 나에게 가장 큰 행복을 준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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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구를 9년 지켜보니...정재형 못지않은 순정마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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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구, 영화 ′모비딕′ 통해 연기변신 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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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
그래서 우리는 영화를 만들기로 했다.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2016년 정지돈과 오한기와 이상우와 나는 <펫 시티>라는 제목의 ‘페이퍼시네마’를 만들었는데, 앨런 튜링의 뇌를 쪼아먹은 앵무새 마부제가 인간을 뛰어넘는 능력을 갖게 되며 조류가 인류를 지배하게 된 세상에서 분투하는 주인공 잭(a.k.a. 짹)과 동료들의 이야기를 그린 일종의 대체역사 SF였다. 벨라 발라즈는 옛날 영화가 우리에게 우스꽝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는 영화라는 문화가 너무도 빠르게 발달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오래된 예술이 대개의 경우 지나간 시대의 정신을 거기에 합당한 형식에 담아 표현했다면, 영화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우리 자신과 연관시킬 수 있는 것, 아직 ‘역사’가 아닌 우리의 최근 모습이며 그 어색함이 우리를 웃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니 당신이 방금 <펫 시티>의 로그라인을 보며 슬쩍 (비)웃었다면 그 때문이다, 아마도…… 그러니까 문제는 웃음이고, 웃음의 종류다. 그게 처음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정지돈과 내게 ‘우리가 사랑하는 21세기 한국 영화’라는 주제로 한달씩 번갈아가며 연재할 것을 제안했을 때 우리가—적어도 나는—떠올린 것이었다. 사랑하는 영화에 대해 말하는 일은 거의 언제나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소위 영화를 사랑한다는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영화라는 우정 운운하면서도 서로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난 모습을 보라. 소문난 영화사랑맨이자 시네마테크의 얼치기 인류학자였던 뤽 물레는 < 알카사르 작전 >에서 자신과 친구들을 한 마디로 묘사한다. 시네필들이 다 그렇듯이 그는 입냄새가 심했다, 라고…… < 인생은 소설이다 >의 개봉에 맞춰 알랭 레네를 인터뷰하는 자리에서 세르쥬 다네는 < 히로시마, 내 사랑 >이 어린 시절의 자신에게 주었던 충격에 대해 말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다네는 말한다, 내가 말해서는 안 될 그의 어떤 무엇인가를 말했다는 듯이 그는 조금은 쌀쌀한 태도와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으로 내게 감사를 표했다. 마치 내가 그의 레인코트를 칭찬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나는 기분이 상했지만 내가 잘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우리의 유년기를 응시했던’ 영화들은 공유 불가능하다는 것, 심지어 그 영화들의 작가와도 공유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근데 그게 웃음이랑 무슨 상관이에요? 지돈씨가 물었다. 아무래도 내가 그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한 모양이다. —두 종류의 한국 영화가 있습니다. 웃겨서 계속 보고 싶은 한국 영화와 웃겨서 더는 볼 수 없는 한국 영화. 전자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습니다. 후자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사이) 그럼 우리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요? 우리는 서교동 콜마인에서 만났다. 우리가 ‘영화를 보러 다니는 평범한 친구들’(가제)이라고 이름 붙인 연재를 위한 일종의 기획회의? 작전회의? 나는 약간 복잡한 마음이었다. 오랜만에 둘이 하는 공동작업이 설레기도 했지만, 장 루이 셰페르의 말마따나, 나는 영화에 대해 특별한 이야기를 할 자격은 전혀 없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관에 지나치게 자주 가는 지돈씨와 달리 마지막으로 영화관에 갔던 게 언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콘 에어>를 본 건 기억나는데…… —정연씨, 제발 니콜라스 케이지는 잊으세요. 지금보다 어리고 민감하던 시절, 나는 니콜라스 케이지가 주연한 < 더 록 >, < 패밀리 맨 >, < 스네이크 아이즈 >, < 비상 근무 >, < 페이스 오프 >, < 시티 오브 엔젤 >, <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 같은 영화들을 보며 생각했다. 왜? 왜 죄다 이 사람이 주인공인 거야? 그건 아직도 내게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로 남아 있고, 사람이란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를 좀처럼 잊지 못하는 법이다. 나는 지돈씨에게 내가 가장 최근에 본 한국 영화인 < 남산의 부장들 >에 대해 말했다. 중반까지는 무척 몰입해서 봤다, 중반을 넘어가며 조금은 동어반복적이고 지지부진한 느낌이, 클라이막스 이후에는 뭔가 잘 정리되지 않은 듯한 느낌도 들었지만 전체적으로 재밌었다, 다만 어느 순간 —한국 현대사를 다룬 정치 영화가 아니라 가족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고 할까요. 이병헌이랑 이희준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계속 보다보니까 추석에 삼촌들이 고스톱 치다 싸우는 것 같고, 이성민은 꼰대 아버지고, 유일한 여성 캐릭터인 김소진은 미국에서 로비스트로 일하는, 레비 스트로스적인 의미에서 족외혼을 통해 교환된, 문자 그대로 출가외인이며…… 겉으로는 세련된 척, 젠틀한 척, 서로 존중하는 척하면서 뒤로 은근히 견제하고 돌려서 까고 음모를 꾸며 뒤통수치는 외국의 정치물과 달리 상대적으로 단순하고 보다 직접적이라는 감상이 남았다. 그리고 그건 내게 아쉬움보다는 한국에서 한국 영화 나온다, 같은 생각이 들게 했다. 이런 이야기다.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평범한 관객으로서 나는 정치라는 공적인 관계까지 가족이라는 사적 프레임을 통해 파악하는 관점이 너무 익숙하다. 혹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관객으로서 내게 한국 영화는 어떤 시대를 다루건 지나치게 가깝게 느껴진다, 마치 가족처럼…… 그래서 우리는 한국 영화를 보고 한국 영화에 대해 말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작품의 매력과는 아무 상관없이 종종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막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되는 걸까? 우리를 둘러싼 시간과 공간이 너무 좁아. 약간의 여유가, 숨을 돌릴 수 있는 거리가 필요해. 늘 그랬던 것처럼 지돈씨는 자신에게 아이디어가 있다고 했다. 무려 세 개나! “봐, 나한테 아이디어가 있어”라고 말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들뢰즈는 묻는다. 이런 질문을 제기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듯이 아이디어가 있다는 것은 드물게 일어나는 사건이고 자주 오지 않는 일종의 축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아이디어가 있다는 것은 뭔가 일반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구나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 있다. 가끔은. 하지만 매번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다. 지돈씨는 어떻게 아직도 매번 아이디어가 샘솟는 거지? 지돈, 유 돈 스탑 네버 스탑? —첫 번째, 22세기의 영화 청년들이 우연히 21세기 초반의 영화를 발견하고 함께 이야기를 나눈다는 설정이에요. 일종의 SF처럼. 그때 내 머릿속에 떠오른 건 <베터 콜 사울>에 나오는 영화과 학생들이었다. 어쩐지 22세기에도 그들은 지금과 똑같은 모습의 영화과 학생으로 남아 있을 것 같았다. 천재 감독이 될 수 있었지만 전공을 잘못 택한 22세기의 사울 굿맨에게 착취 당하며…… —두 번째, 이건 방금 니콜라스 케이지 얘기하다가 떠오른 건데, 재밌게 봤지만 이상우에게는 절대 말할 수 없는 영화들이라는 컨셉인 거죠. 쉽게 말하면 길티 플레져 같은? 그런데 정말 그래도 괜찮을까? 지돈씨와 나는 종종(실은 거의 항상) 글을 쓸때 서로를 등장시켜 할 말 못할 말 모두 하게 만들곤 하는데, 이상우를 등장시킬 때는 어쩐지 조심하게 된다. 상우씨가 특별히 뭐라고 한 적도 없지만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되는 것이다. 바로 그점이에요, 지돈씨가 말했다. 여기서 이상우는 실존인물이 아닙니다. 정연씨와 저의 초자아를 가리키는 다른 이름인 거죠. —세 번째, 각자 상대를 내세워서 서로가 본 영화에 대해 쓰는, 금정연은 정지돈이라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정지돈이 영화를 보고 느낀 걸 기록하고 정지돈은 금정연이라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금정연이 보고 느낀 것을 기록하는 거예요. 3인칭 미니 픽션처럼. 물론 가장 내 마음에 든 건 세 번째였다. 22세기의 한국을 살아가는 청년들의 시점에서 21세기 초반의 한국 영화를 보는 게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지만 상상하긴 힘들었고, 이상우에게 절대 말할 수 없는 영화는 이상우에게 절대 말할 수 없으니까…… 그래서 우리는 서로의 영화 경험에 대해 짧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각자의 등장인물에 대해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신촌에 있던 녹색극장과 이대 앞 영화마당, 서울극장과 단성사와 피카디리와 씨네코아 같은 시내의 극장들에 대해 말했다. 비디오대여점과 극장에서 했던 아르바이트에 대해서도. 좌석들 사이에 떡하니 커다란 기둥이 있어 시야를 가리던 코아아트홀에서 < 버팔로 66 >을 봤다는 이야기를 하자 정지돈은 깜짝 놀라며 어떻게 그걸 극장에서 볼 수 있냐고 물었다. 얼마든지 볼 수 있죠. 내가 대답했다. 충분히 오래 전에 서울에서 태어나기만 했다면…… 정지돈이 영화를 본 곳은 대구극장과 한일극장과 만경관이었다. 그는 중학교 1학년이던 1996년 대구극장에서 < 미션 임파서블 >을 보며 처음 돌비서라운드를 경험했고, 그때부터 브라이언 드 팔마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여기서 질문. 만약 당시로서는 최첨단 음향시설이 설치된 대구극장에서 <미션 임파서블>을 보지 않았다면, 그와 드 팔마의 관계는 지금과 달랐을까? —귀를 중심으로 한 영화 경험은 관객의 자아로 깊숙이 진입한다고 토마스 엘새서가 말하긴 했죠. —그럼 지돈씨 자아 깊숙이 드 팔마가 있는 거예요? 와, 대박. —아니요. 제 자아 깊숙한 곳에는 드 팔마가 없습니다. 정지돈이 단호하게 말했다. —대신 탐 크루즈가 있죠. 귀와 음향은 영화 경험의 공간성을 전면에 부각시킨다, 라고 엘새서는 쓴다. 우리는 모퉁이에서, 그리고 벽 뒤에서, 심지어 우리가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완벽한 어둠과 눈부시게 환한 환경에서도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많은 전통적 접근 방식이 영화 관객을, 이성적으로 동기화되고 목적 지향적인 방법으로 관람하며, 객관적인 방법으로 정보를 처리하는 존재로 간주한 반면, 귀는 균형 감각과 공간적 감수성과 같은 요소로 초점을 옮긴다. 관객은 더 이상 영화 밖에 머무는, 시각 피라미드의 정점에 위치한 이미지의 수동적 수용자가 아니라 음향적, 공간적, 육체적으로 영화적 조직과 엮여 있는 신체적 존재다…… 이듬해에는 피어스 브로스넌이 주연한 < 단테스 피크 >를 돌비서라운드로 보다가 등 뒤에서 돌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서 깜짝 놀라기도 했다며 지돈씨는 쓸쓸하게 덧붙였다. —지금은 무엇에도 놀라지 않은지 오래 되었지만요. 정지돈은 또 아버지와 함께 한일극장에서 < 클리프행어 >를 보기 위해 매표소 앞에 줄을 서서 기다리던 일화를 들려주었는데, 줄이 너무 길어서 아무래도 못 보겠다고 생각하던 참에 아버지가 줄에서 쓱 나가 돌아다니던 암표상을 부르니 형님, 오셨어요? 하며 암표를 주었다고 했다. 어린 그에게 아버지가 비로소 아버지처럼 느껴졌던 몇 안 되는 기억이라고. 비슷한 무렵, 나 역시 아버지와 함께 < 쥬라기 공원 >을 보러 극장에 갔다. 마감에 허덕이는 만화가였던 아버지는 아는 암표상 동생이 있지는 않았고, 허름한 극장에는 사람이 많았던 것 같지도 않지만, 단순히 극장에 데려 갔다는 사실만으로 아버지와 얽힌 기억 중에 몇 안 되는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밖의 다른 좋은 기억들은 집에서 비디오로 함께 < 구니스 >를, <레이더스>를, < 8번가의 기적 >을, < 어비스 >를, < 스플래쉬 >를, < 폴리스 아카데미 >를, < 오복성 >을, < 총알탄 사나이 >를, < 로보캅 >을, < 토탈리콜 >을, < 다이하드 >를, < 프레데터 > 같은 영화들을 보던, 보다가 어머니와 싸우기 전까지는 그래도…… 헐리우드파였던 내 아버지와 달리 지돈씨의 아버지는 장 가뱅을 좋아하던 유럽파였다. 이걸 헐리우드에서 헐리우드 나고 유럽에서 유럽 난다고 해야 할지. 정작 우리 부자는 헐리우드에 가본 적도 없지만…… 아무튼 우리는 헐리우드건 유럽이건 아버지들이 우리를 영화의 세계로 이끌었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그렇다면 한국 영화는 아빠인가? 우리는 한국 영화를 죽여야 하나? —그건 < 화이 >에서 다 끝난 거 아니었어요? 친부 하나에 계부 다섯, 마지막에는 상징적 아버지까지 일곱 명이나 죽이잖아요. —정연씨, < 암살 >을 생각하세요. <화이>에서 친자인 여진구에게 죽었던 이경영은 <암살>에선 친자인 전지현(B) 대신 자기 아버지를 직접 죽이지 못하는 인물들이 모인 살부계의 일원인 하정우에게 죽습니다. 그건 수정주의죠. 영화라는 시간은 선형적이지 않아요. 지돈씨와 나는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고 대신 연락을 끊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우리의 기원에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를 영화 쪽으로 이끌었다는—엄밀히 말하면 영화 언저리에서 방목했다는—사실이 변하지는 않는다. 세르주 다네는 시네필이 된다는 것, 그것은 단지 학교 수업과 병행해서 행해지는 또 다른 수업이자 지식을 주입하는 과정이었으며 이 수업에서 노란 표지 시기의 <카이에>가 길잡이 역할을 했고 몇 사람의 성인 통행안내인들이 우리의 은밀한 공모자가 되었다고 말했는데, 우리는 시네필이 아니고 한 번도 시네필이었던 적은 없지만, 우리들의 아버지가 우리에게 최초의 성인 통행안내인이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처럼 보인다. 정확히 다네적인 의미에서, 그들은 우리에게 저기 어딘가에 발견해야 할 세계가 있고 ‘그’ 세계가 우리가 거주하고 있는 바로 그 세계라는 것을 가르쳐주었던 것이다. —이거다! 그때 갑자기 정지돈이 테이블을 두드리며 외쳤다. —한국의 영화는 일종의 교육-장치입니다. 남자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사적교육체제인 거죠. 로라 멀비는 주류 영화가 남성의 판타지와 쾌락을 제공하며 남성의 응시를 위해 구성된다고 주장했습니다. 다네는 시네필cinéphile을 영화-아들cine-fils라는 이보다 분명할 수 없는 자신만의 조어로 바꿔 말했고요. 아버지에서 아들로 내려오는 가부장적인 사적교육이 이루어지는 장소는 한국에서 모두 두 곳입니다. 극장 그리고 목욕탕! —그건…… 마치 고대 로마 같은 이야기네요. —그렇죠! 캐롤라인 래빈에 따르면 학교는 열을 지어 정렬한 관객 개념을 고대 극장에서 빌려 왔습니다. 따라서 세 가지 학교가 있습니다. 일반적인 학교, 감옥, 그리고 극장. 레프 마노비치는 스크린의 계보에서 영화 스크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관람객이 자리를 뜨지 않고도 다른 공간을 여행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움직이는 가상의 시선이죠. 하지만 이 가상적 운동성은 새롭게 제도화된 관객의 부동성을 대가로 얻어진 것입니다. 전 세계에 수백만 명의 수감자를 수용하기 위한 대규모 감방, 즉 영화관이 지어진 거죠. 수감자-관객은 다른 사람에게 말을 걸 수도 자리를 옮길 수도 없습니다. 바로 그게 제가 극장에서 영화 보는 걸 싫어하는 이유입니다. —싫어하는 것 치고 극장에 너무 자주 가는 거 아니에요? —정연씨,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사는 사람은 없어요.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살 수 없는 사람들의 사회, 푸코는 그걸 훈육사회라고 불렀다. 훈육사회는 감옥, 학교, 작업장, 병원 등 감금 환경의 구성으로 규정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극장이 추가되어야 한다. 들뢰즈는 우리가 훈육사회를 넘어—윌리엄 버로스의 표현을 빌려—통제사회로 가고 있다고 지적했는데, 그건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해 감금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사회다. 들뢰즈는 말한다. 통제는 훈육이 아닙니다, 고속도로로 사람들을 감금하지는 않지만, 고속도로를 통해 통제 수단을 늘릴 수 있게 됩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이것이 고속도로의 유일한 목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전혀 갇혀 있지 않고 무한히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데도 완벽하게 통제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미래입니다! 훈육사회에서 통제사회로. 극장에서 스마트폰으로. 소름…… 하지만 여전히 가장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영화에 대해 말해야 하는 거지? 목욕탕이 배경인 곽경택의 < 억수탕 >? 하지만 그건 20세기 영화인데…… 아니면, 홍상수의 < 극장전 >……? 그날 밤, 책상 앞에 앉아 스포티파이가 추천하는 맞춤 플레이리스트를 듣다가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앨라니스 모리셋의 ‘넌 알아야 해You Oughta Know’를 흥얼거리는데, 등장인물들이 그 노래를 부르던 두 영화의 장면이 떠오른 것이다. 먼저 <투어의 끝>에서 제이슨 세걸이 분한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와 일행들이 차에서 노래를 따라 부르는 장면. 그리고 < 북스마트 >에서 케이틀린 디버가 친구 집에서 열린 파티에서 가라오케 반주에 맞춰 열창하는 장면. 이어지는 것은 < 트립 투 이탈리아 >에서 롭 브라이든과 스티븐 쿠건이 차를 타고 가며 앨라니스 모리셋의 ‘Jagged Little Pill’ 앨범을 두고 토론을 벌이는 장면이다. 티키타카 끝에 둘은 CD를 트는데 “내가 당신을 열받게 하나요?Do I stress you out?”라는 첫소절이 나오자마자 브라이든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한다. “그래Yes, you do.” 그리고 장면은 다시 < 레이디버드 >에서 어린 주인공이 기타를 치며 ‘아이러닉Ironic’을 부르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 다음에 떠오른 것들을 어떤 순서로 적어야 할지 모르겠다. 여러 가지 생각이 한꺼번에 폭발하듯 튀어올라 하나의 형태를 이루었다. 마치 작은 빅뱅처럼. 한 마디로 그건 들뢰즈가 말하는 “내게 아이디어가 있어”의 순간, 단지 영화적인 것밖에 될 수 없는 아이디어의 순간이었다. 톰 앤더슨, < 타짜 >, 한국, 그리고 노래방이 한데 섞인…… 톰 앤더슨은 로스앤젤레스가 등장하는 영화의 장면들을 이어 붙여 < 로스앤젤레스 자화상 >을 만들었다. < L.A. 컨피덴셜 >, <긴 이별>, < 블레이드 러너 >, <히트>, < 차이나타운 > 같은 헐리우드 영화에서 켄트 맥켄지의 <더 엑사일즈> 같은 독립영화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영화들을 통해 도시의 장소들, 건물들, 거리들, 교통체제, 재개발, 도시의 기원을 둘러싼 신화, 도시를 통제하는 경찰 권력, 인종차별과 계급문제를 모두 아우르는 중층적인 영화-에세이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고 그건 내가 톰 앤더슨의 영화를 본 이후로 언제나 하고 싶었던 일, <담배와 영화>라는 책을 통해 나름 시도했으나 결코 성공했다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미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이었지만 나는 지돈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니까 한국 영화 속에 나타나며 한국 영화를 한국 영화로 만드는 한국적인 장면들을 모은 일종의 에세이 영화를 만드는 거죠, 우리가 직접! 이번 연재는 그런 영화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 기획 단계에서부터 포스트 프로덕션까지, 한국 영화에 대한 한국 영화를 만드는 두 사람의 좌충우돌 편력기를 그린 일종의 제작 노트가 되는 거고요! 지돈씨는 동의했고, 나는 검색과 기억에 의지해 노래방이 나오는 영화(25개)와 목욕탕이 나오는 영화(12.5개)의 목록을 정리해서 지돈씨에게 메일로 보냈다. 왜 노래방이냐고? 목욕탕이 극장과 더불어 한국 사회의 가부장적인 사적교육체제가 이루어지는 장소라면, 노래방(룸싸롱이나 가요주점 등을 포함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장치가 구비된 방을 모두 포괄하는 의미에서)은—정확히 말하면 한국 영화에서 재현되는 노래방은—한국의 남성들이 우애를 다지는 호모소셜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여성 인물들이 함께 노래를 한다고 해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 친구 >에서 유오성이 부르는 ‘마이 웨이’나 < 비열한 거리 >에서 천호진이 부르는 ‘올드 앤 와이즈’와 < 광복절 특사 >에서 송윤아가 부르는 ‘분홍 립스틱’이나 < 너는 내 운명 >에서 전도연이 부르는 ‘오빠’를 비교해보라. 꼭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꿀벌 이야기에 꿀이 빠질 수 없는 것처럼, 한국사람 이야기에 노래가 빠질 수는 없는 노릇이기도 하고…… —그런데 왜 하필 박무석이 곽철용 앞에서 ‘불나비’를 부르는 <타짜>의 장면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거에요? —지돈씨, 그건 말이죠…… (다음 회에 계속) *참고도서 [영화의 이론](벨라 발라즈 지음, 이형식 옮김, 동문선, 2003년) [영화가 보낸 그림엽서](세르쥬 다네 지음, 정락길 옮김, 이모션북스, 2013년) [영화를 보러 다니는 평범한 남자](장 루이 셰페르 지음, 김이석 옮김, 이모션북스, 2020년) ‘창조 행위란 무엇인가?’(질 들뢰즈 지음, [사유 속의 영화], 이윤영 옮기고 엮음, 문학과지성사, 2011년) [영화 이론 – 영화는 육체와 어떤 관계인가?](토마스 앨새서.말테 하게너 지음, 윤종욱 옮김, 커뮤니케이션북스, 2012년) [페미니즘 영화이론](쇼히니 초두리 지음, 노지승 옮김, 앨피, 2012년) [형식들](캐롤라인 레빈 지음, 백준걸.황수경 옮김, 앨피, 2021년) [뉴미디어의 언어](레프 마노비치 지음, 서정신 옮김, 커뮤니케이션북스, 2014년) (관련글) 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 , 금정연, 2021.03.19. 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 , 정지돈, 2021.05.07. 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3) , 금정연, 2021.06.11. 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4) , 정지돈, 2021.07.03. 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5), 금정연, 2021.08.06. 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6), 정지돈, 2021.08.31. 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7) , 금정연, 2021.10.08. 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8) , 정지돈, 2021.11.05. 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9) , 금정연, 2021.12.03. 1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0) , 정지돈, 2021.12.31. 1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1) , 금정연, 2022.03.02 1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2) , 정지돈, 2022.03.30. 1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3) , 금정연, 2022.05.11. 1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4) , 정지돈, 2022.06.10. 1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5) , 금정연, 2022.07.08. 1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6) , 정지돈, 2022.08.03. 1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7) , 금정연, 2022.08.31. 1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8) , 정지돈, 2022.10.14. 1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9) , 금정연, 2022.11.11. 2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0) , 금정연, 2022.12.07. 2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1) , 정지돈, 2022.12.15. 2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2) , 정지돈, 2022.12.30.
[한국영화걸작선]해바라기 가족 : 11월의 영화 II
9월의 < 박서방 >( 강대진 , 1960), 10월의 < 마부 >(강대진, 1961)에 이어 11월에도 또 한 편의 ‘ 김승호 영화’를 소개한다. 김승호는 < 로맨스 빠빠 >( 신상옥 , 1960), < 서울의 지붕 밑 >( 이형표 , 1961), < 삼등과장 >( 이봉래 , 1961), < 월급쟁이 >(이봉래, 1962) 등 60년대 초에 대중의 사랑을 받은 대표작들을 통해 한 시대를 풍미했고 지금도 그 영향력이 다했다고는 할 수 없을 소시민 가장의 초상을 그려냈다. 그가 연기한 아버지들은 한 집안을 경제적으로 부양하고 있지만, 전통적인 가부장의 권위는 바람 앞의 등불 신세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그가 담당하는 경제 활동의 토대가 흔들리는가 하면, 자식 세대는 새로운 가치관을 내세우며 불화를 일으킨다. 대체로 사람만 좋을 뿐 기민함과는 거리가 먼 아버지 김승호는 이런 변화 앞에 어찌할 바를 모른다. 그러나 김승호 영화에서 이런 시대의 변화와 세대 갈등이 치명적인 지경에 이르는 경우는 드물다. 아버지의 곤경은 곧잘 웃음기 어린 해프닝으로 마무리되며, 가장 절망적인 경우라도 아랫세대에서 구원자가 등장한다. 구원자의 역할을 맡는 이는 주로 장남이나 맏사위 등 아랫세대 중 가장 나이가 많은 남성인데, 그는 가장의 자리를 물려받음으로써 아버지의 곤경을 해소하며 분열될 것처럼 보였던 가족은 다시 하나로 뭉친다. 이러한 봉합은 주로 인기 라디오 드라마를 바탕으로 스타들을 내세운 상업 영화로서 피할 수 없었던 보수성에서 기인하기도 할 테고, 한국전쟁 이후 4.19 혁명과 5.16 군사정변을 거치며 끝없이 질서가 뒤바뀌는 과정에서 낡은 것을 타파하고 새로운 세상이 오기를 바라는 한편 그 과정이 폭력적인 뒤엎기가 아니라 성실하고 화목한 승계의 형태를 취하기를 열망했던 대중의 절충적 무의식이 발현한 사례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 해바라기 가족 >( 박성복 , 1961)은 다소 색다른 빛을 띤다. 우선 김승호가 연기한 정진구는 소시민이 아니라 잘 나가는 기업의 회장이다. 영화 말미에는 그가 경영하는 회사가 브라운 상사와 8천만 원 규모의 계약을 진행 중이라는 대사가 등장하는데, 이는 요즘 화폐 가치로 따지면 약 30억 원에 해당한다. 거기서 추측할 수 있는 부유함에 걸맞게 그의 가족은 “서울 한복판에 이런 곳이 있을까 의심할 정도로 울창한 숲에” 둘러싸였으며 도로에 면한 대문에서 집이 보이지 않고 정원에서는 공작새가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으리으리한 저택에서 살고 있다. 정진구의 사업에는 어떤 문제도 없으며, 부가 위협받는 일도 없다. 소시민이 아닌 상류층의 대부호인 그는 사회 및 노동 환경의 변화에 아무런 위기도 느끼지 않는다. 영화는 정진구의 집에 새 입주 가정교사로 여대생 미원이 찾아오며 시작된다. 미원은 집에 들어서자마자 “무언가 집안 전체에 감도는 비극적인 분위기”를 느낀다. 비극적인 분위기의 원천은 다름 아닌 정진구의 가족들이다. 첫째 아들 창식은 6.25에 참전했다가 다리를 다친 뒤 술과 염세 철학에 빠진 채 방에서 두문불출 중. 첫째 딸 영애는 전후의 자유주의적 향락에 몰두하는 아프레 걸. 둘째 아들 정식은 신경이 날카로운 권투선수. 셋째 아들 인식은 학업보다 트럼펫을 좋아하는 고등학교 졸업반. 그리고 둘째 딸인 윤애와 윤애의 어머니까지. 정진구가 좀처럼 집에 들어오지 않는 가운데 이 여섯 가족은 매일 같이 서로를 비방하거나 무시하며 살아간다. 이 가정불화의 원인은 무엇인가? 우선 가난이 야기한 조급함일 리는 없다. 그렇다고 전통적 가치관과 현대적 가치관을 둘러싼 세대 간의 불화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영애가 자신을 소개하면서 “금년에 졸업을 하면 도미 유학을 할 예정인데 봉건적인 가정의 인습 때문에 아까운 재능을 썩힐지도 모르는 숨은 천재”라는 농담을 던지기는 하지만, 사실 부모 세대가 자녀들의 삶을 좌우하면서 삶의 방식을 강요하거나 자식들의 남다른 가치관 앞에 쩔쩔매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가족 구성원들 간의 이해관계나 성격 차이가 가정불화를 낳는 것도 아니다. 그들이 서로에게 가하는 언어적, 물리적 폭력은 매번 특별한 명분이나 목적이 있어서라기보다는 몸에 익은 생활 습관처럼 보이며, 한두 장면 앞에 다투었던 이들이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대화를 나누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결국 남는 것은 정진구, 더 정확히는 그의 엽색 행각뿐이다. 그는 창식과 영애를 낳은 첫째 부인을 평양에 버려두고 왔다. 중식을 낳은 둘째 부인은 기생이었는데 정진구의 비서와 눈이 맞아 도망갔다. 인식을 낳은 셋째 부인은 가정부였고 살인죄로 복역 중이다. 넷째 부인은 윤애의 어머니는 창식, 영애와 같은 연배인 스물아홉에 불과하다. 더구나 이 넷째 부인이 집안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별장에 휴양하러 가겠다면서 하는 말을 들어보니 정진구는 요즘 또 낙원동에 새 애인을 두고 있는 모양이다. 이런 복잡다단한 가족 구성의 결과 창식은 6.25 당시 평양에서 아버지가 버린 어머니를 찾으려다 다리를 다친 뒤 방에 틀어박히고, 중식과 인식은 서로의 어머니를 들먹이며 서로 신경을 긁고, 영애는 고작 다섯 살 연상인 넷째 부인을 비웃는다. 결국 가족들의 다툼은 자신의 잘못을 책임지지 않은 채로 부재하는 정진구를 향한 분노가 변형된 결과인 셈이다. 김승호는 이런 인물을 평소의 김승호처럼 연기한다. 그는 가족들의 비난에 인상을 쓰거나 큰소리를 내는 법 없이 늘 조곤조곤하게 말한다. 그렇잖아도 이제 가정에 충실하려고 생각하고 있으니 앞으로는 함께 잘 해보자고. 그러나 그것은 말뿐이며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없다. 이토록 무책임하고 무기력할 뿐만 아니라 위선적으로까지 보이는 김승호를 본 적이 있던가? 영화는 그런 그를 꿈속에서나마 기어이 지옥으로 끌고 가서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전 부인들과 대면하도록 하는데, 거기에는 이자에게 말뿐인 속죄와 봉합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결기마저 느껴진다. 결국 정진구가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되는지는 새로운 관객들이 직접 확인할 수 있도록 언급을 삼가겠지만, 대중적인 홈드라마로 나아가기 위한 각종 타협적인 장치에도 불구하고 그 결기가 완전히 꺾이는 일은 없으며 오히려 안정적인 서사를 훼손해서라도 불편함을 남기고야 말겠다는 서슬이 남아 있다는 점만은 말해두기로 한다. 가부장의 지위는 만장일치로 복권되거나 승계되지 않으며, 가족에 불완전하나마 화합의 가능성을 가져오는 것은 전적으로 다음 세대의 의지 덕분이다. 때로는 끌어안고 함께 나아갈 수 없는 가족도 있는 법이다. 그것이 돈 많고 사람만 좋아 보일 뿐 다음 세대에게 원죄와도 같은 고통을 남긴 채로 자신의 죄과를 전혀 책임지지 않는 가부장이라면 특히 그렇다. >> 해바라기 가족 VOD 보러가기 <<
[한국영화걸작선]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
살부(殺父), 가장 급진적인 정치성 <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 >는 < 지구를 지켜라 >(2003)로 한국영화사에 신선한 충격을 던지며 등장한 장준환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다. <지구를 지켜라>는 평단의 압도적인 지지와 마니아 관객층의 형성에도 불구하고 흥행에 실패했다. 이는 크게 두 가지 결과를 낳았는데, 하나는 이 영화가 ‘저주받은 걸작’의 반열에 올랐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장준환 감독이 그 후 10년 동안 장편영화를 만들지 못했다는 것이다. 장준환 감독이 그야말로 “또라이 미친 영화” 1) 를 기획하다 10년 만에 내놓은 영화가 <화이>였다. 이 영화는 당해 비수기였던 10월 초에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으로 개봉하여 239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고 2) 평단에서도 나쁘지 않은 평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큰 주목을 받지는 못한 채 애매하게 남은 면이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한국영화사상 가장 급진적인 영화에 속한다. 그 이유는 주인공인 프로타고니스트가 아버지를 살해했기 때문이다. 한국영화사에서 적(賊)의 간악함을 폭로하기 위해 살부가 재현되는 일은 있었으나, 관객이 호감을 가지고 공감하는 주인공이 그것을 행한 것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이 영화에서 주인공 소년 화이(여진구)는 친부뿐 아니라 양부들, 그리고 개발독재의 수괴까지 모든 아비를 죽인다. 요컨대 <화이>는 아비를 정조준한 영화라 할 수 있다. <화이> 이전 한국영화사에서는 아버지에게 역사적 책임을 묻고 그들을 제대로 처벌한 적이 없다. 근대 식민지가 되며 전근대에 속한 아버지는 무능한 존재로 전락했다. 이후 근대 문명의 세례를 받은 아버지는 무책임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개인의 방탕으로 가산을 탕진하든, 독립운동에 투신하든 결과적으로 가족에게 무책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가부장제와 환유적 관계를 이루는 전근대 유교체계나 근대 민족의 주권이 붕괴되고 훼손된 상태에서 아버지가 자리할 곳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식민지 조선영화에서 아버지는 병자로 재현되곤 했다. 해방 이후에 잠시 민족의 정통성을 지키려는 투사로서의 아버지가 출현하기는 했으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그 현실적 의미는 다시 무색해졌다. 전후세대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아비를 부정하는 유럽의 젊은이들과 공감했다. 그러나 농경을 기반으로 하여 유교적 가부장의 전통이 수백 년 동안 지속된 사회에서 아비에게 반항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고 전후 영화에서 아버지는 부재한 것으로 처리되는 정도였다. 전후 재건이 본격화되고 민주적인 자유와 평등보다는 당장의 가난을 구원해 줄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해지면서 한국영화에 다시 아버지가 출현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대개 무능하고 무책임하지만 근대 엘리트가 된 자식의 ‘효심’에 의해 소환되었다. 자식 세대는 전근대적 가치[孝]로 아버지를 존중하며 근대적 합리성을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가부장을 꿈꾸었다. 이로써 아비 세대에 대해 식민지화와 전쟁의 역사적 책임을 묻는 일은 제대로 질문도 해보지 못한 채 봉합되었다. 이후 재건의 리더십이 다른 가부장을 허용하지 않는 폭력으로 전개되자 청년 세대는 폭력적 가부장에 의해 살해되거나, 순응하면서 살아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 속에서 ‘가학-피학’의 경험은 합리화되고 피학이 가학으로 전승되는 질긴 고리가 형성되었다. <군번 없는 용사> 한국영화에서 그 고리를 끊는 시도로서의 의미를 갖는 ‘살부(殺父)’가 재현된 것은 이만희의 < 군번 없는 용사 >(1966)에서였다. 이 영화에서 국방군 유격대 대장을 장남(신영균)으로, 인민군 장교를 차남(신성일)으로 둔 아버지(최인현)는 장남 편에 서다가 차남에 의해 처형되었다. 이때 차남은 반공주의가 권장하던 일반적 인민군의 표상, 즉 단순한 패륜과 악의 범주에서 벗어나며 깊은 고뇌를 보여주어 반공주의의 이분법 도식뿐 아니라 부자관계의 재현 면에서도 작지 않은 균열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 영화가 별 문제 없이 검열을 통과하고 개봉했다는 것은 공산주의의 만행을 고발하는 반공영화의 맥락에서 이해되었음을 말해준다. 역설적이게도 반공영화이기에 극단적인 재현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하다. 3) <군번 없는 용사>가 나온 지 47년 만에 나온 영화 <화이>는 질풍노도와 같은 사춘기 소년과 범죄자 양부들이라는 설정을 통해 살부를 구현한다. 주인공 화이는 어린 시절 자신을 유괴했던 ‘낮도깨비’라는 범죄 집단에 의해 길러진 아이다. 자신의 운명을 바꾸고 친부모에게는 치명적인 고통을 안긴 이들이 양육자이기도 하다는 아이러니는 이 영화의 기본 구조를 이룬다. 그것은 주인공의 이름에서부터 드러난다. 화이는 ‘화(火)’에서 쉽게 연상되는 불의 이미지 때문에 강렬한 이름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이 이름은 반전의 의미 또한 내포한다. 그의 이름은 소년이 어린 시절 유괴되어 숨겨진 장소가 화이목 아래였다는 데에서 유래했는데, 사전적 의미로 화이(和易)란 ‘온화하며 까다롭지 아니하다’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주인공 화이는 본성 면에서는 바로 그런 아이, 사철나무처럼 변함없이 푸를 것 같은 아이다. 그러나 그가 유괴되고 적의 손에 양육되었다는 것에서 이미 화이에게는 분노와 복수로 타오를 불씨가 잠재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 불씨는 어떻게 타오를 것인가? 이 영화는 이러한 질문을 관객과 공유하며 전개된다. 그리고 이 영화가 선택하는 방식은 파격적인 정면 돌파다. 화이에게는 6명의 아비가 있다. 생부(이경영)와 5명의 양부가 그들이다. 5명의 양부는 낮도깨비 조직의 5명의 범죄자들, 리더 석태(김윤석), 브레인 진성(장현성), 스나이퍼 범수(박해준), 사이코패스 기술자 동범(김성균), 말더듬이 드라이버 기태(조진웅)이다. 화이는 제도 교육에서 벗어나 그들에게 온갖 범죄 기술을 전수 받으며 성장한다. 그럼에도 화이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고 어둠을 두려워하는 여린 소년이다. 그는 어둠 속에서 괴물을 보곤 하며 미칠 듯한 두려움 속에서 괴로워하는데, 석태는 오히려 그런 화이를 지하실에 가두고 괴물을 대면하라며 학대한다. 이는 화이를 자신과 같이 만들고자 하는 석태의 집착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집착을 괴물이 되어 버리면 괴물이 두렵지 않다는 경험적 ‘교육’ 논리로 합리화한다. 이는 ‘하면 된다!’ 식의 개발독재기 극기 교육을 상기시킨다. 석태는 진성이 화이를 유학 보내려고 하자 화이로 하여금 생부를 살해하게 하여 원죄의 굴레에 밀어 넣는다. 매우 극단적인 전개이지만 한국영화사에서 부모가 자식을 어쩔 수 없는 지경에 몰아가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심청전>(1925/1937/1956/1985)의 심봉사, <무정>(1939/1962)의 박진사(영채의 부친)는 자신의 안위나 신념을 위해 딸을 팔거나, 파는 것을 묵인했다. 그러면 <사도세자>(1956), <사도>(2015)의 영조나, <연산군>(1961/1987))의 성종은 어떠한가? 또는 <황야의 독수리>(임권택, 1969)나 <서편제>(임권택, 1991)에 나오는 아비들은 어떠한가? 그들은 모두 자식을 죽음이나 광기로 떠밀었다. 그럼에도 아비의 폭력은 ‘자식이 아비 마음을 다 헤아릴 수 없다’는 식으로 모호하게 정당화되곤 했다. 이러한 정당화에는 아버지가 그르다 해도 자식이 아비를 거스르는 것은 패륜이라는 묵은 합의가 저류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아버지 대신 자식이 속죄양이 되었고, 이로써 텍스트는 아슬아슬하게 봉합되곤 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화이>는 다르게 대응한다. 바로 아버지들을 모두 죽이는 것이다. 그런데 아들이 아버지들을 죽이는 순서가 의미심장하다. 화이는 생부(生父)를 시작으로 진성, 범수, 동범, 기태, 석태의 순으로 죽인다. 그런데 화이가 생부를 죽이는 일이 석태의 음모에 빠져 아무것도 모르고 한 것이라고는 말하기 어렵다. 화이는 집에 들어가자마자 자신의 어린 시절 사진을 보게 되고 무언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벽장에 숨어있는 엄마(서영화)를 석태로부터 보호하기도 한다. 석태가 임형택(이경영)이 생부임을 말하지 않은 채 그를 쏘라고 명령했을 때 생부의 입에서 나온 마지막 말은 “너 혹시?”였다. 이 말을 듣자마자 화이는 정신없이 방아쇠를 당긴다. 나중에 경찰관들이 참혹한 현장을 보고 원한 관계에 의한 살인이라 추정하는 것은 화이의 위기 심리―눈앞에 선 이가 자신의 현(現)존재 기반을 뒤흔드는 인물임을 감지하고 그것을 강하게 부정하려 했음―를 말해준다. 그러기에 화이가 가장 친부에 가까웠던 아버지, 자신에게 음악과 교양을 가르치고 유학까지 보내려 했던 진성을 생부 다음으로 죽이는 것은 필연적인 전개이다. 모범적인 목사였고 유괴당한 화이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다렸던 생부를 살해하는 순간 화이가 디뎌야 할 기반과 지켜야 할 경계는 모두 무너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화이를 향한 다른 아비들의 위기감을 고조시켜 화이와 반목시키는 측면에서도 이는 효과적이었다. 사격과 각종 범죄기술을 가르친 기능적 아버지인 범수와 동범은 진성이 화이에 의해 죽었다는 것을 안 순간 화이가 자신들을 보다 쉽게 죽일 수 있음을 감지하고 화이를 잡는 데 매진할 수밖에 없다. ‘액션 스릴러’라는 장르 관습에 충실하게 두 아비는 화이가 불러들인 그들의 적에 의해 처치된다. 그리고 화이가 마주하는 아비는 기태다. 그는 가장 감정적이고 즉자적으로 화이를 사랑하는 아비이다. 유괴된 화이를 제일 먼저 안았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가 말을 더듬는다는 것은 그가 본능적 온정에 움직이는 인물임을 드러내는 표지다. 그런 면에서 그는 관습적인 모성성을 지닌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화이를 차마 해치지 못하고 화이도 그를 죽이지 못한다. 그는 화이가 올라간 고층 철조물에서 떨어져 죽는 것으로 처리된다. 그런데 기태의 죽음을 보여주는 것에서 이 영화의 태도가 드러난다. 화이의 손을 잡고 허공에 매달리게 된 기태는 “아빠가 미안해”라는 말을 남기고 화이를 살리고자 스스로 화이의 손을 놓는다. 이때 카메라는 기태의 시선으로 추락하는 그를 끝까지 추적하여 철근이 솟아난 콘크리트 바닥에 그가 떨어져 온몸이 뚫리는 것을 관객으로 하여금 감각케 한다. 그리고 석태의 시선으로 그의 참혹한 죽음을 확인 사살하듯 목도케 한다. 이는 감각적 충격에 대한 영화적 탐닉이기도 한데, 그것이 가장 온정적인 아비 죽음을 보여주는 데 발동되었다는 것은 찌른 칼의 끝을 보고야 말겠다는 이 영화의 의지를 드러낸다. 화이가 기태를 죽이는 것을 본 석태는 화이의 생모를 찾아가 죽인다. 그리고 자신은 화이만 있으면 된다며, 화이에게 이젠 다 끝났으니 힘들었던 일은 자신이 다 정리해 주겠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석태의 왜곡된 열망과 집착이 결국 아비로서의 정체성을 구성했음이 드러난다. 그는 총을 든 화이에게 묻는다. “자 누굴 쏠 거야? 아빠야? 괴물이야?” 그러자 화이는 ‘괴물 아버지’ 석태를 쏜다. 여기에서 영화가 끝났다면 화이가 ‘괴물을 쏜 아이’나 ‘괴물이 된 아이’는 될 수 있어도 ‘괴물을 삼킨 아이’는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삼킨다는 것은 어떤 대상을 입에 넣어서 목구멍으로 넘김으로써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괴물에 대한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도 괴물이 되는 것이 괴물에 대한 주체의 복속이라면, 괴물을 삼키는 것은 주체에 괴물을 복속시키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마지막에 화이는 신도시(명품 청화 골든시티)의 준공식에서 “싸악 밀고 도시를 새로 만든” 개발독재자 전회장(문성근)을 사살함으로써 ‘괴물을 삼킨 아이’임을 입증한다. 화이는 자신의 피학을 또 다른 약자에 대한 가학으로 전수하여 아버지와 같아지는 형태가 아니라 가학을 가해자에게 돌려줌으로써 ‘피학-가학’의 전승 고리를 끊어내는 것이다. 2006년 < 괴물 >에서 2009년 < 마더 >로 이어지는 봉준호 감독의 작업이 한국 사회에서 왜곡된 모성을 문제 삼고 있다면, 장준환 감독의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는 아버지의 신화를 깨고 있다는 점에서 시대적 짝패를 이룬다. 그런데 봉준호 영화가 제기하는 모성의 문제가 현재적이고 현상적인 차원의 것이었다면, 장준환이 내놓은 아비의 문제는 한국 사회의 지배구조를 형성하는 근본을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에서 보다 역사적이고 정치적이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영화적 재현은 급진적이었다. 살부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모호하게 허문 상태에서 간악한 적이나 광인에 의해 자행된 것이 아니라 눈 맑은 소년에 의해 리얼리티가 확보된 가운데 감행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나는 2000년대 한국의 주류영화시장에서 이보다 더 급진적인 영화를 본 적이 없다. 1) 《씨네21》 1136호, 2017년 12.26, 61면. 2) 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 통계정보 (http://www.kobis.or.kr/kobis/business/main/main.do) 참조. 3) <군번 없는 용사>에 대해서는 박유희, 「살부의 윤리와 핍진성의 기율: <군번 없는 용사를 통해 본 이만희의 영화세계」, 『영상문화』 19호, 부산영화평론가협회, 2015.12, 10-25면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