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 10.5 볼케이노
- 감독
- 존 라피아
- 제작년도
- 2005
- 출연
- 킴 델러니, 데이빗 큐빗, 보 브리지스, 레베카 젠킨스, 존 슈나이더
전지적 독자시점 포스터 클릭시 확대 클릭시 확대 클릭시 확대 '전지적 독자 시점' 영화에 대한 리뷰는 세 파트 1 로 나누어서 쓰였습니다. 1. 스포일러 2 없는 리뷰 (원작과 상관없는 평가) 2. 스포일러 있는 리뷰 (원작과 상관없는 평가) 3. 스포일러 있는 리뷰 (원작과 상관있는 평가) 영화관에서 영화를 볼지 참고하려고 이 글을 클릭했다면 아래 1. 부분만 읽으면 됩니다. 2.와 3.은 각자가 목적에 맞추어 필요한 경우에 참고하면 됩니다. 아래 3. 부분에는 작품 자체에 대한 평가에 더하여 웹소설과 영화 매체 자체에 대한 논의가 포함될 예정입니다. 글 시작합니다. 1. 스포일러 없는 리뷰 (원작과 상관없는 평가) 1) 나와 가족은 재미있게 봤나? 재밌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평작 이상이다. 영화 값이 아깝지 않은 영화였다. 제 돈 주러 보고 가도 괜찮냐고 물어보면 당연히 괜찮다고 대답할 것이고, 민생지원금이나 요즘 나라에서 지원해 주는 영화관 할인 쿠폰을 쓰면서 보러 갈만 하냐고 물어보면 완전히 추천하고 싶다. 나는 2번 봤다. 곡성 작은영화관에서 개봉 당일 오후 1시에 한 번, 이후 메가박스에서 한 번. 곡성에서 본 건 현금으로 현장결제해서 봐서 따로 모바일 기록이 없다. 곡성에서는 맨 앞자리에서 70대 아빠, 30대 누나와 같이 봤다. 나를 포함해서 셋 다 재미있게 봤다. 아빠는 영화관에서 자주 꾸벅꾸벅 조신다. 아빠가 안 졸았으면 아빠가 재미있게 봤구나 하고 이해하면 된다. 아빠는 최근 쥬라기공원을 보면서 안 졸고 재미있게 보셨다고 말했는데, 이 영화가 쥬라기공원같이 재미있다고 말했다. 누나는 전지적 독자 시점은 물론이고 살면서 읽은 웹소설이 하나도 없는 사람인데, 이 영화를 재미있게 봤다고 말했다. 2) 어떤 이야기인가요? [전지적 독자 시점]은 포스트 아포칼립스 배경의 현대 판타지 영화다. 예고편에 나와 있는 내용 수준에서 배경을 설명한다. 더럽게 재미없는 웹소설이 있었다. 얼마나 재미없었냐면, 그 웹소설이 3,000회가 넘게 연재됐는데 100회가 넘어가고부터는 그걸 읽은 사람이 1명밖에 없었다. 학창 시절에는 일진들에게 괴롭힘당하는 소위 "찐따"에, 성인이 되어서도 변변찮은 정규직 직장을 얻지 못하고 있는 주인공 김독자는 그 인기 없는 소설이 자신의 삶을 위로해 주는 것 같다고 느껴서 꾸준히 읽었다. 그는 그 소설을 끝까지 완독한 유일한 독자가 됐다. 어느 날, 갑자기 그 소설이 현실이 되어서 눈앞에 펼쳐졌다. 그렇다면 김독자는 그 소설의 주인공으로 빙의한 걸까? 아니다. 그 소설의 주인공과 등장인물들은 그대로 있다. 현실이 된 소설의 주인공은 아니지만, 그 소설을 끝까지 읽어서 주인공의 운명을 알고 있는 김독자와 김독자의 주변인물들이 현실에서 그 소설의 이야기를 다시 써가는 게 이 영화의 줄거리다. 김독자는 소설의 이야기를 그대로 반복하게 될까? 아니면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소설의 이야기를 다시 써갈까? 3) 액션, 그리고 성장을 담은 영화. PS. 나나 멋있어요! 영화의 주인공 김독자와 주변 인물들은 완벽한 사람들이 아니다. 저마다의 트라우마를 안고 있는, 모난 곳이 있는 사람들이다. 영화는 주요한 이야기로 김독자와 주변 인물들의 성장을 다룬다. 저마다 모난 곳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고 서로를 성장시킨다. 어떤 캐릭터가 어떤 과거를 가지고 있으며, 다른 캐릭터들과 어떤 영향을 주고받는지 살펴보는 게 좋은 관전 포인트가 될 것이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드라마적인 휴먼스토리에만 집중하고 있는 건 아니다. 이 영화의 중심은 액션이다. 전독시는 휴먼스토리를 보여주면서도 이를 액션으로 풀어낸다. 지금까지 한국 판타지 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블록버스터 액션이 펼쳐지는데, 잘 만들었다. 장소가 바뀌면서 이야기의 진행이 바뀌는 구성인데, 대부분의 장소에서 굵직한 액션 씬이 나온다. 액션의 구성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고 생각한다. 애프터스쿨/오렌지카라멜 출신인 가수이자 배우 '나나'의 액션씬이 특히 돋보였다. 김독자(안효섭)과 유중혁(이민호)의 액션은 당연히(?) 많이 나오고 또 괜찮게 구성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러려니 하고 봤는데, 나나의 액션이 생각 이상으로 좋았다. 아시아판 존윅 스핀오프를 찍는다면 그 주인공으로 나나를 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에서 나나는 롱테이크까지는 아니지만 꽤 길게 테이크를 가져가는 액션씬을 보여주는데, 좋은 연기를 보여줬다. 액션 이외의 대사 씬의 연기도 좋았어서 앞으로가 기대되는 배우다. 4) CG가 어색한가요? 그렇지 않다. 판타지 속 괴물 같은 게 나오는 장면이 있는데 어색하지 않았다. 물론, 제작비의 한계가 있으니 마블 수준의 CG를 보여주지는 못하지만, 영화를 즐기는 데 방해되지 않을 좋은 수준의 CG를 보여준다. 다만, 특정 인물이 공중을 넘어 이동하는 씬에서 어색한 장면이 3번 있는데, 그것 때문에 CG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게 아닐지 생각한다. 그 인물의 얼굴이 훌륭하다 보니 이동 중에 얼굴을 강조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카메라 구도를 그렇게 잡은 것 같은데, 배경과 조화되지 않는 면이 있어서 다소 아쉬웠다. 더 자연스러운 카메라 구도였으면 좋았을 것 같다. 5) 원작 웹소설이나 웹툰을 봐야 이해할 수 있는 영화인가요? 웹소설을 안 보면 영화의 진행을 이해하기 어렵냐는 질문에는 단호하게 '그렇지 않다'라고 대답하고 싶다. 이 영화는 원작에 나오는 다양한 설정들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불만 어린 항의가 있을 만큼 복잡한 설정들을 다 쳐내고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쉬운 구성으로 각색했다. 다만, '힘이나 민첩성, 근력이라는 능력치를 올린다'라는 개념과 시나리오(퀘스트)를 깬다는 것같이 주로 게임에 많이 사용되어온 개념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영화 초반에 저게 무슨 이야기인지 어색해할 수는 있다. 영화에서 다양한 장면들로 그런 게임적인 설정들이 어떤 뜻인지 유추할 수 있게 하기 때문에 이것도 문제는 안 된다 생각한다. 이 영화는 설정을 많이 쳐내고 바꾸면서까지 이 영화 한 편이 나름의 기승전결을 가지도록 만들었다. 나는 이 점을 높이 평가한다. 영화라면 모름지기 당연히 가져야 할 특징이기도 하지만, 긴 분량의 원작을 가지고 있는 영화들이 쉽게 하지 못하는 일이기도 하다. 원작 웹소설이나 웹툰을 읽었든 읽지 않았든 이 영화 하나만 보면 이해할 수 있도록 이야기가 짜여졌기 때문에, 원작이 있는 작품을 볼 때 흔히 하는 걱정(가령, 원작을 봐야 하는 건가?)은 하지 않아도 좋다. 6) 아쉬운 점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작 이상의 영화 아쉬운 점도 있다. 몇몇 장면들에서 아쉬운 연기가 있었다. 연기의 톤이 다른 인물들과 조화되지 않는 배역이 있었다. 분량이 많지 않어서 그렇게 신경 쓰이지는 않지만, 앞으로 더 발전된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CG가 어색했던 장면 3개(어떤 배우의 공중 이동 장면)도 분명 아쉬웠고, 중간중간 보이는 인물들의 성격 변화가 영화에서 충분히 개연성 있게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도 아쉬웠다. 분량 때문에 몇몇 컷이 삭제되면서 생긴 현상으로 추측한다. 크게 거슬리지는 않고,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내용도 아니긴 하지만 영화가 전체적으로 걸리는 부분 없이 자연스러운 흐름을 보여주지는 못했다는 점에서 아쉬웠다. 이러한 점들 때문에, 오래 기대했던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명작이라고 평가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평작이라는 평가도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를 평작이라고 평가한다면 판타지 영화를 도대체 얼마나 잘 만들어야 평균 이상의 평가를 받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나는 평작보다는 잘 만든,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도 추천하고 다닌다. 7) 이 영화를 통해 웹소설/웹툰 문화 엿보기 이 외에 '주인공 혼자만 알고 있는 소설이 현실이 되었고, 주인공이 자신이 아는 지식을 활용해서 성장해간다'라는 설정 자체에 거부감을 가지는 사람도 꽤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평소에 비슷한 장르의 웹소설이나 웹툰을 읽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유치한, 허무맹랑한 설정이 아니냐고 되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으로 그렇기에 이 영화가 그런 익숙하지 않은 설정들에 다가가 볼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 [전지적 독자 시점]은 웹소설을 기반으로 하는 한국 최초의 블록버스터 현대 판타지 영화다. 영화의 원작이 되는 [전지적 독자 시점] 웹소설은 캐릭터들의 성장을 가시화해서 보여주는 수단으로 상태창(주로 게임에서 활용되는)을 사용하고, 환생하거나 회귀하는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소설에 빙의하는 것 같은 설정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지금 웹소설/웹툰에서 한창 인기를 끄는 한국의 현대 판타지 장르의 특징들을 총망라하고 있다. 영화 또한 원작에서 보여주는 현대 판타지 장르의 특성을 상당히 많이 가져오고 있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면 웹소설과 웹툰에서 유행하는 설정이나 개념이 뭔지 엿볼 수 있다. 한국 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2024년 출판시장 통계 보고서]에 따르면 주요 22개 출판 기업의 2024년 단행본(웹소설, 만화, 교육 출판물을 제외한 일반적인 책) 매출액은 약 4,653억 원이고, 같은 기관이 조사한 [2024년 웹소설 산업 현황 실태조사]에 따르면 2024년 주요 플랫폼 사업체의 웹소설 분야 매출액은 1조 3,129억 원이다. 아주 직관적으로 말해서 이제는 책보다 웹소설에 돈을 쓰는 사람이 많다는 의미인데(웹툰까지 더하면 차이가 훨씬 벌어질 것이다), 그런데도 웹소설은 정말 보는 사람만 본다. 내 주위에도 보는 사람이 거의 없다. 글로 써진 소설이니까 단행본(일반적인 책)과 비슷한 거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다르다. 매체의 특성이 너무 다르다. 권 단위의 분량으로 출판되는 소설은 1회 5천 자 내외의 분량으로 매일 혹은 격일로 연재하는 소설은 호흡이 다를 수밖에 없다. 독자들이 주로 어떤 상황에서 읽는지, 작품의 호흡과 전개 방식 등이 많이 다르다. 웹툰과 출판 만화의 연출법이 상당히 다른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양 시장은 많이 분화되어 있다. 서로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종종 비난하기까지 한다. 내가 이상한 것일 수도 있는데, 나는 주위에 웹소설을 좋아한다는 말을 하는 게 책을 좋아한다는 말을 하는 것보다 힘들다. 나는 웹소설과 웹툰, 단행본을 모두 좋아하는데, 각자가 다른 매력을 가진 매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이제는 서로서로를 이해하고 즐길 거리를 늘릴(?) 때도 되지 않았냐고 되묻고 싶다. 평소 웹툰이나 웹소설이 뭔지 궁금했는데 기회가 없어서 혹은 오그라들어서 보기 힘들었다면, 거부감이 덜한 영화를 보면서 그쪽 세계를 엿보는 경험을 하는 것은 어떨까? 영화 [전지적 독자 시점]은 엿보기를 위한(말이 좀 이상하네요...) 좋은 작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2. 스포일러 있는 리뷰 (원작과 상관없는 평가) 1) 목차를 이렇게 나눠놓은 이유 이 부분을 읽는 사람들은 아래의 3. 부분도 읽을 확률이 클 것이기 때문에 왜 원작과 상관있는 평가와 없는 평가로 목차를 나누어 놓았는지 설명하고 넘어간다. 나는 영화 [전지적 독자 시점](이하 "전독시"라고 한다)의 원작을 읽었다. 그러므로 영화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원작과 비교하면서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작과의 관계에서 내리는 이 영화에 대한 평가와 이 영화 자체에 대한 평가는 구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원작은 원작이고 각색된 작품은 각색된 작품이다. 같은 작품이 아니다. 웹소설과 영화라는 다른 매체로 만들어진 별개의 작품이고, 각 작품은 고유한 의미에서 좋거나 나쁠 수 있다. 원작을 충실하게 반영한 영화라고 해서 좋은 영화가 되는 게 아니고, 원작을 충실하게 반영하지 않은 영화라고 해서 좋지 않은 영화가 되는 게 아니다. 원작을 충실하게 반영했지만 좋지 않은 영화가 있을 수 있고, 반대로 원작을 충실하게 반영하지 않았지만 좋은 영화가 될 수 있다. 따라서 나는 내가 영화를 평가할 때 일반적으로 활용하는 기준을 활용해서 영화 전지적 독자 시점에 대한 리뷰를 작성할 것이고, 그 기준에는 원작을 얼마나 충실하게 반영되었는지가 포함되지 않는다. 원작의 반영 여부와는 별개로 영화는 훌륭하거나 비루할 수 있으므로 나는 최대한 이 영화를 있는 그대로 평가할 것이고, 원작과의 관계에서 본 이 영화에 대한 평가는 아래 3. 목차를 통해 별도로 이야기한다. 내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원작을 본 사람이고 원작에 대한 애정이 큰 사람이기 때문에 무의식적인 차원에서 원작에 대한 나의 생각과 감정이 이 영화에 대한 평가에 반영될 수 있을 것이다. 그 반영을 최대한 피하려고 노력하겠지만, 나는 무의식적인 영역까지는 온전하게 통제할 수 없으므로 이는 내가 어쩔 수 없는 문제다. 영화에 대한 리뷰를 시작한다. 2) 미술 (1) 포스트 아포칼립스 이 영화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그러니까 멸망한 혹은 멸망하고 있는 세상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좀비영화나 SF영화의 배경으로 자주 사용된다. 멸망한 세상의 모습을 얼마나 개성 있고 독창적으로 그리는지에 따라 영화의 미술적 표현에 대해 가산점을 줄 수도, 감점을 줄 수도 있다. 영화 전독시는 멸망한 세상을 묘사하면서 개성 있는 표현을 보여주지 않는다. 아직 완전히 멸망한 게 아니라 현재 진행형으로 멸망하고 있는 중의 세상을 보여주고 있으므로 그 배경이 두드러지지 않는 것일 수도 있고, 영화 내에서의 배경(지하철, 동호대교, 금호역, 충무로역)이 멸망한 한국의 모습을 보여주기에는 상당히 제한적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전독시는 현실이 그 상태 그대로 멸망한 게 아니라 일종의 판타지적 세계관이 덧씌워져서 멸망한 세상을 그린다. 그 때문에 거의 유일한 야외 배경이었던 동호대교와 동호대교에서 괴수에게 먹히고 땅으로 올라왔을 때의 장소에서도 폐허나 멸망의 모습을 강조하기보다는 판타지적인 배경을 강조한다. 동호대교에서는 노을빛을 강조하고 대교를 잇는 마법적인 다리를 묘사했고, 땅으로 올라왔을 때 역시 폐허가 된 강변 아파트 등의 모습을 보여주기보다는 바다 쪽으로 카메라를 잡으면서 날아다니면서 빛나는 해파리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미술은 이 영화의 포스트 아포칼립스적인 배경보다는 판타지적인 배경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판타지적인 묘사는 어떠했는가? (2) 판타지 몇몇 인상적인 장면들이 있었다. 금호역에서 괴수를 죽이는 미션을 하던 중 이길영의 능력으로 반딧불이를 불러서 지하철을 밝히는 장면은 아름답고 신비롭게 묘사되었는데, 이 지옥 같은 세계관에서 보여지는 아름다움이라는 점에서 아이러니함을 불러일으킨다. 해당 장면 이후에 이어지는 어둠 파수꾼 장면과 화룡종을 레이드할 때 시나리오의 난이도가 올라가서 지하철 외부의 공간이 우주적인 공간으로 바뀌는 장면은 전독시의 세계관이 게임적인 설정을 가미한 판타지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땅강아쥐 제사장에 진입한 후 공간이 바뀌어 전후좌우상하가 구분되지 않는 360도의 공간이 펼쳐지는데, 게임에서 던전에 진입한 상황 같은 느낌을 잘 보여준다. 제사장에서의 CG에는 어색함이 전혀 없었고, 이전에 다른 영화들에서 본 미술적 장치도 아니었으며, 전독시의 게임적 세계관을 잘 드러내 주는 적절한 표현이었다고 생각한다. 이후 화룡종 레이드 장면에서 지하철 외부의 공간이 우주적인 공간으로 바뀌는 장면도 인상 깊었다. 지하철 플랫폼의 외벽이 해체되면서 공간이 우주로 확장된다. 형형색색의 우주를 배경으로 전투가 펼쳐지고, 이 부분의 CG도 어색함 없이 등장인물들과 잘 어우러진다. 전독시에서는 등장인물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는 성좌들이 등장하고, 이 내용은 영화 내에서 설명되지만 아래 화룡종 레이드 장면 이전까지는 직접적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주인공 일행이 화룡종을 공격하기 위해서 우주 공간으로 올라가는 부분에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거대한 눈알이 등장하는데, 이 세상을 관조하고 있는 외부적이며 신적인 존재(성좌)가 있다는 점을 미술적으로 표현하는 장치다. 웹소설/웹툰에 자주 활용되는 성좌물 설정을 처음으로 실사영화에서 표현한 것이었는데, 적절한 표현이었다고 생각한다. (3) 횡스크롤 액션 몇몇 액션들이 횡스크롤 형식으로 보여지는 것도 색달랐다. 고전영화까지는 잘 모르겠고, 내가 본 영화 중에서는 킬빌을 제외하고는 횡스크롤 형식의 액션을 제대로 보여주는 영화가 없었다. 횡스크롤 액션이란 공간의 3가지 방향을 다 활용해서 액션을 입체적으로 그리는 게 아니라 등장인물의 Y축과 Z축에서의 위치를 고정한 후 X축에서만 왔다 갔다 하는 식으로 액션을 보여주는 것을 뜻한다. 횡스크롤은 주로 게임에서 활용되는 디자인이다. 게임을 실행할 수 있는 장치의 성능에 제한이 많았던 시절에는 게임 내 공간의 3가지 방향을 다 활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2D 구조인 횡스크롤 방식으로 이동하면서 액션을 보여주거나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방식이 많았다. 장치의 성능이 많이 올라가서 3차원 공간을 모두 활용할 수 있게 된 이후에도 횡스크롤만의 고유한 느낌(이야기 혹은 공간이 진행된다는 감각, 속도감, 횡스크롤에서만 가능한 난이도 조절 등)이 있기 때문에 여전히 많은 게임들이 횡스크롤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전독시에서는 금호역 전투 장면 중 주로 정희원의 액션 장면에서 횡스크롤 방식이 활용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하철역의 공간적인 특성상 여러 방향으로 확장되는 게 아니라 한 쪽 방향으로 길게 늘어져 있기 때문에 횡스크롤이라는 표현방식이 어울리기도 했고, 전독시의 게임적 세계관을 보여주는 장치로서도 기능한다. 정희원의 액션 시퀀스는 횡스크롤 방식의 액션에서도 그렇고 횡스크롤이 아닌 3차원을 모두 활용하면서 테이크를 늘어뜨리는(롱테이크 까지는 아니지만 꽤 길었다) 장면 모두에서 훌륭했다. (4) 아쉬운 폐허 묘사 다만, 게임적인 세계관을 드러내야 한다는 목표에도 불구하고 회상이나 상상으로 나오는 폐허 장면들에 대한 표현은 아쉬웠다. 약 3번 정도 온통 배경이 빨간색인, 딱 보면 지옥같이 생긴 공간이 나온다. 유중혁이 혼자 살아남아서 이 이야기의 결말을 봤고, 그 혼자 살아남은 곳은 폐허였다는 점을 드러내 주는 배경이다. 폐허 + 지옥 느낌을 주려고 황폐한 모습을 표현하려고 한 의도까지는 이해할 수 있지만, 표현이 다소 촌스러웠다. 온통 세상이 빨간색이고 아래에 괴수가 쓰러져있고, 주위가 울퉁불퉁하게 묘사된 배경은 지옥을 표현할 때 아주 흔하게 활용되는 미술이다. 세련되지도, 독창적이지도 않았다. 거기에 유중혁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인데(검은 머리에 검은 착장) 배경은 채도가 높은 빨간색이다 보니 유중혁이 배경에 잘 어우러지기보다는 배경에 얹혀진, CG 같다는 느낌을 많이 준다. 해당 장면은 전독시만의 포스트 아포칼립스적인 미술을 드러낼 좋은 기회였는데 다소 아쉽게 활용되었다고 생각한다. 배경에 활용된 빨간색의 채도만 많이 낮췄어도 배경과 사람이 따로 노는 듯한 느낌을 덜 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5) 화룡종 묘사 더해서, 미술의 문제이기도 하고 연출의 문제이기도 한 부분인데, 영화의 마지막 보스인 화룡종에 대한 묘사도 아쉬웠다. 화룡종이 진화(?)한 모습을 구상하면서 잭 스나이더의 저스티스 리스에 나오는 스테판 울프를 많이 참조한 것 같았다. 처음에 등장하는 화룡종은 용이나 고질라와 비슷한 모습을 띄고, 이후에 진화된 모습이 그 스테판 울프가 조금 더 우락부락해지고 지옥물에 몇 번 담가진 것 같은 모습으로 등장한다. 진화된 모습이 기존의 용/고질라와 같은 묘사에서 인간형에 가까운 묘사로 바뀌어야 하는 명확한 이유를 잘 모르겠다. 그렇게 묘사해서 얻어지는 효과가 있다면 모르겠는데, 딱히 더 위압적으로 바뀐 것 같지도 않았다. 더해서, 그 화룡종이 최종 빌런이니까 위압적인 모습, 막막한 모습이 더 잘 느껴지게 그려졌으면 좋았을 것 같은데 그 부분에 대한 연출이 아쉬웠다. 위압적인 모습이 덜 드러나기 때문에 극적으로 화룡종을 물리쳤을 때 얻어지는 희열도 그렇게 크지 않았다. 화룡종에 대한 묘사가 상대적으로 아쉬워지면서 초반부에 등장하는 약한(?) 괴수인 땅강아쥐의 묘사가 오히려 인상 깊게 됐다. 땅강아쥐는 초반부터 등장하고 그렇게 강하지 않은 괴수로 설정됨에도 불구하고 되게 무섭고 강하게 생겨서 저거 한 100마리만 있어도 화룡종보다 훨씬 무섭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땅강아쥐 뿐만 아니라 땅강아쥐 제사장에 등장하는 어둠 파수꾼에 대한 표현도 좋았다. 사방으로 돌기가 쫘악~ 펼쳐지면서 더럽게 무서운 악마처럼 등장하는데, 나라면 진짜 바로 도망갔을 것 같이 생겼다. 뭔가 비슷한 게 생각이 날 것 같으면서도 생각이 안 나는 괴수 디자인이었다. 다음 영화가 제작된다면 새로운 괴수들이 다양하게 등장할 텐데 어둠 파수꾼의 디자인같이 개성있으면서도 위압적인 디자인이 나와주면 좋겠다. 3) 서사와 연출 (1) 전독시의 특색 전독시는 주인공인 김독자만 읽은 소설이 현실에 펼쳐지면서 김독자가 소설 속 여러 난관들을 겪어가는 이야기다. 여타의 빙의 소재의 작품들과 다른 점은 주인공이 소설 속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소설이 현실에 펼쳐지며, 주인공이 소설 속 주인공으로 빙의하는 게 아니라 주인공은 그대로 따로 있으며 소설에 등장하지 않는 인물로 등장해서 소설의 이야기에 끼어든다는 것에 있다. 소설 속 주인공인 유중혁이 회귀 능력을 가진 회귀자라는 설정이 등장하는데, 1편에서는 해당 설정이 본격적으로 활용되지 않아서 회귀의 소재를 다룬 영화라고 보기는 힘들다. 전독시는 주인공이 동료들과 함께 난관을 겪고 이를 극복한다는 평범한 이야기다. 이 영화의 특색을 만들어주는 건 영화의 주인공인 김독자가 미리 난관의 내용을 알고 있다는 점과, 김독자가 소설을 통해 자신과 함께 할 동료들에 대해 알고 있다는 점이다. 이 두 가지 설정을 활용해서 난관을 극복한다는 점에서 이 영화만의 특색이 생긴다. 영화는 이 두 가지 설정을 최대한 활용하려고 한다. 김독자가 미리 이 이야기의 주연이 될 등장인물들에게 접촉해서 동료가 될 계기를 만들고, 김독자가 혼자 혹은 같이 겪는 난관들마다 본인이 미리 알고 있는 정보를 활용한다. 특히 후자의 설정 때문에 주인공과 동료들이 겪는 고난이 다소 심심해 보일 수도 있는데, 영화는 등장인물이 미래의 정보를 알고 있어서 이를 활용해 과거를 바꾸면 그 순간 미래가 바뀌기 때문에 주인공이 모르는 방식으로 난관을 전개시켜서 주인공과 동료들이 겪는 고난이 쉽지 않은 고난처럼 보이게 만든다. 영화 내에서는 '모든 회귀자는 언젠가 반드시 자신이 모르는 미래를 살아가야 한다'는 대사로 이런 내용들이 표현된다. (2) 시나리오가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는 연출의 부족 아쉬운 점이 있다면, 연출이 충분히 극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영화는 이야기를 진행해 나가면서 이 난관이 쉽지 않은 난관이라는 것을 전달하려고 노력하지만 그 노력이 충분히 성공하는지는 모르겠다. 보면서 '그래, 힘들다는 건 알겠는데 그래도 어찌어찌 하면 될 것 같은데' 같은 느낌을 받는다. 어차피 주인공이 극복해 낼 걸 알아도 스릴있게 연출할 수 있다. 최근 영화 미션임파서블 파이널 레코닝에서의 미션들이 그랬다. 전독시에서는 마지막에 유중혁이 사망해서 세상이 사라지는(마블 엔드게임에서 타노스의 핑거스냅 장면 혹은 드라마 로키 시즌2에서 시간 선이 붕괴하는 장면의 미술을 참조한 것 같다) 장면은 망한 건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괜찮은 연출이었다고 생각하는데, 그 장면 이후에 김독자가 이를 극복하는 과정이 짧게 그려지면서 좋은 장면을 충분히 잘 활용하지는 못했다고 생각한다. (3) 사람이 사람과 영향을 주고받는 이야기 포스트 아포칼립스 배경의 작품들은 '인간'의 속성을 탐구하고자 하는 경우가 많다. 보통은 인간의 이기심이나 탐욕을 많이 다룬다. 좀비나 SF 배경의 생존 영화에서 그런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이 많이 그려진다. 우리에게 익숙한 배경이 아닌 익숙하지 않으며 극단적인 환경에 인간을 던져놓고 이를 관찰할 때 우리는 비로소 인간인 우리들로부터 약간의 거리를 두고 인간을 관찰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 영화는 여타의 포스트 아포칼립스 배경의 영화들과는 다르게 인간의 속성 탐구에 몰두하지 않는다. 금호역에 있는 민간인들과 천인호를 비추면서 인간의 탐욕이나 이기심, 잔인함에 대해 다루긴 하지만 전독시는 이를 주인공과 동료들이 겪게 되는 난관의 배경과 맥락으로 제시할 뿐 이에 대해 집중적으로 조명하거나 탐구하려 들지 않는다. 전독시는 인간 군상 일반을 다루기보다는 주인공과 주인공 동료들 개개인에 집중한다. 주인공과 동료들이 성장하는 이야기인 것이다. 주인공인 김독자와 그 동료들은 상처와 트라우마를 가진 보통의 사람들이다. 영화에서는 그 보통의 사람들이 각종 난관을 겪고 상호작용하면서 서로에게 영향을 끼쳐서 상처와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성장하는 모습이 보여진다. 김독자와 일행인 이현성, 정희원, 이지혜, 이길영, 유상아 중 이길영과 유상아의 상처/트라우마는 영화 내에서 주어지지 않고, 그래서인지 영화에서 유상아와 이길영의 각성 혹은 성장의 모습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유상아와 이길영은 전독시에서 성장하기보다는 적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반면, 김독자와 이현성, 정희원과 이지혜의 경우 직접적으로 상처를 극복하고 성장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정희원의 경우 눈앞에서 친구를 잃은 트라우마를 극복해서 악인을 물리치면서 각성한다. 이때 보여주는 액션들이 진국이다. 이현성은 본인이 군 간부이던 시절 수류탄 투척 훈련을 하던 훈련병이 수류탄을 놓치는 실수를 했을 때 그 훈련병을 구하지 않고 본인만 살아남은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 본인은 그 수류탄 소리의 트라우마와 이전 전투에서의 부상 때문에 귀 막으면서 피하고 있는데, 열 살도 안 된 것으로 보이는 어린 이길영이 손으로 자신을 꼭 안아주고, 그 이길영이 코피를 흘려가며 동료들을 구하는 싸움에 참전한다. 이현성은 이길영을 보면서 자신이 구하지 못했던 어린 훈련병을 떠올리고, 이에 이길영을 구하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서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참전해 화룡종을 막으면서 특성 진화(강화)를 하게 된다. 이지혜는 친구를 죽이고 살아남은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 작중에서 이지혜는 계속해서 "어쩔 수 없었잖아. 어쩔 수 없었다고"라는 말을 한다. 같은 말을 두 번 연속으로 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이지혜는 스스로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을 계속해서 되놰야 하는 마음 상태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때 자신의 모습이 악한 모습이여서는 안되었기에 이지혜는 영화 초중반에 다소 이기적이고 소시오패스적인 모습으로 행동한다. 계속 그렇게 살아가야 이전의 행동이 잘못된 행동이 되지 않으므로 하는 발악으로 보인다. 이후 이지혜는 김독자로부터 "어쩔 수 없었다는 거 알아. 하지만 혼자 살아남으려다 어떻게 됐는지 알고 있잖아"라는 말을 듣고, 김독자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의 발 아래에 설치된 그린 존(안전한 공간)을 파괴하는 모습을 보면서 과거에 혼자 살아남으려고 친구를 죽였던 것과는 다른 미래를 꿈꾸게 된다. 이지혜의 각성은 이지혜가 김독자의 그린존에 총알을 발사하면서 이를 터뜨리는 것으로 그려진다. 김독자의 각성은 이지혜의 각성 직전에 이루어진다. 김독자는 직전까지 계속 갈팡질팡한다. 일단 나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이기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김독자가 읽었던 멸살법에서 유중혁 빼고 다 죽은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다른 결말을 쓰고 싶어 한다. 동료들을 돕는 모습을 보이다가도, 김독자만 알고 있는 그린존 위에 서서 나가고 싶지 않아 하면서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인다. 동료들이 그린존 밖에서 괴수들과 싸 우는 모습을 보면서 죄책감 반 이타심 반에 그 싸움에 참여하게 된다. 김독자는 동료들을 살리고 환영 감옥에 빠져서 본인도 살아남으려는 방법을 선택하는데 와중에 동료들이 밤새 괴수들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그 와중에 이현성은 심각한 부상을 입고 어린아이인 이길영도 탈진한 모습을 보게 된다. 김독자는 자신의 동료들이 목숨을 바쳐서 자신을 위하는 모습을 보고, 그렇게 해서 바보같이 죽은 게 아니라 살아남은 모습을 보면서 동료들에게 말한다. "어젯밤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제가 뭘 해야 할지 알게 됐어요." 이전에도 김독자는 자신이 읽은 소설의 결말을 마음에 들지 않아 했지만, 그 마음이 정확히 뭔지, 소설이 현실로 펼쳐진 세계에서 자신이 원하는 게 뭔지, 자신이 해야 하는 게 뭔지 결정을 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동료들이 사진을 위해서 희생하고, 힘을 합쳐서 살아남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모습을 보면서 비로소 자신이 이 세계에서 원하는 게 뭔지, 해야 하는 게 뭔지 알게 되어서 각성한다. 이후 김독자는 자신이 희생하면서 죽는 전략까지 짜게 되는데, 이는 그린 존 시나리오에서 자신만 아는 그린 존으로 가서 밖으로 나오기 주저하면서 괴로워하던 김독자의 모습과 대비되면서 김독자가 확실하게 성장하고 각성했음을 보여준다. 영화에서 김독자와 주변인물들이 성장하거나 각성하고, 그 과정에 주변 동료들의 행동이나 마음가짐이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게 좋았다. 완전 따뜻한 이야기다. 물론 아주 개성 있거나 독창적인 성장 서사라고 보기는 힘들지만, 다른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의 영화와는 다른 전독시만의 방향을 명확하게 제시하는 이야기였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인간 일반에 대한 일반론을 다루는 게 아니라, 김독자와 동료들이 겪는 모험 이야기인 것이다. 결국 사람을 구원하는 건 사람이고, 사람을 반성하게 하는 것도 사람이며, 사람을 성장하고 극복하게 만드는 것도 사람 아니겠나. (4) 액션에서 소외되지 않는 캐릭터들 액션에서 소외되는 캐릭터가 없었다는 것도 장점이다. 주연 캐릭터라면 소비되거나 소외되지 않고 합당한 역할을 부여받아야 하는데, 전독시는 이야기 진행에서뿐만 아니라 액션에서도 이 원칙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금호역의 화룡종 레이드 장면에서는 유중혁, 김독자, 이지혜, 이현성, 유상아, 이길영 모두가 적극적으로 자신의 역할을 하면서 전투에 참여한다. 인물들이 많아서 명확한 역할을 끼워 넣어 주는 것도 쉽지 않았을 텐데, 액션의 구성에 많은 고민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진화한 화룡종을 잡는 계획에서 '모두가 참여하는 액션'이 잘 드러났는데,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계획에 따르면 유상아가 실로 화룡종을 묶어두고, 김독자가 화룡종의 가슴을 찔러서 껍질을 깨도록 시도하고, 이지혜도 총으로 이걸 돕고, 껍질을 깨면 김독자가 죽을 텐데 그걸 뒤이어서 정희원이 화룡종의 코어를 깨는 게 계획이었다. 아, 계획을 짤 때는 이현성과 이길영이 전투 불능 상태였던 것으로 간주돼서 참여하지 않지만, 실전에서는 둘 다 열심히 참여해서 동료들을 구해낸다. 하여튼, 이런 식으로 모두가 각자의 개성 있는 능력을 활용해서 전투에 참여하는 액션을 구상하려는 시도도 좋았다고 생각한다. (5) 캐릭터들이 성장하는 연출에 대한 아쉬움 위에서 길게 이야기했듯이 영화 전독시의 메인 테마는 주인공과 동료들의 상호 성장 서사다. 이 점이 영화에서 분명하게 보이기 때문에 이길영과 유성아의 성장 서사가 1편에서 잘 드러나지 않았다고 해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후에 다룰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후의 작품들까지 이길영과 유상아의 이야기가 1편의 다른 주연들 이야기처럼 깊게 다뤄지지 않는다면, 그건 문제라고 생각한다. 지금 평가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니다. 아쉬웠던 건 이현성과 이지혜의 성장 부분에서의 연출이었다. 먼저 이현성. 이현성 역을 맡은 배우의 작품을 여럿 봤는데, 표정 연기를 못하는 배우가 아니다. 그럼에도 이현성이 특성 진화를 하는 과정에서의 연기 혹은 연출이 조금 아쉬웠다. 이지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생각을 했다. 이지혜의 성장 서사는 매력적이었지만 너무 짧게 등장해서 서둘러 성장의 결론만 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 두 배우의 연기 문제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아마 분량 문제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영화 한 편에서 줄거리는 줄거리대로 다 진행하고 설정도 여러 개를 풀면서 동시에 김독자/이지혜/이현성/정희원 네 명이 성장하는 이야기를 보여줘야 했기 때문에 이현성과 이지혜의 이야기가 다소 적은 분량으로, 압축적으로 묘사된 것 같다. 보다 많은 분량이 주어졌으면 충분한 연출이 가능했을 것 같은데, 이 점이 아쉽다. 이 두 배우의 연기 문제였든 아니면 분량의 제약으로 인한 연출의 문제였든 아쉬운 부분은 아쉬운 부분이니 지적해 둔다. (6) 그 외 아쉬운 연출 이 외에도 두 부분이 아쉬웠다. 동호대교에서 떨어진 김독자가 해수종에게 먹혀서 위장 안으로 들어가 처음 비형과 대화하는 장면이 있는데, 김독자가 갑자기 능숙해진다. 이 전까지는, 그리고 이후 장면에서도 자주 갈팡질팡하고 확신이 없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 위장 안에서는 갑자기 비형을 능숙하게 다루면서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원작을 알고 있으니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 자체가 어색한 건 아니지만, 직전의 모습과 잘 연결되지 않는 이질적인 모습이라서 더 많은 설명이 필요한 장면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다짐하는 혼잣말이라도 넣어줬으면 더 자연스럽게 느껴졌을 것 같다. 그 해수종을 죽이고 탈출하고 곧바로 정희원을 만나서 함께 금호역으로 가게 되는데(정확히 말하면 정희원을 구하면서 간다), 금호역에서 이기적인 사람들을 대면하게 된다. 이 소설 속 세상에 잘 적응한 평범한 사람들인 건데, 문제는 언제 이렇게 적응했냐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김독자가 괴수의 위장 안에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있었는지가 제시되지 않는다. 저녁놀이 생길 즈음에 위장으로 들어가서 밖으로 나오니까 밤이 되는데, 그러면 자연스럽게 아, 몇 시간 안 지났나? 반나절 정도 지난 건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반나절 정도 지난 것 같은데 금호역에서 만난 민간인들은 이 세상에 너무 잘 적응해서 이기적으로 굴고 있다. 뭔가 어색한 거다. 영화를 같이 본 누나도 같은 점을 지적했다. 이런 이상한 판타지 세상이 펼쳐진다면 적어도 며칠은 지난 후에 사람들이 서서히 적응해야 할 것 같은데, 반나절 만에 너무 잘 적응한 것처럼 보이니 어색하고 이질적이다. 그런데 영화를 잘 보면 사실 반나절이 지난 게 아니라 며칠이 지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금호역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생존비를 납부하지 못한 사람은 죽게 된다'라는 설명이 나온 후 철로의 한쪽에서 많은 시체들이 수북하게 쌓여있고 이를 태우면서 가족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타는 시체들 앞에서 우는 장면이 나온다. 생존비를 납부하지 못한 사람이 죽게 되는데 저렇게 시체가 많이 쌓여있는 것을 보면 최소한 며칠은 지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되면 금호역에 있는 사람들이 이 상황에 잘 적응한 맥락, 그러니까 시간이 충분히 지났다는 맥락을 주면서 사람들의 이기적인 모습이 자연스럽게 설명된다. 문제는, '시간이 충분히 지났다는 맥락'을 알아채는 유일한 수단이 쌓여있는 시체들을 보고 추론하는 것이라는 데에 있다. 단번에 그 장면을 포착해서 이를 추론해 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나도 영화를 두 번째 보면서 그 장면을 포착했다. 김독자가 괴수의 위장에서 탈출하면서 혼잣말하든 아니면 다른 장치를 보여줘서 며칠이 지났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한 후에 금호역의 사람들을 마주하게 했다면, 금호역 사람들이 이 세상에 충실하게(?) 적응한 모습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이 줄어들었을 텐데, 이 시간의 흐름에 대한 표현이 충분하지 않았다. 이 역시 아쉬운 부분이었다. 4) 총평 몇몇 연출에서 아쉬운 부분도 있었지만 좋았던 점이 훨씬 많았던 영화였다. 웹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한국형 현대 판타지에 대한 첫 영화화 시도인데, 미술적으로 보나 서사적으로 보나 좋았고, 잘했다. 후속작이 만들어진다면 난관은 각색에 있을 것이다. 위에서 지적했던 연출적으로 아쉬웠던 부분을 다듬는 건 오히려 큰 문제가 아니다. 전독시의 원작이 워낙 방대하므로 이를 5편으로(5편에 대하여 판권 계약이 이루어진 것으로 안다) 줄이려면 엄청나게 과감한 각색이 필요할 것이다. 영화는 장기적으로 이야기를 진행시킬수 있는 웹소설과는 다르게 2시간짜리 한 편에 기승전결이 모두 담겨야 한다. 1편은 일단 그것에는 성공했다. 2편도 그렇게 기승전결을 담아서 각색한 후에, 위에서 말했던 미술적으로/연출적으로 아쉬웠던 부분들을 보완해서 장면 진행이 자연스럽게 구성된다면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3. 스포일러 있는 리뷰 (원작과 상관있는 평가) 1) 결론부터 이해가 되는 각색이었다. 많이 고민한 흔적이 보이고, 좋은 작품을 만들어냈다. 일부 팬들의 아쉬움이 있는데, 이해한다. 이 주변의 많은 것들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를 시작한다. 2) 저 전지적 독자 시점 원작 웹소설의 팬 맞습니다. 전지적 독자 시점 원작도 안 읽은 놈이 혹은 팬도 아닌 사람이 이렇게 영화를 호평하는 리뷰를 썼다고 오해할까 봐 미리 밝혀둔다. 나는 웹소설 전독시를 3.n회독 했다. 네이버 시리즈로 2회독 했고, 단행본으로 1회독 했으며, 이 외에는 정주행한 게 아니라 중간중간 읽었기 때문에 3.n회독이라고 표현했다. 웹툰도 읽고 있다. 웹소설 외전은 325화까지 읽었다. 구매는 357화까지 해놨는데 조금 더 나오면 몰아볼 예정이다. 물그릇 올려놓고 제발 해피엔딩이기를 기도하면서 이학현 혹은 김독자의 이야기를 읽어가고 있다. 전독시를 1회독 하고 리뷰를 썼고1), 2회독 하고 리뷰를 또 썼다2). 2회독 하고 쓴 리뷰는 22,478자 분량이고, 나름대로 전독시에 대한 독자적인 해석까지 내놓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 다시 읽어보면 많이 부족해서 외전이 끝난 후에 혹은 그전에라도 다시 리뷰를 쓸 예정이다. 내가 처음으로 읽은 웹소설이 전독시다. 전독시 이후에도 수많은 웹소설을 읽었는데, 내가 가장 사랑하고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소설은 전독시다. 영업에 성공한 적은 없지만 주위 사람들에게도 여러 차례 전독시를 추천해 왔다. 세부적으로 몇몇 순서가 틀릴 수는 있지만, 굵직굵직한 에피소드별로 구분한다면 눈 감고도 진행 순서를 외운다. 나보다 전독시를 더 여러 번, 더 자세하게 읽은 사람도 많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정도의 사람을 전독시 찐팬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 전독시 찐팬 맞다. 그러니까 전독시 원작도 안 읽은 사람이, 찐팬도 아닌 사람이 쓰는 글이라고 오해하지 않았으면 한다. 3) 웹소설과 영화 매체의 차이 (1) 호흡, 전개 속도, 한 편의 완결성 웹소설과 영화는 다르다. 웹소설은 1회에 5,000자 내외의 분량으로 연재되는 연작소설이다. 1주일에 많으면 7회, 적으면 3회 정도 연재된다. 당장 이번 편이 재미없으면 다음 편을 보지 않게 되기 때문에 매 회마다 다음 회가 궁금해지는 내용이 들어가야 하고, 그러니 작품의 호흡이 굉장히 빠르다. 웹툰과도 다르다. 정기적으로 연재되는 작품이고 호흡이 빠르다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1주일에 3~7편 정도 볼 수 있는 작품과 1주일에 1편 정도 볼 수 있는 작품의 호흡은 같을 수 없다. 웹소설 1회 분량을 웹툰 1회로 만들면 웹툰은 반드시 어느 시점에는 지루해질 수밖에 없다. 최근의 화산귀환 웹툰이 그렇다. 화산귀환 원작 웹소설은 분량 늘리기(?)가 심한 웹소설이다. 지금 1,800화 이상 연재되었는데, 1,800화 기준 일반적인 소설책 약 65권 분량이다. 웹소설 초반부는 전개가 빠른 편이라 각색을 최소화한 채 웹툰에 이식되었어도 괜찮은 평가를 받았지만, 초반부가 지나자, 웹툰의 전개 속도가 너무 느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웹소설이 웹툰으로 이식될 때는 원작보다 전개가 더 빨라져야 하고, 압축적으로 전개가 일어나야 한다. 각색을 잘했다고 평가받는 웹툰 역대급 영지 설계사나 웹툰 아포칼립스에 집을 숨김을 보면 원작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압축적으로 이야기가 진행되고, 생략도 많다는 공통점이 있다. 영화는 또 다르다. 웹소설이나 웹툰과는 다르게 빠른 기간 안에 연재되는 작품이 아니기 때문에 한 편 한 편이 온전한 완성도가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원작이 되는 웹소설이나 웹툰의 전체 내용을 다루기보다는 기승전결이 있는 특정한 에피소드만 다루는 방식을 취하거나, 전체 내용을 다루려면 엄청나게 많은 압축/생략이 담긴 각색이 있어야 한다. 특정한 에피소드만 다루더라도 상당한 생략과 압축, 각색이 있을 수밖에 없다. (2) 개연성의 요구 정도 작품이 대중에 공개되는 방식(연재, 개봉 등)뿐만 아니라 글, 이미지, 영상이라는 매체 자체의 차이도 있다. 실사에 가까운 형태의 매체를 접할수록 사람은 전개의 자연스러움 혹은 개연성을 더 크게 요구하게 된다. 실사에 가까울수록 상상의 여지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조금 더 엄밀하게 표현하자면, 매체가 우리에게 전달하는 감각의 종류(시각, 청각, 촉각, 후각 등)가 적을수록 우리는 스스로 나머지 감각을 채워가면서 매체를 감상하고, 감각의 종류가 많을수록 우리는 이미 주어진(전달된) 감각들이 짜임새 있기를 요구한다. 우리가 스스로 채워서 완성도 있게 감상할 여지가 없으니까 주어진 것 자체가 완성도가 좋아야 한다는 것이다. 글을 읽을 때면 자연스럽게 묘사된 부분과 생략된 부분을 스스로 상상하면서 감상한다. 만화 같은 이미지 기반 매체를 즐길 때도 같은 상상이 이루어지지만, 이미 이미지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상상의 여지가 줄어든다. 우리가 스스로 상상을 통해 완성도를 채울 여지가 줄어든 만큼, 주어진 이미지에서 완성도가 있어야 한다. 실사 기반의 영상 매체로 가면 더더욱 그렇다. 같은 내용이더라도 글로 읽을 때보다는 이미지로 볼 때, 이미지로 볼 때보다는 실사 영상으로 볼 때 생략된 부분이 더 적고 개연성 있게 구성되어 있기를 요구하게 되고, 그렇게 되어야 감상하면서 자연스러움을 느낀다. (3) 분량 분량의 차이도 있다. 작품의 공개 방식(연재, 개봉 등)의 차이와 맞물려있는 이야기인데, 글이 분량의 문제에 있어서 가장 자유롭다. 적은 분량으로 완성도 있는 글을 쓰는 게 일반적으로는 더 훌륭하다고 평가받지만, 많은 분량으로 글을 쓰더라도 완성도가 있으면 나름의 매력이 있다고 하면서 좋은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 화산귀환 웹소설 1,000화 이전까지가 그랬다. 다른 일반적인 웹소설에 비해서 분량 늘이기가 심한 웹소설이었지만, 그만큼 세밀한 감정묘사가 이루어졌기에 이를 장점으로 꼽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니까 글은 분량이 적어도 괜찮고 많아도 괜찮다는 것이다. 영화는 분량이 많아도 괜찮다는 선택지 자체가 없다. 정말 길어야 3시간이다. 크레딧과 광고 시간을 제외하고 2시간 반 이상의 러닝타임을 확보하는 건 제작비와 상영 비용 차원에서 현실적인 문제를 발생시킨다. cg와 편집, 촬영 비용이 늘어나고 영화 개봉을 위해서 상영관에 지불해야 하는 로열티가 늘어날 수 있다. 상영관 입장에서는 러닝타임이 길수록 하루에 상영할 수 있는 영화의 수가 줄어들기 때문에 손해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같은 문제가 웹소설에서는 발생하지 않는다. 그리고 2시간 반 이상의 영화는, 잘 안 본다. 날이 갈수록 사람들이 짧은 영상에 익숙해지고 긴 영상을 부담스러워한다는 건 널리 알려진 일이다. 나도 개인적으로 가족들과 영화를 보려고 할 때 2시간 반 이상의 영화는 상당히 부담스러워한다는 것을 몇 번이나 느꼈다. 그러니 영화는 2시간 내외의 분량으로 만들어야 하고, 그 분량 안에 상당히 많은 이야기를 집어넣어야 하는데, 역설적으로 글로 전달할 때보다 더 짜임새 있고 개연성 있게 보여야 한다는 제약이 생긴다. (4) 소비자층 소비자층도 다르다. 상업영화는 불특정 다수의 대중을 겨냥하고 만들어지지만, 웹소설은 취향 분야가 다양하게 이루어져 있다. 회/빙/환과 무협, BL과 로맨스, SF 등 장르와 소재가 다변화되어 있고 각 장르/소재마다 인기를 끈 작품들이 있지만 장르와 소재를 넘나들면서 읽는 경우는 많이 없다. 일반적으로 남성 소비자들에게 잘 어필하는 무협 장르는 여성 소비자들이 거의 소비하지 않고, 여성 소비자들에게 잘 어필하는 BL이나 로맨스 장르는 남성 소비자들이 거의 소비하지 않는다. 웹소설 안에서도 취향 분야가 다양하게 이루어져 있는데, 웹소설 소비자들과 영화의 소비자들도 같지 않다. 웹소설 소비자들이 상업영화를 소비하는 경우는 꽤 많지만, 상업영화 소비자들이 웹소설을 소비하는 경우는 그만큼 많지 않다. 전독시도 게임 판타지/빙의나 회귀, 환생 소재의 이야기를 용납할 수 있는 사람들이 소비할 수 있는 작품인데 이러한 소재들은 상업영화에서는 거의 쓰인 적이 없다. 그러니 영화의 관객들은 전독시의 소재를 보고 일단 익숙하지 않은 어색함을 느낄 가능성이 크다. (5) 소재와 장르 웹소설을 많이 읽는 사람들에게 회/빙/환/게임 판타지는 별도의 설명을 하지 않고 전개해도 이해될 수 있는 소재지만, 일반 대중들에게도 그렇지는 않다. 주변에 문학적인 소양이 뛰어난 친구가 있는데, 회/빙/환 이라는 소재를 받아들이는 것 자체를 매우 힘들어한다. 애초에 각 매체를 소비해 왔던 방식, 각 매체의 주류적인 표현 방식이 다른 것이다. 웹소설에서 회/빙/환은 이유가 제시되지 않아도 받아들여지는 장르적인 소재로 이해되지만, 영화나 드라마에서 회/빙/환은 이유 없이 제시되면 '개연성 없는 뜬금없는 설정'으로 여겨진다. 예를 들어 본다. 웹소설 재벌집 막내 아들이 드라마화 되었을 때 마지막 화에 환생의 이유가 후회라는 윤리적인 감정을 바탕으로 제시된다. 이러한 식으로 환생이라는 소재에 윤리적인 맥락과 이유를 부과하는 것에 대해 반발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반대로 일반적인 드라마 소비층들은 환생이라는 소재에 윤리적인 맥락과 이유가 부과되지 않는 것에 대해 어색함을 느꼈을 가능성이 크다. 만약 끝까지 환생의 정당한 이유가 제시되지 않고 드라마가 끝났다면, '뭐야, 이거 끝난 거야? 그럼 애초에 왜 환생한 건데?'라는 평가가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 (6) 종합 여기까지가 매체의 차이에 관한 이야기다. 웹소설, 웹툰, 영화의 매체적 차이는 각 매체의 작품이 다른 매체로 이식될 때 따라야 할 각색의 방향을 결정한다. 전독시는 웹소설 원작이 영화로 이식된 경우다. 분량의 제약, 한 편에 기승전결 있는 이야기를 담아야 한다는 조건, 몇 년 후에 밝혀질 떡밥이 최소한으로만 제시되어야 하고 영화 한 편에 이야기가 완성도 있게 다 담겨야 한다는 조건, 서사가 더 개연성 있게 표현되어야 한다는 조건이 더해진다. 여기에 전독시 원작 자체의 특성도 고려되어야 한다. 일반적인 작품들에 비해 훨씬, 훨씬 더 설정이 많은 작품이다. 웹소설을 읽다 보면 분량의 1/3 가까이가 작품의 설정을 설명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다. 그 설정들도 일반적인 영화 관객들에게는 익숙하지 않고 생소한 경우가 많다. 그러니 원작처럼 계속해서 혼잣말이나 상상을 통해 설정을 읊어대는 방식으로의 영상화는, 적어도 지금 상업영화의 문법에 있어서는 성공을 장담하기 힘든 전략이다. 4) 각색 매체의 차이에 대한 지금까지의 논의를 바탕으로 영화 전독시에서 이루어진 각색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각색된 내용을 전부 다 다룰 수는 없다. 너무 많다. 주요한 내용을 위주로 다루고, 마이너한 각색은 짧게 다루고 넘어간다. (1) 지구에 시나리오가 시작된 이유 ① 원작의 설정이 폐기되었나? 영화 초반부에서 김독자가 읽었던 원작 멸살법을 설명하면서 '신들이 타락한 인간을 벌하기 위해' 시나리오가 시작되었다는 언급이 있다. 원작에는 없는 내용이다. 이런 설명은 영화에서 현실에 갑자기 시나리오가 펼쳐진 현상에 대한 맥락을 제시해 준다. 나는 전독시 영화의 후속작이 만들어진다면 1편 초반부에서 '시나리오가 시작된 이유는 신들이 타락한 인간을 벌하기 위해서'라는 설정이, 지금 김독자가 사는 세상에 시나리오가 펼쳐진 이유로 그대로 이식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영화 전독시는 치밀하다. 영화를 잘 보면 멸살법에서 시나리오가 시작된 이유가 신들이 타락한 인간을 벌하기 위해서라고 제시하기는 하지만, 김독자가 사는 세상에서도 같은 이유로 시나리오가 펼쳐졌다고 확언하지 않는다. 영화는 독자들로 하여금 지금 시나리오가 펼쳐진 이유를 영화 초반부에 제시된 멸살법에 대한 설명으로 이해하고 넘어가면서 개연성 있다고 느끼기를 의도하고 있지만, 이 설명이 향후에 반전을 통해 바뀔 가능성을 막아두지 않고 있다. 영화 내에서 유중혁이 김독자에게 '왜 세상이 이렇게 됐을까. 왜 인간이 벌을 받게 되었을까?'라고 묻는 장면이 있는데, 이에 대한 명확한 대답은 제시되지 않는다. 김독자도 중간중간 이기적인 인간들을 보면서 위 대답을 회상하곤 하지만, 역시 명확한 대답이 제시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멸살법의 세상에 시나리오가 펼쳐진 이유를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신들로부터 벌을 받았다라고 각색했다'라는 문장은 사실이지만, '김독자가 사는 세상에 시나리오가 펼쳐진 이유도 같은 식으로 제시되었으므로 한수영이 김독자를 위해 멸살법을 만들었다는 전독시의 주요한 설정은 폐기되었다'라는 문장은 사실이 아니다. ② 이렇게 각색한 이유가 뭘까? 설정이 폐기되지 않았다면, '멸살법의 세상에 시나리오가 펼쳐진 이유는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신들로부터 벌을 받았다' 는 설정을 더하고 이를 설명하는 방향으로 각색한 이유는 뭘까? 원작에서 멸살법의 시나리오가 시작된 이유는 본편과 에필로그의 끝에 가서야 설명된다. 멸살법이라는 소설은 김독자의 동료인 미래에서 온 한수영이 김독자가 계속 살아갈 힘을 주기 위해서 작성한 소설이다. 이 내용이 소설에서 엄청난 반전으로 제시된다. 전지적 독자 시점 단행본이 20권 분량이니까, 1편에서 이 세상이 시작된 이유가 20권을 다 읽는 시점에 제시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식으로 한참 이후에 밝혀질 내용이니 지금은 설명하지 않고 넘어가는 게 상업영화의 문법에서 용서되는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설정이면 몰라도 애초에 이 모든 일이 벌어진 이유에 대해 어떠한 설명도 없이 갑자기 생소한 판타지 설정을 제시해 버리면 서사에 이입하지 못할 관객들이 많다고 생각한다. 드라마와는 또 다르다. 드라마는 일단 만들어지면 대부분은 끝날 때까지 제작이 되고, 1편에서 제시되지 않은 내용들이 이후에 풀리는 것은 이미 일반적인 한국 드라마의 문법으로 자리잡혀 있다. 로맨스 코미디 드라마를 보더라도 거의 다 이런 식으로 전개가 된다. 영화 초반부에 설명되지 않은 내용이 있는 경우 영화 후반부에 밝혀지는 건 일반적인 상업영화의 문법에 해당하지만, 1편 이야기의 전체 배경이 되는 이야기를 수년이 지나고 개봉하는 5편에 와서야 밝혀지는 게 용납되는 경우는 본 적이 없다. 현실에 갑자기 소설이 펼쳐진 현상이 발생한 이유가 1편이 끝날 때까지 제시되지 않는 건 상업영화에서 받아들여지는 문법이 아니다. 영화판은 웹소설이나 웹툰에서와 다르게 회/빙/환이나 시나리오라는 소재가 어떠한 설명도 없이 넘어갈 수 있는, 하나의 '장르'로 받아들여지고 있지 않다. 그러니 이에 대한 어떠한 설명도 없다면 관객들은 허무맹랑한 이야기다, 개연성이 떨어진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에서 환생의 이유를 제시해야 했던 것과 마찬가지의 맥락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한수영이 김독자를 위해 멸살법을 썼다는, 아기 김독자의 상상으로 이 모든 게 시작되었다는 전독시의 핵심적인 설정과 반전이 폐기된 상황도 아니다. 그러니 나는 이러한 각색을 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고, 괜찮은, 할 수 있는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2) tls123의 역할, 안나 크로프트, 김독자 어머니, 김독자와 동료들의 트라우마 ① tls123의 역할변화 tls123의 역할변화도 마찬가지의 맥락으로 설명된다. 원작에서 현실에 소설이 펼쳐지는 현상은 갑자기 발생하지만, 영화에서는 tls123이 '김독자에게 결말이 마음에 안 든다면 독자님이 직접 결말을 써보세요'라고 답장을 보내면서 소설이 펼쳐진다. 영화 초반부에서는 멸살법을 설명하면서 인간의 타락에 신이 벌을 주는 것을 이유로 제시하면서 그게 이 영화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간접적으로 이야기하는 방식을 택했다면, tls123의 답장은 이 영화에서 소설이 현실에 펼쳐진 이유에 대한 보다 직접적인 맥락을 제시한다. 영화 초반부 멸살법의 설명과 tls123의 답장을 본 관객들은 아, 이런 배경으로 인해 이제 현실에 소설이 펼쳐지겠구나 예상할 수 있고 앞으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맥락을 이해하게 된다. 다만, '배경'이 제시된 것은 맞으나 이것이 '소설이 현실에 펼쳐진 이유'에 대한 영화의 명확하고 확정적인 답은 아니다. tls123이, 그러니까 원작에 따르면 미래에서 온 한수영이 저렇게 답장을 보냈다고 하더라도 이 모든 시나리오가 현실에 펼쳐진 이유에 대한 원작의 설정이 폐기되는 건 아니다. 원작의 설정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과 tls123과 영화 초반부 멸살법에 시나리오가 발생한 이유에 대한 김독자의 나레이션이 모순되지 않는다. 나는 시나리오가 발생한 이유에 대한 원작의 설정과 한수영이 tls123이라는 설정은 각색될 수 있는 성질의 설정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후속편이 만들어진다면 차차 원작의 위 설정과 최종장에서의 반전이 전개될 것으로 추측한다. 영화 1편에서는 이 추측을 깨뜨릴 만큼 명확한 이야기가 없었다. ② 안나 크로프트 생략 tls123은 원작에서의 안나 크로프트와 비슷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때 tls123, 그러니까 한수영이 하는 짓은 전독시 외전에서 다른 세계선의 한수영이 이학현의 세계선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과 유사해 보인다. 원작에서는 김독자가 비형을 통해서 자신이 획득한 어룡의 핵과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안나 크로프트와 교환하고 백청강기를 구매해서 완성템 무기를 만든다. 영화에서는 김독자가 비형을 통해 어룡의 핵과 신념의 에테르를 tls123과 교환하고, 어둠 파수꾼 레이드를 통해 획득한 보상으로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얻어서 완성템 무기를 만든다. 결과적으로 부러지지 않는 신념에 뭔가가 더해져서(원작에서는 백청강기, 영화에서는 신념의 에테르) 완성템 무기가 만들어진 것은 같다. 왜 이렇게 각색했을까? 나는 1편에서 '안나 크로프트'를 빼야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원작에서는 극초반부에 어룡의 핵을 교환할 때 메세지를 통해서 한 번, 그린 존 시나리오에서 스펙터 영석을 먹고 나서 환상 속에서 한 번 안나 크로프트가 등장한 후 별자리 연회 에피소드인 150화 근처까지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일종의 떡밥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이렇게 긴 미래에 확인될 떡밥을 뿌려놓고 설명도 안 한 후 영화를 끝내는 건 상업영화에서 허용되는 문법이 아니다. 상업영화의 관객들이 '나중에 밝혀질 거니까 설명 안 하고 대충 넘어가서 상관없지. 암. 그렇지' 하고 넘어갈 수 있는 문법이 아니다. 따라서 1편에서 설명될 가능성이 없는 안나 크로프트라는 미지의 인물에 관한 이야기는 1편에서 등장시켜서는 안 됐고, 안나 크로프트를 등장시키지 않는다면 김독자가 부러진 신념을 베이스로 한 완성템을 얻는 방식을 바꿔야 했다. 그 이유로 이 방향의 각색이 이뤄졌다고 판단한다. ③ 김독자의 트라우마 새롭게 제시, 김독자 어머니 생략 영화는 안나 크로프트를 빼야 했던 것과 같은 이유로 김독자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빼야 했고, 그래서 김독자의 트라우마를 바꿔서 제시해야 했다. 김독자는 원작 초반부에서는 트라우마가 없는 사람으로 나온다. 본인 입으로도 그렇게 말한다. 김독자의 트라우마는 원작의 중반 부분이 되어서야 슬슬 밝혀지기 시작하고, 그 트라우마는 김독자의 엄마와 관련되어 있다. 영화는 김독자와 동료들의 성장을 주된 주제로 하므로 주인공인 김독자에게도 어떤 트라우마를 제시해야 했다. 그런데 원작의 트라우마를 그대로 가져오게 되면, 1편의 이야기의 흐름과 어울리는 내용으로 김독자에게 그 원작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기에 적절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도 어려웠을 것이고, 더 중요하게는 1편에서 설명될 가능성이 없는 김독자의 엄마를 등장시켜서는 안 됐다. 안나 크로프트를 빼야 했던 것과 같은 이유다. 1편이 완결성 있는 영화이기 위해서는 1편에서 제시되는 트라우마는 1편에서 해결되어야 한다. 김독자, 정희원, 이지혜, 이현성의 트라우마는 모두 1편의 이야기 안에서 해결된다. 따라서 김독자의 트라우마에 엄마 이야기를 넣는 순간 1편 영화에 김독자의 엄마라는 새로운 인물을 등장시켜야 하고, 본래는 한참 뒤에 가서야 역할을 시작할 엄마 이야기를 금호역과 충무로역을 둘러싼 극초반부 시나리오에 끼워 넣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에 영화는 김독자와 엄마의 관계가 아닌 김독자의 다른 트라우마를 새롭게 만들어서 영화에서 제시했고, 있을 법하고 적절한 방식으로 극복의 계기를 만들어줘서 적절하게 각색되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위에서 이 세상에 시나리오가 펼쳐진 이유에 대한 설정이 폐기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듯이 나는 김독자와 엄마의 관계에 대한 설정 또한 아직까지 폐기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후속편이 나온다면 얼마든지 후속편에서 제시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다. ④ 김독자의 트라우마와 멸살법 결말에 대한 김독자의 반감 김독자의 각색된 트라우마는 멸살법의 결말에 대한 김독자의 반감과도 연결된다. 영화에서는 멸살법의 결말을 유중혁 혼자 살아남는 것으로 각색했다. 김독자는 어린 시절 친구를 죽이고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김독자가 봐왔던 멸살법에서 유중혁 또한 동료를 버리는 비슷한 선택을 하면서 살아남았을 것이다. 김독자는 멸살법을 보고 유중혁이 본인과 비슷한 선택을 하는 것을 보면서 김독자 자신의 행동(민석이를 죽게 만든 것)에 대해서도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 유중혁을 보면서 위로받았다는 취지로 말한다. 그런 김독자에게 멸살법의 결말은 너무나도 중요했다. 자신의 선택이 가져올 결말을 미리 이야기해 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각색된 멸살법의 결말은 유중혁 혼자 황폐화된 폐허 같은 곳에서 살아남은 것이다. 미술적으로도 지옥이 떠오르게 묘사한다. 그 결말을 보고 아름답다,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김독자는 그 멸살법을 보면서 자신의 결말 또한 지옥이 아닐까 두려워했을 거다. 그래서 영화에서 김독자는 "저는 이 결말이 너무 무섭습니다"라고 말한다. 김독자에게 새로운 트라우마가 주어지고 멸살법의 결말이 각색되면서 김독자가 멸살법의 결말에 대한 반감을 가지는 게 설명되고, 그러면서 김독자와 작가인 tls123 간의 대화가 설명된다. 1편 영화 안에서 최대한 많은 것들을 내재적으로 설명하고자 했던 고민이 엿보인다. ⑤ 이현성과 정희원의 트라우마 이현성과 정희원의 트라우마도 마찬가지다. 이현성은 군대 내에서 적응을 잘하지 못한 눈치 없는(?) 장교였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과거가 제시되지 않는 인물이다. 영화에서는 이현성에게 별도의 트라우마를 제시해서 극복의 계기를 만들어주고, 그 트라우마 극복의 계기를 이현성의 특성 진화 계기에 대한 각색과 맞물리게 만들어서 이야기를 끌어나간다. 이건 원작보다 더 좋았다고 생각한다. 이길영을 보면서 트라우마를 이겨내는 이현성의 모습은 이현성에게 주어진 트라우마에 대한 말이 되는 극복의 계기로 작동하고, 오히려 이현성이 동료들의 칭찬(?)을 통해서 그룹 내에서 자신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면서 맞이하는 특성 진화의 계기보다 훨씬 더 자연스러웠다. 이현성이 원작에서 맞이하는 특성 진화의 계기는 그게 글의 형태로 쓰여 있으니까 적당히 말이 된다고 넘어갈 수 있지, 그게 영상화된다고 했을 때 개연성 있다고, 이해가 된다고 받아들일 사람이 얼마나 많을지 의문이다. ⑥ 정희원과 이지혜의 트라우마 정희원과 이지혜 또한 마찬가지다. 원작에서 이지혜는 이후의 극장 시나리오에 가서 트라우마 극복의 계기를 맞이한다. 이지혜가 원작에서보다 빠르게 트라우마 극복의 계기를 맞이하도록 각성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로, 1편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다. 영화는 무리하는 게 보일 만큼 최대한 다양한 주연들의 성장 이야기를 다루고자 했다. 그냥 등장만 시켜 놓고 밍숭맹숭하게 넘어가 버리면 주변 인물들이 소비되었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1편에 주연으로 등장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최대한 깊게, 잘 다뤄야겠다는 고민을 했을 것이고, 그 이유로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트라우마를 극복하거나 각성하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생각한다. 둘째로, 극장 던전의 이야기가 이후 영화에서 등장할지 의문이다. 전독시 전체의 이야기를 5편으로 줄이려면 엄청나게, 아주 엄청나게 많은 각색과 함께 시나리오를 많이 생략해야 하는데 하는데, '극장 던전' 이야기가 생략되지 않고 남아있는 시나리오일 수 있는지 의문이다. 따라서 후속편에서 극장 던전 이야기를 하기로 확실하게 마음먹은, 계획이 짜인 상황이 아닌 이상 이지혜에게 별도의 트라우마 극복의 계기를 만들어줘야 했고, 영화는 김독자의 행동에 감화받아서 원작에서보다 일찍 극복의 계기를 맞이하는 것으로 각색했다고 생각한다. 이지혜의 극복에 대한 주요 기여자는 김독자인데, 영화는 이지혜가 특히 김독자에게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제시한다. 김독자는 충무로 시나리오에서 이지혜의 각성을 촉구하며 "어쩔 수 없었다는 거 알아. 하지만 혼자 살아남으려다 어떻게 됐는지 알고 있잖아." 라는 말을 하게 되는데, 김독자의 말이 특히 이지혜에게 울림이 있는 이유는 김독자 또한 스스로를 '친구를 죽이고 살아남은 사람'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독자는 자신의 트라우마에 관해 이야기 하면서 "전 제가 살기 위해 제 친구를 죽인 적이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김독자가 친구인 민석이와 싸워서 민석이를 팬 건 학교에서 일진들로부터 살아남기 위해서 했던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그 일이 있은 다음 날 민석이는 자살했다. 김독자로서는 자신이 민석이를 죽였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지혜가 시나리오1에서 친구를 죽이고 살아남은 것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해서 친구를 죽였다는 사실이 변하지 않는다. 김독자와 이지혜의 트라우마는 유사한 구조로 되어 있다. 김독자는 이지혜와 유사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김독자가 이지혜에게 건네는 "전 제가 살기 위해 제 친구를 죽인 적이 있습니다"라는 말이 이지혜에게 더 와닿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영화는 이지혜에게 1편에서 각성의 계기를 제공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계기가 주변 인물들의 과거와 맞물려서 자연스럽게 설명되도록 각색했다. (3) 정희원의 설정 변화 원작에서 정희원은 멸살법에 등장하지 않는 인물이고, 영화에서 정희원은 멸살법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정희원의 설정을 이렇게 각색한 이유는 영화 분량상의 문제가 컸을 거라고 생각한다. 원작에서는 김독자가 정희원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기 때문에 여러 과정을 통해서 김독자가 정희원과 가까워지는 계기가 마련된다. 영화에서도 그렇게 할 수 있었겠지만, 영화는 원작의 주요 인물들을 모두 다루면서 또 그 인물들의 성장의 계기까지 만들어줘야 했기 때문에 정희원이라는 인물을 새롭게 소개하면서 천천히 친해지는 선택을 하기 현실적으로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정희원을 뺄 수는 없다. 정희원은 명실상부하게 원작의 주요 인물이고, 에필로그에서까지 계속 중요한 행위자로 등장한다. 매력 있는 캐릭터고, 원작의 정희원 캐릭터에 대한 팬층도 두텁다. 따라서 정희원을 등장시키면서 정희원에 대한 설명을 최소화해서 분량을 압축할 방법이 무엇인가 떠올려보면, 다른 캐릭터들과 함께 정희원 또한 원작에 등장하는 인물로 각색하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정희원에 대한 각색이 문제가 되는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정희원을 영화처럼 각색할 경우, 원작에서 김독자와 정희원 사이의 몇몇 장면들이 사라진다. 그 장면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분명 아쉬운 일이지만(나도 김독자와 정희원 사이의 티키타카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 장면들이 전독시의 핵심적인 내용이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보기는 힘들다. 만약 원작에서 정희원에 대한 설명이 영화에서와 같았다 하더라도 원작은 여전히 훌륭한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곁가지로 조금만 더 이야기해 보면, 원작에서는 정희원은 편의점에서 철두파로부터 성폭행을 당할 뻔한 사람이었다는 설정이었고 영화에서는 편의점에서 자신의 친구가 죽은 사람이었다는 설정이었다. 원작에서 정희원의 분노는 자신을 성폭행하려고 했던 일에 대한 분노였고, 영화에서 정희원의 분노는 친구의 죽음에 대한 복수였다. 자신을 위해 분노하는 것이 친구를 위해 분노하는 것으로 바뀐 건데, 바뀐 분노의 계기도 충분히 멋있었다. (4) 총을 사용하는 유중혁과 이지혜 유중혁과 이지혜의 무기가 조금 바뀌었다. 원작에서는 둘 다 칼을 쓰는데, 영화에서는 유중혁의 경우 칼과 총을 다 쓰고 이지혜의 경우 총만 쓴다. 원작에서 유중혁은 시나리오 중후반부에 가면 메인 무기들(천총운검, 흑천마도 등)이 생기는데, 초반부에 보조적으로 총을 사용하는 것으로 각색한다고 해서 무리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영화에서도 유중혁은 총을 보조적 무기로만 사용하고, 주요한 피해를 주는 장면에서는 항상 칼을 쓴다. 유중혁과 이지혜에게 칼이 아닌 총을 쥐여준 이유는 다른 주요 등장인물들이 주로 근접 무기를 사용하기 때문에 액션의 다채로움을 더해주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이지혜가 총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의 이유에서 다채로움을 확보하기 위함이 아닐까 싶은데, 설정상 총을 쓰는 게 어색하다고 할 수도 없다. 이지혜의 배후성은 해상전신인 이순신인데, 이순신은 조총 개발을 주도한 사람일 만큼 총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순신의 난중일기 1593년 5월 12일 편을 보면 "새로 만든 정철총통을 비변사로 보냈다(新造正鐵銃筒 送于備邊司)"라는 대목이 있고, 자신의 수군 각 진영과 각 고을에서 조총을 만들도록 지시하기도 했다.3) 원작의 설정상 이지혜는 이순신의 친구(전우)의 후손이기 때문에, 이순신 장군께서 자신의 친구의 후손이 자신이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고 좋은 무기라고 여겼던 총을 쓴다는 것에 대해서 분노할 거라고 상상하기는 힘들다. 원작의 이순신 장군을 봐도 그렇게 평가하시지는 않을 것 같다. 따라서 액션의 다채로움을 위한 각색이었다고 가정하면, 나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각색이었다고 생각한다. (5) 김독자의 '제4의 벽'과 '전지적 독자 시점' 스킬 원작에서 '제4의 벽'과 '전지적 독자 시점'은 김독자의 중요한 스킬이다. 영화에서는 김독자가 금호역 터널 시나리오에서 뭘 그렇게 아는 게 많냐는 동료들의 질문에 '저는 별다른 스킬도 없잖아요. 그래서 앞으로 일어날 일을 조금 알 수 있어요'라는 취지로 대답한다. 영화에서만 보면 '제4의 벽'과 '전지적 독자 시점'의 스킬을 못 쓰는 것 같기는 한데, 아직 확실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김독자가 '제4의 벽'을 못 쓰면서 발생하는 중요한 효과는 자신의 상태창을 못 보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김독자가 자신의 상태창을 볼 수 있는지 혹은 없는지가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는다. 영화 초반부 지하철에서 김남운과 싸울 때 자신의 능력에 코인을 투자할 때는 상태창이 올라와서 보여지는데, 금호역에서 방철수 파와 싸울 때 "근력 1,500코인 추가"라고 말을 했을 때는 상태창이 올라오지 않는다. 또한, 지하철에서 김남운과 싸울 때 김남운의 공격 패턴을 미리 마음속으로 예측하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에서는 이게 원작을 읽어서 아는 건지 아니면 '전지적 독자 시점' 스킬을 써서 알게 된 건지가 명확하게 제시되지 않는다. 일단 1편의 전개만 놓고 보면 2편에서 '제4의 벽'과 '전지적 독자 시점' 스킬을 사용할 수 있다는 식으로(나중에 발견하거나 아니면 나중에 설명하는 방식) 영화가 전개되어도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이 두 스킬이 빠진 것으로 각색된 게 아니기를 바란다. 2회독을 하고 쓴 전독시 리뷰에서도 썼는데, 나는 원작의 주요한 테마 중 하나가 김독자의 독자(讀者)로서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정체성을 잘 드러내 주는 게 김독자가 가진 위의 두 스킬이기 때문에 후속편에서 이 스킬이 명확하게 등장하면 좋겠다. + 책갈피 스킬도 등장하기를. (6) 유중혁이 회귀하면 세상이 사라진다. 암흑성 마왕 에피소드에서 유중혁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회귀해도 이 세계는 사라지지 않는다. 내가 죽는다고 해서 세계가 리셋되거나 하는 일은 없다는 소리다.” 원작의 설정은 분명하다. 유중혁이 회귀해도 이 세상은 사라지지 않는다. 영화에서는 다르다. 유중혁이 회귀하면 그 세상은 사라진다. 이렇게 각색한 이유는 김독자에게 행동의 동기를 부여해주면서 영화의 마지막 빌런인 화룡종과의 전투에 더욱 긴박감을 부여하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한다. 만약 유중혁이 죽더라도 세상이 사라지지 않으면 김독자가 계속 유중혁을 살리려고 노력할 이유가 사라진다. 김독자가 자신이 아는 정보들을 활용해서 유중혁의 역할을 대신하면 되기 때문이다. 원작에서도 초반부 김독자는 유중혁이 죽어서 회귀하면 이 세상이 사라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계속 유중혁을 살리려고 노력한다. 그렇게 설정할 수도 있었겠지만, 영화에서 다르게 설정한 이유는 화룡종 에피소드에서 실제로 유중혁이 죽어서 세상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때 느껴지는 절망감, 막막함을 통해 화룡종을 물리쳐서 다시 세상을 복원시키는 에피소드가 더욱 극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한다. 더해서 초반부터 명확하게 '이중혁이 죽으면 이 세상이 다 망한다'라고 못 박고 진행할 때 김독자에게 더욱 명확한 동기를 부여해줘서 관객들로 하여금 김독자의 행동이 더 잘 와닿게 만드는 효과도 있을 것이다. 이 각색은 상당히 과감한 각색이다. 향후 줄거리를, 특히나 최후반부나 에필로그 혹은 외전에서의 이야기를 원작과 다르게 가게 만들 가능성이 있는 설정 변화다. 1편에서 이렇게 각색한 것 자체는 이유 있는, 이해할 수 있는 각색이지만 후속편들에서 바뀔 이야기의 방향이 재미있지 않다면 비판받을 수밖에 없는 각색이기도 하다. (7) 기타 각색들 짧게 다루고 넘어간다. 1) 김독자와 유상아의 성격 변화 김독자와 유상아의 성격이 조금 바뀌었다. 원작에서 초반부의 김독자와 유상아는 다소 딱딱하고 사람 냄새가 덜 나는(?) 캐릭터였는데, 그대로 영상화시켰을 경우 자연스럽지 않게 보일 우려를 하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공통적으로 유상아와 김독자 모두 감정 표현이 더 풍부해졌고, 유상아는 보다 장난기가 많고 김독자는 덜 능숙하게 각색됐다. 금호역 시나리오에서 유중혁 이야기를 하면서 유상아가 정희원을 바라보며 "잘생겼어!"라고 하는 장면은 원작의 유상아라면 하지 않았을 대사가 확실하다. 유상아의 각색된 모습도 충분히 매력 있었다. 김독자의 경우 더 인간미가 느껴지게 각색했다는 장점이 있는데, 김독자의 능숙함은 김독자가 가진 제4의 벽 스킬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후속편에서 관련된 설정을 어떻게 정리할지 주목할 생각이다. 2) 지하철 시나리오의 메뚜기 -> 개미 지하철 시나리오에서 원작의 김독자는 메뚜기를 잡는데 영화의 김독자는 개미를 잡는다. 메뚜기를 개미로 바꾼 건 개미알의 시각효과 때문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원작에서는 김독자가 메뚜기알을 여러 개 터뜨리면서 많은 생명을 죽인 효과를 얻어 코인을 많이 획득하는 기회를 얻는데, 메뚜기알은 메뚜기 배 안에 있기 때문에 김독자가 그걸 터뜨려도 정확히 뭘 했는지가 영상으로 표현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반면, 개미알은 밖에 드러나기 때문에 개미알을 터뜨리는 장면에서 김독자가 뭘 해서 어떤 효과를 얻었는지가 보다 명확하게 영상을 통해 드러날 수 있었다. 다만, 이 각색은 실수였다고 생각한다. 메뚜기알은 매뚜기 배 알에 있으니까 메뚜기 배를 갈라서 그 알을 나눠서 가져서 모두 살아남는 시나리오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런데 개미알은 사람 수대로 나누는 게 어렵지 않게 보이기 때문에 김독자는 그 지하철에서 아주 쉽게 모두를 살릴 방법이 있었음에도, 심지어는 모두를 살린 이후에도 수많은 코인을 얻을 수 있었는데도 이를 하지 않은 다소 싸이코같은 사람이 되어버렸다. 별생각 없이 넘어가면 넘어갈 수 있는 씬이지만, 되돌아서 생각해 보면 김독자가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장면이다. 3) 기타 작은 부분들 초반에 7급 해수종을 사냥하는 과정에서 원작에서 사용된 '망치 해마의 점액' 설정을 없애서 사냥 방식을 간소화했고, 이후 안국역에서 화룡종을 상대하는 과정에서 얻게 될 청빙환을 7급 해수종 사냥에 따른 보상으로 바꿨다. 이후 독이 퍼진 외부에서 마스크 역할을 할 엘라인 원숭이의 허파를 구매하는 것을 7급 해수종 사냥에 따른 보상으로 바꿨다. 엘라인 숲의 정기 아이템을 사용하는 장면도 뺐다. 원작에서는 그린 존 시나리오 이후 안국역으로 가서 선지자들의 밤에 참석하고 사도들의 계략에 당하는 과정에서 화룡종을 만나게 되는데, 영화에서는 그린 존 시나리오 이후에 충무로역에서 화룡종이 등장하는 것으로 각색되었다. 쿠키영상에서 다른 역에서 뭔가 무시무시한 것들이 온다고 암시하는데, 한수영이 등장하지 않을가 추측한다. 이러한 각색들은 모두 '설명이 필요한 설정을 최소화해서 분량을 줄이고 압축적인 전개를 해나가는 방향'으로 설명된다. 이런 각색이 없었다면 화룡종을 잡는 데까지 이야기의 진도를 뺄 수 없었을 것이다. (8) 원작의 팬들께 전하는 말 : 영화는 원작의 핵심을 훼손시켰는가? 이런 주장이 많으니까 하지 않을 수 없는 논의이기는 한데, 가장 하기 싫은 논의이기도 하다. '핵심'이 도대체 무슨 뜻일까? 그걸 규정한 권한이 누구에게 있을까? 핵심이 뭔지 논증할 방법이 있기는 할까? 이제 막 영화 1편이 개봉했을 뿐이다. 소설로 따지면 이제 막 안국역 에피소드가 끝났다. 소설 60화 정도에 막 도착했을 뿐이다. 전독시를 재미있게 읽은 사람이라면 전독시의 핵심 메세지나 철학에 대한 각자의 생각이 있을 텐데, 소설 60화를 읽으면서 벌써 그 결론을 냈었나? 아닐 거다. 완결을 보고 에필로그까지 읽으면서 슬슬 감이 잡히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니 영화에 대해서도 관용을 가져주면 어떨까? 지금 1편의 진행이 당신이 생각하는 전지적 독자 시점의 핵심적인 요소와 맞물리지 않을 것처럼 보이더라도, 앞으로 이야기를 어떻게 진행해 나갈지 지켜봐 주는 건 어떨까?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영화 1편은 향후의 진행에 대해서 다양한 가능성을 열고 있다. 그러니 이번 재해석이 어떻게 나올지를 지켜봐 주고, 실망하더라도 이 영화 시리즈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에 대한 명확한 윤곽이 나온 이후에 실망하면 어떨지 제안하고 싶다. . 이 논의에 관심 있는 사람은 전독시 원작의 팬들일 가능성이 크니까, 이렇게 되묻고 싶다. 김독자나 김독자 컴퍼니의 동료들이 [전지적 독자 시점]이 가진 핵심 철학을 자신들만 규정할 수 있다고 주장했을까? 아니면 [전지적 독자 시점]에 대한 오독도 있을 수 있고 엇나간 이해도 있을 수 있고 무리가 있는 해석도 있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롭게 읽히고 이야기되고 재해석되기를 바랐을까? 원작에서 김독자는 자신이 원하는 분명한 전개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를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한다. 에필로그에서 가장 오래된 꿈이 된 김독자는 수많은 전독시의 세계선들을 살펴봤을 텐데, 그 세계선들은 시나리오에 대한 각 세계선의 주인공들의 해석이 담겨있다. 그중 많은 세계선들의 시나리오 전개는 가장 오래된 꿈인 김독자가 원하는,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핵심'이라고 생각하는 전개와 달랐을 것이다. 김독자가 그 세계선들을 지켜보면서 자신이 원하는 전개와 다르다고 해서, 자신이 생각하는 시나리오의 핵심에 어긋난다고 해서 매번 개입하거나 비판하면서, 이 세계선은 진정한 멸살법 세계선이 아니고 전독시 세계선이 아니라고 날서게 비판하면서 그 세계선들을 바라봤을까? 아닐 것 같다. 김독자라면 보는 것만으로 좋았을 것이고, 두근거리고 응원하는 마음으로 지켜봤을 것 같다. 같은 마음이어주면 좋겠다. (9) 각색과 원작에 대하여 : 각색이 중요한 게 아니다. 잘, 재미있게 만드는 게 중요하다. 원작이 있는 작품을 각색할 때는 반드시 논란이 뒤따른다. 각색을 왜 했냐? 혹은 왜 저렇게 했냐는 논란이다. 원작 팬 중 일부는 각색된 작품이 원작의 어떠한 점도 바뀌지 않고 원작을 그대로 드러내기만을 바라기도 한다. 원작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이다. 원작에 대한 마음이 깊으면 원작의 모든 면의 의미를 곱씹고, 있는 그대로의 원작을 좋아할 수도 있다. 이 경우 원작이 바뀌면 그건 작품의 훼손이자 원작에 대한 모독, 나아가서는 원작 팬에 대한 모독이라고 느낀다. 전독시는 훌륭하지만 다소 덕스러운 소설이기도 하다. 설정이 엄청나게, 엄청나게 많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거의 매회마다 설정을 줄줄 읊는 장면이 있을 정도다. 관점에 따라서는 마이너하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에 원작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인식의 차이가 클 수도 있고, 원작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원작에 대해 가지는 감정이 남다를 수도 있다. 이런 작품을 각색할 때는 일단은 반드시 욕을 먹을 수밖에 없다. 설정이 바뀌는 것, 어떤 이야기가 생략된 것 자체를 원작에 대한 공격으로 이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각색한 작품이 모두 욕을 먹고 망하는 것으로 끝나냐고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다. 원작을 각색해서 어떤 내용을 빼거나 바꾸었다는 점에서 기분이 상한 사람들을 설득할 만큼 독자적인 매력을 보여주면 된다. 좀 더 편하게 말해보면, 엄청나게 재미있게 만들면 된다. 그렇게 해도 화를 낼 팬들은 화를 내겠지만, 또 많은 사람들은 '원작과는 다르지만 나름대로 훌륭한 작품'으로 이해해 주기도 한다. . 매체는 매체의 고유한 표현 방식, 호흡, 작품의 공개 방식, 소비자층 등이 모두 다르므로 원작이 있는 경우 반드시, 반드시 각색이 있을 수밖에 없다. 아주 드물게는 각색을 최소화하고 그대로 충실하게 이식하기만 해도 훌륭한 작품이 있을 수 있지만, 그럴 가능성은 아주아주 작다고 생각한다. 원작이 훌륭한 경우 그 매체의 표현 방식을 잘 활용했기 때문에 훌륭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다른 표현 방식의 매체에 와서도 원작의 표현 방식이 그대로 훌륭한 방식이 될 가능성은 작다. 따라서 각색은 필수적이라고 볼 수 있고, 각색했다는 것 자체가 비판받아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설정을 빼거나 바꾸었다는 사실 자체가 비판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구체적인 각색의 방향을 비판할 수는 있겠지만, 매체의 특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비판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귀담아들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러한 비판이 이루어졌다는 사실 자체에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에 인어공주 영화를 리뷰한 적이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평작 이상이었다. 이걸 평작 이하라고 평가하면 평작인 영화는 거의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인어공주 영화를 많이 싫어한다. 인어공주에 대한 비판으로 PC주의(정치적 도덕주의,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다. 영화 리뷰에도 쓴 내용이지만, 나는 그 비판의 내용 자체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내용이 아주 듬뿍 들어간 영화도 훌륭할 수 있고, 반대로 아주 별로일 수도 있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내용이 전혀 없는 영화도 훌륭할 수 있고, 반대로 아주 별로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영화가 훌륭하고 재밌는 건 그 영화가 PC주의를 담고 있냐 담지 않고 있냐와 별개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인어공주를 비판할 때 PC주의 이야기를 하곤 했다. 물론 그건 디즈니의 최근 행보와 연관지어서 '디즈니가 PC주의에만 집중하고 작품의 퀄리티는 경시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라고 말한다면 의미 있는 맥락이 생기는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PC주의 자체는 영화가 못난 이유가 될 수는 없다. 멋지고 주체적인 여성 주인공이 나오는 매드맥스를 누가 뭐라고 하는가? 나는 인어공주가 욕먹는 이유는 그 영화가 충분히 재미있지 않아서라고 생각한다.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든지 인어공주는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했다. 사람들이 인어공주를 싫어한 이유가 주인공이 흑인이어서라는 아주 언PC한 이유일 수도 있지만, 주인공이 흑인이어서 원작과 다르다는 이유로 반감을 느끼더라도 영화 자체를 아주 재미있게 만들어서 그 사람들의 반감을 안아줄 수 있었다면 사람들의 반응이 다르지 않았을까? 일단 싫은 감정이 먼저고 사람들은 그 이후에 그 싫은 감정에 대한 이유를 찾게 되고, 그러다 보니 PC주의든 뭐든 보이는 것들을 집어내서 이를 비판하기 시작하는 게 아닐지 생각한다. 게임 더 라스트 오브 어스2에 대한 논란도 마찬가지였다. 그 게임을 싫어하는 마음은 이해가 가는데, 중간중간 이상한 비판들도 많이 끼어있었다. 엘리의 잔근육이 비현실적이라느니 어떤 주인공이 스테로이드를 쓴 것 같다느니 하는 비판들이 있었는데, 그게 게임이 못난 이유가 될 수 있는지 심각하게 의문이었다. 여태껏 다른 게임들을 판단한 기준이 된 적도 없다. 인어공주 때와 비슷한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이유에서 사람들은 더 라스트 오브 어스2를 싫어하게 됐고, 일단 싫어하게 되었으니, 이유를 만들어서 제시하는 것이다. 전지적 독자 시점 영화에 대한 비판이 많은 것을 안다. 그중 상당수는 합리적인 비판이지만, 나는 그 영화에서 각색이 이루어졌다는 사실 자체를 두고 비판하는 사람도 많이 봤다. 어떤 설정이 사라졌거나 바뀌었다는 점 자체에 분개하는 사람을 많이 봤다. 위에서 말했듯이 다른 매체에 작품을 이식할 때 각색은 '반드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전독시같이 설정이 많은 작품은 더더욱 그렇다. 따라서 각색이 이루어졌다는 사실 자체를 비판하는 내용에는 동의할 수 없다. 다만, 이러한 비판을 위에서 말한 인어공주나 더 라스트 오브 어스2에 대한 설명과 비슷하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는 영화 전지적 독자 시점을 좋아한다. 평작 이상이라고 생각하고. 주위 사람들에도 여럿 추천했다. 다만, 명작이나 수작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원작과 무관하게 눈에 보이는 아쉬움들이 여럿 있었고, 이 글에서 성의 있게 표현해 놓았다. 미묘하다기보다는 다소 눈에 띄는 아쉬움들이었기 때문에 나는 이 영화를 좋아하고, 흥행하기를 바라고, 후속작이 만들어지기를 기대하면서도 명작이나 수작이라고 평가할 수 없다.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면서 재미있다고 느낄 가능성이 크지만, 재미있어서 미치겠다고 느낄 가능성은 적다고 생각한다. 나도 그랬다. 만약 이 영화가 아주 훌륭했다면, 미칠듯이 재미있었다면, 원작/각색과 별개로 눈에 보이는 아쉬움들이 적었다고 가정하더라도 지금과 같은 일부 원작 팬들의 강한 비판이 있었을까? 그렇게 생각하기 힘들다. 나는 위에서 몇몇 각색에 대해 왜 그렇게 각색되었는지, 그래서 괜찮은 각색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가 뭔지에 대한 내 생각을 적었다. 각색을 비판하는 사람들에 대해 다른 의견을 제시하기 위해서 한 이야기인데, 지금 생각해 보면 의미 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들이 각색을 비판하는 이유가 정말 각색돼었다는 사실 자체에 분노해서일 수도 있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몇몇 설정이 바뀌고 삭제되면서 느껴지는 서운함을 달래줄 정도로 영화가 충분히 재미있지, 충분히 훌륭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간단하게 말해서, 더 재미있게 만들었으면 없었을 비판이지 않았을까. 원작의 개성이 강한 작품이라면 원작 팬들의 각색작에 대한 기준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더더욱 재미있게 만들어야 했다. 전독시의 흥행도 어느 정도는 원작 팬들의 사랑에 기반한 것 아니겠는가. 어느 자리에서 이동진 영화평론가는 '훌륭한 영화는 취향을 타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취향이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취향은 있겠지만, 다른 취향마저 설득할 수 있는 영화가 진짜 훌륭한 영화라는 것이다. 각색작도 마찬가지다. '훌륭한 영화는 원작을 얼마나 각색했는지와 무관하다'라고 표현해도 좋겠다. 원작을 많이 각색했다면 원작 팬들은 슬퍼하겠지만, 정말 훌륭한 영화라면 그 슬픔마저 보듬어주고 달래주며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영화 전지적 독자 시점을 좋아하고, 좋은 영화라고 생각하고, 주변에 추천도 하고 다닌다. 다만, 각색으로 인해서 슬퍼하는 원작 팬들의 슬픔을 보듬어주고 달래주며 설득할 수 있을 정도로 훌륭한 영화인지 묻는다면 긍정적으로 대답하기 힘들다. 4. 김독자의 마음으로 후속작이 만들어진다면 위에서 언급한 아쉬운 점들을 잘 보완해서 완성도 있는 영화가 만들어지기를 바란다. 그래서 전독시 원작의 팬들과 팬들이 아닌 사람들에게 모두 사랑받기를 바란다. 김병우 감독을 비롯한 제작진과 배우들 모두를 존경하고 진심으로 감사하다. 내가 좋아하는 작품을 이렇게 영화로 만들어줘서 내가 상상만 하던 세계를 두 눈으로 생생하게 마주할 수 있게 만들어 주셨다. [전지적 독자 시점]의 에필로그에서 김독자는 희생한다. 누군가는 이 세상을 보고 있어야 이 세상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자신의 일부를 나누어서 이 세상을 보는 역할을 한다. 세상을 보는 역할을 하는 김독자는 점점 더 무의식의 영역으로 침잠해 가고 파편화되고 쪼개져서 세상으로 흩어진다. 김독자의 동료들이 김독자를 되찾을 방법은, 흩어진 많은 김독자들이 김독자의 귀환을 바라고 상상하는 것이다. 김독자의 상상은 현실이 되기에 그렇다. 흩어진 김독자들이 [전지적 독자 시점]을 읽고 김독자의 귀환을 상상하면 김독자가 돌아올 수 있다. 나는 흩어져서 김독자의 귀환을 상상하는 김독자의 마음으로 영화 전지적 독자 시점을 보고 있다. 더 많은 김독자들이 전지적 독자 시점을 본다면, 김독자가 다음 영화로 되돌아올 수 있다. 소설에는 김독자 컴퍼니가 '그렇게 해서 돌아온 김독자가 우리가 아는 김독자가 아니면 어쩌지'라며 고민하는 장면이 나온다. 확신이 없더라도 김독자 컴퍼니는 김독자 되찾기를 멈추지 않는다. 나도 그렇게 해서 돌아온 영화 [전지적 독자 시점]이 내가 아는 [전지적 독자 시점]이 아니면 어쩌지 하는 고민을 했었는데, 내가 아는 [전지적 독자 시점]이 아니어도 괜찮다는 결론을 내렸다. 나는 단 하나의 [전지적 독자 시점]을 규정할 권한을 가지고 싶지 않다. 나는 그저 보고 듣고 읽고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일 뿐이다. 나는, 설령 그것이 나의 이해와 다르더라도 누군가가 이해한 [전지적 독자 시점]을 다시 보고 싶다. 그리고 이야기하고 싶다. 다시 김독자를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출처] 영화 전지적 독자 시점 리뷰 - 영화 추천 여부, 각색 등 이 영화에 대한 거의 모든 것|작성자 아라미루 테스트 파일: 개인정보 처리방침 변경(전,후)_260710.pdf 테스트 파일: HWP_테스트.hwp test-lock.hwp 1) 주석 처리 테스트 설명입니다. 2) 두번째 주석 테스트입니다.
누군가의 사진첩을 들여다보는 것은 언제나 흥미롭습니다. 소소한 일상의 흔적과 기억이 담긴 사진첩 속에서 그 누군가는 영화 한 편의 주인공이 됩니다. 사진첩의 주인공은 자신만의 독특한 감성으로 재미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죠. 그렇다면 한국영상자료원이 소장한 ‘어느 영화인의 사진첩’에서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많은 영화인들이 소중하게 간직했던 그 사진첩 속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어쩐지 ‘중요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만 같은 현장. 물론 그 ‘중요한 일’이란 사진을 보는 순간 단번에 눈치챌 수 있다. 사진 속 장소가 어디인지, 언제 찍은 것인지 모른다손 치더라도, 사진 속의 인물만으로도 이곳은 뭔가 대단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현장이다. 1993년 7월 12일,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영화관 단성사 는 이날따라 매우 들뜬 분위기다. 역대 한국영화 최고 흥행 기록을 세울 것으로 기대되며 연일 만원사례를 기록하고 있는 < 서편제 >(임권택, 1993)가 상영 중이기도 했지만, 이 영화를 보기 위해 유독 특별한 손님이 방문했기 때문이다. 한껏 들뜬 분위기를 가득 안은 단성사를 찾은 특별한 손님은 이 사진이 들려주는 이야기의 주인공, (당시) 야인/정치인 김대중이었다. 한편 사진에서 김대중의 오른팔을 가볍게 붙잡고 함께 계단을 오르고 있는 이는 영화 <서편제>에서 한국적 아름다움을 필름 위에 새긴, 사진의 원 소장자인 정일성 촬영감독이다. “ 촬영감독 정일성 컬렉션 ”에는 이 사진 외에도, 단성사 휴게실에서 김대중과 담소를 나누고 있는 정일성과 오정해 의 사진도 포함돼 있는데, 이들의 표정에는 거물 인사와 함께 자리한 데서 오는 긴장감이 역력하다. 이즈음의 김대중은 연일 화제의 중심에 있던 참이었다. 그는 1992년 12월 18일에 치러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에게 패배한 후, 정치 은퇴를 선언하고 돌연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 산하 국제문제연구소의 객원교수로 떠났다. 그 사이에 여러 언론은 그와의 접촉을 수없이 시도했지만, 정계를 떠나 야인으로 돌아간 그는 외부와 거리를 두고 통일문제 연구에 집중했다. 그가 6개월가량의 영국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1993년 7월 초, 언론은 또다시 그의 거취에 대한 보도를 연일 이어갔다. 그러던 차에 귀국 후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이뤄진 그의 <서편제> 관람은 사회의 모든 관심이 집중된 은퇴 정치인의 행보에서 꽤나 튀는, 돌출 이벤트였다. 그가 단성사에서 <서편제>를 관람한 것은 “제작사 측의 초청에 따라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1] 제작사 태흥영화사( 이태원 대표)가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연일 거취 문제로 주목받고 있는 ‘야인’ 김대중을 초청했고, 김대중 역시 이에 응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증이 생긴다. 태흥영화사는 왜 김대중을 단성사에 초청했을까? 김대중은 모든 외부와 거리를 두면서도 왜 태흥영화사의 <서편제> 관람 초청에 응했을까? 제작사 입장에서 생각해본다면, 혹시 태흥영화사는 화제 속 인물의 <서편제> 관람이 영화 홍보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던 것일까? 하지만 <서편제>는 이미 1993년 5월, 문화체육부 중개로 청와대 시사회를 개최했고 김영삼 대통령을 위시한 정부 관계자들의 찬사를 받아 화제가 되었다.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던 종교인, 김수환 추기경이 <서편제>를 보러 단성사를 찾은 일도 있었다. 단성사를 방문한 김수환 추기경과 그를 맞이하는 <서편제> 제작팀(구체일 미상) 다시 말해, 정치계를 비롯해 종교계까지 <서편제>를 관람하면서, 영화의 우수성과 작품성, 화제성은 이미 충분히 입증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1993년 7월 12일의 이벤트는 단순히 영화 홍보를 위한 목적만은 아니지 않았을까? 어쩌면 ‘김대중’ 그 자체가 태흥영화사에 그리고 영화 <서편제>에, 나아가 한국영화계에 특정 무언가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영화계와 김대중의 관계 내지는 영화계에서 ‘김대중’이라는 키워드가 가지는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이로부터 약 5년 전, 노태우 정권을 출범시킨 제13대 대통령 선거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87년 12월 16일에 치러진 제13대 대통령 선거는 1972년 10월 유신 이후의 첫 대통령 직접선거로, 민주화를 향한 국민의 열기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당시 대표적인 민주 인사 김영삼(통일민주당)과 김대중(평화민주당; 이하 평민당) 역시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대중은 민주정권 수립을 위해 양김(김영삼, 김대중)의 후보 단일화를 요구했으나 결렬되었고, 이들은 각자 독자 후보로서 대선 레이스를 치렀다. 영화계 내에서도 국내 영화시장 보호 및 창작과 표현의 자유, 영화인 복지 향상 등 한국영화 발전을 위해 김영삼, 김대중에게 후보 단일화를 요구했지만, [2] 단일화가 결렬되자 평민당 김대중 후보를 공식적으로 지지하는 글을 발표했다. [3] 이에 평민당은 「평화민주당에서- 이 땅의 영화인에게 드리는 글」 [4] 로 영화인의 요구에 호응했다. 여기서 평민당이 제시한 한국영화 발전을 위한 기본 원칙의 골자는 다음과 같았다. 「평민당에서- 이 땅의 영화인에게 드리는 글」, 1987. 12. 경기천년바탕체 R(저작권자: 경기도, 출처: 한국저작권위원회 ) 영화계 현안문제를 고루 다루는 가운데서도, 여기서 주목해 볼 것은 한국영화 보호 및 육성을 위해 평민당이 가장 먼저 제시한 극장 스크린쿼터 확대안이다. 1986년 12월에 개정되어 1987년 7월부터 시행된 제6차 개정영화법에는 외국인의 국내 영화업 허용 조항이 신설돼, 외국 영화사가 국내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되었다. 사실 이는 1985년부터 시작된 미국 통상압력의 한 결과로, 이를 토대로 1988년부터 UIP를 시작으로 20세기 폭스, 워너 브라더스(1989년~), 콜럼비아 트라이스타(1990년~), 월트디즈니(1993년~) 등의 할리우드 영화사들이 국내에 영업 등록을 하고 자사의 영화를 직접 배급(직배)하기 시작했다. 할리우드 영화의 직배는 한국영화계에 위기로 다가왔다. 세계 영화시장에서 막강한 힘을 자랑하는 할리우드 영화가 국내에 직접 배급되면, 자본력이 상대적으로 영세한 한국영화가 설 자리는 좁아질 수밖에 없는 까닭이었다. 설 자리가 좁아진 한국영화를 보호해줄 장치는 스크린쿼터 제도뿐이었지만, 이 역시 미국의 레이더망에서 안전할 리는 만무했다. 이런 상황에서 스크린쿼터 일수를 확대하겠다는 평민당의 공약은 생존 위기에 놓인 영화인들의 희망이자 기대와도 같은 것이었다. 다시 사진 속 1993년 7월의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1993년의 한국영화계는 스크린쿼터 문제, 나아가 영화 시장 개방 문제로 또다시 분주한 해를 보내는 중이었다. 미국의 압력으로 1988년에 시작된 ‘제2차 한미영화협상’에서 한국 정부는 1989년 1월부터 외국영화 프린트 벌 수 제한을 연차별로 완화해 1994년 1월부터 전면 폐지할 것에 합의했다. 이는 쉽게 말해 외국영화 상영 필름의 극장 공급량을 무제한 허용하는 것으로, 국내 영화시장 개방 확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1994년으로 예고된 영화시장 확대 개방을 목전에 둔 1993년의 영화계는 그해 1월, ‘스크린쿼터 감시단(위원장 정지영)’을 발족하고 전국 극장 상영 실적과 스크린쿼터 위반 실태를 조사, 감시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며 한국영화 보호의 마지막 보루인 스크린쿼터 사수에 매진했다. 이런 맥락에서 1993년 7월 12일, 단성사에서 <서편제>를 관람한 ‘야인’ 김대중은 한국영화 보호 및 육성을 공약으로 내세운 1987년의 ‘대선 후보’ 김대중과 교차한다. 미국 통상압력의 결과로 예고된 외국영화 프린트 벌 수 제한 전면 폐지의 위협에서 스크린쿼터 사수를 외치는 1993년 현재에, 미국 통상압력의 결과로 예고된 할리우드 거대 영화사들의 직배 위협에서 스크린쿼터 확대를 약속했던 1987년 정치인 김대중이 마치 소환되기나 한 듯이. 한국영화 흥행 신기록이 예고된 <서편제>를 야인 또는 정치인 ‘김대중’이 관람한다는 것은 이처럼, 그 자체로 한국영화를 위한 상징적인 이벤트였다. * 단성사에 김대중을 초청한 호스트, 태흥영화사의 이태원 대표는 그해 10월, 문체부의 스크린쿼터 20일 추가 감경 발표에 대응하고자 출범한 ‘스크린쿼터 사수를 위한 범영화인 비상대책위원회’에서 시나리오 작가 최금동 , 감독 유현목 , 임권택 , 당시 한국영화인협회 이사장 유동석과 함께 공동위원장으로 추대되었고, 1993년 10월 27일에 예정된 영화의 날 기념행사 취소 및 제작 활동 중단 등의 공동 행동을 전개했다. 한편 정계 은퇴를 선언했던 김대중은 1997년 대통령 선거에 다시 출마해, 제1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이와 맞물려 한국 경제는 IMF 금융위기를 맞았고, 갓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미국에 한미투자협정(BIT) 체결을 제안했다. 그리고 스크린쿼터 문제가 협상 테이블에 올랐다. 영화인들은 ‘스크린쿼터 사수 범영화인 비상대책위원회(약칭 비대위)’를 발족하고 본격적인 투쟁에 돌입했는데, 이때 역시 태흥영화사 이태원 대표는 배우 김지미 , 감독 임권택과 함께 비대위 공동위원장을 맡았다. 영화계의 스크린쿼터 사수 투쟁은 노무현 정부 시기까지 이어졌으나, 그들의 투쟁으로 지켜온 스크린쿼터 146일은 결국 2006년 7월, 연간 73일로 축소되었다(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 영화시장 개방과 스크린쿼터 컬렉션 ” 참조). *** [1] 《동아일보》, 1993. 7. 13., 5면. [2] 애국영화인 일동, 「 민주화를 갈망하는 애국영화인에게 드리는 글 II 」, 1987. 12. 11., 한국영상자료원, 『영화시장 개방과 스크린쿼터 컬렉션』, 관리번호 DZZ0001349_01. [3] 이 땅의 영화인들, 「 이 땅의 민주화를 열망하는 애국시민에게 드리는 영화인의 글 」, 1987. 12. 14., 한국영상자료원, 『영화시장 개방과 스크린쿼터 컬렉션』, 관리번호 DZZ0001350_01. [4] 한국영상자료원, 『 영화시장 개방과 스크린쿼터 컬렉션 』, 관리번호 DZZ0001351_01.
<벤허>(1925) 중 (사진: “ Ben-Hur A Tale of the Christ ”, IMDb) 다시 만난 세계: 식민지 조선의 극장문화 이야기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발간하는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시리즈를 바탕으로 역사의 지층 속에 묻혀 있던 이야기와 행간 속에 숨겨진 욕망들을 재조명합니다. 일제가 조선을 강제 병합하면서 동원한 ‘우승열패(優勝劣敗)’의 논리는 식민지 통치 전략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제국은 힘의 우위를 과시하며 찍어 누르기 위한 ‘무단통치’를 내세웠으며, 이는 ‘강자’가 곧 ‘적자’라는 인식과 궤를 같이하고 있었다. 무장한 헌병들이 백주에 대로를 활보하고 일반 문관뿐 아니라 교사들까지 칼을 차고 다닐 만큼 살풍경한 분위기 속에서 식민지 조선 사회는 급격히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인들의 역량을 과소평가해 왔던 제국의 통치자들에게 ‘3.1운동’은 예기치 못한 ‘사고’와도 같았다. 고종의 장례식에 맞춰 대규모 인파가 몰릴 것이 충분히 예상되었던 상황이었고, 실제로 20만 명 이상의 조선인들이 한꺼번에 상경했지만 치안 당국의 대응은 미온적인 수준에 그칠 따름이었다. 민족 대표들은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총독부에 전화를 걸어 자진 체포되었으나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시위 행렬은 수만 명으로 불어났고, 만세운동의 기운은 조선 각지로 퍼져나가며 끈질기게 이어졌다. 여러모로 ‘3.1운동’은 제국의 통치 시나리오에서 완전히 비껴난 장면들을 연출해 냈던 셈이다. ‘3.1운동’을 기점으로 물리적 폭력에 의존한 통치 방식은 뚜렷한 한계에 부딪혔다. 만세운동 진압 과정에서 드러난 잔혹성은 국제적 비난을 불러일으켰고, 부담을 느낀 제국은 ‘문화통치’를 표방하며 유화책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물론, 이것이 기만적인 술책에 불과했음은 잘 알려져 있다. 눈에 띄기 쉬운 헌병의 수는 줄었을지언정 실질적인 경찰력은 증대되었으며, 언론의 창간을 허용하고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듯했지만 이것 역시 식민지 조선 사회의 동향을 철저히 모니터링하겠다는 의도가 반영된 조치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문화통치의 요체는 감시와 처벌을 짝패로 한 안정적 관리 기술에 있었다. 주목할 것은 극장 이 새로운 식민통치 기술의 주요한 시험대로 인식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문화통치 이후 식민지 조선에서는 사회단체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생겨났다 해도, ‘3.1운동’의 전례를 상기할 수밖에 없었던 제국은 집단을 이룬 조선인들에 알레르기적 반응을 보였다. ‘광장’을 둘러싼 정치적 상상력이 봉쇄당한 상황에서 극장은 거의 유일하게 허용되었던 종족의 회집 장소였다. 극장업은 엄연한 합법의 영역 속에 놓여 있었을 뿐 아니라, 제국은 극장이 사회적 압력에 대한 배출구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치안 유지에 유용한 기관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다만 극장에 모여든 관객들은 돌발적 사건에 의해 쉽게 자극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잠재적 위협 요인으로 치부되었다. 비록 극장에서의 소요 사태가 빈번하게 발생하지는 않았다고 해도 그 여파에 대한 추정치는 ‘3.1 운동’이라는 역사적 전거를 환기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1920년대 들어 검열 규정 들이 본격적으로 제도화되기 시작한 것은 이러한 인식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 1922년에 공포된 「흥행장급흥행취체규칙취급심득」은 공연에 대한 사전 허가가 필요하다는 점과 함께 무단 공연 시의 처벌조항도 적시했다. 이어 1923년에는 경기도 경찰부가 경성에 소재한 극장 경영자들을 불러 모아 개선사항을 주문한 바 있었다. 특히 비밀결사와 음모단이 활동하는 내용의 활극은 유해하므로 피할 것, 변사가 사전 검열 내용과 다른 풍자적 언어를 쓰지 말 것 등의 내용이 눈에 띄는 대목이었다. [1] 1926년부터 시행된 「활동사진필름검열규칙」은 일본의 법규를 소급적용한 것이 아닌 식민지 조선에서 별도로 적용된 최초의 법적 근거였다. 또한 이 규칙은 극장의 핵심 프로그램으로 급성장한 영화 를 명백한 표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필름 상영 전에 검열 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점뿐 아니라, “공안, 풍속 또는 보건상” 지장이 없어야 한다는 검열 기준을 명시하고 있었으며, 상영 시의 임검을 비롯한 현장취체 규정도 명문화되었다. 한편 「활동사진필름검열규칙」의 가장 명시적인 표적은 외화 였다고 할 수 있다. 1923년에 < 월하의 맹서 >(윤백남, 1923)가 제작된 이래 조선영화계는 본격적인 생산의 시대로 진입하기 시작했지만, 상영된 영화의 절대 다수는 서양에서 수입해 온 외화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제국은 어떤 이유로 먼 나라의 이국적 배경에서 펼쳐지는 상이한 풍속의 세계에 경계심을 드러내고 있었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식민지기 극장이 형성해 온 무성영화의 상영 관습 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식민지기 극장에서 상영된 무성영화는 자족적인 텍스트라 보기 어려웠다. 무성영화는 항상 변사와 악사를 비롯한 인간매체의 개입을 동반하고 있었기에 상영이라기보다는 연행 에 가까운 형식을 띠고 있었다. 벤야민이 기술복제 시대의 대표적 표징으로 지목했던 영화의 성격이란 적어도 식민지기 극장에서는 유효할 수 없었던 것이다. 서양발 수입 무성영화를 관람하던 당대의 관객들은 화면에 나타난 낯선 시각적 코드 와 변사를 통해 중계된 익숙한 구두적 코드 를 결합시켜야 했다. [2] 다소 복잡하게 느껴질 법한 방식이라 해도 관객들은 극장 경험을 축적해 나가며 이를 자연스러운 관습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백문임의 연구에 따르면 실제로 무성영화의 관객들은 ‘소리’를 들었다고(혹은 상상했다고) 반응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식민지 조선의 관객들 역시 외국 배우의 벙긋거리는 입술에서 모국어 발화를 연상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생각해 볼 법하다. 그리고 변사의 연행은 그러한 상상력을 강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식민지 조선의 극장에서 무성영화의 수용은 매우 혼종적이고 집단적인 실천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국적 배경에서 펼쳐지는 외국인들의 이야기, 즉 서양발 수입 무성영화의 내러티브는 ‘지금, 여기’에서 공유된 코드에 의해 토착화되고 전유 되었으며 더 나아가 종족의 정체성을 강화하기 위한 계기로 충분히 활용될 수 있었던 것이다. [3] 또한 변사의 역할은 단순히 간자막의 내용을 ‘번역’하여 전달하는 차원에 머물지 않았다. 변사의 수준이란 관객이 지참해야 할 손수건의 수로 가늠할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돌았을 만큼, 그들의 해설은 객석을 선동하여 집단적 호응을 이끌어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때때로 그 과정에서 오독에 가까운 변개가 발생하기도 했는데, 제멋대로인 해설에 대해 불만을 표출했던 관객들도 없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변사들은 스스로의 역할을 일종의 창작자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관객들의 기대와 욕망을 자극하는 해설을 통해 배우 못지않은 인기를 누릴 수 있었다. 유선영은 헐리우드 영화 < 동도(Way Down East) >(데이비드 W. 그리피스, 1920)가 식민지 조선에서 변사 해설을 동반하여 상영되는 과정에 관심을 두었으며, 특히 변사 김영환의 강조점이 영화의 클라이맥스 장면과 다소 비껴나 있다는 점에 주목한 바 있다. <동도>는 남자에게 배신당해 미혼모 신세가 된 젊은 여성이 사회의 냉대 속에서 온갖 고난을 겪지만 자신의 선한 행실을 통해 끝내 행복을 되찾게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즉, <동도>는 권선징악의 시적 정의를 구현하는 데 초점을 둔 전형적 멜로드라마라 할 수 있다. 여주인공 안나는 자신의 진실한 내면을 알아본 데이빗의 구애를 받게 되지만, 과거 그녀를 버렸던 레녹스와 다시 만나 과거사를 폭로 당했고, 데이빗의 아버지인 스콰이어는 부정한 행실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안나를 면전에서 모욕한다. 쫓겨난 안나는 눈보라 속에서 기절하고 강물에 휩쓸려 흘러가다가 폭포로 추락할 위기를 맞이하지만 뒤쫓아온 데이빗은 유빙들을 징검다리 삼아 아슬아슬하게 건너가며 극적으로 안나를 구해내게 된다. 이 장면은 <동도>의 메인 포스터 이미지로 활용될 만큼 스펙터클의 요소가 부각되는 곳이며, 내용 측면에서도 클라이맥스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김영환이 가장 ‘통쾌’한 대목으로 회고했던 것은 데이빗이 아버지 스콰이어에 대해 ‘후레질’을 하며 대드는 장면이었다. 특히 데이빗은 ‘종교, 도덕, 법률’이 부재한다는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하는데, 아버지의 ‘종교와 도덕’은 무엇이냐고 되묻는 장면이나, 안나에게는 ‘종교, 도덕, 법률’ 어느 것도 도움이 되어주지 못했다고 한탄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유선영은 이러한 반복이 다분히 변사 김영환의 강조점에 따라 취택되고 덧붙여진 장면에 가깝다고 보았다. 즉, 김영환이 느꼈던, 그리고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통쾌감’은 낡은 구질서와 도덕의 파괴, 자기혁신을 통한 개조, 정의와 인도주의에 대한 절박한 기대감, 식민지민이자 약소민족이라는 자의식이 결합한 감정이라는 것이다. [4] 변사 김영환 / <동도>(1920) 중 (사진: “ Way Down East ”, IMDb) 이처럼 변사의 해설은 서양발 수입 무성영화의 세계를 식민지의 서사로 환치하는 데 중대한 역할을 담당했으며, 관객들은 은밀한 해석의 코드를 공유하면서 전유의 독법을 체화해 나갔다. 더군다나 인간매체인 변사는 복제매체와 달리 돌발적 수행성 을 발휘할 수 있었다. 해설 대본도 사전 검열을 받아야 했지만, 무대 배우의 애드립처럼 변사 역시 현장 분위기에 맞추어 임의로 발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전 필름 검열과 별도로 임석경관을 동반한 현장취체가 필연적으로 요청되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가) 대구 만경관 활동사진 순업단이 지난 팔일 진주에 도착하여 연일 만원의 성황을 이루었는데 십일 밤 영사하는 사진, <암흑의 시(市)>에 설명 변사 김성두 군이 동 영화 중에 나타나는 주인공이 빈한한 사람을 위하야 일하다가 결국 감옥생활을 하게 되고 전기의 판결을 담임한 판사의 아들이 역시 법망에 걸리는 경로를 설명하면서 현대사회 조직이 불합리할 뿐 아니라 법률이 없어도 이상적 사회를 건설할 수 잇다는 설명 을 마치자 곧 임석경관이 검속을 시키고 다음 사진도 못하게 함 에 오백여 군중이 이유를 설명하라고 고함을 쳐 장내는 대소란을 일으켰는데 활동사진 설명까지 가혹히 취체함은 처음 일이며 진주경찰서의 근래 언론취체는 너무 가혹하다 하여 일반의 비난이 자자하다더라. (진주) -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사연구소 편, 『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1926 』, 한국영상자료원, 2014, 177쪽. - 기사, “활동사진 설명 중 – 변사 돌연 검속”, 《조선일보》, 1926. 3. 13. (나) 지난 십육일 밤에 시내 조선극장에서 다수한 격문을 살포한 사건 이 있은 이후 경찰 당국의 극장 경계는 더한층 삼엄하여져서 시내 단성사 , 조선극장 , 우미관 등의 각 극장의 입구는 말할 것도 업고 밑의 층 위층에는 두어 간통만큼씩 십수 명의 정, 사복경관이 벌려서서 철통 같은 경계를 하고 잇는데 그중에도 무대 정면에는 바로 변사 옆에 순사부장 한 사람이 걸상에 걸어 앉아서 활동사진을 영사하는 암흑한 속에서 끊임없이 관중과 눈싸움 을 하고 잇는 등 일찍이 극장에서 볼 수 없던 진기한 광경을 보이고 있다더라. -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사연구소 편, 『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1930 』, 한국영상자료원, 2019, 132쪽. - 기사, “각 극장마다 수십 경관 배치 – 변사 옆에 순사가 앉아”, 《조선일보》, 1930. 1. 19. (가)는 임석경관이 변사의 임의적 해설을 문제 삼아 흥행 자체를 중지시킨 사례에 해당한다. 대구 만경관 소속의 활동사진 순업단이 진주에서 영사회를 열었을 때, 변사 김성두는 감옥에 갇힌 주인공의 처지를 설명하면서 볼온하게 해석될 만한 해설을 덧붙였다. 현대사회의 조직이 불합리하며, 법률이 없어도 충분히 이상적 사회를 건설할 수 있으리라는 내용이었다. 물론 막연한 인도주의적 발상에 기댄 이 해설이 명시적인 불온성을 띤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전년도 5월부터 공산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 등 국사범들을 처벌하기 위한 ‘치안유지법’이 시행되어 왔음을 고려한다면, 치안 당국은 법률 무용론을 설파한 해설의 저의에 의구심을 품기 충분했을 것이다. 한편, 1929년에 일어난 원산 총파업과 광주학생항일운동은 치안 당국을 긴장시켰던 사건이었다. 이 시기 극장은, 동맹휴학 분위기가 급속도로 퍼져나가던 학교와 더불어 경찰의 일급 감시 대상으로 지목되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어두운 공간 속에 다수의 조선인이 모여들었던 극장은 격문을 살포하기에 최적의 공간이었다. (나)는 조선극장 격문 살포 사건 이후 임석경관의 감시가 매우 노골적으로 표변한 순간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임석경관을 위한 자리는 객석의 가장 뒤편, 즉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마련되어 있었다. [5] 그런데 격문 살포 사건이 발생하자, 경관들이 촘촘하게 배치되었을 뿐 아니라, 순사부장이 아예 변사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관중과 눈싸움”을 벌이는 “진기한 광경”이 연출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치안 당국의 주안점이 변사의 해설 자체보다 그것이 촉발하는 객석의 정동을 감시하고 제어하는 데 있었다는 점을 함의한다. 그러나 가시화된 임석경관의 존재는 외려 극장에 내재한 정치적 상상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을 것이다. 임석경관의 존재는 그 자체로 제국의 감시를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동시에 그와 같은 시스템이 인간의 육체를 빌려 현존하고 있었다는 점은 극장에 내재된 불온성을 끊임없이 환기시켰던 요인이었기 때문이다. 극장의 프로그램은 언제나 임석경관에 의해 중지되거나 취소될 수 있었기에, 임석경관은 극장에 모여드는 관객들로 하여금 불안을 내면화하도록 만드는 요인이었다. 다시 말해, 임석경관으로 대표되는 감시기제의 존재는 관객을 잠재적인 범죄자로 응시하면서 극장을 둘러싼 심상지리를 ‘불온한 공간’으로 스케치했으며, 관객들은 그 시선을 의식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정체성을 재구성 하게 되었으리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극장 흥행주들은 이러한 불온성을 흥행 코드로 치환 하는 데 은근한 관심을 기울여 왔다. 특히 민족의 수난 서사와 해방서사를 담아 낸 외화들은 가장 인기있는 프로그램이었다. 예컨대 1928년에 개봉되었던 <가우초>와 <이스라엘의 달>은 압제에 시달리는 약소민족의 해방서사를 그려 낸 영화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가우초>는 남미의 안데스 산맥에 터전을 둔 유목민 ‘가우초’의 영웅담을 조명한 작품으로, 그들의 수령인 주인공은 신전을 지나다가 우연히 만난 신관의 딸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이후 신전의 보물을 노린 도적들이 쳐들어오고 열세에 처한 주인공은 위기를 맞이하지만, “신출귀몰한 책략”을 발휘하여 끝내 신전을 지켜낸다는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다. [6] <십계>의 ‘자매편’이라 소개되었던 <이스라엘의 달>은 성경의 ‘출애굽기’에 나타난 유대 민족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삼아 허구를 가미한 작품이다. 노예로 전락한 이스라엘 민족은 이집트로 끌려가 가혹한 노역에 시달려 왔다. 그들을 동정해 왔던 이집트 왕자 세티는 ‘이스라엘의 달’이란 별칭을 가진 메라피와 만나게 된 후, 이스라엘 민족을 고향으로 돌려보내기 위한 투쟁에 동참한다. 신문에 게재된 감상평은 동포의 자유를 위해 “어여ᄲᅳᆫ 청춘”을 바친 메라피의 희생을 ‘잔 다르크’에 비견하고 있으며, 신의 저주를 받아 비참하게 죽게 된 이집트 왕의 최후를 “확연한 인과의 결실”이라 규정한 바 있다. [7] <가우초>, <이스라엘의 달> 포스터 이듬해 식민지 조선에서 개봉한 < 벤허 >(프레드 니브로, 1925)는 유대민족의 수난사가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의 현실을 환기하는 계기로 활용될 수 있음을 보다 분명하게 보여준 사례였다. 극장 운영자와 실무자들은 서양영화를 경유하여 민족의식을 자극하는 것이 ‘관객몰이’에 유리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다만, 영화가 극장에 내걸리기 위해서는 먼저 필름 검열을 통과해야 했다. 단성사 영업부장으로 재직하며 <벤허> 검열 과정에 참여한 이구영 의 ‘무용담’은 흥행 실무자의 예민한 감각과 더불어 당대 검열행정의 공백도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이구영) 영화검열을 이거 통과해나가면, 대본을 보니까 이거 암만해도 위태로워요, 내가. 거기 몇 마디 다이알로그가 이건 아주 불온 천만한 얘기란 말이에요, 저 노예선이..., 거 지중핸가 거기 나가지 않습니까? 거기에 전부 철사로 묶이고 거기에 이제 그..., 이... 저...? (면담자) 북? (이구영) 네, 북을 울리면서 리듬 맞춰가지고 노를 젓지 않습니까? 거기에 소위 선장이라고나 할까? 그게 나왔어. 나와서 채찍으로 갈기는 겝니다. 막! 덜 움직인다고... 그래 반항하는 거야. 이쪽에서. 그 주인공의 이름이 마리오스인가요? 반항하는 거야. 직접 대고. 그 선장이 얘기를 하는 겁니다. 이렇게 저어서 한 시간씩 늦으면 어떻게 되겠느냐. 빨리 배를 저으란 말이야. 그 때 반항하는 거야. 그래서 대사 하나가 나옵니다. 너의 한 시간은 말이야, 우리 유태 민족의 백 년이단 말이야. 우리 민족의 백년한을 알겠느냔 말이야. 그 대사가 하나 탁 튀어나옵니다. 이것이 하나 유일하게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겝니다. 이것이 통과되야만, 되면 이거 아주 히트란 말이에요, 영화는... 그런데 검열관은, 소위 성격을 내가 파악하고 있었어요. 오까라고 하는 검열관한테 이것이 가는 날에는 틀림없이 전부 가위질 다 당해서 아마 한 200피트 이상은 없어질 겝니다. 그 화면 전체를 막 끊고, 그런데 다행히 내가 거기 급사로 있던 사람에게 물었어요. 이 대본이 어떤 사람의 손으로 가는 걸 알아다오. 그래 나중에 전화를 걸으니깐드루 요시다란 사람의 손으로 갔다, 길전(吉田)이한테... 됐단 말이야. 그럼 내가 성격을 아니깐 이거 꼭 내가 방법론을 써야 되겄다. 이제 검열실에 올라갔어요. 영화 돌아가는데..., 그 사람이 소위 하이꾸라고 해서 그 배구(俳句)를 좀 할 줄 압니다. (면담자) 네, 하이꾸? (이구영) 네, 그게 경무 월간지가 있어요. 《경무월보》라고... 그걸 내가 찾아냈어요, 일부러, 그래서 고 문구를 외고..., 그런데 그 사람이 아주 줄담배입니다. 줄담배, 소위 아사히라고 하는 것을 밤낮, 이놈을 입에다 종일 물고 있는 거에요. 그런데 눈이 좀, 시력이 이상해서 아주 그냥 안경을 굉장한 걸 썼습니다. 도수가 깊은 것, 그래서 이제 고 화면이 한 5분이면 벌써 나타나기 쉬운 방면까지 왔어요, 벌써. 그래 내가 화면 보면서 대본 읽으면서 얘기하면서 이거 볼 거 아닙니까? 그러면은 그때는 그 배구에 대한 것, “당신 참 배구 참 멋지다 말이지. 이런 문구, 암만 생각해도 이건 정말 걸작인데, 이런 걸 왜 문단에 발표하지 않고 이런 데다 이렇게 내슈?” 막 칭찬하구 말이야. “당신, 자꾸 쓰슈, 자꾸 이런 글을. 이래야지, 우리도 좀 보지. 당신이 나 이런 걸 쓰는지 몰랐단 말이야. 오까~ 같으면 이런 걸 안 쓴단 말이야. 당신이니까 썼지.” 그렇게 하니까 칭찬해서 누가 싫다는 사람 어디 있겠어요? ‘아, 그러냐?구,’ “그래 평판이 대단하단 말이야, 요시다상, 이거 정말 문학에도 이렇게 조예가 있고 검열관으로 있기에는 참 아깝다”고 그런 얘기를 하니까, ‘아! 그렇냐’고 말이야. 그래 그러는데 그 화면이 지나가요. (면담자) 네, 그걸 지키기 위해... (이구영) 내 아주 잊질 않죠, 이제. 그 지나갔어요. 지나가서 얘기 딱 끊고, 뭐 참, 얘기가 너무 길었단 말이야. 그러고 영화 보는 게죠. 그러니까 지나갔죠. 그러니까 이제 노컷으로다가 무제한 도장 콱콱 내줬어요. 내가 춤을 추고 혼자 나오는데,(웃음) - 한국예술연구소 편, 『한국영화사를 위한 증언록 – 김성춘, 복혜숙, 이구영 편』, 소도, 2003, 283~284쪽. <벤허> 중 (사진: “ Ben-Hur A Tale of the Christ ”, IMDb) <벤허>는 유태인들이 로마 제국의 식민 지배하에 놓여 있던 시대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주인공 벤허는 귀족 집안 출신의 자제이며, 체제에 반항하는 동족들을 밀고하라는 로마인 친구의 부탁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모함을 받아 노예로 전락한 인물이다. 이구영이 주목했던 것은 벤허를 비롯한 유태인들이 노예선 위에서 학대 받는 장면이었다. 채찍질하는 노예선의 선장에게 맞서 “우리 민족의 백년한”을 부르짖었던 대사가 “히트”를 예감케 했던 것이다. 문제는 이구영이 보기에도 반항기가 농후했던 이 대사가 온전히 검열을 통과할 리 만무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이구영은 ‘꼼수’를 동원한다. 어떤 검열관이 배정되었는지를 사전에 파악하고, 필름 검열 당시 문제의 장면이 지나갈 때 관심을 돌릴 요량으로 그의 ‘하이쿠(일본 정형시의 일종)’ 실력을 일부러 추켜세웠다는 것이다. 결국 “노컷으로다가 무제한 도장”을 받아 낸 이구영은 희희낙락하며 검열실을 나올 수 있었다. 당연히 <벤허>가 상영되었을 때, 이 대사는 문제를 일으켰고 즉각 임석경관의 중지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벤허>는 필름 검열을 통과한 작품이었던 데다가 변사가 설명대본에 없는 대사를 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검열 당국은 당혹스러워 할 수밖에 없었다. 이구영이 회고한 뒷이야기에 따르면 검열관들 사이에 다툼까지 일어날 정도로 큰 난리가 벌어졌지만, 결과적으로 <벤허>는 계속 상영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연장상영까지 진행할 정도로 큰 인기를 얻게 되었다. 검열 역시 사람의 손으로 수행하는 작업인 이상 빈틈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고, 이구영은 그 허점을 절묘하게 파고들었던 셈이다. 물론 이러한 사례는 극히 예외적이었며, 극장의 핵심 프로그램이 발성영화로 전환된 1930년대 이후부터는 더더욱 기대하기 어려운 요행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발성영화는 별도의 소리 연행자를 둘 필요 없이 그 자체로 완결된 텍스트였기에 필름 검열만으로도 불온한 장면들을 걸러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발성영화의 사운드와 충돌할 때가 잦았던 변사의 목소리는 영화 감상을 방해하는 원인으로 지목되었고, ‘재래의 취향’으로 낙인찍히며 점차 주변화되었다. 이는 곧 식민지 조선의 극장에서 돌발적 수행성이 발휘될 여지(餘地)가 급격히 좁아져 간다는 점을 의미했다. *** [1] 기사, “활동사진 개선의 요점 - 비밀결사나 모험뎍 활동사진은 조선 사람에게 보이는 것을 금지”. 《조선일보》, 1923. 4. 11. [2] 유선영, 「초기 영화의 문화적 수용과 관객성 : 근대적 시각문화의 변조와 재배치」, 『언론과 사회』 12, 사단법인 언론과 사회, 2004. [3] 백문임, 「식민지 극장의 무성영화 관람성」, 『한국언어문화』 38, 한국언어문화학회, 2009. [4] 이러한 전유의 구조를 적용해 본다면, 안나는 피억압 약소민족으로 치환되며, 레녹스는 거짓과 위선으로 식민지를 강제 병합한 제국 일본으로, 스콰이어는 종교와 도덕을 말하면서도 침략자인 일본을 지지하거나 방조하는 서구 강대국들로, 데이빗은 약소민족을 대변하기 위해 아버지에 대항하고 더 나아가 약자를 구원하기 위해 죽음을 마다하지 않는 조력자이자 인도와 정의를 구현하는 선인으로 전치될 수 있을 것이다. (유선영, 「식민지의 할리우드 멜로드라마, <동도>의 전복적 전유와 징후적 영화경험」, 『미디어, 젠더 & 문화』 26, 한국여성커뮤니케이션학회, 2013.) [5] 광주극장은 1930년대에 건축되어 오늘날까지 명맥을 이어온 극장이다. 광주극장은 ‘임검석’의 위치도 보존해 놓았는데, 객석의 가장 뒤편인 출입구 바로 옆에 임석경관을 위한 자리가 별도로 마련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6] 기사, “신영화 - 『더글라스』의 가우초”, 《조선일보》, 1928. 2. 15. [7] 기사, “내가 본 이스라엘의 月”(一), 《동아일보》, 1928. 2. 10. 이광욱(극장문화사 연구자) l 읽고 생각하며, 말하고 글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다. 과거의 기록을 뒤적이고 오늘의 사람들과 소통하며 함께 미래를 고민한다. 건국대학교 글로컬캠퍼스 조교수(동화 한국어문화학과), 한국영상자료원 객원연구원(『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시리즈). 『드라마, 일상성의 미학』(2024) 공저, 「카프 연극대중화론의 전개와 송영 풍자극의 매체미학」(2018), 「도달한 임계점과 보존된 미래 – 발성영화의 정착과 경성 소재 조선인 극장의 연쇄 반응」(2021), 「표류하는 조선영화 : <임자 업는 나루배>에서 <정춘삼>으로 – 최초의 영화 판권 소송과 식민지 조선영화 시장의 추이」(2022) 집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