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엔딩
- 감독
- 황수빈
- 제작년도
- 2019
- 출연
- 김선재, 공태현, 신동력, 옥주리
“당신이라면 이래도 살겠어요?” 이것은 남편을 잃고 어린 아들과 남편 고향에 살러 왔다가 아들마저 유괴로 잃는 여자의 이야기, < 밀양 >( 이창동 , 2007)의 카피 문구였다. 수난이 많았던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우리는 종종 이 질문과 마주친다. 그리고 이 질문을 가지고 한국영화사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 이 생명 다하도록 >( 신상옥 , 1960)을 만나게 된다. ‘이 생명 다하도록’이라는 제목 자체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고도 할 수 있다. 1960년에 개봉한 영화 <이 생명 다하도록>은 한운사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이 소설은 한운사의 첫 장편소설이었는데 ‘방송소설’이라는 이름으로 라디오에서 낭독되면서 유명해졌다. 한국전쟁 이후 라디오가 가장 대중적인 매체로 부상하면서 방송드라마가 큰 인기를 끌었다. <청실홍실>로 시작된 라디오 드라마 붐은 방송극 원작의 영화화를 견인했고 이러한 현상은 1960년대 한국영화 붐에 촉매 역할을 했다. 그 중 하나가 한운사의 <이 생명 다하도록>이었다. 이 소설은 박격포탄 파편에 맞아 하반신이 마비되고 전란을 거치며 두 딸마저 잃은 김기인 대령의 실화를 바탕으로 했는데, 김 대령을 간호하며 그 옆을 지킨 부인의 일기 형식으로 되어 있다. 한국전쟁으로 과부만 30여만 명이 발생했음에도 여성들이 목소리를 낼 통로가 없던 상황에서 과부나 진배없는 기구한 여성 화자의 고백은 대중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일기의 고백체는 라디오에서 낭송되기에도 적합한 것이었다. ‘방송소설’의 인기 덕에 이 이야기는 영화화가 결정되었고, 개봉 시기에 맞춰 단행본으로 출간되었으며 1) , 한운사는 인기 방송작가로, 신상옥 감독은 신필름 시대로 나아가는 발판이 되었다. 이 영화는 “이 한편의 영화를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생명을 바친 모든 전몰장병과 상이용사, 그리고 그 유가족 앞에 삼가 바친다.”는 헌사로 시작한다. 시작부터 전후 재건의 이념과 논리를 강력하게 보여주는 셈이다. 그리고 바로 1949년 태백산 토벌 작전 중에 김 대위( 김진규 )가 치명적인 부상을 당하는 장면이 제시된다. 둘째 아이를 출산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내 ‘선경 엄마’ (최은희 )는 의사에게 남편의 목숨만이라도 살려 달라 애원한다. 담당의사가 ‘그나마 생명이라도 살리는 것이 인도적이냐, 그냥 죽이는 것이 인도적이냐?’고 고민하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영화는 김 대위가 성기능을 상실했고 이로 인해 부부의 삶이 위태로울 것임을 말해준다. 이후 영화는 부부 갈등을 축으로 하는 멜로드라마로 전개되는데 한국전쟁은 그 갈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장애인 남편과 슬하에 두 아이를 둔 주부로서의 삶만으로도 고달픈데 전쟁이 일어나자 선경 엄마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하는 것은 물론 적치를 피해 군인 남편을 피난시키고 그에게 삶의 동기도 부여해야 하는 사명까지 감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영화는 부부 갈등을 넘어 전후 재건의 문제로 확장되며 1950년대 말의 현실에 보다 적극적으로 연루된다. 그래서 이 영화는 동시기에 많이 나왔던 과부를 주인공으로 하는 멜로드라마의 계보에 놓이면서도 다른 영화들보다 ‘정치적’ 색채를 강하게 띤다. 120회에 걸쳐 낭독되었던 소설이 109분의 영화로 만들어지는 데 따른 축약과 변용은 이 영화가 지닌 정치성의 좌표를 드러낸다. 소설은 일기 형식이므로 시간 순에 따라 전개되면서도 수도육군병원 시대, 서울대학부속병원시대, 천호동시대, 남한산성시대, 서울 수복, 대구 피난시대, 부산 피난시대, 환도 이후로 공간 별로 나뉘어 서술된다. 따라서 원작은 한국전쟁 발발 이전부터 한국전쟁의 전개, 그리고 전후 복구의 과정을 소상하게 들려주며 한국전쟁에 대한 르포르타주의 성격을 지닌다. 영화에서는 ‘수도육군병원―피난지 부산―환도’로 압축되며, 사건 또한 삭제되거나 축약되는데 그러면서 멜로드라마로서의 애정 갈등에 초점이 놓인다. 삭제되거나 축약된 부분이 주로 전쟁의 실상에 대한 세부적인 목격담이나 현실 비판이라면, 확장과 변용이 가장 많이 이루어지는 부분은 선경 엄마와 미스터 조의 인연이다. 원작에서 선경 엄마가 미스터 조를 만나는 것은 대구 국제시장이고, 부산에서는 ‘양부인’이 된 여고 동창을 만난다. 대구 피난시대는 전체 분량의 9분의 1에 불과하다. 그리고 자살하면서 선영 엄마에게 유산을 남기고 가는 것은 부산에서 만난 동창이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미스터 조를 부산 국제시장에서 만나고, 그와의 우정이 부부관계의 핵심 장애가 된다. 그러면서 미스터 조의 여동생 영선이 ‘양부인’인 것으로 변용된다. 원작에서는 미스터 조와의 인연과 양부인의 자살은 별개의 사건이므로 상관이 없는 것과 달라지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영화에서 영선이 자살하는 데에 오빠인 미스터 조( 남궁원 )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영선( 정성숙 )은 여관방에서 선경을 돌보아주던 친절한 여성으로 오빠를 만나기 전까지 씩씩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죽은 줄 알았던 오빠를 만나고 그가 양부인이 되었다고 비난하자 자살하고 만다. 그녀는 유서에서 “살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떳떳할 줄 알았는데, 오빠를 보고나서 ‘똑바로’ 보게 되었다.”라며, “뒷골목에서 ‘떳떳이’ 살지 못할 운명”이기에 죽는다고 이유를 밝힌다. ‘똑바로’, ‘떳떳이’라는 부사는 오빠라는 존재 자체가 요구하는 기준이다. 가부장적 규범을 따르자면 부모가 없는 상황에서 오빠는 여동생을 지킬 의무가 있었지만 전쟁은 그것을 불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살아남기 위해 타락한 여동생은 ‘썩어빠진 변명’이라는 오빠의 비난 앞에서 모든 책임을 자신이 온전히 질 수밖에 없다. 미스터 조 남매의 행동은 무력이 전면화되는 전쟁을 겪으며 전통적인 가부장적 윤리는 무너졌음에도 오히려 그 규범은 강하게 요구되고 결과적으로 그 수행의 책임은 여성에게 돌려지는 부조리를 보여준다. 이는 현모양처의 도리로서 ‘남성 능력을 잃은 남편’을 지키기 위해 공적인 영역에 끌려나오고 사회적 노동까지 전담해야 하는 선경 엄마의 모순된 처지와도 겹친다. 더 문제적인 것은 결국 영선이 죽으면서 남긴 돈으로 김 대위는 전쟁과부를 위한 시설을 운영하게 됨으로써 재기한다는 점이다. 영선의 죽음은 < 쌀 >(1963)에서 오빠(신영균)의 사업을 위해 여동생 영란이 술집 여자가 되었지만 사업이 완수된 이후에 슬그머니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나, 상이군인(남궁원)은 5.16을 통해 복귀하는 데 반해 첫 장면에서 그를 타일렀던 술집 여자들은 서사에서 사라지는 것과도 같다. < 로맨스그레이 >(1963)에서 바걸인 만자(최은희)와 보영(조미령)이 근대화의 역군인 젊은이(신영균)를 위해 부산행 기차를 타고 떠나야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2) 그러나 죽거나 떠나야했던 여성들과 달리 선경 엄마는 상이군인 남편에게 꼭 필요한 존재이므로 ‘성생활’을 포기하고 남편을 선택함으로써 환도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전쟁으로 인해 남성 인력은 부족해졌으나 재건은 꼭 해야 하는 전후 상황에서 여성에게 요구되었던 헌신의 이념과 논리를 잘 보여준다. 이 영화는 1959년에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1960년 7월에 개봉하였다. 이 기간은 민주화에 대한 시민의 요구가 폭발했던 4.19를 가로지른다. 그런데 이 영화는 5.16 이후의 경제 근대화에 보다 어울리는 이념과 논리를 담고 있다. 그리고 방송소설에 이어서 이 영화 또한 크게 흥행했다는 것은 그러한 이념과 논리의 지향점이 대중의 기대지평과 조응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렇게 볼 때 이 영화는 1960년대의 역사적 전개에 대한 징후로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이것이 이 영화에서 처음 드러난 것은 아니다. 신상옥 영화가 1958년 < 어느 여대생의 고백 > 이후 < 악야 >(1952)나 < 지옥화 >(1958) 유의 전위적인 경향에서 벗어나 전후 재건과 경제 근대화에 필요한 계몽 논리를 멜로드라마에 녹여내어 감성적으로 설득하는 노선을 선택하고 그것이 연이어 대중적 성공을 거두면서 이미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와 같이 시대적 요청을 선취했기에 신상옥 감독은 < 상록수 >(1961), <쌀>(1963)로 이어지는 영화를 먼저 만들 수 있었고 1960년대 내내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하다. 1) 한운사, 『이 생명 다하도록』, 삼한출판사, 1960.6. 2) 박유희, 『한국영화 표상의 지도』, 책과함께, 2019, p.35. >> 이 생명 다하도록 VOD 보러가기 <<
① 군산좌(群山座), 군산극장(群山劇場) 군산좌는 군산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이다. 군산부 노정(蘆町)에 있었으며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는다. 1914년 무렵부터 신문지상에서 이름이 발견되는데 1926년 당시 군산좌의 좌주는 시마다(島田元三郞)였다. 그는 낡고 오래된 극장을 개축하려 시도하던 중 실패하였고 1929년 극장은 폐쇄된다. 이 무렵 군산 유지 미츠토미(光富嘉八) 등이 합자회사를 조직하여 극장을 개복동으로 옮겨 짓고 이름을 군산극장이라 지었다. 1932년 8월 군산극장은 채무 문제로 경매에 붙여졌고, 마쓰오(松尾仁平)가 낙찰 받아 운영하기 시작했다. 이후 군산극장은 조선인 상설관으로 활용되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마쓰오(松尾仁平)이며 객석수는 610석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② 희소관(喜笑館) 군산부 개복정에 있었던 활동사진관이다. 언제 설립되었는지 알 수 없다. 1924년 무렵부터 신문지상에서 그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가와카미(河上榮)이며 지배인은 히로노(博野登四郞)였으나 화재를 당해 폐관 상태였다. 해방 직전 다시 개관한 것으로 보인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③ 전주좌(全州座), 전주극장(全州劇場), 제국관(帝國館) 전주 지역의 오래된 극장으로 1910년대 초반 설립된 것으로 보인다. 1918년 무렵엔 이미 시설이 낙후해서 폐쇄된 상태로 새로운 극장 신축을 위한 조합이 조직되어 극장을 건설 중에 있었다. 전주부 대정정에 새로 건설된 극장의 이름은 전주극장으로 정해졌다. 전주극장에서는 각종 공연과 활동사진을 상영했다. 1934년 초등생도음악회 이후 제국관으로 이름을 바꾼 듯 보인다. 1943년 당시 흥행주는 마츠나카 시게루(松永茂), 지배인은 마츠나카 키요시(松永潔)였으며 객석은 760석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④ 이리좌(裡里座) 이리읍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이다. 1914년 4월 개관했다. 1928년 2월 극장에서 발생한 화재로 소실되었다. 당시 좌주는 가토(加藤方)이었다. 같은 해 7월 말 재건되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미무라(三村德太郞)이며 좌석수는 450석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⑤ 김제좌(金堤座) 김제읍 본정에 있었다. 언제 건립되었는지 알려지지 않는다. 1932년 10월 25일 김제에서 화재가 발생했을 때 극장에서 구경을 하던 사람들이 밖으로 뛰쳐나오면서 아수라장이 펼쳐진 사건이 있었다. 또한 1934년 8월 삼남수해활동사진이 이곳에서 상영되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곽용훈(郭鎔勳)이며 객석수는 300석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⑥ 소화극장(昭和劇場) 전북 부안군 부안읍에 있었다. 언제 건립되었는지 알려지지 않는다. 1937년 이곳에서 황군위문학예회가 열린 것으로 보아 이 무렵 설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김광평(창씨명 金本光平)이고 지배인은 우에다(植田英二)였다. 객석수는 305석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⑦ 남원극장(南原劇場), 보국관(報國館) 남원극장은 1931년 4월 낙성한 극장이다. 적은 비용으로 건립되었기에 시설과 설비가 좋지 못했다. 1936년 당시 관주인 최두일이 4천 8백원을 투입하여 수리하였다. 1940년대 들어 이름을 보국관이라 바꾸었고, 해방 후 다시 남원극장으로 개칭하였다. 1943년 당시 흥행주는 쿠니사다(國定豊)였으며 객석수는 428석이었다. ⑧ 추산좌(秋山座) 정읍군 정읍읍에 있었다.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1922년부터 신문지상에서 이름이 발견된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박명규, 지배인은 아라이(新井純二郞)였다. 좌석수는 355석이었다. 다음은 전라남도지역이다. ⑨ 광주좌(光州座) 광주 최초의 극장으로 광주읍 황금정에 있었다. 1918년 이곳에서 집회를 개최한 기록이 남아 있다. 다양한 집회와 연극, 영화 상영이 펼쳐졌던 이곳은 1931년 11월 8일 발생한 화재로 전소된다. 당시 관주는 후지가와(藤川)였다. 이후 재건되지 못했다. ⑩ 광남관(光南館), 제국관(帝國館) 광남관은 1927년 설립된 일본인 위주의 활동사진관이다. 조선인 활동사진관이 없었기에 광남관의 전속 영사기사 조명덕(趙明德)은 1927년 연말에 이 곳에서 조선인들을 위한 시민위안영화대회를 열었다. 그는 영사기사, 악사, 변사로 구성된 광주영화삼우회(光州映畵三友會)를 조직하기도 했다. 1930년에 그 이름을 제국관(帝國館)으로 바꾸었으며 다양한 집회장소와 흥행장으로 사용되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구로세(黑瀨豊藏), 지배인은 미에(彌榮正己)였으며 좌석수는 750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⑪ 광주극장(光州劇場) 호남 갑부 최선진 외 4명의 사람들이 자본금 30만원 불입금 7만 5천원의 주식회사 광주극장을 조직하여 세운 영화관이다. 광주부 본정에 위치했으며 1935년 10월 1일 개관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최선진이며 지배인은 미야가와(宮川昌信)였다. 객석은 1,050석의 대극장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⑫ 상반좌(常盤座), 목포극장(木浦劇場) 상반좌는 목포의 가장 오래된 극장이다.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다. 1914년 2월 고토 료스케 일좌(後藤良介一座)의 공연과 1916년 5월 어대례활동사진배관회(御大禮活動寫眞拜觀會)가 이곳에서 있었다. 이와 같은 각종 행사를 비롯해 형설회나 토월회 같은 조선인 흥행단의 공연도 이곳에서 펼쳐졌다. 1926년 11월 활동사진관으로 전환하며 이름을 목포극장으로 바꾸었다. 김성두, 이상근과 같은 조선인 변사를 두고 있었으며 미국 유니버설회사와 특약을 맺고 있었다. 1934년 김원희(金源喜)가 인수하였으며 이후 2만 3천원의 예산으로 대개축을 하였다. 1936년 대대적인 수리가 끝났고 이후 목포극장은 광주극장과 더불어 호남을 대표하는 영화관으로 자리하게 된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기무라(木村巴茂)였으며 78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⑬ 희락관(喜樂館), 평화관(平和館) 희락관은 목포의 활동사진관으로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1921년 통영청년회활동사진대일행이 이곳에서 영화를 상영한 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목포의 유일한 활동사진상설관이던 희락관은 1926년 소실되었다. 희락관이 사라진 후 1927년 8월 새롭게 영화관이 신축된다. 새로운 영화관의 이름은 평화관이었다. 쇼치쿠 영화 중심의 흥행장으로 목포부 무안통에 있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모리모토(森本政治郞), 지배인은 모리모토(森本淸)이며 객석수는 513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⑭ 여수극장(麗水劇場) 여수에 극장을 지으려는 시도는 1925년부터 있었다. 부사옥구락부(富士屋俱樂部)와 영좌(榮座)라는 극장이 있었으나 가설극장 수준이었다. 제대로 된 상설관의 건립은 1930년 시작된다. 여수의 일본인 니로(新納寅太郞)가 극장 여수좌(麗水座)의 건립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상설 극장이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1939년 1월부터 여수극장이 신문지상에 보도되기 시작한다. 1943년 현재 여수극장의 흥행주는 나카무라(中村克己)이며 37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⑮ 순천구락부(順天俱樂部), 순천극장(順天劇場) 1933년 1월 조선신문에 실린 순천구락부의 새해 광고에 극장 순천구락부의 이름이 등장한다. 마사무네(正宗義智), 키자키(木崎義男), 무라카미(村上義一), 타케우치(武內罷) 등의 이름이 병기되어 있다. 1937년 7월 13일에는 순천극장이 개관한다. 순천 거주 일본인들의 발기로 3만원을 들여 극장을 지은 것이다. 순천극장의 건립과 함께 순천구락부는 사라진 듯 보인다. 1943년 현재 순천극장의 흥행주는 마사무네(正宗義智)이다. 순천극장은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⑯ 송정리극장(松汀里劇場) 전남 광산군 송정읍에 있었다. 누가 언제 건립했는지는 알려지지 않는다. 1943년 현재 광주극장 운영자 최선진이 운영하고 있었다. 객석 수는 407석이었다. 해방 이후에도 존속했다. ⑰ 창심관(暢心館), 조일구락부(朝日俱樂部) 제주도에 가장 먼저 만들어진 극장은 창심관(暢心館)이다.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1935년 1월 23일 영화 상영 중 화재가 발생해 전소되었다. 이어서 만들어진 극장이 조일구락부(朝日俱樂部)이다. 1940년경에 개관했다고 알려져 있다. 제주도 제주읍에 있던 극장으로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니무라(二村守彦)이며 30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후 제주극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자료] 《조선중앙일보》, 1935.09.28. 광주극장 개관, 十월 一일부터 【광주】 조선에서 제일을 자랑할 만한 광주극장(光州劇場)은 당지 갑부 최선진(崔善鎭)씨 외 四명의 주식회사로서 총건축비 八만여원이란 거액을 들여 약 一년간을 두고 건축 중이든 바 근근 준공을 보게 되여 오는 十월 一일 부(府) 승격을 기념하기 위하여 당일부터 개관을 하게 만단 준비 중이라 한다. [자료] 《매일신보》, 1935.10.04. 광주극장 준공, 一일에 개관 【광주】 기공 중이든 광주극장은 이에 준공을 마치엇슴으로 十월 一일부터 개관하고 동일(同日)은 관계자 수백명을 초대하야 개관의 피로공연이 잇섯든 바, 동 극장은 천이백명의 관람자를 수용할 수 잇는 당당한 철근 『콩크리-트』 二층 건물로 본정 五정목의 한 위관(偉觀)을 이루고 잇는데 그 총 공비 七만 五천원의 거비(巨費)를 투(投)하야 무대는 회전식 八간(間)의 대규모의 것으로 사장은 최선진(崔善鎭)씨 취체역에 유연상(劉演相) 조규림(趙圭林)의 양씨, 감사역에는 김희성(金喜誠)씨가 취임하기로 되엇다. [자료] 《매일신보》, 1931.04.27. 신축 중의 남원극장, 낙성식 거행 【전주】 작추(昨秋) 이래 신축공사를 급진(急進)하야 오든 전북 남원극장은 이 사이 겨우 준공됨을 ᄯᅡ 라 지난 二十일 오후 七시부터 당지 소방조(消防組) 주최로 성대히 낙성식을 거행하얏는데 당일 관람객은 남녀 수천여명에 달하야 장외 장내는 입추의 여지도 업시 대혼잡을 극(極)하야 남원 유사 이래 초유(初有)의 성황을 정(呈)하얏다 한다. [자료] 《매일신보》, 1932.03.09. 군산에 우복(又復) 대화(大火), 극장 등 삼동(三棟) 전소(全燒), 七일 새벽 군산좌에서 발화, 손해는 약 三만원 【군산】 화신(火神)의 작란인지? 지난 三일에 군산 영정(榮町)에서 손해액 二만 二천원의 손실을 보는 큰 화재가 이러남은 본보가 솔선하야 보도한 바이어니와 지난 七일 새벽 一시 四십분 군산부 노정(盧町) 군산좌(群山座)(그전 극장)에서 불이 이러나자 ᄯᅢ 맛침 맹렬한 바람은 소방대의 출동도 못 밋처 부근은 큰 불바다가 되야 여섯 채의 집을 전소하고 세 채의 집을 반소하얏스며 전신주 한 개를 반소하야 손해액은 三만 천원에 달한 큰 화재인바 금년으로 二三일을 격하야 발행한 대화이니만큼 그 원인을 조사 중인바 군산좌주 도전원삼랑(島田元三郞)은 극장으로 쓰든 군산좌의 집을 오래동안 묵혀 비어둔 것으로써 일전에야 화재보험액 一만원을 가입한 관게와 그 집에서 불이 난 것을 미루어 색안경으로써 보게 되는 의혹이 불무하야 방금 군산경찰은 엄중히 조사 중이라 하며 소실된 가옥은 군산좌(群山座)와 동해루(東海樓)라는 중국료리점과 그에 린접한 집 一동 세 집과, 반소로는 주다야여관(ジタヤ)과 서천(西川) 모의 주택과 송미세탁소(松尾洗濯所)라고 한다. (사진은 화재현장 광경) [자료] 《매일신보》, 1913.05.01. 소인연예회(素人演藝會) 별항(別項)과 여(如)히 당지 소방조합에서는 소방용으로 정호(井戶) 16개소를 부내 적의(適宜)의 처(處)에 굴반(掘鎜)하기로 결정한 바 우(右)의 비용은 六白원을 요(要)할터인즉 차(此)를 충(充)하기 위하야 소인연예회를 개(開)하고 기(其) 수익으로 기부한 사(事)로 안무(安武)관리자 급(及) 의원 기타 유력자의 찬조를 득(得)하야 금회 인가를 득하야 래(來) 五월 二일부터 四일 ᄭᅡ 지 三일간 전주좌에셔 개최한다더라 [자료] 《동아일보》, 1928.11.12. 극장개관기념식 목포부 죽동(竹洞)에 잇는 목포극장은 목포의 유일한 오락기관으로 유관오(柳官五)씨가 경영하여 오는 바 지난 八일은 동관의 二주년 개관 기념일임으로 이를 축하하기 위하야 최저요금으로 명화를 영사하얏는데 입장자는 무려 六白명의 대성황을 정(呈)하얏스며 관람자에게 시상 추첨이 잇섯다는데 一등 一인에 금완권(金腕卷) 시계 一개, 二등 二인 은배(銀盃) 각 一개식, 三등 五인 수건 각 이타식(二打式) 주엇다더라. 【목포】
고전영화와 현대영화를 가르는 기준은 육체다. 아아. 저 한마디 뱉는 순간 벌써부터 무수한 항변과 반론들이 들려온다. 기실 땅바닥만 찍지 않는 이상(헤어조그가 그런 적이 있었다고 재반론하고 싶지만 참는다) 육체를 찍지 않는 영화는 100년 동안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육체의 범위를 문자 그대로(“corpus”) ‘물체’로 조금만 확장하면 카메라를 들이대는 순간 모든 피사체가 이미 육체다. 심지어 카메라도 육체이고, 그걸 찍고 보는 작가도 관객도 죄다 육체다. 하지만 고전적 육체와 현대적 육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물론 그들 모두가 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이미지의 변화를 표현하는 주인행세를 함에는 어떤 차이도 없겠지만 말이다. 고전적 육체는 정신의 담지자로서 먼저 나타난다. 고전적 육체는 정신적 가치보다 더 앞설 수 없다는 의미다. 물론 드레이어와 베리만의 영화에도 육체가 있다. 하지만 그들이 하얗게 지워져서 지금이라도 얼른 복원되어야 할 정신의 심도보다 먼저이진 않다. 그저 정신이 심도를 복원할 때까지 느릿느릿 움직여주고, 그에 필요한 말씀(<오데트>)을 전달해주면 그만이다. 고전육체는 정신의 수단인 셈이다. 반면 현대적 육체는 (신을 잃어버려서 그런지) 비틀거리고 넘어질 때 나타난다. 즉 진짜 육체는 피 흘리고 다칠 수 있는 육체다. 진짜 육체는 죽을 수 있는 힘으로 정의된다. 팔다리만 있다고 육체가 아니다. 팔다리가 떨어져 나갈 수 있어야, 그에 비명 지르고 펄쩍 뛸 수 있어야 진짜 육체다. 프레이밍에 의해 가려져 있던 잔 다르크의 가멸력을 화형대로 옮겨놓은 브레송은, 그런 의미에서 현대적 육체에 한 걸음 더 다가갔다고 말할 수 있다. 정신의 심도? 뜨거워 죽겠는데 무슨 심도 타령일까. 온몸의 신경이 화염에 불타오를 때 심도보단 비명이 먼저다. 요컨대 고전적 육체가 불멸의 정신적 가치(정의ㆍ믿음...)를 위한 수단에 불과할 때, 현대적 육체는 소멸의 물질적 가치를 위한 수단이자 목적이 된다. 누구 말을 빌리면, 진짜 육체는 가멸성의 “순수수단”이다. 표표히 사라지는 서부극 인물 죽을 수 있는 육체만이 진짜 육체라고 한다면, 고전 서부극엔 육체가 없다. 아무리 역마차의 속도가 빨라 봤자 그 종착지는 아메리카의 정의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셰인과 링코 키드는 죽지 않는다. 그저 표표히 사라질 뿐(물론 죽은 거나 진배없다는 추가해석이 가능하지만). 더욱 결정적인 사례는 종교영화들의 경우다. 종교적 상황들을 다루었던 고전시대극들에서 육체는 바리새인이나 유대인 할 것 없이 모두 휘황찬란한 의상들로 가려져 있다. 드밀과 와일러의 영화에서 육체보다 색깔이 먼저인 이유는 다시 색깔이 정신의 심도를 방해하거나 도와주는 역할을 맡기 때문이다. 로마제국의 테크니컬러 총천연색에 모세의 남루한 넝마주이 패션이 극한의 대조를 이룰 때, 우리의 영혼은 더더욱 가열차게 기도 모드에 돌입할 수 있음이다. 즉 고전종교영화에서 의상은 정신의 척도만을 내어주지, 육체의 척도를 내어주지 않는다. 심지어 로마 군인들이 바닷물에 휩쓸려 죽는 것마저도 그나마 파도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건 육체가 죽었단 사실이 아니라, 로마제국과 그의 폭정이 죽었단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가장 육체의 출현을 방해하던 고전적 문법은 클로즈업이라고 할 수 있다. 얼굴 한 방이면 세계의 모든 것이 거기서 표현되고 있었다. 베리만은 이걸 한껏 즐겼다. 클로즈업은 육체의 죽을 수 있는 능력을 영혼의 가속도로 대체한다. <잠입자Stalker> (1972) 반대의 상황들로 가보자. 웨스턴을 지나 네오웨스턴으로 가보면, 거기엔 육체가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육체가 있어도 너무 육체만 있다. 정의감이나 신념 따위는 개나 줘버리고 금 한 덩이 차지하기 위해서 동물적 본능만 남은 네오웨스턴의 육체들은 가히 ‘사막의 좀비들’이라 할 수 있다. 페킨파의 < 와일드 번치 >에 한 총잡이는 기관총 드립에 사망하여 널부러진 한 시체에서 금니를 캐내려고 한다. 이것은 모세의 정신적 넝마주이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동물적 넝마주이다. 심지어 페킨파는 육체의 가멸성이 충분히 강조되지 않을까 슬로우모션으로 죽는 순간을 찍어댔고, 많은 평론가들에게 상욕을 들었다. 페킨파의 슬로우모션은 클로즈업이 표현하던 영혼의 가속도와 대비되는, 영혼이 육체를 떠나는 가속도다. 헐. 현대의 신학영화는 그렇지 않을 거야! 여전히 신학은 정신이다, 육체가 아니라! 라고 울부짖는 그대에게 일독을 권장하는 영화는 타르콥스키의 영화다. 비록 그가 인터뷰에서 열심히 “영성”과 “희생”에 대해서 말하지만, 정작 그의 이미지들을 보라. 거기엔 안개와 유황 가스를 뒤집어쓰고 어쩔 줄 몰라하는 육체, 자신의 존재를 잊을까 봐 초원 위에 마치 비디오데크가 고장 난 것처럼 일시 정지된 상태로 몇 분이고 서 있는 육체, 무엇보다도 공중부양하는 육체가 있다. 이른 결론으로 건너뛰자면, 정신성의 회복을 위해 타르콥스키에게 먼저 고양되어야 할 것은 영혼이 아니라 육체인 것이다(물론 이건 인간의 육체만은 아니다). 그런 이유에서 타르콥스키는 클로즈업을 마뜩잖아 했다. 클로즈업이 보고 싶나? 말씀을 쏟아내던 입이 삭제된 뒤통수 클로즈업이나 봐라(< 스토커 >). 현대적 육체는 클로즈업을 경멸한다. 얼굴은 죽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몇몇 예외가 있다. 얼굴들을 겁나게 이어 붙여서 줄줄이 비엔나로 엮어낸 후 맥놀이 하듯 겁나게 흔들면 다시 육체가 나타난다. 이것이 카사베티스의 경우이고 그의 독특성이었다. 천의 얼굴은 하나의 육체와 맞먹는 셈이다(<얼굴들>). 오발탄 (1961) “가자...가자..” 요컨대 고전영화와 현대영화를 가르는 기준은 ‘고통’이다. 고통이 없는 모든 영화를 고전적이라고, 고통이 있는 모든 영화를 현대적이라고도 부를 수도 있을 터다. 현대 신학영화는 이 기준의 반대급부이기는커녕, 이 기준을 가장 먼저 밀고 나갔던 고통의 첨병들이었다. 유현목 의 영화들이 타르콥스키보다 이른 현대적 신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거기엔 고통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천근만근의 짐짝”에 짓눌릴 때의 압사의 통각이고, “가자...가자..”의 환청에 고막이 찢어지는 통각이다(< 오발탄 >). 아무리 클로즈업과 의상으로 가려봐도 이 고통의 파동은 사라지지 않는다. 얼굴 안에 충치는 하나쯤 박혀있기 마련이고, 파동은 육체의 신경과 힘줄에 직접 작용하기 때문이다. < 막차로 온 손님들 >에서 도마질 소리에서 괘종시계 소리로의 이행을 들어보라. 모세가 듣는 신의 목소리는 노래방 마이크에서와 같은 에코라도 걸려 있었다. 그러나 유현목의 세계는 노래방이 아니다. 십계현판이라는 마이크도 없는데 울려 퍼지기 때문이다. 그 마이크는 내 뇌 속에, 내 신경 속에 이미 있다. 이건 거의 고막의 화형식이다. 너는 죽는다. 육체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이에 대한 통각 없이 아무것도 아니다. 신은 압력이 되었다(타르콥스키는 “시압time-pressure”이라 불렀던 그것). 이것이 유현목이 진정 말하고자 하는 바다. < 순교자 >에서 신부를 휘어 감는 문제는 신이 있냐 없냐가 아니었다. 그건 신은 없는데, 어떻게 십자가가 있느냔 것이다. 저기에 우뚝 서서 이 폐허를 압박하고 있는 파동의 중심으로서의 십자가가. 이 모든 측면들이 유현목을 한국최초의 육체적 작가로 만든다. 유현목이 영화는 “체험”이라고 강조함을 잊지 않았다. 말 그대로 몸의 경험인 것이다. 고통으로만 존재하는 신념의 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