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범
- 감독
- 고정욱
- 제작년도
- 2018
- 출연
- 송새벽, 유선, 장혁진, 오민석, 정해균, 한수연, 정희태, 우미화, 신현탁, 장영, 윤송아, 전현숙, 박미리, 김필, 심혜연, 김귀선, 최정원, 김현지, 장혜진, 김성혜, 김상두, 마민희, 이다희, 김민지, 이경오, 이준헌, 오동현, 권현수, 최현준, 양예나, 박건준, 강소윤, 송하린
사진: 창비 박사학위논문 제출 기한이 약 1년 정도밖에 남지 않은 시점, 나는 여전히 명확한 주제조차 잡지 못하고 있었다. 무엇을 쓸 것인가,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질문으로 매일 전전긍긍하면서 시간을 흘려보내던 때였다. 남은 시간을 꾸준히 쓰기만 해도 눈사태처럼 쌓여 있는 백지를 채우기에는 준비해둔 것이 턱없이 부족했지만, 마음속엔 무언가 가득했다. 그것은 대학원 시절 내내 또는 사회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이래로 계속 누적되었던 불만과 환멸, 분노와 냉소 같은 것이었다. 십여 년 동안 대학원의 골방에 묵으며 쌓인 이런 정념이 내가 가진 유일한, 하지만 결코 사소하지 않은 자원이라고 주문처럼 되뇌면서 대학에 들어온 이래로 보고 겪어온 장면들을 수없이 복기하곤 했다. 나의 대학 시절은 참여정부의 탈권위주의적인 기조와 더불어 월드컵 이후의 희망과 자신감,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입 등 변화에 대한 기대와 전망 속에 펼쳐졌다. 사회 전반의 자유주의적인 분위기 속에서 학생운동 역시 아직은 일정한 공간을 점유하고 있었고, 그 덕분에 페미니즘, 장애인권, 신자유주의 비판 등 여러 진보적인 담론들이 비교적 자유롭게 유통되었다. 물론 이와 같은 ‘열린 사회’의 환상을 깨는 사건도 많았다. 이라크 파병과 노동자들의 죽음, 대학의 기업화, 한미 FTA 등. 주변에는 한나라당만큼이나 노무현을 싫어하는 이들도 많았다. 그리고, 이명박이 당선되던 날의 그 우울함을 기억한다. 숭례문 화재와 명박산성, 용산참사와 쌍용차, 노무현의 죽음, 4대강 사업과 천안함 의혹 등으로 점철된 5년. 그리고 이어서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이 되었다. 세월호 참사를 보면서는 이미 무너진 사회가 물에 잠기는 듯한 절망감이 들었다. 그런 이명박근혜 시대를 기어이 우리 손으로 끝내던 그때 그 광장에서 우리는 얼마나 오랜만에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를 품었었는지. 그런데 드넓은 광장에 촛불이 물결처럼 넘실대던 그 ‘스펙터클’ 이후 한국사회는 과연 얼마나 더 좋은 사회가 되었는가? 민주주의를 지켜냈다고 자부하는 이들은 어떤 사회를 만들어냈는가? 민주주의를 회복하고 지켜낸 공(功, merit)을 가져간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그들의 자녀는 어떻게 대학에 가고 어떻게 변호사나 의사가 되는가? 그들은 여성 비서에게 무슨 짓을 하는가? 이토록 ‘민주적인’ 사회에서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이 매일 같이 죽어가는 일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구의역 김군과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은 왜 죽었는가? 왜 동성애는 (심지어 ‘민주’당 대선 후보에 의해서도) 반대되는가? 왜 장애인은 아직도 버스와 지하철을 타기 위해 싸워야 하는가? 과연 한국의 민주주의는 누구의 것이고 누구를 위한 것인가? 민주주의의 ‘민’에 속하는 이들은 누구이고 속하지 못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한국 민주주의에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민주주의가 이대로여서는 안 되지 않는가? 이 책은 이러한 질문들을 학문의 언어로 던지려는 시도였다. 이러한 시도를 가능케 한 것은 하나의 은유였다. 역사는 극(劇, drama)이라는 것. 가깝게는 지난 2024년 12월 하룻밤 사이에 계엄 선포와 해제가 휩쓸고 지나갔을 때도 국내외 언론에서는 K-드라마와 같은 일이 벌어졌다고 했지만, 그 이전부터도 한국 현대사에는 드라마와 영화로 만들어질 법한, 그리고 이미 만들어져 관객들로부터 감동을 자아내는 사건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리고 우리의 민주주의가 영화 같은 역사, 드라마틱한 역사를 겪으며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은 한국인들이 전 세계에 대해 가지는 자부심 중 하나가 되지 않았는가. 나는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가 한 편의 드라마라는 이 은유를 단순한 수사로서가 아니라 진지한 발판으로 삼았다. 만일 역사가 극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영화와 드라마가 그러하듯 비평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한국 민주주의라는 극은 좋은 극인가? 우리는 지금까지 그러했듯 앞으로도 이런 극을 보며 감동해도 좋은가? 계속해서 이런 드라마를 만들어내며 자랑스러워해도 되는가? (상) <오! 꿈의 나라>, <명성, 그 6일의 기록> 중 / (하) <꽃잎> 중 / © 이은, 푸른영상, ㈜미라신엔터테인먼트 이에 답하기 위해서 나는 먼저 한국 민주주의라는 영화 혹은 드라마가 어떤 장면들로 이루어져 있는지 살펴봤다. 역사라는 극을 구상하는 작가로서 우리는 민주주의에 대해 어떤 장면을 기억하고 기대하는지, 그리고 극에 참여하여 연기하는 배우로서 우리가 어떤 장면을 상연해왔는지 살펴봤다. 1980년대를 한국 민주주의의 가까운 기원으로 설정하고, 이 시기에 생산되었거나 이 시기를 다루고 있는 영화, 사진, 소설, 시, 그림, 노래, 수기 등을 되는대로 수집하여 보고 읽고 들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아카이브 와 5․18기념재단 사진아카이브 를 매일 들락거렸고, 대학 도서관과 국회도서관, 유튜브, 한국영상자료원의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등을 뒤져서 < 오! 꿈의 나라 >(이은, 장동홍, 장윤현, 1989)나 < 꽃잎 >(장선우, 1996), < 명성, 그 6일의 기록 >(김동원, 1997) 등을 보았다. 임철우, 공선옥, 김영현, 공지영, 권여선 등의 소설을 읽었고, 각종 도록과 온라인 갤러리에서 오윤, 신학철, 홍성담, 강요배, 임옥상 등의 민중미술 작품을 찾아서 보았다. 1980년대의 여러 일간지를 교차하여 훑어보고 나무위키까지도 활용하면서 각종 사건을 연도별·월별로 숙지했고, 사건의 장소를 지도와 영상에서 찾아보거나 직접 가보기도 했다. 길을 오갈 때는 꽃다지부터 안치환, 윤선애, 이성지, 그리고 김민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온갖 민중가요를 들었다. 인용을 위해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2017)나 『소년이 온다』(2014)를 다시 들춰볼 때면 책을 덮지 못하고 계속해서 읽어나가기 일쑤였고 영락없이 눈물을 쏟곤 했다. 낮에는 이제 막 백일이 지난 아이를 돌보며 그 생명력에 감격하다가 아이들이 모두 잠든 밤에는 광주항쟁 희생자들의 훼손된 주검 사진을 보며 이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이처럼 다양한 작품들을 섭렵하는 일은 연구를 위해 각종 표와 숫자로 이루어진 자료(data) 속에 파묻히는 작업과는 달랐다. 그것은 연구이기 이전에 한국에서 사회학을 하기 위해 알아야 하는 역사적 교양을 뒤늦게 습득하는 과정이기도 했고, 나보다 앞서 세상을 겪으며 살아온 이들이 보고 느끼고 생각한 바를 나 역시 보고 느끼고 생각하면서 그로부터 또다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문화적 과정에 동참하는 것이었다. 간혹 주변에서 나의 근황을 물을 때면 나는 소설도 읽고 영화도 본다면서 ‘문화생활’을 하고 있다고 가볍게 답하곤 했지만, 그것은 “세계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를 지닌”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의미의 망(webs of significance)”에 동참한다는, 진지한 의미에서의 문화생활이었다. [1]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나는 1980년대를 살았던 사람들, 나아가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신념처럼 간직하며 살아가는 이들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들이 보았거나 기억하는 장면들, 그리고 내가 본 다양한 자료의 페이지마다, 이어지는 다음 장면마다 등장하는 것은 어떤 몸의 이미지였다. 그것은 때로는 곤봉과 개머리판에 맞아 터지고 덜렁거리는 몸, 벌벌 떨며 밀실의 욕조나 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몸, 해체되고 허물어진 채 부패해가는 몸이었고, 때로는 뒷사람에 밀려 앞으로 앞으로 넘실대며 나아가는 몸, 주변의 건물을 울림통 삼아 웅장한 구호와 노래를 뿜어내는 인파의 거대한 몸집이었다. 그리고 이런 몸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모습이 있었다. 이런 몸의 이미지를 보는 나의 몸 역시 차분할 수 없었다. 숨을 고르며 한숨을 내쉬고, 눈물을 흘리고, 가슴이 두근거리고, 무언가 벅차오르기도 했다. 한국 민주주의라는 영화는 온몸으로 감상할 수밖에 없는 영화였다. 하지만 나는 이런 영화를 계속 이어나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한국 민주주의는 너무나도 감동적인 드라마이지만, 이 극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삶은 과연 살만한 것이었는가? 누군가는 말한다. “인생은 생각할수록 아름답고 역사는 앞으로 발전한다.”(김대중, 2009년 1월 7일 일기) 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이렇게 반문한다. 사진: 네이버 영화 “너 정말 삶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냐? 네가 일기에 그렇게 썼대? 삶은 아름다운 거라고. 너 정말 그렇게 생각해?” - < 박하사탕 >(이창동, 1999) 중 김영호( 설경구 ) 한국 민주주의가 성취되는 과정에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었다. 몸과 마음에 회복될 수 없는 흔적을 가진 이들이 부지기수이며, 가족과 친구를 잃은 사람도 허다하다. 누군가는 자신의 목숨을 잃었다. 한국 민주주의는 찬란한 역사였지만, 그 속에서 살아온 이들의 삶 역시 축복이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자랑스러워도 이런 민주주의를 계속할 순 없을 것이다. 마냥 자랑스러워하기만 해서도 안 될 것이다. 물론 무대에서의 죽음을 목격하고서 객석을 박차고 나가 민주주의를 지켜낸 경험을 가지고 있는 민주주의의 ‘주역’들에게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는 대단한 감동을 주는 자랑스러운 영화임에 틀림없다. 이들은 영화 < 1987 >(장준환, 2017)에서 “그런다고 세상이 달라져요?” 하고 냉소하던 연희( 김태리 )가 선배 이한열( 강동원 )의 죽음을 보고 회심하여 광장으로 달려나가면서 민주주의라는 극의 국면 역시 결정적으로 전환되었음을 현실에서 경험한 이들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민주주의라는 극에 배우로서 참여하지도 않았고, 객석에서 이러한 극을 보며 감격하지도 않았던, 민주주의의 극장 밖에서 살아온 이들도 있다. 민주주의의 주역들이 민주화된 사회를 향유하는 동안에도 여전히 고된 삶을 살아온 이들에게 민주주의란 낯선 것이었고 남의 것이었다. 이들의 동등한 시민적 권리를 보장하지 않거나 부정하기까지 했던 자들이 ‘우리는 모두 민주주의의 주인공 아니냐’며 함께 무대로 올라가 민주주의를 위기에서 구하자고 호소한다면 극장 밖에선 아마 이런 목소리가 들려올지 모른다. <1987>, <극장전> 중 / 사진: 네이버 영화 , ㈜영화제작전원사 “영화를 정말 잘못 보신 것 같아요. 자긴 이제 재미 봤죠? 그럼 이제 그만, 뚝!” - < 극장전 >(홍상수, 2005) 중 영실( 엄지원 ) 모두의 민주주의가 아니라면 그런 민주주의를 계속해나갈 수도, 그것을 민주주의라고 부를 수도 없을 것이다. 한국 민주주의라는 극의 작가이자 배우로서 우리는 죽음-결집의 레퍼토리와 함께 몸과 마음이 쪼개졌다가 커지기를 반복했다. 스펙터클로 점철된 이러한 영화가 주는 극적 쾌감이 대단하긴 하지만 이러한 역사를 우리 삶의 보금자리로 삼을 수는 없을 것이다. 덜 자랑스럽고 덜 극적이더라도 모두가 평등하고 평안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민주주의를 희망하며 만들어 볼 수는 없을까? 내란과 탄핵을 겪으며 우리는 민주주의의 위기와 수호의 이력을 다시 한 줄 추가하게 되었다. 그런데 혹시 우리는 이 최근의 역사를 완전무장 하고서 국회로 쳐들어온 계엄군이나 맨몸으로 장갑차를 막은 시민들이라는 스펙터클로만 기억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 겨울 광장에서 시민들은 소수자와의 연대, 성평등, 노동 있는 민주주의, 평화와 안전, 기억과 애도 등을 외쳤다. [2] 이러한 목소리가 더 크게 들리고 거기에 힘이 보태진다면, 크고 대단한 장면을 내세우지 않더라도 한국의 민주주의는 모두가 아끼는 삶의 터전이 될 것이다. 다른 민주주의를 향한 변화에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기를 바라며 이 책을 썼다. *** [1] 막스 베버, 「사회과학적 및 사회정책적 인식의 “객관성”」, 『문화과학 및 사회과학의 논리와 방법론』, 김덕영 옮김, 길, 2021, 293쪽; 클리퍼드 기어츠, 『문화의 해석』, 문옥표 옮김, 까치, 1998, 13쪽. [2] 유현미․김이선․김정환․박상은․장진범, 「광장에서 만난 세계: 윤석열 퇴진 집회 시민발언문 분석」, 『경제와 사회』 146. Behind the Book : 저자에게 아직 남아있는 이야기 한 사람의 질문이 늘어나고 깊어진 끝에 수백 쪽이 되어, 세상 밖으로 나오기까지. 마침내 책 한 권으로 독자에게 닿은 저자가, 치열하고도 가치 있던 여정을 들려줍니다. 김정환(사회학자) l 문화사회학, 사회이론을 전공 분야로 삼고 있다. 『연구자의 탄생』(2022, 공저), 『마스크가 말해주는 것들』(2020, 공저) 등의 책을 썼으며, 『신자유주의적 상상』(2026, 공역), 『사회론』(2015) 등의 책을 옮겼다. 사회학의 이론과 방법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다양한 문화 현상의 해석을 통해 한국 모더니티의 전개와 변화를 탐구하는 작업을 수행하고자 한다.
* 글 내용 중에 < 마더 >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봉준호 감독의 데뷔작 < 플란다스의 개 >는 이후 그의 영화를 관통하는 키워드를 제공한다. ‘개 도둑’을 쫓던 현남( 배두나 )은 드디어 범인을 잡을 절호의 기회를 포착한다. 범인을 쫓아 전력 질주하던 현남이 다다른 장소는 막다른 옥상. 그녀는 결국 범인을 놓친다. 해결사를 자처한 인물이 출구 없는 막다른 곳으로 내몰리는 과정. < 살인의 추억 >(2003) < 괴물 >(2006)을 거쳐 < 마더 >(2009)에 이르기까지, 봉준호 감독 영화는 결국 이 한 줄로 정리할 수 있다. <마더> 역시 해결사가 주인공이다. 지적능력이 부족한 아들 도준( 원빈 )이 살인사건 용의자로 체포되자, 어머니( 김혜자 )가 아들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직접 진범을 잡겠다고 나선다. 만약 봉준호 감독의 전작을 본 관객이라면, <마더>가 속 시원히 진범을 토해내지 않을 것임을 안다. 그의 영화에선 단 한 번도 해결사들이 문제의 본질과 맞닥뜨려 승리한 적이 없다. 인물들은 항상 패배한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관객을 바라다본다. 마치 그 이유를 우리에게 묻는 것처럼. <마더>는 아예 첫 장면부터 ‘패배’를 드러낸다. 엄마가 풀이 일렁이는 들판 한 가운데로 천천히 걸어 들어온다. 그리고 조금씩 몸을 움직인다. 그녀의 움직임은 영화 음악과 맞물리면서, 마치 괴이한 ‘춤’처럼 보인다. 그녀의 이 몸짓은 스크린 너머에 있을 관객을 향하는 듯하지만, 실상 그녀는 아무 곳도 보고 있지 않다. 특히 웃는 듯 우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던 그녀가 제 손등으로 눈을 가리는 장면으로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처럼, 시선의 단절은 곧 그 장소가 봉준호 감독 영화에서 익히 봐 온 ‘막다른 곳’ 즉 패배의 장소임을 암시한다. 따라서 이후 < 마더 >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모두 그녀가 ‘패배의 장소’로 되돌아오기 위한 과정이다. 엄마는 작은 마을에서 홀로 약재상을 운영하며 지적능력이 떨어지는 아들 도준을 키우며 산다. 어느 날, 마을에 살인사건이 벌어진다. 누군가 여고생을 살해하고 그 시신을 마을 어귀 폐가 옥상에 전시하듯 널어두었다. 사건 현장에서 도준의 이름이 쓰인 골프공이 발견되고, 도준은 유력한 용의자가 된다. 엄마는 이것이 누명이라고 믿는다. <마더>는 “내 아들이 안 그랬다”고 믿는 엄마가 사건의 진실에 한 걸음씩 다가가는 과정을 그린다. 영화 중반까지만 해도 엄마의 목표는 ‘진범을 찾아내는 것’이다. 결국 그녀는 목표를 이룬다. 진범을 찾기까지 영화는 범죄 스릴러 장르의 관습을 충실히 이행한다. 매 장면 숨 막히는 긴장감이 이어진다. 하지만 엄마가 목표를 이루는 순간, 그녀는 철저하게 패배한다. 그제야 <마더>의 몽환적인 오프닝은 무자비한 현실이었음이 드러나고, 영화는 범죄 스릴러의 포장을 벗어 던지고 진짜 하고자싶었던 이야기를 시작한다. < 마더 >에서 ‘아정 살인사건’은 완벽한 맥거핀이다. 진범의 존재는 중요치 않다. 대신 봉준호 감독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죄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똬리를 틀고 앉은 ‘현실’의 지옥도다. 그의 전작에서도 현실은 부조리의 집합체로 묘사된다. 하지만 <마더>의 세상은 부조리를 넘어 ‘알고 보니’ 원죄의 도가니다. ‘알고 보니’ 생활고에 찌든 어미는 어린 아들을 살해하려했고, 그 때문에 아들은 ‘바보’가 됐다. ‘알고 보니’ 아들은 ‘바보’라 불린 탓에, 소녀는 아들을 ‘바보’라고 부른 탓에 살해당했다. ‘알고 보니’ 소녀의 죽음에 분노하던 친척들은 어린 혈육의 생활고를 방치했고, 소녀는 먹고 살기 위해 쌀 한 줌에 몸을 팔았다. ‘알고 보니’ 엄마에게 살해당한 노인은 소녀의 몸을 산 일당 중 하나였다. 마지막으로 아들은 엄마의 살인을 ‘알고 있었’다. 봉준호 감독은 구치소에 갇힌 도준의 입을 통해 일찌감치 이러한 ‘죄의 꼬리 물기’를 언급한다. “죄가 몇 바퀴 돌아서 나한테 돌아오는 거야.” 유일하게 이 고리에서 자유로운 인물은 도준의 죄를 뒤집어 쓴 장애인 동팔 뿐이다. “엄마 없어?”라는 질문으로 자신의 죄를 자문하는 도준의 엄마에게 “울지 마라”고 위로하는 유일한 인물이지만, 그 역시 구원자가 될 수 없다. 죄의 꼬리 물기가 동팔을 거점으로 일단락되는 이유를 그가 아정을 순수하게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긴 힘들다. 그런 ‘순수’에 희망을 걸기에 <마더>의 세상은 너무 무자비하다. 그보다는 동팔이 ‘죄의 먹이 사슬’ 최하층부에 존재하는 피해자라고 보는 게 맞다. 동팔은 죄를 떠넘기거나 자진해서 덮어 쓸 대상을 찾지 못한 것뿐이다. 결국 <마더>의 세상엔 ‘희망’ 따윈 없다. 전작과 비교하자면 봉준호 감독의 세계는 더 없이 비관적이고, 인물들은 무자비하고 무기력해졌다. 그는 부조리한 현실 속에 다양한 인간 군상을 풀어 놓고, 그들이 넘어졌다 일어나고, 다시 넘어졌다가 일어나는 과정을 관찰해왔다. 현실의 부조리는 해소되지 않았지만, 인물들은 최소한 내일로 삶을 이어갈 이유 한 가지씩을 찾았다. 조금 호들갑떨자면 ‘희망’이라 부를 무언가를 남겨 두었다. 하지만 < 마더 >에선 그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원죄의 세상에서 무기력한 인간이 기댈 곳은 오로지 ‘망각’ 뿐이다. 마지막 장면, 모든 죄를 짊어진 어미가 ‘망각의 침자리’에 침을 놓고 막춤 추는 ‘어미의 무리’ 속으로 숨어드는 장면은 극도로 아름다워서 지극히 절망적이다. 무기력한 인간들이 모여 사는 절망적인 세상을 이토록 아름답게 그려낸 봉준호 감독의 차기작은 글로벌 프로젝트 < 설국열차 >다. 이번엔 아예 세상의 종말과 마주한다. 기상 이변으로 지구는 멸망 위기에 처하고, 가까스로 살아남은 사람들이 남쪽으로 향하는 ‘설국열차’에 탑승하면서 열차는 작은 ‘지구촌’이 된다. 공간은 좁고, 식량은 줄어든다. 완벽한 절망 앞에 내쳐진 인간의 본성이 낱낱이 드러날 일만 남았다. 상상만으로도 등골에 소름이 오도독 돋는다. 매번 진화에 진화를 거듭해 온 봉준호 감독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그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