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나랑 진실게임 할래요?
- 감독
- 박한진
- 제작년도
- 2019
- 출연
- 윤상이, 성화연, 권리, 이응민
일단 < 클로즈 유어 아이즈 >(빅토르 에리세, 2023)를 골랐다. 이 영화와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 룸 넥스트 도어 >(2024) 사이에서 몇 초 망설였는데 그래도 빅토르 에리세의 신작을 넣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에리세의 영화를 내 리스트에 넣을 기회가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올까. 어떤 때는 이 정도만으로 충분한 이유가 된다. 스페인 영화가 한 편 더 있다. 파블로 베르헤르의 < 로봇 드림 >(2023)인데, 아직 쌍둥이 빌딩이 건재했던 1980년대 뉴욕을 기가 막히게 재현한 애니메이션이다. 거기에 절절한 로봇과 개가 주인공인 멜로드라마를 넣어서. 오로지 애니메이션을 통해서만 가능한 마법이다. 애니메이션 영화가 한 편 더 있다. 오시야마 키요타카의 < 룩백 >(2024)이다. 창작과 창작자에 대해 깊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려주는 짧지만 강렬하고 아름다운 예술가 영화다. 예술가 영화도 두 편이 더 있다. 하나는 위에 언급한 <클로즈 유어 아이즈>. 다른 하나는 모나 아샤쉐의 < 리틀 걸 블루 >(2023)로, 감독의 어머니와 할머니를 다룬 다큐멘터리다. 여러분이 프랑스어권 유성애자 여성작가의 피학적인 오토 픽션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무언가라고 생각한다면 이 영화를 멀리하시기 바란다. 하지만 그런다면 여러분은 마리옹 코티아르가 펼친 최고의 명연 하나를 놓치게 된다. 다큐멘터리가 아니냐고? 그렇긴 한데 그와 상관없이 감독은 코티아르에게 자기 어머니 역을 시키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해가 간다. 모녀 이야기는 <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 >(조지 밀러, 2024)의 도입부를 여는 중요한 드라마이기도 하다. 이 영화가 꼭 필요한 무언가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조지 밀러, 2015)가 그랬던 것처럼 끝내주게 재미있는 액션물이고, 이 영화의 실망스러운 흥행성적은 관객들이 뭘 모를 때가 많다는 흔한 진리를 다시 한 번 알려준다. 하긴 관객들은 개봉 당시 존 카펜터의 < 괴물 >(1982)도 대충 넘겼다. 그냥 그렇다고. 로즈 글래스의 < 러브 라이즈 블리딩 >(2023)도 만만치 않게 재미있는 필름 누아르로, 몸과 섹스와 퀴어성에 대해 정말 신나고 뻔뻔스러운 장면들을 엮어대는 오락물이다. 아, 그리고 재미 이야기가 계속 나와서 하는 말인데, 션 베이커의 < 아노라 >(2024)와 모함마드 라술로프의 < 신성한 나무의 씨앗 >(2024)이 주는 재미는 특별한 구석이 있다. 성노동자가 연결된 계급 이야기를 진지하게 다룬 인디 영화와 마흐사 아미니 시위를 다룬 사회파 이란 영화가 이렇게 갑자기 대중적으로 (심지어 거의 고전 할리우드스럽게) 재미있어지면 관객들은 당황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당황스러움과는 별도로 재미있는 영화들이 주는 즐거움을 주제의 무게나 구질구질함을 두려워하며 버릴 필요는 없다. 한국영화를 두 편 골랐다. 더 고를 수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사방에 종말론적 예언이 나팔처럼 울려퍼지고 있었지만 올해 한국영화를 보는 경험은 여러모로 즐거웠다. 그런 경험을 제공해준 영화가 주류영화가 아니었을 뿐이다. 올해 특히 재미있었던 것은 퀴어, 특히 여성 퀴어 영화들의 공습으로, 어떤 때는 네 편의 영화가 동시에 극장에 걸려 다들 어리둥절해 하기도 했다. 당사자성 넘치는 사실주의극인 < 럭키, 아파트 >(강유가람, 2024)부터 올해 가장 뻔뻔스러운 길티 플레저인 < 히든 페이스 >(김대우, 2024)까지 다양하기도 했다. 세상이 바뀌는 걸 느낄 수 있는데, 그 때문에 드라마 < 정년이 >(2024)의 비겁함이 더 짜증난다. 오정민 의 < 장손 >(2023)은 거의 임권택 과 이두용 의 직통이라고 할 수 있는 영화이다. 이러면 당연히 올드하고 지루하게 느껴질 텐데, 아니다. 이 영화도 ‘재미있다.’ 거의 1세기에 가까운 한반도의 역사를 가족사에 녹여낸 재주, 대한민국 가부장제에 대한 냉정한 고찰만큼이나 신기한 건 이런 주제로 신선한 재미를 끌어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 리스트에 오른 영화 열 편 중 아홉 편은 호오도를 떠나 대중적으로 매우 재미있다. 마지막으로 고른 영화가 남궁선 의 < 힘을 낼 시간 >(2024)이다. 이 영화는 두 가지 이유로 내 관심을 끌었다. 하나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열다섯 번째 인권영화 프로젝트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케이팝 아이돌에 대한 영화라는 것이다. 수없이 이야기하는 거 같은데, ‘메시지를 전하고 싶으면 전보를 쳐라’라는 옛 할리우드의 격언에 동의하지 않는다. 대놓고 뻔뻔스럽게 교훈과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재미있고 훌륭한 영화들은 많다. 전보로 전달한 텍스트의 다발과, 주제에 공감하는 작가와 감독, 배우들이 결합한 결과물의 차이는 엄청나다. 당연히 ’공익영화’는 비하 단어가 될 수 없다. 다른 모든 영화가 그렇듯 좋은 공익영화와 나쁜 공익영화 그리고 그 사이에 걸쳐진 광대한 스펙트럼이 있을 뿐이다. 그렇게 보았을 때 <힘을 낼 시간>은 여러모로 일단 효율적인 공익영화다. 그리 길다고 할 수 없는 러닝타임 안에서, 선정적인 실제 사건의 구체적인 재현 없이 한국 연예계의 문제점들을 이렇게 효과적으로 정리해서 보여주는 영화가 얼마나 되는가. 이것만 해도 엄청난 성취인데, <힘을 낼 시간>은 이 모든 정보와 메시지를 다 담고 있는 동시에 여전히 매력적이다. 공익영화로서의 기능은 영화의 매력에 어떤 핸디캡도 되지 않는다. 그건 그냥 자연스러운 일부이다. 이 영화의 다음 성취에 대해 이야기해보기로 하자. 지금까지 케이팝이라는 장르에 봉사하는 사람들에 대한 영상물을 만들려는 시도는 많았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초창기의 시도는 김기영 (동명이인이다)의 < 진실게임 >(2000)이다. 아마 더 이전 작품도 있을 거고 사실 여기서 정확한 경계선을 찾는 건 불가능한 일인데, 그래도 20년은 더 됐다. 하지만 성공작이 뭐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다들 주저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가장 먼저 떠오른 작품들은 < 내일부터 우리는 >(윤성호, 2017), < 아이돌 권한대행 >(윤성호, 박현진, 2017), <탑 매니지먼트>(2022)로 이어지는 윤성호 의 시리즈들이다. 만드는 사람들의 아이돌 문화에 대한 애정과 지식이 개성적인 유머 속에서 조화를 이룬 작품들인데 이 작품들이 아이돌 스토리텔링의 주류가 된 적은 없다. 아쉽게도. 나머지는 대부분 성공보다는 실패로 기억된다. 그 중 가장 처참한 실패는 아무래도 드라마 <청춘시대 2>(2017)였던 거 같은데. 일단 이 시리즈는 왜 아이돌 이야기를 왜 굳이 거기서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건 여러모로 최악의 오타쿠적 선택이었다. <힘을 낼 시간>은 소위 ’망돌‘이라는 소재를 공유하는 것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면에서 <청춘시대 2>와 반대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장점이다. 일단 영화는 왜 이 영화가 ‘망돌들’의 이야기를 하는지에 대한 아주 명쾌하고 당연한 이유를 갖고 있다. 주인공이니까. 정확히 말하면 세 주인공 중 망돌은 ‘파이브 갓 차일드‘라는 남자 아이돌 그룹 멤버였던 태희( 현우석 )뿐이다. 여자 아이돌 그룹 ‘러브앤리즈’의 멤버 수민( 최성은 )과 사랑(하서윤)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제법 히트한 노래도 한 편 이상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노래보다는 이 팀에서 일어난 끔찍한 사건을 더 먼저 떠올리고 제대로 정산을 못 받고 은퇴한 건 태희와 다를 게 없다. 하여간 이 셋은 전재산 98만원을 챙겨들고 제주도 여행을 오는데, 그만 첫날에 한 명이 사고를 내 돈 대부분을 날려버린다. 이 정도면 너무 어이가 없어 슬슬 웃음이 나오는 가학적인 블랙 코미디를 기대해 볼 만도 한 상황이다. 이 영화의 감독이 얼마 전에 < 십개월의 미래 >(2020)를 만든 남궁선이라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영화는 보다 평화롭고 진지한 길을 간다. 세 사람은 귤 따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벌고 자기들을 알아보는 케이팝 팬도 만난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힐링’이라는 단어를 빼고 설명을 할 수가 없다. 따분하게 들린다면 미안하지만, <힘을 낼 시간>은 정말로 처음부터 끝까지 치유의 과정에 대한 영화이고 여기에 진지하다. 이 영화에서 치유라는 단어는 결코 가볍게 쓰이지 않는다. <힘을 낼 시간>의 가장 큰 장점은 ‘좋은 의미로’ 머글스럽다는 것이다. 이 영화엔 다른 케이팝 아이돌 관련 작품들에서 쉽게 발견되는 징그러움이 느껴지지 않는다. 영화는 케이팝 아이돌의 친숙한 이미지를 따르고 그걸 페티시적으로 활용하는 대신 부당한 노동 조건 속에서 시달리다 버려진 젊은 노동자들을 그린다. 이 영화가 정공 공익영화로 기능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렇게 쓰면 무지 재미없게 들리는데,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 리스트에 오른 영화들은 대부분 대중적 재미가 풍부한 작품이다. 그건 일단 이 진지함의 정공법이 드라마에서 제대로 작동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 영화엔 더 흥미로운 점이 있는데, 오타쿠적인 선택 대부분을 피해가고 있고 일부러 아이돌 캐스팅도 하지 않은 영화인데도 여전히 아이돌스러운 매력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대 장면 하나 나오지 않고 ‘가상의 아이돌 그룹 만들기 게임’에 집착하지 않으며 골수팬을 등장시키지 않는데도 영화는 부서진 홀로그램 조각처럼 케이팝 그룹을 이루는 수많은 것들을 담고 있다. 노력한 팬이라면 러브앤리즈 팬픽을 쓰는 게 가능할 정도다. 영화의 의도는 전혀 아니겠지만. <힘을 낼 시간>은 최선 또는 최악의 타이밍에 개봉한다. 부조리하기 짝이 없는 정치 상황이 모든 이슈를 잡아먹었으니 개봉하는 영화에겐 타격이 크다. 하지만 뉴진스와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 때문에 사람들이 아이돌의 노동권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바로 그 정치적 상황 속에서 수많은 아이돌 팬들이 응원봉을 국회 앞에서 휘두르고 있는 지금 이 순간만큼 이 영화에 맞는 시기가 있을까. 듀나(영화평론가) l SF 작가이고 영화 컬럼니스트다. 영화 관련 저서로는 『가능한 꿈의 공간들』(2015), 『옛날 영화, 이 좋은 걸 이제 알았다니』(2022), 『여자 주인공만 모른다』(2019), 『남자 주인공에겐 없다』(2020) 등이 있다.
이 영화는 공포영화이다. 치매에 걸린 아버지 안소니와 아픈 아버지를 돌보는 딸 앤의 가슴 저미고도 절절한 얘기가 왜 공포냐고? 그건 바로 ‘관찰자’가 아니라 ‘주인공’이 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치매를 다룬 수많은 영화가 인물과 관객 사이에 투명유리창을 세워 놓고 인물의 고통을 관망하게 했다면 이 영화는 맹렬히 그 창을 깨부수고 관객을 화면 안으로 끌어당겨 그들의 모든 의식과 감각을 통째로 붙잡고 흔든다. 3인칭 시점의 1인칭화! 소재의 진부함은 결곡하고도 투철하게 인간을 이해하는 플로리안 젤러 감독의 전위적 시도로 온전히 극복되고도 남는다. 안소니(안소니 홉킨스 분)는 엔지니어로 자수성가하여 근사한 아파트에서 여유로운 노후를 보내는 80대 노인이다. 그의 낙은 자신을 보러 매일 들르는 딸 앤(올리비아 콜맨 분)을 기다리는 일이다. 마침내 딸이 왔다. 그런데 딸의 표정이 좋지 않다. 왜 도우미한테 험한 말을 했느냐고 자신을 추궁하듯 묻기에 그녀가 시계를 훔치려 해서 그랬다고 자못 양양하게 대꾸한다. 그러나 시계는 딸의 짐작대로 욕조 밑에 있다. 엇, 왜 이게 욕조 밑에 있지? 어찌됐든 찾았으니 됐고, 도우미 대신 딸이 옆에 있으니 만족스럽다. 그러나 그 날의 일은 가벼운 해프닝에 불과했다. 그의 상태가 그럭저럭 괜찮았던 날이었던 것이다. 딸은 계속해서 도우미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더니 급기야 자신은 런던을 떠나 프랑스로 가게 됐다고 말한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 프랑스로 떠난다고? 그럼 나는? 갑자기 겁이 나기 시작한다. 이 와중에 둘째 딸은 왜 보이지 않는지 모르겠다. 본 지가 오래된 것 같은데 말이다. 다음 날은 갑자기 못 보던 남자가 거실 소파에 앉아 있다. 누구냐고 물었더니 사위라고 답한다. 앤은 이혼했는데 사위는 무슨? 한 술 더 떠 이 집이 자신의 집이라고 말하는 낯선 남자. 잠시 후 장을 보러 나간 앤이 들어오는데, 아니다. 앤이 아니다. “아빠, 저예요. 저 앤이에요!”라는데 처음 보는 여자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이 집은 분명히 내 집인데 내 집이 아니라 하고 모르는 남자가 사위를 자처하며 앤마저 얼굴이 바뀌었다. 이건 현실이 아니다. 꿈일 것이다, 그래, 분명 꿈일 것이다. 안소니의 상태는 날이 갈수록 심각해진다. 아닌가? 혹시 안소니의 말이 다 사실인 건 아닐까? 안소니가 느끼는 감각은 분명 그의 감각이 맞을 텐데 그것을 어떻게 아니라고 단정할 수 있는가. 낯선 남자가 그의 뺨을 때려 그는 당황스러우면서도 아픔을 느꼈다. 그런데 그것이 오해이며 착각이라고 우리가 어찌 장담할 수 있겠는가. 누군가의 기억의 오류와 소실이 망상이라고, 현재로 느껴지는 누군가의 과거가 단지 과거일 뿐이라고, 누군가에게 틀림없는 진실이 거짓투성이라고 우리가 규정할 근거가 대체 무어냔 말이다. 감독은 집요하고 밀도 높게 관객을 긴장시킨다. 당신이 느끼는 혼란이, 혼란의 반복으로 발생하는 자기 불신이, 마침내 그 무엇도 신뢰할 수 없게 되는 공포가 바로 안소니가 경험하는 그 자체라는 것을, 추체험할 수 없다고 여겼던 일을 핍진하게 우리 내부로 침투시키며 우리를 안소니화하는 데 성공시킨다. 그러나 밀어붙이기만 하는 게 아니다. 감독의 탁발한 연출은 속도의 조절과 적절한 밀당에 있다. 여백을 과감하게 이용하는 것이다. 이 영화는 2012년 프랑스에서 초연해 연극으로 이미 성공을 거둔 작품이다. 자신이 쓴 연극을 직접 영화로 만들면서 감독은 영화를 한 편의 연극처럼 환원시키는 데 성공한다. 연극이 막으로 무대를 전환한다면, 영화에서는 인물 없이 다양한 공간을 천천히 훑는 기법으로 시공을 변환한다. 이 같은 기법으로 감독은 관객에게 어떤 시간을 제공하는데, 하나는 얼기설기 복잡해진 감정을 소강시켜 감정이 사유로 넘어갈 수 있는 여유를 주는 시간이다. 어느 시점에서 우리는 진실게임이 더 이상 소용이 없다는 걸 알게 된다. 그것은 우리에게 응당 선이어야 할 것들이 안소니에게는 수많은 점으로 흩어져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결과이다. 또한 그 선과 점이 굳이 같은지 다른지를 물을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아서이며, 지고한 사랑의 가치를 행위로써가 아닌 고작 인식 따위로 이해하려드는 우리 자신이 가소롭다는 걸 알게 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시간은 미세하게 바뀐 집의 공간이 안소니의 심리변화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추측케 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엄마가 보고 싶어!”하며 우는 마지막 장면에 가서야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더 이상 자신의 공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아버렸을 때 그는 아이가 되었다. 엄마가 보고 싶은 아이. 기억을 잃어가며 점점 낯설어지는 공간이 될지언정 집은 그에게 자궁이었다는 걸 의미한다. 그리고 공간을 되찾고 싶어 하는 그의 마음은 ‘시계’가 메타포가 되어 잃어버린 시간들을 붙잡고 싶어 하는 마음과도 꼭 닿아 있다. 시간과 공간에 대한 그의 집착은 상실감이 주는 고통의 깊이와 완벽히 정비례한다. 거개의 사람들은 치매가 암보다 더 두렵다고 말한다. 망각은 신의 선물이라고 하면서도 망각에 빠져드는 질병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절대 받고 싶지 않은 선물로 치부한다. 어쩌면 죽음은 그 자체로 무(無)가 되는 일일 수도 있는데, 명멸하는 자기 자신을 마주하는 일은 그 無와 대체 무엇이 다른 걸까. 육체는 쇠할지언정 영혼은 꺼트릴 수 없다는 마음이라면 그것은 부질없는 욕심이 아닐까? 좋다. 그것이 순수한 바람이든 욕심이든 나아가 탐욕이든 그것의 정체를 굳이 알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메시지를 사회적으로 확대해 치매환자를 대하는 시선의 변화를 촉구하고, 치매환자를 돌보는 가족의 고통을 헤아려 복지체계에서 이들을 포용해줄 것을 역설하면 되는 걸까. 그것으로 충분한 걸까. 인간에게 기억이란 시간 속에 존재를 새긴 결과물일 것이다. ‘살아 낸’ 시간의 결과물이다. 병에 걸려 아파한 시간이나 그저 살아진 시간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래서 다시, 질문은 ‘어떻게 살 것인가’로 돌아온다. 삶의 본질적 질문은 결국 이 질문 하나로 수렴되듯. 이 영화로 치매를 경험한 덕분에 답을 찾는 것은 더 쉬워진 것 같다. 그것은 바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모습으로 살아내는 것이다. 동시에 사랑하는 사람이 기억해주기를 바랐던 것 그대로 그 존재를 기억해주는 것이다. 그것이 가는 자와 남은 자가 할 수 있는, 또 해야 할 전부가 아닐는지. <더 파더>는 2021 아카데미 시상식에 작품상, 남우주연상, 여우조연상, 각색상, 미술상, 편집상 등 6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고, 이 중 안소니 홉킨스 배우가 남우주연상을, 플로리안 젤러 감독이 각색상을 수상하였다.
60년대의 기운 시대적인 ‘기운’이라는 것이 있는 것 같다. 가령 1960년대가 그런 시대였다. 유럽은 프랑스의 68혁명으로 대표되는 반자본주의 혁명에 돌입했고, 미국은 반문화 정서에 몰두했다. 현대영화의 형식과 내용의 급진성이 과감하게 실험됐고, 미국 영화조차도 상상력의 자유가 허용됐다. 카메라 움직임과 앵글, 편집에는 금기가 없는 것 같았다. 소위 말해 “뭘 해도 의미는 만들어졌다”.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60년대의 일본 영화계는 대형 스튜디오들에겐 위기였으나 새로 등장한 신진 작가들에게는 새로운 계기였다. 오시마 나기사의 영화-정치학이 새로운 세대를 사로잡았다. 이마무라 쇼헤이도 이러한 시대에 동참했다. 오즈 야스지로의 조감독으로 영화계에 입문했지만 그는 오즈의 엄격한 조형미에 동의할 수 없었다. 왜 아니었겠는가? 그는 거의 인류학자의 태도로서 일본의 인간 군상들을 관찰했고, 원시주의적 열정으로 영화들을 만들어냈다. 차마 발언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인간의 동물적 본성과 에너지, 혹은 폭력과 무지가 그의 영화들에서 가감 없이 펼쳐졌다. 60년대 카이에 뒤 시네마에 실린 그의 발언은 그 자신을 가장 잘 대변한다. “나는 온 힘을 다해 두 가지 문제, 즉 인간 육체의 열등함과 일본의 일상적 현실의 끊임없는 바탕이 되고 있는 사회 구조의 열등함을 결합시키고 싶었다.” 정말로 그는 그렇게 했다. 시대적 기운도 그를 상승시켰다.(당대의 제도나 사회구조와는 다른 의미로서의 시대의식, 세대성) 쇼헤이의 60년대에서 70년대로 이어지는 걸작들은 금기가 없다. 검열도 없다. 카메라 움직임과 캐릭터, 주제와 소재, 영화적 형식과 스토리도 파격적이다. 그의 모든 영화들에는 스크린을 뚫고 나올 것 같은 괴이한 기운도 감돈다. 괴력의 감독이다. 다큐멘터리의 진실 혹은 허구 60년대 쇼헤이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이채로운 작품은 1967년에 만들어진 < 인간 증발 >이다. 젊은 날의 쇼헤이의 모습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이 작품은 현장을 지배하는 그의 강단과 천재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일본 영화에 각별한 애정을 쏟은 영화평론가 도널드 리치는 이 영화를 이마무라 쇼헤이의 가장 중요한 업적으로 평가하였을 정도였다. 이 영화는 원래 TV 시리즈 물로 기획되었으나 영화로 전환됐다. 당시 일본에선 한해 십만 명에 육박하는 사람들이 실종되었고, 이마무라는 도대체 이 조그만 나라에서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사라지는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경찰청 실종 파일들을 뒤지기 시작했고 그중에서 가장 평범해 보이는 32세의 남자, 타다시 오시마를 추적하기로 결심한다. 여기에 그의 약혼녀 요시에를 동참시켜, 그녀가 오시마의 가족과 동료, 실종 당시의 정황 등을 파헤치고 다니는 모습을 기록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전문 인터뷰어로는 < 붉은 살의 >(1964) 등에 출연한 바 있는 남자배우 츠유구치 시게루를 캐스팅하여 요시에와 함께 움직이도록 하였다. 영화는 오시마 실종 1년 반이 지난 시점부터 촬영되기 시작해 거의 1년에 가까운 기간을 소요했다. 촬영팀은 오시마를 추적하는 수사팀과 흡사했고, 요시에와 시게루를 내세운 인터뷰들은 직계 가족부터 점점 주변으로 확장되었다. 영화 촬영팀의 첫 추적 대상은 당연히 오시마였다. 그의 내밀한 가족사와 부모 형제, 그가 왜 도시로 이주했으며 동료들에게 어떤 사람이었는지, 심지어 어떤 여성 편력을 지니고 있었는지 폭로되기 시작한다. 극기야 실종 시점에 오시마는 약혼녀 요시에가 아닌 다른 여성과 결혼을 약속하고 임신까지 시켰다는 증언이 나온다. 이쯤 되면 영화는 슬슬 관객에게 퍼즐과도 같은 질문의 발동을 걸기 시작한다. 부재하는 남자,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는 남자, 실체가 없는 남자가 오직 타인의 증언에 의해서만 관객에게 제시된다. 누군가에게 그는 무능한 일군이었고 어떤 이에게는 예의 바르고 착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어떤 이에게 그는 여자들을 농락하는 자였고 결국 실종 전에 회사 공금까지 횡령한 문제적 인물이기도 하였다. 그는 정말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러나 영화가 정작 질문하는 것은 오시마라는 사람의 존재 혹은 오시마가 죽었는지 살았는지가 아니다. 오시마를 경유해 이마무라 쇼헤이의 진짜 질문은 이것이었다. “영화가 어떻게 단편적 사실들(그의 흔적들, 증언들, 기억들, 관계들)을 통해 진실에 가 닿을 수 있겠는가?” 영화의 본격적인 게임은 중반에 이르면서 고조된다. 오시마 실종 2년째 되던 날, 일본의 TV와 언론 매체는 이마무라의 영화 촬영팀과 약혼녀인 요시에를 조명하기 시작한다. 어떤 미디어에서 요시에는 보기 드문 순애보의 주인공으로 추앙되었고, 어떤 기자는 “단지 찾겠다는 일념으로 이마무라의 촬영에 응한 것인가?”라는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다. 실제로 요시에는 이때쯤 이미 변심하고 있었다. 그녀가 이 오랜 추적과정 속에 더 이상 오시마가 아니라 인터뷰어이자 배우인 시게루를 사랑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눈치 챈 이마무라 쇼헤이는 시게루를 불러 그것이 사실인지 확인한다. 그리고 내린 결론. “이미 영화는 목적(요시에의 오시마 찾기)을 잃었으니, 여기서부터는 요시에와 시게루의 관계를 밀어붙이자.” 영화와 현실, 허구와 진실의 경계 < 인간 증발 >은 명백히 다큐멘터리 형식을 표방하고 시작된 작품이었다. 오시마 실종이라는 사건, 오시마의 주변 사람들, 무엇보다도 요시에의 추적은 모두 사실에 기반했다. 그러나 그 과정을 영화로 기록하면서 이마무라는 새로운 실험을 덧붙인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이마무라는 관객들을 향해 다음과 같은 직설화법으로 이야기한다. “이 영화는 사실들을 추적하다 보면 진실에 다다르게 될 것이라는 믿음에서 시작했다. 물론 진실은 있겠지만 여기 세 명(극 중 진실 공방을 벌이는 요시에와 요시에 언니, 그리고 어떤 사건의 목격자인 생선장수)에게 진실은 다 다르게 존재한다. ... 사람 마음은 믿을게 못 된다. 이건 픽션이다. 오시마의 실종을 바탕으로 한 드라마일 뿐이다. 이 영화는 드라마다. 가공된 것이다.“ 실제로 영화는 중반 이후 관객들은 보이스 오버 방식으로 흘러나오는 영화 촬영팀의 목소리들을 듣게 된다. 화면은 여전히 오시마 주변을 배회하며 사람들을 인터뷰하는 요시에 일행을 제시하고 있지만, 목소리들은 이 영화의 방향에 대해 극영화적 스토리를 부여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촬영팀이 사건을 왜곡하거나 정황을 조작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다만 영화적 포커스를 오시마에서 요시에로 옮겨가며, 요시에 언니를 새로운 사건의 용의자로 제시한다. 막장에 가까운 의혹도 제기한다. 무당의 강신된 목소리가 결정적 계기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무당은 오시마가 이미 죽었으며, 그를 죽인 것은 오시마와 불륜을 저지른 요시에의 언니라는 것이다. 이제 영화의 포커스는 요시에와 그녀의 언니, 그리고 불륜을 목격했다고 주장하는 생선장수의 진실게임으로 전환된다. 영화는 끝까지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 알려주지 않는다. 아니 알려주지 못한다. 화면 안으로 불쑥불쑥 들어와 선언하듯 이야기하는 이마무라 쇼헤이의 말처럼, 영화는 다 허구이며, 사실의 단편들이 진실을 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제의식이 가장 잘 드러내는 명장면은 영화의 후반부에 제시된다. 언니와 진실공방을 하던 요시에는 목격자인 생선장수를 집으로 불러와 언니와 대면시킨다. 이 세 명은 격한 논쟁을 하지만 누구도 상대방을 신뢰하지 않는다. 이때 이마무라 감독이 방안으로 불쑥 들어와 앉게 되고, 답답해진 요시에는 이마무라에게 질문한다. “감독님 진실은 무엇인가요?” 그러자 이마무라는 큰 목소리로 “세트 준비!”라고 외친다. 이에 누군가의 집일 거라고 간주되었던 방의 벽들이 뜯겨 나간다. 카메라는 뒤로 빠지며 이들을 전경화하는데, 카메라가 움직임을 멈췄을 때 관객은 이들이 실제 공간인 집이 아니라, 영화 세트장에 마련된 방과 집기들, 그리고 조명 장치 및 분주하게 움직이는 스태프들과 함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마무라의 주장. “인간의 마음을 믿을게 못된다~(위에서 언급한 내용)”. 이 작품이 천재적인 것은 단순히 진실 게임을 능란하게 해서만은 아니다. 물론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임에도 어느 심리 스릴러 못지않은 치밀함과 긴장으로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오시마는 살았는가? 언니는 정말 동생의 약혼자와 불륜을 저질렀나? 요시에는 약혼자를 찾겠다는 건가, 유명해지겠다는 건가? 그뿐 아니다. 이 영화는 정말이지 60년대의 산물이다. 한국의 TV 다큐멘터리나 독립 다큐멘터리에선 좀처럼 발견하기 힘든 파격적인 형식 구조와 실험이 전면에 배치된다. 이미지와 사운드의 관계. 증언자와 카메라의 관계, 관객과 사건의 관계 등 모든 것들은 관습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자신만의 리듬 속에서 놀라운 에너지로 결합된다. 이마무라는 자신만의 언어와 아이디어로 영화의 쇼트를 구성하고 편집하며 사운드를 배치한다. 그리고 그 인공적 가공물은 더 근원적으로는 영화와 현실의 관계, 허구와 진실의 관계에 대해 심오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1967년 작인 이마무라의 이러한 파격적 실험은 동시에 유럽의 시네마 베리테나 미국의 다이렉트 시네마의 정신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특히 시네마 베리테의 인터뷰법은 이 영화에서 얼핏 유사하게 적용된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시네마 베리테는 진실을 추동하는 카메라, 무수한 질문들을 통해 진실에 가 닿을 수 있다고 믿었다. 유럽의 그들은 영화의 진실 가능성에 대해 확신했다. 그러나 이마무라는 그들의 한 계를 이미 간파했다. 증언자들은 신뢰할만한 것인가? 카메라는 과연 세계를 객관적으로 기록할 수 있는가? 이것은 증언자들의 윤리 문제가 아니라 영화의 ‘구성능력’에 관한 문제였다. 2차원적인 카메라 렌즈가 세상을 프레이밍 하는 순간, 영화는 그 자체로 또 다른 세계(드라마, 허구)를 구성할 뿐이라는 사실 말이다. 버스터 키튼의 < 셜록 주니어 >나 알프레드 히치콕의 < 이창 >, 그리고 고다르의 <경멸> 못지않게 뛰어난 자기 반영적 영화로서, < 인간 증발 >에서 진짜 진실은 오시마의 실종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영화 그 자체의 구성능력, 현실과 영화가 맺는 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 영화의 주인공은 오시마나 요시에가 아니라 영화 그 자체이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요시에 자매와 목격자가 거리 한복판에서 사건 정황을 두고 벌이는 논쟁을 기록한다. 촬영팀이 장비를 동원해 소란스런 촬영을 시작하고 세 명의 주인공들은 서로의 증언이 사실이라 우기며 싸우기 시작한다. 여기에 또 다른 관련자들이 모여들고 도시의 구경꾼들이 가세하면서 현장은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 돼버린다. 그러자 이마무라는 더 이상 촬영이 불가능하다며 중단을 선언한다. 그러면서 하는 마지막 발언. “이 영화는 다양한 각도에서 포착해 편집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예기치 않은 상황이 벌어졌다. 오시마의 실종에 다시금 초점을 맞춰야 한다. 이 영화는 픽션이다. 다 사실이 아니다.” 이때 카메라는 공중으로 빠지고 불쑥 침입해 들어오는 요시에와 시게루의 대화 목소리. “끝인가요?” “응 그래. 영화는 끝이지만 현실은 시작이지. 내일 뭐해?” ps. 영화가 개봉하자 여러 논쟁들이 벌어졌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의 윤리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커졌다. 다큐멘터리가 현실을 조작했다는 비난부터, 오시마 및 요시에의 사생활 침해에 대한 논란까지 일었다. 그러자 역시 강단 있는 이마무라 감독의 응수. “내가 요시에의 시련을 영화 만드는 데 이용한 만큼 요시에도 나를 이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