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문의 진원지
- 감독
- 함희윤
- 제작년도
- 2022
조선극장 흥행광고 3호 중 일부 (사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다시 만난 세계: 식민지 조선의 극장문화 이야기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발간하는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시리즈를 바탕으로 역사의 지층 속에 묻혀 있던 이야기와 행간 속에 숨겨진 욕망들을 재조명합니다. 조선극장 은 단성사 와 더불어 식민지기의 대표적인 조선인 극장으로 손꼽혔던 곳이다. 그러나 ‘경성의 일류 극장’이라는 명성이 무색할 만큼 조선극장은 유독 ‘스캔들’의 진원지로 호명될 때가 많았다. 객석에서 발생한 삐라 살포 사건이나 극장 주위에 진을 친 폭력단들의 범죄행위도 여러 차례 신문 지상에 오르내렸지만, 무엇보다 빈번했던 것은 극장 경영권을 둘러싼 내홍 에 얽힌 이야기들이었다. 실제로 조선극장의 운영 기록(1922~1936)을 살펴보면, 일시 휴관을 선언하고 극장 문을 닫는 일이 적지 않았는데 주된 원인은 경영권 분쟁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으며 극장이 재개관할 때는 대개 새로운 경영주의 취임 소식을 동반하곤 했다. [1] 이는 단성사가 경영주 박승필 의 수완과 카리스마에 힘입어 안정적인 경영 체계를 구축해 나갔던 것과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사실 조선극장의 경영권 분쟁은 탄생 시점부터 어느 정도 예견되어 있던 사태였다. 동양생명보험회사 경성지부장으로 근무하던 일본인 시택근차랑(矢澤近次郞)은 얼마간의 자금을 모아 사업에 뛰어들 계획을 갖고 있었는데, 이때 지인을 통해 소개받은 사업 파트너가 바로 황원균이었다. 두 사람은 극장업을 시작해보기로 의기투합한 후 본격적인 절차에 착수했다. 시택근차랑이 자금을 대고, 황원균이 흥행장 건축허가를 비롯한 실무를 담당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니 실질적인 지배권은 시택근차랑에게 있었겠지만 문제는 서류상의 소유주가 황원균의 이름으로 명시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당연히 시택근차랑은 명의변경을 요구했고, 황원균은 영업 개시 전에 명의변경을 하면 신용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약속을 차일피일 미뤘다. 결국 두 사람의 갈등은 법정 공방으로 이어지기에 이른다. 이후 시택근차랑은 건물 소유권을 동경 건물회사에 판매한 후 조선극장에서 발을 뺐다. 다만 동경 건물회사는 조선극장의 흥행권, 즉 직접적인 운영에 관여하지는 않았고, 실질적인 운영 책임을 담당한 것은 ‘지배인’으로 취임한 조선인 흥행주들이었다. 점차 흥행권은 소유권과 별개의 권리처럼 유통되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일정한 비용을 지불하고 조선극장의 흥행권을 양도했던 사례들이 이를 잘 보여준다. [2] 1926년에는 변사 김조성 이 새로운 흥행주로 취임하게 되었으나 극장 자금을 유용했다는 혐의를 받아 관원들과 갈등을 빚은 끝에 3개월 만에 물러나게 되었고, 차영호, 현철, 김영식, 이필우 , 이태진 등이 공동 혹은 개인 명의로 경영권을 승계했으나 대개는 1년을 넘기지 못했다. 그만큼 1920년대 조선극장의 경영은 불안정했던 것이다. 심지어 1928년 8월에는 연이은 휴관사태 속에 위기의식을 느낀 관원들이 공동명의로 흥행주 역할을 맡아 1년간 경영을 이어나가기도 했을 정도였다. 조선극장의 경영이 비교적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은 안봉호와 신용희 가 이태진으로부터 경영권을 인수한 1929년부터의 일이었는데, 안봉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경영권을 넘기고 손을 뗐기에 실질적으로 조선극장의 흥행권을 행사했던 인물은 지배인으로 취임한 신용희였다고 볼 수 있다. (좌) 조선극장의 모습 (사진: “ 조선극장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우) 조선극장 개관 관련 신문 광고 (사진: “ 개장피노 ”, 《동아일보》, 1922. 11. 7.) 한편 조선극장의 경영구조는 1931년부터 기존과 사뭇 다른 방식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1931년 7월에 창립한 조선흥행주식회사 는 흥행업에 포함된 제반 사업들을 모두 아우르는 데 목표를 두고 있었다. 즉, 제작, 배급, 상영의 수직적 통합 을 통해 최대한의 이익을 확보하려 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조선극장은 개인 경영 방식을 벗어나 조선흥행주식회사의 직영관으로 운영되기 시작했다. 조선흥행주식회사의 사장은 평양에서 고무공장을 운영하던 사업가 정완규가 맡았으며, 안봉호로부터 경영권을 인수한 정현국은 전무취체역을 담당했다. 그리고 신용희는 조선극장 지배인과 조선흥행주식회사 상무취체역을 겸임하게 되었다. 조선흥행주식회사의 창립과 직영관 제안은 조선극장 입장에서도 충분히 매력을 느낄 만한 사안이었다. 발성영화로의 전환 과정에 직면한 식민지 조선의 극장들은 기로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무성영화보다 과중한 필름 대여료를 지불해야 했고, 장비 설비에도 목돈을 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전면적인 발성영화 전환을 천명한다는 것은 적지 않은 위험을 감수해야 할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점차 관객들의 취향이 무성영화를 ‘재래의 저급 취향’으로 낙인찍는 경향이 현저해지고 있던 상황에서 무조건 무성영화의 재탕 상영을 반복하기도 어려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본금 8만원을 들여 출범한 조선흥행주식회사는 든든한 뒷배 역할을 해 줄 수 있었으며, 실제로 조선극장은 라이벌 관계에 놓여 있던 단성사보다 적극적으로 발성영화 전환을 시도 하며 시장의 트렌드를 주도해 나갔다. 재계 공황의 영향으로 말 못 된 흥행계는 예년에 비하야 참경에 빠진 셈인데 더구나 영화계는 조금도 새로운 면목을 보여주지 않고 다만 재삼 상영한 영화를 최염가의 관람료로써 상설관의 수명을 연장시켜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형편이었으나 기신양행(紀新洋行) 겸 조선극장의 지배인 신용희(申鎔熙) 씨가 일본에 갔다 오고 일본 동화상사(東和商事) 사장이 구라파에서 돌아오는 길에 동화상사 조선지점장인 고윤묵(高潤黙) 씨와의 회견으로 기신양행 측에서는 순전한 『토-키-』 배급 , 동화상사 측에서는 구라파 특작 무성영화 로써 영화배급전이 개시될 모양인데 무성영화 측에서는 이미 명작을 계약하야 수입 중이라 하며 기신양행 측에서는 조선극장에 불일간 『토-키-』영사기계를 장치하여 일반의 목을 놀래일 예상 인데 실패한 기왕에 일본제의 『토-키-』영사기계와는 달라서 이번의 것은 순미국제를 사드려 임이 『파라마운트』 회사의 『모로코』를 위시하야 『명작 토-키-』를 계약하였으므로 조선극장에서는 가을에는 얼마동안 『토-키-』 전문으로 흥행- 『단성사』에서는 무성구라파영화로써 영화전이 개시될 모양이라 한다. 기신과 조극 측에서는 과연 완전한 토-키-를 보여줄 것이며 동화상사 측에서는 과연 구라파의 명작을 가지고 『토-키-』의 새 진영을 돌파할지 일반 영화『팬』의 흥미를 자아내고 있다 한다. - 기사, “금추 흥행계는 발성 무성 영화전 - 기신 측엔 토-키- 상사 측엔 무성”, 《조선일보》, 1931. 8. 25. - 한국영상자료원 편, 『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1931 』, 1,114쪽. 1931년 가을 흥행 시즌 당시 단성사와 조선극장이 보여준 노선은 명확하게 엇갈렸다. 단성사가 명작 무성영화 전문관을 표방하며 유럽산 특작 영화들을 전면에 배치하려 한 반면, 조선극장은 기신양행과 손을 잡고 “순전한 토키”들로 프로그램을 채우고자 한 것이다. 주목할 것은 조선극장이 기왕의 일본제 발성영사기보다 훨씬 우수한 미국제 장비(RCA)를 전격적으로 사들였다는 점이다. 구매 시기를 고려할 때, 조선극장이 이처럼 공격적인 설비 투자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조선흥행주식회사의 자본력에 힘입은 바 컸다고 볼 수 있다. 조선극장과 달리 유럽산 특작 무성영화를 전면에 내세운 단성사의 모습 (자료 출처: 『大京城都市大觀』(朝鮮新聞社, 1937), 映畫常設館ノ部 / 사진: “ 단성사 ”, 서울역사아카이브, 서울역사박물관) 단성사와 조선극장의 상반된 행보는 여러모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 싸움의 승패는 곧 발성영화 전환 문제에 있어 향후의 행보를 결정지을 만한 바로미터가 될 것이라 인식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승부는 발성영화 전환이라는 과제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흐름임을 각인 시키는 결과로 낙착되었다. 이듬해인 1932년 4월에 단성사와 우미관은 발성영사기를 구매하고 토키의 상영 비중을 늘려나가며 뚜렷한 노선 변화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1932년 7월에 지난 1년간의 사업 융창을 자축하는 의미의 기념 상영회를 열었을 만큼 조선극장과 조선흥행주식회사는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렇기에 1932년 10월에 조선극장 지배인 신용희가 일방적인 해고 통보를 받은 것 은 굉장히 갑작스러운 조치처럼 여겨질 만한 일이었다. 조선흥행주식회사 측은 신용희가 배임 행위를 저질렀다고 지목하면서 지배인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종용했는데, 신용희가 격렬하게 반발함에 따라 조선극장은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이나 일시 휴관 사태에 접어들 수밖에 없었다. 당시 신문기사를 통해 보도된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인생안내』 계약이 발단 / 정(鄭), 신(申) 양파로 대립 / 지배인은 건물 소유자와 악수 / 알력의 전말 내용 조선극장은 소화 四년 九월에 건물 소유자인 부내 황금정(黃金町) 二정목 五十九번지 동경건물주식회사(東京建物株式會社)와 임차계약(賃借契約)을 안봉호(安奉鎬) 씨가 체결하고 보증금(保證金) 六천 五백원을 내게 되었는데 그 후 소화 五년 七월에 정현국(鄭鉉國) 씨가 一만원을 내고 영업권리권(營業權利權)을 양수(讓受)하여 주식회사로 조직 후 조선흥행주식회사(朝鮮興行株式會社)를 조직한 나머지 정완규(鄭完圭) 씨가 사장(社長) 으로 취임하고 신용희(申鎔熙) 씨는 지배인(支配人) 으로 취임하여 정씨는 금전에 관한 일절 책임을 지고 신씨는 영업에 책임을 맡아 이래 경영을 하여 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날로 업적을 나타내어 작년에는 二, 三천원의 순이익까지 보게 되어 주주들 간에 상당한 배당까지 하게 되었다. 지난번에 인생안내(人生案內)라는 영화를 상영하려고 영화배급소와 계약 체결을 할 당시 조선극장 간부의 승낙 없이 자기 개인으로 약 四백원에 계약을 하여 가지고 극장 간부와는 五할 배당을 하자는 조건을 제출하였는바 이에 극장 간부 측에서는 동 극장에 지배인의 지위에 잇는 사람으로 당연히 극장을 대표하여 계약을 체결할 것인데 불구하고 개인의 계약이라는 것은 배신 행동이라 하야 지난달 중순경에 신씨에게 해임장을 발송 하게 되었다. 이에 분개한 신(申)씨는 극장 건물 계약관계자인 목미(木尾) 씨에게 그 사실을 말하게 되자 전기 목미 씨는 신씨를 지지(支持)하는 터이라 결국은 정씨 일파와 신씨 일파 사이에 분쟁을 일으키게 되어 페관의 운명에까지 이른 것 이라고 한다. 관객을 위하야 애석한 일 - 사장 정완규 씨 담(談) 금번 분규사건에 대하여 사장 정완규(鄭完圭)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조선에서 몇 개 안 되는 흥행계에 극장 간부들의 분쟁으로 휴관까지 하게 된 것은 조선흥행계를 위하야 일반 사회 각 방면 인사에게 진실로 미안하기 끝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 간부는 어떠한 일이 있든지 양보를 하고 원만 해결을 지으려 합니다. 극장세만 하야도 九월에 七백 五十원 하든 것을 十월에 八백원을 내라고 하야도 아모 이의도 업시 그대로 다 지불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회사 규정에 의하야 부정한 행동이 있는 지배인 하나를 처치하엿다고 극장 계약자가 흥행을 못하게 하는 것은 너무나 횡포한 일 이 아닌가 합니다. 지난번에 처분한 신 지배인에 대하여도 처분을 관대하게 하기 위하야 九백원이라는 퇴직금까지 보내었습니다. 이런데도 불구하고 목미(木尾) 씨가 극장을 사용치 못하게 한다는 것은 신씨와 어떠한 밀접한 관계가 있는지 알 수 없으나 일반대중을 위하여 너무나 애석한 일입니다. 장래를 위하야 해결에 노력 - 지배인 신용희 씨 담(談) 일찍이 동 극장의 지배인으로 있던 신용희(申鎔熙) 씨는 말하되 금번에 소위 배임행동이라고 하는 것은 지난번 인생안내(人生案內)를 계약하였을 당시에 四백원을 내 돈을 내어 계약을 하였다는 것이나 그것은 당시 간부들이 너무나 사진값이 비싸다고 계약하기를 주저하므로 만약 다른 극장에서 계약이나 하여 사진값이나 오르면 더욱 극장에 손해가 될 듯하기에 내가 먼저 계약을 한 것 입니다. 여하간 사실에 잘잘못은 어찌 되었든지 조선극장의 장래를 위하여 원만히 해결을 짓는 것이 좋을 듯하기에 해임장을 받고서도 정씨(鄭氏)를 방문하고 무조건으로 잘못하였다고 사과까지 하고 앞으로 사업을 계속하자고 하였으나 끝끝내 거절을 하므로 나는 부득이 극장 계약관계자 목미(木尾) 씨에게 그 사유를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목미(木尾) 씨의 방침은 사리를 모르는 회사 당국과는 계약은 하고 싶지 않다고 하며 회사라는 명칭을 떠나 개인으로 계약을 하고 싶다고 하는 중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목미(木尾) 씨는 나를 신임하느니만큼 내가 빠지어 다른 사람과는 계약을 하고 싶지 않다고 하는 중인데 현 간부 측에서는 나를 배척하니 앞으로 어찌될지 조선흥행계의 장래를 위하여 적지 아니한 걱정입니다 운운. - 기사, “『토키』영화의 전당 조선극장의 분규 - 휴관한 지 일개월에 아모 해결 업서”, 《매일신보》, 1932. 11. 28. - 한국영상자료원 편, 『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1932 』, 1,382-1,383면. 사건의 발단은 한 편의 수입영화 계약을 둘러싼 이견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소비에트 영화 <인생안내>(니콜라이 에크, 1931)의 흥행가치에 주목한 신용희는 간부들이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자 개인 명의로 필름을 선구매했으며, 회사에는 추후에 수익금을 배분하리라고 통고했다. 그는 다른 극장과 경쟁이 붙어 필름 대여료가 폭등할까 우려했기에 불가피한 조치를 한 것이라 항변했지만, 조선흥행주식회사는 이것이 엄연한 배임 행위라고 보았던 것이다. 다만 <인생안내>가 신용희의 기대처럼 수익 창출에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사회 부랑자 청소년들이 철도 노동자로 재탄생하여 사회주의 건설에 기여한다는 이야기를 담아낸 <인생안내>는 ‘노력영웅’의 숭고한 희생을 조명하는 데 초점을 맞췄을 뿐, 계급투쟁을 전면적으로 다룬 작품이라 하기는 어렵다. 그렇기에 신용희는 <인생안내>가 무난하게 검열을 통과할 것이라 보았고, 상영을 앞두고 주요 일간지에 특별광고를 커다랗게 게재했을 만큼 자신감을 보였다. [3] 그러나 <인생안내>는 개봉 다음 날 “사정에 의하야 중지”하게 되었다는 공지만을 남긴 채 사라져 버린다. [4] 필름 검열은 통과했지만, 조선극장에서 자체 제작한 선전문이 문제시되어 압수됨에 따라 상영 불허 처분이 사후적으로 내려졌던 것으로 보인다. [5] (좌) 조극 흥행광고 3호 (사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 (우) <인생안내> 포스터 및 스틸 (사진: “Putyovka v zhizn( 1 , 2 )”, IMDb) 그러나 상영이 중지되었다고 해도 <인생안내>는 신용희가 개인 명의로 구입한 필름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조선극장 측의 손해가 아주 컸다고는 보기 힘들 것이다. 그런데도 조선흥행주식회사는 굳이 이 문제를 끄집어내어 신용희를 몰아내고자 했다. 아마도 이는 신용희의 개인 행동을 용인하게 된다면 장차 무척이나 불리한 선례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을 경계했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흥행주식회사는 극장업뿐 아니라 배급업에도 상당한 비중을 두고 있었기에, 신용희가 정상적인 배급 절차를 건너뛴 채 임의로 이익을 분배하게 되면 회사 측의 이익을 결정적으로 침해할 우려가 있었다. 그러므로 조선흥행주식회사는 위험의 싹을 미연에 잘라 버리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조선흥행주식회사가 신용희를 쉽게 몰아낼 수 없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조선흥행주식회사는 조선극장에 대해 완전한 장악력을 갖고 있다고 보기 어려웠다. 조선극장의 흥행권에 대해서는 일정한 처분 권한이 있었을지 몰라도, 최종적인 결정권은 어디까지나 건물 소유주인 동경 건물회사 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해임장을 받은 신용희는 동경 건물회사 측 대리인을 맡았던 일본인 목미호지조(木尾虎之助)를 찾아가 억울함을 호소했고, 평소 신용희의 사업 수완을 신뢰했던 동경 건물회사는 즉각 극장 문을 닫으며 조선흥행주식회사를 압박했다. 동경 건물회사는 양자 간에 원만한 합의를 이루도록 종용했지만 신용희와 정완규의 협상은 끝내 결렬되었고, 조선극장은 조선흥행주식회사와 결별하는 길을 택한다. 조선흥행주식회사의 투자가 주로 발성영화 상영 환경을 마련하는 데 집중되었으므로, 새롭게 설비된 장비들의 소유권 또한 조선흥행주식회사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32년 12월에 조선흥행주식회사는 단성사와 새로운 계약을 맺고 조선극장에 설비되어 있던 발성영사 상영 장비를 철거해 단성사로 옮겼다 . 단성사는 1932년 4월에 일제 발성영사기를 도입했지만, 음향이 희미하고 잡음이 많았기에 장비 개선에 관심을 갖고 있던 중이었다. 계약 체결 직후 단성사는 최신의 미제 RCA 상영기를 장만했다는 점을 대대적으로 광고하며 모리스 슈발리에 주연의 발성영화 < 오늘 밤에는 사랑해 주세요(Love Me Tonight) >(로우벤 마물리안, 1932)를 상영하게 되었다. <오늘 밤에는 사랑해 주세요> 포스터 및 스틸 (사진: “Love Me Tonight( 좌 , 우 )”, IMDb) 창졸간에 장비를 잃은 상황에서 신용희는 새롭게 영사기를 장만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이때 시간을 벌어 주었던 것이 바로 극장 대관업 이었다. 1932년 12월에는 새롭게 창단한 명일극장과 문외극단이 조선극장에서 연달아 연극을 올리게 되는데, 이는 극장을 마냥 닫아둘 수만은 없었던 흥행주의 입장과, 명망 있는 큰 무대에 서기 원했던 신생극단들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신용희는 1929년에 지배인으로 취임한 직후부터 자체 레뷰단을 조직하여 공연을 올리고, 극단들에 무대를 대여해 주며 조선극장의 운영난을 타개해 나갔던 전력이 있었다. 영화 상영에 위기가 닥쳤을 때, 대관업을 적절히 병행하며 융통성을 발휘하는 데 능했던 그의 경영 노하우가 또 한 번 발휘된 순간이었다. 조선흥행주식회사와 신용희의 갈등은 연예사업 종사자 간에 일어난 단순한 알력관계를 넘어 여러 흥미로운 논점들을 수면 위로 밀어 올린 사건이었다. 조선흥행주식회사는 영화의 제작, 배급뿐만 아니라 상영까지 포괄 가능한 회사를 목표로 삼았으며, 이는 영화산업의 수직적 통합 을 염두에 둔 행보였다. 그러나 결국 실패로 돌아갔던 신용희 해고사태가 함의하듯 경영권 (조선인) 과 소유권 (일본인) 이 분리된 식민지 극장의 특수성 은 이러한 통합을 불가능하게 한 구조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또한 신용희를 비롯한 조선인 극장의 경영자들이 발성영화 전환에 따른 리스크를 줄이기 위한 방안으로서 대관업을 십분 활용 해 왔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다. 즉, 1930년대 초반의 발성영화 전환기에 연극 흥행은 프로그램 운영의 윤활유 역할을 담당했으며, 극장업자들이 최소한의 자율성이나마 확보할 수 있도록 통로를 열어 주었던 것이다. *** [1] 이승희, 「조선극장의 스캔들과 극장의 정치경제학」, 『대동문화연구』 72,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10. [2] 1929년에는 안봉호가 이태진으로부터 6,500원에 경영권을 인수했으며, 1930년에는 정현국이 안봉호로부터 1만원에 경영권을 인수하였다. [3] 조선극장 특별광고, 《동아일보》, 1932. 9. 1., 2면. [4] 조선극장 광고, 《동아일보》, 1932. 9. 3., 6면. [5] 이 선전문은 전량 압수당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오늘날 전해지는 “조극 흥행광고 3호”가 <인생안내> 특별편으로 구성되었으며, 9월 1일자로 발간되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것이 바로 문제가 된 선전문일 것이라 추정해 볼 수 있다.(대한민국역사박물관, 『자료로 보는 일제강점기 극장문화』, 대한민국역사박물관, 2020, 196쪽.) “조극 흥행광고 3호”는 <인생안내>의 예술성과 제작진의 우수성을 상찬하는 내용으로 서두를 꾸몄는데, 불온성을 지적할 만한 내용이 크게 눈에 띄지는 않는다. 영화 줄거리에 대한 소개 역시 신문에 게재된 개요보다 약간 더 상세할 뿐 큰 차이가 없다. 눈길을 끄는 것은 <인생안내>에 삽입된 노래들의 가사를 옮겨놓았던 부분이다. <인생안내>를 “젊은 노서아”의 太息이자 熱로 소개하면서 ‘권로가’, ‘유랑의 노래’, ‘철도사역’의 가사가 나열되고 있는데, “무로가 영원히 매장되도록” “진흙 속에 영원히 무너버리고저 한다”라는 선언이나, “ᄯᅡᆼ을 긁지만 말고 / 정말로 파 업흐라”라는 구호, “낡은 세계를 ᄲᅮ리채 / 단연히 잘나낼 것은 이 손이다” 등의 구절은 시각에 따라 직접적인 선동으로 해석될 만한 내용들이었다. 이광욱(극장문화사 연구자) l 읽고 생각하며, 말하고 글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다. 과거의 기록을 뒤적이고 오늘의 사람들과 소통하며 함께 미래를 고민한다. 건국대학교 글로컬캠퍼스 조교수(동화 한국어문화학과), 한국영상자료원 객원연구원(『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시리즈). 『드라마, 일상성의 미학』(2024) 공저, 「카프 연극대중화론의 전개와 송영 풍자극의 매체미학」(2018), 「도달한 임계점과 보존된 미래 – 발성영화의 정착과 경성 소재 조선인 극장의 연쇄 반응」(2021), 「표류하는 조선영화 : <임자 업는 나루배>에서 <정춘삼>으로 – 최초의 영화 판권 소송과 식민지 조선영화 시장의 추이」(2022) 집필.
<변신> 올 여름에는 < 변신 >( 김홍선 , 2019)과 < 암전 >( 김진원 , 2018), 한국 공포영화 2편이 개봉했다. 8월 21일 개봉한 <변신>은 29일까지 100만명이 넘는 관객이 들며 좋은 성적을 냈고, 8월 15일 개봉한 <암전>은 10만명의 관객이 아쉽기는 하지만 정통 공포영화로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매년 여름마다 공포영화 2, 3편이 개봉하고 적어도 한 편 정도는 좋은 성적을 거두었던 호시절이 돌아오는 것일까? 아직 판단은 힘들지만 공포영화가 이전보다 대중의 관심을 받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암전> 최근 몇 년간 한국은 물론 해외의 공포영화들이 좋은 흥행 성적을 거두고 있었다. 시작은 2013년 제임스 완의 < 컨저링 >이었다. 이후 애너벨 시리즈와 <더 넌> 등으로 확장된 컨저링 유니버스의 출발인 <컨저링>은 한국에서 226만명의 관객이 관람했다. 보통 5백만은 넘어야 히트작이라고 보겠지만 공포영화의 경우는 다르다. 한국에서 공포영화는 한국이나 해외 작품 가리지 않고 마이너 장르다. 한때 < 여고괴담 >( 박기형 , 1998), < 장화, 홍련 >( 김지운 , 2003) 등의 히트작이 나오기는 했지만 지속된 흐름으로 정착되지는 못했다. 4, 5편의 공포영화가 경쟁하던 여름도 있었지만 시류에 맞춰 조잡하게 만들어낸 작품은 관객의 실망으로 이어졌다. 공포영화에 관심이 없고, 좋아하지도 않는 프로듀서와 감독이 저예산으로 관객의 관심을 끌기 위해 급조된 작품이 많았다. 공포영화의 ‘스릴’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정교한 테크닉이 필요할 뿐 아니라 ‘공포’에 대한 진지한 접근이 필요하다. 무서운 분장과 깜짝 효과만으로는 공포영화를 만들 수 없다. <컨저링>이 성공한 후 2014년 < 애나벨 >(존 R. 레오네티)은 92만명, 2016년 < 컨저링 2 >(제임스 완, 2016)는 192만명의 관객이 들었다. 호러영화의 전통적인 스타일을 현대적으로 리메이크한 ‘컨저링 유니버스’는 젊은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리고 2015년에는 장재현 감독의 < 검은 사제들 >이 544만명의 대성공을 거두었다. 사제복을 입은 미남이라는 컨셉을 앞세운 트렌디한 영화였고, 공포의 문법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감독의 연출력이 돋보였다. 장르적 완성도가 높았다. 2017년에는 미국에서 높은 평가를 받은 조던 필 감독의 < 겟 아웃 >이 213만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해외에서 화제를 끌기는 했지만, 무명 감독 연출에 흑인들이 주연을 맡은 <겟 아웃>의 성공은 놀라운 일이었다. < 애나벨:인형의 주인 >(데이비드 F. 샌드버그>도 193만명의 관객이 들었다. 전작의 2배가 넘는 흥행이었다. 미국에서 대성공을 거둔, 스티븐 킹 원작의 < 그것 >(앤드레스 무시에티)이 88만명이라는 아쉬운 성적이기는 했지만, 한국에서도 화제성을 가진 공포영화라면 대중성이 있음을 증명했다. 2018년에는 다양한 공포영화가 선보였다. 실화 괴담을 소재로 한 < 곤지암 >( 정범식 )을 267만명의 관객이 봤고, 컨저링 유니버스에 속하는 <더 넌>이 101만명이었다. 공포만이 아니라 예술영화의 범주로도 가능한 < 유전 >(아리 에스터)은 17만명이 들었다. 페이크 다큐 형식으로, 실재했던 곤지암의 폐건물을 찾아가는 내용인 <곤지암>은 한국 공포영화의 다양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평가할 수 있다. 특별한 스타나 화제 없이도 관객들은 흥미로운 공포영화를 선택한다. 또한 공포 장르는 중독성이 높아 한 번 좋아하게 되면 지속적으로 장르를 소비한다. <사바하> 올해는 <검은 사제들>의 장재현 감독의 신작 < 사바하 >가 239만명, < 겟 아웃 >의 조던 필 감독의 신작 < 어스 >가 147만명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애나벨 시리즈 3번째 영화인 < 애나벨 집으로 >(게리 도버먼)도 48만명이 들었다. 모두 관객은 전작보다 줄었지만, 전작보다 약한 화제와 임팩트에도 이 정도의 거둔 것은 평가할 수 있다. 다음 작품의 완성도가 이 감독들의 미래를 결정지을 것이다. 공포영화는 메이저에서 성공을 거두기가 쉽지 않은 장르다. 드라큘라와 프랑켄슈타인, 늑대인간 등이 등장한 유니버설 호러의 성공 후에도 호러는 서브컬처의 영역에 속했고, B급영화로 주로 만들어졌다. 호러가 메이저로 복귀한 것은 윌리엄 프리드킨의 < 엑소시스트 >(1973)가 대성공을 거둔 덕이었다. 그리고 1980년대 <할로윈>, < 13일의 금요일 >, < 나이트메어 > 등 10대 관객이 좋아하는 슬래셔 호러가 인기를 끌었다. 90년대 들어 주춤하던 할리우드 호러는 슬래셔 호러를 변주한 웨스 크레이븐의 < 스크림 >(1996), < 링 >(나카다 히데오, 1998)과 < 주온 >(시미즈 다카시, 2002)이 주도한 J호러가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되면서 잠깐 주목을 받았다. 최근 공포 불모지였던 한국에서 공포영화가 선전하고 있는 것은, 세계적인 흐름의 영향이기도 하다. 할리우드는 물론 동남아에서도 요즘 공포영화는 약진하고 있다. 제임스 완 감독의 컨저링 유니버스가 대성공을 거두었고, <겟 아웃>과 <유전> 등 예술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는 호러영화가 선전했다. 케이블 채널과 넷플릭스 등 다양한 플랫폼에서는 9시즌까지 나온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를 비롯하여 넷플릭스의 <힐하우스의 유령>, 스티븐 킹 원작의 <제럴드의 게임> 등 저예산의 공포영화와 드라마가 탄탄한 인기를 과시한다. 또한 동남아인 인도네시아, 베트남, 태국, 대만 등에서 공포영화가 그 해 흥행 1위나 높은 순위에 오르는 등 인기를 끌고 있다. 전통적 호러 강국인 태국에 이어 <사탄의 숭배자>와 <드레드 아웃>의 인도네시아, <마신자> 시리즈와 <카르마>의 대만 그리고 말레이시아, 베트남 등에서도 활발하게 호러영화가 만들어지고 흥행에서도 좋은 성적을 올리고 있다. 저예산이 가능하면서 확실한 마니아를 거느리는 호러영화는 다큐멘터리와 함께 21세기 들어 제작편수가 가장 많이 늘어난 장르이며 인기 장르가 되었다.
이지룡은 1954년부터 1992년까지 영화계에서 활동한 영화제작자이다. 외화수입업으로 영화계에 입문해 명보극장을 설립했고 정창화 감독을 비롯한 유명 감독들의 작품을 제작한 인물이다. (사진1) 젊은 시절의 이지룡 그는 1926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났다. 함흥에서 치마대소학교와 대흥상업학교, 금정고등학교를 나와 함산금융조합 출납계원으로 일했다. 일제강점기 안정된 직장을 다니며 함흥 명보극장에 들어오는 영화를 놓치지 않고 보던 평범한 청년이었다. 그러나 안정적이었던 생활은 해방으로 인하여 변화된다. 그렇다해도 좌우대립이 심한 남한보다 그곳이 낫다는 생각에 그는 함흥에서 장사를 하며 새로운 체제에 적응해갔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곧 한국전쟁을 만나게 된다. 만세교를 건너 함흥에 입성하는 국군은 그에게 해방군이자 공포의 대상이었다. (사진2) 함흥만세교 사진 (사진출처_한국민족문화대백과) 국군이 입성한 뒤 그는 함흥 민사부 동원부장으로 국군을 도왔고 흥남철수작전이 시작되자 퇴각하는 1군단과 함께 서호진에서 간신히 수송선을 타고 월남한다. 배는 예상과 달리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포항에 닿았다. 단신에 무일푼으로 월남한 그는 국민방위군에 차출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방위군이 해산되자 본격적인 피난생활이 시작된다. 부산에서 그는 친척인 삼양물산 주동태의 도움으로 쌀창고와 함흥냉면 장사를 하며 종자돈을 모아, 휴전되기 전 도강증을 구해 서울로 상경한다. 그리고 전쟁으로 파괴된 서울에서 건설업을 시작한다. 입찰과 재무 업무는 자신 있었지만 건설에는 영 취미가 없던 그는 친척인 이회극이 부사장으로 있는 수도극장에 자주 출입하게 된다. (사진3) 1951년 한국전쟁기의 수도극장의 모습과 2003년 스카라극장의 모습이다. 수도극장은 1930년 약초극장으로 개관해 1945년 수도극장, 1962년 스카라극장으로 재개관하며 유지되어 오다 2005년 근대문화재로 등록예고 된 뒤 소유주에 의해 철거되었다. (사진출처_한국콘텐츠진흥원kocca 문화컨텐츠닷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극장 문 닫는 법이 없어. 손님이 오는 거야.” 사람이 끊이지 않는 극장에서 그는 영화사업의 가능성을 보게 되고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를 준비한다. 그는 먼저 외화수입을 통해 영화흥행에 대한 감을 익히며 명보극장 건설을 추진한다. 삼양물산의 주동태와 고향 친구이자 후에 연방영화사 부사장이 되는 양봉식을 설득해 투자유치를 하고 파리에서 귀국한 건축가 김중업에게 설계를 의뢰해 극장건설을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국회부의장 조 모 씨의 권력을 등에 업고 나타나 일신산업에게 공사를 맡기며 위기는 시작된다. 자본도 기술도 부족했던 건설업체인 일신산업의 미숙으로 공사가 난항을 겪게 된 것이다. (사진4) 1956년 명보극장(공사 초기 명성극장) 기공식 현장. 오른쪽 끝이 양봉식, 그 옆이 이지룡으로 일신산업 대표와 악수하고 있다. (사진5) 1956년 명보극장 기공식 현장. 양봉식과 이지룡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 그는 자본과 기술이 있는 대림산업에게 공사를 의뢰했고 대림산업은 초기 투자자들 보다 더 많은 지분을 요구했다. 어쩔 수 없이 대림산업의 요구를 들어준 뒤 공사는 시작되었다. (사진6) 명보극장 상량식. 대들보에 돈을 넣은 하얀천을 묶고 있다. (사진7, 사진8) 명보극장 건설현장 1957년 여름, 드디어 명보극장은 완성된다. 한국전쟁 후 처음으로 건설된 현대식 영화상영관이자 그가 청년기 함흥 시내에서 영화를 봤던 명보극장이 서울 충무로에도 들어선 것이다. 이때가 그의 나이 29세이다. 명보극장은 1957년 8월 25일 개관식을 갖고 개관작 <상류사회 High Society>(찰스 월터스, 1956)를 시작으로 극장영업을 시작한다. 그는 명보극장 부사장으로 자리한다. (사진9) 1957년 명보극장 개관기념. 극장종업원들과 명사들이 함께 찍은 사진이다. 가운데가 당시 민의원 의장 이기붕이고 오른쪽이 부인 박마리아, 그 옆이 이지룡이다. 명보극장은 개관했으나 대림산업과의 알력다툼으로 친구 양봉식을 비롯한 초기 관계자들은 명보극장에서 손을 떼게 되고 그 또한 명보극장에서 나오게 된다. 대림산업 측의 부당함을 호소하기 위해 소송을 제기했으나 5.16으로 유야무야 된다. 그는 다시금 심기일전해 1960년대 중반 영화제작업에 뛰어든다. 1964년 <학생부부>(김수용) 등 다른 영화사의 이름을 대명해 세 편의 영화를 제작하고 1966년 아세아영화사를 만들어 자신의 메이커로 본격적인 영화제작을 시작한다. (사진10) <학생부부>(김수용, 1964) 촬영현장. 선글라스를 낀 이가 김수용 감독이고 그 옆에 양복을 입고 있는 이가 제작자 이지룡이다. 카메라 뷰파인더를 보고 있는 이가 촬영감독 전조명이다. 그리고 1965년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정창화, 1965)로 정창화 감독과 처음 만나게 된다. 이 작품은 2차 세계대전 중 미얀마 전선을 배경으로 스스로를 황군으로 정체화한 조선인 지원병이 미얀마 게릴라 대원과 친구인 조선인 학도병들의 죽음을 통해 각성하고 일본군에 대항하지만 미얀마 게릴라 대장의 오해에 의해 결국 죽임을 당한다는 내용의 남방전쟁액션영화이다. 열대 지방인 미얀마 전선을 국내에 재연하기 위해 그는 미공보원에 있는 지인의 도움을 받아 정창화 감독과 함께 미공보원에 들어가 동남아 전투장면에 대한 영상을 살펴보고 자료를 모았다. 이를 바탕으로 일본군 초소와 열대 밀림을 광릉에 만들고 실제 동남아 전선을 촬영한 미공보원의 필름까지 복사해 영화에 사용했다. (사진11)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정창화, 1965)의 한 장면으로 동남아 분위기를 내기 위해 미공보원에서 가져온 필름을 사용한 것이다. (사진12)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정창화, 1965)의 한 장면으로 열대 전선 상공을 나는 전투기 장면도 미공보원에서 가져온 필름을 영화에 사용한 것이다. (사진13, 14, 15)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정창화, 1965)에서 오픈세트로 만든 일본군 초소는 그 규모와 정교함에서 추석 대작프로그램의 면모를 보여준다. 정창화 감독은 본인의 구술에서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의 열대 야자수는 국내의 호사가에게 빌려서 촬영한 것이라 증언했다. 제작자 이지룡은 야자나무를 제작팀이 천이나 다양한 재료를 이용해 직접 만든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쌀과자로 중국식 발을 만들었던 당시 소품팀의 재주라면 야자나무 또한 그럴듯하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 영화 속에 열대 풍경을 재현하기 위해 야자나무 일부는 빌리고 일부는 만드는 식으로 처리한 듯하다. (사진16, 17)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정창화, 1965)에서 야자나무가 화면 전면에 배치되어 있는데 옥의 티처럼 화면 왼쪽 하단에 화분이 보인다. 당시 촬영현장에는 따로 모니터가 없고 카메라의 작은 뷰파인더로만 촬영 중인 화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심지어 시네마스코프 영화의 경우 카메라 뷰파인더에는 일명 쫄쫄이 화면이라 불리는 세로로 긴 왜곡된 화면이 보이기 때문에 이런 실수가 발생했을 것이다. (사진18, 19, 20)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정창화, 1965)에서 광릉에 만들어 놓은 열대밀림과 서해안으로 보이는 곳에 만들어 놓은 열대의 바닷가 장면이다. 전쟁이 끝나고 회한에 젖은 주인공이 홀로 바닷가로 향하는 장면에는 큰 키의 야자나무들이 이국적인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호사가의 야자나무인지 제작팀이 직접 제작한 것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정창화, 1965)도 당시 대부분의 한국영화 처럼 지방배급업자들에게 지역판권을 선판매한 자금에 초기 투자금 및 초과되는 제작비를 제작자가 감당하는 방식으로 돈을 조달해 영화를 만들었다. 제작 초기 스틸사진만 보고 지방배급업자들이 어음을 끊어주고 시사회에서 개봉관 아카데미극장 방우영 사장이 일어나 박수 칠 정도로 평이 좋아 흥행을 기대했으나 대중의 반응은 달랐다. 결과적으로 그에게 손해만 안겨준 작품이 된다. (사진21)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정창화, 1965) 포스터 깐깐하고 꼼꼼한 정창화 감독을 만족시키는 데는 많은 제작비가 들었다. “정창화한테 내가 밤낮 지지...연출자가 뭐 하는데 밀어줘야지. 그러니까 다른 회사는 가지도 않고, 다른 회사에서도 정창화가 제작비를 많이 들인다 해가지고 정창화 쓰는 걸 겁내 한 거야.” 그럼에도 그는 정창화 감독의 가능성을 보고 영화를 계속 제작했다. 정창화 감독의 연출로 1966년 <순간은 영원히>, <예라이샹>, <위험한 청춘>, 1967년 <비련>, <위험은 가득히>, <황혼의 검객>, <조용한 이별>, 1970년 <아랑곡의 혈투>(정창화·짱깅퍼)를 연이어 제작했다. 정창화 감독이 2년간 연출, 개봉한 작품의 70퍼센트를 그가 제작했다. 정창화 감독의 까다로운 연출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제작사는 아세아영화사 말고는 없었다는 말이 과언이 아니었다. (사진22) 아세아영화사 사무실에서 이지룡, 정창화 당시 홍콩 굴지의 영화사 쇼브라더스가 정창화 감독을 스카우트하게 된 영화 <순간은 영원히>도 그가 한홍합작으로 제작한 작품이다. 그는 정창화 감독이 아시아 무협영화의 거장으로 탄생할 수 있는 밑거름을 제공한 제작자였다. 자칫 멜로드라마로 오해할 법한 제목인 <순간은 영원히>는 사실 홍콩을 무대로 남한 정보원들이 대남공작을 위해 막대한 금괴를 수송하려는 북괴 간첩단을 일망타진한다는 첩보액션영화이다. 영화의 원래 제목은 <위기X7호>인데 무슨 일인지 공보부는 개명을 권유했고 결국 <순간은 영원히>로 변경한다. 그래도 영문제목은 <Special Agent X-7>이다. (사진23) <순간은 영원히>(정창화, 1966)의 포스터 <순간은 영원히>는 홍콩 로케이션 촬영을 위해, 국내에서 중화권 영화의 통번역을 맡았던 인물의 소개로 홍콩의 군소영화사인 유린영화사와 합작해서 만들어졌다. 달러의 반출이 어렵던 시절 이국적인 홍콩배경이 필요한 경우 합작은 유리한 선택이었다. 국내 배우와 스태프들의 개런티와 국내 촬영 비용은 국내제작사가 부담하고 홍콩배우들과 홍콩촬영분은 합작한 홍콩 현지 제작사가 비용을 부담하는 식으로 진행했다. 이런 제작 방식은 홍콩이나 대만의 영화사들에게도 매력적인 일종의 공동제작, 투자방식이었던 듯싶다. 그래서 그는 <순간은 영원히>(정창화, 1966), <비련>(정창화, 1967), <조용한 이별>(정창화, 1967), <낮과 밤>(전우열, 1968), <아랑곡의 혈투>(정창화, 1970), <대벽관>(부청화·장진원, 1970) 등을 한홍합작으로 제작했다. 홍콩에서 <순간은 영원히>(정창화, 1966)를 본 쇼브라더스사는 정창화 감독을 스카우트하기 위해 아세아영화사에 연락했고 그는 정창화 감독 외에 액션영화에 일가견이 있던 김기덕, 장일호 감독도 함께 소개해주었다. 또한 부족한 홍콩의 남자배우들을 채우기 위해 배우 성훈, 남석훈, 방수일, 오경아 등을 추천해 그들 또한 홍콩에서 한동안 활동하게 된다. (사진24) <아랑곡의 혈투>(정창화, 1970)에 출연 중인 오경아와 방수일 정창화 감독을 쇼브라더스에 소개한 인연으로 아세아영화사도 쇼브라더스와 함께 <아랑곡의 혈투>를 합작하게 된다. 이 작품은 쇼브라더스의 영화를 합작영화로 둔갑시킨 위장합작 영화라는 논란이 많은 작품이다. 당시 외국영화의 수입편수가 국가에 의해 통제되다 보니 인기 있는 외국영화와 겉모습을 취할 수 있는 합작영화의 제작이 인기였다. 실제 국내영화사와 거래를 했던 홍콩과 대만의 영화사는 국내 영화법의 각종 제약(합작영화의 조건인 국내감독의 참여, 국내배우의 출연, 투자금액의 제한 등)을 인식하고 이에 맞춰 때로는 이면계약이 이뤄지던 시절이었다. 당시 홍콩이나 대만영화에 국내 영화제작사가 사전투자를 통해 합작영화 타이틀을 얻기도 했는데 이런 작품들 모두 당시 기준으로는 위장합작이다. 아세아영화사는 김진규의 추천으로 대만 영화에 사전투자를 했지만 결과물이 좋지 않아 추가 투자를 철회하고 판권을 포기한 경험이 있다고 했다. 국가의 통제에도 불구하고 합작영화의 제작은 대단히 유동적이고 탄력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사진25) 쇼브라더스와 아세아영화사와의 합작영화인 <아랑곡의 혈투>(정창화, 1970) 포스터이다. 홍콩무협영화의 색채를 띈다. (사진26) 홍콩의 군소영화사인 영광영업공사와 아세아영화사의 합작영화인 <조용한 이별>(정창화, 1967) 포스터이다. 주연 여배우인 홍콩 배우 정향이 신성일과 남정임 사이에 작은 크기로 그려져 있다. 1971년에 그는 <20인의 여도적>(이지룡, 1971)을 연출한다. 아세아영화사의 여배우 공모로 화제를 모았던 작품인데 당시 공모전 사진을 보면 지금의 오디션과는 매우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사진27) <20인의 여도적>(이지룡, 1971) 포스터 (사진28) <20인의 여도적>(이지룡, 1971) 여배우 공모전 사진 1972년에는 영화제작사인 유림흥업을 설립한다. 그리고 1973년 이성구 감독 연출로 <쥬리아와 도꾸가와 이에야스>를 일본의 고즈시마섬에서 로케이션으로 제작한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쥬리아는 임진왜란기 일본에 입양된 조선 출신 여성으로 천주교도로 성장해, 천주교를 박해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측실 제안을 거절하여 유배당하고, 유배지에서 약자와 병자에게 헌신해 성자로 추앙받는 인물이 된다. (사진29) <쥬리아와 도꾸가와 이에야스>(이성구, 1973) 포스터 1973년 오타 쥬리아에 대한 기사가 국내에 소개되어 인기를 얻자 다섯 개의 영화사가 이 소재를 영화화하고자 경합했다. 영화사들이 기획안을 문화부에 접수했고 그 중 유림흥업의 작품이 선정된다. 유림흥업은 야심차게 일본 고즈시마섬에서 이 작품의 로케이션 촬영을 진행한다. (사진30, 31) <쥬리아와 도꾸가와 이에야스>(이성구, 1973)의 스틸 섬 사람들의 관심과 우호적인 협조 속에서 진행된 작품이라 벅찬 마음에 제작자는 영화 타이틀이 뜨기 전 작품의 취지에 대한 제작자의 당부 영상과 이를 일어로 통역하는 배우 김진규의 영상까지 넣어 완성시켰다. (사진32) <쥬리아와 도꾸가와 이에야스>(이성구, 1973) 일본 고즈시마섬 촬영 현장. 보조출연을 해 준 섬 주민들과 함께한 사진으로 양복을 입은 이가 이지룡이고 오른쪽이 배우 김진규이다. 그러나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천주교 신자들의 단체관람도 기대했으나 신통치 않았다. 김수환 추기경을 초대한 시사회에서 추기경이 관람 도중 나가는 사태가 발생할 만큼 영화에 불편한 부분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쥬리아가 유배를 가게 된 동기를 묘사하는 과정에서 쥬리아의 성녀로서의 이미지가 훼손된 것이 원인이라 지적했다. 흥행을 위해 외설적인 묘사를 시도한 것이 오히려 흥행에 악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사진33, 34) <쥬리아와 도꾸가와 이에야스>(이성구, 1973) 도꾸가와 이에야스 역의 허장강과 쥬리아 역의 신숙 야심차게 제작한 작품의 부진으로 타격을 입은 그는 10년 정도 합동영화사와 한진흥업, 남아진흥공사에서 부사장으로 있으며 극장업과 영화제작에 대한 자문과 기획 활동을 했다. 극장업과 수입, 제작을 아우르며 폭넓게 활동한 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제작사들이 많았던 것이다. 그리고 1986년 다시 다남흥업을 설립한다. 1992년까지 <프리지스 오너 Prizzi’s Honor>(존 휴스턴, 1985)와 같은 흥행작을 수입했으며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장길수, 1989)를 비롯하여 6편의 작품을 제작했다. <프리지스 오너>는 1986년 9월 다남흥업이 수입하여 단성사에서 개봉한 작품이다. 당시 신문에 의하면(《매일경제》 1986년 8월 13일 9면) 다남흥업은 <프리지스 오너>의 사전제작단계에서 수입을 결정해 저렴한 가격에 좋은 영화를 수입할 수 있었다고 한다. (사진35, 사진36) <프리지스 오너 Prizzi’s Honor>(존 휴스턴, 1985) 개봉 당일. 종로 극장 단성사 앞의 풍경으로 관객들이 표를 사기 위해 극장 앞에 길게 줄 서 있다. 단관 개봉관 시절에는 인기작의 경우 영화표를 사기 위해 극장 앞에 관객들이 길게 줄지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제작자들은 이것 또한 광고라 생각하고 일부러 줄을 대로변으로 세우거나 티켓박스를 조금 늦게 열기도 했다. 1989년에 제작한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장길수)는 작가 이문열의 요구에 따라 원작료를 러닝개런티로 선점하고, 베니스영화제와 모스크바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당시 최고의 인기 배우 강수연을 캐스팅해, 영화의 대부분을 미국에서 로케이션 촬영한 야심작이었다. (사진37, 38)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장길수, 1989) 홍보사진 이 작품은 음력설이었던 개봉일, 한파에도 불구하고 국도극장에서 을지로까지 줄을 선 관객들로 전회 매진을 기록하며 극장 문을 열었다. 31만이 넘는 관객이 들어 그해 방화 3번째 흥행작이 된다. 그리고 1990년 대종상 최우수 작품상과 기획상 등 7개 부문을 수상해 흥행은 물론 작품성까지 인정받는 영화가 된다. 그동안 그가 제작한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정창화, 1965), <쥬리아와 도꾸가와 이에야스>(이성구, 1973)등 흥행성과 작품성을 만족시키고자 큰 투자를 감행했던 작품들이 기대에 못 미쳤으나 드디어 만족스러운 성과를 낸 작품이 나온 것이다. 그는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장길수, 1989)의 성공 이후 소품 두 어 편을 제작한 뒤 40년 가까이 몸담은 영화계를 은퇴한다. 무일푼 단신으로 월남했지만 빠른 판단과 추진력, 도전정신을 통해 영화계에 족적을 남긴 그의 다이나믹한 인생은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진행된 2012년 원로영화인 구술에서 좀 더 깊이 있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