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 밤거리
- 감독
- 최영철
- 제작년도
- 1965
- 출연
- 김승호, 김지미, 남궁원, 도금봉, 서영춘, 김동원, 장훈, 김용연, 김칠성, 신미림, 최삼, 도성희, 임예심, 옥상미, 이수미, 추봉, 석운아, 박일, 최일
“(밀레니엄 세대가) 성인기에 이르는 과정은 지연되고 있을 뿐 아니라 극단적인 경제 구조 조정, 심대한 문화 변동, 깊은 사회 불평등 때문에 근원적으로 파괴되고 있다.” 1) 사회학자 제니퍼 M. 실바는 미국의 밀레니엄 세대 100명을 인터뷰를 통해 연구한 저서 『커밍 업 쇼트』에서 위와 같이 적고 있다. 물론 2010년대 미국의 청년들과 2020년대 한국의 청년들을 일대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리스크풀링(Risk-pooling)이라는 사회안전망의 축소,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산업 노동계급의 쇠락, 급속한 문화 변동 2) 등 실바가 꼽은 문제점은 지금의 한국에도 충분히 적용 가능하다. 『커밍 업 쇼트』의 국내 서평들은 88만원 세대, N포세대, 흙수저, 헬조선 같은 단어들을 사용해가며 국내 청년의 상황을 책의 내용과 비교하고 있다. 미국의 청년들이 그러한 것처럼, 한국의 청년들 또한 독립, 취업, 결혼, 육아 등 전통적으로 성인기라 여겨지는 단계에 접근하는 것이 지연되고 있다. 이는 수준미달(Coming Up Short)의 개인들 때문이 아니라 수준미달의 사회와 제도 때문이라는 것이 이 책의 주된 분석이다. 더 나아가 실바는 성인기가 “극적으로 새롭게 상상되고” 있다며, 전통적인 성인기의 지표들 대신 다양한 방식으로 경험한 “고통의 치유를 성인 정체성의 기반” 3) 으로 삼고 있다고 주장한다. 홍다예 감독의 < 잠자리 구하기 >(2022)는 입시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은 불안에 관한 고백이다. 고3이었던 2014년 입시생활에 관한 다큐멘터리 < 시발 .>(2014)을 시작으로 <개새끼>(2016), <관종쓰레기>(2018) 등으로 이어지는 감독의 필모그래피의 연장선상에 놓인 작품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하나의 고백으로 시작한다. 감독은 고3 시기 학교에서 마주한 잠자리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창밖으로 나가려 하지만 반복해서 유리창에 머리를 부딪히던 잠자리는 결국 떨어져 죽었다. 감독은 자살을 위해 찾은 한강 다리 위에서 그 잠자리를 떠올렸다고 고백한다. 대학은 지긋지긋한 입시생활의 탈출구로 여겨짐과 동시에 학생들을 구속하는 유리벽이기도 하다. <잠자리 구하기>는 “대학에 간다는 것”의 의미를 끊임없이 되새긴다. 대학에 가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며, ‘어른’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감독과 친구들은 반복되는 실패와 좌절을 경험한다.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하고, 재수생활을 하고, 원하는 대학에 들어갔음에도 또다시 좌절을 경험한다. 대학에 들어가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처럼 이야기하던 말들은 허상이었음이 드러난다. 대학에 간다는 것은 성장이 아니라 새로운 불안의 시작임을 깨닫는다. 자신을 규명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 학생들은 성적과 대학의 이름으로 자신을 정의하기 시작한다. 각자의 상황을 토로하는 친구들과의 대화는 절망과 불안을 토해낼 뿐 아무런 논의도 서로에 대한 공감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잠자리 구하기> 속 친구들은 서로의 불안을 직관적으로 이해하지만, 그것을 서로 해소해줄 수 없다. <잠자리 구하기>는 < 공부의 나라 >(2015)와 같은 다큐멘터리처럼 입시 제도를 분석적으로 비판하는 영화가 아니다. 고3, 재수생, 대학 신입생, 20대 중반인 현재 등 다양한 시간대의 모습이 계속하여 교차되는 영화의 형식은 ‘입시’와 ‘대학생활’이라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지도 않다. 더 나아가, 이 영화는 그러한 불안을 떨쳐내고 마침내 발전한 모습을 보여주는 성장담도 되지 못한다. 감독 자신은 이 영화를 “20대 청년의 인류학적 반(反)-성장 보고서” 4) 라 말하고 있다. “잘 지내지 못한다는 고등학교 친구에게 편지를 쓰기로 했다.”라는 시놉시스가 무색하게, 이 영화는 결국 편지를 부치지 못했다는 고백을 포함하고 있다. 불안 속에 놓여 있는 감독은 친구에게 편지를 보낼 수 있을 만큼 성장하지 못했다. 다만 부치지 못한 편지를 이 영화로 대신하고 있을 뿐이다. 때문에 이 영화는 8년이라는 시간 동안 촬영된 감정을 유일한 진실로서 제시한다. 홍다예 감독과 친구들이 입시 과정에서 어떠한 실패와 성공을 경험했는지는 그저 그들이 경험한 사실의 기록으로서 제시될 뿐이다. <잠자리 구하기>가 제시하는 기록은 입시라는 과정 속에서 경험한 사실들의 진술이 아니라, 8년이라는 시간 동안 누적된 감정들이다. 자기 파괴적이라 느껴질 정도로 날것의 감정들을 파헤치고 공개함으로써 자신의 반-성장을 고백한다. 이는 원하던 대학에 진학했음에도 여전히 불안감을 안고 살아가는, 끝없이 성장기에 머무를 뿐 성인기에 도달할 수 없는 청년의 초상이기도 하다. 대학 진학이라는 지표는 여전히 강력한 성인기의 지표임과 동시에, 너무나도 추상적이라 결코 뛰어넘을 수 없는 장벽이다. 반-성장을 고백하는 또 한 편의 다큐멘터리가 있다. 푸른영상에서 제작한 이효진 감독의 < 가단빌라 >(2022)다. 이 영화 또한 감독 자신의 자살사고를 고백한다. 흑백 화면의 작은 공원에서 시작한 이 영화는 한 빌라의 문을 열고 들어가 빌라 꼭대기의 집으로 향하는 카메라의 이동에서 시작된다. 그곳은 이효진 감독이 26년을 살아온 공간이다. 이어지는 장면 속 내레이션은 14살 때 부모를 대신해 빚쟁이들의 전화를 받으며 자라왔고, 그렇게 10여 년간 이어진 불행 속에서 자살충동을 갖게 되었다고 말한다. 감독은 불행 속에서 살아온 할머니 또한 자살을 생각했을지 궁금해 카메라를 들었다고 영화 속에서 밝히고 있다. 감독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하지만, <가단빌라> 속 대부분의 푸티지에서 감독의 목소리는 삭제되어 있다. 할머니나 어머니 등과 감독이 대화하는 장면에서 감독의 말은 사운드에서 지워진 채 자막으로만 처리되어 있다. 이 영화에서 감독은 카메라 뒤로 자신을 잔뜩 숨긴 채 가족의 이야기를 기록한다. 이효진 감독은 ‘손녀’이자 ‘딸’로서 할머니와 어머니 앞에 서 있지만, 목소리를 지움으로써 온전한 관찰자의 위치로 물러나기를 시도하는 것이다. 이효진 감독의 모습은 가끔씩 등장하는 내레이션으로, 흑백 화면의 영화 속 몇 안 되는 컬러 화면의 홈비디오 영상으로만 등장한다. <가단빌라>는 할머니를 비롯한 여성 가족구성원들의 일상을 관찰한다. 이 일상에는 부동산과 돈의 문제를 두고 격앙된 목소리로 싸우는 가족구성원들의 모습 또한 포함되어 있다. 내레이션이 아닌 이효진 감독의 목소리가 등장하는 몇 안 되는 순간 중 하나는 화가 난 할머니가 칼을 드는 장면이다. “할머니 칼 들었어”라는 감독의 말은 감독이 자신의 목소리를 삭제함으로써 결심한 자신의 위치를 스스로 배반하며, 자신에게 내포된 불안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가단빌라>는 가족이 왜 싸우는지, 어떤 역사를 가지고 살아왔는지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부동산과 돈의 문제가 전면화되는 다른 작품, 이를테면 마민지의 < 버블 패밀리 >(2016)와 같은 작품들이 IMF를 비롯한 국가적, 사회적 사건들을 끌어오고 뉴스화면 등을 차용하며 가족과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적극적으로 해설하는 것과 대비된다. 다만 관객들은 어렴풋이 그 문제들을 짐작할 수 있다. 대가족의 생계와 함께 육아와 가사노동까지 책임져야 했던 할머니의 과거, 딸의 기여를 무시하고 아들에게 먼저 이익을 물려주려는 할머니의 태도, 끊임없이 재산을 ‘날려먹음’에도 반성하지 않는 집안의 남성들. 한국 특유의 부동산 자본주의와 가부장제가 이 영화의 내부에서 맴돌고 있지만, 이효진 감독의 카메라는 그곳에 집중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집안의 남성들을 거의 담아내지 않는다. 종종 프레임 속에 들어오기는 하지만, 그들은 대부분 할머니와 어머니의 말속에서 등장할 뿐이다. 이 영화는 집안을 말아먹고 감독에게 불안감을 심어준 가장 큰 이유가 되는 인물들을 담아내지 않는다. 오히려 감독 자신과 비슷한 위치에서 비슷한 방식으로 살아온 여성 가족구성원에게 주목한다. 마치 “이런 끔찍한 집안에서 살아남은 비결이 무엇인가요?”라며 묻는 것처럼. 영화의 제목인 ‘가단빌라’는 감독이 거의 평생을 살아온 집이다. 동시에 "집을 지어 성공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성공하지 못한다"는 할머니의 말처럼 자본주의적 성공의 지표이고, “삼촌이 말아먹을 수 있는” 투자가치를 지닌 상품이자, 욕설과 고성이 오가는 싸움터이다. 가단빌라라는 공간에 담긴 한 가족의 역사와 정동, 수준미달의 사회와 제도가 만들어낸 집이라는 전쟁터는 반-성장을 추동한다. 영화 후반부에 등장하는, 가단빌라의 평면도 위로 가족의 사진을 오버랩시키는 장면은 영화가 담아낸 반-성장의 근원을 갈무리하고 있다. <잠자리 구하기>와 <가단빌라>의 반-성장 서사는 그것을 기록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잠자리 구하기>의 마지막에서 홍다예 감독은 물에 빠진 잠자리를 나뭇가지로 건져 올려 구해낸다. <가단빌라>는 흑백의 이미지를 담아내는 카메라 뒤에 숨어 있던 감독이 다시금 목소리를 내고 푸른색 하늘을 담아내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두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모종의 결심이 담겨 있다. 혹은 그 모든 것을 견디고 자신이 아직 버티고 있다는 증거로 각자의 영화를 제출해낸 것만 같다. 실바의 말을 다시금 빌리자면, 두 영화는 “과거로 돌아가 (정신적) 병리 현상의 숨겨진 원천을 찾고, 타인들과 의사소통하면서 겪은 고통의 이야기에 목소리를 부여하고, 해방되고 독립된 자아를 형상함으로써 과거를 극복” 5) 하는 것이다. 실바가 이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아니다. 마크 피셔는 『커밍 업 쇼트』의 논의를 확장하는 글 [반-치료]에서 실바의 분석이 "치료 서사는 더 이상 제도에 의지해 개인을 뒷받침하고 보살필 수 없는 세계에서 의미를 부여해 주는 유일한 이야기"를 보여주는 것이며, “치료 서사의 확산은 의식 고양 운동이 야기한 분자 혁명을 억누르고 개인화한 한 방식” 6) 이라 덧붙이고 있다. 두 영화가 각각 보여주는 우정의 붕괴와 가족의 파괴는 한 개인과 한 가족의 실패라 치부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두 감독은 그럼에도 살아있고 그럼에도 살아가며 카메라를 들고 자신과 친구들, 가족들을 찍는다. 두 영화는 그 실패 속에 놓여 있는 개인(들)에 집중하고, 각 개인이 놓인 상황에 관한 분석보단 감정의 기록을 택함으로써, 그 이면에 있는 사회와 제도를 생각하게끔 한다. 실바는 “이들이 성인이 된 이야기는 여전히 전개 중이며 이들의 미래는 아직 다 쓰이지 않았다.” 7) 며 책을 마무리한다. <잠자리 구하기>와 <가단빌라>는 90년대에 태어났고 2010년대에 성인이 되었지만 2020년대까지 성인기를 지연시키고 있는 이들의 고통스러운 일기장이다. 이제 그 일기의 이면을 상상하고, 두 영화의 마지막이 내미는 손을 잡을 차례다. *** 1) 제니퍼 M. 실바 「커밍 업 쇼트」, 문현아, 박준규 옮김, 리시올, 2020, 32p. 2) 제니퍼 M. 실바, 같은 책, 38~38p. 3) 제니퍼 M. 실바, 같은 책, 33~35p. 4) 이우빈, "JeonjuIFF #2호 [인터뷰] 20대 청년의 반성장 보고서, '잠자리 구하기' 홍다예 감독", 씨네21, 2022, 출처: www.cine21.com/news/view/?mag_id=100062 . 5) 제니퍼 M. 실바, 위의 책, 50~51p. 6) 마크 피셔, "반-치료", 박진철 옮김. https://playtime.blog/2020/10/22/반-치료/ 7) 제니퍼 M. 실바, 위의 책, 284p.
서울에서 신문사 편집기자로 일하는 은서( 이유영 )는 이사 갈 곳을 정하지 못한 채 집 계약이 만료되자 어쩔 수 없이 아빠 진철( 강신일 )의 집으로 짐을 옮긴다. 진철은 은서가 어린 시절을 보낸 인천의 집에서 홀로 생활하고 있다. 녹슨 철문을 열고 들어가면 보이는 진철의 집은 햇살이 거의 들지 않는 괴괴한 공간으로, 시간이 멈춘 듯한 인상을 줄 만큼 오래고 낡았다. 열쇠공인 진철은 그곳에서 수십 년의 세월을 보냈지만 나머지 가족은 모두 떠난 상태다. 막내 은서는 독립을 이유로, 첫째 은주는 결혼과 함께, 아내 미자는 이혼을 택하면서 집과 진철에게서 멀어졌다. 은서와 진철도 살가운 사이는 아니어서, 서울과 인천이라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도 소원하게 지낸다. < 집 이야기 >(2019)는 은서가 뜻하지 않게 아버지의 집으로 되돌아가 그와 함께 생활하면서 벌어지는 갈등과 연민, 이해를 그린 드라마다. <집 이야기>에서는 공간 자체가 제3의 캐릭터 역할을 한다. 우선 진철이 머무는 인천이라는 도시가 그러하다. 과거 번성했지만 지금은 낙후한 느낌이 강한 이곳의 풍경은 한때 ‘열쇠 장인’으로 불렸으나 디지털 도어락이 보편화된 오늘날 생계를 걱정하는 진철의 삶과 그 모습이 닮았다. 더욱이 인천은 서울에서 마음만 먹으면 쉽게 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로, 그럼에도 왕래가 뜸한 은서와 진철의 심리적 거리를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진철은 직업인으로나 생활인으로서나 변화가 거의 없는 삶을 사는데(일례로 그는 여전히 폴더폰을 쓴다), 하나 특별한 게 있다면 간혹 비행기가 지나는 바닷가를 찾아 사진을 찍는 것이다. 인천은 세계에서 손꼽는 규모의 국제공항이 자리한 지역으로 ‘이동’의 공간인 이곳은 영화에서 역설적으로 진철의 고립감을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영화에서 캐릭터로서의 기능을 가장 많이 하는 공간은 역시 진철의 집이다. 낡은 열쇠 가게와 맞닿아 지어진 그곳을 한마디로 설명하면 ‘닫힌 공간’으로 요약할 수 있다. 특히 이곳은 시간적으로 단절된 공간이다. 물론 진철은 오늘도 장을 봐 와 그곳에서 밥을 해먹으며 생활을 이어 가지만, 그 배경이 되는 공간은 네 식구가 살던 시절과 판박이처럼 닮았다. 사용한 지 십수 년은 돼 보이는 손때 묻은 가구와 낡은 벽지, 은주와 은서가 학창시절 받은 상장 등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일상생활에서 시간의 흐름을 가장 잘 알게 하는 것은 빛의 변화. 우리는 창으로 넘어 들어오는 빛의 질감으로 집 안에서도 대략의 시간을 가늠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창문이 거의 없는 진철의 집은 시간을 읽어 내기 힘든 곳이며, 진철의 방은 특히 더 그렇다. 으레 창문이 있을 법한 자리엔 푸른 바다 풍경이 담긴 오래된 달력이 액자처럼 걸려 있을 뿐이다. 이처럼 진철의 공간에 고립과 단절의 기운이 스며 있다면 정반대엔 은서의 엄마, 미자의 공간이 있다. 진철과 이혼한 후 재혼해 제주에서 새 삶을 시작한 미자의 집은 빛이 가득한 곳이다. 게다가 사방으로 탁 트인 창문으로는 바다가 드넓게 펼쳐져 있다. 물론 진철이 영화 내내 고립 혹은 부동(不動)의 상태에 있는 건 아니다. 그는 은서를 통해 삶의 반경을 훌쩍 넓히는 경험을 하기도 하고, 일신상의 변화로 다른 공간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기도 한다. 그리고 영화는 진철이 옮겨 가는 공간과 공간을 세심하게 비춤으로써 진철의 삶을 설명하고자 노력한다. 사실 오랜만에 재회한 가족이 묵은 상처와 갈등을 마주해 화해에 이른다는 영화의 전체 얼개는 크게 새로운 건 아니다. 그러나 <집 이야기>는 한 가족의 집(home) 이야기를 집(house)이라는 공간으로 풀어냄으로써 이 같은 한계를 돌파한다. 영화를 전공하기 전 잠시 건축을 배웠다는 박제범 감독은 그렇게 ‘집’ 혹은 ‘공간에서 공간’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로 한 인물의 삶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다만 인물의 심리를 공간에 빗대 드러내겠다는 명확한 의지는 영화 표현 면에서 하나의 ‘틀’로 작용해 다소 도식적인 느낌을 주기도 하는데, 이런 점에서는 배우들의 도움이 컸다. 강신일과 이유영은 자연스럽고 유연한 연기로 각자의 공간에서 웅크리고 있던 부녀가 그 세계를 부수고 새로운 관계를 구축해 나가는 것을 설득력 있게 묘사해낸다.
2001년 | 마술피리 감독, 시나리오: 정재은 | 제작: 오기민 | 촬영: 최영환 | 프로덕션 디자인: 김진철 | 음악: 조성우 CAST 태희: 배두나 | 혜주: 이요원 | 지영: 옥지영 | 비류: 이은실 | 온조: 이은주 2000년대 초 한국영화를 꼼꼼히 살펴보면, 의외의 작품들이 눈에 띕니다. 여기서 ‘의외’라는 건 산업적인 의미입니다. 요즘 같으면 독립영화나 저예산 영화 안에서 제작될 법한 아이템이 메인 스트림 안에서도 제작되곤 했다는 거죠. < 고양이를 부탁해 >가 그렇습니다.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다섯 명의 ‘스무 살 여성’들이 세상과 맞닥트리는 이야기. < 여고괴담 >(박기형, 1998)의 오기민 프로듀서가 설립한 ‘마술피리’의 창립작인 이 영화는 당시 충무로 규모 있는 투자사 중 한 곳인 아이픽쳐스의 자본으로 제작되었고, 메이저였던 시네마서비스가 배급을 맡았던 작품입니다. 아직은 조금 쌀쌀한 2001년 3월의 어느 날, <고양이를 부탁해> 촬영 현장 공개가 있었습니다. 장소는 인천 월미도. 태희와 혜주와 지영과 쌍둥이 자매인 비류와 온조. 다섯 친구가 오랜만에 모이는 장면이죠. 버스를 타고 월미도에서 동대문 의류 상가로 이동하는 그들. 하지만 마침 불어오는 거센 바닷바람 앞에서 친구들은 옷깃을 꼭 여며야 했는데요, 그 바람은 마치 이 청춘들이 장차 겪게 될 현실이라는 거센 바람처럼 느껴집니다. 물론 그 바람은 실제는 아니었습니다. 대형 강풍기가 만들어내는 바람 앞에서 배우들은 ‘바람 맞는 연기’를 했습니다. <고양이를 부탁해>는 정재은 감독의 첫 장편영화입니다. 영상원 출신인 그는 < 도형일기 >(1997) < 둘의 밤 >(1999) 등의 단편으로 각광 받았고, <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김태용/민규동, 1999)의 스크립터로 충무로에 진입한 지 2년 만에 자신의 장편영화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고양이를 부탁해>의 제작자인 오기민은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의 프로듀서이기도 했죠. 요즘은 그렇지 않지만, 당시만 해도 30대 초반의 여성 감독은 흔하지 않았죠. 그런 이유로 정재은 감독은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고양이를 부탁해> 현장의 고유한 분위기는, 모니터 확인 시간입니다. 감독과 주연배우 다섯 명이 모두 여성이었기 때문이었을까요? 모니터 앞에서 친구들이 옹기종기 친구들이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매우 정다웠습니다. <고양이를 부탁해>는 정재은 감독에게만 첫 영화는 아니었습니다. 최영환 촬영감독에게 <고양이를 부탁해>는 오롯이 혼자 촬영을 책임져야 하는 첫 영화였습니다. 역시 감독처럼 30대 초반의 나이였는데요, 이후 최영환 촬영감독은 < 피도 눈물도 없이 >(류승완, 2002) < 범죄의 재구성 >(최동훈, 2004) < 타짜 >(최동훈, 2006) < 세븐 데이즈 >(원신연, 2007) < 전우치 >(최동훈, 2009) < 베를린 >(류승완, 2012) < 도둑들 >(최동훈, 2012) < 국제시장 >(윤제균, 2014) < 베테랑 >(류승완, 2014) < 살인자의 기억법 >(원신연, 2016) 등의 카메라를 잡습니다. 서울에서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인천 월미도까지 온 혜주(이요원)은 쌍둥이 자매인 비류(이은실)와 온조(이은주)를 발견합니다. 인형 뽑기에 빠져 있는 자매. 이미 적잖은 인형을 뽑았는데요, 이 장면을 위해 마련한 소품이 아니라 진짜로 뽑은 거라고 하네요. 이재용 감독의 < 순애보 >(2000)에서도 역시 쌍둥이 자매로 데뷔한 이은실, 이은주 자매는 이 영화에서 두 번째로 호흡을 맞추었습니다. 혜주는 오랜만에 만난 지영(옥지영)에게 염색이 촌스럽다며, 집에서 혼자 한 거 아니냐며, 타박을 합니다. 배가 지나가면서 내는 소리 때문에 촬영은 잠깐씩 중단되곤 했습니다. 드디어 약속 장소에 다섯 명의 친구가 다 모였습니다. 한편 <고양이를 부탁해> 현장이 조금 독특했던 건, 한국영화 최초로 전문 조감독제가 도입되었다는 점입니다. 일반적으로 한국의 도제 시스템에선 조감독은 감독으로 가기 위한 통로이고, 연출부에서도 퍼스트, 세컨드, 써드 등으로 위계가 형성되어 있죠. 하지만 전문 조감독은 감독에 종속된 직책이 아닙니다. 감독과 수평적 입장에서 자신의 업무를 수행합니다. 지금은 ‘옥고운’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옥지영에게 <고양이를 부탁해>는 첫 영화였습니다. 패션 모델 출신인 그녀는, 자신의 실제 이름과 같은 ‘지영’이라는 캐릭터를 섬세하게 표현했죠. 이 영화로 배두나, 이요원과 함께 춘사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습니다. 당시 배두나는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한창 주목 받던 라이징 청춘 스타였습니다. 2000년 봉준호 감독의 < 플란다스의 개 >로 청룡영화상 신인여우상을 수상했던 그녀는, <고양이를 부탁해>를 통해 한 뼘 더 캐릭터의 영역을 넓혔죠. 특유의 자연스러우면서도 순수하고 꿈꾸는 듯한 이미지가 황금비율로 섞인 캐릭터가 바로 ‘태희’였습니다. 배두나는 이 캐릭터로 백상예술대상과 춘사영화제와 부산 영평상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합니다. <고양이를 부탁해>는 이요원이 영화에 안착할 수 있었던 영화였습니다. 그녀가 받았던 네 개의 영화상, 즉 백상예술대상과 디렉터스컷 시상식과 청룡영화상의 신인여우상, 그리고 춘사영화상의 여우주연상은 모두 <고양이를 부탁해> 덕분이었습니다. 호기심 많고 꿈 많은 태희(배두나), 현실적인 혜주, 약간은 어둡고 세상에 냉소적인 지영, 굳건한 자매애로 알콩달콩 살아가는 비류와 온조. <고양이를 부탁해>는 이 다섯 친구가 세상과 드디어 대면하는, 바로 그 시간에 대한 영화입니다. 이미지 디지털화 지원 NA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