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 유부녀 알바의 욕정
- 감독
- 니쿠손
- 제작년도
- 2023
- 출연
- 토모다 마키
지난해 12월 12일, 한국영상자료원(이하 ‘영자원’)은 “스크린 케미스트리: 스타로 보는 한국영화사”라는 제목으로 1950~1990년대 한국영화계 스타 커플의 관계성을 분석하는 시네포럼을 개최했다. 한국영화사 연구를 수행하는 아카이브로서, 영화연구자는 물론 관련 분야에 관심을 가진 참여자들이 한국영화사와 관련해 새롭게 논의될 만한 지점을 발견하며 대화하는 장을 마련하고자, 영자원은 매년 이와 같은 행사를 기획하고 있다. 이번 행사는 학술적인 분석 중심의 발제나 토론이 아니라 발표자들이 청중의 질문을 받아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는 시네포럼의 방식으로 진행됐다. 국내 주요 스타 커플이 등장한 시기를 네 구간으로 구분하고, 각 구간별로 등장한 스타 커플과 당시 한국영화나 대중문화의 특성 간의 상관관계를 조명했다. 시기별로 논의될 만한 스타들을 미리 설정해놓기는 했지만, 이들의 활동이 갖는 의미는 발표자가 스스로 고민한 후 관객에게 제안하도록 열어뒀다. 1950~1990년대 급변한 한국사회의 분위기와 영화산업의 지형을 참고하면서, 시대를 ‘풍미’한 스타들이 대중에게 남긴 여운을 발표자와 참여자가 함께 추적할 수 있었던 포럼 현장을 요약한다. 1950~1960년대 스크린 속 스타 커플 영화평론가·영화사가 김종원 김종원 평론가는 1950~1960년대 한국영화에서 커플로 등장한 스타들 간 케미스트리를 발견했다. 1950년대 스타 커플의 역사는 < 출격명령 >(홍성기, 1954)에서 처음 호흡을 맞추고 실제 부부가 되어 < 춘향전 >(이규환, 1955)에서 향단과 방자를 연기한 전택이 와 노경희 부터 시작한다. 배우 노경희는 < 내가 넘은 삼팔선 >(손전, 1951)을 비롯해 < 피아골 >(이강천, 1955) 등에서 해방 이후 스크린을 통해 강렬한 카리스마를 분출하는 여성 배우로 거듭나고 있었으며, < 아리랑 3편 >(나운규, 1936)으로 데뷔한 전택이와 여러 작품에 동반 출연하며 20세기 중반 한국영화사에서 함께 활약했다. 이후 김승호 와 황정순 이 강대진 감독의 < 박서방 >(1960), < 마부 >(1961), 김수용 감독의 < 굴비 >(1963)에서 돋보이며 또 다른 스타 커플로 주목받았다. 그런데 < 새로운 맹서 >(신경균, 1947)로 데뷔한 배우 최은희 는, 커플을 구성하는 인물들 간 관계가 남성을 중심으로 형성된다는 당시 시대적 한계에서 벗어나, 케미스트리를 주도하는 여성 인물로 떠올랐다. 김진규 와 신영균 의 상대역으로 등장한 신상옥 감독의 < 동심초 >(1959), < 상록수 >(1961), < 산 >(1967)과 같은 작품들에서 이러한 측면이 두드러진다. 한편, 스타 커플의 일원으로 거론된 적은 드물었지만 멜로드라마 위주의 문예영화 영역 밖의 상업영화 작품들에도 다수 출연하며 입지를 다진 김지미 배우의 행보도 독특했고, 그의 활약은 < 골목안 풍경 >(박종호, 1962), < 불나비 >(조해원, 1965)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후 1960년대에 등장한 ‘트로이카’의 구성원으로, 김종원 영화사가는 배우 엄앵란 , 윤정희 , 문희 를 꼽았고, 그들과 배우 신성일 의 긴밀한 관계를 설명했다. 엄앵란은 < 청춘교실 >(김수용, 1963), < 맨발의 청춘 >(김기덕, 1964) 등에서 그와 함께 연기하며 ‘청춘영화’의 전성기를 불러왔으며, 두 배우의 호흡은 한국영화계에서 ‘스타’의 존재를 부각함과 동시에, 이전까지 외화에 치중됐던 국내 관객의 관심이 한국영화로 선회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다. 윤정희는 데뷔작 < 청춘극장 >(강대진, 1966)부터 < 안개 >(김수용, 1967), < 장군의 수염 >(이성구, 1968) 등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며 1960년대 한국 예술영화의 주축을 구성하는 배우로 자리매김한다. 문희 역시 이만희 감독의 < 흑맥 >(1965)과 < 돌아오지 않는 해병 >(1963) 등에서 신성일의 상대역을 연기하면서 트로이카의 구성원으로서 영화계에 두각을 드러냈다. 그리고 이러한 신성일 중심의 트로이카 구도로 대표되는 1960년대 한국영화의 스타 커플 구조는, < 결혼교실 >(정인엽, 1970) 속 신성일과 윤정희, 문희, 남정임 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막을 내린다. 윤정희 X 신성일: 1960~1970년대 개발독재시대의 ‘밀고 당기기’ 영화평론가·영화연구자 금동현 금동현 평론가는 1960~1970년대 대표 배우이자 청춘스타였던 신성일과 윤정희가 동반 출연작에서 연기한 인물들의 관계를 ‘밀고 당기기’라는 용어로 재해석했다. 극중 그들의 배역이 점하는 위치는 1966년부터 1980년까지 함께 출연한 87편에 달하는 작품들에서 거듭 역전되고, 둘 간의 케미스트리가 두드러진 <안개>와 < 야행 >(김수용, 1977)에서 이 점이 선명히 관찰된다. 배우 신성일은 비교적 젊은 나이에 < 아낌없이 주련다 >(유현목, 1962)로 데뷔한 이후 유수의 작품에서 줄곧 주연을 맡았고, 특유의 소년미로 ‘청춘의 영원한 아이콘’이자 현대사회에 완전히 정박하지 못한 무책임한 어른의 모습을 보여줬다. 반면 도회적이고 지적인 여성 인물을 대표했던 배우 윤정희는 1972년 석사 논문 「영화사적 측면에서 본 한국여배우 연구: 1903~1946년을 중심으로」를 발표하면서, 배우이자 여성인 자신의 위치를 성찰하는 면모를 보이며 ‘멜랑콜리’한 정서를 중심으로 스타 이미지를 갱신했다. <안개>와 <야행> 중 신성일, 윤정희 / © ㈜태흥영화 일례로, <안개>에서만 해도, 윤정희는 주변 소품이나 인물들 사이에 갇혀있고 신성일과의 관계에서 주도적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인물로 나타났다. 하지만 <야행>의 몇몇 장면에서 윤정희는 자신을 향한 관객의 시선을 의식하는 연기를 수행함으로써, 1970년대 한국영화가 관객의 시선을 활성화하는 성취를 이루는 데 기여한다. 신성일과의 케미스트리를 일으킴과 동시에 한국영화사의 흐름을 따라가며 구축된 윤정희의 스타 이미지를 참고하면, 금동현 평론가는 그가 ‘보여지는(보이는) 여성’에서 ‘보여주고 보는’ 여성으로 변화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1960~1970년대 한국고전영화 중 빼놓을 수 없는 걸작인 두 작품의 영화사적 의미가 제대로 파악되기 위해서는, 당대 형성된 두 배우의 스타 이미지를 반드시 경유해야 한다는 관점도 공유했다. 더불어, 두 사람이 우울하지 않은 명랑한 얼굴로 콤비를 이룬 작품 < 아파트를 갖고 싶은 여자 >(정인엽, 1970), < 모범운전사 갑순이 >(이형표, 1972) 역시 언급하면서, 둘의 케미스트리를 다른 방식으로도 재조명하고 싶다는 소회를 밝히며 발표를 마쳤다. 장미희 X 안성기 1980년대 한국영화의 황금 커플 영화연구자 이윤종 이윤종 영화연구자는 1980년대를 대표하는 배우 장미희 와 안성기 를 다루면서, 당대 한국영화 주요작에 출연하며 강력한 케미스트리를 발휘한 이들을 ‘황금 커플’로 지칭했다. 안성기는 김기영 감독의 1957년작 < 황혼열차 >에서 아역 배우로 데뷔해 연기 활동을 지속하다가 < 애수의 언덕 >(김대희, 1969) 이후 10여 년간 휴식기를 보내고 < 병사와 아가씨들 >(김기, 1977)로 복귀했다. 이때부터 < 바람불어 좋은날 >(이장호, 1980), < 적도의 꽃 >(배창호, 1983), < 고래사냥 >(배창호, 1984), < 깊고 푸른 밤 >(배창호, 1985) 등 1980년대 화제작의 주연으로서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닌 인물을 연기하며 ‘국민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같은 시기 장미희와의 동반 출연이 특히 빛났다. 장미희는 < 성춘향전 >(박태원, 1976)으로 데뷔하고 흥행작 < 겨울여자 >(김호선, 1977)에 출연한 이후, 1980년대에 접어들어 당대 여성 배우 트로이카에도 합류한다. 이후 <적도의 꽃>, <깊고 푸른 밤> 등에서는 안성기와 상대역으로 만나 열연함과 동시에 흥행까지 거두면서 두 배우 모두 영화계 입지를 굳히게 된다. <적도의 꽃>와 <깊고 푸른 밤> 중 장미희, 안성기 / © ㈜동아수출공사 그런데 이들이 동반 출연한 1980년대 작품들에서 각자가 욕망의 주체(안성기)와 대상(장미희)으로 설정되면서 둘 간의 케미스트리가 ‘파국’의 결말을 통해 발휘된 점이 인상적이다. 안성기는 순수함부터 비열함에 이르기까지 중·하층민 남성의 변화무쌍한 얼굴을, 장미희는 세련된 외관을 지닌 채 심리적 결핍을 겪는 부유한 여성 인물을 자주 연기했다. <적도의 꽃>에서는 중년 사업가에게 착취당하는 오선영(장미희)에게 반한 미스터 M(안성기)이 그를 구출하려 하지만 결국 화합에 실패한다. < 황진이 >(배창호, 1986)에서 황진이(장미희)에 대한 마음을 전하지 못한 갓바치(안성기)는 극단적 선택을 감행하고, <깊고 푸른 밤>에서는 미국 영주권과 돈벌이에 집착하는 백호빈(안성기)이 계약 결혼을 통해 제인(장미희)을 이용하며, 두 인물이 파멸로 치닫는 과정에서 아메리칸 드림의 허상이 드러난다. 1980년대를 대표하는 두 배우는 이렇게 산업화와 군부 독재의 한가운데 드리운 감정 소외나 우울감의 그림자를, 불행의 케미스트리로 스크린에 옮겨왔다. 김혜수 X 한석규: 1990년대 소비문화와 트렌드 신화, 도시의 얼굴 영화평론가·성결대학교 교수 정민아 이전까지 언급된 배우들의 활동이 과거 한국사회의 시대별 흐름에 맞춰 전개됐다면, 정민아 평론가는 1990년대에 두각을 드러내 현재까지도 활발히 필모그래피를 갱신하고 있는 배우로서 배우 김혜수 와 한석규 를 조명했다. 시대를 대표하는 스타였지만 그들이 함께 출연한 작품은 사실 많지 않다. 로맨틱 코미디의 전성기였던 1990년대 < 닥터봉 >(이광훈, 1995)에서 처음 협업한 후 20년이 지난 시점에 < 이층의 악당 >(손재곤, 2010)으로 다시 만났다. 그래서 그들이 한 작품에서 발생시킨 케미스트리보다는, 1990년대를 배경으로 각자의 역량을 개발한 시간을 되돌아보며 오늘날까지도 강력하게 유지되고 있는 두 배우의 존재감을 분석했다. (상) 영화 <쉬리>, 드라마 <신사장 프로젝트> 중 한석규 / (하) 영화 <첫사랑>, <내가 죽던 날> 중 김혜수 © ㈜필름쿡플러스, tvN 1990년대 국내에서 외환위기가 발생하기 전까지, 민주화와 세계화가 본격화되며 대중문화 산업의 규모 역시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대중의 취향과 ‘트렌드’에 부합하는 다양한 콘텐츠나 인물이 주목받았던 때로, 이때 등장한 스타들은 대체로 산뜻하면서도 세련된 분위기로 팬덤을 확보했다. 그중에서도 김혜수와 한석규는 외모와 목소리, 연기, 스타일 등 모든 면에서 당시 대중이 선망한 ‘세련됨’을 구현했고, 데뷔 이후부터 현재까지 작품 속에서 쉼 없이 대중과 호흡해왔다. 한석규는 지성과 인품을 겸비한 도시 남성의 이미지를 표방했지만, 드라마 <서울의 달>(1994)에서처럼 냉정한 현대사회에서 불운을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처연한 청년의 모습으로도 기억된다. 이는 최근까지 그가 TV 드라마에서 보여준 ‘소시민적’ 영웅의 리얼리티와도 맞닿아있다. 또한 감독에 의해 ‘선택받는’ 배우를 넘어 자발적인 비전에 따라 작품과 장르를 선택하고 신인 감독의 성장까지 견인하는 흥행보증수표 영화인의 시초 격이기도 하다. 한편, 김혜수는 활동 초기에 드라마 <한지붕 세가족>이나 영화 < 첫사랑 >(이명세, 1993)을 통해 젊고 발랄한 청춘스타의 면모와 특유의 건강미로 호응을 얻었다. 200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는 보다 다채로운 배역을 맡아 연기 스펙트럼을 확장했으며, 특히 2020년대 즈음에는 < 굿바이 싱글 >(김태곤, 2016)과 < 내가 죽던 날 >(박지완, 2019), < 밀수 >(류승완, 2023) 등을 통해 독립된 여성 자아가 돋보이는 씨네페미니즘의 상징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비디오 에세이 “기쁜 우리 젊은 날 그리고 안성기” 비디오 에세이스트 이무언, 한국영상자료원 학예연구팀 연구원 윤서연 비디오 에세이스트 이무언 과 영자원 학예연구팀 윤서연 연구원은, ‘비디오 에세이’라는 작업의 의미를 소개하며 포럼 주제에 맞는 작업 결과물 한 편을 직접 제작해 선보였다. 이무언은 관객이나 연구자로 하여금, 각자가 작품에서 발견한 특별한 지점을 중심으로 연출과 편집을 주도하면서 영화와 한층 더 친밀해지는 기회로 비디오 에세이를 인식했다. 윤서연 연구원 역시 비디오 에세이가 주제가 되는 대상(물)과 이를 둘러싼 세계를 “적극적으로 이해하고 통찰”한 결과이자 “매혹적인 또 하나의 작품으로 기능”한다는 논의 [1] 를 인용하며, ‘오디오 비주얼 크리틱’으로서 비디오 에세이의 영역이 지닌 비평적이면서도 창의적인 측면을 소개했다. 이날 소개한 작업은 영자원이 올해 ‘우수영상물 다국어자막 DVD 제작 및 배포 사업’을 수행하던 도중 두 사람이 기획하게 됐다. 우수영상물 다국어자막 DVD는 영화사적·예술적 가치를 지닌 한국영화 몇 편의 공통 소재를 제목으로 하여, 작품별 본편 영상과 각국의 언어로 번역된 자막, 그리고 코멘터리 영상 등을 수록한다. 영화를 통해 한국의 역사와 문화 전반을 해외에 소개할 목적으로 매년 해외 공관이나 문화원 등에 비영리적으로 배포되고 있다. 작년에는 “영화와 남성: 영화로 보는 스타 페르소나”라는 제목의 DVD에, 한국사회의 일면과 시대의 감성을 머금고 있는 남성 인물들이 인상적인 한국영화 6편을 수록했다. 그리고 감상자들이 한국에 대해 간략히 소개받을 수 있는 짧은 콘텐츠를 기획해 부가 자료로 함께 수록하고자, DVD에서 다루고 있는 남성 배우 6인 중 한 명에 대한 비디오 에세이를 기획했다. 내부 논의 끝에 최종 선정하게 된 에세이의 주인공은, 순정과 헌신, 소시민의 나약함, 일그러진 욕망 등 다채로운 감정을 표현한 국민 배우이자 고전과 동시대를 아우르는 스타로 기억되는 한국영화의 얼굴, 안성기였다. 실제 연령대로 비춰볼 때, 안성기는 에세이를 제작한 이무언의 아버지 세대이면서 작품 촬영 당시에는 그(이무언)와 같은 또래였다. 또한 안성기가 극중 인물을 형상화하며 선보인 특유의 ‘얼굴’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한국사회의 각기 다른 국면을 관통함에 따라, 1980년대의 시절이 하나로 통합되는 듯한 느낌 역시 받았다고 이무언은 전했다. “이미지들의 느슨하고 싱거운 연결”을 통해 이러한 인상이 에세이를 감상하는 이들에게도 전달되기를 바랐다고 한다. 반면 윤서연 연구원은 안성기가 각기 다른 영화에서 선보인 대사들 중 인상 깊은 부분들을 모아 1980년대 시대정신과 같은 특정 의미를 강조하여, 작품과 쇼트들의 의미를 비교적 명료하게 전달하고자 했다. 이 두 가지 입장은 작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조화를 이룰 수 있었다. 2017년 시네마테크KOFA에서 그에 관한 특별전을 개최했을 때 제작된 영상 “한국영화의 페르소나, 안성기전”을 참고하고, 구술채록 사업 진행 중 그의 구술 내용이 녹음된 파일들을 다시 들어봤으며, 그가 출연한 수많은 작품 중 10편을 골라 실제로 삽입할 쇼트를 신중히 선택했다. 쇼트마다 배어있는 정서를 자막과 음악으로 배치하기도 했다. 특히 서로 다른 작품에 속한 장면을 소품이나 장소 등을 매개로 연결하며 안성기가 작품과 작품 사이를 유기적이면서도 자유롭게 오가는 듯한 느낌을 자아냈다. 그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연출 중 하나는, < 기쁜 우리 젊은 날 >(배창호, 1987) 중 덕수궁의 벤치에서 각각 아내( 황신혜 )와 딸에게 자상함을 베풀지만 냉대를 받고 마는 두 장면을 한 화면에 나란히 배치해 동시에 재생한 대목이다. 같은 장소를 배경으로 아내와 딸을 향한 그의 행동이 중첩되는 순간들이 보이는데, 이는 필름이 아닌 디지털 영상이 보편화된 시대에 두 개의 영상을 2채널로 나란히 배치하며 가능해진 실험이라고 윤서연 연구원은 덧붙였다. 한국고전영화 에세이 - ‘기쁜 우리 젊은 날 그리고 안성기’ (이미지 클릭 후 재생) 관객과의 대화 (질문1) 1980년대까지 한국영화의 ‘스타’들에게는, 할리우드 스타들로부터 충족되지 못한 국내 관객의 욕망이 투사되는 측면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개인적인 관점에서 1990년대부터는 이들만의 영역이 독립적으로 구축됐다는 느낌을 받는데, 한국영화의 각 시기가 할리우드 스타 시스템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에 대해 발표자분들의 의견을 듣고 싶다. (답변_이윤종 영화연구자) 고전 할리우드 시기 영화산업은 몇몇 주류 영화 스튜디오가 제작과 배급, 상영을 전담하는 방식으로 운영됐고, 배우들 역시 각 스튜디오에 소속된 채로 활동했다. (하지만 1948년 미국 대법원에서 이러한 영업 활동이 ‘독점’에 해당한다고 판결하면서 여러 스튜디오가 해체됐고, 여기에 소속됐던 배우들이 개별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같은 시기 한국에서는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불가능했던 측면도 있지만 이러한 스튜디오 중심의 스타 시스템 자체가 확립되지 못한 상태였고, 할리우드의 방식을 모방하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성공적이지 못했다. 해방 이후 신상옥 감독이 이끄는 신필름이 당시 국내 영화산업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게 되면서 스튜디오 시스템에 근접한 운영 양태를 보였는데, 1970년대부터는 이마저도 쇠퇴했다. 그리고 이전과 같이 감독과 배우, 영화 스태프들 모두가 독립된 개인으로서 활동하게 된다. 1980년대까지는 1990년대 이후에 비해, 영화를 비롯해 여기에 출연한 배우들 역시 대중에게 큰 파급력을 얻지는 못했던 시점인데, 와중에 안성기와 같은 ‘국민 배우’가 탄생했다는 점이 더욱 특별하게 느껴진다. (질문2) 20대 관객의 입장에서는 < 라디오스타 >(이준익, 2006)나 < 실미도 >(강우석, 2003) 등의 2000년대 이후 작품을 중심으로 안성기 배우를 기억하게 되는데, 과거의 다양한 출연작들을 통해 그의 활동을 한국영화사의 맥락에서 돌이켜볼 수 있어 뜻깊은 시간이었다. 비디오 에세이를 제작하면서, 여러 출연작 중에서도 중요하다고 인식되는 장면들을 구분해내고 이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작업이 쉽지만은 않았으리라고 예상된다. 작업 도중 겪게 되신 고충 이 있다면 듣고 싶다. (답변_이무언 비디오 에세이스트) 감상을 공유해주셔서 감사드린다. 인상 깊은 장면을 선정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장면을 확인할 때마다 영상의 일부를 이미지로 캡처해두고, 작품 안에서의 타임코드와 함께 그 장면이 인상적이었던 이유를 메모했다. 에세이에서 다룰 모든 작품에 대해 이 작업이 완료되면, 캡처된 이미지들을 훑어보며 관련 장면을 어떻게 연결할지를 고민했던 것 같다. 각 이미지를 연결하는 과정에서는, 안성기의 연기를 통해 전달되는 여러 가지 인상들(‘아버지’, ‘남성’ 등)이 쇼트들의 유기적인 연결을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지각되기를 바랐다. 그리고 안성기 개인의 삶이 연상되거나 관객 스스로가 처한 ‘현실’ [2] 과 작품 속의 ‘허구’가 연결되는 것처럼 느껴져서 흥미로웠던 장면들도, 어렵지만 제시하고 싶었다. 또한 관객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밖에 없는 안성기의 ‘얼굴’ 외에 다른 요소들도 활용하려고 노력했다. 잔을 부딪치며 건배하는 이미지, 수면 위에 반사된 이미지, 극중 시계를 비춘 이미지 등이, 매 장면 돋보이는 그의 다채로운 ‘얼굴’들을 연결해줬다. 한국고전영화 에세이 - ‘기쁜 우리 젊은 날 그리고 안성기’ 중 시계와 잔이 등장하는 쇼트 (질문3) 1960년대 한국영화의 멜랑콜리적 지식인 주체성에 대해 연구한 바가 있는데, 금동현 평론가의 발표에서 <장군의 수염>과 <안개>가 다뤄져서 반가웠다. 1960년대 한국영화에서 배우들이 담지하고 있는 멜랑콜리적 주체성 이 무엇일지에 대해 여쭙고 싶다. (답변_금동현 영화평론가) 오늘 분석한 작품들에서는 멜랑콜리를 자아내지 않고 ‘체현한’ 인물들이 등장했다. 물론 1960년대에는 멜랑콜리를 재현하는 몇 가지 요소가 발견될 뿐 멜랑콜리라는 감수성 자체가 이 시기에만 두드러졌던 것은 아니다. 그래도 멜랑콜리의 흔적이 관찰되는 1960년대 한국영화의 한 대목을 꼽자면, ‘코미디’라는 장르라고 생각한다. 1960년대 한국 코미디영화에서 웃음은 모종의 이유로 ‘경직되어버린’ 무언가를 조롱할 때 자주 발생했던 것 같은데, 이렇게 웃어야 하는 데 웃지 못하는 순간( 이봉래 감독의 영화에서의 몇 가지 장면이 예가 될 수 있다)이 어떻게 보면 멜랑콜리한 상태에서 받는 느낌과 연결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질문4) 오늘 언급된 배우 중, 배우 김혜수가 유독 눈에 띈다. 1990년대 당시 그는 확고한 ‘무비스타’로 자리매김한 상태가 아니었고, 광고나 드라마를 통해서도 아직 다른 스타들만큼의 파급효과를 일으키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1990년대를 대표하는 스타로 김혜수 가 자연스레 떠오른다는 것이 독특한 지점이다. 이 시기 스타로서 김혜수의 부상을 분석하실 때 다른 배우들과 비교하여 어떤 접근법을 적용하셨는지가 궁금하다. (질문5) 2000년대 이후부터 최근까지 배우 김혜수와 한석규가 선보인 연기 스타일이, 그들이 1990년대에 수행하던 방식과는 달라졌다고 말씀해주셨다. 배우들이 선보이는 연기의 방향성이 재정립되는 데는, 영화에 대한 관객의 욕망이 변화하는 현상이 상당 부분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시대별로 이념이나 정치성, 관객의 욕망 등의 변화가 배우들의 연기 스타일 변모에 어떻게 작용할 수 있을지 를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면 좋겠다. (답변_정민아 영화평론가) 두 질문에 대해 한 번에 답변 드리고 싶다. 말씀하신 대로 김혜수 배우가 영화계 스타로서 두각을 나타낸 시점은 비슷한 시기에 데뷔한 다른 배우들에 비해 다소 늦다. 하지만 1990년대 화보와 예능, TV를 포함해 대중매체 전반에서 그가 독보적인 영역을 구축하며 성장한 여정을 고려하면, 그리고 이 시기 관련 콘텐츠를 향유했던 경험을 되새겨보면, 1990년대를 대표하는 스타가 김혜수라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이는 오늘날 스타가 탄생하는 과정과도 유사하다. ‘영화’와 그밖의 영역(방송 등)이 명확히 구분됐던 과거와 다르게, 2000년대 이후부터 현재까지는 ‘배우’의 활동 분야가 대폭 확장됐고 분야 간 경계도 거의 사라졌다. 영화, 드라마, 뮤지컬 등 분야에서 연기 활동을 이어가는 이들은 모두 ‘배우’로 호명되며, 그들이 연기를 선보이는 분야 역시 한 가지로 국한되지 않는다. 따라서 스크린을 통해서만 스타로 거듭나기보다, 1990년대 본격적으로 파급된 각기 다른 매체에서 강렬한 영향력을 발휘해 자신만의 스타 이미지를 구축한 김혜수가, ‘멀티 플레이어’로 활약하는 복합적 차원의 배우상을 1990년대부터 선구자적으로 확립한 이로 평가될 수도 있을 것 같다. * 현장 BEHIND CUT * *** [1] 박진희, “ 복혜숙과 석금성을 헷갈려하다 ”, KMDb 영화글, 2023. 7. 27. [2] < 개그맨 >(이명세, 1988) 중 이발사가 이종세(안성기)에게 “어렸을 때부터 그 방면에 재능이 많으셨죠?”라고 물어 아역 배우 시절 안성기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거나, < 칠수와 만수 >(박광수, 1988) 중 “우리 쳐다보는 거 아니에요?”라는 대사 이후 배우 박중훈과 함께 카메라를 응시하는 장면 등이 있다.
홍콩 시티대학교와 한국영상자료원 공동 주최해 2025년 5월 16일부터 17일까지 진행된 국제 컨퍼런스 ‘목적지 홍콩: 한국과 중국어권 영화와의 조우 (Destination Hong Kong: South Korean Cinema’s Encounter with Chinese-Language Cinemas)’의 기조연설과 2일차 발표 및 토론 내용 을 요약합니다. 컨퍼런스 개최 개요와 1일차 발표 및 토론 내용은 이전 글( 링크 )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기조연설> 아시아 지역에서의 초국가적인 영화 협업 활동의 사례를 발견하고 그 맥락을 짚는다는 컨퍼런스의 목표에 맞춰, 영국 킹스 칼리지 런던의 크리스 베리 교수와 한국영상자료원의 김홍준 원장이 기조연설을 진행했다. 20세기 중후반의 역사적 사건들이 당대 아시아 영화의 제작과 배급, 수용에 미친 영향을 거시적인 차원의 담론과 미시적인 차원의 자전적 경험담을 통해 파악할 수 있었다. 한국과 중국어권의 영화 연결 역사 속 우연성과 불가해성: 최국인, 신장, 그리고 <용의 해> (킹스 칼리지 런던 영화학과 교수 크리스 베리) 크리스 베리(Chris Berry) 교수는 카자흐스탄과 러시아, 그리고 북한이 주 활동 무대였던 영화인 최국인과 그가 공동 연출한 <용의 해>(아사날리 아시모프, 최국인, 1981)를 중심으로, 영화를 통한 한국과 중국어권의 연결이 얼마나 우연적이면서도 불가해하게 발생할 수 있는지를 설명했다. 그는 두 문화권의 영화적 교류가 이외 지역의 개입을 통해 더욱 확장된 프레임으로 논의될 가능성을 보였다. 아시아 내 여러 지역을 옮겨가며 활동한 “마이너 디아스포라”로 규정되기도 하는 최국인은, 1926년 조선에서 태어나 1934년에 부모님을 따라 상하이로 이주하고, 6.25 전쟁 이후 북한에 체류하다가 1950년대 초반에는 모스크바 국립영화학교 브기끄(VGIK)에 다니며 영화인으로서의 이력을 정립했다. 이후에는 카자흐스탄 알마티의 카자흐필름스튜디오(Kazah Film Studio)를 마지막 근거지로 하여 활동했다. 다큐멘터리 < 굿바이 마이 러브NK: 붉은 청춘 >(김소영, 2017)을 통해 최국인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크리스 베리는, 최국인을 ‘냉전’ 개념의 복합성을 깨닫게 해준 인물로 기억하고 있었다. 스탈린이 사망한 후 개인 숭배(cult of personality)를 통해 자신을 절대적 지도자로 신격화했던 스탈린의 행태를 비판하며 스탈린 체제로부터 이탈해야 함을 주장한 흐루쇼프의 연설이 있은 후, 당시 소련에서 브지끄의 학생이었던 최국인과 그의 동창들은 이를 모방해 북한 김일성의 개인숭배를 비판한다. 이에 따라 그들은 졸업 이후 북한으로 돌아간다면 신변 위협을 받게 될 것이라고 우려해 소련에 잔류하기로 결정하고, 소련은 이를 허가한다. 흔히 미·소 간 대립을 중심으로만 이해되는 냉전의 이분법적 의미는 대개 서구 사회에 의해 구성되었고, 이외 문화권이 처한 사회적 상황에 따라 그 서구적 의미 바깥에서 (심지어 사회주의 집단 내부에서도) 얼마나 다양한 굴절이 발생하는지 를 알게 해준 일화였다. 게다가 동아시아가 ‘현대’ 사회로 돌입하며 받아들이게 된 이념은 상당 부분 외부로부터 유입되어 동아시아 각지에 사회적 혼란을 야기했는데, 크리스 베리는 이 혼란에 대응하기 위해 영화를 통해 연대하려는 노력 이 최국인과 같은 영화인에게서 엿보인다고 주장했다. (이는 패권국이 시시각각 대립하며 파장을 낳는 동시대 사회 속 불안정한 일상과 일면 유사하기도 하다.) 관련 활동은 연설의 제목에도 나타나듯이 아시아 곳곳의 영화인들에 의해 ‘우연적’으로 발생했다. <용의 해(Year of the Dragon)> 포스터 / 사진: IMDb 그가 1981년 중 연출에 참여한 <용의 해>는 신장 지구와 위구르족에 대한 청나라의 폭력적인 정복을 다룬다. 작품의 제작과 개봉에 관해서는 여러 의문이 제기된다. 당시 소련에서는 어떤 목적으로 이러한 내용의 영화 제작을 허가했고, 왜 최국인을 공동 연출자로 임명했을까? 작품 자체가 갑작스럽게 종적을 감춘 이유는 무엇일까? 역사적 맥락을 먼저 살펴보자면, 작품은 20세기 중·후반 지속됐던 중·소 분열(Sino-Soviet Split)을 배경으로 기획됐다고 할 수 있다. 1950년대부터 중국은, 흐루쇼프를 필두로 탈스타린 기조에 접어든 소련과 대립하기 시작했고, 그 연장선상에서 1964년에는 두 국가 간 국경이 과거 불평등 조약에 의해 확정됐다며 중국 측에서 소련을 대상으로 국경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여기에는 중국 서부 국경 지대에 해당하는 신장 지구가 포함된다). 그리고 당시 소련의 역사학자들은 대부분 신장 지구 내 위구르족의 투쟁이 국가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전개됐다는 입장으로 위구르족을 지지하며, 과거 청나라와 당시의 중국이 견지한 무리한 영토 확장 욕구를 비판하곤 했다. 더불어, 민족성(ethnicity)에 대한 두 국가의 인식 차이도 작품에 드러난다. 소련은 ‘소비에트 연방’이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연방에 속한 개별 국가들의 자치 가능성을 시사한다. 하지만 중국은 각기 다른 민족이 통합되어 ‘하나의 중국’을 형성함을 주장해왔는데, 크리스 베리는 극중 청나라의 장군과 위구르족의 일원이 위구르족의 중국 융화 필요성, 그리고 민족의 자기 결정권 존속을 두고 논쟁하는 장면이 이러한 인식 차이를 반영하고 있다고 짚었다. 과거에 위구르족을 향해서 그랬던 것처럼, 작품이 제작됐던 당시에도 중국은 소련에 대해 ‘하나의 중국’ 기조를 강요한다는 소련의 비판적 입장 이 내포됐다는 분석이다. 연설 중 재생된 <용의 해> 본편 영상 일부 한편, 최국인 개인의 이념이 작품과 연관되어있을 가능성은 쉽사리 파악하기 어렵다. 그의 정치·사회적 이념을 추정해볼 수 있는 자료가 부재할 뿐더러, 그가 활동하던 시기 소련 영화산업의 현실을 고려하면 연결고리가 잘 형성되지 않는다. 당시 소련의 영화 제작은 보통 개별 감독에게 국가가 작품을 배당함으로써 진행됐기에 배당을 받지 못한 감독들의 수입은 비교적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최국인이 순전히 물질적인 관점에서 공동 연출 제의를 수락했는지, 그 이면에 개인의 이념적 지지 등이 존재했는지는 연설 제목처럼 여전히 불가해(unknowable)하다. 크리스 베리가 작품과 관련해 지적한 우연적이고 불가해한 또 다른 부분은 작품이 갑작스레 사라졌다는 점이다. 당시 기준으로 상당한 예산을 들여 제작됐고 1982년 제15회 소련 탈린영화제 수상까지 경험했음에도 오늘날 본편을 감상할 수 있는 자료를 찾기가 매우 어렵다. 유일하게 남아있는 저화질의 유튜브 영상에는 작품 배급이 갑작스레 중단된 데 대해 여러 이용자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는 원인으로 추정해볼만한 상황을 역사학자 피터 롤버그(Peter Rollberg)의 설명을 참고해 제안했다. 본 작품이 소련에 대한 민족주의적 저항의 알레고리 로, 즉 중국이 아니라 소련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은유로 인식될 여지가 있어 소련 차원에서 배급 중단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가설이라고 할 수 있다. 가설을 뒷받침할 만한 영화학적 개념으로 그는 이스턴 장르를 언급한다. 서구 문화권에서 비롯된 웨스턴 장르는 미국 서부 지역을 정복한 유럽인의 이야기를 다루는데, 이를 모델로 발전한 이스턴 장르는 중앙아시아 지역에 대한 소련의 정복을 다룬다. 원주민과 카우보이의 구도가 바스마치(소련에 저항한 중앙아시아 세력)와 볼셰비키로 전환되는 것이다. 사막이나 스텝 지대를 배경으로 삼고 석양을 따라 말을 타고 달리는 인물들, 그들의 총격전 등을 보면 자연스레 웨스턴 장르가 연상된다. 극중 몇몇 장면을 컨퍼런스 현장에서 직접 재생한 그는, 중·소 분리와 소련·중앙아시아 간 대립을 동시에 은유할 가능성을 통해 냉전 국면에서 아시아의 영화사적 기록을 되짚을 때 감지되는 우연성과 불가해성을 다시 한 번 강조하며 연설을 마무리했다. 황홀한 기억: 홍콩영화와의 조우, 1966년부터 1989년까지 (한국영상자료원 김홍준 원장) 김홍준 원장은 삶의 궤적을 따라 홍콩영화와 맺어온 관계와 그로부터 받았던 인상, 영감, 깨달음을 개인적 일화들을 바탕으로 공유했다. 그가 영화인으로 활동하기 시작하며 한국영상자료원장으로 재임하기까지 되새길 만한 추억으로 남아있는 홍콩영화는, 동시대 아카이브가 지닌 고유의 임무를 환기하는 것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1967년, 11살이 되고 막 사춘기에 접어들던 때 그는 홍콩영화를 처음으로 접했다. 당시는 박정희 정부가 유신정권에 돌입하기 전, 국군이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시기다. 동시에 반공주의적 의식이 사회 전반에 공유됐는데, 흥미롭게도 007 시리즈가 이러한 이념에 부합하는 영화로 인식되기도 했다. 시리즈에서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존재는 공산주의 세력으로 묘사되었고, 주인공들은 '위험 세력'으로 그려진 이들을 소탕했기 때문이다. 이때 국내 군사 정부는 과거 식민 통치를 자행한 일본의 문화를 배격하던 와중이었기에 일본영화가 수입되지 않았다.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서 일본영화가 점했던 영역을, 한국에서만큼은 홍콩의 액션 및 시대극 영화들이 차지할 수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같은 시기, ‘마카로니 웨스턴’ 장르의 등장으로 < 황야의 무법자 >(세르지오 레오네, 1964) 등의 명작이 소개된 직후, <대취협>(호금전, 1966) 을 접했다. 중국어권에서 집필된 무협소설이 크게 인기를 얻고 있었던 시절, 김홍준 원장 역시 이 작품을 만나기 전에 대만의 유명 무협소설 작가 와룡생이 쓴 『군협지』를 먼저 접한 상태였으며, 그의 표현처럼 어린 시절 그에게 “무협의 피”는 이미 흐르고 있었다. <대취협>은 홍콩에서 1966년에, 한국에서는 이듬해인 1967년에 개봉했다. 당시 17살이었던 그가 처음으로 본 무협영화이기도 한 이 작품은, 그가 대만 출신 배우 정패패와 영화 속 쿵푸의 세계를 최초로 알게 되는 계기였다. 이후 중국어권의 여러 무협영화 들이 국내에도 선을 보이면서 10대 관객들은 이들의 무협적 요소에 매료됨과 동시에 장르에 내재된 정서에 힘입어, 사춘기의 반항심이 거세지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특히 정패패, 데이비드 치앙, 적룡과 같은 배우나 당대 걸출한 연출자로 꼽혔던 장철이 기억에 남는다고 밝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러한 종류의 무협영화들이 정교하게 연출된 액션이 아닌 맨주먹을 이용한 싸움을 소재로 하기 시작했기에, 무협 장르의 본령을 져버렸다고 생각한 그는 이전만큼 홍콩영화에 애정을 갖지 못했다. 이소룡과 성룡이 등장한 이후 20년간 홍콩영화를 그렇게 잠시 잊고 지내다가, 그가 2001년부터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를 이끌게 되면서 인연이 다시 시작됐다. 국내 최초로 호금전 회고전을 기획해 < 협녀 >(1969), < 용문객잔 >(1967), < 산중전기 >(1979) 등의 작품을 상영한 것인데, 놀랍게도 30~50대 관객이 크게 몰렸다. 영화제 관객의 주 연령대인 2030 세대가 아니라 중년 관객층이 호응한 이례적인 사례였다. 2003년에는 복원 또는 재개봉된 작품들을 중심으로 쇼브라더스 특별전을 개최했고, 영화제를 방문해 자신의 영화 인생 안내자로서의 호금전에 대해 설명하던 정패패를 직접 만나는 기회를 맞기도 했다. <대취협> 중 정패패 / 사진: Film at Lincoln Center 대학 재학 중이던 1976년으로 돌아가보면, 김홍준 원장은 슈퍼 8mm 필름으로 다큐멘터리 영화들을 제작했고, 이중 < 서울 7000 >의 수상을 계기로 영화 제작 활동을 보다 진지한 취미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군 제대 이후에는 학내 영화 동아리 ‘얄라셩’에 합류해 영화와 관련된 워크숍을 진행하며 관련 활동을 지속했지만, 본래 인류학을 전공했고 학업을 이어가고 싶다는 생각에 1987년부터 1989년까지는 미국 템플대학교에서 영상·문화인류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남는 시간에는 캠퍼스나 시네마테크 등을 찾아 계속 영화를 감상했으며, 교내 도서관의 간행물 섹션에서 《사이트 앤 사운드( Sight and Sound )》나 《아메리칸 시네마토그래퍼( American Cinematographer )》, 《카이에 뒤 시네마( Cahiers du cinéma )》와 같은 영화잡지를 즐겨 읽었다. 이때 토니 레인즈가 작성한 한 기사에서 홍콩영화계의 새로운 세대가 “ 홍콩 뉴웨이브 ”를 구축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홍콩영화에 대한 관심이 다시 되살아났다. 그렇게 학업을 이어가며 영화도 자주 감상하던 어느 날, 미국의 한 극장에서 < 도마단 > (서극, 1986) 을 상영하는 더블 피쳐 프로그램이 열렸고, 영화잡지 외에는 관련 정보를 살펴볼 기회가 드물었기에 그는 반가운 마음으로 찾아갔다. 아무런 사전지식 없이 관람했지만 홍콩 출신 여자 배우 3인의 우정이 아름답고 감성적으로 그려지는 순간이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인물들이 곧 일어날 ‘혁명’을 예고하는 마지막 장면 역시 돋보였다. 1980년대는 광주 민주화운동을 시작으로 한국에서도 ‘민주화’를 향한 사회적 외침이 본격화되던 시기였기에, 해당 장면 속 대사와 분위기가 암시하는 ‘혁명’은 그로 하여금 단어에 내포된 의미와 가치를 되새기도록 했다. 작품을 연출한 홍콩 출신의 영화인 서극은 감독이자 제작자, 배우로서 여러 역작을 남겼다. 국내에서는 그가 연출 또는 제작한 < 영웅본색 2 >(오우삼, 1987), < 황비홍 >(1991), < 신용문객잔 >(1992) 이 흥행했다. 공교롭게도 김홍준 원장의 연설이 있기 3주 정도 전에, 서극은 이탈리아 우디네극동영화제에서 평생공로상을 수상하며 거장의 반열에 공식적으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 좌 ) <도마단> 중 주인공 3인 / ( 우 ) 혁명 후 만남을 기약하며 헤어지는 인물들 / 사진: IMDb 그리고 몇 년 후, 김홍준 원장은 국내 영화잡지 《로드쇼》에서, 한 작품의 특정 장면을 영화 이론이나 영화사적 개념으로 해설하는 “도시에” 섹션 연재를 맡는다. 섹션 내 첫 원고의 주제로는 대중적 관심도에 비해 주류 평론계에서 충분한 논의가 이뤄지지 못했던 홍콩영화를 선택했다. 원고 작성 시 참고할 만한 자료가 많지 않던 시절이라서 고충은 있었지만, 편집장이었던 정성일 평론가의 말처럼 1990년대 홍콩영화를 진지하게 비평하려는 최초의 시도였다는 데서 의미를 찾았다. 1990년부터 1991년까지 본 잡지에 그가 ‘구회영’이라는 필명으로 연재한 이 원고들은 이후 『영화에 대하여 알고싶은 두세 가지 것들』이라는 단행본으로 출간된다. 그가 홍콩영화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키워가도록 한 작품이 한 편 더 있다. 왕가위 감독의 < 열혈남아 >(왕가위, 1989)다. 국내에 수입된 당시 배포됐던 포스터와 한국어 제목이 전형적인 홍콩 누아르의 이미지를 연상시킨 것과는 정반대로. 작품은 완성도 높은 예술영화에 가까웠다. 결투 중심의 홍콩영화로부터 경험해보지 못한 감정적 동요와 신선한 충격에 사로잡혀 홍콩영화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감독이 나타났다는 생각에 들뜨기도 했다. 그는 눈에 띄는 강렬한 몇 장면을 연설 중 공유했으며, 그중 하나는 포장마차에서의 액션 신이다. 얼핏 보면 인공 혈흔과 같은 특수효과가 매우 어색해보이지만, 액션을 비롯해 카메라의 움직임과 편집 기술이 무척 유려하게 적용됐다는 점이 놀랍다. 공중전화 부스에서 유덕화와 장만옥이 만들어낸 명장면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김홍준 원장이 본래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는 홍콩영화 관련 영상자료들도 다수이지만, 그는 원내수집 담당 부서에서 국내 기증자를 대상으로 대규모 수집을 진행한 덕에 최근 한국영상자료원에 1,000여 점에 달하는 홍콩영화 DVD 또는 블루레이가 소장돼 있다고 전했다. 아카이브를 통해서만 완수될 수 있는 기억의 과정으로서, 작품을 재발견하고 수집한 후 디지털 복원해, 대중에게 그 가치를 전파하면서 작품 자체가 다시 상상(re-imagine)되는 데 기여하겠다는 마음가짐을 밝히기도 했다. 연설을 마무리하며 그가 재생한 <열혈남아> 속 두 배우의 얼굴처럼, 과거의 한 순간에 멈춰 있지 않고 미래 세대를 위해 계속해서 재발견될 영화 속의 무언가를, 필름 아카이브로서 꾸준히 찾아 공유하고 싶다는 소망도 덧붙였다. <패널 3> 장르, 리메이크, 그리고 조우 특정 장르 속에서 한국과 중국어권 영화계가 각자의 스타일과 인력을 교환한 역사를 들여다보고, 그 이면의 지정학적·산업적 영향을 분석했으며, 홍콩대학교 김소혜 교수가 발표자들을 소개했다. 중국 멜로 TV 드라마 속 한국 남성 스타와 한류 남성성의 현지화 (영국 카디프대학교 현대언어학부(중국학) 조교수 일레인 정) (당시 해외 체류 중이었음에 따라 비대면 발표 진행) 일레인 정(Elaine Chung)은 중국 멜로영화나 TV 시리즈에 주인공으로 출연한 한국 남성 배우들의 배역을 통해, 중국어권이 ‘한국의 남성성(Korean masculinity)’을 현지화하게 된 배경과 사례를 소개했다. 특히 상당수의 한류스타가 중국어권 콘텐츠 산업에 진출한 시기, 즉 그들의 인기가 중국어권에서 부상한 2000년부터 사드무기체계(THAAD) 배치로 인해 양국 교역이 대폭 축소된 2016년까지의 작품들에 주목했다. 당시 한국인 배우들이 연기한 남자 주인공의 특성으로부터 중국어권 사회가 도출한 ‘한국의 남성성’과 이에 대한 인식이 내러티브에 어떻게 반영되어있는지를 분석하기도 했다. 로맨스와 남성성은 한국 드라마는 물론 아시아에서 흥행한 한류 콘텐츠 전반이 중심적으로 다루는 소재다. 정선의 한류 연구(“Pan-East Asian Soft Masculity”, 2001)에서는 두 요소의 결합을 통한 남성 한류스타들의 강력한 팬덤과 한국 멜로 TV 시리즈 흥행이 2000년대 초반 동아시아 한류 열풍을 본격적으로 불러일으켰다고 분석한다. 일레인 역시 한류 콘텐츠 속 한국인 남성 주인공들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으로 ‘ 부드러운 남성성(Soft masculinity) ’을 언급했다. 신사적이고 예의 바른 태도, 차분한 말투, 그리고 섬세한 성격을 지닌 것으로 묘사되는 그들은 종종 재벌로 등장하며, 경제적 형편이 어려운 상대역 여성과 함께 신데렐라 내러티브를 완성시킨다(2000년대 초반 당시 한국 멜로 TV 드라마의 전형이다). 그러나 일레인은, 한류 콘텐츠를 통해 이상화된 부드러운 남성성이 중국 TV 시리즈 속 한국인 남성 배우를 거치면서, 중국어권 대중에게는 다르게 인식될 여지가 있다며 TV 시리즈 세 편을 예로 들었다. 부드러운 남성성을 지닌 한국인 남성 주인공의 성격이 또 다른 중국인 남성 배우와 비교 또는 대조되며 내심 부정적으로 평가 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백령공우(White Collar Apartment)>(2002)의 안재욱, <100번째 신부(The 100th Bride>(2004)의 지진희, <다이아몬드 러버(Diamond Lover)>(2015)의 정지훈 모두 여성 주인공과 연인 관계를 주도적으로 이어가지 못하고 결국 관계를 지켜내는 데 실패한다. 반면 그들과 여성 주인공 사이에서 삼각관계를 이룬 중국인 남성 배우는, 실용적이면서도 강인한 면모를 보이며 마침내 여성 주인공과 연인이 된다. 혹은 한국인 남성 주인공과 달리, 이들은 부유하지는 않지만 자수성가했으며 여성 주인공에게 지속적으로 헌신하는 독립적이고 성숙한 어른을 표방하면서 더욱 이상적인 방식으로 ‘부드러운 남성성’을 구현한다. <다이아몬드 러버> 주요 인물 / 사진: TV Time 예시가 된 세 작품의 자세한 줄거리를 살펴보면, 시리즈 흥행을 위해 남성 한류스타를 캐스팅하고 전면에 내세워 홍보하면서도 결말은 중국인 남성에게 우호적으로 전개된다. 중국어권 콘텐츠 제작자의 관점에서 강력한 팬덤을 동원한 한류스타의 이미지를 문화적 자본으로 활용 해 상업적 성공을 꾀하면서도, 인물 구도와 내러티브를 중국어권 문화의 맥락에서 지역화한 결과 라고 일레인은 분석한다. 경제 발전 이후 중국사회에서 단정하고 신사적인 외양으로 대표되는 소위 “화이트 칼라 남성성(White-collar masculinity)”이 호응을 얻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일레인에 따르면, 중국어권에 아직 널리 공유되어있는 통념상 가장 바람직한 남성 이미지는 ‘부단히 노력한 후 사회적 성공을 거둬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에 가깝다. 따라서 부드러운 남성성을 지닌(부유한 집안에서 편안히 자랐지만 가정을 이끄는 독립적 주체로까지는 성장하지 못한) 한국인 남성 배우의 역할은 이에 부합하지 않는 인물로 지각되어 내러티브에서 소외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일레인은 추측했다. 중국어권 콘텐츠 흥행 수단으로 한류의 대중적 인기를 활용함과 동시에, 인기의 핵심이 되는 남성 이미지는 지역화해서 내러티브에 반영함으로써 한류와의 차별화를 시도하는 전략이라는 해석이다. 한·중 영화 협력의 산업적·정책적 측면: <제3의 사랑>을 중심으로 일본 교토대학 강사 김수현(현 영국 퀸즈대학교 벨파스트 조교수) 김수현 교수는 2000년대 이후 본격화된 한국과 중국어권 간 콘텐츠 합작이 시도된 역사를 산업과 정치의 맥락에서 분석했다. 특히 한·중 합작 영화에서 작가로서의 권리와 투자자로서의 권리가 각 스태프에 의해 복합적으로 행사되는 현상 을, 동아시아의 정치와 산업에 관한 담론에 기반해 설명했다. 연구 방법론 중 하나로 참여관찰법을 도입해 합작 영화 < 제3의 사랑 >(이재한, 2014) 제작 현장에서 어시스턴트 프로듀서로 활동한 경험을 녹여낸 점도 인상적이었다. “20세기는 방송(Broadcasting)의 시대”라며 방송이라는 동시다발적 송신의 매체가 대중문화 형성에 미치는 영향을 강조한 미셀 힐름스(Michele Hilmes)의 주장을 ‘영화’에도 적용하는 것으로 발표가 시작됐다. 영화도 기술을 바탕으로 초국적으로 전파될 수 있고, 스타나 대중문화에 관한 담론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세계화된 문화적 양식으로 공유되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에서는 2000년대부터 영화를 매개로 초국가적인 협업이 발생했는데, 그중에서도 중국은 같은 시기 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하고 정부 당국이 한층 완화된 문화 정책을 펼치면서 ‘합작’에 대해서도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기 시작했다. 이때 한국은 합작 파트너로서 중국어권 제작나와 배우와 협업해 < 비천무 >(김영준, 2000), < 무사 >(김성수, 2000), < 아나키스트 >(유영식, 2000) 등의 작품을 내놓았다. 김수현 교수에 따르면, 이러한 초국가적 합작의 경제적 기반을 조성한 여러 주체들 간의 협상 결과에 따라, 작품의 ‘작가(author)’로서 창작의 방향을 결정하고 통제할 권리가 주어진다. 한·중 합작 영화의 경우 제작 과정 전반에 걸쳐 정부 당국의 검열이 만연한 중국 영화산업의 특성까지 더해져, 작가로서의 권리가 제작 주체들 사이에서 합리적으로 배분되기가 쉽지 않다 . 그는 <제3의 사랑>의 어시스턴트 프로듀서로서 각색과 제작, 배급 과정에 직접 관여했던 경험을 빌려, 이 과정에서 견제나 갈등, 때로 불공정한 상황까지 야기될 수 있음을 보였다. <제3의 사랑> 포스터, 스틸 / 사진: IMDb( 1 , 2 ) <제3의 사랑>은 동명의 중국 소설을 원작으로 한국인 이재한 감독(John. H. Lee)이 연출하고 중국 제작사 HS엔터테인먼트가 제작을 맡은 멜로드라마 장르의 영화다. 원작을 각색한 각본은 본래 이재한 감독이 집필했지만 최종적으로 채택된 각본은 중국 측 프로듀서의 작업 결과물이었다. 특히 영화 제작 및 배급을 담당하는 국영 기업 차이나 필름 그룹(China Film Group Corporation)의 당시 부대표는, 일부 장면이 여자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을 대면하려는 동기를 약화한다는 이유로 원작 소설에 충실할 것을 지시하는 이메일을 감독에게 직접 보내기도 했다. 차이나 필름 그룹이 중국영화에 관한 대규모 투자 및 배급을 주도하는 국영 기업이라는 점에서, 각색에 참여한 한국 스태프 인력은 합작 영화의 창작을 둘러싼 권력 구조를 개편하지 못하고 그의 지시에 따라야 했다. 중국 제작사 측의 불공정한 대우는 직업 안정성에 대한 위협으로까지 이어졌다. 김수현 교수가 인터뷰한 한국 출신 조감독의 경우, 현장 참여를 위해 중국에 체류하던 중 비자가 만료되었음에도 중국 제작사는 이를 연장하는 데 협조하기를 거부했고, 해당 조감독은 촬영 도중 출국해야 했으며, 중국 측 제작사와의 갈등을 이유로 중국 재입국도 허락되지 않았다. 결국 중국 제작사는 촬영 종료일까지 참여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그의 이름을 작품 크레딧에서 제외하고 만다. 이렇게 중국에서 일시적으로 근무한 한국 출신 스태프들은 체류 목적에 적절히 부합하는 비자를 발급받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제작 현장에 기여한 바와 관계없이 스태프로서의 지위까지 위협받는 불안을 감수해야 했다. 게다가 배급 지역마저도 중국 측 배급사가 단독으로 결정하면서, 대규모 흥행에도 불구하고 한국 관객으로부터 발생할 잠재적 수요는 무시된 채 작품은 중국 내에서 배급되는 데 그쳤다. 또 다른 한중 합작 영화 < 평안도 >(장윤현, 2014)는 출연한 배우가 대만의 독립을 지지하는 정치 성향을 띤다는 등의 이유로 중국 내 상영이 금지됐고, 중국 당국의 압력으로 인해 해외 상영까지도 무산되며 2016년까지 개봉을 하지 못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위와 같은 몇몇 사례를 종합했을 때, 한·중 합작은 중국이 상대 국가와 맺고 있는 여러 종류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며, 그에 따라 합작 결과물의 중국 시장 진출 향방이 정해지는 현상을 엿볼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합작’이라는 외형을 지녔지만 제작과 배급 전반이 실질적으로는 중국을 중심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게 되는 한계 가 드러나기도 했고, 상대국 제작진이 체감하는 지정학적 불안정성 이 그들의 제작 참여 경험의 질에 악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김수현 교수는 이렇게 영화산업의 논리와 제작 방식이 서로 달라 충돌하는 상황에서, 국제 합작이라는 작업에는 통상 모종의 긴장 관계가 형성됨을 언급했다. 그리고 ‘시장 확장’을 목표로 한다는 본래 특성상 합작 영화 제작 시 감독의 권한이 상대적으로 약화될 여지가 있으며, 위에 언급한 국가 간 이해관계와 지정학적 역학 관계에 따라 창작과 배급을 주도할 권리가 주어지는 현상도 소개했다. 국제 합작은 이렇게 서로 다른 문화권 간 타협과 조율, 그리고 힘겨루기의 장이 되며, 합작을 둘러싼 권리는 예술적 아이디어나 행위뿐만 아니라 지정학적 영향력이 작용하는 가운데 주장 된다. 다만 산업 환경이 변화하면서 오늘날 동아시아의 국제 합작 경향은 조금씩 달라지는 중이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의 합작에서는 각본이나 캐스팅 등을 공동으로 진행하며 작품의 ‘창작’을 함께 하려는 기조가 강했다(단, 일본의 경우 < 박하사탕 >에서처럼 제작 투자 위주로 참여했다). 그리고 시장을 효과적으로 확장하기 위해 동아시아 관객 모두가 친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공통의 주제(< 적벽대전 >과 < 묵공 >에서와 같이 대개 역사적 사건)를 바탕으로 한 블록버스터 대작들이 주로 제작됐다. 2010년대에 들어서면 중국을 무대로 한 작품을 중심으로 한중 합작이 주로 이뤄졌고, 중국을 찾는 한국인 제작진들의 규모도 증가했으며, 후반 작업 단계까지도 합작이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가 최근 2020년대에는 분위기가 달라져, 앞서 언급한 캐스팅, 각본 집필 등의 창작 과정을 함께 하지 않고, 장소 섭외와 같은 프로덕션 서비스만을 서로에게 제공하는 새로운 방식의 합작이 시도되고 있다. 하지만 김수현 원구원은 한·중 합작 사례가 갈수록 드물어지고 있다는 부정적 현실을 전했다. 2016년, 사드무기체게(THAAD) 배치 문제로 한·중 간 지정학적 긴장 관계가 형성되면서 대부분의 합작 프로젝트는 취소되었다. 해당 분야에 투자되던 예산 역시 삭감되면서 2020년대까지도 한중 합작은 거의 성사되지 않고 있고, 최근 동아시아 내 합작은 주로 일본과 중국, 대만 간 진행된다. 액션! 대만 갱스터 영화의 부활과 한국 영화인·문화와의 연결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커뮤니케이션 대학 조교수 팅 우 초) 팅 우 초(Ting Wu Cho) 교수는 이전부터 자신이 연구해왔던 ‘대만 펄프 영화(pulp film)’라는 주제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대만 갱스터 영화가 한국영화와의 상호작용을 거쳐 2000년대 이후 부흥한 현상을 다뤘다. 이를 위해 1950~60년대 대만 고전영화를 비롯해 대만 내 영화산업의 발전, 지역문화, 그리고 지정학적 관계의 변화에 따른 영향까지 폭넓게 고려했다. 논의를 뒷받침할 수 있는 개념으로는 냥유연(Long-liu-lian) 을 제안했는데, 중국어 방언의 한 종류인 복건어로 표현된 ‘낭유연’은 목적 없이 방랑하며 시간을 흘려 보내는 행태를 말한다. 그는 제작 자본의 투자와 시장 구조, 장르적 요소의 측면에서 불안정하고 혼종적인 성격을 지닌 대만 갱스터 영화 의 특성이 이 개념과 유사하다고 봤다.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대만 갱스터 영화 중 다수가, 타국의 영화산업과의 합작을 통해 액션연기를 수입하고 자국 관객의 취향에 맞게 변화시키면서, 작품의 장르와 자본 모두 초국가적이고 혼종적인 방식으로 구성되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팅 우 초는 대만 갱스터 영화를 시간 순으로 세 종류로 구분했다. ‘방랑자’의 전형을 타고난 인물에 대한 구원 서사 가 중심이 되는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의 작품들이 첫 순서다. 대만의 지역적 특성을 반영한 범죄 및 갱스터 영화의 관습이 이들에게서부터 처음으로 발견되기 시작했다. 냥유연을 체화한 방랑자로서의 인물과 지역의 청년문화, 그리고 유행가 삽입을 통한 뮤직비디오와도 같은 연출이 눈에 띈다. 장르의 측면에서는 일본의 야쿠자 영화와 홍콩의 액션 영화가 모두 엿보인다. 그리고 제작 자본은 불안정하게 투입된 데다 당시 검열의 강도는 높았기에, 이 시기에 발표된 대만 갱스터 영화들 대다수는 상업적 흥행을 이루지 못했다. 계엄이 해제된 1990년대에는 대만 뉴웨이브 의 영향으로, < 비정성시 >(허우샤오셴, 1989), <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에드워드 양, 1991), < 남국재견 >(허우샤오셴, 1996) 등 작가주의적 경향이 짙고 독특한 내러티브를 지닌 작품들이 갱스터 주제의 대만 펄프 영화 중 대다수를 이뤘다. 반면 세 번째 구간이라고 할 수 있는 2000년대 이후에는, 상업적 장르영화의 형식을 갖춘 작품들을 통해 갱스터 장르가 부흥하기 시작했다. < 맹갑 >(유승택, 2010)과 같은 “ 대만 뉴 갱스터 필름 ”, 즉 1970~80년대 대만 펄프 영화의 특징에 청년들 간의 낭만주의적 요소를 가미함으로써 상업성을 띠게 된 2000년대 이후 장르영화가 대중적 인기를 얻은 것이다. 같은 시기에 아시아 전역에 세계화 트렌드가 나타나기도 하면서, 대만의 최신 가요와 인기 배우 등에 대한 국제적 인지도가 향상됐고, 타국 영화산업 인력과의 영화 공동 각색 및 합작 역시 활성화될 수 있었다. 대만 갱스터 영화의 지역적 전통과 세계적인 영화 트렌드가 맞물린 지점이다. <맹갑> 포스터 / 사진: IMDb < 하이자오 7번지 >(위덕성, 2008)라는 멜로드라마가 흥행하면서, 대만의 지역적 특성이 대중적인 인기를 불러일으킬 잠재력을 지녔음이 재발견되고, 대만 영화산업의 십년 간의 침체가 극복되는 기회가 마련됐다. 이윽고 2010년에 개봉한 <맹갑>은 실제 야외 거리와 주변 지역에 거주하는 갱스터들을 묘사하는 등 초기(1970~80년대) 대만 갱스터 영화의 특징을 여럿 지니고 있다. 하지만 초국가적 협업 이 두드러진다는 점에서 초기의 형태와 차별화된다. 촬영과 프로덕션 디자인, 액션 연출 등의 주요 보직에 외국인 스태프를 많이 기용했다. 그리고 액션 자체도 정교하게 짜인 홍콩 스타일이 아니라 정제되지 않은 본능적 움직임이 돋보이도록 연출됐는데, < 올드보이 >(박찬욱, 2003)의 액션에서 영감을 받아 양길영 무술감독을 섭외한 후 배우들에게 액션 연기를 전수해주기를 요청하기도 했다. 양길영 감독의 지도를 바탕으로 작품에는 1분 28초에 달하는 싱글 테이크 액션신이 삽입될 수 있었고, 이 장면은 <올드보이>의 장도리 액션신에 대한 오마주이자 동시대 대만 액션 연출의 우수 사례로서 현재까지도 언급되고 있다. <맹갑>에서 양길영 감독이 참여한 사례를 기점으로 대만의 갱스터 영화의 액션 연출은 물론 각색, 투자 등 종합적 측면에서 한국 영화인들의 기여가 늘어나기 시작했고, 이는 대만의 상업영화 제작 기반이 다시금 다져지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일례로, 한국영화 < 남자가 사랑할 때 >(한동욱, 2013)를 대만의 문화와 관객 취향에 맞게 리메이크해 흥행한 < 맨 인 러브 >(은진호, 2021)를 들 수 있다. 연출을 맡은 대만 출신 감독 은진호는 이전에 대만 밴드 “EggplantEgg”의 뮤직비디오 연출을 맡았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해당 뮤직비디오에서 역시 청년 갱스터 문화를 반영하는 서사가 전개되며 음악과 잘 어우러져 “방랑자(Wanderer) 유니버스”를 구축하는 데 일조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런 그는 <남자가 사랑할 때>를 대만의 관점에서 제작된 갱스터 영화로 리메이크하기 위해, 대만의 문화적 혼종성을 드러낼 수 있도록 동남아시아 출신 노동자 인구가 집중돼 있거나 일본문화도 일부 관찰할 수 있는 지역을 배경으로 촬영을 진행했다. 여기에 대만의 인기 가요까지 삽입하면서, 한국영화에 대한 성공적인 지역화 사례라는 평가를 받으며 본 작품으로 당해 대만 개봉작 중 최고 흥행 성적을 달성하기도 했다. (좌) 국내 원작 <남자가 사랑할 때> / (우) 대만 리메이크작 <맨 인 러브> (사진: ㈜사나이픽처스, IMDb ) 한편, <맹갑> 흥행 이후 해당 작품의 제작자는 대만의 소위 ‘지하세계’ 경험을 모티브로 또 다른 갱스터 영화 <가타오>를 제작했다. 이 작품 역시 인기를 얻자 제작자 장웨이인이 후속편을 제작하면서 시리즈에 대한 관심은 높아져갔다. 후속편 <가타오 2: 제왕의 부상>(2018)은 대만 뉴웨이브 작품에 자주 등장한 배우 겸 감독이자 과거 조폭집단에서 활동하기도 했다고 알려져있던 옌정궈가 연출을 맡아 화제가 됐다. 가오제나 콜린 쩌우와 같은 유명 배우가 출연하기도 했으며, 한국의 홍의정 무술감독과도 협업했다. IP 활용 범위도 넓어져, 작품 관련 OTT 스트리밍과 주제가 발표, 라이브 콘서트를 기획하며 ‘가타오 유니버스’를 조성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다음 편인 <가타오: 최후의 방랑자>(2021)에서는 한국 투자사와 타이베이 영화 기금 모두로부터 자본을 조달할 수 있었다. <가타오 2: 제왕의 부상> 포스터 / 사진: IMDb 결론적으로, 한국 영화인들의 전문성과 산업 구조 도입에 힘입어 형성된 대만의 뉴 갱스터 장르 는, 상업영화의 공식을 정립하고 이를 대만이라는 지역에 특화 하면서 대만 영화산업에 내재됐던 야심을 실현하는 장으로 기능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간은 또 다른 종류의 변화가 발생하고 있는데, The Pigs, the Snake and the Pigeon (2023)이라는 작품이 대만영화로는 처음으로 중국 본토에서 대규모 흥행 성적을 거두며, 아시아 국가 간 협업을 통한 갱스터 장르의 색다른 변모 가능성을 제기한 것이다. 위 작품의 무술감독은 대만의 스턴트맨 출신이지만 <가타오> 시리즈에서 한국인 무술감독과 함께 작업한 이후 무술감독으로 성장했다. 또한 대만에서 가장 큰 규모의 멀티플렉스를 운영하는 비쇼시네마(Vieshow Cinema)의 대주주인 와닌국제비주얼엔터프라이즈(Wanin International Visual Enterprise)는 중국의 영화 제작 및 배급 업체 알리바바픽처스(Alibaba Pictures)와 계약을 맺어, 작품의 IP를 범중국어권에 수출하려는 의도를 내비쳤고, 추후 일본과 한국, 말레이시아와의 합작 가능성도 열어 뒀으며, 리메이크 작품 제작을 맡을 한국 지사까지 설립하기도 했다. 이렇게 다차원적으로 심화되기 시작한 아시아 국가 간의 영화 합작이 대만 영화계에도 생기를 불어넣을지, 혹은 대만의 갱스터 장르를 근본적으로 재구성하게 되는 현상으로 이어질지를 주의 깊고도 흥미롭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팅 우 초는 설명했다. 포스트 정동 혹은 새로운 사후세계: <마약전쟁>과 <독전>을 통해 본 홍콩 누아르의 공명 (부산대학교 영화연구소 전임연구원 박은지) 박은지 연구원은 특정 시기에 한국을 찾아온 ‘ 홍콩영화 신드롬 ’의 특징을 바탕으로 < 마약전쟁 >(두기봉, 2012)과 이의 한국판 리메이크작 < 독전 >(이해영, 2018)을 비교하며, 한국영화 속 (포스트) 홍콩 누아르의 흔적 을 발견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국내 관객이 홍콩영화에 열렬히 반응한 일련의 현상을 일컫는 홍콩영화 신드롬은 특유의 감성과 에너지를 국내 영화계에 각인시켰으며, ‘문화적 기억’으로 회자될 만큼 영화문화 형성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여기에 국내 영화인들의 상상력까지 가미되어 여러 차례의 각색과 리메이크, 오마주가 나타나기도 했다. <독전>은 그러한 사례들 중에서도 상업적으로 가장 큰 성공을 거둠과 동시에 평단의 반응도 호의적이었던 작품이다. 반면, 놀랍게도 <마약전쟁>의 리메이크작이라는 이 작품 본연의 정체성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이는 홍콩 반환 이후 제작된 영화들의 국내 수입량과 인지도가 크게 감소한 데 영향을 받았을 수 있다. 국내 수입된 홍콩영화 편수는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연간 50~80편이라는 높은 수치를 기록했지만 1997년부터 41편으로 급감했고, 2000년대에는 이내 한 자릿수까지 곤두박질치며 반환 이후 급속 냉각되고 있는 홍콩영화 시장의 현실을 드러냈다. 하지만 신드롬이 한창이던 시기, 한국영화는 홍콩영화 특유의 어둡고 강렬한 미학을 열정적으로 받아들이며 ‘홍콩 누아르’의 등장에 열광했다. 기록적인 흥행을 거둔 오우삼 감독의 <영웅본색> 시리즈에 이어, < 첩혈쌍웅 >(오우삼, 1989)과 < 천장지구 >(진목승, 1990), < 지존무상 >(왕정, 향화승, 1989) 등 범죄 및 갱스터 장르의 홍콩영화가 한국에 성공적으로 안착하며 홍콩 누아르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홍콩 누아르’라는 용어는 1991년에 『영화에 대하여 알고싶은 두세 가지 것들』에서 김홍준 원장이 처음 사용하며 이후 비평계에서 통용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홍콩 누아르에 대한 국내 팬들의 열정이 거세졌고, 이전까지 이상적인 목표로 받아들여졌던 할리우드와 유럽영화로부터 벗어난 영역으로서, 한국 영화문화의 매력적인 대안으로 고려되기에 이르렀다. <첩혈쌍웅>, <지존무상> 중 (사진: MUBI , IMDb ) 박은지 연구원은 홍콩의 누아르와 액션을 한국영화만의 방식으로 수용 했다는 데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반환이 일어난 1997년 즈음 홍콩에 스며든 우울함을, 민주화를 열망하던 1980년대 후반 한국사회의 시대정신을 바탕으로 재전유(reappropriation) 했다는 분석이다. 홍콩영화를 접하기 시작한 1980년대 후반 한국사회는 서울올림픽을 통해 본격적으로 세계화를 경험하는 한편, 1987년 민주항쟁 이후 민주주의의 불완전한 정착에서 비롯된 감각 역시 이상하게 공존하고 있었다. 특히 충심과 형제애 등의 유교적 이상에 부합하지 않는 분위기로서의 “ 정동적 아노미(affective anomie) ”는 홍콩 누아르의 핵심적인 감수성으로 국내 관객에게 지각됐고, 파멸적이고 어두운, 울분의 폭발과 같은 키워드가 이 장르를 추동하는 감정으로 거론됐다. 박은지 연구원은 당시 한국사회의 정치적 불안정성의 영향으로 내면에 모종의 불안이 자리하게 된 국내 관객이, 선과 영웅주의 위주의 표면적 서사 이면에 있는 이러한 누아르적 감수성에 열광했을 가능성을 제안했다. 비슷한 시기에 영화잡지 《키노(KINO)》는 오우삼과 왕가위 등을 정전화하며 해당 장르를 작가주의적 관념과 연결해서 이해하기도 했다. 그리고 한국영화 감독들은 홍콩 누아르의 기묘한 매력에 이끌려 2000년대부터 2010년대에 이르기까지 본 장르의 연장선상에서 작업을 이어갔다. 홍콩 원작들에 대한 눈에 띄는 리메이크 시도들 역시 있었지만, 아쉽게도 많은 작품이 무산되거나 흥행에 실패했다. 반환 이후 홍콩에서 직접 제작된 누아르 영화들 자체가 국내 관객에게 소개되는 경우는 비교적 드물었는데, 홍콩 누아르의 중심 인물인 두기봉 감독이 2000년대 연출한 역작 Breaking News , Election , PTU 등마저도 국내 대중에게 선보일 기회가 없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좌) 홍콩 원작 <마약전쟁> / 사진: IMDb (© 2013 - Variance Films) (우) 국내 리메이크작 <독전> 중 / 사진: ㈜용필름 와중에 <독전>이 흥행에 성공하며 원작 <마약전쟁>에 대한 관심도 불러일으킨 점이 흥미롭다. 두 작품은 줄거리는 같지만 스타일과 톤, 감정을 전달하는 방식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이를 통해 <마약전쟁>은 전형적인 홍콩 누아르와는 구별되는 독특한 작품으로 국내 관객에게 인식될 수 있었다. 영화는 두기봉 감독이 연출한 첫 홍콩-중국 본토 합작 영화로, 홍콩 마약 카르텔의 브로커 티미(Timmy)가 사형을 면하기 위해 마약 경찰 장(Zhang)과 공조한다는 설정으로 언더커버 범죄 스릴러의 흔한 관습을 따르며 시작한다. 하지만 이내 티미의 배신이 가져온 범죄 조직의 붕괴로 초점을 옮겨가고, 경찰 조직이 참혹하게 파괴되며 마무리된다. 치밀하게 탈출을 계획하는 티미와 마약 카르텔을 끈질기게 추적하는 장은 각자의 목표를 향한 굳은 결심을 지닌 채 극명하게 대립한다. 반면, <독전>은 경찰 원호( 조진웅 )와 락( 류준열 ) 사이의 정서적 긴장을 강조하고, 두 인물 간 경쟁 관계를 점차 심화시킨다. 그리고 자기 존립과 배신을 원동력으로 움직여 윤리적 측면에서 모호한 위치에 있던 <마약전쟁>의 티미와 달리, 락은 마약 조직 내 구조적 폭력의 희생자로서 경찰의 수사를 도우면서 윤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인물로 상정된 듯한 느낌을 준다. 이런 인물 설정은 홍콩 누아르의 특징을 공유하는 한국형 범죄영화에서 자주 나타나며, ‘ 속죄를 통해 회복된 영웅적 행동 ’의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 원작 <마약전쟁>은 국가 간 합작으로 탄생한 동시대 홍콩 누아르에 그치지만, 리메이크작 <독전>에서는 남성 인물들이 차츰 동료애를 형성함과 더불어 서로의 정체성 형성에 영향을 주고받는 와중에, 극단적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카르텔의 착취 구조를 배경으로 그에 대한 사회적 응징의 아이디어도 제시한다. 원호와 락은 마약 카르텔의 폭력에 어머니를 잃은 락의 사연, 그리고 그 카르텔에 대한 수사에 공조하려는 의지를 매개로 잠시나마 연대하고, 이로써 경찰과 범죄 조직원의 경계가 희미해진다. 이후 경찰 원호는 국가의 통제를 벗어난 개인의 실행을 중심으로 ‘정의’의 개념을 재구성하고, 락은 무자비한 착취를 기반으로 이익을 창출해온 브라이언의 신체를 훼손해 흔적을 남기며 사적 응징을 완수한다. 두 인물은 이윽고 서로를 총으로 겨눈 채 마지막 장면에서 마주하는데, 한때 감정적으로 결속했지만 극중 사건 이후 멀어진 둘 사이에 모호한 연대와 상호 환멸의 분위기가 감돈다. 박은지 연구원은 <독전>의 이와 같은 차별화된 서사와 감정들이, 홍콩영화 신드롬이 정착시킨 ‘농도 짙은 감정’의 범죄물을 한국 조폭영화의 관점에서 이해한 결과 라고 설명한다. 창작자의 시네필적 면모와 장르의 혼종이 작용하면서, 홍콩 누아르와 한국형 범죄영화의 특징들을 반영함과 동시에 전복하기도 하는 독창적인 리메이크 작품이 탄생한 것이다. * 토론 * 홍콩 침례대학교 영화과 조교수 도로시 와이 심 라우(Dorothy Wai Sim Lau)가 패널 3 발표자 4인의 연구 내용을 요약하고 아래와 같이 질문했으며, 발표자들이 답했다. Q. 김수현 교수에게 (질문1) 시대별로 한국과 중국이 처해있는 외교적 상황에 따라 합작 양상이 달라진다고 설명해주셨다. 그렇다면 <제3의 사랑> 제작 당시 한·중 간 정치·사회적 관계 는 어떠했는지 궁금하다. (답변) <제3의 사랑>이 제직됐던 2010년부터 2015년 사이, 한국 정부는 영화산업에서의 합작에 호의적이었고 관련 절차가 다양한 방법으로 지원되기도 했다. 이에 힘입어 본 작품의 감독과 촬영감독, 음악감독을 비롯한 여러 스태프 역시 작업을 위해 한국에서 중국으로 이동했지만, 발표 중 이야기했듯이 중국 제작진의 개입과 지정학적 불안정성 등으로 인해 충분한 창작 권리를 획득하지 못했다. (질문2) 중국의 제5세대 감독들에게서 나타난 작가주의적 특색과 달리, 블록버스터 < 유랑지구(The Wandering Earth) >와 같은 작품은 국가 권력에 기반한 창작(national authorship)과 국가적 브랜딩이 눈에 띈다고 발표 중에 말씀하셨다. 후자의 ‘ 국가 권력에 기반한 창작 ’이 무엇일지 보다 구체적으로 듣고 싶다. (답변) 물론 장이머우와 천카이거 감독과 같은 이들은 한국의 봉준호 와 박찬욱 감독처럼,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통해 작가주의 감독으로서의 지위를 오랜 기간 인정 받아왔다. 하지만 이들이 속한 제5세대 이후에 등장한 주선율영화(1990년대 중국에서 개혁·개방이 이뤄진 후 사회주의와 애국주의 등의 중국사회 주류 이념을 교육 및 선전할 목적으로 제작된 영화의 종류)와 같은 장르에서는 작가주의에 관한 어떠한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여기에는 중국 정부가 추구하는 가치관과 비전이 관객 선전을 목적으로 하여 주입돼 있다. 따라서 감독이나 스태프 개인의 개성을 중심으로 한 작가주의를 바탕으로 하지 않고, 국가 권력과 이념을 기반으로 ‘중국영화’라고 이름 짓는 행위 자체만이 의미를 갖게 된다 는 점에서 제5세대 감독들의 활동과는 맥을 달리한다고 볼 수 있겠다. Q. 팅 우 초 교수에게 (질문) 중국과 홍콩에서 비롯된 액션 스타일과, <맹갑>에 도입된 한국식 액션 스타일의 차이점을 설명해줄 수 있는가? (답변) 홍콩의 액션은 중국으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아, 각기 다른 그룹이 터득한 기술을 바탕으로 정교하게 연출돼 있다. 한국의 영화인들은 이와 같은 홍콩식 액션을 받아들이되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응용 했는데, 카메라 앵글에 맞춘 인위적 동작이 아니라 보다 현실적인 움직임을 가미 했다는 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Q. 박은지 연구원에게 (질문) 발표에서도 언급해주신 홍콩 누아르의 ‘정동’적 측면이 동아시아 국가의 리메이크작을 통해 표현 될 때 주로 어떤 특징이 나타난다고 생각하시는지 여쭤보고 싶다. (답변) 이번 발표를 위해 진행한 <독전>에 대한 연구를 중심으로 말씀드리자면, 먼저 정동적 모티프로부터 영향에 따라 범죄자와 경찰의 경계를 흐릿하게 하는 설정 이 있다. 이는 남성들 간의 연대에 기반한, 매우 불안정하고 양가적인 감정에서 비롯된다. 다른 하나는 ‘ 상호반영적 페르소나(mirroring persona) ’의 발견이다. 한국 범죄 스릴러에서 자주 등장하는 장면으로, 두 남성 인물이 서로를 응시하면서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상대의 모습을 자신의 정체성에 투영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패널 4> 한·홍 합작의 재해석 특정 영화인이나 작품의 사례를 인용해 한국과 홍콩 간 영화 합작이 일어난 역사를 돌아보고, 눈 여겨 볼 만한 몇 가지 대목을 자세히 살펴봤다. 영화의 안과 밖 모두에서 새로운 시대를 직면할 수밖에 없게 된 상황에서, 영화를 통한 두 국가의 협력이 나아갈 방향에 대한 제언도 이어졌으며, 패널 발표 전반은 홍콩 침례대 케니 응 교수가 이끌었다. 호금전의 한국 산악영화에 대한 재평가 (영화사가 · 독립 연구자 스테판 테오) 1970년대 한국영화는 홍콩과 대만과의 합작을 여러 번 시도했으며, 이 과정에서 “Destination South Korea”와 같은 현상으로 일컬을 만큼 합작 영화의 주 촬영지로 자주 등장하기도 했다. 스테판 테오(Stephen Teo)는 그중에서도 < 사문의 승객 >(1979)과 < 산중전기 >(1979)에 집중해, 한·홍 합작의 로케이션으로 한국의 산세가 선택된 맥락과 함께 각 작품의 역사적 의미를 되짚었다. 그는 한국의 산속에 자리한 전통적 양식의 건축물과 사찰, 주변의 절경이 두 작품의 핵심적인 미적 요소로 기능했고, 배경이 되는 전근대 중국(historical china)을 상징하는 공간이 되어줬다고 말했다. 모든 장면이 인위적인 세트나 스튜디오를 이용하지 않고 실존하는 장소에서 있는 그대로 촬영된 점도 특별하다. 스테판 테오는 ‘문화적 냉전(cultural cold war)’이 이어지던 1970년대 중·후반 중국어권과 한국의 영화 합작이 선호되는 환경이 마련됐고, 두 편의 작품 역시 그 결과물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당시 중국은 문화혁명의 잔재로부터 벗어난 직후였기에 정치와 사회 전반이 불안정한 상태였으며, 무협을 비롯해 귀신, 종교, 미신 등(신이나 요괴, 초자연적 현상을 다루는 중국영화의 한 장르로 ‘신괴’로도 일컬어진다)이 개입한 장르나 서사의 유통도 금지돼 있었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영화 촬영지로서, 감독 호금전이 의도한 장르를 시도할 ‘자유’를 선사 했다고 봤다. 한국과 홍콩, 대만이 영화 제작 측면에서 ‘ 자유에 기반한 네트워크(freedom nexus) ’를 구축하며, 중국 본토에서의 정치, 사회, 문화적 제약으로 인해 수용되기 어려운 작품들이 제작되는 환경으로 기능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며 지정학적 상황도 변화했기에 위와 같은 맥락은 작품의 가치를 뒷받침하기에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대신 그는 한국이 ‘문화적 중국’으로 재현됐다는 주장을 바탕으로 합작의 의의와 효과를 설명했다. 유교학자 뚜웨이밍(Tu Wei-ming)이 제안한 개념인 ‘문화적 중국’은 중국문화로부터 영향을 받은 지역으로 구성된 국제적 공동체를 가리키며, 중국 본토와 홍콩, 대만을 포함해 전 세계의 중국어권 디아스포라 지역도 해당된다. 그중에서도 홍콩은 ‘문화적 중국’의 기조로 기획된 영화를 한국과 합작했고, 호금전의 위 두 작품에서 한국이라는 배경이 ‘문화적 중국’을 재현하는 데 효과적임이 입증됐다고 그는 평가했다. 호금전이 한 인터뷰에서 답변한 내용에 따르면, 한국의 전통 건축 양식과 몇몇 자연 경관으로부터 중국과의 문화적 유사성을 발견한 경험을 계기로 두 작품을 한국에서 촬영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이외에도 두 국가는 유교와 불교와 연관된 의식이나 생활 양식을 오랜 시간 공유해왔다. 같은 맥락에서, 홍콩의 영화 제작진들 역시 중국과의 교류가 단절된 문화적 냉전 시기, ‘문화적 중국’을 재현할 수 있는 대안적 공간으로 한국을 택해 합작을 시도했다는 주장이다. <산중전기> 중 / 사진: IMDb( 1 , 2 ) 한편, 아시아 문화권에서 공유되어온 동양 철학의 개념이 작품 속 주제의식의 동력이 된 점도 눈에 띈다. 도가적 사상에서 비롯된 장자의 ‘소요유’는 『장자』 제1편에 등장하는 용어로, 어떠한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노니는 정신적 경지를 뜻한다. 사물과 세상에 구속 받지 않고 광막한 공간에서 누리는 절대적인 자유이자 참된 행복이라고도 할 수 있을 텐데, 이는 호금전의 작품의 모티프로 자주 등장한다. <사문의 승객>과 <산중전기>에서도 인물들은 계속 걷는다. 단순히 땅 위를 걷는 것뿐만 아니라 적을 쫓아 뛰고, 몇몇 액션신은 공중에서 펼쳐지며 ‘하늘에서 걷는’ 듯한 느낌을 자아내기도 한다. 스테판 테오는 소요유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자유’의 감각을 포착한 호금전이, 이를 인물의 다양한 움직임들(걷기, 뛰기, 공중에서 활동하기)로 작품 속에서 실현 하고 있다면서, 배경이 된 한국의 자연경관 역시 기여했다고 덧붙였다. 결과적으로, 그의 관점에서 ‘소요유’ 개념에 기반하고 있는 두 작품은 그 개념의 특성에 따라 존재와 시간의 ‘실존’을 지지하게 된다. 한편 호금전은 일종의 방랑자로서, 당시 중국사회의 제한적 환경에서 벗어나 한국이라는 대안적 공간에서 예술적 자유를 발휘해 창작한 작품으로 소요유 개념을 시각화했다고 덧붙였다. 무사, 스파이, 그리고 쿵푸 마스터: 정창화 감독과 초국가적 영화 제작자의 탄생 (홍콩 시티대학교 창의미디어학부 조교수 이상준) 이상준 교수는 그간 학술적으로 분석된 적이 드문 정창화 감독에 대한 예비적 수준의 연구로서 1960~70년대 한국과 홍콩에서 그가 지나온 연출 여정을 들여다봤다. 감독으로 데뷔한 1953년부터 1977년까지 그는 50여 편에 달하는 작품을 제작함으로써 국내는 물론 홍콩에서도 합작영화 제작의 주역으로서 크게 활약했다. 2003년 부산국제영화제가 마련한 회고전을 계기로 그의 연출작이 지닌 영화사적 가치가 국내에서 재발견되기 시작했고, 당시 회고전에서는 쇼브라더스와 골든하베스트와 작업한 한·홍 합작영화 9편이 상영됐다. 여러 국가를 오가며 활동하는 아시아 영화인들은 ‘내셔널 시네마’라는 프레임에 부합하지않는다는 이유로 과거 연구의 대상으로 쉽사리 선정되지 못했다. 현재는 이런 편협한 경향성이 사라지긴 했지만, 정창화 감독이 활동하던 당시만 해도 디아스포라의 정체성을 지녔거나 초국가적 작업에 참여하는 감독과 촬영감독, 배우 등은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정창화 감독은 활동 초기부터 여러 장르에 걸쳐 왕성화게 활동했다. 1965년부터 3년간 멜로드라마, 청춘, 무협 등의 장르영화 15편(< 황혼의 검객 > 등)을 한국에서 연출했고, 1968년에 쇼브라더스와의 협업을 시작했다. 이후 그는 6.25 전쟁 이후로 중국어 문화권의 제작사 두 곳(쇼브라더스, 골든하베스트)과 공식적으로 협업하며 높은 흥행 수익을 올린 최초의 한국인 감독으로 거듭났다. (물론 그가 쇼브라더스와 초반에 합작한 다섯 편은 제목과 감독의 이름을 사실과는 다르게 명시한 ‘위장 합작(counterfeit coproduction)’에 해당한다.) 그리고 많은 한국인 배우와 촬영감독, 무술감독과 같은 제작 인력이 그의 활동을 계기로 홍콩으로 넘어와 본격적으로 합작에 합류하는 기회가 만들어졌다. 제작 파트너가 골든하베스트로 바뀐 뒤에는, 그는 제작사 산하에서 본인이 직접 운영하는 별도의 전속 스튜디오를 설립해 한국은 물론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제작사들과도 활발히 합작하기도 했다. 다만 그가 홍콩에서 제작했지만 한국에서 공개한, 앞서 언급된 ‘위장 합작’ 작품들은 그의 필모그래피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터라, 홍콩에서의 그의 활동이 학술적으로 면밀히 분석되지 못하게 되는 상황을 낳고 말았다. 국내의 많은 영화사 연구자들은 그 작품들의 존재를 아예 무시하거나, ‘탈국적(denationalized)’ 활동의 결과물 또는 한국영화사의 ‘비공식적 일화’ 정도로만 평가했다. 이는 홍콩영화사 연구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 철인(죽음의 다섯손가락) >(1972)이 ‘컬트적 고전(classic)’으로 인식되기도 했지만 역시 그를 ‘작가’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이상준 교수는 이와 관련해 2008년에 홍콩의 영화 연구자 웡 아인 린(Won Ain-ling)과 대화하며 접한 설명을 인용했다. 웡 아인린에 따르면 1997년 홍콩 반환 이후 ‘홍콩영화’의 정체성 구성이 간절해진 상황에서, 홍콩을 상징하는 무협 장르의 영화에 한국과 일본 출신의 영화인들이 관계되어있다는 사실이 홍콩의 영화인들을 약간은 불편하게 했을 수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주자(Emigré)와 망명자(Exiled)와 같은 디아스포라 영화인들은 초국가적 영화사 형성의 핵심 동력이라는 점에서 ‘내셔널 시네마’의 영역에 편입되지 못한다는 이유로 그들의 활동이 망각돼서는 안된다고 이상준 교수는 주장한다. 영화와 사람, 문화적 움직임, 협업, 공간 등이 여러 국가에 걸쳐 조직될 수 있다는 ‘초국가적 관점’ 을 전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정창화 감독은 1960~70년대 한국과 중국어권 간의 영화적 교류를 중개한 이로 상정된다. 그는 정치적 상황이 불안하고 정부 개입도 심각했던 당대 한국영화계에 쿵푸영화의 매력을 제시했고, 새로운 합작 파트너로서 동남아시아권의 인력을 소개하는 참신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상준 교수는 관련해 정창화 감독이 한국에서 홍콩으로 제작의 근거지를 옮기고 초반에 발생한, 쇼브라더스와의 합작 사례를 더욱 자세히 설명했다. 그가 < 망향 >(1958)을 통해 홍콩과의 합작을 처음으로 시도한 이후 < 조용한 이별 >(1967)과 < 비련 >(1967)을 제작했지만 홍콩 관객들로부터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하지만 1960년대 한국의 대표적 첩보 스릴러로 손꼽히는 < 순간은 영원히 >(1966)의 흥행 성적은 비교적 준수했다. 설립자 런런쇼의 관심을 끄는 데도 성공해 1968년, 쇼브라더스와 5년간의 계약을 체결하게 되기도 했다. 정창화 감독은 (당시 기준) 동시대적 설정을 바탕으로 ‘현대 액션 영화’를 구현할 줄 알았기에 자신이 섭외됐을 것 이라고 추정했다. 이때까지 홍콩은 사극 기반의 무협 장르가 액션 영화의 중심이 되어 현대적 액션 연출 경험은 부족했기 때문이다. 같은 시기에 쇼브라더스에서는 일본 출신 감독, 촬영감독, 작곡가, 안무가 등이 상당수 활동 중이었으며, 정창화 감독이 입성한 이후 성훈, 임지은, 남석훈 등의 한국 배우들의 합류도 앞두고 있었다. 당대 여느 제작사보다 국제적으로 조직이 구성되었던 업체라고 할 수 있다. 쇼브라더스의 국제 교류 역량에 힘입어 정창화 감독이 해당 제작사 안에서 처음으로 연출한 작품은 < 천면마녀 >(1969)로, 홍콩에서 007 시리즈가 유행하던 중 그와 같은 형식으로 제작된 여성 주연의 액션 영화다. 두 명의 조감독과 배우 한 명(성훈)은 한국인으로, 세 명의 핵심 스태프는 일본인으로 기용하며 동아시아 출신의 인력들이 어우러졌다. 크게 흥행하지는 못했지만 적정 수준의 상업적 이익을 달성하며 유럽 영화계에 진출한 최초의 쇼브라더스 제작 작품이라는 수식어를 얻게 됐다. 그 사이 호금전의 <대취협>(1966)이 홍콩 박스 오피스에서 신기록을 세우고 아시아 전반에 무협 장르 붐을 일으키면서 쇼브라더스의 제작 기조도 무협 장르 쪽으로 기울었다. 이후 정창화 감독 역시 시장의 수요를 의식해 한국에서 < 나그네 검객 황금 108관 > 등 ‘국내 무협영화’를 연출한 데 이어 쇼브라더스에서도 중국어권 출신이 아닌 감독으로서는 최초로, 사극 무협 기반의 작품들을 연출했다. 그는 쇼브라더스의 무협 액션 스타일에 반일 감수성을 결합하고, 미국의 웨스턴 장르도 일부 차용했으며, < 강호여협 >(1970)과 < 아랑곡의 혈투 >(1970)와 같은 작품을 선보였다. 특히 <아랑곡의 혈투>가 긴박하고 현실적이면서도 효율적으로 연출된 전투 장면들로 볼 때 1960년대 만주리안 웨스턴 장르의 분위기를 성공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천면마녀>, <아랑곡의 혈투> 중 (사진: 영화진흥위원회) 다만 이상준 교수에 따르면, 정창화 감독은 무협 장르의 붐에 다소 늦게 반응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쇼브라더스와 계약하고 본격적으로 무협 장르 연출을 시도했던 1970년대 초반은 쇼브라더스의 무협 제작 열기가 식고 홍콩영화가 ‘쿵푸’라는 물결을 마주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보다 현대적인 공간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노동 계급의 이야기, 그리고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 맨손 쿵푸 액션은 홍콩영화의 새로운 흥행 공식으로 자리매김했고, 골든하베스트(Golden Harvest)라는 제작사의 설립 및 운영의 주된 목표가 됐다. 정창화 감독은 이 트렌드를 재빠르게 수용해 1972년에 <철인(죽음의 다섯손가락)>을 제작했다. 그가 처음으로 연출한 쿵푸영화였지만 한국에서 제작했던 전작들과 유사하게 반일 감정을 모티프로 한 서사가 중심이 됐다. 다만 작품 개봉 직후에는 홍콩 내에서 흥행에 실패한 듯 보였고, 쇼브라더스의 새로운 인력과의 의견 불일치 등의 문제도 겹쳐 정창화 감독은 같은 해에 골든하베스트로 이직한다. 하지만 1973년 작품은 미국 박스 오피스 흥행 1위라는 놀라운 기록을 세우며 1970년대 초반 홍콩영화의 국제적 영향력을 입증했다. 골든하베스트는 할리우드와 같이 수직적으로 통합된 구조를 추구하며 유연한 제작 체계역시 갖춘 기업이었다. 정창화 감독은 이곳에서 < 흑야괴객 >(1973), < 흑무사 >(1974), < 황비 >(1974), < 심판자 >(1976)를 연출했고, 다양한 장소를 로케이션으로 삼는 골든하베스트의 방침에 따라 태국, 인도네시아, 필리핀, 대만, 한국 등 여러 아시아 국가들에서 촬영했다. 그런데 그의 마지막 작품 < 충열도(파계) >(1977)가 개봉하자, 그는 갑작스럽게 홍콩을 떠났다. (정창화 감독은 당시 “홍콩영화 발전에 기여하신 만큼 한국영화의 발전에도 기여해줬으면 한다”라는 부탁을 문화공보부로부터 받았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그 즈음 국내에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사망 이후 전두환 정부 출범을 앞두고 있어 정치 상황이 매우 불안정했다. 귀국 후 정창화 감독은 스스로 제작사 화풍흥업을 설립해 1980년대 중에는 국내에서 제작자로 활동했고, 이를 계기로 영화 연출에서 은퇴한 그는 1996년 미국으로 이주했다. 이상준 교수는 2003년 부산국제영화제의 정창화 감독 회고전 프로그램의 코디네이터로 활동한 조영정을 인용하며, “액션영화의 선구자로서 이 장르를 한국에 소개하고 발전시킨 그가 다채로운 이력에도 불구하고 심도 깊은 연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라는 점에 아쉬움을 표했다. 그리고 발표 당시 컨퍼런스에 함께 하며 기조연설을 맡기도 했던 연구자 크리스 베리(Chriss Berry)의 말처럼, “영화를 통한 한국과 중국 간의 연결이, 자연적으로 주어진 민족성(ethnicity)과 유사한 ‘국민국가(nation-state)’ 개념에 기반하지 않고, 개별적인 초국가적 프로젝트들에 의해 더욱 구체화”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관련된 학술적 논의가 이어지는 데 기여하고 싶다는 소망을 밝히기도 했다. 하나의 냉전에서 또 다른 냉전으로: 한·홍 합작의 과거로 미래를 살펴보기 (홍콩필름아카이브 소속 영화평론가 샘 호) 샘 호(Sam Ho)는 이틀 간의 컨퍼런스를 마무리하는 순서에 걸맞게, 한·홍 합작의 과거를 지나 그로부터 역동적으로 변화한 결과로서의 현재를 개괄하고, 이를 바탕으로 양국 간 영화 협업의 미래를 조망했다. 그는 동시대 사회가 유례 없는 새로운 질서 를 마주함과 동시에, 그와는 정반대의 가치를 추구하는 국제사회의 냉전 상황 역시 목도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이번 컨퍼런스의 목표가 더욱 뜻깊은데, 두 국가로부터 비롯된 영화적 움직임들이 갈라지면서도 합쳐지는 대목들을 다루고 있어, 모순되면서도 상호 보완적인 방식으로 발전하는 오늘날의 역사와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지난 150년의 역사만 보더라도, 아시아는 외부의 오랜 침략과 억압으로 인해 깊은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그만큼 고통으로부터 교훈과 깨달음을 얻어 현재와 미래를 가꾸려는 의지가 돋보인다고 샘 호는 말했다. 따라서 아시아는 새로운 질서를 받아들이는 와중에 지정학적 권력의 중심으로 피할 수 없이 끌려갈 수밖에 없는 동시대 상황 속에서, 지금까지의 역사를 통해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그 권력의 중심지를 조정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러려면 마주하게 되는 사건의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맥락을 짚어야 하는데, 개인이 모든 맥락을 파악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여러 연구자가 관점을 공유하는 이번 컨퍼런스와 같은 자리가 자주 마련되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다. 그가 한·홍 합작 역사를 읽는 방법으로 추천한 바는 이렇다. < 이국정원 >(전창근, 도광계, 와카스기 미쓰오, 1957)을 기점으로 합작이 시작된 1950년대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를 그는 홍콩영화의 제1 황금기라고 보는데, 좌익(left-wing)과 우익(right-wing) 진영의 제작사들이 절묘하게 균형을 이루며 홍콩영화 발전에 기여했기 때문이다. 홍콩영화의 두 진영은 당시 이분법적으로 분리되어 있지 않았으며, 샘 호에 따르면 오히려 긴밀히 연결된 채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찾아온 냉전 체제에도 불구하고 다극적인(multi-polar) 영화산업을 구축해나갔다. 여러 작품에 걸쳐 홍콩과 합작한 한국인 정창화 감독에 대해서도 언급하며, 한국영상자료원에서 그의 작품을 처음으로 관람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과거 홍콩국제영화제에서 2000년대 초반의 독창적인 한국영화들을 관람하고 완전히 매료된 그는 해당 작품들 이전의 한국영화사가 궁금했고, 홍콩필름아카이브의 지원으로 한국에 방문해 한국고전영화를 연구하는 기회를 얻은 바 있다. 정창화 감독을 비롯해 홍콩과 합작한 여러 한국영화인들의 활동 역시 이러한 연구의 의지를 다지도록 해줬다. 그는 그러면서 한국과 홍콩의 합작이, 동아시아의 문화와 가치를 통합하고자 노력하는 과정에서 양국이 공유하게 된 경험 이고, 결과적으로 두 국가의 영화적 전형에서 벗어난 새로운 무언가가 창작됐다고 설명했다. 이후 그는 홍콩필름아카이브의 여정을 홍콩영화사와 연결 지어 돌아봤다. 홍콩은 자국 내 영화산업도 활성화된 상태였지만 영화 미학의 측면에서도 기여한 바가 큰 반면, 타국에 비해 필름아카이브를 상당히 늦게 설립했다(1990년대). 그래서 소장자료의 규모 역시 상대적으로 작은 편인데, 그럼에도 아카이브로서 사업을 개척하고 학계와 유기적인 관계를 지속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이 고무적이다. 샘 호는 그 비결이 영화 연구에 미치는 지정학적 영향력을 수용하면서도 아카이브 고유의 임무에 충실한 연구를 병행 했다는 데 있다고 말했다. 전 세계 영화 연구의 성과를 측정하는 기준은 아직까지 상당 부분 서구 문화권의 기준을 따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정치·사회적으로 민감하거나 그다지 대중적이지 않은 연구 주제는 여전히 “저명한 지면”, 즉 서구의 주도 아래 발행되는 지면을 통해 공개되기 어렵다. 샘 호는 이를 비판하기보다, 지정학적 영향력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사회 속 불가피한 현실임을 인정한다. 따라서 그는 필름아카이브의 연구 업무를 수행하는 자로서 영화학계의 여론을 지배하는 서구 문화권의 가치관에 근접한 연구 성과를 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다만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더라도, 필름아카이브만이 파고들고 매진할 수 있는 주제로 연구하는 이들을 지원 하기도 한다. 아시아 영화인 1인의 필모그래피를 종합적으로 정리한 저서를 집필하는 등, 주류 학계의 틈새를 메우는 이들의 유의미한 연구는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샘 호는, 자신을 포함해 과거와 현재를 면밀하고 꾸준하게 연구하려는 의지를 지닌 아카이브의 일원들이 있기에, 홍콩영화의 미래는 결코 어둡지 않으리라고 내다봤다. * 토론 * 패널 3과 4의 발표자들이 모두 모인 가운데, 청중이 질문을 던지거나, 발표자들이 서로의 주제와 관련해 궁금했던 점을 문의하고 답변했다. Q. (청중) 이상준 교수에게 (질문) 정창화 감독은 홍콩에서 영화를 제작할 당시, 한국인으로서의 민족적 정체성에 더욱 영향을 받았는지 , 혹은 홍콩 영화산업과 연출 방식에 동화된 상태였을지가 알고 싶다. (답변) 그의 자기 정체성 인식이 작품을 통해 명확히 나타나지는 않는다. 다만 처음 쇼브라더스를 통해 홍콩에 진출했을 당시, 그는 제작사와의 계약에 의해 섭외된 여러 외국인 감독 중 하나였다. 따라서 각본에 개입하지도 않았고, 작품 자체를 통제할 권한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했다. 하지만 구체적인 연출 방식(액션 동작과 인물 설정, 반일 감정에 관한 요소 등)만큼은 당대 쇼브라더스에서 제작된 다른 작품들과는 차별화됐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골든하베스트 에서의 필모그래피는 달랐다. 이곳에서는 그가 창작에 관해 주장할 수 있는 권리가 더욱 확대 됐고, 한국 출신 인력을 도입할 여건도 형성되어 쇼브라더스에 비해 훨씬 많은 ‘합작’ 작품이 제작될 수 있었다. 그래서 본인은 개인적으로 그가 골든하베스트에서 작업할 당시 연출한 작품들을 선호한다. 물론 작품의 가치를 기준으로 평가한 것은 전혀 아니며,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말씀드렸다는 점 참고 부탁드린다. Q. 샘 호 평론가 (질문) 일레인 정이 발표한 ‘부드러운 남성성’은, 중국의 유교적 가치관으로부터 파생된 이미지로 인식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오래 전부터 유래된 유교 사상에 입각해, 중국에서는 학문에 정진하는 ‘학자’로서의 태도 가 남성의 이상적 이미지를 구성하는 조건이 된다고 여겨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이 유교적 남성상은 점차 변화를 겪어 ‘신체적 강인함’을 수련하려는 태도도 강조 된 바 있다. 그럼에도 중국에서는 학문 수양을 중심으로 한 전자의 ‘부드러운 남성성’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데, 한국의 경우는 어떠한지 궁금하다. (답변: 김수현 교수) 대부분의 각본을 남성이 집필하는 한국‘영화’ 의 경우, 신체적으로 강인하고 마초적인 남성성을 형상화하는 작품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반면 한국‘드라마’ 작품들은(특히 멜로드라마 장르가) 여성 작가에 의해 주로 집필되곤 한다. 그리고 이들이 그린 남성 인물의 이미지는 작가의 주관이 반영된, 이상적이면서도 무척 비현실적인 요소들이 집합함으로써 탄생하기에, 한국드라마가 설정한 남성 이미지는 현실 사회에서는 실재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정리하면, 한국 영상 콘텐츠를 통해 남성성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영화와 드라마에 각기 다른 양태로 형성되어있는 젠더 및 섹슈얼리티 구분 현상 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본다.
경기천년바탕체 R(저작권자: 경기도, 출처: 한국저작권위원회 ) (위 이미지 클릭 시 유튜브 영상으로 이동) 20년 역사의 예술영화 전용관 대전의 원도심이라고 불리는 대전 중앙로에 위치한 대전아트시네마는 예술영화 전용 상영관으로, 스스로를 ‘예술영화 지기’라고 칭하고 있는 강민구 대표가 2006년 4월에 개관하여 이후 계속 운영하고 있다. 대전아트시네마는 1990년대 말부터 전국적으로 본격화된 시네마테크 운동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강민구 대표는 ‘전국시네마테크연합’이라는 모임에서 활동을 하면서, ‘시네마테크 운동’의 관점에서 대전에도 예술영화 상영 공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처음에는 다른 극장을 대관하거나 문화회관 같은 공간을 대관하여 영화제를 열었으나, 안정된 상영 공간이 확보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본인이 살고 있던 지역에 예술영화관을 개관했다. 2002년 시네마테크 단체들이 연합해서 출범한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가 서울아트시네마를 개관하는 것을 본 것이 자극이 되었다. 또한 당시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진행한 예술영화관 운영 지원사업의 대상이 되어 영화관 개관에 큰 도움을 받았다. 강민구 대표는 처음 2006년에는 대전 선사유적지 근처에서 ‘시네마테크 대전’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일 년간 운영을 했는데, 그 장소가 요양병원으로 바뀌면서 2007년 현재의 자리로 이전했다. 현재의 대전아트시네마 공간은 이전 ‘동보극장’이었다. 영화관 시설이 어느 정도 갖춰져 있다는 점이 이전의 이유가 되었다. 원래는 바로 인근에 7개 관을 운영하고 있던 대전아카데미극장을 임대하고 싶었으나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받게 돼서 동보극장을 임대하게 되었다고 한다. (대전아카데미극장은 2016년 7월 31일 영업을 종료했다) 현재도 동보극장의 기물들을 상당 부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원도심에는 원래 대형 영화관뿐 아니라 소극장 등도 있었으나 멀티플렉스가 생기면서 2, 3년 사이에 급격하게 다 사라져 버렸다. 대전아트시네마 강민구 대표 현재 대전아트시네마는 옛 충청남도청사 방향으로 목척교를 지나기 전 대로변 건물 3층에 위치하고 있다. 기차역 대전역에서 내려서 도보로 5분 거리이며 인근에 대전의 명소로 불리는 ‘성심당’ 본관은 물론 ‘중앙시장’과 ‘스카이로드’가 있어서 서울과 경기도 지역에서 오는 여행자들이 들러야 하는 지역으로 꼽히고 있다. 현재 대전아트시네마 위치는 기차역과 지하철역에서 도보로 접근이 가능하고, 자동차를 가지고 온다고 해도 중앙시장 공영주차장이나 인근 건물의 복합주차빌딩을 이용할 수 있어서 접근성이 높다. 대전아트시네마가 위치한 지역은 주민들에게 구 시가지의 중심이라는 의미를 가진 ‘원도심’이라고도 불린다. 이전까지는 지리적으로 대전의 중앙에 있었던 지역이었으나 현재는 유성이나 대전 서구 쪽으로 계속 범위가 넓어지면서 둔산이 중앙이 되었다. 2000년대 중후반 지하철 대전역이 생기면서 이 지역이 다시 활성화되고 있다. 특히 시내버스가 대전역 앞으로 오게 되면서 대전의 20~30대들의 원도심 유입이 많아졌다. 또한 대전아트시네마가 영화제나 기획전을 열면 대전 이외의 지역, 특히 서울과 경기 쪽 영화 마니아들이 기차를 타고 참석하는 경우도 많다. 대전아트시네마 로비 전경 138석의 상영관 건물 입구에서 계단을 따라 3층으로 올라와서 대전아트시네마로 들어오면 좌측에 ‘시네마테크관’이 있다. 시네마테크관은 28석인데 영화 상영이 가능한 강연 공간이다. 기획전이 열리기도 하지만 워크숍과 대관 등의 행사가 주로 진행된다. 우측에는 휴게 공간이자 로비가 있다. 이곳에서는 티켓 발권도 가능하고 음료도 주문이 가능하다. 로비에 영화 관련 서적과 DVD, 영화 포스터 등이 놓여 있고 영화 관람 전 티켓 발권을 하고 쉴 수 있는 카페처럼 꾸며져 있다. 로비에는 방대한 양의 영화 DVD가 있는데 대전아트시네마 회원으로 가입하면 무료로 빌려주고 있다. 회비는 월 만 원이며 영화를 볼 때마다 회원가입을 하면 삼천 원씩 할인해주고 있다. 시네마테크관 전경 로비에서 우측으로 들어가면 상영관이 있는데, 상영관은 1관이고 좌석은 총 138석이며 10분이 경과되면 입장을 할 수 없다. 면적은 전체적으로 보면 100평 정도 되고, 상영관이 50평, 휴게실이 30평, 시네마테크관이 20평 정도이며 옥상이 있다. 날씨가 좋을 때는 옥상에서 ‘옥상영화제’라는 이름으로 영화 상영과 음악 공연 등을 진행했다. 원래 좌석은 2층을 포함하여 193석이었는데 필름 영사기를 대체한 디지털 영사기의 공간을 2층에 마련하게 되어 2층에 관객을 출입시키지 않고 있다. 더 이상 쓰지 않는 필름 영사기의 부속들은 서울아트시네마에 기증했다. 그런데 현재는 10,000안시 빔 프로젝터로 상영을 하고 있다. 디지털 영사기가 있으나 보수비용이 너무 비싸서, 맥미니를 통해서 프로레스 파일로 받아 상영한다고 한다. 취재 시점 영화진흥위원회 지원사업에 선정되어서 상영시스템을 보수할 계획도 가지고 있다. 상영관 1층 전경 대전 영화예술문화의 아지트 대전아트시네마는 예술영화 전용관답게 개관 이래 한결같이 예술영화와 독립영화를 대전 시민들에게 소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주기적으로 기획전과 영화제를 개최하고, 영화 비평 수업 및 제작 강좌 등을 열기도 하는 등 영화를 사랑하는 시민들에게 아지트 역할을 한다. 2019년부터 시작한 ‘대전철도영화제’는 지역민들로부터도 큰 호응을 받고 있다. ‘대전의 역사와 영화를 교차시킨다’라는 취지를 걸고 있는데 철도와 함께 성장한 도시라는 정체성을 지역 주민들에게 부각함과 동시에 만나기 힘들었던 고전 명작들과 한국 독립영화 신작들을 발굴하여 상영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영화인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겨서 《씨네21》이 2020년 독립예술영화관에 대한 기획 기사를 연재했을 때, < 윤희에게 >(2019)를 연출한 임대형 감독과 < 스틸 플라워 >(2016), < 재꽃 >(2016) 등에 출연한 정하담 배우가 본인들에게 인상 깊었던 독립예술영화관으로 대전아트시네마를 지목하기도 했다. 임대형 감독은 대전아트시네마가 2011년에 에릭 로메르 감독의 추모전을 하고 있을 때 방문한 기억을 술회했으며, 정하담 배우는 2017년 <재꽃>을 개봉했을 당시 대전아트시네마 옥상에서 열리는 GV 행사에 참여 한 뒤, 그때의 분위기는 물론 당시 대전아트시네마에서 일하는 청년 스태프의 열정에 대해서도 감탄했다고 한다. 이렇듯 이십 년의 시간을 거쳐 온 대전아트시네마는 이제 많은 영화예술인들에게 추억의 공간이자, 성장의 터전이 되어주고 있다. 공간 및 운영개요 1) 위치 : 대전시 동구 중앙로 192, 3층 2) 설립일 : 2006년 4월 3) 대표자 : 강민구 4) 규모 : 면적 212.37㎡(상영관 약 50평, 휴게실 약 50평) 5) 극장 구성 (관수, 관별 좌석 수, 훨체어석): 대전아트시네마 1관 136석, 시네마테크관 28석 6) 운영시간 및 정기휴무 : SNS 및 공식카페에 상영시간표 공개, 연중무휴 7) 입장료 및 할인 정책 : 일반 8,000원, 청소년/노약자/장애인 7,000원, 회원 5,000원 8) 조직도 및 조직 구성 : 대표, 대전철도영화제 스태프 9) 구성원 : 강민구 대표, 신진희 스태프 10) 주요 장비(영사 장비, 음향) : 빔 프로젝터, 맥미니(ProRes 파일 상영) 취재 일자: 2024년 8월 29일 글/인터뷰 진행: 김문경 사진: 허 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