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리언과 지구여인
- 감독
- 줄리언 템플
- 제작년도
- 1988
- 출연
- 제프 골드브럼, 줄리 브라운, 지나 데이비스, 짐 캐리, 데이먼 웨이언스, 마이클 맥킨, 찰스 라킷, 래리 린빌, 릭 오버턴, 다이안 스틸웰, 준 C. 엘리스, 펠릭스 몬타노
“방송에서 죽음을 다루고 싶어요.” 무려 30년 동안 많은 아이들에게 사랑받은 ‘피클스 아저씨의 인형극장’을 이끈 피클스 아저씨는 갑자기, 주시청자인 아이들에게 ‘죽음’을 알려주고 싶다고 말한다. 이렇게 상상해볼까? 색종이 한 장으로 어린 시절을 알록달록 채워준 종이접기 아저씨, 김영만 선생님이 어느날 빨간색 종이를 접어 시체를 만들자고 한다면 그걸 보는 부모와 아이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다른 건 몰라도 부모들의 항의 전화가 끊기질 않을 거다. 어린이 프로그램이라고 하면, 세트장은 검은색보단 핑크색 계열이 어울리고 음악은 돈 얘기나 욕이 들어간 랩보단 동요가 흘러나오는 게 정상으로 보인다. 여기에 기분이 우울해지는 목소리 톤보다는, 듣는 것만으로도 운동장으로 뛰쳐나가야 할 것 같은 뽀미 언니의 하이 레벨 톤도 필수! 귀여운 단발 스타일을 한 피클스 아저씨 역시 노래하는 인형을 통해 아이들에겐 꿈과 희망을, 어른들에겐 잊고지낸 동심을 찾아준다. 모두가 바라는 그대로… 그런 피클스 아저씨는 어째서 어린이 프로그램의 금기인 ‘죽음’을 다루고자 했던 걸까. 나는 그 점이 흥미로워 <키딩>을 밤새서 보고 말았다. 마지막 화를 막 끝낸 시점에, 난 알아버렸다. ‘죽음’을 다루기 좋은 매체는 영화도 드라마도 아닌 어린이 프로그램이라는 걸. 그 이유를 설명하기에 앞서 가볍게 <키딩>의 흐름을 살펴보려고 한다. 짐 캐리가 연기하는 피클스 아저씨는 오랜 시간동안 아이들에게 사랑받아온 TV 프로그램 진행자이다. 얼마나 오랫동안 선한 영향을 끼쳤냐면, 거리에 주차된 차량을 훔친 강도들은 부품 하나하나를 팔려고 하다가 피클스 아저씨의 친구, 우쿨래리(사실은 피클스가 연주하는 악기)를 발견하곤 분해된 차를 재조립해서 그대로 되돌려 놓는다. 강도에게도 건드릴 수 없는 절대 선이 ‘피클스 아저씨’인 것. 이렇게만 설명하면, 피클스 아저씨는 무슨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같지만 그에게도 어른들의 세상이 존재한다. ’인형극장’ 프로덕션 사장이자 피클스의 아버지 셉은 동심을 더 많은 돈으로 바꾸고 싶어하고, 프로그램 밖에서 제프로 살아가는 어른 피클스는 아내와 이혼한 돌싱으로 누구보다 외롭게 홀로 살아가고 있다. 한마디로 그는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어린이 프로그램 진행자인 ‘피클스’이자 행복한 가정을 지키기 못한 어른 ‘제프’. 동시에 그 둘은 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키딩>의 주요 이야기는 그 둘 사이에서 혼란스러워 하는 인물 ‘제프’ ‘피클스’를 따라 진행된다. 그걸 지켜보는 게 이 작품의 묘미. 이쯤에서 다시 떠올리게 되는 질문. 피클스 아저씨는 왜 ‘죽음’을 다루려고 하는 걸까? 그냥 하던대로 하기만 해도 유명토크쇼에도 출연하고, 피클스 인형도 잘 팔수 있는데 말이다. 원래 어른이 된다는 건 새로운 도전보단 가진 걸 지키는 방향으로 가는 게 아닌가. 혹시 제프에겐, 반드시 ‘죽음’을 다뤄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닐까? 그게 뭘까. 정해진 시간, 정해진 주제에 따라 ’피클스 아저씨의 인형극장’은 방송된다. 오늘 주제는 벌써 몇 번이나 반복해서 다룬 아름다운 색. 얼마나 지겨웠는지 제프는 아버지 셉에게 “색깔에 관한 방송을 또 해야 해요? 하늘이 파란색인 건 애들도 안다”고 말하지만 1억 1200만 달러짜리 가치를 지닌 피클스 아저씨를 지키기 위해 사장 셉은 제프의 제안을 단박에 거절한다. 그러면서 하는 말. “네 안에 두 사람이 있어. 한 명은 피클스 아저씨. 다른 한명은 제프야. 별거 중인 남편이자 슬픔에 잠긴 아버지.” 아- 차, 현실을 사는 제프에겐 쌍둥이 아들이 있는데 한 명을 교통 사고로 잃어버린 것. 이 글을 쓰면서도 놀란 건 나조차 죽음을 ‘죽었다’라 표현하지 않고 ‘잃어버렸다’고 우회해서 표현했다는 사실이다. 나름 어른이 된 나조차 죽음은 이토록 어색하다. 그러니, 평생을 아이들과 소통해온 어른 제프에게 죽음은 얼마나 낯설었을까? 게다가 다른 누구의 아이도 아닌 자기 자식의 죽음은 그가 하는 모든 것들을 서투르게 만들었을 것이다. ’제프’와 ‘피클스’ 사이에서 혼란에 빠진 한 아버지가 바로 그 증거. 제프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고, 피클스는 현실의 슬픔을 해결하지 못한 채 아이들을 마주할 수가 없다. 그건 거짓말이니까. 거짓말을 하는 어른은 나쁘다고 가르치고 있으니까. 자, 이런 상황에서 제프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식을 잃은 슬픔을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딱 하나다. 자신의 또다른 분신 ‘피클스 아저씨’를 통해 아이들을 만나 죽음을 설명하는 것. 이제 피클스 아저씨가 굳이 어린이 프로그램에서 ‘죽음’을 다루려고 한 속사정을 알게 됐다. 여기까지만 알고 봐도 <키딩>은 한 인간의 내면을 현실과 방송으로 분열시키고, 다시 융합하는 과정을 통해 보는 이의 마음을 치유하게 만드는 좋은 작품이다. 보고 나면, 누구나 내 의견에 동의할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여기엔 제프와 피클스를 연기하는 짐 캐리의 얼굴도 무시할 수 없다. 과거엔 끼 많은 배우였지만, 지금은 주름 사이로 이야기까지 담아낼 줄 아는 배우가 되버렸다. 짐 캐리가 연기한 피클스 아저씨 얼굴만 봐도 치유가 되는 느낌이니까. 여기까지 담아낸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근데, <키딩>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앞서 나는 ‘죽음’을 다루기 좋은 매체는 영화도 드라마도 아닌 어린이 방송 프로그램이라는 말을 했다. 실제로 죽음을 다룬 어린이 프로그램을 본 적은 없기에 부득이 ‘피클스 아저씨의 인형극장’을 예로 설명해야 함을 이해해주시길. 일단, 죽음이 무엇일까? 파스칼이나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이 죽는다는 명확한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죽음에 대해선 무엇 하나 아는 게 없다고 했다. 이처럼 똑똑한 어른도 죽을 때까지 모르는 게 ‘죽음’이라는 거다. 그런 ‘죽음’을 도대체 제프는 어떻게 피클스 아저씨로 빙의해서 아이들에게 설명한 걸까? ‘제프’와 ‘피클스’ 사이에서 오락가락한 그는 급기야 머리카락을 밀어버린 뒤 소아병동에 있는 한 아이를 찾아간다. 뇌종양 수술때문에 머리카락 일부를 잘라낸 아이에게 피클스는 고속도로처럼 시원하게 뚫린 두피 표면을 만지게 한다. 보기엔 흉한 것이 만지고 나니 별 게 아니다. 이윽고 수술로 인해 비어버린 자신의 두피를 만지는 아이. 아이는 웃는다. 이처럼, 아이들이 ‘죽음’을 미리 만져볼 수 있다면 죽음이라는 고통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다음 피클스 아저씨는 셉에게 말한다. “이번 시즌엔 사라진 것들에 대해 다루려고요. 머리카락처럼요.”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하는 건, 제프는 피클스를 통해 자식의 죽음을 받아들이려고 한다는 것. 제프는 사장 셉에게 “우리만의 특별한 방식으로 죽음을 다루지 않으면, 아이들 모두에게 비극적인 일이 생겼을 때 아무 일도 없었던 척하라는 셈이 된다’는 말을 하고 있지만 실은 그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자식을 한순간에 잃은 현실의 제프는 아무 일도 없었던 척하며 TV 속 피클스로 살고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기 때문에 제프는 죽음을 미리 만져볼 수 없지만, 피클스는 가능하다. 피클스 아저씨는 여러 인형 친구들이 있는데, 그 중하나가 심장을 표현한 쿵쿵이다. 마냥 귀여운 쿵쿵이가 고통스러워하자 피클스 아저씨는 단 번에 그걸 쭈욱 뽑아버린다. 피클스는 쿵쿵이를 만지며 방송을 보는 아이들에게 말한다. “이 고통엔 이름이 있어” 이 짧은 순간을 다시 살펴보고 싶다. 심장을 상징하는 쿵쿵이를 뜯어내는 순간, 인간은 죽는다. 그 ‘죽음’에 동반되는 고통. 피클스는 이젠 멈춰버린 심장을 만지며, 이 고통에 이름을 붙여주려고 한다. 나는 살면서 고통에 이름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우리는 고통스러울 때 무언가를 말하고 싶지 않는가. 단지 그걸 표현해도 되는 지 모를 뿐인 거다. 제프가 고통스러운 건 그때문이고,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 하는 것도 그 아픔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 지 모르기 때문이다. 아프면 아프다고 표현하라고 말하는 어른도, 어린이 방송 프로그램도 많아지면 좋겠다. 밝은 색이 아니라 어두운 색을 칠해도 좋다고 말하는 세상이 되면 좋겠다. 그걸 뒤늦게 알게된 제프가 피클스를 통해 우리에게 말한다. “애들이.. 심장이 있던 곳에, 느끼는 감정을 표현 못 하는 건 두려운 일이에요” 비록 작품 속 어린이 프로그램이지만, 어른이든 어린이든 집에서 <키딩> 속 ‘피클스 아저씨의 인형극장’을 봤으면 좋겠다. 단언컨데 이것보다 더 좋은 교육용 드라마를 본 적이 없다.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키딩>은 청소년 관람 불가로 분류됐고 그 말은 아직 피클스 아저씨가 바라는 (아이들에게 ‘죽음’을 소개할 수 있는) 세상은 <키딩>에서도, 현실에서도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보통 웃기다 싶지 않은데 < 이터널 선샤인 >(2004)에서 찰스 강 장면을 찍는 아이디어를 내놓던 미셸 공드리 감독이, 강이 얼기 전에 헤드라이트를 켠 자동차를 집어넣고 강물이 얼게 한 후 그 위에 누운 짐 캐리의 머리가 위치하게 하자는 제안을 했다고 한다. 사랑의 기억을 찾아 쫓고 쫓기는 조엘(짐 캐리)의 머리로 ‘영원한 빛’이 스며들어오는 그 찰나의 순간을 재현할 생각에 그가 얼마나 들떴을까. 하지만 다행히도(?) 이 허황된 생각은 스태프들의 거센 만류로 중단됐고, 아시다시피 사실 얼어붙은 강 아래 헤드라이트 없이도 그 장면은 명백히 아름다운 장면으로 남았다. < 이터널 선샤인 > 불발된 장면이 어디 이쯤이라. 시시각각 샘솟는 공드리의 아이디어야 늘 넘쳐서 탈이다. 그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무슨 장난을 했는지 상기해봐라.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역사상 망작 리스트에 단단히 자리매김하는 < 그린호넷 >(2011)의 ‘대참사’야말로 공드리라서 일어날 수 있었던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최근작인 < 무드 인디고 >(2013)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이 엉뚱한 아이디어들의 무한투척은, 영화가 기대에 미치고 못 미치고의 문제를 떠나 공드리 영화임을 알려주는 인증마크다. < 더 위 앤 더 아이 >(2012)를 처음 본 건, 2012년 칸국제영화제에서다. 그해 감독주간 상영작으로 초청된 이 작품을 보러 가면서도 이번엔 그가 어떤 엉뚱한 상상을 화면으로 구현해낼까, < 수면의 과학 >(2006) 같은 아날로그적인 꿈속 장면을 한두 시간 동안 헤집고 다니다 나올 요량으로 극장에 들어갔던 것 같다. < 더 위 앤 더 아이 >는 이런 예상을 단 하나도 남기지 않고 여지없이 무너뜨린 영화다. 물론 이제나저제나 이건 아니지 뭐든 나올까 싶은 마음은 남아, 100분이 넘는 영화상영이 모두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기존 공드리 영화와는 다르군 하고 절실히 깨닫게 된다. 영화는 힙합의 본고장이자 할렘가인 뉴욕 브롱크스의 한 공립학교 십 대들을 대상으로 여름방학 하굣길, 그들이 시내버스에서 나누는 대화를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정말이다. 그게 전부다. 사실 감독 이름을 살짝 스파이크 리로 표기했다면 차라리 그편이 더 수긍이 갈 정도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이 영화에서 공드리 특유의 엉뚱한 아이디어가 구현된 장면이 있지 않냐고 재차 물으신다면 오프닝 신이 전부인데, 카세트 플레이어를 장착한 미니버스(리모컨 장난감 차)가 도심을 횡단하다가 똑같은 모양의 실제 사이즈 버스와 맞닥뜨리는 장면이 있긴 하다. 하늘을 나는 조랑말(< 수면의 과학 >)이나, 구름 모양의 기구를 타고 다니는(< 무드 인디고 >) 판타지 장면들은 아무리 ‘리와인드’를 해도 없을 테니, 그런 상상력을 기대한다면 아예 첫 장면에서 끄는 편이 낫다. 오프닝을 질주하던 미니버스가 실제 크기의 버스로 대치되는 순간부터 영화는 한 치 자비 없이 100% 리얼함만을 탑승시킨 채 끝까지 달려나간다. 오프닝 ‘불량배들’, ‘혼돈’, ‘나’ 이렇게 총 3장으로 구성되는 영화는 공드리가 이 지역의 한 커뮤니티 센터의 십 대들을 만난 후 영감을 얻어서 발전시킨 이야기다. 1장 ‘불량배들’은 인종차별적 관점에서 십 대들의 공격성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버스 뒷좌석에 앉은 ‘빅 T’라는 흑인 소년은 “피임약 먹어요. 관계는 솔직해야 해요. 나는 빅 T예요. 뭐든 크죠.”라며 옆에 앉은 백인 할머니를 희롱하고, 한 무리의 아이들은 중년의 백인 남자를 타깃으로 껌을 씹으며 위협하기까지 한다. 가득 찬 버스 안의 다른 소년 소녀들도 각자 대화에 바쁘다. ‘3년 동안 치킨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돈을 엄마가 다 가져가서 돈 한번 구경 못 해 봤다’ ‘케이블 수신료는 내가 다 낸다’는 푸념 섞인 소녀들의 대화 사이로, 찐한 키스를 나누느라 정신없는 커플과 그런 그들을 역겨워하는 소녀의 모습이 교차된다. 공드리 자신의 십 대를 빌려 온 캐릭터가 아닐까 싶은데, 움츠린 어깨에 뿔테 안경을 끼고 놀림을 당하면서도 꽤 창의적이고 그럴듯한 그림을 그리는 얌전한 소년도 등장한다. (최근 공드리가 직접 그린 < 이터널 선샤인 >의 스케치 노트가 공개됐는데, 아무래도 이 추측은 신빙성이 꽤 높다.) 개중에는 왕따 소녀도 있고, 생일파티 문제로 정신이 팔린 소녀도 있다. 2장 ‘혼돈’에 이르러서 잡다한 소음에 뒤섞여 있던 각각의 아이들의 갈등이 좀 더 구체화되는데, 버스 창밖 자전거를 탄 가슴 큰 여자에게 반해 소동이 벌어진다거나, 평소 좋아하던 소녀에게 급기야 저녁 데이트 약속을 받아낸다거나, 게이 커플이 서로의 속내를 털어놓는 등 사건이 하나둘 인지되기 시작한다. 이 와중에 아이들끼리 보내는 핸드폰 동영상, 문자메시지도 정신없이 오고가는데 역시 왕따인 소녀는 그 전송의 흐름에서 소외된다. 복잡한 소동들 사이로 버스는 달리고 멈추기를 그치지 않으며, 아이들도 하나둘 버스에서 내리고 바깥은 점점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한다. ‘혼돈’의 2장을 거쳐 온 3장 ‘나’에 이르러서는 이제 인물들이 한층 정돈된 느낌으로 다가온다. 마약중독자였던 아버지의 죽음 이후 자동차 정비소에서 일하는 소년, 오래된 자동차를 수리해서 타는 걸 즐기는 소년의 대화가 진행된 이후, 한 소년이 내리면 이제 대화는 다시 남은 소년과 왕따를 당해서 계속 우울증약을 먹으며 버텼던 소녀의 대화에 이르게 된다. 종착역을 향해 가는 버스처럼, 소통이라고는 불가능할 것 같던 버스 안의 상황도 차츰 공감대에 도달하게 된다. 솔직히 3장으로 오기까지는 버스 안 아이들의 캐릭터와 소음이 뒤섞인 대화를 쫓아가는 것만으로도 버거울 지경이었다. 공드리가 쓴 트리트먼트는 24페이지에 불과했다지만, 아이들이 두서없이 쏟아내는 대사는 가늠이 안 될 지경으로 방대하다. 게다가 좁은 버스 안을 촬영해야 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핸드헬드 촬영을 해야 했고, 그래서 안정적인 화면이나 사운드도 기대하기 힘들다. 나름 스토리를 가진 메인 배역이 다섯 명 정도 되는데 모두 얼굴을 아는 배우는 아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총 40여 명의 아이들은 생생한 목소리를 담고자 모두 비전문 배우로 캐스팅했다고 한다. 이 지역에서 버스 탑승 경험이 있었던 공드리는 떼로 있을 때 공격적이던 아이들이, 점점 한둘 내리고 나서 소수만 남았을 때 차분해지고 속내를 드러내는 걸 보고 거기서 착안해서 이 이야기를 썼다고 한다. 그 버스를 탄 아이들이라면 듣지도 않는 80년대 유행한 Young MC의 ‘버스트 어 무브 Bust a Move’를 제 취향이라는 이유로 영화에 사용하는 프랑스 감독이 할렘가 아이들을 과연 얼마나 이해할 수 있느냐는 당연한 질문 앞에서 그는 “편부이거나, 왕따를 당한다거나, 또 괜히 심각한 아이들은 특별한 아이들이 아니라, 주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보편적인 문제이자, 캐릭터”라고 응수한다. 엔딩 크레디트에서 공드리는 촬영에 도움을 준 한 어머니가 촬영팀에게 보낸 편지를 덧붙이며 영화를 맺음 한다. 어느 모로 뜯어봐도 공드리 영화 같지 않은 덕분에 이 영화는 제작 단계에서 ‘십 대들이 타임머신을 개발하는 내용’이라는 추측성 기사가 보도되는가 하면, 영화제목 ‘We and the I’를 듣고, 스필버그가 아니고 공드리의 영화니까 ‘Wee(오줌) in the Eye’일 거라고 지레짐작 하고 공드리에게 질문을 던지는 인터뷰까지 나왔었다. ‘자신에게는 현실이 곧 꿈의 연장 선상이자, 그 구분이 무의미하다’고 평소 설파하던 공드리가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십 대 이야기를 한건 분명 의외의 선택이지 싶다. 짐작컨대, 데뷔작 <휴먼 네이처>(2001)의 혹평 이후 < 이터널 선샤인 >을 만들기 전 그가 전작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한 반성노트를 썼다고 하는데, 아마 < 그린호넷 >의 황당한 전개 이후 또 한 번 반성 노트를 쓴 결과로 허벅지 꾹꾹 누르며 창의력을 줄인, 이런 극도의 리얼함을 실은 버스 이야기가 나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여간 < 더 위 앤 더 아이 > 이후에는 <무드 인디고>와 국내에 아직 소개되지 않은 <미크로브 에 가조왈 Microbe et Gasoil>(2015)을 만들기도 했다. 반에서 따돌림을 받는 십 대소년 둘이 기상천외한 집 모양 차를 만들어 프랑스를 여행하는 로드무비로 <이터널 선샤인>에서 어린 시절 기억 속에서 따돌림을 당하던 조엘이나 <수면의 과학>에서처럼 꿈과 현실을 혼동해 사회생활에 적응을 못 하는 스테판을 거친 또 다른 왕따 소년들의 이야기다. 평소의 엉뚱한 표현력은 자제했지만, <더 위 앤 더 아이>도 결국 비슷한 곤란을 겪는 아이들이지 싶다. 엔딩 크레디트의 편지 비요크(Bjork)의 뮤직비디오로 일약 뮤직비디오계의 총아를 받던 공드리에게 사람들 모두 “그걸 능가할 뮤직비디오는 언제 나오냐?”고 닦달을 했다. 영화로 치자면 < 이터널 선샤인 >이 비요크의 뮤직비디오 같은 ‘그가 넘어야 할 작품’인 셈이다. 사람들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공드리에게 특정 분위기를 갈구하지만, 그는 이미 끊임없이 다른 시도로 그 벽을 두드리고 있다. 완성도가 늘 못 미쳐 아쉬운 마음도 크지만 아직까지는 그 시도를 지켜볼 용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