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행자(執行者)
- 감독
- 제임스 화르고
- 제작년도
- 1976
- 출연
- 크린트 이스트우드(Clint Eastwood), 존 밋첨(John Mitchum), 타이니 데일리(Tyne Daly), 해리 과디노(Harry Guardino), Bradford Dillman, DeVeren Bookwalter, John Crawford, Samantha Doane, Robert F. Hoy, Jocelyn Jones, M.G. Kelly
제임스 그레이의 영화에서, 나는 두가지 특별한 사적 감흥을 느낀다. 하나는 화면이 젖어 있다는 것이다. 비가 오거나 안개에 잠겨 있지 않아도 그레이의 화면은 멜랑콜리아의 습기라고 할만한 기묘한 물질감이 감싸고 있다고 느낀다. 아마도 이점과 깊이 연관되어 있을 다른 하나는 친구 혹은 연인과의 투 숏에서도 심지어 가족의 회합 장면에서도 그레이의 인물은 절대적 고립의 감옥에 갇혀 있다고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의 영화에서 감정은 표현되는 게 아니라, 보는 이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신체에 스며들고 번져가며 전염되는 것 같다. 그레이의 최고작으로 여겨지는 < 투 러버스 >(2008)보다 이 점을 잘 느끼게 하는 영화는 없다. 주인공 레너드(호아킨 피닉스)는 그가 사랑하는, 하지만 종잡을 수 없는 여인 미셸(기네스 펠트로)과 있을 때에도, 그를 사랑하는 가족과 있을 때에도 철저히 고립된 존재이며 외로움의 심연에 가라앉은 인물로 감지된다. 가장 뛰어난 장면은 마지막 시퀀스에 있다. 미셸이 떠난 뒤 레너드는 다시 자살을 시도하려다 포기하고 가족과 그를 아끼는 따뜻한 여인 산드라(비네사 쇼)의 품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미셸에게 주려던 반지를 그녀에게 끼워준다. “우는 거예요?”(산드라), “행복해서 그래요.”(레너드). 가족들, 유태인 친척들이 작은 파티를 벌이고 있는 따뜻한 집에서 두 남녀는 키스하고 포옹한다. 놀라운 점은 외관상 가장 포근하고 평온한, 그리고 남녀의 결합으로 마무리된 이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레너드의 속수무책의 고립을 사무치게 체감한다. 그레이의 영화에서 우울과 외로움은 이야기의 주제이기 이전에, 매 숏에 담긴 물질적 표정 혹은 운명적 공기와 같은 것으로 느껴진다. 물론 이 느낌은 매우 주관적인 것이고, 적시할 수 있는 한 숏 내부의 특정 요소들의 효과만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카메라와 인물의 거리 및 앵글, 인물의 표정과 동작과 말, 음악과 사운드, 숏의 길이와 편집의 리듬 등이 이야기와 결합된 복합적 효과일 것이다. 제임스 그레이의 남다른 점은 그가 두드러진 스타일을 구사하지 않을 뿐더러, 특정한 사건을 앞세우지 않으면서도, 연출의 영역에 속한 갖가지 요소들의 유기적 조합을 통해 유례를 찾기 힘든 높은 밀도와 강한 전염성을 지닌 감정의 강도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레이의 영화를 말할 때야말로 감정 대신 정동(情動)이란 단어를 쓰고 싶게 된다. 그런 점에서 그레이는 동세대의 어떤 감독보다 고전적인 작가라 할 수 있으며, 그가 영화적 스승으로 거론하는 인물에 속하진 않지만, 니콜라스 레이의 진정한 후예라고 나는 생각한다. < 애드 아스트라 >(2019)는 공간이 우주로 확대되어도 화면에는 농축된 감정의 밀도가 압도하는 매우 제임스 그레이적인 영화이다. 어쩌면 우주의 텅빈 그리고 무한대의 시공간이야말로 그레이의 인물이 벗어날 수 없는 고립과 외로움의 물질적 거처로 가장 적합할 수도 있을 것이며, 이것이 그레이가 SF로 눈길을 돌린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요컨대 <애드 아스트라>의 우주는 모험의 사건과 미래의 변화에 열린 확장적 공간이 아니라, 반대로 인간의 절대적 고립을 재확인하는 내성적이고 수축적인 공간이다. 우주비행사 로이 맥브라이드(브래드 피트)는 지적 생명체를 찾아 해왕성으로 떠난 뒤 16년째 소식이 끊긴 아버지이며 우주탐험의 전설 클리포드 맥브라이드(토미 리 존스)를 찾아 떠난다. 스토리라인은 머나먼 정글에서 광기의 왕국을 건설한 미친 유사 아버지를 수색하는 병사의 이야기 < 지옥의 묵시록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1979)을 상기시키기도 하지만, 이야기의 모티브는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등장하는,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 오디세우스를 기다리다 그를 찾아나서는 아들 텔레마코스에게서 빌려왔다. 텔레마코스는 누구인가. 이타카의 왕이자 전쟁영웅 오디세우스가 전쟁 원정으로 왕국을 20년간 비운 동안, 난봉꾼 왕자와 귀족들이 그의 재산과 왕위를 빼앗기 위해 어머니를 희롱하고 결혼을 강요하는 상황에서, 한번도 보지 못한 아버지의 귀환으로 자신의 땅에 정의가 실현되리라는 희망을 품고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며 기다리다, 아버지의 행적을 쫓아 목숨을 건 여행에 나선 아들. 그런데 제임스 그레이는 이 인물의 어떤 점에 영감을 얻었을까. 결말을 떠올리면 <애드 아스트라>는 오이디푸스의 살부(殺父) 의식에 가까운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오이디푸스의 살부와 근친상간은 법의 위반과 욕망의 실현이라는 차원에 놓여 있다. <애드 아스트라>의 로이는 사실상 법의 충실한 집행자다. 그의 목숨과 여러 사람의 생명이 걸린 그의 해왕성 행은 아버지의 우주선 이상으로부터 비롯된 지구의 위기를 구하기 위한 그리고 상부의 명령에 의한 것이다. 그렇다고 로이가 상부의 명령이나 미션의 대의에 완전히 동일화하는 건 아니다. 로이는 아버지의 우주선 리마의 파괴 임무를 맡은 우주선 세피우스에 무단으로 탑승하고, 그를 제압하려는 세피우스 승무원들을 미필적 고의로 모두 죽인다. 제임스 그레이의 인물이 흔히 그렇듯 우리는 로이의 욕망을 정확히 알기 힘들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맥박수가 80을 넘지 않는 냉담한 사람이다. 그의 행동으로 추론하면 그에게 가장 중요한 건 아버지를 만나는 일이다. 평생 복종해온 명령, 특히 이번엔 부당하기는 커녕 지구의 안녕이 걸려있는 중대한 명령을 거부한 것도 세피우스의 제거 작전이 성공하기 전에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서다. 그것을 그저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이라 말할 수는 없다. 그는 오랫동안 아버지를 보지 못했고, “아버지를 만나는 일이 항상 두려웠다.”고 독백한다. 마침내 조우한 아버지도 “난 아내에게도 너에게도 관심이 없다.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매정하게 말한다. 다시 물어보자. 로이는 왜 필사적으로 아버지를 만나려 하는가. 이 질문은 이 영화를 본 관객의 당연한 권리이지만, 제임스 그레이는 적어도 대사를 통해서는 이 질문에 정확히 답할 수 없도록 만든다. 그레이의 인물들은 자신의 욕망을 모르는 것처럼 말한다. 그레이는 그 무지를 존중한다. 아버지 클리포드는 말한다. “나는 지구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어. 우리는 과학이 부인하는 지적 생명체를 찾아내야 돼. 이건 신의 소리야. 난 이 여정을 멈출 수 없어.” 그의 친구인 동료 우주비행사 프루이트 대령(도널드 서덜랜드)은 로이에게 말한다. “오랜 우주 비행으로 내가 깨달은 바는, 탐험 비행이 때론 탈출 수단이 될 수도 있다네.” 지적 생명체에 대한 종교적 믿음, 지구에 대한 혐오, 탈출의 은밀한 욕망. 우리는 어느 말을 믿어야 할까. 내 생각에 가장 신뢰할만한 말은 영화의 결말부에 있는 로이의 독백이다. “아버지는 없는 것만 찾았고 눈 앞에 있는 소중한 건 보지 못했다”.” 그러느라 동료를 죽이고 지구를 위험에 빠트린 미친 사람이다. 그런데 정작 로이 자신은 어떠한가. 그 역시 우주 비행에 미쳐서 아내를 떠나보낸 남자 아닌가. 로이와 클리포드는 아들과 아버지이기 이전에 완전히 동질적인 인간이며, 둘은 말하자면 쌍생아다. 로이의 혹독한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그리운 아버지를 만나려는 가족애의 여정이 아니며 아버지의 율법을 살해해 자신의 욕망의 법을 세우려는 아들의 모험도 아니다. 그것은 온전히 자기자신을 대면하려는 여정이다. 지구 혹은 자신의 ‘눈 앞에 있는 것’을 혐오하고 피안을 향해 탈출하려는 자신의 욕망, 그 욕망의 잔혹함과의 대면이다. 그 대면을 위해 로이 역시 많은 사람을 희생시켰다. 아버지와 대면하고서야 로이가 아버지와 똑 같은 과정을 거쳐 그 대면에 성공했음을 우리는 알게 된다.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지적 생명체나 인류의 진보 같은 그들의 언어가 아니라, 그들의 정확한 동형의 여정이다. 이제 선택은 두가지다. 집으로 돌아오느냐, 아니면 더 멀리 떠나느냐. 아버지 클리포드는 후자를, 아들 로이는 전자를 택한다. 로이에게 아버지는 주인 기표도 율법의 표상도 아니다. 요컨대, 로이는 오이디푸스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안티오이디푸스도 아니다. 호메로스의 텔레마코스는 하염없이 아버지를 기다리는 사람이다. 그가 기다리는 건 아버지이자 왕인 오디세우스이지만, 그것은 권력의 복원이나 주인의 귀환에의 기대가 아니다. 이탈리아 심리학자 마시모 레칼라티의 말을 빌리면, 텔레마코스는 아버지에 대해 오이디푸스의 절연과 달리 상속의 관계를 맺는다.(<버려진 아들의 심리학>, 윤병언 옮김, 책세상) 하지만 상속은 과거의 권력이나 재화, 혹은 영광스런 기억의 선사가 아니다. 레칼라티의 논지를 요약하면 정당한 상속은 아버지의 증언을 참조함으로써 이뤄지는 말의 계율과 욕망의 재설정이다. 그렇다면 상속은 완료가 불가능한, 반복되는 실패를 경유할 수밖는 끝없는 여정이다. 그러므로 “모든 상속자는 고아다.” 또한 그러므로 상속이란 “아버지의 구조적 부재라는 열린 틈새를 메우는 일이 아니라, 항상 그것을 통과하는 일이다.” 제임스 그레이는 텔레마코스의 이야기에서 상속의 약속 없는 상속자의 여정이라는 모티브를 본 것 같다. 텔레마코스는 아버지를 찾아 세상을 헤맸지만 오디세우스를 만난 건 여정을 마치고 돌아온 고향에서다. <애드 아스트라>의 로이는 여정의 끝에 아버지를 만났지만 그 아버지는, 아내와 아들을 위해 불멸에의 꿈을 포기하고 돌아온 오디세우스와 달리, 자신의 욕망을 조금도 조정할 줄 모르는 눈먼 광인일 뿐이다. 텔레마코스는 이제 상속의 과정을 본격화할 것이다. 하지만 로이가 이른 곳은 아버지의 삶, 그 복제으로서의 자신의 삶이 모두 눈 먼 광인의 소동으로 드러나는 황량한 공허이다. 그는 홀로 지구에 돌아온다. “삶에 의욕을 느껴요. 내 주변 상황에도 주의를 더 기울이게 됐죠. 이젠 소중한 것에만 집중하며 살 겁니다.” 이어지는 결말의 언어들은 계몽적이고 달콤하나 <애드 아스트라>의 우주를 가득 채운 우울증의 공기는 무관하다. 우리는 이 평온한 결말의 언어와 비슷한 것을 그레이의 전작에서도 만났다. < 위 오운 더 나잇 >(2007)에서도 만났다. 경찰학교 졸업식장에 앉은 경찰 형제(마크 왈버그, 호아킨 피닉스)가 나누는 마지막 대화. “사랑한다, 동생아.” “나도 사랑해, 형” 그리고 앞에서 인용한 <투 러버스>의 마지막 대화. “우는 거예요?“ ”행복해서 그래요.“ 이 장면들이 뼈저린 것은, 인물들 특히 호아킨 피닉스가 분한 남자에게 이 말이, 이 말의 실현불가성에 대한 필사적인 부인의 몸짓이기 때문이다. 이 거짓말이 역설적으로 그의 가장 절박한 진실이다. 제임스 그레이의 영화에서 가족(때로 유태인 공동체)은 주인공이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내면적 강박처럼 등장한다. 이 점에서 그레이의 서사는 주인공이 이 강박을 정당한 상속으로 전환하려는 모험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결말에서 만나는 것은 결말의 언어가 숨기고 있는, 하지만 관객 누구라도 느끼는 있는 상속의 실패다. <애드 아스트라>의 로이 역시 임무수행에는 성공했지만 상속에 실패한, 하지만 그 실패를 필사적으로 부인하려는 텔레마코스다. 제임스 그레이의 인물은 여전히 출구 없는 멜랑콜리아의 안개 속을 떠돌고 있다.
최근 한국영화가 발명한 장르가 있다. 바로 ‘ 마동석 이라는 장르’다. 배우에게 일반적으로 ‘변신’이 미덕으로 여겨진다면, 마동석은 그 반대편에서 범죄 스릴리라는 장르 안에 자신만의 둥지를 틀고 있다. < 악인전 >( 이원태 , 2019)는 그 정점이다. 클리셰로 구성된 장르 영화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서 마동석은 자신이 구축해왔던 나름의 영역을 완성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악인전>은 두 겹의 텍스트다. 표면적으로 <악인전>은 조폭 두목과 미친 형사와 연쇄살인마라는, 범죄 장르에서 지겹게 반복되었던 캐릭터를 한 데 모아 새롭게 재조합한 영화다. 여기서 마동석은 또 하나의 겹을 만든다. 그는 영화에 활기를 불어넣는 원동력이 되면서 ‘마동석 영화’의 본색을 보여준다. 마동석은 감독의 페르소나가 되기를 거부하는, 스스로 페르소나를 만들어가는 배우다. 그가 맡은 캐릭터들은 모두 마동석의 분신이자 배우 자체처럼 여겨지는데, 이런 위력은 한 명의 배우가 장르와 동의어가 되는 원동력이다. 세 악인의 팽팽한 대결처럼 보이지만, <악인전>의 중심은 마동석이 맡은 캐릭터인 장동수다. 여기서 ‘마동석 영화’의 첫 번째 법칙. 마동석은 언제나 ‘룰’(rule)을 만드는 사람이다. 응징이든 복수든 정의 구현이든, 그는 언제나 자신이 원칙을 만들고 그 안에서 움직인다. <악인전>에서도 이 영화에서 ‘게임의 법칙’을 만드는 사람은 장동수다.(“먼저 잡는 사람이 갖는 거지”) 이 과정에서 그는 형사 정태석( 김무열 )과 상의 같은 건 하지 않으며(“우리 애들 쓰고, 진행비도 내가 내. 정보 공유하고”), 현실의 법 따위엔 관심 없다.(“법으로 못하는 일 하는 게 우리 일이니까”) 그리고 최후의 응징자가 된다.(“사내 셋이 목숨 걸고 게임을 했는데 끝을 봐야지”) 여기서 장동수의 포지션은 흥미롭다. 법을 만들지만 그는 법 밖에 있는 사람(조폭)이다. < 범죄도시 >( 강윤성 , 2017)의 마석도처럼 형사일 때도 있지만(그럴 때조차도 그는 법을 따르지 않지만), 마동석의 캐릭터는 공권력을 부여 받지 않았음에도(범죄자인 경우에도) 법의 집행자가 된다. 그는 평범한 승객(부산행), 수산물 가게 주인(성난 황소), 체육 교사(동네 사람들), 유도 도장 관장(원더풀 고스트)이면서 악당과 맞선다. 그는 한국영화에선 드문 일종의 자경단원 같은 역할을 반복하는데 그 상징적 시작은 카메오로 출연했던 < 베테랑 >( 류승완 , 2015)의 ‘아트박스 사장’이다. 화면에 그가 등장했을 때 관객들이 느꼈던 기대감, 즉 ‘완력을 이용한 즉각적 응징’은 마동석이라는 배우가 지니는 가장 큰 장르적 매력이다. 압도적인 피지컬로 그 어떤 적도 제압할 것만 같은 파워의 소유자. 마동석은 그런 면에서 범죄 영화 장르의 슈퍼히어로 같은 존재다. 그럼에도 마동석의 액션이 절대 판타지처럼 느껴지지 않는 건, 개인적 동기가 사회적 행동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악인전>에서 장동수가 강경호(김성규)를 잡으려는 이유는 간단하다. 경기 이남 최고의 조폭인 자신에게 칼을 꽂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개인적 복수는 연쇄살인마를 감옥에 가두는 결과로 이어진다. < 성난 황소 >( 김민호 , 2018)에서 아내를 구하는 과정에서 납치 조직을 소탕한다. < 부산행 >( 연상호 , 2016) < 동네 사람들 >( 임진순 , 2018) < 원더풀 고스트 >( 조원희 , 2018) 등도 그런 구도다. 가정과 이웃을 위하는 소박한 행동은 집단에 위협적인 존재를 처단하는 공익적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다. 같은 이미지를 지나치게 소비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마동석의 행보는 한국영화가 오랜만에 접하는 경험이다. 서민극의 김승호 , 청춘 영화의 신성일 , 액션의 박노식 과 장동휘 , 멜로의 문희 등 과거 한국영화는 스타와 장르의 반복적 결합을 통해 전성기를 누렸다. 이후에도 박중훈 (코미디), 최민수 (액션), 전도연 (멜로) 등의 배우들이 한때 그런 역할을 했다. 지금은 마동석이다. 그는 범죄 스릴러 장르에서 형사든 범죄자든, 한국영화 100년 사상 가장 두꺼운 팔뚝을 휘두르며 강렬한 ‘한 방’의 액션을 선보였고, 그것은 이미 익숙한 쾌감이 되었다. <악인전>은 엔딩의 ‘살인 미소’와 함께 그 쾌감의 끝을 보여준 영화이며, 아마도 마동석이라는 장르는 좀 더 우리 곁에 머물며 이어질 것이다.
김기영 감독이 유일하게 타인의 영화를 리메이크한 < 육체의 약속 >(1975)은 이만희 의 < 만추 >(1966)를 원작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는 두 영화를 나란히 놓고 생각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 <만추>에 대해 구전되거나 활자로 남아 있는 증언, 듬성듬성 모인 자료집, 김지헌 의 시나리오를 성실하게 꿰맞추어도 온전한 ‘영화’로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육체의 약속>은 <만추>를 원전으로 삼은 네 편의 영화 중에서 가장 이질적인 태도로 한시적인 상황과 속박된 두 육체가 부여잡은 정념을 해체한다. 살인죄로 수감된 여성, 그에게 주어진 한정된 시간, 짧은 여정에 불쑥 끼어든 남성과의 만남과 헤어짐은 김기영의 말처럼 ‘원작의 30%만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것에 불과하다. 이 영화는 제한적인 상황으로 인해 더욱 애틋할 수밖에 없는 감정의 변화나 욕망과 약속 사이에 남겨진 스산한 정조와 무관하게 여성을 해부한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김기영은 왕성하게 욕망하고 발산하기에 급급한 남성의 육체와 그들의 뻔뻔한 요구(자손번식과 양육)로 인해 피폐해진 여성의 수난기를 심판대에 올려놓는다. 기차 안에서 간수( 박정자 )와 젊은 남성( 이정길 )은 피해망상 혹은 남성혐오증에 걸린 여성( 김지미 )에게 인간성을 회복시킬 방안에 대해 논쟁한다. 또 간수는 죄인에게 베풀어져야 할 휴머니즘을 실행하기 위해 형사들을 설득한다. 즉 여수를 향해 달리는 기차 안은 굳게 입을 닫은 살인자와 그녀를 옹호하고 보호하는 간수의 말이 공존하고, 법을 어긴 자에 대한 막연한 증오가 끼어든다. 죄에 대한 형벌로서의 사형에 대한 의견이 충돌하고, 살인과 강도라는 범죄 행위에 대한 냉소가 흐르며, 자살보다는 삶을 택해야 한다는 회유가 넘나드는 말의 싸움터가 된다.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는 형사와 간수라는 법의 수호자/집행자가 선의를 베풀고 죄인들(젊은 남자 또한 죄인이 되었다)을 교화시킴으로써 세상이 아직까지 믿을만하며, 죽음보다 삶이 더 낫다고 믿도록 만드는 담합의 현장이 된다. 기껏해야 죽음을 유예시킬 뿐이지만 그들은 죄인에게 관대함을 베풀어주고, 그들이 살아갈 명분을 제공하기 위해 약속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 모든 사건의 중심인물인 여자는 무력하게 창밖을 응시하거나 간수가 입에 넣어주는 분홍 사탕을 받아먹을 뿐, 어떠한 항변도 하지 않는다. 간수는 어머니/변호인처럼 그녀를 외부로부터 보호함과 동시에 자신의 법으로 길들이고, 그녀는 양순한 아이처럼 고분고분하게 망각의 도구로 제공되는 사탕을 오물거린다. 김기영은 왜 주인공을 이토록 무력하게 남겨두었을까. 그녀를 무화시키기로 작정한 것처럼 표정과 목소리마저 빼앗은 것일까. 김기영은 듬성듬성하고 불균질하지만 단호한 태도로 주인공의 몰락을 따라가다가 최후의 순간이 되어서야 그녀를 삶의 영역으로 돌려보낸다. 감독은 그녀의 삶을 매혹적인 육체로 인한 고난과 약속으로 인한 구원으로 축약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가 육체를 드러내는 방식과 약속을 보여주는 방식이 확연히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김기영은 뻣뻣한 얼굴과 무력한 육신의 표면에 머무름으로써 오히려 그녀를 살거나 죽게 만들 약속의 힘을 상기시킨다. 목소리-말의 내용, 표정-감정은 빈약하고 메마르지만, 약속은 의지를 들끓게 만들 위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교도소에 이르러서야 뚫고 나온 그녀의 간절한 표정과 거친 절규에 우리는 압도당한다. 하지만 영화는 여기서 더 나아가 그녀에게 주어진 현재의 삶으로 그녀를 돌려보낸다. 김기영은 강력한 영화적 표현을 과감하게 마감시키고 김지미라는 배우의 육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한기를 포기한다. 대신 마지막 쇼트를 통해 불멸의 삶, 약속으로 인해 가능한 삶을 붙박아둔다. 영화의 도입부를 살펴보자. 첫 쇼트는 한 테이크로 촬영되었고 누군가의 시선을 따라 펼쳐진다. 증기를 뿜어내는 기차에서 시작한 눈의 운동은 줄지어선 기차들, 복잡하게 얽힌 선로, 빈 플랫폼, 역사 너머로 보이는 도시, 높낮이가 다른 빌딩들과 막 지어지고 있는 대우 빌딩의 철근 구조물에서 멈춘다. 이어지는 쇼트는 택시에서 내리는 가족의 모습인데 주인공은 멀뚱하게 서 있는 남편과 매달리는 아이를 떼어놓고 역으로 향한다. 이 두 쇼트는 영화의 마지막 쇼트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여성의 고난-반항-억압-순응-죄-감시-교화-망각-삶에 대한 각성을 포착한다. 첫 쇼트에 등장한 시선의 주체는 냉정하고 차분하게 그녀의 삶을 관찰하는 감독이다. 마지막 신에서도 동일한 태도로 공간을 바라보고 있지만 그의 시선에 그녀는 포착되지 않는다. 주인공을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역이라는 장소가 그녀의 삶을 지탱하고 있음을, 죽음에 사로잡혔던 그녀가 살아있기에 약속을 지킨다는 행위가 가능함을 각인시킨다. 그녀가 기차에 오른 후부터 액자구조로 플래시백이 시작된다. 서사는 현재(기차를 타고 떠난다)-대과거(그녀의 수난사)-과거(여수로 가는 기차 안에서 만난 남성과 동행한 간수와의 사건)-다시 현재(서울로 돌아온다)로 복귀하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녀가 1인칭 내레이션을 통해 반추한 삶에 따르면 그녀의 육체가 소진되고 착취되는 과정은 대과거에 머물러 있고, 과거와 현재는 그녀가 한 약속(과거와 현재)이나 그녀에게 한 약속(과거)을 따라 구성된다. 흥미로운 것은 ‘서울역-도심 한복판-모든 기차의 출발지와 도착지’라는 물리적인 실체가 ‘여수-어머니 무덤-약속이 맺어진 장소’라는 관념보다 더 중요하게 보인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지독히 특징 없는’ 남자와 그의 딸에게 하루의 시간을 약속하고 여수로 떠난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 나타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약속이기 때문에’ 그곳에 가야만 하고, 무용함을 알면서도 기다려야 한다. 삼 년 째 반복되는 여정의 시작과 끝 모두 덧없는 약속에 포위되었으며, 발버둥을 치며 살아가고 온 힘을 다해 기다린들 그는 나타나지 않을 것처럼 느껴진다. 그 사실을 기어이 확인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되어버린 여자는 다시 떠나기 위해 서울역으로 돌아와야만 한다. 남자가 시계를 채워주면서 한 약속(“6시까지 돌아오면 약혼과 결혼, 임신을 한꺼번에 해버리자”)과 간수가 자살로부터 그녀를 구해내기 위해 제안했을 법한 여수로의 여정보다 이것이 더 중요한 것은 그녀가 스스로 부여한 삶과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삶을 지탱해나가는 순수한 목적으로서의 약속은 숭고하며, 골몰하던 죽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선택한 순응과 망각마저 발악하듯 벗어던진 삶의 의지도 존엄하다. 또 무수한 ‘개새끼들’로부터 벗어나 ‘선택의 자유’를 행한 그녀가 과거의 것들과 결별하는 방식이기에 감동적이다. 영화의 마지막은 현재에 충실한 그녀, 그렇기 때문에 해마다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떠나 새벽에 도착하는 그녀, 순수하지만 무용하고, 의미로 풍요로워지기보다 약속을 지킨다는 행위에 온전히 바쳐진 시간만을 탐닉한 그녀, 그리하여 자신과 약속을 응시하는 그녀의 현재만이 반복되는 곳에서 멈춘다. 마지막 신은 철로로 들어오는 기차, 기차들이 서 있는 선로에서 줌아웃하면 서울역과 대우빌딩이 보이는 두 쇼트로 구성된다. 도입부에서 김기영의 카메라는 인물보다 먼저 역에 도착해 있고 기차와 어지럽게 얽힌 선로, 도시를 바라보았다. 이 시선에 담긴 것은 오로지 기차들과 빌딩들이고 사람의 흔적은 대우 빌딩 건설현장 멀리 보이는 노동자 두어 사람뿐이다. 기차를 탈 사람과 그가 지닌 사연보다 기차가 향하거나 멈추는 곳, 출발을 기다리는 기차의 행렬, 곧거나 휘어진 선로들의 얽힘, 배웅하거나 마중하는 사람들이 없는 플랫폼의 스산한 공기, 역을 빠져나가자마자 만나게 되는 도시의 빌딩들이 주인공 같다. 마지막 쇼트를 바라보는 카메라도 주인공을 마중하기보다 서울역 건너편의 건물을 오래도록 바라볼 뿐이다. 떠남의 끝과 돌아옴의 끝을 모두 도시의 빌딩으로 마무리하는 것은 <육체의 약속>의 시작부터 끝까지 완강하게 지켜온 김기영의 기이한 결단, 타협하지 않는 그의 시선처럼 보인다. 또 가로막힌 담벼락과 철문을 향해 온몸을 던진 그녀의 외침, 피폐한 삶을 뚫고 나온 ‘기다린다’는 그녀의 약속을 완결 짓는 김기영의 제스처 같다. 그는 주인공의 육체로 인한 고난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기억하고, 찾아가서, 기다린다는 행위가 그녀를 구원할 것이라고 믿는다. 삶이 있기에 약속이 행해지고, 약속 때문에 시간을 부여잡고 살아야 한다는 다짐이 갱신되는 곳은 역사가 아니라 도시 어딘가 여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