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없는 천사
- 감독
- 최인규
- 제작년도
- 1941
- 출연
- 김일해, 문예봉, 홍은순, 곽도식, 진훈, 김신재, 이상하, 윤봉춘, 강정애, 김유호, 남경치, 황상돈, 시라카와 에이사쿠, 남경호, 박창혁, 임운학, 유현, 전택이, 김덕심, 안복록, 김한, 백란, 고기봉, 이금룡, '향린원' 원아 일동
① 황금관 1913년 1월 1일 개관한 황금관은 대장성 관료 출신으로 러일전쟁 당시 조선에 건너온 다무라 기지로(田村義次郞)가 세웠다. 위치는 지금의 을지로 4가인 황금정 4정목에 있었는데 루나파크(Luna Park)인 황금유원(黃金遊園) 내 활동사진관으로 시작되었다. 설립 초기 황금관은 필름 수급의 어려움과 운영상의 미숙으로 고전하였으나 대정관 매점을 운영하던 하야카와 마쓰타로(早川增太郞)가 운영을 맡게 되면서 크게 성장하게 된다. 하야카와는 대정관에 비해 상대적으로 질이 낮은 영화를 상영했음에도 조선 내 일본인 관객들에게 가장 큰 인기가 있던 변사 유모토 교하(湯本狂波)와 여자 변사 아시자와 하쓰에(蘆澤初江) 등을 고용하여 많은 관객을 끌어 모을 수 있었다. 황금관은 하야카와의 이름을 딴 하야카와연예부(早川演藝部)를 통해 운영되었다. 1914년 하야카와연예부는 텐카츠(天活, 천연색활동사진회사의 약칭)의 선만대리점으로 텐카츠에서 수입, 제작한 2색 칼라영화인 키네마칼라를 본격적으로 상영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서울의 우미관을 비롯해 인천의 표관, 평양의 평안극장 등 지방의 영화관에 필름을 공급하였다. 또한 제1차 세계대전으로 필름 값이 폭등하게 되자 일반 영화보다 필름을 두 배 더 사용하는 키네마칼라 필름을 대신하여 활동사진의 일부를 변사들의 실연으로 보여주는 연쇄활동사진을 도입해 경영상의 어려움을 극복했다. 하야카와연예부의 영향력은 당시 조선의 영화산업을 주도하던 대정관의 닛다연예부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였다. 황금관은 1915년 경복궁에서 개최된 시정5년기념조선물산공진회(始政五年記念朝鮮物産共進會)를 위해 만들어진 연예관(演藝館)을 사들여 기존 건물 옆에 옮겨지은 후 1916년 6월 10일 새로운 건물로 확장 이전하였다. 성공적으로 운영되던 황금관은 1917년 황금관 소유자인 다무라와 하야카와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유락관으로 그 본거지를 옮긴 하야카와연예부를 대신하여 낭화관의 운영자 니시다 가조(西田嘉三)를 급하게 운영자로 섭외한다. 하지만 니시다는 영화관 운영 경험이 없었기에 영화관이 운영될 수 있게 틀만 잡아 두고 아라키 다이스케(荒木大助)에게 운영권을 넘기게 된다. 아라키가 운영하던 시기 황금관의 가장 큰 성과는 극영화를 제작했다는 점이다. 1919년 2월 21일 상영한 부산의 출정군인 나가부치 센타로(中淵仙太郞) 일가의 비참한 삶을 그린 <누의 가(淚の家)>가 바로 황금관에서 제작한 극영화이다. 이 영화는 경성일보사 기자의 지도하에 제작되었으며, 각본은 황금관 운영자인 아라키가 썼다. 이 영화는 조선거주 일본인들이 만든 최초의 극영화로 부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재조선 일본인들의 삶을 소재로 삼았기에 경성의 일본인 관객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사진] 황금관이 인수한 조선물산공진회 연예관 1919년 텐카츠가 해산되어 국제활영주식회사(國際活映株式會社, 곳카쓰[國活])로 바뀌면서 황금관에서는 곳카쓰(國活) 영화를 상영했으나 고전하게 된다. 1921년 말, 황금관은 유니버설 영화만을 상영하는 서양영화 전용관으로 전환되었다. 당시 서양영화전용관으로 전환하는데 앞장선 이가 새롭게 황금관을 운영하게 된 황금관 전무인 변사 난고 기미토시(南鄕公利)였다. 그는 서양영화의 설명에 능한 인물로 한때 서양영화전용관으로 운영되던 유락관에서 근무하다가 황금관으로 옮겨온 바 있다. 황금관은 1922년 9월 다이카츠 쇼치쿠와 계약을 맺고 쇼치쿠 계통의 영화관으로 운영되다가 1924년 1월부터는 새롭게 등장한 제국키네마(帝國キネマ) 조선 봉절장으로 있었다. 1925년 9월부터 다시 하야카와 마스타로가 운영을 맡았다. 그러나 1926년 2월에 하야카와 마쓰타로가 조선에서의 활동을 접으면서 마키노키네마(マキノキネマ), 도아키네마, 제국키네마 등이 직영하게 된다. ② 동아구락부(東亞俱樂部) 1928년 4월에는 신문기자 출신으로 외화 수입업자로 활동하던 도쿠나가 구마이치로(德永熊一郞)가 황금관의 운영권을 인수하여 도아키네마(東亞キネマ) 직속 동아구락부(東亞俱樂部)라는 이름으로 운영했는데 도아키네마 영화뿐 아니라 다른 중소회사의 영화들도 상영했다. 동아구락부의 운영자 도쿠나가 구마이치로는 규슈 출신으로 1920년대 초반 대구로 건너와 흥행업에 뛰어 든 이후 1920년대 중반 서울로 근거지를 옮겨 외국영화 수입회사인 덕영상회(德永商會)를 설립하고 고베의 동서영화주식회사(東西映畵株式會社)가 권리를 가지고 있는 워너브러더스와 FBO영화사의 영화를 수입 배급했다. 덕영상회에서는 외화 수입 외에 도아키네마를 비롯해 중소 규모 영화회사의 필름을 상영했고 덕영프로덕션을 통해 영화제작도 했다. 덕영프로덕션에서 제작한 영화로는 토성회와 함께 제작한 이규설 연출, 복혜숙 주연의 <홍련비련>과 <순정은 신과 같다>와 같은 관청 납품용 교육(문화)영화들이 있다. 동아구락부에서 상영되는 영화들이 인기 있는 작품들이 아니어서 저렴한 입장료를 매기는 대신 자주 프로그램을 바꾸면서 많은 관객을 불러 모았다.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 초반 사이 동아구락부는 일본인 상설관 중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하던 극장이었다. 1930년부터 조선에서 토키영화가 본격 상영되기 시작하자 닙튼 영사기를 구비하여 토키영화를 상영하였다. [사진] 1936년 신축되어 1999년 사라진 국도극장(1961년 경, 출처: 국가기록원) ③ 쇼치쿠좌(松竹座) 1934년 3월 말로 계약이 끝나는 쇼치쿠 영화에 대한 대정관의 독점권을 두고 서울의 극장들이 쇼치쿠 개봉관이 되기 위해 쟁탈전을 벌이게 된다. 이때 주도권을 쥔 것이 동아구락부였다. 동아구락부에서는 쇼치쿠 개봉관의 지위를 얻게 되자 이를 기회로 극장 이름도 동아구락부에서 쇼치쿠좌(松竹座)로 바꾸었다. 1934년 7월 13일이었다. 쇼치쿠좌는 정원이 1,033명이 들 정도로 거대한 극장으로 보통 2,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극장으로 불리었다. 하지만 시설이 낙후하여 1935년 6월 토키영화관으로 신축이 결정된다. ④ 황금좌(黃金座) 쇼치쿠좌와 그 뒤 과거 광무대가 있었던 곳을 합하여 총 600평의 부지에 건설비 30만원에 무대장치 완비하여 건설되었다. 개관 당시 쇼치쿠의 흥행권이 이시바시 료스케(石橋良介)에게 넘어가게 되면서 마키노영화를 상영하게 되자 극장 이름을 쇼치쿠좌에서 황금좌로 바꾸었다. 개관일은 1936년 11월 15일이었고 정원은 1,136석이었다. 도쿠나가가 운영하던 황금좌는 1937년 12월 도와(東和)상사 조선지사의 고인문(高仁文)으로 운영자가 바뀌게 된다. 파라마운트를 비롯해 각종 외화를 수입하는 도와상사가 황금좌를 운영하게 되면서 황금좌는 서양영화를 비롯해 조선영화의 상영장으로 자리 잡게 된다. 특히 최남주의 조선영화사는 공식적으로 황금좌를 자사의 봉절관으로 정하게 된다. 당시 외국영화와 일본영화를 함께 상영하도록 했기에 도와상사가 운영하던 황금좌에서는 닛카쓰 영화를 상영하며 닛카쓰 개봉관이 된다. 전통적으로 닛카쓰영화를 개봉하던 희락관은 2번관으로 바뀌게 된다. ⑤ 경성보총극장(京城寶塚劇場) 할리우드영화에 대한 수입제재가 장기화되면서 도와상사의 고인문은 황금좌 운영에서 손을 뗀다. 황금좌 소유자 다무라 미네(다무라 기지로의 미망인)는 황금좌의 운영권을 회수하여 요시모토 흥업과 보총극장이 제휴한 주식회사 경성보총극장에 넘긴다. 황금좌는 1940년 5월 1일부터 이름을 경성보총극장으로 바꾸었다. 주식회사 경성보총극장은 극장 운영을 위해 자본금 85만원의 주식회사를 성립하게 된다. 주식회사 경성보총극장의 진용은 사장 하타 도요키치(秦豊吉, 동보), 전무 하야시 히로타카(林弘高, 요시모토), 취체역 나와 미쓰마사(那波光正, 동보), 하야사 쇼노스케(林正之助, 요시모토), 감사역 온다 다케이치(恩田武一, 요시모토), 마나베 야치요(眞鍋八千代, 동보측)이었으며 실무는 지배인 우메미야 사부로(梅宮三郞)가 맡았다. 1940년대 경성보총극장은 성보극장이라는 약칭으로 불렸다. 이 영화관은 조선영화의 개봉관으로 이용되었는데 <집 없는 천사>(1941), <복지만리>(1941), <창공>(돌쇠의 개제)(1941), <그대와 나>(1941), <신개지>(1941) 등이 경성보총극장에서 개봉되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연예를 통한 선전활동이 강화되면서 1942년 9월 20일 경성보총극장 직속의 성보연예부가 신설된다. 연예보국의 영역을 확장키 위해 만들어진 성보연예부에서는 동보연예배급사 요시모토흥예배급부(吉本興藝配給部)의 지원과 만주연예협회와의 연락을 통해 내지 연극연예단을 조선에 소개하고 조선의 연극연예의 배급과 흥행을 맡았으며 그 산하에 성보이동연예봉사대를 조직하여 각종 위문연예를 제공했다. 경성보총극장은 1943년 7월 30일 조선흥행연합회에서 1급에서 11급까지 등급을 나누었을 때 서울의 영화관 중 명치좌와 약초극장과 더불어 1급관으로 80전의 입장료를 받을 수 있었던 대표적인 영화관이었다. 해방 직전 화재로 인해 문을 닫은 성보영화극장은 해방 이후 내부를 수리하며 재개관하게 되는데 이때 이름을 국도극장(國都劇場)으로 바꾸었다. 국도극장은 1999년까지 운영되었다가 폐관하였다. 현재 극장이 있던 자리에는 호텔이 들어서 있다. [참고문헌] 《경성일보》, 《동아일보》, 《매일신보》, 《조선신문》, 《조선중앙일보》 김태현,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1』, 도서출판 문, 2012. 김계자,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1』, 도서출판 문, 2012. 정병호·김보경,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3』, 도서출판 문, 2012.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사연구소 엮음, 『일본어 잡지로 본 조선영화(1~6)』, 한국영상자료원, 2010~2015. 한상언, 『조선영화의 탄생』, 박이정, 2018. * [사진](상단). 황금유원 설립자 다무라 기지로(『京城府之卷』, 京城府) [자료] ≪경성일보≫,1919.02.21. 淚の家 全五卷 當館封切 黃金館 京城日報記者指導 黃金館主 荒木大助 脚色 釜山出征軍人 中淵仙太郞氏の家族 ▲夫の出征後妻は貧0の身に又一兒を産み産後の患ひより遂に歸らぬ旅0 の人となる、頑是なき七人の子は飢に泣き水よ飯よと取0る0他の見ろ 目 0實に哀れ悲慘の淚なり ●六人の子は飢に泣き妻は臨月の腹を抱つて病床に臥す出征軍人の大 悲慘なる家族、 噫々薄命なる勇士 ●0の難を見て惻隱の情を勤かすは仁の端と云ふ大方の士御觀覽の上一 掬御同情あらん事を43)(0은 판독불가-인용자) [자료] ≪경성일보≫, 1919.02.23. 初日 二日 滿員 黃金館 荒木大助 脚色 事實悲劇 淚の家 ▣ 當館特別撮影 大阪樂天地に京都京座に名古屋新守座に於て連日大盛況の本0は劇以上 に出色せしめたる實に現在釜山にある大悲慘事 此哀れなる寫眞を見られて誰れか泣かれぬ方ありや 本日 晝夜 開演 黃金館45)(0는 판독불가-인용자) [자료] "연기관의 대소요, 연극 즁에 큰 소동, 일반 연극의 주의" 《매일신보》, 1913.2.22. 십구일 오후 십시에, 남부 산림동(山林洞) 황금유원 안 연기관에셔, 한 소요 일이 잇셧 , 연기관에 , 혁신단 림셩구(林聖九) 일 이, 신파연극을 흥 즁, 그 시각에, 그곳에셔 고용 , 광도현인 포 신조(廣島縣人 蒲生信造) 삼십륙셰된 쟈가, 왼편 손에 연극에 쓰 , 폭발약을 만히 쥐고 셧다가, 그릇 불이 이러나, 굉쟝 형셰로, 젼부가, 폭발되얏슴으로 그 근쳐에 잇던, 흔 고용인, 즁셔, 쇼숑, 쇼뎐(中西, 小松, 小田) 등, 삼인도 즁샹을 입어, 젼귀 명을, 즉시 그 부근 지샹의원(池上醫院)으로, 메여다가 치료 즁인 , 그 즁 포 은, 왼편 손이, 젼부가 파괴되얏슴으로, 지샹씨의 집도로, 대슈슐을 시작 야, 팔을 버혓 , 지금 형샹으로 , 명에 , 관계가 없슬 듯 나, 눈망울과 기타 크게, 화샹 곳이 만아, 보기에 우 참혹 다더라. [자료] 《매일신보》, 1918.07.05. 日本天然色活動寫眞株式會社 技術部 新案 米國式 스데-지 기네오라마 應用 事實劇 船長의 妻 黃金館은 新築二週年 記念 特別 大大興行으로 右 天活會社 技術部員 拾數名을 招 야 七月五日부터 公開 다 歐洲戰亂以來 敵 潜航艇으로 因 야 商船의 遭難이 不... 바 昨年 我 日本最初의 武裝船 ○○會社 ○○丸도 其 慘禍에 罹 얏더라 今回 黃金館은 其 巨大 舞臺 一面에 前記 天活會社 獨得의 「스데-지 기네오라마」를 應用 고 電氣仕掛로써 當時의 實況을 看客 諸君에 示코져 今 基 光景을 略述 지면 英國 包台 不飽히 探照燈을 照 야 獨히 潜航艇 並 飛行機의 襲來를 監視 月은 皎皎 야 海 照 고 金波 銀波 靜動中에 我 ○○丸은 警戒 中 航行 天候 俄然히 變 야 數千의 星은 急히 其 光을 沒 야 一天은 忽然 暗黑 敵艇 及 飛行機 其 機를 乘 야 「 버」海峽에 馳來 야 我 ○○丸을 發見 고 .....水雷를 發射 고 又 爆彈을 投下 ○○丸 其 ....의 活躍인 實로 慘劇 其 物을 目擊 에 不異 고 誰何든지 科學의 進步 光學 應用의 巧妙 에 驚치 안이치 못 이라 「스데-지, 기네오라마」에 就 야 內地에 旣히 定評이 有 고 今 玆에 ....言을 不要 고 黃金館은 鮮人 各位의 觀覽에 供 기 爲 야 特히 此 一團을 招聘 얏더라 米國 단호자會社 作 連續 二十三編 四十六卷 連續 大活劇 百萬弗의 秘密 第一 第二篇 上場 臨時觀覽料 特等 七十錢 一等 五十錢 二等 三十錢 軍人學生各等半額 黃金館.
<집 없는 천사>: 팬톰 시네마의 귀환 이 영화는 세 번의 삶을 살게 된다. 1941년 무렵 첫 상영 시기의 < 집 없는 천사 >( 최인규 , 1941), 필름이 망실된 이후 망령, 유령, 환상적 “팬톰 시네마”로서의 삶, 그리고 영상자료원으로 귀환 뒤 2005년 이후의 삶 . 이 세 번의 삶 속에서 <집 없는 천사>는 비평의 집들을 축조해냈다. 이 프레임들은 조선, 한국 영화사 비평 기반을 조성한다. 친일 영화인가 아닌가에 대한 이념적 논의 , 흥행 영화라는 산업적 접근, 법제도에 관한 논쟁이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특히 엔딩 부분, 아이들이 황국신민 서사를 낭독하는 장면이 문제적이다. 이 부분은 『한국 영화 전사, 이영일 저』에서 <집 없는 천사>를 한국 영화사의 눈부신 리얼리즘의 궤적에 소재시킨 것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기존 논의들에 대한 참조를 권하면서, 두 개의 토픽을 도입하고자 한다. 아동의 문제와 토폴로지다. 특히 고아 소년, 소녀와 일본 내지, 조선이라는 외지의 장소성과 경계이다. 이 영화에서 시네마틱한 정교함이 특히 드러나는 장면은 방성빈( 김일해 )이 고아들을 데리고 향란원을 세워나가는 과정을 실화에 근거, 재현한 고아 아이들의 노동과 일상 장면이다. 목가적 풍경 위로 해가 뜨면 기상나팔, 행진곡 풍 음악이 장쾌하게 이어진다. 땅을 파고, 함께 국수를 뽑고, 빨래를 하며, 아이들은 상반신을 드러낸 채 신나게 일한다. 고아원 향린원은 이들의 노동으로 일본 제국의 식민지, 일본 내지와 조선 외지라는 지정학적 장소성을 비껴나는 헤테로토피아로 보인다. 또한 내지도 외지도 아닌 불확정 지대(zones of indetermination)로 나타난다. 소년, 소녀에 관한 이렇게 쾌활하기 그지없는 재현은 아래 표현과 그리 멀지 않다. “아동은 친화성, 방산적(放散的)사고, 유머, 뇌의 가소성(可塑性), 낙천성 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관계적인 면에서는 어른들에 비해 높은 감수성과 유연성, 관계의 탄력성을 갖고 있다. 그리고 호기심, 모방, 탐색적 사고, 실험정신, 상상력이 높다.” 1938년 7월 내무성 경보국도서과의 내부자료 제 32호「유소년소녀잡지에 관한 답신안(幼少年少女 雑誌に関する答申案)」에 나온 글이다. 일본에선 아동의 문제가 대중적인 호응을 얻게 된 것은 만주사변 전후의 긴박한 시기였다고 한다. 일본의 <소년클럽>과 조선의 <소년>잡지는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인기를 누렸는데, “외지 조선의 소년들도......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일본, 조선, 만주, 타이완, 사할린, 브라질 등)에서도 자신과 동일한 생각과 이상을 품으며 생활하는 동년배가 있다는 잡지의 ‘전시’ 효과는 기울어가는 전쟁 상황 속에서도 일본의 소년독자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북돋는 심리적 지지대가 되어주었다.” 1) 최인규 감독의 다른 작품 < 수업료 >(1940)와 <집 없는 천사>와 비교되는 <미가헤리의 탑>(시미즈 히로시, 1941) 등이 조선과 일본의 대표적인 아동 영화들로 위 소년클럽의 시대적 무드를 공유하고 있는 셈이다. 노동자로 훈련된 이러한 고아들은 이후 징병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실제로 1942년 이 영화의 남자 주인공인 방성빈의 실제 인물 방수원은 향린원 원아들을 징병하려는 일제를 피해 제주도에 남진소년개척단을 꾸리기도 했다. ( 이효인, 「집없는 천사와 미가헤리의탑의 비교연구」, 영화연구 44 , 2010, 254쪽). 이렇게 방수원이 맞닥뜨린 실제 상황에서처럼 징병을 피해볼 수 있는 집단이기도 하다. 미성년으로서의 아이들은 불확정성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방수원의 활동은 제국 군대의 기제를 슬쩍 돌려놓는 것이다. 전쟁 동원령 시기, 일본 외지, 반도의 조선인으로서 행하는 사회적 실천은 독립운동을 제외한다면 필연적 아포리아에 빠진다. 재생산을 위한 긍정적 실천자체가 일본 제국에 가세하는 형세를 띄기 때문이다. 감독 최인규는 방성빈(방수원)의 아이들이 종국엔 제국의 황국신민 서사를 읊조려야 하는 과정을 영화 실천과 포개어놓았는지도 모른다. 흥행, 친일, 반일의 동요 속에서 영화 속 아이들의 신체는 어떤 불확정 지대인 장소를 생산하고, 지리적 장소인 향린원은 이것을 미학화 한다. 고아들의 집을 다룬 영화의 토폴로지다. 1)서기재, 「소년클럽의 독자 생성과 외지조선의 소년」, 일본문화연구 68,2018. 10. 210쪽 주 5에서 재인용. > > 집 없는 천사 VOD 보러가기 <<
1919년에 발간된 한국 최초의 영화잡지 「녹성(綠星)」에는 1916년 유니버설 블루버드 작품인 「Shoes」가 < 독류(毒流) >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어 있다. 주인공 메아는 자신이 받는 주급 5달러로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도시 노동계급 여성이다. 그녀의 극단적인 가난은 비가 새고 발에 상처가 날 정도로 너덜너덜해진 구두로 형상화되는데, 결국 그녀는 새 구두를 얻기 위해 타락의 길에 들어선다. 영화(소설) <독류>는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화려한 물질문명의 전시, 선망과 대리만족의 세계가 할리우드 영화의 전부는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히려 20세기 전반기의 할리우드는 사회적 빈곤이나 전쟁이 낳은 참상, 지배계급에 의한 착취와 수탈 같은 세계상을 자주 그렸고 식민지 조선에서 할리우드 영화는 그와 같은 보편적 세계상에 대한 이해와 공감 속에서 소비되었다. 남성에게 농락당하는 하층계급 여성의 수난기를 다룬 그리피스의 < 동도(Way Dowm East) >나 찰리 채플린의 무성영화들이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던 것을 보아도 그렇다. 사회적 빈곤을 다루는 이 영화들은 조선인들 또한 세계 다른 지역의 사람들과 같은 삶의 조건에 놓여 있다는 감각, 말하자면 ‘공통의 인류’로서 근대의 생활세계에 대해서 느끼는 어떤 보편적 감각을 생산했다. 오랫동안 한국영화사를 주조해온, ‘빈곤의 미학’으로서의 리얼리즘은 이와 같은 근대세계의 보편성에 맞닿아 있다. 영화사가 이영일 은 ‘리얼리즘’이라는 개념 아래 < 아리랑 >(1926)을 비롯한 나운규 의 영화 세계와 < 수업료 >(1940), < 집 없는 천사 >(1941)같은 최인규 의 영화들, 그리고 해방 후 유현목 의 < 오발탄 >(1961)으로 이어지는 한국영화의 정전 목록을 제시한 바 있다. 수탈당하는 소작민의 울분을 그렸던 <아리랑>, 부모의 돌봄을 받지 못하는 가난한 아이들을 담은 <수업료>와 <집 없는 천사>는 <독류>나 채플린의 영화들, 더 나아가서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이나 <오발탄>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빈곤이라는 근대세계의 보편적 주제를 다뤘다. 예컨대 낡은 구두가 메아의 가난을 표상하듯이 할머니가 주워온 짝이 맞지 않는, 구멍마저 뚫린 신발은 영달의 빈곤한 처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먼저 <집 없는 천사>가, 그리고 이어서 <수업료>가 발굴되어 다시 세상에 나오기 전까지, 이영일의 정전 목록은 대체로 받아들여졌다. 식민 말기의 영화들에 대한 연구가 풍성해지는 가운데, “2차대전 후 네오리얼리즘을 연상”시킨다(이영일)는 전언과 몇 장의 사진을 통해서 최인규 영화의 면모를 짐작해왔던 후세대는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서하는 <집 없는 천사>의 마지막 장면에 당혹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수업료>는 그보다는 덜 노골적이지만, 일제의 ‘소국민 담론’ 안에서 소비된 맥락으로 보든, 서사의 논리적 구조로 보든 이른바 ‘친일영화’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수업료> <집 없는 천사>를 비롯해 새로 발굴된 식민 말기 친일영화들의 내적 논리를 밝히는 가운데, ‘균열’ 또는 ‘징후’로서 드러나는 조선영화의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논의들이 생산되었다. 하지만 친일영화임이 분명한 이상, 어떤 균열이나 징후가 있더라도 이 영화들이 민족영화의 정전으로서의 위상을 고수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필름의 발굴로 인해 오히려 모호해진 최인규 영화의 영화사적 위상을 다시 정립하기 위해서는 ‘빈곤의 미학’으로서의 리얼리즘을 민족영화의 정점으로 구성해온 이영일의 영화사론을 재고해야 한다. 요컨대 최인규의 영화들은 리얼리즘과 민족영화의 균열지점을 보여주는 문제적인 텍스트들인 것이다. 빈곤의 미학으로서의 리얼리즘이 식민지시대를 넘어 < 꼬방동네 사람들 >(1982)이나 < 바람 불어 좋은 날 >(1980) 같은 1980년대 영화들까지 규정하는 틀로서 이어져 온 긴 역사를 생각했을 때, <수업료>와 <집 없는 천사>를 민족영화의 정전에서 배제하는 손쉬운 방법은 해결책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사회적 빈곤이야말로 20세기 한국의 대중이 자신의 ‘현실’로 받아들였던 것이며, 그것을 다루는 영화 매체의 보편적 능력을 외국영화들뿐 아니라 식민지 조선과 한국의 영화들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리얼리즘으로 한국영화의 “정신의 광맥”을 구성하고자 했던 이영일의 영화사론을 효과적으로 논박하기 위해서는, 빈곤의 재현이 리얼리즘으로 규정되고 그것이 곧 민족영화의 핵심이자 세계적 보편성에 가닿는 것이 되는 논리적 도약이 어떻게 그토록 오랫동안 유효할 수 있었는가를 질문해야 한다. 1930년대 초에 카프 비평가들이 나운규의 영웅주의를 아메리카니즘이라고 비난했을 때, 나운규는 자신 또한 “이 현실에 생활고를 느끼는 프롤레타리아의 한 사람”이라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영화가 왜 프롤레타리아 영화가 될 수 없는지를 반문했다. 더글러스 페어뱅크스가 분한 쾌걸 조로가 “약한 사람을 도와주고 권력으로 인민을 압박하는 자를 징계하는 것으로 자기 사명”을 삼았던 것처럼 <아리랑> 연작의 영진이나 < 철인도 >의 개고기 같은 나운규의 활극적 캐릭터들은 비참한 상황에 처한 식민지 조선인들을 ‘영웅적 활동’으로써 구원한다. 나운규와 카프 비평가들은 억압과 수탈의 사회구조와 그로부터 비롯된 대중의 생활고를 다루는 것이 영화의 역할이라고 믿었지만, 나운규는 영웅적 개인의 ‘활동’으로써, 카프 비평가들은 “노동계급의 집단적 힘”으로써 이를 극복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달랐다. 1930년대 초 나운규 영화 세계에 닥친 위기는 아메리카니즘의 패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카프 비평가들 또한 승자가 아니었는데, 그들이 옹호했던 소비에트 영화의 미학은 일제의 검열에 의해 아메리카니즘의 영웅주의보다 더 철저하게 봉쇄되었기 때문이다. <수업료>의 ‘리얼리즘’, 즉 사회적 빈곤의 재현은 모두가 패배한 바로 그 상황에, 조선 영화미학의 폐허 위에서 자라났다. <수업료>는 가난의 서사가 갖는 보편성에 기반 해서 전개된다. <독류>에서 메아가 쇼윈도우에 전시된 구두를 바라보는 것처럼, <수업료>에서 영달은 또래 아이와 그 아버지가 새 신발을 사는 모습을 쓸쓸하게 지켜본다. 다른 이들과의 비교를 통해 선명하게 부각된다는 점에서 가난은 상대적인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사회적인 의미망 안에서 제시된다고 말할 수 있다. 메아의 구두가 일터로 나가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생필품이었다면, 영달에게 수업료는 학교라는 사회에 머무르기 위한 기본적 요건이었다. 수업료 때문에 학교에 가지 못한 영달과 정희가 강가에서 책을 읽는 모습으로부터, 교실에서 책을 읽는 다른 아이의 얼굴로 넘어가는 장면의 연결은 ‘공부’ 또한 특정한 사회적인 의미망 안에 놓여 있는 것임을 보여준다. 저 하늘에도 슬픔이 1965년 < 저 하늘에도 슬픔이 >에서는 주인공 윤복의 눈물겨운 ‘고학’의 정경이 더욱 절절하게 그려지는데, 이는 당시가 제도교육을 통해 가난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신화가 본격화된 시기라는 점과 관련되어 있다. 못 배운 한과 가난의 대물림, 고학을 통한 가난으로부터의 탈출 같은, 근대적 교육제도를 둘러싼 재현의 관습들은 산업화 시대의 산물인 것처럼 보인다. 당장 굶더라도 학비를 마련해서 학교에 가야 하는 것은 가난이 현재의 곤경인 동시에 미래의 박탈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수업료>에서 가난과 공부는 개인의 미래보다는 개인이 속한 공동체의 문제로 제시된다는 점에서 식민 말기의 사회상을 반영한다. 불우한 아이를 도와주고 계도하여 공동체의 성실한 성원으로 만드는 ‘아동영화’의 주제가 당시 사회상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는 불우한 부랑아들과 뉘우친 불량배들이 함께 황국신민의 서를 외우는 <집 없는 천사>의 마지막 장면에 오면 선명하게 드러난다. 요컨대 조선인들은 모두(그들의 신체적 나이와 상관없이) 훈육과 계도를 받아야 할 어린아이이며, 이들에 대한 교육은 ‘대동아’의 ‘공영’을 위한 일본제국의 의무이자 권리인 것이다. 서두에 일본 제국의 일부로서 조선 반도를 위치 짓는 지리 수업을 보여줌으로써 <수업료>는 식민지에서 제도교육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분명하게 하지만, <집 없는 천사>와 같은 직접적인 선전 메시지를 담지는 않았다. 대신, <수업료>의 세계에는 수원성에 둘러싸인 그림 같은 조선의 정경과 선의로 가득한 생활 공동체의 성원들이 있다. 월급을 털어 영달의 월사금을 주는 일본인 교사, 영달과 병든 할머니의 생계를 걱정하고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친구 누나, 영달의 곤궁한 처지를 돕기 위해 ‘우정의 상자’에 돈을 모으는 학우들과 교사들, 그리고 월사금을 얻기 위해 60리 길을 걸어온 영달에게 따뜻한 밥을 차려주는 아주머니 등이 구성하는 그 세계에서 사회적 빈곤은 투쟁이 아니라 자선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로 그려진다. 영웅적 개인의 활동을 통해서든 노동계급의 집단적 힘에 의해서든 간에, <수업료> 이전의 가난은 투쟁을 통해 극복할 수 있는 것이었다. 누구는 갖고 누구는 갖지 못한 사회적 불평등은 수탈로부터 기인한 것이라는 인식, 그리고 이와 같은 구조적 모순을 타파하기 위해서 투쟁해야 한다는 인식은 카프 비평가들뿐 아니라 나운규조차도 공유하고 있던 것이다. 그들이 모두 패배한 뒤에, 특히 계급투쟁의 좌파적 상상력이 절멸된 위에서 이웃의 온정이 사회적 빈곤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부상했음을 <수업료>는 보여주고 있다. 수업료 VOD 보러 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