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나타
- 감독
- 차이밍량
- 제작년도
- 1992
- 출연
- 진소영, 왕유문, 이강생
<무소주>(2024) 중 (사진: 전주국제영화제 )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 금강경에 나오는 구절이다. 차이밍량은 2012년부터 <행자(行者)> 연작을 찍기 시작했다. 장소만 달려졌을 뿐 내용은 모두 동일하다. 리캉성이 붉은색 가사를 입고 약간 고개를 숙인 다음 한 손은 엄지와 검지로 원을 만들어 불가의 공(空)을 표시하고 다른 한 손은 내린 채 펼친 다음, 혹은 마찬가지로 원을 만들어서, 천천히 걷는다. 맥락과 배경, 그리고 거기에 대한 해설을 달 수 있겠지만 영화에서 보는 건 그게 전부이다. 차이밍량은 2013년 < 떠돌이 개 >를 찍은 다음 더 이상 극영화를 찍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물론 언젠가부터 점점 차이밍량의 영화에서 극영화라고 부를 수 있는 부분들이 희박해져 갔다. 그는 < 안녕, 용문객잔 >(2003)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이미 모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행자> 연작을 오래전부터 준비해 온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무대에서 시작되었다. 2011년 타이베이 국립극장에서 300석 규모의 무대에서의 공연을 제안받았다. 세 명의 배우를 무대에 불러 각자의 모노드라마를 올릴 계획이었다. 세 명은 양구이메이, 루이징, 그리고 리캉성이었다. 리캉성에게는 일인삼역을 부탁했는데, 리캉성 본인과, 차이밍량의 아버지, 그리고 현장(玄奘)법사였다. 현장법사는 당나라 시대의 승려이다. 불교 교리를 연구하려고 했지만, 그때 중국에는 불교 경전이 없었다. 그래서 경전을 구하기 위해 천축국(지금의 인도)으로 길을 떠났다. 627년의 일이다. 둔황을 거쳐 천축국에서 불경을 얻은 다음 당나라의 수도 장안(長安)으로 돌아온 것은 645년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는 그 여정을 명나라 시대에 신괴소설(神怪小說)로 쓴 오승은 작가의 『서유기』이다. 삼장법사와 세 명의 제자,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과 함께 그들을 기다리는 온갖 요괴와 난관을 헤쳐 나가는 모험극. 하지만 무대에서 리캉성은 무얼 하려고 하지 않았다. 대신 사각형으로 된 무대 끝 선을 따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차이밍량은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무대에서 한 번 공연한 다음에 사라져 버리는 게 너무 안타까워 그걸 기록하고 싶어졌다. 이 말을 다시 한 번 옮기겠다. <행자>는 영화로 만들어지기 위해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기록하기 위해서 시작되었다. <모래>(2018) 중 (사진: 전주국제영화제 ) 하지만 무대에서 이미 한 것을 카메라 앞에서 반복하지 않았다. 차이밍량은 리캉성에게 붉은 가사(袈裟)를 입히고 길거리로 데려 나갔다. <무색>(2012)이라는 제목의 첫 번째 <행자>는 2012년 타이베이의 야시장(夜市場)에서 걸었다. 아주 느리게 걸었다. 이 해에 세 편의 <행자>를 더 찍었다. 처음에는 상영시간이 짧았지만, 점점 더 길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덟 번째 <행자> 연작인 <모래>(2018)에서 처음으로 1시간 상영시간을 넘어섰다. 아무 사건도 없고, 아무 이야기도 없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 대사도 없다. 리캉성은 그저 고개를 숙이고, 언제나처럼 붉은 가사를 입고 한 손으로 엄지와 검지로 원을 만들고 다른 손을 내린 채 맨발로 몹시 천천히, 아주 느리게, 마치 멈춘 것 같은 속도로 걷는다. 하지만 길거리로 나가자 구체적인 문제와 만나야만 했다. 기후의 가혹한 조건. 환경이 요구하는 한계. 한여름 뜨거운 햇빛으로 달궈지다시피 한 말레이시아 쿠칭의 아스팔트 위를 맨발로 걸었고(다섯 번째 <행자>인 <물 위 걷기>) 추운 한겨울 밤에도 도쿄의 길거리도 맨발로 걸었다(여섯 번째 <행자>인 < 무무면(無無眠, No No Sleep) >). 그래서 차이밍량은 모든 테이크를 단 한 번만 찍었고, 리캉성은 같은 장소에서 두 번 걷지 않았다. <행자>는 정신적인 여정이지만 육체적인 기록이다. < 곳 >(2022), < 무소주 > 중 (사진: 전주국제영화제) 열 번째 <행자>인 < 무소주(無所住, Abiding Nowhere) >(2024)에서 리캉성은 미국 워싱턴 DC를 걷는다. 아홉 번째 <행자>인 <곳(何處, Where)>(2022)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아농 홍앙시가 등장한다. 하지만 두 사람은 만나지 못하고 각자의 일을 각자 한다. 부사(副詞)로서의 각자(各自). 서로 따로따로. 어떤 일? 리캉성은 쉬지 않고 걷고, 아농은 외출하고 돌아와서 면을 끓인 다음 먹는다. 그 둘은 무슨 사이일까. 전주에서 만난 차이밍량은 내게 비밀을 알려주었다. (올해 전주영화제에서 차이밍량 <행자> 전작 회고전을 했고, 차이밍량은 전주에 방문했다. 이때 긴 인터뷰를 할 기회가 있었다. “언지무(言之無)―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 나는 이를 추구한다”, 《필로》 38호, 2024 May_June.) “<행자> 연작 일부분은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 예를 들면 내가 어릴 적에 읽은 『서유기』에 나오는 요괴 같은 개념들을 몰래 넣기도 합니다. 당신에게 알려줄 수는 있지만, 관객들에게 내 생각을 굳이 알려줄 필요는 없습니다. 확실한 건 <행자> 연작을 찍을 때는 어떤 방법을 통해 표현할지 생각을 많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파리에서 찍은 <곳> 속의 아농은 거미 요괴를 닮았습니다. 그가 리캉성, 그러니까 행자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요괴를 닮았습니다. 내 머릿속에는 이런 생각들이 들어있습니다.” 하지만 차이밍량은 거기까지만 비밀을 알려주었다. <무소주>에서 아농이 요괴인지 그렇다면 어떤 요괴인지, 거기까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무소주> 중 (사진: 전주국제영화제 ) <무소주>의 마지막 장면에서 석양이 저물어가는 물가를 리캉성이 걷는다. 그때 해가 저물어가면서 물 위로 반사광이 피어오른다. 구태여 비유를 빌리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사바세계(娑婆世界)를 건너서 극락에 이른 것처럼 보인다. 그때 노래가 흐른다. ‘了悟心性究竟之上師祈請文’. 문자 그대로 옮기면 ‘완전한 깨달음을 얻기 위한 스승들의 기도’이다. 이 노래가 들릴 때 리캉성은 마치 긴 여정을 마치는 것만 같다. 차이밍량은 베를린 영화제에서 이 열 번째 <행자>가 연작의 마지막 작품이 될 것이라고 했다. 추신 _ 전주영화제에서 차이밍량에게 열한 번째 <행자>를 제안했고, 차이밍량은 다음 <행자>를 전주에서 찍을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아직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다. 이것이 새로운 <행자> 연작의 첫 번째 영화가 될지, 아니면 열한 번째 <행자>일지, 그도 아니면 번외편이 될지, 또는 에필로그가 될지, 아무것도 정해진 바 없다고 했다. 나는 두근거리면서 기다리는 중이다. 정성일(영화감독, 영화평론가) l 매일 영화를 보고 종종 영화 평을 쓰고 가끔 영화를 만들고 때로 영화제 일을 한다.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2003) 인터뷰 진행,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2010), 『필사의 탐독』(2010) 비평집 집필. 첫 영화 < 카페 느와르 >(2009) 이후 < 천당의 밤과 안개 >(2015), < 녹차의 중력 >(2018), < 백두 번째 구름 >(2018) 연출.
<희생>(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1986) 중 1년간 관객을 찾은 영화들을 필자의 시선으로 돌아보며, 올 한 해 영화가 불러온 고민들을 정리합니다. 스크린 앞에 앉은 이들이 이미지 속에서 그들의 욕망을, 그들이 욕망하는 것을 찾는다는 말은 꽤 미심쩍은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의 앞에, 뒤에 그리고 곁에 앉은 이들이 보고 있는 이미지와 자신이 보고 있는 그것과의 차이를, 즉 간극을 향유하기 위해 영화관에 간다. 이 경우에, 그리고 오직 이 경우에만 영화관은 우정의 장소가 된다. 그런데 “뤼미에르에 대한 에디슨의 승리”(장-뤽 고다르)가 전면화된 곳에서, 관객들은 그저 “자신들이 찾은 것만을 욕망”(기 드보르)하게 될 것이다. - 유운성, 「우정의 이미지들」, 『인문예술잡지 F』 제10호 이 글은 2024년 12월 중순에 쓰이고 있다. 12월 3일의 계엄령 선포 이후라는 뜻이다. 연말의 나는 영화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렇듯, 그해의 영화들을 순위 매기거나 놓친 영화를 돌아보며 다가올 새해를 맞이했다. 지나간 이미지들을 되짚으며 한 해를 마무리하고는 했었던 것인데, 반대로 요즘의 나는 유튜브에 들어가 생중계되는 담화와 현안 질의 영상 같은 것을 들여다보고 있다. 이 와중에 마감 일자는 다가왔고 글을 써야 할 때가 되었는데, 청탁을 받았을 때와는 무언가 달라진 기분 같은 것을 느꼈고, 그것을 외면하기에는 원래 준비했던 글의 주제와 지금의 내 상태가 관련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닌 것 같고, 꽤나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고, 준비하던 글을 버릴 수는 없지만, 아무 일 없다는 듯 준비했던 대로만 쓰면 왠지 그건 평정심이라기보다는 뻔뻔함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불안 섞인 걱정을 하고, 그럼 준비했던 대로만 쓰는 건 뭔가 아니다 싶고, 굳이 올해에 한정하지 않더라도 관련지을 수 있을 만한 사례를 가져와도 괜찮겠다는 결론에 이르러, 그와 관련된 옛날 얘기로 글을 시작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한 편의 영화에 대한 단일한 감상이란 있을 수 없다. 비평이란 이름의 탈을 쓰고 유의미한 의견으로 정교히 언어화되어 세상에 나오지 않을지라도, 언제나 한 편의 영화를 본다는 것에는 각자의 개별적 경험이 스며들며 그 분리 불가능한 총합은 또 하나의 경험이 되어 각자의 마음에 남기 마련이다. 김대환 의 장편 데뷔작 < 초행 >(2017)이 내게 그런 영화 중 한 편이다. 2017년 겨울에 개봉한 이 영화는 당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첫 선을 보였는데, 당시 이 영화를 본 친구들은 개봉하게 되면 꼭 보라는 말을 해주면서도, 어떤 내용인지 묻자 아무것도 모르고 보는 편이 좋고 결말이 참 인상적이라는 말을 더해 주어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포스터나 시놉시스를 보건대 장르적이거나 플롯 운영에 있어 반전을 꾀하는 영화는 아닌 것임이 확실할 텐데, 도대체 무엇이 있길래? <초행> 포스터와 스틸 <초행>이 막바지에 다다른 순간이었다. 결말부는 2016년 가을 무렵부터 2017년 중순까지 이어졌던 광화문 촛불 집회를 로케이션으로 삼는다. 양쪽 집안을 오가며 고군분투하던 7년 차 청년 커플을 따라가던 픽션의 세계에 돌연하게 쏟아지는 저 리얼리티의 막대함에 적잖이 혼란스러웠다. 개인적으로 이 선택이 단순히 허구와 현실의 구별이라는 영화의 근본적인 문제를 건드린다는 개념적 차원 그 이상의 가치로 빛난다고 느꼈는데, 서둘러 말하자면 이 영화가 너무 빨리 도착한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KOBIS에 따르면 이 영화는 내가 열심히 광화문 광장을 오가던 2016년 11월 26일부터 2016년 12월 20일까지 촬영되었다. 헌법재판소는 2017년 3월 10일 대통령 탄핵을 결정했고, 이 영화는 두 달이 지나지 않아 제18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프리미어 상영으로 공개된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 당시 촛불 집회와 관련된 일련의 사태와 시간은 이 현실을 살아가는 한 명의 시민으로서 망각하기 어려운 적잖은 충격이었을 테다. 물론 나는 이 영화를 개봉하고 보았지만, 그 물리적 간극을 상쇄시킬 정도로 <초행>의 끝이 주는 감흥은 생생하면서도 생경했다. <초행>에 기입된 광화문 광장의 생생한 이미지가 한편으로 생경했던 이유는, 영화라는 것이 어느 정도 시차를 두고 만들어진다는 모종의 관습을 깨부수었기 때문이다. 거의 생중계에 가깝다고 느끼면서도, 약간의 거리감은 환기되는 이상야릇함에 가까웠다고 해야 할까? 사실 이 장면이 인상 깊은 건, 작품 내에서 세계를 뒤집어놓는 급속한 반전처럼 기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고민이 지난히 이어지던 이 커플이 광장으로 향하며 어디로 가야 할지 헤매는 상황은, 이야기와 멀어지기보다는 오히려 끈끈히 달라붙으며 세계를 입체화하기 때문이다. 수현과 지영은 그 역할을 맡은 조현철 과 김새벽 으로 존재를 전환하지 않고, 광화문 광장은 이 영화의 주된 무대인 삼척, 인천과 특별한 위계서열을 형성하지 않는다. 나의 사적인 경험, 역사적 현실, 영화적 허구가 한 데 섞여 용광로처럼 들끓었던 이 기묘한 감각을 여전히 잊기 힘들다. <태풍클럽> 일본어 포스터(일부)와 국내 개봉 포스터 그 ‘너무 이른’ 경험으로부터 7년이 지나 2024년이 되었다. 올해는 정반대로 ‘너무 늦은’ 경험을 했다. 소마이 신지의 < 태풍클럽 >(1985)이 정식으로 개봉한 것이다. 처음 본 것이 중학생 때인지 고등학생 때인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어둠의 경로를 통해 이 영화의 영상과 자막을 구했으며 이불에 들어가 스마트폰으로 보았던 기억, 예상치 못한 영화 속의 거친 면모에 받았던 충격만큼은 선명하다. <태풍클럽>은 1985년 작이니 거의 30년이 되어서야 한국에 정식으로 공개된 것이다. CGV 아트하우스관에서 이 영화를 다시 보았는데, 객석이 의외로 꽉 차 있어 놀랐고, 영화가 끝난 뒤 당혹스러워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며 내가 너무 늙어버린 것 같다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미 <태풍클럽>이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그려내는 아름다운 청춘물이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일까? 아니면 이미 소마이 신지의 다른 영화들과 그의 연출 스타일을 경험해 보았다는 차이 때문일까?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시네필 꼰대처럼 우쭐대는 것은 아닐까? 상영관에 함께 있던 이들과 나는 동등한 입장에서 영화를 본 것이 맞는 걸까? 너무 늦게 도착한 영화를 보며 든 생각이다. 영화 감상은 반드시 시차의 문제를 동반한다. 스크린 속 세계가 내게 익숙한지 생소한지에 따라 감상은 달라지기 마련이다. <태풍클럽>은 개봉하기까지 30년에 가까운 시간을 통과하며 몇몇 평자들에 의해 걸작으로 이야기되어 왔던 작품이었고, 이미 대다수의 시네필들이 시네마테크와 어둠의 경로를 통해 그 감각을 수용한 상태에서 너무 늦게 도착했다. 물론 이 영화를 다시 보고 생각을 바꿀 수도 있고, 처음 본다 해도 기존의 맥락을 신경 쓰지 않고 감상할 수 있으니 이 모든 것은 쓸 데 없는 우려일지 모르겠지만, 어쩐지 하나의 유물을 목격하는 듯한 인상을 받는 것도 사실이다. 2024 월별 독립예술영화 박스오피스 20위까지의 목록 중 재개봉 영화 목록 (출처: KOBIS / 회색 음영: 한국 최초 개봉 연도, 주황 음영: 당월 순위) 그 인상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올해 개봉한 수많은 재개봉작들 때문이다. KOBIS를 참고해 보면 올해는 그 어느 때보다 재개봉작들이 많이 출현했던 해다. 심지어 몇몇은 동시대에 만들어지고 개봉하는 영화와 경쟁해 당당히 1위의 자리를 차지하기도 했다. 나는 영화 산업에 종사하고 있지 않고, 어쨌거나 이 통계는 한국의 사례이기에 동일한 현상이 전지구적으로 일어나는지에 대해서까지 고려하며 이 흥행에 대한 인과론적 분석을 할 수는 없다. 그저 코로나바이러스 이후 영화 산업이 큰 타격을 입었고, 특히 독립예술영화를 배급하는 입장에서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을 테니, 새로운 영화를 가져오는 것보다는 이미 지나간 영화를 고르는 쪽이 경제적으로 나은 선택지였을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보다 관심이 가는 것은 그 선택들이 일으키는 변화다. 영화 홍보에 있어 언제부터 ‘개봉’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는지는 모르겠다. 모르긴 몰라도 “봉하여 두었던 것을 떼거나 엶”이라는 사전적 의미에서 그 선택의 이유를 추정해 볼 수 있겠다. 요컨대 영화가 개봉한다는 건 무언가 기대할 만한 것이 빵 하고 튀어나오는 그런 종류의 사건이었던 것이다. ‘개봉박두’ 나 ‘대개봉’ 같은 한때의 표현들이 떠오르기도 하는데, 이제 우리네 관객이 마주하는 표현은 ‘개봉’ 대신 ‘공개’라는 심심한 표현이다. 코로나바이러스의 지원 사격으로 부상한 OTT와 유튜브를 통과하며 우리는 이미지에 너무나도 익숙해졌고, 더 이상 이미지가 이전과 같은 환상성이나 신비로움을 확보할 수 없다는 것을 지독할 정도로 체감하다 못해 익숙해졌다. 내 손안의 영화관인 스마트폰 디스플레이 속 릴스와 쇼츠로 맥락이 탈구된 수많은 밈(meme) 이미지들을 나의 취향에 맞는 알고리즘의 설계 아래 부지런히 스크롤링하며 갱신하는 것이 일상화된 우리의 감상 환경에서, 미지의 세계를 마주하는 구속적 방식의 영화 감상은 그 자체로 만족을 주지 못하는 20세기의 시대착오적 산물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올해는 그것을 직접 몸으로 체감했던 해였다. 올해 나는 “무슨 무슨 영화가 재개봉한대” 라는 말을 정말 많이 들었는데, 그때마다 이렇게 중얼거리고는 했다. “아니, 그게 나온 지 얼마나 됐다고 재개봉이냐?” 가령 표의 4월부터 5월을 보면 < 남은 인생 10년 >(후지이 미치히토, 2022)이 1위를 차지했는데, 이 영화는 고작 1년 전에 개봉한 영화다. 차라리 재개봉 대신 재상영 내지 스크리닝이라는 심심하고 객관적인 표현이 어울리지 않을까? 아니면 재개봉이라고 부를 정도로 세상이 돌아가는 속도는 너무 빨라서 그 사이 옛날 영화가 되어버린 것일까? 이 ‘재개봉’에 대해 느끼는 어색함은 그 자체로 동시대 영화가 놓인 위치를 설명해 주는 것만 같다. 사실 나는 10년이 넘기는 했지만 < 비긴 어게인 >(존 카니, 2013) 같은 경우에도 ‘옛날 영화’라고 감각하지 않는 쪽인데, 이 영화도 ‘재개봉’을 해서 9월 독립예술영화 박스오피스에서 1위를 기록했다. 심지어 20년이 넘었는데도 1등을 한다. 10월의 1등, 닉 카사베츠의 < 노트북 >(2004)이다. 이렇게 ‘재개봉’으로 소환되는 (너무 이른) 과거는 추억으로 기능한다. 그리고 다가오는 2025년에는 얼마 전 유명을 달리한 나카야마 미호의 출연작, 이와이 슌지의 < 러브 레터 >(1995)가 작품 탄생 30주년 기념으로 재개봉을 예정 중이라고 한다. 심지어 세로 자막 버전이라고 한다. 아! 그때 그 시절 …… 농담이다. 나는 극장에서 세로 자막으로 영화 본 기억이 없다. 좌우지간, 그런 점에서 올해의 극장은 추억의 공간이다. 다른 한편, 올해는 과거의 수많은 걸작들이 극장에 소환된 해다. 이들은 박스오피스권에는 들어오지 못하지만 시네필들에게는 축복과도 같은 사례다. 앞서 말한 소마이 신지의 <태풍클럽>, 오시마 나기사의 < 전장의 크리스마스 >(1983), 이마무라 쇼헤이의 < 복수는 나의 것 >(1979), < 우나기 >(1997), 다시 한 번 ‘재개봉’한 구로사와 기요시의 < 큐어 >(1997), 무엇보다 90년대 한국에 뒤늦게 개봉하여 10만 관객을 동원하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 희생 >(1986) 4K 리마스터 재개봉까지 …… 물론 이들의 방문은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이들이 ‘걸작’으로 소환되고 있는 것은 한편으로 영화가 더 이상 동시대를 살아가는 ‘나’의 문제와 결부되는 어떤 것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역사적 덩어리 내지 가치 있는 유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이들에 익숙한 시네필들은 기꺼이 극장에 갈 것이고, 그렇지 않은 관객들이라도 걸작이라는 은근한 압박에 둘러싸여 작품을 만나야 하는 것이다. (상) <전장의 크리스마스>, <복수는 나의 것> / (하) <큐어>, <희생> 그런 감각을 더 강하게 느끼는 이유가 있다면, 이 영화들이 시네마테크의 기획과 같은 대안적인 방식으로 상영되지 않고, 정식 개봉 절차를 거치는 방식으로 CGV와 메가박스, 롯데시네마에서 상영되었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몇 년 전만 해도, 최신 개봉작은 멀티플렉스에서 보고 독립영화와 과거의 영화들은 시네마테크에서 보는 이분법적 감상 환경이 일반적이었다. 나 역시 2016년에 처음으로 서울아트시네마에서 고바야시 마사키의 < 할복 >(1962)을 보고, 노인이 된 나카다이 다츠야와 이준익 감독의 대담 상영을 경험하며 그 시간의 아득함을 체감한 바가 있다. (적고 보니 거의 10년이나 지난 일이다. 미안하다.) 그러나 코로나 이후 예술영화 시장에는 큐레이팅이 보다 적극적으로 도입되었고 ‘홍길동 특별전,’ ‘임꺽정 배우전,’ ‘장길산 기획전’ 같은 문구는 굳이 대안적 상영 공간을 찾지 않더라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브랜딩 상품이 되었다. 알리체 로르바케르와 JR의 단편 < 알레고리 >(2024)와 레오 까락스의 단편 < 잇츠 낫 미 >(2024)가 동시대 영화 이미지의 존재론적 탐구라는 주제의식과 레오 까락스라는 공유점으로 매끄럽게 묶여 개봉하는 상황은 시네필을 위한 친절한 배려이자 선물이지만, 아무래도 이런 호의에 적응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잇츠 낫 미> 중 그러니 이와 같은 유물의 소환을 다른 말로 ‘교양’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올해 많은 이들이 관심을 보였던 또 하나의 사례가 떠오르는데, 다름 아닌 < 괴물 >(고레에다 히로카즈, 2023), < 추락의 해부 >(쥐스틴 트리에, 2023), < 존 오브 인터레스트 >(조나단 글레이저, 2023)와 같은 작품의 예상치 못한(?) 흥행이 그것이다. 솔직히 이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에는 자신이 없지만, 일개 관객으로서의 경험을 떠올려볼 수는 있겠다. 개인적으로 이 세 작품의 흥행은 작품들이 그 자체로 특별한 자질을 품고 있다는 항구적인 특징 때문이 아니라, 어떤 시대적인 요구에 의한 결과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저 세 편의 영화를 보고 사회적이든 미학적이든 정치적이든, 영화를 통해 상당히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고 접했지만, 그 수많은 말들 속에는 왜인지 ‘나’의 시선이나 감상보다는 대체로 객관과 분석의 언어로 가득했다. 차이밍량은 “상업영화는 세상의 내일을 걱정하는 영화이고, 예술영화는 나의 내일을 걱정하는 영화”라고 했는데, 이상하게 이 ‘예술영화’들을 보고 나는 세상의 내일을 걱정했던 것 같다. <괴물>, <추락의 해부> 중 이제 영화관은 문자 그대로 영화를 상영하는 공간이라는 무맥락적인 성격이 아니라, 지나간 걸작을 만날 수 있는 시네마테크, 혹은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시네마천국이 되어버린 것일까? 그 속에서 오래된 영화들은 박물관의 유물처럼 ‘나’와 무관한 역사로 간주되거나, 반대로 ‘나’의 그때 그 시절 향수에 젖어드는 정서적 힐링 콘텐츠가 되어버린 것일까? ‘재개봉’이라는 말로 너무 이르게, 혹은 ‘걸작’이라는 이름으로 너무 늦게 찾아온 과거의 영화들을 보면서 든 생각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사례를 더 이야기해 보고 싶다. 비단 올해만 그렇지는 않지만, 영화관에는 전통적 의미의 영화 대신 다른 영상물이 걸린 경우가 많았다. 구체적으로 제목을 짚지 않더라도, 가령 다큐멘터리로 분류되는 아이돌 콘서트 실황 영상이나 스포츠 중계 등은 코로나 이후 극장 수입에 있어 효자 상품이었다. 그런데 누가 보러 가는가? 당연히 해당 작품이 다루는 대상의 팬들이 보러 간다. 그러니 팬들이 아니면 보지 않는다. 나를 비롯한 주변의 지인들 중에서 같은 종류의 영화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팬덤 문화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이 타겟팅 기획물 중 올해 가장 성과가 좋았던 작품은 김덕영 의 < 건국전쟁 >(2023)이다. KOBIS에 따르면 <건국전쟁>은 117만 관객을 동원하며 2024년 한국에서 상영된 독립예술영화 분류 작품 중 관객 수 1위를 기록했다. 이승만이라는 아이돌과 태극기 부대를 중심으로 한 팬덤 문화가 만들어낸 기념비적 성과라고 불러야 하겠다. 불현듯 “태극기 부대 속에 들어가서 <건국전쟁> 보기”라는 기획으로 유튜브 콘텐츠를 만들어도 좋았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바로 그런 생각을 하게 할 정도로 이러한 종류의 작품들은 볼 사람과 보지 않을 사람이 명확히 정해져 있는 상품이다. 말하자면 죽음의 이지선다! 바이로이트 극장의 내부를 그린 삽화,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 19세기에 활동한 독일의 음악가 리하르트 바그너는 기존의 오페라를 상연하던 극장을 완전히 탈바꿈하며 바이로이트라는 이름의 극장을 설계했다고 한다. 그는 호화로운 장식이나 발코니석 같은 부수적 기물을 전부 떼어버리고, 바닥을 깊게 파서 오케스트라를 안쪽으로 은폐하여 관객들이 오로지 작품에만 몰입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했다. 그곳에서 관객은 하나가 되는 것이다. 바그너의 이 미학적 파시즘의 설계는 이후 영화관의 메인 모델로 채택되었고, 그를 총애했던 히틀러의 정치적 파시즘과 짝꿍을 이루며 < 의지의 승리 >(레니 리펜슈탈, 1934)와 같은 걸작으로 당시 독일 인민들의 정신을 통합해냈다. 우리는 여전히 그 자장 속에서, 쉽게 ‘우리’라는 말을 꺼내고 싶게 하는 환경 속에서 영화를 보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스마트폰과 소셜 미디어, OTT 플랫폼에 둘러싸인 우리는 각자가 각자의 작품을 보는 식이었던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식 관람 환경 안에 살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곳에서는 옆 사람이 무얼 보든 신경 쓰지 않아도 좋다. 2024년을 돌아보면서 불현듯 영화관 모델의 역사를 떠올린 것이 우연은 아닐 것이다. 영화의 죽음, 극장의 죽음, 무엇보다 우리와 각자의 문제. 혼란스러운 연말 시국 속에서 그 말들이 피부로 느껴지고 있다. 그렇다. 이것은 결산이 아니라 진행이다. 이광호(영화평론가) l 1996년생, 다양한 방식으로 영화 주변을 오가고 싶다. 2018년 부산영화평론가협회 비평공모 당선. 반연간지 《크리틱b》, 월간 서비스 '비평의 편지' 필진.
< 오월의 눈 >(Snow in Midsummer)은 말레이시아 총 킷 옹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로, 지난 2017년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앵글 섹션을 통해 처음 소개되었던 단편이자 말레이시아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인 5.13 사건을 다뤘던 <장중한 무덤>(Cemetery of Courtesy)을 장편 프로젝트로 확장하면서 완성한 작품이다. 올해는 해외 주요 영화제에서 주목할만한 성과를 성취한 아시아 영화들이 많았던 해로 평가할 수 있는데, 특히 칸영화제 비평가주간에서 수상한 말레이시아 출신의 아만다 넬 유 감독의 < 호랑이 소녀 >(Tiger Stripes)와 더불어 말레이시아 신인감독의 활약이 도드라졌다. <오월의 눈>은 올해 베니스영화제 비평가주간에서 처음 공개되었고, 중화권 지역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대만금마장 영화제 두 편의 개막작 중 한 편으로 선정되었으며, 총 9개 부문 후보지명을 받으며 작품성을 인정 받았다. <오월의 눈>은 말레이시아와 대만, 그리고 싱가포르가 공동제작으로 협업해 완성한 영화다. 말레이시아 출신이 대만으로 이주해 창작을 이어가는 것은 그리 새로운 일이 아니다. 차이밍량 감독과 호 위 딩 감독이 대표적이지만, 그 이후로도 상당수의 말레이시아 젊은 창작자나 감독지망생들이 대만으로 이주해 활동을 하고 있는데, 이러한 흐름에는 여러 배경이 있겠으나, 아무래도 동남아시아 전역으로 이주. 정착하면서도 여전히 중국식 문화와 언어, 생활을 유지해온 화교 문화권이라는 공통기반이 있어서 가능한 지점일 것이다. 특히 말레이시아 출신으로 대만으로 이주해 극영화와 다큐멘터리 작업을 이어가는 라우 켁 후앗 감독은 1950년대 말레이시아 공산당 운동의 역사를 다룬 <무단 외출>(Absent without Leave)과 <오월의 눈>의 주요 소재인 말레이시아 5.13 사건을 다룬 <도끼는 잊어도 나무는 기억한다>(The Tree Remembers), 그리고 대만인과 대륙에서 건너온 외성인이 충돌하자 대륙에서 건너온 국민당 정부가 유혈진압을 자행해 3만명 가량의 희생자가 발생했던 대만 2. 28 사건을 다룬 <야생 토마토의 맛>(Taste of Wild Tomato) 등을 통해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근현대사를 가로지르며 잊혀진 역사를 재구성하고 영화적으로 복기하는 과정을 수행하고 있다. 말레이시아와 대만, 그리고 싱가포르가 공동제작한 <오월의 눈>은 최근 몇년간 도드라진 성과를 보여주고 있는 동남아시아국가들의 공동협업이라는 뚜렷한 흐름을 보여주는 케이스이기도 하다. 올해 칸영화제 황금카메라상을 수상한 베트남 출신의 팜 티엔 안 감독의 < 노란 누에고치 껍데기 속 >(Inside the Yellow Cocoon Shell)은 베트남, 싱가포르, 프랑스, 스페인 등이 공동제작에 이름을 올렸는데, 감독의 전작이자 단편인 < 정신차려 >(Stay Awake, Be Ready)가 2019년 칸영화제 감독주간 단편경쟁에서 주목 받으면서, 싱가포르 젊은 프로듀서와 의기투합해 장편 프로젝트로 개발했고, 이후 유럽에서 주요 펀딩을 받으며 완성에 이르는 과정을 밟았다. 비슷한 예시로, 올해 칸영화제 비평가주간 대상을 수상하며 주목 받았지만 자국인 말레이시아에서 개봉 당시 일부 장면이 삭제되며 검열논란을 일으켰던 아만다 넬 유 감독의 <호랑이 소녀>는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독일 등 무려 8개 국가가 공동제작에 이름을 올렸다. 작년부터 올해까지 여러 프로젝트 마켓을 통해 주목을 모았던 장편 프로젝트들이 대체로 동남아시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젊은 프로듀서를 중심으로 공동제작의 형태로 개발.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향후 몇 년간 이러한 경향이 더욱 도드라질 것으로 예상되는데, 특히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는 여러 공동제작 프로젝트에 대만 영화기관과 펀딩이 주요 파트너로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파트너십과 돌파구가 필요한 한국독립예술영화계에도 적잖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오월의 눈>은 1969년 5월 13일 말레이계와 중국계 이주민(주로 중국남부에서 이동해온 호키엔족)이 충돌해 유혈폭동으로 이어진 5. 13.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 그리고 중국계 이주민들로 연결되는 복잡다단한 말레이 반도의 역사를 단박에 정리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압도적으로 화교의 숫자가 많았던 싱가포르를 억지로 독립시켰고, 그럼에도 말레이시아에 남아 있던 중국인과 인도계에 대한 차별과 분리가 이어지던 1960년대의 말레이시아는 민족주의의 발흥과 인종 차별, 그리고 불평등한 사회구조로 인해 상당히 혼란스러운 상황이었고, 폭발 직전의 인종 갈등을 촉발시킨 계기는 1969년 말레이시아 세번째 총선거 이후 3일째가 되던 5월 13일, 선거에서 승리를 거둔 중국인들이 승리를 자축하며 거리에 나서면서 이에 자극 받은 말레이계와 충돌하면서부터다. <오월의 눈>의 제목은 오랫동안 중국인의 사랑을 받아온 대표적인 고전 희곡인 관한경의 『두아원(竇娥寃)』에서 왔다. 『두아원』은 하늘에 사무치는 두아의 원한, 이라는 뜻으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목이 베어지는 참형을 당한 두아(영어로는 Dou E)가 처형 직전, 내가 죄가 없다면 초여름에 눈이 내리고 가뭄이 들 거라고 외치고 처형을 당했는데, 실제 그녀의 예언대로 서리가 내리고 가뭄이 들자, 조정에서 재조사에 나서 그녀를 음해한 사람들을 처형한다는 스토리를 지닌 일종의 잡극. 중국에서는 초등학교 과정에서도 소개되며 모든 연령대가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이자, 13세기 중국을 배경으로, 당시 지배계층의 착취와 혼란스런 정치로 인해 고통 받던 민중들의 현실과 비참한 현실을 고발하는 정치극이었으며, 불평등하고 정의롭지 못한 경우를 당하는 민중에 대한 메타포로 종종 언급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영어제목으로는 『The Injustice to You E』 또는 『Snow in June』로 번역되었는데, <유월의 눈>을 차용해 <오월의 눈>으로 제목을 지은 것은 감독의 명확한 의도가 읽혀지는 지점이다. <오월의 눈>은 크게 두 챕터로 나눠진다. 첫 번째 챕터는 1969년 5월 13일, 당시 중국인 집단 거주지역에서 중국오페라 거리극 <유월의 눈> 공연을 준비하는 극단 사람들과 두 아이를 가진 중국인 부부의 하루를 따라가며 그날, 중국인 거주지역의 현장으로 관객을 데리고 간다. 두 번째 챕터는 2018년 5월 13일, 말레이시아 14번째 총선거 이후 4일째가 되는 날 시작하는데, 이 총선거를 통해 말레이시아에서는 61년 만에 최초로 여야 간 수평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진다. 1969년 5월 13일 당시, 살아남은 아 엥은 신문기사를 통해 5.13 사건 희생자들의 집단매장지로 추정되는 공동묘지터가 재개발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50년만에 아빠와 동생이 묻혀있을 수도 있는 매장지를 찾는다. 영화는 크게 두 챕터로 나눠지지만, 두 개의 챕터를 연결하는 역할은 거리극 <유월의 눈>의 주인공인 “두이 Dou E”가 맡는다. 중국인 거주지역에서 거리극을 무대에 올리는 극단의 주연배우인 두이는 첫 번째 챕터에서는 마제스틱 극장 지붕에서 유혈현장을 바라보며 위무의 노래를 부르고, 두 번째 챕터에서는 집단매장지에서 죽은 자들과 무명묘를 위해 위무의 노래를 부른다. 첫번째 챕터는 역사서에 기록된 문장에서 시작한다. “말레이 연대기 The Malay Annals”에는 “왕의 한센병은 감히 말라카 술탄에게 탄원서를 보낸데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치료를 위해선 술탄의 발을 씻은 물을 마셔야한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이 기록은 말레이인과 중국인의 관계를 보여주는 주요한 텍스트로, 그리고 텍스트를 시각화하는 주요한 영화적 상상으로 재연된다. 중국인이라는 이유로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는 딸을 데리러 온 엄마는 버스를 타고 아빠 아쿠와 아들이 있는 신사로 향한다. 말을 잘 듣지 않는 아들을 위해 Datuk Gong (말레이와 중국의 신이 혼재된 형태의 신)에게 바치는 의식을 행하는 부부. 아빠는 인근 마제스틱 극장 티켓 2장을 구했다며 아들과 극장으로 향하고, 엄마는 딸과 함께 거리극 <유월의 눈>을 관람한다. 당시 마제스틱 극장에는 대만영화 <부심적인 負心的人>(The Jilted)이 상영중이었는데, 상영 전 광고로 보여지는 차기 개봉작은 말레이시아 영화 <송곳니를 가진 왕>(Raja Bersiong, The King with Fangs)인데, 오랫동안 대중의 사랑을 받아온 민담을 영화화한 것으로, 우연하게 음식에 들어간 피맛을 본 왕이 그 맛에 취해 더 많은 피를 원하게 되면서 민중들을 학살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방화와 살인이 시작되고, 엄마와 딸은 극단원을 따라 무대 뒤 공간으로 숨어들지만, 외부에 소리가 들리지 않아 대피하지 못한 극장 안 사람들은 모두 살육당하고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끌려간다. 영화의 두번째 챕터. 2018년 5월 13일. 당시 엄마와 함께 살아남은 아엥은 중년의 나이가 되었고, 남편의 구박에도 무기력하고 지쳐보인다. 오랫동안 아빠와 동생의 시신을 찾아 다녔지만, 그동안 엄마는 죽었고, 아무 기록도 흔적도 찾지 못한 채 아 엥은 무력한 일상을 살고 있다. 그러다 우연히 당시 5. 13 사건의 희생자들이 묻혀 있는 집단 매장지가 재개발된다는 기사를 보고, 음식을 준비하고 쿠알라룸푸르로 향한다. 당시 중국인 집단거주지역이었던 푸두 Pudu는 이제 고층빌딩이 들어선 도심으로 변했지만 마제스틱 극장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서 있다. 어려서 다녔던 초등학교 옆 가게에서 차를 마시는 아엥은 옆 자리에 있던 일군의 사람들이 공연에 늦었다며 재촉하는 모습을 바라본다. 그들 뒤로 남아 있는 낡은 신사에는 버려진 두리안 껍질들과 쓰러진 작은 불상들이 있다. 택시를 타고 숭가이 불로에 있는 지역 집단 매장지로 향하는 아엥에게 택시기사는 이곳에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병원이 있던 곳이라고 설명하고, 도착한 아엥은 그곳에서 아까 가게에서 만났던 무리들이 무덤 주변에 공연을 위한 무대를 설치하려 하지만, 공무원으로 보이는 관리인이 말리자 포기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리고 어느새 나타난 두이가 죽은 자들을 위한 위무의 노래를 부른다. 시대를 구분하여 두 개로 나눠진 영화의 구조는 완전히 다른 양식과 형식미를 보여준다. 학살의 순간, 극장 공간 안과밖에서 운명의 순간을 맞이해야 했던 한 가족의 비극을 따라가는 카메라의 우아한 움직임과 다다미 쇼트를 연상시키는 낮은 앵글, 그리고 형식미를 강조한 미장센은 일본과 대만의 고전영화로부터 받은 영화적 유산을 여지 없이 보여주고 있으며, 특히 여러 지점에서 허샤오시엔 감독의 < 비정성시 >를 떠오르게 한다. 특히 거리극의 공연장면을 삽입하고 거리극과 현실 사건의 스토리를 교차하면서 엮어내는 방식과, 코끼리를 탄 말라카 술탄이 등장하는 장면은 기이하고 신비로운 마술적인 영화적 경험을 선사하는데, 이를 다루는 신인 답지 않은 영화적 야심과 완숙미가 돋보이는 장면들이다. 2018년에서 시작하는 두 번째 챕터는 동남아시아 예술영화의 전통과 특징들이 묻어나는데,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아엥의 무료한 일상과 지근거리에 있는 신사의 존재, 그리고 산 사람인지 영혼들인지 불문명한 사람들이 등장해 도시를 지나 집단매장지에 이르는 동안, 카메라는 유령을 쫓듯 계속 흔들리고 유동하듯 움직인다. 50년이 지나도 여전히 드러나지 않는 사건의 실체. 남은 기록이라곤 증언과 기억밖에 없는 그날의 진실을 매년 5월 13일이 되면 집단매장지를 찾아와 제사를 지내는 유가족과의 인터뷰를 통해 인물과 사건을 창조하고, 아름다운 음악과 빼어난 사운드로 그날의 현장을 영화적으로 복원해낸 감독의 뚝심과 용기에 찬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