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식사
- 감독
- 뤽 물레
- 제작년도
- 1978
- 출연
- 뤽 물레
연말 리스트 짜는 걸 좋아하지 않는데, 원래부터 줄 세우기를 좋아하지 않기도 하지만, 소위 ‘객관적인’ 리스트들을 짜다 보면 정작 그해에 진짜로 좋게 본 영화들이 누락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리스트에서는 그런 거 신경 쓰지 않고 그냥 넉넉하게 가기로 했다. 이들은 심지어 가장 재미있게 보거나 좋게 본 영화가 아닐 수도 있다. 그냥 내 기억 속에 달라붙은 영화들이고 또 이야기하고 싶은 영화들이다. 일단 < 그랜마 >는 릴리 톰린이 세상에서 가장 섹시하면서 뻔뻔스러운 할머니로 나오는 것만으로도 감동스럽다. <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는 노장의 힘을 보여주는 거의 완벽한 장르물이었다. < 무서운집 >은 심지어 한국에서 영화를 만드는 노장감독이 컬트 현상을 일으키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 팔로우 >는 오래전에 바닥이 드러난 것처럼 보였던 ‘십 대 아이들 괴롭히기’ 호러의 영역에 미개척지가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으며 < 월드 오브 투모로우 >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올해 최고의 SF다. 60년대의 폴란드와 대화를 나누는 < 이다 >의 교령의식은 오싹한 만큼이나 감동적이었다. 필리핀에서 만들어진 깜찍한 퀴어 소녀의 성장물인 < 아니타의 마지막 차차차 >는 여성영화제 바깥 관객들에게 다시 한 번 소개하고 싶은 영화였고 < 나이트 크롤러 >는 대한민국에서 뉴스와 미디어를 다루는 사람들은 악마에게 영혼을 팔기 전에 한 번은 의무시청해야 하는 작품이다. 그리고 < 더 듀크 오브 버건디 >에 대해 말할 거 같으면... 어떻게 크레디트에 “Perfume by Je Suis Gizella”라고 박는 영화를 외면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오늘 집중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영화는 < 28일 후 >의 작가 알렉스 갈란드의 감독 데뷔작인 < 엑스 마키나 >다. 최고의 SF는 < 월드 오브 투모로우 >가 차지했고 그 뒤는 <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가 뒤에 바짝 붙어 있으니 올해의 SF로는 3위 정도 된다. 하지만 그래도 훌륭한 영화이고 이야기할 거리도 많다. < 엑스 마키나 >에서 가장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은 그 전형성이다. <엑스 마키나>는 인간형 로봇 이야기다. 굉장히 흔해빠진 설정이고 역사도 깊다. SF만 따져도 오귀스트 빌리에 드 릴아당의 「미래의 이브」로 거슬러 갈 수 있고 아이디어만 따진다면 그리스 신화의 피그말리온도 있다. 태초부터 사람들은 인간을 닮은 무언가를 만드는 이야기에 매료되어 왔다. 따지고 보면 「창세기」를 포함한 모든 창조 신화들이 담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런 욕망일지도 모른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 엑스 마키나 >에 대한 기대는 그렇게 크지 않았다. 척 봐도 아름다운 여자 모습을 한 로봇 이야기이니 이성애자 남성 작가의 판타지가 노골적이다. 그리고 판타지나 SF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작가의 욕망 자체이다. 이야기의 제한이 없기 때문에 지나치게 욕망에 충실해 포르노로 빠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포르노의 외설성이 아니라 지루함이다. 하고 싶은 것만 하는 이야기는 지겹기 마련이다. 오히려 그 뒤에 나올 닐 블롬캠프의 < 채피 >에 대한 기대가 더 컸다. 예측이 잘못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 영화에는 알리시아 비칸데르의 모습을 한 여성 로봇 에이바에 대한 쾌락적인 추구가 무시할 수 없을 비중으로 존재한다. 이런 추구는 소노야 미즈노가 연기한 쿄코에겐 더욱 노골적이다. 그리고 이름이 에이바가 뭔가. 꼭 이런 여자 모양의 로봇에겐 이브에서 파생된 이름을 붙어야 하나? 하지만 갈란드는 자신의 욕망에 바탕을 둔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과학적 정직성을 잃지 않는다. 이 점이 큰 기대를 모았지만 확실하게 망해버렸던 로봇 영화 < 채피 >와 < 엑스 마키나 >를 갈라놓는 부분이다. 여기서 < 채피 > 이야기를 조금 하겠다. 이 영화는 < 엑스 마키나 >의 거의 정확한 대척점에 있어서 비교용으로 거의 이상적이다. 얼핏 보면 대량생산된 투박한 경찰 로봇인 채피가 지나칠 정도로 인간적인 외모를 하고 있는 에이바보다 더 사실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사실적인’ 외양 밑을 조금만 더 깊이 들여다보라. 과학, 논리, 철학 중 어느 것도 찾아볼 수 없다. < 채피 >에서 주인공 로봇은 그냥 로봇 시대의 피노키오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 원형적인 이야기에 채피를 맞추기 위해 그들은 뭐든지 하는데 그 과정 중엔 최소한의 고민도 개입되어 있지 않다. 예를 들어 이들은 채피에게 ‘영혼’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림을 그리게 한다. 그림은 예술이고 예술을 할 줄 아는 존재라면 영혼이 있다는 논리다. 하지만 정작 채피가 그린 그림은 아이패드 그림 앱으로 사진을 가공해 프린터로 찍은 것처럼 기계적이다. 구도에서부터 붓놀림에 이르기까지 해석이 전혀 개입되어 있지 않은 이미지를 보고 예술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건 중요한 질문이지만 < 채피 >는 안 한다. 영화 내내 그렇다. 하지만 < 엑스 마키나 >는 질문을 한다. SF 영화로서 <엑스 마키나>의 가장 큰 장점은 굳이 하지 않아도 관객들이 알아서 이해하고 넘어가 줄 부분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질문을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는 ‘영화화된 TED 강의’라고도 이죽거리기도 한다던데, 이게 그렇게 큰 단점인지는 모르겠다. 그 질문과 대답이 지적으로 자극적이고 정확하며 재미있다면 그게 문제가 되나? 내가 미리 설정해 놓은 기준점을 < 엑스 마키나 >가 넘은 순간은 에이바의 성을 건드렸을 때였다. 많은 SF가 당연시하고 넘어가지만 절대로 당연하지 않은 부분이 여기에 있다. 인간형 로봇은 여자 모습을 하고 있을 수도 있고 남자 모습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진짜로 인간 여자나 남자처럼 사고하고 행동한다는 근거가 있는가? 많은 작가들이 이 부분을 건너뛴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감정 이입하는 남자 주인공과 로봇이 섹스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로봇이 ‘여자’가 아니더라도 섹스는 할 수 있지만 그 즐거움은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 엑스 마키나 >는 그 질문을 한다. 하는 정도가 아니라 바로 그게 영화의 핵심이다. 에이바를 만든 천재 과학자 네이든은 자신이 에이바를 이성애자 여성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에이바가 진짜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그 자신도 모른다. 에이바의 내면은 강제로 분석할 수 없는 블랙박스이기 때문에 그에겐 일종의 튜링 테스트가 필요하다. 그래서 그는 자기 회사의 직원인 카일렙을 불러와 테스트를 시킨다. 카일렙은 에이바를 사랑하게 되고 그 로봇을 네이든으로부터 구출하기 위해 뭐든지 할 생각이다. 하지만 에이바는 어떤가? 에이바는 네이든에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가? 그 감정이란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가? 만약 에이바가 인간 여성의 육체를 갖고 있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행동할 것인가? 게으른 작가들은 ‘그냥 그렇게 프로그램했다’라고 얼버무릴 이 모든 질문들에 대해 <엑스 마키나>는 답을 갖고 있다. SF는 오래된 장르이다. 어느 기준을 적용하더라도 1세기가 넘었다. 과학이 매서운 속도로 발전한 20세기와 21세기를 통과하면서 1백 살의 나이를 먹었다는 것은 옛날엔 당연한 관습으로 받아들여지고 이해되었던 것이 더이상 당연하지 않다는 의미이다. 우린 레이 브래드베리가 그린 로맨틱한 고대의 화성을 사랑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동안 나사가 보낸 로봇들이 보내온 자료들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과거의 이야기는 전설로 남고 SF는 현대 과학의 논리에 맞추어 계속 전진을 해야 한다. 그 과학과 논리는 현재의 지식일 수도 있고 이전 것보다 발전된 가설일 수도 있으며 그냥 이전엔 그러려니 하고 넘겼던 잘못된 상식이나 관습의 수정일 수도 있다. 최근 들어 인공지능과 특이점을 다룬 수많은 영화들이 나왔다. < 엑스 마키나 >와 < 채피 >를 빼더라도 < 빅 히어로 >와 < 그녀 > 같은 작품들이 있는데, <채피>를 제외한 모든 영화들은 다가올 인공 지능에 대한 21세기 초의 상상력을 반영한다. 물론 이 상상력의 결과물이 정확한 예측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들 특이점 이야기를 하는데 과연 이게 오긴 할까? 정말 인공지능은 스스로의 자아를 갖게 될까? 상관없다. SF가 추구하는 것은 단 하나의 정답이 아니라 가능성의 영토 자체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 몸 안에 거하고, 몸으로 세계와 접한다. 나의 바깥은 내 몸이다. 몸으로 나는 타자를 만나고 만질 수 있다. 내 자아는 내 몸을 입고 있지만, 그 점유의 증거가 비로소 나다. 나는 곧 내 몸이며 나는 내 몸을 산다. 몸은 살과 뼈로 이루어진다. 성서의 창세기에서, 자신의 갈빗대를 취해 야훼가 창조한 인류 최초의 여성을 일컬어 아담은 “내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라고 했다. 생존의 토대를 이루는 것이 뼈라면, 관능과 쾌락은 살에서 기원할 터이다. 2010년 서울독립영화제와 인디포럼2011 등에서 상영된 이원우 의 < 살 중의 살 >은, “여성으로서” 감독이 겪은 “몸의 기억과 경험”을 표현하려는 작품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러한 의도로 제작된 영화에서 정작 그녀의 몸은 보이지 않는다. 관객이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여성 속옷의 일부분으로 짐작되는 레이스와 망사 조각의 연속, 뼈를 보여주는 엑스레이 사진, 필름 퍼포레이션 등속이며, 들을 수 있는 것은 (남성으로 짐작되는) 누군가가 카메라 곁에서 잠자며 내쉬는 숨소리와 코 고는 소리 뿐이다. 인화된 빛과 녹음된 소리로 흔적만 남은 여성의 몸과 남성의 존재. 이를 담은 필름은 마치 죽은 예수의 형상이 나타나는 베로니카의 베일처럼, 관객에게 그들의 부재하는 현전을 전한다. 흔히 서구 이미지 재현의 역사에서 사라진 몸은 누군가의 죽음, 혹은 누군가를 죽인 사건, 또는 그로 말미암은 자아를 향한 증오를 형상화한다. 아우슈비츠나 보스니아 내전 등 20세기를 관통한 대량 학살 이후, 서구를 삼켜버린 죄책감을 드러내는 이러한 경향은 더욱 뚜렷해졌다. 불행을 나타내는 의식을 통해 자신을 비하하기. 그러나 사라짐의 미학과 정치학이 언제나 염세적인 것만은 아니다. 때로 사라짐은 르네상스 시대 이후 넘쳐났던 형상의 넘침에 대한 새로운 답이다. 지나친 드러냄은 보이는 것 말고는 다른 것을 보여주지 못하고, 형상의 힘을 약화시킨다. 이를 깨닫고 홀딱 다 벗은 나체마저 넘치는 재현이라며 범속하게만 여기는 작금의 예술가들은, 인간의 몸을 사라지게 하여 비로소 자아와 타자를 향한 애증과 죄책감을 드러내고 트라우마와 유령들을 불러들여 푸닥거리한 뒤, 삶의 관능과 열광을 노래할 수 있었다. < 살 중의 살 > 속 몸이 실종된 속내도 비슷한 맥락으로 읽을 수 있겠다. 뼈와 옷 사이에서 당연히 현전해야 할 살아있는 여성의 몸을 복제된 재현 속에서 사라지게 하자 새로운 효과가 태어난다. 몸이 지닌 관능과 그에 대한 열광은, 지직거리고 끼익거리는 소리들, 플리커의 강도와 함께 점점 강렬해져간다. 몸을 감춤으로서 되려 몸을 드러내고 그 권능을 일깨우는 역설의 과정은 삶의 의지를 충만케 한다. 오랜만에 보는 35mm 핸드메이드 필름의 손맛도 썩 좋다.
조너선 캐럴의 『웃음의 나라』는 마셜 프랜스라는 동화작가의 전기를 쓰기로 결심한 남녀 한 쌍의 모험을 다룬 소설이다. 이들은 자신이 좋아하던 작가가 평생을 보냈던 마을에 도착하지만, 곧 그 마을의 무서운 비밀을 알게 된다. 꽤나 충격적인 반전과 장면이 포함된 이 소설을 읽고, 허구의 창작이야말로 신의 천지창조를 흉내낸 행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창세기에서 신은 자신의 형상을 본따고 생령을 불어넣어 인간을 만들었다고 했다. 모든 창작자들도 자신과 자신의 주변인들의 소소한 설정들을 자신의 이야기 속에 녹여낸다. 자신이 속해있는 사회, 환경, 그리고 자신의 사연을 이야기에 반영하면서, 점차 보이지 않는, 그러나 우리의 물리적 세계를 꼭 닮은 허구의 세계가 형태를 갖게 된다. 그러나 어떤 창작자든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캐릭터를 제 마음대로 쥐고 흔들며 끌고가지 못하게 된다. 대신 어느 순간부터 캐릭터들이 스스로 향하는 방향을, 스스로 행하는 선택들을 그저 뒤좇게 된다. 그러고 보면 바벨탑 이야기가 ‘언어’의 흩어짐으로 끝을 맺는 것도 매우 의미심장하다. 후대의 신학자들은 바벨탑 이야기를 ‘신의 권위에 도전한 인간들’에게 신이 내린 징벌로 해석한다. 그리고 테드 창 같은 작가는 오히려 “신을 경배하고자, 그래서 신을 닮고자 만든 것”이라는 전복적인 해석을 내놓는다. 물론 나는 테드 창의 해석이 좀더 마음에 든다. 나아가 바벨탑이 그저 높이만 높은 탑일 뿐 아니라, 실은 소설들을 보관하는 일종의 도서관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든다. 인간 복제나 새로운 생명체의 창조보다도, 허구의 창작야말로 신의 영역을 넘보는 모방 행위라면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 모두는 재능이 있든 없든, 사춘기 적 한번쯤은 소설 습작을 해보고, 고통과 무력의 시기에 한번쯤은 시나리오를 써볼 궁리를 해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김성호 감독의 영화 < 그녀에게 > 역시 허구를 창조하는 창작자의 세계를 다루는 이야기이다. 영화는 배우 미팅을 위해 부산에 내려가는 한 영화감독과, 실명(失明)을 앞두고 오래 전 버린 딸을 찾아가는 중년의 사진가를 교차하며 시작한다. 영화감독은 시나리오를 고쳐쓰다 부산의 거리에서 오토바이를 타는 묘령의 신비로운 여자와 만나 그녀와 동행하게 된다. 한편 전화번호가 적힌 낡은 사진 한 장만을 들고 딸을 찾는 중년 남자는 필사적으로 딸의 행방을 좇지만 좀처럼 그녀를 만날 수 없다. 두 개의 이야기는 서로 평행하게 달리며 서로 교차되다가 어느 순간 하나로 엮이기 시작한다. 영화감독이 오토바이 여자가 들려주는 사연을 자신의 시나리오에 반영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여자의 사연이 밝혀질수록, 초반에 제시됐던 영화감독의 사연이 하나씩 거짓으로 판명될수록, 영화 안에서 이야기와 현실, 실제와 허구가 뒤섞일 뿐 아니라 시간까지 뒤섞인다. 주인공인 영화감독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뒤섞인 채 한 영화 안에 여러 개의 이야기로서 공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여러 개의 이야기가 다시 거대한 하나의 이야기를 이룬다. < 그녀에게 >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은, 시나리오를 쓰던 영화감독이 오토바이 사고를 당한 여자를 안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결국 창작자가 자신이 창조한 이야기 세계 속으로 뛰어들어가 자신의 주인공을 붙잡는 장면으로 판명난다. 자신이 피조물에게 그런 고통과 상처를 주었고, 그 자신이 그녀가 사고를 당하도록 시나리오를 썼다. 그러나 그녀가 사고를 당하는 그 순간, 아니 그가 그 장면을 쓰던 그 순간, 그는 스스로 깜짝 놀라 키보드를 내던지고 이야기 속으로 달려나간다. 그리고 그녀를 품에 안는다. 이건 뒤집어 말하면, 결국 고통과 눈물의 세계를 창조한 창조주가 자신의 피조물의 상처를 안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인 되는 셈이다. 어쩌면, 인간을 연민한다는 신의 마음이 저런 것일까. 제가 만들고 제가 안겨준 고통이면서, 막상 그 고통에 힘겨워하는 인간을 보면서 연민과 고통을 경험하는 것일까, 신이란 존재는. 생각이 여기에까지 미치자, 신이 바벨탑을 무너뜨리고 언어를 흩뜨려놓긴 했으나 문학을 포함해 허구 자체를, 나아가 예술 자체를 파괴하지 않은 이유가 무얼까에 생각이 미친다. 신을 닮고 싶어하는 인간의 그 가련한 욕망에 결국 연민을 품어버린 것일까. 이 세계를 창조한 자신들의 영광을 기리는 것이니 그냥 관대하게 굴자고 마음먹어서인 걸까. 혹은, 인간이 허구와 예술을 즐기다가 어느 순간 신을 이해하는, 아니 이해하려는 노력의 순간을 맞기에 그냥 고이 내버려둔 것일까. 그런데 김성호 감독은 이 영화를, 애초에 시나리오가 없는 상태로 일단 찍어놓고 나중에 편집을 통해 이야기를 짜맞췄다고 한다. 어쩌면 신도 이 세상을 만들 때 실은 아무 계획없이 창조의 욕구 때문에 무작정 만들고 본 게 아니었을까 싶다. 완벽한 조물주가 만들었다고 하기엔, 빈 틈이 너무 많은 우리 세상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