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창조
- 감독
- 존 휴스턴
- 제작년도
- 1966
- 출연
- 존 휴스턴, 리차드 해리스, 조지 C. 스코트, 에바 가드너, 피터 오툴, 마이클 파크스, 울라 버그리드, 스테판 보이드
사진: “ Frankenstein ”, IMDb (촬영: Ken Woroner, Netflix / © 2025 Netflix, Inc.) “생물학, 북극의 얼음, 동물의 살점, 알프스의 풍광, 채식주의, 생과 사, 언데드. 당신은 메리 셸리의 소설이 이런 맛깔나는 주제들을 다루고 있기에, 이 작품에 대한 생태비평이 수백 편쯤 제출되었으리라 예상할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티모시 모턴은 2016년 “『프랑켄슈타인』과 생태비평”에서 이렇게 썼다. 그는 지난 20년간 발표된 약 2천 5백여 편에 달하는 관련 비평에서 생태학을 명시적으로 다루는 작업은 1%에 불과하고, 그나마도 주변적이라고 평가한다. 최근 ‘인류세’ 담론이 대중화되면서 이런 판도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지만, 이 위대한 고전에 대한 생태적 관심은 여전히 부족하다. 어쩌면 가장 흥미로운 생태비평은 지면이 아니라 스크린에서 구현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나는 기예르모 델 토로의 < 프랑켄슈타인 >(2025)을 떠올리고 있다. 2025년 겨울, 넷플릭스에서 공개한 최신작에서 델 토로는 셸리의 원작에 내재되어 있는 생태적 관점을 적극적으로 끌어내 자신의 방식으로 재해석했다. 여기서 생태적 관점이란 단순히 기후재난이나 생태위기 등의 문제를 다룬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건 문명과 자연, 인간과 비인간, 생명과 비(非)생명적인 것 사이에 그어져 있는 허구적 경계를 질문하고 폭로함으로써 문명적인 것의 폭력성을 성찰한다는 의미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생명을 잃고 한낮 물질로 ‘전락’한 시체의 생기 없는 신체 조각들로부터 ‘피조물’을 창조했다. 누더기처럼 짜깁기한 피조물의 몸은 생명과 비생명 사이에 경계가 흐려지는 순간을 체현하는데, 사실 그 자체가 생명에 대한 사실이다. 생명과 비생명 사이에 명확한 경계란 것은 없다. 예컨대 바이러스는 동물의 생을 가능하게 하기도 하고 파괴하기도 한다. 바이러스는 생명인가 비생명인가? 모턴 식으로 말하자면 어떤 의미에서 모든 생명체는 이미 “좀비”다. 사진: “ Frankenstein ”, IMDb (촬영: Ken Woroner, Netflix / © 2025 Netflix, Inc.) 빅터가 피조물에 대해 극도의 혐오감을 느끼는 것은 피조물이 생명과 죽음의 경계를 드러내는 임계점, 즉 ‘불쾌한 골짜기(uncanny valley)’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불쾌한 골짜기 역시 인간과 비인간, 정신과 물질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근대적 사유가 빚어낸 허상이다. 이런 이분법적 세계관이야말로 인간이 ‘자연’, 즉 ‘대상’으로 규정한 것들에 대한 무한한 착취를 가능하게 한다. 모턴은 불쾌한 골짜기가 확장되면 비로소 ‘유령적 평원(spectral plain)’이 열리고, 그곳에서 우리는 생태적으로 각성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물론 이 주제는 델 토로보다는 셸리가 더 잘 다루고 있다. 피조물에 대한 빅터의 혐오를 매우 세밀하게, 기이한 열정을 담아, 반복적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델 토로는 피조물을 지나치게 아름답게 재창조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그를 숭배하게 만든다. 피조물의 피부는 유약을 바른 것처럼 반짝이고, 봉합선은 괴물성이 드러나는 벌어진 틈새라기보다는 공들여 세공한 예술작품 같다. 그는 선하고 서글픈 눈매를 한 패셔니스타다. 델 토로의 피조물은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고귀한 타자로서 우리에게 불쾌함의 작은 조각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화려한 미장센에 접붙여진 피조물의 아름다움은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이지만, 생태비평의 관점에선 가장 큰 약점이 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여전히 생태비평의 관심을 견지하고 있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해석하자면 피조물은 단지 소외된 타자가 아니라, 인간이 인식과 통제의 대상으로 삼으려 했으나 끝내 실패한 어떤 생태적 실재에 대한 의인화로 읽히기도 한다. 이는 델 토로의 작품 목록 안에서 견지되어 온 파시즘 비판의 연장선상에서 논해질 수 있다. <셰이프 오브 워터>, <기예르모 델토로의 피노키오> 중 사진: “ The Shape of Water ”, “ Guillermo del Toro’s Pinocchio ”, IMDb (© 2017 Twentieth Century Fox Film Corporation / © 2022 Netflix, Inc.) 델 토로는 < 악마의 등뼈 >(2001)와 < 판의 미로 >(2006) 등의 인상적인 초기작에서부터 전쟁이 세계를 어떻게 파괴하는지, 특히 아이들의 생을 어떻게 박탈하는지 강변해 왔다. < 셰이프 오브 워터 >(2017)와 < 기예르모 델토로의 피노키오 >(2022)에서는 이 문제의식이 생태적인 것으로까지 확장된다. ‘물고기 인간’은 다른 어떤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말살당하고 있는 아마존의 생태적 타자성에 대한 은유로서 등장했고, ‘피노키오’는 숲의 정령의 생기를 나눠 받은 ‘기물(器物)’로서 인간의 얇고 가벼운 시간을 넘어 심원한 시간을 살아가는 존재였다. 이제 <프랑켄슈타인>에 이르면, 세계에 대한 이해를 세계에 대한 지식으로, 세계에 대한 지식을 세계에 대한 정복으로 이해했던 북반구 근대주의자들의 탐욕과 광기가 어떻게 전쟁 및 자연에 대한 식민화와 분리 불가능하게 연루되어 있는지 노골적으로 비판한다. 이 관심사는 엘리자베스 캐릭터를 통해서 다루어진다. 그는 강인하고 우아한 사마귀처럼 스크린을 활보하면서, 원작과 이 작품이 가장 극적으로 달라지는 부분을 담당한다. 셸리는 엘리자베스를 빅터의 고귀한 사촌이자 지고지순한 연인으로 묘사했다. 델 토로는 엘리자베스에게서 순정을 지우고 일종의 매개자(medium)로서의 자질을 더했다. 이성과 과학, 정복의 언어를 경유하지 않고서는 ‘자연’과 만날 수 없는 빅터와 달리 엘리자베스는 세상의 “가장 작은 것들, 자연의 흐름에 따르는 존재들”의 다채로운 모양과 빛깔에 감응하는 자다. 그가 곤충학에 조예가 깊은 이유다. 피조물은 근대적 지식의 격자 속에서 탄생했으나, 그 격자로는 충분히 포착될 수 없는 존재다. 인간의 스케일을 초과하는 생태성을 그 뿌리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는 근대적 이성과 비인간적 감응 사이에서 진동하는 자이기 때문에 피조물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그는 피조물의 동선을 따라 펼쳐지는 ‘유령적 평원’의 유일한 목격자다. <프랑켄슈타인> 중 엘리자베스 사진: “ Frankenstein ”, IMDb (촬영: Ken Woroner, Netflix / © 2025 Netflix, Inc.) 엘리자베스는 확신에 찬 반전평화주의자이기도 하다. 그는 생과 사를 정복하겠다는 꿈이 얼마나 탐욕스러운 것인지, 그것이 어떻게 세계를 파괴하는 전쟁과 연결되어 있는지 이해하고 있다. 빅터와의 첫 식사 자리에서 전쟁과 빅터의 야망을 비교하면서 “어리석은 자들이 이상을 품었을 때” 벌어지는 비극이며, “그 비극을 부추긴 자”들은 죽음 앞에서 “모르는 척한다”라고 분노하는 이유다. 델 토로의 피조물은 피노키오의 또 다른 판본이다. 인간(혹은 아버지)의 목적을 위해 조립되었지만, 그 총합은 인간의 의도로 환원되지 않는다. 다만 델 토로는 언제나 이 ‘기물’들에게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선한 마음을 부여한다. 델 토로의 아름다운 판타지 월드의 또 하나의 한계는 어쩌면 이런 선량한 마음일 지도 모른다. 자연이란 그렇게 인간에게 호의적이지 않다. 제임스 러브록의 경고처럼 ‘가이아’는 자신의 시스템을 망치는 존재를 오작동으로 인식하는 냉정한 피드백 루프임을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손희정(문화평론가) l 미디어 그룹 '프로젝트38' 멤버. 『손상된 행성에서 더 나은 파국을 상상하기』(2024) 집필.
2019년 대구사회복지영화제 중 상영 전 작품 소개 왜 대구에서 영화글을 쓰나요? 그 소박하면서도 긴 여정 2025년 가을, 대구·경북에서 지난 10여 년간 나온 100여 편의 영화를 소개하는 책을 한 권 출간했다. 그저 몇 년 동안 꾸준히 기록해 온 글 모음일 뿐인데, 이런 유형의 작업은 최초라는 소릴 여기저기에서 듣는 중이다. ‘지역’에서 영화 관련 글을 쓰고 활동한다는 소개를 하면, 대개 접하는 반응은 두 갈래로 나뉘게 마련이다. 1) ‘얼마나 수고(혹은 고생) 많으냐’, 2) ‘거기에서 어떻게 (제대로) 활동하느냐’다. 둘의 온도는 차이가 크지만, 배경은 거의 다르지 않다. ‘지역’에서 영화를 논하기 어렵다는 전제다. 영화 평론집을 내고 ‘작가’란 어색한 호칭을 종종 듣지만, 평론가를 지망한 적은 딱히 없었다. 영화와 무관한 일을 하며 받는 업무 스트레스를 풀고자 영화제에 종종 다니던 게 조금 유별난 점이란 정도? 그러다 조금씩 지역의 독립·예술영화 극장과 소규모 상영회에도 간간이 다니게 되기 시작했다. 그러다 불쑥 상영회를 열어보겠다는 꿈이 생겼다. 그렇게 모든 재앙(?)이 출발한다. 상영회를 열며 소소한 영욕을 쌓아간다. 관련 활동을 이어가니 주변에서 알아차리게 된다. 영화를 매개로 한 교육이나 사업 기획이 생업에 침투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공사 구분이 허물어지자 화근은 종잡을 수 없이 커진다. 마침내 영화제를 열어보자는 제안이 나오고, 실무를 떠맡게 된다. 그렇게 2010년, 대구사회복지영화제가 시작된다. 영화제 자원활동가도 한 번 하지 않고 졸지에 영화제를 책임지게 된 셈이다. 이후 10년간 좌충우돌 행각이 이어졌다. 저서 『경계의 영화: 대구영화라는 낯선 풍경』(2025, 대구경북영화영상사회적협동조합) 소 뒷걸음질 치다 쥐잡기? 어쩌면 필연을 가장한 우연 영화제 관객으로 다녔을 뿐, 실무는 관람과는 차원이 달랐다. 작품을 발굴하고, 상영작을 수급한 다음 행사를 차질 없이 진행하기 위해 온갖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관객의 다양한 수요를 예측하고 대응하는 건 물론, 정산과 평가까지 마쳐야 행사 하나가 끝난다. 온갖 사건 사고를 겪으며 경험과 교훈을 얻었다. 무엇보다 영화를 선별하는 안목이 얼기설기 형성되어갔다. 작지만 내실 있는 영화제를 꾸린다는 건, 실무적으로 경험이 축적되는 것과 함께, 무엇보다 자신만의 선구안이 형성되기에 가능한 일이다. 해당 영화제가 지향하는 가치, 공유하고 싶은 주제가 (영화제가 상정하는) 관객과 접점을 형성하기 위해선, 개별 ‘취향’과는 구별되는 ‘지향’이 필수다. 영화제를 통해 프로그래머의 가치와 덕목을 어렴풋이 깨우쳐 나갔다. (좌) 2019년 대구사회복지영화제 중 단편2 섹션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 (우) 2018년 전태일 노동영화제 중 < 사수 >(김설해, 정종민, 조영은, 2018)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 며칠에 불과한 영화제 동안 소개할 수 있는 프로그램은 뻔하다. 여건의 한계로 미처 소개하지 못한 작품이 잔뜩 쌓이게 마련이다. 추가 상영을 향한 갈증은 별도의 상영회로, 사전 제작 지원으로 자연스럽게 향한다. 물론 새로운 도전이니 풀어야 할 과제가 수북하다. 용케 고비를 넘기며 소박한 성과를 이룰 때마다 욕심은 더욱 커져만 갔다. 지역 영화제는 서울과 비교해 너무도 취약한 다양한 영화와, 이를 매개로 한 프로그램에 목마른 지역 관객에게 부족하게나마 극장의 대체재로 기능한다. 그 특성을 깨닫는 순간, 무형의 책임이 어깨에 내려앉는다. 우리 지역에 반드시 그 존재를 알리고 싶어 하는 작품은 무엇일까? 턱없이 부족한 자원과 기회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까? 우선순위를 정하는 기준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최적화 모델을 찾기 위한 계산과 순수한 열망이 끝없이 충돌하며 개인의 욕망과 지역 영화문화의 공공성이 외줄타기를 거듭했다. 맨땅에 헤딩하기로 얻는 찰나의 행복, 일상의 갈증 지속 가능한 영화제를 내실 있게 꾸리고, 여력 닿는 한 온갖 명목으로 공동체 상영회를 기획하고, 영화제 프로그래머란 직함으로 여기저기 영화를 소개하는 자리에 나가거나 글을 기고하게 된다. 자연스러운 순서다. 이름을 걸고 적합한 작품을 추천해 기대 효과를 충족해야 한다. 다양한 수요가 예상치 못하게 불쑥 제기되더라도 늘 열과 성을 다해 의뢰에 응대할 때만 후일을 기약할 수 있다. 어느새 업계 관계자(!)가 되어버린 상황에서, 그에 걸맞은 책무를 수행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할 일은 점점 늘었다. 물론 대부분은 누가 강요한 게 아니다. 그래도 하면 좋을 듯하거나 필요할 일이란 생각에 자발적으로 벌인 일이다. 그러니 잘 안 풀려도 하소연하거나 누굴 원망할 수 없다. 그러나 못내 서운한 마음은 어쩔 수 없다. 그렇게 찰나의 보람과 일상의 고민이 쌓여만 갔다. 그러다 2020년 코로나19가 터졌다. 영화제나 상영회를 지속하기가 어려워졌다. 설상가상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 오랜 입원 기간 동안 아무것도 할 게 없었다. 외출도 면회도 통제된 가운데, 다행히 와이파이는 잘 터졌다. 노트북을 켜고 영화를 본다. 하지만 허전함은 여전했다. 영화를 소개하고 나누는 재미가 없었던 탓이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렇게 본격적으로 영화에 관한 글쓰기를 시작했다. 영화제 일을 하면서 조금씩 글을 쓰긴 했지만, 대개 작품 소개를 위한 한정된 분량과 용도에 그쳤다. 긴 글을 쓸 여력도 없고, 쓴다고 해도 게재할 지면이 지역엔 딱히 없었던 탓이다. 영화를 소개하는 건 글보다는 상영 기획으로, 혹은 종종 들어오는 방송 프로그램으로 수행해 왔다. 외부 조건의 극단적 변화로 그 경로가 변경되어야 할 상황이 닥치자, 자연스레 영화글 쓰기로 중심이 이동된 셈이다. 그러다 보니 그냥 쓰고 싶은 작품에 관한 글쓰기가 아닌, 보다 선택과 집중에 의한 작업을 구상하게 된다. 일단 다양한 영화를 소개해야 하는데, 마침 코로나19로 인해 얼어붙은 극장가엔 역설적으로 저예산-다양성-독립-예술영화 소개가 상대적으로 늘어나던 참이다. 재개봉 붐도 일었다. 다양한 영화가 어려움을 뚫고 극장에 걸리는데, 정작 이런 영화들의 정보를 접하긴 무척 어렵다. 자연히 (재)개봉 독립·예술영화 작품 소개 글을 기고하게 된다. 지역에서 영화 잡상인이 존재할 이유 다음으로 상영 활동을 수행하며 알게 된 지역 영화인과 그들의 작업을 알리고 싶었다. 역시 주기적으로 리뷰를 작성한다. 영화 애호가가 아닌 평범한 이들에게 일상과 영화가 연결되는 접점을 만들고자 예전부터 틈틈이 작성하던 교육 목적 기고도 꾸준히 잇는다. 어느새 해야 할 몫은 감당하기 힘들 만큼 불어났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정체성에 혼란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영화제 프로그래머로 인정받기 위해 십여 년 넘게 분투해 왔건만, 정작 본업은 지지부진한데 부업이 활발해진 격이라 그렇다. 그렇게 어쩌다 시작한 정기적 집필 작업은 크게 세 경로로 집중되어갔다. 가변적인 글쓰기 실험으로 인스타그램에 영화 단평을 별도로 올렸다. 단평은 정식 기고의 초벌 스케치 역할과 더불어, 지면 게시용으론 애매한 분량이나 비중의 작품도 공개적으로 소개하는 우회로로 상정했다. 그저 많이 보고 능력껏 쓰는 것에서 출발해, 일정한 방향과 목적의식을 갖고 작품을 소개하는 공적 경로를 좌표로 설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조건반사처럼 끊임없이 지금도 글을 작성하는 중이다. 그 과정이 반복되며 일종의 축적을 낳는다. 기존의 오프라인 상영을 통해 형성해 온 독립·예술영화계 네트워크를 다른 각도로 연속성을 유지할 수 있게 된 셈이다. 필자가 인스타그램에 게시한 리뷰 피드(< 밸브를 잠근다 >, < 입문반 >) 그런 실용성 말고 이런 글쓰기 활동이 지역 영화 (창작 및 관람) 환경에 어떤 순기능을 수행하고 있을까? 그저 자기만족에 불과한, 혹은 남들이 상대적으로 덜 다루는 희소성에 주목한 데 불과할까? 해당 질문은 지금도 수시로 머릿속을 맴돈다. 혹시 이 고민에 답을 얻기 위해 지역 영화 관련 활동을 계속하는 건 아닐까 싶을 만큼. 그러나 조금씩 몇 년간 꾸준히 수행하던 지역 영화 글쓰기의 쓸모가 발견되기 시작했다. 지난 몇 년간 한국 독립영화에서 ‘지역 영화’는 꾸준히 호명과 소환을 거듭해 왔다. 주요 영화제에서 여러 이름으로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에 주로 포진한 영화학과 중심)에 대비되는 로컬 작품 위주 부문을 신설하고, 지역별 독립영화제에서도 해당 분야 비중이 대폭 늘어났다. 영상 제작 환경의 긍정적인 변화와 교육/지원기관의 증가로 지역에서 제작되는 영화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이 안에 무수한 다양성과 가능성이 내재해 있다. 하지만 여전히 유력 영화제에서 호명되고 수상하지 않는 한, 절대다수의 지역 영화는 소리 소문 없이 잊히기 일쑤다. 물론 이는 수도권 지역에도 적용되지만, 바늘귀의 크기엔 분명한 차이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여기에서 파생되는 문제는 꼬리에 꼬리를 문다. ‘지역 영화생태계’란 수식어가 종종 등장하지만, 정작 제대로 된 심도 있는 논의는 찾기 힘들다. 대개 개별 지역마다 (변화된 창작 환경에 따라 대폭 증가한) 창작자는 꼭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소수나마 복합상영관에 걸리는 상업영화에 만족하지 못하는 관객층, 그들에 의지하며 능력껏 다양한 작품과 기획을 선보이려는 상영 공간 및 집단이 존재한다. 지역 영화제/독립·예술영화관/(근래 확산되는) 상영회 개최그룹 등이다. 이들을 묶어 흔히 생태계로 호칭한다. 지역 영화 창작자와 독립·예술영화 관객이 별개가 아니라면 그 자체로 작은 영화 공동체가 될 수 있으리란 기대가 싹틀 법하다. 그러나 가야 할 길에는 난제가 숱하다. 우선 관객 입장에선 반드시 지역 영화를 관람할 이유랄 게 없다. 세상에 봐야 할 영화가 얼마나 많은데, 정보도 찾기 힘든 낯선 영화까지 챙겨야 한다는 말인가. 그러다 보니 지역에서 만든 영화가 평가받는 거의 유일한 기준은 (외부의 알려진) 영화제 진출과 수상 경력으로 제한된다. 자기 동네에서 만들어진 영화가 돌고 돌아 역수입이 되어야 비로소 인식 대상이 되는 것이다. 지역 영화의 매력이자 개성이라면, 다양한 고유의 소재와 배경, 지역 사회와 문화에 주목한 특유의 색깔일 텐데 정작 그나마 소개될 기회를 얻는 경로는 그 특색과 동떨어지기 쉬운 셈이다. 이런 오류를 보완하는 데 지역 사회 내에 공존하며, 영화생태계 일부로 소속감을 지닌 평론/평론가의 존재는 필수적인 윤활유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 2023년 반짝다큐페스티벌 중 섹션4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 작은 변화의 가능성과 함께 엄습하는 숙제들 지역에서 왕성히 활동하는 인터넷 대안언론 《뉴스민》에 제안해 ‘무비053’이란 이름의 칼럼을 열었다. 2주마다 꼬박꼬박 대구(경북) 지역 작가와 배경의 영화를 소개하는 코너다. 2022년 3월부터 기고를 개시한 해당 칼럼이 훗날 『경계의 영화: 대구영화라는 낯선 풍경』(2025)의 산파가 된 셈이다. 몇 년 전부터 틈틈이 비정기 기고는 진행했지만, 본격적인 지역 영화글을 집필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하지만 글쓴이에게 일어난 변화는 작지 않다. 지역에서 영화 관련 글을 쓴다는 건 단순히 글쓰기로만 끝나지 않는 일이다. 일단 영화를 찾아봐야만 한다. 대부분 지역에서 제작되는 작품이 단편이다 보니 오프라인 상영을 찾아다녀야 한다. 그나마 대구는 근래 비교적 활발하게 작품 창작이 일어나고 있기에 작품 숫자는 적지 않은 편이나, 지역별 편차에 따라 애초 작품 수급 자체가 힘든 경우도 적지 않을 것이다. 일상적인 상영 공간이 부재하니 한 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 볼 기약이 없다. 그런 상황이라면 창작자에게 별도 연락을 취해 과정을 밟아야만 한다. 그런 수소문을 통해 멀찍이 거리를 두던 지역의 영화인들과 대면하고 교섭(?)을 치르게 된다. 해당 과정을 반복하며 정보를 취합하고 평론 글을 게재하면 창작자의 반응을 기다리게 된다. 하지만 자신의 작업에 대한 피드백을 거의 경험할 기회가 적다 보니 글쓴이가 기대하던 교류를 얻기란 지극히 드물다. 그저 자신의 작업에 누군가 반응을 남겼다는 사실 자체로 기뻐하거나, 혹은 오탈자 지적이나 창작 의도에 부합하는 글을 암묵적으로 바란다는 확인이 대다수 반응을 이룬다. 이럴 땐 맥이 빠지지만, 결국엔 양측 모두 훈련과 적응이 필요한 사안이긴 하다. 『경계의 영화: 대구영화라는 낯선 풍경』 관련 대화형 행사 (좌) 2025년 부산다큐필름페스티벌 중 토크 포럼 / (우) 2025년 안동중앙아트시네마 내 북콘서트 안면을 트고 인사하게 되면 새롭고 근본적인 문제가 발생하는데, ‘팔이 안으로 굽지 않느냐는’ 의심이다. 이는 여전히 저울에 올라오는 쟁점이기도 하다. 작품에 대한 상세 정보 취득이 수월해지는 만큼, 그에 비례해 중심 잡기라는 난제가 동시에 닥친다. 지역 영화를 둘러싼 일종의 ‘온정주의’에 관한 입장은 극명하게 나뉜다. 누군가는 당연한 일이라며 여러 제약을 극복해 완성된 지역 작품을 ‘동료’적인 시각에서 다루는 게 틀린 게 아니라 말하지만, 누군가는 그러한 근접성이 공정한 비평과 동떨어진 것이라 비판한다. 정답은 늘 그 중간 어딘가에서 형성된다. 글을 쓸 때마다 성배를 찾는 불가능한 모험을 거듭해야 한다는 뜻이다. 글을 쓰는 행위는 송고했다고 바로 끝나지 않는다. 해당 작품이 웬만큼 외부에서 소개되지 않았다면, 대부분은 필자의 글이 유일한 ‘공식’ 평론으로 남는 경우가 태반이다. 즉, 해당 작품 관련 검색 가능한 ‘정전’이 되는 셈이다. 이는 아주 살짝 보람인 동시에 큰 부담으로 자리한다. 작품이 온당하게 평가받고 소개될 수 있도록, 일종의 A/S 과정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의미다. 작품이 추가로 상영 기회를 얻게 지원하는 임무도 부여된다. 영화의 의미와 가치, 효용을 글을 쓰면서 포착한 데 기반해 가능한 선에서 추천하고 제안하는 과정이 글을 쓰는 동시에 부가된다. 지역별 영화생태계에서 비평의 자리를 찾기 위해 일련의 과정이 반복되다 보면, 일부 작가의 작업을 일종의 ‘작가론’으로 작성하는 경로에 진입한다. 단편 위주로 작업하는 지역 창작자에겐 쉽게 접하기 힘든 기회인 도시에, 평론 관점에서도 창작자의 출발점부터 연속적으로 작업을 관찰하고 포착할 수 있는 드문 계기이기도 하다. 그런 계기를 통해 드물게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서는 창작자를 지켜보는 건 ‘발견’의 기쁨이 되곤 한다. 여기까지 언급하면 한국 독립영화의 ‘블루 오션’으로 간주할 만하지만, 실제로 지역 영화 글쓰기는 외롭고 험난한 길이다. 우선 공개 지면이 거의 부재하다. 물론 서울 등 수도권에서 활동하는 평론 영역에서도 지면 축소는 공통된 화두겠지만, 지역은 몇 곱절 더 심각하다. 일단 영화 평론을 전문적으로 실어주는 매체 자체가 드물다. 일간지나 공중파 방송 역시 전문 코너가 부재한 데다, 온라인 미디어 또한 전문 지면을 유지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글쓴이 역시 라디오 프로그램에 간헐적으로 출연하는 것 외엔 안정적인 미디어 지면을 확보하는 데 오랫동안 어려움을 겪었다. 사실상 자기가 글을 올릴 지면을 새로 만들어야만 가능한 셈이다. (좌) 2019년 대구MBC 프로그램 <문화극장 조조할인> 중 코너 ‘작은 영화관’ 녹화 현장 (우) 2023년 KBS2 라디오 프로그램 <음악과 음악 사이> 중 코너 ‘이 영화 어때요’ 생방송 현장 물론 없던 지면을 창조하다시피 하니, 중앙 미디어에 비교하면 노력과 봉사의 비중이 높을 수밖에 없다. 지면을 유지하는 것도 감사한 일인 경우가 허다한 탓이다. ‘박리다매’로 승부할 수밖에 없다. 그나마 고료를 받고 평론을 싣는다는 기준을 설득하는 자체부터 쉽지 않다. ‘무료’로는 원고를 싣지 않는다는 원칙을 꺼내며 욕먹을 각오를 해야 할 판이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글을 쓸 수도 없다. 하지만 제대로 쓰고 싶은 만큼 전문성을 추구하는 데에도 한계가 뚜렷하다. 해당 매체 독자층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보다 좀 더 핵심적인 화두가 있는데, 애초 지역을 기반으로 영화 평론을 수행하는 동업자 겸 경쟁자 집단이 부재한 데 기인하는 문제다. 원래 고민하던 목적의식, 지역 영화에 대한 다양한 비평을 통한 ‘기대 효과’가 온전히 구현될 수 없다는 구조적 한계는 대구·경북은 물론 거의 모든 ‘지역’에서 공통된 난제다. 동료를 만들고 싶어도 찾기란 쉽지 않다. 아무래도 협업이 당연한 영화 창작 과정이나 상영 활동과 달리, 기본적으로 개인 작업인 특성 때문이다. 아울러 관심사와 여타 조건이 맞아떨어지지 않으면 공동 작업은 더욱 고난도로 변한다. 앞서 서술한 것처럼, 일단 지역에서 전문화된 글쓰기를 상시 과제로 삼는 필자 찾기가 1차 관문, 지역 영화에 관심을 가진 이가 희소한 게 2차 관문, 조건 다 맞아도 일감이 없는 지역에서 해당 활동을 지속하기 어렵다는 게 3차 관문이다. 그야말로 ‘좁은 문’이다. 그룹을 구성해 ‘선의의 경쟁’을 일상에서 수행하지 않는다면 지역에 절실한 다양한 결의 비평 문화 조성은 암초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그러나 생태계 순환 과정에서 창작 집단에 자극을 주고 긴장을 유지하려면 넘어야 할 벽이기도 하다. (좌) 2022년 안동중앙아트시네마 내 영화비평 강좌 ‘영화 보기의 미학’ 프로그램 소개 (우) 2022년 인디플러스 포항 내 강의 ‘독립영화의 감상과 비평’ 지역 영화 예산 복원을 넘어서 지속 가능한 생태계 형성까지 2023년, 몇 년간 조금씩 조성해 왔던 영화진흥위원회의 지역 영화 창작 및 영화문화 관련 예산이 전액 삭감된 후, 현재까지 관련 예산은 복원되지 못한 상태다. 자연스럽게 지역 영화 관련 지원 및 정책 초점은 해당 사안으로 귀결되는 실정이다. 물론 (개별 지역이 아닌 전체) 총액 12억이란 별것 아니게 보이는 지원 예산을 참 알뜰하게 써가며 여러 항목에 골고루 종잣돈이 되온 게 증명되기에, 본 예산은 복구를 넘어 대폭 확대되더라도 전혀 낭비가 아니다. 문제는 몇 년째 이 문제로 지역 영화에 대한 모든 담론이 환원된다는 점이다. 일단 ‘지역 영화(창작과 문화)’ 정책 수립의 초점과 방향이 확립되어야 한다. 현재 정부의 영화정책은 여전히 20세기에 형성된 ‘수출산업’에 방점이 찍혀 있다. 한국 독립·예술영화는 그런 시각 아래 철저하게 상업영화의 ‘(산업)예비군’으로만 사고해 온 게 엄연한 사실이다. 그런 관점에서 언젠가부터 독립영화와 창작자마저 마치 국가대표팀 선발하듯 국내외 주요 영화제 진출과 수상 중심으로 서열화되는 실정이다. 그런 일방적 기준에 의한다면, 지역 영화는 2군도 아닌 3군 이하로 취급될 뿐이다. 당연히 관심을 호소해봐야 헛수고일 따름이다. 이런 난맥상을 돌파하려면 발상의 전환이 필수다. ‘산업’ 중심주의를 돌파하지 않으면 결국엔 지역 영화는 유령처럼 떠돌 뿐, 실체를 갖출 수 없다. 지역의 인재는 재능을 꽃피우기 위해 서울로 향하면 되고, 지역의 관객은 복합상영관 객석을 채우는 머릿수로만 족할 뿐인데 지역 영화에 유의미한 관심이 향할 리 없다. 기껏 기존 예산이 복구된다 해도 그저 시혜적인 상징에 불과할 테다. 지역 영화(창작과 문화)를 진흥하려면 우선 서울을 제외한 지역 공통 현황과 함께 차별화된 지역별 특징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는 단순히 영화문화 측면을 뛰어넘어 한국사회 고질병인 ‘서울 공화국’ 문제와 직결된다. 즉 지역 균형발전, 지방분권 쟁점과 같은 궤로 놓고 접근해야 할 사안이다. 그렇게 발상을 전환한다면, 독립·예술영화 접근 기회의 균등은 곧 비수도권 주민들의 문화복지 권리 일부가 된다. 물론 그저 최신 상업영화 대작 관람 기회를 넘어, 다양한 영화문화 접근권으로 향해야 유의미할 것이다. 지역 영화에 관한 글쓰기는 그저 개별 창작물에 관한 평론으로 그치지 않는다. 해당 작품이 꼭 영화제를 거쳐 인정받지 않더라도 지역 내에서 충분한 함의와 가치를 갖는다면 이를 포착해 소개하는 기능을 통해 지역 영화문화 형성의 일부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글을 쓰는 데 그치지 않고, 상영 활동 등 2차, 3차 소개 기회를 넓히는 파급력을 상정하며 글을 쓰게 된다는 의미이다. 얼핏 피곤하거나 과도한 확장으로 받아들여질 주장이다. 그러나 지역 영화를 평론한다는 건 글쓰기로만 국한하기에 애초에 불가능한 과제다. 일종의 능동적 ‘수용’ 활동이자 순환계 내에서 끝없는 운동을 거듭하되 ‘미토콘드리아’처럼 일정 간격을 유지해야 한다. 그렇게 ‘지역화’한 영화 평론은 예산과 지원 대책에만 갇히지 않는 지역 영화문화 형성의 일부로 역할을 얻는다. 물론 ‘가지 않은 길’이기에 정답은 누구도 모른다. 다만 기존 독립·예술영화 비평 모델과 비교하면 보다 사회학적 접근, 현장 참여에 주목하는 형태를 지니리라 예상해 본다. 일단 떠나지 않고 지역 사회 쟁점과 배경을 숙지한 상태로 작품의 의미를 해석하고 발굴해 접속하는 과제를 수행하는 수밖에 없다. 개인을 넘어 집단으로, 생산자와 소비자의 이분법을 넘어 공생하는 영화생태계로 접근하는 과정에서 지역 영화 글쓰기는 고유의 형상과 임무를 찾게 될 테다. 지금은 일단 씨를 뿌리며 경작에 나설 시간이다. 2019년 대구MBC 프로그램 <문화극장 조조할인> 중 코너 ‘작은 영화관’ 녹화 현장 * 사진 전체: 필자 본인 제공 김상목(스크리닝 메이커) l 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영화제와 상영회 기획부터 매체 기고, 라디오, 텔레비전, 교육 강연 등 들어오는 일 마다하지 않고 즐겁게 지역에서 다양한 영화를 소개하며 활동 중. 저서 『경계의 영화: 대구영화라는 낯선 풍경』(2025), 공저 『이것은 카메라입니다』(2022) 집필.
<소년> 중 (사진: " 소년 ", 전주국제영화제 / © James Benning) 숙련된 장인의 손길이 조립식 미니어처 완구에 민트색 페인트를 칠한다. 노스롭 그러먼(Northrop Grumman), 제너럴 다이내믹스(General Dynamics), 레이시온 테크놀로지스(Raytheon Technologies) 등 완성된 미니어처 외벽의 간판에는 미국의 글로벌 방위 산업체 이름들이 새겨진다. 그 위로 학교에서의 수업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년의 읊조림이 얹힌다. “전쟁이 그렇게 나쁘지 않다는 걸 배웠어/ 우리가 겪었던 위대한 전쟁들에 대해 배웠어/ 독일과 프랑스에서 싸웠지/ 언젠가는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거야.” 1964년 발표된 피트 시거(Pete Seeger)의 저항적인 포크 송 ‘오늘 학교에서 무엇을 배웠나요?(What Did You Learn At School Today)’는 미니어처 모델의 양식화된 조립 과정과 기이한 대조를 이룬다. 정글의 소리와 멸종된 짐승의 포효가 곁들여진 공룡 뼈의 모형으로 열리는 영화 < 소년 >(2025)은 제임스 베닝의 필모그래피에서 보기 드문 시도로, 의뭉스러운 도입 직후 작가 특유의 엄격한 패턴을 제시한다. 베닝이 묘사하는 것은 실재적인 세계 이미지가 아니다. 베닝은 풍경을 포기하고, 텅 빈 블랙박스를 배경으로 구조물을 만들고 라디오를 듣는 소년의 관점을 취한다. 시간을 횡단하는 이 가상의 소년은 세상에 대해 잘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것들이 잘못되어가고 있으며, 무언가 긴급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 같다. 구조는 명확하다. 플롯은 8개의 분절로 구성되는데, 각 파트는 미니어쳐 모형을 조립하는 손의 움직임을 따라 흘러가는 시네이드 오코너(Sinéad O'Connor), 샤이렐스(Shirelles), 트레이시 채프먼(Tracy Chapman), 냇 킹 콜(Nat King Cole) 등의 노래, 그 뒤를 이어 완성된 모형을 배경으로 하여 1961년부터 2016년까지의 미국 현대사에서 분기점을 형성한 정치적 연설을 병치한다. 이미지는 순수한 유희처럼 보이지만, 사운드는 군산 복합 비즈니스를 위한 폭력과 전쟁의 연대기를 재생한다. 냉전의 종식과 평화를 외치는 대통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 인종 분리를 주장했던 백인 정치인 조지 월러스(George Wallace), 흑인들의 힘에 대해 역설하는 인권운동가 스토클리 카마이클(Stokely Carmichael), 이주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노동운동가 세사르 차베즈(César Chávez), 이란에 대한 미국의 무기 지원을 인정하는 보수의 상징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기후 위기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는 환경운동가 세번 컬리스-스즈키(Severn Cullis-Suzuki), 미군의 지속적인 이라크 주둔을 옹호하는 정치인 힐러리 클린턴(Hillary Clinton). 핵무장 종식을 촉구하는 반핵운동가 헬렌 칼디콧(Helen Caldicott)의 연설과 군산복합체의 성채는 아이러니하게 충돌한다. 시대의 아젠다를 초점으로 한 연설의 선집은 인종 분리와 시민권, 이주 노동자 착취, 중동 위기, 복지와 환경 문제, 전후 미국 사회의 정치, 사회적 문제들을 연대기 순으로 망라하면서 권력과 자본 또는 둘 다에 대한 욕망의 결과를 보여준다. 노래가 연설에 응답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 아니면 모두가 풍자와 야유의 찬양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제임스 베닝의 작품은 역사의 무게와 집단 기억 속에서 예술의 역할을 끊임없이 탐구해 왔지만 이번에는 사뭇 노골적인 어조와 직설적인 정치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제임스 베닝의 영화를 정의해 온 사색적 무드를 탈피한 생동감이다. 언제나처럼 생각할 거리가 많지만, 유머를 가미한 표현 요소들, 예컨대 붓질을 하는 손동작, 리드미컬한 음악, 그리고 풍부한 질감의 연설 대사 때문에 활력이 넘친다. 이미지, 소리, 단어의 조합은 언뜻 보기에는 무작위적으로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모호한 통일감을 전달한다. 한편으로 지난 10년간 베닝의 작업들처럼, 구조나 내용과 관련이 없어 보이는 디테일에 대한 궁금증도 피어난다. <소년>의 경우, 설정을 알아차리고, 패턴에 대해 상상한 뒤, 곧바로 질문을 던지게 된다. 미니어처 모형에 색칠을 하는 손은 같은 사람의 것일까? 저들은 평소에도 모형을 조립하고 색을 칠하는 사람들인가, 아니면 장면을 위해 고용된 배우들인가? 정치 연설과 ‘손’의 소재(所在), 정체성은 관련이 있을까? 질문에 대한 답은 엔딩 크레디트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소년>은 의식의 흐름에 따른 게임을 통해 하나의 모델-패턴을 제시하고 노래와 연설이라는 발화 형식의 의도적인 병치를 창조하여 ‘청취’에 깊은 주의를 기울이도록 유도한다. 엄격한 구성, 역사와 기억을 유희하는 개념적 구조로 관객의 인식에 도전장을 내밀면서 권력과 파시즘의 은유이자 현재에 재건되고 있는 과거의 망령들을 형상화함으로써 예술과 정치의 교차점을 탐구하는 것이다. <소년> 중 (사진: " 소년 ", 전주국제영화제 / © James Benning) 베닝은 <소년>을 “수십 년 동안의 일기를 읽으며 만든, 친밀하고 개인적인 작품”이라고 해설했다. 하지만 영화는 사적인 노스탤지어를 넘어서며, 꼰대의 한탄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감정도 초월한다. 베닝이 제시하는 8개의 스토리는 군국주의의 포괄적인 역사를 회고적으로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피상적인 엿보기와 수사적 장식을 제공하는데, 이와 같은 병치의 전략은 계보학의 차원을 서사에 부여한다. 베닝은 과거의 렌즈를 통해 현재를 진단하고, 무엇이 우리의 삶을 위태롭게 하는지를 명확히 드러낸다. 6천5백만 년 전 공룡을 사라지게 하는 대절멸의 도래, 뼈와 으르렁거리는 소리는 다음에 소멸할 종(種)은 인류가 될 것, 이라고 경고한다. 개선의 여지가 없는 인간과 그들의 위협받는 미래에 대한 근심을 담은 이 영화는 말과 행위의 불일치가 초래할 것들에 대한 전망도 보여준다. 투쟁과 몰락, 재건에 익숙해진 것처럼 계속해서 모형을 칠하고 조립하는 손들의 움직임은 어딘지 모르게 파괴적이다. 마지막에 베닝은 군산 복합 비즈니스의 최종 장을 화면 중앙에 배치한다. 1945년 8월 히로시마를 초토화한 원자 폭탄 ‘리틀 보이’의 모형은 소문자 영어 제목(<little boy>)에 담긴 ‘소년’의 순수성을 폭파한다. 오늘 학교에서 배운 것을 새기는 소년의 사색은 얼마나 헛된 것인가. 진보와 그 대가, 역사의 폐쇄적 순환 궤도에 대해 성찰하는 <소년>은 인류의 서사가 주요 사건뿐 아니라 사소하고 개인적인 결정들을 통해 구성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시청각 요소들의 조합은 일관된 패턴을 따르고 베닝의 전작들에 비해 해석의 어려움이 덜 하지만, 이 영화의 시청각 은유는 개별 요소들의 총합을 능가한다. 상징적인 연설과 정적인 이미지를 병치함으로써, 베닝은 시적인 환기와 정치적 명제 사이를 왕래한다. 스토클리 카마이클의 시민권 연설이나 헬렌 칼디콧의 핵에 대한 경고처럼, 언어의 힘이 이미지를 이기는 순간들은 깊은 영감을 준다. (상) <엘.코헨>(2018), <알렌스워스>(2022) (사진: " L. COHEN ", " ALLENSWORTH ", VIENNALE) (하) <미국>(2022), <브레스리스>(2023) (사진: "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 " BREATHLESS ", RÉEL Archives) 제임스 베닝이 지속적으로 헌신해 왔던 ‘풍경’에 관한 에세이로 영화를 읽을 수도 있다. <소년>에는 두 가지 경관 양식이 작동한다. 먼저 파랑, 노랑, 갈색 등의 채색으로 지속하여 변동하는 경관이다. 두 번째는 완성된 미니어처 모형을 길게 비추는 타블로 쇼트가 자아내는 인상으로 여기서 연설은 일종의 음성 해설처럼 기능한다. 환경음과 음악의 지배를 받는 베닝의 영화들(< 엘.코헨 >, <알렌스워스>, <미국>, < 브레스리스 >)처럼 <소년>은 역사적 풍경에 대한 인내심 있는 응시가 된다. <미국>(2022)은 <소년>과 매우 유사한 도식을 구현한 영화이다. 같은 길이의 정지 이미지 50장이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으며, 각 이미지 앞에는 검은 무지의 배경에 미국의 50주를 나타내는 캡션이 붙는다. <미국>은 베닝의 다큐멘터리 실천이 세상을 향한 창, 즉 화면 속 현실을 재구성하려 하지 않고 관객에게 경험을 창조하고 전달하려는 시도임을 보여주는 분명한 예이다. <소년>은 <미국>의 전략을 확장한다. 정지 카메라로 촬영한 롱 쇼트, 역동적인 요소들이 섞인 정적인 피사체를 포착하는 베닝의 스타일 서명은 <소년>에서 개별 쇼트의 구성과 프레임 안에서 단조로운 요소들의 기하학적 배치로 대체된다. 대중음악과 정치 연설이 어우러진 미국의 작은 풍경들을 기록하는 단조로운 타블로를 통해 베닝은 미국 역사의 토대를 재구성하기 위한 풍경화를 제시한 것이다. 역사를 미니어처로 관람하는 <소년>의 시청 경험은 시간의 지속과 인내를 요구한다. 베닝은 언제나처럼 우리들이 개념적 퍼즐을 조립하도록 내버려두고, 조립을 위한 부품들만을 제공한다. 그가 모델을 구축했듯이 관객은 부품들을 조립해야 한다. 국방비 지출, 인종 정치, 노동운동, 핵전쟁, 기후 위기에 대한 사전 지식과 선입견, 그리고 음악적 취향에 따라 <소년>은 베닝의 가장 흥미로운 작품이자, 그의 필모그래피를 풍성하게 만들어줄 걸작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 장병원(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수석 프로그래머) l 영화주간지 《필름 2.0》 편집장,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를 거쳐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수석 프로그래머로 일하고 있다. 영화글을 쓰며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