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깊이 묻어주오
- 감독
- 강찬우
- 제작년도
- 1964
- 출연
- 신성일, 엄앵란, 장훈, 신영균, 김석훈, 양미희, 손미희자, 강효실, 주란지, 차유미, 한미나, 변일영, 이해룡, 최명수, 조덕성, 임운학, 이영, 지계순, 김웅, 석운아, 추봉, 김기범, 송억, 김경란, 승정호, 박종화, 김희철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화와 비평 사이에서 고민해온 시간을 들려줍니다. 그러다가 떠오른, 한국영화에 대한 감상도 꺼내봅니다. <새로운 천사Angelus Novus>(파울 클레, 1920) / 펜과 수채, 이스라엘 박물관, 예루살렘. 우리가 함께 이야기했던 파울 클레(Paul Klee)의 <새로운 천사Angelus Novus> 그림을 기억해? 벤야민은 그의 글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1940)에서 파울 클레의 이 그림을 보며 역사의 잔해 더미들을 마주해야 한다고 말했지. 날아오르려는 천사는 역사의 잔해 더미 앞에서 눈을 감지도, 날개를 접지도 못해. 폐허가 된 현재를 바라보고 있지. 과거의 것을 뒤로 한 채 앞으로 나아가지도, 그렇다고 과거로 되돌아가지도 못하는 진보라는 폭풍 앞에서 말이야. 우리는 산개해 있는 역사의 잔해 더미를 더듬는 영화를 보려 했고, 글을 읽으려 했고, 그러한 글을 쓰고자 해왔던 것 같아. 우리는 영화 앞에서 눈을 감을 수 없었지. 아마 늘 주변화된 것에 사로잡히고 마는 우리의 성정을 감히 벤야민과 천사에 이입해 왔던 것일지도 몰라. 사실 이렇게 글을 계속 쓰게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어. 우리는 그저 늘 함께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동료를 필요로 해왔고, 그렇게 기꺼이 서로에게 동료의 자리를 내어주었고, 우리가 필요로 하는 글을 찾아 헤매다 결국에는 스스로 읽고 싶은 글을 썼을 뿐이니까.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글을 끝내는 찾지 못했잖아. 영화에 대해 말하는 글, ‘그’ 영화와 그 ‘영화’, 그리고 ‘영화’ 자체에 관해 말하는 글. 그러니까, 그러한 글은 어디에 있을까? 과거에 머물러 있는 질문을 되뇌면서, 이 끝없는 질문에도 불구하고, 영화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할 때면 처음에는 한 글자도 쓸 수 없었다가 점점 질문에 대한 문장을 찾았지. 문장의 끝에서 비로소 그 영화는 우리의 것이 되었어. 글로써 완성되는 영화. 그럼 이건 우리가 앞서 이야기한 물음과는 상반되잖아. 결국 영화에 대해 말하는 글은 없고, 주변을 맴도는 글만 남아있게 되는 건 아닐까. 우리는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없고, ‘그것’에 ‘대한’ 것만 말할 수밖에 없어. 그러니 우리는 어쩌면 비평의 흐름에서 아주 작은 귀퉁이의 잔해가 되겠지. 오늘날 한국에서의 비평은 주류와 비주류, 프로와 아마추어가 구분되어 있다기보다는 사실 모두가 비주류라는 조각으로 맞춰지지 않은 채(혹은 프로는 아마추어인 체하고, 아마추어는 짐짓 프로인 체하며) 서로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지도 몰라. 비평과 작품의 ‘쓰루패스’를 지향하는 《마테리알》, 서버와 리시버가 편지를 보내고 응답하는 ‘비평의 편지’, 《씨네21》이나 《필로》… 그들까지 우리가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우리 모두는 끊임없이 서로에게 말을 걸어. 더는 비평의 독자를 상상하지 못하게 된 걸까? 우리가 비평과 한 발짝 떨어진 존재인지라 더욱 그렇게 느끼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비밀스럽게 활동하는 우리로서는 이 상황이 퍽 만족스러워. 우리는 사라질 기회를 찾고 있어. 천사 앞에 놓일 잔해가 될 날을 기다리며. 우리가 사라지게 될 날은 매년 갱신하는 《 해파리 》의 도메인을 결제해야 하는 가을이 될까? 행방불명이 되자. 사라진 작가들처럼, 사라진 배우들처럼, 사라진 감독들처럼, 사라진 영화관들처럼, 사라진 필름들처럼. 그리고 신재인 처럼.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영화를 위해. (좌) <재능있는 소년 이준섭> 중 (사진: "재능있는 소년 이준섭", KOBIS ) (우) <그의 진실이 전진한다> 중 (사진: "아카이브-역대상영작-KAFA 40주년 특별전", 전주국제영화제 ) 신재인 감독은 2000년대 초반 네 편의 영화를 만들었어. 단편영화 < 소세지 >(2000), < 재능있는 소년 이준섭 >(2001), < 그의 진실이 전진한다 >(2002), 그리고 장편영화 < 신성일의 행방불명 >(2005)을 끝으로 사라져 버렸지. <김갑수의 운명>, <심은하의 잠적>, <어머니가 상했다>를 만들겠다고 했는데 말이야. 신재인은 『포도주』(2007)라는 책을 한 권 남기기도 했는데(사실 로맨스 소설을 꾸준히 쓰고 있는 듯 보이지만), 이 책은 그가 쓴 66개의 단편을 한 데 묶었고, 2000년에 대산문화재단 소설 부문에 당선되었으며, 세상에는 그로부터 7년이 지난 후에 출판의 형태로 공개됐어. 『포도주』의 단편 「남이 먹을 때1」과 「너의 진실1」은 영화 <재능있는 소년 이준섭>과 <그의 진실이 전진한다>의 원전이기도 해. 단편의 화자는 모두 다른 듯 보이지만, 신재인 스스로가 ‘작가의 말’에서 화자는 “다중인격자”라고 말하기도 했던 것처럼, 한 사람의 목소리로 느껴지기도 해. 「리얼 드림1」에서 주인공 ‘나’는 꿈을 꿔. 그는 눈을 뜨자마자 꿈을 기록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가 꿈을 꾸는 시간은 더욱 길어져만 가. 꿈도, 어머니도 없는 그의 사적 시간은 줄어만 가고, 그는 결국 꿈과 현실을 구별하지 못하게 돼. 완결 없는 결말로 향해 가는 그의 이야기는 신재인의 영화와 같아. 신재인의 영화는 절대 문턱을 넘지 않아. 지점을 향해 나아갈 뿐, 그저 시도할 뿐이야. 2006년 신재인 감독의 <어머니가 상했다>(가제) 연출팀 모집 공고글 발췌 신재인의 영화는 체제에 속하지 않는 이방인의 등장으로 하여금 규범을 흔들어. 이방인은 체제의 안과 바깥,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메시아와 같은 존재처럼 느껴지기도 해. 그의 세계에서 규범이란 죄의식과 위선, 성스러운 것과 천한 것, 그리고 신성모독으로 뒤틀린 정상성의 형태야. 그리고 이방인, 혹은 메시아는 뒤틀린 세상의 구원이 아니라 정상의 세계를 뒤흔드는 시도에 가까워. <신성일의 행방불명>에서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먹는 행위는 죄악이 돼. 보육원의 아이들은 아버지(신)가 음식을 먹는 모습을 보지 못하도록 음식을 보급받으면, 불이 켜짐과 동시에 흩어져 버리는 바퀴벌레처럼 재래식 화장실이나 침대 밑으로 숨어들어. 공중에서 재래식 화장실을 수직으로 내려다보며, 수평으로 움직이는 장면은 배설과 섭취를 등가로 만들어. 먹는 행위가 수치스러운 행동이 되는 보육원에서 남들보다 ‘뚱뚱한’ 성일( 조현식 )은 유일하게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고, 천사를 만나. 성일은 이 뒤틀린 세계를 구원할 메시아일까? 보육원에는 바깥에서 들어온 이영애( 문슬예 )가 있어. 영애는 먹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유일한 아이야. 영애는 권사의 주방에 들어가 몰래 음식을 훔쳐 먹거나,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배고파”를 외치며 음식을 먹어. 아이들은 영애를 두려워하면서도, 배고픔을 참지 못해. 보육원의 규범은 점차 흔들리고, 마침내, 그곳을 통치하던 원장( 예수정 )이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영애를 교단에 올려 억지로 음식을 먹는 벌을 줄 때, 아이들이 반기를 들려고 하는 순간, 폭력의 문턱을 넘어가려는 바로 그 순간, 영화는 폭력을 중지하고, 보육원 안과 바깥의 경계를 만드는 철문 앞에 서 있는 성일의 쇼트로 이동해. 보육원 바깥에 있던 카메라는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상승’하여 문을 넘어 다시 성일을 쫓지. 흑백의 영화는 컬러로 전환되고, 보육원의 성일은 터미널에서 눈을 뜨게 돼. 성일은 행자와 같은 모습으로 모텔촌과 먹자골목을 돌아다니며,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먹고, 사는 사람들을 마주하게 되지. 신재인이 영화에서 흑백과 컬러를 사용하는 방식 또한 흥미로운데,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해. “흑백은 아름답기에 억압받는 보육원 장면은 흑백으로 아름답게, 해방 공간인 바깥세상은 현실적으로 추하게 담고 싶었다”라고. (상2) 흑백의 보육원 장면 (하2) 컬러의 바깥세상 아이들을 통치하던 원장이 벌을 받는 뒤집힌 보육원의 시간과 성일이 돌아다니는 시간은 이리저리 중첩돼. 성일은 보육원의 안과 밖, 모든 시간에 있어. 아이들이 교단 위의 원장에게 돌을 던지고 음식을 던질 때, 바깥의 쇼트와 교차되던 성일이 보육원 안에서 폭력을 막는 장면이 프리즈 되고, 반복되며, 영화는 영화적 장치를 통해 폭력의 물리적 접촉을 막아. 영화의 마지막, 성일이 원장과 그의 아들이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치킨을 뜯는 모습을 목격하고, 그들과 동석하게 됐을 때, 카메라는 그들에게 다가가지 않고 오히려 창의 바깥에서 점점 물러나지. 흥미로운 점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신의 시선을 은유하는 듯한 카메라의 움직임보다도, 보육원 건물에 높이 매달려 있는 아무런 기능도 하지 못하는 낡은 나팔형의 스피커라는 존재야. 신재인 영화에서 신을 위시하는 카메라는 신이 될 수 없어. 오히려 신은 낡고 기능하지 않는 버려진 모습을 하고 있지. 이러한 시점의 카메라는 신재인의 다른 영화에서도 반복적으로 등장해. <소세지>는 남성, 여성, 아이로 구성되는 소위 ‘정상 가정’으로 보이는 구도를 유지해. ‘소세지’는 남성 성기의 직접적 대리물이 되고, 여자는 남자가 들고 있는 소세지를 핥을 때, 아이는 “나도 먹어보자”라고 말해. 재미있는 점은 여성-남성-아이의 구도가 계속 바뀌고 있음에도 삼각형 구도는 변하지 않는다는 점이야. 이 같은 구도는 가부장을 환기하면서도, 남성의 소세지를 핥는 데 집중하던 여자가 아이가 재촉하니, 남성 성기와 가부장을 대리하는 소세지를 다른 길쭉한 야채들과 함께 싹둑싹둑 절단 내고, 소세지 야채볶음으로 만들어내는 코미디로 무너지지. 여자와 아이는 소세지 야채볶음을 맛있게 나눠 먹고, 카메라는 투샷에서 물러나며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남성을 보여줘. 마치 르네 지라르가 ‘욕망의 삼각형 이론’에서 욕망은 욕망하는 대상과 욕망의 주체, 그리고 욕망을 모방하도록 하는 매개자가 있다고 했을 때, 영화는 욕망의 대상으로 보이던 남성을 결말부에 욕망으로부터 아예 배제해 버리는 거지. 그러니까 신재인 영화는 오히려 욕망의 매개자를 영화 바깥에 위치시키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면서, 세계의 질서와 규범을 계속해서 조롱하는 거야. <그의 진실이 전진한다> 중 (사진: "아카이브-역대상영작-KAFA 40주년 특별전", 전주국제영화제 ) 마찬가지로 <그의 진실이 전진한다>에서는 주인 없는 시점 쇼트가 많이 등장하는데, 주인공 의사( 홍승환 )는 환자의 머리에 진실을 넣었고 그것을 깨끗하게 봉합했다고 말해. 이때 카메라는 환자의 머리에 자리 잡고 있어. 환자는 죽고, 법정에 선 남자는 천정에서 떨어지는 물을 바라봐. 떨어지는 물의 시점은 남자를 내려다보고, 영화는 법정과 교회의 연단, CCTV의 시점 쇼트를 제외하고는 의사의 시점을 제외한 인간의 시점으로 느껴질 만한 쇼트를 배치하지는 않아. 의사가 진실을 넣은 환자의 머리를 봉합하는 데 실패한 것처럼, 영화는 영화의 안과 바깥을 시점으로 연결해 봉합하는 데에도 의도적으로 실패하는 거지. 의사는 교회와 법원을 오가며 자신의 죄를 고하는데, 목사( 정인기 )와 판사( 권택기 ) 앞에서 물을 토해내며, 자신이 토해내는 진실에 잠겨 버려. 그리고 진실을 말하는 남자 앞의 모두는 도망을 가. 판사, 목사, 변호사, 소위 “‘사’짜”가 만들어내는 질서와 경건한 십자가 앞에서 진실은 마침내 물고문실로 연결되고, 영화를 보는 관객은 진실을 고해야 하는 그의 정신세계에 빠져 있다가 CCTV 화면을 통해 빠져나와. 이러한 주인 없는 시점과 그것의 물성은, 칸트의 정언명령과 같은 규칙이나 명령, 진실과 거짓, 그리고 성경의 인용이라는 언술로부터 순응주의적 진실을 전복해. 마치 신재인이 유명인의 고유명사를 쓰면서 실제 세계의 아우라, 숭고를 벗겨내는 방식을 전유하는 것처럼 말이야. (특히 재미있는 점은 ‘성일’이 영화감독 신성일과 영화평론가 정성일을 모두 떠올리게 한다는 것이고.) <재능있는 소년 이준섭>에서도 세상에서 가장 비위가 좋은 사나이인 소년 준섭이 지우개나 배설물을 먹을 때, 그를 보여주는 부감 쇼트와 같은 방식은 영화 바깥의 타자를 작품 속으로 끌어들이지. 준섭은 이 영화에서 똥을 먹음으로써 사랑을 쟁취하고, 외계인의 우주선을 먹음으로써 인간을 구하며, 음식난으로부터 인류를 구하는 자폐적 상상력은 <그의 진실이 전진한다>에서처럼 망가진 메시아의 형상으로 작동하는 거지. 신재인 영화는 일상적이고 동질적인, 즉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기능을 수행하는 영화 플롯과 규정적 한계의 바깥에서 규범을 소격화하여 불균질하게 연결함으로써 자아로 필연적으로 빠져버리는, 영화와 영화 바깥에 초월의 기회를 만들어 주는 것 같아. 우리는 이런 조각나고 어긋난 것 같은, 주인공의 상상으로 치부될 법한 영화의 장면들이 산란함으로써 ‘진실’을 만들어간다고 생각해. 그래서 신재인이 『포도주』에서 말하듯 영화들은 모순 없는 매끄러운 이야기로서 영생하지 않고 언젠가 사라지게 되겠지. 그렇기에 그의 영화는 필멸하기에 거짓을 말하지 않는 것이고, 모든 장면은 진실로 향하게 되겠지. 신재인은 운동하는 진실을 포착해 불쑥 솟구쳐 오르도록 글과 영화로 만들어낸 것이고, 이렇게 만들어진 너머의 무언가는, 현실에 천착해야 하지만 현실에서의 도망침을 꿈꾸는 우리에게 닿으며 필연적으로 주변화되는 비평 작업으로 이어지는 것 같아. 그러므로 신재인 영화는 영화 속 세계 바깥에서도, 그저 쌓이고 잔해가 되어, 사라짐 후에도 우리 앞에 놓인 영화처럼 ‘새로운 천사’ 앞에 놓일 거야. 다시 돌아와, 벤야민에게 메시아는 과거를 들여다보되 지금의 시간에 사로잡히는 순간에 가능한 것이야. 메시아를 이야기하면서도, 메시아를 신격화하지 않는 벤야민처럼, 우리는 신재인이 만들어내는 하나의 이미지로부터 질서를 위태롭게 만드는 모순적이고, 복합적이고, 복수적인 시간의 공존과 긴장을 경험해. *** 주1. 1) 배장수, " 장편 데뷔작으로 주목 받는 두 감독 '신재인·박성훈 '", 《경향신문》, 2006. 2. 16. 해파리(영화웹진) l www.haepari.net. 영화에 관한 글을 쓴다. 영화제 프로그램 노트 및 전시 도록을 쓰거나, 영화계 인력을 인터뷰하고, 독립상영회를 기획한다.
박홍민 은 지금까지 세 편의 장편영화를 만들었다. 내용은 단순하다. 그는 비극적인 가족 이야기나 멜로드라마를 주로 다룬다. 신작 < 그대 너머에 >도 다르지 않다. 영화 두 편을 찍고 멈춘 상태인 감독 경호가 지연이란 이름의 젊은 여성과 만난다(박홍민의 영화에서 여자 주인공의 이름은 항상 지연이다). 그녀는 어머니의 이름이 인숙이라고 밝힌 뒤 경호가 자신의 아버지가 아닌지 묻는다. 놀라 과거를 부정한 경호는 지연의 뒤를 몰래 따라가 인숙과 20년 만에 재회한다. 도입부의 줄거리만 들어도 <그대 너머에>에서 < 물고기 >(2011)와 < 혼자 >(2016)의 세계가 반복되고 있는 건 맞다. 영화 속에서 반복을 즐기는 스타일은 영화와 영화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박홍민은 ‘죽음, 귀신, 령, 꿈, 기억, 인연, 불안, 무의식’의 세계에서 좀체 벗어나지 않는다. <그대 너머에>를 연작이라 부를 수는 없지만 전작들과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혼자>처럼 공간의 구성에 신경 쓰는 법이 여전한 가운데, 카메라가 훨씬 매끄러워진 점이 눈에 띈다. 예를 들어 경호가 지연을 따라 놀이터에 도착해 벌어지는 장면이 그러하다. 아마도 경호가 숨어서 바라볼 동안, 지연과 인숙이 대화를 나눈다. 얼핏 보기에 인숙의 시점 아래 지연이 놓인 것 같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지연의 시선이 살짝 어긋나 있어서 흡사 그녀가 사시(斜視)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한참을 그러다 지연이 자리를 바꾸어 인숙 쪽으로 다가가면, 카메라는 180도로 시선을 돌려 그네에 앉은 두 인물을 포착한다. 문득 인숙이 “나무가 참 앙상하다”라고 말하면 카메라가 그 의도를 따라 시선을 위로 올려 앙상한 겨울 나무와, 그 곁에서 해에 걸린 또 다른 마른 나무를 마저 붙든다. 그 나무를 따라 아래로 내려오면, 지연이 원래 앉았던 벤치 위로 인숙과 지연이 나란히 앉아 있다. 그들은 언제 맞은편으로 옮긴 것일까. 사소하지만 복잡한 배려가 깊이 밴 이 시퀀스는, 집으로 가는 지연을 인숙의 등 뒤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끝난다. 인숙의 주관적 시선 아래 전개될 것 같던 시퀀스가 인숙의 시선을 가장하는 척하면서 마치는 거다. 이 시퀀스의 카메라 움직임은 사실, 영화의 도입부에서 경호와 지연이 만나는 시퀀스의 그것을 변주한 것이다. 아무리 반복을 즐기는 박홍민이라고 하더라도 왜 그가 굳이 어려운 방식으로 미장셴을 구축하려는 것인지 궁금했다. 매끄러우나 의미는 더 모호해지는 이러한 방식에 대한 답을 구하자면 1시간 정도 영화를 더 보아야 한다. <혼자>의 주인공 수민이 다큐멘터리를 준비하는 감독인 것처럼, 경호가 두 편의 영화를 찍은 감독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창작자로서 경호는 감독 박홍민과 좀 더 결부된 인물이다. 그는 의식의 물화에 매진하는 박홍민을 닮았다. 그는 쓴다, 고로 존재한다. 지하층의 어두운 방에 앉아 그는 세 번째 영화의 바탕이 될 시나리오를 쓴다. 그런데 그가 쓰는 시나리오의 내용은 지연이 전달해준 이야기 그대로다. 그는 자신이 시나리오를 쓴다고 생각하지만, 그의 노트북에 적혀 있는 이야기가 과연 그의 머릿속에서 나온 건지 확실하지 않다. 심지어 그가 자리를 비운 동안, 그의 노트북은 자동 피아노처럼 그가 할 말과 행동을 미리 알고 있다는 듯이 문자로 연주한다. 경호는 인숙이 쓴 수천 장의 노트에 기록된 인물일까? 사정은 인숙이나 지연도 비슷하다. 지연은 자기가 글 속의 인물인지 애초에 태어나지 않은 아이인지 스스로 질문한다. 기억을 유지하기 위해 미치도록 써 글로 남기는 인숙은 기억이 흐릿해질 때마다 자신과 경호, 자신과 지연의 관계를 의심한다. 경호, 인숙, 지연의 사정은 기실 박홍민 영화에 나오는 모든 인물에게 적용된다. 박홍민의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은 자신이 유령이 아닌지 반복해서 묻는다. 그 질문은 자기 실존을 확인하는 순간까지 끝나지 않는다. 골목에서 지연이 경호에게 하는 말은 ‘유령 선언’이다. “어차피 어딜 가더라도 아저씨를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예요.” 경호는 자기가 실존한다는 증거를 자기 시나리오 안에서 찾으려 한다. 그는 인숙이 지어놓은 의식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기를 문자 그대로 시도한다. 방법은 간단하다. 지연이 하는 방식을 따라, 그는 자기 머리를 인숙의 머릿속으로 세게 밀어 넣는다. 머리를 쥐어 잡으며 일어난 그는 인숙의 집, 즉 인숙의 의식을 방문하고, 인숙 또한 의식의 입구에 달린 문을 열어 그를 받아들인다. 상황을 다시 정리하면 이러하다. 인숙의 의식 세계라 할 집 안에서 경호와 인숙이 만나 이야기를 나눌 동안, 인숙이 종종 낯선 존재로 인식하는 지연은 문밖을 지키고 섰다. 그런 까닭에 인숙의 집에 걸린 액자에서 지연의 자리는 지워져 있다. 경호와 대화를 나누던 인숙은 어느 순간 기억이 흐릿해지자 기억을 정리해둔 수천, 수만 장의 노트의 바다 위에서 거칠게 몸부림친다. 집 곳곳에 가득 쌓인 노트 곁에서, 지연은 물론 경호와 인숙은 그들의 유령성을 재확인할 따름이다. 그들이 존재한다고 믿었던 공간은 쓰라린 고통과 함께 허구의 세계임을 드러낸다. 인물들이 유령성을 확인하는 순간 속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내 의식을 건드리는 건 어떤 비디오에 녹화된 이미지다. 경호는 인숙의 방에서 오래전에 자신이 찍어둔 비디오 테잎을 발견한다. 경호와 인숙이 비디오를 보면서 대화를 나눈다. 개미 한 마리가 나무 위로 기어가는 중이다. 개미에 관해 이야기했던 기억을 나누다 인숙이 “카메라를 움직여 봐봐, 아래로, 아래로”라고 주문한다. 그러면 카메라가 시선을 땅 쪽으로 이동해 모래 위를 걷는 또 다른 개미를 바라본다. 이건 좀 이상한 상황이다. 보통 비디오를 보다 이동을 요구할 때, 그 이동은 시간의 순서상 앞이나 뒤를 의미한다. 그런데 인숙이 비디오에 찍힌 공간 내에서 아래로 이동할 것을 요구하자, 그게 이상하지 않다는 듯이 카메라는 그 요구를 따른다. 비디오에 찍힌 이미지는 고정되기 마련인데, 인숙의 기억 속 주문에 맞춰 경호가 과거에 찍어놓은 이미지가 자유자재로 새로운 이미지를 추가한다. 고정되었던 이미지 내부에서 인숙의 기억이 요구하는 대로 새 이미지를 꾸미게 되고, 기억을 더듬던 인숙의 손으로 옮겨 간 카메라는 20년 전의 경호의 모습을 되살려낸다. 시간을 당기고 늘여서 그 사이로 무언가를 삽입이라도 하겠다는 투다. 게다가 카메라를 인숙에게 넘겨주는 건 경호의 손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게 기억의 손이란 말인가. 이어 인숙의 기억이 사라질수록 경호의 이미지도 흐릿해진다. 남은 건 이미지뿐인 이 세계에서, 인물의 부유하는 의식 속에서 유일하게 실존하는(혹은 실존을 돕는) 건 카메라다. <혼자>와 비교해 더욱 풍성해진 박홍민의 ‘골목 오디세이’는 ‘98분 44초부터 102분 25초’에서 폭발한다. 이 장면은 <혼자>의 ‘47분 56초부터 56분 28초’ 사이에 전개되는 지옥의 골목 신과 하나의 세트를 구성한다. <혼자>에서 아무리 걸어도 골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수민을 카메라가 어김없이 잡아내던 것처럼, <그대 너머에>의 카메라는 골목 사이로 잠긴 인숙을 기어이 끄집어낸다. 박홍민의 세계가 구저분해 보이는 건 주요 공간이 가난한 동네의 골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홍민은 골목과 집의 집합이 꾸며낸 이미지가 중세 도시의 그것이라도 되는 양 다룬다. 골목은 중세의 여명이 깃든 전근대의 공간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카메라는 앞서 인숙과 지연이 나눴던 대화를 기억해 두었다 하나의 이미지 - 골목으로 재현한다. 놀이터에서 인숙은 옆에 앉은 지연이 낯선 인물인 것처럼 예전 기억을 전했다. “꿈이랑 똑같이 딸을 잃어버린 날, 온 동네를 찾아 헤매다가 내가 혹시나 하고 집에 가봤는데 지연이가 울면서 마루에 앉아 있더라고요” 221초에 걸쳐 인숙은 지연의 이름을 부르며 골목 사이를 돌아다닌다. 골목은 공간 전체를 미로처럼 연결하지만, 정작 그것을 잇는 자기 모습은 보이지 않는 이상한 길이다. <혼자>에서 수민이 지연에게 말하기를, 골목은 머릿속, 뇌 안에 있는 주름 같다고 했다. 아무도 보이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는 고요한 마을의 서쪽 모퉁이 집에서 나온 인숙은 골목 사이를 돌고 돌아 동쪽 아래 어귀로 불쑥 등장한다. 경호의 비디오가 인숙의 기억을 물질로 바꿔놓은 것처럼, 221초의 여정은 인숙이 딸에게 해줬던 이야기를 생생하게 물화한다. 나는 그 221초의 이미지를 올해의 장면이라 부를 것이다. 90년대 이후 대중영화에서 골목은 주요한 공간의 지위를 잃어버렸다. 미로로서의 골목과 가난한 멜로드라마라는 점에서 나는 배창호의 <꼬방동네 사람들>(1982)의 도입부를 기억했다. 택시 기사가 된 주석(안성기 분)이 오래전 헤어진 검은 장갑(김보연 분)을 알아보고 뒤를 쫓는다. 그런데 검은 장갑을 뒤따르는 일이 만만하지 않다. 철거민들이 모여 사는 작은 동네에 불과한데, 골목에서 골목으로 이어지는 길은 좁으면서 끝이 안 날 것 같은 미로에 다름이 없다. 갖가지 짐을 이고 든 검은 장갑은 골목 너머로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하고, 카메라는 신비하고 매력적인 물체에 매혹된 듯이 그녀의 뒤를 따른다. 영화가 자아내는 분위기는 사뭇 다르지만, 나는 박홍민의 골목 멜로드라마가 <꼬방동네 사람들>의 21세기 버전처럼 보인다. 하층민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한 요즘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골목에서 건져낸 멜로드라마. 범죄의 일기였던 전편에 비해 다소 따뜻해지긴 했으나, 박홍민의 멜로드라마는 우울하다. 노스탤지어를 제거했을 때 장르 영화는 얼마나 잔혹해지는가, 그게 박홍민이 현실을 바라보는 방식이다. 무릇 현실은 실존을 넘어선다. 영화를 완성하고 죽은 감독은 다시 유령이 되어 인적이 드문 충무로의 극장 주변을 맴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