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무자
- 감독
- 우원석
- 제작년도
- 2004
- 출연
- 임형국, 김은석, 박수영, 최종효, 임채용, 손경록, 심서형, 최창환, 박원영
자르고 붙이기(cut and paste)는 예술 분야에서 전통적인 제작 방식 중 하나이면서 동시에 그것은 오늘날 사회, 문화, 경제 전 분야에서 나타나는 우리 삶의 주요 양식이기도 하다. 영화의 몽타주, 예술의 콜라주, 대중문화의 리믹스는 모두 자르고 붙이기의 전략을 따라 하나의 대상을 본래의 맥락으로부터 떨어뜨리고 그것을 새로운 자리에 위치시켜 의미의 전복을 꾀한다. 한편, 자르고 붙이기는 동시대의 삶의 양식이기도 하다. 가속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공간은 잘게 쪼개지고 있으며, 그 속에서 우리의 신체 또한 하나의 사물처럼 조각난다. 예를 들어, 노동 현장은 시간을 유연하게 활용하는 파트타임 노동자로 채워지고, 주거 공간은 대부분 성냥갑처럼 만들어진 구조물을 켜켜이 쌓아 올려 완성된다. 만약 우리 삶이 자르고 붙이기를 하나의 양식으로 채택하여 따르고 있다면, 그런 삶은 분명 누더기처럼 기운 흔적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그런 불완전한 것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 김효준 감독의 < 자르고 붙이기 >는 경제적으로 파산의 상태에 이른 한 남자의 모습을 그린다. 이 작품의 소재는 1990년대 후반의 IMF 시기와 2000년대 후반의 금융위기를 거치는 과정에서 빚의 굴레에 빠진 사람들의 모습을 재현할 때 자주 쓰이던 신용불량자, 카드빚, 고시원과 같은 것들이다. 정호는 수산 시장에서 일하고 있으며, 그는 고시원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정호와 그의 어머니는 카드빚을 두고 심한 갈등을 빚는다. 어머니는 아들 몰래 신용카드를 발급받고 그것으로 빚을 갚으려고 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정호는 빛 한 줄기 새어 들어오지 않지만 모든 소리는 새어 나가는 고시원 방에서 어머니에게 큰 소리로 화를 낸다. 정호와 어머니의 갈등은 우발적인 사고에 의한 비극으로 이어진다. 정호는 어머니가 숨기고 있던 카드를 빼앗아 그것을 가위로 자르려고 하고, 어머니는 그런 정호를 말리다가 손가락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는다. 신용카드를 놓고 분열된 모자의 관계는 두 동강이 난 신용카드와 상처 입은 어머니의 손가락을 통해서 형상화된다. 대다수의 비극적 이야기의 주인공이 스스로 비극을 초래하는 것처럼, 주인공 정호의 우발적인 행동이 그의 비극을 낳고 있었던 것이다. 이 영화의 이야기는 크게 ‘자르기’에 해당하는 부분과 ‘붙이기’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구분된다. 신용카드를 자르다가 어머니의 손가락을 다치게 한 정호의 이야기가 있다면 그런 정호의 행동을 뒤집어 놓은 것과 같은 방식으로 구성된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정호의 어머니가 손가락을 다쳐 응급실에서 간단한 봉합 수술을 받는 이야기와 어머니의 치료비를 내기 위해 자신이 가위로 잘랐던 신용카드를 접착용 셀로판테이프로 붙이는 이야기는 구조적으로 대구를 이룬다. 잘린 사물이 다시 붙고, 잘린 신체가 다시 붙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전반부의 위기는 일시적으로 해소된다. 흥미로운 것은 ‘붙이기’에 해당하는 이 영화 후반부의 내용이 갈등과 위기의 완벽한 해소가 아닌 비극의 심화를 의미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머니의 손가락은 수술을 끝낸 것이지 치료가 끝난 것이 아니며, 셀로판테이프로 붙인 신용카드는 정호가 빚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용카드라는 소재를 중심에 놓고 보자면, 정호는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자신이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채무자의 신세로부터 단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가 부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감행했던 행동이 그를 다시 부채의 늪으로 빠뜨렸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르고 붙이기>는 빚이 또 다른 빚을 낳고, 비극이 또 다른 비극을 낳는 아이러니를 통해서 이야기를 완성하고 있다. 그리고 이 비극적 이야기의 주인공인 정호의 행동, 즉 그가 무언가를 자르고 붙이기를 행할 때 그의 손은 두려움에 떨고 있음에 주목하자. 그의 손은 가위를 들고 신용카드를 자를 때 또는 셀로판테이프로 잘린 카드를 다시 붙일 때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떨린다. 물론 각각의 상황과 의미는 사뭇 다르다. 신용카드를 자를 때 정호는 분노, 짜증, 흥분 속에서 반대로 신용카드를 붙일 때 정호는 불안, 초조, 긴장 속에서 주체할 수 없이 떨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런 정호의 신체적 떨림은 한편으로는 해체된 가정의 구성원으로서 겪는 고통으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해체된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으로서의 고통으로 볼 여지가 있다. 정확한 이유는 나오지 않지만, 정호의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큰 빚을 남기고 떠난 것으로 보인다. 정호는 자신의 아버지가 남긴 빚과 그의 부재로 인해 고통받는 인물인 동시에 어머니, 아내, 딸을 부양해야 하는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으로 인해 고통받는 인물이다. 정호가 겪고 있는 이 이중의 고통은 고시원 고유의 독특한 건축적 공간 구성에 따라서 시각적으로 형상화된다. 이 영화의 주요 배경으로 쓰인 고시원을 하나의 소우주로 본다면, 그것은 전체를 작은 부분들로 자르고 이어붙인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건축적 공간에서 정호는 아버지로부터 자신에게로 대물림되는 가족의 해체를 겪으면서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고통받는 것이다. 영화는 정호에게 가혹한 시련을 주거나 반대로 그에게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는 단순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끝맺지 않는다. 정호가 어머니의 손을 다치게 만든 그날은 하필 그의 딸의 생일이었다. 어머니를 걱정하면서 딸의 생일을 축하해야 하는 그 기묘한 상황은 앞으로 정호가 자기 자신은 물론 자기 자신의 가족을 위해 어떤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것인지를 되묻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정호의 미래에 대해서 그 어떤 판단도 그리고 그 어떤 결정도 내리지 않는다. 대신 정호의 삶이 누군가의 무차별한 가위질로 난도질당하여 찢김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게 그리고 반복적으로 드러낸다. 그러면서 이제 정호에게 과거를 박차고 일어서야 할 시간이 도래했다는 하나의 신호를 준다. 열린 결말처럼 보이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정호는 호흡곤란 증세를 보이면서 연신 헛구역질을 한다. 만약 정호의 헛구역질이 속에 있는 것을 게워내는 구토의 전조라고 한다면, 그것은 과거를 떨쳐 낼 수 있는 일말의 희망의 제스처로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경제적 파산이 초래한 찢김의 고통을 다룬 이 작품은 어딘가에서 비슷한 경험을 할지도 모를 다른 누군가에게는 삶의 극약처방이 될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관련글) 1. 우리는 달팽이의 시간 속에 살고 있다 - <달팽이>(2020), 2022.04.21. 2. 나와 유령이 함께 하는 시간 - <탈날탈>(2018), 2022.05.31. 3. 타인의 그림자를 집어삼키는 법 - <햄스터 죽이기>(2021), 2022.06.29. 4. 얼굴 없는 영화, 등으로 말하는 영화 - <말투>(2020), 2022.07.27. 5. 사랑의 약속으로 하나가 되는 세계 - <우리의 낮과 밤>(2020), 2022.08.25. 6. 이 몸체의 주인을 찾습니다 - <매미>(2021), 2022.09.23. 7. 이것은 감자인가 아니면 고구마인가? - <감자>(2018), 2022.11.08. 8. 일상을 적시는 시간들 - <햇볕을 볼 시간>(2022), 2022.11.21. 9. 찢김의 고통을 극복할 날을 기다리며 - <자르고 붙이기>(2022), 2022.12.06.
이동우의 < 셀프-포트레이트 2020 >(2020)은 우정의 영화화를 시도한다. 영화는 아침부터 술에 취해 이동우에게 20만 원을 요구하는 이상열의 모습에서 시작된다. 보들레르의 말을 말라르메의 말로 착각하는 그는 오즈 야스지로나 하길종 같은 영화감독의 이름을 중얼거린다. 그의 정체는 2000년 단편영화 <자화상 2000>(2000)을 통해 베니스국제영화제 등에 진출했던 영화감독이다. 하지만 뒤이어 벌어진 여러 불행으로 인해, 이동우를 만난 2017년의 시점의 그는 알코올 중독과 조울증을 앓고 있는 노숙자가 되었다. 이동우는 영화 속 자막을 통해, “집 앞에서 이상열을 처음 만난 날 그는 나에게 자기만큼 멋지다고 말을 걸어왔다. 심심했던 나는 그를 집으로 데려왔다.”라고 이상열과의 첫 만남을 밝히고 있다. 한때 유망한 영화감독이었던 이와 현재 주목받고 있는 감독의 만남은 순전히 우연에 의한 것이었다. 이후에도 몇 차례 이상열과 우연한 만남을 반복하던 이동우는 카메라를 들고 그와 동료 노숙자들을 만나게 된다. 이상열이 영화감독이었음을 알게 되는 것은 그즈음의 일이다. 영화 만드는 것을 도와주겠다는 이동우의 말에 이상열은 동료 노숙인을 스탭과 배우로 캐스팅하여 영화를 만들려 한다. 하지만 이는 반복하여 좌절된다. 조울증은 갈수록 심각해지고, 이상열은 구치소에 오가게 된다. <셀프-포트레이트 2020>은 이 과정을 담아낸다. 이동우는 첫 영화 < 노후 대책 없다 >(2016)에서 자신과 펑크 동료들을 비슷한 방식으로 담아낸 바 있다. 영화제작을 의도하고 촬영된 것이 아닌 푸티지들을 편집하여 만들어진 이 영화에서, 카메라는 이동우 감독을 대리한다기보단 현장을 경험하는 또 하나의 인물로서 존재하는 것처럼 다가온다. 무엇보다 <노후 대책 없다>의 카메라는 이동우만의 것이 아니다. 영화의 크레딧에는 이동우와 박수환, 두 명의 이름이 올라가 있다. 크레딧에 정확하게 담겨 있지는 않지만, 카메라가 두 사람 외에도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쳤을 것임을 영화 속 여러 장면을 통해 어렵지 않게 짐작해볼 수 있다. 반면 <셀프-포트레이트 2020>의 크레딧에는 촬영이 따로 명시되어 있지 않다. 이동우 감독은 ‘연출’ 크레딧으로만 엔드크레딧에 올라가 있다. 이는 곧 촬영과 편집을 비롯해 엔드크레딧에 기재되지 않은 대부분의 역할을 수행했음을 알려준다. 크레딧에 자신을 단순히 ‘연출’ 역할로만 표기했다는 점은 이 영화 속 카메라의 사용을 떠올렸을 때 흥미롭게 다가온다. <노후 대책 없다>의 카메라가 ‘펑크 공동체’라 할 수 있는 곳에 속한 또 하나의 인물과, 다시 말해 관객을 자신들의 공동체에 초대하는 것과 같았다. 반면 <셀프-포트레이트 2020>의 카메라는 촬영 크레딧을 따로 기재할 필요를 느끼기 어려울 정도로 이동우 자신과 결부되어 있다. 이 영화 또한 전작처럼 영화제작을 염두에 두고 촬영된 것은 아니다. 이 영화의 카메라는 이상열과 함께한 이동우의 시간에 관한 단순한 기록만을 수행하고 있을 뿐이다. “영화를 만들기 위해 온 것보다 같이 약속을 하고 시간을 보내러 왔다는 생각이 더 많이 들었다" 1) 는 이동우 감독의 말처럼, 그 기록을 재구성하여 지금의 영화로 만드는 것은 그것이 촬영된 순간과는 별개의 사안으로 다가온다. 적어도 이 영화에 한정해서는. <셀프-포트레이트 2020>은 이상열의 < 자화상 2000 >으로 시작하고 끝난다. 이상열이 비디오로 소장하고 있던 15분가량의 <자화상 2000>과 메이킹 영상, 영화제 현장 영상은 이 영화 전체에 흩어져 삽입되어 있다. 특히 이상열이 구치소에 있던 2019년의 분량 대부분이 이상열의 영화와 영상들로 채워져 있다. 마치 이상열의 부재를 이상열이 찍었고 이상열의 과거가 담겨 있는 영상들로 대체하려는 것처럼 말이다. 이나라 평론가의 말처럼, <셀프-포트레이트 2020>의 구조는 “이상열의 영화가 이동우의 영화를 감싸 안고” 2) 있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동우의 카메라가 찍을 대상을 잃어버렸을 때조차, 이상열의 영화는 그의 다른 분신처럼 이동우 앞에 놓여 있다. 3시간에 가까운 영화 전체에서 이동우와 이상열이 한 프레임 안에 들어오는 순간은 단 두 번이다. 하나는 이상열이 이동우의 집에 찾아온,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순간이다. 다른 하나는 출소한 이상열이 이동우와 함께 편의점 테이블에 만나 금주의 방법을 이야기하는 영화의 마지막 순간이다. 영화의 부제 “나는 나를 바라보는 나를 바라본다”는 <자화상 2000>의 부제 “나는 나자신을 바라보는 나를 바라본다”를 잘못 말한 이상열의 말에서 따온 것이다. 이동우의 카메라는 두 사람이 함께 담긴 그 장면을 기록했고, 이동우의 영화는 두 개의 영화를 함께하는 영화로 만들었다. 영화의 부제는 단순히 이동우가 이상열의 지금을 자신의 미래처럼 느껴, 그를 일종의 반성적 거울로 여긴다는 말이 아니다. “나”와 “너”의 지칭이 뒤섞이는 순간, 카메라 앞의 대상이 모두 “나”이면서 “너”가 되는 순간을 향해 이 영화는 흘러간다. 그 순간 이 영화는 우정의 기록이나 증거가 아닌, 우정 자체를 관객 앞에 제시한다. 하지만 이동우 감독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이 사람이 나 때문에 더 힘들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3) 이 말 한마디로 이동우가 <셀프-포트레이트 2020>과 영화 이후의 이상열에 관해 가진 생각을 갈음할 수는 없다. 다만 그의 신작 < 사갈 >(2022)을 통해 그것을 얼핏 엿볼 수 있을 뿐이다. 사갈(蛇蝎)은 뱀과 전갈이라는 뜻으로, “남을 해치거나 심한 혐오감을 주는 사람”을 뜻한다. <사갈>은 이동우가 영화과 동기인 박건호를 오랜만에 만나는 것으로 시작된다. 사채업자이자 도박중독자인 그는 돈을 버는 족족 술과 도박으로 탕진한다. 성실하게(?) 사채 일을 하며 빚을 갚아 다른 생활을 꾸릴 수 있는 상황이 충족되는 순간에도 그의 손은 도박을 향한다. <셀프-포트레이트 2020>이 우정의 순간이라는 찰나를 담아내기 위해 168분의 시간을 동원했다면, <사갈>은 156분 동안 박건호와 그 주변 인물들의 끝없는 실패를 담아낸다. 사채업자라고는 하지만, 박건호가 수금해야하는 돈은 대부분 100만원이 채 되지 못하는 작은 돈이다. 5만원, 10만원, 20만원가량의 빚들은 불법도박으로, 돌려막기로, 또 다른 샛길들로 사라진다. 이는 사채를 쓴 채무자뿐 아니라 박건호 본인에게도 해당하는 말이다. <사갈>에 담긴 박건호와 그 주변 사람들의 상황은 그야말로 빠져나올 수 없는 무간지옥이다. 박건호가 재기할 수 있을 것 같은 상황이 영화에 등장하는 순간, 그는 어김없이 추락한다. <사갈>은 러닝타임 내내 그 과정을 반복하여 보여준다. 이 영화의 외형은 이동우의 다른 영화들과 유사하다. 격렬하게 흔들리는 카메라, 길거리에서 적당히 촬영한 인터뷰, 상황을 설명하는 작은 폰트의 자막. 흥미로운 것은 이동우 감독의 존재 자체다. 세 편의 영화에서 이동우는 점차 자신의 출연을 줄여간다. <사갈>에서 이동우가 프레임 속에 들어오는 장면은 박건호의 본가에서 식사하는 그의 뒷모습 정도다. 박건호 등과 대화할 때 그의 목소리가 영화에 담기긴 하지만, 그의 모습 자체는 전작들에 비해 극히 적은 순간에만 등장한다. 반면 자막을 통한 이동우의 발화는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다. <사갈>은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자막으로 시작해서 "이 영상이 내가 만드는 마지막 다큐멘터리였으면 좋겠다"는 자막으로 끝난다. 전작이 이상열의 이야기였던 만큼이나 그와 함께하는 이동우의 이야기였다면, <사갈>은 박건호의 이야기를 담아내지만 다큐멘터리 자체에 관한 이동우의 복잡한 생각을 그대로 끄집어낸 이야기다. 영화 중반 즈음의 자막은 박건호를 왜 찍기 시작했는지 까먹었다고 고백한다. 그와 더불어, 이동우는 자신의 영화 때문에 박건호가 불행해지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와 함께 영화는 잠시 <셀프-포트레이트 2020> 이후의 이상열을 잠시 보여준다. 이동우는 이상열이 영화 촬영 이후 조울증이 심해지고 구치소를 들락거리며 살고 있음을 이야기하며, 자신의 다큐멘터리가 헛된 희망을 심어준 것 같다는 죄책감을 토로한다. 그 죄책감은 <사갈> 전체에 맴돌고 있다. <사갈>의 이동우는 이상열을 만날 때와 마찬가지로 카메라를 들고 박건호를 찾고, 박건호를 찍는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의 이동우가 박건호에게 갖는 거리감은 관찰적 다큐멘터리라기엔 너무 가깝고, 참여적 다큐멘터리라기엔 너무 멀다. “이동우의 카메라가 이상열을 찍지 않았다면…”이라는 가정이 무의미한 것처럼, “박건호를 찍지 않았다면…”이라는 가정 또한 무의미하다. 하지만 이동우는 이 무의미한 가정을 토대로 누적된 죄책감을 토로하고 있다. “남을 해치거나 심한 혐오감을 주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제목을 다시금 떠올려보자. <사갈>은 우정의 순간을 포착하여, 우정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관객 앞에 펼쳐 놓는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이 사람과 우정을 나누는 것은 불가능하겠다는 판단을, 끔찍하게도 자기파괴적인 죄책감을 수반하는 그 판단을 고백하는 영화다. 이동우의 고백대로, 그가 처음 카메라를 들고 박건호를 만났을 때 떠올렸던 생각은 그도 관객도 알 수 없다. 그러한 지점에서 <사갈>은 꽤나 비겁한 영화다. 이동우 감독의 생각을 옮긴 자막들을 보고 있자면 그가 박건호라는 ‘사갈’을 수단삼아 자신의 죄책감을 토로하고 있을 뿐이라는 느낌을 준다. 혹은, 그러한 박건호를 찍어 다큐멘터리로 제작하고 있는 자신을 ‘사갈’이라 지칭하는 것만 같다. <셀프-포트레이트 2020>이 촬영된 ‘함께’의 순간을 ‘우정’으로 만들어가는 영화였다면, <사갈>은 어느 순간 ‘함께’일 수 없는 이와의 동행을 담아낸다. 우정이 불가능함을 깨달은 이후에도 이동우는 카메라를 들고 박건호를 찍었다. 그렇다고 <사갈>이 절교를 찍은 영화라고 할 수는 없다. 관객은 이 영화 이후의 박건호를 모른다. 관객이 볼 수 있는 것은 이동우가 박건호와, 이상열과, 동료 펑크들과 보낸 시간들이다. 관객은 영화 이후의 그들을, 그들과 이동우의 관계를 알 수 없다. 다만 우리는 가능한 우정의 순간과 우정이 불가능해지는 순간을, 그 순간을 찍고자 그 순간과 뒤엉켜버린 영화를 보고 있을 뿐이다. 때문에 이동우의 영화들을 보고 난 뒤에 이러한 질문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당신과 나 사이에 놓인 카메라는 우리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는가?” *** 1) 2021 제12회 부산평화영화제/기록문 <셀프-포트레이트 2020> GV, 「부산평화영화제 아카이브」 2021.12.31, https://bpff.tistory.com/entry/셀프-포트레이트-2020-GV 2) 이나라, [무주산골영화제 영화평론가상 수상작 비평 전문] <셀프-포트레이트 2020> : 불타는 우정의 자화상, 「씨네21」, 2021.10.12, cine21.com/news/view/?mag_id= 98724 3) 앞의 글, 「부산평화영화제 아카이브」 2021.12.31, https://bpff.tistory.com/entry/셀프-포트레이트-2020-GV
4분할 폐쇄회로 모니터 안에서 지하철 역사(驛舍)들의 이모저모가 보인다. 서울 곳곳의 지하철 플랫폼을 찍은 저화질 흑백 이미지들이 둔탁한 리듬의 편집으로 나열되는 모니터에서는 열차들이 도착한 뒤 통근자들이 타고 내리고 터널 안에서는 다음 열차의 불빛이 빛난다. 서로 다른 지점을 비추는 네 개의 프레임과 한 프레임을 확대한 이미지가 번갈아 배치되다가 체류 외국인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트랙으로 내려가고 그의 마지막 순간이 열셋이나 열넷 또는 열다섯 프레임일 수도 있는 착란적인 이미지로 제시된다. 그리고, video off... 어두운 색깔의 점퍼를 입은 남자의 최후를 기록한 이 CCTV 이미지 뒤에는 무엇이 있는가? 창생의 기운이 넘실거리는 태양 아래로 카메라가 틸트 다운하면 스모그에 뒤덮인 서울의 빌딩 숲이 드러난다. 곧이어 한 이미지에서 다른 이미지로 건너뛰면서 라디오 채널의 잡다한 목소리들이 겹치고 도시 경관 위로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조언이 흘러나온다. “이번 한 달, 올 한 해를 진정 성공하려면 나의 성과를 냉철하게 보는 지혜의 눈이 필요하겠죠?”, “웃을 일이 있을 때는 소리 내어 즐겁게 웃도록 하십시오. 많이 웃는 사람은 우울증과 같은 정신질환에 걸릴 염려도 없다고 합니다.” 상냥한 충고와 맞물린 이미지들의 전환은 무뚝뚝하고 가차 없다. 교통체증, 지하철역의 승하차객들, 연체동물 형상의 인쇄기, 무표정한 노동자의 얼굴, 펄럭이는 구인광고, 증기를 내뿜는 다리미, 재봉틀과 박카스 따위의 사물과 행위들이 일상과 산업 공간을 흘러 다닌다. 그 즈음 일상적 생활사의 세목들 위로 별안간 건조한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이 끼어들어 최근 한국인의 사망 원인에 대한 통계자료를 읽어 내려간다. 미세먼지와 황색포도상구균 등의 미생물, 암이나 뇌혈관질환, 심장질환 같은 병증에 이어 고의적 자해로 인한 사망이 4위에 올랐노라고, 내레이터는 말한다. 다시 죽음이라는 의제로 돌아와 이 메마른 통계들의 꺼풀을 벗겨내면 그 아래에서 무엇을 보게 될 것인가? < 파산의 기술 >은 프롤로그에 제시되었던 잊히지 않는 죽음의 내막을 탐사하는 비선형 복합 내러티브 다큐멘터리이다. IMF 외환위기 이후 한국 사회의 혼란스러운 지형을 매핑하는 이 영화는 4개 챕터로 구성된 느슨한 플롯을 취하는데, 서로 다른 기원과 출처에서 발췌한 이미지 자료들을 배치하고 이미지들의 좌표와 접촉면을 확장하여 형성된 문맥이 서사의 핵심이 되도록 한다. 형식과 의미 질서의 구속성을 무시하여 일견 두서가 없는 듯 보이는 서사는 디스토피아적인 도시 경관과 경제적 재난, 긴축 위기에 직면한 남녀들의 증언을 통해 1990년대 말부터 한국 사회에서 시작된 파산의 물결이 개인에게 미친 여파를 추적한다. 말과 언어, 이미지, 정보의 충돌을 전개하는 기술 방식은 번영의 뒤에 도사린 위기, 신자유주의 질서 하에서 은폐되는 착취와 고갈, 살인에 대한 총체적 반성을 촉구하기 위해 일상적인 확신의 목소리 위에 파산의 풍경들을 대비하는 충돌의 미학을 내세우고 있다. 이를테면 이런 충돌의 이미지들이 앞을 막아선다. 불명료한 카메라의 표면 위에 철문을 두드리는 소음이 얹힌다. 채무 변제를 종용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잦아들면 전원이 켜지고 카메라는 십자가와 단란한 가족사진들이 벽에 걸린 좁은 집을 스캔한다. 젊은 엄마는 어린 딸에게 더 큰 집으로 이사할 거라는 밝은 미래를 약속하지만 웬일인지 딸은 “무섭다”고 말한다. 순간 암전, 강제집행을 고지하는 목소리를 따라 불이 켜지면 압수품에 붙은 붉은 딱지들이 보이지만 집에는 아무도 없다. 저들의 꿈은 어떻게 살해당했는가? 말과 목소리, 이미지의 충돌을 모체로 이어지는 다음 시퀀스에서 다종다기한 노동으로 생계를 꾸리는 사람들은 일상 업무와 부채의 증가, 직업의 조건 따위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들 중 일부는 얼굴을 숨기고 붉은 립스틱을 바른 입술 또는 눈두덩이로만 나타난다. ’붉은 입술들‘이 생존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신용과 부채에 의존하는 사정에 대해 말하는 동안 세계경제포럼에서는 말쑥한 비즈니스 맨들이 샴페인을 들고 어슬렁거린다. 한때 아파트 건물이 있던 공간은 크레인으로 철거되고 있으며 부서진 콘크리트 슬라브가 심란하게 흩어져 있다. 붉은 입술들의 대화는 그들의 생존 투쟁에 대해 계속 이야기한다. 모닝커피, 출근 준비, 통근, 어린이집, 월세, 여가 시간을 즐기는 방법 따위의 생존 루틴들이다. 포크레인의 집게발이 콘크리트 더미 속에서 철근 뭉치를 뽑아내면, ‘붉은 입술들’은 카드 돌려막기로 연명해야 하는 채무의 굴레를 한탄하고, 가족들은 집에서 쫓겨난다. IMF 이후 기업의 파산과 구조 조정이 계약 관행의 조정, 실업, 인플레이션, 대출, 개인 파산으로 이어졌던 고통의 지도가 순식간에 그려진다. 동시에 텔레비전 모니터에서는 선거 승리를 축하하는 운동가들의 감격적인 연설이 흘러나온다. 텔레비전 안에 박제된 이미지를 제외한 주변은 모두 어둡다. <파산의 기술>은 리드미컬하고 아이러니한 몽타주, 감독 자신의 무감동한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으로 사회에서 개인을 증발시킬 위기에 처한 파산의 공기를 시적인 게릴라 영상으로 전환한다. 다큐멘터리 형식의 혁신을 기도한 감독 이강현은 행과 불행, 희망과 절망, 승리와 패배에 대한 반성적 시각을 가지고 고단한 노동의 조건과 일상, 거대한 대부 경제의 무게 아래 짓눌린 채무자들의 생존 투쟁, 승리의 확신이 무색한 죽음의 기운들을 능숙하게 대조한다. 승리를 공표하고 환호하는 사람들, 누가 이긴 것인가? 무엇이 우리를 여기로 데리고 왔는가? 사태의 본류와 지류가 분별되지 않는 혼돈의 지도 안에서 생활사의 분주함, 부채의 압력, 웅장한 공공프로젝트의 역사, 노동조합주의의 쟁취, 선거의 승리, 오염된 콘크리트 도시에 대한 느낌들이 스스로 말하도록 함으로써 <파산의 기술>은 진정한 사회적 고통과 불안을 묘사하려 한다. 이 지점에서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은 우리들의 접하는 이미지의 두께를 이야기한다. 이미지의 표층과 심층에 쌓인 시간의 두께는 서울 영등포 어느 뒷골목 벽에 붙은 너저분한 포스터를 찍은 이미지에 대한 독해로 해설된다. 한몫에 보이지 않는 이 이미지 더미 안에는, 국제결혼을 알선하는 포스터와 사금융 대부업체 전단, 초고속 인터넷 회사의 광고, 룸 가라오케를 선전하는 포스터, 그리고 이 모든 이미지의 뒤에 쌓인 시간의 퇴적층들이 공존한다. 내레이터의 말대로, 우리는 오랜 시간을 가지고 이미지들의 안과 밖을 살펴야 한다. 한 맥락에서 이강현은 재현과 재현의 장치를 동시에 또는 번갈아 보여준다. TV 모니터, 비디오 캠 이미지는 현실과 재현의 구분을 강조한다. TV 모니터 안의 이미지와 바깥의 현실 사이에는 좁혀질 수 없는 간극이 있고, 우리들은 이미지 바깥에 서 있다. 영화에 주석을 달고 정리해야 하는 에필로그는 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1987년 시민항쟁을 기념하는 집회로 이동한다. 선언과 주장, 추억, 공염불, 낄낄거림이 교차하는 그곳에서 카메라는 연사가 아닌 군중을 비추고 있다.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고 웃음을 흘리는 해사한 군중들 사이에서 투쟁가에 고양된 한 남자는 외롭게 주먹을 치켜올린다. 장면이 전환되고 흐린 하늘 아래 복면을 두른 노동자들의 집회를 시발로 하여 아파트에서 누군가의 유품을 정리하는 여인의 비디오 영상이 흐른다. 화면 위에 찍힌 날짜는 2003년 10월 17일이다. 붉은 이불이 둘둘 감겨 있는 사람은 고공 크레인 농성을 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김주익이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프롤로그의 폐쇄회로 영상에서 보았던 남자의 죽음으로 돌아간다. 주검을 향한 통곡과 이어지는 격문, “나의 목숨을 내놓으라 하면 너의 심장을 찔러주겠다.” 승리를 기념하는 사람들의 맞은편에서 죽창을 든 노동자들은 공격을 위한 채비에 나섰다. 우리들은 이미 철거와 퇴거, 쏟아지는 절망, 그리고 지하철에서 생을 마감한 남자를 보았다. 영화의 앞과 뒤에 평행하게 놓인 죽음은 어떻게 서로를 향하는가? 상투적인 인과론의 오류를 넘어 <파산의 기술>은 간단히 정의될 수 없는 사회학적 현상으로 이 죽음들의 지도를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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