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이브야 - 채연 봐봐봐 안무
- 제작년도
- 2010
사진: “ 너와 나 ”, 서울독립영화제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화와 비평 사이에서 고민해온 시간을 들려줍니다. 그러다가 떠오른, 한국영화에 대한 감상도 꺼내봅니다. ---------- Original message ---------- From: "함연선" Date: 2025-03-XX XX:XX Subject: 마테리알 10호 기획의 건 To: "박채연", "박현" 두 분께, 안녕하세요, 채연 님, 현 님. 날이 많이 따뜻해졌습니다. 지난달 지원했던 비평매체 지원사업 공모 결과는 오늘 발표 날 줄 알았건만, 다음 주 중이나 되어야 나올 예정인가 봅니다. 이제 슬슬 마테리알 10호를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 메일을 드립니다. 10호라는 숫자가 주는 의미가 있어서인지, 자연스럽게 지난 5년간의 마테리알 여정을 돌아보게 됩니다. 10호는 단순한 숫자 이상의 의미가 있을 것 같아, 우리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독자층은 조금씩 늘고 있고, 잡지 자체의 완성도도 높아져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뭔가 이대로 괜찮은가 하는 불안에 종종 시달립니다. 요즘 특히 더 그렇네요. 2019년 창간 당시 마테리알의 원동력이 되었던 기존 예술비평 제도에 대한 반발심과, 그 무모했던 열정이 조금은 옅어진 것 같아서일까요? 돌이켜보면, 창간 초기 마테리알의 태도는 꽤 도전적이고 자극적이었습니다. 처음 개최한 행사인 창간 기념 집담회 홍보문에는 “오늘날 한국 비평의 고지혈증에 대한 책임은 모두가 나눠가져야 할 것이다”라는 다소 과격한 문구가 들어있었죠. 또 “과연 (젊은 세대가 죽이고 싶어하는 아버지가) 죽일 만한 아버지인지 먼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라는 선배 평론가의 말에, 우리는 한 인터뷰에서 “‘아버지’가 ‘죽일 만한 아버지’인지는 자식들이 판단할 문제다” *주1 라고 꽤 건방지게 대답하기도 했습니다. 사진: “ [마테리알 창간기념 토크] 비평의 비평 – The Book Society ”, 텀블러 당시 저는 기존 비평계의 권위(일종의 ‘아버지’)에 도전하는 그 행위 자체가 우리에게 정체성을 부여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칼이 아무리 무디더라도, 그것을 휘두르는 행위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믿었죠.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의 무모하게 큰 야심과 정확하지 못한 방법이 한데 섞여 있었던 셈입니다. 좋고 나쁨을 떠나, 마테리알의 초기 에너지는 무지에서 비롯된 용기에 크게 빚졌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저는 다른 종류의 야심에 대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초기에 우리가 추구했던 야심이 높고 커다란 것이었다면, 이제는 ‘크기’와 상관없는 야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이 야심은 정확하되 비루하지 않은 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크기에만 집착하여 막연하고 허황된 말로 시끌벅적한 마음만큼이나, 너무 정확하고자 하여 오히려 작아지는 마음 역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야심이 크기와 상관이 없다면, 무엇과 상관있는 것이어야 할까요? 이 고민을 하던 중에 우연히 하길종 감독의 < 바보들의 행진 >(1975)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이 영화는 1975년 개봉 당시에 크게 흥행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 영화에서 발견되는 것은 흥행을 향한 상업적 계산이나, 혹은 반대로 소위 ‘실험적’인 작업들에서 보이는 관습적인 작가적 야심이 아닙니다. 거칠게 말해보자면 철저히 실패하는 야심, 절망하는 야심에 가까운 것 같아요. 그리고 그것은 이내 야심을 가진 절망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두 분은 이 영화에 대해, 그리고 ‘크기와 상관없는 야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하네요. 언제든 편히 답장 주세요. 두 분 모두 평안한 하루 보내시기를요! 연선 드림 ---------- Original message ---------- From: "박현" Date: 2025-03-XX XX:XX Subject: RE: 마테리알 10호 기획의 건 To: "박채연", "함연선" ‘절망하는 야심’이라는 연선 님의 표현이 인상 깊어 저도 <바보들의 행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어요. 전우형은 <바보들의 행진>이라는 제목을 국책 새마을영화인 임권택 감독의 < 아내들의 행진 >(1974)에 대한 패러디 로 보고 있는데요. *주2 근면한 아내들이 마을을 변화시켜 밝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아내들의 행진>에서와 달리 이 영화에서 ‘바보들’의 ‘행진’은 어디로도 나아가지 않죠. 인물들의 서사뿐 아니라 영화의 구성에도 뚜렷한 진행 방향이 없어요. 맨 처음 오프닝 시퀀스에서 무음 상태로 재생되는, 착착 맞아떨어지는 군대 행진의 모습을 점차 깨부수는 게 이 영화의 목표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요. 어떤 거창한 주제 또는 클라이막스를 향해 발맞춰 나아가는 진행을 요리조리 피해가며 거부하는 이 영화의 방식은 연선 님의 말대로 실패와 절망을 제대로 선언하겠다는 야심일지도 모르겠어요. 사실 청년기의 삶은 생각만큼 낭만으로 가득 차 있지는 않잖아요. 어린 시절의 순진한 이상과 동떨어진 현실의 보잘것없음에 적응해가야 하는 시기이기도 한데, 냉혹한 시대 속에 무력감을 겪는 청년들에겐 더더욱 그 낙차가 컸겠죠. 그런 실망 속에서 어떤 이들은 ‘바보’로 남을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이 영화는 날카롭게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설렘을 안고 연극 무대에 오른 영자( 이영옥 )는 고작 우스꽝스러운 하인 역할로 번개처럼 나타났다 사라져 버리는데요. 연극이 끝난 후 쓸쓸한 실망에 잠긴 영자의 표정도 인상적이었지만, 더욱 기억에 남은 건 이어지는 술자리 씬이었어요. 이야기의 진행에 별 역할을 하지 않는 영철( 하재영 )의 술주정에 영화는 이상하리만치 많은 시간을 할애하잖아요. 빨뿌리 장사를 해서 돈을 잔뜩 벌겠다는 허무맹랑한 꿈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늘어놓죠. 하지만 반복되면 될수록, 이것이 단지 헛된 꿈에 지나지 않으며 영철은 빨뿌리 장사를 하지도, 돈을 벌지도 못할 거라는 음울한 예감만이 더욱 강해져요. 그 꿈의 종착지가 ‘고래사냥’이라는 허상이기에 더더욱요. 연극이 끝난 후, 하인 역할을 한 영자의 쓸쓸한 표정 / 술자리에서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는 영철 영철은 영화 초반부터 어딘가 부족한 말더듬이로 등장하죠. 하지만 모든 것을 그의 캐릭터성 탓으로 돌리기엔 자꾸만 영화 외부를 가리키는 힌트가 눈에 들어와요. 검열을 피해 우회적으로, 잠깐씩 등장할 뿐이어도, 아는 사람들이라면 영화가 암시하는 시대상을 유추해내기란 어렵지 않죠. 이상을 가진 청년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바보가 될 수밖에 없는 사회. 영철이 그런 사회의 희생양임을 영화는 말하지 않고도 생각하게 만듭니다. 이는 《영상시대》 1호에 실린 하길종의 글에 담긴 야심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듯해요. “그러나 단지 영화적인 <재미>를 통해 스토리를 서술하는 일차적인 차원을 떠나서, 새 세대의 영화는 인간의 가치관과 기존 모랄을 재고하고 날카롭게 현실을 관찰하도록 대중을 선도하는 힘이다.” *주3 하지만 영화의 새로운 대안을 꿈꿨던 하길종은 검열 당국의 감시에 시달리며 흥행에 실패하다가 결국 요절했고, 그가 몰락한다고 보았던 “흥밋거리” 위주의 할리우드 영화는 되려 끈질기게 살아남았죠. 하길종에게 영향을 준 뉴 아메리칸 시네마 역시 결국 취사선택되어 주류에 흡수되었고요. 이전에 채연 님이 ‘독립’이나 ‘대안’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시작한 움직임들이 변질되지 않는 방법은 그 전에 소멸해버리는 것뿐인 듯하다고 말씀하신 것이 기억나요. 마테리알도 결국 소멸이라는 숙명을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싶어 당시엔 잠시 울적한 기분이 되었는데요. 다시 생각해보니 세상은 늘 소멸과 재생을 반복하잖아요. 70년대의 청년영화는 사라졌지만, 그들이 존재했기에 훗날 그 자리에 새로 태어난 또 다른 대안이 있을 테고요. 그렇게 생각하니 미래를 두려워하지 말고 지금 필요한 것을 하자는 결심이 서는 것 같아요. 언젠가는 소멸하게 되더라도, 지금 당장은 마테리알이 우리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낼 수 있는 목소리가 남아 있을 테니까요. 혹은 어쩌면… 스스로를 죽이고 다시 태어나는 방식으로 우리의 자리를 계속 만들어 나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 Original message ---------- From: "박채연" Date: 2025-03-XX XX:XX Subject: Re: RE: 마테리알 10호 기획의 건 To: "박현", "함연선" 두 분 메일을 읽고, 저도 서둘러 <바보들의 행진>을 보고 왔습니다. 영화의 흐름에 “발맞춰 나아가는 진행을 요리조리 피해가며 거부”한다고 현 님이 말씀해주셨는데, 정말 잘 표현해 주신 듯해요. 조금 다른 말일 수도 있는데, <바보들의 행진>을 보며 저는 < 너와 나 >(조현철, 2022)가 계속해 떠올랐어요. 정확히는, <너와 나>에 관한 김병규 평론가의 글 *주4 이요. 이 비평에서 문제시하는 <너와 나>의 연출이 <바보들의 행진>에서도 보이더라고요. 잘 아시는 대로 김병규 평론가는 <너와 나>가 “넘칠 만큼 치장되어” 있다며 “화면 안의 요소들은 자연스러움을 훼손하는 의식적인 ‘의도’로 (...) 화면에 돌출되어 있다”라고 평하는데요. <너와 나>에서는 이야기와 동떨어진 사물들이 등장한다면, <바보들의 행진>에서는 이야기와 동떨어진 사건들이 거듭 등장해요. 서사의 진행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는, 맥락 없는 사건들이요. 이를테면 병태( 윤문섭 )와 영자가 처음 만난 날, 영자가 (병태에게 거짓말하면서까지) 교수를 찾아가 시험 점수를 정정해 달라고 말하는 장면이라든지, 축구경기 중에 병태가 공을 차는 순간 운동화 한 짝이 날아가고 돌연 화면이 멈추는 장면이라든지, 교내에서 각종 스포츠 경기가 열리는 장면 말이에요. 현 님이 짚어주신 대로 이상하리만치 긴 이런 장면들 덕에, <바보들의 행진> 또한 김병규 평론가가 <너와 나>를 칭하듯 “은유적이고 우회적”이라고 볼 수 있겠더라고요. <너와 나>에서 조현철 감독이 “통제”의 주체가 되어 연출과 편집을 행한 데 반해 <바보들의 행진>은 검열이라는 (진짜) 통제의 대상이 되어, 화면이 삭제되고 대체되면서 이런 구조를 취하게 되었다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기는 하죠. 특히, 수업을 듣다가 응원전 연습을 위해 교실을 우루루 빠져나가는 학생들은 원래 시나리오대로라면 시위에 참여하러 가는 것이었다고 해요. 영철의 권유에도 꿋꿋이 교실에 남아 수업을 듣는 병태는 홀로 괴로워하는데, 이때 병태의 모습과 스포츠 경기 장면을 교차해 보여주죠. 검열받지 않은 원래 시나리오대로라면 스포츠 경기가 아닌 학생운동 현장이겠고, 그렇다면 운동에 참여하지 않는 병태의 심리상태가 꽤나 직접적으로 드러났을 테죠. 병태의 운동화가 하늘로 날아가며 멈춘 화면 각종 스포츠 경기 장면과 교차되는, 홀로 교실에 남은 병태의 모습 하길종 감독은 검열의 흔적을 숨겨 매끄럽게 다듬기보다는 오히려 그 이음매를 도드라지게 만들어, 이 영화가 검열되었다는 사실을 보란 듯이 드러내 보이죠. 이러한 맥락 없이 영화의 결과물 그 자체만 본다면 되게 전위적인 영화 같아요. 느닷없고 당황스러운 장면들이, 김병규 평론가의 말 그대로 “돌출되어” 보이는 거죠. 검열이 없었다면 <바보들의 행진>이 조금은 더 밋밋하고 직접적인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 라고 조심스럽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검열로 인해 영화가 어떤 형식적 효과를 얻게 된 점이 굉장히 아이러니하네요. 영화를 보다 보면 “엥?” 하는 순간이 있죠. 푹 빠져 몰입하고 있는데, 예기치 못한 장면에 당황하는 순간들이요. 분명 <너와 나>를 보는 내내 김병규 평론가는 물론 많은 관객들이 “엥?”들을 경험했을 테죠. 저도 그랬고요. 김병규 평론가의 비평은 이런 장치들, 영화 속 은유와 상징들이 모두 일정한 의미값을 갖고 영화 속에서, 또 서사의 흐름에서 제 역할을 다해야만 한다고 전제하는 듯해요. 하지만 저는 이들의 역할이, 서사 중간중간에 그런 긴장감을 줌으로써 주의를 환기하는 것이라고 봐요. 몰입을 방해하면서, 서사가 아닌 영화에 주의를 다시 집중시키는 핑거 스냅 같은 역할인 것이지요. (“야! 너 지금 서사에 너무 몰입하고 있어”) 다른 말로, “자연스러움을 훼손”함으로써 내가 보는 화면이, 실제 장면 속에 들어가 있는 게 아니라, 카메라를 통해 보고 있다는 점을 일깨우는 역할 말이에요. (“야! 이건 영화야”) 장면 하나하나의 의미를 해석해 가며 영화를 감상하는 것 자체가 가능한지는 차치하고, 과연 그러려고 애써야 할까요? <너와 나>에서 거울을 들고 있는 두 어린이는 과연 누구를 상징하는지, 브라키오사우루스는 왜 물웅덩이에 빠져 있는지, 그리고 <바보들의 행진>에서도, 병태가 축구경기를 하는 장면은 어떤 의도로 삽입되었는지, 하키 경기 장면은 왜 혼자 화질이 다른지, 이렇게 물어가며 감상해야 하나요? 그걸 묻고 답을 찾을 동안 영화는 계속되는데 말이죠. 그러니까, “엥?”이라는 감각이 추임새를 넘어서서 문장이 되고 “이건 어떤 의미일까? 무얼 상징하는 걸까?” 묻는 순간 관객은 함정에 빠지는 게 아닐까 싶어요. 스스로 판 함정 말이에요. 그럴 때는 몰입하던 고개를 조금 뒤로 젖혀 자세를 고쳐 앉고 미간 사이 힘을 빼, 함정에서 얼른 벗어나 다시 영화로 되돌아오면 되지요. <너와 나> 중 / <바보들의 행진> 중 저화질로 재생되는 하키 경기 장면 (사진: “ [너와 나] 메인 예고편 ”, 유튜브 너와 나) 마테리알의 야심에서 시작해 너무 멀리 와버렸네요. 다시 돌아가자면, 이 기회를 빌려 마테리알을 독자로서 접하다가 이제는 내부인원이 된 제 입장을 말씀드려봐도 좋을 듯해요. 저에게 마테리알은 연선 님 표현대로 “높고 커다란” 야심으로 무장하고 돌진하는 듯 보였어요. 마테리알이, 혹은 비평이 모종의 변화를 일으킬 수 있으리라 믿는 효능감이 돋보였죠. 불만이 많고, 목표지향적이며, 대범합니다. 편집부원으로 활동을 시작하고 난 뒤 생각이 바뀌었다, 이런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에요. 마테리알은 실로 변화를 꾀하고, 불만이 많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애쓰며, 쉽게 겁먹지 않습니다. 마테리알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이야기할 때 연선 님이 특히 ‘동료’를 많이 언급한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어요. 어쩌면 마테리알의 동력은 개인의 야심이 아니라 공동의 야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스포츠 경기 전, 선수들이 둥글게 모여 손을 포개 승리를 다짐하는 이미지가 스칩니다. 야심의 크기가 아니라, 야심의 겹을 따져 보는 것은 어떨까요? 박채연 드림 ---------- Original message ---------- From: "함연선" Date: 2025-XX XX:XX Subject: RE: Re: RE: 마테리알 10호 기획의 건 To: "박채연", "박현" 두 분께, <너와 나>에 대한 부정적 평가들은 영화 내에 상징적인 것을 과하게 배치해 놓는 창작자에 대한 반감에서 기인한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반감을 적극적으로 표명하다 오히려 반감의 대상이 가진 논리에 포섭되어 버린 듯한 인상이에요. 상징적인 것들이 너무 많다고 지적하다가, 끝내 많은 것을 상징으로 읽어내고야 마는… <너와 나>가 세월호 사건을 다룬다는 사실은 개봉 전부터 명약관화한 사실이었고, 영화의 뽀얀 화면, 컨테이너 박스에 갇힌 개들, 물웅덩이에 빠진 브라키오사우루스 인형 등은 세월호에 대한 놀랍도록 뻔한 상징이죠. 하지만 그처럼 쉬운 상징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것들이 상징이라는 사실을 금방 지나칠 수 있지 않나요? 그리고 영화적 현실로서 그것들을 감각할 수 있지 않나요? 저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채연 님이 말씀 주신 것처럼 상징을 읽어내는 와중에도 영화는 계속되고, 그렇기에 상징이나 의미를 발견하는 비교적 어려운 책무를 맡는다는 사실이 비평가들에게 중요한 것 같기도 해요. 스스로의 존재 가치에 대한 불안을 자신의 기능에 대한 확신으로 대체할 수 있으니까요. 저는 예전에 같은 영화나 영상작품을 여러 번 보면서, 그것이야말로 내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유사-전문성이다, 라고 생각하기도 했었어요. 일반 관객들은 굳이 같은 작품을 여러 번 안 볼 테니까요. 그들이 다른 데 배분할 시간들을 나는 같은 작품을 여러 번 보는 데 씀으로써 독자들에게 다른 기능을 제공한다, 는 생각으로 불안을 달랬던 셈이죠. 하지만… 지금은 솔직히 말해 비평이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인지 자꾸만 비평가로서의 저 개인보다는 마테리알에 집중하고 싶어져요. 얼마 전에 마테리알 7, 8호의 객원편집인이기도 했던 독립기획자 김신재 님께서 건넨 말이 생각나요. “점점 작품에 부속된 작품론을 안 다루고, 어떤 비평가의 작업을 연속선상에서 보고 비평적 야심(?)을 밀고 갈 수 있는 자리를 내어주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속도와 사이클을 따라서 뭔가를 계속 뽑아내야 할 때가 많으니까요. 작가나 비평가 모두 창작의 고민과 방법론, 비평적 과제를 자기 속도와 방향으로 풀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그런 바람입니다.” 이 얘기를 듣고 조금 정신 차렸어요. 같은 자리를 맴도는 듯한, 뭔가 막혀버린 듯한 느낌이 드는 이유가 자꾸만 스스로의 야심에 대해서만 고심해서였단 사실을 깨달았거든요. 좁은 의미에서의 동료들의 야심뿐 아니라 같은 그라운드에서 각자의 포지셔닝을 가져가고 있는 타인들의 야심에 대해서 보다 주의깊게 관찰하고 그들의 야심을 엮어내는 게 현재 마테리알의 사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독립’이나 ‘대안’ 등의 영역에 속한 움직임들은, 대체로 이질적인 외부의 저항에 무너지는 게 아니라 동질적인 주변의 사랑—또는 그 비슷한 것—에 파묻혀 괴사하는 경우가 많지 않나 합니다. 언제나 커다란 야심을 품으시길… 메이웨더와 싸운 맥그리거처럼…” 마테리알 7호 피드백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독자 코멘트를 요즘도 종종 생각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야심은 ‘무엇을 이루어 보겠다고 마음속에 품고 있는 욕망이나 소망’일 텐데요, 물론 위의 코멘트를 남긴 익명의 독자분은 마테리알로 하여금 “커다란 야심”을 가지길 요청하셨지만, 저는 앞선 메일에서 말했듯 우리의 야심을 ‘크기’와는 떨어뜨려 생각해보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맥그리거의 야심이 크기와는 관련 없었을 수도 있잖아요. 어쩌면 하길종 감독의 ‘절망하는 야심’과도 공명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하길종 감독은 검열로 인해 산산조각 난 영화의 이음매를 오히려 의도적으로 드러냄으로써 검열이라는 현실 자체를 폭로했고, <너와 나>는 때로는 촌스럽게까지 느껴지는 솔직함과 직접적인 ‘상징’으로 영화와 현실의 관계를 밀어붙였죠. 두 영화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이 놓인 현실과의 관계를 정직하게 표현했다는 점에서 닮아있습니다. 마테리알의 ‘크기와 상관없는 야심’ 역시 여기에 있지 않을까요? 만듦새보다는 지향점을 보려는, 자본과 제도와 관습을 걸고 넘어지려는 비평의 몸짓 말입니다. 작품이 던진 스루패스의 궤적을 감각하고, 우리도 그 공간으로 달려 나가는 열린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것. 이것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읽히느냐, 얼마나 큰 반향을 일으키느냐의 ‘크기’와는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그라운드 위에서 얼마나 예리하게 기존의 흐름을 간파하고, 얼마나 과감하게 새로운 공간을 향해 패스를 보내거나 패스가 보내질 곳으로 달려가느냐의 문제겠죠. 이런 관점에서 마테리알 10호는 그동안의 여정을 돌아보면서도, ‘스루패스로서의 비평’이라는 비전에 우리가 어떻게 계속해서 새로운 해석과 실천을 더해갈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하는 장이 되면 좋겠습니다. 서로의 생각을 꾸밈없이 나누는 이 서신교환처럼요. 아, 그리고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방금 전에 비평매체 지원사업 결과가 나왔어요. 지원이 확정되었습니다! 영화계에서는 비평에 대한 지원이 거의 없어서 결국 미술계를 통해 길을 찾아야 했네요. 다들 너무 고생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랜만에 좋은 영화들에 대해서 이야기 나누고, 마테리알의 실무가 아닌 추상적인 미래에 대해서도 여러분과 이야기 주고받을 수 있어서 좋았어요. 감사합니다. 조만간 오프라인에서 뵈어요! 연선 드림 <바보들의 행진> 중 / <너와 나> 중 *** 주1. 이예지, “TEXT TEXT TEXT”, 《아레나》, 2020. 5. 13. 주2. 전우형, “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1975) 의 검열 표상 ”, KMDb, 2018. 1. 28. 주3. 하길종, 「새 세대•새 영화•새 정신」, 『영상시대』 1호, 1977. 주4. 김병규, “ [비평] 〈너와 나〉와 한국 독립영화라는 문제, <너와 나>, <괴인> ”, 《씨네21》, 2023. 12. 6. 마테리알(영상비평지) l 마테리알은 ‘스루패스로서의 비평’을 지향한다. 박채연, 박현, 함연선으로 구성된 마테리알은 동시대 무빙이미지를 중심으로 미술계와 영화계 및 그 주변부를 아우르는 비평 활동을 펼친다. 축구에서의 스루패스가 상대팀 수비진의 틈새를 뚫어 새로운 기회를 만들듯, 마테리알은 예술계에 열린 공간을 창출하고자 한다. 영상비평지 《마테리알》 발행을 중심으로, 온라인 지면 의 비평적 텍스트 발행과 오프라인 행사 ‘오픈 스페이스’ 등을 통해 다양한 플레이어들의 비평적 상호작용을 모색한다.
2013년 여름, 급하게 써낸 트리트먼트가 운 좋게도 한국예술종합학교와 CJ E&M이 공동 주관하는 산학협력프로젝트 2기 개발작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한창 상업영화 현장에서 스크립터로 일하는 중이었지만, 이창동 감독님께서 기획총괄에 시나리오 멘토로 참여하시는 과정이라 어떻게든 병행하기로 굳게 마음먹었던 순간도 문득 떠오른다. 드디어 모임 첫날, 나와 함께 뽑힌 3명의 동기들과 함께 설렘과 기쁨에 잔뜩 들떠 감독님을 기다렸고, 조금 늦게 오신 감독님은 우리가 제출했던 트리트먼트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세심하고도 날카로운 피드백을 주셨다. 그리고 마침내 내 작품에 이르러서는, 아주 짧고 굵은 한 방만을 날리셨다. “이야기가 너무 가짜 같지 않니? 핵심만 남기고 처음부터 다시 써봐. 진짜를 찾아봐.” 충격이 너무 커서 창피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난 그 후 한 달 넘게 글은 한 자도 쓰지도 못했고, 그저 멘붕 속에서 방황하며 그간 억지로 피해왔던 진실과 마주해야 했다. 당시 내가 썼던 이야기는 서사적인 재미와 자극을 준답시고 소화도 못 하는 여러 장르와 장식들을 그저 전시하는 수준이었는데, 나 스스로도 왠지 모르게 이야기가 붕 뜨고 감정이 느껴지지 않아 고민하면서도 애써 외면했던 것이다. 이후 다시 간신히 마음을 붙잡은 나는, 8개월의 시나리오 개발 기간 동안, 대체 내 이야기 속에 ‘진짜’가 있긴 한 건지, 정말 말하고 싶었던 ‘핵심’은 무엇이었는지를 끝없이 자문하며, 새로 쓰고, 엎고, 또다시 쓰는 과정을 수차례 반복했다. 그리고 이듬해 최종 제작지원작에 당선되고 나서도, 예상보다 훨씬 줄어든 예산에 맞추느라, 또다시 ‘진짜 중의 진짜’와 ‘핵심 중의 핵심’만 남기는 수정을 감행해야 했다. 그렇게 2년이 넘는 시나리오 작업 기간 동안, 이야기 속 사건을 확장하는 대신 인물의 감정을 깊이 파고들려고 나름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데 그러다 보니 어쩐지 이야기가 너무 단순하고 평이해졌다. 그래서 한편 또 다른 걱정이 들고, 불안감이 일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아이들이 주인공인데, 이야기가 너무 작고, 유치하고, 사사로워 보이는 건 아닐까. 하지만 긴긴 고민 끝에, 결국 내가 그토록 영화로 드러내고 싶었던 세계가, 바로 그런 지극히 사적이고 내밀한 감정들이 오가는 평범한 아이들의 세계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렇게 어른이 되어서도, 나는 여전히 그때와 같은 세계에서, 같은 마음으로 고군분투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마침내 솔직히 직면하게 되었다. 인정하고 나니 편해졌달까. 할 수 있는 말이 그것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니깐 되려 이상한 안도감이 들었달까. 그다음부터는, 그냥 그런 나 자신을 믿어주기로 결심했고, 에라 모르겠다, 내처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니 가장 큰 행운이 찾아왔다. 초짜 감독인 나와 이런 작은 이야기를 전적으로 믿고 큰 힘을 실어주는 영화사와 스태프들을 만난 것이다. 특히 조감독을 맡아주었던 나의 절친 슬기와 민준원 , 김지현 촬영감독님은 이후 계속된 시나리오 수정 작업에서도 늘 아낌없이 거침없는 조언을 해주었고, 스크립터 유라와 연출부 리아는 때때로 나 자신보다 더 나를 믿고 진심으로 격려해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엔딩 신은 촬영 전날까지 붙들고 고민하며 수정에 수정을 거듭했는데, 그런 미친 나를 대체 무슨 마음으로 다들 지켜보고, 기다려주고, 응원해줄 수 있었는지, 생각해보면 다들 나만큼이나 이상한 사람들인지도 모르겠다. 한편, 시나리오만큼 치열하게 고민하고 힘을 쏟은 작업은 캐스팅과 리허설이었다. 사실은 2014년 중순에 작품을 준비하다 중단했으므로, 전체적으로 대략 8개월을 캐스팅에 매진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 동안, 영화사 아토의 김순모 제작 PD님이 나와 함께 직접 발로 뛰며 아역배우들을 찾았고, 직접 프로필을 받고, 직접 연락해, 방방곡곡 아역배우들을 만나러 다녔다. 사실 나는 이런 발로 뛰는 캐스팅 과정을 굉장히 좋아해서 프리 작업 중 가장 설레고 신나는 순간들이었는데(사실 예산이 없어 이 일을 맡길 다른 스태프도 없었다), 제작 PD님은 그 바쁜 와중에 그 모든 과정에 어떻게 참여하실 수 있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미스터리다. 오디션은 우선 배우와 1:1로 만나, 30분가량을 일상에 관한 잡담만을 나누며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1차에서 추려진 배우들을 대여섯 명의 그룹으로 묶어, 2-3시간 동안 일종의 ‘연극놀이’ 오디션을 여러 차례 진행했다. 나와 연출부들은 ‘선생님’으로 참여해 배우들을 이끌었고, 함께 간단한 게임부터, 몸풀기, 재연극, 즉흥극, 그리고 미리 준 대본을 바탕으로 한 상황극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도를 하면서 촬영으로 기록을 남겼다. 그리고 마침내, 그 모든 과정을 거쳐, 드디어 ‘선’의 최수인 , ‘지아’의 설혜인 , ‘보라’의 이서연 , 그리고 보라의 두 친구를 맡은 김채연 , 김희준 배우를 만나게 되었다. <우리들>의 촬영 현장 이후 리허설을 진행하며 아역배우들에게 시나리오를 보여주지 않기로 결정했는데, 텍스트에 얽매이지 않는 상황에서 보다 자유로운 마음으로 생생한 연기를 펼쳐주길 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 배우로서 자신이 어떤 역할인지, 어떤 감정을 연기할지 아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뜩이나 연기경험이 없는 어린 배우들을 불안해하는 것을 원치 않았고, 특히 연기 중에 진짜 마음이 다치는 일은 절대 없게 하는 게 제1원칙이었기 때문이다. 이 사뭇 상반돼 보이는 두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해 여러 고민이 있었고, 늘 조언을 구하던 연극놀이 선생님을 초빙해 특별 세미나부터 열었다. 그렇게 우리는 대체 연기가 뭔지, 배우가 어떤 사람인지에서부터, 각자 일상에 겪는 크고 작은 여러 가지 걱정과 불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소중한 시간을 갖게 되었다. (이때의 이야기들은 아직도 우리들만의 비밀로 남아있다!) 이렇게 나와 배우가, 또 배우와 배우가, 서로에 대해 알아가면서, 믿고, 의지하게 된 다음 최대한의 리허설 시간을 확보해 시나리오의 모든 신을 즉흥극으로 풀어보는 과정을 숨 가쁘게 진행했다. 내가 시나리오 속 상황을 직접 설명하고 필요한 대사를 알려주면, 배우들이 그 상황에 몰입해 자신만의 언어와 몸짓으로 그것들을 표현해보는 연습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같은 장면을 여러 번 반복하며 시나리오에는 없었던 새로운 디테일들을 찾아내기도 했고, 인위적이고 불편한 부분들은 함께 고민해 수정해나갔다. 확실히 배우들과 직접 이야기하며 함께 장면을 만들어 가면서 비로소 명확히 보이는 지점들이 있었다. 또한 콘티작업도 리허설을 관찰하며 병행했기 때문에, 그만큼 촬영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대비를 해나갈 수 있었다. 단편 <손님> 때부터 함께해온 김세훈 라인 PD는 모든 면에서 훌륭했지만, 특히 로케이션계의 황금손이었다. 때로는 감독보다 더 예민하게 시나리오를 분석해 여러 조건들을 따졌고, 직접 발로 뛰어 끝끝내 장소를 섭외하는 놀라운 능력의 소유자였다. 한편 영화 속 선의 집으로 나온 연립주택은 사실 재개발 지역의 빈집이었는데, 안지혜 미술감독이 집 내부에 가벽까지 세우면서 가구와 소품들을 채워 넣어, 마치 선네 가족이 평생 살아온 집처럼 보이는 마술을 부리기도 했다. 내가 콘티와 배우들을 붙잡고 씨름하는 동안, 스탭들은 각자 초저예산과 싸우며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여러 조건들을 가능한 것으로, 더 좋은 기회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7-8월의 무더운 한여름 동안, 1억5천의 말도 안 되는 예산으로, 무려 30회차의 기염을 토하며 < 우리들 >의 한 장면, 한 장면을 찍어나갔다. 촬영 내내 우리는 매일매일 새로운 기적을 만났다. 교육청의 도움으로 학교 섭외가 극적으로 이루어진 것, 어린 배우들을 진심으로 아끼고 챙겨주는 스태프들(특히 이시현 조명감독과 강나루 동시기사, 김동위 미술팀장은 모든 배우 친구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는 현장의 아이돌이었다. 그들이 없었다면 배우들은 더위와 피로와 나의 잔소리를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을 만난 것, 회차 때는 쨍하다가 휴차 때만 비가 온 것, 깊이 몰입한 배우들이 시나리오에 없던 놀라운 장면을 만들어낸 것 등, 지금 꼽으래도 3박 4일은 이야기해도 모자랄 기적들이 가득했다. 물론 기적이 일어난 만큼 충격과 공포의 순간도 많았다. 나는 촬영 5회차 만에 현장을 뛰어다니다 발가락이 부러져 내내 깁스를 하고 다녔고, 더위를 먹은 어린 배우들이 어지러움을 호소하며 급기야 토하기도 해 촬영이 중단된 적도 있다. 또 우리는 배우들의 즉흥 연기를 담아내기 위해 한 번에 5분가량의 롱테이크를 소화해야 하는 일이 많았는데, 이 때문에 촬영감독님들과 붐맨의 팔과 어깨는 매번 부서지기 일보 직전까지 갔다. 촬영 말미엔 촬영감독님이 가슴에 통증이 느껴져 혼자 조용히 심각한 건강 검진을 받기도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매일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엎고 메고 다니다 생긴 산업재해로 밝혀졌다. 게다가 30여 명의 4-6학년 초등생을 10회차 가까이 매일 상대해야 했던 연출부 친구들의 정신건강은 또 누가 책임질 것인가! (내가?) 아이들과 함께 하는 작업은 매일 자신의 인내심과 피로도의 수치를 새롭게 갱신하는 작업이다. 사실 우리 연출부들은 누구보다 아이들을 사랑하고 배려하는 천사 같은 친구들이었는데, 어쩌면 바로 이번 촬영을 통해 평생 절대로 아이를 낳지 말자는 결심을 하게 되었을 수도 있다. (무서워서 물어보지도 못했다.) 후반 작업 역시 천국과 지옥의 연속이었다. 특히 이번 작품은 즉흥적으로 연기한 장면이 많았고, 대사도 넘쳐났으며, 온전히 감정으로 진행되는 서사였기 때문에 더더욱 편집이 중요했다. 만약 박세영 편집감독(우리는 단편 <손님> 때도 합을 맞췄다!)이 아니었다면, 그 모든 소스를 함께 세심하게 훑고, 조각내면서, 그야말로 장면을 한 땀 한 땀 직접 만들어가지 못했을 것이다. 돌이켜 보니, 우리는 주말도 반납한 채 장장 3개월을 볕도 들지 않는 편집실에 몽땅 쏟아부었다. 특히 많은 대사를 잘라내고 압축하는 과정에서, 사운드까지 아주 미세하게 편집해야 했는데, 때론 음절 단위로 대사를 조각내서 이어 붙일 정도였다. 덕분에 진도가 느려 때론 하루에 한 신을 편집하고 탈진해 앓아눕기도 했지만, 어떻든 반쪽이라도 완성하고 나면 또 묘하게 쾌감이 일어 종일 신나하기도 했다. 우리는 “계속 이렇게 강박적으로 편집을 하다가는, 결국 둘 다 편집증에 걸리고 말 거야!”라는 시시껄렁한 농담을 종종 주고받았는데, 사실 둘 다 진짜 그렇게 되고 있는 거 아닌지 몰래 서로를 의심하기도 했다. 단편 < 콩나물 >부터 함께 했던 고아영 믹싱감독은 주인공 소녀의 깊은 감정들을 ‘호흡’을 통해 드러내려는 계획이 있었다. 사실 고백하자면, 그게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드러날까 반신반의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함께했던 경험으로 믹싱감독을 전적으로 믿었기에 적극적으로 지지했고, 결국 최수인 배우는 장장 이틀에 걸쳐 영화 전체, 모든 장면의 호흡을 재연하는 녹음을 해야 했다. 그리고 나중에 전체 믹싱을 들었을 때야 비로소 그 자연스럽고도 디테일한 표현에 무릎을 탁 칠 수 있었다. 한편, 연리목 음악감독의 스코어는 마치 자연의 소리처럼 아이들의 호흡과 목소리, 공간의 앰비언스 안으로 녹아들었다. 애초에 나는 메인 악기로 기타를 원했는데, 연리목의 적극적인 주장에 피아노곡을 먼저 들어보기로 했다가 바로 설득당해버리고 말았다. 감정을 억지로 과장하거나 일부러 고양시키지 않으면서도, 다만 그 자체로 감정의 폭과 깊이를 확장시키는 놀라운 음악이었다. 나의 애매한 주문에도 이렇듯 멋진 음악을 만들어준 연리목에 아직까지도 깊은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 그렇게 숨 가쁘게 영화를 쓰고, 찍고, 완성해 어느덧 개봉을 앞두게 되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동안 그저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를 찍는 것에만 무식하게 덤벼들었지, 정작 ‘개봉’이란 과정을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결국 나는 또 이렇게 닥쳐서 헐레벌떡 개봉준비를 하면서야, 영화산업에 대해 간신히 하나둘 배우고 있다. 결국 관객을 만나야지만, 그 긴긴 시간 멋진 사람들과 꽃 같은 시간을 바쳐 만든 이 무언가가 비로소 ‘영화’가 된다는 것을, 부끄럽지만 이제야 매일매일 새롭게 깨닫는다.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 이제 개봉까지 나흘밖에 안 남았는데, 지금까지도 내가 정말 진짜를 쓴 건지, 말하고 싶었던 핵심을 잘 담아 찍어냈는지 여전히 모르겠다. 여러 가지 착각과 잘못된 판단, 실수로 인해 빚어진 오류만 눈에 보이는데,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갖은 부끄러움과 후회가 치고 올라 매일 밤 몰래 훌쩍 도망쳐버리고 싶은 마음도 들지만, 한편으론, 나 혼자라면 절대 시작조차 할 수 없었던 모든 여정에 진심을 담아 함께 달려와 준 고마운 사람들의 얼굴이 계속 떠올라 어떻든 간신히 버티는 중이다. 벌써 이 영화가 완전히 내 손을 떠났다는 느낌이 든다. 이제 남은 건, 오로지 관객분들의 평가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그 결과를 마음 깊이 받아들이는 것밖에 없는 것 같다. 두렵고 또 두렵지만, 그래도 뭔가 배우는 과정은 되겠지. 그래 뭐, 잘 배워서 다음 영화 때 잘 하면 되지 뭐! 하면서, 다시 출발선에 서있는 나를 매일 매일 달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