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녀성
- 감독
- 홍성기
- 제작년도
- 1964
- 출연
- 김혜정, 신영균, 양미희, 황정순, 남미리, 강문, 차유미, 옥상미, 김칠성, 성소민, 최삼, 이상사, 이민, 남석훈, 임성희, 주란지, 박철, 소부자, 임선희, 조덕성, 문미봉, 최승이
[사진] <추억은 영원히>(전택이, 1960)에서 이민과 노경희 이민(李敏)은 1947년 서정규 감독의 <불멸의 밀사>(1947)의 이준 열사 역으로 영화계에 발을 디딘 후 한중영화사 제1회작인 강춘(江椿) 감독의 16밀리 시대극 <연화(蓮花)>(홍서량, 박양실 주연, 1948)와 반공영화 <화랑도>(염매리 공연, 1951) 두 편에 출연했다. <불멸의 밀사>는 이준 열사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한 전후 시기의 독립운동의 이면을, <연화>는 조선조 제25대 왕 철종 12년에 일어난 대교육자의 분기(奮起)와 기생 도화(道花)의 비련을 그린 것이다. (『민주일보』, 1948년 6월 27일, 광고) 배역 모두 2천여 명의 응모자 중에서 선발하였다. (『대동신문』, 1948년 7월 8일) [사진] 이준 열사 역을 맡은 이민의 첫 출연작 <불멸의 열사> (사진제공: 김종원) <화랑도>는 북한에서 월남한 청년이 헤어진 애인을 만나 반공전선에 나서는 얘기로, 촬영 중에 6.25를 만나 중단됐다가 피난지인 대구에서 완성한 것이다. 이런 내용의 특성상 <화랑도>는 개봉 후 상이군인들이 조직한 영화계몽반에 의해 남한 일대의 각 지역에서 상영되기도 (「상이군인들이 영화로 계몽운동」, 『조선일보』, 1952년 11월 13일) 했다. 그는 이렇게 일찍이 영화계에 발을 들여 놓았으나 한동안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다. <춘향전>과 <자유부인>의 히트 전후 1953년 휴전과 함께 정부가 서울로 환도한 후에도 대부분의 영화인들은 부산, 대구 등지에 남아 있었다. 그해 초겨울이었다. 대구의 자유극장 옆 단골다방에서 차를 마시고 있던 이민의 눈에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 들어왔다. <임자 없는 나룻배>(1932)와 <갈매기>(1948)로 유명한 이규환 감독이었다. 이민은 여종업원에게 차 한 잔을 시켜 보낸 뒤 의아한 표정을 짓는 그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이 일은 결국 이규환 감독의 <춘향전>에 기용되는 계기가 되었다. 남원의 기생 딸 성춘향(조미령 분)을 사랑하게 된 사또의 아들 이몽룡 역이었다. 이민은 연기뿐만 아니라 제작 진행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예정했던 남원 대신 촬영지로 선택한 경북 달성군 가창면 냉천동이란 마을은 로케 장소로는 적합했으나 기계를 움직일 동력이 없었다. 전력을 끌어오기 위해서는 가까이 있는 달성광산의 도움이 필요했다. 다행히 일이 쉽게 풀리느라 마침 그곳 광산소장이 이민의 경성제대 공과 시절 동기생이어서 전기를 끌어올 수 있었다. [사진] 이규환 감독의 <춘향전>, 여배우는 조미령 이렇게 필름 길이 1만 2천자, 상영시간 2시간 15분으로 완성한 <춘향전>이 1955년 1월 16일 서울 국도극장에 개봉되자 첫 날부터 초만원을 이루었다. 관객들이 서울 변두리는 물론 인천, 수원 등지에서까지 트럭을 동원하여 단체로 몰려들 정도 (이규환, 「남기고 싶은 이야기(50) ‘영화60년’」, 『중앙일보』, 1980년 2월 21일) 였다. 그 결과 <춘향전>은 20일 동안 10만 여명이 관람하여 당시까지 한국영화사상 최다 흥행 기록을 세웠다. 이에 따라 이민은 여주연인 조미령과 함께 일약 국민적인 스타로 떠올랐다. 여세를 몰아 <막난이 비사>(김성민, 1955), <단종애사>(전창근, 1956)와 <애인>(홍성기, 1956), <자유부인>(한형모, 1956) 등에 기용되었다. <막난이 비사>에는 조선조의 홍문관 정오품 벼슬인 교리(郊理)로 등장했다. 진사의 외동딸(이경희)을 소실로 삼으려다 반대에 부딪치자 그 아버지를 역적으로 몰아 목을 치게 하는 악역이었다. <단종애사>에는 세종대왕에 이어 등극한 후 재위 2년 만에 어린 단종을 신하에게 부탁하고 죽은 비운의 문종대왕 역을, 김내성 원작 <애인>에는 요정마담의 딸인 여대생(노경희)을 좋아하는 청년으로 나와 아프레게르적인 끼를 드러내었다. 그러나 이민에게 결정적인 돌파구를 열어준 것은 크레인 촬영을 시도한 정비석 원작 <자유부인>이었다. 가부장 중심의 유교적 인습사회에 외래문화가 들어오면서 변해 가는 여성들의 모습을 한 대학교수 부인(오선영: 김정림 분)을 통해 보여준 이 영화에 춤으로 그 부인을 유혹하는 건달 대학생 신춘호역으로 등장했다. 그는 ‘마담 익스큐즈 미' ‘알러브유’ 따위의 영어단어를 읊조리며 능란하게 대학교수 부인의 탈선을 부추겼다. 이 영화는 1956년 6월 9일 서울 수도극장(현재의 스카라)에서 개봉되었고, <춘향전>의 흥행을 무색하게 하는 대박을 터뜨렸다. [사진] <자유부인>의 이민과 안나영(오른쪽) 그는 잇따라 <실낙원의 별>(홍성기), <애원의 고백>(홍성기), <여성전선>(김기영), <찔레꽃>(신경균), <청실홍실>(이상 1957, 정일택) 등 5편에 이어 58년 <그 밤이 다시 오면>(노필), <꽃도 생명이 있다면>(홍일명), <낙엽>(박구), <느티나무 있는 언덕>(최훈), <모정>(양주남), <청춘비가>(이규환), <별만이 아는 비밀>(이선경), <별아 내 가슴에>(홍성기), <촌색씨>(박영환), <흐르는 별>(김묵) 등 12편에 출연했다. 주로 신문연재소설과 연속방송극을 원작으로 한 것이다. [사진] <청춘비가>의 이민과 김아미(오른쪽) (사진제공: 김종원) <청실홍실>에는 사장 딸(엄앵란)의 구애에도 전쟁미망인(이민자)을 사랑하는 운전기사로, <그 밤이 다시 오면>에는 잡지사 여사원(이빈화)을 임신시키고 회사 돈을 훔쳐 이용하려다가 실패하자 자취를 감추는 회사원으로, <청춘비가>에는 일찍이 고아가 돼 헤어졌던 여동생(김아미)을 혈육인 줄 모르고 사랑하게 되는 기구한 화전민 출신의 오빠로, <별아 내 가슴에>에는 대학생(김동원)과 기생(주증녀)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사귀는 여대생(김지미)의 양부가 자신의 아버지임을 모르는 출판사 사원으로, <흐르는 별>에는 아내를 두고 월남한 후 혼자 딸을 기르며 온갖 시련을 겪는 장님으로 각기 등장한다. [사진] <그 밤이 다시 오면>의 이민과 이빈화(사진제공: 김종원) 1959년에는 <가는 봄 오는 봄>(권영순), <꽃피는 시절>(최훈), <꿈이여 다시 한 번>(백호빈), <그 여자의 죄가 아니다>(신상옥), <내 사랑 그대에게>(하한수),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신상옥), <동백꽃>(정일택), <동심초>(신상옥), <밤마다 꿈마다>(이사라), <별은 창 넘어로>(홍성기), <비오는 날의 오후 세시>(박종호), <사모님>(최훈), <아내>(김묵) <애모>(신경균), <장마루촌의 이발사>(최훈) 등 27편으로 출연작이 증가된다. 태평양전쟁에 끌려갔다가 딸(전계현)을 남기고 죽는 <가는 봄 오는 봄>의 학도병, 6.25전쟁 때 작전을 수행하던 중 눈에 부상을 입고 국군병원으로 후송된 <꿈이여 다시 한번>의 육군 중위, 수절하는 전쟁미망인(이민자)을 사랑하는 <별은 창 넘어로>(홍성기)의 관상대 기사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 가운데 주목을 끈 것은 고아로 자란 한 여성(김지미)을 사랑하여 결혼 단계에 이르렀으나 전사했다던 그녀의 약혼자(최무룡)가 나타나면서 파국을 맞게 되는 <비오는 날의 오후 3시>의 미8군 소속 교포 2세 헨리 장 역이었다. 그는 이 영화에서 군복과 양복을 번갈아 입으며 때로는 양미간을 찌푸리는 특유의 표정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사진] <비오는 날의 오후 3시>의 이민과 김지미 최훈(9편)과 홍성기 감독(8편)의 단골배우처럼 나왔던 그가 신상옥 감독의 <그 여자의 죄가 아니다>,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 <동심초> 등 세편에 기용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미혼 여성(최은희)의 원치 않는 임신과 기혼 여성(주증녀)의 불행한 불임의 모순을 다룬 <그 여자의 죄가 아니다>의 너그러운 약혼자, 구한말 20세의 청년 이승만에게 개화학문을 배우라고 권하는 신긍우, 전쟁미망인(최은희)을 도우려는 친구에게 차용증부터 챙기는 <동심초>의 냉정한 증권회사 사장 신동일 역할이 그것이다. [사진] <그 여자의 죄가 아니다>에서의 이민과 최은희 이민은 이처럼 영화계에 진출한 뒤에 가장 바쁘고 화려한 시기를 보냈다.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할까, 이 기간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꿈이여 다시 한번>, <나는 고발한다>, <비오는 날의 오후 3시> 등 세편의 제작에 손댔다가 손실을 보기도 했다. 연극 경험 없는 명문대 출신 정상이 있으면 내리막길이 있는 법. 그의 독주는 얼마 못가 뒤에서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에 의해 위협받기 시작한다. 이미 <젊은 그들>(신상옥, 1955)로 주목받기 시작한 최무룡과 <피아골>(이강천, 1955)에서 두각을 나타낸 김진규의 도전으로 확고한 듯싶었던 인기의 성곽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러한 조짐은 1960년대에 이르면서 뚜렷이 나타난다. 60년 한 해 동안 출연 편수가 <애수에 젖은 토요일>(최훈), <추억은 영원히>(전택이), <투명인의 최후>(이창근), <햇빛 쏟아지는 벌판>(정창화) 등 10여 편으로 줄어들고 이마저도 예시한 네 편을 제외하고는 조연급에 밑도는 것이었다. <애수에 젖은 토요일>(1960)은 그동안 우리 영화가 즐겨 다뤄온 민족분단, 이산의 비극을 소재로 한 것이다. 6.25 때 헤어진 사람을 기다리다 지친 나머지 윤락가로 전락한 여자(김지미)가 죽은 줄 알았던 애인이 부상당한 군인의 모습으로 살아 돌아오면서 빚어지는 비극으로, 이민이 그 주인공 박경일 중위 역을 맡았다. <추억은 영원히>에는 6.25전쟁 중에 부모를 잃고 정신이상자가 돼 거리에서 방황하는 여자(김지미)를 간호하는 착한 운전기사로, <투명인의 최후>에는 부족한 능력 때문에 애인을 빼앗기고 음독자살을 기도했으나 죽는 대신 투명인간으로 변해 복수를 하는 끈질긴 캐릭터로 나타난다. 이후 이민은 62년 안현철 감독의 <그리움은 가슴마다>를 비롯한 <양귀비>(최훈), <여자의 일생>(신경균), <운명의 골짜기>(전창근) 등 5편과 63년 <돈바람 님바람>(김수용), <상처받은 두 여인>(이규환) <백마고지>(김수길) 등 3편, 64년부터 66년까지 <처녀성>(홍성기, 1964), <대석굴암>(홍성기, 1965), <눈물 젖은 왕관>(하한수, 1966)을 만들고 칩거에 들어간다. [사진] <여자의 일생>의 이민과 이민자(사진제공: 김종원) 그랬던 그가 10년 만에 장미희의 데뷔작 <성춘향전>(1976, 박태원)에 이몽룡의 아버지 이진사역으로 등장하여 관심을 끌었다. 19년 전 서른다섯 살 이몽룡이 이번에는 쉰여섯 그의 아버지가 된 것이다. 제작자의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렇게 이민은 1951년 <화랑도> 이후 4년여 동안의 공백기를 제외한 15년의 배우생활을 마쳤다. 그때까지 출연한 70여 편 가운데 <춘향전>(1955)을 비롯한 <막난이 비사>(1956), <단종애사>(1957),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1959), <양귀비>(1962), <대석굴암>(1965) 등 6편의 시대·역사극과 <햇빛 쏟아지는 벌판>(1960), <백마고지>(1963) 등 전쟁물을 제외하고는 60여 편이 넘는 작품이 멜로드라마였다. 그 후 영화계를 떠나 사업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던 이민이 17년 만에 홀연히 서울에 나타났다. 영화를 제작한다는 것이었다. 일흔 세 살 때였다. 한 도예공의 삶을 통해 장인정신을 기리는 <서편제> 유의 영화라고 했다. 자신이 시나리오를 쓰고 주연을 맡는다는 이 영화의 예산은 일화 5억 엔으로 학창시절 친구였던 일본아시아문예협회 키누가와 고오이치(衣川耕日) 회장이 부담한다고 했다.(⸀‘자유부인’ 플레이보이 이민 73세에 영화 찍는 인생」, 『부산일보』, 1998년 2월 6일) 그러나 일본과 중국의 합작을 꾀한 이 계획은 얼마 못가 무산되고 말았다. 이민은 1921년 2월27일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이시중(李時中)이다. 삼형제중 막내로 선비들과 어울려 시조창을 즐기고 사군자 치기를 좋아했던 아버지 때문에 어머니는 삯바느질로 생계를 꾸려야 했다. 그러나 춘천초등학교(1934년)와 춘천중학교를 졸업(1939년)하자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의 회고 (한국영상자료원 기획, 「이민」, 『한국영화를 말한다: 한국영화의 르네상스 1』, 도서출판 이채, 2005, 272~273쪽) 에 따르면, 벽이나 전주에 걸린 일본 시세이도(資生堂) 화장품의 선전을 위해 도자기로 만든 선전용 레이또 크림이나 눈에 넣는 와카모도라는 영양제 광고를 봐뒀다가 밤에 몰래 뜯어내 고철로 팔았다고 한다. 이렇게 3년 반 동안 모은 돈이 여비가 되었다. 1940년경이었다. 동경에서 가까운 사이타마현(琦玉県)의 우라와(浦和)고등학교에 들어가 아르바이트를 하며 1년 정도 다니다가 귀국했다. 이후 경성제국대학교(서울대 전신) 예과에 들어갔다. 그는 이 대학을 나올 무렵 길에서 발탁돼 영화와 인연을 맺게 된다. 스물여덟 살 때였다. [사진] <여성전선>(김기영, 1957)에서 이민과 조미령 1950년대 중반 이후 한때 최무룡, 김진규와 함께 삼각경쟁 구도를 이룬 이민에게는 당시의 일반적인 배우와는 다른 삼유삼무(三有三無)라는 특징이 있었다. 그것은 그만이 가진 세 가지 있음(三有), 즉 서울대학교(경성제대 후신)를 나온 명문대 출신이라는 점과 <춘향전>이나 <자유부인>과 같은 최다 흥행작을 일구어낸 광복 후 최초의 미국풍 댄디보이였다는 사실이다. 세 가지 없음(三無)은 연극 경험이 없는데다 본격적인 액션영화에 출연한 적이 없고 연기 외에는 대외 활동을 한 적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는 이 시기에 첨단적인 정장과 점퍼, 스웨터의 옷맵시로 여성들의 허영심을 자극한 대표적인 '니마이메(二枚目: 미남배우의 통칭)였다. *
1926년 12월 2일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난 함완섭은 진학을 위해 상경해 외숙부인 김성춘 조명기사의 집에서 기거하면서 자연스레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장차 자신과 함께 작업하게 되는 영화인들과도 인연을 맺게 된다. 일제강점기 <전과자>(김소봉, 1934)의 최진과 더불어 1세대 조선인 조명기사로 활동했던 김성춘은 해방 후 한국영화 조명기사의 계보가 그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한국영화 기술자들에게 ‘오야지(おやじ, 親父)’로 통했던 인물이다. 기술학교인 홍아학원을 거쳐 1944년 경성전기공업학교 전기과를 졸업한 함완섭은 김성춘의 추천으로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의 광희동 촬영소 조명부에 입사하면서 영화 조명 일을 시작했다. 1942년 9월 발족한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는 조선영화령(조선총독부제령 제1호)에 의거해 기존 10개의 민간 영화사가 강제 통합되어 친일, 군국주의 선전영화를 제작한 국책 영화사였지만, 200여 평의 촬영 스튜디오를 비롯해 녹음실, 현상소, 최신식 기자재 등을 구비하고 말단 기술진에게도 공무원 월급의 두 배를 지급했던, 당시로서는 최고의 직장이었다. [사진 1]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 창립 기념 사진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에서 김성춘의 조명 조수로 최인규 감독의 <태양의 아이들(太陽の子供達)>(1944), <사랑과 맹서(愛と誓ひ)>(1945), <신풍의 아들들(神風の子供達)>(1945)에 참여한 함완섭은 해방 후에도 김성춘을 따라 조선영화건설본부의 뉴스영화와 최인규가 설립한 고려영화협회의 <자유만세>(최인규, 1946), <독립전야>(최인규, 1948), <죄 없는 죄인>(최인규, 1948) 등에 조명 조수로 참여했다. 그리고 스물세 살 되던 해인 1948년 계몽영화인 <국민투표>(최인규)로 최연소 조명기사로 데뷔한다. [사진 2] 영화 <사랑과 맹서>(최인규, 1945) [사진 3] 영화 <자유만세>(최인규, 1946) [ 사진 4] 영화 <독립전야>(최인규, 1948) 같은 해 <반도의 봄>(이병일, 1941)의 원작자였던 김성민의 감독 데뷔작 <사랑의 교실>(1948)로 극영화 조명기사로 정식 데뷔한 함완섭은 이후 조수 시절 인연을 맺은 최인규의 조감독 출신들인 홍성기, 신상옥, 정창화 등의 감독 데뷔작 조명을 담당하기도 했다. 한국 최초의 컬러 극영화 <여성일기> 1948년 함완섭은 한국 최초의 컬러 극영화인 홍성기 감독의 데뷔작 <여성일기>(1949)에 조명기사로 참여했다. 바로 1년 전 일본계 미국인이 촬영한 기록영화 <무궁화동산>(안철영, 1948)이 컬러로 제작된 바 있지만, 순수 국내 자본과 제작진으로 만들어진 극영화로는 이 영화가 처음이었다. [사진 5] 영화 <여성일기>(홍성기, 1949)의 신문광고(출처: 경향신문 1949년 6월 6일자 2면) ‘최초’라는 수식어답게 함완섭은 이 영화로 한국에서 가장 먼저 컬러 영화의 조명을 경험할 수 있었지만, 그만큼 더 큰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다. 자신은 물론 감독도 촬영기사도, 심지어 스승인 김성춘도 컬러 촬영에 대한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함완섭은 늘 하던 대로 흑백 영화 촬영 때처럼 조명을 했는데, 결과물을 보고선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고 한다. 컬러 필터를 쓰는 법도 몰라 낮에도 텅스텐 조명을 그대로 쓴 데다 마침 낙엽이 지는 가을에 촬영해 화면에 붉은색이 많이 돌았던 것이다. 더욱이 <여성일기>는 네거티브 단계 없이 원본 자체가 포지티브 프린트로 변하는 리버설 필름(reversal film)으로 촬영했는데, 이 때문에 러쉬(rush)를 뜰 수가 없어 원본 필름으로 편집해야 했고 프린트도 만들 수 없어 극장에 영사기 두 대를 설치해 원본 필름과 녹음 필름을 따로 걸어 상영했다고 한다. 흥행은 어느 정도 되었다지만, 기술적으로는 함완섭의 표현대로 “반쪼가리 작품이나 마찬가지”였다. 이후 함완섭은 <애국자의 아들>(윤봉춘, 1949), <여인애사>(신경균, 1950)를 거쳐 신상옥 감독의 데뷔작 <악야>(1952)를 촬영하던 중 전쟁을 맞았고, 피난 시절에도 <삼천만의 꽃다발>(신경균, 1951), <최후의 유혹>(정창화, 1953), <출격명령>(홍성기, 1954) 등에 참여하며 활동을 이어나갔다. 홍성기 감독과 1950년대 중반 한국영화의 조명 양상 한국전쟁 후 김성춘의 조명 조수 출신인 고해진, 이한찬 등과 함께 2세대 조명기사로 자리매김한 함완섭은 신경균, 윤봉춘, 이병일 등 원로 감독의 작품들뿐만 아니라 홍성기, 정창화, 유현목 등 한국영화의 중흥기를 이끈 젊은 감독들의 작품에 다수 참여했다. 특히 홍성기와의 작업이 많았는데, <열애>(1955), <애원의 고백>(1957), <실락원의 별>(1957), <별아 내 가슴에>(1958), <실락원의 별(후편)>(1958) 등 그의 전성기 시절을 함께했다. [사진 6] 영화 <애원의 고백>(홍성기, 1957)의 한 장면 [사진 7] 영화 <별아 내 가슴에>(홍성기, 1958)의 한 장면 사실 1950년대 중반 한국영화의 조명은 열악하고 부족했던 기재와 여건 등으로 인해 조명기사 고유의 미학적 조명은 꿈도 꿀 수 없었고, 단지 화면을 밝히는 수준의 인물 삼점 조명(three point lighting) 같은 기본적인 조명만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성기는 조감독 시절부터 함께 고락을 같이한 함완섭을 유독 신뢰했고 조명에 있어서만큼은 그에게 전적으로 일임했다고 한다. 이 시기 홍성기 감독의 작품들 중 유일하게 필름이 남아있는 <열애>는 당시 한국영화의 조명 양상을 잘 보여준다. 세트 촬영이 흔치 않았던 시절이라 영화의 모든 공간을 오픈에서 촬영했는데, 실내 낮 장면에서 창문에 커튼이나 블라인드를 치고 촬영했던 것은 바깥의 광량을 커버할 만한 실내 조명이 부족해서였으며, 벽에 인물 그림자가 많이 지는 것은 세트 촬영일 경우엔 부감대 같은 높은 위치에서 조명을 할 수가 있지만 오픈에선 아무리 조명기의 키를 높여도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진 8~11] 영화 <열애>(홍성기, 1955) 속 장면들. 부족한 실내 조명으로 인해 커튼과 블라인드로 광량을 조절해야 했으며, 그림자가 벽면에 가득 드리워졌다. 또한 당시 영화들에서 카메라에 감마(gamma) 필터를 끼워 낮에 밤 장면을 찍는 데이 포 나이트(day-for-night) 촬영이 많았던 이유는 산이나 해변에서 촬영할 경우 전기를 끌어올 재간이 없어 어쩔 수 없이 그랬던 것이지만, <열애>에서 영옥(염매리 분)의 집 앞 장면처럼 전기를 끌어오기 용이한 장소에서의 촬영은 당시에도 웬만하면 밤에 촬영했다고 한다. [사진 12, 13] 영화 <열애> 속 야외촬영 장면들. 촬영 장소의 전기 수급에 따라 촬영 방식과 시간을 바꿔야 했다. 화영공작소와 <자유결혼> 1950년대 중반 조명 기재는 김성춘이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 시절 일본의 아라시간주로(嵐寛壽郎)프로덕션에서 수입해 보유하고 있던 조명기 150kw와 전쟁 당시 북한의 국립영화촬영소에서 노획해온 국방부 정훈국 영화과에서 보유하고 있던 소련제 조명기 100kw, 미공보원(USIS)에서 썼던 미제 조명기 70kw 등이 있었는데, 파손이 심해 실제 사용할 수 있는 대수는 얼마 되지 않았다. 더욱이 당시 영화 한 편에 50~100kw 정도의 조명기가 필요했는데, 네 명의 기사가 동시에 사용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양이다 보니 함완섭은 자신의 촬영을 마치고 급하게 김성춘의 작업 현장으로 조명 기재를 실어날라 가며 번갈아 사용하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한다. 그러던 중 1957년 함완섭은 자신이 대여해 쓰던 미제 조명기를 샘플로 화영공작소에 의뢰해 총 120kw의 조명기를 자체 제작했다. 화영공작소는 김성춘의 문하에서 조명 조수로 일했던 김종철이 설립한 조명 기재 제작소로, 비록 수공업적 방식이긴 했으나 당시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영화 조명기를 국내에서 제작할 수 있게 되어 한국영화 조명인들의 숨통을 틔워주었던 곳이다. [사진 14] 영화 <자유결혼>(이병일, 1958)의 세트 촬영 현장 <자유결혼>(이병일, 1958)은 함완섭이 화영공작소에 의뢰해 제작한 조명기를 사용한 첫 번째 작품으로, 당시로선 나름 풍족했던 조명기 덕에 <열애>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세련된 조명이 보여진다. 오픈 실내 장면에서 벽에 드리워졌던 인물 그림자는 말끔히 사라졌고, 낮임에도 항상 커튼이나 블라인드를 쳐놓아 답답했던 화면도 커튼을 걷어냄은 물론 창문을 활짝 열어 놓고 촬영해 시원한 느낌마저 준다. [사진 15~18] 영화 <자유결혼> 속 장면들 함완섭은 이러한 것이 풍부해진 조명 때문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실내 장면을 세트에서 촬영했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세트 촬영을 하면 조명기의 위치를 높일 수 있고 실외 광원 설정도 조명기로 조절할 수 있어 여러모로 오픈 촬영 때보다 작업하는 데 유리했다는 것이다. 최훈 감독과 광보영화사 함완섭은 홍성기의 조감독 출신인 최훈 감독의 데뷔작 <모녀>(1958)에서 조명을 맡은 후부터 <느티나무 있는 언덕>(1958), <사모님>(1959), <장마루촌의 이발사>(1959) 등 최훈과 호흡을 맞추어 나간다. 그렇다고 홍성기와의 작업을 곧바로 그만둔 것은 아니었다. [사진 19] 영화 <모녀>(최훈, 1958)의 한 장면 [사진 20] 영화 <느티나무 있는 언덕>(최훈, 1958)의 한 장면 당시 제작 편수에 비해 조명기사가 부족해 기사 한 명이 여러 작품을 동시에 진행했는데, 함완섭은 3팀을 운용했으며 각 작품마다 제1조수가 책임을 맡고 자신은 세트 촬영이나 로케이션 밤 촬영 같은 어려운 촬영에만 들여다보았다고 한다. 같은 시기 작업한 홍성기의 <별아 내 가슴에>, <실락원의 별(후편)>도 당시 최고참 조수였던 방영원(방기찬)이 전담하고 있었는데, 함완섭은 <청춘극장>(홍성기, 1959)부터 아예 그를 독립시켰으며 이후에도 자주 홍성기의 촬영장을 찾아 일을 도왔다. <사모님>, <장마루촌의 이발사>를 작업하며 기획⋅제작에도 관여했던 함완섭은 1959년 최훈과 함께 광보영화사를 설립한다. 당시 한국영화계는 해를 거듭할수록 풍작을 거두고 있었고, “영화가 흥행을 하면 몇 배가 남는 장사가 되니까” 너나 할 것 없이 우후죽순 영화사를 만들던 시기였다. 1958년에 제작된 작품 편수가 74편인데 반해 당시 영화사가 72개사일 정도였다. 1959년엔 한국영화사상 처음으로 100편대를 넘어 111편이 제작되기도 했다. 하지만 제작자로 변신한 함완섭에게 운은 따라주지 않았다. 광보영화사로 <어느 여교사의 수기>(최훈, 1960), <애수에 젖은 토요일>(최훈, 1960), <아버지>(최훈, 1961) 등을 제작했는데, 하필 <어느 여교사의 수기>가 개봉할 때 4.19가 터졌고 <아버지>가 개봉할 땐 5.16 쿠데타가 일어나 흥행은커녕 손해만 크게 입었던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62년 영화법이 제정되며 영화사 통폐합 조치가 내려졌고, 광보영화사는 동아영화흥업주식회사와 통합되고 만다. [사진 21] 영화 <어느 여교사의 수기>(최훈, 1960)의 포스터 [사진 22] 영화 <애수에 젖은 토요일>(최훈, 1960)의 포스터 이후 함완섭은 동아영화흥업에서 제작 담당으로 일하며 <사랑의 승부>(최훈 ․ 이용호, 1962), <비밀통로를 찾아라>(이용호, 1962), <천동(天動)>(정승문, 1963)을 기획, 제작했지만, 동아영화흥업마저도 1963년 6월 영화사 등록요건이 더 강화된 제1차 개정 영화법의 시행으로 등록이 취소되었다. 신상옥 감독과의 재회 <에밀레종>(홍성기, 1961) 이후 조명을 중단했던 함완섭은 1964년 최훈 감독의 <눈물의 자장가>(1964)를 시작으로 다시 조명기사로 복귀했다. 그리고 홍성기 감독의 <대석굴암>(1964), <처녀성>(1964), 최훈 감독의 <울지마라 물새야>(1964), <파도>(1967), <밀어(密語)>(1967), <지금 그 사람은>(1968), <난풍(暖風)>(1968), 김묵 감독의 <폭력지대>(1965), <최후의 대결>(1967) 등을 작업하며 조명 활동을 이어나갔다. 그러던 중 1968년 함완섭은 신상옥의 부름을 받는다. <악야> 이후 16년 만이었다. <지옥화>(1958) 때부터 신상옥의 대부분 작품에서 조명을 담당했던 이계창이 1967년 3월 베트남에서 <여자 베트콩 18호>(강범구, 1967)를 촬영하던 중 불의의 폭파 사고로 사망하면서 그 공백을 함완섭에게 대신 맡기고자 했던 것이다. 그렇게 신상옥과 해후한 함완섭은 <여자의 일생>(1968)을 시작으로 <내시>(1968), <천년호>(1969) 등의 조명기사로 신상옥과 함께했다. [사진 23, 24] 영화 <여자의 일생>(신상옥, 1968) 속 장면들 당시 신필름은 안양촬영소를 인수하고 자회사를 설립해 연간 30여 편의 영화를 제작하던 국내 최대의 영화사였고, 일본의 류덴샤(柳電社)에서 수입한 조명기 등 최신 기재를 보유하고 있던 꿈의 영화공장이었다. 함완섭은 <내시>를 작업할 때 당시 보통 영화 한 편에 소요되던 광량의 두 배에 달하는 1,200kw를 썼을 정도로 풍족한 환경이었다고 기억한다. 촬영 스튜디오에는 300kw 이상의 기본 전력이 들어왔고, 한 장면에만 100kw 이상 쓴 적도 여러 번 있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격세지감(隔世之感)이었다. [사진 25, 26] 영화 <내시>(신상옥, 1968) 속 장면들 [사진 27, 28] 신상옥 감독의 영화 <천년호>(1969) 속 장면들 하지만 그 호사(好事)도 오래가지 않지 않았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 영화산업은 장기 불황에 빠져들었고 신필름도 예외가 아니었다. 사실 그 조짐은 함완섭이 신상옥의 작품에 참여하기 시작할 때부터 보였었다. 큰 몸집을 유지하기 위해 연간 30여 편의 영화를 양산해야 했지만, 흥행 성과는 미미했고 빚만 불어나는 악순환이 이미 그때부터 있어왔던 것이다. 더욱이 신필름은 1970년 시설 기준 미달로 등록이 취소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고, 규모가 대폭 줄어든 안양영화제작주식회사로 재설립된다. 함완섭은 <평양폭격대>(신상옥, 1971)를 작업한 후 1972년부터 최은희가 교장으로 있던 안양영화예술학교에서 조명과 전기 등을 관리하는 시설감독으로 근무했다. 이후 1973년 <삼일천하>(신상옥)에 조명기사로 참여하기도 하지만, 1975년 7월 신상옥이 외화 쿼터를 획득하기 위해 뇌물을 제공한 혐의로 구속되는 등 어수선해지자 퇴사했다. [사진 29] 영화 <삼일천하>(신상옥, 1973)의 한 장면 [사진 30] 영화 <평양폭격대>(신상옥, 1971)의 한 장면 <세종대왕>과 마지막 작품 함완섭은 한동안 일선에서 물러나 지내다 1978년 당시 최대 제작비와 인력을 투입한 대작 사극 <세종대왕>(최인현)에서 조명 책임을 맡게 된다. 자신이 조명기사로 참여한 59편의 작품들 중 가장 애착하는 작품으로 꼽기도 한 이 영화에서 함완섭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동안 쌓아왔던 모든 역량을 쏟아부어 작업했다. 낮 장면에 쓰는 데이라이트(daylight) 조명기 10대를 홍콩에서 전구를 수입해와 자체 제작했고 경복궁 오픈 촬영에서 유용하게 사용했다. 기존의 텅스텐 조명기도 당시 모을 수 있는 최대의 물량을 동원해 유려한 롱 쇼트 밤 장면을 구현해내기도 했다. 더욱이 1년여의 긴 촬영 기간에 로케이션과 오픈 촬영이 많아 고생을 많이 한 작품이었지만, 그해 대종상 후보에까지 오르고 수상은 하지 못해 아쉬움이 컸다고 한다. [사진 31~33] 당시 최대 제작비와 인력을 투입한 영화 <세종대왕>(최인현, 1978) 속 장면들 이후 함완섭은 1979년부터 현진영화사에서 조명실장으로 재직하며 직접 나서기보다 후배들을 돕는 일에 매진했다. 그리고 1980년 <느티나무 있는 언덕>에서 촬영기사와 조명기사로 만나 오랫동안 친구로 인연을 맺어온 심우섭 감독의 <난 모르겠네>를 마지막으로 극영화 조명을 그만두었고, 1986년 아시안게임 기록영화의 조명을 끝으로 은퇴했다. [사진 34~36] 함완섭이 참여한 마지막 극영화 작품 영화 <난 모르겠네>(심우섭, 1980) 속 장면들
제목의 ‘장미’는 꽃 이름이기도 하겠지만, 실제 유지인 의 극 중 배역 이름이기도 하다. 전화벨이 울리자, 장미(유지인)는 졸린 눈으로 “어보세요?”라고 전화를 받는다. 금요일을 토요일로 착각하고 꿈나라에 빠져있던 장미는 부랴부랴 학교로 향한다. 모범생이라 그런 줄 알았더니 친구들과 약속이 있었던 모양이다. 심지어 캠퍼스에서 여대생들이 대놓고 담배 피우기 애매하던 시절(지금도 그런가?), 화장실에서 친구들과 함께 모여 담배를 피워대기 시작한다. 그런 그녀들을 꼬나보는 학교 관계자가 바로 < 여곡성 >(1986)에서 귀신이 몸을 빌린 시어머니로 출연하여 혀를 길게 뽑으셨던 석인수 선생이다. 이름은 남성적이지만 당대 한국영화의 못된 시어머니, 무당, 여죄수 등을 도맡으며 황정순의 반대편에서 장르와 분량을 아랑곳하지 않고 한국영화에 이바지하셨던 훌륭한 분이시다. 그처럼 공부는 뒷전인 장미와 그 일행들을 기다리는 남자는 바로 규식( 송승환 )이다. 장미만을 사랑해온 규식은 카페에서 사랑의 징표라며 무언가를(알지만 도저히 쓸 수 없다) 테이블에 올려놓는다. 그러고는 (역시 알지만 도저히 쓸 수 없는) 동정과 처녀성에 대한 규식의 일장연설과 플래시백이 이어진다. 단순한 세대차이로 치부하기에는 납득하기 힘든 그런 논리로 규식이 급기야 “우린 결혼해야 돼, 부모들 사이에서도 얘기가 끝났어”라고 말하자, 장미는 허탈한 듯 소리친다. “아이구 이 피곤한 친구.” 그래 궤변은 늘 피곤한 법이다. 장미 가시로 만든 핏방울 징표 “세 방울은 장미 거, 세 방울은 내 거” 규식을 따돌린 장미와 그 일행은 야심한 시각이 되자, 정체불명의 술집에서 만난 하키부 남자들과 옷 벗기 내기 술 마시기 게임을 시작한다. 이계인 이 대학생으로 나오는 것은 이해한다 해도, 같은 해 만들어진 하길종 의 < 병태와 영자 >(1979)에서 병태( 손정환 )에게 “군대에서 여자 친구 사진을 갖고 있는 것은 정신무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충고하는 소대장으로 나온 이해룡 이 전혀 정신무장이 안 된 하키부 예비역 대학생으로 나오는 것은 무척 황당하다. 심지어 유지인 보다 실제 20살이 많고, 영화 속 중년남으로 나오는 신성일 보다도 한 살 많은 한국영화계의 대표적 원로배우다. <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1989)에서는 은주( 이미연 )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아무튼 여자가 한 명 모자라지만 대담하게도 두 사람을 상대하겠다는 장미로 인해 게임이 시작된다. 그런데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은 철민(이계인)이 술자리를 뒤엎으며 장미에게 “자신을 내동댕이치는데 익숙한 여자”라고 소리친다. 그처럼 < 가시를 삼킨 장미 >의 초반부는 뭔가 ‘한국판 < 님포매니악 >’스러운 분위기로 후끈 달아오른다(물론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너무 설레는 마음으로 받아들이지는 마시길). 문제의 대학생들(가장 앞이 이해룡 , 세 번째가 이계인 )과 후끈한 게임 정진우 감독의 < 가시를 삼킨 장미 >는 이장호 감독의 < 별들의 고향 >(1974)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른바 ‘호스티스 멜로드라마’의 자장 안에 있다(<별들의 고향>을 각색한 이희우 작가가 <가시를 삼킨 장미>를 썼다). 그를 B무비 장르에 명쾌하게 포함시킬 수는 없겠으나, <가시를 삼킨 장미>는 A무비를 지향하는 대사들의 연속이 오히려 현재에 이르러 B무비처럼 느껴지는 경우다. 당시로써는 ‘여성 주체’에 대한 심오하고 페미닌한 텍스트로 해석될 수 있었겠지만 말이다. 그나마 그를 현실적으로 살려내는 것은 유지인 의 탁월한 연기력이다. 그런 혼돈의 술자리를 끝내고 헛헛한 마음으로 귀가한 장미 앞에는 쓸쓸한 새장이 있다. 까마귀(< 하얀 까마귀 >), 뻐꾸기(<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 앵무새(<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 갈매기(< 백구야 훨훨 날지마라 >) 등 유난히 새를 사랑해온 정진우 감독의 미장센이 빛나는 대목이다. 심지어 신일룡 , 이미숙 주연의 또 다른 연출작 <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1984) 또한 앞서 <두견새 왜 피를 토했나>라는 제목을 달고 있었다(그보다 앞선 최초의 제목은 <짧았지만 만족했어요>라는 야릇한 제목이었다). 당시 「경향신문」은 이 영화를 촬영 중인 정진우 감독을 인터뷰한 취재기사에 “정진우 감독 조류학자 되려나”라는 제목까지 달았었다. 누가 봐도 현실의 장미를 비유하는 것이 빤한 새장 속의 새를 향해 그녀가 말한다. “넌 왜 그렇게 불쌍하게 있니. 날아, 노래를 해, 날아, 노래하라고!” 거기서 끝이 아니라, 알아듣지도 못하는 애꿎은 새를 향해 더 심도 깊은 논의를 펼쳐 보인다. “우리는 왜 수컷을 통해서 존재가치가 인정되니? 잘못된 거야! 난 싫어. 그런 모든 걸 다 감수하고 살 수만은 없어. 싫어, 싫어, 싫어~~~” 새장 이후 부산 집으로 내려가던 장미는 우연히 옆에 앉은 중년남자( 신성일 )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가정으로 인해 번뇌에 빠진 그를 “우리가 어떤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 얼마나 한정된 범위 안에서의 선택인가를 생각해봐요”라며 위로한다. 파산하고 부산에 내려온 남자는 아내도 자식도 답이 되지 못한 현실 속에서 장미를 만나고서야 삶을 돌아볼 기회가 생긴다. 하지만 “앞으로 백 가지 슬픔이 있더라도 한 가지 행복을 위해 살겠어요”라는 장미의 비현실적이고 천사 같은 사랑도, 남편의 하숙집에서 여자 팬티를 발견하고 연락한 그의 아내( 선우용녀 )로 인해 ‘불륜’이 되어 산산조각 나고 만다. 그럼에도 “죽음을 모르고 뛰어드는 하루살이에게 박수라도 칠까”라며 두려움 없는 사랑을 꿈꾸는, 그렇게 자신을 (깡에 살고 깡에 죽는) ‘깡생깡사’로 표현하는 장미의 모습은 꽤나 매력적이다. 하지만 그런 불륜이 집에도 알려지고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중년남자를 향한 마음이 ‘항상 충족되지 못한 아버지의 이미지를 찾으려 했던 것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 관계는 끝나버린다. 예정된 사랑의 실패로 장미는 이전보다 더 방탕한 생활을 하고, 급기야 약물 과다복용으로 정신병원에도 간다. 당시 국내 유일의 정신병원이었던 ‘청량리뇌병원’에서는 장미를 두고 ‘마음의 병’이라는 진단을 내린다. 이후 겨우 진정이 됐을 즈음에는 혼자 동시 상영관을 찾아 영화만 보는데, 그런 그녀 앞에 세호( 한진희 )라는 미남자가 나타난다. 또한 비슷한 시기 옛 친구 진영( 김보미 )이 결혼 예찬론을 펼쳐서 장미의 마음에 적잖은 파문을 일으킨다. 그렇게 장미는 안정된 생활에 대한 막연한 희망을 품는 듯하다. 진영과 통화하며 “우리들의 방황도 어떤 식으로든 끝장이 나려나 봐”라는 장미의 얘기 뒤로 엘비스 프레슬리의 ‘버닝 러브’가 흐른다. 얼마 뒤 세호의 집요한 애정공세로 두 사람은 건너편으로 당인리 화력발전소가 보이는 한강변에서 데이트를 즐기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세호의 몸개그는 장미의 얼굴에 잃어버린 미소를 되찾아준다. 영양가 없는 남자들 하지만 세호 또한 ‘똑같은 놈’이다. 결혼까지 생각한 장미가 임신을 하게 되지만, 세호는 어머니가 장미의 과거를 알아서 결혼을 승낙하지 않고 있다는 핑계까지 대며 한사코 결혼을 거부한다. “아직도 엄마 젖을 빨고 싶겠죠? 조금씩 엄마한테서 벗어나요”라고 충고하지만 세호의 마음은 변함이 없다. 이후 세호의 진짜 비밀이 드러나면서, 남자 잘못 만나 고생하는 장미의 비극은 종지부를 찍는다. 여느 호스티스 멜로드라마와 별다를 바 없는 설정 안에서도 < 가시를 삼킨 장미 >의 유지인 은 <별들의 고향>의 경아( 안인숙 )와 비교해도 독특한 매력을 발산한다( 정진우 감독이 같은 해 만든 < 심봤다 >의 유지인이 얼마나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지 비교해 보면 좋을 것이다. 이듬해 출연한 이장호 감독의 < 바람불어 좋은 날 >과는 또한 얼마나 비슷한 모습인지도). 더불어 < 별들의 고향 > 이후 유행처럼 만들어지던 아류작들 대부분은 그저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관음증을 영상화한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가시를 삼킨 장미>는 ‘버림받은 여자의 방황’이라는 나름의 한계 안에서도, 고민의 흔적이 역력한 이희우 작가 특유의 대사들과 정진우 감독의 집요한 연출력이 결합해 유지인의 장미를 보다 입체적으로 재구성한다. 영화 속에서 오랜만에 다시 만난, 그리고 드디어 다른 여자 친구가 생긴 규식과 장미가 나누는 대화가 기억에 남는다. “난 아직도 너를 이해 못 하겠어”라는 규식의 회한 가득한 말에 장미는 이렇게 답한다. “나 자신도 나를 이해 못 해.” “나 자신도 나를 이해 못 해.” 이건 유지인 이 예뻐서 그냥... 유지인 신성일 한진희 송승환 감독: 정진우 각본: 이희우 개봉극장: 스카라 관람인원: 75,757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