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와 애인
- 감독
- 김성민
- 제작년도
- 1957
- 출연
- 이택균, 주증녀, 강숙희, 김승호, 최명수, 성소민, 박순봉, 김유희, 임양, 양일민, 송의숙, 한정자, 김승권, 이해자, 이경자, 박명옥, 연영, 안호, 전석진, 정애란, 권기석, 이희순, 윤혜원
[사진] 영화 <물망초>에서 주증녀 남편 유지 이은 <조국의 어머니> 주증녀는 1950년대를 눈앞에 둔 1949년 3월 윤대룡 감독의 <조국의 어머니>로 스크린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다. 독립운동을 하던 남편이 일본 헌병에 체포돼 모진 고문으로 죽자 아내가 그 유지를 이어 싸우다가 광복을 맞게 되는, 이른바 이 시기의 특징인 항일 영화이다. 잇따라 황정순, 주선태, 황해, 최남현, 이민 등 신인이 몇 달 사이에 쏟아져 나온다. 이렇게 이름을 알린 주증녀는 16밀리로 찍은 최초의 천연색 극영화 <여성일기>(홍성기, 1949)에 이어 <여인애사>(신경균, 1950), <흥부와 놀부><이경선, 1950) 두 편에 출연한다. [사진] <여성일기> 현장 사진(앞열 왼쪽이 주증녀, 오른쪽이 황정순) 하지만 6.25 전란 후 주증녀가 다시 활동을 재개한 것은 전쟁으로 헤어졌던 연인이 재회하는 김성민 감독의 <애원(哀怨)의 향토>(1954)부터였다. 잇따라 <자유전선>(김홍, 1955), <인생역마차>(김성민, 1956), <애인>(홍성기, 1956), <처와 애인>(김성민, 1957), <실낙원의 별>(홍성기, 1957), <청실홍실>(정일택, 1957), <인생화보>(이창근, 1957), <별아 내가슴에>(홍성기, 1958), <실낙원의 별 후편)(홍성기, 1958), <모녀>(최훈, 1958), <별만이 아는 비밀>(이선경, 1958), <마도의 향불>(신경균, 1958) 등 11편에 기용된다. 대부분이 당시 작고한 김내성의 「애인」, 「실낙원의 별」 류의 인기 통속소설과 방송극을 원작으로 한 것이었다. [사진] <실낙원의 별> 스틸 사진(중앙이 노경희, 우측이 김동원) ‘국산 갱스터 ’(「영화주평」. 『한국일보』, 1956.09.16) 를 지향한 <인생역마차>는 신문기자와 암흑가의 두목(이향, 1인2역) 사이에서 사랑을 선택해야 하는 비운의 여성을 보여 주는가 하면, <처와 애인>에서는 월남한 남편의 외면 속에 참고 견뎌야 하는 실향민의 비애를, <실낙원의 별>과 <실낙원의 별 후편>에서는 애독자(노경희)와 사랑에 빠진 인기 작가 아내(옥영)의 좌절과 반전의 삶을, <청실홍실>과 <별만이 아는 비밀>에서는 전쟁미망인과 딸의 행복을 위해 참고 견디는 애틋한 모성애를 각기 표출해 낸다. 주증녀는 특히 <실낙원의 별>의 호연으로 보다 더 좋은 의미의 대중성을 갖게 되었다. (유동준, 「영화로 보는 실낙원의 별」, 『경향신문』, 1957.09.28.). [사진] <청실홍실>의 한 장면, 좌측은 영화배우 엄앵란(사진제공 김종원) 그 이후 <낭만열차>(박상호, 1959), <그 여자는 행복했던가>(송국, 1959), <아내>(김묵, 1959) 등 주로 여성 멜로물에 출연했으나 자신이 제작한 <그 여자는 행복했던가>(기획 허영)의 흥행 실패와 잇따른 언론계 종사자와의 스캔들로 인해 이미지에 타격을 입게 된다. 그러나 김기영 감독의 <하녀>(1960), <고려장>(1963)에 이어 김수용 감독의 <만선>(1967)과 <산불>(1967) 등 1960년대의 출연작에 이르면서 달라진 모습을 보인다. 상투적인 내용과 도식적인 인물패턴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작품 선택에 변화가 온 것이다. 재봉틀 일로 가계를 도우며 두 자녀와 가정부의 유혹에 빠진 남편(김진규)까지 신경을 써야 하는 <하녀>의 아내, 잘못된 효행의 악습에 따라 산채로 버려져야할 운명에 처한 <고려장>의 할머니, 바다에 나간 두 아들을 잃고, 실성해버린 <만선>의 어머니(곰치 아내), 마을에 숨어들어온 인민군 탈영자를 사이에 두고 다른 과부와 성적 비밀을 공유해야 하는 <산불>의 과부 점례 등 다양한 캐릭터가 그런 예이다. 이 같은 질적 성취는 결국 제5회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산불)과 제11회 부일영화상 여우주연상(산불), 그리고 제6회 대종상 여우조연상(만선) 등 세 개의 큰 상을 받게 되는 경사로 나타난다. [사진] <하녀>의 한 장면 [사진] <고려장>의 한 장면 여덟 살 연극소녀에서 은막의 유망주로 강렬한 눈매와 우수의 그늘을 드리운 독특한 마스크로 팬들에게 사랑받은 주증녀는 1925년 2월10일 함경남도 영흥군 엄기면 덕하리에서 태어났다. 부농의 무남독녀로 어린 시절을 보내고 함남여고를 졸업하자 동경하던 극단 고협(高協)에 들어갔다. 1943년 열여덟 살 때였다. 그녀가 처음 무대에 선 것은 <무영탑>(연출 유치진)의 단역인 시녀 구슬아기 역이었다. 이후 <청춘의 윤리>, <맹진사댁 경사> 등 연극에 출연하며 연기력을 다졌다. 이 무렵 그녀는 극단 예원좌(藝苑座)에서 고협(高協)으로 옮겨온 배우 허영(許影)과 눈이 맞아 혼인하고, 대건사(大建社)의 직속극단 청탑(1946년 11월23일~)의 첫 연극 <보검>(3막4장)에 김승호, 허영 등과 함께 출연했다. (『자유신문』, 1946.11,09) 조용하고 섬세하면서도 선이 뚜렷한 그녀의 연기는 보는 이들의 시선을 끌었다. 이런 그의 재능은 얼마 못가 새 얼굴을 찾는 윤대룡 감독에 의해 발견된다. 허영 외에 손전과 권일천이 공연한 <조국의 어머니>였다. [사진] <만선>의 한 장면(사진제공 김종원) 이렇게 은막에 진출한 주증녀는 1950년대까지 ‘잘 나가는 배우’로, 60년대 이후에는 ‘연기파 배우’로 주어진 역할에 충실했다. 그 사이 신변에도 변화가 있었다. 허영과 헤어지고 가십에 오르내리던 언론계 종사자 윤호중과 재혼한 것이다. 하지만 70년대 초반부터 갑자기 눈앞이 흐려지는 현상이 나타나면서 정상적인 연기를 계속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1974년 검객영화 <철면객>(이형표, 장청천)에 출연할 무렵이었다. 종합 진단 결과 뇌종양이었다. 수술을 포기한 채 스스로 육체를 갉아먹는 고통 속에서 약물 치료만 계속했다. 다만 한 가지 위안이 있다면 열일곱 살 큰 딸이 치는 피아노 소리를 듣는 일이었다. “추석이 며칠 안 남았구나. 추석빔을 마련해야 할 텐데…” 유족들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주증녀는 1980년 9월18일 동트는 새벽 6시30분 남편과 1남 1녀, 정들여 가꾼 정원의 나무와 마지막 작품 <청색시대>(1976, 정인엽) 등 3백여 편의 영화를 남기고 25년에 이르는 연기생활을 마쳤다. 당시 56세였다. “예술인마을에 정착한지 벌써 5년이 돼간다. 시골도 아닌 서울의 주택가에 무슨 마을이냐고 하겠지만 기실 이 마을이란 어휘에 나는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정감과 향수를 느끼고 있다. 나에게 있어서 어쩌면 유일한 안식처가 될지도 모르는 이곳 예술인마을- 이름처럼 황토색 짙은 옛날의 마을은 아닐지라도 서울에서 유일한 ‘마을’이라는 희소가치가 있다.” 이는 주증녀가 뇌종양을 앓을 무렵 영화진흥공사 발행 월간 《영화》(1974년 5월호)에 발표한 수필 「예술인마을 우거기(寓居記)」의 한 대목이다. *
한국영화사상 가장 비극적인 삶을 살다간 여배우를 꼽는다면 단연 < 월하의 맹세 >(1923)의 이월화 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출생지는 물론 부모가 누군지, 성조차 모른 채 젖어머니 손에서 자라나 배우가 됐으나 기생 노릇을 하다가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댄서생활을 하던 끝에 심장마비로 죽은 그 일생 자체가 꾸며낸 한 편의 비극과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석금성 (石金星)도 이에 못지않은 삶을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출생 신분이 분명하고 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랐다고는 하나 성인이 된 후 겪은 세상살이는 참으로 모진 것이었다. 일찍이 생살을 도려내는 아픔으로 피붙이와 헤어지고, 가까이 있는 자식과도 거리를 두고 살아야 했던 그녀의 삶은 이월화보다 더 비극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인이 되기 40일 전의 얘기 내가 석금성 여사를 마지막으로 뵌 것은 작고하기 40일 전이었다. MBC가 제작하는 TV다큐멘터리 촬영을 끝내고 그가 묵던 남영동 한 여관 부근에 있는 다방에서였다. 많은 얘기 끝에 여사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신상에 대해 털어놓았다. “해방 후 생활이 어려워 옷가지 등을 동두천에 나가 쌀과 바꿔다 끼니를 잇곤 했지. 하루는 황철 (黃徹, 월북배우)에게 자식들을 먹이고 공부시킬 자신이 없으니 남편이 있는 북으로 데려가달라고 부탁했어. 그래서 4남매 모두 월북하게 된 거야.” 그런데 1991년부터 북으로 간 자녀와 연락이 닿았다고 한다. 일본을 통한 간접적인 소식이었다. 18세 때 ‘샘물터에서’라는 노랫말로 재능을 인정받은 막내딸 최로사(崔露砂, 당시 65세가 량)는 손꼽히는 시인으로 성장했고, 막내아들 호섭(57세 가량)은 고모 최승희의 영향을 받아 안무가로 활동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그동안 ‘말 못할 사정’을 털어놓으면서 들고 있던 북한 화보잡지를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막내딸의 근황을 알리는 글과 사진이 실려 있었다. 그의 처지를 이해한 국가안전기획부의 묵인 아래 일본을 통해 전달받은 것이라고 했다.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한숨을 길게 내쉬던 그녀는 한 가지 소망이 있다면 죽기 전에 자식들의 모습을 보는 일이라고 했다. 순간 여사의 눈에 물기가 어렸다. 그녀는 얼른 손에 든 담배 연기가 매워서 그렇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그녀는 하루 세 갑의 담배를 피우는 애연가였다. 1991년 북으로 간 자녀로부터 연락이 닿기 전까지만 해도 여사에게는 아들 이택균 (李澤均)과 며느리 강숙희 (姜淑姬)가 있었다. 그들은 1950년대부터 활약한 부부배우였다. 이택균은 원래 화가 지망생이었으나 1949년 안진상 감독의 <육탄 십이용사>의 단역인 성사 역으로 캐스팅되면서 영화계에 나왔다. 이후 < 낙동강 >(1952), < 최후의 유혹 >(1953), < 미망인 >(1955), < 교차로 >(1956) 등 주로 멜로드라마에서 주연 및 조연을 했고, < 처와 애인 >(1957) 때는 아내와 주연을 나눠 맡았다. 여사는 그들에 대해 묻자 뜻밖에도 “지금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 지 소식이 없다”고 냉정하게 말했다. 며느리에 대해서는 남 얘기하듯이 “1950년대 중반에 할리우드에서 왔다는 배우가 있었다.”고 전제하고 “ 윤인자 를 만났더니 그애는 택시를 타도 건방지게 문을 열어주어야 한다고 하더군. 하루는 나일구다방(명동)에서 약속하고 이병일 감독하고 기다리는데 선글라스를 쓰고 나타났어요. 하도 고까와서 ‘선배 앞에서 웬 검은 안경이냐’고 야단을 쳤지. 그때는 택균이와 연애하는 줄도 몰랐거든.” 이렇게 들려주었다. 그의 직선적인 성품이 잘 드러난 자리였다. 두 번의 혼인과 남북으로 갈린 혈육 1907년 12월 3일 평안남도에서 태어난 석금성 의 본명은 정의(丁義)였다. 일찍이 서울의 진명여학교를 다니다가 극단 토월회와 인연이 닿으면서 1925년 연극계에 투신했다. 이 무렵 충청도 갑부 이충직과 결혼, 1926년 장남 이택균 (李澤畇)을 얻게 된다. 그러나 3년 만에 남편과 헤어지고 1929년 김영환 감독의 < 약혼 >으로 영화에 첫발을 디디게 된다. 잇따라 김상진 감독의 < 종소리 >(1929)에 출연했으나 기대만큼 빛을 보지 못했다. 그 뒤 프로문학운동에 가담한 무용가 최승희의 오빠 최승일(崔承一)과 가정을 이루고 슬하에 2남2녀를 둔다. 그녀는 연극 무대에 서다가 잊을 만하면 영화에 얼굴을 내미는 식으로 1930년대와 40년대에 걸쳐 <심청>(안석영, 1937)의 단역 장승상 부인과 내선일체를 강조한 친일 어용영화 < 너와 나 >( 허영 , 1941)에 주인공 나카다 겐지로(永田絃次郞, 한국명 김영길)의 어머니역을 맡는다. 이때 처음 창씨 개명한 이름 가야마 사다코(桂山貞子)를 사용했다. 이렇게 일제강점기를 보낸 마감한 석금성 은 광복 후 < 마음의 고향 >(1949)을 비롯해 < 춘향전 >(1955), < 장화홍련전 >(1956), < 그 여자의 일생 >(1957), < 마도의 향불 > < 자유결혼 >(1958), < 청춘극장 >(1959), < 장희빈 >(1961), < 성난 코스모스 >(1963), < 치마바위 >(1964) 등 150여 편을 통해 퇴기나 악독한 계모, 독부, 작부, 주모 등 주로 성격이 강한 캐릭터를 소화해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더욱이 < 화촉신방 >(1966) 이후 스크린과 멀어진 상태에서 거의 16년 만인 76세의 나이에 정진우 감독의 < 백구야 훨훨 날지 마라 >(1982)로 컴백, 흑산도의 악덕 주모역할을 맡아 제3회 영화평론가협회상 특별상을 받는 관록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 뒤 80대 중반의 나이에도 <분례기>(1992, SBS), <친애하는 기타 여러분>(1993, SBS) 등 TV 드라마에 출연하며 노익장을 과시했다. 신극의 모태인 토월회의 유일한 생존자로서 말년에도 늘 짙은 마스카라, 매니큐어와 루즈가 선명한 화장을 즐겼던 석금성 여사는 화려했던 한때의 각광을 추억으로 간직한 채 아흔 살을 눈앞에 둔 1995년 9월 3일 오후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나 홀로’ 남영동 여관과 광명시에서 홀로 어렵게 살다가 눈이 펑펑 내리는 산골 간이역 대합실에서 교도소에 간 아들을 기다리는 자신의 출연 TV드라마 <사평역(沙平驛)>(1981)의 노모처럼 북에 있는 혈육을 보지 못한 채 한 많은 생애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