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낚시]영천권 산속 부들밭
- 제작년도
- 2010
(좌) <젊은 육체들> 중 (사진: " Beat Girl . 1960. Directed by Edmond T. Gréville", MoMA ) / (우) <오발탄> 중 한국영상자료원이 보유한 10,000건 이상의 검열 행정자료들 중 흥미롭고 주목할만한 것들을 선별하여 영화사적 배경이나 상황과 함께 소개하는 시리즈입니다. 이 글들을 통해 새로운 자료들을 발견하는 기쁨과 아울러, 한국영화사를 보다 다양한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계기를 만나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혁명과 함께 영화검열 폐지가 가시화되다 1960년대는 한국정치와 사회의 거대한 격변과 함께 시작한다. 4월혁명은 이승만으로 상징되는 노쇠하고 부패한 옛 체제를 불과 한 달여 만에 파괴했고, 각 분야의 개혁 작업이 뒤따랐다. 이는 영화검열의 측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5월 경이 되면 관에 의한 검열 폐지 주장이 본격화된다. 5월 6일 문교부는 이승만 정권 말기, 특히 3.15 부정선거 이후 강화된 영화검열로 상영 불허가 된 작품의 재상영을 검토하는 등 검열을 완화할 것이라는 취지를 밝혔고, 13일에는 관제 영화검열을 철폐하고, 영화계의 자율적인 위원회에 검열을 맡기겠다는 취지를 영화인들에게 비공식적으로 언급한다. 이후 한국영화제작가협회와 외화배급협회(대한영화배급협회), 영화인단체협의회 등 3자는 관영 영화검열제도를 반대하고 자율적으로 영화계가 검열을 시행하기로 합의하는 동시에, 영화윤리위원회의 설치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공동구성안은 분란의 씨앗을 안고 있었다. 워낙에 한국영화 제작자들과 외화수입업자들의 이해관계가 달랐던 데다, 5월 말에서 6월 초 사이 한국영화 제작 관련자들이 한국영화의 발전을 위해 외화수입쿼터의 일부를 한국영화제작계가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고 외화 수입업자들은 이에 크게 반발하는 갈등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1960년 6월 15일 헌법이 개정되었다. 제2공화국 헌법은 “...언론, 출판에 대한 허가나 검열과 집회, 결사에 대한 허가를 규정할 수 없다”(28조)라고 규정하여 검열이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였다. 또한 6월 27일 법무부는 “영화도 새 헌법상에 규정된 언론·출판 개념에 포함되므로 검열이나 허가를 할 수 없다”라는 유권 해석을 내렸다( 《동아일보》, 1960. 6. 28 ). 이제 민간 주도의 심의 기관이 시급해졌다. 그러나 5, 6월 내내 골이 깊어진 제작자들과 수입자들은 각각 별개로 영화윤리위원회를 추진했다. 7월 2일, 영화배급협회는 외국영화윤리위원회를 조직하는 한편 별도의 윤리규범을 마련했고, 영화인단체연합회 및 한국영화제작가협회는 7월 5일 영화윤리위원회창설준비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이에 영화계 안팎에서는 통합된 영윤의 출범을 촉구하였고, 그 여망을 받아 7월 내내 통합된 기관을 준비하기에 이른다. 영윤의 설립과 정부와의 줄다리기 드디어 8월 5일, 영화윤리전국위원회(이하 영윤)가 발족했다. 7월 28일 한국영화제작가협회, 영화인단체연합회, 외국영화배급협회, 극장협회 등 4개 단체의 대표들이 모여 연석회의를 열고, 8월 5일 창립총회를 열 것을 결의하였고, 5일 문화단체총연합회(문총) 회의실에서 열린 창립총회에서는 규약과 규정을 통과시킨 한편, 위원장에 이청기 , 부위원장에 이진섭 , 전문위원에 이진섭, 허백년 , 최일수 등을 임원으로 선출하였다. 윤리위원으로는 박계주 , 조풍연, 백철, 허백년, 호현찬 , 오영진 , 선우휘 , 한운사 등 영화계 안팎의 전문가 28명이 선임되었다. 영윤의 윤리규정은 국가 및 사회, 법률, 풍속, 성, 교육 등 6개 부문 22개의 세부 기준으로 구성되었다. 당시 일부에서는 이 규정이 지나치게 까다로워 자승자박이 될 수 있고, 영윤이 권력기관화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려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위원장 이청기는 “말초적인 장면에 구애되는 좁은 단정을 피하면서 되도록 그 영화가 지니고 있는 본질적인 주제정신의 건실성 여부에 대한 핵심적인 평가에까지 그 심의도의 범위를 아량껏 넓힐 것”을 약속했다(《한국일보》, 1960. 8. 18.). 8월 5일 공식 출범을 했으나, 실질적으로 영윤이 업무를 시작한 것은 9월 5일이 되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영윤의 시작은 그다지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영윤 출범 직후 검열을 제대로 하지 않고 사무국장이 독단으로 심의필증을 발급함으로써 물의를 일으켰던 것이다. 이와 같은 일회적 사건 외에 더 심각한 것은 문교부와 벌어진 일종의 권한 쟁의였다. 문교부는 영윤의 출범에 한국영화의 심의권을 넘겨줄 수는 있지만, 외국영화에 대한 적부 심의는 문교부가 지속적으로 맡아야 한다는 종전의 주장을 반복적으로 제기했다. 문교부가 이렇게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은 문교부에 외화수입추천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엄밀히 보자면 외화수입추천의 절차는 검열의 절차와 다소 결이 다르다. 외화수입추천 절차는 기본적으로는 특정 외화를 수입해도 될 것인지에 대한 표현수위를 결정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수입되는 외화의 총량 관리(즉 영화의 질이 아니라 양적인 규제), 국가의 외환 관리나 무역 관리 과정과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권한은 국가기관이 아닌 영윤으로 이관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외화에 대한 실질적인 검열권(즉 상영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권리와 수입이 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권리)이 영윤과 문교부에 애매하게 분리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문교부는 이 권한을 빌미로 외화에 대한 심의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시도를 보였다. 혁명 후 외화의 수입추천 과정을 규정한 영화및공연물 사무요강 (문교부 고시 132호) 이는 9월 초 영윤이 실제 업무에 돌입했던 즈음, 과도정부 시절에 만들어졌던 문교부의 영화사무요강을 통해 가시화되었다. 이 사무요강에는 “외화의 수입추천은 서류 심사 또는 실사 심사로 하며 심사기구 및 규정은 따로 정한다”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영윤은 영윤의 심의권을 침해하는 조치라며 크게 반발했고, 문교부와 영윤의 사이에 끼어 이중의 심의절차를 밟아야 할 상황에 처한 수입업계는 영윤을 통한 일원화를 강하게 촉구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 일원화는 제도적으로 해결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문교부가 처음부터 수입추천의 권한을 적극적으로 행사했던 것 같지는 않다. 당시 기사들에 따르면 4월혁명 이후 대략 9월까지 문교부는 영화의 수입추천권을 거의 서류적으로만, 즉 형식적으로 행사해 왔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이 분위기는 <차타레 부인의 사랑>(마르크 알레그레, 1955) 등 사회적인 논란이 되는 영화들이 다수 수입되거나 상영금지가 해제되고, 이에 대한 비판적 여론이 조성되면서 반전되었다. 그 중심에 있던 영화는 1960년 10월 수입된 루이 말 감독의 < 연인들 >(1959)이었다. 이 영화의 불륜성과 외설성을 이유로 사회 일각에서 비판적인 여론이 형성되자 문교부 장관은 10월 4일, 이 영화에 대한 고발 조치를 통해 상영을 중지하겠다는 의견을 밝힌다. 또한 18일부터는 기존 서류 심사 위주의 수입추천 절차를 실사 심사로 실질화시키고, 관세법 126조(공안을 해치거나 풍속을 문란케 할 서적, 도화, 조각물, 기타의 물품은 수출 또는 수입을 금지한다)에 의하여 철저히 단속할 방침을 밝히기에 이른다. <연인들>을 계기로 선정적 외화에 대한 비판적 담론이 일기 시작한다. (“ 영화가는 불륜개방시대 ”, 《경향신문》, 1960. 10. 23.) 이와 같은 문교부의 방침은 사실상 영화검열제도의 부활로 인식되었고, 영윤은 물론 당대 대다수의 언론들은 이와 같은 조치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월 말에서 11월 초 사이 사친회의 <연인들> 상영 중단 요구를 비롯 미풍양속을 해치는 영화의 상영과 광고에 대한 반대 여론은 무시 못할 정도였다. 문교부는 이러한 분위기를 이용, 10월 말 이에 대해 실사 심의 후 문제가 되는 영화는 ‘컷’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수입추천을 하지 않고 수입추천이 거부된 영화는 재차 수입이 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강경한 방침을 밝혔고, 나아가 11월 초에는 외화 배급사 대표들을 초청한 자리에서 ‘음탕한 영화광고, 유인물을 첨부하는 것’까지 단속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젊은 육체들> 사건으로 룰이 정립되다 1961년 초 검열과 관련하여 또 다시 커다란 사회적 논란이 발생했다. 당시 젊은이들의 행태에 대한 선정적인 표현으로 세계적으로도 논란이 되었던 영국영화 < 젊은 육체들 >(원명 Beat Girl , 1961)의 수입 상영과 관련된 것이었다. 검열 폐지 이후 실질적인 검열의 필요성을 주창함으로써 문교부가 공세에 섰던 <연인들>의 경우와 달리, 이 영화의 수입·상영 논란에 있어서는 영윤이 공세적인 입장에 섰다. 1961년 1월 21일 영윤은 사회풍기 관계 전문위원 11인의 심의 결과 이 영화에 대해 전원 일치로 상영보류 결정을 내렸고, 수입 회사인 세기상사의 재심 의뢰로 열린 전원위원회에서도 9대 7로 상영보류 조치를 결정했다. 이는 4월혁명 이후 영윤에 의한 최초의 상영보류 결정이었다. 그러나 문교부는 이 영화에 대한 심의가 이루어지던 1월 28일 이미 상영신고필증을 발부해 버렸고, 이에 기반해 수입사인 세기상사가 영화의 개봉을 준비했다. 이는 2월 내내 한국사회에 엄청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영윤을 무시한 문교부의 결정에 대한 비판은 물론, 기존 미풍양속을 해치는 외화의 수입 관행에 대한 비판, <젊은 육체들>이 주제로 삼은 비트 세대에 대한 소개, 영화에 대한 찬반양론 등이 물끓듯 일어났다. 검찰 당국은 2월 7일 이 영화에 대한 입건 방침을 세우고 조사에 들어가기도 했다. 그러나 문교부는 2월 15일 청소년 단속이 어려운 2, 3번관의 상영은 보류하고, 대사 여섯 군데, 화면 일곱 군데 등 320피트를 삭제한 채 이 영화의 상영을 허가했다. <비트걸> 제한 상영중지 명령 문서 (“외국영화 <비트걸> 상영중지의 건”, 문교부, 1961. 2. 18.) 이 사건은 영윤과 문교부 간의 감정적인 대립에 가까운 반목을 불러왔음은 물론 영윤의 권위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특히 수입추천 단계에서 문교부의 실사 심의, 상영 단계에서 영윤의 심의라는 이중의 심의를 감당해야 하는 외화수입사들의 불만은 영윤의 무용론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대다수의 언론이 문교부의 독단과 검열의 부활 움직임을 비판하는 한편. 영윤의 유지와 강화를 지원하면서 문교부의 입장은 곤란해졌다. 이와 같은 논란 끝에 문교부와 영윤은 3월 중순 다음과 같은 합의에 이르게 된다. 문교부와 영화윤리위원회 전국위원회는 당면한 영화정책에 다음과 같이 합의했다. 1. 외국영화 추천심의는 문교부 주최 아래 영화윤리위원회와 함께 한다. 2. 외화 통관후의 작품심의는 영화윤리위원회측에서 한다. 3. 외국영화 수입추천을 심의할 때 문교부와 영화윤리위원회 사이에 합의가 안되었을 때 영화윤리위원회측의 전원위원과 문교부가 위촉한 심의위원이 합석하여 심의한다. 4. 예고편, 선전자료등을 통관추천심의할 때는 문교부와 영화윤리위원회가 합동심의한다. 5. 신문광고, 극장간판, 선전탑 등의 단속은 영화윤리위원회에서 한다( 《조선일보》, 1961. 3. 15. ). 이와 같은 합의안은 문교부가 독점해왔던 외화 수입추천 심의를 문교부와 영윤이 함께 수행한다는 점에서 영윤의 입장에서는 진일보한 성취였다. 그리고 이 결정으로 4월혁명 이후 오랜 기간 모호한 채로 유지되었던 외화의 수입과 심의절차의 행정 과정이 정비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혼란을 거쳐 새롭게 시작해야 할 영윤의 역사는 채 두 달이 못 돼 발생한 5.16 쿠데타로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쿠데타 이후 계엄사령부는 사전 검열을 부활시켰다. 1961년 5월 15일 이전 신고필증을 받고 상영 혹은 공연 중인 영화·연극에 대해서는 사전 검열을 면제했지만, 신고필증을 받았더라도 상영 혹은 공연되지 않은 작품에 대해서는 사전 검열을 받도록 지시했던 것이다. 영화계는 쿠데타 직후 사회가 안정되면 영윤이 부활되기를 고대했으나, 이는 희망사항으로 남고 말았다. 검열은 부활되었고, 이후 오늘날까지 민간의 자율에 의한 심의제도는 채택되지 못하고 있다. 영윤: 짧지만 중요한 역사적 경험 영윤의 수립에서부터 기관의 운영, 해체에 이르는 대략 8~9개월의 짧은 기간은 다소의 혼란에도 불구하고, 관권이 배제된(물론 전적으로는 아니지만) 한국영화의 검열사에서 거의 유일한 기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기간 < 하녀 >(김기영, 1960), < 오발탄 >(유현목, 1961) < 삼등과장 >(이봉래, 1961) 등 한국영화사를 수놓는 명작들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은 4월혁명과 영윤에 의한 자율적인 심의의 성과물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좌) 제한 사항이 없이 발급된 <하녀>의 상영허가서(1960. 11. 1.) / (우) 제한사항 1개로 발급된 <오발탄>의 상영허가서(1961. 2. 14.) (더 많은 서류는 " 검열서류 컬렉션 "에서 확인할 수 있다. 좌 , 우 ) 그러나 앞서 몇 가지 사례를 통해 보았듯이 영윤의 시절이라고 해서 모든 영화가 자유롭게 상영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문교부에 의한 수입추천권이 실질적인 검열 기제로 작동하였음은 물론, 심지어 영윤이 자체적으로 영화의 상영을 보류하는 결정까지 내릴 정도였다. 이는 민간에 의한 자율적인 심의가 모든 영화의 자유로운 상영에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이 되지 못함을 의미한다. 한 영화의 수용 여부는 단순히 검열의 자율성 여부뿐 아니라 사회단체나 수용자들의 여론, 혹은 영상에 대한 감각의 한계선, 즉 망탈리떼(mentalite)에 의해 더욱 중요하게 좌우되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이후 오랜 기간 권위주의 정권을 겪으며 검열의 가장 중요한 변수를 국가로 두어왔던 한국영화사 연구의 흐름이 놓친 부분이기도 하다. 나아가 비록 등급 “서비스”를 표방하고 있기는 하나, 여전히 관영 심의의 체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국영화계의 현실에서, 영윤의 경험은 한국영화 심의 체제의 미래를 고민할 때 반드시 복기되어야 할 중요한 역사적 경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한국고전영화를 보는 이유는 전부 비디오에세이 만들기와 관련이 있다. 한국고전영화를 ‘본다’기보다 다음 비디오에세이를 만들기 위해 ‘탐색’하는 것이다. 누가 들으면 ‘비디오에세이깨나 만드나 보다’라고 생각하겠지만, 부끄럽게도 그건 아니다. 재작년에 어도비 프리미어 프로그램을 구입한 이후 계속해서 결과물들을 산출하고 있기는 하나 누군가와 함께하는 작업이 아닌 이상 혼자 하는 것들은 다 재미를 위해 하는 것일 뿐이어서 그냥 폴더에 담아두기만 한다. ‘비디오에세이를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영화를 본다’라고 얘기하는 지점에서 이미 나는 ‘땡’ 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수년 전 미디액트에서 ‘오디오비주얼크리틱’을 가르쳐주신 선생님들이 들으면 혀를 차실 얘기이기 때문이다. 영상을 영상으로서 비평하는 시도로서 ‘오디오비주얼크리틱’이 의미 있는 작업이 되려면 역시나 그 작업의 최종 목적지는 여러 영상을 짜깁기해서 그럴듯하게 붙여놓고 거기에 어울리는 음악을 깔아서 산출하는 mp4 파일이 아니라, 상대하고 있는 대상(물)과 그 대상(물)을 둘러싼 세계에 대한 적극적인 이해와 적절한 통찰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그 자체로 매혹적인 또 하나의 작품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시도여야 하기 때문이다. 즉, 영화를 이것저것 보다가 괜찮은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비디오에세이를 만든다고 하면 그건 자연스러운 흐름이지만, 비디오에세이를 만들겠다고 작정하고 그것에 걸맞은 영상을 탐색한다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행위이다. 하지만 그 수업에서 선생님들은 분명 이렇게 말씀하시기도 했다. ‘비디오에세이’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안 보던 고전영화들을 본다면, 그것 자체로도 좋은 일이라고. 사실 ‘한국고전영화’야말로 아도르노가 정리한 대로 “문화적으로 형성된 특수한 대상에 대한 고찰”1)이라고 하는 에세이적 방법론의 대상으로 삼기에 가장 좋은 소재다. 여튼 그런 불순한 목적으로 한국고전영화를 보는데, 최근에 관심을 갖고 있는 소재를 말하기 위해 내가 만들다가 만 한 편의 비디오에세이 <60년대 샐러리맨의 하루>를 말해보려 한다. 1959년작 < 여사장 >(한형모)부터 < 구봉서의 벼락부자 >(김수용, 1961), < 삼등과장 >(이봉래, 1961), < 월급쟁이 >(이봉래, 1962), < 골목안 풍경 >(박종호, 1962), < 두고만 보세요 >(김봉환, 1964), < 떠날 때는 말없이 >(김기덕, 1964), < 회전의자 >(이형표, 1966), < 억울하면 출세하라 >(심우섭, 1969) 등 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 중반 사이의 영화에서 직장인들의 출퇴근, 회의, 월급날, 신입사원 채용, 면접, 점심시간, 사내연애, 근무 중 농땡이 부리기, 상사의 꾸지람 등의 장면들을 골라 붙여 만든 것이다. 부끄럽게도 어느 정도 만들고 나서 조금은 재밌지 않나 하는 생각에 몇 명에게는 보여주고 반응을 살핀 적도 있었다. 그중 몇 명으로부터는 냉철한 피드백을 받아 수정하려는 생각으로 처박아 두었다. 이 <60년대 샐러리맨의 하루>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 오발탄 >(유현목, 1961)을 갖다 쓴 부분인데, 바로 김진규의 직장 동료인 여성 타이피스트가 등장하는 두 장면이 그것이다. 첫 번째 장면은 계리사사무소에서 상사가 자리를 비운 사이 타이피스트가 분첩을 꺼내 찍어 바르며 “육시랄하게 시간도 안 가지”라고 말하고 김진규에게 상사 없을 때나 쉬지 언제 쉬냐고 말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곧바로 상사가 돌아오는 소리가 들려 타이피스트는 후다닥 분첩을 집어넣고 다시 바쁜 손동작으로 타자기를 친다. 두 번째 장면은 이들이 퇴근하는 장면으로, 타이피스트가 “월급도 받았는데 집에 그냥 가냐”며 김진규를 낚으려고 하다 김진규가 “월급을 아내에게 주는 것도 멋진 일이다”며 거절하니 “흥, 재~미없어”하고 사라지는 장면이다. 타이피스트가 쌩하고 사라지자 혼자 남은 김진규는 이가 아파 볼을 만지면서 제 갈 길을 가지만, 보기에 따라서는 ‘노잼인증’을 당해 겸연쩍은 느낌으로 빠르게 자리를 뜨는 느낌으로도 보인다. 원작을 읽지 않아서 이 장면이 원작에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김진규 같은, 즉 세상의 모든 고민을 다 짊어진 것 같은 매사 진지하기만 한 직장 동료에게 어떻게도 손쓸 수 없는 더없이 적절한 공격 타이밍으로 촌철살인의 일갈을 할 수 있는 젊은이 특유의 여유랄까,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오발탄>의 보석 같은 장면이었다. 심지어 ‘육시랄’이라는 욕설의 처리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마치 그 대사엔 욕설이라곤 전혀 없었던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 외의 영화들에서도 사무공간을 배경으로 하는 장면에서 김숙일, 도금봉, 최지희 같은 여배우나 이름을 알 수 없는 단역 여배우들이 김승호나 김희갑, 주선태 같은 문제적 상사들에게 속 시원한 한마디를 날리는 모습은 꽤나 자주 볼 수 있었고, 대사뿐 아니라 존재 자체로도 전통적인 규범이나 집단으로부터 자유로운 전후 세대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일군의 여배우들 즉, 노경희, 양미희, 나애심, 안나영, 김의향 같은 배우들의 활약도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왔다. 이중에 < 서울의 휴일 >(이용민, 1956)과 < 화심 >(신경균, 1958) 등에서 너무나 매력적인 모습을 보여준 양미희의 팬을 자처하며 그녀의 필모를 깨기 위해 보게 됐던 홍성기 감독의 < 열애 >(1955)에서, 나는 한국고전영화에 대한 새로운 고찰의 국면을 만나게 되었다. 2. 한국고전영화를 가끔이지만 조금씩 보다 보니 어느 순간 한국고전영화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영화를 보는 데에 익숙하고 안 하고 할 게 뭐가 있냐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나는 내가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한국고전영화를 픽션으로서 이해하기 어렵다고 보는 쪽이다. 바꿔 말하면, 한국고전영화에서 내가 목격하는 ‘과거의 한국’이나 ‘과거의 한국인’은 내가 아는 현실의 그것과는 너무 다르거나, 반대로 내가 아는 현실의 그것들을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내기 때문에 이들의 작용이 픽션으로 느껴지기보다는 ‘영화’의 외피를 쓴 무의식의 덩어리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잘 찍고 내러티브가 깔끔하게 떨어지는 영화를 볼 때도 뭔가 뒷맛이 씁쓸하고, 내러티브가 산만하고 완성하기에 급급했다 싶은 영화를 볼 때는 오히려 마음이 편해진다. 그런 면에서 한국고전영화는 내게 있어 재미가 있다/없다, 이해가 잘 된다/안 된다 하는 문제가 아니라 충분히 익숙한가 아닌가의 단순한 문제였던 것 같다. 다만 ‘익숙해진다’는 것은 한국고전영화의 ‘디폴트값’을 알아챘다는 뜻이어서, 익숙해지게 되면 익숙한 것들 사이에서 특이한 것을 구분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이 왜 특이하게 여겨질까를 생각하는 과정에서 가끔 의외의 재미가 찾아오기도 한다. 홍성기 감독의 <열애>를 본 후, 나는 내가 배우 ‘석금성’과 ‘복혜숙’을 혼동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열애>에 나오는 복혜숙은 출연뿐 아니라 영화의 시작과 끝에 등장하는 인상적인 내레이션을 담당하고 있기도 한데, 그 목소리가 석금성의 목소리인 걸로 착각이 되었던지 나는 <열애>의 그 인물을 한참이 지난 뒤까지도 ‘석금성’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가 닮은 꼴 배우를 헷갈리는 일은 흔한 일이다. ‘닮았다’ ‘안 닮았다’라고 하는 조형적 유사성에 근거한 판단조차 개인의 이미지 경험이나 레퍼런스에 영향받기 때문에 심지어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전혀 닮지 않은 배우들도 가끔은 헷갈림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복혜숙과 석금성은 젊은 시절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동그란 얼굴에 눈이 새까맣고, 항상 깔끔하게 뒤로 빗어넘긴 머리를 하고 있는 게 약간 비슷하다. 심지어 음성도 걸걸하면서 중저음인 게 비슷하다. 하지만 내가 헷갈린 건 그 둘이 외양과 음성이 비슷해서가 아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복혜숙’이란 배우가 있고 ‘석금성’이란 배우가 있는 것은 알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영화에서 할머니 역으로 많이 등장하는 그 사람을 나는 ‘한 명의 사람’으로 뭉뚱그려 생각했었다. 그 사람이 어떨 때는 착하게 나오고(복혜숙), 어떨 땐 고약하게도 나온다고(석금성) 생각했던 것이다. 왼쪽은 24세의 석금성이고 오른쪽은 26세의 복혜숙의 모습이다. 둘 다 토월회에 몸담고 있던 시절. 사진 출처: 석금성-1930년 1월 8일 자 《조선일보》, 복혜숙-1931년 8월 9일 자 《동아일보》 복혜숙과 석금성을 빠르게 구별하기 위해 찾은 김남석의 『조선의 여배우들』(국학자료원, 2006)은 연배마저 비슷한(복혜숙이 1904년생, 석금성이 1907년생으로 세 살 차이) 이 두 사람이 토월회라는 신극단체에서 함께 활동했던 인연이 있음을 알려주었다. 김수용 감독은 복혜숙과 석금성이 1957년 여름 < 배뱅이굿 >을 찍기 위해 충청도 온양에 머물렀을 때 사이가 굉장히 나빠 각기 다른 민박을 쓰면서 서로를 비방했다고 썼다. 2) 석금성은 워낙 동료 연예인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었고 3) , 실제로 모 배우가 석금성의 거친 성격을 증언하기도 했다고 영화사연구자 L선생님으로부터 들었다. 하지만 복혜숙이 남긴 ‘나의 교유록(交遊錄)’ 4) 을 보면 복혜숙의 성격도 만만치 않다. 토월회에서 활동하다 영화계에 들어왔고 영화에선 둘 다 주로 할머니 역을 했던 공통점도 있으니 거의 지척에서 서로를 봤을 텐데 사이가 안 좋았다는 이야기를 접하게 되니 두 배우에 대한 흥미가 더 커졌다. 3. 1904년생 복혜숙과 1907년생 석금성은 각각 10대 후반에 신극 단체인 토월회에 입단해 타고난 끼를 바탕으로 각각 인기 여배우로 거듭났지만 토월회 입단 전후로 기생 활동을 할 정도로 당시의 불안정한 쇼비즈니스계를 통과하고 있었다. 5) 20~30대 시절 영화에 단발적으로 출연했지만(복혜숙은 < 농중조 >(1926), 석금성은 < 심청 >(1937)) 본격적으로 영화를 시작한 것은 40대 전후의 나이였다(복혜숙은 < 수업료 >(최인규, 1940)에서 영달이 할머니로, 석금성은 < 마음의 고향 >(윤용규, 1949)에서 최은희 어머니로). 이들보다 불과 10살가량이 어린 문예봉, 김신재, 김소영 등이 당시 조선에 형성되기 시작하던 영화 저널리즘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현숙하고 정갈한 이미지로 전시 체제 프로파간다의 얼굴이 되어가는 동안, 복혜숙과 석금성은 현실 세계에서도 영화 속에서도 이미 ‘여성’보다는 ‘모성’을 수행하는 중이었다. 복혜숙은 <수업료>에 영달이 할머니로 출연했을 때 고작 37세였다. 그녀의 당시 나이를 알고 <수업료>를 다시 봤더니 그냥 할머니 분장한 젊은이여서 웃음이 절로 나왔다. 바로 그다음에 출연한 < 반도의 봄 >(이병일, 1941)에서만 해도 그는 치마 정장에 하이힐을 신고 라디오를 할부로 구매하는 활달한 커리어우먼으로 등장하는데, 그 후로 맡은 역할은 거의 다 온정적인 할머니나 어머니, 유모, 식모 같은 것들이었다. 마찬가지로 석금성은 <마음의 고향>에서 최은희의 완고한 친정어머니로 등장하는데 그 이후 < 그 여자의 일생 >(김한일, 1957), < 자유결혼 >(이병일, 1958), < 촌색씨 >(박영환, 1958) 등에서 표독스러울 정도의 거친 모성을 연기하거나 아예 무당(< 김약국의 딸들 >(유현목, 1963)이나 < 강화도령 >(신상옥, 1963), < 만고강산 >(최인현, 1968)) 같은 강렬한 역을 연기했다. 영화계에 본격적으로 들어온 이후 연거푸 전형적인 역할에만 캐스팅되었기 때문에 이들의 출중한 연기력은 안타깝게도 개점휴업한 상태로 있을 수밖에 없었다. 6) 내가 이들을 혼동한 데에는 연달아 비슷한 역(온정적인 어머니냐 완고한 어머니냐의 차이가 있을 뿐)으로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연유도 있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실생활에서 두 사람이 사이가 좋지 않았다면 그건 두 사람이 사람들과 교류하는 방식의 차이에서 기인했을 수 있을 것 같다. 복혜숙은 자신이 ‘연기’를 좋아하고 원한다는 사실을 일찍부터 알았기 때문에 연기를 지속하기 위해 기생 활동이나 다방 마담을 하는 것도 마다치 않았고 7) 대한영화배우협회, 성우협회 회장을 맡는 등 영화계 대표 ‘인싸’였다. 심지어 임화수도 복혜숙 앞에서는 꼼짝을 못 했다고. 8) 하지만 석금성은 데뷔 전 기생 이력을 잘 드러내지 않으려 하거나 9) 연예인 친구보다는 평범한 주부들이나 동네 부인들과 주로 어울리다가 흔히 말하는 '주부도박단' 사건에 두 번이나 연루되는 등의 사정으로 봤을 때 연예계에서는 전형적인 '아싸'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부자>(권영순, 1958)에서 55세의 나이로 10대 처녀 시절을 연기하고 있는 복혜숙. 하지만 이 둘은 오히려 생애 말기에 연기자로서 활발한 모습을 보였다는 점에서 또 다시 공통분모를 형성한다. 둘은 토월회 50주년 기념행사에 나란히 참여해 연극 <이대감 망할대감> 공연을 같이 하기도 했고, 10) 복혜숙은 79세에 사망하기 전까지 약 10여 년간, 석금성은 89세에 사망하기 전까지 약 10여 년간 활발하게 활동했다. 76세의 나이로 < 사랑의 조건 >(김수용, 1979)에서 한겨울 눈밭 한가운데서 연기를 펼친 복혜숙이나, 80세 넘어서 출연한 TV문학관 <사평역>, KBS 설특집 드라마 <너도 늙어봐라>, SBS 드라마 <분례기>, <친애하는 기타 여러분> 등에서 엄청난 존재감과 명연기를 선보인 석금성을 보면 생애 마지막 나날까지도 꾸준한 자기 관리로 일을 해나갔던 커리어우먼으로서의 모습에 존경을 바치지 않을 수 없다. 유작인 SBS 드라마 <친애하는 기타 여러분>(1993)에 출연한 석금성의 모습. 4. "악역을 많이 맡아 욕을 무던히 먹어서인지 오래 살지요? 이제까지 살면서 한숨도 많이 쉬고 눈물도 많이 흘렸지만 이제는 오늘 일은 오늘, 내일 일은 내일 하는 식으로 산답니다.” 1983년의 인터뷰에서 석금성은 이렇게 말했다. 덧붙여 “지난해에 선배인 복혜숙 씨마저 타계하는 바람에 인생이 덧없다는 생각이 든다”고도 말했다. 복혜숙은 72년의 인터뷰에서 토월회의 가장 큰 성과로 1929년에 공연했던 <아리랑고개>를 언급하며 “처녀 봉이(석금성)가 일본인에게 농토를 빼앗긴 아버지를 따라 괴나리 봇짐을 들고 간도로 가면서 사랑하는 총각과 이별하는 구슬픈 장면이 나오는 것인데, 석금성의 눈물을 따라 온 극장 안이 울음바다가 됐으며 임검경관마저 같이 울었다”고 회고했다. 11) 이는 두 사람이 서로를 공식적으로 언급한 흔적으로, 내가 찾은 바로는 이 두 개가 유일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두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도 한 장 발견했다. 《동아일보》 1981년 5월 14일 자 11면. 함께 찍었다기보다 단순히 한 공간에서 찍힌 사진 같기도 하다. 복혜숙과 석금성은 복혜숙의 남편인 김성진을 사이에 두고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다. 언제 찍은 사진인지는 미지수이지만 아마도 1973년에 있었던 토월회 50주년 행사 때가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토월회에서 데뷔했다는 것 말고는 사실상 별다른 연결고리가 없는 두 사람을 무리하게 묶어서 생각을 한다는 생각도 했지만 내가 두 사람의 행적을 파악하며 느낀 건, 진부하게도 ‘마지막에 살아남는 자가 승자’라는 문구이다. 두 사람은 그 어느 여배우보다도 길게 살았고, 길게 연기했다. 올해 40대에 접어들어 ‘위기의 중년’을 체감하는 나로서는 그 어떤 누구의 조언보다도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점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생각한 다음 비디오에세이에 대한 계획은 우선 여기까지이다. ※ '시청각연구인'이라는 바이라인에 대한 추가 설명: 지난해까지는 원고 쓸 일이 있으면 '한국영상자료원 직원'이라는 직함을 썼고 그전까지는 항상 '중앙대 대학원 박사과정생'이라는 표현을 썼었다. 그런데 지금은 한국영상자료원 직원도 아니고 중앙대 박사과정생으로서 뭔가를 수행하고 있지도 않아 이 원고를 다 써놓고 '영화연구자'라는 표현을 이름 옆에 달아두고는 있었지만 뭔가 찝찝했다. '연구자'라고 하는 표현은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영어의 researcher가 아닌 scholar와 거의 동의어로 쓰이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쓰기 부담스러웠다. 그러던 어느 날 영상자료원 4층 사무실의 복사기 앞에서 출력물이 나오길 기다리며 뭔가를 심사숙고 하고 있는 김기호 차장님을 봤다. 김기호 차장님은 복원팀에서 오랜 기간 아키비스트로 일했고 지금은 학예연구팀에서 조금은 다른 연구들을 수행하고 있다(고 알고 있다. 내가 팀을 떠났기 때문에 자세한 건 모른다.) 순간 그 어떤 연구자보다 자신의 일에 대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성찰하는 김기호 차장님 같은 사람이야말로 ( KOFA Issue paper vol. 1 , vol. 2 ) '연구하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대학원 따위(표준국어대사전에서 '따위'를 검색했을 때 나오는 1번, 2번 용례에 해당. 3번 아님)의 제도적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고 해서 저 사람을 '연구자'라고 부르지 못할 일은 없기는 하나 '연구자'보다 그럴듯한 표현이 없을까 하다가 '연구인'이라는 단어를 생각하고 거기서 더 나아가 '시청각연구인'이라는 말을 생각하게 됐다. 내 주변에는 확실히 '박사'라고 하는 학계에서 인증한 소위 '메이카'를 갖고 계신 연구자 선배님들도 많지만 내가 그들을 존경한다면 그건 '메이카'를 갖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항상 꾸준히 우리의 삶과 사회가 노출하는 모순들을 자신의 연구영역 안에서 이리저리 관찰하고 연구하기를 게을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직은 '메이카'를 취득하지 못한 때문도 있지만 일단 나는 김기호 차장님 같은 '시청각연구인'을 표방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말에 부합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앞으로도 계속 노력해보고자 한다. *** 1) Translated from the German by R. Hullot-Kentor and F. Will, 'The Essay as Form', New German Critique , No. 32. (Spring-Summer, 1984), p.151 2) 김수용, '드라마 분위기 설정해가는 역광 같은 배우, 복혜숙', "한국의 여배우들",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공식블로그, 2014. (https://siwff.tistory.com/503) 3) '77세의 원로여우 석금성 씨 20년 만에 <백구야...>로 컴백하면서 또 악역', 《경향신문》, 1983년 1월 29일 자. 4) 복혜숙이 1981년 4월부터 두 달에 걸쳐 《동아일보》에 연재한 '나의 교유록 - 원로여류가 엮는 회고'. 5) 석금성은 데뷔 전 기생이었고 데뷔 후에는 권번생활을 하지 않았으나, 복혜숙은 오히려 데뷔 후에 이름이 알려진 것을 이용해 권번에 적을 두고 기생 활동 및 기생 교육 활동을 했다. 복혜숙, '나의교유록 - 원로여류가 엮는 회고 <86> 복혜숙⑯: 권번시절', 《동아일보》 1981년 5월 11일 자; 김정은, 「일제시대 기생과 여배우의 관계: 대표적인 여배우를 중심으로」, 숙명여대 석사학위논문, 2007.; 이승연, 송지영, 「일제시대 인천권번에 대한 연구: 용동권번을 중심으로」, 『인천학 연구』 6, 2007.2. 6) 약간 예외적인 모습을 보여준 영화도 있기는 했다. <오부자>(권영순, 1958)에서 복혜숙은 55세의 나이에 10대 처녀 시절을 연기했는데 어딜 가나 사람들을 웃겼다는 복혜숙의 진가가 이 영화에서 조금이지만 발휘되고 있다. 석금성은 <고려장>(김기영, 1963)에서 그나마 전형적인 표독스러운 계모를 탈피한 연기를 할 수 있었는데, 그의 강렬한 이목구비가 오히려 이런 톤 다운된 역할에 잘 어울리는 것으로 봤을 때, 그가 다양한 역할을 맡지 못했다는 점이 정말 안타깝다. 7) 복혜숙은 권번 활동이 적잖은 돈벌이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최성해, 이월화, 김소진 등 토월회 멤버들과 함께 권번을 드나들었으며, 권번에서 돈을 벌어 연극을 하자고 의기투합했었다고 한다. 복혜숙은 특히 권번에서 기생들에게 일본어와 현대무용을 가르치기도 하고 후에 판소리 명창이 된 박녹주와 콤비를 이뤄 손님들을 웃겼다고 한다. 복혜숙, '나의 교유록 - 원로여류가 엮는 회고 <82> 초창기의 여배우 복혜숙⑫: 초창기의 여배우', 《동아일보》 1981년 5월 1일 자; '나의 교유록 - 원로여류가 엮는 회고 <86> 복혜숙⑯: 권번시절', 《동아일보》 1981년 5월 11일자. 8) 복혜숙, '나의 교유록 - 원로여류가 엮는 회고 <96> 복혜숙 26: UN군 환영 연극', 《동아일보》 1981년 5월 25일 자. 9) 석금성은 1930년대의 언론 인터뷰에서 토월회 배우 데뷔 전 이력을 '개인 사정'이라고 표현하는 정도였고, 언론들도 '쓰라린 세파에 몸을 적시고 있었던' 시기 정도로 완곡하게 표현했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선지 그녀의 생애 후반기 인터뷰들은 토월회 입단 전에 그녀가 진명고녀 졸업생이었다고 쓰고 있다. '대리석 같은 여인 - 눈물을 흘리는 역이 적역, 신흥 토월회 스타편 - 석금성', 《조선일보》 1930년 1월 8일 자; '석금성 여사 - 처녀와 귀부인이 적역', 《동아일보》 1931년 6월 17일 자; '77세의 원로여우 석금성 씨 20년 만에 <백구야...>로 컴백하면서 또 악역', 《경향신문》, 1983년 1월 29일 자. 10) '토월회 창립 50돌 기념 공연', 《조선일보》 1973년 10월 23일 자. 11) '내가 겪은 20세기 (25) 복혜숙 여사', 《경향신문》, 1972년 6월 23일 자.
1960년 영국에서 제작된 <비트 걸, Beat Girl>은 10대들의 성(性)과 비행을 다룬다는 이유로 제작에서부터 많은 논란을 낳았다. 1959년 3월, 영화의 오리지널 대본인 <스트립티즈 걸, Striptease Girl>은 영국영화검열위원회(The British Board of Film Censors, BBFC) 1 에 제출된 뒤 “기계로 찍어낸 쓰레기(machine-made dirt)”, “몇 년 사이에 본 최악의 스크립트(the worst script I have read for some years)”라는 혹평을 받았다. 이후 영화의 제목을 <비트 걸, Beat Girl>로 변경하고 누드 장면들을 대폭 삭제했으나, 검열위원회는 스트립티즈에 대한 묘사와 소년범죄, 그리고 기차 레일에 누워 담력을 시험하는 십대들의 치킨 게임 장면이 지닌 문제점을 강하게 지적하였다. 결국 영화는 스트립 클럽에서의 노출 장면을 비롯한 문제적인 장면들을 삭제당한 뒤, 관객 제한 수위가 가장 높은 X등급을 받고 개봉하였는데 2 작품에 대한 악의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영국 박스오피스에서 성공적인 성적을 기록했다 3 . <비트 걸>의 상영을 둘러싼 논란은 동시대적으로 영화를 개봉되었던 대부분의 국가에서 발생했다. 특히 성에 대한 사회적 담론이 전무하다시피 한 한국사회의 문화적 환경을 고려하면 <비트 걸>의 상영은 그 자체로 놀라운 일이었다. 실질적으로 <비트 걸>의 국내 상영은 4.19 혁명 이후 급진적인 사회변혁의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진 제도적 변화를 빼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영화를 둘러싼 정책적 기조가 국가권력에 의한 일방적인 통제에서 민간기구에 의한 문화예술의 보호육성이라는 관점으로 이동하면서 영화 상영은 허가제가 아닌 신고제로 변경되었다. 가히 혁명적이라 할 수 있는 제도적 환경 아래서 시장의 자율성은 보다 적극적으로 고려될 수 있었고,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시장 주체들의 도발적인 기획은 영화심의를 둘러싼 논란을 야기했다. 1960년 10월 4일, 영화윤리위원회의 심사를 마친 후 아카데미 극장에서 상영 중이던 <연인들(Les Amants, 1958)>이 불륜을 소재로 삼기에 사회의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문교부가 일방적으로 상영 중지한 사건은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비트 걸>의 경우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외국영화에 대한 수입 추천권을 지닌 문교부는 수입업체인 세기상사가 <젊은 육체들>이라는 제명으로 해당 영화를 배급하고자 했을 때 이를 승인하였고, 오히려 영화윤리위원회(이하 영륜)에서 해당 영화가 사회풍기를 문란케 한다는 이유로 상영보류판정을 내렸다. 이후 세기상사는 해당 조치에 불응하며 상영을 강행하는데, 세기상사와 문교부, 그리고 영륜 사이의 힘겨루기 양상으로 전개되는 <비트 걸> 논란은 박정희의 5.16 군사쿠데타와 맞물려 비로소 일단락되게 된다. 물론, 세기상사는 수입한 영화를 상영해야만 하는 입장이었기에 군부 정권이 자신들의 지배 체제를 수립한 시점에 다시금 상영허가를 신청하게 된다. 현재 한국영상자료원(KOFA)에서 보관하고 있는 <비트 걸> 검열 서류는 영화의 수입과 상영, 그리고 보류통보와 재상영을 둘러싼 일련의 과정을 재구성해볼 수 있는 구체적인 정보들을 포함하고 있다. 우선, 시간상으로 가장 앞선 서류를 살펴보자면, 1960년 11월 9일, 뉴욕에 본사를 두고 있는 리버티 상사(Liberty Trading Company)가 도쿄 지부를 통해 세기상사로 계약관련 내용을 확인하는 전신(cable) 내용이다. [그림 1] 리버티 상사가 세기상사에 보낸 계약 내용 확인 서신 [그림 1]에서 알 수 있듯이 해당 전신은 1960년 10월 29일에 세기상사가 “BEAT GIRL”이라는 제목(안건)으로 리버티상사에 보낸 문의사항에 대한 회신이다. 리버티상사는 세기상사에 <비트 걸>에 대한 복사 권한을 허용하되 프린트 복사를 5본으로 제한한다는 점을 명시하고 있다. 이를 통해 미루어 알 수 있는 내용은 10월 29일 이전에 양자 간의 영화 수입 계약이 체결되었고 원본 네거티브에 대한 듀플리케이션은 세기상사에서 진행했다는 점이다. 현재 남아 있는 검열 서류에는 계약서가 포함되어 있지 않아 판권대금을 비롯한 라이센스 기한과 같은 구체적인 계약 내용은 알 수 없다. 다만, ‘영화상영신고서’에 판권 대금이 “35미리 필름 10권 US $4,000”로 명시되어 있어 계약 사항을 짐작해볼 수 있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영화상영신고서’에는 “35미리 필름 10권 3편”만이 신고 대상에 올라와있는데, 복사판 계약을 5본으로 진행했던 정황을 미루어볼 때, 해당 시점에 나머지 2편에 대한 국내 배급 계약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서는 이후에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그림 2] <비트걸> 영화상영신고서 ‘영화상영신고서’의 경우는 해당 서식이 없어 기존의 ‘허가신청서’를 ‘신고서’로 수정한 흔적을 그대로 보여준다.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변경이 그만큼 급격하게 이루어졌음을 엿볼 수 있는데, 여기서 주목해볼 점은 해당 서류에는 제명이 “젊은 육체들”로 변경되어 있다는 점과 1961년 1월 18일에 사단법인 외국영화배급협회를 경유하여 문교부에서 승인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외국영화배급협회는 배급업자들의 이익 단체인 만큼, 영화에 대한 심의권한을 독점하려는 영륜과 긴장관계를 형성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들 협회는 영륜의 권한은 심의 결정이 아닌 권고 수준에 그쳐야 하며, 영화에 대한 최종적 검열 권한은 배급협회에서 자율적으로 마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실질적으로 <젊은 육체들>이라는 제명으로 상영신고서를 제출할 당시, 수입사이자 배급사인 세기상사는 자율적인 심의를 통해 상당한 분량을 삭제하였다. [그림 3] 세기상사에 의한 자진삭제분 一 대사삭제부분 1. 사랑이란 섹스를 고상하게 표현한 말이죠(204) 2. 늙은 바보야(365) 3. 우린 양친과 무관계. 나는 나…. 제니에요. 완전히 독립된 신인간(632-634) 4. 내주엔 펑하고 세계가 연기로 화해 제로에요(650) 5. 법률엔(902, 905,906, 909, 913) 6. 굶주려선 정도를 못 지켜요 (985) 二 화면삭제부분 1. 나이트클럽 장면(5권) 단축 2. 무대 뒤에서 스테이지가 보이는 장면 단축 (529) 3. 노래 장면 삭제… 입과 입, 엉덩이와 엉덩이, 그대 욕적으로 수평선(846~847) 4 4. 제니가 옷을 벗는 장면(8권) 5. 스트립쇼에 유방 나오는 장면(10권) 6. 장면 변경 (1001에서 1010으로) [그림 3]은 1961년 1월 27일자 영화상영신고 품의서로서, 세기상사가 자체 심의를 통해 삭제한 항목이 명시되어 있다. 대사 6개처, 화면 6개처에 해당하는 삭제된 부분은 미풍양속을 해칠 우려가 있는 선정적 장면과 지배질서에 반하는 반사회적 내용에 주로 해당된다. 문교부는 자체 검열 결과에 대해 별다른 의견을 덧붙이지 않고 기안이 올라온 일자에 영화상영신고필증을 발부한다. 그런데 영화상영신고에서부터 신고필증이 발부되기까지 영륜의 심의과정을 반영한 문서는 보이지 않는데, 1961년 1월 28일자 《한국일보》의 기사를 참조해볼 때, 영륜에서는 상영신고 일주일 전인 1월 21일에 <비트 걸>에 대한 실사 심의를 진행하였다. 그리고 해당 영화가 사회풍기를 문란하게 한다는 이유로 전문위원 11명 전원일치로 상영보류 판정을 내렸다. 그리고 세기상사는 영륜의 판정에 불복하여 재심을 청구하였는데, 재심은 1월 27일 오후 7시에 재심이 열린 것으로 확인된다 5 . 그런데 주목할 점은 1월 27일은 세기상사가 자체적으로 문제의 소지가 있는 장면을 삭제하여 상영신고필증을 받은 날이기도 하다. 신고필증이 정확히 언제 발급되었는지 구체적인 시각은 알 수 없지만, <비트 걸>의 러닝 타임이 90여 분인 점을 감안하면, 신고필증의 발부는 영륜의 심의의견이 제출되기 전에 문교부의 일방적인 절차에 따라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영륜의 최종 심의의견은 다음날인 1961년 1월 28일에 언론을 통해서 공개되는데, 영륜은 전원 위원회에서도 9대 7로 상영보류를 희망한다는 의견을 제출한 상황이었다. 세기상사의 입장에서 보자면, <젊은 육체들>로 개봉할 영화는 문교부가 고시한 행정적 절차에 따라 상영신고필증을 받았기에, 상영보류 의견은 받아들일 수 없는 권고였다. 따라서 예정대로 신문사에 광고를 게재하며 “강렬한 장면의 연속! 숨막히는 애욕묘사!”와 같은 자극적인 문구로 대대적인 홍보를 시작하였다. 물론 세기상사의 행보는 영륜의 심의의견이 단지 권고일 뿐 근본적으로 어떠한 구속력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었기에, 영륜은 언론을 통해 사건을 쟁점화하고 문교부와 세기상사의 행태를 비판하는 여론을 통해 자신들의 존재의미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었다. 결과적으로 영륜은 이 사건을 계기로 영화심의 과정에서 자신들의 입지와 사회적 역할을 분명히 명시하게 되는데, 1월 28일 기사를 필두로 영륜의 존재의미를 부정하는 문교부의 처사를 비판하는 기사가 연이어 쏟아지고, 검찰도 풍기단속을 위해 절차상 직무 유기를 한 이들에게 형법을 적용할 수 있다는 의견을 피력하게 됨으로써 <비트 걸> 논란은 사회적 문제로 부각된다. 결국 문교부장관은 영륜의 존재를 무시할 생각은 전혀 없으며 단순한 사무적인 실수일 뿐이라고 한발 물러섬으로써 사건을 일단락 지을 출구를 마련한다 6 . 이후, <젊은 육체들>에 대한 재심이 진행되었는데, 검열 서류에는 재심에 참여한 위원의 명단을 비롯하여 재심 과정의 내막을 엿볼 수 있는 단서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림 4] <비트 걸> 상영신고 필증 회수 관련 문서 [그림 4]는 1961년 2월 9일, 문교부가 세기상사에게 보내는 공문으로 <젊은 육체들>에 대한 재심의 결과 상영신고필증을 회수한다는 사실을 통보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외국영화 <젊은 육체들>의 상영을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보류함 (2) 앞으로 상영 시에는 제명을 원명대로 할 것 (3) 현재 이후 모든 선전 및 광고에는 '젊은 육체'의 제명과는 일체 무관하게 할 것 신고필증 회수를 통보한 날로부터 나흘 뒤인 2월 13일에는 각 도지사에게 공문을 보내어 “이미 흥행허가가 시행되었다면 긴급히 흥행을 보류시켜 주기”를 요청한다. 그리고 그 다음날인 14일에는 세기상사에 다시 공문을 보내어 복사판 2편에 대해서도 상영신고필증을 반납할 것을 요구한다. 앞서 전신(cable) 내용을 통해 살펴본 바와 같이, 세기상사는 복사판을 5본 제작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했는데, 첫 번째 상영신고서를 제출할 당시에는 3편만을 접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2편의 복사판에 대한 상영신고는 별도로 신청이 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실질적으로 <젊은 육체들>이라는 제명으로 영화를 개봉할 예정이었던 극장이 대한극장(서울)과 문화극장(부산) 그리고 천일극장(광주)이었던 점을 감안해보면 세기상사는 1차적으로 위의 세 극장과 상영계약을 체결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2편의 복사판에 대한 계약이 체결되고 그에 대한 상영신고필증을 발부받았을 것인데, 2월 14일의 문서는 해당 건에 대한 보류 통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문교부의 일방적인 신고필증 회수통보는 세기상사가 수입추천을 받을 시점인 1960년 11월 29일에 작성하였던 “각서”에 근거한 조치였다. 뿐만 아니라 문교부는 세기상사로 하여금 회수 통보를 받은 즉시 “서약서”를 쓸 것을 요구한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할 시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포괄적인 내용의 ‘각서’와 ‘서약서’는 행정적 절차의 미비로 발생하는 문제에 대한 책임을 민원인에게 지우고 그에 따른 행정적 처분을 받게끔 한다는 점에서 결과적으로 사후적인 검열의 효과를 발생시키는 것이었다. 즉, 4.19 혁명 이후 검열제도의 폐기는 그 의의와 함께 한계가 분명히 존재하는 만큼, “각서”의 억압적 효과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림 5] <비트 걸> 상영신고 필증 재교부 관련 문서 [그림 5]는 2월 15일 세기상사가 제명을 <비트 걸>로 변경 후 신규로 상영신고필증을 발급받기를 희망하고 이를 허가해줄 것을 요청하는 품의서이다. 상영을 보류하지 않는 조건으로 문교부에서는 “<비트 걸>에 대한 선전 및 광고에서 ‘젊은 육체들’과 전혀 무관하게 할 것”과 “문제의 영화 운운하는 문구를 삽입치 못하게 할 것” 그리고 “영화 상영 시에 있어 관람객을 비롯한 일반여론을 충분히 파악하시어 물의가 있을 시에는 즉시 보고할 것”을 명시한다. 이와 같은 조치는 영화배급사인 세기상사가 노이즈 마케팅의 효과를 이용하려는 시도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조치라 판단된다. 그러나 세기상사는 다음날인 2월 16일, 영화의 선전과 광고가 아니라 “사과문”의 형식으로 신문광고란에 “사회 저명인사 중에는 극력 <젊은 육체들>을 찬양한 바도 있었으나 당국의 요청에 의해 <젊은 육체들>을 <비트 걸>로 개제하여 상영 7 ” 하게 되었음을 적극적으로 홍보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세기상사의 행태는 결국 문교부로 하여금 상영을 중지케 하는 빌미를 제공하는 결과가 된다. [그림 6] <비트 걸> 상영 중지를 요청하는 문교부의 공문 1961년 2월 19일 문교부는 서울특별시 교육감과 각 도지사에게 <비트 걸> 상영 중지를 요청하는 공문을 발송한다. 해당 문서에는 상영중지 처분의 이유를 “상영 후의 제반 사항을 고려하여 동 영화상영을 당시에 배급회사인 세기상사주식회사 우기동으로부터 수리한 별첨 각서와 상영계획서에 의거하여” 상영계획에 있던 극장에서 “재상영 및 동일 극장의 장기 상영을 일체 중지”할 것을 명령한다. 당시의 개봉이 계획된 극장은 대한극장, 문화극장을 비롯하여 대구의 제일극장, 광주의 동방(東方)극장, 그리고 인천의 동방(東邦)극장 5곳이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이후의 신문기사와 관련 검열 서류를 참조해보면, 서울지역에서는 2, 3류 극장은 제외한 개봉관 상연은 제한적으로 허가된다. 2, 3류 극장의 경우 청소년들의 입장을 단속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기에 영화 상영을 개봉관에 한정한다는 논리인 것 같으나, 어째서 서울 지역만 예외로 두었는지는 현재의 서류만으로는 알 수 없다. 다만, 영화수입추천에서부터 상영신고필증의 발부까지 문교부의 고시에 따라 절차를 밟아왔던 사안이었던 만큼, 세기상사에게 일방적인 손해를 입힐 수 없어 마련된 일종의 중재안 정도일 것이라 추측만 가능할 뿐이다. 결과적으로 <비트 걸>을 둘러싼 논란은 영륜의 권고안을 받아들여 서울의 개봉관에 한정하여 상영을 하게 됨으로써 일단락된다. [그림 7] <비트 걸> 재상영 허가 관련 서류 [그림 7]은 5.16 이후 정부조직이 개편된 뒤 세기상사가 공보부에 상영보류 해제를 신청했던 사실을 알 수 있게 하는 서류이다. 해당 문서는 1961년 12월 6일에 작성된 품의서인데, 그보다 앞서 1961년 11월 14일, 세기상사는 공보부 장관에게 상영보류해제와 관련하여 서신을 보낸 것으로 확인된다. “개봉 후 영화의 교육적 가치”가 인정되었고, “혁명 후(5.16 쿠데타를 의미) 이와 유사한 수편의 영화가 국내에서 상영된 사실”을 참작하여 상영을 승인해줄 것을 요청하는 것이다. 이후, 1961년 12월 6일, 공보부로부터 해당 영화가 “2월 18일로 상영보류된 작품이나” “서류고사 및 실사고사를 통하여 내용을 검토한 바 관객으로 하여금 저속한 감정을 도발할 우려가 있는 스트립쇼- 장면을 삭제하고 상영함이 무방하다”고 판정을 받고 재상영을 위한 허가증을 받게 된다. 검열 서류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해당 영화에 대한 검열이 8월에 이미 실시되었다는 점이다. 군과 법무부, 민간 인사(추정)로 구성된 검열 위원회는 해당 영화에 대해 양가적인 결과를 내어놓는데, 역설적이게도 군에서 파견된 오세용 소령만이 “반항이 그 생리가 된 젊은 세대가 범하기 쉬운 악풍조의 감염을 부모들의 사랑과 조언으로 미연에 방지해야 된다는 것을 암시한 영화”로서 이를 검토한 결과 “스트립쇼를 하는 장면은 관객으로 하여금 야비하고 저속한 감정을 도발할 우려가 있으니” 해당 “장면만 삭제하면 상영하여도 가하다고 사료”된다는 입장을 내어놓는다. 결과적으로 영화는 상영허가가 되었고, 그 권리는 2년간 보장이 되었다. 검열 서류를 통해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사실은 1971년 6월에 세기상사가 다시 한 번 <비트 걸> 상영허가를 신청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검열 당국은 해당 영화에 대한 권리가 세기상사에 있는지 분명하지 않다는 이유로 상영허가를 반려한다. 이후, 세기상사는 자신들이 가진 권리를 입증함으로써 권리 상에 문제가 없음을 보이고 문제가 되는 장면을 삭제하여 재심을 요청하는 의견을 전달한다. 그러나 검열당국은 “전체적인 영화의 내용이 문제되므로 화면 일부를 제거하여도 상영이 불가하다고 사료되어, 현재로서는 허가할 수 없으니” 이를 반송한다는 의견을 통보함으로써 상영금지처분을 내린다. <비트 걸> 검열과 관련된 일련의 서류들은 동일한 영화가 정책 당국의 입장에 따라 어떤 처분을 받게 되며, 그 과정에서 시장 주체는 어떠한 방식으로 대응하는지, 그리고 그들 사이의 역학 관계는 어떠한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어 한국영화사를 구성하는 데 중요한 사료가 되리라 생각된다. 1. 1912년에 설립된 영국영화검열기구(BBFC)는 비정구기구로서 현재는 영국영화등급분류위원회(The British Board of Film Classification, BBFC)로 그 명칭과 기능이 변경되었다. 2. 1960년대의 영국의 영화 등급분류 기준은 U등급(Universal, 전체관람가)과 A등급(Adult, 성인동반 관람가능), 그리고 X(16세 이상 관람가능)등급으로 나뉘었다. 따라서 <비트 걸>의 X등급은 한국의 현행 영상물등급분류 기준으로 따지면, 청소년관람불가 등급 정도라 할 수 있다. 3. 「Beat Girl」, Wikipedia. (URL: https://en.wikipedia.org/wiki/Beat_Girl) 4. 의미를 알 수 없음. 5. 「<젊은 육체들> 말썽, 사회적 악영향을 우려하여」, 《한국일보》, 1961.1.27. 6. 「패륜영화의 상영과 극장가의 환경정리」, 《경향신문》, 1961.2.9. 7. 「영화 <젊은 육체들>에 대한 사과문」, 《경향신문》, 1961.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