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피드 화이어
- 감독
- 드와이트 리틀
- 제작년도
- 1992
- 출연
- 브랜든 리, 파워스 부스, 닉 맨쿠소, 레이몬드 J. 배리, 케이트 하지, 트지 마, 토니 롱고, 마이클 폴 찬, 더스틴 엔가이엔, 브리지타 스텐버그, 바실 웰라스, 알 레옹, 프랑소와 쇼, 쿠엔틴 오브라이언, D.J. 하워드, 모리스 차세
왕시린. 한자 이름으로 王西麟(pinyin_Wang Xilin). 1936년 12월 13일에 중국 허난성(河南省) 카이펑(開封)에서 태어났다. 연도를 유심히 읽어 주기 바란다. 아직 국공내전은 끝나지 않았고, 일본 제국주의와의 전쟁이 이어지고 있었다. 마오쩌둥이 중국 공산군을 이끌고 18개의 산을 넘고 17개의 강을 건너 1만 2,500킬로에 이르는 대정정을 끝낸 이듬해이다. 왕시린은 음악에 대한 재능을 타고났다. 시골에서 악기를 변변히 가르쳐주는 교사가 없는 데도 스스로 음악책을 읽으면서 12살에는 중국 전통악기인 후친(胡琴). 아코디언, 그리고 몇몇 관악기를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했고, 사회주의 중화인민공화국이 되었다. 1949년, 13살 소년 왕시린은 그게 무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때 왕시린은 간쑤성(甘蕭省) 핑량(平凉) 미션스쿨 졸업반이었다. 인민 해방군의 행진을 보았다. 그러면서 소년들에게 입대를 선전하였다. 가난한 왕시린은 가족 중의 입을 하나라도 줄이기 위해 입대하였다. 여기서 왕시린은 1957년까지 근무하였다. 음악과 먼 생활이었지만 다시 음악으로 돌아오고 싶었다. 그때 군부 위원회에서 군악대 지휘자를 양성한다는 계획을 발표하였다. 왕시린은 지원을 했고, 여기서 좋은 성적을 받았다. 그래서 우수 인재로 발탁되어 상하이에 있는 상하이 음악학교(上海音樂學院)로 전출되었다. 왕시린은 여기서 처음으로 체계적인 음악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때 이 학교에는 유럽에 음악 유학을 다녀온 선생님들과 연주자들이 있었다. 대기근으로 알려진 대약진의 시대를 왕시린은 피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천안문 안에서는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이 다시 시작되었다. 1965년 11월 10일 베이징 부시장인 우한(吳晗)이 쓴 경극 희곡 <하이루이의 파면(海瑞罢官)>을 야오원위안(姚文元)이 대약진운동에 대한 비판이라고 주장하는 글을 발표하였다. 지도자는 기다리던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1966년 6월 1일 인민일보에 마오쩌둥은 “모든 괴물과 악마를 척결하라”는 논설을 발표하였다. 새로운 강령. 이 문장에 들어있는 단어, 척결(剔抉). 살을 도려내고 뼈를 바르듯이 나쁜 부분들을 깨끗이 없애버려라. 부주석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이 손에 피를 묻히는 역할을 맡았다. 1966년 8월 18일. 천안문 앞에 100만 명의 학생들이 집합하였다. 그들에게 붉은색의 비단 완장이 배급되었다. 해가 떠오르자 연단에 마오쩌둥이 나타났다. 붉은 완장을 두른 학생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열광하였다. 린뱌오는 “착취계급의 모든 낡은 사고와 낡은 문화, 낡은 전통, 낡은 관습을 타도하라”고 호소하였다. 지도자는 인자한 표정으로 그들의 환호에 응답했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었다. 홍위병들은 처음에는 그들의 교사를 공격하였다. 상하이 음악학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왕시린의 선생님들은 자아비판에 불려갔고, 그 과정에서 자살하거나 불구가 되거나 아니면 체포되어 감옥에 갔다. 다음에는 그들의 동료가 목표가 되었다. 그 중의 한명이 왕시린이었다. 왕시린은 학교를 비판하는 대중연설을 요구받았다. 왕시린은 거절하였다. 청년동맹에서 악질분자로 분류한 다음 10번도 넘은 자아비판을 요구했고, 그런 다음 “인민 속으로 들어가서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다시 학습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왕시린은 시골로 하방(下方)되었다. 그가 보내진 곳에서 왕시린은 주자파로 분류되어 한밤중에도 불려 나가 사람들 앞에 서서, 자아비판을 하고 야유를 받아야 했다. 그리고 이른바 제트기 자세라고 불리는 사상개조 고문을 받았다. < 흑의인 >이 시작되자마자 왕시린이 허리를 숙인 다음 두 팔을 길게 뻗고 서 있던 그 자세, 이 자세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는 지금 이 글을 읽는 걸 멈추고 일어서서 해보길 바란다. 중국 전역에서 반혁명분자로 분류된 이들에게 요구된 자세. 그 자세를 추운 겨울날 운동장에서 밤새도록 요구하고, 한여름 뜨거운 뙤약볕 아래 세워놓고 종일 그렇게 서 있어야 했다. 쓰러지면 무서운 매질이 기다렸고, 그리고 다시 일어서서 계속해야만 했다. 왕시린은 문화혁명 기간 중에 자신의 치아를 잃었고, 청력의 20퍼센트를 상실했다. 왕시린은 음악가이다. 왕빙은 왕시린의 음악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첫 번째(이자 아직까지는 마지막) 극영화 < 바람과 모래 (The Ditch, 夾邊溝)>의 사운드트랙으로 사용할 계획이었다. 복잡한 사정으로 잘 안 되었다. 하지만 계획을 바꾸어서 왕시린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 계획을 세웠다. 그 사이에 변화가 생겼다. 왕시린은 2017년 10월 24일 그의 거주지를 베이징에서 독일 라인할트- 팔츠주(州) 마인츠로 이사했다. 왕빙은 왕시린을 찾아가 집에서 인터뷰했고, 또 왕시린이 지휘하는 무대도 찍었다. 하지만 무언가 핵심적인 것이 거기에 빠졌다고 느꼈다. 계속해서 완성을 미루었다. 방법을 바꾸었다. 왕빙은 왕시린을 단 하룻밤 극장 무대에 세우기로 하였다. 프랑스 파리 10구 샤펠가 37번지에 자리한 극장 떼아트르 데 부프 뒤 노르(Théâtre des Bouffes du Nord)에서 2022년 5월 27일에 촬영하였다. 아무도 없는 텅 빈 극장. 왕시린은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채, 말 그대로 발가벗고, 몸의 어떤 부위도 가리지 않고 무대 위로 걸어 올라온다, 이때 우리는 그 몸에서 무엇을 읽어야 하는가. 몸에 새겨진 역사. 달리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온몸에 피어난 검버섯. 흘러내리는 것만 같은 살. 몸은 아직도 문화혁명을 기억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무대에 서자마자 제트기 자세를 한다. 그런 다음 자신이 처음 인민해방군의 행진을 보던 날부터 시작해서 긴 증언을 시작한다. 아니, 차라리 이건 공연이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왕시린은 기억의 무게 앞에서 몸서리치면서 견딜 수 없는 그 시간을 물리치기라도 하듯이 노래 부르고 피아노 앞에 앉아서 건반을 쾅쾅 두들긴다. 그건 아름다운 선율이 아니다. 노래는 비명을 지르는 것 같고, 건반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만 같다. 그렇다. 이것이 왕시린이 자신을 짓눌렀던 역사와 싸워온 방식이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말한다. “나는 오직 작곡을 하고 또 하면서 그 시간을 지나왔습니다. 그렇게 악보에 그걸 기록했습니다. 누군가 그걸 연주할 때 그건 그 시간을 살았던 인간을 다시 불러내고 그 시간의 무게를 듣고 경험하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영화의 제목에 관해 설명해야 할 것 같다. 이 영화에는 ‘검은 옷을 입은 남자(黑衣人)’은 나오지 않는다. 대신 왕시린은 마지막에 노래를 부른다. 노래 가사만으로는 이 내용을 따라올 수가 없다. 이 노래는 왕시린이 작곡한 ‘흑의인지가(黑衣人之歌, 검은 옷을 입은 남자의 노래)’이다. 이 노래 가사는 소설가 루쉰이 1926년에 쓴 소설 <주검>(鑄劍, 쇠붙이를 녹여 칼을 만들다, 한국에는 <도공의 복수>라고 김시준이 번역했다)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 소설의 줄거리를 알지 못하면 이 가사의 뜻을 알 수가 없다. 단조롭게 줄거리를 소개하겠다. 열여섯 살이 되는 소년 미간척은 어머니에게 칼을 만드는 천하제일의 명인이었던 아버지 이야기를 듣는다. 왕은 어느 날 신비로운 쇳덩어리를 얻게 되고 미간척의 아버지를 찾아와 검을 만들어달라고 한다. 아버지는 삼 년에 걸려 두 자루의 검을 만든 다음 아내에게 한 자루를 주면서 자신이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고 알려준다. 의심 많은 왕은 틀림없이 세상에 둘도 없는 검을 바치면 자신이 또 다른 검을 만들지 못하게 자신을 참수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아이가 열여섯 살이 되면 자신의 복수를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왕궁에 가서 검을 바치고 참수당한다. 미간척은 아버지의 복수를 하기 위해 떠나지만 그만 왕의 부하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미간척 앞에 ‘검은 옷을 입은 사내’가 나타난다. 그리고 두 가지 제안을 한다. “만일 나에게 너의 목과 검을 바치면 네 복수를 해주마” 미간척은 망설임 없이 아버지의 칼로 자신의 목을 자른다. ‘검은 옷을 입은 사내’는 미간척의 목과 검을 들고 왕에게 세상에 없는 구경거리를 보여주겠다고 아뢴다. 그러면서 큰 솥에 물을 끓여달라고 요구한다. 물을 끓이자 그 속에 미간척의 목을 집어 던진다. 그런 다음 ‘검은 옷을 입은 사내’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솥 안에서 노래에 맞춰 미간척의 목이 춤을 추기 시작한다. 그런데 오르락 내리락 하던 그 목이 갑자기 보이지 않자 왕이 어찌 된 일이냐고 묻는다. ‘검은 옷을 입은 사내’는 솥 안에서 신기한 일이 벌어지고 있지만 가까이 오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고 아뢴다. 궁금함을 참지 못한 왕이 솥에 가까이 와서 목을 들이밀자 ‘검은 옷을 입은 사내’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왕의 목을 자른다. 솥 안에 굴러떨어진 왕의 목을 미간척의 목이 물어뜯으면서 ‘검은 옷을 입은 사내’와 눈을 찡긋 맞춘다. 왕시린이 부르는 노래는 여기서 ‘검은 옷을 입은 사내’의 사내가 부르는 노래를 가져와서 작곡한 곡이다. 루쉰의 소설에 관해서는 많은 해설이 있다. 아마 <흑의인>을 보고 나면 당신의 해설을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왕시린은 평생동안 싸웠다. 어디서? 그의 악보 위에서. 혁명 속에서의 혁명. 선율과 피비린내. 리듬과 비명. 피아노 연주를 마치고 난 다음 왕시린은 무대를 떠난다. 왕빙은 텅 빈 극장을 둘러본다. 그런데 저기 누가 앉아있다. 왕시린이 앉아있다. 왕시린은 누구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일까. 왕빙을? 영화를? 천안문의 지도자를? 아니면 역사를? 아니면 우리를? 아마도, 아마도 그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만 같다. 왕시린, 그 자신을,
1987년에 도착한 < 영웅본색 >은 그 매혹의 강도에서 보자면, 적어도 어떤 세대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사건이라고 할만한 것을 만들어냈다. 동시대의 그 어떤 한국영화도 이 영화가 불러일으킨 것과 같은 열광의 대상이 되지는 못했다. ‘강호의 의리가 땅에 떨어졌다’는 저 고색창연한 대사는 소년들의 마음을 움켜잡았다. 그렇다. 의리는 땅에 떨어졌으나, 이 세계의 유일무이한 가치인 바로 그 의리를 세우기 위해 우리의 ‘따거(大兄)’ 주윤발은 홀홀단신 적진을 향해 나아가 기꺼이 목숨을 바친다. 소년들은 일시에 검은색 선글라스와 롱코트에 사로잡혔으며, 너도나도 성냥개비를 질겅질겅 씹어대고 싶어했다. 실상 <영웅본색>의 시작은 그렇게 창대하지는 않았다. 이 영화는 서울의 화양, 명화, 대지극장에서 1987년 6월 23일부터 7월 9일까지 개봉되었으며, 9만 4천 604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개봉관에서 ‘신통치 않은’ 성적을 거둔 이 영화가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기 시작한 것은 “뒷골목과 변두리의 ‘동시상영’ 프로가 되면서”부터였다. 그리고 “급기야는 주인공의 웃차림과 제스추어를 모방하고 수십번씩 같은 영화를 되풀이해 보는 1) 열광적인 팬덤을 낳았다. 팬덤은 이제 막 불붙기 시작한 새로운 매체를 기반으로 장르에 대한 탐닉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1988년을 기점으로 VCR 대수가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영웅본색>을 필두로 한 홍콩영화는 비디오 가게 선반이 나눠놓은 분류 속에서 그 자체로 하나의 장르로 카테고리화되었다. 이 ‘장르’는 이제 가장 충실하고 열정적인 관객을 갖게 될 터이다. 비디오라는 새롭게 추가된 매체의 영향은 있었으나, 여기에는 분명 1970년대 이래로 동시상영관을 채워왔던 이런 영화들(이른바 1970년대의 홍콩 권격영화)의 관객의 세대적, 젠더적 상속이 있었다. 이들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한 것은 10대에서 20대의 젊은 남성관객들이었다. 장사치들은 발빠르게 이에 조응하였다. <영웅본색> 이후 단 1년 만에 홍콩영화의 한국 판권은 2배에서 3배까지 치솟았으며, 1988년의 시점에 홍콩영화의 주요 수출국 중 3위로 랭크된 한국은 1990년에 이르면 대만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오우삼과 서극과 임영동의 이름은 이제 막 등장한 ‘시네필’들의 경전에 올랐고, 주윤발, 장국영, 왕조현, 유덕화, 적룡, 이수현, 여명 등 한국식 한자 발음으로 통용되는 이름들은 그 발음만큼 ‘친숙한’ 스타가 되었다. 이 열광을 가능케 한 조건과 근원은 무엇인가? 왜 이곳에서 <영웅본색>은, 나아가 이로부터 촉발된 19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 소위 ‘홍콩 느와르’ 2) 로 불려진 일련의 홍콩영화들은 그토록 강렬한 매혹을 불러일으켰는가? 왜 그때 한국의 10대와 20대 젊은 남성들은 이 세계에 그토록 ‘진지하게’ 심취할 수 있었는가? <영웅본색>은 1987년과 88년 사이라는 한국 사회의 기점적 시간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시작된 홍콩 느와르에 대한 열기는 1990년대를 전후하여 절정에 이르렀다.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분명 <영웅본색>이 불러일으킨 열광의 강도는 놀라운 것이지만, 누가 어떻게 향유, 소비했는가의 방식은 한편으로는 1970년대 이후 이 지역에서 광범위한 영향력을 획득했던 (그러나 그 하위문화적 성격상 거의 담론의 영역에서는 논의되지 않았던) 홍콩산 액션영화(이거나 종종 한국, 대만, 동남아시아 일대의 영세 영화자본들이 합종연횡하면서 만들어낸 출처 불분명의 ‘무국적’ 액션영화)가 소비되었던 방식을 답습하는 한편, 당연한 말이지만 1980년대 중후반이라는 사회적·미디어적 조건과 결부되어 향유되었다. 즉, 여기에는 한국에서 홍콩영화가 차지했던 독특한 위상이라는 종적 맥락과 <영웅본색>이 도착한 1987년부터 이 장르에 대한 열광이 사그라드는 1990년대 초반까지의 한국이라는 횡적 맥락이 서로 연동되어 개입되어 있다. 1960년대 중후반 한국의 영화관객이 산업화와 도시화 속에서 계층별, 세대별, 젠더별 분화를 시작하던 무렵 이른바 무협영화의 형태로 처음 한국 영화시장에 도착한 이래 홍콩영화는 재개봉관, 도시 변두리 소극장과 같은 지극히 남성 동성사회적(homosocial) 공간에서 지속적으로 소비되며 젊은 남성들의 주요한 하위문화적 자원으로서 기능하였다. 특정 공간과 특정 세대, 젠더가 결합되어 있는 이 향유의 방식이야말로 홍콩영화에 관한 한국 담론 특유의 세대적 노스탤지어의 감각이 생겨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홍콩영화에 관한 서술이 종종 개인적 기억과 그것이 놓여진 시간과 장소로 이끌리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3) 10대, 20대의 남성 하위문화와 강하게 결부되어 있던 홍콩영화에 관한 이해는 내셔널 시네마 히스토리에 기반한 영화사적 계보 이전에 개인적 기억과 결합되어 수용되어왔다. 강력한 스타 시스템으로 운용되는 홍콩영화가 전시하는 친밀한 인종의 얼굴, 스타의 몸이야말로 바로 이 개인적 열망들의 투사체로 작용하였다. 이것은 홍콩영화의 향유 방식에 내재된 독특한 세대론적 감각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를 보여준다. 이 세대적 응집성은 강렬한 체험의 강도를 동반한다. 홍콩영화와 관련하여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이 영화들이 한국영화사에서 차지하는 기묘한 위치이다. 홍콩영화는 일본영화가 전면 금지된 이곳에서 오랫동안 한국영화를 제외하고 같은 동양인의 얼굴이 등장하는 유일한 영화였으며, 또한 한국영화와 가장 빈번하게 결합된 영화이기도 하였다. 1970년대 내내 도시 변두리 극장에서 가장 긴 흥행 사이클을 보여주었던 액션영화의 절대 다수는 소위 한국-홍콩 혹은 한국-대만의 ‘위장합작’ 영화들이었다. 1986년의 외국영화 수입 자유화 이후에야 완전히 사라진 이 오래된 관행 속에서 종종 한국어 더빙 버전의, ‘한국영화’로 알려지기도 한 홍콩영화는 익숙한 풍경과 언어를 지닌 것으로 감각되었으며, 그 속에서 홍콩영화의 외래성은 습관적으로 또 의도적으로 지워졌다.(홍콩 영화배우들의 이름이 한국식 한자 독음 표기로 호명되었던 사실은 이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일 것이다). 홍콩영화에 대한 이곳에서의 감각은 외화와 방화 사이에 비스듬히 걸쳐져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아마도 이 친밀성이야말로 홍콩영화에 대한 한국에서의 ‘번역가능성’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일 게다. 4) 바로 이와 같은 친밀한 방식 속에서 이 영화들에 열광한 절대적인 관객층이 10대와 20대 젊은 남성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은 이 영화들이 이 시기 이들의 열망과 분노, 상상적 극복과 같은 것, 즉 어떤 정동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절반쯤 토착화된 영 컬처로서 <영웅본색>은 이 영화가 도착한 바로 그 시간인 1987과 1990년대 초까지 들끓었던 혁명적 열망과 정념과 관련되어 있다. 1987년의 6월 항쟁이 이끈 직선제 개헌 관철의 결과 그해 12월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6월 항쟁은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함을 보여주었다. 7, 8월의 노동자 대투쟁과 전대협 결성, 이듬해의 노동법 개정투쟁, 6.10/8.15 남북학생회담 투쟁, 1989년의 전교조 결성, 노동자 총파업, 그리고 문익환 목사, 전대협 대표 임수경, 정의구현사제단 문규현 신부 등의 방북, 1990년의 전노협 결성 등 대규모의 노동자 투쟁과 통일 투쟁이 이어졌다. 한국 사회의 역사적인 동시에 정치, 사회, 경제적인 모순에 대한 거대한 저항이 분출하고 있던 이 시기는 정확히 오우삼 영화에 대한 열광의 시간과 겹쳐져 있다. 한국영화를 포함해서 그 어떤 영화도 이 순간 그의 영화만큼 젊은 남성들의 열광의 대상이 되지는 못했다는 사실이야말로 이 영화가 1987년의 정치와 정동과의 예기치 않은 충돌 혹은 밀착을 이루어내고 있는가를 역설해주는 것일 게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 <영웅본색>을 필두로 한 홍콩 느와르는 이 영화들의 과도한 폭력성이 미칠 영향에 대한 우려로 점철되었다. 그것은 심지어 구체적인 숫자까지 동반하였다. 당시 한 시민단체가 주최한 ‘폭력영화와 청소년 문화환경’이라는 심포지움의 발표에 따르면, 1988년 관객 28만명을 동원한 <영웅본색 2> 전체의 21.9퍼센트가 폭력장면이고 89년 25만명을 동원한 <첩혈쌍웅> 24.3퍼센트가 폭력장면이다. 5) 라는 ‘구체적인’ 퍼센티지까지 제시되고 있다. 이 영화들에 대한 히스테릭한 우려는 더 이상 저질이라는 모호한 어휘를 맴도는 것이 아닌 직접적으로 ‘폭력’에 대한 과도한 염려였으며, 이 영화들에 대한 매혹 또한 액션의 ‘폭력’으로부터 비롯되었다. 87년 6월 항쟁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이한열의 죽음이라는 기폭제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어떻게 대중이 애도의 공동체로서 형성되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자, 또한 국가폭력이 저지른 이 무구한 죽음의 형상은 그 자체로 대항폭력을 요청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대항폭력은 ‘87년을 전후로‘ ‘정당한 약자의 무기로 자리잡았’다(김원). 그것은 가두에서 백골단과 구사대가 휘두르는 곤봉과 최루탄에 맞서는 화염병과 쇠파이프의 저항이었으며, ‘약자가 최대한의 도덕적 힘을 발휘한 가장 치열한 무기’(최장집)로서의 분신이었다. 즉, 이 격렬한 대중투쟁의 시간은 도저한 국가 폭력에 저항하는 대항폭력의 시간이기도 하였다. 대항폭력의 정당성이야말로 공안정국을 유지하고자 했던 이 정권으로서는 가장 염려스러운 것이자 하루빨리 탈취해야 할 것이었다. 역설적으로 말해 폭력의 카테고리 안에 묶인 <영웅본색>의 힘은 그야말로 거리의 힘의 상상적 투사물일 수 있었다. 1990년 국군보안사령부가 각계 주요인사들을 사찰한 ‘청명계획’이 내부고발자에 의해 폭로된 직후 국면전환용으로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노태우는 “저는 우리의 공동체를 파괴하는 범죄와 폭력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고 헌법이 부여한 대통령의 모든 권한을 동원해서 이를 소탕해나갈 것입니다”라고 선언하였다. 범죄와 폭력이 ‘와’로 병렬되고 있는 이 연설은 대항폭력을 범죄화함으로써 이 폭력의 정당성을 삭제하고자 하는 언설 전략의 전형적인 한 형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폭력) 대 대항폭력. 한국에서의 홍콩 느와르 전성기와 함께 하는 이 두 폭력의 구도는 왜 이 영화들의 폭력이 어떤 이들에게 그토록 과잉 의식되는지 왜 이 영화들의 향유자들에게는 그토록 매혹적인 것인지에 대한 단초를 제공해준다. 저 영화적 폭력이 죽음과 애도와 긴밀히 연결된 대항폭력의 영화적 형상이라고까지 말하는 것은 무리가 있는 이야기일 것이다. 다만, 여기에는 분명 폭력 형상이 있으며, 나아가 그것의 가능성을 열어젖히는 쾌감이 있다. 게다가 그 폭력은 오로지, ‘형제’를 위해서만 발현되는 것이다. <영웅본색>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이 정념의 활극은 오로지 형제애에 기초해 있다. 한때 조직에 발 담갔으나 갱생의 의지를 다지는 남자, 그러나 그의 이전의 삶이 그의 발목을 잡아끄는 이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영웅본색>이 느슨하게 관련된 1967년의 동명 영화로부터 비롯되었다. 감독 용강(龍剛)의 광동어 사회파 드라마인 이 동명의 영화를 리메이크하면서 오우삼은 원작에는 존재하지 않는 마크라는 전적으로 새로운 인물을 창조하였다. 오우삼은 이 인물을 구축하는 여타의 서사를 지우고, 이 캐릭터를 송자걸과의 관계에만 집중하도록 만들었다. 마크는 오로지 이 관계의 도덕, 의리라는 하나의 정념으로 움직인다. 젊은 남성들을 열광케 했던 소위 이 영화의 ‘명장면’들이 마크에게 집중되어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예컨대 위조화폐에 담뱃불을 붙이는 주윤발, 화분에 심어놓은 총을 꺼내어 춤추듯 유려한 동작으로 총을 쏘는 주윤발. 왜냐하면 이 캐릭터는 클로즈업과 슬로우모션을 통해 제스추어와 표정으로 특권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크에게 가족이 있는가, 그는 어떤 역사를 지니고 있는가. 우리는 여기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 송자걸이 서사의 캐릭터라면, 마크는 제스처의 캐릭터이다.(1974년이라는 구체적인 시간을 배경으로 마크의 전사를 그리고 있는 < 영웅본색 3 >는 영화의 성취와는 별개로 이 시리즈의 팬들을 얼마나 실망시켰던가. 3편에서 마크는 땅으로 내려왔고, 심지어 여자와 ‘연애’를 한다.) 오우삼은 마크를 통해서 신화적 공간을 창출한다. 단적으로 말해 그 공간은 ‘협(俠)’의 세계이고, 이 ‘협’이라는 세계의 기본원리를 그 자체로 현현해내고 있는 마크-주윤발이야말로 이 세계를 온전히 하나의 세계로서 형성시켜내고 있는 자이다. <영웅본색>을 비롯한 홍콩 느와르의 중요한 특질 중 하나는 이 세계가 ‘아버지’ 없는 세계라는 데에 있다. 다시 말해 ‘아버지적 존재’는 행위의 동기 혹은 주체로서 기입되어 있지 않다. 이 세계에서 행위의 동기이자 주체가 되는 것은 동년배의 남성들이며 연대란 오로지 그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형제를 위해!). 이 세계를 온전히 하나의 세계로서 구성해내는 원리라고 할만한 것은 다름 아닌 형제들 사이의 ‘의리’와 세계에 대한 ‘인의’이며, 형제를 배신하는 행위야말로 이 세계의 악이다. 오우삼은 기회 있을 때마다 자신의 영화가 폭력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인의(仁義)와 형제애에 관한 영화임을 역설하였다. 그것은 단지 그의 영화가 과도하게 폭력적이라는 비난에 대한 변명이 아니다. < 첩혈속집 >에 출연했던 쿠니무라 준이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오우삼은 진심으로 자신의 영화 모티브가 인의로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했다. “소위 인의란 사람과 사람의 관계, 삶과 죽음 사이에서도 상대를 지키는, 혹은 상대를 위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인간의 관계성의 극단과 같은 것이다. 알기 쉽게 말하자면 남자들 간의 우정이라고 할까. 그것이 내가 영화를 찍을 때의 기본 모티브다.” 6) 오우삼이 인의를 ‘사람과 사람의 관계’, ‘삶과 죽음 사이에서도 상대를 지키는……남자들 간의 우정’이라고 언급할 때, 그것은 그의 영화 스승인 장철(張徹)이 ‘피의 형제애 blood brothership’라고 불렀던 것을 상기시킨다. 오우삼 스스로 경외를 바쳐 마지않는 영화사의 선배들 이름을 즐겨 거론하지만(이를테면 장철부터 샘 페킨파, 장 피에르 멜빌까지) 적어도 <영웅본색>에 한해서 말하자면 이 영화는 거의 전적으로 장철에 대한 오마쥬로 보인다. 오우삼이 장철의 영화적 인장이라고 할 수 있는 것, 다량의 피, 파열하는 신체, 죽음의 순간을 지속시킬 수 있는 영화적 장치로서의 슬로우모션 등을 반복할 때 그것은 단지 스타일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장철 영화의 미학인 ‘비장’을 발현하는 데에 핵심요소들인 이 인장들의 반복이야말로 <영웅본색>을 그토록 비장하게 만드는 것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장철은 홍콩의 주류 장르를 젊은 남성들의 영화로 옮겨오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홍콩 내의 산업적, 인구적 변화와 맞물려 등장한 젊은 남성 관객들을 대상으로 한 그의 영화는 젊은 남성이 말 그대로 ‘죽도록’ 싸우는 영화에 심취해 있었으며, 장철의 관심은 시종 이 싸우는 신체가 어떻게 파열되고 부서지는가에 있었다(<영웅본색>의 적룡은 장철이 사랑해마지 않았던 그 부서지는 젊은 신체 중 하나였다). 이 이야기는 단지 그의 영화가 얼마나 익스트림한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 스스로의 영화를 즐겨 ‘양강(陽剛)’ 영화라고 칭했던 장철에게 강력한 남성성(陽剛)은 비장미를 자아내는 데에 있어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 비장미는 세계와의 대결을 내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치적인 미학이다. 이 대결은 패배를 예정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장을 쏟아가며 선 채로, 끝까지 버티면서 죽음에 이를 때 비장미가 발현된다. 홍콩 영화 최초로 등장한 이 젊은 남성들의 영시네마가 홍콩의 가장 격렬한 정치적 저항의 시기인 1967년과 1968에 등장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오우삼이 장철을 다시금 불러오고 있을 때, 이 영화들은 마찬가지로 불의와 폭력의 세계에 대한 정치적 주체의 정동을 반영한다. <영웅본색>이 홍콩영화 사상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던 그해 홍콩은 다가오는 1997년을 어둡게 만드는 사건으로 들끓고 있었다. 1986년 홍콩 센트럴에서 약 50미터 거리인 다야만에 설립될 중국의 핵발전소 건립계획은 홍콩 내의 격렬한 반대운동을 불러일으켰다. 같은 해 4월에 발생한 체르노빌 사건은 이 반대운동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학생, 노동자, 시민단체 등이 결집한 ‘다야만 핵발전소 건설보류 연석회의’가 중국정부에 제출한 반대서명에는 참여한 숫자는 당시 홍콩인구의 1/5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알다시피 오우삼의 최대 걸작으로 평가받는 < 첩혈쌍웅 >은 1989년 천안문 사태와 ‘본토’의 폭력을 목격한 홍콩 시민들의 광범위한 불안을 반영하였다. 1987년부터 90년대 초반까지 홍콩 느와르에 대한 한국의 젊은 남성들의 열광은, 홍콩의 정치적 맥락과 전혀 상관없지만 그럼에도 이들은 하나의 정동을 공유하는데, 그것은 인의와 그 인의를 보장하는 투쟁중인 집단의 형제애라고 할만한 것이었다. 왜, 한국의 젊은 남성들에게 주윤발은 ‘따거(大兄)’가 되었는가? <영웅본색>이라는 저 정념의 활극의 핵심은 형제를 위해서라면 죽음도 감내하는 헌신적인 형제애이다. 주윤발의 몸이 말 그대로 무수한 총알구멍들로 뚫려질 때, 그는 온몸을 부서뜨리며 이를 수행한다. <영웅본색> 2편에서 죽은 마크-주윤발의 총알구멍으로 너덜너덜해진 코트가 등장할 때 그것은 형제를 위한 이 죽음의 순간을 거의 물신의 영역으로까지 끌어올린다. 죽음을 무릅쓰는 이 형제애의 감정경제는 1987의 저 광범위한 연대, 세계의 폭력에 저항하고자 하는 (남성) 동지들의 연대와 그 속에 작동하고 있던 상징적이고 실질적인 젠더적 편향성까지를 모조리 담아낸다. 다시 말해 이 의리란 세계의 부정과 대치하고 있는 (남성) 형제들 간의 의리에 다름 아니다. 이것이야말로 <영웅본색>의 ‘번역가능성’이었던 셈이다. 말하자면 1987의 <영웅본색>은 한국과 홍콩영화 사이의 독특한 관계 속에서 일종의 외주제작된 정념의 ‘번안물’로서 이곳에 도착하고 있었다. (이 글의 내용 일부는 필자의 「형제애의 로망, 1987의 정동—<영웅본색>과 홍콩-한국 커넥션」을 가필 수정한 것임을 밝힌다.) *** 1) ”구회영, 『영화에 대하여 알고 싶은 두세 가지 것들』, 한울, 1991, 205쪽. 잘 알려져 있다시피 김홍준이 구회영이라는 필명으로 로드쇼에 연재한 글을 묶어 출간한 이 책은 새롭게 등장한 시네필들의 관람 실천의 안내서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한국에서 홍콩영화가 최초의 ‘컬트적’ 향유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은 이 관점에서 보자면 흥미로운 사실이다. 이것은 한국 관객들이 처음으로 시네필이라는 ‘세계’관객의 시민성을 향유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2) <영웅본색> 이후의 홍콩 갱스터 영화를 일괄했던 이 표현은 일본과 한국의 저널리즘에서 즐겨 유통되었다. ‘필름 느와르’라는 매우 특화된 역사성과 내러티브-이미지를 지닌 영화 장르명을 원용해오고 있는 이 용어에 대해 우다가와 코우요는 <영웅본색>의 일본에서의 공개 당시, 일본 배급회사 선전부가 만들어낸 것이라고 전한다.(野崎歓・宇田川幸洋対談「香港犯罪映画の魅力」, 夏目深雪、石坂健治、野崎歓編, 『アジア映画で<世界>を見る』, 作品社、2013, p.110) 대개의 저널리즘적 표현이 그러하듯 엄밀한 의미를 적용하기는 어렵지만, 직관적인 포착이 가능한 이 용어는 거의 같은 시기 한국에서도 즐겨 사용되었다. 한편, 홍콩에서는 <영웅본색> 이후 등장한 일련의 갱스터 영화들에 대해 ‘영웅편(英雄片)’이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하였다. 3) 홍콩영화 향유의 초기부터 있었던 개인적 기억과 결부된 ‘체험’으로서의 홍콩영화에 대한 매혹적인 서술의 사례들로는 다음을 참조. 오승욱, 「어느 장철교 신자의 신앙고백- 나는 왜 그렇게 장철 영화를 좋아하나?」, 『KINO』 2003.7/ 정성일, 「장철의 무협영화에 바치는 피끓는 십대 소년의 막무가내 고백담」,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바다출판사, 2010. 4) 1971년 쇼브라더스에서 장철의 조감독으로 영화 경력을 시작한 오우삼 자신이 1970년대의 홍콩-한국 커넥션을 직접 경험한 자라는 점은 꽤 의미심장해 보인다. 그의 공식적인 감독 데뷔작 <여자태권군영회 女子跆拳群英會>는 한국 관객들의 홍콩영화에 대한 저 친밀함이 1970년대의 어떤 시각적 경험을 통해서 저변화되어갔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73년 불어닥친 이소룡 영화의 붐 이후 국가적 전략으로까지 제시된 ‘태권도 영화’와 호응하여 만들어진 이 합작영화는 한국에서 올로케 촬영되었다. 김창숙과 남산식물원과 경복궁을 주된 시각적 재료로 삼고 있는 이 영화는 한국에서 1974년 제작사 골든하베스트와 감독 오우삼이라는 이름을 지우고, 동아수출공사가 제작하고 김명용이 감독한 ‘한국영화’ <위험한 영웅>으로 개봉되었으며, 1980년대 후반 오우삼 영화의 인기에 힘입어 <여자태권군영회>라는 원제목을 달고 한국에서 VHS로(세경) 출시된 바 있다. 5) 『동아일보』 1990.9.20 6) 「国村準インタビュー」, 宇田川幸洋編集, 『キネ旬ムック フィルムマーカーズ⑫ ジョン・ウー』, キネマ旬報社, 2000, p.74 (관련글) 1. 비행기의 시선, 무정한 시선 - 2021.04.30. 2. 액션영화의 한 기원, 안중근과 무협 - 2021.05.31. 3. '외팔이'의 도래, 1960년대 후반의 무협붐 - 2021.06.30. 4. 태권도 영화- 챠리 셀과 바비 김, 이국적 이름들의 행렬에 관하여 - 2021.07.23. 5. 이소룡적 신체 - 2021.08.24. 6. 김두한과 협객물, 유신 시대의 가장 안전한 쾌락 - 2021.10.01. 7. 브루스플로이테이션과 한국영화 - 2021.11.01. 8. 춤추는 괴수, 1967의 '트위스트' 용가리 - 2021.12.02. 9. 우리는 왜 그때... - 2021.12.24. 10. 용팔이, 1970년대의 과잉과 잉여 - 2022.02.24. 11. 1970년대식 섹스와 폭력, 여감방 영화와 <여수 407호> - 2022.03.22. 12. <삼국대협>, '트랜스내셔널한 어떤 고립에 대하여 - 2022.04.20. 13. '빈곤한 이미지'의 여행- <정도>/<당수태권도>와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 - 2022.05.30.
왕빙은 < 사령혼 >(2018)을 오랜 시간동안 비밀리에 촬영하였고 그런 다음 기습적으로 공개하였다. 여기에 이유가 있다. 이제는 알려진 대로 이 영화는 1957년에 시작된 대약진 기간 동안 우파분자로 지목되어 간쑤성 고비사막에 있는 자볜거우(夾邊溝)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사상교정을 이유로 부역하고 돌아온 다음 침묵을 강요당한 ‘인민’들을 인터뷰한 영화이다. 중국 공산당은 등 샤오핑 이후 문화혁명에 대해서는 당의 오류임을 인정했지만 그러나 사실상 파국으로 끝난 대약진 시기에 대해서는 어떤 사과도 하지 않았다. 그 말은 아직도 대약진 기간에 대해서 비판을 하는 것은 사회주의 중국 인민 공화국에서 허용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는 중국에서 공산당이 허락하지 않는 행위를 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홍콩에서 보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죽음을 목전에 둔 ‘인민’들은 거기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카메라 앞에서 말했다. 비공식 기록에 따르면 저볜거우 강제노동수용소에서만 3년 동안 3만 5천명이었던 수용소 우파분자들 중에서 돌아온 사람은 600명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 강제노동수용소가 중국 전역에 있었다. 대약진 운동 중에 굶어 죽거나, 맞아 죽거나. 실종되거나, 하여튼 죽은 사람의 숫자는 4,70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나는 숫자를 다시 확인했다. 왕빙은 다른 영화를 찍으면서 내내 이들을 만나러 다녔다. 왕빙에 따르면 촬영분량은 600시간에 이르고 만난 사람은 120명에 달한다고 한다. <사령혼>은 그 중에서 15명에 관한 인터뷰를 담고 있다. 상영시간은 8시간 16분이다. 그런데 왕빙은 여기에 한 가지 사실을 알려주었다. <사령혼>은 저볜거우 강제노동수용소에서 돌아온 사람들에 관한 삼부작 중에서 첫 번째 영화이다. 그러므로 나는 다음 영화를 기다렸다. 그래서 < 미(美)는 자유에 있다 >(2018)가 당연히 <사령혼> 연작의 두 번째 영화라고 생각했다. 내가 틀렸다. 이 영화는 왕빙이 미국에 가서 라스베가스 근처에 살고 있는 중국인 화가 가오얼타이(高爾泰)을 만나 인터뷰한 다큐멘터리이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다소 어리둥절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왕빙은 예술가들을 인터뷰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소설가도, 시인도, 음악가도, 대중예술가도, 어떤 영화감독도 만나지 않았다. 왕빙은 노동자들, 농부들, 어란 아이들, 정신병자들, 버림받은 이들, 그저 ‘인민’들만을 만났다. 그런데 갑자기 화가를 만났다. 두 번째 이유는 왕빙은 중국 바깥에 머무는 중국인들을 만난 적이 없다. 마찬가지로 어떤 외국인도 만나지 않았다. 아니, 그 자신이 외국에 누군가를 찍기 위해 나간 적이 없다. 그는 항상 중국을 돌아다니면서 거기서 찍었다. 그런데 갑자기 가오얼타이를 만나기 위해서 미국 라스베가스에 갔다. 내가 왜 왕빙이 그를 찍기 위해서 미국에 갔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영화를 본 다음이다. 먼저 가오얼타이를 소개해야 할 것 같다. 가오얼타이는 화가이지만 그는 미학을 연구한 학자이며 철학을 강의한 선생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바이두(百度, www.baidu.com)의 소개에 따르면 산문수필가이며, 서예가이기도 하다. 하지만 왕빙의 관심은 거기에 있지 않다. 가오얼타이는 1935년 장쑤성(江蘇省) 가오춘현(高淳縣)에서 태어나 수쪼우(蘇洲)사범대학에서 공부했다. 1957년 7월 잡지 ‘새로운 건설(新建設)에 ’미를 논하다(論美)‘를 발표하였다. 이 글이 문제가 되었다. 가오얼타이는 지금도 변증법에 기반을 둔 이 미학에 관한 논문이 왜 문제가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가오얼타이는 여기에 대해서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는 반혁명분자로 분류되었고, 사상재교육을 위해 자볜거우 강제노동수용소로 이송되었다. 가오얼타이가 간신히 살아 돌아올 수 있었던 1959년 우여곡절 끝에 간쑤성 박물관으로 재배치되었고, 거기서 둔황(敦煌) 문화유적 복원사업에 복무하였다. 1962년 봄, 자볜거우 강제노동수용소가 폐쇄되면서 가오얼타이는 고향으로 귀향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복권된 것은 아니다. 1966년 문화혁명이 시작되자 가오얼타이는 다시 우파분자로 고발조치 되었다. 그는 하방 되었다. 그리고 거기서 첫 번째 아내가 죽었다. 가오얼타이가 학교로 돌아온 것은 1977년 문화혁명이 끝난 다음이다. 그 이듬해 란쩌우(蘭州)시범대학에 교편을 잡았고 거기서 <미는 자유의 상징이다(美是自由的象徵)>을 썼다. 이 책은 지식인들에게 널리 읽히는 미학에 관한 저술이 되었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89년 천안문 사태와 관련하여 가오얼타이는 136일 동안 감호소에 구금되었다. 가오얼타이는 1992년 그의 두 번째 아내와 함께 홍콩을 거쳐서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하지만 그의 딸은 중국에 남았고 미국에서 그녀의 부고 소식을 들어야 했다. 이 소개를 읽고 나면 왕빙이 왜 가오얼타이를 만나기 위해 미국까지 가야만 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왕빙은 가오얼타이가 화가이거나 유명한 미학 학자여서가 아니다. 그는 우리가 <사령혼>에 이어서 만나는 16번째 자볜거우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이다. 아니, 17번째라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왕빙의 두 번째 영화 <펑밍; 중국여인의 연대기>에서 만난 허펑밍(和鳳鳴) 할머니도 (그 영화를 볼 때는 미처 셈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알게 된 것인데) 자볜거우에서의 경험을 안고 살아 돌아온 생존자이기 때문이다.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미(美)는 자유에 있다>는 상영시간이 5시간 25분이지만 단 한 번도 가오얼타이의 그림에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 인터뷰가 내내 그의 작업실 바로 옆방에서 진행되는데도 그러하다. 그리고 왕빙은 단 한 번도 가오얼타이의 창작의 과정, 그의 예술작업에 대해서 질문하지 않는다. 쉬지 않고 오직 자볜거우에서의 경험에 대해서만 물어보고 또 물어본다. 그렇다면 왜 가오얼타이를 <사령혼>에 포함시키지 않았을까. 단지 그 분량이 길기 때문에? 내 생각에 그건 (마오쩌둥의 분류에 따르면) 가오얼타이는 지식분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사령혼>에서 단 한 명도 지식분자들을 만나지 못했다. 가오얼타이는 <미적 각성>과 <미적 저항>이란 두 권의 저서가 지금도 중국 내에서 예술가들과 아카데미에서 읽히는 존경받는 저자이다. 왕빙은 그렇다고 해서 여기서 그의 방법을 바꾸지 않는다. 여전히 그는 경청(敬聽)의 미학이라고 불러야 할 만한 방법으로 듣고 또 듣는다. 왕빙은 거의 질문하지 않는다. 좀 더 정확하게 영화에 그가 질문하는 순간을 남겨놓지 않았다. 일단 가오얼타이가 대답을 시작하면 그 대답의 시간 안으로 왕빙은 개입하지 않는다. 그는 카메라를 믿고 오로지 대답하는 가오얼타이를 담는 일에 집중한다. 거기에는 음악도 없고, 별다른 카메라의 위치 변화도 없고, 그렇다고 구도를 바꾸지도 않는다. 다만 두 대의 카메라를 사용해서 이따금 이 카메라로부터 저 카메라에로 옮겨갈 따름이다. 이때 이 인터뷰를 담는 것은 왜 그토록 긴급하고 중요한가. 첫째, 대약진 시대에 강제노동수용소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에 관한 어떤 이미지도 없다. 게다가 중앙정부의 자료들은 대부분 아직도 접근이 엄격히 금지되었으며 또한 (역사학자들의 조사에 따르면) 그 신뢰도가 매우 낮은 상태의 보고서들이다. 심지어 지방 성(省)과 현(縣)의 자료들은 그것을 수집하는 과정에서 훈련받은 공무원들이 없었기 때문에 전혀 체계적이지 않았고 일부 수치들은 중앙정부에 보고하는 과정에서 일부 수치를 멋대로 수정하였다. 이제 남은 것은 거기서 살아 돌아온 자들의 증언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둘째, 그런데 그들이 죽어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용기를 낸 것이기도 하지만 그들에게 허락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왕빙은 서둘렀지만 가끔 인터뷰가 끝난 다음 몇 달 뒤에 장례식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사령혼>에 그런 순간들이 담겨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왕빙의 영화들을 단지 역사적 증언의 가치 때문에 소중하게 여기는 것인가. 만일 그게 전부라면 이 영화들의 가치에 대해서는 우리보다는 역사학자들의 손에 맡기는 편이 나을 것이다. 바로 여기가 우리들의 출발점이다. 우리들은 왕빙의 작업 과정에서 영화가 증언을 듣는 순간, 증인과 만나는 자리. 증언을 들으면서 증인의 증인이 되는 영화의 자리를 다시 물어볼 수 있게 되었다. 그때 영화는 자기의 존재에 대해서 질문을 시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내가 왕빙의 영화를 보면서 배움을 구하는 것이다. 고다르는 1944년 아우슈비츠에 영화가 없었기 때문에 영화가 죽었다, 라고 말했다. 정확하게 같은 의미에서 왕빙은 영화가 1957년 자볜거우에 없었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지금 영화의 책임을 물어보는 중이다. 접근 불가능했던 것들에게 영화가 다가가서 그들에게 증언을 할 기회를 준다는 것은 단지 기록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어둠 속에 있던 역사의 심연에서 영화가 하나의 섬광 같은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그때 영화는 자기의 존재를 역사 속에서 증명해낼 것이다. 그렇게 영화의 죽음을 한 번 더 선언하지 않기 위해서 왕빙은 생존자들의 말을 영화에 담기 위해 그들 곁에 있는 것이다. 영화는 어디에 있습니까. 네,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