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의 얼굴을 가진 사나이
- 감독
- 조셉 페브니
- 제작년도
- 1957
- 출연
- 제임스 카그니, 도로시 말론, 제인 그리어
고전영화와 현대영화를 가르는 기준은 육체다. 아아. 저 한마디 뱉는 순간 벌써부터 무수한 항변과 반론들이 들려온다. 기실 땅바닥만 찍지 않는 이상(헤어조그가 그런 적이 있었다고 재반론하고 싶지만 참는다) 육체를 찍지 않는 영화는 100년 동안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육체의 범위를 문자 그대로(“corpus”) ‘물체’로 조금만 확장하면 카메라를 들이대는 순간 모든 피사체가 이미 육체다. 심지어 카메라도 육체이고, 그걸 찍고 보는 작가도 관객도 죄다 육체다. 하지만 고전적 육체와 현대적 육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물론 그들 모두가 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이미지의 변화를 표현하는 주인행세를 함에는 어떤 차이도 없겠지만 말이다. 고전적 육체는 정신의 담지자로서 먼저 나타난다. 고전적 육체는 정신적 가치보다 더 앞설 수 없다는 의미다. 물론 드레이어와 베리만의 영화에도 육체가 있다. 하지만 그들이 하얗게 지워져서 지금이라도 얼른 복원되어야 할 정신의 심도보다 먼저이진 않다. 그저 정신이 심도를 복원할 때까지 느릿느릿 움직여주고, 그에 필요한 말씀(<오데트>)을 전달해주면 그만이다. 고전육체는 정신의 수단인 셈이다. 반면 현대적 육체는 (신을 잃어버려서 그런지) 비틀거리고 넘어질 때 나타난다. 즉 진짜 육체는 피 흘리고 다칠 수 있는 육체다. 진짜 육체는 죽을 수 있는 힘으로 정의된다. 팔다리만 있다고 육체가 아니다. 팔다리가 떨어져 나갈 수 있어야, 그에 비명 지르고 펄쩍 뛸 수 있어야 진짜 육체다. 프레이밍에 의해 가려져 있던 잔 다르크의 가멸력을 화형대로 옮겨놓은 브레송은, 그런 의미에서 현대적 육체에 한 걸음 더 다가갔다고 말할 수 있다. 정신의 심도? 뜨거워 죽겠는데 무슨 심도 타령일까. 온몸의 신경이 화염에 불타오를 때 심도보단 비명이 먼저다. 요컨대 고전적 육체가 불멸의 정신적 가치(정의ㆍ믿음...)를 위한 수단에 불과할 때, 현대적 육체는 소멸의 물질적 가치를 위한 수단이자 목적이 된다. 누구 말을 빌리면, 진짜 육체는 가멸성의 “순수수단”이다. 표표히 사라지는 서부극 인물 죽을 수 있는 육체만이 진짜 육체라고 한다면, 고전 서부극엔 육체가 없다. 아무리 역마차의 속도가 빨라 봤자 그 종착지는 아메리카의 정의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셰인과 링코 키드는 죽지 않는다. 그저 표표히 사라질 뿐(물론 죽은 거나 진배없다는 추가해석이 가능하지만). 더욱 결정적인 사례는 종교영화들의 경우다. 종교적 상황들을 다루었던 고전시대극들에서 육체는 바리새인이나 유대인 할 것 없이 모두 휘황찬란한 의상들로 가려져 있다. 드밀과 와일러의 영화에서 육체보다 색깔이 먼저인 이유는 다시 색깔이 정신의 심도를 방해하거나 도와주는 역할을 맡기 때문이다. 로마제국의 테크니컬러 총천연색에 모세의 남루한 넝마주이 패션이 극한의 대조를 이룰 때, 우리의 영혼은 더더욱 가열차게 기도 모드에 돌입할 수 있음이다. 즉 고전종교영화에서 의상은 정신의 척도만을 내어주지, 육체의 척도를 내어주지 않는다. 심지어 로마 군인들이 바닷물에 휩쓸려 죽는 것마저도 그나마 파도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건 육체가 죽었단 사실이 아니라, 로마제국과 그의 폭정이 죽었단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가장 육체의 출현을 방해하던 고전적 문법은 클로즈업이라고 할 수 있다. 얼굴 한 방이면 세계의 모든 것이 거기서 표현되고 있었다. 베리만은 이걸 한껏 즐겼다. 클로즈업은 육체의 죽을 수 있는 능력을 영혼의 가속도로 대체한다. <잠입자Stalker> (1972) 반대의 상황들로 가보자. 웨스턴을 지나 네오웨스턴으로 가보면, 거기엔 육체가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육체가 있어도 너무 육체만 있다. 정의감이나 신념 따위는 개나 줘버리고 금 한 덩이 차지하기 위해서 동물적 본능만 남은 네오웨스턴의 육체들은 가히 ‘사막의 좀비들’이라 할 수 있다. 페킨파의 < 와일드 번치 >에 한 총잡이는 기관총 드립에 사망하여 널부러진 한 시체에서 금니를 캐내려고 한다. 이것은 모세의 정신적 넝마주이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동물적 넝마주이다. 심지어 페킨파는 육체의 가멸성이 충분히 강조되지 않을까 슬로우모션으로 죽는 순간을 찍어댔고, 많은 평론가들에게 상욕을 들었다. 페킨파의 슬로우모션은 클로즈업이 표현하던 영혼의 가속도와 대비되는, 영혼이 육체를 떠나는 가속도다. 헐. 현대의 신학영화는 그렇지 않을 거야! 여전히 신학은 정신이다, 육체가 아니라! 라고 울부짖는 그대에게 일독을 권장하는 영화는 타르콥스키의 영화다. 비록 그가 인터뷰에서 열심히 “영성”과 “희생”에 대해서 말하지만, 정작 그의 이미지들을 보라. 거기엔 안개와 유황 가스를 뒤집어쓰고 어쩔 줄 몰라하는 육체, 자신의 존재를 잊을까 봐 초원 위에 마치 비디오데크가 고장 난 것처럼 일시 정지된 상태로 몇 분이고 서 있는 육체, 무엇보다도 공중부양하는 육체가 있다. 이른 결론으로 건너뛰자면, 정신성의 회복을 위해 타르콥스키에게 먼저 고양되어야 할 것은 영혼이 아니라 육체인 것이다(물론 이건 인간의 육체만은 아니다). 그런 이유에서 타르콥스키는 클로즈업을 마뜩잖아 했다. 클로즈업이 보고 싶나? 말씀을 쏟아내던 입이 삭제된 뒤통수 클로즈업이나 봐라(< 스토커 >). 현대적 육체는 클로즈업을 경멸한다. 얼굴은 죽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몇몇 예외가 있다. 얼굴들을 겁나게 이어 붙여서 줄줄이 비엔나로 엮어낸 후 맥놀이 하듯 겁나게 흔들면 다시 육체가 나타난다. 이것이 카사베티스의 경우이고 그의 독특성이었다. 천의 얼굴은 하나의 육체와 맞먹는 셈이다(<얼굴들>). 오발탄 (1961) “가자...가자..” 요컨대 고전영화와 현대영화를 가르는 기준은 ‘고통’이다. 고통이 없는 모든 영화를 고전적이라고, 고통이 있는 모든 영화를 현대적이라고도 부를 수도 있을 터다. 현대 신학영화는 이 기준의 반대급부이기는커녕, 이 기준을 가장 먼저 밀고 나갔던 고통의 첨병들이었다. 유현목 의 영화들이 타르콥스키보다 이른 현대적 신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거기엔 고통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천근만근의 짐짝”에 짓눌릴 때의 압사의 통각이고, “가자...가자..”의 환청에 고막이 찢어지는 통각이다(< 오발탄 >). 아무리 클로즈업과 의상으로 가려봐도 이 고통의 파동은 사라지지 않는다. 얼굴 안에 충치는 하나쯤 박혀있기 마련이고, 파동은 육체의 신경과 힘줄에 직접 작용하기 때문이다. < 막차로 온 손님들 >에서 도마질 소리에서 괘종시계 소리로의 이행을 들어보라. 모세가 듣는 신의 목소리는 노래방 마이크에서와 같은 에코라도 걸려 있었다. 그러나 유현목의 세계는 노래방이 아니다. 십계현판이라는 마이크도 없는데 울려 퍼지기 때문이다. 그 마이크는 내 뇌 속에, 내 신경 속에 이미 있다. 이건 거의 고막의 화형식이다. 너는 죽는다. 육체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이에 대한 통각 없이 아무것도 아니다. 신은 압력이 되었다(타르콥스키는 “시압time-pressure”이라 불렀던 그것). 이것이 유현목이 진정 말하고자 하는 바다. < 순교자 >에서 신부를 휘어 감는 문제는 신이 있냐 없냐가 아니었다. 그건 신은 없는데, 어떻게 십자가가 있느냔 것이다. 저기에 우뚝 서서 이 폐허를 압박하고 있는 파동의 중심으로서의 십자가가. 이 모든 측면들이 유현목을 한국최초의 육체적 작가로 만든다. 유현목이 영화는 “체험”이라고 강조함을 잊지 않았다. 말 그대로 몸의 경험인 것이다. 고통으로만 존재하는 신념의 상태.
흔히 배우를 가리켜 '천의 얼굴을 가진 인간' ' 다른 사람의 인생을 대신 하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정작 그 말을 실행할 수 있는 경우는 흔치 않다. 배우도 전문성을 가진 직업이라는 점에서 남다른 재능과 의지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순재 는 무슨 역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을 맡든 믿을 수 있는 배우로 통한다. 대학시절인 1956년 <지평선 넘어>라는 연극작품에 출연하면서 무대배우의 길을 걷기 시작한 그는 1961년 KBS가 개국하면서 텔레비전 연기자를 겸했고 1966년 < 초연 >이란 영화에 출연하면서부터는 영화배우의 길도 함께 걸었다. 어느 분야에서건 그는 성실한 배우, 믿을 수 있는 인격을 가진 존재로 평가받았다. 그와 함께 일했거나 알고 있는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이순재''의 모습은 한결같다. ''약속시간보다 1분이라도 빨리 나오는 배우'' ''항상 대본을 읽는 배우'' ''누구보다도 성실한 배우''---. 실제로 그의 일상도 그같은 평가와 별로 다르지 않다. 술을 별로 하지 않는데다 남들 눈에 두드러져 보일만한 호사를 즐기는 경우도 드물다. 배우에게라면 의례 따라 다닐 것 같은 스캔들도 없다. 겸손하고 진지하고 성실하다는 것이 그의 특징이자 이미지인 셈이다. 이순재 는 1935년 10월 10일,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났지만 고향에 대한 기억은 주위 어른들을 통해 전해들은 정도에 그친다. 그가 네 살되던 해에 조부모가 살고 있던 서울로 와 줄곧 생활했기 때문이다. 조부는 서울에서 소규모 부동산업을 하며 생활했고 부친 이용남(작고)은 고향에서 비누를 만들어 파는 것을 생계로 삼고 있었다. 그의 부모는 한국전쟁 중 1.4후퇴 때 피난민들 속에 섞여 서울로 왔다. 그가 기억하는 집안 사정은 평범하고 일상적인 모습이었다. 아현동에서 성장한 이순재는 서울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문리대 철학과에 입학했다. 1954년,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였다. 이때까지도 역시 그는 착실한 모범생이었다. 그러나 주변의 시절은 그리 평탄하지 않았다. 1950년대 중반, 한국전쟁이 끝난 뒤의 세상은 쓰라린 상처와 가난,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적개심, 다시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가득찼다. 현실의 생존은 무엇보다도 다급한 과제였다. 그런 가운데서도 변화는 크게 다가왔다. 이념의 대립이 어떤 형태로 폭발할 수 있는 가를 절감했고, 미국을 중심으로 구성된 국제연합군(UN)의 파견과 함께 들어온 미국식 문화와 가치관, 미국식 생활방식에 대한 동경 같은 것들도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중요한 요소였다. 영화는 새로운 문화를 시각적으로 확인하며 꿈을 키우는 창구였다. 특히 미국영화는 법과 정의, 풍요와 행복이 넘치는 파라다이스가 어떤 것인가를 실증하는 ''시네마 천국'' 그 자체였다. 사람들은 영화를 보며 위안과 꿈, 희망을 찾았다. 현실이 거칠었던만큼 영화는 더욱 간절하게 사람들의 눈과 마음을 잡았다. 스무살 전후 청년 시절의 이순재 역시 영화에 마음을 빼앗겼다. 영화관에서 보내는 시간은 중요한 일과였다. 동숭동의 서울대학교 문리대 캠퍼스와 종로 통의 단성사, 우미관, 을지로의 국도극장, 충무로의 수도극장(현재는 스카라극장)은 당시 사정으로는 ''한 걸음에 닿을 수 있는'' 문화센터나 다름없었다. 시간 나는 대로, 극장 표를 살만한 형편이 되는대로 그는 극장을 들락거렸다. 주로 외국영화들을 섭렵했다. 영화를 보면서 생기는 궁금증은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오던 ''포토플레이''(Photoplay) ''모던 스크린''(Modern Screen), 일본에서 발행되던 ''키네마 준포''(키네마旬報)나 ''에이가노도모''(映畵의友)) 같은 영화잡지들을 구해 보면서 풀기도 했다. 좋아하는 배우나 감독의 작품 내역, 아카데미 영화상의 수상기록 등 잡다한 상식이 늘어갔고 그 덕분에 이순재는 동급생들 사이에서 ''영화박사''로 통할 정도였다. 영화매니아 청년이 호기심을 넘어 본격적인 배우의 길로 들어서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도 영화덕분이었다. 로렌스 올리비에가 주연한 흑백영화 < 햄릿 >(1948)은 영화 이상으로 다가왔다. 철학과 지도교수의 권유로 본 것이지만 가동의 충격은 강렬했다. 삼선교 건너 돈암동 동도극장에서 그 영화가 다시 상영될 때는 첫 회에 들어가 4번을 연속해서 보고 나온 적도 있었다. 아침에 들어가서 어두워 져서야 극장 밖으로 나왔고 점심도 거른 채 였지만 <햄릿>의 감동은 그런 것들을 잊게 만들었다. 결국 이순재 는 연극부에 들어갔다. 배우 인생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배우의 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성인배우들 조차 변변하게 생활하기가 쉽지 않은 현실이 젊은 배우 지망생의 처지라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었다. 오로지 젊은 열정과 위대한 배우가 되겠다는 의지만이 보상의 전부였을 뿐이었다. 한가지 더 있다면 서울대학교 출신들이 연극을 한다는 것, 배고프고 힘들더라도 순수한 예술을 지킨다는 자부심 같은 것들이었다. 1958년 입대한 그는 3년동안 대북방송을 담당하는 부서에 배치받아 서울에서 근무할 수 있었다. 덕분에 그는 군인의 신분이기는 했지만 연극계와 가깝게 생활할 수 있었다. 1961년, 그가 군대를 제대하던 해에 KBS 방송국이 개국했다. 새로 생긴 텔레비전 방송은 드라마를 주로 내보내기 시작했고, 연기자들에 대한 수요도 그만큼 넓어지고 있었다. 1967년에는 동양방송(TBC)이 개국했다. 방송 드라마에 필요한 연기자는 대부분 연극무대 출신들이 맡았다. 지금은 무대와 방송, 영화 분야의 연기가 서로 넘나드는 것에 대해 별다른 저항감이나 차별적 인식이 없지만 1960년대 무렵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영화배우들은 텔레비전 연기를 비정통이라고 여기는 분위기가 강했다. 텔레비전 연기자들이 대부분 무대 배우 출신들이라 연기 패턴에도 연극적 과장이 섞이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연극배우들은 과장이 심하다며 기피하는 경향을 보이고, 텔레비전 연기자들은 정통파가 아니라는 이유로 영화계에서는 선뜻 문을 열지 않았다. 60년대를 넘기면서는 한국영화의 연간 제작편수가 연간 150여편을 넘나들 정도로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고 있었다. 영화 분야에서는 작품 편수가 늘어나는 것과 비례해 새로운 연기자의 발굴이 절실한 문제였지만 방송 연기자들을 탐탁치 않게 여기는 분위기는 쉽게 바뀌지 않았다. 이순재 는 1966년 정진우 감독이 연출한 < 초연 >이란 작품에 출연하면서 영화배우의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영화계에서는 한수 접는 시선으로 연극이나 텔레비전 연기자들을 대하려 했지만 텔레비전 드라마가 인기를 끌고, 새로운 연기자를 구해야 하는 영화계로서는 언제까지나 외면할 수 많은 없는 일이었다. 이낙훈 , 김성원 , 전운 , 김성옥 , 오현경 , 김동훈 같은 연기자들이 연극과 방송 쪽에서 경력을 쌓으며 당시 영화계로 활동영역을 넓힌 대표적 인물들이다. 영화계에서도 이순재 의 성실함은 여전했다. 시나리오를 열심히 읽고, 자신이 맡은 역할의 성격을 꼼꼼하게 따졌다. 그가 활동을 시작하던 무렵의 영화계 스타는 신성일 , 엄앵란 을 비롯하여 김지미 , 최은희 , 김승호 , 김진규 , 최무룡 , 남궁원 , 박노식 , 황해 , 장동휘 , 신영균 등 모두가 내로라 하는 거물급들이었다. 잘 나가는 스타들은 몇 편의 영화에 동시 출연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스케줄이 엉킬 때는 여러 곳의 촬영 일정이 연쇄적으로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주연급 배우가 시간에 맞추어 촬영 현장에 나타나지 않으면 나머지 배우나 스탭들은 이제나 저제나 하며 기다리는 외에는 도리가 없었다. 그럴 때도 이순재는 시나리오를 읽고 대사를 다듬으며 감정을 정리하는 것을 습관처럼 삼았다. ''주머니 속의 송곳은 감추어도 표시가 나기 마련''이라는 말처럼 그의 성실함과 연기 감각은 영화계로부터도 호평을 받았다. < 막차로 온 손님들 >(1967), < 나무들 비탈에 서다 >(1968), < 일식 >(1968) , < 피도 눈물도 없다 >(1969), < 분례기 >(1971), < 토지 >(1974) < 집념 >(1976) < 광염 소나타 >(1979) 등에 계속 출연하며 연기력 있는 이른바 ''성격파 배우''로 주목받았다. 1999년의 <허준>에 이르기까지 그가 출연한 영화는 모두 200여편이다. 그 중에서 한의로 명성을 날린 ''동의보감''의 저자 허준의 일대기를 다룬 <집념>에서 그는 주인공 허준 역을 맡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이지적인 이미지를 가진 조연 캐릭터였다. 많은 경우 조연급 연기자들은 영화의 간판 역할을 하기는 어렵지만 영화의 흐름을 받쳐주며 특색있는 포인트 역할을 한다. 이순재 역시 이지적이며 논리적인 인물, 따뜻한 심성을 지닌 캐릭터를 독특하게 소화 해냈다. 지금 이순재 는 영화보다는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고집스럽게 자신의 삶과 신념을 지켜나가는 강인하면서도 따뜻한 아버지 역할을 자주 맡으며 현역 배우로서의 위엄을 지켜나가고 있다. <사랑이 뭐길래>에서 연기한 ''대발이 아버지'' 역이나 <허준>에서 한의의 도를 지켜나가는 유의태, 조선시대 상인들의 사업 철학을 들여다본 <상도>의 거상 박주명 등의 역할은 시청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경우들이다. 한때 지역구 의원으로 국회에서 활동하며 정치인 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결국 그는 연기자의 길로 다시 돌아왔고, 노년의 열정을 연기에 담고 있다. 지난해에는 <세일즈맨의 죽음>이라는 연극에서 주인공 역을 맡아 변함없는 무대 사랑을 과시하기도 했다. 성실한 일관성으로 평생을 배우로 살고 있는 사람, 무대나 영화 텔레비전을 오가며 최선의 노력으로 자신의 세계를 지키고 있는 사람. 그가 바로 이순재다. 조희문 (영화평론가, 상명대교수) / 2003년 <프로필> 1935년 10월 10일 함북 회령 출생 1958년 3월 30일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철학과 졸업 1956년 유진 오닐의 <지평선 너머>로 연극활동 시작 1966년 정진우 감독의 < 초연 >으로 영화 데뷔 <주요 경력> 한국방송연기자협회 회장 역임 14대 국회의원 현재 세종대학교 겸임교수, 사단법인 중랑문화원원장, 대한적십자사 친선대사 <수상 경력> 1976 < 집념 > 한국연극영화예술상 최우수남우상 < 어머니 > 대종상 남우특별상 1982 <풍운> 한국방송대상 2002 문화훈장 보관장, MBC '명예의 전당' <주요 작품> 초연 , 막차로 온 손님들 , 탈출 , 서북청년단 , 어머니 , 집념 등 200여 편
1960년대와 70년대, 80년대 이어지는 한국영화의 역사는 다사다난하다. 영화에 대한 사회적 인식, 정치적 환경, 제작 여건, 등 여러 가지 요소가 씨줄, 날줄로 얽히면서 어느 한 가지 시선이나 가치만으로 평가하기에는 참으로 많은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시대를 이끌어온 영화계의 인물이 누구였는가를 평가하는 일조차 간단치 않은 문제가 되는 것도 영화를, 그 당시의 사회를 어떤 시각으로 받아들이는 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영화 역사를 평가할 때 가장 자주 드러나는 경향은 ''스타의 역사''로 바라보는 것이다. 어느 감독, 어느 배우, 어느 제작자 등 한국영화 발전에 기여했다고 생각되는 인물을 선정하고 그들이 이룬 업적을 예찬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돌아보면 한국영화의 역사는 스타의 역사, 주인공의 역사라기보다는 무명의 역사, 패자들의 역사처럼 보인다. 영화인들은 그들의 생존을 모색하는 동안 사회로부터 견디기 어려운 냉대를 받았고, 한국영화의 제작 여건은 참으로 오랫동안 너무도 열악했기 때문이었다. 그 속에서 영화인들은 자신의 꿈을, 집념을 키우고 지켜왔다. 최영철 감독도 그런 인물 중의 한 명이다. 그는 1963년 < 잉꼬부부 >라는 영화를 감독하고 < 백백교 >(1992)라는 영화를 제작, 감독할 때까지 80여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가 한국영화의 중요한 스타라고 이야기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의 영화가 한국영화의 전환점을 만들었다고 평가하는 경우도 거의 없다. 하지만 그는 한국영화계에서 평생을 바쳐 일한 감독이고 누구보다도 영화를 사랑한 영화인 중의 한 명이다. 최영철 감독은 1933년, 서울 광희동에서 아버지 최석운과 어머니 김준주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철물점을 하며 생계를 꾸렸던 아버지 덕분에 생활은 웬만큼 살 만한 정도였다. 어린 시절의 최영철은 다부지고 잽싼 날쌘돌이였다. 체격은 또래들에 비해 적은 편이었는데도 운동이나 싸움이라면 마다하는 적이 없었고, 져본 적도 별로 없을 정도였다. 그의 운동감각은 남달랐다. 특히 야구와 축구에 대한 감각과 재능은 놀라울 정도였다. 초등학교 시절에 이미 지역별 소년단 야구시합에서 3년 연속 우승하는 데 중심 노릇을 할 정도여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축구 솜씨 또한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무렵에는 선수급의 수준에 이르렀다. 보성중학교(5년제)에 진학한 것도 축구 덕분이었다. 축구 특기생으로 특채된 것이다. 당시 서울의 고등학교 중에서 한양공업고등학교와 선린상업고등학교는 축구 명문으로 꼽히며 라이벌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보성중학교에 다니던 축구선수 최영철 은 한양공고 축구팀의 스카웃 제의에 따라 학교를 옮겼다. 얼마동안 그곳에서 선수생활을 하던 그는 다시 선린상고 쪽으로 소속을 옮겼다. 두 학교 모두 그의 재능을 그만큼 높게 보고 있었다는 뜻이지만 라이벌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두 학교의 축구부를 오간 일은 그의 인생에 미묘한 파장을 일으켰다. 그가 소속하고 있던 선린상고의 축구코치가 학교 건물을 방화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이는 축구부를 해체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선수들 대부분은 한양공고 팀으로 합류했으나 그 곳에서 이적해온 최영철은 그럴 수 없었다. 하는 수없이 그는 광신상업고로 옮겼으나 그곳의 생활도 오래가지 않았다. 축구부가 개입한 싸움이 벌어지는 바람에 또 다시 덕수상고로 옮겨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덕수상고에서의 생활은 6.25 전쟁이 일어나면서 멈추고 말았다. 축구선수로 활동할 수 없게 된 그는 학도병으로 지원해 제8사단 21연대 수색중대에 소속되어 전쟁을 치렀다. 1.4후퇴 때 대구로 내려온 그는 영남고등학교 3학년에 복학했다. 축구부가 없었던 그 학교에 최영철은 축구부를 창설하는데 앞장섰다. 학교 측에서도 적극적이었다. 이때 같이 활동한 선수들 중에는 최정민, 문정식 같은 인물들이 있었고, 이들은 1957년, 한국이 처음으로 월드컵 대회에 참가할 때 한국대표로 활동했던 스타들이었다. 최영철 역시 당시 축구계에서 주목받는 유망한 선수였다. 덕분에 영남고는 잠시나마 당시 축구계의 스타들이 몰린 축구 명문으로 이름을 얻었다. 전쟁의 상황이 변하면서 서울로 돌아온 그는 다시 배제고등학교에 다시 들어갔고, 그곳에서 고등학교 시절을 마쳤다. 돌아보면 참으로 길고도 다난했던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대학 역시 축구 인생의 연속이었다. 축구 특기생으로 국민대학교에 입학했던 그는 다시 고려대학교 농림대학 임학과로 편입했다. 이때도 역시 그의 특기는 축구였다. 고려대학교 축구부에서 그가 맡은 포지션은 골키퍼였다. 공을 막을 때마다 날쌘 몸놀림으로 눈길을 모았던 그는 전국적으로 이름이 날만큼 유명한 스타였다. 그러나 그의 축구인생은 더 나아가지 못하고 그 곳에서 멈춘다. 재능에도 불구하고 작은 키는 선수로서의 약점으로 작용했고, 더 이상 선수생활을 하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자 결국 축구선수로서의 생활을 접고 말았다. 대학생활도 함께였다. 축구와 함께 성장한 청소년 시절의 마감이나 다름없었다. 최영철 이 시작한 새로운 인생은 영화였다. 1950년대와 60년대 한국영화계에서 촬영가로 활동했던 김명재 촬영감독의 조수로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이다. 김명재 촬영감독은 최영철의 4촌 매부이기도 했기 때문에, 그가 축구를 그만두고 영화계에 입문하는데 중요한 도움을 줄 수 있었다. < 유전의 애수 > < 오발탄 > 등을 촬영한 김명재는 미첼 카메라를 국내 여건에 맞게 개조해서 ''코첼''(Kotchell)이라는 이름으로 사용하기도 하는 등 촬영분야에서는 현장에서의 작업 뿐 아니라 기술적인 측면에서도 두드러지게 활동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최영철은 김명재의 소개로 안현철 감독의 문하에 들어갈 수 있었다. 스물일곱살 되던 해였다. 연출부에 서드(3rd)로 들어간 그는 < 낙화유수 >, < 백진주 > 등의 영화에서 조감독으로 영화계의 분위기를 익히며 영화제작과정에 직접 참여하는 경험을 쌓았다. 촬영을 전담하던 김명재의 감독 데뷔작이기도 한 <백진주>에서 그는 시나리오 각색 작업을 주로 맡았다. 이 영화에는 훗날 한국영화계의 중요 감독으로 주목받았던 이만희 가 역시 조감독으로 참여했다. 몇 년간 조감독생활을 하며 영화계에서 기반을 쌓아가던 최영철은 마침내 < 잉꼬부부 >(1963,동아영화사 제작)라는 영화를 직접 연출함으로써 감독으로 데뷔했다. 축구에 인생을 걸었던 그가 영화감독으로 인생을 바꾼 후 첫 번째 만든 영화였다. 그는 ''영화감독이 된 것은 오랫동안 지니고 있던 또 하나의 꿈을 이룬 것이다. 나에게는 영화도 축구만큼 흥미롭고 중요한 일이었다''고 회고하기도 한다. 그가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의 옆 집에 왕평 (王平)이라는 배우가 살았다. 해방 전부터 < 군용열차 > < 나그네 > 등에 출연하며 이름을 얻은 인물이다. 그의 부인은 나풍심이란 이름의 만담가로, 남편 못지 않은 유명인이었다. 유명한 스타 부부와 이웃하여 살고 있었던 셈인데, 어린 최영철 은 나풍심의 귀여움을 받았다. 덕분에 나풍심의 손에 끌려 부민관(府民館)이나 단성사, 우미관 같은 극장을 자주 출입하게 되었고 영화의 매력에 일찍부터 빠져드는 계기가 되었다. 성장하면서 축구선수로 길을 잡는 바람에 영화와는 멀어졌지만 마음 속에는 영화에 대한 동경과 기대가 떠나지 않았다. 4촌 누이가 영화촬영감독과 결혼한 것도 영화와의 인연을 새삼스럽게 부추기는 중요한 일이었다. 최영철이 축구선수로서의 인생을 접었을 때 주저없이 영화인이 되기를 결심할 수 있었던 것도 주변의 그런 요소들이 작용한 결과였다. < 잉꼬부부 >는 김진규 , 문정숙 등이 주연한 홈 드라마. 자식 없이 사는 부부와 많은 자식을 거느리고 살면서 힘겨워하는 두 집안을 대조하며 행복하게 사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이야기하고 있는 작품이다. 신상옥 감독의 < 로맨스 빠빠 >, 이형표 감독의 < 서울의 지붕 밑 >, 강대진 감독의 < 마부 > < 박서방 > 등 60년대 한국영화계의 주요 흐름을 이루었던 홈 드라마의 경향을 잇고 있는 <잉꼬부부>는 최영철 의 영화감독 데뷔를 무난하게 만들었다. 같은 해 < 로맨스 가족 >이라는 영화를 또 한편 감독한 그는 주위로부터 ''편하게 일할 수 있는 감독''이란 평을 얻으며 비교적 빠르게 감독의 자리를 다져나갔다. 성격적인 요소도 있고, 운동을 했던 영향 때문이기도 했지만 멜로드라마와 더불어 그가 관심을 가진 장르는 액션영화였다. < 낙인찍힌 사나이 >(1964), < 저 자를 쏴라 >(1964) < 무명가의 지배자 >(1965) < 악인가 >(1967), < 여선장 >(1969), < 암흑가의 지배자 >(1969), < 사나이중 사나이 >(1969), < 홍콩의 마도로스 >(1970), < 홍콩의 단장잡이 >(1970), < 동경의 호랑이 >(1971) 등을 내놓으며 이른바 60-70년대 한국영화계의 중요한 흐름을 이루었던 ''충무로 액션'' 장르에서 손꼽히는 감독으로 활동했다. 부족한 자본, 미약한 기술 등으로 대작을 만들기 어려웠던 당시 한국영화계 사정에 비추어 최영철 감독의 활동은 적은 제작비로 흥행성 있는 영화를 무난하게 만들어 낼 수 있는 경우로 평가받았다. 그의 활동은 80년대까지 이어진다. < 괴도출마 >(1981), < 화야 >(1983), < 삿갓쓴 장고 >(1985), < 비내리는 영동교 >(1986) 등은 그의 후기 목록들이다. 그가 감독한 영화 편수가 80여 편에 이르는 것은 그의 활동이 결코 만만치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구체적인 증거다. 영화계에서 일하는 동안 그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사람''이란 평가를 많이 받았다. 마음에 없는 말이나 행동으로 남의 환심을 사려는 생각도 별로 없었고, 경우에 벗어나는 일은 하려 들지도, 하지도 않았다. 운동선수나 건달들의 세계에서 흔히 보는 ''정정당당''이나 ''의리'' 같은 가치를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정작 본인이 피해를 입을 때가 많았다. 흥행을 끝내고도 이런저런 이유로 일한 비용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오죽하면 그러겠는가''하는 마음으로 물러서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영화감독 최영철 은 두 편의 영화를 직접 제작까지 했지만 영화제작은 그를 회복할 수 없는 형편으로 몰아붙이고 말았다. 감독 생활을 오래 하기는 했지만, 모든 사람이 내 마음 같으려니 하는 마음으로 맡긴 일들에서 사기를 당하면서 곤란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는 < 비 내리는 영동교 >(1986)와 < 백백교 >(1992)를 직접 제작하고 연출까지 맡았다. 8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작업 기회가 멀어진 그가, 사재를 털다시피 하여 기획한 영화들이었다. 마지막 혼신을 다한다는 각오로 작업에 몰두한 그는 시나리오, 연출 등의 분야에 힘을 기울였고, 흥행은 그쪽 일을 잘 안다는 사람에게 맡겼다. 그러나 어렵게 제작을 마치고 흥행을 했지만 그는 ''10원짜리 동전하나''도 건지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한 것이다. 젊음을 바쳐 영화계에서 일했던 그는 그 영화계로부터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받은 셈이었다. 그는 영화인이 된 것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미국처럼 제작여건이 좋은 나라에서 태어나지 않은 것이 아쉽다고 했다. 그러면 좀 더 나은 조건에서 만들고 싶은 영화,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지 않았겠느냐는 아쉬움의 표시였다. 조희문 (상명대교수) / 2003년 <프로필> 1933년 8월 25일 서울 출생 고려대학교 임학과 졸업 1963년 < 잉꼬부부 >로 데뷔 <작품 연보> 1963 잉꼬부부 / 로맨스 가족 1964 낙인찍힌 사나이 / 저 자를 쏴라 1965 무명가의 지배자 1966 나그네 밤거리 / 그늘진 삼남매 1967 악인가 1969 사나이 중 사나이 / 죽어도 좋아 / 암흑가의 지배자 1970 동경의 무정가 / 여선장 / 홍콩의 마도로스 / 홍콩의 단장잡이 1971 맨발로 왔다 / 맨주먹으로 왔다 / 54번가의 마담 1972 동경의 호랑이 1973 사나이 훈장 1974 낙인 / 후계자 / 흑백대권 1975 검은띠의 후계자 / 황금마담 / 천의 얼굴 1976 킹콩의 대역습 / 거대한 음모 1977 7호실 손님 1978 특명 8호 1979 여호신 1980 대근이가 왔소 1981 괴도출마 1983 화야 1984 돌아온 장고 1985 비내리는 영동교 1993 백백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