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부지 아씨
- 감독
- 김기풍
- 제작년도
- 1968
- 출연
- 문희, 신영균, 김희갑, 황정순, 한은진, 김성옥, 김정훈, 김기범, 김영옥, 명미정, 김옥주, 김민정, 이정애, 김지영, 주일몽, 홍성우, 주상호, 김용학, 박예숙
갈등의 민낯을 보는 일은 어렵다. 사랑하기 때문에, 미워하기 때문에, 일궈온 것이 무너질까 무섭기 때문에, 과오를 인정하는 것이 괴롭기 때문에, 부끄러운 모습이 드러날 것 같아 불안하기 때문에 등등으로 갈등 상황 및 그 안의 사람들을 마주하는 일은 미뤄지거나 외면당하기 일쑤다. 그러나 2018년 두 편의 다큐멘터리 < 핑크페미 >(남아름)와 < 길모퉁이가게 >( 이숙경 )는 갈등의 역사 속에서 헤쳐가야 할 문제를 응시하는 용기를 지니고 있다. 페미니스트를 엄마로 둔 감독이 가족사를 되짚으며 페미니즘과 자신의 관계를 탐색하는 <핑크페미>는 여러모로 깨는 작품이다. 헌신적인 엄마와 철부지 자식의 구도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 엄마는 일찍이 사회활동을 통해 자아실현을 꾀했으며, 초등학생 때부터 딸은 자식을 위해 대기하는 엄마의 모습을 요구하지 않을 만큼 철이 들었다. 이 영화는 여성이기 때문에 분홍 리본 달린 공주 옷을 입었던 시절 대신 페미니스트보다 공주병으로 불리는 편이 사회적으로 낫다는 것을 체득했던 시절을 가진 청년의 이야기다. 페미니스트 엄마를 상대로 살아온 딸의 투쟁기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녀에게는 페미니즘의 부재가 아니라 너무 무거운 페미니즘의 역사가 문제였던 것이다. 감독이 엄마와 함께 오랜 회포를 푸는 과정에서 우리는 두 가지 역사를 경험하게 된다. 그 첫 번째는 우리사회에 지속해온 페미니즘 역사와의 반가운 만남이다. 한국사회에는 엄마의 역할을 우선시 하라는 것은 남녀차별이라고 어린 딸에게 말하며 세월을 헤쳐 온 쎈언니가 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거인 같은 엄마의 역사를 딛고 진격하는 딸의 역사다. 여유롭게 대화에 임하는 엄마 앞에서 울먹이며 그간의 사정을 고백하는 딸이 있다. 마냥 기대고 싶은 사람에게서 지극히 이성적인 태도를 요구받는 것은 매우 야속한 일이고, 신뢰하는 대상으로부터 평가를 받는 위치에 서는 건 자기를 부정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앞에 서는 일이다. 그러므로 울먹거림과 함께 조목조목 나오는 딸의 이야기에는 진실한 용기가 담겨 있다. 위험을 각오하고 자기 역사의 거인 앞에 선 자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핑크페미니스트’는 엄마에게 딸로서의 자기를 고백하는 한편 엄마의 그늘에 있기를 경계하면서 스스로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렇게 자신을 껴안고 주체적으로 페미니즘을 질문해간다. 역사는 우리를 가르치고 억압하고 좋고 나쁜 여러 영향력을 행사한 우리의 조건 중 하나다. <핑크페미>는 이런 역사의 자산 및 도전의식과 함께 다시 커나가는 존재의 힘에 대한 호기로운 보고서다. <길모퉁이가게>는 사회적 기업의 일원인 청년들과 기업을 이끄는 수장을 소개하되 이들의 사연을 파고들지는 않는다. 영화에서 응시하고 있는 것은 사회적 기업이라는 프로젝트를 이끌어 가는 시간 속에서 ‘사회’와 ‘기업’이 어떻게 성장해가는가이다. 정규 학업 과정에 적응하지 못했거나 그 과정을 거부한 젊은이들과 함께 하는 도시락 제조 기업 ‘소풍가는 고양이’는 두 가지 과제 수행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것은 멤버들이 사회적 관계 안에서 스스로 또 함께 성장해가는 것, 그리고 기업의 운영이나 문화가 성장해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저런 불안정한 운영상황에 직면하여 이를 극복하기 위한 ‘소고’의 노력은 매출 증가라는 목표를 향하게 되고, 이러한 기업 성장은 역설적으로 그들이 애초에 꿈꿨던 성장의 위상을 위태롭게 한다. 영화는 조용하게 ‘소풍가는 고양이’의 세월을 따라가는 것만 같지만 작고 세세한 긴장과 변화의 국면을 놓치지 않는다. 웃으면서 하는 회의지만 그것은 회사에 어떻게 기여할지 이야기해야 하는 잔인한 자리기도 하다. 전문 인력이 들어오고 효율적이고 철저한 서비스 관리가 시작되지만 이는 예민한 직원들을 사회적으로 좀 더 나이스하게 행동할 수 있도록 통제하는 문제와 맞닿는다. 이것은 그전에 멤버들 각각이 자기 상황을 헤쳐가기 위해 필요했던 성장을 이야기 나누던 것과는 거리가 있다. 그리고 직원들이 쉬는 시간에 옹기종기 아이스크림을 먹던 풍경 대신 밤늦게 혼자 짐을 내려놓거나 코에 휴지를 꽂고 있는 모습들이 대치된다. 감독은 서서히 풍경이 바뀌어 가는 ‘소고’의 변화를 기록한다. 이는 기업의 성장 역사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역사 속에 언뜻언뜻 보이는 인물들의 표정과 이야기가 이 영화를 갈등하는 시간의 기록으로 만들어준다. 좋은 의도나 이미지에 숨지 않는 영화의 기록은 갈등을 봉합하지 않고 막을 내린다. 직원을 다그치는 주방의 소리와 함께 영화는 자본주의 하에서 규정되는 기업의 운영을 질문한다. 그리고 청년들이 자신의 사회를 만들어가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태도를 일터의 성장과정과 함께 지켜가는 일이 요원해지는 우리사회의 한계점에 대해서도 묻는다. <핑크페미>와 <길모퉁이가게>는 대결하기 어려운 갈등 앞에 기꺼이 선다. 자기 앞의 대상에게 휘둘리거나 주눅이 들지 않고 잘 이해하기 위해 역사와 대면하고 대상의 본질적 경향과 마주한다. 그리고 이러한 시간 한가운데를 젊은 청년들이 걷고 있다. 그들은 망설이기도 하고 뛰쳐나가기도 하면서 고군분투하고 있다. 역사 속에서 역사에 지지 않으려는 인물들과 연출자의 자세가 씩씩하다.
1980년대 한국영화를 이야기할 때, 과거에 가장 의존적이었던 장르는 하이틴 무비와 청춘 영화일 것이다. 모든 건 1970년대에 결정되었고, 1980년대 충무로에서 만들어진 틴에이저와 청춘의 이야기는 대부분 과거의 답습 혹은 각색이었다. 여기서 ‘1975년’은 기억할 만하다. 이 해에 얄개 영화가 시작되었고, 하길종 감독의 < 바보들의 행진 >이 나왔다. 이후 1980년대는 물론 21세기까지도, ‘스물 즈음’을 다룬 한국영화는 1975년이라는 시간에 정박되어 있었다. 먼저 하이틴 무비를 보자. 조흔파의 소설을 각색하고 안성기 가 주연을 맡은 1965년의 < 얄개전 >( 정승문 )이 있었지만, 얄개(얄미운 개구쟁이) 영화의 물꼬를 튼 영화는 10년 후인 1975년의 < 여고 졸업반 >( 김응천 )이었다. 1976년 문여송 감독의 ‘진짜진짜’ 시리즈가 이어졌고, 1977년 석래명 감독의 < 고교 얄개 >(1977)가 나오면서 ‘얄개의 전성시대’가 열렸으며, 1978년에 김응천-문여송-석래명 3인방은 옴니버스 영화 < 우리들의 고교시대 >에서 만난다. 1, 2. < 고교 얄개 >와 < 대학 얄개 >( 김응천 , 1982). 얄개 영화의 전통은 1980년대도 지배했다. 3, 4. < 바보들의 행진 >과 < 고래 사냥 >( 배창호 , 1984). ‘병태’의 청춘 스토리는 지속된다. ‘얄개 영화’는 유신 시대를 살아가는 10대들을 위한 가이드라인이었다. 최고 권력자를 정점으로 국가 전체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했던 시기를, 입시의 중압감과 칙칙한 교복과 ‘교련’으로 상징되는 군대식 학교를, 게다가 남녀 공학마저 없었던 시대를, 한참 꿈 많고 호기심 충만한 틴에이저로 살아간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거다. 여기서 얄개 영화는 작은 해방구이자, 참고 견디며 현실에 순응하자는 국책성 메시지였다. 각자의 개성과 고민이 있지만 결국엔 흐뭇한 웃음으로 무마되고, “그렇게 우린 성장한다”는 식의 찡한 엔딩으로 마무리되던 영화들이었던 셈이다. 한편 < 바보들의 행진 >은 아직까지도 ‘한국 최고의 청춘 영화’로 꼽히는 작품이다. 실제 대학생들을 캐스팅 한 이 영화는 당시 캠퍼스 청춘 문화를 배경으로 로맨스와 청춘의 고뇌를 담아내고, 동시에 숨 막히는 시대에 대해 절규한다. 그리고 한 친구는 죽음을, 한 친구는 군 입대를 선택한다. 장발 단속과 통금과 휴교령의 시대에 “한 마리 예쁜 고래를 잡는 것”이 꿈이었던 젊음의 이야기. 이 영화는 이후 청춘 영화의 정전이 된다. 그렇다면 1980년대의 양상은 어떠했을까? < 바람 불어 좋은 날 >( 이장호 , 1980)처럼 청춘들의 모습을 사회적 메시지와 결합시킨 작품도 있었지만, 여전히 ‘털보’ 김응천 감독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 김응천 감독의 필모그래피는 매우 흥미로운데, 그가 이룬 자가발전은 곧 10대를 다룬 하이틴 영화와 20대 초반을 다룬 청춘 영화를 아우르며, 이 장르들 자체의 역사가 된다. 유신 시대가 막을 내리고 교복 자유화가 이뤄진 1980년대에 얄개 영화는 지속될 수 없었다. 이때 김응천 감독은 대학 문화를 얄개 영화 방식으로 접근한다. < 꽃밭에 나비 >(1979)부터 조짐이 보였고, < 모모는 철부지 >(1980) < 달려라 풍선 >(1980) < 내 이름은 마야 >(1981) < 갈채 >(1982) 등을 거쳐 그는 드디어 < 대학 얄개 >(1982)와 < 대학 들개 >(1983) < 대학 괴짜들 >(1984)에 도달한다. 이 영화들의 테마는 꽤 익숙했다. 가난 속에서도 잃지 않는 희망, 진실한 우정에 대한 깨달음, 부모의 강요와 자신의 꿈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화해, 학교생활의 낭만과 로맨스, 이루어지지 않는 첫사랑…. 김응천 감독의 ‘대학 청춘 영화’들은 여전히 얄개 영화의 세계관 안에 있었다. 고등학교는 대학 캠퍼스로, 교복은 사복으로, 치열한 입시는 머리 싸매는 고시로, 제과점은 나이트클럽으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1. 김응천 감독은 1970년대 틴에이저 무비를 개척해 1980년대 청춘 영화로 변형시켰다. 그는 1980년대에 20편의 하이틴 청춘 영화를 만들었다. 2. 이규형 감독은 1980년대 청춘 영화의 대표적 감독이었다. 3. 이장호 감독의 < 바람 불어 좋은 날 >(1980). 1980년대의 포문을 연 이 영화는 < 바보들의 행진 >과는 다른 방식으로 청춘의 현실을 다룬다. 4. 전상국 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임권택 감독의 < 우상의 눈물 >(1982). 얄개 출신인 진유영 은 이 영화에서 사뭇 다른 톤의 십대 연기를 보여준다. 배우들도 여전했다. 단짝이었던 김정훈 이 대만으로 유학을 떠났지만, 이승현 은 여전히 ‘사고뭉치’ 캐릭터로 이 장르를 이끌었다. 그는 김응천 감독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고등학생으로 시작해 대학에 가고 결혼을 하고 취직을 한다.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과 ‘앙토완 드와넬’ 시리즈의 장 피에르 레오처럼) 한 감독의 영화 안에서 배우가 성장하는 ‘감독-페르소나’ 관계였던 셈이다. “흥, 절교야!”라며 홱 토라질 때 남학생들의 애간장을 녹이던 깍쟁이 강주희 , 완력을 앞세우던 ‘마초 고교생’ 진유영 , 어눌하면서도 인간적이며 낙관적인 의리파 손창호 , 억척스럽고 생활력 강한 김보연 , 부잣집 도련님 스타일의 활동파 전영록 , 동안의 감성파였던 전호진 과 박재호 (이후 < 내일로 흐르는 강 >(1996)으로 감독 데뷔), 얄밉게 고자질하던 강남길 …. 그들은 여전히 얄개 시절의 캐릭터를 지닌 채 대학생이 되었다. 오토바이 사고로 활동을 중단했던 이덕화 는 < 대학 얄개 >에 ‘얄개 1기 선배님’으로 불리며 등장하기도 했다(단 20대에 접어든 임예진 은 연기 변신을 시도하며 이 대열에서 이탈한다). 인력 충원도 있었다. 송승환 김주승 강문영 이미영 조용원 등이 ‘포스트 얄개’ 시대의 청춘스타가 되었고, 이미숙 이나 원미경 도 이 장르에 적잖은 지분을 가지고 있었다. 특기할 사랑은 가수들의 진출이었다. 전영록 의 사례가 있긴 했지만, 1980년대엔 가요계와 영화계의 하이브리드 현상이 두드러졌고, 청춘 영화 장르는 그 격전지였다. 일단 당대 최고 인기 밴드였던 송골매가 있다. 처음엔 카메오처럼 등장하더니 < 모두 다 사랑하리 >( 김응천 , 1983)와 < 대학 괴짜들 >에 이르면 배철수 와 구창모 는 주요 배역을 차지한다. 숨은 강자는 김형용 이었다. ‘김형용과 톱니바퀴’의 리더로 ‘해변가요제’ 출신인 그는 당대는 희귀한 미소년 스타일로 어필했다. < 고래 사냥 >( 배창호 , 1984)의 김수철 , < 졸업 여행 >( 오성환 , 1985)의 김범용 도 가세했다. 여기서 김응천 감독의 전환점(사실 하강점)이 되는 영화는 이상아 와 하희라 주연의 < 말괄량이 대행진 >(1986)이다. 여기서 그는 다시 고교 시절로 돌아가며, 다음 해 < 얄숙이들의 개성 시대 >(1987)를 이어간다. 이런 회춘이 가능했던 건, 새로운 스타덤의 등장 덕분이다. 1980년대 후반기에 등장한 하희라 이상아 김혜수 김희애 이응경 최수지 이미연 , 그리고 강석현 이재학 민규 최재성 최민수 허준호 박중훈 김민종 김보성 김세준 등은 좀 더 화려한 아이돌 스타덤을 이루었다(1980년대에 한국의 아이돌 문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이다). 여기서 김응천 감독은 기존의 청춘스타를 조연으로 기용하고, 신진 세력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방식으로 나름의 ‘절충’을 이룬다. 1. 김응천 감독의 < 대학 들개 >(1983). 전영록 과 이승현은 1980년대에도 여전히 얄개로 활동했다. 2. < 스물한 살의 비망록 >( 김응천 , 1983)의 송승환 과 강문영 . 1980년대 초에 새롭게 등장한 청춘 배우. 3. < 모두 다 사랑하리 >( 김응천 , 1983)의 김형용 . 가수이자 배우로 1980년대 초 청춘 영화를 잠시 이끌었다. 4. < 대학 괴짜들 >의 배철수 . 그가 속했던 밴드 ‘송골매’는 당시 가장 인기 있었던 청춘스타 중 하나였다. 스타 지형도만 변한 게 아니었다. 1980년대 중반, 한국의 틴에이저 무비는 1970년대의 영향권을 벗어나 드디어 ‘현실’을 직시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 김응천 의 세계관’을 벗어나기 시작한 십 대의 이야기는 훨씬 더 거칠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 시작은, 당시로선 충무로에서 정말 드물었던 ‘20대 여성 감독’ 이미례 의 데뷔작 < 수렁에서 건진 내 딸 >(1984)이었다. 호즈미 다카노부의 소설을 각색한 이 영화는 한국영화의 10대들이 더 이상 얄개 영화의 해피 엔드에 갇혀 있을 순 없다고 말한다. 폭력적 사회와 무관심한 가정 사이에서 콤플렉스를 지닌 16세 소녀 유리( 김진아 )는 갈 길을 잃고 저항한다. 1985년 동명 연극을 영화화한 < 방황하는 별들 >( 차현재 , 1986)은 밤거리를 헤매는 아이들의 사연 속으로 들어간다(< 나쁜 영화 >( 장선우 , 1997)의 선배격이다). 이 영화의 카메라는 비디오 다방, 술집, 대학로, 만화가게, 성인 오락실, 나이트클럽, 여관 등을 휘저으며 단속에 걸린 10대들을 경찰 보호실로 내몬다. 영화는 뮤지컬 형식을 통해 그들의 속마음을 드러내며, 소외당한 아이들의 외침을 들려준다. 이런 시도들은 <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 강우석 , 1989)를 통해 대중적 폭발력을 지닌다. 1990년대 초 기획영화의 포문을 여는 ‘신씨네’의 신철 대표는 이 영화의 기획을 맡았는데, 그는 수백 명의 중고등학생들을 만나 직접 이야기를 들었고, 취재를 바탕으로 김성홍 감독이 시나리오를 썼으며, 강우석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학창 시절의 에피소드와 로맨스를 배치함으로써 얄개 영화의 전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이 영화는 당시 아이들이 실제 모습을 영화에 담아낸다. 이후 <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 >( 김성홍 , 1990) < 사랑은 지금부터 시작이야 >( 이미례 , 1990) < 있잖아요 비밀이에요 >( 조금환 , 1990) < 열아홉의 절망 끝에 부르는 하나의 사랑 노래 >(강우석, 1991) < 인생이 뭐 객관식 시험인가요 >( 강구연 , 1992) 등 ‘긴 제목 영화’들이 쏟아진다. 다소 나이브한 태도는 있지만, 이 영화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아이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포착했던 영화들이었다. 리얼리즘에 좀 더 기운 영화들도 있었다. < 꼴찌부터 일등까지 우리 반을 찾습니다 >( 황규덕 , 1990)는 <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와는 다른 방식으로 입시 지옥을 보여주는데, 담임 교사( 문성근 ) 캐릭터를 통해 ‘참교육’의 가치를 이야기한다. 이것은 1987년 민주화 항쟁 이후 변하기 시작한 한국 사회의 움직임과 맞물리는 부분으로, 1989년에 ‘전교조’를 계기로 ‘참교육’이라는 단어가 등장했고 그 문제의식은 영화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독립영화 단체 ‘장산곶매’에서 제작한 < 닫힌 교문을 열며 >( 이재구 최호 김숙 김건 강경환 황길재 , 1990)는 바로 전교조 문제를 담아낸 첫 영화였다. 1. < 방황하는 별들 >의 이상아 . 이상아는 1980년대 후반기에 등장한 새로운 아이돌 스타덤의 기수였다. 2. < 캠퍼스 연애특강 >( 조금환 , 1988)의 강석현 하희라 민규 . 3. < 수렁에서 건진 내 딸 >의 김진아 . 4. 연극을 영화화한 < 방황하는 별들 >은 다큐멘터리, 극영화, 뮤지컬 등 다양한 장르적 요소가 결합된 실험적 작품이었다. 틴에이저 무비 계열에서 ‘현실’이라는 화두가 떠오르며 얄개 영화와의 결별이 서서히 이뤄졌다면, 청춘 영화 계열에서도 작은 변화는 있었다. 이 시기 조금씩 시도되던 청춘 로드 무비가 그렇다. < 바보들의 행진 >의 병태( 윤문섭 )가 꿈을 찾아 떠나듯, < 고래사냥 > < 열아홉 살의 가을 >( 김응천 , 1984) < 가슴을 펴라 >( 최원영 , 1987) < 굿모닝! 대통령 >( 이규형 , 1989) 등의 그들도 길 위에서 인생을 배운다. < 내일은 뭐 할 거니 >( 이봉원 , 1984) 같은 실험적 영화도 등장했다. 1960년 4.19 때 도주 중이던 대학생과 창녀 사이에서 태어난 주인공 B( 강석현 )은 대학생이 된 1980년대에 마치 사회 부적응자처럼 방황한다. 아마도 < 바보 선언 >( 이장호 , 1984)과 함께 가장 파격적인 스타일과 내러티브의 1980년대 영화로 기억될 <내일은 뭐 할 거니>는 당시 젊은이들의 무기력함에 대한 메타포였다. 새로운 흐름을 만든 사람은 이규형 감독이었다. <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 >(1987)가 흥행작이지만, 먼저 그가 20대 때 만든 데뷔작 < 청 블루 스케치 >(1986)를 주목해야 한다. 이 영화는 당시로선 드물게 ‘청춘 비가’ 스타일의 영화였으며, 이야기보다는 모던한 공간 감각과 비주얼에 더 초점을 맞춘 작품이었다. < 비 오는 날의 수채화 >( 곽재용 , 1990)나 < 비트 >( 김성수 , 1997)의 장르적 근원을 더듬다 보면 <청 블루 스케치>를 만날 수 있는데, 로맨스와 범죄 세계의 폭력과 비극적 서사 장치를 결합한 청춘 영화는 1980년대에 만나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 영화의 밋밋한 흥행(서울 관객 약 4만 명) 이후 이규형 감독은 ‘얄개의 세계’에 더 접근했고, <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 >로 서울 관객 약 26만 명을 동원한다. 대학 초년생인 영문과 미미( 강수연 )와 신방과 철수( 박중훈 )의 연애담인 이 영화는, 미래지향적 분위기와 젊은 날의 고뇌를 동시에 담았고, 이규형 감독은 청춘 영화의 새로운 아이콘으로 등극한다. 이 영화로 청춘의 아이콘이 된 또 한 명은 배우 박중훈이었다. 그는 < 이장호 의 외인구단 >(1986)으로 상한가를 치던 최재성과 투 톱을 이뤄 < 아스팔트 위의 동키호테 >(1988)와 < 내 사랑 동키호테 >(1989)를 이끈다. 메가폰의 주인은 얄개 영화의 장인이었던 석래명 감독. 그런데 두 영화는 같으면서도 달랐다. 두 편 모두 젊음과 사랑과 도전과 우정을 다루지만, <내 사랑 동키호테>는 당시 입시 현실을 다루던 하이틴 영화와 접점을 지닌다. 두 주인공이 개발한 ‘쿨쿨 머신’은 수면 중에도 뇌파 조작을 위해 학습을 할 수 있는 기계. 이것은 당시 밤낮없이 책상 앞에 앉아 입시 공부에 매달려야 하는 십 대의 현실에 대한 풍자였다. 이처럼 1980년대 말에 오면, 이 장르 안의 그 어떤 영화도 현실을 외면하지 못하게 된다. 1. <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는 하이틴 영화가 ‘현실’을 직시하기 시작한 영화다. 2. < 꼴찌부터 일등까지 우리 반을 찾습니다 >는 ‘참교육’을 이야기한다. 3. < 내일은 뭐 할 거니 >는 실험적 스타일 속에서 억압적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의 무기력함을 보여준다. 4. <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 >는 1980년대에 가장 흥행한 청춘 영화이다. 1970년대 얄개 영화와 청춘 영화는 1980년대 시기 변형을 겪은 후 1990년대에 리얼리즘으로 방향을 잡았다. < 숲속의 방 >( 오병철 , 1992)이나 < 세 친구 >( 임순례 , 1996) 등이 ‘현실’이라는 프리즘으로 방금 고등학교를 벗어난 아이들의 삶을 바라본다면, < 정글 스토리 >( 김홍준 , 1996)처럼 힘겹게 자신의 길을 가는 청춘의 이야기가 있었다. < 비트 > < 태양은 없다 >( 김성수 , 1999) < 질주 >( 이상인, 1999) 등은 ‘도시 청춘’을 스타일리시한 영상과 결합시켰다. 흥미로운 건 1990년대 말에 나타난 장르화 현상이었는데, 남녀의 성이 바뀌는 판타지 < 체인지 >( 이진석 , 1997), 아이돌 문화나 밴드 콘셉트와 결합했던 음악 영화들인 < 세븐틴 >( 정병각 , 1998)과 < 짱 >( 양윤호 , 1998) 그리고 호러 장르를 부활시킨 < 여고괴담 >( 박기형 , 1998) 등이 등장했다. 어떻게 보면 1980년대 하이틴 청춘 영화는, 이 장르의 역사에서 일종의 ‘가교’ 역할을 한 셈이다. 전통은 수정되었고, 관습은 변주되었으며, 배우는 교체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제기되었던 수많은 젊음의 테마들은 좀 더 시간이 흐른 2000년 이후 독립영화와 저예산 영화의 중요한 모티브가 되었다. 그렇다면 얄개 영화의 전통은? 거의 희석되었고, <학교> 시리즈 같은 TV 드라마를 통해 새로운 모습으로 이어졌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나에게 1980년대는 곤란한 시간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박정희의 죽음을 겪고(등굣길에 길에서 우는 수많은 할머니들을 보았다), 3학년 때 5.18이 있었으며(서울 변두리에 살았는데 동네 큰길에 정말 아무도 없었다), 4학년 때 집에 컬러텔레비전이 들어왔던 게 생생히 기억나는 걸 보면 1980년대를 제대로 경험한 건 분명하다. 동네 삼류극장의 추억, 올림픽 때문에 샀던 VCR, 학교 앞 만홧가게 쪽방에서 보던 포르노, < 영웅본색 >과 < 천녀유혼 >…. 1980년대는 나에서 문화적 요람기이며, 지금의 취향이 형성된 결정적 계기였다. 그때 따먹은 선악과 때문에 난 아직도 어떤 원죄 의식을 지닌 채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르며, 이런 연재를 시작하게 된 것도 그런 무의식의 발로일 거로 생각한다. 그렇다면 줌-아웃 하여, 그 시대를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나에게 ‘1980년대’는 분명 살긴 했지만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 10년이기도 하다. 그 시절 영화를 연구해 보겠다고 나선 입장에선 더욱 난점이 있다. 한국영화사에서 1980년대처럼 이상한 시기는 없기 때문이다. 10년씩 묶어서 뭉뚱그리는 수사법에 문제가 있긴 하지만, 해방 이후 한국영화사는 대충 10년 단위로 어떤 레이블이 붙는다. 1960년대가 황금기로서 한국영화의 모더니즘이 여러 감독에 의해 시도되었다면, 1970년대는 그 모든 성과물들이 ‘유신 체제’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이른바 ‘암흑기’로서, 전 세계 영화계가 ‘뉴 시네마’의 열풍에 휩싸일 때 한국영화는 ‘방화’라는 용어 안에 갇혀 외화 쿼터와 국책 영화라는 당근과 채찍에 길들어 갔다. 그 시기에 이만희와 하길종이 요절했던 건, 슬프지만 어쩔 수 없었던 일이다. 시대의 공기가 너무 안 좋았기 때문이다. 1980년 1월 1일에 개봉된 두 편의 한국영화. < 타인의 방 >( 김문옥 )과 < 어느 여대생의 고백 >( 김선경 ). 모두 이영옥 이 주연을 맡은 멜로드라마다. 1990년대는 ‘기획 영화’가 등장하며 한국영화의 자본 구조가 천지개벽을 겪었고, 이런 물적 토대의 변화를 기반으로 2000년대 한국영화 르네상스가 시작되었으며, 산업적 팽창은 2010년대 독과점이라는 부작용을 낳게 되었다. 이런 흐름 속에서 마치 공란처럼 존재하는 1980년대는 쉽게 파악되지 않는다. 물론 이 시기를 대표하는 표제어는 존재한다. 바로 ‘3S 정책’이 그것이다. 신군부의 우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 애마부인 >( 정인엽 , 1982)의 심야 상영을 필두로 에로티시즘 영화에 대해 ‘어느 정도’ 허용하는 제스처를 보인 것이다. 만약 1980년대를 ‘3S 정책’으로 설명한다면, 이 가설의 장점은 연속성이다. 1970년대 유신에서 1980년대 3S로 이어지는, 군부 정권의 억압적 문화 정책에 의해 한국영화는 긴 침체기에 빠졌다는 설명이 가능해진다. 단점은 1990년대와 연결할 때 발생한다. 20년 가까이 침체되었던 한국영화가 1990년대 초 갑작스레 활기를 띨 수 있었던 건 계기는 무엇인가?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선 뭔가 다른 시대 규정이 필요한데 아마도 ‘코리아 뉴웨이브’가 그런 시도일 것이다. 이것은 ‘서울의 봄’ 이후 한국 사회의 변화 속에서 충무로에도 새 바람이 불었다는 가설이다. 1980년대 전반기의 이장호 와 배창호 , 후반기의 장선우 와 박광수 가 그 기수였는데, 그들의 등장으로 인한 변화는 1990년대의 성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난점은, 당대의 영화가 1970년대와 어떻게 단절을 이룰 수 있었는지의 문제다. 그리고 과연 ‘뉴웨이브’라 부를 만큼의 성과가 있었는지도 의문이다. 의외로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던 게 1980년대 영화다. 곽경택 감독의 < 챔피언 >(2002)과 박흥식 감독의 < 사랑해, 말순씨 >(2005). 영화 속에서 김득구( 유오성 )는 연인과 함께 심야 상영으로 < 애마부인 >을 보고, 아이들은 동시 상영관에서 <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 정진우 , 1981)를 본다. 1970년대의 연장선상에서 보면 부정적이고, 1990년대의 전사로 받아들이면 긍정적인 1980년대의 한국영화. 3S와 뉴웨이브가 공존했던 불균질 적이며 돌발적이고 혼란스러우며 규정할 수 없는 시기. 이번 주부터 격주로 이어갈 연재는 바로 그 시대에 대한 글들이다. 명료하게 정리할 야심은 없다. 그럴 수 없는 시대였으며, 그런 ‘쉽게 파악되지 않는 속성’이 이 시대 한국영화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단서 하나. 기존에 이뤄진 이 시기 감독들에 대한 작가 연구에 글 하나를 보탤 생각은 없다. 이 연재는 그 시기 가장 대중적이었던 영화들에 대한 재평가다. 에로 영화, 하이틴 무비, 코미디, SF 아동 영화 등 당시 가장 많이 만들어졌고 휴지처럼 소비되던 영화들이 분석의 대상이 될 것이다. ‘1980년대’라는 시대 구분도 약간 수정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엄밀하게 말하면 1982년 < 애마부인 >부터 1992년 < 결혼 이야기 >( 김의석 ) 직전까지, 즉 에로 영화가 본격화되고 기획 영화가 등장하기 전까지의 영화를 중심으로 다룰 예정이다. 그렇다면 첫 번째 질문. 1980년대엔 어떤 영화들이 만들어졌을까? 1960~70년대의 유산을 상속받았다는 걸 부인할 순 없을 것이다. 1980년 한국영화 흥행 1위는 364,538명(이하 모두 서울 관객수)의 < 미워도 다시 한번 1980 - 1부 >( 변장호) 였다. 1981년은 287,929명을 동원한 윤정희 주연의 < 자유부인 >( 박호태 )이었다. 기존의 신파 멜로가 이어지던 형국이었고, 이때 1982년에 < 애마부인 >이 315,738명을 기록하며 그 해 1위 자리에 오르면서 충무로의 풍토를 바꿔 놓았다. 정인엽 감독의 < 애마부인 >과 < 애마부인 2 >(1984). 1980년대를 대표하는 에로 프랜차이즈다. 그런 점에서 당대의 에로틱 멜로드라마, 이른바 ‘에로 영화’는 돌연변이였다. 1960년대 신파 멜로에서 1970년대 호스티스 영화로 오면서, 어느 정도의 개연성이 확보된 상태에서 가벼운 수준의 노출이 감행되었다면, 1980년대 에로 영화들은 국가 정책의 조장 속에서 영화의 특정 요소를 다소 지나치게 강조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굳이 에로 영화만의 특성은 아니었다. 쉽진 않겠지만 1980년대 대중 영화를 뭉뚱그릴 수 있는 용어가 있다면 그건 ‘익스플로이테이션(exploitation) 필름’일 것이다. 번역하기 쉽지 않은 이 용어는 풀어서 해석하면 ‘특정 관객의 취향에 호소하는 주제와 소재를 다루는 상업영화’라 할 수 있는데, 1980년대 한국영화는 상당 부분 이러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단지 섹슈얼하고 에로틱한 부분에 그치지 않았다. 1970년대 얄개 영화는 1980년대 청춘 영화로 이어지며 로맨스 부분이 대폭 강화됐고, 액션 영화는 수많은 아류 스타일의 영화로 가공되었다. 정식 합작영화도 있었지만 위장 합작영화도 상당했고, 합작과 무관한데 제목만 중국 영화인 척하는 한국영화도 부지기수였다. 이 영화들은 모두 무협 팬들을 위한 익스플로이테이션 필름으로, 극적 개연성 없이 대결 액션 신으로 꽉꽉 채운 영화들도 등장했다. 저예산 호러도 1980년대 중반까지 심심찮게 이어졌다. 코미디도 마찬가지였다. 이주일 , 김형곤 , 심형래 등 당대의 인기 코미디언과 개그맨의 유행어와 개인기를 전면에 내세운 영화들이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특히 심형래는 <우뢰매> 시리즈를 통해 아동 영화 시장을 붐업 시켰고 수많은 유사작들이 등장했다. < 평양 맨발 >( 남기남 , 1980)의 이주일 과 < 그 사랑 한이 되어 >( 이형표 , 1981)의 조용필 . 이 시기 영화를 더욱 기묘하게 만든 건 크로스오버(crossover) 현상이었다. 여기서 요즘 콘텐츠 전략에서 언급되는 ‘원 소스 멀티 유즈’ 같은 개념을 떠올려선 곤란하다. 1980년대에 영화라는 콘텐츠는 타 분야와의 경계선이 그다지 엄격하지 않았다. 최근 ‘연기돌’들이 나름 착실한 연기 수업을 바탕으로 연기자에 도전한다면, 1980년대엔 인기 있는 가수는 별 장벽 없이 배우가 되었다. 조용필 , 심수봉 , 인순이 등이 모두 영화를 찍었고, < 마음 약해서 >( 심우섭 , 1980)나 < 모모는 철부지 >( 김응천 , 1980) 처럼 당대 히트곡 제목을 그대로 딴 영화들도 많았다. < 난 이렇게 산다우 >( 남기남 , 1985)처럼 개그맨의 유행어를 그대로 제목에 가져온 영화도 부지기수였다. 만화의 영화화가 본격화된 것도 1980년대이며, 의외로 많은 리메이크와 프랜차이즈(와 외화 표절) 영화들이 있었다. 이처럼 쉽사리 정리되진 않지만, 그 카오스 속에서도 어떤 묘한 질서를 찾아볼 수 있는 1980년대 영화들. 다음 글에선 좀 더 세부적으로 접근해보겠다. 그 첫 대상은 에로 영화로 건너가는 가교 역할을 했던, ‘토속물’ 혹은 ‘향토물’이라 불리었던 영화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