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원기행
- 감독
- 김대환
- 제작년도
- 2014
- 출연
- 양흥주, 문창길, 이영란, 김민혁, 이상희, 허재원, 고인배, 양홍주, 장준호, 강승민, 박찬윤, 김미옥
[사진] 김승호의 대표작 중 하나인 <혈맥>의 한 장면 ● 연극으로 시작한 3대 독자 김승호는 1918년 7월 13일 강원도 철원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났다. 농사를 했지만 경제적으로는 윤택하여 어려움을 모른 채 귀여움을 받으며 자랐다. 일설에는 그의 아버지가 승적을 가진 적이 있었다고 한다. 본인은 이에 대해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양친께서 석왕사(釋王寺)에서 불교를 신봉하셨다” (『국제영화』 1959년 10월호) 고 말한 적이 있어 뜬소문만은 아님을 시사하고 있다. 어릴 때 이 복덩이에게 붙여진 이름은 해수(海壽)였다. 그가 네 살이 되자 부모는 아들의 교육을 위해 서울로 이사했다. 종로 청진동에 정착한 뒤 복덕방과 전당포를 하며 사림을 꾸려 나갔으나 얼마 못가 숙박업으로 전환하였다. 해장국으로 유명한 청진옥 맞은편 서울관광호텔 옆 골목에 있었던 대흥여관이 바로 그 출발이었다. 그가 입학한 수송국민학교는 집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래서 공휴일에도 조무래기 친구들과 어울려 학교 운동장에 나가 놀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명문인 보성(普成)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심한 우울증에 빠졌다. 수재들과의 경쟁이 벅차서였는지, 1년 만에 그만 두고 말았다. 그 대신 집 근처에 있는 우미관이나 낙원동의 조선극장, 수은동의 단성사 등 극장을 찾아다니며 연극과 영화 보기를 즐겨 했다. 그때 이미 ‘분바른 무대 인생’의 길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셈이다. 그는 스무 살 되던 해 봄 동양극장의 전속극단인 황금좌로 박진(朴珍)을 찾아갔다. 연출부장인 박진은 당돌하게 연극을 하게해 달라고 조르는 이 초면의 청년에게 대뜸 호떡을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무슨 영문인지 잘 몰랐지만 그는 사실대로 잘 먹는다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내일부터 같이 고생을 하자”며 입단을 허용했다 .(김승호, 「나의 청춘과 예술의 편력」, 『국제영화』 1956년 3월호) 연구생 신분이었다. 그는 오래가지 않아 이 질문의 뜻을 알게 되었다. 공연지를 따라다니는 동안 정말 지겹도록 이 호떡을 먹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연극인들은 호떡으로 끼니를 때우다시피 했다. 그러나 김승호는 포기하지 않았다. 허기진 배를 참아가며 연극에 빠졌다. 선배들의 시중은 물론 단체의 잡일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전원교향악>이란 연극을 공연할 때였다. 그는 평소에 하고 싶었던 장님 역할을 맡고 있는 선배에게 떡을 사다가 권하며 아첨을 떨었다. 선배는 이런 호의가 기특했는지 주는 대로 받아먹었다. 그런데 공연 시간을 앞두고 급히 먹은 떡이 체했는지 그만 자리에 눕고 말았다. 그에게 대역의 기회가 왔음은 물론이다. 그동안 선배의 연기를 보며 익힌 보람이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이번에는 정식으로 캐스팅되었다. 그 첫 작품이 홍해성 연출의 <임자 없는 자식들>이었다. 1938년 그의 나이 스물두 살 때였다. 그 뒤 <백진주>, <아들의 심판>과 같은 연극에도 출연했다. 그러나 집에서는 이런 ‘광대 짓’을 못 마땅히 여겼다. 부모가 얼마나 완고했는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아들의 연극을 한 번도 보지 않았다. 이 무렵 동양극장 무대에 올려 크게 성공한 신파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1936, 임선규 작, 홍해성 연출)가 영화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극장주인 홍순언이 김승호를 주연인 황철의 친구 역으로 나오게 해주었다. 그런데 현상 기사가 실수하는 바람에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황문평, 『인물로 본 연예사: 삶의 발자국 1』 ‘서민의 우상 명배우 김승호’ 도서출판 선. 1998, 334쪽) 그는 해방 후 변기종이 주도한 자유극장으로 옮겨 연기부장을 맡아 박상익, 송재로, 김신재 황정순 등과 함께 2년 여 동안 활약했다. 그 뒤 서월영, 유계선 등과 함께 극단 청탑(靑塔)을 창단하기도 했다. 김영수의 <민중전(閔中殿)>(1945)과 <망향>(1946), <선구자>(1946) 등이 이때 공연한 레퍼토리였다. [사진 ] <박서방>의 한 장면, 황정순은 오랫동안 김승호의 가장 중요한 파트너였다 ● 특유의 발성법으로 연기력 과시 김승호는 누구보다도 화려하게 한 시대를 누빈 대기만성형의 배우였다. 그가 활동한 1958년부터 1968년까지의 10년간은 한국영화 전성기와 일치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동안 그가 이룬 업적은 명배우로서 부합될 만큼 큰 것이었다. 하지만 제작의 유혹을 떨쳐버리지 못한 게 화근이었다. 1967년 처음 만든 <돌무지>의 흥행 성공과 제6회 대종상 최우수반공영화상 작품상 수상으로 받은 외화수입쿼터 보상에 힘입어 제작한 <영원한 모정>(원명 ‘머슴 칠복이’ 조긍하)이 실패한 뒤에도 부채를 안고 강행한 <7인의 밀사>(원제 사화산)가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그는 고혈압에 시달리다가 1968년 12월1일 아침 자택에서 세수를 하다가 쓰러진 후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서른 살에 얻은 외아들(김희라)이 1년 뒤 <독짓는 늙은이>(1969, 최하원)로 영화배우의 꿈을 이룬 모습도 보지 못한 안타까운 51년의 짧은 생애였다. [사진 ] 영화 <돌무지>(1967)의 한 장면 [사진 ] 김승호의 장례식 장면 혀와 입술 사이에서 더듬듯이 굴려 내는 독특한 발성법과 안면을 수축시키며 만들어내는 표정 연기는 김승호 연기의 특징이었다. <박서방>, <마부>, <혈맥> 등의 경우처럼 탁월한 연기력으로 어려운 현실에도 순응하며 살아가는 서민의 정서와 애환을 적절히 녹여내는가 하면, <시집가는 날>, <인생차압>, <로맨스그레이> 등에서 볼 수 있었듯이 ‘능청스런 익살’ 연기로 관심을 끌었다. 반면에 한 가장이 화목한 가정을 깬 죄책감으로 고행의 길을 걸어간 <육체의 길>(1959, 조긍하)에서는 오버액션이라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연기는 단연 고진감래(苦盡甘來)의 서민 역할에서 빛났다.
김영효 감독은 언제, 어디서 만나도 사내 냄새가 물씬 풍긴다. 훤칠한 키에 호남형 마스크, 거기에 굵고 무게 있는 목소리를 지닌 그에겐 겉으로 발산하는 카리스마도 있다. 내가 느끼기엔 속으로는 정감도 넘친다. 김영효는 외모에서 풍기는 이미지처럼 그가 연출한 액션 영화도 시원시원하고 아름답다. 그가 감독한 30여 편의 영화 중 대부분이 액션물이지만 그의 영상은 살벌한 액션이 아니라 정감 넘치는 액션으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모더니스트를 자처했다. 김영효는 액션 영화를 통해 인간의 비뚤어진 욕망이 얼마큼 인간성을 파괴하는지 보여준 후 가능하면 휴머니즘으로 봉합한다. 액션 영화 감독으로서 아름다운 액션을 추구하는 목표 의식도 있었겠지만 그가 청년 시절 문학도였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김영효 는 처음 배우 지망생이었고, 감독 데뷔 전에 영화에 출연했었다. 모두에 잠깐 언급했지만 배우를 해도 부족함이 없는 마스크다. 그래서 김영효의 영화 입문은 배우로부터 출발한다. 1958년 신상옥 이 감독한 < 지옥화 >에 김영효 는 단역으로 출연했다. <지옥화>의 단역 출연은 신상옥의 다음 작품인 < 어느 여대생의 고백 >에 주연급으로 출연하기 위한 봉사였다. <지옥화>에 단역으로 출연하면서 신상옥으로부터 다음 작품인 <어느 여대생의 고백>에 주연급으로 출연시킨다는 언질을 받았다. 그러나 촬영에 들어갈 때는 김영효가 출연하기로 한 그 배역에 한국무용가인 최현 으로 결정되었다. 신상옥 감독의 <어느 여대생의 고백>은 <지옥화>와 같은 해인 1958년 개봉되었는데 흥행에 성공했다. 이 영화는 흥행 성공뿐만 아니라 페미니즘 영화로서 작품성도 평가받아 이때부터 신상옥은 전성시대의 화려한 출발을 했다. 약이 오른 김영효 는 보란 듯이 배우로 성공하고 싶었다. 마침 당시 국내 최고 시설의 촬영 스튜디오인 안양촬영소(후에 신필름으로 넘어감)를 가진 수도영화사에서 신인 배우와 감독을 공모했다. 그 당시 수동영화사는 사장이 홍찬 인데, 홍사장은 영화사 외에 극장과 신문사를 소유한 막강 인사였다. 김영효는 연기부에 응모 당당히 합격했다. 그때 연기부 동기생으론 조문진 감독이 있었다. 마침내 김영효는 1959년 정비석 원작 소설을 박상호 가 감독한 < 낭만열차 >에 김동원 의 아들로 출연했다. 주연은 아니지만 꽤 비중 있는 역할이었다. 그러나 <낭만열차>는 흥행에 실패했다. 만약 이 영화가 흥행에 성공했으면 김영효는 영화감독이 아니라 배우로 계속 남아 있었을 것이다. 김영효 는 그때 자신을 한번 돌아봤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응시했다.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군대에 갔다 온 직후라 얼굴은 뼈만 앙상했다. 거울 속에 자신을 비추면서 김영효는 영화는 포기할 수 없지만 배우의 꿈은 일단 접고 감독으로의 전환을 모색한다. 그의 영화 인생은 원점에서 다시 출발한다. 김영효 는 1931년 2월 17일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고향은 황해도 해주지만 강원도 철원으로 와서 자리를 잡았다. 해방이 되자 1947년 가족과 함께 월남했다. 월남한 김영효 집안은 서울 광희동에 살았는데 그때 앞 뒤 집에서 친하게 지낸 친구가 이신명 감독이었다. 물론 그때는 이신명 도 영화감독은 아니고 야구협회에서 일하고 있었다. 김영효는 그 무렵 한 동네 친구인 이신명, 국민대 1년 선배인 강범구 감독, 박상호 감독과 어울렸다. 강범구는 1962년 < 북극성 >으로 감독 데뷔했는데 그때 마침 액션물 < 밤은 말이 없다 >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때가 1965년이었다. 김영효는 동네 단짝 친구인 이신명과 함께 강범구가 감독한 <밤은 말이 없다>의 조감독으로 들어갔다. 배우로 성공하겠다는 야망을 스스로 접고 영화감독이 되기 위해 새출발 한 것이다. < 밤은 말이 없다 >의 제작자 이재관 은 촬영 현장에 나와 조감독으로 활동하는 김영효 를 눈여겨 보면서 자질과 능력을 인정하고 자신이 책임지고 감독으로 데뷔시켜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래서 김영효는 이재관으로부터 감독 데뷔작으로 건네받은 시나리오가 <현금에 손대지마라>였다. 김영효는 감독 데뷔의 부푼 꿈을 안고 시나리오를 철저히 분석하면서 콘티을 작성했다. 그러나 기대했던 이 영화의 감독은 다른 사람에게 돌아갔다. 당시 최고의 톱스타였던 여배우의 반대로 그 여배우와 친한 이모 감독에게 돌아갔다. 김영효는 또 가슴 쓰라린 좌절을 당했지만 이번에는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김영효 는 내가 쓴 시나리오로 당당하게 감독 데뷔하겠다는 굳은 각오로 3개월을 칩거하면서 시나리오 < 반역 >을 탈고했다. 그는 탈고한 시나리오를 들고 이재관 을 찾아갔다. 이재관은 시나리오를 앉은 자리에서 단숨에 읽고는 '됐어, 훌륭해!''를 연발하면서 자신이 제작하겠다고 나섰다. 제작 준비 과정에서 사정이 여의치 않아 이재관은 김영효에게 친구인 서대문 주먹 보스를 소개했다. 우여곡절을 겪은 후 김영효는 마침내 자작 시나리오 <반역>으로 감독 데뷔를 했다. <반역>은 일본군 관동지구 특부대장 아라이는 한국인이면서도 한국 독립군을 체포하여 박해를 가했다. 어느날 체포된 독립군 중에 아버지가 끼어 있었다. 이에 충격을 받은 아라이는 총뿌리를 일본군에 돌려 독립군을 탈출케 하고 자신은 장렬한 최후를 마친다는 활극물로 박노식 , 이민자 , 김혜정 이 출연했다. 1966년 2월 26일 아세아극장에서 개봉했다. 일상은 로맨티스트요, 영화는 모더니스트인 김영효는 1966년 <반역>으로 데뷔한 이후 < 춘풍 >(1968), < 황야의 외팔이 >(1970), < 오륙도 이무기 >(1978), < 화요일 밤의 여자 >(1980),< 가까이 더 가까이 >(1986) 등 30여 편을 감독했다. 액션물 감독 밑에서 조감독을 했고, 액션물로 감독 데뷔한 김영효지만 때로는 산뜻한 멜로물과 화사한 청춘물을 연출, 장르의 다양성을 꾀하기도 했다. 남진 , 우연정 주연의 < 그대 변치 마오 >는 뮤지컬이고 < 대학시절 >은 청춘물이다. 김영효 감독은 기억에 남는 작품으로 위 2편과 데뷔작 <반역>을 꼽았다. 액션물을 주로 감독하고 액션 감독이란 브랜드를 지니고 있었는데 의외로 멜로물과 청춘물에 애정을 느끼고 있었다, 젊은 시절 문학서적을 탐독했던 문학도였고 일상에서는 멋을 알고 감정이 풍부한 성격 탓이리라. 나는 개인적으로 김영효 감독에 대해 세 가지 느낌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긴 제명의 영화를 감독했고, 두 번째는 감독이 된 이후 액션영화에 중년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주연으로 출연했고, 세 번째는 언제 어디서 만나도 나에게 따뜻한 악수의 손을 내민다, 김영효가 감독한 < 눈으로 묻고 얼굴로 대답하고 마음속 가득히 사랑은 영원히 >(1974)는 내가 알고 있는 한 대한민국에서 지금까지는 제일 긴 제명의 영화다. 마산 교도소에 수감중인 사형수의 옥중 결혼식 실화를 영화한 것이다. 또 김영효가 영화감독이 되고 난 후에 영화배우로 용기있게 나선 것은 좌초된 영화배우에의 꿈을 한번쯤 되살리고 싶은 잠재된 욕망의 발로였을 것이다. 그리고 김영효는 영화인이건, 영화 밖의 사람이건 간에 누구와 만나도 소주잔을 기울이면서 폭 넓은 대화를 나누는 친화력의 따뜻한 체온을 지니고 있다, 김영효는 영화를 만드는 일 외에 영화계 발전과 영화인 친목을 위해서도 의욕적인 활동을 해왔다. 한국영화감독협회 회장을 8년 6개월이나 했다. 오랜 기간 동안 감독협회를 운영하면서 김영효는 회원 간의 친목과 결속을 다지고 협회의 위상을 높였다. 지금도 그가 영화와 영화계를 사랑하는 마음엔 변화가 없다, 언제봐도 청년 같은 열정의 모습이지만 세월의 흐름은 막을 수 없는지 칠순을 넘긴 김영효는 요즘 둘째 딸 은주의 감독 데뷔 뒷바라지에 여념이 없다. 부인 심두섭과 슬하에 1남 3녀를 두었는데 둘째 딸 은주가 아버지의 대를 이어 감독 데뷔 준비중이다. 후배 감독들의 활동에 기대를 걸고 있다는 원로 김영효 감독의 목소리는 아직도 쩡쩡하다. 김화(영화평론가) / 2003년 <프로필> 1931년 2월 17일 강원도 철원 출생 1959 국민대학교 상경대학 경제학과 졸업 1965 < 반역 >으로 감독 데뷔 <주요 경력> 한국영화감독분과 이사, 한국영화권익위원장 (주)우성사 기획실장 및 고문, 한국영화인협회 감독협회 회장 삼선 영화법 개정 운동 본부장 <작품 연보> 1965 반역 1966 상처뿐인 사나이 1967 춘풍 /한녀 1968 지옥에서 온 신사 1969 심야의 난입자 1970 황야의 외팔이 1971 홍콩의 카포네 1973 대학시절 / 대학생 1974 눈으로 묻고 얼굴로 대답하고 마음속 가득히 사랑은 영원히 그대 변치마오 / 비에 젖은 입술 1975 사랑을 빌려드립니다 1976 구삼육 사건 1977 맨주먹의 소녀들 1978 오륙도 이무기 / 소림 백호문 1979 혈육마방 1980 화요일밤의 여자 / 요 / 1986 가까이 더 가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