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인 28호
- 제작년도
- 1963
1930년 1월 조선극장과 단성사가 토키를 상영하기 시작하면서, 조선의 활동사진 변사들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다. 조선의 영화 문화에서 중요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던 변사들의 연행이 ‘화예(話藝)’라는 말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원숙한 경지에 이른 때였다. 무성영화 시대를 대표하는 변사의 한 사람, 김영환은 곱상한 외모와 단정한 매너로 흥행계에서 인기를 얻어왔을 뿐 아니라, <장화홍련전>(1924), <세 동무(삼걸인)>(1928), <약혼>(1929), <젊은이의 노래>(1930), <연애광상곡>(1931) 등을 연출한 영화감독이기도 했으며, “낙화유수”, “세 동무” 등의 영화 주제가와 “강남제비”, “추월색” 등의 유행가를 작곡할 정도로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1928년에 단성사에서 조선극장 해설부 주임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앞으로 수년 내에 변사라는 직업이 사라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조선에서의 영화해설 역사를 설명한 음반 《역려》(1932)에서, 그는 자신이 서있는 격변의 시간을 “활동사진이란 그 이름이, 영화라는 이름으로 바꾸이는 동시에 변사라고 하든 것도, 해설자라는 것으로 고치어진 오늘” 1 이라는 정도로 인식했다. 그가 보기에 토키 이후의 변사는 ‘활동사진 변사’에서 ‘영화의 해설자’로, 그러니까 극장의 엔터테이너에서 필름 텍스트에 한걸음 더 다가가 영화의 번역자로서 자기 인식을 가져야 하는 존재였다. 김영환에게는 더 나은 해설자가 되는 것이 중요할 뿐 굳이 다른 분야를 곁눈질할 필요가 전혀 없어 보였다. 김영환은 ‘조선인 변사 1세대’ 서상호와 김덕경의 견습으로 흥행계에 입문했다. 경상도 출신으로 사투리 탓에 견습 시절에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고 꽤 오래 생활고에도 시달렸지만, 이제 영화해설계의 중진이 되자 변사의 화예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일이 많아졌다. 그는 외국영화뿐 아니라 국산영화를 상영할 때도 변사의 해설이 붙는 일본이나 조선에서 “해설은 외국인들도 일찍 발견치 못한 영화감상의 효과를 한층 더 힘 있게 하는 일종 특수적 색채”이며 “영화를 일반적으로 감상시키는 동시에 영화의 색채와 더 예민한 감각과 인상을 주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작품을 해부하여 일반적 감상에 바치는 일종 수단”인 영화해설에는 그야말로 ‘연구’가 필요하다. “지껄이되 잘 지껄이자는 것이며 어떻게 해야 조리 있게 잘 지껄일까를 힘써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한 연구 끝에 김영환은 영화의 주제와 플롯, 분위기를 이해하고, 작자의 주안(主眼)과 세선(細線)을 분별하는 안목을 보유하며, 영화 번역에 창의성을 발휘하되 자기도취에 빠지지 않는 것이 해설자의 자질이라고 풀어 설명했다. 2 1931년 조선극장에서 <럭비시대>(The Forward Pass, 1929)와 <크랙 장군>(General Crack, 1929)을 상영하던 때, 김영환이 기록한 일기에는 이제 막 토키 시대로 진입한 조선 변사의 일상이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는 하루하루가 바쁜 변사였다. 조선극장에서는 이미 외국의 토키영화가 상영되고 있었는데, 김영환은 그 외국어 자막을 번역해 설명하는 연행을 했다. 그런 한편 개인적으로 유성기 극음반을 취입해 상당한 재미를 보기도 했다. 유성기와 라디오 보급률이 서서히 증가하면서 극장에서 ‘오리지널’한 변사의 목소리는 레코드를 통해 ‘복제’되고 방송을 통해 ‘전파’되었다. 변사가 자신의 다른 목소리들과 공존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1930년대의 김영환은 라디오에 출연해 영화를 해설하고 극음반 취입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새로운 ‘재생 예술’들과 상보적인 관계를 형성했다. 어떤 면에서 그는 ‘소리 복제 시대’를 반기고 있었다. 1931년 봄 김영환이 콜롬비아레코드에서 취입한 《춘향전》은 윤혁과 이애리수의 실연(實演)과 박록주의 창, 그리고 그 자신의 설명이 어우러진, 다시 말해 연극과 판소리, 영화해설이 뒤섞인 음반으로서 구매자들에게 풍성한 즐거움을 제공했다. 극음반이 잘 팔린다는 소식을 듣고 기뻤던 김영환은 극음반 취입의 소감을 이렇게 기록했다. “영화는 형태의 촬영이라면 레코드는 음성의 촬영이다.” 3 기술적 격변의 시기에 그는 쏟아지는 신작 영화와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세계 영화계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자, 일본의 영화 잡지 『키네마순보(キネマ旬報)』와 『키네마주보(キネマ週報)』를 구독하며 동시대적인 감각을 익히려 노력했다. 어느 날은 자신이 취입한 음반이 많이 판매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솔직하게 적었지만, 또 어느 날은 일본의 명변사 도쿠가와 무세이(德川夢聲)가 ‘토키영화 설명 반대론’에 대해 반론을 펼친 데 깊이 동조했다. 김영환은 여기서 언어와 계급의 불평등이라는 문제를 제기하며, 토키영화를 해설하지 않는 것은 민중 오락인 영화를 “일부 유식급(有識級)만이 즐길 수 있는 일종 독락적(獨樂的) 기호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새로운 기술 도입으로 인해 일본영화 산업계의 구조 조정이 시작된 것을 영화 노동자의 입장에서 아프게 바라보기도 하는데, 체계를 갖춘 스튜디오 하나 없이 산업적으로 허약한 조선영화의 현실에서는 그것조차도 남의 이야기에 불과했다. 4 기술과 산업의 후진성이 어떤 경험을 ‘결핍’시키거나 ‘지연’시키는 조선의 현실에서, 1930년대 초반의 변사들은 기존의 상영 관습을 이어가는 차원에서, 또 외국어 토키에 대한 관객들의 언어적 소외를 최소화하는 차원에서 발성영화의 음향을 줄이고 영화해설을 곁들이는 ‘토키 연행’을 시작했다. 하지만 관객의 항의에 부딪치지는 않았다. 비단 외국어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조선에서는 여전히 무성영화가 제작되고 있었고 아직 토키 상영 설비를 갖추지 못한 극장들도 많았다. 무성영화 프린트는 계속 유통되었고, 변사는 여전히 중요한 존재였다. 그러나 이 시기를 지나며 관객들이 영화 사운드와 영상 동조 시스템을 이해하고 자연스레 토키 감상에 익숙해지자 변사는 점차 불필요한 존재로 그의 연행은 ‘낡은 문화’로 인식되어갔다. 김영환의 일기로부터 몇 년이 지난 1930년대 후반, 경성의 이른바 ‘일류관’에서 변사의 해설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근대 문화의 첨단에 서 있었던 변사들은 불과 몇 년 사이에 활동사진 시대의 유물이 되었다. 1938년 가을, 조선일보영화제에 자극을 받은 ‘재경해설유지연맹(在京解說有志聯盟)’이 동양극장 영화부의 후원을 얻어 11월 16일부터 3일간 ‘무성영화 감상제’를 개최했다. 그해 여름 우미관 화장실에서 변사한 왕년의 인기 변사 서상호를 추모하듯, 무성영화 감상제에서는 과거의 동료들인 ‘무성영화 해설계의 권위’ 변사 이십여 명이 해설을 하고 그들과 함께 이름을 날리던 악사들이 영화음악을 연주했다. 5 <선라이즈>(Sunrise: A Song of Two Humans, 1927), <부활>(Resurrection, 1927), <거리의 천사>(Street Angel, 1928), 그리고 조선영화 <철인도>(1930), <아리랑 전·후편>(1926, 1930) 등 ‘추억의 명화들’이 이병조, 최병룡, 서상필 등의 해설로 다시 상영되었다. 그때가 아마도 ‘잊혀졌던 암실의 웅변가’들이 마지막으로 화려하게 조명된 시간이었을 것이다. 사진 2. ‘무성영화감상제’ 광고 출처: 『동아일보』 1938년 11월 16일자, 3면. 1) 배연형·구인모,「역려」『유성기 시대, 변사의 화예』, 한국문화사, 2018, 321쪽. 2) 김영환,「영화해설의 소고(小考)」『대중영화』 제4호(1930년 7월), 8~13쪽. 3) 김영환,「영화생활」『영화시대』 1권 3호(1931년 5월), 32쪽. 4) 김영환, 위의 글, 30~31쪽. 5) 「해설유지 주최 무성영화감상제」『동아일보』 1938년 11월 17일자, 4면. 상단사진 1. 변사 김영환의 영화일기 출처: 「영화생활」, 『영화시대』(1931년 5월) (아단문고 미공개 자료 총서 2013, 7권, 104쪽) <자료> ※ 이하 자료는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현대어 표기에 맞게 다시 썼다. 일부 표현은 문맥에 맞게 다듬었다. 1. 김영환, 「영화생활」 『영화시대』 1권 3호(1931년 5월), 30~32쪽. (부분 발췌) 3월 7일 (토) 10시 기상— 근래 처음으로 충분히 잠을 잔 모양이다. 어린애가 몸성히 잘 있다는 편지가 왔으므로 오늘은 마음이 좀 편해진다. 오늘은 토요일, 주야(晝夜) 곱빼기를 또 마시는 날이다. 『영화시대』에 보낼 원고 몇 장을 쓰고 나니 벌써 무대 교대 시간이 되었다. 마음에 없는 작품을 지껄이는 것이야말로 울면서 겨자 먹기, 이를테면 ‘빵’ 구실에 지나지 못하니 ‘밥’이 시키는 것이라 어쩔 수 없다는 그것뿐. 밤에 김연실, 강석연, 강석제, 유영광 이 네 분의 양(孃)들이 놀러 왔었다. 편지 쓰고 있던 때라 고급적 인사를 못하였더니 “방해가 너무 많아 미안합니다”라고 석제 씨의 꼬는 말씀 한마디에 낭자군은 일제 행동! 네 분의 양군(孃群)은 객석으로 달아났다. 저녁 일을 마치고 『키네마순보(キネマ旬報)』(3월 1일 제393호)를 통독함. 유니버설 춘계 작품 에드윈 커리우 (Edwin Carewe) 감독, 루프 벨레즈 (Lupe Velez) , 존 볼스 (John Boles) 주연으로 톨스토이의 『부활』이 재차 영화화가 된 모양. 반가운 소식이다. 돌로레스 델 리오 (Dolores del Rio) 가 지긋지긋하게 싫으니만큼 전(前) 영화 <부활> (Resurrection, 1927) 에서도 나는 호감을 가지지 못했던 것이라 재차 영화화인 루프 벨레즈와 존 볼스의 이 신(新) <부활> (Resurrection, 1931) 에 나는 기대를 가져본다. 메트로골드윈메이어 영화로 세실 B. 드밀 (Cecil B. DeMille) 감독 <마담 사탄> (Madam Satan, 1930) 의 발표는 그리 반갑지가 않다. 또 어느 구석에서든지 기필코 하나님이니 무엇이니 하고 씨부렁대놓은 구절이 있을 것 같아서 평(評)이나 시사를 대하기 전까지는 믿고 싶지가 않다. 동 회사 클래런스 브라운 (Clarence Brown) 감독 <불사조> (Wonder of Women, 1929) , 문호 주더만 (Hermann Sudermann) 의 원작인 만치 스토리의 통속적이 아니요, 비상업적인 그 점에서 어서 좀 보고 싶다. 일활(日活) 촬영소에서는 소원(所員)의 감봉 정리를 단행하였다고? 해고당한 50명 중에는 기술자나 배우로서 제일선에 나선 사람은 하나도 끼이지 않은 모양. 그러고 본즉 결국 수하 자(手下者) 참수 단행이나 아닌지 원! 먹을 것이 제법 생긴다는 저 땅에서도 영화 노동자의 수난이 생길 데에야 백사지(白沙地) 이 땅 위에서 갈팡질팡 헤매는 우리 영화 노동자들이야 말해서 무엇 하리. 아직도 참수 단행은 당하지 않았으니 그것으로나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까?! 도쿠가와 무세이(德川夢聲) 씨의 「영화연첨일기(映畫軟尖日記)」, 『키네마주보(キネマ週報)』소재, 토키영화 설명 반대론에 대한 대항전은 흥미 있게 읽었다기보다도 장차 우리에게도 전환되어올 수난일 듯한 거기에서 같은 감정에 가슴이 흔들린다. 토키영화 설명 반대론에 대해서는 나 역시 거기에는 수긍하지 않는다. 당사자의 직업적 입장에서가 아니라 제3자의 견지로도 물론 그러하다. 만일 세계 공통어가 세계적 보급과 발달을 얻고, 그리하여 그 세계 공통어로 취입(吹込)하여 토키영화를 제작한다면 모르되, 그것을 얻지 못하는 금일에 있어서 토키영화 설명 반대를 고창(高唱)하는 것은 민중 오락에 본위를 가진 영화 그 물건으로 하여금 일부 유식급(有識級)만이 즐길 수 있는 일종 독락적(獨樂的) 기호물을 만들어 버리겠다는 전횡적 야심인 동시에 가공적 잠꼬대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아! 과학문명의 발달은 노동자의 생명을 뺏는 독와사(毒瓦斯)! 축음기의 권위로 말미암아 음악사(音樂士)의 희생을 본 오늘에 있어 토키영화의 출현으로 해서는 또다시 해설의 존재까지 그러하지 않은가! “아- 쿠오바디스 (Quo Vadis) 변사여!” 무세이 씨의 차탄사(嗟歎詞)이다. 참 아닌 게 아니라 어디로 갈꼬! 3월 8일(일) 9시 기상- <럭비시대> (The Forward Pass, 1929) 를 오늘도 주야로 두 번씩이나 씨부렁댈 일을 생각하니 졸음이 온다. 존 배리모어 (John Barrymore) 주연 <크랙 장군> (General Crack, 1929) 은 내가 보지는 않았으나 생각건대 <럭비시대>보담은 지껄일 재미가 좀 있으리라 했더니 후반을 담임한 성동호 군, 지긋지긋해 죽겠다는 말. 그러나 <럭비시대>나 <크랙 장군>이 태작이라고 할 지경이면 배급소의 시비를 받을 말인 고로 이를테면 어디까지든지 태작이 아니요, 걸작이란 말이다. 요컨대 이 두 개의 걸작이 유감천만히도 우리들의 입에는 맞지 않는 음식과 같아 씨부렁대기에 매우 부아통이 터질 뻔 했다는 그것뿐이니 당해 배급소여! 달은 잡지 마실지어다. 적선동 강대원 씨에게 조극(朝劇) 초대권으로 미성(微誠)을 표하였다. 콜롬비아축음기회사 문예부 강윤석 씨 방문, 나의 취입한 레코드 초회 발매, 레코드 대회, 2회 발매, 《춘향전》은 상당히 잘 팔린다는 말 듣기에 기쁘다. 영화는 형태의 촬영이라면 레코드는 음성의 촬영이다. 촬영을 마친 영화배우나 취입을 마친 취입자의 궁금증은 피차가 일반이니 시사나 시험반(試驗盤)을 대하기까지에 일력장(日曆帳)이 곤죽이 되어버리는 것도 똑같은 일이다. 3회 발매품은 무엇인지 어떻게 되었을까. 잘 되었으면 좋고, 못 되었으면 낙망! 낙망! 단성사 해설부 견습이던 편순만 군. 조극 무대로 오겠다는 것을 단성사 해설 주임 김덕경 씨의 승낙을 맡아오라 했더니 저녁에 씨(氏)의 쾌락을 맡아왔음으로 즉시 출연을 허락하였다.
1919년에 발간된 한국 최초의 영화잡지 「녹성(綠星)」에는 1916년 유니버설 블루버드 작품인 「Shoes」가 < 독류(毒流) >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어 있다. 주인공 메아는 자신이 받는 주급 5달러로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도시 노동계급 여성이다. 그녀의 극단적인 가난은 비가 새고 발에 상처가 날 정도로 너덜너덜해진 구두로 형상화되는데, 결국 그녀는 새 구두를 얻기 위해 타락의 길에 들어선다. 영화(소설) <독류>는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화려한 물질문명의 전시, 선망과 대리만족의 세계가 할리우드 영화의 전부는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히려 20세기 전반기의 할리우드는 사회적 빈곤이나 전쟁이 낳은 참상, 지배계급에 의한 착취와 수탈 같은 세계상을 자주 그렸고 식민지 조선에서 할리우드 영화는 그와 같은 보편적 세계상에 대한 이해와 공감 속에서 소비되었다. 남성에게 농락당하는 하층계급 여성의 수난기를 다룬 그리피스의 < 동도(Way Dowm East) >나 찰리 채플린의 무성영화들이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던 것을 보아도 그렇다. 사회적 빈곤을 다루는 이 영화들은 조선인들 또한 세계 다른 지역의 사람들과 같은 삶의 조건에 놓여 있다는 감각, 말하자면 ‘공통의 인류’로서 근대의 생활세계에 대해서 느끼는 어떤 보편적 감각을 생산했다. 오랫동안 한국영화사를 주조해온, ‘빈곤의 미학’으로서의 리얼리즘은 이와 같은 근대세계의 보편성에 맞닿아 있다. 영화사가 이영일 은 ‘리얼리즘’이라는 개념 아래 < 아리랑 >(1926)을 비롯한 나운규 의 영화 세계와 < 수업료 >(1940), < 집 없는 천사 >(1941)같은 최인규 의 영화들, 그리고 해방 후 유현목 의 < 오발탄 >(1961)으로 이어지는 한국영화의 정전 목록을 제시한 바 있다. 수탈당하는 소작민의 울분을 그렸던 <아리랑>, 부모의 돌봄을 받지 못하는 가난한 아이들을 담은 <수업료>와 <집 없는 천사>는 <독류>나 채플린의 영화들, 더 나아가서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이나 <오발탄>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빈곤이라는 근대세계의 보편적 주제를 다뤘다. 예컨대 낡은 구두가 메아의 가난을 표상하듯이 할머니가 주워온 짝이 맞지 않는, 구멍마저 뚫린 신발은 영달의 빈곤한 처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먼저 <집 없는 천사>가, 그리고 이어서 <수업료>가 발굴되어 다시 세상에 나오기 전까지, 이영일의 정전 목록은 대체로 받아들여졌다. 식민 말기의 영화들에 대한 연구가 풍성해지는 가운데, “2차대전 후 네오리얼리즘을 연상”시킨다(이영일)는 전언과 몇 장의 사진을 통해서 최인규 영화의 면모를 짐작해왔던 후세대는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서하는 <집 없는 천사>의 마지막 장면에 당혹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수업료>는 그보다는 덜 노골적이지만, 일제의 ‘소국민 담론’ 안에서 소비된 맥락으로 보든, 서사의 논리적 구조로 보든 이른바 ‘친일영화’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수업료> <집 없는 천사>를 비롯해 새로 발굴된 식민 말기 친일영화들의 내적 논리를 밝히는 가운데, ‘균열’ 또는 ‘징후’로서 드러나는 조선영화의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논의들이 생산되었다. 하지만 친일영화임이 분명한 이상, 어떤 균열이나 징후가 있더라도 이 영화들이 민족영화의 정전으로서의 위상을 고수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필름의 발굴로 인해 오히려 모호해진 최인규 영화의 영화사적 위상을 다시 정립하기 위해서는 ‘빈곤의 미학’으로서의 리얼리즘을 민족영화의 정점으로 구성해온 이영일의 영화사론을 재고해야 한다. 요컨대 최인규의 영화들은 리얼리즘과 민족영화의 균열지점을 보여주는 문제적인 텍스트들인 것이다. 빈곤의 미학으로서의 리얼리즘이 식민지시대를 넘어 < 꼬방동네 사람들 >(1982)이나 < 바람 불어 좋은 날 >(1980) 같은 1980년대 영화들까지 규정하는 틀로서 이어져 온 긴 역사를 생각했을 때, <수업료>와 <집 없는 천사>를 민족영화의 정전에서 배제하는 손쉬운 방법은 해결책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사회적 빈곤이야말로 20세기 한국의 대중이 자신의 ‘현실’로 받아들였던 것이며, 그것을 다루는 영화 매체의 보편적 능력을 외국영화들뿐 아니라 식민지 조선과 한국의 영화들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리얼리즘으로 한국영화의 “정신의 광맥”을 구성하고자 했던 이영일의 영화사론을 효과적으로 논박하기 위해서는, 빈곤의 재현이 리얼리즘으로 규정되고 그것이 곧 민족영화의 핵심이자 세계적 보편성에 가닿는 것이 되는 논리적 도약이 어떻게 그토록 오랫동안 유효할 수 있었는가를 질문해야 한다. 1930년대 초에 카프 비평가들이 나운규의 영웅주의를 아메리카니즘이라고 비난했을 때, 나운규는 자신 또한 “이 현실에 생활고를 느끼는 프롤레타리아의 한 사람”이라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영화가 왜 프롤레타리아 영화가 될 수 없는지를 반문했다. 더글러스 페어뱅크스가 분한 쾌걸 조로가 “약한 사람을 도와주고 권력으로 인민을 압박하는 자를 징계하는 것으로 자기 사명”을 삼았던 것처럼 <아리랑> 연작의 영진이나 < 철인도 >의 개고기 같은 나운규의 활극적 캐릭터들은 비참한 상황에 처한 식민지 조선인들을 ‘영웅적 활동’으로써 구원한다. 나운규와 카프 비평가들은 억압과 수탈의 사회구조와 그로부터 비롯된 대중의 생활고를 다루는 것이 영화의 역할이라고 믿었지만, 나운규는 영웅적 개인의 ‘활동’으로써, 카프 비평가들은 “노동계급의 집단적 힘”으로써 이를 극복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달랐다. 1930년대 초 나운규 영화 세계에 닥친 위기는 아메리카니즘의 패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카프 비평가들 또한 승자가 아니었는데, 그들이 옹호했던 소비에트 영화의 미학은 일제의 검열에 의해 아메리카니즘의 영웅주의보다 더 철저하게 봉쇄되었기 때문이다. <수업료>의 ‘리얼리즘’, 즉 사회적 빈곤의 재현은 모두가 패배한 바로 그 상황에, 조선 영화미학의 폐허 위에서 자라났다. <수업료>는 가난의 서사가 갖는 보편성에 기반 해서 전개된다. <독류>에서 메아가 쇼윈도우에 전시된 구두를 바라보는 것처럼, <수업료>에서 영달은 또래 아이와 그 아버지가 새 신발을 사는 모습을 쓸쓸하게 지켜본다. 다른 이들과의 비교를 통해 선명하게 부각된다는 점에서 가난은 상대적인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사회적인 의미망 안에서 제시된다고 말할 수 있다. 메아의 구두가 일터로 나가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생필품이었다면, 영달에게 수업료는 학교라는 사회에 머무르기 위한 기본적 요건이었다. 수업료 때문에 학교에 가지 못한 영달과 정희가 강가에서 책을 읽는 모습으로부터, 교실에서 책을 읽는 다른 아이의 얼굴로 넘어가는 장면의 연결은 ‘공부’ 또한 특정한 사회적인 의미망 안에 놓여 있는 것임을 보여준다. 저 하늘에도 슬픔이 1965년 < 저 하늘에도 슬픔이 >에서는 주인공 윤복의 눈물겨운 ‘고학’의 정경이 더욱 절절하게 그려지는데, 이는 당시가 제도교육을 통해 가난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신화가 본격화된 시기라는 점과 관련되어 있다. 못 배운 한과 가난의 대물림, 고학을 통한 가난으로부터의 탈출 같은, 근대적 교육제도를 둘러싼 재현의 관습들은 산업화 시대의 산물인 것처럼 보인다. 당장 굶더라도 학비를 마련해서 학교에 가야 하는 것은 가난이 현재의 곤경인 동시에 미래의 박탈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수업료>에서 가난과 공부는 개인의 미래보다는 개인이 속한 공동체의 문제로 제시된다는 점에서 식민 말기의 사회상을 반영한다. 불우한 아이를 도와주고 계도하여 공동체의 성실한 성원으로 만드는 ‘아동영화’의 주제가 당시 사회상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는 불우한 부랑아들과 뉘우친 불량배들이 함께 황국신민의 서를 외우는 <집 없는 천사>의 마지막 장면에 오면 선명하게 드러난다. 요컨대 조선인들은 모두(그들의 신체적 나이와 상관없이) 훈육과 계도를 받아야 할 어린아이이며, 이들에 대한 교육은 ‘대동아’의 ‘공영’을 위한 일본제국의 의무이자 권리인 것이다. 서두에 일본 제국의 일부로서 조선 반도를 위치 짓는 지리 수업을 보여줌으로써 <수업료>는 식민지에서 제도교육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분명하게 하지만, <집 없는 천사>와 같은 직접적인 선전 메시지를 담지는 않았다. 대신, <수업료>의 세계에는 수원성에 둘러싸인 그림 같은 조선의 정경과 선의로 가득한 생활 공동체의 성원들이 있다. 월급을 털어 영달의 월사금을 주는 일본인 교사, 영달과 병든 할머니의 생계를 걱정하고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친구 누나, 영달의 곤궁한 처지를 돕기 위해 ‘우정의 상자’에 돈을 모으는 학우들과 교사들, 그리고 월사금을 얻기 위해 60리 길을 걸어온 영달에게 따뜻한 밥을 차려주는 아주머니 등이 구성하는 그 세계에서 사회적 빈곤은 투쟁이 아니라 자선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로 그려진다. 영웅적 개인의 활동을 통해서든 노동계급의 집단적 힘에 의해서든 간에, <수업료> 이전의 가난은 투쟁을 통해 극복할 수 있는 것이었다. 누구는 갖고 누구는 갖지 못한 사회적 불평등은 수탈로부터 기인한 것이라는 인식, 그리고 이와 같은 구조적 모순을 타파하기 위해서 투쟁해야 한다는 인식은 카프 비평가들뿐 아니라 나운규조차도 공유하고 있던 것이다. 그들이 모두 패배한 뒤에, 특히 계급투쟁의 좌파적 상상력이 절멸된 위에서 이웃의 온정이 사회적 빈곤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부상했음을 <수업료>는 보여주고 있다. 수업료 VOD 보러 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