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 조
- 감독
- 이광국
- 제작년도
- 2011
- 출연
- 김영필, 신동미, 이채은, 이다윗, 김동현, 조한철, 류의현, 김수웅, 박혜진, 조덕제, 서영화, 신연숙, 백익남, 박수민, 배단희, 방영배, 이달, 곽자형, 김새벽, 조재윤, 팽재국, 이승호, 변재상, 소원, 이예나, 유금정
2001년 | 싸이더스 감독: 김태균 | 원작: 서동헌 | 각본: 서동헌 정안철 허균 박헌수 김태균 | 제작: 차승재 | 촬영: 최영택 | 미술: 장근영 김경희 | 음악: 박영 | 특수효과: 정도안 | 무술감독: 이응준 | 시각효과: 장성호 CAST 김경수: 장혁 | 유채이: 신민아 | 장량: 김수로 | 송학림: 권상우 | 소요선: 공효진 | 마방진: 허준호 | 교감: 변희봉 | 요마: 차시은 2000년대 초 한국영화의 화두 중 하나는 컴퓨터 그래픽이었습니다. 그 역사는 채 10년도 되지 않았지만 적잖은 기술적 축적이 있었고, 테크놀로지가 제대로 구현될 수 있는 콘텐츠만 만나면 폭발력을 지닐 듯했습니다. < 화산고 >(2001, 김태균)는 그 첫 시도입니다. 이후 < 해운대 >(2009, 윤제균 )이나 최근 < 신과 함께 > 시리즈(2018~2019, 김용화 ) 등 디지털 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블록버스터의 시작은 <화산고>였던 셈이죠. 무협 액션과 컴퓨터 그래픽을 결합한 이 영화는 어쩌면 반 걸음 정도는 앞서 간 실험이었는데요, 개봉 당시엔 기대만큼 반응을 얻지 못했지만 월드 마켓에서 마니아 층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현장 공개는 6월 말, 어느 여름 밤에 이뤄졌습니다. 장소는 전라남도 고흥군에 있는 ‘도양’이라는 곳이었는데요, 지금은 도로 사정이 나아져서 서울에서 5시간 정도 걸리지만 당시엔 장장 7시간을 가야 했던 곳입니다. 소록도로 가는 배가 떠나는 부두 근처에 있는 어느 폐교에 세워진 야외 세트는 장관이었는데요, 전국을 뒤지며 1,000개에 달하는 폐교를 둘러본 끝에 헌팅한 장소입니다. 운동장 양 끝엔 거대한 조명탑이 있고, 그곳엔 ‘火山’ ‘武’ 같은 한자가 새겨진 붉은 휘장이 걸려 있습니다. 살수차는 지하수를 끌어 올려 폭우를 만들어내고, 카메라는 크레인에 올라가 있었으며, 무술 팀은 끊임없이 와이어를 잡아당기던 분주한 밤 현장이었습니다. 이날 촬영은 영화의 클라이맥스인, 수학 교사 마방진(허준호)과 주인공 경수(장혁)의 대결이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건 와이어 액션이었는데요, 마방진의 가격에 경수가 하늘로 치솟는 장면 때문이었죠. 허리에 와이어를 매단 경수의 몸이 한 순간에 갑자기 솟구치는 장면을 위해, 카메라 밖에선 무술 팀(이른바 ‘땡김이’)이 정확한 타이밍에 맞춰 와이어를 잡아 당깁니다. 10번 넘는 테이크 만에 OK 사인이 났는데요, 카메라 앵글을 바꿔서 그 장면을 반복합니다. 그때마다 장혁은 바닥에 내동댕이쳐져야 했고요. 마치 <매트릭스>의 한 장면 같습니다. 12개의 살수구에서 물줄기가 쏟아지면 ‘우중 액션’이 시작됩니다. 어릴 적 우연하게 뇌전벽력을 맞아 극강투기를 가지게 된 경수. 그는 여덟 번 퇴학을 맞고 아홉 번째 전학으로 화산고에 옵니다. 영화 < 짱 >(1998, 양윤호 ), 드라마 <학교>(1999)로 고등학생 이미지가 강했던 장혁에게 <화산고>는 어쩌면 운명적인 캐릭터였을지도 모릅니다. 마방진 역의 허준호. ‘빌런’ 캐릭터로 허준호만큼 다크 포스를 내뿜는 배우도 많지 않을 겁니다. <화산고>에서도 경수를 압도하는 엄청난 힘을 보여줍니다. 장혁은 경수를 “바보스럽지만 바보는 아닌” 캐릭터로 설정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느낌을 만들어내는 게 정말 힘들었다고 하네요. 그리고 11개월 동안 이어진 촬영은 당시 20대 초반이었던 신인급 배우에게 결코 쉽지 않았는데요, 촬영이 끝났을 땐 마치 학교를 졸업하는 기분이 들었다고 합니다. <화산고> 현장에서 와이어는 장혁에겐 마치 신체의 일부와도 같았습니다. 거의 항상 몸에 달려 있었으니까요. 거친 액션을 소화하느라 온몸에 멍이 들었고, 일곱 번 기절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나중엔 너무 익숙해져서, 와이어에 매달린 상태에서 자장면을 먹을 정도가 되었다네요. 1997년 어느 공모전에 출품된 시나리오가 하나 있었습니다. <화산고>였죠. 당선되진 않았지만 그 시나리오를 재밌게 읽었던 김태균 감독은 원작자 서동헌에게 영화화 제안을 했는데요, 처음엔 직접 연출할 생각은 아니었다고 하네요. 이후 < 키스할까요? >(1998)을 마친 후 불현듯 <화산고> 시나리오가 떠올라 친구인 싸이더스의 차승재 대표에게 제안했고, 2년에 걸쳐 <화산고>를 만들게 됩니다. 촬영에 11개월, 후반작업에 6개월. 당시 한국영화로선 파격적인 제작 일정이었죠. <화산고>의 클라이맥스 액션 신은 마치 서부극을 연상시킵니다. 김태균 감독은 이 대목에 대해 “총과 총의 대결이 아니라 물 싸움으로 변형”시켰다고 설명합니다. <화산고>는 제작 노하우에서 그 어떤 참고 자료도 없었던 영화입니다. 의도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와이어 액션을 위해 홍콩 액션 팀을 불러올 수도 있었지만, 컴퓨터 그래픽을 해외 업체에 맡길 수도 있었지만, 모두 국내 인력을 통해 해결했습니다. 그래야 뭔가 쌓인다는 판단 때문이었는데요, 그러다 보니 제작비와 일정이 늘어났죠. “아무도 이렇게 긴 시간 동안 영화 작업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무지막지한 괴로움을 겪었어요. 과연 이 영화를 끝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했죠.” 김태균 감독의 말입니다. 김태균 감독은 <화산고>를 “근사함과 망가짐이 공존하는 영화”로 만들고 싶었다고 합니다. 아주 촌스러운 구석도 있고, 만화적인 톤도 있지만, 근사한 비주얼과 스펙터클이 결합된 영화. 그런 면에서 <화산고>는 거대하면서도 무모하고 한편으론 용기 있는 시도였습니다.
“영화는 비-영화적인 메시지를 위해 오용되어서는 안 된다” 빌헬름 하인과 비르기트 하인(이하 W+B 하인)이 첫 영화 < S & W >(1967)를 만든 이후 약 10여 년간 이어간 영화 제작 활동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개념이 있다면 재생산(reproductions)일 것이다. 전후 서유럽의 언더그라운드 실험영화에 대한 살아있는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 『XSCREEN: Materialien über den Underground-Film』(1971)의 77쪽을 보면, ‘재생산에 내재한 미학 Reproduktionismmanente Ästhetik’이라는 제목아래 쓴 짧은 글을 발견할 수 있다. 그 내용을 한번 살펴보자. “재생산 과정만으로도, 이미 필름의 미적 특질은 결정된다. 영화라는 공간은 서로 다른 재생산 과정 안에서 원본(vorlage)이 변화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곳이다. 이 변화를 명확하게 보여주기 위해, 원본(사진)은 16mm 카메라로, 8mm 카메라로, 비디오카메라로, 그리고 스틸 카메라(슬라이드)로 기록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의 공간에서 동시에 재생된다.” W+B 하인은 필름의 재생산의 결과로 나타나는 지각 효과를 전경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즉 영화에서 재생산 저 혼자서 발생시키는 미학적 경험을 선명히 하려 한 것이다. 재생산의 과정에서 무엇이 일어나는가? 이러한 맥락에서 그들의 관심사가 처음으로 드러나게 된 작업이 바로 < 생필름 Rohfilm >(1968)이라고 할 수 있다. 《Film as Film》(1977) 도록에는 비르기트 하인이 구조영화(Structural Film)에 대해 소개하고 그 역사를 서술한 글이 있는데, 그가 구조영화의 특징 중 처음으로 손꼽은 것이 ‘필름 스트립’이다. 여기에는 구조영화가 필름 스트립을 사용하는 세 가지 방법이 안내되어 있다. 첫 번째는 시각적인 ‘과정’이다. 필름의 연속이 내러티브 영화에서 내러티브 시퀀스를 만든다면, 구조영화에서는 시각적인 리듬으로 기능하는 데 이용된다. 두 번째는 네거티브와 포지티브 필름의 화학적 현상 과정이고, 세 번째는 필름 스트립의 표면에 직접 그림을 그리거나, 풀로 무언가를 붙이거나, 흠을 내는 것이다. 아무것도 촬영되지 않은 투명한 필름은 스크린에 흰빛만을 영사할 뿐인데, 이것 또한 ‘영화’로 인정한다. < 생필름 >을 보면 우리는 비르기트 하인이 언급한 이러한 특징을 모두 확인해볼 수 있다. < 생필름 >은 말 그대로 눈앞에 있는 대상이 무엇인지 모를 혼란스러운 경험을 선사한다. 빌헬름 하인의 얼굴이나 네거티브로 드러나는 남성의 형상, 쾰른 대성당을 롱 샷으로 찍은 장면 등 이미지의 파편들이 일정한 내러티브나 목표를 가지지 못하고 스크린에서 부유하듯 흐른다. 중간중간 남녀가 벌거벗은 채 침대에서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 장면이나 누군가가 책상에 앉아서 작업을 하고 있는 것 정도만이 형상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는 촬영된 이미지일 뿐이다. 스프로켓 홀과 필름의 경계가 화면에 드러나고, 스크래치, 일그러진 얼룩이 추상적인 조형이 되어 점멸한다. 두 종류의 필름 스트립이 한 화면에서 동시에 나타남으로써 검은 선으로 나뉜 분할화면의 효과가 생성되기도 하는데, 이 모든 시각적 자극이 뒤죽박죽된 영화는 20여 분 동안 지속된다. W+B 하인은 <생필름>을 위한 필름 스트립을 만들기 위해 머리카락, 먼지, 담뱃재, 잘게 조각난 네거티브와 포지티브 필름이미지, 종이 파편, 이어 붙인 천공 테이프 등을 비어있는 필름에 붙이고 여기저기 흠집을 냈다. 풀로 오브제를 붙여 두꺼워진 필름 때문에 회전이 때때로 멈추게 되면서 같은 이미지가 계속해서 나타나기도 한다. 또한 매우 느린 속도로 재생되면 프로젝터의 열이 필름을 녹이고, 이미지의 형상을 변화시킨다. 이 필름은 무비올라에 올라가 다시 8mm 혹은 16mm로 촬영되고, 재촬영 본은 임의로 선택된 필름 조각이 붙여진 뒤 재촬영된다. < 생필름 >을 통해 W+B 하인이 주요하게 내세웠던 태도는 앞서 말한 것처럼 필름이라는 물질 그 자체라기보다는 재생산의 전반적인 과정이다. 그들이 최초로 만든 필름 스트립은 또 다른 재생산 과정을 위해 소요될 뿐이며, 물신화되지 않고 폐기된다. 그 결과로 남는 것은 매우 강렬한 파괴의 인상을 주는 영상 이미지이다. 여기서 ‘파괴’적인 인상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생필름>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이것이 꽤 중요한 감각이기 때문이다. 비슷한 방식으로 만든 다른 작업을 떠올려 보자. 스탠 브래키지의 < Moonlight >(1963)는 나방의 날개나 잡초, 꽃 등을 투명한 필름 위에 붙인 것으로, 다소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운율을 전달한다. 오웬 랜드(조지 랜도우)의 < Film in Which There Appear Edge Lettering, Sprocket Holes, Dirt Particles, Etc. >(1965-66)는 여성의 상반신 초상이 담긴 필름을 중앙에서 빗겨나게 두어 스프로켓 홀과 필름에 적힌 숫자뿐만 아니라 먼지 따위가 모두 화면에 나오도록 했는데, 여기서는 영사된 이미지가 어떤 감정을 환기시킨다기 보다는 필름의 자기-지시적인 측면이 도드라질 뿐이다. 반면 W+B 하인에게 중요했던 것은, 영화의 한정적인 생산 양식 안에서 기존의 이미지를 다시 생산하는 행위 자체만으로 어떤 이미지의 효과, 미학적 상태가 발생할 수 있는지 탐구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사운드의 기능 또한 중요하게 등장한다. 사운드는 W+B 하인의 주된 관심사 중 하나였다. W+B 하인의 초기 작업에서 대부분의 사운드를 담당했던 것은 비르기트의 형제였던 크리스티안 미카엘리스(Christian Michelis)였다. W+B 하인이 이미지에, 미카엘리스가 사운드에 집중하여 비재현적이고 형식적인 영화 만들기에 헌신하면서, 그들은 사운드와 이미지 사이의 부조화, 그리고 비동시적인 관계를 성취하고자 했다. 사운드에 관한 미카엘리스의 생각을 살펴보자. “사운드는 영화의 분위기나 특정한 형식적 측면을 강조 혹은 무시하며 일종의 해석을 제공한다. 음향의 영역에서는 영화의 형식적인 문제나 기술적인 문제와의 유사성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유사성은 직접적으로 대응되는 것이 아니라 재료들의 조직과 유사하다. 이론적 개념들의 유사성보다 중요한 것은, 필름과 사운드의 효과로서 즉각적으로 지각되는 감각의 상호작용이다.” W+B 하인과 미카엘리스는 (그들이 뉴 아메리카 시네마의 작품들에서 확인한 순진한(naive) 전술이라고 할 수 있는) 익숙한 사운드를 거부했고, 관객이 편안함을 느끼지 않기를 바랐다. 영화의 지속 안에서 부유하며 감정적인 측면을 제공하는 음향은 스크린에서 아주 잠깐 동안만 식별 가능한 이미지의 발생과 같은 감각적인 인식을 요구한다. < 생필름 >은 1968년 11월 뮌헨에서 열린 “유럽 독립영화 감독들의 모임 European Meeting of Independent Filmmakers”에서 처음 상영되어 무척 호의적인 반응을 얻었으며, 빠른 속도로 주목을 받게 된다. 바로 뒤이어 뉴욕, 런던, 도쿄, 그리고 프랑스 감독 조합에 의해 설립된 비경쟁 프로그램인 감독주간(L Quinzaine des Realisateurs)을 통해 칸 영화제에서도 선보이게 된다. 그런데 비르기트가 이탈리아 영화감독 알프레도 레오나르디에게 쓴 편지를 보면 칸에서 <생필름>을 본 관객들에 대한 흥미로운 묘사가 나온다. “우리가 풀 사운드로 <생필름>을 보여주자, 관객들은 소리를 질렀고 마지막 십분 동안에는 상영을 중지하라는 박수를 쳤다. 그건 정말로 테러였다.” 이는 대부분 미카엘리스의 타협하지 않는 사운드 때문이었는데, 제5회 국제만하임영화제의 경쟁부문에서 상영될 때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관객들은 야유를 보내고 소리를 질렀는데, 한 신문의 지면에서는 이에 대해 “영화의 노이즈가 주는 메시지에 대한 적절한 응답”이라고 쓰기도 했다. 그러나 당대의 동료들이나 아방가르드 영화감독들에게는 이 영화가 그들의 실천에 있어서 기념비적인 것임을 적절하게 인지했다. 그들은 W+B 하인의 초기 영화들이 뉴 아메리카 시네마의 작업들과는 변별된다고 생각했다. 영국의 영화비평가 데이비드 커티스는 그의 저서 『Experimental Cinema: a Fifty Year Evolution』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필름이라는 물질에 대한 확신과 프로젝터 안의 물질이 지닌 존재감은 압도적이었으며, 내가 본 모든 미국 영화보다 강력하다.” 스티븐 드워스킨이 <생필름>에 대해 “시각적 폭탄”이라 표현한 것도 그렇게 과장은 아니라는 것을 짐작해볼 수 있다. 필름의 재생산이 낳은 “시각적 폭탄”과도 같은 강렬한 경험이라는 것은 단순히 수사에 그치는 것 같지 않다. 그보다는, W+B 하인이 영화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시화하기 위한 의도인 것처럼 보인다. 비르기트 하인이 1975년 『스튜디오 인터내셔널 Studio International』 11/12월호에 쓴 글은 영화의 영역에서 그들이 무엇을 추구했는지, 그리고 영화에 대한 태도가 어떠한지를 잘 보여준다. 이 글은 『Film as Film』 도록 마지막 부분에 개별 작가의 필모그래피와 함께 발췌되어 실렸다. “우리의 영화는 미학적인 창조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시작점은 어디인가? 예술과 과학의 경계는 어디인가? 재생산의 기술적 과정은 어느 정도 수준으로 미학적 변형의 기본 단계로 여겨지는가? 이미 재생산된 현실의 해석을 촬영할 때, 가장 단순한 카메라의 조작은 어느 정도인가? 조작된 추상과 실제적인 물질 이미지의 대결에서, 또 다른 문제는 명백해진다. 이는 예술을 다룰 때면 언제나 발생하는 문제인데, 실제 오브제와 그에 대한 설명이 실려 있는 도록의 볼 때의 괴리를 상상해보라. 바로 이것이 육체적으로는 경험할 수 있지만 말로 표현할 수는 없는 시각적 형식의 ‘표현’이다. 이것이 하워드 아이헨바움이 영화의 ‘포토제닉, 자움(the zaum) - 본질’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이성을 넘어선, 이성 앞에 뉘어있는 언어’이다. 구조에 대한 연구는 이 문제를 걸고넘어지는 첫 시도이다. 작품의 ‘무의식적’ 요소를 의식적인 과정으로 만드는 것이 얼마만큼 가능한지 살피면서 말이다. 만약 당신이 사회와 사회의 역사적 과정의 바깥에 예술과 예술가를 놓아두고자 하는 이데올로기, 즉 무의식의 창조적인 힘이라거나 천재와 같은 낭만을 넘어서고 싶다면 이 질문은 중요하다. 영화는 종종 ‘손가락 운동’ 이라거나 예술이 아닌 것으로 평가되곤 했다. 이러한 반응은 느슨하고 열려 있는 영화의 구조 때문에 발생한다. 이는 고전적인 예술 작품의 닫힌 형식이나 유일성의 이데올로기에 반대되는 개념 중 일부이다. 영화의 구조는 변화와 연속에 열려 있다. ‘예술 작품’은 닫혀 있으면 안 되며 반드시 그 스스로 열려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작업의 과정을 열어 두는 것이 필요하며, 영화를 교훈적인 것에 가깝게 만들어야 하고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회고적으로 보면 < 생필름 >은 W+B 하인이 뒤이어 제작한 개별 영화에서 추구했던 미학적 전략이 응집된 핵심적인 작품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제목에서조차 그들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잘 보여주는 작업 <재생산 Reproductions>(1968)은 W+B 하인이 아프리카, 이탈리아, 그리스 등지에서 휴가를 즐기며 찍었던 흑백 슬라이드 한 종류만을 이용해 만든 영상이다. 카메라는 풍경이나 건물이 찍힌 정지한 이미지를 훑기도 하고, 초점을 또렷이 맞췄다가 흩뜨리기도 한다. W+B 하인의 초기 작업에서 특징적인 것이 있다면, 비르기트가 말하듯 “개인적인 이미지를 형식적인 맥락에서” 이용하는 것이었다. 이에 반해 <625>(1969)는 순수한 추상처럼 보인다. ‘625’라는 제목이 지시하는 것은 PAL(Phase Alternation by Line) TV의 프레임당 주사선의 숫자이다. 볼렉스 16mm 카메라로 TV의 화면을 찍게 되면, 아날로그 비디오와 필름 카메라의 서로 다른 초당 프레임 숫자 때문에 두꺼운 검은색 띠가 생겨나는데, 1969년 빌헬름이 쿠르트 크렌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을 살펴보면 그가 1초당 8~32프레임으로 촬영 속도를 조절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우리가 <625>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카메라의 재촬영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띠의 두께와 속도, 움직임 등이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고, 그 운동에서 발생하는 리듬을 느낄 수 있다. <머테리얼필름 Materialfilme>(1976) 시리즈에 이르러서는 필름의 재생산 과정보다는 이미 주어진 발견된 오브제(found object)로 탐구의 방향을 선회한다. 이를 마지막으로, 그들은 필름 만들기를 중단하고 1978년부터 독일 곳곳을 돌아다니며 클럽이나 바에서 직접 퍼포먼스를 선보이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재생산 과정을 거친 이미지의 지각적 효과와 그 미학을 탐구한 W+B 하인의 초기 활동은 30여 개가 넘는 실험적인 작업을 뒤로하고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된다. 빌헬름 하인 Birgit Hein과 비르기트 하인 Wilhelm Hein (W+B 하인) 덧붙여 보자면,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후반까지의 기간 동안 W+B 하인이 영화의 영역에서 수행했던 것은 작품 제작뿐만이 아니다. 1966년 본격적으로 영화를 만들기로 마음먹고 그 이듬해인 1967년은 그들이 영화에 관한 기획까지 아우르는 전방위적인 활동을 이어나가는 데 영향을 준 중요한 사건들이 일어난 한 해였다. 그중 하나가 67년 10월 로마에서 < Bliss >(1967)를 상영하던 자리에서 그레고리 마르코폴로스를 만난 일이었다. 이를 계기로 W+B 하인은 마르코폴로스를 쾰른으로 초대하여 상영회를 마련한다. 12월 11일 마르코폴로스의 < Eros, o Basileus >가 쾰른대학에서 상영되었는데 무려 1천 명의 관객이 왔다고 한다. 다른 하나는 W+B 하인이 벨기에 크노케(Knokke)에서 열린 제4회 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에 참석한 일이었다. 이 행사는 영화를 선보이고 토론하는 장소였을 뿐만 아니라 아방가르드 영화의 유통, 비평, 프로그래밍 등의 국제적 협력을 도모하는 곳이었는데, 67년의 행사는 유럽에 ‘언더그라운드’ 아방가르드 영화를 확산시킨 것으로 여겨진다. W+B 하인은 쾰른으로 돌아와 1968년 국제적 아방가르드에 초점을 맞춘 정기적인 스크리닝 시리즈 《XSCREEN》을 그의 동료들과 기획하여 만든다. 이후 그들은 10여 년간 아방가르드 영화 이벤트를 꾸준히 마련하며 필름 큐레이팅에 대한 경험을 착실히 축적해 간다. 1977년에는 《도큐멘타 6》을 비롯해 《Film as Film》과 같은 대규모 전시에 공동 기획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 뮌헨 필름뮤지엄(Filmmuseum München)에서 출판하는 DVD 시리즈 ‘Edition filmmuseum’을 통해 W+B 하인의 초기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 이 시리즈의 54번 에디션으로 제작된 『Materialfilme1968-76』(2012)에는 < 생필름 >을 비롯해 <재생산> <625> <초상들 Portraits>(1970), 그리고 <머테리얼필름> 등 W+B 하인의 주요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DVD에 포함된 소책자에는 W+B 하인에 대한 마크 시겔의 소개가 있는데, 본 글은 마크 시겔의 글을 참고하여 작성되었다.
1. 2016년 6월 30일, 한국영상자료원은 한국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 홍길동 >(1967)이 수록된 「 신동헌 애니메이션 컬렉션」 DVD를 출시했다. <홍길동>은 만화가 신동우가 「소년 조선일보」에 연재했던 만화 <풍운아 홍길동>을 원작 삼아, 신동우 작가의 형인 신동헌 감독이 연출을 맡아 제작한 애니메이션이다. 필름이 유실된 후 오랫동안 볼 수 없었던 작품이었는데, 2008년에 일본 고베의 고베플래닛영화자료도서관(KOBE PLANET FILM ARCHIVE)으로부터 일본어 더빙이 된 <홍길동>의 프린트를 입수하여 한국어 사운드 필름과 합치는 작업을 통해 상영하면서 실제 모습을 비로소 볼 수 있었다. 그러다가 이번에 신동헌 감독의 다른 작품 < 호피와 차돌바위 >와 함께 디지털 색보정 작업을 해서 DVD가 출시된 것이다. 이 < 홍길동 >을 2012년 11월 29일~12월 2일 한국 동국대학교에서 개최된 메카데미아 학회(미국 미네소타대학을 중심으로 결성된 일본 팝컬처의 연구 학회)의 콘퍼런스에서, 학회 참석자를 위해 한국영상자료원의 협력을 얻어 상영한 적이 있었다. 이때 필자도 메카데미아 콘퍼런스에 참석차 한국을 방문한 일본의 평론가 오쓰카 에이지(「스토리 메이커」 「이야기의 체조」 저자)의 초청을 받아 같이 관람했었는데, 오쓰카 에이지는 <홍길동>을 본 감상으로 “폴 그리모(Paul Grimault)의 <사팔의 폭군 La Bergere et le ramoneur>을 방불케 한다”며 그 당시 한국 애니메이션이 비단 일본의 영향만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발언은, 일본 내에서는 한국이 특히 만화와 애니메이션, 게임 등의 분야에서 일본을 ‘흉내 내’ 발전해왔다는 식의 인식이 만연한 상황에서, 한국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에 대해 호의적인 반응을 보인 것인 셈이다. 물론 한국인인 필자에게 인사치레한 것 아니겠는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는데, 오쓰카 에이지는 일본에서 많은 개인, 회사, 단체, 기관과 자주 싸움을 일으키는 것으로 유명한 평론가이다. 심지어 일본에서는 터부에 가까운 ‘덴노’와 그와 관련된 제도에 대한 비판을 가하기도 했고, 요즘은 아베 신조 정권이 개헌을 논하고 있지만 90년대까지만 해도 일본에서 헌법에 대한 논의는 굉장히 민감한 문제였는데 거침없이 헌법에 대한 의견을 밝히기도 했고, 일본 정부의 이라크 파병에 대한 반대 재판을 일으키기도 하는 등 어떤 다른 사람에게 배려를 하거나 인사치레를 위해 입에 발린 소리를 하지 못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는 학자이다. 그런 그가, 단 두 번 만났을 뿐으로 생판 알지도 못하는 필자를 배려하기 위해 괜한 소리를 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나는 생각하고 있다. 다만 한 가지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은, 평소에도 오쓰카 에이지가 상대적으로 일본에 대해 비판적이고 (아무래도 자국이기도 하니) 타국, 특히 한국이나 중국 등 아시아권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비판을 가하지는 않는 편으로는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한국과 중국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무비판을 견지하는 것도 아니므로, 역시나 단순히 ‘일본에서 만연하고 있는 통상적인 편견’에 대해 반대하는 감정을 가진 상태에서 되도록 중립적으로 보았을 때에, < 홍길동 >이 꼭 ‘절대적인 일본 애니메이션의 영향 하’에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폴 그리모 감독의 < 사팔의 폭군 >은 1952년 작품으로 당시 이탈리아 베네치아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대상을 수상했을 만큼 높은 평가를 받은 애니메이션이다. 다만 개봉 버전은 감독의 의향에 맞지 않은 형태로 1953년에 공개되었던 것이었는데 (제작을 시작한 지 4년이 지나도 완성시키지 못하자 공동제작자가 자금 회수를 위해 억지로 개봉시켰음), 1967년 재판을 통해 폴 그리모가 권리를 되찾은 이후 자금을 10년 걸려 모아서 1980년 < 왕과 새 Le Roi et l’Oiseau >라는 제목으로 다시 개봉했다는 복잡한 뒷사정이 있다. 아무튼 구 버전인 < 사팔의 폭군 >은 일본에서 1955년 개봉되어 높은 평가를 받았고 (일본어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문부성 선정 및 우수영화감상회 추천 등을 받았다고 함), 미야자키 하야오를 비롯하여 여러 일본의 애니메이터들이 영향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사팔의 폭군>은 세기영화에서 배급을 맡아 1957년 8월 31일에 한국에서도 개봉되었고 (「동아일보」 1958년 9월 4일 자 기사), 1960년에도 8월 21일부터 재개봉된바 (「동아일보」 1960년 8월 23일 자 기사) 있다. 1950년대 한국전쟁 종전 후에 한국에서는 월트디즈니는 물론이고 워너브러더스의 애니메이션이 상영되었고, 미국 작품만이 아니라 유럽의 폴 그리모 작품도 상영되었다는 것이다. < 사팔의 폭군 > 중앙극장 개봉 광고. ‘붸니스 영화제 특별대상 및 심사위원상 수상 작품’이라고 홍보하고 있다. ‘구라파 최고의 만화영화의 시인 포-ㄹ·그리모- 제작’이라고, 유럽 감독 폴 그리모가 만들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왼쪽 하단에는 ‘세기영화 주식회사 배급’이라고 수입사가 표기되어 있다. 2. 그뿐만이 아니다. 자주 지적되지 않고 있지만 사실 한국 국내에서 처음으로 일본 애니메이션이 극장에서 상영된 것은 1963년 < 소년 사루토비 사스케 >란 작품이었다. 필자가 소유하고 있는 < 소년 사루토비 사스케 > DVD < 소년 사루토비 사스케 >는 일본에서 1959년 12월 25일에 개봉된 토에이애니메이션(당시는 토에이동화) 제작 장편 애니메이션이다. 일본에서 시네마스코프로 제작한 장편 애니메이션으로서는 첫 번째 작품인데, 토에이애니메이션 사이트의 소개를 보아도 그 당시 첫 시도였기 때문에 “제작에 엄청난 곤란을 겪었으나, 그 성과는 매우 훌륭했다”고 설명되어 있다. 실제로 1960년도 베네치아국제영화제 아동영화 부문 황금사자상(그랑프리)을 수상하기도 했다. 물론 일본 국내에서도 문부성 선정과 우수영화감상회 추천을 받았다. (< 사팔의 폭군 >과도 마찬가지) “이 작품을 통해 (일본에서) 애니메이션 영화는, 영화 산업의 일각에 안정적인 지위와 가능성을 획득한 것”이라고까지 토에이애니메이션이 자평하고 있을 만큼, 토에이 초창기의 주목할 만한 작품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 소년 사루토비 사스케 >는 1958년 개봉된 <백사전> 이후 토에이의 두 번째 장편 애니메이션이고, 몇몇 단편 애니메이션을 제외하고는 토에이가 본격적으로 제작하기 시작한 초기작이었던 것이다. 토에이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백사전>은 중국의 설화, 그것도 「서유기」나 「삼국지」처럼 아시아 전역에서 유명한 고전이 아닌 작품을 원작으로 한 케이스였다. (중국의 4대 민간설화 중 하나라서 오래전부터 한국과 일본 등에도 물론 전해져 있었지만, 그렇다고 대중적 인지도가 「삼국지」 「서유기」 「수호전」만큼 높은 것은 아니었으므로.) < 소년 사루토비 사스케 >는 일본에서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사루토비 사스케’라는 캐릭터를 이용하여 만든 작품으로, 말하자면 토에이가 중국 원작인 <백사전>을 만든 다음 소위 ‘신토불이’랄까 일본적인 것을 만들어보고자 하는 마음에 제작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때문에 이 작품에 베네치아국제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할 만큼 높은 평가를 받자, “시대극이라는 지극히 일본적인 소재였음에도 불구하고” 해외에서 평가가 높았다고 토에이 측에서도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사루토비 사스케는 소위 ‘닌자’라고 하는 일본 창작물 속의 존재를 대표하는 캐릭터인데, 원래는 일본에서 2차대전을 전후하여 유행했던 ‘강담’ 1) 등과 같은 대중소설 비슷한 장르를 통해 높은 인기를 끌었다는 배경이 있다. 그리하여 < 소년 사루토비 사스케 > 이후 토에이는 <서유기>(1960), <안주와 즈시오마루>(1961), <아라비안나이트 신드배드의 모험>(1962), <개구쟁이 왕자의 큰뱀 퇴치>(1963) 등 장편 애니메이션을 속속 개봉하면서 일본 애니메이션 산업의 중심축으로 성장해갔다. 필자가 소유하고 있는 <백사전>(왼쪽), <안주와 즈시오마루> DVD 3. 이같은 작품인 < 소년 사루토비 사스케 >가 일본에서 개봉한 지 4년 만에, 또 베네치아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한지 3년 만에 한국에서 개봉된 것은 당시로써는 상당히 빠른 수입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이것은 약간 편법을 사용한 수입이었고, 그로 인하여 아직 일본으로부터 독립한 지 오래 지나지 않았던 1963년 당시에 국내에서는 반발이 일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우선 1963년 12월 7일 「동아일보」에 왜색 영화의 서울 상영에 대해 비판하는 독자 투고가 실렸고, 12월 17일 자 같은 「동아일보」에서는 <소년 사루토비 사스케>의 사진까지 인용하여 ‘눈가리고 아웅/판치는 왜색 붐’이란 비판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에서는 <소년 사루토비 사스케>를 ‘일본 토에이(동영) 작품’이라고 명기하면서, “백 퍼센트 왜색물이라는 것과 그것이 미국을 거쳐 들어온 상품이어서 당국이 관용을 보이고 있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즉 일본 작품이라는 점을 크게 강조했던 것이다. 공보부(이후 문화부로 이어지게 되는 정부기관)에서 <소년 사루토비 사스케>만이 아니라 역시 왜색을 이유로 수입이 제한되어 있던(하지만 그 이야기는, 수입 시도를 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해병 동경에 가다> 역시도 수입 규제를 풀어주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1959년 일본 동영 제작·야부시다 감독인 <사루토비 사스케>를 MGM에서 영어로 자막을 넣어 배급(RELEASE)한 것이 틀림없는 만큼 완전히 일본 작품이다. 이렇게 된다면 일본 아닌 미국이나 이태리 등지에서 제작 또는 제공, 배급된 일본 작품은 수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위험한 결론이 되고 마는 것이다.” (「동아일보」) (※여기 표기된 ‘야부시다’란 감독 야부시타 타이지를, MGM은 미국의 영화 배급회사 MGM을 가리킨다.) < 소년 사루토비 사스케 > 「동아일보」 1963년 12월 17일 기사 이처럼 비판적인 논조이기는 하나, 이 기사를 읽고서 < 소년 사루토비 사스케 >가 일본 작품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독자는 없을 것이고, 즉 ‘일본 애니메이션이 한국에 정식 수입·개봉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는 이야기다. (나중에는 이처럼 비판론이 나오는 바람에 정부에서도 지속적으로 수입을 허가해주지는 못했던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당초에는 분명히 당국의 허가를 받아 수입이 되었다는 것을 이 기사에서 알 수 있다. 물론 ‘일본 애니메이션의 수입’이라기보다는 ‘일본 애니메이션이지만 미국 MGM이 배급을 맡았으므로’라는 이유로, 크게 검토하지 않고 단지 실무적 차원에서 수입이 이루어졌던 것 같기는 하지만) 마찬가지로 이후에도 한국의 여러 신문에서는 1970년대와 80년대에 TV 방송되는 애니메이션이 일본 작품이라는 사실을 (주로 비판하는 논조로) 자주, 또 크게 다루었고, 1990년대 이후 국내에서, 심지어 전문가나 연구자들 사이에서조차도 일컬어지는 “과거 한국에서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국적을 속인 채 한국 작품인 것처럼 방영하였다”는 말이 실은 잘못임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1980년대 MBC나 KBS의 방송국 연감을 살펴보더라도 해당 애니메이션이 일본 작품임을 (굳이 강조는 하지 않았을지언정) 감추고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아니, 이렇게까지 신문에서 대대적으로 비판 기사를 싣는데 감춰질 수도 없고, 한국이 그때 일본과 교류를 전혀 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고 신문사에 일본 특파원도 있고 사업차 일본에 드나들던 사람들도 있는 상황에서, 방송국이 그 사실을 아무도 모르게 감출 수 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인 것이다. 이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이 자리에서 다룰 수 없지만, 어쨌든 대한민국 건국 이후 최초의 일본 애니메이션 수입 및 극장 상영은 ‘일본대중문화 3차 개방안’에 의해 2000년 개봉된 < 무사 쥬베이 >(원제 <수병위인풍첩>)가 아니라 1963년 < 소년 사루토비 사스케 >(당시 개봉 제목은 <요술 소년>)이었다는 점은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4. 더불어 또 한 가지 추가하고 싶은 것은, < 소년 사루토비 사스케 >가 1963년 개봉되면서 당시 국산 애니메이션을 만들고자 했던 이들도 이 작품을 보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1960년대 당시엔 아직 한국에서 애니메이션이 지금처럼 흔한 장르가 아니었고, 월트 디즈니와 워너브러더스 작품에 환호하면서 “우리도 그런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던 초기 애니메이션 팬들에게 가까운 일본이 만들어낸 상업 장편 애니메이션을 볼 수 있는 기회는 놓칠 수 없는 것이 아니었을까. 예를 들어 필자가 앞서 2012년 일본의 평론가 오쓰카 에이지의 < 홍길동 > 관람 소감을 한국영상자료원 측에 전달하였을 때에, 2008년 복원 상영 당시 신동헌 감독이 가장 영향을 받은 작품으로는 디즈니 애니메이션과 아시아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인 중국의 < 철선공주 鐵扇公主 >(1941년 1월 1일 개봉)였음을 밝혔지만, < 소년 사루토비 사스케 >도 본 적은 있다는 식으로 말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한국영상자료원 측에서는 2012년 당시 필자에게 이렇게 밝혔다. “초당 24프레임의 풀 프레임 애니메이션을 기조로 했으면서도 부분적인 리미티드 애니메이션을 사용한 점, ‘선 녹음 후 작화’ 2) 방식을 고수한 점, 천체망원경에서 힌트를 얻어 직접 고안한 그림자의 표현 등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목표로 두고 부단히 노력하며 새롭게 고안한 것들이라고 하셨다. 여기에 클래식에 대한 남다른 지식과 애정을 바탕으로 한 음악과 움직임의 조화, 그리고 무엇보다도 작품 전반에 흐르는 ‘해학’은 오롯이 감독님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감독님은 ‘유머’가 가장 중요하다고 하셨고, 그런 감독님의 세계는 유명한 진로소주 등 CF 애니메이션에서도 이미 잘 보여지고 있다.” (한국영상자료원에서 필자에게 보낸 이메일) 필자 역시 상영 당일에 오쓰카 에이지와 이야기를 하면서 < 홍길동 >의 배경 그림이나 몇몇 부분이 ‘조선의 민화에서 볼 수 있는 호랑이나 소나무 등의 묘사’와 ‘작품에 흐르고 있는 해학’에 대해 지적한 바 있었는데, 이 같은 필자의 감상이 어긋난 방향이 아니었음을 한국영상자료원 측의 이런 설명으로부터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오쓰카 에이지 역시도, “< 홍길동 >에 관한 정보, 감사합니다. 제 안에서 여러 가지 것들이 아주 분명해질 수 있었습니다.” “역시 < 철선공주 >였군요. 그리고 디즈니. 제가 마침 지난 11월에 중국에서 <철선공주>는 디즈니의 기법으로부터 ‘로토스코프’를, 일본의 <모모타로 바다의 신병>은 ‘멀티플레인’을 채용함으로써 각각 서로 다른 스타일이 성립되었다고 강의를 했습니다. <철선공주>로부터의 영향, 디즈니 수용 형식의 차이점, 그리고 각국의 전통양식과의 관계라는 3가지 시점에서 < 홍길동 > < 철선공주 > <모모타로 바다의 신병>을 대비(對比)함으로써 동아시아 애니메이션사(史)를 그려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쓰카 에이지가 필자에게 보낸 이메일) 이처럼 아시아의 초기 애니메이션 사이의 관계와 각국 작품의 비교가 가능할 수도 있다는 모색을 시도했다. 2012년 당시 오쓰카 에이지는 혹시 < 홍길동 > 관련으로 나중에 심포지엄이나 세미나가 열린다면, 개런티를 받지 않아도 좋으니 강연이든 패널로든 참석하고 싶다고 했을 만큼, <홍길동>과 아시아 초기 애니메이션 사이의 연구에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5. 신동헌 감독은 2009년 11월 7일 일본 나고야의 아이치 예술문화센터에서 열린 ‘시네마 코리아 2009 ~한국 고전 애니메이션 특집~’에서 < 홍길동 > 상영의 게스트로 초대받아 열린 무대 인사 및 토크 이벤트에서, 참고를 하거나 의식했던 외국 작품이 있었는가 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변을 했다. “당시에는 (참고할 만한) 책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는 당시 장편 만화영화라면 디즈니 정도. 그리고 존 하라스 3) 가 만든 <동물 농장> 정도였죠.” (「시네마 코리아」 채록) 한국에서는 특히나, 1960년대에 애니메이션에 관련된 서적이 번역되거나 했을 리가 없기 때문에 결국은 직접 작품 자체를 보는 것 외에 참고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으리라 짐작된다. 일본에서도 과거에는 비슷한 상황이었으므로, 만화가 테즈카 오사무 같은 경우에도 2차대전 종전 후인 1951년 < 밤비 >(1942년 미국 개봉)가 일본에서 개봉되었을 때에 영화관에서 무려 100번 이상이나 관람한 다음 1952년에 (월트 디즈니 사의 허락 없이) <밤비>의 내용을 그대로 외워서 만든 만화 판을 출간하기도 했던 것이다. 4) < 홍길동 >도 마찬가지로, 디즈니나 다른 애니메이션 작품들이 실제로 어떻게 그러한 화면을 만들어내었는지 참고할 자료가 매우 부족한 상황에서, 작품만 보고 어렵게 제작했었을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어쨌든 당시에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중국에서도 세계 각국의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었다는 점, 또한 월트 디즈니 역시도 애니메이션이란 장르 자체를 처음으로 만든 것은 아니었으므로, 영화라는 장르와 마찬가지로 애니메이션 역시도 어느 누구 한 명의 천재가 전부를 다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수많은 이들이 조금씩 새로운 기술이나 창작을 덧씌우면서 발전되어 왔다는 점은, 이런 여러 가지 사실을 통해 분명하게 알 수 있을 듯하다. 또한, 그와 같은 애니메이션 장르 초기의 교류사(史)를 연구함으로써 당시 세계 각국에서 애니메이션이 실제로 어떤 식으로 발전해왔는지가 제대로 밝혀질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 국내의 애니메이션 사(史)에 관한 서적은 물론 일본이나 서양 쪽의 서적에도 과거에 출판된 책 중에는 그 이후 새롭게 밝혀진 사실이 반영되지 못한 경우도 있으므로, 앞으로 애니메이션 학계에서 좀 더 많은 연구와 논의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6.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지적해두고 싶은 점이 있다. 일본 토에이의 < 소년 사루토비 사스케 >가 미국 MGM 배급으로 국내 수입되는 바람에 개봉이 가능했다는 것은 앞서 밝힌 바와 같다. 그런데, 일본에서 필름이 발견된 < 홍길동 > 역시도 수출 자체는 미국 회사인 20세기폭스사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 점에도 주목하고 싶다. 신동헌 감독은 ‘시네마 코리아 2009’ 토크 이벤트에서 본인은 일본 수출에 대해 아는 바가 없고, 당시 제작회사였던 세기상사에서 진행했던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만 언급했다. 하지만 이에 관해서는 당시 신문에 기사가 실린 바 있다. ‘만화영화 홍길동 등 일본에 첫 수출’(「경향신문」 1968년 6월 12일), ‘<홍길동> <7공주> 수출’(「동아일보」 1968년 6월 13일) 등이다. 국산 만화영화 <홍길동>과 실사영화 <칠공주>를 세기상사가 미국 20세기폭스사의 일본지사에 수출했다는 내용이다. 동아일보 기사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세기상사 작품인 이 두 영화는 폭스사 영화의 한국 수입과 바터로 수출이 결정된 것이다. 폭스사는 < 홍길동 >을 일본어판으로 만들어 금년 여름에 일본 전국에 공개하며 <칠공주>는 슈퍼판으로 제작, 배급한다.” (「동아일보」)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우선 ‘바터’로 수출이 결정되었다 함은 바터무역(barter trade), 즉 특정 상품의 상호 교환을 통한 수출입거래를 말한다. 바터무역은 본래 금전 거래가 없는 물물교환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수출액과 수입액이 균형을 이루도록 하는 무역을 말한다. 즉 한국에 할리우드 영화를 팔아서 돈을 벌고 싶은 국내 영화사(세기상사)에, 외국영화만 수입해오지 말고 한국영화도 수출해야만 그에 비례하는 만큼의 외국영화를 수입해올 수 있다는 식의 조건을 내걸었다는 의미이다. 당시에는 특히나 외화벌이가 중요했던 시기이니만큼 비단 영화에서만이 아니라 다른 통상에 있어서도 바터제를 조건으로 내걸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20세기폭스사가 일본지사를 통해 미국이 아닌 일본에서 개봉을 추진했던 것을 보면, 20세기폭스 측에서는 당시의 한국영화가 미국에서보다는 일본에서 그나마 더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판단한 듯싶다. 기사에서 폭스사가 < 홍길동 >을 ‘일본어판으로 만들어’라고 한 부분은 즉 일본어 더빙을 했다는 말이다. (일본에서 발견된 <홍길동> 필름은 일본어 더빙이 되어 있는 것으로, 한국영상자료원 측에서 복원했을 때에는 한국에 남아 있던 사운드필름을 가지고 한국어 음성을 새로 덧입혔다.) 그리고 실사영화 <칠공주>는 ‘슈퍼판’으로 배급한다고 되어 있는데, 슈퍼판이란 자막판을 뜻한다. 즉 주로 아동이 보게 될 애니메이션 <홍길동>은 아이들을 위해 더빙판으로, 성인이 보게 될 실사영화는 자막판으로 제작해서 일본에 상영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어쨌든 이처럼 일본 애니메이션의 한국 수입도 한국 애니메이션의 일본 수출도 양쪽 모두 미국의 배급 업체(영화사)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점은, 필자가 평소에 1970년대 초반의 일본 TV 애니메이션 수입에 있어서도 미국 방송국의 역할이 있었던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고 있던 점과도 연관되어 주목하고 있는 부분인데, 이에 관련해서 올해 들어 일본의 애니메이션 연구자와 논의를 하면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도 있지만 이 자리에서 다 설명할 여유는 없을 것 같다. 한일 간 애니메이션 교류 역사의 일환으로써 언젠가 다른 기회에 발표할 기회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갖고 있다. 1. 강담(講談)이란 연기자가 무대 위 책상에 앉아서 관객들에게 역사나 정치에 관련된 이야기를 낭송해주는 일본의 전통 예능의 일종. 이것이 일본 메이지 시대에 속기술이 발달되면서 강담의 연기 내용을 속기해서 만든 ‘강담 속기본(講談速記本)’이란 것이 등장하여 큰 인기를 끌었고, 이 강담 속기본의 유행이 일본에서 구어체를 보급하는 데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일컬어진다. 1911년 일본의 대표적인 출판사 코단샤(講談社)가 강담 속기본의 인기를 바탕으로 잡지 「강담 구락부(강담 클럽)」를 창간하는 등 일본 출판계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일본 최대 출판사인 코단샤의 회사 이름부터가 바로 이 ‘강담’ 및 잡지 「강담 구락부」에서 따온 것이다. 이 강담 속기본에 대해서는 국내는 물론이고 일본에서도 대중적으로는 거의 알려지지 못했다. 찾아본 바로는 국내에 2013년 「최천종 살해사건을 소재로 한 실록체 소설 연구」(경희대학교 대학원 동양어문학과 안대수)라는 논문에서 특정 강담 속기본 작품을 비교 대상으로써 사용했고, 일본에서는 애니메이션 회사 스튜디오 지브리가 발행하는 소책자 잡지 「열풍」 2011년 12월호~2013년 8월호에 연재된 「잊혀진 이야기─강담 속기본의 발견」(야마시타 타이헤이) 정도가 강담 속기본에 대해 연구된 얼마 안 되는 사례인 것 같다. 강담 속기본이 ‘줄거리를 가진 대중/통속 창작물로서, 표지와 내지에 그림이 있고 캐릭터를 중시한 표현이 특징이다. 구어체로 씌어졌으며 당대와 후대의 대중문화에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다’는 측면에서 현대의 라이트노벨과 비교하는 경우도 있는 듯한데, 야마시타 타이헤이는 ‘라이트노벨과 비교할 때 표지나 삽화의 그림이 내용과 전혀 관련없는 경우도 많고, 둘 다 통속 문화로서 비평이나 연구의 대상으로 여겨지지 않았단 것은 비슷하나 그나마 라이트노벨은 인터넷 상에서나 소수의 비평가, 연구자들 사이에선 비평이나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강담 속기본은 당대에나 후대에 전혀 그런 움직임이 없었다는 점’ 등을 들어 양자의 비교에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한 바 있다. 하지만 그는 강담 속기본이 일본 근현대에 있어서 현재 알려져 있는 닌자 전설, 사무라이 전설과 그 캐릭터의 태반을 만들어내었다는 점 등 일본 대중문화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그에 따르면 강담 속기본은 일본에서 초기의 소설, 카미시바이(종이연극), 영화, 만화 등 다방면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하니 향후 일본에서도 후속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다만, 그렇다고는 해도 강담 속기본은 어디까지나 일본 대중문화의 원류 중의 하나일 뿐 그 외에도 현재의 만화나 라이트노벨 등 일본의 대중문화는 할리우드 영화, 미국이나 유럽의 SF·판타지 소설, 펄프 픽션 등 수많은 영향 위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강담 속기본만을 강조하게 되면 그것이 ‘일본 고유 문화론을 주장하고 싶은 욕망의 발현’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는 측면에서 일본의 연구자들도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것일 테고,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일본 대중문화를 연구할 때에도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이란 점은 지적해두고 싶다. 2. 프리 레코딩(prerecording; 선 녹음)이란 애니메이션 등 영상 작품에서 대사나 음악을 먼저 녹음하는 수법을 말한다. 다른 용어로는 ‘프리스코어링(prescoring)’이라 하는데, 일본에서는 제작비 절감이나 작화 스케줄 때문에 ‘애프터 레코딩’(후시 녹음)을 주로 사용하지만 미국에서는 보통 프리 레코딩으로 제작되는 경우가 많다. 3. 존 하라스(John Halas)(1912~1995년)는 헝가리의 애니메이터. 4. 테즈카 오사무는 <피노키오>도 마찬가지로 월트 디즈니에 무단으로 만화화한 다음 출간한 바 있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테즈카판 <밤비>와 <피노키오>는 2005년에야 디즈니의 허락을 얻어 복각판이 출간될 수 있었다. 테즈카 사후 만들어진 디즈니 애니메이션 < 라이언 킹 >(1994)의 내용이 테즈카의 만화(애니메이션으로도 유명한) < 정글 대제 >(한국 방영 제목 <밀림의 왕자 레오>)와 유사하지 않느냐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에, 디즈니 측에서는 <라이언 킹>은 < 밤비 >와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착상을 얻었을 뿐이라고 반박했었는데, 이에 대해 테즈카 프로덕션 측에서 “만약 테즈카 본인이 살아 있었다면, ‘내 작품이 디즈니에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면 영광이다’라고 말했을 것이다”라는 성명을 내놓는 것으로 끝낸 바 있었다. 또한 실제로 <정글 대제> 연재 도중에 <밤비>가 일본 개봉되었으며 테즈카가 <밤비>를 100번 이상이나 관람했던 만큼, 실제로도 <밤비>를 보고 감명을 받게 되면서 <정글 대제>를 당초 구상했던 내용과 다른 내용으로 만들었다고 설명했던 테즈카 본인의 문장도 남아 있다고 한다. (일본어 위키피디아 <라이언 킹>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