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경제를 밝히는 청사초롱, G20 서울 정상회의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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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오마주(homage)라는 말은 누벨바그 세대와 함께 도착했다. 그들은 파리 시네마테크에서 영화를 ‘학습’했고, 그런 다음 자신들이 경배하는 위대한 거장들의 영화에 대한 존경을 자신의 영화에 담기를 원했다.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의 첫 장면, 미셀과 그의 애인이 파리를 향해 달려가는 장면은 로셀리니의 < 이탈리아 여행 >의 첫 장면이다. 영화 장면 안에 등장한 오마주는 영화사에 시네필 세대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사건이기도 했다. 누벨바그 세대가 존경을 바쳤던 대부분의 거장들이 영화가 태어난 1895년과 거의 동시에 태어났다는 것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들은 문법을 만들었고, 개념을 발명했으며, 과학이 예술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하나의 역사, 하나의 전통, 임권택 을 시네필이라고 부르는 것은 당신에게 아마도 가장 낯설게 들리는 표현일 것이다. 우리들이 극장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영화를 보기 위해 거리를 떠돌 때 임권택은 영화를 찍으면서 길거리와 세트장에서 시간을 보냈다. 임권택은 취미에서 시작한 영화감독이 아니다. 그는 처음부터 직업감독이었다. 하지만 임권택의 1960년대 영화들에서 불규칙하지만 반복해서 마주치는 이상한 명단이 있다. 오마주를 바치는 것만 같은 영화들. 리메이크라고 하기에는 원작이 너무 희미하고, 그저 아이디어를 가져왔다고 하기에는 구태여 그럴 필요가 없는 흔적을 남겨놓은 영화들. < 남자는 안 팔려 >와 빌리 와일더의 < 뜨거운 것이 좋아 >. < 바람같은 사나이 >와 존 스타제스의 <황야의 칠형제>.(그때 임권택은 <황야의 칠형제>의 원본인 <칠인의 사무라이>를 아직 보지 못했다) < 30년만의 대결 >과 존 포드의 < 아일랜드의 연풍 >. 게다가 그 영화들과 원작을 연결시켜 질문할 때마자 망설이지 않고 대답하셨다. “그때 그 영화를 너무 재미있게 본 거에요” (<임권택, 임권택을 말하다>) 나는 그 대답을 하시는 순간의 표정에서 기쁨의 시간을 읽는다. 그 대답에서 임권택 감독님은 자신의 영화를 뒤로 밀어버리고 그 바탕에 있는 밑그림으로서의 영화, 아마도 기억 안의 원(原)텍스트라고 불러야 할 (이런 표현이 허락된다면) 기원에로 거슬러 올라갔다. 영화를 본다는 경험, 임권택은 영화를 체계적으로 ‘학습’할 수 없었다. 지구 반대편에서 누벨바그 세대는 앙드레 바쟁의 지도를 받았고, 앙리 랑그루아의 프로그램으로 고전을 보았으며, 서점에서 수많은 영화서적을 구할 수 있었다. 임권택은 첫 영화를 1962년에 찍었다. 그때까지 그는 단 한 권의 영화책도 읽을 수 없었다. 영화를 만드는 법을 배움. 배운다는 문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어떻게 배울 것인가. 학교 바깥에서 영화를 배운다는 문제. 혼자서 스스로 영화를 배운다는 문제 앞에 서야 했을 때 임권택은 (고전이 아니라) 개봉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에 갔다. 그가 좋아한 영화들, 자기가 감탄한 장면들. 하지만 제한적인 목록. 임권택은 그때 한국전쟁이 막 끝난 다음 폐허와 다름없는 서울에 있었다. 한 가지 사실을 환기시켜 주겠다. 그때 아직 남한에는 텔레비전이 도착하지 않았다. 아무도 임권택에게 영화에서의 미학적 문제에 대한 질문의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았을 때 임권택은 무엇이 영화에서 가치 있는가, 에 관한 질문을 정식화시킬 수 없었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 정반대의 자리에 있던 하이데거와 아도르노는 거의 동시에 예술에서의 진리, 라는 질문을 서로 다른 빙식으로 제기하였다. 누벨바그 세대들은 틀림없이 그들의 지도자 앙드레 바쟁이 귀도 아리스타르코와 이탈리안 네오리얼리즘은 주제인가 형식인가를 놓고 논쟁하는 것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사회적 내용과 주제에 우선하는 미학적 형식의 기준. 영화에서의 질문의 위계질서. 이 논쟁은 아마도 하나의 강령이 되었을 것이다. 지구 반대편에서 임권택은 새로운 영화의 시작과 어떤 관계도 맺을 수 없었다. 그 안에 들어왔지만 수수께끼와 같은 질서들. 쇼트의 접속. 왜 어느 순간에는 기적 같은 경험을 안겨주는데 어느 자리에서는 작동하지 않는 것일까. 이 문제가 단순하게 시나리오나 대사, 연기의 결함이나 부족에서 멈추지 않고 영화의 내재적 시청각 기호들의 오작동으로 귀결될 때 이 예술은 세계의 무질서에 대해 항상 자기의 질서, 세계와의 사이에서 가져보는 자기의 규칙, 세계와 영화를 연결하는 순간 사이의 연결의 미학에로 이어지는 질문에 이끌렸을 것이다. 임권택의 질문. 그때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을 찾았다. 왜 어떤 영화는 나를 즐겁게 만들고 어떤 영화는 그렇지 않은가. 그 즐거움은 무엇인가. 즐거움의 즐거움, 즐거움의 정체. 정체의 이면. 이면의 질서. 질서의 규칙들, 그 즐거움은 어떻게 이루어져있는가. 심지어 임권택은 그런 영화중의 한 편을 프린트를 구해서 그 즐거움의 순간을 프레임 단위로 들여다보았다. 그때는 영화를 손 안에 넣을 기회가 없었다. 다시 말하지만 아직 텔레비전이 도착하지 않았다. 아마도 편집실에서 릴을 걸어놓고 보았을 것이다. 그런 영화중의 한 편이 조지 스티븐스의 웨스턴 <세인>이었다. 임권택은 이 영화에서 맛 본 즐거움의 체험을 몇 번이고 말했다. 1956년 11월 2일에 서울에 개봉한 영화. (그때는 대도시에 먼저 개봉한 다음 프린트가 지방 소도시로 배급되었다) 임권택이 정창화 의 연출부를 할 때였다. 1953년 파라마운트가 테크니컬러로 제작한 < 셰인 >은 웨스턴의 영화사에서 < 하이 눈 >과 함께 고전 웨스턴의 시대를 끝내고 이 장르를 변덕스럽게 만들었다. 누군가는 <셰인>에게 찬사를 바쳤고(미국 영화연구소(American Film Institute)는 웨스턴사상 베스트 10에 선정했다) 누군가는 이 영화에 탄식을 했다. 앙드레 바쟁은 이 영화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그는 <셰인>을 ‘쉬르 웨스턴(Sur-western, 이 정의를 휴 그레이는 영어로 옮기면서 ‘Super western’이라고 번역했다. 하지만 이 번역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박상규는 이 표현을 ‘초(超)웨스턴’으로 옮겼다. 쉬르레알리슴(超現實主義)에서 가져온 접두어일 텐데 또 다른 오해의 여지가 있다. 여기서는 ‘발음’으로 옮겼다)’이라고 불렀다. 바쟁은 이차 세계대전 이후에 나타난 ‘쉬르 웨스턴’들은 고전 웨스턴들과 달리 자신이 웨스턴이라는 사실을 부끄럽게 생각하면서 이 장르 바깥에서, 이를테면 사회적이거나 도덕적인, 그리고 심리적이거나 정치적인, 혹은 다른 미학적이거나 에로틱한 무언가. 말하자면 이 장르 바깥으로부터 무언가를 가져와 자신의 수치를 정당화시키고 풍요롭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라고 공격하였다. (‘웨스턴의 진화’) 여기서는 <셰인>을 공격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반대로 바쟁은 <셰인>을 공격하면서 역설적으로 이 영화의 매혹에 대해서 어떤 찬사의 글보다 훌륭하게 요약하고 있다. 먼저 간단한 줄거리를 소개해야 할 것 같다. <셰인>은 1889년 존슨 카운티 전쟁, 혹은 와이오밍 평원 전쟁으로 알려진 개척민과 토지 소유주들 사이에서 벌어진 유혈참극에서 느슨하게 가져온 이야기이다. <셰인>보다 본격적으로 이 소재를 다룬 영화는 마이클 치미노의 < 천국의 문 >이다. 가난한 개척민 마을에 허름한 차림에 점잖고 예의바른 총잡이 한명이 찾아든다. 셰인이라는 이름의 남자. 아무도 이 사람을 알지 못하고 그 자신도 과거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이 낯선 남자에게 호의를 베푸는 사람은 이 마을의 조 스타렛이다 그는 가난하지만 정숙한 아내 마리안과 어린 아들 조이와 함께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있다. 이 마을의 걱정은 토지 소유주 라이커와 그 일당이 계속해서 이들이 힘들게 개척한 땅에서 쫓아내려는 것이다. 라이커와 그의 일당이 폭력을 행사할 때 과묵하고 조용한 셰인은 숨겨져 있던 그의 솜씨를 보여준다. 조이는 그 모습을 보고 셰인을 영웅처럼 존경하고 조의 아내 마리안도 자신도 모르게 이 남자에게 이끌린다. 그걸 셰인도 알지만 모른 척 한다. 라이커는 개척민들을 몰아내기 위해 쌍권총 총잡이 잭 윌슨을 고용한다. 검은 옷을 입은 이 사내는 도착하자마자 순식간에 마을 사람들을 해치운다. 라이커는 조 스타렛에게 대결을 하자고 제안하지만 셰인이 대신 그 자리에 간다. 그리고 순식간에 총을 뽑아 잭 윌슨과 라이커를 해치운다. 셰인은 거기까지 쫓아온 조이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와이오밍 평원 저편으로 떠난다. 어린 소년 조이가 멀어져가는 셰인을 향해 영화사상 가장 유명한 대사 중의 하나를 외친다. “돌아와요, 셰인” 평원의 메아리. 바쟁은 <셰인>이 신화 그 자체라고 설명한다. (바쟁에게 웨스턴은 비극의 윤리학이었다) 이 영화에서 셰인은 성배를 찾는 (아서왕의 원탁의 기사 중의 한명인) 것처럼 보이며, 게다가 그가 누구인지 아무도 알 수 없으며 그저 신비로운 복장을 하고 있을 뿐이라고 비웃듯이 말한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셰인>을 매혹적으로 만든다는 사실을 놓쳤다. 신화와 비극의 거리. 신비로운 주인공. 나는 거기에 이 주인공의 특징을 한 가지 더하고 싶다. 아무런 목표가 없는 주인공. 바쟁의 표현을 빌린다면 불가능한 목표에 이르기 위한 무한정한 방랑. 대지를 떠돌아야 하는 ‘나그네’(‘Wanderer’는 '산책자‘가 아니다)의 멜랑코리. 그래서 이 주인공은 무엇보다 우울하다. 이 우울한 주인공은 목표가 없기 때문에 종종 우유부단하게 보인다. 그 우울한 우유부단이 보는 쪽을 매혹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안고 있는 슬픔. 왜 세계는 나를 받아들이지 않을까, 라고 자기 스스로에게 부여한 고난의 슬픔에 머물 때, 거기서 발생하는 세계와 나 사이의 불화. 그 불화하는 세계가 역사에 기대어 있을 때 그 역사의 무게 아래에 눌려 찌그러지지 않기 위해 거기서 물러났을 때, 그래서 그 불화에 들어서지 않기 위해 그 입구를 스스로 차단했을 때, 나는 역사의 시간 안에서 삭제되는 것이다. 그때 경험하는 우울한 우유부단은 세상 안에 있으면서 역사 바깥에 놓여있는 자리, 이것도 아니면서 저것도 아닌 (아감벤이 쓰는 표현을 빌리면) 시시한 자리에 가는 행위의 제스처이다. 임권택에게 <셰인>과 (펠리니의) <길>은 보는 쪽의 자리에서만 말하는 것을 허락한다면 같은 영화이다. 어쩌면 둘 중 한 쪽, <셰인>과 < 풍운의 검객 > 중 어느 한 편만을 보았다면, 그래서 다른 한 쪽을 줄거리만으로 알고 있다면 다른 한 편이 잘 떠오르지 않을 만큼 두 편의 영화는 멀리서 쳐다보는 서사가 아니라 그 안에서 들여다보는 장면의 디테일에서 서로 겹친다. 한 가지 사실을 더 덧붙여야 할 것 같다. 임권택은 처음부터 조선시대 사극을 자신의 영화적 무대로 삼았다. 이미 세 번째 영화 < 망부석 >에서 사도세자와 그의 아내 혜경궁 홍씨, 그리고 정조의 이야기를 궁궐 안을 무대로 실타래처럼 얽은 이야기를 풀어헤치고 묶으면서 고유한 유형의 매듭으로 고유한 장소를 만들어냈다. 분명히 임권택은 조선시대 사극의 대가인 신상옥 으로부터 어떤 영향도 받지 않았다. 이렇게 말하면 임권택은 늘 겸손하게 그건 내가 연출부를 했던 정창화 감독님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라고 대답했지만 (그리고 그건 부분적으로 사실이다) 그러나 그 안에서 모든 인물들을 감싸 안는 정념의 연쇄고리들은 전적으로 임권택의 것이다. 하지만 <풍운의 검객>은 이상하게도 <망부석> 혹은 < 십년세도 >에서 보여주었던 조선시대 사극의 사료적 근거가 반사하는 것만 같은 장소의 질서, 인물들 사이의 위계질서. 질서가 빚어내는 운명, 그 안에서의 복종과 같은 역사와 서사 사이의 유사성이라고 할 수 있는 그 둘 사이의 친화성이 희미해졌다. 그 유사성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여기서 조선시대는 기괴할 정도로 우스꽝스러워졌고 그 대신 거의 절대적이었던 질서의 체제, 그래서 숨 막힐 것처럼 촘촘하게 그 곁에 연이어 이어 붙여놓았던 제도의 고유한 거리들의 일부가 사러지거나 거의 작동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 대신 여기에 들어선 것은 조선시대 바깥에서 온 것 같은 인물의 등장이다. 이따금 전시하는 거의 불합리한 것처럼 보이는 무술. 왜 여기에 왔는지 설명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영화 안에서도 설명하지 않)는 인물. 길을 잃지 않기 위한 가이드로서의 줄거리. 하지만 <풍운의 검객>은 줄거리의 독후감과 영화를 보고 난 다음의 감상의 디테일 사이의 간극이 이상할 정도로 큰 영화라는 걸 염두에 두고 읽어주기 바란다.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는 조선시대. 왕은 병석에 누워있고 간신들이 날뛰고 있는 시절. 왕을 측근에서 모시는 최괄은 희빈 문소이와 함께 왕이 별세하면 문소이가 낳은 아들 달지를 왕위에 옹립하기 위해 자객들을 보내서 왕자들을 차례로 제거한다. 어느 날 밤 어린 왕자를 해하려는 순간 복면을 쓴 검객이 나타나 그들을 물리친다. 그 무렵 한양 주막가에 자신을 방갓이라 칭하는 나그네가 한 명 나타나 뛰어난 무술 솜씨를 보여준다. 그의 무술을 높이 평가한 달지는 그를 자신의 수하에 둔다. 그런 방갓을 보고 달지가 관심을 기울이는 기생 연화가 연모하는 마음을 품는다. 방갓은 최괄의 집에 매달린 초롱에 화재를 일으킨 다음 몰래 빠져나가 옥에 갇힌 영의정 김종성의 딸 난실을 구한다. 그때 우연히 그걸 달지의 집을 방문한 연화가 보게 된다. 난실은 자신을 구해준 방갓에게 감사의 뜻으로 자신의 노리개를 건네주면서 연모하는 마음을 품는다. (기이한 우연과 사건이 겹친 다음) 달지는 방갓이 자신을 방해하려는 목적을 지녔음을 알고 그를 제거하려고 한다. 최괄은 방갓이 무술이 뛰어남을 알고 또 다른 무술의 고수인 백운선생을 부른다. 한편 연화는 방갓이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고 난실에게 끌린다고 오해하고 그가 난실과 은거하고 있는 산 속의 암자를 달지에게 알려준다. 달지와 그의 부하들, 그리고 백운선생이 방갓을 찾아냈을 때 알게 되는 것은 방갓이 백운선생의 제자라는 사실이다. 백운선생은 방갓이 살생을 일삼는 악행을 저지르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 자리에서 꾸짖는다. 스승의 부름 앞에 제자는 저항하지 않고 항복한 다음 감옥에서 고문을 당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오해였음을 연화가 백운선생에게 알리고, 백운선생은 감옥에 갇힌 방갓을 구한다. 백운선생은 상소문을 올려 최괄과 문소이가 역적모의를 했음을 알리고 다시 떠나지만 달지에게 죽음을 당한다. 방갓은 모든 일이 마무리되었다고 여기고 연화와 난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떠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을 막아선 달지를 물리친다. 처음부터 끝까지 방갓을 지켜보던 소년은 떠나가는 방갓의 등 뒤에서 큰 소리로 부른다. “아저씨” 하지만 그 소리는 바람소리에 묻힌다. 방갓은 뒤돌아보지 않고 떠난다. 분명히 <풍운의 검객>은 <망부석> 혹은 <십년세도>로부터 멀어졌다. 아쉽게도 나는 그 사이에 놓인 < 영화마마 >, < 왕과 상노 >, < 닐니리 >, < 청사초롱 >을 (네가 프린트가 사라져서) 보지 못했다. 네 편의 영화. 나는 그 영화들을 건너뛰면서 상상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사이에서 단절이라고 할 만한 정도의 태도를 발견하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설명해도 <풍운의 검객>은 조선시대에 머물고 있다. 장르로서 반복 안의 차이. 그리고 디테일에서의 차이 안의 반복. 그 안에서 일부 인물들은 그들 자신이 놓여있는 시대에 복종하고 있지만 일부 인물들은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를 부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때 이 부정은 저항이 아니라 억압된 것을 인정하는 방식일 뿐만 아니라 그 과정의 어떤 결과가 자유를 얻게 된다, 라는 프로이트의 설명을 고스란히 따라 가보고 싶게 만든다. 나는 여기서 앙드레 바쟁의 웨스턴에 대한 견해를 뒤집어 다시 세우고 싶다. 왜 그럴 필요가 있는가. 바쟁은 쉬르-웨스턴의 영화들을 공격하면서 이 영화들이 자기가 놓여진 시대로부터, 좀 더 구체적으로 냉전시대의 매카시 ‘레드 페이퍼’를 알리바이로 삼는 것으로부터 이 장르를 구해내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나는 충분히 동의할 수 있다. 과도하게 뒤집어 쓴 알리바이. 하지만 영화가 자기의 책임, 모순, 법적인 제도, 복잡한 층위에서 요구하는 정치적인 상황, 경제적인 관계, 그 안에서 하나의 통일을 부여하려는 예술의 전투 혹은 타협, 그 전투 혹은 타협의 주관적인 결정과 객관적인 한계, 그 모든 것의 결정으로서의 역사를 형식의 일시적인 진공상태로 정지시키는 것에 대해서 나는 동의할 수 없다. 제 자리로 돌아간 영화. 나는 재빨리 원래의 자리에 돌아오고 싶다. <풍운의 검객> 안의 새로운 인물들, 가까스로 세워놓은 배경을 어지럽히는 행동들, 이 행동이 만들어내는 사건. 그것들은 임권택이 이제까지 복종했던 조선시대 사극에 대한 하나의 시험이다. 어떤 시험? 임권택에게 할리우드 영화들, 그 중에서도 웨스턴 영화들, 그 중에서도 (바쟁의 분류에 따르면) 쉬르-웨스턴들은 이상적인 유토피아 모델이었을 것이다. 조선시대의 사극 모델 안에서 웨스턴 영화를, 쉬르-웨스턴을, <셰인>을 진행해볼 수는 없는 것일까, 라는 하나의 시험. 그 둘은 겹쳐놓아도 괜찮은 것일까. 그 둘은 서로 공존 가능한 것일까. 그 둘은 분명히 다르지만 그러나 어딘가에서 닮은 것을 찾아낼 수는 없을까. 모방은 탐색이다. 무엇에 대한? 유사한 기호들. 그걸 찾아내기만 하면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텐데, 라는 시험. 하지만 이건 위험한 시험이다. 왜냐하면 서로 완전히 다른 배경의 무대는 그것이 작동되기 시작할 때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때려 부술 지도 모른다. 이 폭력적인 접근의 교집합. 이때 교집합의 자리에 놓인 주인공은 이유 없는 자신의 고난 앞에서 아무 것도 결정을 내릴 수 없기 때문에 우유부단해지고 그 공허한 행위 속에서 슬픔을 느끼게 될 것이다. 여러 관점에서 다시 정의내릴 수 있는 <풍운의 검객>은 이 수수께끼의 검객 방갓을 주인공으로 한 영웅담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개연성을 놓고 질문을 하면 의문이 떠오른다. 방갓은 왜 한양 한 복판에 나타난 것일까. 그는 왜 어린 왕자와 옥에 갇힌 난실을 구하는 것일까. 왕자도, 난실도 그가 누군지 모른다. 그는 왜 목숨을 걸고 최괄과 희빈 문소이의 음모를 방해하는 것일까. 그 이유가 시나리오에는 있다. 방갓은 수문장 손호관의 아들 손용운으로 그의 가족이 최괄에게 억울한 죽음을 당했고 어린 나이에 혼자 살아남은 다음 복수를 하기 위해 돌아왔다. 방갓의 모든 행위를 이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영화로 옮기면서 방갓의 사연, 차라리 손용운이라는 인물 자체를 삭제시켜 버렸다. 우리는 끝까지 방갓의 사연을 알지 못한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추론은 그 스스로 내내 쓰고 다니면서 자신을 ‘방갓’이라고 부르는 모자를 통해 희미하게 추론할 수 있을 뿐이다. 삿갓과 달리 방갓은 부모의 상(喪)을 당한 상제가 외출을 할 때 쓰는 모자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누구도 방갓에게 부모의 상을 당한 슬픔에 대해서 위로하거나 질문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모자는 내용 없는 기호로 그와 함께 내내 머문다. <풍운의 검객>에는 대사가 없는 많은 등장인물들이 나온다. 이를테면 최괄의 하인들, 달지의 부하들. 장안의 오가는 백성들. 하지만 방갓을 쓴 사람은 방갓뿐이다. 그럼으로써 방갓은 그 모두로부터 방갓을 분리해내는 기호이기도 하다. 주인공의 두 번째 특별한 점. 방갓은 자기 스스로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애쓴다. 그 약속은 살생을 저지르지 않는 것이다. 물론 살인에 대해서는 불교, 유교, 그리고 기독교, 같은 종교에서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에도 법으로 엄격히 금지되었다. 여기서 방갓이 살인을 저지르지 않는 것은 상대방이 자신에게 살인의 위협을 가하는 경우에도 그를 물리치거나 무력화시킬 뿐 거기서 멈추는 그 자신과의 약속에 있다. 그 약속이 스승 백운도사와의 요구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한참 뒤에 방갓을 에워싼 달지의 수많은 부하들의 칼과 맞서야 할 때, 그래서 그들을 물리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칼등 대신 칼날을 휘둘러야 했을 때, 그때 그 자리에 나타난 백운도사의 입을 통해서이다. 이 약속은 무얼 말하는 것일까. 영웅의 조건. 단지 뛰어난 무술과 빼어난 지략만으로는 만족스럽지 않다. 그래서 방갓에게 선과 덕을 요구한다고 말하면 그건 요점을 놓친 것이다. 영웅이 영웅이 되는 순간은 그가 시련이라는 시험을 통과하고 그것을 이겨내는 과정이다. 임권택은 이 과정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음에 틀림없다. 그의 주인공들은 종종 이 시련을 통과해야 했으며, 이 과정에서 신체의 일부를 상실하거나 부서졌다. 그 시련은 점점 혹독해졌으며 임권택의 ‘다찌마와리’ 액션 장르영화 시기에는 잔혹함을 넘어서서 (상황에서) 기괴하고 (감정적으로) 굴욕적이며 차라리 거기서 멈춰 서서 그 과정 자체에서 어떤 기쁨을 누리는 것만 같은 도착으로까지 밀고 나아갔다. 임권택의 영화에서 이 과정은 완전히 사라진 적이 없다. 심지어 1970년대 새마을 영화에서도 주인공들은 운동의 지도자로 거듭 나기 위해서 이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과해야만 한다. 아마도 이 과정의 가장 복잡하고 기이한 정식화는 이청준의 원작 소설을 빌려 한(恨)을 품어야만 더 높은 예술의 경지에 이룰 수 있다는 판소리 예술가들에 관한 두 편의 영화 < 서편제 >와 < 천년학 >일 것이다. 나는 이미 반복해서 이 문제를 다루었다. 그리고 이 질문 앞으로 되돌아와서 다시 밀고 나아갈 것이다. <풍운의 검객>에서 임권택은 이 질문을 아직 정식화시키지 않았다. 대신 주인공이 고난의 과정을 통해서 조선시대 안에 어떤 틈을 만들어내고 있다. 차라리 주인공을 조선시대로부터 소외시키면서 장르와의 사이를 분리시키기 시작했다고나 할까. 그때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주인공 방갓이 고난의 과정을 통과하고 영웅이 되면서 그 자신에게 충만하면 할수록 조선시대는 점점 공허해진다는 것이다. <풍운의 검객>은 (바쟁의 정리에 의지해서 말하자면) <셰인>이 웨스턴에서 한 것을 조선시대에 대해서 하고 있는 중이다. 임권택은 자기가 시작했던 무대를 자기의 방법으로 부정하는 중이다. 방갓은 이 공허한 무대에서 점점 생기를 잃어가는 기호들 사이를 오가면서 자기의 모든 것을 내걸고 무언가를 한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그걸 왜 하는 지 끝내 알지 못한다. 무언가, 라는 행위와 왜, 라는 이유, 사이의 간극에서 방갓은 영웅의 시련을 성공적으로 통과하지만 그 시련의 대가는 그에게 무의미한 조선시대로부터 거의 우주적인 텅 빈 영화 바깥의 세계에로 어떤 선택의 여지없이 다시 떠나야한다는 운명적인 결론이다. 그때 이 우주는 어둠 속으로 무엇이든지 집어삼켜버린 다음 소멸시켜버리는 심연에 다름 아니다. 임권택은 영웅적인 죽음대신 차라리 여기서 영웅적인 소멸을 선택한다. 죽음과 소멸 사이의 간극. 이 절망적인 매혹, 나는 아무 것도 세상에 남기지 않고 사라버리고 싶습니다. 세상이 내게 부여한 임무가 무엇인지는 알겠지만 그걸 왜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기호의 밤. <풍운의 검객>에서 영웅적인 과정은 사실상 소멸 앞에서의 잠시 동안의 머뭇거림이다. 하지만 세 번째 특별한 점에 비교하면 두 번째 특징은 아무 것도 아니다. <셰인>에서 셰인은 마리안이 그에게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마리안과의 로맨스를 외면한다. 왜냐하면 그에게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으면서 호의를 베풀어준 그녀의 남편 조 스타렛과의 우정 때문이다. 물론 마리안도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지 않는다. 단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제스처를 노출시킬 뿐이다. 좀 더 복잡한 설명도 있다. 셰인은 이 마을에 머물 생각이 없기 때문에. 단지 이 마을뿐만 아니라 어떤 공동체에도 머물 생각이 없기 때문에 마리안이 아닌 누구와의 로맨스도 거절했을 것이다, 라는 가설이다. 왜 웨스턴의 주인공이 광야(wildness)에서 공동체에 왔다가 다시 광야로 떠나가는지에 관한 긴 이론이 있다. 하지만 그 이론은 우리의 논점과 아무 상관이 없다. 단지 세 번 밖에 총을 뽑지 않는 <셰인>은 셰인과 마리안과의 감정적 긴장에 훨씬 많은 시간을 보낸다는 점에서 웨스턴이라기보다는 로맨스 멜로드라마에 더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풍운의 검객>도 로맨스에 더 가까운 (일종의) 기사도 서사이다. 처음에는 방갓이 달지의 아흔 아홉 칸 대궐 같은 저택에서 벌이는 신출귀몰하는 지략과 음모의 모험극처럼 시작하지만 이 서사 안으로 연화와 난실이 들어오자 갑자기 두 여자가 방갓에게 보내는 정념의 로맨스로 바뀐다. 연화는 방갓을 보자마자 그가 이 서사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달지가 그녀에게 보내는 관심을 외면한다. 난실은 방갓이 그녀를 옥에서 구하자마자 처음 보는 그에게 자신이 품고 있던 노리개를 건네주면서 (연인들 사이에 나누는) 정표로 삼아달라고 부탁한다. 그런데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방갓을 사이에 두고 난실과 연화는 사랑, 질투, 분노, 원망, 하여튼 그녀들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서로 경쟁적인 로맨스의 감정을 조금도 숨길 생각 없이 드러내놓고 신호를 보낸다. 이때 방갓은 둘 사이의 선택에서 어떤 고민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둘 중 누구도 선택할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방갓은 그녀들에게 예의를 갖추어 둘 사이에 균형을 맞추면서 항상 친절한 태도로 대하지만 어떤 장면에서도 로맨스의 신호에 응답하지 않는다. 그는 둘 중 누군가에게 실망을 시킬까 두려워 거짓 거절을 하는 것도 아니다. 사랑을 거절하는 척 하는 사랑. 우리들이 로맨스 소설에서 이미 읽은 냉담한 실패를 목표로 한 사랑의 거짓 제스처. 거절을 통해서 진정한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의 변주들). 방갓이 이 로맨스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서사 안에서 설명되지 않는다. 서사 바깥에서 누군가 (이를테면 집에서 기다리는 그의 아내) 방갓을 기다리는 것도 아니며. (그래서 어딘가를 가야하는 도중에 벌어진 일에 말려든 것이 아니며) 거기에 또 다른 계산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알고 보니 이 일은 왕의 명령으로 이루어진 임무였다, 라는 이중 플롯) 아무 것도 숨기지 않은 두 여자의 속마음. 무조건적인 정념. 오히려 삼각관계에 놓여있는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일관되고 단조롭게 설명할 수 없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진행되는 방갓의 거절은 오히려 기괴해 보이기까지 한다. 여기서 누구도 선택하지 않는 것도 선택이라는 걸 먼저 계산에 포함시켜야 한다. 이때 어떤 로맨스도 받아들이지 않는 방갓의 선택은 그의 적들에게 살생을 저지르지 않는다는 약속과 결합하면서 그가 ‘나그네’라기보다는 불가에 입문한 승려처럼 보이게 만든다. 하지만 우리는 <풍운의 검객>에서 불교의 어떤 기호도 발견할 수 없으며, 또한 그런 가르침을 내린 방갓의 스승 백운도사도 스님이 아니다. 이때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것은 두 여자, 난실과 연화의 대조적인 사회적 신분이다. <풍운의 검객>의 무대가 조선시대라는 것을 환기시키겠다. 난실은 영의정 김종성의 무남독녀 영애이다. 조선시대에 시기별로 그 지위가 변하였으나 (<풍운의 검객>은 정확한 연대를 표기하지 않았다) 한때 의정부 최고의 자리였으며 그 아래 좌의정과 우의정을 두고 조선의 국사를 결정하던 자리. 그 지위의 근대적인 번역은 갑오개혁에 이르러 고종의 명에 따라 영의정을 총리대신으로 호칭을 바꾸었다. 봉건제 왕권국가에서 임금 바로 아래의 관직.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의 딸. 연화는 그녀가 아무리 호사스러운 장안의 기방(妓房) 여주인이라 할지라도 유교를 기반으로 한 사회에서 기생의 신분이다. 우리는 ‘춘향전’에서 서예와 가무에 능한 성춘향은 어머니가 기생이지만 그녀는 엄연히 기방에 등록하지 않은 여염집 규수인데도 기생의 딸이라는 이유로 남원 사또 변학도에게 술시중을 들지 않는다고 불려가 고초를 당하는 이야기를 알고 있다. 방갓이 두 여자 사이에서 선택하지 않는 선택은 그 둘이 반대의 자리가 아니라 비대칭의 위치에 있다. 여기서 조선시대는 임권택의 영화 안으로 이상한 우회를 거쳐 회귀한다. 내면화된 조선. 오른 쪽에는 난실이 있다. 영의정 김종성의 가문이 지금은 최괄과 희빈 문송이의 음모로 화(禍)를 당하고 난실이 한양 바깥으로 쫓겨나 그녀의 몸종처럼 데리고 다니는 어린 소년과 지내고 있지만 그 음모를 밝히고 가문의 명예를 되찾으면 난실은 다시 명문가의 자리에로 되돌아갈 것이다. 지금 바로 그것을 하기 위해 방갓은 이렇게 애를 쓰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게 <풍운의 검객> 서사의 전부이다. 이때 이 서사의 무대로서의 역사는 감정의 세계가 아니라 왕조차 복종해야하는 질서에 지배받고 있는 국가이다. 무대는 배경에서 멈추지 않고 그 서사의 토대라는 더도 덜도 아닌 근거의 지평을 인정해야 한다. 영화가 끝난 다음, 그러니까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난 다음의 첫 번째 장면을 떠올려보자. 지금 한양 바깥 산속 암자에서 지내는 처지이지만 난실이 다시 복권하고 원래의 자리에 갔을 때 방갓이 있어야 할 자리는 없다. 난실은 지금이 예외의 상태이지만 방갓에게 원래의 자리라는 것은 없다. 나그네의 자리. 일시적인 잉여의 위치. 조선시대는 신분사회였고, 양반은 사회의 기득권을 소유하고 있는 계층이었으며 그들을 천민들과 분리하였다. 난실은 그 중에서도 최고위층의 사대부 집안, (한 번 더) 그 중에서도 영의정의 자식이다. 난실이 방갓을 허락한다 할지라도 그녀의 (어쩌면 남아있는) 가족, 가족의 친척들, 그녀가 되돌아온 사대부, 그들을 둘러싼 선비들, 그 모두를 구성하는 신분사회인 조선은 방갓이 그들 사회에 진입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을 것이다. 조선시대에 관한 사극영화의 멜로드라마 서사들. 양반집 따님, 혹은 남편을 잃은 과부가 하인과 사랑에 빠졌다가 맞이하는 비극에 관한 이야기들. <풍운의 검객>은 방갓이 난실의 로맨스 제안을 받아들이면 마지막 장면 디음 장면은 정확하게 조선시대를 무대로 한 멜로드라마 영화를 반복하는 비극의 첫 장면이 될 것이다. 이번에는 왼 쪽을 볼 차례이다. 이때 연화는 난실의 반대의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둘은 옆이 아니라 위와 아래의 자리에 완강하게, 거의 불변의 위치에서, 사회적 조건 아래, 고정된 상태로 머물 것이다. 조선시대에 기생은 신분 중에서도 가장 낮은 천민에 해당했다. 물론 기생들 사이에서도 다섯으로 나뉜 등급이 있었으며 그 중에서 으뜸인 일패기생(一牌妓生)은 임금 앞에서만 술을 따르고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아마도 달지를 상대하는 연화는 문무백관만을 상대하는 이패기생(二牌妓生)이었을 것이며, 이패기생 중에는 가무와 서예로 한양 장안에서도 그 명성이 드높은 이들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신분이 상승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조선은 유교의 원리가 가치였던 사회였다. 남녀유별, 남녀칠세부동석, 의 가치아래 남자들 앞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술을 권하는 여자들은 유교라는 텍스트를 난잡하게 만들고 올바른 도덕적 삶에 대한 타락의 사례가 되었다. 도덕은 유교에서 명령이다. 나는 똑같은 가정을 한 번 더 해보고 싶다. 방갓은 난실대신 연화를 선택할 기회가 있었다. 이상한 장면. 방갓은 난실의 노리개를 찾는다는 명분으로 연화의 기방을 찾는다. (그런데 이게 위험을 무릅쓸만한 일인가) 연화는 그때 자기를 보고 싶어 찾아온 것으로 오해하고 방갓에게 안겨 자기의 속마음을 고백한다. 이때 방갓은 매장하게도 난실의 노리개를 찾으러 왔다고 말한다. 이 장면에서 방갓의 태도에 관한 질문, 이 방문을 통해서 방갓은 무엇을 얻으려는 것일까. 표면적인 진정한 목표는 (이 이중적인 표현을 주의 깊게 읽어주기 바란다) 노리개가 아니라 연화를 실망시킴으로써 그녀를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다. 반론. 가장 단순하게 그 행위가 다른 남은 선택인 난실을 위한 것이라면, 혹은 반대로 연화를 실망시킴으로써 자신에 대한 감정을 바꿔놓기 위해서라면, 어느 쪽을 향하건 사랑의 퍼포먼스가 될 것이다. 하지만 방갓은 어느 쪽도 선택할 생각이 없다. 그렇다면 이 공허한 방문은 무엇을 보여주기 위한 것인가. 이때 방갓을 둘로 찢어서 생각해볼 수는 없는 것일까. 방갓은 자시니 난실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현실적인 연화에게도 향한다. 방갓은 정말 연화를 받아들일 마음으로 자신의 진정한 상대는 연화라는 대상에게 일시적인 판단을 했을 수 있다. 그래서 난실의 노리개는 핑계이며 연화와의 시간을 갖기 위해 여기에 왔(을 수 있)다. 그런데 마치 방갓의 속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연화는 흠모하는 자기 마음을 고백한다. 만일 그런 마음으로 여기에 왔다면 방갓은 왜 그 고백을 거절하는가. 여기에 도착하는 전까지 방갓에게 연화는 어떤 대상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도착하여 고백을 듣는 순간 어떤 대상이 연화가 되는 것이다. 이 둘의 차이는 서로 완전히 다른 자리라는 것이다. 도착하기 전까지 연화는 대상이긴 하지만 방갓이 알 수 없는 어떤 존재였다. 그러므로 연화는 방갓에게 무한한 선택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었다. 그런데 도착하자마자 연화가 자신을 방갓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연인이라는 대상으로 고정시키는 순간 연화는 즉시 단순하게 사랑의 감정에 고정된 존재로 축소된다. 그러므로 질문은 단순해진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은 나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 왜 여기서 질문은 당신은 나를 사랑합니까, 가 아니라 당신은 나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 라고 옮겨진 것일까. 로맨스 서사의 무대가 조선시대이기 때문이다. 이 질문을 다시 번역하면 당신은 기생인 나를, 천민인 나를, 유교의 가치 아래 세상 사람들이 경멸하는 나를, 그런 나의 연인이 될 수 있겠습니까, 로 옮겨질 수 있다. 방갓이 거절하는 것은 연화가 아니라 연화가 놓인 사회적 위치이다. 당신은 반문할 것이다. 나그네인 방갓이 그걸 거절할만한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건 지금 당신이 이 선택의 남은 절반을 잠깐 잊은 것이다. 신분사회의 로맨스. 난실과의 일시적지만 이 맹목적인 로맨스는 방갓을 상상할 수 있는 (하지만 임금을 제외한) 가장 높은 지위에 올려놓는다. 방갓은 영의정 김종성의 딸 난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대상이다. 그러므로 방갓은 두 개의 선택 사이에서 (셰인과는 완전히 다르지만 그 태도에서는 별 차이 없이) 우유부단해진다. 어떤 우유부단? 난실의 사랑을 받을 때 방갓은 그 사랑의 대상의 자리에 갈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뒤로 물러나고, 연화의 사랑을 받을 때 방갓은 자신이 난실의 사랑을 받는 자리로부터 내려갈 생각이 없기 때문에 뒤로 물러난다. 이때 이 두 개의 뒤로 물러남이 비대칭의 이유라는 것을 보아야 한다. 방갓이 어떤 계산도 없이 로맨스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것은 요점을 놓친 것이다. 방갓은 조선시대 안에서 계산하고 있다. 그리고 이 계산의 비대칭이 방갓을 우유부단한 슬픔에 빠지게 만든다. 이것이 방갓의 선택할 수 없는 것과 선택하지 않는 것 사이의 선택이다. 그러므로 선택 이후의 선택은 방갓이 조선시대로부터 완전히 물러나는 것이다. 임권택은 퇴각의 마지막 자리에 <셰인>과 마찬가지로 클라이맥스를 배치하였다. 셰인은 마지막 시퀀스에서 전문적인 해결사인 총잡이 잭 윌슨과 대결을 벌인다. <셰인>에 매혹된 관객은 누구나 이 마지막 대결 장면을 언급한다. <풍운의 검객>에서 가장 공들인 장면은 방갓과 달지 사이의 단 한 번의 마지막 대결 씬이다. 이미 최괄과 희빈 문소이는 백운도사가 올린 상소문으로 연화석상에서 나라의 명을 받고 대역 죄인으로 포도청 금부(禁府)에 의해 구금되었으며. 방갓은 난실과 연화에게 작별인사를 고하고 길을 떠나던 중이었다. 떠나가는 방갓을 따라온 건 난실을 모시던 어린 소년 시종과 그 자리에서 구금을 피해 달아난 달지뿐이다. 물론 시종 소년의 역할은 영화 내내 거의 존재감이 없다가 이 마지막 장면에서 방갓과 달지의 대결을 바라보는 증인의 시선으로서의 역할, 말하자면 <셰인>에서 셰인과 잭 윌슨의 대결을 바라보는 증인의 존재이자 신화를 완성시키는 임무를 가진 마리안의 어린 아들 조의 자리이며, 그런 다음 떠나가는 방갓을 애타게 부르는 목소리의 존재로서 거기 있는 것이다. 총에서 칼로 바뀐 조선시대를 무대로 한 대결, 웨스턴 영화의 마을 중심에 자리한 술집 바에서 아무도 보이지 않는 산등성이 들판에로의 이동. 그런데 갑자기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단지 산등성이 언덕 풀밭을 흔드는 정도를 넘어서서 들판 전체를 흔드는 것만 같다. 그리고 그 바람과 함께 어디에선가 안개가 몰려온다. 화면은 일부가 정도로 짙은 안개. 바람결에 그 안개가 사방을 덮는다. 안개를 제외하면 이상할 정도로 이 장면은 구로사와 아키라가 1943년에 만든 첫 영화 < 스가타 산슈로(姿三四郞) >의 마지막 대결 장면을 떠올리게 만든다. 한 마디로 굉장한 시퀀스. 물론 임권택은 그때 이 영화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일본영화는 1998년 10월 20일 일본대중문화 개방정책에 따른 허가까지 한국에 수입이 금지되었다. 다시 말하지만 1967년은 극장이 아니면 영화를 볼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었고, 임권택은 해외에 1978년에 처음 나가보았다. 하지만 단지 들판에서 바람이 분다는 설정에서 멈추지 않고 방갓과 달지가 서로 마주보는 장면의 구도 일부는, 좀 이상한 표현이지만, 심지어 본 적도 없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첫 영화의 영향 아래 놓여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씬의 디테일은 임권택 스타일의 특별한 순간을 보여주고 있다. 우선 이 씬이 <풍운의 검객> 전체로부터 마치 떨어져 나온 다른 영화의 한 장면처럼 이루어져있다는 것을 지적해야 할 것 같다. 오직 여기서만 씬 전체에서 장소의 위와 아래, 그 장소와 관계하는 기후의 변화와 그것이 서사에 관여하여 만들어내는 미장센의 효과, 그 안에서의 동선의 이동과 그 동선을 바라보는 소년의 시선으로 이루어지는 몇 겹의 배치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단조롭던 이 영화의 동선과 장소의 배치는 오로지 이 장면만을 위해서 마치 숨겨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아마도 방갓이 달지와 마주치는 장면은 소년의 시선의 위치 때문에 산등성이 언덕으로 설정했을 것이다. 달지는 떠나는 방갓을 멈춰 세운다. “이봐, 결판을 내야지” “싫다” “그건 네 생각이고, 어차피 너와 나는 끝장을 봐야하는 입장이다” “싫다, 죽는 것도, 죽이는 것도” “웃기지마라” 그리고 달지가 칼을 뽑아든다. 방갓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방갓을 벗는다. 그런데 그런 다음 그 둘은 그 자리에서 갑자기 산 비탈길 아래로 위치를 옮긴다. 마치 위에서 소년이 내려다보기에 좋은 위치로 옮겨야한다는 듯이 그렇게 이동한다. 이때 화면을 채우는 것은 갑작스러운 바람소리이다. 조금 전까지 평화롭던 이 산등성이에 갑자기 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 단지 장르의 약속 이상으로 그 바람이 너무 세고 큰 규모로 불기 시작하기 때문에 기이하고 심지어 초현실적인 감흥마저 불러일으킨다. 이때 이 대결장면은 임권택의 스타일을 보여준다. 어떤 스타일? 이 대결 장면이 2분 40초에 이르는데도 임권택은 서로를 마주보는 방갓과 달지 사이를 서로 다른 위치에서 찍은 쇼트를 마주보게 만든 다음(shot_reverse shot) 둘 사이만을 번갈아 오갈 뿐이다. 이 대결에서 달지가 칼을 휘두르는 찰나의 순간은 세 번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방갓은 마지막 순간 단 한 번 칼을 휘두를 뿐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다. 방갓은 그 한 번으로 달지의 양쪽 무릎을 베어 그를 땅에 무릎 꿇게 만든다. 임권택은 이 씬에서 액션의 디테일 대신 서로 마주보는 시선의 교환, 그때마다 위치를 옮겨 찍은 카메라의 위치와 구도, 무엇보다도 바람소리와 화면을 덮치는 것만 같은 안개로 진행한다. 최소의 액션. 이때 씬의 진행에서 위계질서는 어떤 변화를 맞이하게 되는 것일까. 디테일들 사이의 위계질서. 이때 임권택이 거기서 찾은 디테일은 서사의 안쪽으로부터 말 그대로 표면, 영화라는 표면 바깥으로 나오는 것이었다. 영화의 표면, 영화라는 표면. 표면의 광경. 광경의 디테일에 관한 방법론. 나는 거의 멈춰 서다시피 이 마지막 씬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임권택은 분명히 거기서 무언가 새로운 기쁨을 발견했다. 마치 마지막 씬의 기쁨을 위해서 이미 만든 영화의 전부를 바꿔도 상관없다는 것만 같은 태도. 임권택의 1960년대 영화를 설명할 때 대부분 고통의 감정으로 다루려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 내가 본 것은 분명히 기쁨의 정념이었다. 이제부터 나는 고통 안에 숨어있던 기쁨을 끌어내려고 애쓸 것이다. 물론 기쁨이 비가시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매번의 쇼트라는 양태 안에 담겨있는 속성의 표현이라면, 그래서 그 표현이 영화를 견디게 해주는 실존적인 상태라면, 우리는 이 질문을 통해서 정념의 형상에 관한 설명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실패를 무릅쓰고 이 형상의 모델을 만들기 위해 거듭 되돌아올 것이다. 그걸 해낼 수 있다면 임권택 영화에서 거의 다루어진 적이 없는 디테일을 경유하여 정념의 형상에 관한 표현의 순간과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계속)
이렇게 서문을 시작할 수밖에 없다. 나는 1986년 11월 둘째 주 화요일에 임권택 감독님을 처음 만났다. 나는 이 날을 정확하게 기억한다. 그 날은 화창했지만 바람이 차가웠다. 막 겨울이 시작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임권택 감독님에 관한 인터뷰로만 이루어진 책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내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임권택 감독님은 그해 여름 < 티켓 >을 완성하였고, 남산에 자리한 영화진흥공사의 지하 이층에 세워놓은 세트장에서 < 씨받이 >를 촬영하고 있었다. 처음 만난 자리도 기억할 수 있다. 영화진흥공사 바로 옆에는 난다랑이라는 커피숍이 있었다. 남산에서 약속을 하면 대부분 거기서 만났다. 아침 열시에 처음 뵈었다. 내가 시간에 늦지는 않았지만 감독님이 먼저 나와 계셨다. 하지만 첫 인상은 잘 생각나지 않는다. 창가 옆자리에 앉아계셨다. 당신께서는 아직 내 나이가 스물일곱 살이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시기 바란다. 나는 남산 길을 올라가면서 거의 암송하듯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외웠지만 정작 그 분 앞에 앉았을 때 횡설수설하듯이 말해버리고 말았다. 임권택 감독님은 말씀이 적지만 그때는 더 그러했다. 그냥 나를 쳐다보았다. 막 시작된 아침 겨울 햇살이 커피 잔에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이상하게도 그 빛이 언제나 어제 일처럼 기억난다. 아무 말 없이 한참을 들은 다음, 어쩌면 그저 내가 그렇게 느꼈을 지도 모르는 시간 동안 설명을 하고 난 다음, 임권택 감독님은 내게 그냥 던지듯이 물었다. “내게 무어 들을 이야기가 있소?” 나는 이 말 뜻을 한참이 지난 다음에야 알 수 있었다. 이미 83편의 영화를 찍은 한국 영화감독. 여기서 모든 것이 방점이다. 83편이라는 그 두께. 한국이라는 영화산업 안에서 1962년에 데뷔한 다음 그는 그 영화들을 찍으면서 살아남았다. 그와 함께 시작한 대부분의 감독들이 이미 현장을 떠난 지 한참인 다음에도 그는 영화를 만들고 또 만들었다. 그리고 만들고 있었다. 그는 다른 일을 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제작자가 되었고, 누군가는 학교로 갔으며, 누군가는 관리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오로지 현장에서 영화를 연출하였다. 이십여 년에 걸친 한국영화산업의 역사. 황금시대와 1972년 이후의 몰락. 흥행의 시대가 끝나자 시작된 검열의 역사. 텔레비전과의 경쟁에서 밀려나기 시작한 대중오락. 그때 임권택 감독님은 어린 나를 바라보면서 당신이 이 영화들을, 이 영화들에 담긴 세월을, 이 세월 속의 삶을, 이 삶으로부터 나온 매 쇼트의 결단을, 정말 귀 기울여 들어볼 수 있겠냐, 는 질문을 내게 던졌다. 나는 약간 망설인 다음 대답했다. “배우고 싶습니다” 나에게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그것만이 내 진심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내 마음 속에 염두에 둔 책은 프랑소와 트뤼포가 1962년 6월 2일 첫 편지를 쓴 다음 그 해 8월 13일 월요일부터 6일간 유니버셜 스튜디오 146호 방갈로에 있는 사무실에서 계속된 알프레드 힛치콕과의 인터뷰를 담은 <알프레드 힛치콕(Le Salon Alfred Hitchcock)>이었다. 나는 이 책에서 영화에 관한 많은 것을 배웠다. 그 중에서도 두 가지 배움. 하나는 영화라는 비밀을 알기 위해서 동원된 인터뷰라는 방법이 사실상 최상의 비평이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영화를 본다는 문제란 결국 질문을 던진다, 라는 형식으로 나타나는 능력(들) 사이의 (말 그대로의) 표현이라는 사실이다. 설명하는 표현, 함축하는 표현. 그 둘 사이의 활동으로서의 영화. 우리는 그 둘 중 어느 것도 놓쳐서는 안 된다. 트뤼포는 힛치콕에게 단지 미학적이거나 기술적인 질문에서 멈추지 않았다. 종종 질문은 대답보다 흥미로웠고, 때로는 질문으로부터 영화를 보는 방법을 배울 수 있었다. 혹은 질문이 때로 예상치 않은 대답을 끌어내기도 하였다. 많은 질문과 대답들은 차라리 행간을 읽어야만 했다. 그 둘 사이의 질문과 대답은 존경과 사랑으로 진행되었다. 어떤 질문은 궁금해서라기보다는 힛치콕에게 자기가 그의 영화에서 ‘발견’한 것을 자랑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읽혔고, 어떤 질문은 마치 수줍은 사랑의 고백처럼 들렸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를 감탄하게 만든 것은 마치 영화를 손끝으로 건드리듯이 만져보는 듯, 정확하게 그렇게 설명할 때, 영화를 애무하듯이 느껴볼 때, 그 마음이 질문 속에 담겨서 전달될 때, 그건 내게 마치 마법처럼 보였다. 트뤼포는 힛치콕의 영화를 정면으로만 응시하지 않았다. 가끔은 프레임을 이리저리 두리번거린 다음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인공을 쳐다보느라 놓쳤을만한 흔적들을 끌어냈다. 혹은 내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사라진 클로즈업을 문득 끌어내기도 하였다. 명백하게 그는 수십 번을 맹목적으로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질문을 던졌다. 거의 불가사의할 정도의 관찰. (내 추측이 틀리지 않다면) 때로는 눈물을 흘리면서 보았기 때문에 찾아낼 수 있는 흐릿한 시선으로 바라본 화면들. 트뤼포는 정보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무엇보다도 배움의 기호를 찾고 있었다. 영화라는 고유한 세계 안에서 활동하는 법칙들. 어떻게 저 기호들은 다른 영화에서는 작동하지 않으면서 오로지 힛치콕의 영화에서만 활동하기 시작한 것일까. 몇 번이고 다시 본 다음 매번 수수께끼 앞에서 난처하게 질문을 던지고 다시 던진 다음 마침내 그 마술을 만들어낸 사람 앞에 도착하여 참지 못하고 제발 그 비밀을 풀어주세요, 라는 간절한 하소연. (그의 스승이었던 바쟁의 표현을 빌리면) 누가 이 상형문자의 비밀을 풀어줄 수 있을까. 아마도 사랑에 빠져본 사람만이 느껴볼 수 있는 그 영화적 신호들에 대한 놀랄 만큼 예민한 반응. 트뤼포는 힛치콕의 영화를 안다고 말한 적이 없다. 그저 보고 또 볼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동일한 행위의 반복이 아니다. 영화를 두 번 볼 때 우리는 첫 번째 볼 때와 완전히 다른 방법으로 보게 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그건 단지 음미의 차원이 아니다. 트뤼포의 질문이 내게 가장 큰 쇼크를 준 순간은 영화에 단 하나의 시선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일깨움을 주는 질문을 던질 때였다. 한 사람이 이것을 볼 때 다른 사람은 저것을 볼 수 있다. 누군가 여기서 멈출 때 다른 누군가는 존재하지도 않는 다음 쇼트를 그 안에서 찾아내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트뤼포는 처음에는 내가 그 영화를 본다, 라고 시작한 다음 그 영화가 나를 본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 영화가 내가 보는 것을 안다고 느껴볼 때 거기서 무슨 일이 생길 것인가. 비평은 거기서 시작하였다. 트뤼포는 용기를 내서 한 걸음 더 밀고 나갔다. 트뤼포는 자기를 보는 영화를 다시 바라보았다. 사랑의 시선. 시선의 교환. 트뤼포의 질문은 거기서 시작하였다. 나는 그것을 배우고 싶었다. 이 책을 둘러싼 나의 아주 사적인 배움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당신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이겠지만) 게다가 이 책의 일본판을 번역한 사람은 아아, ‘일본 제일의 영화광’이라고 불러 한 점 부끄럼 없는 두 사람, 하스미 시게히코와 야마다 고우이치였다. (이 책은 <힛치콕, 映畵術> 이라는 제목으로 ‘키네마 준보’에 일부 번역된 다음 1981년에 초판이 발행되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건 이 책의 초판본이다) 야마다 고우이치는 번역을 끝낸 다음 후기에서 “이 책은 영화의 백과사전이며, 입법전서이다. 매번의 질문은 영화란 무엇인가, 라고 불러도 좋다. 매번의 대답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라고 썼다. 나는 이 사람들에게 영화와 만나는 태도를 배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임권택 감독님을 처음 뵙고, 그 분에게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청했을 때. 대답을 듣고자 했을 때, 그건 나에게 배움의 실천이었다. 나는 이 배움 속에서 내 방식으로 영화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수백 번, 수천 번 던져보고 싶었다. 그리고 수백 번, 수천 번, 그 대답을 듣고 싶었다. 그 대답. 여기에는 약간의 이야기를 더해야 할 것이다. 내가 처음 이 책을 준비할 때에는 임권택 감독님에 관한 영화 평을 거의 볼 수 없었으며, 그에 관한 작가론을 단 하나도 읽을 수 없었다. 세상의 무관심.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대중들로부터의 일정한 거리. 여전히 그의 대부분의 영화들은 개봉관에서 볼 수 없었다. 혹은 아주 짧은 시간만 영화관에 간판이 걸려있었다.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를 보기 위해서는 종종 시내 중심가로부터 외곽에 자리한 한적한 극장을 찾아가야만 했다. 심지어 어떤 영화는 재개봉관에서 개봉을 하기도 하였다. 나는 < 신궁 >을 보기 위해서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그리고 그런 다음 그 ‘이후’ 다시는 가보지 못한) 극장을 찾아 내가 살던 동네로부터 멀리 떨어진 뚝섬까지 가야만 했다. 물론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내가 서울 지리의 감각을 익힌 것은 그때 영화를 찾아 처음 타보는 노선의 버스에 몸을 싣고 낯선 동네, 낯선 골목을 헤매면서 두리번거리던 경험의 결과이다. 어떤 네비게이션도 없었다. 그저 동네를 기웃거리고 낯선 사람들에게 수없이 물어보면서 극장을 찾아가야만 했다. 그때 제작사들은 야비하게도 외화 수입쿼터를 따내기 위해서 한국영화를 만들었으며, 그런 다음 그 영화를 버릴 때 그런 방식을 취했다. 비평의 차가운 외면. 그때 그 영화들을 아무도 방어하지 않았다.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들은 외롭게 만들어졌다. 이미 83편의 영화를 만들었지만 충무로에서는 그를 직업감독으로만 부르고 있었다. 물론 이미 < 만다라 >를 만들었고, 그런 다음 < 길소뜸 >과 < 티켓 >을 만들었지만 비평은 그에게 거의 관심이 없었다. 차라리 한국영화에 별 관심이 없었다고 말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때 한국영화는 세계영화사의 시간 바깥에 있었다. 다시 한 번 당신을 환기하지만 1986년의 일이다. 나는 충분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많은 할리우드 영화를 열심히 보았다. 프랑스문화원에서 매달 프로그램으로 상영되는 영화들을 단 한 편도 놓치지 않고 보았다. 독일문화원에서 영화를 보았다. 일본문화원에서 영화를 보았다. 물론 나는 아직 많은 영화를 보아야 했다. 여기는 파리가 아니었다. 아직 시네마테크도 없었다. 어쩌면 영화보다도 영화에 관한 책을 더 많이 읽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때 나를 가로 막고 나선 것은 한국영화였다. 내가 영화에 대한 글을 쓴다는 문제에 대해서 자의식을 갖기 시작한 것은 대학교에 가서였다. 물론 그건 전적으로 나 혼자 읽는 글이었다. 매일 본 영화를 쓰고 또 보고 또 썼다. 그러기위해서 나는 참고문헌을 가져야 했다. 문학 비평을 처음 읽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논쟁이 중심에 있었다. 한국문학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내게 한국영화란 무엇인가, 로 번역되었다. 나는 의식적으로 한국영화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김기영 의 < 이어도 >, 유현목 의 < 문 >, 하길종 의 < 한네의 승천 >, 이장호 의 < 어제내린 비 >, 김호선 의 < 영자의 전성시대 >. 나는 두서없이 때로는 막 개봉했을 때, 혹은 재개봉으로 상영되었을 때, 종종 동시상영으로 이 영화들을 대부분 프린트에 (스크래치로 인하여) ‘비가 내리는’ 상태에서 보았다. 그리고 어느 날 늦봄 이른 아침 학교 앞 극장에서 < 족보 >와 마주쳤다. 누구에게나 어떤 영화를 보기 이전과 이후로 나누는 순간과 마주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각성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쇼크 상태. 아마도 그 목록은 모든 시네필들에게 각자 개인의 ‘은밀한’ 명단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 영화를 언제 어떻게 만났느냐에 따라 완전하게 다르게 당신을 일깨워주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에게도 그런 영화들의 명단이 있다. <족보>는 내게 그런 영화(중의 하나)이다. 나는 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林權澤’(그때에는 포스터에도, 영화 자막에도 모두들 한자로 이름을 표기하였다) 이라는 이름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심지어 그 이전 영화들을 이미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름을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나는 쇼브라더즈 무협영화를 보면서 감독 이름을 외우기 시작했다) <족보>는 줄거리가 특별한 영화가 아니었다. 나는 이미 그와 비슷한 줄거리의 일제 강점하의 식민지 시대를 다룬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면서 자란 세대이다. 그렇다고 특별한 주인공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오로지 어떤 순간부터 이 영화의 진행은 내가 이제까지 본 영화들과 완전히 다르게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 영화의 씬들은 이제까지 내가 읽은 책의 일부분을 완전히 무효로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장면들, 그 쇼트들의 리듬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고 무엇보다도 우아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 안에 구석구석 자리 잡은 통일성과 이상할 정도로 균형을 잡은 감각들. 그러나 이 아름다움을 나는 설명할 방법을 알지 못했다. 나는 지금 도대체 무엇을 본 것일까. 영화의 수수께끼. 트뤼포를 경유하여 바쟁의 말에 기댄다면 상형문자. 무엇이 나를 이렇게 민감하게 만들었을까. 대답을 해야 한다. 나는 초조하게 두리번거리면서 다음 영화를 기다렸다. 그때부터 나는 ‘林權澤’이라는 이름을 찾아서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임권택 감독님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영화를 만들어나가고 있었다. 도대체 이 사람은 어떻게 이 영화들을 모두 만들 수 있는 것일까, 라고 어리둥절할 정도였다. 어떤 영화는 훌륭했고(< 짝코 >), 어떤 영화는 나빴다(< 내일 또 내일 >). 유감스럽게 나는 < 만다라 >를 개봉했을 때 보지 못했다. 그때 나는 군대에 있었고. 대신 전쟁영화인 < 아벤고 공수군단 >을 보았다. 이 영화는 지루했다. 제대한 다음 다시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를 순서대로 쫓아갈 수 있었다. 그 어떤 영화보다도 < 길소뜸 >은 굉장하다, 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나는 이 사람에게서 영화에 대한 대답을 듣고 싶었다. 만일 내가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 안에 담겨진 비밀을 알게 된다면 그건 한국영화라는 비밀을 알게 되는 순간이 될 것이라는 (앎에 대한) 은밀한 열망이 있었다. 물론 내가 임권택 감독님의 대답에서 기대한 것은 영화의 개념(들)이 아니었다. 그건 이미 책으로 충분히 ‘읽었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 개념들이 실제로 영화 속에서 어떻게 활동하고, 어떻게 이것이 저것과 접속하고, 그 안에서 반대로 개념들에 영화라는 시스템이 어떻게 의문을 제기하며, 그 과정에서 영화라는 개념이 만나는 불안의 조건이 무엇이며, 이 모든 각각의 요소들을 정의내리는 대신 그 용어 바깥에서 명령하는 날씨와, 세트와, 배우라는 몸과, 그 몸속에서 울려나오는 목소리와, 그 몸의 제스처와, 활동과, 종종 순환을 중단시키는 카메라의 뒤편에서 벌어지는 결정 사이의 블랙홀, 말하자면 아무리 노력해도 항상 불연속성으로 귀결 지어지는 비평과 현장 사이의 절망적인 중단을 다시 매듭짓고 싶었다. 나는 반문하고 싶었다. 혹시 이 모든 것들이 오로지 현장에서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 임의적으로 모인 것은 아닙니까? 어쩌면 나는 자신을 방어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알라바이를 만들고 싶어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반대로 나는 기꺼이 개념(들)과 영화 사이의 비대칭의 대결 속에서 이념들로 이루어진 개념을 버리고 활동 중인 영화를 선택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영화에 관한 진정한 감각이란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 안에 놓여진 것이다, 라는 롯셀리니의 말. 그냥 단 한 마디로 이 개념들의 피와 살을 알고 싶었다. 트뤼포는 인터뷰를 위해서 벨기에 시네마테크에서 힛치콕의 영국시절 영화들을 다시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그러나 나는 트뤼포와 같은 행운을 누리지 못했다. 그 당시 한국영화들을 보관한 곳은 한국필름보관소였고, (1991년 9월 지금의 명칭으로 변경한 이후) 한국영상자료원이 된 2002년에서야 자료를 외부에 공개하기 시작했다. 나는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를 전적으로 내 기억에 의존해야만 했다. 대부분의 영화들은 기억 속에 희미하게만 남아있었다. 고백하자면 심지어 이 영화들 중의 일부는 필모그래피를 정리하는 과정 중에 아, 내가 그때 본 그 영화가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였구나, 라고 알게 된 제목들도 있었다. 인터넷은 아직 인류 문명에 도착하지 않았고, 모든 자료는 하나씩 국회도서관에 가서 찾아야 했으며, 일일이 필름으로 보관된 신문기사들을 뒤져야만 했다. 게다가 그때 나는 아직 1960년대에 만들어진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 대부분을 보지 못한 상태였다. 그건 전적으로 내 나이의 한계 때문이다. 내가 무슨 재주로 (아직) 국민학교(라고 불리던) 시절에 만들어진 그 영화들을 찾아볼 수 있었을까. 혹은 보았다 하더라도 그걸 인터뷰로 질문을 해낼 만큼 기억해낼 수 있을까. 질문을 한다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발견의 방법론을 경유하는 문제의식이다. 나는 질문이 내 안에 머물기를 원치 않았다. 질문이 다시 영화 안에 들어가 활동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임권택 감독님과의 인터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이 인터뷰가 그렇게 전면적인 상황으로 펼쳐지게 될 것이라고는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 질문은 저 아래까지, 일제 식민지 강점하를 거쳐서 조선시대 말기 그 어딘가에 까지 내려가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의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전라남도 장성이라는 지리적 장소가 가져온 한국 근대사 안의 역사적 맥락. 한국전쟁은 그 장소를 찾아온 다음 한 인간의 영혼과 육신을 갈가리 찢어놓았다. 그는 오로지 자기 육신 안에서 이 모든 시간을 견뎌내야만 했다. 그런 다음 그 시간이 끝나지 않고 그의 영화 속에 흔적을 남겨놓고 있었다. 그의 영화 속의 시간은 경험의 시간이자 역사의 시간이었다. 시간의 다발들.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들은 세상 속을 어슬렁거린다. 그는 종종 인터뷰 중에 탄식을 하면서 내게 말했다. 나는 많은 시간을 낭비했어요. 그저 어떤 삶의 목표도 없이 그렇게 세월을 보냈어요. 그러나 영화는 그 시간들을 차례로 쌓아나갔다. 그런 다음 우리를 되찾은 시간 앞으로 데려다 주었다. 나는 이 시간들 사이의 복잡한 기호들에 관해서 귀를 기울였다. 그 자신이 헛되이 시간을 보냈다고 말하는 그 시간 안에 있는 진실. 내가 비로소 알게 된 배움의 본질적인 성과. 나는 임권택 감독님에 관해서 이야기를 할 때 종종 어느 순간부터 한국근대사에 대해서 말하거나, 혹은 지난 50년간에 걸친 한국영화사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사실에 문득 소스라쳐 놀라곤 한다. 그건 내 의도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걸 설명하는 과정은 번번이 잃어버린 시간 안으로 들어와 길을 잃어버린 다음 이러 저리 그 선을 따라 나가면 그 시간을 되찾는 장소에로 나를 데려다 놓았다. 물론 첫 번째 인터뷰는 < 씨받이 >에서 끝났지만 그 ‘이후’ 임권택 감독님은 계속 영화를 만들었고 나도 계속 그 영화들을 쫓아갔다. 발걸음은 늦어졌지만 그 보폭은 점점 멀어지고 깊어졌다. 이를테면 < 아다다 >를 만들고 난 다음 갑자기 < 개벽 >으로 점핑했을 때의 아득함. 혹은 < 창, 노는계집 >을 찍고 난 다음 갑자기 < 춘향뎐 >으로 넘어왔을 때의 망연자실함. 종종 선이 끊어진 듯한 느낌을 받을 때조차 있었다. 혹은 내가 붙잡은 선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는지 자문해보게 되었다. 매번 영화 앞에서 이쪽인가, 저쪽인가를 망설여야만 했다. 임권택 감독님은 대답을 하는 대신 다음 영화를 만들었다. 항상 영화가 끝났을 때 새로운 영화가 시작되었다. 한 편의 영화 안에 놓여진 하나의 세계. 가능한 세계. 그 세계 안의 무한한 가능성. 그때 나는 무엇을 따라가야 할 것인가. 2002년에 진행된 두 번째 인터뷰는 거기서 시작하였다. 나는 멈추지 않았다. 두 번째는 훨씬 좋은 환경에서 진행되었다. 영상자료원은 기꺼이 내가 놓친 영화들을 다시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많은 영화들이 (불완전한 형태이기는 하지만) 비디오로 출시되었고, 이제 막 DVD로 나오기 시작했다. 물론 많은 영화들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나는 그 영화들에 대한 질문을 할 수 없었다. 임권택 감독님은 그저 차라리 잘 없어졌다, 는 말로 대답을 대신 했다.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 그런 다음에도 세 편의 영화가 더 만들어졌다. < 하류인생 >과 < 천년학 >, 그리고 < 달빛 길어 올리기 >. 나는 이미 이 세 편의 영화에 대한 인터뷰를 모두 마친 상태이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나는 계속해서 이 인터뷰의 정리를 미루고 있었다. 핑계는 금방 임권택 감독님이 102번째 영화 촬영을 시작하게 될 예정이니 잠시만 기다려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내가 오랜 시간 망설여왔던 결정을 할 때가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갔다. 나는 처음에는 내 질문을 잘 알지 못했다. 내 질문을 정식화시킬 수 있었던 것은 모리스 블랑쇼로부터의 배움 덕분이다. 나는 이제까지 영화란 무엇인가, 라는 대답을 얻고 싶어 했다. 블랑쇼는 질문을 바꾸었다. 문학은 어떻게 가능한가? 나는 그 말을 영화에로 끌어당겼다. 영화는 어떻게 가능한가? 이때 영화적 경험의 공간이란 무엇인가? 모든 경험의 기억을 남겨둔 채 그것이 하나의 텍스트라는 윤곽만을 망각해버린다면 무슨 일이 생길 것인가. 거기에 온전히 남아있는 영화적인 경험의 순간들. 비평은 시선의 결단을 내려야한다. 어떤? 그것을 간신히 유지시키고 있는 윤곽을 지워버리기. 나는 완성에 대한 근심을 잊어버릴 생각이다. 그 대신 오로지 내가 경험한 영화적 공간 안에서 어떤 매개도 없이 찢겨져 나간 영화와 인터뷰 사이의 두 세계를 점핑할 것이다. 나의 기투(Entwurft)라는 모험. 나는 먼 길을 돌아서 다시 비평으로 돌아왔다. 나는 그 영화가 어떻게 완성되었느냐고 물어보는 대신 어떻게 출현하였느냐고 물어볼 것이다. 영화를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건 그 영화의 가능한 세계를 체험하는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만일 이때 의미를 찾는 일에 몰두한다면 우리는 매번 동일한 방식으로만 영화를 보게 될 것이다. 어떻게 우리들은 매번 새로워질 수 있을까. 나는 이제까지 대답을 찾았다. 지금부터는 다시 질문을 생각할 차례이다. 좋은 질문. 오류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실패를 겁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 대답을 찾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나는 여기서 다시 시작한다. 마치 만난 적이 없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를 하나씩 다시 볼 것이다. 그런 다음 내가 볼 수 있는 모든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에 대한 글을 쓸 것이다. 이것은 전체의 긍정이다. 하나도 빠짐없이 그 모두를 긍정하기. 이때 나는 영화가 영화라는 것을 스스로 질문하는 장소에서 시작할 것이다. 자, 이제 구체적인 이야기를 할 차례이다. 나는 몇 가지 원칙을 세웠다. 첫째, 모든 영화를 다시 본 다음 다시 쓴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가능해진 것은 한국영상자료원의 도움 덕분이다. 어쩌면 이 글은 그들과 함께 쓰는 것이라고까지 말하고 싶다) 나는 기억에 의존하지 않을 생각이다. 매번 마치 그 영화를 어제 본 것처럼 다시 본 다음 다시 쓸 것이다. 이미 이전에 그 영화에 대해서 쓴 글을 (가끔 참고는 하겠지만) 다시 끌어들이지 않을 것이다. 종종 과거의 영화들에 대해서 어떤 비평은 기억에 의존할 때가 있다. 나는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차라리 이런 경우 영화와 기억 사이의 차이에 대해서 쓴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매번 그 영화를 내 앞에 다시 불러 세운 다음 다시 생각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반대로 미래의 비평을 생각하고 있다. 과거의 영화를 현재의 자리에서 본 다음 그 영화를 생각할 때 그 사유는 미래의 종합이라는 방식으로 전개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의 영화를 현재의 자리에서 미래에로 개방하기. 이때 세 개의 시간을 나는 하나의 자리에서 모으게 될 것이다. 이미 본 영화. 다시 보는 영화. 이미 경험한 영화, 다시 경험하는 시청각 기호들. 그 안에 담겨있을 매번의 새로운 발견의 가능성. 영화와 비평 사이의 선험적 경험주의. 나는 영화가 창조의 장소이며, 매번 새로운 가능성이 활동하는 시간이라는 것을 보고 싶다. 나는 되돌아왔지만 그러나 동시에 그 장소가 매번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영화에서 같은 장소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모든 예술에서 같은 장소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아쉽게도 나는 101편의 영화를 모두 쓸 수가 없다. 왜냐하면 현재 한국영상자료원에 보관되어 있는 영화는 모두 76편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24편의 영화에 대해서 나는 아직도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 영화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 전쟁과 노인 >(1962), < 남자는 안 팔려 >(1963년), < 신문고 >(1963년), < 단장록 >, < 욕망의 결산 >, < 십자매 선생 >, < 단골지각생 >, < 영화마마 >, (모두 1964년) < 빗속에 지다 >, < 왕과 상노 > (1965년), < 닐니리 >(1966년), < 청사초롱 >, < 망향천리 >(모두 1967년), < 돌아온 왼손잡이 >(1968년), < 상해탈출 >, < 비 나리는 고모령 >(모두 1969년), < 이슬 맞은 백일홍 >, < 비 나리는 선창가 >, < 밤차로 온 사나이 >, < 비검 > (모두 1970년), < 나를 더 이상 괴롭히지 마라 >, < 요검 > (모두 1971년), < 대추격 >, < 잡초 > (모두 1972년). 그 중에서도 가장 분한 것은 ( 임권택 감독 스스로 자신의 영화 경력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라고 말한) <잡초>를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줄거리를 읽은 다음 이 영화를 처음부터 왠지 본 것만 같은 기분이 들긴 하지만 기억이 분명치 않다. 두 번째, 나는 이 영화들을 연대기 순으로 써나가지는 않을 생각이다. 이건 전적으로 내 쪽에서의 이유이다. 나는 이 비평을 통해서 전기를 구성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트뤼포에게서 배운 것은 각 영화들을 그 자체로 존재케 하라, 는 것이었다. 차라리 전략이라고나 할까. 나는 영화들 사이의 관계를 과도하게 과장할 생각이 없다. 같은 해에 만들어진 영화들조차 서로 다른 영화사에서 서로 다른 이유로 서로 다른 스태프들과 함께 서로 다른 배우들로 만들어졌을 때 이 둘 사이의 관계는 쉽게 연결 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종종 비평 담론들은 이들 영화 사이를 마치 친족관계처럼 설명하고 싶어 한다. 어쩌면 이건 비평의 관습일지도 모른다. 종종 하나의 이름 아래 규칙을 통일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1969년은 1971년이 아니다. 혹은 1978년은 1980년이 아니다. 이 연도를 잘 생각해주기 바란다. 나는 그런 손쉬운 방법을 피하고 싶었다. 나는 연재소설을 쓰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그런 방식으로 묶여있는 관계를 차례로 풀어낸 다음 나는 이들을 다시 배치시킬 모델을 찾아낼 생각이다. 서로 상이한 영역. 서로 다른 과정의 형성들. 나는 한 편의 영화가 매번 매우 복잡하고 상이하게 얽힌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들은 단조로운 등질관계 아래 놓고 이야기될 수 있는 균형 잡힌 성질의 것이 아니다. 모든 영화는 각자의 창문을 가질 것이다. 그리고 그 창문으로 각자의 세상을 보게 될 것이다. 이건 집합이 아니라 분산을 목표로 한 것이다. 그러니 제발 내게 어떤 영화가 임권택 영화 중의 최고냐고 물어보지 말길 바란다. 여기서는 어떤 영화가 어떤 영화보다 우월하거나 반대로 열등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각각의 영화들의 존재방식을 물어볼 것이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 자신이 예술이라는 것을 드러내 보일 때 거기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건 무조건적이자 절대적인 차이일 것이다. 자기 스스로 존재하고 그 존재에 대해 우리가 사유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각자의 힘. 각자의 아름다움. 다만 여기에 두 가지 원칙은 세웠다. 하나는 101번째 영화 <달빛 길어 올리기>를 맨 먼저 쓴 다음 두 번째 영화는 데뷔작 <두만강아 잘 있거라> 를 쓴다는 것이다. 그건 일종의 고정점 역할을 해줄 것이다. 나는 임권택 감독님의 말을 믿기로 하였다. 자신의 101번째 영화를 가리켜 “나의 두 번째 데뷔작”이라고 불렀다. 나는 맨 먼저 두 편의 데뷔작을 다룰 생각이다. 다만 뒤의 것을 먼저 다룰 생각이다. 그런 다음 임권택이라는 별자리 안에서 어떻게 각각의 영화들이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줄지를 생각할 것이다. 나는 아직 순서를 정하지 않았다. 아마 마지막 순간까지 순서를 정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내가 이 연재를 진행하는 도중 새로운 영화가 만들어지면 (아마도) 그 영화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세 번째. 그러나 이 모든 영화에 대한 비평을 쓰지는 않을 것이다. 말하자면 나는 약간의 우회를 할 생각이다. 혹은 비평의 변주라고나 할까. (아직 아무 것도 결정하지는 않았지만) 필요하다면 그 영화에 대해서 누군가를 초대하여 토크를 하거나 혹은 라운드 테이블의 형식을 취할 생각이다. 나는 더 많은 친구들이 이 영화들을 환대하기를 기대한다. 그러므로 나의 배움은 여러 가지 전술들을 동원하여 진행될 것이다. 어떻게 그 영화와 마주칠 것인가. 어떻게 그 영화를 껴안을 것인가. 어떻게 거기서 배움을 끌어낼 것인가. 하지만 오해하지 말아주었으면 좋겠다. 나는 의미를 찾는 것이 아니다. 이 모든 노력 속에서 내가 끌어내고 싶은 것은 말 그대로 배움의 기쁨이다. 다소 길지만 이 말을 인용하고 싶다. “중국 옛말에 우공이산(愚公移山)이란 말이 있습니다. 옛날 화북지방에 북산우공(北山愚公)이라 불리는 노인이 살았습니다. 그의 집 대문이 남쪽으로 나 있었는데 태행산과 왕옥산이라는 두 큰 산이 그 출로에 버티고 있었습니다. 노인은 그의 아들들을 불러 괭이를 들리고 이 큰 산에 가 산을 파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지수(智?, 지혜로운 늙은이)라 불리는 다른 노인이 있었는데 그들을 보고 크게 웃으면서 당신들은 참으로 멍청하구려, 당신 부자 몇 사람이 큰 산 두 개를 옮기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한 일이요, 라고 말했습니다. 우공이 대답하길 내가 죽으면 아들이 있고, 아들이 죽으면 손자가 있고, 자자손손은 끝이 없습니다, 이 두 산이 아무리 높다한들 다시 더 높아지는 것은 아닐진대 조금씩, 조금씩 파헤치면 어찌 평평해지지 않겠습니까, 라고 대답했습니다. 옥황상제가 이에 감동하여 두 신선을 내려 보내 두 산을 지고 가게 했습니다” 나는 하나씩 써나갈 것이다. 내 결심. 하여튼 누군가 시작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긴 시간이 걸리겠지만 차례로 써나갈 것이다. 대장정. 물론 신선을 기다리지는 않을 생각이다. 다만 그러면 누군가는 또 다른 평을 쓰기 시작할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하나씩 모이면 모든 한국영화들은 각자 자기 자신에 관한 각자의 영화평을 갖게 될 것이다. 적어도 우리는 한국영화 편수와 동일한 숫자의 영화평을 갖게 될 것이다. 나는 둘 사이의 우정을 생각한다. 어떤 영화도 외로우면 안 된다. 어떤 영화는 운 좋게 두 편, 혹은 세 편, 어쩌면 열 편, 아니면 훨씬 그 이상의 친구를 갖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때 어떤 영화들은 단 한 명의 친구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다시 그날처럼 11월 둘째 주 화요일이다. 임권택 감독님을 처음 만난 날. 나는 오늘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으로 시작한다. 두 번의 시작. 그리고 두 번째 시작!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