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배달
- 감독
- 김수용
- 제작년도
- 1959
- 출연
- 김진규, 김희갑, 구봉서, 최지희, 도금봉, 이빈화, 김아미, 박옥초, 복혜숙, 백금녀, 김미선, 이종철, 후라이보이, 허장강, 박응수, 경윤수, 이예춘, 최봉, 장동휘, 황해, 남춘역, 최성호, 윤왕국, 박복남, 전숙, 임양, 김강애, 정웅, 원경, 이창식, 이병철
김수용 감독은 자신이 영화 연출에 임하는 태도와 방식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각본을 받으면 주어진 제작 일정과 예산 범위 내에서 등장인물들을 어떻게 운용하고, 영화의 도입부터 결말까지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 설계한다. 그리고 밤에 잘 때마다 머릿 속에 구축해놓은 영화 한 편을 처음부터 끝까지 ‘본다’. 촬영을 한 부분은 찍은 장면대로, 아직 안 찍은 부분은 콘티대로 연결하면서 작품 전체를 몇 번이고 ‘보는’ 연습을 하다 보면 실제로 제작이 끝나는 시점에는 머릿 속에서 이미 여러 차례 ‘다 본’ 영화대로 완성되는 것이다.” 여기서 ‘본다’는 것은 어떻게 시청각 이미지로 구현하는가를 화두로 잡고 있다는 뜻이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영화는 연극이 아니고 라디오극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영화적으로 접근하는 화면들을 구축하여 정서와 이야기를 전달할 것인가를 꼼꼼하게 계산했다. 덕분에 촬영 현장을 신속하게 지휘했고, “사람을 지루하게 하는 건 참 싫다”는 본인의 말대로 그는 영화 속에서 불필요한 반복이나 서사 전개가 지연되는 것을 경계했다. 그리하여 김수용은 1958년 데뷔작 <공처가>부터 2000년에 개봉한 <침향>에 이르기까지 무려 109편의 영화를 연출했다. 그가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꼽히는 이유는, 기념비적인 다작을 이룬 영화 장인일뿐만 아니라 영상예술로서의 영화에 대한 신념을 일관되게 견지한 영화 작가이기 때문이다. 1950년 서울사범학교 졸업 후, 김수용이 교단에 서자마자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그는 9.28 수복 후에 징집되어 군에 입대한다. 전시에는 통역장교로 근무하고 휴전 후, 1954년에 국방부 정훈국 영화과에 배속된다. 근무지는 서울 중구 필동 남산에 위치한 적산가옥이었는데 편집실, 녹음실, 영사실 및 스튜디오를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국방부 영화과 시설에서 군 영화뿐만 아니라 당시 한국영화의 거의 모든 작업들이 이루어졌다. 전후 1950년대 중후반에는 민간 현상소나 편집실 등의 후반작업 시설이 전무했기 때문이다. 김수용은 이곳에서 영화인들의 작품 제작 현장을 눈여겨보면서 전반적인 영화 제작 과정을 터득한다. 그 무렵 정훈국 영화과는 종전의 군 뉴스 제작에서 한발 나아가 홍보 및 교육용 문화영화를 시도하였고, 김수용은 군 교육 문화영화 <잊지말자 6.25>(1955)를 감독하며 처음으로 영화 연출을 하게 된다. 이어서 <10분간 휴식>, <윤 중사의 수기>, <해뜨는 마을> 등의 군 영화들을 연출하였는데, <10분간 휴식>은 군인들이 행군 도중 휴식 시간에 나누는 이야기가 영화 속에서 장면화되었다가 현실로 돌아오는 구조로 만들었다. (사진 1) 국방부 정훈국 영화과 근무 당시, 가운데가 김수용 김수용은 <배뱅이굿>(양주남, 1957)의 조감독을 맡아 장편극영화 제작 현장에 참여하고, 군 영화들을 연출하면서 영화감독으로서의 소양을 쌓았다. <배뱅이굿>의 제작자였던 김보철이 이듬해 그에게 영화 <공처가> 연출을 의뢰한다. 그리하여 그는 정훈국 영화과 간부들의 배려 하에 근무시간 외의 시간에 촬영을 진행하여 장편극영화 감독으로 데뷔한다. (사진 2) <공처가>(김수용, 1958) 포스터. 이 작품은 김수용이 현역 군인 시절에 감독으로 데뷔한 작품이다. <공처가>는 장소팔, 김희갑, 구봉서, 백금녀 등의 당대 희극배우들이 주연을 맡은 코미디 드라마였고 관객의 반응을 얻는 데 성공한다. 때문에 “촬영소에 있는 김 대위”에게 연출 의뢰가 계속 들어왔고, 김수용은 <3인의 신부>(1959), <청춘배달>(1959)을 연출하여 그가 군 복무 시절에 감독한 작품들은 총 3편이다. (사진 3) <청춘배달>(김수용, 1959)을 관람하기 위해 명보극장에 모여든 관객 이후 군복을 벗고 본격적인 직업 영화감독의 세계에 들어선 김수용은 <애상>(1959)을 시작으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쳤고, 국방부 정훈국 영화과에서 촬영을 담당했던 전조명과 장석준이 그의 작품들을 다수 촬영한다. 전조명은 <3인의 신부>(1959)의 촬영감독으로 데뷔하여 <혈맥>(1963), <굴비>(1963), <갯마을>(1965), <일요일의 손님들>(1973), <도시로 간 처녀>(1981) 등의 작품들을 촬영했고, 장석준은 <구혼결사대>(1959)를 시작으로 <버림받은 천사>(1960), <만선>(1967), <안개>(1967), <일본인>(1968), <봄봄>(1969), <토지>(1974) 등의 작품들을 촬영했다. (사진 4) 모파상의 소설 「 귀향 」 을 번안한 영화 <돌아온 사나이>(김수용, 1960)의 스틸사진. 주인공 박남우(배우 김진규)는 전쟁터에서 당한 부상 때문에 얼굴에 심한 화상 흉터가 있다. 영화 속에서 실감나는 화상 특수 분장으로 등장한다. 1962년에는 한양영화공사가 홍콩과 합작한 <손오공(원제 화염산(火焰山)>의 한국 측 감독을 맡아 홍콩에서 연출한다. 한국 배우 김희갑, 김지미, 조미령, 양훈, 최무룡, 양미희 등이 출연했다. 손오공 일행의 여정이 중화권에서는 익숙한 이야기로 해마다 영화화되었지만, 김수용은 한국 관객을 감안했을 때 캐릭터 및 설정 소개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직접 영화 도입부를 작성하여 추가 촬영했다고 한다. (사진 5) <손오공(원제 화염산 火焰山)>(김수용, 1962) 촬영현장. 김수용 감독(오른쪽에서 두 번째)이 손오공 역을 맡은 배우 김희갑(왼쪽에서 두 번째)에게 연기 지도를 하고 있다.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서 <사춘기여 안녕>(1962), <청춘교실>(1963)과 같은 청춘물 등을 선보이고, 1963년에 그의 초기 대표작으로 꼽히는 <굴비>, <혈맥>을 연출한다. 두 작품은 각각 라디오극과 연극 원작으로 김수용은 이를 영화적으로 소화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다. <혈맥>은 원작 희곡이 방공호 토굴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을 영화적으로 장면화 하기 위해 판잣집으로 바꾸고, 서울역 근처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판자촌 오픈 세트를 짓고 촬영했다. 도시 빈민의 현실을 그리고 있지만 인물 각자의 개성을 활력있게 그려내어 극이 암울하거나 무겁게만 느껴지지 않도록 연출했다. 이 작품은 1963년 청룡영화상, 1964년 대종상 주연상 · 작품상 등을 수상했다. (사진 6) <혈맥>(김수용, 1963)에서 열연한 배우 김승호(왼쪽)와 조미령(오른쪽) 1965년 작 <갯마을>은 오영수의 단편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김수용은 바다에 운명을 맡기고 살아가는 어촌 마을의 이야기에서 한국적인 드라마를 발견하고, 여배우들의 개성 있는 연기를 발현해보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시집 오자마자 남편이 바다에서 실종된 주인공 해순을 비롯하여, 마을 아낙네 대다수가 과부로 동병상련을 나누며 삶의 애환을 함께 한다. 이들이 해질녘 해변가에서 망중한을 즐기는 장면에는 영화음악가 정윤주가 제안한 국악인 김소희의 창이 깔린다. 이 소리와 여인들의 건강한 육체가 바다를 배경으로 아름답게 어우러져, 인물들이 고난을 견뎌가는 명랑함이 서정적으로 전해진다. (사진 7) <갯마을>(김수용, 1965) 중 해변가 망중한 시퀀스. 김수용이 연출한 연기 앙상블, 전조명 촬영 감독이 담아낸 유려한 미장센 그리고 김소희의 창이 어우러져 탄생한 명장면이다. <갯마을>은 관객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하여 문예영화의 흥행가능성을 보여준 작품이 되었고, 이후 수많은 문예영화들이 기획·제작되는 데에 영향을 끼쳤다. (사진 8) <갯마을> 출연진을 연기 지도 중인 김수용(왼쪽). 누워있는 이가 배우 이낙훈이고 오른쪽부터 배우 신영균, 고은아, 황정순 (사진 9) <갯마을>의 촬영감독인 전조명(왼쪽)과 김수용 “바다 냄새까지도 스크린에 담고자 했다”는 <갯마을> 이후 김수용은 바다를 테마로 한 작품 <만선>(1967), <물보라>(1980)를 연출했고, 이 작품들에 대한 애정을 표한 바 있다. <만선>은 천승세의 희곡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바다에 생계와 목숨을 걸고 분투하는 어촌민들을 그려냈다. 당대 최정예 배우들이 대거 출연하여, 만선으로 돌아와도 선주(船主)로부터 제 몫을 받을 수 없는 어부들의 갈등과 바다에 자식을 잃은 가족의 비애와 사랑을 열연한다. (사진 10) <만선>(김수용, 1967)에서 만선의 기쁨을 누리는 어부들. 가운데가 곰치 역을 맡은 배우 김승호 (사진 11) <만선>에서 임금 문제로 선주와 갈등하는 어부들. 맨 앞이 배우 김승호, 그 뒤로 허장강(왼쪽 세 번째)과 김칠성(왼쪽 다섯 번째) (사진 12) <만선>에서 폭풍우를 겪고 만신창이로 돌아온 배를 맞이하는 마을 사람들. 앞줄 오른쪽부터 배우 남정임, 주증녀, 김칠성 한편 <갯마을>과 같은 해에 개봉한 <저 하늘에도 슬픔이>는 1965년 최고 흥행작으로, 초등학생 이윤복이 쓴 일기인 『저 하늘에도 슬픔이: 11세 소년이 외치는 인간의 소리』(서울: 신태양사, 1964)를 영화화했다. 가난이라는 굴레에 쓰러지지 않고자 애쓰는 윤복이의 여정이 동요 따오기 선율과 함께 마음 아리면서도 담대하게 펼쳐진다. (사진 13) <저 하늘에도 슬픔이>(김수용, 1965)에서 윤복이네 식구가 사과로 끼니를 때우는 장면. 윤복의 아버지로 출연한 배우 장민호(가운데)는 이 영화의 제작자이기도 하다. 왼쪽부터 배우 정해정(순나 역), 김천만(윤복 역), 이지연(태순 역), 김용연(윤식 역) (사진 14) <저 하늘에도 슬픔이>에서 윤복(왼쪽)에게 일기가 책으로 출간된 사실을 알려주는 약사(오른쪽)로 출연한 최현민은 이 영화의 기획자이자 희곡 <만선>을 연출한 연극인이기도 하다. 한편 이 영화는 대만에서 <추상촌초심 秋霜寸草心>이라는 제목으로 상영되었다. 아역 배우들의 연기가 출충하고, 특히 배우 김천만(이윤복 역)은 이후 김수용이 연출한 <맨발의 영광>(1968)에서도 서울시립아동보호소 축구팀원으로 열연한다. (사진 15) <맨발의 영광>(김수용, 1968)에서 헝겊으로 만든 공을 가지고 맨발로 축구 연습을 하는 진호(왼쪽, 배우 김천만) 이외에도 김수용은 <사격장의 아이들>(1967), <가위 바위 보>(1976), <달려라 만석아>(1979) 등의 어린이들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을 다수 연출했다. 교단에 서자마자 전쟁이 발발하여 뜻하지 않게 학생들과 헤어졌던 기억을 갖고 있는 그는 항상 아이들에게 각별한 관심을 품어왔고, 아역들이 촬영장에서 위축되지 않고 기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이끌었다. (사진 16) <사격장의 아이들>(김수용, 1967) 아역 배우에게 연기 지도 중인 김수용(왼쪽) <사격장의 아이들>(김수용, 1967)은 휴전선 근처 군 사격장 인근 마을에서 포탄 파편을 주워 생계를 돕는 아이들을 통해 전후에도 지속되는 전쟁의 상처를 그려낸다. 이 영화는 기적 같은 행운이나 해결책 없이, 아이들이 겪고 있는 비극적인 현실을 냉정하게 제시하는 채로 끝나는데 바로 이 점이 작품을 울림 있게 한다. (사진 17) <사격장의 아이들>(김수용, 1967)의 한장면. 아이들이 행여 불발탈이면 폭발할지도 모르는 탄피를 안고 서로 차지하겠다고 뒹구는 장면들은 보는 이를 안타깝게 한다. (사진 18) <사격장의 아이들>(김수용, 1967)에서 영규(배우 송현규)는 불발탄이 터지는 바람에 머리를 다치고 고막이 터진다. 연기 경험이 없던 아역 송현규의 자연스러운 연기가 호평을 받았고, 김수용은 이 작품으로 제5회 청룡영화상 감독상을 수상했다. 1966년 한국영화 흥행 1위 역시 김수용이 연출한 작품 <유정>이다. 서울 개봉 관객만 32만명을 돌파하여 전년도 자신이 세운 흥행 기록(<저 하늘에도 슬픔이>(1965) 서울 개봉 관객 28만 돌파)을 갱신했다. 이광수 소설을 영화화한 <유정>은 일본 로케 촬영으로 북해도 설경을 담아낸 컬러 작품이고, 배우 남정임의 데뷔작이다. 김수용은 소수의 스타들에게만 작품이 집중되는 한국영화 제작 관행을 타파하고 연기자층을 넓히기 위해, 기성 배우들의 아성에 도전하는 신인 배우들을 육성하고자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그가 영화배우로 발굴한 남정임은 여배우 트로이카(남정임, 문희, 윤정희) 중 한 명으로 성장했고 한성, 이훈, 최난경, 주연, 김정철, 임지운 등이 당시 김수용이 주목한 신인 배우들이었다. 이후 강석우(<여수>(김수용, 1978) 주연), 금보라(<물보라>(김수용, 1980) 주연) 등이 그의 작품을 통해 배우로 데뷔하여 활발히 활동했다. (사진 19) <어느 여배우의 고백>(김수용, 1967)에서 배우 한성(왼쪽)과 배우 전계현(오른쪽). 한성은 이 작품에서 겹치기 출연을 하느라 바쁜 톱스타로 등장한다. (사진 20) <웃음소리>(김수용, 1978)에서 주인공 학자를 연기한 배우 남정임. 김수용 감독 작품으로 데뷔하고 은퇴한 배우 남정임의 마지막 영화 출연작이다. 1967년에는 김수용이 데뷔 9년차 감독으로서 이제껏 그의 연출작들에서 함께 일해 왔던 스태프들과 이상적인 호흡을 자랑하는 일종의 ‘드림팀’을 갖추게 된다. 이러한 팀워크를 바탕으로 만든 <만선>, <어느 여배우의 고백>, <산불>, <안개>, <사격장의 아이들>, <까치소리> 등은 한국영화사에 길이 남는 수작으로 꼽힌다. (사진 21) <산불>(김수용, 1967) 촬영 현장을 지휘하는 김수용(가운데 흰 모자 쓴 사람). 그는 1977년에 이 작품을 컬러 영화로 스스로 리메이크 하기도 했다. (사진 22) <산불>(김수용, 1967)에서 열연하는 배우 신영균(왼쪽)과 도금봉(오른쪽). 차범석의 동명 희곡을 영화화했다. 한국전쟁으로 여인들만 남아있는 마을에 빨치산 규복이 숨어든다. 그를 둘러싼 여인들의 욕망과 파국을 통해 전쟁의 비극을 이야기한다. <어느 여배우의 고백>(1967)은 1960년대 한국영화계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 대한 영화’이다. 주연 배우들이 실명으로 출연하고 당시 영화 제작 현장과 기자재들, 스태프들 그리고 이른바 ‘충무로 영화인들’의 문화와 실정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심지어 김수용 본인도 감독으로 출연한다. 왜냐하면 이 작품의 제작에 투자한 지방흥행사(<어느 여배우의 고백>에는 호남 흥행사가 제작자와 면담하는 장면도 있다)가 흥행 감독으로 유명한 김수용의 모습도 관객들이 스크린에서 보길 원한다며, 감독이 직접 출연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는 당대 관객들의 관심이 관람하는 영화 뿐만 아니라 이러한 영화를 ‘만드는 이’와 한국영화계로까지 확장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사진23) <어느 여배우의 고백>(김수용, 1967)에서 영화감독으로 출연하는 전창근 감독 (사진24) <어느 여배우의 고백>(김수용, 1967) 위의 컷 다음에 등장하는 영화 촬영 장면에서 김수용 본인(썬글라스를 쓴 사람)이 감독으로 출연한다. (사진25) <어느 여배우의 고백>(김수용, 1967) 촬영 현장에서 배우 김진규(왼쪽)와 김수용(오른쪽). 이 작품에서 김진규는 신인 배우 남정임을 지원하는 원로 배우로 출연한다. 한국 모더니즘 영화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안개>(김수용, 1967)는 한국영화의 혁신을 목표로 기획되었다고 한다(제작 김동수· 황혜미, 원작·각본 김승옥).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을 영화화한 <안개>는 입도선매 없는 자체 제작이었고, 제작자들의 간섭도 없었기 때문에 감독이 비교적 구애받는 바 없이 작품에 몰두할 수 있었다. 이를 김수용은 이제껏 쌓아온 영화연출 역량을 제약 없이 발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여겼다. 그리하여 주인공의 의식의 흐름에 따라 실재와 환상, 현재와 과거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새로운 감각의 작품으로 연출했다. (사진26) <안개>(김수용, 1967)에서 기준(오른쪽, 배우 신성일)의 고향인 무진으로 가는 버스 안. 뒤쪽 엑스트라 중 모자 쓰고 담배 문 사람이 원작자인 소설가 김승옥이다. <안개>는 1967년 제14회 아시아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하면서 한국의 모더니즘 영화로 주목 받고, 관객의 호응도 얻었다. 일찍이 김수용은 <굴비>(1963)를 감독할 무렵부터 기존의 인습적인 한국영화 표현 방식에 회의를 느끼고, 이를 탈피하는 연출을 강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한 시도는 앞서 <갯마을>(1965)의 ‘시네포엠’적인 몽타주나 <까치소리>(1967)에서 의식의 흐름을 영상화한 장면들에서도 볼 수 있으며, 이후 김수용 특유의 영화적 개성으로 발전한다. <야행>(김수용, 1973년 제작·1977년 개봉)은 그가 “시간과 공간이 항상 유동적이고 주인공이 잘 흔들리고 있다.” 1) 는 점에서 <안개>와 비슷한 시나리오라고 회고한 작품이다. 프리즈 프레임을 통한 비약과 플래쉬백, 점프컷 등을 활용하여 주인공의 심상을 예상치 못한 방향과 템포로, 때로는 권태롭게 때로는 위트 있게 표현한다. <화려한 외출>(1977), <웃음소리>(1978)에서도 선형적인 시공간 구성을 탈피하고, 인물의 내면을 대사 없이 영상과 사운드만으로 직조하는 과감한 시도를 전개하기도 했다. (사진27) <야행>(김수용, 1977)에서 길 가던 행인이 던지는 추파를 거절하는 주인공 현주(배우 윤정희) <수전지대>(김수용, 1968)는 김수용의 조감독이었던 이원세 감독의 오리지널 시나리오(6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나리오부문 입선작)를 영화화했다. 어릴 적 염전마을에서 자라난 이원세 감독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이다. 문예영화를 다수 연출했던 김수용은 그의 조감독들에게 장차 감독이 되려면 문학적 감수성과 글쓰기에 대한 이해를 갖추고, 반드시 시나리오를 쓸 것을 당부했다. 그렇게 김수용의 조감독을 거쳐 데뷔한 감독들로는 조문진, 이원세, 김수형, 정지영, 장길수 등이 있다. (사진28) <수전지대>(김수용, 1968)에서 아낙네들이 소금을 훔치는 장면. 염전마을 사람들은 낮에는 소금밭에서 일하고, 밤이 되면 그 소금을 훔쳐 팔아 생계를 유지한다. (사진29) 동료 감독들과 야유회. 1960년대 후반, 왼쪽부터 이만희 감독, 김수용 감독, 김기덕 감독 1970년대에도 김수용은 소설을 원작으로 한 <토지>(1974), <극락조>(1975), <황토>(1975), <내일은 진실>(1975), <내 마음의 풍차>(1976), <발가락이 닮았다>(1976), <야행>(1977), <화려한 외출>(1977), <웃음소리>(1978), <망명의 늪>(1978), <사랑의 조건>(1979) 등을 연출하는 한편 70년대 초반에는 홍콩 영화제작사 쇼브라더스의 초청을 받아 홍콩에서 <와와후링 娃娃夫人>, <우중화 雨中花>를 연출했다. 그리고 미국으로 건너가 1970년대 초반 할리우드와 미국 영화들을 접하고 돌아온다. 그는 당시 홍콩, 미국 영화계를 방문하고 영화 자본 및 기술력 측면에서 동시대 한국영화계와의 격차를 절감했다고 한다. 70년대 한국영화 시장은 침체기에 접어들었고, 검열에 발목이 잡히는 작품들도 적지 않았다. 김수용이 연출한 <가위 바위 보>(1976)는 베트남에서 서울로 피난 온 아이들이 엄마를 잃고 고아가 되어 뿔뿔이 흩어지게 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베트남 패망을 이유로 주인공이 베트남 국기를 든 모습이 검열 제재를 받는다. <망명의 늪>(김수용, 1978)은 “70년대라는 특수상황 속에서 그것도 영화라는 간섭 심한 장르를 통해서 위선적 지식인을 비판한 것은 감독이 아직 작가로서의 한 가닥 맥박이 뛰고 있음을 증명한 것이다.” 2) 라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당시 군사문화에 익숙한 지식인을 통해 ‘인간의 양심을 묻는 영화’라는 이유로 상영 제재를 가한 당국의 권유로 인해 제작비만 보상 받고 창고 속에 묻혀있었다고 한다. 80년대에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도시로 간 처녀>(김수용, 1981)는 버스안내양들의 열악한 근로환경과 비인간적인 처우 등을 다루었는데, 상영 중지 및 작품 수정, 재상영 등의 고초를 겪었다. 당시 영화평론가협회는 ‘<도시로 간 처녀>의 상영중지에 대한 우리의 주장’이라는 성명을 발표하는 등 영화 창작의 자유에 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삐에로와 국화>(김수용, 1982)는 영화 속 북한의 모습이 “너무 잘 그려졌다”는 이유로 용공 시비에 휘말려 당국으로부터 재촬영을 강요받았다고 한다. 이와 같이 연이어 작품 연출에 제약을 받는 와중에, 그가 의도적으로 서정적인 작품을 선택하여 검열 제재를 피하고자 한 영화가 <만추>(김수용, 1981)이다. 이 작품은 주연을 맡은 배우 김혜자의 호연과 더불어 늦가을이라는 짧은 시간을 배경으로 정일성 촬영 감독의 수려한 화면이 더해져, 원작인 이만희 감독의 <만추>(1966)와 함께 수작으로 꼽힌다. 그러나 중광의 삶을 다룬 <허튼 소리>(김수용, 1986)가 공연윤리위원회의 심의 과정에서 10여개 장면이 잘려나갔고, 김수용은 이에 항의하는 뜻으로 영화계 은퇴를 선언했다. 대학에서 후진 양성에 매진하던 그는 동료 교수이자 극작가 차범석의 권유로 1995년 일본영화 <사랑의 묵시록>을 연출하여 10여년만에 감독으로 복귀하고, 1999년 김지헌 작가와 정일성 촬영 감독과 의기투합한 ‘K.J.K필름’이란 이름으로 제작한 <침향>을 연출했다. (사진30) <만추>(김수용,1981)의 해외용 포스터. 주연 배우 김혜자가 제2회 마닐라국제영화제(1983)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김수용 감독은 당대 관객에게 소구되거나 당대 영화정책에 따른 제작 환경이 요청하는 작품들 모두를 다양하게 만들었다. 데뷔작부터 두각을 보인 코미디영화를 시작으로 청춘영화, 사극영화, 멜로영화, 문예영화 등의 여러 장르를 연출했다. 그는 빈민촌의 고단한 인생살이부터 오픈카를 타고 등교하는 최상류층 대학생들의 청춘까지 다양한 소재와 이야기를 소화하는 폭넓은 스펙트럼의 영화연출력을 갖춘 감독이었다. 그는 철저한 사전 콘티 작업과 함께 “제작기간을 지연시키는 일은 하지 않았고, 밝고 빠른 템포의 즐거운 필름을 칼날같이 약속기한 내에 만들어내는 것을 특기로 삼았다.” 3) 이처럼 김수용은 제작자와 관객, 평단 모두를 만족시키는 영화감독으로서, 1960년대 한국영화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그가 사회적 약자인 어린이들을 다룬 작품들은 아동물로만 소통되지 않고, 전체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아 한국 대중영화의 폭을 넓히는 데 일조했다. 또한 문학적 감수성을 스크린에 발현하여 문예영화의 부흥을 이끄는 한편 자신만의 직관과 개성을 담은 영상 표현을 시도하여 한국영화 화법에 새로운 결을 가져왔다. 김수용의 영화 세계가 선사하는 대담한 담대함, 그리고 특유의 리듬과 위트는 세월이 변해도 관객을 흔드는 영화적 감각, 영화적 체험이다. 1) 권용숙,「김수용」,『한국영화사 구술채록 연구 시리즈 <생애사>』, 2012, 한국영상자료원, 351쪽. 2) 영화평론가 정용탁,「79 문화회고 <6> 영화」,《동아일보》, 1979년 12월 27일. 3) 김수용,「연출기: <혈맥>과 나」, <혈맥> DVD 소책자,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블루키노, 2012, 6쪽.
우리나라 희극은 왠지 감상적이다. 희극이 갖는 밝은 웃음과 축축한 눈물은 상관이 없을 성 싶은데 우리 희극에선 그것이 이상하게 동거 하고 있다. 1) 김희갑은 1945년 반도악극단에서 데뷔했다. 무대 뒤에서 배우들의 대사를 읽어주던 프롬프터였던 김희갑은 김대봉의 대역으로 코미디 배우의 길에 들어서서, 노인역과 코믹한 조연, 고복수, 현인 등의 모창에 재능을 보이며 악극단에서 눈에 띄는 배우로 성장했다. 한국 전쟁 무렵부터는 ‘웃기는 역을 도맡아’ 하면서 연기력을 인정받는 반도가극단의 스타 코미디 배우가 되었다. 그리고 1957년 <청춘쌍곡선>(한형모, 1957)에서 그의 특기인 현인, 남인수, 고복수 등의 모창을 선보이면서 영화계에 진출했다. 이후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비공식으로 700여 편, 공식적으로 약 300여 편의 출연기록을 남기며, 가장 오랫동안 가장 많은 작품에서 활약했다. 김희갑은 1950년대 후반, 약 4~5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3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는데, 이 중 18편 가량이 코미디로 분류되며 그 외에도 <선화공주>(최성관, 1957), <느티나무 있는 언덕>(최훈, 1958), <인생극장>(김지헌, 1959), <사랑이 가기 전에>(정창화, 1959), <유관순>(윤봉춘, 1959), <박서방>(강대진, 1960)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서 조연 혹은 단역을 맡았다. 1950년대 후반, 양석천이나 양훈, 구봉서 등의 동료 코미디언들이 코미디영화의 주연 혹은 비코미디영화의 비중 있는 조연으로 출연할 때, 김희갑은 비교적 비중이 작은 조연이나 단역도 가리지 않고 꾸준히 필모그래피를 늘려갔다. 이 시기, 김희갑을 코미디 스타 반열에 올려놓은 것은 권영순 감독의 <오부자>(1958)였다. 이 영화에서 김희갑은 이종철과 석금성의 네 명의 아들들(양훈, 양석천, 김희갑, 구봉서) 중 한 사람으로 출연하여, 연애담을 중심으로 하는 노래와 코미디를 선보였다. 이 영화는 개봉관인 국도극장에서 제작비를 다 걷어 들일 만큼 큰 인기를 끌었고, 함께 발매되었던 <오부자>의 사운드트랙 음반 역시 엄청난 인기를 모았다. 이 영화의 성공은 1950년대 말의 코미디영화 붐을 이끈 기폭제가 되었다. 양훈과 양석천이 이미 인지도 있는 라디오 및 영화계 최고의 스타였던 데 비하여, 이제 막 영화에 발을 들인 악극단의 작은 스타였던 김희갑과 구봉서는 이 영화를 통해 ‘합죽이’와 ‘막둥이’라는 평생을 따라다닌 애칭을 얻으면서 비로소 전국적인 스타덤에 오르게 되었다. (사진1) <오부자>(권영순, 1958) 포스터. 왼쪽부터 구봉서, 양석천, 이종철, 양훈, 김희갑. ‘뮈지칼코메듸’, ‘음악희극영화’라는 장르 명칭이 포스터 왼편 위쪽에 명시되어 있다. 김희갑은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초까지 코미디영화의 공동주연뿐 아니라 비코미디영화에서 코믹 릴리프를 담당(<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신상옥, 1961), <성춘향>(신상옥, 1961))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그밖에 주인공의 친구로 등장(<박서방>(강대진, 1960), <서울의 지붕 밑>(이형표, 1961))하거나 단역으로도 출연(<청춘쌍곡선>, <백만장자가 되려면>(정일택, 1959))하면서 다양한 스펙트럼의 연기를 선보였다. 1960년대 초반, 양석천․양훈의 활동이 뜸해지면서 코미디영화의 인기 상승곡선이 소강상태에 이르고 제작 빈도가 줄어들던 시기에 오히려 김희갑의 활동은 더 활발해졌다. 김희갑은 이 시기 코미디영화의 명실상부한 주연배우로 자리매김 되었을 뿐 아니라, 당시 제작되었던 거의 모든 장르의 영화들에서 코믹 릴리프 역할을 수행하며 가장 많은 영화에 겹치기 출연하는 배우 중 한 사람이었다. 양석천과 양훈, 구봉서나 곽규석 등의 코미디언들이 코미디영화와 코믹 시퀀스를 통해 '코미디 배우'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냈다면, 김희갑은 코미디 장르나 코믹함을 넘어 거의 모든 장르의 영화에서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 갔던 것이다. 즉, 김희갑은 단독 주연을 맡은 영화보다는 공동 주연을 맡거나 극의 코믹한 성격을 불어넣는 조연 역할로 출연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연기 초반에는 그의 특기였던 모창 실력을 드러낼 수 있는 영화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후기로 갈수록 코미디보다는 드라마적 성격이 강한 영화에 출연했는데,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신상옥, 1961), <와룡선생 상경기>(김용덕, 1962), <팔도강산>(배석인, 1967), <속 팔도강산>(양종해, 1968), <내일의 팔도강산>(강대철, 1971) 등에서 뛰어난 연기력을 선보이며, 1970년대까지 계속 활발하게 활동했다.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를 거치며 본격적인 TV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을 때, 코미디 배우들이 대부분 <웃으면 복이 와요>나 <쇼쇼쇼> 등의 코미디, 쇼 프로그램 등을 주 무대로 삼았던 것과 달리, 김희갑은 <꽃피는 팔도강산>, <제삼지대>와 같은 드라마를 중심으로 활동 범위를 넓혔다. (사진2) <성춘향>(신상옥, 1961)의 한 장면. 김희갑과 구봉서는 춘향이를 잡아오라는 변사또의 명을 받아 춘향의 집에 가는 포졸 역할로 등장했다. 춘향의 수난이 시작되는 시점에 등장한 두 사람은 점차 고조되는 춘향과 변학도 간의 긴장을 잠시 완화시켜 주는 ‘코믹 릴리프’의 역할을 수행했다. 1950년대가 홀쭉이와 뚱뚱이, 즉 양훈과 양석천의 시대였다면, 1960년대는 구봉서, 김희갑, 서영춘 등의 코미디가 빛을 발하던 시기였다. 김희갑 코미디의 특성 역시 1960년대 영화들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1950년대 김희갑은 다수의 코미디영화에 출연했지만, 주연배우로서의 존재감을 드러낸 영화는 많지 않았으나 1960년대 영화들에서부터 김희갑이라는 캐릭터와 김희갑의 코미디 스타일이 부각되는 경우가 많아지기 시작한다. '장르'로서 ‘김희갑’의 독특하고도 연속적인 관습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1960년대 영화들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워낙 다작이었기 때문에 김희갑의 코미디를 몇 가지 경향으로 정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이 글은 1960년대 김희갑이 주연 혹은 주연급 조연으로 출연했던 코미디영화들로 텍스트를 한정하여 김희갑 코미디의 특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앞서 인용했던 신문기사가 언급했듯이 "왠지 감상적"이고 밝은 웃음과 축축한 눈물이 동거하며 희극의 페이소스가 유난히 강조되는 것이 '한국형 코미디'의 큰 특징 중 하나였다고 한다면, 여기에 가장 가까운 것은 김희갑의 코미디라 할 수 있다. 김희갑의 코미디들은 1960년대 초반 영화계를 휩쓸었던 홈드라마에 근사(近似)한 것으로, 김승호 주연 홈드라마의 '코미디 버전'이라고도 볼 수 있다. 1960년대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와룡선생 상경기>나 <팔도강산> 시리즈는 드라마적 성격이 강화된 코미디들로, 이러한 경향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그의 코미디들은 '엎치락뒤치락'의 활기로 표현되는 양석천 양훈의 코미디나 '청춘 코미디'의 성격이 강한 구봉서의 코미디와 달리, '페이소스'를 내세워 감상적이고 구구절절한 사연 있는 인물들을 등장시킴으로써 ‘누선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예컨대 <김희갑의 청춘고백>(최경옥, 1964)은 동아방송의 인기 라디오 프로그램인 <김희갑쇼>를 영화화한 것으로, <김희갑쇼>는 김희갑이 시골에서 올라와 성공을 하게 되기까지의 인생사와 그에 얽힌 인물들의 이야기를 에피소드 형식으로 이어가며 흘러간 옛 가요를 이야기 중간에 끼워 넣는 뮤지컬 코미디극형식이었다. 라디오극에서 비롯된 영화 <김희갑의 청춘고백>은 김희갑의 장기인 모창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출세하기 위해 무작정 서울로 뛰어든 가난한 청년과 그를 의지하는 고아 자매의 이야기를 큰 축으로 하는 '애조 띤' 코미디로 제작되었다. (사진3) <깁희갑의 청춘고백>(최경옥, 1964) 포스터. 김희갑의 얼굴을 전면에 내세운 이 영화에서 김희갑은 시골에서 올라와 ‘몸부림’빠의 전속밴드 멤버로 취업한 ‘김희갑’을 연기했다. 코미디언들의 성공담을 허구로 재구성한 코미디영화는 1960-70년대에 많이 만들어졌다. 이렇게 감상성이 가미된 김희갑 코미디의 경향은 천경자가 썼듯이 "카이젤 수염의 센티멘탈"과 "친근감을 주는 한국적 체취"를 갖는 "그야말로 코리언적인 체취가 풍기는 좋은 개성의 코미디언"2 ) 이라는 그의 페르소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1) 공감과 풍자 김희갑이 출연했던 1950년대 후반 코미디 영화는 총 18편이었다. 이 중, 확인 가능한 작품에 한하여 김희갑이 주연으로 이름을 올린 작품은 <오부자>, <웃어야 할까 울어야 할까>, <복도 많지 뭐유>, <구혼결사대>, <부전자전>, <청춘배달>, <오형제> 7편이다. 이 7편의 영화에서 김희갑은 구봉서 등과 함께 공동주연을 맡았는데, 이 영화들은 로맨스가 가미된 청춘코미디에 가까웠다. 김희갑 역시 구봉서의 형제 혹은 친구 역을 맡아 취업과 연애에 성공하는 인물로 등장했는데, 단 한 편 <부전자전>에서는 김희갑이 구봉서의 아버지로 출연하여 중심 서사에서 제외되었다. 구봉서가 1960년대까지 이러한 청춘코미디의 경향을 이어가 자신의 장르로 만들었다면, 1960년대 김희갑은 매우 다른 경향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즉, 1950년대의 명랑한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감상성'이 1960년대 김희갑의 코미디에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사진4) <서울의 지붕 밑>(이형표, 1961) 포스터. 김승호를 주연으로, 허장강과 김희갑은 그의 친구로 등장하여 코믹한 노인 3인방을 연기했다. 기본적으로 코믹한 캐릭터였지만, 김희갑은 가족도, 돈도 없이 친구들의 놀림을 당하는 가련하고 초라한 노인의 감상성을 보여주었다. 1950~60년대 코미디영화에서 김희갑이 맡은 내러티브의 역할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두 경우에서 모두 김희갑은 공감을 하거나 공감을 받을 수 있는, 관객들과 심리적으로 가까운 거리에 서 있는 인물로 등장한다. 첫 번째 경우는 김희갑 단독 주연 영화들에서 주로 볼 수 있는 경향으로, 김희갑을 주연으로 내세우고는 있지만 그가 관찰자의 입장에 서게 되는 경우이다. <와룡선생 상경기>(김용덕, 1962), <합죽이의 신혼열차>(황외천, 1962), <희갑 목욕탕 개업하다>(안성찬, 1963), <청색아파트>(이형표, 1963), <오색무지개>(조긍하, 1963) 등의 영화에서 김희갑은 주연이되, 논평하고 공감하는 관찰자 입장에 더 가까운 역할을 맡아 다른 등장인물들이 벌이는 내러티브 사건들에 개입하여 화해를 이끌어내는 인물로 기능한다. 그리하여 주요 내러티브 사건이나 사연들은 주인공 김희갑이 방문하는 서울의 제자들, 개업한 목욕탕의 손님들 혹은 김희갑이 소유주로 있는 아파트의 입주자이거나 김희갑의 자식들을 둘러싸고 벌어진다. 김희갑은 은퇴한 선생, 목욕탕 주인, 여행자, 아파트의 소유주, 아버지로서 대면하는 이들이 일으키는 다양한 사건, 사고들을 함께 겪고 공감해주는 인물이 된다. 김희갑의 초기 대표작 <와룡선생 상경기>를 비롯하여, 1960년대 후반에 제작되어 1970년대까지 속편을 거듭하고 TV 연속극으로도 제작되었던 <팔도강산> 시리즈 역시 이 계열에 속한다. <와룡선생 상경기>는 은퇴한 와룡선생이 서울 사는 제자들을 둘러보기 위해 상경하는데 대기업의 중역이거나 사업가로 성공한 제자들은 와룡선생을 박대하지만 소매치기, 빠 걸, 가난한 과부와 상이군인 등 근대화된 서울에 적응하지 못한 제자들만 와룡선생을 따뜻하게 맞는다. 그리고 '너무 출세하면 인간미가 없어진다'던 와룡선생의 교훈에 따라 잘못을 뉘우치고 제각기 변화한 제자들이 한 데 모여 와룡선생을 전송하는 장면이 엔딩으로 제시된다. (사진 5) <와룡선생 상경기>(김용덕, 1962)의 한 장면. 영화가 시작되면, 와룡선생은 눈물을 흘리면서 정년퇴임을 하고 정들었던 ‘신도국민학교’를 떠난다. (사진 6) <와룡선생 상경기>(김용덕, 1962)의 한 장면. 서울에 온 와룡선생. 제자(이대엽)가 결혼하게 될 여성(엄앵란)의 아버지(양훈, 왼쪽)와 계속 소동으로 얽히게 되는 와룡선생(김희갑, 오른쪽). <팔도강산>(배석인, 1967) 역시 ‘팔도’에 사는 자녀들을 방문하기 위해 부인과 함께 전국 일주에 나선다는 큰 틀을 가진 이야기로, 김희갑과 그의 부인(황정순)이 내러티브를 이끌어가는 주요 인물이되 내러티브 사건은 이들의 자녀들을 둘러싸고 벌어진다는 점에서 동일한 서사 전략을 취한다. <팔도강산>의 김희갑 부부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그에 적합한 음악 및 풍물을 소개하면서 근대화된 조국의 모습에 감격하고, 어렵게 살고 있는 자식을 도와주고 버릇없는 자식에게는 깨달음을 주면서 여행을 마감한다. 그리고 마지막 회갑연에서 전국 각지에 살고 있는 자식들을 불러 모아 우애 있게, 효도하며, '조국의 역군'으로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전해준다. 이러한 영화들에서 김희갑은 여타 등장인물들의 사연에 크게 공감하고 안타까워하고 깨달음을 주기도 하면서 화해와 중재를 이끌어 내는 아버지의 형상으로 그려진다. (사진 7) <팔도강산>(배석인, 1967) 포스터. 이 영화는 국립영화제작소에서 만들어 이후 속편과 3편, 문화영화에서의 다양한 변주 시리즈들을 거친 뒤, 텔레비전에서 <꽃피는 팔도강산>으로 지속되었다.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김희갑의 아버지 역할의 전형이 된 작품이었으나, 시리즈가 진행될수록 더욱 노골적으로 친정부적이고 선전적인 색을 드러내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둘째, 공처가, 난봉꾼, 촌로, 구두쇠 등 일상적인 생활인으로서 코믹한 역할을 담당하는 경우로, 김희갑이 출연한 코미디영화의 대부분이 이런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부전자전>, <오형제>, <월급쟁이>, <마이동풍>, <신사는 새 것을 좋아한다> 등의 주연작 뿐 아니라 <고바우>, <구봉서의 벼락부자>, <로맨스그레이>, <남자조종법>, <남자식모>, <특등비서>, <신세 좀 지자구요> 등 조연으로 출연했던 대부분의 코미디영화 및 여타 장르의 드라마에서도 김희갑은 주로 코믹 시퀀스를 연기하는 일상적 생활인으로 등장했다. 이 경우, 김희갑은 평범한 인물이지만 숨기고 싶은 비밀 혹은 결함을 가진 캐릭터로 등장하면서 관객들의 공감과 함께 웃음을 이끌어내는 인물로 기능한다. 즉, 김희갑은 밖에서는 바람을 피우지만 집에서는 부인에게 꼼짝 못하는 공처가(<마이동풍>, <로맨스 그레이>, <남자식모>, <특등비서>), 급사를 사랑하는 회사 중역(<오형제>), 식모를 사랑하는 어리숙한 노인(<약혼녀>), 잘못된 자식 사랑으로 문제에 처하는 아버지(<부전자전>) 등의 역할을 맡아 소동을 벌이면서 웃음과 함께 페이소스를 이끌어낸다. 그러나 비극과 달리 코미디에서는 아무리 큰 결함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인물을 파멸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통합으로 이끄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동한다는 점에서 김희갑이 맡은 인물들은 의미심장하다. 일련의 사건들을 계기로 바람난 공처가는 가정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고 급사와 식모를 사랑하던 이들은 우여곡절 끝에 진정한 사랑의 중요성을 느끼게 되며, 잘못된 자식 사랑으로 야기되었던 문제는 돈보다 귀한 것이 있음을 깨달음으로써 해결된다. 김희갑이 출연한 대부분의 작품에서 이러한 인물형을 연기했던 것은 그 인물형이 코미디나 코믹함의 표현에 적합한 것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진8) <마이동풍>(이봉래, 1961)의 한장면. 주당 3인방 김희갑, 구봉서, 양석천의 금주 소동을 다룬 영화로 김희갑은 ‘천하의 공처가’ 역할을 맡았다. (사진9)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신상옥, 1961)의 한 장면. 도금봉과 김희갑 콤비의 사랑 이야기가 소소한 웃음을 주면서 현실적인 사랑의 모습을 그렸다. 공감하는 관찰자의 형상이든, 결함이나 비밀을 가진 채 일상을 살아가는 생활인의 모습이든 김희갑은 평범하면서도 코믹한 인물들의 캐리커처에 누구보다 강점을 보였던 연기자로, 김희갑이 그려냈던 인물들은 갈등을 일으키는 인물보다는 갈등을 해결하고 통합을 이루는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그의 코미디 속에는 눈물샘을 자극하는 사연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했다. 불과 세 살 차이지만 항상 연애 서사의 중심에 선 청년을 연기했던 구봉서에 비해, 30대 후반부터 중년 혹은 노년을 연기했던 김희갑은 선량해 보이는 얼굴과 인생의 희노애락을 알 법하게 겉늙어 보이는 외모, 그리고 뛰어난 연기력과 코믹한 애드리브 능력을 바탕으로 평범한 중년/노년의 일상을 가장 잘 표현하는 배우였으며 그의 눈물과 웃음을 통해 관객들은 그와 함께 공감할 수 있었다. 2) ‘생활과 윤리감, 그리고 페이소스’ 양석천과 양훈으로 대표되는 1950년대 코미디가 무질서의 활력을 이야기하는 '아나키즘적 코미디'의 경향을 보였고 구봉서가 1960년대 후반까지 이어지는 '청춘코미디'에서 독보적 영역을 구축했다면, 김희갑의 코미디는 애상적 정서를 띤 코미디로 1960년대 초반에 등장했던 홈드라마와 깊은 친연성을 가진 것이었다. 1960년대 초반 김희갑과 김승호가 짝을 이루어 등장하던, 홈드라마에 가까운 일련의 코미디들에 대해 이영일은 "생활이 있는 희극" 혹은 "풍속적 희극"이라고 칭했다. 이영일에 따르면 풍속적 희극이란 일상인들의 생활에 밀착되어 있는 코미디로 "소시민 상인, 말단 샐러리맨, 말단 회사간부, 시골선비" 등을 주인공으로 삼아 그의 일상을 통해 세태풍속을 그리는 동시에, 세태를 풍자하고 페이소스를 표현한 희극을 일컫는 것이다. 여기에는 '인생'과 '사회'가 "충실하게" 그려져야만 한다. 김희갑의 1960년대 초반 코미디들은 이영일이 가장 높게 평가했던 '풍속코미디'의 정의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3) 지금까지 살펴본 김희갑의 코미디들은 김희갑의 시선을 통해서 바라본, 혹은 김희갑 자신이 겪는 일상 속의 인물들과 사건들을 중심으로 했다. 그리고 공감의 중심에 서 있는 김희갑을 통해 가족 안에서의 화합과 더 나아가 새 시대의 질서 안에서의 통합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김희갑 코미디의 '통합'은 근대화 과정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뒤떨어졌지만 '충', '효', '예'와 같은 전근대적 가치관을 간직하고 있는 '페이소스'를 불러일으키는 인물들과, 속악한 근대화의 과정을 거쳐 '성공'한 희화화된 인물들 사이의 물질적 중재와 가치관의 중재를 포함한다. 그의 영화에서는 근대화된 환경들–구획된 도시, 서구적 생활환경, 개발 중인 팔도강산 등-의 전시를 통한 물질적 근대화가 강조된다. 특히 <팔도강산> 시리즈에서는 국가의 근대화 정책에 대한 찬양과 동조가 노골적으로 표현된다. 예컨대 <내일의 팔도강산(제3편)>(강대철, 1971)에는 전라도 농촌에 사는 사위 노식을 찾아간 희갑이 도시보다 농어촌이 더 많은 혜택을 입고 있다고 설교하는 장면이 삽입된다. 농어촌의 상대적 빈곤과 박탈감을 오히려 "혜택"으로 둔갑시켜 위로하는 한편, 사대강 개발이라는 국책을 편향적으로 선전하는 이 장면은 김희갑 코미디가 근간하는 이데올로기적 위치를 분명히 적시한다. 또한, 물질적 근대화, 세속적 성공을 긍정하기 위한 전략으로 '남존여비', '엄한 가부장', '형제간의 우애'와 '동료의식' 같은 전근대적 가치관의 '회복'이 주장된다. <내일의 팔도강산>의 후반부에는 사업을 무리하게 확장하려다 망하게 된 허풍장이 첫째 사위 장강과 그를 도우려는 성실한 넷째 사위 영균, 그리고 그런 그들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장모 정순과 훈계하는 장인 희갑이 등장한다. 즉, <팔도강산> 시리즈는 '근대화' 자체는 긍정하되 희화화된 인물들을 통해 그려지는 '속악한 근대화'만이 지양되어야 할 것임을 주장하면서 "올바른 근대화"의 방향을 제시하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합당한 '중재'와 '화해'로 나아가는 전략을 택한다. 그리하여 근대화의 그늘에 가려져 있거나 소외된 이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물질적 "성공"을 긍정하여 그것을 추구하도록 함으로써 그들 스스로 지배질서에 편입되도록 인도한다. 이러한 김희갑 코미디의 주제의식의 표명은 '근대국가' 형성의 논리를 앞세우던 박정희 정권의 이데올로기에 부합하는 것으로, 이후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국책으로 후원되고 장려되었던 김희갑의 <팔도강산> 시리즈와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도 지속되었다. (사진10) <속 팔도강산 – 세계를 간다>(양종해, 1968) 포스터. <팔도강산> 시리즈의 두 번째 편 (사진11) <내일의 팔도강산 – 제3편->의 한 장면. 전라도 사위 노식에게 농촌이 받고 있는 혜택에 대해 설명하는 희갑. 왼쪽부터 김희갑, 박노식, 황정순. (사진12) <아름다운 팔도강산>(강혁, 1971) - <팔도강산> 시리즈의 4번째 편 포스터 (사진13) <우리의 팔도강산>(장일호, 1972) - <팔도강산> 시리즈의 5번째 편 포스터 1950년대 코미디를 대표하는 양석천과 양훈의 코미디가 무질서의 활력을 이야기하고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에 지속적으로 만들어졌던 구봉서의 코미디가 낙관적 전망을 보여주면서도 점차 지배질서에 순응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면, 1960년대와 70년대에 걸쳐 제작되었던 김희갑의 코미디는 좀 더 생활밀착형 인물들을 등장시켜 관객들의 공감을 이끌었다. 그리하여 이 인물들에 대한 연민에서 비롯되는 애상적 감정을 숨기지 않으면서 지배질서로의 통합을 보다 정교하고도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는 영화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 “[신영화] 소시민적인 인정희극/ 이봉래 감독 <월급장이>”, 《한국일보》 1962. 7. 22. 4면. 2) 천경자, "웃는 얼굴 웃기는 얼굴 - 김희갑 편“, 《한국일보》1963.1.1.14면. 3) 이영일, 『한국영화전사- 개정증보판』, 소도, 2004, 360쪽. <참고문헌> “[신영화] 소시민적인 인정희극/ 이봉래 감독 <월급장이>”, 《한국일보》 1962. 7. 22. 4면. 천경자, "웃는 얼굴 웃기는 얼굴 - 김희갑 편“, 《한국일보》 1963.1.1.14면. 이영일, 『한국영화전사- 개정증보판』, 소도, 2004. 박선영, 『코미디언 전성시대- 한국 코미디영화의 역사와 정치미학』, 소명출판, 2018.
구봉서는 1945년 악극단의 악사이자 배우로 연예계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반세기가 넘는 긴 시간 동안 라디오, 영화, 텔레비전에서 활약하면서 코미디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삶 자체가 한국 코미디의 역사였던 우리 시대 최고의 코미디언이다. 구봉서는 1945년 태평양악극단에서 데뷔하는데, 임시 악사였던 구봉서는 김대봉의 대역으로 코미디 배우의 길에 들어선다. 훤칠한 외모와 능청스러운 말솜씨로 코미디와 쇼 무대에서 사랑을 받았던 구봉서는 악극단에서 눈에 띄는 스타로 성장하게 된다. 전쟁기 구봉서는 종군연예인으로 약 5년간 활동했으며 같은 시기 라디오 방송에도 진출하여 홀쭉이 양석천과 함께 <홀쭉이와 길쭉이> 등의 프로그램과 대북방송을 진행했다. 1956년 문화성 감독의 <애정파도>로 영화계에 데뷔할 때, 구봉서는 이미 포스터 한쪽에 코믹한 장면을 연기하는 모습이 들어갈 정도로 잘 알려진 스타였다. (사진2) <애정파도>(문하성, 1956) 포스터. 오른쪽 아래 코믹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구봉서와 박옥초 구봉서를 명실상부한 코미디 스타 반열에 올려놓은 것은 권영순 감독의 <오부자>(1958)였다. 이 영화에서 그는 이종철과 복혜숙 부부의 아들 넷(양훈, 양석천, 김희갑, 구봉서) 중 막내로 출연, 연애담을 중심으로 하는 노래와 코미디를 선보였다. (사진3) <오부자>(권영순, 1958) 포스터. 왼쪽부터 구봉서, 양석천, 이종철, 양훈, 김희갑. 아버지 이종철과 네 형제 영웅호걸의 이야기 중 구봉서는 ‘막둥이’ ‘걸’ 역할을 맡았다. 포스터 상단에 '뮈직칼 코메듸' 라는 장르명칭이 부각되어 있다. 이 영화는 당시 개봉관인 국도극장의 입장수익만으로도 제작비를 다 충당할 정도로 큰 인기를 얻었으며, 이 영화의 성공은 코미디영화 제작의 활성화라는 산업적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리고 구봉서는 이 영화를 통해 '막둥이'라는, 평생을 따라다닌 애칭을 얻게 되었다. (사진 4) <오부자>(권영순, 1958)의 한 장면. 상사병으로 앓아누운 호(김희갑)를 진찰하러 온 의사와 그를 둘러싼 가족들. 왼쪽부터 어머니 역할의 복혜숙, 걸(구봉서), 웅(양석천), 아버지(이종철), 영(양훈) (사진 5) <오부자>(권영순, 1958)의 한 장면. 구봉서와 상대역 최지희 이후, 1970년대까지 다수의 영화에서 주조연으로 출연하면서 대표적인 코미디 배우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구봉서는 1970년대 초반까지 약 40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으며, 특히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후반까지 이어지는 코미디영화 열풍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는 <백만장자가 되면>(정일택, 1959), <구봉서의 벼락부자>(김수용, 1961), <이거 됩니까 이거 안됩니다>(박종호, 1964), <단벌신사>(김기풍, 1968), <남자식모>(심우섭, 1968), <남자 미용사>(심우섭, 1968)와 같은 원톱 영화들에서 뿐 아니라 (사진 6) (사진 7) <단벌신사>(김기풍, 1968) 포스터(위)와 <단벌신사>(김기풍, 1968)의 한 장면(아래). 복권이 든 양복을 찾아 좌충우돌하던 구봉서와 서영춘이 우연히 쇼단체의 무대 위에 서게 되었다. <서울의 지붕밑>(이형표, 1961), <성춘향>(신상옥, 1961), <맹진사댁 경사>(이용민, 1962), <또순이>(박상호, 1963), <돌아오지 않는 해병>(이만희, 1963)과 같은 영화에서도 비중 있는 조연으로 확실히 존재감을 드러내는 배우였다. (사진 8) <성춘향>(신상옥, 1961)의 한 장면. 춘향을 잡으러 가는 포졸 역할의 김희갑(좌)과 구봉서 (사진 9) <돌아오지 않는 해병>(이만희, 1963)의 한 장면. 부대의 막걸리 회식 장면에서 좌중을 즐겁게 하는 구일병 역할의 구봉서 그런가하면, <수학여행>(유현목, 1969)처럼 코미디가 아닌 영화의 주연으로서도 훌륭한 연기를 선보였다. (사진 10) <수학여행>(유현목, 1969) 포스터. 구봉서와 문희. 구봉서는 낙도의 어린이들을 데리고 서울로 수학여행을 간 선생님의 역할을 맡았다. 이 영화는 제4회 테헤란국제아동영화제 그랑프리 및 심사위원특별상을 수상했다. 양석천과 양훈이 1950년대 후반 가장 먼저 영화계를 석권했던 코미디 배우였다면, 구봉서는 가장 긴 시간, 가장 많은 코미디영화에서 주연을 도맡았던 경우라 할 수 있다. 양석천과 양훈이 1950년대 이후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나 김희갑이 더 많은 영화에 출연했으나 단독 주연을 맡았던 작품보다는 공동 주연이거나 비중 있는 주연급 조연을 맡은 경우가 더 많았다는 것과 비교해 볼 때, 구봉서는 비슷한 시기에 영화로 옮겨왔던 악극단 스타들 중에서도 10년 넘게 주연 배우로 활약한 드문 경우였다. 1950년대 후반은 구봉서가 악극단에서 영화계로 활동 범위를 넓혀가던 시기로, 이 시기에 제작된 코미디 영화에서 구봉서는 단독 주연보다, 공동주연 혹은 비중 있는 조연의 역할을 맡으면서 내러티브의 중심인물을 보조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실제로 구봉서 코미디의 특성을 더 잘 보여주는 것은 1960년대 후반 코미디라고 볼 수 있다. 1950년대로 유효시기가 다한 양석천, 양훈의 코미디와 달리 1960년대까지, 그리고 영화를 넘어 텔레비전으로 영향력을 확대했던 1970년대와 80년대까지 구봉서의 코미디는 일정한 경향을 띠고 지속되었다. 이 글은 구봉서 코미디의 '일정한 경향'을 하나의 “'장르'로서의 구봉서 코미디”가 갖는 특성으로 규정하고자 한다. 이는 첫째, 내러티브적으로는 ‘취업’과 ‘결혼’이라는 지상과제를 해결하는 구성을 띤다는 점, 둘째, 내용적으로는 ‘명랑’하고 ‘건전’한 중산층의 윤리를 대변한다는 점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취업과 결혼이라는 지상과제 먼저, 1950년대 후반 출연작들에서 구봉서가 맡은 역할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해볼 수 있다. 첫째, <오부자>(권영순, 1958)나 <오형제>(김화랑, 1960), <구혼결사대>(김수용, 1959) 등 다중주연 영화에서 공동주연을 맡아 좌충우돌하다가 제 각기 연애에 성공하는 '막둥이' 캐릭터. 이때, 연애서사는 공동주연을 맡은 인물들 각자에게 가장 중요한, 그리고 유일한 내러티브가 된다. 영화의 엔딩은 합동결혼식이나 그에 준하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둘째, <삼인의 신부>(김수용, 1959), <청춘배달>(김수용, 1959), <부전자전>(강대진, 1959), <복도 많지 뭐유>(백호빈, 1959) 등도 다중주연 영화에 속하지만, 주인공들은 시골에서 상경하여(혹은 실직 상태에서) 사랑과 취업 두 가지를 모두 추구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여기서는 연애서사와 취업을 위한 노력 두 가지가 주요 내러티브 사건이 되며, 첫 번째 경우와 마찬가지로 합동결혼이나 그에 준하는 장면이 엔딩으로 제시된다. 마지막으로 <공처가>(김수용, 1958)에서의 곰탕집 사위이자 아내에게 꼼짝 못하는 캐릭터처럼,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는 생활인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있다. 이 유형에서 구봉서는 주연보다 조연에 가까운 역할을 맡았으며, 1950년대 코미디보다는 타 장르의 영화나 1960년대 이후의 코미디에서 더 많이 찾아볼 수 있는 유형이라 하겠다. (사진 11) <복도 많지 뭐유>(백호빈, 1959) 포스터. 좌측부터 김희갑, 주선태, 구봉서 이상의 분류에서 첫 번째와 두 번째, 즉 구봉서가 주연배우로 등장하는 코미디영화로 대상을 한정해서 구봉서 코미디의 특징을 살펴보자. 양석천, 양훈 코미디가 뒤죽박죽 얽히고설킨 내러티브 속에서 그 혼돈과 해결 불가능성을 즐기는 것이라고 할 때, 구봉서가 등장하는 코미디들은 연애 혹은 연애와 취업이 주 해결과제로 주어지고, 여러 가지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과정에서 그것(들)에 성공하는 내러티브 구성을 보여준다. 준수한 외모 덕에 구봉서가 주연으로 등장하는 영화는 로맨틱한 요소들을 띠는 연애서사가 전면에 배치되었고, "건전하고 명랑한 소시민"이라는 페르소나에 힘입어 그의 캐릭터들은 '취업'과 '결혼'을 통해 주류 사회로 진입하는 지상과제에 집중했던 것이다. 보다 강렬하고 스펙터클한 코미디를 보여주던 양석천과 양훈이 빠른 속도로 소비되어 가는 동안, 1950년대 출연작들에서 구봉서는 거의 3인~5인의 주인공 중 한 사람 몫을 담당하는 정도에 머무르면서 꾸준히 필모그래피를 늘렸다. 이 시기부터 비교적 일관성을 가지고 다루었던 연애와 취업이라는 두 가지 모티프와 그것을 이루어가는 내러티브 구성은 1960년대까지 이어지면서 구봉서 코미디 내러티브의 핵심적인 구성요소가 되었다. 1960년대 초반, 양석천이 실연무대에 전력을 다하고 양훈이 사업 실패와 이혼 등의 개인적인 문제들로 영화출연이 뜸해진 동안, 구봉서와 김희갑은 최고의 주가를 올리는 코미디 배우로 입지를 굳혔다. 특히 구봉서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 더욱 친숙한 대중스타가 되었는데, 그가 매일 아침 8시 고정으로 진행하던 동아방송의 라디오 프로그램 <안녕하십니까>는 '건전한 소시민'의 시각에서 사회를 풍자하는 것이었다. 영화 외의 대중매체들- 라디오와 텔레비전, 신문 등-을 통해 굳혀지고 다시 영화와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강화되었던 구봉서의 '건전하고 상식적인 생활인'으로서의 스타 페르소나는 구봉서의 인지도를 높이는 데 일조했으며, 1960년대 초반에는 "한국에서 가장 바쁜 사나이"(《동아일보》, 1963. 10. 15.)라는 타이틀을 얻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구봉서의 벼락부자>(김수용, 1961), <구봉서의 인생출발>, <이거 됩니까 이거 안 됩니다>(박종호, 1964)와 같이 아예 구봉서의 스타성을 전면에 내세운 영화들을 비롯하여, <사장 딸은 올드미쓰>(김응천, 1963), <남자는 안 팔려>(임권택, 1963), <죽자니 청춘 살자니 고생>(권철휘, 1964) 등 흥행작의 성공을 이끌면서 구봉서는 1960년대 전반기 동안 단독 주연이 가능한 코미디 배우로서 가능성을 입증하게 하게 되었다. (사진12) <사장 딸은 올드미쓰>(김응천, 1963) 포스터. 구봉서와 상대역 방성자가 가장 크게 자리하고, 왼쪽은 곽규석과 남미리, 아래 좌측부터 양훈과 황정순, 주선태과 백금녀, 독고성과 주란지 (사진 13) <남자는 안 팔려>(임권택, 1963) 신문광고. 여장을 한 구봉서(우)와 이대엽(좌) <호랑이 꼬리를 밟은 사나이>(이강원, 1963)처럼 스릴러코미디를 표방한 영화, <구봉서의 벼락부자>나 <이거 됩니까 이거 안 됩니다>처럼 사회풍자의 성격이 가미된 영화 등 1960년대 초반에는 코미디형식의 다양한 변화를 꾀한 작품들도 시도되었다. (사진 14) <구봉서의 벼락부자>(김수용, 1961) 샐러리맨 구봉서와 직장 상사 양훈(우). 구봉서의 두 번째 주연작으로 구봉서는 이 영화에서 한국전쟁 때 목숨을 구해줬던 미국인의 유산을 받아 벼락부자가 된 샐러리맨으로 출연했다. (사진 15) <이거 됩니까 이거 안됩니다>(박종호, 1964)의 신문광고. 구봉서가 진행했던 라디오프로그램의 유행어 ‘이거 됩니까 이거 안됩니다’를 제명으로 한 풍자 영화 그러나 무엇보다 구봉서가 코미디영화의 전성기를 이끌기 시작했던 것은 심우섭 감독과 만나 본격적인 '구봉서식 코미디'를 꽃피우기 시작한 1960년대 후반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남자 시리즈와 팔푼이 시리즈 등 인기 출연작들에서 구봉서는 1950년대 코미디에서 본인이 가지고 있던 캐릭터와 서사를 유지한다. 즉, 이 영화 속에서 구봉서는 여전히 시골에서 갓 상경하거나 실직을 함으로써 직업을 구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으며, 그 과정에서 진정한 사랑을 만나게 되는 내러티브 사건을 겪는다. 그리고 여러 가지 소동에 휘말리거나 스스로 소동을 벌이면서, 그 속에서 홀로 중심을 잡고 여타 등장인물들에게 훈계를 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예컨대, <남자와 기생>(심우섭, 1969)에서 그(태호)는 여성스러운 성격 탓에 직장에서 해고당하고 여동생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기생 산월이로 변장하는데, 산월이는 요릿집에서 만난 기생 정미를 보호하며 자신에게 반한 옛 상사 허사장을 골탕 먹인다. 태호는 정미에게는 '희망을 가지고 살 것'과 허사장에게는 '가정에 충실할 것', 허사장의 부인에게는 '남편에게 서비스를 잘 해서 기생집에 가지 않도록 할 것'을 주문한다. 그리고 정미와 로맨스를 이루면서 자신의 남성성을 회복한다. (사진 16) <남자 식모>(심우섭, 1968) 포스터. 구봉서의 ‘남자 시리즈’ 중 첫 번째 영화. 이 영화의 성공으로 남자 시리즈가 연달아 두 편 더 제작되었다. (사진17) <남자와 기생>(심우섭, 1969)포스터. 원제는 <남자기생>이었으나 경박하다는 검열관의 지적에 의해 ‘남자와 기생’으로 제명이 변경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필름에는 변경된 제명이 반영되어 있으나 포스터는 원제 그대로 남아있다. (사진 18) <남자 미용사>(심우섭, 1968) 신문광고. ‘블란서’ 유학을 마친 유명 미용사 ‘앙드레’로 변장한 구봉서가 주연을 맡았다. 실직 이후 "장난"으로 시작했던 기생 일을 하며 허사장을 비롯한 남성들의 허위의식과 바람기를 꼬집고,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 자신의 남성성을 회복하게 된 태호는 로맨스의 완성과 취업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게 된다. 엔딩 신에서 태호의 여동생 태숙은 허사장의 아들과 결혼을 하게 되고, 태호는 허사장의 회사에 과장으로 진급하여 재취업하게 되며 정미와의 사랑도 이루게 된 것이다. 한편, <팔푼이 사위>(심우섭, 1968)에서 구봉서(구만복)는 시골에서 올라와 직장을 구하던 중, 부잣집 사위로 '취직'하게 된다. 연애결혼을 했으나 '잘난' 첫째 사위의 외도로 부부간 불화가 잦을 날 없던 첫째 딸 내외 때문에 다소 바보스럽더라도 진실한 사위를 구하겠다고 결심한 장인 덕에, 구만복은 부잣집 둘째 딸과 결혼하게 된다. 서울의 근대적이고 서구화된 생활방식에 적응하지 못한 그가 벌이는 소동을 코믹하게 그려내던 영화는, 오히려 그가 기지를 발휘하여 난봉꾼-악처인 큰 딸 내외를 '고치고', 마지막으로 허영심 많고 남편을 깔보던 둘째 딸의 '버릇을 고침'으로써, 화목한 가정을 만들어낸다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사진 19) <팔푼이 사위>(심우섭, 1968)의 한 장면. 우연히 부잣집 사위로 ‘취직’하게 된 구봉서의 ‘팔푼이’ 웃음 이렇게 볼 때, 1960년대 후반 구봉서의 코미디영화들은 1950년대 구봉서 주연 코미디 서사의 확대, 재생산이라는 관점에서 논의될 수 있다. 즉, 1950년대 후반에 30대 초중반의 나이였던 구봉서는 근대화의 물결과 이촌향도 현상으로 서울에 떠밀려 와 하숙집을 전전하며 직업을 구해야 하거나(<삼인의 형제>, <청춘배달>), 혹은 이미 직업이 있더라도 황당무계한 직장(<오형제>에서 잠자리 날개 기름과 달팽이 이빨 가루로 만든 미래 우주식품을 연구하는 무역상사)을 가진 주인공이었다. 이 영화들 속에서 구봉서(와 친구/형제들)는 꿈에도 그리던 여성을 만나거나(<구혼결사대>), 이미 있었던 애인과 결혼에 성공하거나(<오형제>), 새로운 애인을 만드는(<삼인의 신부>, <청춘배달>, <부전자전>) 등 '연애와 결혼'의 서사 중심에 놓인다. 연애와 결혼을 통해 그(들)은 부모님의 소원을 이뤄드리기도 하고(<삼인의 신부>, <오형제>), 진실한 사랑을 깨닫고 새 출발을 다짐(<청춘배달>, <부전자전>, <구혼결사대>)하기도 하면서, 합동결혼식 혹은 결혼약속을 통해 중산층-가부장제 사회로 진입하게 됨을 시사한다. (사진 20) <부전자전>(강대진, 1959) 포스터. 아버지 역의 김희갑과 구봉서(위), 걸인 친구 역할의 양석천과 양훈(아래) 10년의 시차를 두고 제작된 1960년대 후반, 이제는 40대 초중반이 된 구봉서의 코미디영화들은 여전히 도시로 밀려왔거나 실직을 당함으로써, 다시 구직을 해야 하는 상황에 이른다. 이번에는 여동생의 뒷바라지(<남자기생>), 남동생의 실험비용 마련(<남자식모>), 고향 개간(<남자 미용사>) 등 가족을 위해서 취직을 해야 하는 좀 더 절체절명의 상황에 맞닥뜨리게 된 이들은 변장을 하거나(남자 시리즈) 결혼을 함(<팔푼이 사위>, <팔푼이 부부>)으로써 이 위기를 극복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다시 진실한 사랑을 발견하게 되고, 자신의 능력과 남성성을 발전시켜 "번듯한" 직장을 구하게 됨으로써 중산층-가부장제 사회에 성공적으로 안착한다. 1950년대 코미디 속 구봉서가 시골에서 올라온 주인공(혹은 '덜' 근대화된 인물)을 맡아 구직과 연애 활동을 통해 근대 사회와 가부장제에 다가간다면, 1960년대 후반 코미디에서 구봉서는 이미 시작부터 가부장이었으며, 여러 가지 위기 속에서 가부장으로서의 면모를 더욱 굳건히 하게 되면서 위기에 놓인 이들을 통합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는 점에서 주제의식이 강화된 버전이라고 볼 수 있다. (사진21) <팔푼이 부부>(심우섭, 1969)의 한 장면. 방성자와 구봉서. <팔푼이 사위>의 성공에 힘입어 제작되었던 ‘팔푼이 시리즈’ 중 한 편인 ‘팔푼이 부부’ 따라서 구봉서 코미디의 가장 큰 특징은 취업과 결혼이라는 지상과제를 수행하고, 성공하는 주인공을 보여줌으로써 '질서'를 잡고 '통합'하는 내러티브를 제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구봉서의 페르소나와 외형적 특징(준수한 외모, 정확한 표준어를 구사하는 저급하지 않은 화법, 그와 어울리지 않는 가느다란 목소리 등)은 이러한 내러티브에 적합한 캐릭터를 구현하였으며, 이는 영화 외의 매체를 통해 구성된 구봉서의 스타성과 상호작용한 결과였다고 볼 수 있다. 건전한 중산층의 "명랑한 윤리" 1962년 10월 9일 《경향신문》에 '공처가 클럽'이 '홈 서비스 데이'를 맞이하여 야유회에 나섰다는 기사가 실렸다. "우리 집은 걱정 없어요"라고 말하는 영화인 가정의 대표로, 공처가 클럽의 회원인 황해, 구봉서, 곽규석, 신영균이 부인, 자녀와 함께 동반 나들이한 것을 기사화한 것이다. "가정에서는 아이들에게 자신이 출연한 코메디를 못 보게 하는 엄한 아버지"이자 "아내에게는 자상한" 구봉서의 면면은 "건전하고 명랑한 가정생활"을 하는 평범한 가장의 이미지로 신문지상에 종종 소개되곤 했다. 당시 인기 배우들의 스캔들이 신문에 적나라하게 소개되고 이에 대한 각 사회 인사들과 신문독자, 관객들의 논평이 이어지는 가운데, 구봉서를 '명랑가정'을 이루고 있는 대표적인 스타로 거론한 이 기사는 "명랑하고 건전한 소시민"이라는 그의 스타 페르소나에 잘 들어맞는 기획이었다. 이런 페르소나에 알맞게 취업과 결혼이라는 지상과제를 성공적으로 완수해 내는 결말로 수렴되어 가는 구봉서 코미디는 '질서'와 '통합'을 이뤄낸다. 구봉서의 캐릭터들은 전도된 남녀관계를 회복하고, 파탄에 이른 가족관계를 복구하며, 허영심에 들뜬 여성들에게 일침을 가한다. 1950년대 코미디에서 이러한 경향이 암시적으로 드러나거나 내재해 있었다면, 1960년대 코미디에서는 훨씬 노골적인 대사들로 전달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지만, 구봉서 코미디가 추구하는 건전한 중산층의 "명랑한 윤리"라는 주제를 설파한다는 점에서는 일관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사진 22) <남자미용사>(심우섭, 1968)의 한 장면. 유학파 미용사 ‘앙드레’로 변장한 구봉서와 사장 최지희 (사진23) <남자미용사>(심우섭, 1968)의 한 장면. ‘블란서’식 계란 마사지를 시술하는 구봉서 (사진 24) <남자미용사>(심우섭, 1968)의 한 장면. ‘최신 유행하는 머리 스타일’을 만들고 있는 구봉서 이러한 내러티브와 주제 위에서 구봉서의 캐릭터는 무능력한 사회부적응자의 모습에서 과장된 남성의 능력과 우월함을 전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며, 이 과정에서 자신의 우스꽝스러움을 극복하고 지배력을 회복하여 용기 있는 자아상을 구성하게 된다(Henry Jenkins, 구봉서 코미디의 장점은 무능력함을 드러내는 코믹한 장면들과 '취업'과 '연애'에서의 성공을 이끌어내는 이상적 자아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는 탁월함에 있다. 예를 들어 <남자와 기생>에서 구봉서(태호)는 지나친 여성성이 문제가 되어 직장에서 쫓겨나게 된다. 근무 시간에 용돈 벌이로 바느질이나 빨래를 대신 해 주다가 허사장에게 발각되어 실직을 하게 된 그는 우연히 여장을 하게 되고 기생으로 오해를 받게 된다. 그런데 오히려 기생 산월 노릇을 하면서 태호는 뭇 남성들을 훈계하고 남성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게 되는 과정을 겪는다. #73 그 일실(밤) 많은 손님들이 교자상 앞에 길에 앉아 저마다 기생들을 끌어 안은 채 술을 마신다. (중략) 태호 가야금을 엉터리로 켜며 목청을 돋군다. 태호: 에헤야 에헤야 디야 어허랑 어허랑.. 모두들 내 노래가락 귀담아 들어라. 이 노래가락은 요즘 새로 유행되는 금주의 인기 베스트 원이다. 어허랑 어허랑 네놈들 돈 많다고 자랑하러 여기 왔다. 집에 가면 쌀도 없고 연탄도 없는 것들이 이런 곳에 와서는 돈을 물쓰듯 쓰는구나. 어허랑 어허랑 이 녀석들아. 냉수먹고 속 차려라. 여기서 쓸 돈이 있으면 자식 새끼들 운동화나 사 주고 고생하는 만누라의 속옷이나 사 입혀라. 어허랑 어허랑 급기야 춤을 춘다 태호: 한심하다 한심해. 네 놈들 때문에 우리들이 밥을 먹고 살지만 그러나 너희들은 정신을 차려 국가를 위해 무언가 일을 할 생각이나 해라. 어허랑 어허랑. 이처럼 '건전하고 상식적'이면서 '명랑한' 페르소나를 갖는 구봉서라는 스타 코미디언은 코믹한 무능력함을 전시하는 영화 초반부에서 이상적 자아로 향하는 후반부로 가면서 항상 성공적으로 그 경계를 넘어섬으로써, 관객들의 응원 속에서 근대적 중산층 가부장제 사회의 주류로 편입하게 된다. 구봉서가 그려낸 세계는, '상식'과 '능력', 그리고 '건전한 정신'으로 신분의 사다리를 '수직상승'할 수 있는 이상화된 세계였던 셈이다. 1962년 영화법 개정과 코미디영화에 대한 검열 및 제반 장르영화의 정착, 1960년대 초반에 유행했던 홈드라마의 영향, 그리고 '아버지의 법'을 등에 업은 채 진행되었던 사회적 억압의 기제는 대중영화의 주제에도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쳐, 196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반대급부로서의 '이상화된 세계'에 대한 열망은 커져갔다. 변장이나 가장을 통해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생존해 내고자 했던 구봉서의 캐릭터들은, 그들의 '가부장'성과 그에 대한 열망으로 인해 '정상적'인 방식인 취업과 결혼을 통해 신분상승의 기회를 얻게 된다. 묘령의 여인이나 회사의 직원, 하숙집 딸과 같은 중산층 서민과 연애를 했던 1950년대의 구봉서는 1960년대에는 회사 사장의 딸과 연애를 하거나 사장의 사돈이 됨으로써, 명실상부한 '중산층'의 윤리를 획득하게 된다. '정상성'과 '비정상성'이 구분되고 연애하는 상대의 사회적 계층을 인식하게 되며 '통합'이라는 주제가 강화되는 1960년대 코미디 속 구봉서는 1950년대 코미디 속 구봉서와 같은 내러티브 목표를 추구하지만, 좀 더 속악해지고, 좀 더 ‘질서 잡힌’, 억압적 세계 속의 '구봉서'가 된 것이다. 1960년대 후반, 구봉서코미디를 비롯한 코미디영화가 다수 제작되었던 시기는 어쩌면 스크린코미디 전성기를 마감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한국영화 검열이 한층 강화되던 흐름과 맞물려, 1969년에는 MBC TV 방송국이 개국했고, 텔레비전 수상기 보급이 활성화되면서 텔레비전은 급격히 영화의 자리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사진 25) <당나귀무법자>(안일남, 1970) 포스터. <셰인>을 비롯한 서부영화를 패러디한 영화 (사진 26) <삼인의 검은 표범>(김응천, 1971) 포스터. 세 시기의 영웅들을 다룬 옴니버스 영화. 서영춘, 허장강, 구봉서가 각각 주연을 맡았다. (사진 27) <타잔 한국에 오다>(김화랑, 1971) 포스터. 악극단 레퍼토리 중 하나였던 ‘타잔’ 패러디극을 악극단 작가이자 연출자였던 김화랑 감독이 영화화했다. MBC 방송국의 개국 프로그램이었던 <웃으면 복이 와요>를 시작으로, 스크린의 코미디 스타들은 방송국으로 주요 활동무대를 옮겼다. 구봉서는 서영춘, 배삼룡, 곽규석 등 걸출한 코미디언들과 함께 각 방송사들의 개국 프로그램을 섭렵하면서 코미디 연기를 이어 나갔다. 그리고 이들은 스크린 코미디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것처럼 TV코미디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1970년대 초까지 구봉서는 다양한 하위 장르의 코미디영화에 출연하며, 스크린과 브라운관의 코미디를 연결시켰다. 구봉서는 영화뿐 아니라 대중문화계전반에 걸쳐 코미디 장르의 형성과 전성에 지대한 역할을 담당하며 우리 시대의 웃음을 주조했다. (사진 28) <막동이 신혼 10개월>(심우섭, 1969)의 한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