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화원
- 감독
- 이강천
- 제작년도
- 1960
- 출연
- 도금봉, 김진규, 황해, 노경희, 허장강, 황정순, 최봉, 최남현, 이해랑, 강계식, 황남, 안나영, 김소연, 안성기, 남방운, 이대엽, 박노식, 윤왕국, 이예춘, 김희갑, 구봉서, 지용남, 독고성, 박복남, 김영준, 최성, 경윤수, 김현주
한국영화의 또 한번의 꽃이 활짝 핀 1950년대 중반에 노경희 란 여배우의 위치는 든든했다. 흔히들 해방 후 1세대 글래머 스타가운데 노경희를 꼽지만 그는 역시 탄탄한 연기자로 평가되어야 한다고 본다. 노경희 는 뭐니뭐니 해도 < 피아골 >의 ‘노경희’이다. 1955년 이강천 감독이 만든 <피아골>은 지리산의 피아골을 무대로 하여 한 여자 빨치산을 둘러싸고 빨치산들 사이에 벌어지는 갈등, 그리고 빨치산의 귀순 과정이 사실적으로 그려진 작품이다.‘한국영화의 수작’으로 영화사적으로도 높이 평가 받고 있다. 이 <피아골>에서 노경희는 바로 여주인공인 여자 빨치산 ‘애란’역을 훌륭히 해냈다. 이 영화가 높은 평가를 받은 것은 작품성과 함께 연기진의 연기가 훌륭했기 때문이었다. 남자 주인공 김진규 는 이 작품으로 영화 데뷔를 했으며 이예춘도 이 작품으로 영화와 인연을 맺었다. 허장강 은 역시 이강천 감독의 < 아리랑 >으로 데뷔하여 뒤이어 이 작품에 출연했다. 노경희를 포함하여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가 악극단 출신 연기자들이라는 것이었다. 현직 경찰관이 각본을 쓴 이 ‘반공영화’ (당시 용어)는 빨치산의 생태를 너무나 사실적으로 묘사한 죄(?) 때문인지 한동안 용공성(容共性) 시비가 없지 않았다. 군부에서도 의견이 갈려 국방부 정훈국에서는 상영불가론, 육군본부 정훈감실에서는 우수작품론을 펼쳤었다. 신문지상에도 군인과 평론가의 논쟁이 있었다. 당시 문학평론가 임긍재는 다음과 같이 이 작품을 평가했다. “…< 피아골 >은 선전적 가치로 보나 영화예술성으로 보나 아직까지 한국영화로서는 볼 수 없었던 우수한 작품이다. 왜냐하면 이 <피아골>을 보면 공산주의자들이 얼마나 악독하고 잔인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까닭이다. 가령 부상공비 A가 무기를 버리고 왔다고 해서 대장 아가리는 총살을 명령하고 뒤이어 만수로 하여금 잔인하게 돌로 쳐 부셔죽이는 것이다…”(동아일보 1955·8·12)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회의적인 먹물 든 빨치산 철수( 김진규 )를 사랑하는 골수 공산주의자인 여자 빨치산 애란 역을 멋있게 해낸 노경희 는 이 < 피아골 > 한 작품으로 당당하게 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노경희 자신도 세월에 상관없이 이 작품에 대한 애착을 간직하고 있었다. “내가 가장 아끼는 영화는 < 피아골 >이지요. 대표작입니다.” 회갑을 1년 앞둔 87년 7월 노경희 (당시 영화인협회 연기위원회 부위원장)가 한 말이다. (주간조선 87.9.13) 노경희 는 10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였지만 피아골 다음으로는 < 춘향전 >(1955)과 < 망나비비사 > (1955)가 연기력을 평가받고 많은 화제를 남겼다. 한국영화사의 거목인 이규환이 생전 “각본 감독 편집을 손수 내 손으로 한<춘향전>은 나의 영혼이 깃든 작품이었다”(김화: 이야기 한국영화사)고 말한 작품. “…1월 설날 프로그램으로 개봉된 이규환 감독의 < 춘향전 >이 전국 흥행계를 강타했다. 해방 후 최초의 춘향전 영화이다. 춘향전은 한국영화사의 길목에 가끔씩 나타나 마치 구원의 여신과 같이 한국영화산업에 활기를 불어넣은 작품이다…”( 호현찬 : 한국영화 100년) < 춘향전 >은 노경희 의 연기 길목에도 큰 활기를 불어 넣어 주었다. 춘향= 조미령 , 이도령= 이 민 , 향단 = 노경희, 방자= 전택이 …. 당시로서는 다시 맞출 수 없는 ‘호화배역’이었다. 더구나 노경희·전택이는 부부사이었으니 향단·방자역을 얼마나 멋있게 해냈겠는가. 두 사람이 깡충깡충 뛰는, 활력 넘치는 장면들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흥행은 ‘대박’이었다. 개봉관인 서울의 국도극장 한 곳에서만 20일 상영에 1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다는 이야기이다. 당시 서울 인구가 2백여만 명 ( 이규환 감독의 기록)이었으니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춘향전>을 본 셈이다. 2년 동안 그야말로 전국 방방곡곡, 면소재지에서까지 상영되었다고 하니 향단이 노경희의 연기가 그만큼 평가되고 인기가 오를 수밖에 없었다. <춘향전>의 히트로 한국영화계에 사극 붐이 일었다. 김성민 감독의 < 망나니 비사 >도 만들어졌다. 이 영화에도 노경희는 남편 전택이와 함께 출연했다. 이 작품은 제목처럼 비사(슬픈 역사), 슬픈 이야기이다. 전택이가 망나니 ‘먹’역을, 노경희는 술집 작부‘달’로 분했다. “…얼굴 가득 불안스러움을 내비치며 그 특유의 빈정거리는 말투로 먹을 다루는 노경희는…”(여성영화인사전:여선정) 성격 배우로서의 역량을 한껏 발휘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글의 첫머리에서도 지적했듯이 노경희는 역시 글래머 스타라기보다는 단단한 연기자로 대접해야 한다고 본다. 노경희는 1955년 한해동안 < 피아골 >, <춘향전>, <망나니 비사> 3편의 작품에 출연하여 그 연기 능력을 충분히 인정받았다. 이 세 작품만으로 노경희의 연기자로서의, 배우로서의 위치는 굳혀진 셈이다. 노경희 는 1929년 12월 25일 강원도 화천에서 태어났다. 서울의 배화여고를 졸업했다. “…배화여고 시절 하루도 빠짐없이 극장에 다녔던 노경희는 친구들 사이에서 ‘극장대장’으로 통했다…”(여성 영화인사전) 노경희는 17세 때 감독 최인규와 배우 전택이 가 제작준비 중이던 <마의 산> 히로인 역에 음모하여 뽑혔다. 그러나 <마의 산> 촬영이 자금난으로 중단되자 노경희는 길을 잃었다. 전택이 선배를 찾아갔다. 그의 소개로 약초가극단 (단장 김해송)에 들어갔다. 이 가극단 동기생으로는 김진규 , 이예춘 , 허장강 이 있다. 신청년악극단에서도 활동하는 등 무대생활은 모두 6년이었다. 1948년 < 수우 >에도 출연한 기록이 없지 않지만 본인이나 한국 영화사 기록에서는 1950년의 < 흥부와 놀부 > ( 이경선 감독)을 노경희 의 본격적인 데뷔작품으로 꼽고 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 2편의 영화가 만들어져 서울에서 개봉되었는데 그중 1편이 바로 <흥부와 놀부>이다. 노경희는 한국전쟁 중 종군다큐멘터리 제작에 연기자로 참여했으며 1954년 홍성기 감독의 < 출격명령 >에 출연했다. 공군 조종사간 사랑의 삼각관계와 전우애를 그린 이 영화에는 전택이도 출연했다. 그리고 앞에서 특기한 < 피아골 > < 춘향전 > < 망나니 비사 > 3편이 1955년의 노경희를 빛냈다. 뒤이어 다음과 같은 작품에 출연했다. < 인생역마차 > < 자유부인 > < 애인 > < 여성의 적 > (이상 1956년) < 실락원의 별 > < 애원의 고백 > (1957년) < 산넘어 바다건너 > < 돈 > < 실락원의 별 2 > < 유혹의 강 > < 애정무정 > < 느티나무 있는 언덕 > (1958년) < 고바우 > < 내일 없는 그날 > < 백만장자가 되면 > < 별하나 나하나 > < 삼여성 > < 애련의 꽃송이 > < 젊은 안내 > < 푸른 날개 > < 황금의 상처 > (1959년) < 버림 받은 천사 > < 어느 하늘 아래서 > < 울지 않으련다 > < 청춘화원 > < 추억은 영원히 > (1960년) <애정행로> (1961년) < 양귀비 > <어딘지 가고싶어> <흑태양> (1962년) < 거지왕자 > < 검은 꽃잎이 질 때 > < 약혼녀 > < 연애주식회사 >(1963년) 노경희 가 출연한 100여 편의 영화를 여기 다 적을 수는 없다. 위에서는 주요 작품만 열거해 본 것인데 1950년대 중반이후 1960년대 초반에 걸쳐 한국 영화계에서 노경희가 얼마나 ‘맹활약’을 했는가를 알 수 있다. 당시 한국영화에는 주연이든 조연이든 노경희가 거의 출연하다시피 했다. < 자유부인 > < 애인 > < 실락원의 별 > < 느티나무 있는 언덕 > < 삼여성 >등은 연기면에서나 이야기거리로나 노경희의 이름을 기억하게 하는 작품들이다. 특히 <애인>에는 전택이가 주연으로 출연했는데 노경희는 이 작품을 ‘전택이의 대표작’으로 평가하곤 했다. <삼여성>에서는 당시의 스타 최은희 이경희 그리고 노경희 세 사람의 연기 대결을 보여주었다. 왕성하게 영화 출연을 하지 않게 된 뒤로도 노경희 는 선배로서 후배들의 연기지도 또는 영화인의 권익 옹호를 위하여 열심히 뛰어 다녔다. 회갑을 넘기고도 그의 왕년의 글래머 스타의 건강을 여실히 보여주었었다. 그러나 노경희에게는 지병이 복병처럼 숨어 있었다. 1995년 7월 17일 제헌절 날 새벽 서울 을지병원에서 노경희는 세상을 떠났다. 67세였다. 당뇨와 심부전증이 사인이었다. 당시 83세인 남편 전택이와 4남1녀를 남겨 두고 갔다. 전택이는 3년뒤인 1998년 3월2일 86세를 일기로 아내 노경희 곁으로 갔다. 두 사람은 영화계의 선배·후배로 만나 ‘사랑하는 사이’가 되고 전택이가 본 부인과 이혼한 뒤 1954년 정식으로 결혼했다. ‘…두 사람은 말년에도 잉꼬부부로 주위의 부러움을 샀다. ’(동아일보 1998·3·4) 신우식(영화평론가) / 2003년 <프로필> 본명 : 노숙진 1929년 12월 25일 강원도 화천 출생 배화고녀 졸업 1950년 이경선 감독의 < 흥부와 놀부 >로 데뷔 1995년 7월 7월 타계 <주요 작품> 인생 역마차 , 애인 , 삼여성 , 자유부인 , 망나니비사 , 실낙원의 별 등 <수상 경력> 1955년 < 망나니비사 > 제1회 금룡상 여우주연상 수상
이강천 (李康天) 감독은 17년 남짓의 영화 생활을 통해 대표작인 < 피아골 >(1955)을 비롯하여 < 격퇴 >(1956), < 백치 아다다 >(1956), < 아름다운 악녀 >(1958), < 생명 >(1958), < 두고 온 산하 >(1962), < 대좌의 아들 >(1968) 등 모두 28편을 남겼다. 1954년 데뷔작인 < 아리랑 >에서 마지막 작품이 된 < 타인이 된 당신 >(1971)까지 멜로드라마 12편, 분단의 비극과 6·25 전쟁을 소재로 한 반공영화 9편, 시대극 7편이 그것이다. 이를 작품별로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1. 멜로드라마 < 백치 아다다 >(1956), < 사랑 >(1957), < 아름다운 악녀 >(1958), < 종말 없 는 비극 >(1958), < 생명 >(1958), < 젊은 아내 >(1959), < 청춘 화원 >(1960), < 사랑의 역사 >(1960), < 나그네 >(1961), < 무정 >(1962), < 낙동강 7백리 >(1963), < 타인이 된 당신 >(1971) 2. 반공 영화 < 아리랑 >(1954), < 피아골 >(1955), < 격퇴 >(1956), < 두고 온 산하 >(1962), < 나는 속았다 >(1964), < 남북 천리 >(1966), < 죽은 자와 산 자 >(1966), < 대좌의 아들 >(1968), < 어떤 눈망울 >(1968) 3. 시 대 극 < 팔검객 >(1963), < 수양과 백두건 >(1964), < 미녀와 도적 >(1965), < 살아야 한다 >(1965), < 계룡산 >(1966), < 유성의 검 >(1968), < 공산성(公山城)의 혈 투 >(1968) < 아리랑 >( 허장강 · 김재선 주연)은 무성영화 시대에 제작된 나운규 의 < 아리랑 >(1926)을 원작으로 했으나, 시대 배경을 일제 지배 아래가 아닌 6·25 전쟁 이후 공산치하로 바꿔, 영진의 집 외양간에 숨어든 두 명의 미군을 간호하고 여동생이 희생되는 가운데 쫓아오는 북한군으로부터 탈출시키는 내용을 16밀리 화면에 담았다. 6·25 때 전선에서 낙오하여 공산군에게 고초를 겪었던 딘 소장의 실제 이야기를 주제로 부각시킨 것이다. < 피아골 >( 김진규 · 노경희 주연)은 지리산에 숨어 활약하는 빨치산들이 경찰지서를 습격했다가 빠져 나올 때 부상을 입고 소총을 버린 한 대원이 처단되면서 벌어지는 조직 내부의 반목과 모순된 이념에의 회의, 여대원을 둘러싼 애욕의 갈등 속에 자유를 선택하는 청년(철수)의 모습을 그린 문제작이다. < 격퇴 >( 황남 · 최봉 주연)는 김만술이라는 육군 소령의 6·25 참전을 바탕으로 승공 의욕을 고취시킨 실화물이고, < 나는 속았다 >( 신영균 · 문정숙 주연)는 남로당 재건을 시도하는 거물급 공산주의자를 돕다가 배신당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는 여간첩 김수임의 일대기를 담은 것이며, < 두고 온 산하 >( 김진규 · 모니카 유 주연)는 해방 후 흥남에 주둔하는 소련군 고문관의 딸과 한국 청년간의 국경을 초월한 로맨스를 바탕으로 소련군의 만행과 자유를 갈구하는 북한 동포들의 실상을 묘사한 것이다. < 남북 천리 >( 김지미 · 김진규 주연)는 인민군에게 납북돼 강제 수용소에 갇힌 남한의 애국지사들을 구출하는 한국군 정보 장교의 활약상을 부각한 것이며, < 죽은 자와 산 자 >( 신영균 · 김혜정 주연)는 1·4 후퇴 때 서울에 남아 국군 정보 장교를 도와 첩보 활동을 하다가 죽은 젊은 미망인의 이야기를, < 대좌의 아들 >( 신성일 · 박노식 주연)은 모스크바 유학까지 한 인민군 대좌의 아들이 공산주의에 회의한 나머지 탈출을 꾀하다가 자기 아버지의 총탄에 쓰러지는 비극을, 그리고 < 어떤 눈망울 >( 남궁원 · 박노식 주연)은 북한군의 후방에 잠입하여 싸우다 부상을 입고 은신중인 한 중위가 자신을 도와준 사람들이 고문을 당하는 위기 속에서 북진해온 국군과 극적으로 재회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상과 같이 이강천 감독이 주력한 분단 전쟁의 영화들은 한결같이 게릴라, 첩보, 전투, 전향 등 국군이나 민간인들의 반공 이념을 내세우고 있다. 이런 가운데 빨치산 조직 내부에 앵글을 맞춰 분란을 겪는 공산주의자들의 인간적인 고뇌의 모습을 그린 < 피아골 >은 단연 이채롭다. 이 영화가 해방 후 만들어진 < 오발탄 >(1961· 유현목 감독), < 하녀 >(1960· 김기영 감독), <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1961· 신상옥 감독) 등과 함께 수작으로 꼽히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피아골>은 인간과 민족 동질성 회복이라는 문제를 전면에 내세운 < 7인의 여포로 >(1965· 이만희 감독), < 남부군 >(1990· 정지영 감독), < 공동경비구역 JSA >(2000 · 반찬욱 감독)의 출발점이자 화두라 할 수 있다. 계용묵의 대표작인 단편소설을 원작으로 한 < 백치 아다다 >( 나애심 · 한림 주연)는 남편의 난봉과 도박으로 인해 겪는 순진한 벙어리 아내의 설움을, 이광수 원작인 < 사랑 >( 김진규 · 김현주 주연)과 < 무정 >( 최은희 · 김승호 주연)은 각기 아내를 잃은 뒤에도 한눈 팔지 않은 병원장을 짝사랑하다 떠나는 간호사의 행로와 반일 혁명가의 딸 박영채의 고귀한 애정을 그렸으며, < 아름다운 악녀 >( 조항 · 최지희 주연)는 모델이 된 창녀가 화가의 사랑을 받게 되자 신분의 한계를 느끼고 물러서는 내용을 담았다. < 종말 없는 비극 >( 박암 · 한미나 주연)은 1·4 후퇴 때 헤어진 남편을 만났으나 병석에 누운 애의 치료를 위해 여급 생활을 한 것이 빌미가 돼 버림받는 아내의 슬픔을, < 생명 >( 최성진 · 문정숙 주연)은 고아로 자라나 사랑하게 된 두 남녀가 헤어지지만 미국 유학길에서 재회, 다시 결합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 청춘 화원 >( 김진규 · 도금봉 주연)은 사기로 재산을 날린 아버지의 건축 공사를 아들이 맡아 일으켜 세운 뒤 도움준 애인과 결혼하는 해피엔드를, 그리고 <사랑의 역사>(최은희·김진규 주연)는 죽은 남편의 제자인 대학생을 몸을 팔아 뒷바라지 하는 미망인의 헌신을 소재로 삼았다. < 낙동강 7백리 >( 최무룡 · 김지미 주연)는 낙동강 상류에서 고기잡이로 생계를 잇는 한 노인의 외동딸이 서울 청년의 유혹에 빠져 임신, 상경한 후에 겪는 비애를 부각시켰고, < 타인이 된 당신 >( 신성일 · 문희 주연)은 시어머니와 맞지 않아 가출한 아내가 초등학교 교사가 돼 남자 앞에 나타나지만 재결합을 외면하고 제 길을 걸어가는 자립의 의지를 그렸다. 또한 < 팔검객 >( 김진규 · 이예춘 주연)은 광해군의 학정에 반기를 든 여덟 명의 무사를, < 수양과 백두건 >(김진규· 박노식 주연)은 자신의 과거를 후회하고 폐비 소생의 세 옹주를 따라 나섰다가 흑두건 일당의 모함으로 살인 누명을 쓰게 된 세조를, < 계룡산 >( 허장강 · 김혜정 주연)은 이조 말엽 계룡산 일대를 중심으로 서식한 사교 교주를, < 유성의 검 >(박노식·김혜정 주연)은 상납금을 호송하다 모사꾼 일당에게 급습당해 도둑의 누명을 쓰게 됨으로써 복수에 나서는 사나이를, 그리고 < 공산성의 결투 >(박노식·문희 주연)는 정적의 흉계로 고구려와의 싸움에서 패전하고 천신만고 끝에 돌아오는 백제 개로왕의 손자 마모를 각기 주인공으로 내세워 일전을 겨루게 했다. - 데뷔 전후 이강천 은 1921년 12월 10일 충남 서천에서 태어났다. 동경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미술계에서 종사하다가 이만흥 감독의 < 끊어진 항로 >(1948)의 미술을 담당한 것을 계기로 영화계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가 전주문화극장의 경영주인 친구 김영창 (金永菖)의 제안으로 < 아리랑 >을 연출하게 된 것은 미술적인 감각과 영화에 대한 열정이 크게 작용한 결과였다. 1952년 가을의 일이다. 먼저 남주인공인 영진 역에 이향 , 여주인공인 그의 여동생 영희 역에 주증녀 를 내정하고 교섭차 서울로 올라간 제작자와 촬영기사( 강영화 )가 그들 대신 허름한 차림의 낯선 사내와 여자를 데리고 전주역에 나타나면서 실망스러웠지만, 촬영은 순조롭게 시작되었다. 길다란 얼굴에 주먹코, 붕 뜨는 특유의 음성을 가진 이 사나이는 KAS라는 군예대 소속으로 무대 생활을 하던 허장강 이었고, 여자는 극협(劇協) 회원인 김재선(金在仙)이었다. 이들을 남녀 주인공으로 기용한 이강천은 그때까지만 해도 허장강이 영화계의 보물로 크게 한몫을 하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초겨울로 접어드는 날씨 속에 소방차를 동원하여 비를 뿌리는 강행에도 허장강은 몸을 움츠릴 뿐 군말이 없었다. 이 작품은 16밀리이기 때문에 촬영 당일에 필름을 현상하여 프린트기 대신 영사기에 구워서 랏슈를 볼 수 있었다. < 아리랑 >의 흥행(1954년 6월 11일·시공관)은 성공적이었다. 정부의 시책으로 이루어진 국산 영화에 대한 면세 조치도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아리랑>이 촉진시킨 < 피아골 >은 1954년 해맑은 봄날 예향 전주에서 싹트기 시작했다. 어느 날 이강천 에게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전북 경찰국 공보계에 근무하는 김종환(金宗換)이었다. 이 사람을 만나자 후방에서 선무공작 업무를 수행하던 중 귀순자들이 쓴 좋은 영화 소재감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때만 해도 지리산에는 빨치산이 출몰하고 있었다. 그는 이 소재를 놓고 며칠 동안 생각했다. 내용은 마음에 드는데 스폰서가 문제였다. 그러던 어느 날 뜻밖에도 좋은 동조자를 얻었다. 백 명의 원군을 얻은 기분이었다. 지리산 기슭 구례가 고향인 이 사람은 근방의 지리에도 밝았다. 그 동조자인 김병근이 제작에 직접 나섰음은 물론이다. 피아골은 지리산에 깊숙이 자리잡은 골짜기를 가리키는 말이다. 동학란이 있었던 조선조 말기에는 그 피아골에서 무수한 학살극이 빚어졌고, 6·25 전쟁 때는 은신의 거점으로 삼은 북한 잔류군과 빨치산에 의해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강천 은 시나리오 집필을 위해 해변 마을 변산에 자리를 잡았다. 넓은 평야를 덮어버릴 듯한 노란 채소꽃들이 복숭아꽃과 어울려 초가지붕을 둘러싼 부감의 정경은 차라리 한폭의 동양화였다. 그가 여름을 피해 굳이 가을을 촬영의 시기로 택한 것은 산의 선과 암석의 입체감을 살릴 수 있는 암갈색의 구도를 고려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갓 데뷔한 김진규 를 빼고는 노경희 , 이예춘 , 허장강 등 경험있는 배역으로 짜여져 연기의 대결을 벌이도록 유도하였다. 출연자에게는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 인공적인 분장을 피하고 머리와 수염을 기르게 하였다. 잠자리에 들 때도 극중 의상을 입고 자도록 지시함으로써 연기를 자연스럽게 만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필름이 모자란다는 점이었다. 속이 탄 것은 감독과 촬영 기사였다. 마지막 장면을 찍을 때는 15커트를 세 커트로 줄여서 찍지 않으면 안되었다. 나중에 그 이유를 알아차린 김진규는 안타까움에 눈물을 흘렸다. < 피아골 >은 이와같은 우여곡절 끝에 완성되었다. 그러나 이 영화는 화제와 논란을 파생시켰다. 전북 경찰국과 내무부치안국이 후원한 작품이었지만 빨치산 묘사에 사실과 다른 점이 내포되었다는 이유로 후원을 번의하는 사태로까지 비화되었다. 함에도 불구하고 <피아골>은 피상적이고 관념적이기 쉬운 분단영화에 설득력 있는 사실성을 부여하여 하나의 이정표를 세웠다. 이 영화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는 1955년 영화인 이금룡 (李錦龍)을 추모하여 처음 시행한 제 1회 금룡 영화상 작품, 감독, 연기( 노경희 ), 녹음상( 이경순 ) 등 주요 부문을 휩쓸게 됨으로써 입증되었다. 이로써 1950년대를 정점으로 그의 전성시대가 펼쳐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강천 은 1993년 9월 2일 일흔 세 살의 나이로 허장강 ( 아리랑 ), 김진규 ( 피아골 ), 최지희 ( 아름다운 악녀 ), 전영선 ( 종말 없는 비극 ·아역)등 당대에 이름을 날린 배우들을 영화계에 배출시키고 세상을 떠났다. 김종원 (영화평론가·청주대 겸임 교수) / 2003년 <프로필> 1921년 12월10일 충남 서천 출생 일본 도쿄미술학교 졸업 1954년 < 아리랑 >으로 데뷔 1993. 9. 1 타계 <주요 경력> 한국영화인협회 감독위원회 위원장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 간사 심의위원 한국영화인협회 부이사장 한국공연윤리위원회 영화검열심의위원 <수상 경력> 국방부장관 표창, 문교부 문예상,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장 표창 문화공보장관 공로상, 영화진흥공사장 공로상,대한민국 문화훈장 <작품 연보> 1954 아리랑 1955 피아골 1956 격퇴 / 백치아다다 1957 사랑 1958 아름다운 악녀 / 종말 없는 비극 / 생명 1959 젊은 아내 1960 청춘화원 / 사랑의 역사 1961 나그네 / 이 순간을 위하여 1962 두고 온 산하 / 무정 1963 팔검객 / 낙동강 칠백리 1964 수양과 백두산 / 나는 속았다 / 미녀와 도적 1965 살아야 한다(일명 배꼽대감) 1966 남북천리 / 계룡산 / 죽은자와 산자 1968 대좌의 아들 / 유성의 검 / 어떤 눈망울 / 공산성의 혈투 1971 타인이 된 당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