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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독
- 정겨운
- 제작년도
- 2006
- 출연
- 김건, 조하나, 강서영, 구본환, 엄세윤, 김이경, 이장하, 권호창, 안창현, 이승주, 신현영, 이초롱, 이보영, 황지희, 손아영, 한성국
[사진] <추억은 영원히>(전택이, 1960)에서 이민과 노경희 이민(李敏)은 1947년 서정규 감독의 <불멸의 밀사>(1947)의 이준 열사 역으로 영화계에 발을 디딘 후 한중영화사 제1회작인 강춘(江椿) 감독의 16밀리 시대극 <연화(蓮花)>(홍서량, 박양실 주연, 1948)와 반공영화 <화랑도>(염매리 공연, 1951) 두 편에 출연했다. <불멸의 밀사>는 이준 열사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한 전후 시기의 독립운동의 이면을, <연화>는 조선조 제25대 왕 철종 12년에 일어난 대교육자의 분기(奮起)와 기생 도화(道花)의 비련을 그린 것이다. (『민주일보』, 1948년 6월 27일, 광고) 배역 모두 2천여 명의 응모자 중에서 선발하였다. (『대동신문』, 1948년 7월 8일) [사진] 이준 열사 역을 맡은 이민의 첫 출연작 <불멸의 열사> (사진제공: 김종원) <화랑도>는 북한에서 월남한 청년이 헤어진 애인을 만나 반공전선에 나서는 얘기로, 촬영 중에 6.25를 만나 중단됐다가 피난지인 대구에서 완성한 것이다. 이런 내용의 특성상 <화랑도>는 개봉 후 상이군인들이 조직한 영화계몽반에 의해 남한 일대의 각 지역에서 상영되기도 (「상이군인들이 영화로 계몽운동」, 『조선일보』, 1952년 11월 13일) 했다. 그는 이렇게 일찍이 영화계에 발을 들여 놓았으나 한동안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다. <춘향전>과 <자유부인>의 히트 전후 1953년 휴전과 함께 정부가 서울로 환도한 후에도 대부분의 영화인들은 부산, 대구 등지에 남아 있었다. 그해 초겨울이었다. 대구의 자유극장 옆 단골다방에서 차를 마시고 있던 이민의 눈에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 들어왔다. <임자 없는 나룻배>(1932)와 <갈매기>(1948)로 유명한 이규환 감독이었다. 이민은 여종업원에게 차 한 잔을 시켜 보낸 뒤 의아한 표정을 짓는 그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이 일은 결국 이규환 감독의 <춘향전>에 기용되는 계기가 되었다. 남원의 기생 딸 성춘향(조미령 분)을 사랑하게 된 사또의 아들 이몽룡 역이었다. 이민은 연기뿐만 아니라 제작 진행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예정했던 남원 대신 촬영지로 선택한 경북 달성군 가창면 냉천동이란 마을은 로케 장소로는 적합했으나 기계를 움직일 동력이 없었다. 전력을 끌어오기 위해서는 가까이 있는 달성광산의 도움이 필요했다. 다행히 일이 쉽게 풀리느라 마침 그곳 광산소장이 이민의 경성제대 공과 시절 동기생이어서 전기를 끌어올 수 있었다. [사진] 이규환 감독의 <춘향전>, 여배우는 조미령 이렇게 필름 길이 1만 2천자, 상영시간 2시간 15분으로 완성한 <춘향전>이 1955년 1월 16일 서울 국도극장에 개봉되자 첫 날부터 초만원을 이루었다. 관객들이 서울 변두리는 물론 인천, 수원 등지에서까지 트럭을 동원하여 단체로 몰려들 정도 (이규환, 「남기고 싶은 이야기(50) ‘영화60년’」, 『중앙일보』, 1980년 2월 21일) 였다. 그 결과 <춘향전>은 20일 동안 10만 여명이 관람하여 당시까지 한국영화사상 최다 흥행 기록을 세웠다. 이에 따라 이민은 여주연인 조미령과 함께 일약 국민적인 스타로 떠올랐다. 여세를 몰아 <막난이 비사>(김성민, 1955), <단종애사>(전창근, 1956)와 <애인>(홍성기, 1956), <자유부인>(한형모, 1956) 등에 기용되었다. <막난이 비사>에는 조선조의 홍문관 정오품 벼슬인 교리(郊理)로 등장했다. 진사의 외동딸(이경희)을 소실로 삼으려다 반대에 부딪치자 그 아버지를 역적으로 몰아 목을 치게 하는 악역이었다. <단종애사>에는 세종대왕에 이어 등극한 후 재위 2년 만에 어린 단종을 신하에게 부탁하고 죽은 비운의 문종대왕 역을, 김내성 원작 <애인>에는 요정마담의 딸인 여대생(노경희)을 좋아하는 청년으로 나와 아프레게르적인 끼를 드러내었다. 그러나 이민에게 결정적인 돌파구를 열어준 것은 크레인 촬영을 시도한 정비석 원작 <자유부인>이었다. 가부장 중심의 유교적 인습사회에 외래문화가 들어오면서 변해 가는 여성들의 모습을 한 대학교수 부인(오선영: 김정림 분)을 통해 보여준 이 영화에 춤으로 그 부인을 유혹하는 건달 대학생 신춘호역으로 등장했다. 그는 ‘마담 익스큐즈 미' ‘알러브유’ 따위의 영어단어를 읊조리며 능란하게 대학교수 부인의 탈선을 부추겼다. 이 영화는 1956년 6월 9일 서울 수도극장(현재의 스카라)에서 개봉되었고, <춘향전>의 흥행을 무색하게 하는 대박을 터뜨렸다. [사진] <자유부인>의 이민과 안나영(오른쪽) 그는 잇따라 <실낙원의 별>(홍성기), <애원의 고백>(홍성기), <여성전선>(김기영), <찔레꽃>(신경균), <청실홍실>(이상 1957, 정일택) 등 5편에 이어 58년 <그 밤이 다시 오면>(노필), <꽃도 생명이 있다면>(홍일명), <낙엽>(박구), <느티나무 있는 언덕>(최훈), <모정>(양주남), <청춘비가>(이규환), <별만이 아는 비밀>(이선경), <별아 내 가슴에>(홍성기), <촌색씨>(박영환), <흐르는 별>(김묵) 등 12편에 출연했다. 주로 신문연재소설과 연속방송극을 원작으로 한 것이다. [사진] <청춘비가>의 이민과 김아미(오른쪽) (사진제공: 김종원) <청실홍실>에는 사장 딸(엄앵란)의 구애에도 전쟁미망인(이민자)을 사랑하는 운전기사로, <그 밤이 다시 오면>에는 잡지사 여사원(이빈화)을 임신시키고 회사 돈을 훔쳐 이용하려다가 실패하자 자취를 감추는 회사원으로, <청춘비가>에는 일찍이 고아가 돼 헤어졌던 여동생(김아미)을 혈육인 줄 모르고 사랑하게 되는 기구한 화전민 출신의 오빠로, <별아 내 가슴에>에는 대학생(김동원)과 기생(주증녀)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사귀는 여대생(김지미)의 양부가 자신의 아버지임을 모르는 출판사 사원으로, <흐르는 별>에는 아내를 두고 월남한 후 혼자 딸을 기르며 온갖 시련을 겪는 장님으로 각기 등장한다. [사진] <그 밤이 다시 오면>의 이민과 이빈화(사진제공: 김종원) 1959년에는 <가는 봄 오는 봄>(권영순), <꽃피는 시절>(최훈), <꿈이여 다시 한 번>(백호빈), <그 여자의 죄가 아니다>(신상옥), <내 사랑 그대에게>(하한수),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신상옥), <동백꽃>(정일택), <동심초>(신상옥), <밤마다 꿈마다>(이사라), <별은 창 넘어로>(홍성기), <비오는 날의 오후 세시>(박종호), <사모님>(최훈), <아내>(김묵) <애모>(신경균), <장마루촌의 이발사>(최훈) 등 27편으로 출연작이 증가된다. 태평양전쟁에 끌려갔다가 딸(전계현)을 남기고 죽는 <가는 봄 오는 봄>의 학도병, 6.25전쟁 때 작전을 수행하던 중 눈에 부상을 입고 국군병원으로 후송된 <꿈이여 다시 한번>의 육군 중위, 수절하는 전쟁미망인(이민자)을 사랑하는 <별은 창 넘어로>(홍성기)의 관상대 기사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 가운데 주목을 끈 것은 고아로 자란 한 여성(김지미)을 사랑하여 결혼 단계에 이르렀으나 전사했다던 그녀의 약혼자(최무룡)가 나타나면서 파국을 맞게 되는 <비오는 날의 오후 3시>의 미8군 소속 교포 2세 헨리 장 역이었다. 그는 이 영화에서 군복과 양복을 번갈아 입으며 때로는 양미간을 찌푸리는 특유의 표정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사진] <비오는 날의 오후 3시>의 이민과 김지미 최훈(9편)과 홍성기 감독(8편)의 단골배우처럼 나왔던 그가 신상옥 감독의 <그 여자의 죄가 아니다>,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 <동심초> 등 세편에 기용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미혼 여성(최은희)의 원치 않는 임신과 기혼 여성(주증녀)의 불행한 불임의 모순을 다룬 <그 여자의 죄가 아니다>의 너그러운 약혼자, 구한말 20세의 청년 이승만에게 개화학문을 배우라고 권하는 신긍우, 전쟁미망인(최은희)을 도우려는 친구에게 차용증부터 챙기는 <동심초>의 냉정한 증권회사 사장 신동일 역할이 그것이다. [사진] <그 여자의 죄가 아니다>에서의 이민과 최은희 이민은 이처럼 영화계에 진출한 뒤에 가장 바쁘고 화려한 시기를 보냈다.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할까, 이 기간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꿈이여 다시 한번>, <나는 고발한다>, <비오는 날의 오후 3시> 등 세편의 제작에 손댔다가 손실을 보기도 했다. 연극 경험 없는 명문대 출신 정상이 있으면 내리막길이 있는 법. 그의 독주는 얼마 못가 뒤에서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에 의해 위협받기 시작한다. 이미 <젊은 그들>(신상옥, 1955)로 주목받기 시작한 최무룡과 <피아골>(이강천, 1955)에서 두각을 나타낸 김진규의 도전으로 확고한 듯싶었던 인기의 성곽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러한 조짐은 1960년대에 이르면서 뚜렷이 나타난다. 60년 한 해 동안 출연 편수가 <애수에 젖은 토요일>(최훈), <추억은 영원히>(전택이), <투명인의 최후>(이창근), <햇빛 쏟아지는 벌판>(정창화) 등 10여 편으로 줄어들고 이마저도 예시한 네 편을 제외하고는 조연급에 밑도는 것이었다. <애수에 젖은 토요일>(1960)은 그동안 우리 영화가 즐겨 다뤄온 민족분단, 이산의 비극을 소재로 한 것이다. 6.25 때 헤어진 사람을 기다리다 지친 나머지 윤락가로 전락한 여자(김지미)가 죽은 줄 알았던 애인이 부상당한 군인의 모습으로 살아 돌아오면서 빚어지는 비극으로, 이민이 그 주인공 박경일 중위 역을 맡았다. <추억은 영원히>에는 6.25전쟁 중에 부모를 잃고 정신이상자가 돼 거리에서 방황하는 여자(김지미)를 간호하는 착한 운전기사로, <투명인의 최후>에는 부족한 능력 때문에 애인을 빼앗기고 음독자살을 기도했으나 죽는 대신 투명인간으로 변해 복수를 하는 끈질긴 캐릭터로 나타난다. 이후 이민은 62년 안현철 감독의 <그리움은 가슴마다>를 비롯한 <양귀비>(최훈), <여자의 일생>(신경균), <운명의 골짜기>(전창근) 등 5편과 63년 <돈바람 님바람>(김수용), <상처받은 두 여인>(이규환) <백마고지>(김수길) 등 3편, 64년부터 66년까지 <처녀성>(홍성기, 1964), <대석굴암>(홍성기, 1965), <눈물 젖은 왕관>(하한수, 1966)을 만들고 칩거에 들어간다. [사진] <여자의 일생>의 이민과 이민자(사진제공: 김종원) 그랬던 그가 10년 만에 장미희의 데뷔작 <성춘향전>(1976, 박태원)에 이몽룡의 아버지 이진사역으로 등장하여 관심을 끌었다. 19년 전 서른다섯 살 이몽룡이 이번에는 쉰여섯 그의 아버지가 된 것이다. 제작자의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렇게 이민은 1951년 <화랑도> 이후 4년여 동안의 공백기를 제외한 15년의 배우생활을 마쳤다. 그때까지 출연한 70여 편 가운데 <춘향전>(1955)을 비롯한 <막난이 비사>(1956), <단종애사>(1957),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1959), <양귀비>(1962), <대석굴암>(1965) 등 6편의 시대·역사극과 <햇빛 쏟아지는 벌판>(1960), <백마고지>(1963) 등 전쟁물을 제외하고는 60여 편이 넘는 작품이 멜로드라마였다. 그 후 영화계를 떠나 사업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던 이민이 17년 만에 홀연히 서울에 나타났다. 영화를 제작한다는 것이었다. 일흔 세 살 때였다. 한 도예공의 삶을 통해 장인정신을 기리는 <서편제> 유의 영화라고 했다. 자신이 시나리오를 쓰고 주연을 맡는다는 이 영화의 예산은 일화 5억 엔으로 학창시절 친구였던 일본아시아문예협회 키누가와 고오이치(衣川耕日) 회장이 부담한다고 했다.(⸀‘자유부인’ 플레이보이 이민 73세에 영화 찍는 인생」, 『부산일보』, 1998년 2월 6일) 그러나 일본과 중국의 합작을 꾀한 이 계획은 얼마 못가 무산되고 말았다. 이민은 1921년 2월27일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이시중(李時中)이다. 삼형제중 막내로 선비들과 어울려 시조창을 즐기고 사군자 치기를 좋아했던 아버지 때문에 어머니는 삯바느질로 생계를 꾸려야 했다. 그러나 춘천초등학교(1934년)와 춘천중학교를 졸업(1939년)하자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의 회고 (한국영상자료원 기획, 「이민」, 『한국영화를 말한다: 한국영화의 르네상스 1』, 도서출판 이채, 2005, 272~273쪽) 에 따르면, 벽이나 전주에 걸린 일본 시세이도(資生堂) 화장품의 선전을 위해 도자기로 만든 선전용 레이또 크림이나 눈에 넣는 와카모도라는 영양제 광고를 봐뒀다가 밤에 몰래 뜯어내 고철로 팔았다고 한다. 이렇게 3년 반 동안 모은 돈이 여비가 되었다. 1940년경이었다. 동경에서 가까운 사이타마현(琦玉県)의 우라와(浦和)고등학교에 들어가 아르바이트를 하며 1년 정도 다니다가 귀국했다. 이후 경성제국대학교(서울대 전신) 예과에 들어갔다. 그는 이 대학을 나올 무렵 길에서 발탁돼 영화와 인연을 맺게 된다. 스물여덟 살 때였다. [사진] <여성전선>(김기영, 1957)에서 이민과 조미령 1950년대 중반 이후 한때 최무룡, 김진규와 함께 삼각경쟁 구도를 이룬 이민에게는 당시의 일반적인 배우와는 다른 삼유삼무(三有三無)라는 특징이 있었다. 그것은 그만이 가진 세 가지 있음(三有), 즉 서울대학교(경성제대 후신)를 나온 명문대 출신이라는 점과 <춘향전>이나 <자유부인>과 같은 최다 흥행작을 일구어낸 광복 후 최초의 미국풍 댄디보이였다는 사실이다. 세 가지 없음(三無)은 연극 경험이 없는데다 본격적인 액션영화에 출연한 적이 없고 연기 외에는 대외 활동을 한 적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는 이 시기에 첨단적인 정장과 점퍼, 스웨터의 옷맵시로 여성들의 허영심을 자극한 대표적인 '니마이메(二枚目: 미남배우의 통칭)였다. *
이미지는 오래 간다. “감독은 데뷔작의 인물에 자신을 담을 수밖에 없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말일 테고, 실제로 며칠 전 한 자리에서 올해 데뷔한 감독이 하는 말을 곁에서 듣기도 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대중영화에서 인물 하나에 자신을 툭 던져놓는 정도일 것이다. 대개는 그렇다. 자기 이야기를 한답시고 조용한 인물과 소소한 가족의 이야기로 일관하는 영화에 돈을 댈 대중영화 제작자는 거의 없을 터이기 때문이다. < 작은 빛 >(2018)은 조민재 가 제작하고 연출한 작품이다. 작년 말 첫 번째 ’관객과의 대화‘에서 조민재 감독이 했던 말을 희미하게 기억할 즈음, 나는 1년이 지나 그와 다시 한 번 ’관객과의 대화‘를 가졌다. 그는 그 자리에서 <작은 빛>이 그의 자전적 이야기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냥 그의 삶이 조금 반영된 이야기일 거라고, 짐작할 즈음 그의 말을 듣게 됐다. 꼭 자전적 영화가 아니라 하더라도 평범한 인물의 평범한 삶의 풍경을 그린 독립영화를 근래 많이 보았다. 은은한 내음이 나쁘지 않지만, 자칫 향이 아예 안 나다시피 하는 심심한 영화도 여럿 있었다. 그럴 때 나는 보통 잠을 자게 된다. 영화가 만들어놓은 세계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잠을 자는 게 아니라 영화가 잠을 자게 만든다. 좋은 일은 아니다. <작은 빛>은 그렇지 않다, 고 자신할 수는 없다. 시작부터 홀라당 빠져 끝까지 눈을 깜빡이며 보았을 나 같은 사람도 있겠지만, 어떤 관객은 의미를 찾다 슬며시 다른 세상으로 갔을지도 모른다. 조용하고 평범한 영화란 어떤 것일까? 위에 써놓은 글을 반복하자면, 보통 사람의 일상을 굴곡 없이 담아놓은 작품이 한 예가 될 것이다. 이런 경우 대개 사건이 일어나지 않거나 일어나더라도 관심을 기울일 만한 것이 못 된다. 간단하게 말해 장르성이 너무 없어 재미가 없는 영화라고 해도 되겠다. 감독을 포함해 채 열 명이 안 되는 스태프로 찍은 <작은 빛>은 분명히 그런 범주에 속한다. 그런데 평범한 것과, 평범한 것을 그리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평범한 것도 어떻게 그리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보이는 법이다. <작은 빛>의 도입부에서 나는 인물의 어머니가 지내는 허름한 방을 보았다. 내 눈에 제일 박힌 건 빗물이 배 얼룩진 벽지다. 아들이 오고 딸이 찾아오지만 아무도 그 벽지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흉해서 도배하자고 말할 법도 한데 그런 대사는 나오지 않는다. 두 번째로 불안해 보인 건 벽에 허술하게 박힌 전기 코드였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바뀌지 않은 벽지보다는 나은 게, 어느 날 아들이 전기 코드에 손을 댄다. 그것도 전등에 고장이 나서야. 공장에서 성의껏 일하던 그는 의외로 섬세하게 코드를 정리하지 않는다. 대충했다고 보는 게 맞다. 대충이라도 어쨌든 정돈된 덕분에 천정의 등은 제 기능을 하고 그들은 그 아래에서 밥을 먹고 대화를 나눈다. 내 마음속 긴장은 그렇게 해소된다. 엉뚱한 사건을 만들거나 어울리지 않는 인물을 끼워 넣는 일은 <작은 빛>에 절대 없다. 위와 같은 일들이 그들을 설명하고 그들을 이해시키고 그들을 사랑하게 만든다. 감독이 그런 의도를 지녔는지, 그건 또 다른 문제다. 내게는 그랬다. 아들 진무가 엄마의 집을 찾았다. 휴가라고 둘러댔지만 거짓말이다. 그는 다니던 공장을 곧 그만둘 예정이다. 19분경, 의사가 진무의 수술을 언급한다. 잘못하면 기억을 잃어버릴 수 있으니 만반의 준비를 하라는 말도 더했다. 그가 엄마, 형, 누나, 그리고 백부의 집과 아버지의 묘를 차례로 방문하는 걸 보노라면 무언가를 정리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기억을 이유로 그는 캠코더를 들어 가족을 찍기 시작한다. ‘1. 잠든 어머니가 돌아누웠다, 2. 어머니와 조카 호선이 손바닥을 맞대며 논다. 3. 공장의 시계는 멈춰 있고 기계가 돌아간다. 4. 호선이 마당에 앉은 할머니, 삼촌, 엄마를 찍는다. 5. 형 정도가 문 앞에서 춤을 춘다. 6. 호선이 방에 앉은 할머니, 삼촌, 엄마를 찍는다. 7. 누나를 인터뷰한다. 8. 아들이 어머니를 인터뷰하고, 연결된 숏에서 어머니가 아들을 인터뷰한다. 9. 어머니가 터미널에서 아들을 배웅한다. 10. 어머니가 병실에 누운 아들을 찍다 이어 남편이 남긴 사진을 담는다.’ 조민재는 10개의 캠코더 신 바로 다음에 영화의 카메라로 캠코더 바깥의 인물을 찍어 붙여두었다. 1-1은 어머니를 향해 캠코더를 든 진무, 2-1은 잠자는 할머니와 호선, 3-1은 기계를 향해 캠코더를 든 진무, 4-1은 캠코더에 찍힌 가족을 보는 정도, 5-1은 동생이 떠난 후 정도가 보내는 시간, 6-1은 캠코더에 찍힌 가족을 보는 누나 현, 7-1은 동생이 떠난 후 현이 보내는 시간, 8-1은 방에서 잘 준비를 하는 어머니와 진무, 9-1은 아들을 배웅한 후 집으로 돌아와 고개를 숙이는 어머니, 10-1은 이듬해 여름 아버지의 묘를 이장하는 날.‘ ● 정확하게 말하면 1번에 앞서 캠코더 신이 하나 더 있다. 진무가 집으로 가는 길에 버스에서 찍은 바깥 풍경일 텐데, 조민재는 그것을 빠르게 지나가는 추상적 이미지로 만들어 오프닝 크레디트로 삼았다. 이미지의 본질이란 측면에서 캠코더 신이나 카메라 신이나 다를 건 없다. 필름으로 영화를 찍던 시절에, 캠코더로 찍은 장면을 삽입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사실 두 개의 디지털 이미지 사이에 화질이 좋고 나쁜 것 외에 차이라곤 없다. 그래서 조민재는 캠코더 신과 카메라 신 사이에 어떤 블랙 이미지도 넣지 않고 점프하듯이 넘어와 버린다. 이것을, 필름의 유령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가 이미지를 이어붙이는 방식이라고 불러도 될까. 어쨌든 조민재가 캠코더 신과 카메라 신으로 짝을 짓는 방식은 그러하다. 영화적인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영화에서, 조민재는 그것을 그들의 삶의 흐름이라 부른다. 사건을 보겠다는데 삶의 흐름으로 박자를 만든다. 그 삶 또한 보통의 영화에서 보기를 기대하는 유와 거리가 멀다. 1번에서 10번에 이르는 캠코더 신은 그야말로 진무라는 인물이 기억을 간직하기 위해 애쓰는 태도에 다름 아니다. 아픈 남자가 어쩌면 잃어버릴지 모르는 기억을 담는 행위, 조민재는 설령 당신이 그것에 관심이 없다 하더라도 그것을 자기 영화에 담아 기억하겠다고 다짐한다. 1-1에서 10-1에 이르는 카메라 신이 바로 그의 다짐이다. 인물이 바라본 것을 그는 자기 카메라로 다시 확인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일상을 살아가는 모습, 알지 못하는 시간에 대한 호기심과 질문들, 얼굴을 맞대고 말하기엔 쑥스러웠던 사연들, 혼자의 시간으로 돌아와 조용히 되돌아보는 순간들‘ 조민재는 그것이 자신에게 소중한 어떤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 것을 보여주는 것이 자신이 영화를 찍는 행위의 목적이라고 말한다. 진무의 캠코더와 조민재의 카메라가 기억하고 기록하는 행위는 영화 바깥에서 부여된 어떤 것의 도움을 받는데, 조민재는 그것을 일컬어 ’작은 빛‘이라 불렀다. 이미지를 기록하는 데 도움을 주었던 빛은 몇몇 장면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연히 드러낸다. 첫 번째 순간은 8분 40초쯤, 현이 아들과 함께 어머니의 집을 방문하는 날 오전이다. 어머니의 집은 서너 층짜리 건물들에 둘러싸인 탓에 빛이 스며들기가 힘들다. 오전의 짧은 순간에 빛은 골목 사이로 어머니의 집을 방문한다. 물론 집 전체는 아니고 오른편 지붕 정도에 불과하다. 오른쪽 한켠 지붕 위로 살포시 내려앉은 따뜻한 빛. 두 번째 순간은 가족이 외출하는 때다. 부감 쇼트로 첫 번째 순간을 포착했던 것과 반대로, 두 번째 순간은 마당의 위치에서 빛을 향한 방향으로 담겼다. 11월 초겨울의 빛은 얼마나 귀한 것인가. 빛은 이제 집에서 거의 사라지려 하고, 카메라는 조금이라도 그 빛을 붙잡으려 한다. 세 번째 순간은 아들이 돌아가는 날 아침이다. 빛은 며칠 전과 마찬가지로 오른쪽 창에 살짝 걸쳐 있을 뿐이다. 빛은 더듬거리는 듯이 창을 어루만지는데 떠나는 아들과 아들을 마중하는 어머니는 그것을 보지 못한다. 네 번째 순간은 회사를 그만둔 진무가 자기 방에 누웠을 때다. 그의 방에서도 빛은 박하다. 빛은 머리 부분에만 살짝 비추는 대신 강렬하다. 눈이 부신 진무는 인상을 쓴다. 그에게 빛은 낯설다. 낯선 남자의 아이를 밴 어머니는 아들을 둔 남자를 만나 결혼을 서둘렀다. 그리고 현에 이어 진무를 낳았다. 아내와 가족에게 주먹을 휘두르던 남편은 젊어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36살인 아들을 보며 아버지보다 더 나이를 먹었다고 알려준다. 어머니나 세 오누이나 다 유복한 편은 못 된다. 힘겹게 노동을 해야 살 수 있는 형편은 어머니부터 진무까지 다 똑같다. 빛은 때때로 그들 위에서 비치지만 그들은 그것을 제대로 느낄 틈이 없다. 너무나 작고 너무나 짧은 순간만 비추기에 빛은 남의 것처럼 느껴진다. 그들의 기억에 아버지는 원수 같은 존재다. 어머니는 죽은 남편에게 욕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수술 전, 진무는 창고에서 아버지의 카메라를 찾았다. 작동하는지 확인하려 셔터를 누르자, 플래시의 빛이 창고 밖으로 흘러나온다. 반짝, 반짝, 카메라는 세 번 빛을 발했다. 이 장면은 좀 특이한 곳에 배치되었는데, 조민재는 아버지의 묘를 이장하는 시퀀스 가운데 그것을 끼워놓았다. 빛이 외부에서 내려앉았던 것과 다르게, 이 장면에서는 작은 빛이 문틈 사이를 통해 바깥으로 발산한다. 바깥의 빛과 내부의 빛은 그렇게 서로 조응한다. 아버지의 유산인 카메라 속 묵은 필름엔 그가 기록한 옛 가족의 모습이 들어 있었다. 진무의 캠코더에 담긴 이미지를 보고 웃었던 가족들은 아버지가 남긴 사진을 보고 신기해한다. 그도 가족을 사랑했을까. 다섯 번째 순간은 이듬해 여름 즈음 아버지의 묘를 이장하는 날에 일어난다. 힘들게 아버지의 시신을 추린 뒤 어머니와 세 오누이와 손자는 산을 내려온다. 그들이 스쳐 가는 나지막한 숲 위로 빛이 내린다. 탁 트인 덕분인지 빛의 크기는 더 이상 작지 않고 한낮이 끝나 가는데도 금방 사라질 것 같지 않다. 빛은 가족 위로 쏟아져 내린다. 가족이 오른쪽에서 등장해 스크린 왼쪽 밖으로 사라질 때까지 빛은 변함없이 찬란하다. 빛은 그렇게 순환하는 삶을 축복한다.
2002년 | 싸이더스 감독, 각본 : 조민호 | 제작: 차승재 | 촬영: 이두만 | 음악: 김재원 박영 | 미술: 이대훈 CAST 기태: 장혁 | 철수: 이범수 | 멕: 전혜진 | 민철: 손창민 | 악어: 김뢰하 | 땅개: 봉태규 | 이 형사: 박원상 큰 흥행을 기록한 영화는 아니었지만, < 정글쥬스 >는 이른바 ‘양아치 영화’ 장르의 대표작입니다. 청량리 출신의 두 루저 기태(장혁)와 철수(이범수). 그들은 우연히 마약을 손에 넣지만 쫓기는 신세가 되죠. 그 끝은 부산 태종대. 2001년 초겨울, 그곳 현장에 갔습니다. 마약을 빼앗긴 조직 보스 민철(손창민)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두 주인공에게 총을 겨눕니다. 이 날 촬영은 영화의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데요, 영화에선 꽤나 절박한 장면이지만 정작 현장 분위기는 여유가 있었습니다. 크랭크업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어서 그랬던 것 같네요. 위의 롱 숏을 앵글을 달리 해 두 개의 숏으로 쪼개 보면 이렇습니다. 뒷모습으로 보이는 손창민은, <정글쥬스>에서 ‘빡빡 머리’로 밀며 인상적인 변신을 보여줍니다. 한편 기태와 철수는 태종대 자살바위 끝까지 몰렸습니다. 과연 그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요? 기태는 철수를 이끌고 벼랑 끝으로 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뛰어 내립니다. 혹시 이 장면… < 델마와 루이스Thelma & Louise >(리들리 스콧, 1991)의 마지막 장면을 패러디 한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두 배우는 실제로 큰 액션과 함께 뛰어 내렸고, 아래 쪽엔 라면 박스가 쌓여 있었습니다. 든든한 안전 장치였는데요, 그렇다고 해도 시야에 바다가 걸리는 장소에서 벼랑 아래로 뛰어내린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죠. 하지만 두 배우는 몇 번에 걸쳐 반복했습니다. 안 그래도 아찔한 벼랑 위의 촬영에, 더 아찔해 보이는 크레인이 동원됐습니다. 이두만 촬영감독은 정지우, 김용균, 임필성 감독 등과 함께 1990년대에 ‘영화제작소 청년’에서 활동했고, < 눈물 >( 임상수 , 2000)로 장편영화 촬영감독이 되었습니다. <정글쥬스>는 두 번째 장편인데요, 서른 즈음의 젊은 촬영감독답게 활기 찬 화면을 만들어냈습니다. “컷!” 소리가 나자마자 배우들은 모니터 앞으로 달려옵니다. 중요도가 높은 장면이라, 꼼꼼하게 체크할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죠. 조민호 감독이 오케이 사인을 내도, 배우들의 요구로 더 찍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영화아카데미 출신은 조민호 감독은 김영빈 , 이민용 감독의 연출부를 거쳐 <정글쥬스>로 데뷔했습니다. 이후 < 강적 >(2006) < 10억 >(2009) 등의 작품을 내놓았고요. 기태와 철수, 두 루저 캐릭터에 대한 감독의 애정은 매우 컸습니다. “나는 <정글쥬스>에서 양아치들 바로 옆에 따라 붙고 싶었고, 그래서 핸드헬드 카메라를 많이 사용했다. 그것이 관객들에겐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었겠지만. <정글쥬스>엔 인물이 없는 컷이 한 컷도 없다. 나는 인물들과 같이 호흡하고 느끼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현장은 열기로 넘쳤지만, 초겨울에 여름 의상을 입은 배우들은 추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두 배우는 점퍼를 입거나 하지 않고, 영화 속 의상 그대로 현장에 있었습니다. 조민호 감독은 “양아치 인생을 그렸지만 어두운 영화는 아니다. 밝게 찍어야 한다”고 배우들에게 주문했습니다. 한편 이범수에게 <정글쥬스>는 첫 주연작이었는데요, 그는 “이 영화를 찍는 게 너무 재미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장혁은 이범수와 호흡을 맞추며 “만만한 셋째형을 건졌다”고 표현했는데요. “범수 형은 큰형이나 둘째형보다 조금 만만한 셋째형 같은 느낌이다. 콤비 플레이가 중요한 영화라서 핑퐁을 하듯 재미있게 연기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보스 민철의 피 묻은 손과 옷, 그리고 권총은 이 장면의 격렬한 느낌을 압축해서 보여주는 이미지입니다. 어느덧 점점 어두워지는 태종대. 그래도 빛이 허락할 때까지 촬영은 이어집니다. 마치 벌레들처럼 바글거리며 살아가는 두 청춘의 이야기 <정글쥬스>. 조민호 감독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정글쥬스>의 기태와 철수는 낮에는 유치찬란한 양아치고 밤에는 범죄를 저지른다. 그 아이들은 청년 실업자들이고 경제적 이해 관계로부터 소외된 하층 계급이다. 하지만 그 양아치들에겐 당당하고 자유로운 모습이 있다.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 근처에 도둑고양이들처럼 말이다.” 이미지 디지털화 지원 NA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