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 비 앙 로즈
- 감독
- 올리비에 다한
- 제작년도
- 2007
- 출연
- 마리온 꼬띨라르, 장 피에르 마틴, 제라르 드빠르디유, 빠스깔 그레고리, 실비 테스튀, 마크 바르베, 엠마누엘 자이그너, 끌로틸드 꾸로, 캐서린 알레그리, 캐롤라인 시홀, 엘리자베스 코멜린
이두용 감독의 <뽕>은 1980년대 ‘토속적 에로티시즘’의 대표작으로 각인된 영화다. 이 영화는 당대 흥행에 크게 성공한 것은 물론 국내외 영화제에서도 여러 상을 탔음에도 불구하고, 비평에서는 ‘오락적 흥미 본위의 성애물’로 분류되며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 이후 <뽕2>(1988), <뽕3>(1992), <1996 뽕>으로 이어지면서 ‘뽕’이라는 말이 지닌 원초적 어감이 강화되어 ‘성애 영화’로서의 이미지가 고착되었고, <변강쇠>(1986) 시리즈와 함께 계보를 형성하는 희극적 에로티시즘 영화의 대명사가 되었다. <뽕>은 왜 진지한 비평의 대상이 되지 못했나 그러나 따지고 보면 <뽕>은 나도향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문예영화다. 게다가 이두용 감독은 <피막>(1980)으로 1981년 베니스영화제에서 특별감독상을 수상하고, <물레야 물레야>(1983)로 1983년 칸영화제의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서 입선한 ‘국제적인’ 감독이었다. 또한 주연배우 이미숙은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1984)로 여우주연상을 휩쓸고, <고래사냥>으로 흥행의 아이콘으로 부상한 여배우였으며, 각색자 윤삼육은 특히 사극 장르에서 재능을 발휘한 당대 최고의 시나리오 작가였다. 요컨대 이 영화는 좋은 원작을 저본으로 삼아 당대 최고의 영화 인력들이 모여 만든 야심작이었던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진지한 비평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토속적 에로티시즘 영화의 계보는 1960년대 <산불>(김수용, 1967)이나 <내시>(신상옥, 1968) 등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런데 그것이 1970년대에 제대로 발로되지 못하며 도착성으로 저류하다가 1980년대 3S정책과 컬러TV 보급의 영향, 그리고 ‘국풍(國風)’의 흐름 속에서 전근대(적) 사회 여인의 수난을 알리바이로 삼는 성애영화로 발현되기에 이른다.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를 비롯해 <물레야 물레야> <자녀목> <땡볕> <어우동> <씨받이> 등이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제작된 영화들이다. 이 영화들은 한결같이 비극으로 점철되며 비민주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에 대한 비판의 자세를 취했고 나름대로 진지한 시선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이에 비해 <뽕>은 웃음을 주조로 삼으며 뚜렷한 주제의식을 표출하지 않는다는 점에 차이가 있었다. 한국영화사에서 웃음을 유발하는 코미디 장르는 예술로 평가되지 못하는 경향이 있어 왔다. 웃음은 ‘단순한 오락’이고 의미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가벼운 해소’로 인식되며 코미디 영화는 언제나 ‘예술’의 범주에서 쉽게 제외되곤 했다. <뽕>이 문예영화임에도 불구하고 ‘통속적 성애물’로 자리매김한 것은 그러한 인식에 연유하는 바 크다. 그리고 이 지점이 다른 영화들에 비해 <뽕>이 가볍게 취급되거나 본격적인 분석의 대상이 되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다. 결속되기 힘들었던 두 요소의 병치 그러나 ‘웃음’이야말로 <뽕>에서 공존하기 힘든 불균질한 요소를 결속하는 아교이자 영화에 활력을 제공하는 원천으로 기능하며 이 영화가 성취하는 신선함의 중추를 담당한다. <뽕>은 웃음을 기반으로 이전 영화에서 결속되기 힘들었던 두 요소, 즉 ‘화냥녀 아내 안협집’과 ‘독립운동가 남편 삼보’를 병치해 의외의 효과를 창출한다. 원작에서 삼보는 그저 “땅딸보 오리궁둥이 투전꾼”으로, 삼돌에 의해 마당에 패대기쳐지고 그 화풀이를 아내에게 하는 못난 인물이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삼보를 도인의 품격을 풍기는 정체불명의 룸펜으로 만든다. 삼보는 무심한 듯 사내답고, 초연한 듯하면서도 어딘가 비애에 젖어 있는 범상치 않은 인물이다. 그가 나타날 때마다 뒤따르는 일본 헌병은 그가 일제강점기 요주의 인물임을 암시한다. 이러한 암시는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확증에 가까워지고, 이에 따라 영화는 후반부로 갈수록 에로티시즘보다는 안협집이 처한 현실적 맥락, 즉 남자가 제 구실을 못하는 시대를 온몸으로 살아가야 하는 여자의 상황이 부각되는 방향으로 서서히 전환된다. 이에 대해 개봉 당시에는 “분망한 섹스 행각과 시대상이 상치”되고, “뜨거운 장면 뒤에 각박한 생활을 연결시킴으로써 섹스 장면을 포장”하고 있으며, 이는 “사실성이나 예술성과는 처음부터 거리가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생활인이자, 팜므파탈이자, 억척스러운 그러나 프랑스혁명 직전 귀족사회의 ‘위험한 관계’를 19세기 조선사회의 ‘스캔들’로 가져왔을 때 의외의 결과가 빚어지며 조선사회를 새롭게 상상할 수 있는 지평이 열렸듯이, 이 영화도 웃음을 수반하는 성애놀이로 식민지 시대를 투과시킴으로써 ‘엄숙한 독립운동의 시대’에 대해 이전과는 다른 조망을 가능케 한다. 존경받아야 하는 독립운동가는 아내의 성매매로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는 ‘못난 남편’이 되고, 남자가 제 구실을 못하는 시대에 정조를 파는 일은 비단 비천한 여성에게만 해당하는 일이 아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독립운동’의 의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의 초반에 삼보를 뒤따르는 헌병이 등장하자 삼돌(이대근)이 나서서 정중하게 인사하는 장면이 있다. 삼돌은 안협집이 한사코 마다하는 사내로 끝에 가서 삼보에게 안협집의 행실을 고해바치는 비루한 인물이다. 이러한 삼돌의 패배는 초반 장면에서부터 암시되는 셈이며, 이는 삼보의 행동이 지니는 명분에 대한 공인, 그리고 그에 따라 안협집의 행동에도 정당성이 부여되는 연관 고리를 형성한다. 그리고 이러한 명분과 정당성을 강화하는 것은 삼보의 존재감과 안협집의 매력이다. 삼보는 영화의 맨 앞과 맨 뒤에 등장해 방랑시인과 같은 카리스마로 눈길을 사로잡는다. 삼보의 등장은 전체 구조에서 수미상관을 이루며 영화의 몸통을 이루는 안협집의 행동에 강한 존재감을 드리우고 동시에 그것을 감싸 안는 역할을 한다. 한편 안협집은 특유의 당당함으로 영화 전체를 주도한다. 한국문학사에서도 안협집은 두드러지는 여성 인물이다. <뽕>과 동시대에 나온 단편소설에는 ‘복녀’(<감자>), ‘계집’(<물레방아>), ‘아내’(<소낙비>) 등의 이름으로 무능한 남편과 돈 때문에 성매매를 하는 아내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그들은 상대가 누구냐에 관계없이 돈에 매달리는 데 비해 안협집은 “정조가 헤프기로 유명한 만치 또 매몰스럽기도 유명하여 한번 맘에 들지 않는 것은 죽어도 막무가내여서 만 냥 금을 주어도 거들떠보지 아니하고”, “맘에 드는 서방질은 부정한 일이 아니요, 죄가 아니요, 모욕이 아니나 마음에 없는 놈에게 그런 소리를 듣고 당하는 것은 무서운 모욕”으로 생각하는 인물이다. 이러한 안협집이 영화에서는 잇속과 셈속에 밝은 생활인이자, 계층과 연령에 상관없이 마음만 먹으면 남성을 좌지우지하는 팜므파탈이자, 자신의 매력을 질시하는 동네 아낙들의 횡포에 맞서는 억척스러운 여성으로 거듭난다. 햇발 아래 던져놓은 여성의 생명력 이 독보적인 캐릭터가 시대와 만나면서 흥미로운 충돌과 균열을 드러내는 장면은 이 영화의 압권이다. 삼보는 안협집의 행실을 폭로한 삼돌을 곤죽으로 만들고 나서 아내를 때리며 뽕밭에 몇 번 갔느냐고 다그친다. 이에 안협집은 ‘딱 한 번’이라고 대답한다. 이는 웃지 않을 수 없는 정황을 연출하며 ‘무게 있는 남편’, 혹은 ‘의미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권위에 가려져 있던 삼보의 ‘인간적 면모’를 드러낸다. 그리고 안협집의 개성과 생명력을 다시 한 번 확인해준다. 마지막에 남편이 떠나가는 것을 바라보는 안협집의 뒷모습은 비극적 수난 여성의 정조를 풍기기는 하나, “뽕을 따야 님도 따지”라는 말을 남기고 유유히 사라지는 삼보의 뒷모습 위로 흐르는 타령의 활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협집의 생명력이 변함없이 지속될 것임을 암시한다. 이로써 이 영화는 민족, 독립과 같은 엄숙한 영역에 대해 다시 생각케 하는 동시에 음화와 같은 밀실의 상상력으로만 저류했던 성적 욕망을 여성의 생명력과 중첩시켜 햇발 아래 던져놓는다. 이분법의 균열과 교란, 그리고 역사의 엄숙성에 대한 문제제기가 냉전체제의 종식 이후 그것도 2000년대 들어서야 ‘퓨전’ 혹은 ‘혼성’의 이름으로 본격화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영화에서 불균질한 요소들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지점은 이질성의 모순과 충돌이 빚어내는 포스트모던적 의외성의 선취라 할 만하다.
올해로 3년째 하다 보니 사사로운 영화 리스트를 작성하고 원고 독촉을 받으며 이 원고를 쓰는 일이 이제 한 해를 마무리하는 중요한 일이 되었다. 다시, 올해 본 영화 리스트를 뒤적거렸다. 상반기에 개봉한 영화들 중 사사로운 리스트에 넣을 만한 영화들은 대부분 무주산골영화제에서 상영했으므로, 이번엔 주로 2017년 하반기 극장 개봉작과 이 시기에 본 영화들을 주로 살펴보았다. 그리고 올해의 베스트 영화에 넣을 영화들은 되도록 제외하면서 사사로운 마음으로 나만의 2017년 ‘사사로운 영화 리스트’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올해의 사사로운 영화 리스트 먼저 애니메이션 한 편, 일본 박스오피스에서 < 너의 이름은 >과 함께 흥행했던 야마다 나오코 감독의 애니메이션 < 목소리의 형태 >, 10대의 왕따 문제를 소재로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도를 넘어서서, 소통과 다름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세련되고 유려하게 담아낸 영화는 별로 본 적이 없다. 10대는커녕 20대 이야기를 다룬 청춘영화조차 대부분 교훈과 감동을 버무려내기 위해 애쓰는 한국영화가 앞으로 넘어야 할 산 너머에 있는 영화다. 그리고 한국영화 두 편, 정윤석 감독의 두 번째 다큐멘터리 < 밤섬해적단 서울불바다 >와 김대환 감독의 두 번째 극영화 < 초행 >, 두 감독의 데뷔작과 두 번째 작품을 모두 본 사람은 알 것이다. 본인들은 손사래를 치거나 그러거나 말거나 할지 모르지만 이 두 감독은 한국영화 미래의 일부가 될 것이다. 이제 3년째 사사로운 리스트를 만들면서 처음으로 넣은 할리우드 영화 차례다. 할리우드 프랜차이즈 영화의 최근 경향의 중심에는 마블과 DC의 세계 속에서 존재론적 고민에 시달리며 우울증을 겪고 있는 히어로들이 있다. 이 와중에 험상궂은 얼굴로 못된 인간들을 몽땅 몰아내고 유인원의 세계를 탄생시킨 < 혹성탈출: 종의 전쟁 >은 올해 유일하게 마음을 움직인 할리우드 영화였다. 사실 보고나서야 알았다. 이 영화의 감독이 < 렛미인 >의 미국 버전을 연출한 맷 리브스였다는 걸, 빤한 영화가 좋을 땐 항상 이유가 있는데, 그 이유는 대부분 감독으로부터 비롯된다. 다음은 올해 영화제 상영작 2편, 우선 올해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상영작 오드리우스 스토니스 감독의 < 여자와 빙하 >, 최근 몇 년간 본 최고의 시적 다큐멘터리였다. 구 소비에트 연방과 주변 나라의 감독들은 몽타쥬의 본질과 그것이 가지는 힘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오드리우스 스토니스 감독은 리투아니아 출신이다. 그리고 올해 가장 인상적으로 봤던 데뷔작 중 한 편인 < 신의 나라 >, 영국 출신 프란시스 리 감독의 데뷔작으로 요크셔 지역을 배경으로 한 영국판 < 브로크백 마운틴 >으로 불린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올해 최고의 영국영화 중 한 편임을 확신한다. 내년에 개봉하지 않는다면 무주산골영화제에서 보게 될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이수연 작가의 첫 TV 드라마 < 비밀의 숲 >. ‘사사로운 영화 리스트’에는 TV 드라마를 넣을 수 있다. TV 드라마의 형식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고, 긴장감을 유지하기 위해 매회 정보의 양을 효과적으로 조절한다. 그러면서 세련되게 메시지를 담아낸다. 이수연 작가의 이런 솜씨는 좀처럼 눈을 번쩍 뜨게 하는 스릴러 영화를 찾아볼 수 없는 한국 영화가 벤치마킹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2017년 하반기 개봉작 3편. 2012년 < 신의 소녀들 > 이후 4년 만에 돌아온 크리스티안 문주 감독의 2016년 영화 < 엘리자의 내일 >, 칸영화제 감독상 수상작이 아니더라도 이런 식의 차가운 리얼리즘을 표방한 동유럽 영화는 언제든 보고 싶다. 이제 그의 영화는 어떤 경지에 올라간 것 같다. 거기서 내려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영국의 린 램지(< 케빈에 대하여 >), 미국의 켈리 리처드(<어떤 여인들>), 프랑스의 미아 한센-러브(< 다가오는 것들 >)와 함께 항상 다음 작품이 기다려지는 또 한 명의 여성 감독 안드레아 아놀드의 눈부시게 아름다운 청춘 로드 무비 < 아메리칸 허니: 방황하는 별의 노래 >. 유려하게 움직이면서 포착해내는 청춘의 빛과 그들의 감정은 황홀하다. 이런 클로즈업이라면 어떻게 쓰든 얼마나 쓰든 괜찮다. 그리고 올해 리스트의 마지막 영화는, 드니 빌뇌브 감독의 <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2015)와 데이빗 맥켄지 감독의 < 로스트 인 더스트 >(2016)의 시나리오 작가 테일러 쉐리던의 본격적인 첫 연출작 < 윈드 리버 >다. 볼 날을 기대했던 몇 안 되는 영화였다. 누군가는 실망했겠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올해 선택한 10편의 영화 중 쓰고 싶은 유일한 영화였다. 테일러 쉐리던 테일러 쉐리던은 최근 몇 년 사이 가장 관심 있게 지켜봐 온 미국 시나리오 작가이자 감독이다. 그는 현재까지 쓴 3편의 영화를 통해 기존의 장르 영화에서 보던 흔한 이야기를 다층적인 콘텍스트에 얹어 새로운 시각으로 풀어내는 특별한 재주를 가지고 있음을 증명했다. 원래 배우였다. 2005년 <베로니카 마스>를 시작으로 주로 드라마에 출연했는데, 2008년부터 2010년까지는 <썬즈 오브 아나키>에 출연해 부서장 역을 맡아 주목받았다. 그러다가 2011년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저예산 호러 영화 <고통 Vile>을 연출했다. 이 무렵 주로 시나리오 작업에 몰두했던 모양이다. 2012년 즈음에 시나리오 상태였던 < 시카리오 >와 < 로스트 인 더스트 >의 영화 판권 계약을 마쳤으니 말이다. 이렇게 그는 40살이 넘어 시나리오 작가로서의 길을 열어젖혔다. 그의 시나리오가 영화로 만들어진 첫 결과물은 드니 빌뇌브가 연출을 맡은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였다. 사실 드니 빌뇌브는 지금이야 가장 주목받는 할리우드 영화감독이지만, 원래 캐나다에서 주로 활동했던 감독이다. 첫 출세작은 8번째 영화 < 그을린 사랑 >(2010)이었다. 거의 한국 드라마 수준에 육박하는 감동의 막장 이야기를 힘 있게 연출하여 특히 한국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이후 할리우드 배우들과 함께 2편의 영화를 더 연출했지만 그는 여전히 캐나다 바깥에서 주목받지 못했다. 2013년이 끝나갈 무렵 테일러 쉐리던의 시나리오 <시카리오>를 만났다. 그의 11번째 연출작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는 2015년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하며 호평을 받았다. 처음으로 영화화된 쉐리던의 시나리오는 이렇게 감독과 작가의 인생을 바꾸어버렸다. 드니 빌뇌브는 이후 < 컨택트 >(2016), < 블레이드 러너 2049 >(2017)를 연달아 연출하며 할리우드에서 동시대 가장 주목받는 감독의 자리에 올랐고, 테일러 쉐리던은 <시카리오> 이후 데이빗 메킨지가 연출을 맡은 <로스트 인 더스트>(2016)가 공개되면서 시나리오 작가로서 본격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영화는 2016년 칸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에 초청되었고, 아카데미영화상 및 많은 영화상의 시나리오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었다. 그리고 2016년 자신이 각본을 쓴 세 번째 작품이자, 연출을 맡은 두 번째 작품이지만 본격적인 데뷔작이라고 할 수 있는 < 윈드 리버 >를 완성했다. 2017년 선댄스 영화제에서 첫 공개되었고, 곧바로 칸영화제로 직행하여 주목할만한 시선 부문 감독상을 수상했다. 미국 변방 3부작 테일러 쉐리던은 스스로가 <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 < 로스트 인 더스트 > < 윈드 리버 >를 미국 변방 3부작(frontier trilogy)으로 부른다. 세 영화의 배경이 모두 현대 미국의 변방이기 때문이다. 이 3부작은 특정한 공간을 기반으로 한다. 그래서 이 세 편의 영화를 이야기할 때 반드시 먼저 이야기해야할 것은 영화 속 공간이다. 변방은 정부의 사법권이 잘 닿지 않기 때문에 범죄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세 편의 영화에 등장하는 범죄는 이런 공간적 배경 속에서 발생할 수 있는 동기를 갖게 된다. 여기서 이 삼부작을 가로지르는 하나의 주제를 발견할 수 있는데, ‘이주’와 ‘정착’이다. 변방은 이주가 용이하고 정착이 어렵다. 그러므로 이미 변방에 정착한 사람들의 삶은 불안하다. 외부로부터 흘러들어온 이주민은 잠시 머물렀다 어제든 떠날 사람들이고, 그래서 그들의 삶 역시 부유한다. 불안한 삶은 폭력을 내재한다. 폭력으로 나를, 내 삶을, 내 가족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주민과 정착민 사이에는 긴장이 만들어지고, 그 긴장이 깨지면 폭력이, 그리고 그 폭력은 다시 범죄로 연결된다. 그래서 이 3부작을 관통하는 또 하나의 키워드는 ‘폭력’이 된다. 3부작에는 인간에 내재된 폭력이 얼마나 발전할 수 있는지, 그리고 인간의 삶은 얼마나 폭력에 발목이 잡혀있는지가 그려진다. 테일러 셰리던은 자신의 영화 속 폭력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모든 종은 폭력적이고, 폭력은 말 그대로 삶의 접착제다. 그러나 폭력을 사악하게 사용하는 유일한 종은 인간뿐이다.” 그는 이런 인식을 기반으로 현대 미국의 변방의 특정 공간을 배경으로 설정하고, 이주와 정착, 폭력을 주제로 하여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섬뜩한 스릴러 영화 <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는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을 배경으로 미국의 마약과의 전쟁과 그로 인한 폭력의 이면을 차갑게 담아낸다. 불명확한 선과 악의 경계에서 FBI 요원인 여주인공은 원칙을 지키려고 하지만 결국 실패한다. 그리고 정부가 개입하여 얻어낸 마약과의 전쟁의 결과물은 다시 전직 마약 두목에게 돌아간다. 선악이 불분명해진 세계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미국의 시스템은 영화 속에서 이렇게 정체를 드러낸다. 한편, 멜랑콜리한 감성이 느껴지는 서부극의 느낌이 물씬 나는 범죄 스릴러 영화 < 로스트 인 더스트 >의 배경은 몰락해버린 미국 서부 텍사스이다. 영화는 가족을 위해 은행을 터는 형제 강도와 이를 쫓는 텍사스 두 경찰을 통해 자본주의가 파괴해버린, 그래서 이제는 미국의 변방으로 몰락한 서부의 모습을 노란빛의 화면에 담아낸다. 웨스턴 장르를 통해 찬양받으며, 무자비한 폭력으로 미국 서부를 개척했던 카우보이 모자를 쓴 미국 백인 남성들은 이 영화에 와서 몰락한 채 퇴장한다. 범죄를 처단하고 정의를 부르짖었던 서부극의 총잡이들은 이제 가족을 위해 범죄를 저지르거나 은퇴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그래서 <로스트 인 더스트> 앞에는 신서부극(네오 웨스턴)이라는 단어가 붙곤 한다. < 윈드 리버 > 그리고 쉐리던이 마지막으로 당도한 곳은 또 다른 미국의 변방, 아무런 희망도 찾을 수 없는 미국 와이오밍 주의 인디언 보호구역 윈드 리버다. 미국 정부의 인종에 대한 차별적이고 폭력적 정책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다. 쉐리던은 이곳을 잘 안다. 한 때 오랫동안 이런 보호구역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그가 영화의 연출을 다른 감독에게 맡기지 못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윈드 리버는 겨울이 되면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정도의 눈 폭풍이 며칠씩 몰아치는, 끝없는 백색 설원으로 가득한 곳이다. 이 광활한 공간에서 인간은 한낱 점과 같다. 그 새하얀 눈밭에서 처참한 모습을 한 한 소녀의 시신이 발견된다.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나면 FBI의 관할이다. 지역 사법권의 부재는 외부에서 초짜 여성 FBI 요원 제인(엘리자베스 올슨)을 윈드 리버로 불러들이고, 여기에 인디언 경찰과 야생동물 헌터 코리(제레미 레너)가 합세한다. 사건 조사 과정에서 보여주는 인디언 보호 구역의 삶은 그 곳의 풍경만큼 스산하고 황폐하다. 죽은 채 발견된 소녀는 외부에서 흘러들어온 백인 공사장 인부들에 의해 희생되었다. 광활한 자연의 지루함을 견딜 수 없어 범죄를 저지른 이 백인들은 결국 인디언들에게 유일하게 빼앗아 가지 못한 그 백색의 자연 속에서 죽어간다. < 윈드 리버 >는 이렇게 오래전 인디언을 학살하고 그 땅을 차지했고, 이제 한 인디언 소녀를 잔인하게 폭행하여 죽음으로 몰아넣은 백인들의 범죄를 정부의 사법권으로 처벌하지 않고, 인디언 아내를 둔 코리를 통한 복수로 마무리한다. 따라서 사건을 해결하는 주체가 인디언이 아니라 인디언의 아내를 둔 백인 남성(코리)과 백인 여성(제인)이라는 점에서 이 영화에 대한 비판이 나오는 건 자연스럽다. 그러나 쉐리던이 가지고 있는 인디언 보호구역에서의 거주 경험과 인디언 커뮤니티에 대한 깊은 애정, 그리고 영화의 끝에 등장하는 자막을 생각하면, 코리는 분명 쉐리던의 분신이므로, 이 영화를 통해 정말 쉐리던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폭력으로 밖에 지킬 수 없는 인디언 보호 구역의 처참한 현실에 대한 것이다. 쉐리던은 <윈드 리버>에 대한 인터뷰에서 작가로서의 자신의 일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스토리텔러로서 나 같은 사람이 하는 일의 좋은 점 중 하나는 바로 옆에 엄연하게 존재하고 있음에도 존재하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세계를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라는 예술이 명백하게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점은, 질문함으로써 우리 세계를 비춰보도록 하고, 결국 관객이 질문을 하게 함으로써 어떤 변화를 끌어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쉐리던이 각본을 쓴 이전 두 작품을 떠올려보면, 이 영화에는 이런 하나의 사회적 의미 이상의 다양한 의미들이 포함되어 있는 걸 짐작할 수 있다. 쉐리던의 세계에선 제 역할을 하지 않는 캐릭터를 찾기가 어렵고, 각 인물에게는 많지 않지만 정확하고 필요한 대사가 딱 그만큼 주어진다. 그래서 한 시퀀스에서 다른 시퀀스로 넘어갈 때 꽤 대담한데도 불구하고, 인물의 감정에 대한 설명이 거의 필요 없다. 그렇게 인물들은 안정적인 감정의 인과관계 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질문을 던진다. 뿐만 아니라 그의 세계에선 공간 자체가 캐릭터화 되어 공간과 인물이 상호작용을 하고, 이를 통해 다른 의미를 끌어낸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윈드 리버라는 공간의 입장에서 보면 살인사건과 이 사건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인물들을 통해 인디언 보호구역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정치적 영화가 되지만, FBI 요원의 입장에서 보면 한 여성 초짜 법률 집행인이 사건을 수사하면서 희생자의 슬픔을 진심으로 이해해 가고, 갖은 고초 속에서 결국 사건 해결에 성공하고 살아남은 과정을 담은 성장영화가 되거나, 야생동물 헌터 코리의 입장에서 보면 딸을 잃었던 경험이 있는 아버지가 딸을 잃은 친구를 위해 치밀하게 계획하여 복수에 성공하는 범죄영화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딸을 잃은 아버지 마틴의 입장에서 보면 상실의 고통과 아픔을 견디는 과정을 담은 심리 드라마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다시 한 번 삼부작이 공통적으로 다루고 있는 다른 하나의 주제를 발견하게 된다. 그 주제는 바로 ‘아버지’, 자식을 지키는 데 실패한 아버지다. 적에게 무참하게 가족을 잃은 <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의 아버지 알레한드로(베네치오 델 토로), 가난 밖에 물려줄 수 없어 형과 함께 은행을 털기로 한 < 로스트 인 더스트 >의 아버지 토비(크리스 파인), 살해된 딸과 마약으로 망가진 아들을 지켜내지 못한 < 윈드 리버 >의 두 아버지 코리(제레미 레너)와 마틴(길 버닝햄), 이 무능하고 실패한 아버지들은 잔인하게 복수하거나, 가족을 위해 범죄를 저지르거나, 가만히 슬픔을 체화한다. 결국 쉐리던의 세계는 이 실패한 아버지들을 통해 더 커다란 은유의 세계로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테일러 쉐리던이 만들어낸 세계 난 테일러 쉐리던이 미국 변방 삼부작을 통해 구축해낸 세계를 좋아한다. 폭력이 가득한 이 세계는 우울하고 슬프고 황폐하며 차갑다. 끝없는 절망도 섣부른 희망도 없다. 사랑 때문에, 부조리한 구조 때문에 상처받은 영혼들이 살아가는, 그 흔한 로맨스 하나 없는 세계다. 영화 속에 등장한 인물들은 그저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자신의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명백하게 변화하지 않을 것 같은 이 세계, 그러나 우리는 이 견고해 보이는 세계조차. 천천히, 보이지 않게 변화하고 있다는 걸 안다. 그리고 그 세계의 변화는 결국 사람으로 비롯된다는 것도. 지난 수년간 암흑기를 겪었던 우리가 그랬듯, 이 삼부작의 각기 다른 공간 속에서 살아남은 인물들 - <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의 FBI요원 케이트(에밀리 블런트)와 다시 마약 두목이 된 알레한드로(베네치오 델 토로), < 로스트 인 더스트 >의 토비(크리스 파인)과 해밀턴(제프 브리지스), < 윈드 리버 >의 두 아버지 코리(제레미 레너)와 마틴(길 버닝햄)과 살아남은 FBI요원 제인(엘리자베스 올슨) - 도 그럴 것이다. 아니 그럴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이것이 그가 쓴 시나리오로 영화화 되고 있는 < 시카리오 2: 솔다도 >(2018)와 케빈 코스트너의 출연을 전제로 각본과 연출을 맡은 TV 드라마 <옐로우 스톤>(2018)을 기다리는 나의 이유이다.
이두용 감독의 < 뽕 >은 1980년대 ‘토속적 에로티시즘’의 대표작으로 각인된 영화다. 이 영화는 당대 흥행에 크게 성공한 것은 물론 국내외 영화제에서도 여러 상을 탔음에도 불구하고, 비평에서는 ‘오락적 흥미 본위의 성애물’로 분류되며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 이후 < 뽕2 >(1988), < 뽕3 >(1992), < 1996 뽕 >으로 이어지면서 ‘뽕’이라는 말이 지닌 원초적 어감이 강화되어 ‘성애 영화’로서의 이미지가 고착되었고, < 변강쇠 >(1986) 시리즈와 함께 계보를 형성하는 희극적 에로티시즘 영화의 대명사가 되었다. < 뽕 >은 왜 진지한 비평의 대상이 되지 못했나 그러나 따지고 보면 <뽕>은 나도향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문예영화다. 게다가 이두용 감독은 < 피막 >(1980)으로 1981년 베니스영화제에서 특별감독상을 수상하고, < 물레야 물레야 >(1983)로 1983년 칸영화제의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서 입선한 ‘국제적인’ 감독이었다. 또한 주연배우 이미숙 은 <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1984)로 여우주연상을 휩쓸고, < 고래사냥 >으로 흥행의 아이콘으로 부상한 여배우였으며, 각색자 윤삼육 은 특히 사극 장르에서 재능을 발휘한 당대 최고의 시나리오 작가였다. 요컨대 이 영화는 좋은 원작을 저본으로 삼아 당대 최고의 영화 인력들이 모여 만든 야심작이었던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진지한 비평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토속적 에로티시즘 영화의 계보는 1960년대 < 산불 >( 김수용 , 1967)이나 < 내시 >( 신상옥 , 1968) 등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런데 그것이 1970년대에 제대로 발로되지 못하며 도착성으로 저류하다가 1980년대 3S정책과 컬러TV 보급의 영향, 그리고 ‘국풍(國風)’의 흐름 속에서 전근대(적) 사회 여인의 수난을 알리바이로 삼는 성애영화로 발현되기에 이른다. <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를 비롯해 < 물레야 물레야 > < 자녀목 > < 땡볕 > < 어우동 > < 씨받이 > 등이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제작된 영화들이다. 이 영화들은 한결같이 비극으로 점철되며 비민주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에 대한 비판의 자세를 취했고 나름대로 진지한 시선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이에 비해 <뽕>은 웃음을 주조로 삼으며 뚜렷한 주제의식을 표출하지 않는다는 점에 차이가 있었다. 한국영화사에서 웃음을 유발하는 코미디 장르는 예술로 평가되지 못하는 경향이 있어 왔다. 웃음은 ‘단순한 오락’이고 의미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가벼운 해소’로 인식되며 코미디 영화는 언제나 ‘예술’의 범주에서 쉽게 제외되곤 했다. <뽕>이 문예영화임에도 불구하고 ‘통속적 성애물’로 자리매김한 것은 그러한 인식에 연유하는 바 크다. 그리고 이 지점이 다른 영화들에 비해 <뽕>이 가볍게 취급되거나 본격적인 분석의 대상이 되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다. 결속되기 힘들었던 두 요소의 병치 그러나 ‘웃음’이야말로 < 뽕 >에서 공존하기 힘든 불균질한 요소를 결속하는 아교이자 영화에 활력을 제공하는 원천으로 기능하며 이 영화가 성취하는 신선함의 중추를 담당한다. <뽕>은 웃음을 기반으로 이전 영화에서 결속되기 힘들었던 두 요소, 즉 ‘화냥녀 아내 안협집’과 ‘독립운동가 남편 삼보’를 병치해 의외의 효과를 창출한다. 원작에서 삼보는 그저 “땅딸보 오리궁둥이 투전꾼”으로, 삼돌에 의해 마당에 패대기쳐지고 그 화풀이를 아내에게 하는 못난 인물이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삼보를 도인의 품격을 풍기는 정체불명의 룸펜으로 만든다. 삼보는 무심한 듯 사내답고, 초연한 듯하면서도 어딘가 비애에 젖어 있는 범상치 않은 인물이다. 그가 나타날 때마다 뒤따르는 일본 헌병은 그가 일제강점기 요주의 인물임을 암시한다. 이러한 암시는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확증에 가까워지고, 이에 따라 영화는 후반부로 갈수록 에로티시즘보다는 안협집이 처한 현실적 맥락, 즉 남자가 제 구실을 못하는 시대를 온몸으로 살아가야 하는 여자의 상황이 부각되는 방향으로 서서히 전환된다. 이에 대해 개봉 당시에는 “분망한 섹스 행각과 시대상이 상치”되고, “뜨거운 장면 뒤에 각박한 생활을 연결시킴으로써 섹스 장면을 포장”하고 있으며, 이는 “사실성이나 예술성과는 처음부터 거리가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생활인이자, 팜므파탈이자, 억척스러운 그러나 프랑스혁명 직전 귀족사회의 ‘위험한 관계’를 19세기 조선사회의 ‘스캔들’로 가져왔을 때 의외의 결과가 빚어지며 조선사회를 새롭게 상상할 수 있는 지평이 열렸듯이, 이 영화도 웃음을 수반하는 성애놀이로 식민지 시대를 투과시킴으로써 ‘엄숙한 독립운동의 시대’에 대해 이전과는 다른 조망을 가능케 한다. 존경받아야 하는 독립운동가는 아내의 성매매로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는 ‘못난 남편’이 되고, 남자가 제 구실을 못하는 시대에 정조를 파는 일은 비단 비천한 여성에게만 해당하는 일이 아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독립운동’의 의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의 초반에 삼보를 뒤따르는 헌병이 등장하자 삼돌( 이대근 )이 나서서 정중하게 인사하는 장면이 있다. 삼돌은 안협집이 한사코 마다하는 사내로 끝에 가서 삼보에게 안협집의 행실을 고해바치는 비루한 인물이다. 이러한 삼돌의 패배는 초반 장면에서부터 암시되는 셈이며, 이는 삼보의 행동이 지니는 명분에 대한 공인, 그리고 그에 따라 안협집의 행동에도 정당성이 부여되는 연관 고리를 형성한다. 그리고 이러한 명분과 정당성을 강화하는 것은 삼보의 존재감과 안협집의 매력이다. 삼보는 영화의 맨 앞과 맨 뒤에 등장해 방랑시인과 같은 카리스마로 눈길을 사로잡는다. 삼보의 등장은 전체 구조에서 수미상관을 이루며 영화의 몸통을 이루는 안협집의 행동에 강한 존재감을 드리우고 동시에 그것을 감싸 안는 역할을 한다. 한편 안협집은 특유의 당당함으로 영화 전체를 주도한다. 한국문학사에서도 안협집은 두드러지는 여성 인물이다. < 뽕 >과 동시대에 나온 단편소설에는 ‘복녀’(<감자>), ‘계집’(<물레방아>), ‘아내’(<소낙비>) 등의 이름으로 무능한 남편과 돈 때문에 성매매를 하는 아내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그들은 상대가 누구냐에 관계없이 돈에 매달리는 데 비해 안협집은 “정조가 헤프기로 유명한 만치 또 매몰스럽기도 유명하여 한번 맘에 들지 않는 것은 죽어도 막무가내여서 만 냥 금을 주어도 거들떠보지 아니하고”, “맘에 드는 서방질은 부정한 일이 아니요, 죄가 아니요, 모욕이 아니나 마음에 없는 놈에게 그런 소리를 듣고 당하는 것은 무서운 모욕”으로 생각하는 인물이다. 이러한 안협집이 영화에서는 잇속과 셈속에 밝은 생활인이자, 계층과 연령에 상관없이 마음만 먹으면 남성을 좌지우지하는 팜므파탈이자, 자신의 매력을 질시하는 동네 아낙들의 횡포에 맞서는 억척스러운 여성으로 거듭난다. 햇발 아래 던져놓은 여성의 생명력 이 독보적인 캐릭터가 시대와 만나면서 흥미로운 충돌과 균열을 드러내는 장면은 이 영화의 압권이다. 삼보는 안협집의 행실을 폭로한 삼돌을 곤죽으로 만들고 나서 아내를 때리며 뽕밭에 몇 번 갔느냐고 다그친다. 이에 안협집은 ‘딱 한 번’이라고 대답한다. 이는 웃지 않을 수 없는 정황을 연출하며 ‘무게 있는 남편’, 혹은 ‘의미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권위에 가려져 있던 삼보의 ‘인간적 면모’를 드러낸다. 그리고 안협집의 개성과 생명력을 다시 한 번 확인해준다. 마지막에 남편이 떠나가는 것을 바라보는 안협집의 뒷모습은 비극적 수난 여성의 정조를 풍기기는 하나, “뽕을 따야 님도 따지”라는 말을 남기고 유유히 사라지는 삼보의 뒷모습 위로 흐르는 타령의 활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협집의 생명력이 변함없이 지속될 것임을 암시한다. 이로써 이 영화는 민족, 독립과 같은 엄숙한 영역에 대해 다시 생각케 하는 동시에 음화와 같은 밀실의 상상력으로만 저류했던 성적 욕망을 여성의 생명력과 중첩시켜 햇발 아래 던져놓는다. 이분법의 균열과 교란, 그리고 역사의 엄숙성에 대한 문제제기가 냉전체제의 종식 이후 그것도 2000년대 들어서야 ‘퓨전’ 혹은 ‘혼성’의 이름으로 본격화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영화에서 불균질한 요소들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지점은 이질성의 모순과 충돌이 빚어내는 포스트모던적 의외성의 선취라 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