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꿀이 실종사건
- 감독
- 최선진, 이주호, 천현일, 류가영, 이나라
- 제작년도
- 2007
- 출연
- 홍진욱, 전숙경, 오해완, 오해주, 김미진
경기천년바탕체 R(저작권자: 경기도, 출처: 한국저작권위원회 ) (위 사진 클릭 시 유튜브 인터뷰 영상으로 이동) 90년의 역사: 광주 지역 최초의 조선인 대상 상설관으로 출발하다 광주극장은 현재 광주광역시 동구 충장로 46번길에 있는 영화관으로 1935년 10월 1일에 개관했다. *주1 광주의 향토극장으로는 지금은 사라진 ‘무등극장’을 비롯, 두 개 정도의 극장이 더 있었으나 이제는 오롯이 광주극장 하나가 남아있다. 광주극장은 현존하는 광주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이자, 인천의 애관극장 에 이어 국내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극장이다. 애관극장이 멀티플렉스로 바뀌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단관극장으로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극장이라 할 수 있다. 개관 이후 거의 90년의 세월 동안 한자리를 지키고 있는 광주극장은 단순한 극장이 아니며 영화인들은 물론 광주시민, 지역주민들에게 그 공간 자체가 갖는 가치와 상징이 크다. 광주극장이 광주 지역 최초의 극장은 아니다. 광주극장 이전 광주좌와 제국관 , 광남관 등이 존재했다. 그러나 이들 극장은 일본인 극장주가 경영을 하였고, 주된 대상 관객 역시 광주에 있던 일본인이었다. 조선인 대상의 극장이 필요하다는 인식하에 1928년부터 광주의 조선인들 사이에서 영화관 설립의 불이 지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실제로 세워지기까지는 시간이 소요되어, 1935년에야 조선인이 극장주가 된 광주극장이 개관했다. 광주극장이 세워진 위치 자체도 조선인들의 상권이 형성되어 있는 곳이기에 그 의미가 더 컸다. 원래 충장로에서 남해당이라는 큰 상점을 경영하던 이준실이란 사람이 광주극장을 계획했는데, 빚을 감당하지 못하고 학교법인 유은학원의 설립자이자 만석꾼이었던 최선진에게 건축 중인 건물을 넘겼다. 최선진은 1933년 30만원의 자본금으로 주식회사를 설립하여 1935년 1,250명 수용 규모의 광주극장을 개관했다. 광주극장의 역사를 1933년으로 헤아리는 것은 법인이 설립된 해 기준이다. 현재까지 그 자손들이 광주극장 건물의 소유주이자 서류상 광주극장 대표로 되어 있다. 광주극장 1층 로비와 출입문 광주극장은 충장로 5가에 위치했는데, 충장로 1가, 3가는 일본인들 상권이 형성되어 있었던 반면, 5가는 조선인들 상권이 형성되어 있던 곳이었다. 즉 충장로 5가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조선인들의 접근성이 높았는데, 조선인의 자본으로 조선인이 세우고 직접 운영하다보니 조선인들을 위한 문화적 공간이 되었음은 물론, 단순한 극장을 넘어 민족적이면서도 지역의 구심점이 되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광주극장은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영화 상영 외에도, 창극이나 판소리 등의 공연, 조선인 단체들의 회합 장소로 활용되면서 조선인 지역극장의 정체성을 지켰으며, 해방 후에는 김구의 강연회를 포함한 정치집회, 음악회, 연극제를 여는 등 문화교육운동의 장소로도 활용되었다. 특히 일제강점기 조선인 지역극장으로서의 특성은 일제의 감시를 염두에 둘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는데, 그 검열의 흔적은 아직도 극장 안에 남아있는 ‘임검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임검석이란 상영이나 공연이 진행되는 현장을 점검하는 검열관들을 위해 만든 좌석으로, 임검은 사전 검열과는 다른 별도의 행정 단속 절차였다. 또한 호남지역 최초로 한국인이 세운 극장이었기에 일본인 소유의 극장에서는 올리지 않는 영화들인 < 홍길동전 >(김소봉, 이명우, 1935)과 < 춘향전 >(이명우, 1935) 등과 같은 영화를 광주극장에서 볼 수 있었다. 광주극장 내 남아있는 임검석 1968년, 극장에 큰 화재가 나서 건물 대보수를 했고 1968년 10월 4일 재개관했는데 현재의 광주극장(864석)이 재개관한 광주극장 건물을 그대로 유지 보수하여 쓰고 있다. (1997년에는 내부 좌석 교체와 개보수 및 건물 전면 일부를 변경) 화재 당시 건물이 타면서 극장 안에 보관 중이던 1968년까지의 자료도 함께 불타버린 점이 가장 큰 손실이다. 예술영화 전용관이 되다 광주극장이 지금처럼 예술영화 전용관으로 전환하게 된 계기는 1998년 6월, 극장이 학교보건법 상 정화구역 내 유해업소로 지정되어(15m 안에 유치원이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자진 이전 하거나 2000년 12월 말까지 폐쇄하라는 명령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광주극장은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고, 심야 예술영화 프로그램을 신설해 다른 극장에서 볼 수 없는 영화들을 상영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시 교육청은 행정명령 불이행으로 극장주를 검찰에 고발했고, 극장 측도 헌법재판소에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하면서 맞섰다. 결국, 2004년 5월 27일, 헌재는 학교정화구역에서의 극장 영업을 금지한 학교보건법 관련 조항에 대해 재판관 전원 일치로 위헌 결정을 내리면서 영업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광주극장은 2016년경 한 번 더 위기를 맞이한다. 광주극장은 2002년부터 예술영화 전용관으로, 영화진흥위원회의 지원을 받아왔다. 그러다 2016년 영화진흥위원회의 ‘예술영화 전용관 사업’이 ‘예술영화 유통배급 지원사업’으로 바뀌었는데, 위원회가 정하는 영화의 상영 기준을 충족하는 영화를 상영해야 지원을 하는 제도였다. 광주극장은 이 방침을 ‘사전검열’이라고 보고 지원을 받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만의 특색과 프로그램을 유지하고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한 결정이었다. 그러나 운영 수익의 35%를 차지하는 지원금이 막히면서 광주극장은 극장 유지에 고비를 맞게 됐고, 이를 돌파하기 위해 ‘후원회원 모집’ 캠페인을 진행, 현재 약 450여 명의 후원회원을 두고 있다. 현재는 영화진흥위원회와 광주광역시의 사업 보조금, 그리고 광주극장 후원회원의 후원금으로 운영 중이나 안정적인 운영을 위해 광주광역시 동구청은 ‘고향사랑기부제’를 통해 광주극장 살리기에 나섰다. 광주 지자체 최초로, 고향사랑기부제의 구체적인 사용처를 적시한 프로젝트다. 광주극장 상영관 1층 내부 전경 광주극장은 관객의 영화감상을 방해하지 않기 위하여 영화 시작 전에 상업광고는 절대 하지 않고, 영화가 끝나고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조명을 켜지 않는다. 비좌석제라서 들어가서 앉고 싶은 자리에 앉으면 되고, 지금도 필름 영사기를 보관하고 있어서 일 년에 3~4번 정도는 필름으로 영화를 상영하고 있다. 20년 이상 극장에서 일하셨던 영사기사 두 분이 디지털과 필름 영사기를 돌리며 극장의 역사와 함께하고 있다. 역사를 간직한 채 새로운 길을 모색하다 광주극장에 들어서면 극장 곳곳에는 극장 역사를 알 수 있는 많은 기록과 자료, 기자재들이 가득하다. 아이스크림을 팔던 기계, 영사기, ‘개봉푸로’라고 적힌 오래된 안내판, 극장 간판을 그리는 박태규 화백의 작은 간판 작품이 놓여 있다. 박태규 화백은 1992년 광주극장에 입사하여 2004년까지 간판을 담당했다. 마지막 직함은 간판실 부장이었다. 박태규 화백은 단순한 간판 화가가 아니라, 민중미술가로서도 활동해 왔는데 최근에는 간판 미술을 전시하고 교육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그 연장선상에서 그는 2015년부터 광주극장과 함께 영화간판시민학교를 운영해오고 있다. 영화간판학교의 결과물이 전시된 광주극장 전면 포스터대 한편 광주극장은 극장 뒤편 관사를 개조한 영화의 집에 건립 당시의 극장 전경과 주변 거리 풍경이 담긴 사진첩과 그동안 광주극장을 거쳐 간 많은 사람의 근무기록부, 영화 및 공연 기록, 입장권 수불표 등도 보관하고 있다. 1960년대는 영화 상영 전 아나운서가 멘트를 하고 영화를 상영했는데 아나운서 멘트 노트도 잘 보존되어 있다. 극장 자체가 영화박물관인 셈이다. 지금은 광주의 구도심이 되어 버렸지만 예전에 많은 한복집과 보석상들이 자리 잡았던 광주 충장로 골목은 해방 이전에는 호남상권의 중심으로 전성기를 보냈고 해방 이후에도 오랫동안 호남 사람들의 중심지이자 번화가의 역할을 맡아, 지금도 그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2020년 광주광역시 조사 당시 광주에서 30년 이상 된 가게 160곳 중 120곳이 충장로에 모여 있었는데, 이는 충장로에 위치한 가게가 2,000여 개 정도라는 것을 생각하면 매우 높은 비율이다. 1935년 시작하여 90년 가까운 시간을 지켜온 광주극장에 이어 1946년부터 자리를 지켜온 전남의료기상사가 아직도 충장로 5가에 있으며, 이외에도 충장로의 흥망성쇠를 보고 자라며 2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가게도 많다. 충장로의 오래된 가게는 그 자체로 지역민들에게 지역의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인식되고 있는데, 광주극장에 대한 광주시민들의 애정과 호응 역시 광주극장이 위치한 거리의 특성과 더불어 개관 당시의 역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2020년 광주시 동구는 광주극장 옆 골목길을 ‘영화가 흐르는 골목’으로 조성하였고, 나아가 광주극장과 문화공간 ‘영화의 집,’ 독립서점 ‘소년의 서’ 등 골목에 소재한 문화자원을 적극 활용해 광주극장 인근 골목을 영화·문학·문화가 흐르는 광주의 대표 예술 골목으로 재탄생시킨 바 있다. 원래 광주극장 옆 골목길은 쓰레기가 넘치고 악취가 많이 풍겼는데, 박태규 화백이 직접 그리는 손간판뿐 아니라 광주의 극장 문화사를 담는 여러 가지 자료들을 전시하여 거리의 분위기를 일신했다. 영화가 흐르는 골목 벽면 전시-광주의 극장문화사 광주극장은 시네필들의 성지나 광주의 가장 오래된 극장(한국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극장)이나 랜드마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문화유산이자 예술영화 전용관으로 소비자가 자부심 느끼며 영화와 공간을 모두 이용하는 상징적 소비를 하는 극장으로 자리 잡고 있다. 공간 및 운영 개요 1. 위치 : 광주광역시 동구 충장로46번길 10 2. 설립일 : 1935년 10월 1일 3. 대표자 : 최용선 4. 규모 : 연면적 2,264.85㎡, 대지면적 1,286.6㎡, 건축면적 999.4㎡ / 지하 1층, 지상 4층 5. 극장 구성 (관수, 관별 좌석수) : 1개관, 856석, 장애인 좌석 30석 6. 운영시간 : 10:40 – 22:00 7. 입장료 : 성인 1만원, 청소년 9천원, 조조 8천원, 실버·장애인·초등학생·CMS 후원회원 7천원, 패키지 티켓(1인 사용) 5편(2개월) 4만원, 3편(1개월) 2만 7천원 8. 조직 구성 대표(최용선, 극장주), 전무이사(김형수, 실질적인 운영), 영사실장(정홍주), 매표직원 2인(비정규), 미술실 박태규 화백은 ‘영화간판학교’ 프로젝트로 참여 글/진행 : 김문경 사진 : 허 성 취재 일자 : 2023년 7월 27일 *** 주1. 위경혜의 연구에 따르면 10월 1일에 낙성을 하고 10일에 개관식을 했다고 한다. 위경혜, 『광주극장: since 1933』,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8, 46쪽. 이하 이 글의 상당 부분 내용은 이 책을 참고로 했음을 밝힌다.
① 군산좌(群山座), 군산극장(群山劇場) 군산좌는 군산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이다. 군산부 노정(蘆町)에 있었으며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는다. 1914년 무렵부터 신문지상에서 이름이 발견되는데 1926년 당시 군산좌의 좌주는 시마다(島田元三郞)였다. 그는 낡고 오래된 극장을 개축하려 시도하던 중 실패하였고 1929년 극장은 폐쇄된다. 이 무렵 군산 유지 미츠토미(光富嘉八) 등이 합자회사를 조직하여 극장을 개복동으로 옮겨 짓고 이름을 군산극장이라 지었다. 1932년 8월 군산극장은 채무 문제로 경매에 붙여졌고, 마쓰오(松尾仁平)가 낙찰 받아 운영하기 시작했다. 이후 군산극장은 조선인 상설관으로 활용되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마쓰오(松尾仁平)이며 객석수는 610석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② 희소관(喜笑館) 군산부 개복정에 있었던 활동사진관이다. 언제 설립되었는지 알 수 없다. 1924년 무렵부터 신문지상에서 그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가와카미(河上榮)이며 지배인은 히로노(博野登四郞)였으나 화재를 당해 폐관 상태였다. 해방 직전 다시 개관한 것으로 보인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③ 전주좌(全州座), 전주극장(全州劇場), 제국관(帝國館) 전주 지역의 오래된 극장으로 1910년대 초반 설립된 것으로 보인다. 1918년 무렵엔 이미 시설이 낙후해서 폐쇄된 상태로 새로운 극장 신축을 위한 조합이 조직되어 극장을 건설 중에 있었다. 전주부 대정정에 새로 건설된 극장의 이름은 전주극장으로 정해졌다. 전주극장에서는 각종 공연과 활동사진을 상영했다. 1934년 초등생도음악회 이후 제국관으로 이름을 바꾼 듯 보인다. 1943년 당시 흥행주는 마츠나카 시게루(松永茂), 지배인은 마츠나카 키요시(松永潔)였으며 객석은 760석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④ 이리좌(裡里座) 이리읍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이다. 1914년 4월 개관했다. 1928년 2월 극장에서 발생한 화재로 소실되었다. 당시 좌주는 가토(加藤方)이었다. 같은 해 7월 말 재건되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미무라(三村德太郞)이며 좌석수는 450석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⑤ 김제좌(金堤座) 김제읍 본정에 있었다. 언제 건립되었는지 알려지지 않는다. 1932년 10월 25일 김제에서 화재가 발생했을 때 극장에서 구경을 하던 사람들이 밖으로 뛰쳐나오면서 아수라장이 펼쳐진 사건이 있었다. 또한 1934년 8월 삼남수해활동사진이 이곳에서 상영되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곽용훈(郭鎔勳)이며 객석수는 300석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⑥ 소화극장(昭和劇場) 전북 부안군 부안읍에 있었다. 언제 건립되었는지 알려지지 않는다. 1937년 이곳에서 황군위문학예회가 열린 것으로 보아 이 무렵 설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김광평(창씨명 金本光平)이고 지배인은 우에다(植田英二)였다. 객석수는 305석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⑦ 남원극장(南原劇場), 보국관(報國館) 남원극장은 1931년 4월 낙성한 극장이다. 적은 비용으로 건립되었기에 시설과 설비가 좋지 못했다. 1936년 당시 관주인 최두일이 4천 8백원을 투입하여 수리하였다. 1940년대 들어 이름을 보국관이라 바꾸었고, 해방 후 다시 남원극장으로 개칭하였다. 1943년 당시 흥행주는 쿠니사다(國定豊)였으며 객석수는 428석이었다. ⑧ 추산좌(秋山座) 정읍군 정읍읍에 있었다.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1922년부터 신문지상에서 이름이 발견된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박명규, 지배인은 아라이(新井純二郞)였다. 좌석수는 355석이었다. 다음은 전라남도지역이다. ⑨ 광주좌(光州座) 광주 최초의 극장으로 광주읍 황금정에 있었다. 1918년 이곳에서 집회를 개최한 기록이 남아 있다. 다양한 집회와 연극, 영화 상영이 펼쳐졌던 이곳은 1931년 11월 8일 발생한 화재로 전소된다. 당시 관주는 후지가와(藤川)였다. 이후 재건되지 못했다. ⑩ 광남관(光南館), 제국관(帝國館) 광남관은 1927년 설립된 일본인 위주의 활동사진관이다. 조선인 활동사진관이 없었기에 광남관의 전속 영사기사 조명덕(趙明德)은 1927년 연말에 이 곳에서 조선인들을 위한 시민위안영화대회를 열었다. 그는 영사기사, 악사, 변사로 구성된 광주영화삼우회(光州映畵三友會)를 조직하기도 했다. 1930년에 그 이름을 제국관(帝國館)으로 바꾸었으며 다양한 집회장소와 흥행장으로 사용되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구로세(黑瀨豊藏), 지배인은 미에(彌榮正己)였으며 좌석수는 750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⑪ 광주극장(光州劇場) 호남 갑부 최선진 외 4명의 사람들이 자본금 30만원 불입금 7만 5천원의 주식회사 광주극장을 조직하여 세운 영화관이다. 광주부 본정에 위치했으며 1935년 10월 1일 개관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최선진이며 지배인은 미야가와(宮川昌信)였다. 객석은 1,050석의 대극장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⑫ 상반좌(常盤座), 목포극장(木浦劇場) 상반좌는 목포의 가장 오래된 극장이다.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다. 1914년 2월 고토 료스케 일좌(後藤良介一座)의 공연과 1916년 5월 어대례활동사진배관회(御大禮活動寫眞拜觀會)가 이곳에서 있었다. 이와 같은 각종 행사를 비롯해 형설회나 토월회 같은 조선인 흥행단의 공연도 이곳에서 펼쳐졌다. 1926년 11월 활동사진관으로 전환하며 이름을 목포극장으로 바꾸었다. 김성두, 이상근과 같은 조선인 변사를 두고 있었으며 미국 유니버설회사와 특약을 맺고 있었다. 1934년 김원희(金源喜)가 인수하였으며 이후 2만 3천원의 예산으로 대개축을 하였다. 1936년 대대적인 수리가 끝났고 이후 목포극장은 광주극장과 더불어 호남을 대표하는 영화관으로 자리하게 된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기무라(木村巴茂)였으며 78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⑬ 희락관(喜樂館), 평화관(平和館) 희락관은 목포의 활동사진관으로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1921년 통영청년회활동사진대일행이 이곳에서 영화를 상영한 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목포의 유일한 활동사진상설관이던 희락관은 1926년 소실되었다. 희락관이 사라진 후 1927년 8월 새롭게 영화관이 신축된다. 새로운 영화관의 이름은 평화관이었다. 쇼치쿠 영화 중심의 흥행장으로 목포부 무안통에 있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모리모토(森本政治郞), 지배인은 모리모토(森本淸)이며 객석수는 513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⑭ 여수극장(麗水劇場) 여수에 극장을 지으려는 시도는 1925년부터 있었다. 부사옥구락부(富士屋俱樂部)와 영좌(榮座)라는 극장이 있었으나 가설극장 수준이었다. 제대로 된 상설관의 건립은 1930년 시작된다. 여수의 일본인 니로(新納寅太郞)가 극장 여수좌(麗水座)의 건립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상설 극장이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1939년 1월부터 여수극장이 신문지상에 보도되기 시작한다. 1943년 현재 여수극장의 흥행주는 나카무라(中村克己)이며 37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⑮ 순천구락부(順天俱樂部), 순천극장(順天劇場) 1933년 1월 조선신문에 실린 순천구락부의 새해 광고에 극장 순천구락부의 이름이 등장한다. 마사무네(正宗義智), 키자키(木崎義男), 무라카미(村上義一), 타케우치(武內罷) 등의 이름이 병기되어 있다. 1937년 7월 13일에는 순천극장이 개관한다. 순천 거주 일본인들의 발기로 3만원을 들여 극장을 지은 것이다. 순천극장의 건립과 함께 순천구락부는 사라진 듯 보인다. 1943년 현재 순천극장의 흥행주는 마사무네(正宗義智)이다. 순천극장은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⑯ 송정리극장(松汀里劇場) 전남 광산군 송정읍에 있었다. 누가 언제 건립했는지는 알려지지 않는다. 1943년 현재 광주극장 운영자 최선진이 운영하고 있었다. 객석 수는 407석이었다. 해방 이후에도 존속했다. ⑰ 창심관(暢心館), 조일구락부(朝日俱樂部) 제주도에 가장 먼저 만들어진 극장은 창심관(暢心館)이다.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1935년 1월 23일 영화 상영 중 화재가 발생해 전소되었다. 이어서 만들어진 극장이 조일구락부(朝日俱樂部)이다. 1940년경에 개관했다고 알려져 있다. 제주도 제주읍에 있던 극장으로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니무라(二村守彦)이며 30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후 제주극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자료] 《조선중앙일보》, 1935.09.28. 광주극장 개관, 十월 一일부터 【광주】 조선에서 제일을 자랑할 만한 광주극장(光州劇場)은 당지 갑부 최선진(崔善鎭)씨 외 四명의 주식회사로서 총건축비 八만여원이란 거액을 들여 약 一년간을 두고 건축 중이든 바 근근 준공을 보게 되여 오는 十월 一일 부(府) 승격을 기념하기 위하여 당일부터 개관을 하게 만단 준비 중이라 한다. [자료] 《매일신보》, 1935.10.04. 광주극장 준공, 一일에 개관 【광주】 기공 중이든 광주극장은 이에 준공을 마치엇슴으로 十월 一일부터 개관하고 동일(同日)은 관계자 수백명을 초대하야 개관의 피로공연이 잇섯든 바, 동 극장은 천이백명의 관람자를 수용할 수 잇는 당당한 철근 『콩크리-트』 二층 건물로 본정 五정목의 한 위관(偉觀)을 이루고 잇는데 그 총 공비 七만 五천원의 거비(巨費)를 투(投)하야 무대는 회전식 八간(間)의 대규모의 것으로 사장은 최선진(崔善鎭)씨 취체역에 유연상(劉演相) 조규림(趙圭林)의 양씨, 감사역에는 김희성(金喜誠)씨가 취임하기로 되엇다. [자료] 《매일신보》, 1931.04.27. 신축 중의 남원극장, 낙성식 거행 【전주】 작추(昨秋) 이래 신축공사를 급진(急進)하야 오든 전북 남원극장은 이 사이 겨우 준공됨을 ᄯᅡ 라 지난 二十일 오후 七시부터 당지 소방조(消防組) 주최로 성대히 낙성식을 거행하얏는데 당일 관람객은 남녀 수천여명에 달하야 장외 장내는 입추의 여지도 업시 대혼잡을 극(極)하야 남원 유사 이래 초유(初有)의 성황을 정(呈)하얏다 한다. [자료] 《매일신보》, 1932.03.09. 군산에 우복(又復) 대화(大火), 극장 등 삼동(三棟) 전소(全燒), 七일 새벽 군산좌에서 발화, 손해는 약 三만원 【군산】 화신(火神)의 작란인지? 지난 三일에 군산 영정(榮町)에서 손해액 二만 二천원의 손실을 보는 큰 화재가 이러남은 본보가 솔선하야 보도한 바이어니와 지난 七일 새벽 一시 四십분 군산부 노정(盧町) 군산좌(群山座)(그전 극장)에서 불이 이러나자 ᄯᅢ 맛침 맹렬한 바람은 소방대의 출동도 못 밋처 부근은 큰 불바다가 되야 여섯 채의 집을 전소하고 세 채의 집을 반소하얏스며 전신주 한 개를 반소하야 손해액은 三만 천원에 달한 큰 화재인바 금년으로 二三일을 격하야 발행한 대화이니만큼 그 원인을 조사 중인바 군산좌주 도전원삼랑(島田元三郞)은 극장으로 쓰든 군산좌의 집을 오래동안 묵혀 비어둔 것으로써 일전에야 화재보험액 一만원을 가입한 관게와 그 집에서 불이 난 것을 미루어 색안경으로써 보게 되는 의혹이 불무하야 방금 군산경찰은 엄중히 조사 중이라 하며 소실된 가옥은 군산좌(群山座)와 동해루(東海樓)라는 중국료리점과 그에 린접한 집 一동 세 집과, 반소로는 주다야여관(ジタヤ)과 서천(西川) 모의 주택과 송미세탁소(松尾洗濯所)라고 한다. (사진은 화재현장 광경) [자료] 《매일신보》, 1913.05.01. 소인연예회(素人演藝會) 별항(別項)과 여(如)히 당지 소방조합에서는 소방용으로 정호(井戶) 16개소를 부내 적의(適宜)의 처(處)에 굴반(掘鎜)하기로 결정한 바 우(右)의 비용은 六白원을 요(要)할터인즉 차(此)를 충(充)하기 위하야 소인연예회를 개(開)하고 기(其) 수익으로 기부한 사(事)로 안무(安武)관리자 급(及) 의원 기타 유력자의 찬조를 득(得)하야 금회 인가를 득하야 래(來) 五월 二일부터 四일 ᄭᅡ 지 三일간 전주좌에셔 개최한다더라 [자료] 《동아일보》, 1928.11.12. 극장개관기념식 목포부 죽동(竹洞)에 잇는 목포극장은 목포의 유일한 오락기관으로 유관오(柳官五)씨가 경영하여 오는 바 지난 八일은 동관의 二주년 개관 기념일임으로 이를 축하하기 위하야 최저요금으로 명화를 영사하얏는데 입장자는 무려 六白명의 대성황을 정(呈)하얏스며 관람자에게 시상 추첨이 잇섯다는데 一등 一인에 금완권(金腕卷) 시계 一개, 二등 二인 은배(銀盃) 각 一개식, 三등 五인 수건 각 이타식(二打式) 주엇다더라. 【목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