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에 대하여
- 감독
- 최승일
- 제작년도
- 2003
- 출연
- 진선규, 박민정
제일극장은 1930년 종로 4가에 미나토좌(ミナト座)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어 1932년 제일극장으로 이름을 바꾼 후 해방 후까지 존속했던 영화관이다. 제일극장의 기원은 1922년 설립된 권상장 여흥장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인 미나토 키쿠치(港谷久吉)가 세운 권상장은 종로 4가 대로변 780평 부지에 서양식 2층 벽돌건물로 만들어 진 것으로 1층은 130여 개의 점포가 늘어서 있었고, 2층에는 전시장과 함께 무료여흥장이 있었다. 조선인 고객들을 더 많이 유치하기 위해 설치된 2층 무료 여흥장에서는 조선의 구극 및 중국연극 등이 공연되었다. [자료] 권상장 개관 광고(《동아일보》, 1922.06.09) 권상장으로 큰 성공을 거둔 미나토는 권상장이 들어선 일대를 경성의 유흥가로 만들기 위해 종로 권상장의 개축과 함께 권상장 뒤편에 부지 330평을 마련해 미나토좌라는 영화관을 신축했다. 미나토진지(賑地)라 불린 이 일대에는 영화관 이외에 57개의 점포를 가진 미나토데파트, 카페 아홉 곳이 늘어선 미나토미인가(美人街), 800여평 규모의 댄스홀인 미나토홀 그 외 놀이시설이 설비된 미나토유원지 등이 설치되었다. 미나토좌는 1930년 6월 9일 활동사진관 설립 허가를 맡은 후 공사비 약 1만5천원으로 권상장 뒤편에 건설되었다. 8월 24일 개장한 미나토좌의 개관 프로그램으로는 스즈란좌(スズラン座) 여배우들의 댄스, 나운규 일좌의 소극 <아버지>가 공연되었다. 미나토좌에서는 개관 직후 조선인관객들을 유치하기 위한 방편으로 서양영화를 상영하는 것 이외에 극장 내에 신극부를 두어 연극을 공연했다. 개관 초기 미나도좌 신극부는 조선에서 가장 인기 있는 나운규 일좌가 포진하고 있었다. 이 극단에서는 최승일과 이백수가 연출을 맡았고 나운규는 직접 무대에 나와 연기를 펼쳤다. 그 외 심영, 석금성, 김선영 등이 연기를 함께 했다. 대표적인 공연작품으로는 1930년 9월 초 상연된 오토 뮬러의 〈하차〉가 있다. 이 작품은 최승일 연출, 심영, 석금성, 나운규, 김순희, 이호영, 이명우, 임운학 등이 출연했다. 9일부터는 이백수 연출, 나운규, 석금성, 심영 주연으로 <산중의 일야>가 상연되었고 18일부터는 루 메루덴(Lu Märten) 작 〈탄광부〉(Bergarbeiter)를 각색한 최승일 연출의 〈산〉이 심영, 나운규, 석금성, 이영철, 박갑득, 김종하, 박종, 이호영 등의 출연으로 공연되었다. 9월 23일에는 가네코 요분(金子洋文)의 <언덕을 오르는 사람>이 엄시중, 심영, 나운규, 석금성, 김평숙, 김덕희 등의 출연으로 공연되었고 10월 1일에는 업튼 싱클레어(Upton Beall Sinclair) 원작의 <2층의 사나이>가 리백수 번역, 나운규, 심영, 석금성 출연으로 공연되었다. 이렇듯 프롤레타리아 연극을 공연하면서 미나토좌는 학생들과 노동자들 사이에 큰 인기를 끌었으며 영화보다는 연극 공연장으로 더 큰 사랑을 받았다. 미나토좌의 나운규 일좌 공연은 사상성을 이유로 막을 내리게 된다. 이후 침체했던 미나토좌는 강천희가 이끄는 중외영화사가 직영하며 중외극장이라는 단체의 좌익극을 표방한 공연을 하게 된다. 1931년 12월 18일부터 중외극장이 미나토좌에서 공연한 작품은 <선로공부의 죽음>, <사람 좋은 형리>, <사랑이 깊어 갈 때>와 같은 작품이었는데 김유영은 중외극장이 공연한 작품들에 대해 프로극단을 표방한 신파극단과 다름 아니라는 날선 비판을 했다. 강천희의 중외극장이 미나토좌에서 철수한 이후 미나토좌에는 토월회의 후신으로 새롭게 조직된 박승희의 태양극장이 공연을 펼쳤다. 1932년 2월 1차 공연에서는 <명나라 원나라> 등이 공연되었는데 과거 토월회 출신들로 나운규 일좌에서 활약하던 심영, 석금성, 김선영 등이 포진해 있었다. 1932년 4월 12일 미나도좌는 2층을 개축한 기념으로 이름을 제일극장으로 바꾸었다. 제일극장에서는 증축낙성을 기념하여 조선연극사의 신춘대공연이 펼쳐졌으며 이어 6월 말부터는 태양극장의 2차 공연으로 〈춘향전〉을 비롯해 <대도전>, <애사> 등이 상연되었다. 이중 <춘향전>은 1925년 토월회에서 상연하여 큰 인기를 얻은 작품이었다. 박승희의 태양극장이나 조선연극사와 같은 조선인 극단의 공연을 비롯해 다양한 무대극을 공연하면서 조선인 관객들의 큰 호응을 얻던 제일극장은 1935년 3월 23일 오후 7시 15분 시사용 영사실에서 발생한 영사기사 이홍우의 실화로 전소되었다. 이홍우는 전기 휴즈가 끊어져 잠시 암전 된 사이에 성냥불을 켰는데 불이 필름에 옮겨 붙어 삽시간에 극장 전체를 태워 버렸다. 극장주 미나토는 화재로 전소된 제일극장을 재건하기로 결정한다. 1935년 8월 23일 화재 발생 5개월 만에 제일극장의 공사를 마무리 짓고 낙성식을 거행했다. 흥행은 그 다음 날인 24일부터 재개했다. 화재 이후 제일극장은 영화상영에 주력했는데, 주로 상영된 지 오래된 필름들을 상영하는 등 영화관으로서는 2번관에 머물렀다. 1935년 동양극장이 들어서 연극 붐이 일기 시작하자 제일극장은 주로 연극 공연장으로 활용되었다. 특히 1939년 동양극장의 주인이 바뀌게 되면서 발생한 내분으로 지배인 최상덕을 비롯해 연출자 박진, 극작가 송영, 임선규, 장치가 원우전, 배우 황철, 서일성, 양백명, 문정복, 박영신, 차홍녀 등 단원들이 대거 탈퇴하여 극단 아랑을 조직하고 자신들의 근거지를 제일극장으로 삼으면서 서울 동쪽의 제일극장, 서쪽의 동양극장이 대표적인 연극 공연장으로 각축을 벌이게 된다. 아랑의 첫 공연은 1939년 10월 부민관에서 공연된 임선규 작 <청춘극장>이었다. 이 공연을 시작으로 아랑에서는 부민관과 제일극장을 자신들의 근거지로 삼았다. 1940년 1월의 첫 공연의 경우 부민관에서 임선규 작 <북두칠성>, <빈부>를 공연한 후 11일부터는 제일극장에서 본격적인 흥행을 시작했으며 지방 순회공연을 다녀온 뒤 4월 28일부터는 송영과 임선규가 함께 쓴 <김옥균>의 공연이 제일극장에서 시작되었다. [자료] 1930년대 후반 제일극장(山田勇雄, 『大京城寫眞帖』, 中央情報鮮溝支社, 1937) 제일극장은 아랑의 근거지였지만 다른 연극단체들에게도 문호가 개방되어 있었다. 대표적으로 1940년 2월 조선성악연구회에서는 <옥루몽>을 비롯한 창극을 공연했으며 같은 해 6월 최남주가 세운 조선영화사 계열의 조선무대가 조직되어 제일극장에서 공연을 펼쳤다. 조선무대에서는 1회작으로 송영 작 <방랑시인 김삿갓>을 안종화 연출로 공연했으며 2회작인 안종화 연출, 최독견 각색의 <춘향전> 역시 제일극장에서 공연되었다. 태평양전쟁 발발을 전후하여 제일극장은 연극전용관으로 바뀌어 저렴한 입장료로 많은 관객들을 동원했다. 1943년 당시 1급 영화관들이 80전 내외의 저렴한 가격을 형성하고 있었던 가운데, 제일극장은 입장료가 25전으로 가장 저렴했다. 일제 말기 제일극장은 주로 연극, 악극, 창극 등을 공연했는데 대표적인 공연들을 꼽으면 다음과 같다. 1945년 1월 평양대화숙 부설 청명극단에서 윤태순 작, 마완영 연출, 강호 장치의 <산울림>을, 라미라가극단은 1944년 10월 신추공연으로 이부풍 작, 김용환 곡의 <오동나무>를 공연했다. 특히 제일극장은 다른 극장들보다 창극단의 공연이 활발했는데 김연수, 오태석, 정남희 등으로 구성된 조선창극단은 1943년 11월 1일부터 박진 연출로 <장화홍련전>을 공연한바 있다. 조선창극단은 주로 이동연예단으로 활동했는데 공인극단으로 승격되자 이를 기념하여 1945년 5월 2일부터 <어촌애화>, <장화홍련전> 등을 제일극장에서 공연했다. 그 외에 창극단 화랑(1940.12)과 동일창극단(1945.4) 등도 제일극장에서 공연을 펼쳤다. 제일극장은 해방 후 영화업자 이창용이 적산관리인이 되어 운영하였다.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이창용이 일본으로 밀항하면서 주인이 없다가 전쟁 중 파괴된 광장시장 재건에 뛰어들면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이정재가 관리하던 것을 임화수가 인계받으며 이름을 평화극장으로 바꾸었다. 이어 임화수가 4월혁명 이후 체포되고 5.16 직후 사형 당하게 되자 이름을 한일극장으로 변경한 후 1977년까지 영업하다가 폐관되었다. 참고문헌 《경성일보》, 《동아일보》, 《매일신보》, 《조선신문》, 《조선중앙일보》 백두산, 「식민지 조선의 상업.오락 공간, 종로 권상장(勸商場) 연구」, 『한국극예술연구』 42호, 2013. 정병호·김보경,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3』, 도서출판 문, 2012.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사연구소 엮음, 『일본어 잡지로 본 조선영화(1~6)』, 한국영상자료원, 2010~2015. * [사진](상단) 미나토좌 외관 《조선신문》, 1930.8.23. [자료] 《 매일신보 》 , 1922.3.10. 도시의 미관 , 조선의 경성에 내선융화적의 공영과 호락기관 ( 互樂機關 ) 의 설비 , 장래 조선박람회에 최 ( 最 ) 히 적응 준비 , 조직적 백화상점 ( 百貨商店 ), 종로 권상장 매점신입 ( 賣店申込 ) ( 전략 ) 본관의 계상 ( 階上 ) 에ᄂᆞᆫ 내외의 미술품 병 ( 並 ) 상공업의 진로를 개척할 참고자료를 진열종람 ( 縱覽 ) 케 하며 우 ( 又 ) 무료여흥장 ( 無料餘興場 ) 을 설 ( 設 ) 하야 활동사진 기타의 오락기관을 사시 ( 四時 ) 일반에게 관람케 하ᄂᆞᆫ 등 원 ( 願 ) 히 경제적 오락적으로 조직ᄒᆞᆯ 뿐 아니라 특히 사회적으로 생활의 안전과 위안을 여 ( 與 ) 할 최진 ( 最珍 ) 최신의 차종 ( 此種 ) 의 상기관 ( 商機關 ) 은 아즉 일즉이 동양에서 기 ( 其 ) 유래를 견 ( 見 ) 치 못한 전대미문의 파천황의 사업이며 연 ( 然 ) 하고도 상 ( 常 ) 권상장의 위치는 문 듯 조선박람회에 적응키 위하야 각 방면에서 오락기관을 망라하야 잇는 조선유일 낙천지에 인접하는 즉 경성종로 사정목 조선인 상공업의 중추지에 실지하고 동대문시장과 상사 ( 相俟 ) 하야 은진 ( 殷賑 ) 을 극 ( 極 ) 하고 동아 ( 東亞 ) 의 일각에 신진의 대도시를 과 ( 誇 ) 할 조선수도에 일대미관을 정 ( 呈 ) 할 뿐 아니라 ( 후략 ) [자료] 《 매일신보 》 , 1930.6.12. 이현 ( 梨峴 ) 에 신설될 활동사진관 , 건축허가가 낫다 , 칠월말 개관 부내 종로 사정목 일번지 ( 鐘路四丁目一番地 ) 에 있는 권상장 주인 항구길 ( 勸商場 主人 港久吉 ) 씨는 전기 권상장의 단층 ( 單層 ) 일부를 헐고 부지 ( 敷地 ) 삼백오십평에 활동사진상설관 ( 活動寫眞常設館 ) 을 건축코자 소관 동대문서 ( 東大門署 ) 를 거처 경기도로 건축허가를 제출하였든 중 지난 구일부로 이의 허가가 나와 즉시 공사에 착수하게 되었다는바 이번 새로 건축될 활동사진 상설관은 공비 일만오천원으로 오백명 수용의 연와제 단층 ( 煉瓦製 單層 ) 으로서 늦어도 칠월 말경에는 개관하게 도리 터이라 하며 간간히 보는 바 권상장 이층에서 흥행되는 구극 ( 舊劇 ) 기타 중국연극 ( 中國演劇 ) 등도 새 극장에서 개연을 보게 되어 일반관객의 환영을 밧게 될 터이라 한다 . [자료] 《 동아일보 》 , 1935.3.24. 작석 ( 昨夕 ), 제일극장서 영사 중 돌연 발화 , 필름의 폭발로 내부가 전소 , 이백 관객은 전부 구출 , 시사실서 발화 휠림에 인화 폭발 이십삼일 오후 칠시 십분부터 종로사정목 일번지에 있는 제일극장에서 돌연 발화하야 삽시간에 전관 이층 건물이 거의 전소되고 이어서 그 부근 큰 상점에 연소될 염려가 있어 방금 현장은 큰 수라장을 이루엇고 소관 동대문경찰서는 물론이오 시내 각서는 경찰부의 총 지휘아래 각 소방서 총출동으로 대경계중이다 . 아직도 ( 오후 칠시 반 ) 맹렬한 불길에 쌓이어 화광 속에 들어있는 일대의 혼잡은 실로 형언할 수 없는 수라장이다 . 전차 자동차는 종로 3 정목 일대부터 동대문까지 완전히 차단되어 잇다 . 원인은 이날도 평시와 같이 오후 칠시부터 활동사진을 상영하여 이날 밤은 약 이백명의 관객이 모였는데 첫째 사진을 상영중에 시사실에서 발화하여 필름에 곧 불이 당기자마자 폭발되어 발화한 듯 하다하며 동 팔시에 진화되었는데 원인 손해를 알 수 없고 이백 관중은 전부 구출되었다 한다 . ( 이상 호외 ( 號外 ) 재록 ( 再錄 )) [자료] 《 동아일보 》 , 1935.8.25. 제일극장 재축 ( 再築 ) 금년 봄에 화재로 인하여 건축중이든 부내 종로 ( 鐘路 ) 5 정목 제일극장 ( 第一劇場 ) 은 그동안 개축중이든 바 최근에 준공이 되어 금 24 일에 개관식을 거행하고 일반 관람은 명 25 일부터 개관키로 되었다는데 관람료는 역시 10 전 균일의 대중경영으로 한다고 한다 .
제일극장은 1930년 종로 4가에 미나토좌(ミナト座)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어 1932년 제일극장으로 이름을 바꾼 후 해방 후까지 존속했던 영화관이다. 제일극장의 기원은 1922년 설립된 권상장 여흥장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인 미나토 키쿠치(港谷久吉)가 세운 권상장은 종로 4가 대로변 780평 부지에 서양식 2층 벽돌건물로 만들어 진 것으로 1층은 130여 개의 점포가 늘어서 있었고, 2층에는 전시장과 함께 무료여흥장이 있었다. 조선인 고객들을 더 많이 유치하기 위해 설치된 2층 무료 여흥장에서는 조선의 구극 및 중국연극 등이 공연되었다. [자료] 권상장 개관 광고(《동아일보》, 1922.06.09) 권상장으로 큰 성공을 거둔 미나토는 권상장이 들어선 일대를 경성의 유흥가로 만들기 위해 종로 권상장의 개축과 함께 권상장 뒤편에 부지 330평을 마련해 미나토좌라는 영화관을 신축했다. 미나토진지(賑地)라 불린 이 일대에는 영화관 이외에 57개의 점포를 가진 미나토데파트, 카페 아홉 곳이 늘어선 미나토미인가(美人街), 800여평 규모의 댄스홀인 미나토홀 그 외 놀이시설이 설비된 미나토유원지 등이 설치되었다. 미나토좌는 1930년 6월 9일 활동사진관 설립 허가를 맡은 후 공사비 약 1만5천원으로 권상장 뒤편에 건설되었다. 8월 24일 개장한 미나토좌의 개관 프로그램으로는 스즈란좌(スズラン座) 여배우들의 댄스, 나운규 일좌의 소극 <아버지>가 공연되었다. 미나토좌에서는 개관 직후 조선인관객들을 유치하기 위한 방편으로 서양영화를 상영하는 것 이외에 극장 내에 신극부를 두어 연극을 공연했다. 개관 초기 미나도좌 신극부는 조선에서 가장 인기 있는 나운규 일좌가 포진하고 있었다. 이 극단에서는 최승일과 이백수가 연출을 맡았고 나운규는 직접 무대에 나와 연기를 펼쳤다. 그 외 심영, 석금성, 김선영 등이 연기를 함께 했다. 대표적인 공연작품으로는 1930년 9월 초 상연된 오토 뮬러의 〈하차〉가 있다. 이 작품은 최승일 연출, 심영, 석금성, 나운규, 김순희, 이호영, 이명우, 임운학 등이 출연했다. 9일부터는 이백수 연출, 나운규, 석금성, 심영 주연으로 <산중의 일야>가 상연되었고 18일부터는 루 메루덴(Lu Märten) 작 〈탄광부〉(Bergarbeiter)를 각색한 최승일 연출의 〈산〉이 심영, 나운규, 석금성, 이영철, 박갑득, 김종하, 박종, 이호영 등의 출연으로 공연되었다. 9월 23일에는 가네코 요분(金子洋文)의 <언덕을 오르는 사람>이 엄시중, 심영, 나운규, 석금성, 김평숙, 김덕희 등의 출연으로 공연되었고 10월 1일에는 업튼 싱클레어(Upton Beall Sinclair) 원작의 <2층의 사나이>가 리백수 번역, 나운규, 심영, 석금성 출연으로 공연되었다. 이렇듯 프롤레타리아 연극을 공연하면서 미나토좌는 학생들과 노동자들 사이에 큰 인기를 끌었으며 영화보다는 연극 공연장으로 더 큰 사랑을 받았다. 미나토좌의 나운규 일좌 공연은 사상성을 이유로 막을 내리게 된다. 이후 침체했던 미나토좌는 강천희가 이끄는 중외영화사가 직영하며 중외극장이라는 단체의 좌익극을 표방한 공연을 하게 된다. 1931년 12월 18일부터 중외극장이 미나토좌에서 공연한 작품은 <선로공부의 죽음>, <사람 좋은 형리>, <사랑이 깊어 갈 때>와 같은 작품이었는데 김유영은 중외극장이 공연한 작품들에 대해 프로극단을 표방한 신파극단과 다름 아니라는 날선 비판을 했다. 강천희의 중외극장이 미나토좌에서 철수한 이후 미나토좌에는 토월회의 후신으로 새롭게 조직된 박승희의 태양극장이 공연을 펼쳤다. 1932년 2월 1차 공연에서는 <명나라 원나라> 등이 공연되었는데 과거 토월회 출신들로 나운규 일좌에서 활약하던 심영, 석금성, 김선영 등이 포진해 있었다. 1932년 4월 12일 미나도좌는 2층을 개축한 기념으로 이름을 제일극장으로 바꾸었다. 제일극장에서는 증축낙성을 기념하여 조선연극사의 신춘대공연이 펼쳐졌으며 이어 6월 말부터는 태양극장의 2차 공연으로 〈춘향전〉을 비롯해 <대도전>, <애사> 등이 상연되었다. 이중 <춘향전>은 1925년 토월회에서 상연하여 큰 인기를 얻은 작품이었다. 박승희의 태양극장이나 조선연극사와 같은 조선인 극단의 공연을 비롯해 다양한 무대극을 공연하면서 조선인 관객들의 큰 호응을 얻던 제일극장은 1935년 3월 23일 오후 7시 15분 시사용 영사실에서 발생한 영사기사 이홍우의 실화로 전소되었다. 이홍우는 전기 휴즈가 끊어져 잠시 암전 된 사이에 성냥불을 켰는데 불이 필름에 옮겨 붙어 삽시간에 극장 전체를 태워 버렸다. 극장주 미나토는 화재로 전소된 제일극장을 재건하기로 결정한다. 1935년 8월 23일 화재 발생 5개월 만에 제일극장의 공사를 마무리 짓고 낙성식을 거행했다. 흥행은 그 다음 날인 24일부터 재개했다. 화재 이후 제일극장은 영화상영에 주력했는데, 주로 상영된 지 오래된 필름들을 상영하는 등 영화관으로서는 2번관에 머물렀다. 1935년 동양극장이 들어서 연극 붐이 일기 시작하자 제일극장은 주로 연극 공연장으로 활용되었다. 특히 1939년 동양극장의 주인이 바뀌게 되면서 발생한 내분으로 지배인 최상덕을 비롯해 연출자 박진, 극작가 송영, 임선규, 장치가 원우전, 배우 황철, 서일성, 양백명, 문정복, 박영신, 차홍녀 등 단원들이 대거 탈퇴하여 극단 아랑을 조직하고 자신들의 근거지를 제일극장으로 삼으면서 서울 동쪽의 제일극장, 서쪽의 동양극장이 대표적인 연극 공연장으로 각축을 벌이게 된다. 아랑의 첫 공연은 1939년 10월 부민관에서 공연된 임선규 작 <청춘극장>이었다. 이 공연을 시작으로 아랑에서는 부민관과 제일극장을 자신들의 근거지로 삼았다. 1940년 1월의 첫 공연의 경우 부민관에서 임선규 작 <북두칠성>, <빈부>를 공연한 후 11일부터는 제일극장에서 본격적인 흥행을 시작했으며 지방 순회공연을 다녀온 뒤 4월 28일부터는 송영과 임선규가 함께 쓴 <김옥균>의 공연이 제일극장에서 시작되었다. [자료] 1930년대 후반 제일극장(山田勇雄, 『大京城寫眞帖』, 中央情報鮮溝支社, 1937) 제일극장은 아랑의 근거지였지만 다른 연극단체들에게도 문호가 개방되어 있었다. 대표적으로 1940년 2월 조선성악연구회에서는 <옥루몽>을 비롯한 창극을 공연했으며 같은 해 6월 최남주가 세운 조선영화사 계열의 조선무대가 조직되어 제일극장에서 공연을 펼쳤다. 조선무대에서는 1회작으로 송영 작 <방랑시인 김삿갓>을 안종화 연출로 공연했으며 2회작인 안종화 연출, 최독견 각색의 <춘향전> 역시 제일극장에서 공연되었다. 태평양전쟁 발발을 전후하여 제일극장은 연극전용관으로 바뀌어 저렴한 입장료로 많은 관객들을 동원했다. 1943년 당시 1급 영화관들이 80전 내외의 저렴한 가격을 형성하고 있었던 가운데, 제일극장은 입장료가 25전으로 가장 저렴했다. 일제 말기 제일극장은 주로 연극, 악극, 창극 등을 공연했는데 대표적인 공연들을 꼽으면 다음과 같다. 1945년 1월 평양대화숙 부설 청명극단에서 윤태순 작, 마완영 연출, 강호 장치의 <산울림>을, 라미라가극단은 1944년 10월 신추공연으로 이부풍 작, 김용환 곡의 <오동나무>를 공연했다. 특히 제일극장은 다른 극장들보다 창극단의 공연이 활발했는데 김연수, 오태석, 정남희 등으로 구성된 조선창극단은 1943년 11월 1일부터 박진 연출로 <장화홍련전>을 공연한바 있다. 조선창극단은 주로 이동연예단으로 활동했는데 공인극단으로 승격되자 이를 기념하여 1945년 5월 2일부터 <어촌애화>, <장화홍련전> 등을 제일극장에서 공연했다. 그 외에 창극단 화랑(1940.12)과 동일창극단(1945.4) 등도 제일극장에서 공연을 펼쳤다. 제일극장은 해방 후 영화업자 이창용이 적산관리인이 되어 운영하였다.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이창용이 일본으로 밀항하면서 주인이 없다가 전쟁 중 파괴된 광장시장 재건에 뛰어들면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이정재가 관리하던 것을 임화수가 인계받으며 이름을 평화극장으로 바꾸었다. 이어 임화수가 4월혁명 이후 체포되고 5.16 직후 사형 당하게 되자 이름을 한일극장으로 변경한 후 1977년까지 영업하다가 폐관되었다. 참고문헌 《경성일보》, 《동아일보》, 《매일신보》, 《조선신문》, 《조선중앙일보》 백두산, 「식민지 조선의 상업.오락 공간, 종로 권상장(勸商場) 연구」, 『한국극예술연구』 42호, 2013. 정병호·김보경,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3』, 도서출판 문, 2012.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사연구소 엮음, 『일본어 잡지로 본 조선영화(1~6)』, 한국영상자료원, 2010~2015. * [사진](상단) 미나토좌 외관 《조선신문》, 1930.8.23. [자료] 《 매일신보 》 , 1922.3.10. 도시의 미관 , 조선의 경성에 내선융화적의 공영과 호락기관 ( 互樂機關 ) 의 설비 , 장래 조선박람회에 최 ( 最 ) 히 적응 준비 , 조직적 백화상점 ( 百貨商店 ), 종로 권상장 매점신입 ( 賣店申込 ) ( 전략 ) 본관의 계상 ( 階上 ) 에ᄂᆞᆫ 내외의 미술품 병 ( 並 ) 상공업의 진로를 개척할 참고자료를 진열종람 ( 縱覽 ) 케 하며 우 ( 又 ) 무료여흥장 ( 無料餘興場 ) 을 설 ( 設 ) 하야 활동사진 기타의 오락기관을 사시 ( 四時 ) 일반에게 관람케 하ᄂᆞᆫ 등 원 ( 願 ) 히 경제적 오락적으로 조직ᄒᆞᆯ 뿐 아니라 특히 사회적으로 생활의 안전과 위안을 여 ( 與 ) 할 최진 ( 最珍 ) 최신의 차종 ( 此種 ) 의 상기관 ( 商機關 ) 은 아즉 일즉이 동양에서 기 ( 其 ) 유래를 견 ( 見 ) 치 못한 전대미문의 파천황의 사업이며 연 ( 然 ) 하고도 상 ( 常 ) 권상장의 위치는 문 듯 조선박람회에 적응키 위하야 각 방면에서 오락기관을 망라하야 잇는 조선유일 낙천지에 인접하는 즉 경성종로 사정목 조선인 상공업의 중추지에 실지하고 동대문시장과 상사 ( 相俟 ) 하야 은진 ( 殷賑 ) 을 극 ( 極 ) 하고 동아 ( 東亞 ) 의 일각에 신진의 대도시를 과 ( 誇 ) 할 조선수도에 일대미관을 정 ( 呈 ) 할 뿐 아니라 ( 후략 ) [자료] 《 매일신보 》 , 1930.6.12. 이현 ( 梨峴 ) 에 신설될 활동사진관 , 건축허가가 낫다 , 칠월말 개관 부내 종로 사정목 일번지 ( 鐘路四丁目一番地 ) 에 있는 권상장 주인 항구길 ( 勸商場 主人 港久吉 ) 씨는 전기 권상장의 단층 ( 單層 ) 일부를 헐고 부지 ( 敷地 ) 삼백오십평에 활동사진상설관 ( 活動寫眞常設館 ) 을 건축코자 소관 동대문서 ( 東大門署 ) 를 거처 경기도로 건축허가를 제출하였든 중 지난 구일부로 이의 허가가 나와 즉시 공사에 착수하게 되었다는바 이번 새로 건축될 활동사진 상설관은 공비 일만오천원으로 오백명 수용의 연와제 단층 ( 煉瓦製 單層 ) 으로서 늦어도 칠월 말경에는 개관하게 도리 터이라 하며 간간히 보는 바 권상장 이층에서 흥행되는 구극 ( 舊劇 ) 기타 중국연극 ( 中國演劇 ) 등도 새 극장에서 개연을 보게 되어 일반관객의 환영을 밧게 될 터이라 한다 . [자료] 《 동아일보 》 , 1935.3.24. 작석 ( 昨夕 ), 제일극장서 영사 중 돌연 발화 , 필름의 폭발로 내부가 전소 , 이백 관객은 전부 구출 , 시사실서 발화 휠림에 인화 폭발 이십삼일 오후 칠시 십분부터 종로사정목 일번지에 있는 제일극장에서 돌연 발화하야 삽시간에 전관 이층 건물이 거의 전소되고 이어서 그 부근 큰 상점에 연소될 염려가 있어 방금 현장은 큰 수라장을 이루엇고 소관 동대문경찰서는 물론이오 시내 각서는 경찰부의 총 지휘아래 각 소방서 총출동으로 대경계중이다 . 아직도 ( 오후 칠시 반 ) 맹렬한 불길에 쌓이어 화광 속에 들어있는 일대의 혼잡은 실로 형언할 수 없는 수라장이다 . 전차 자동차는 종로 3 정목 일대부터 동대문까지 완전히 차단되어 잇다 . 원인은 이날도 평시와 같이 오후 칠시부터 활동사진을 상영하여 이날 밤은 약 이백명의 관객이 모였는데 첫째 사진을 상영중에 시사실에서 발화하여 필름에 곧 불이 당기자마자 폭발되어 발화한 듯 하다하며 동 팔시에 진화되었는데 원인 손해를 알 수 없고 이백 관중은 전부 구출되었다 한다 . ( 이상 호외 ( 號外 ) 재록 ( 再錄 )) [자료] 《 동아일보 》 , 1935.8.25. 제일극장 재축 ( 再築 ) 금년 봄에 화재로 인하여 건축중이든 부내 종로 ( 鐘路 ) 5 정목 제일극장 ( 第一劇場 ) 은 그동안 개축중이든 바 최근에 준공이 되어 금 24 일에 개관식을 거행하고 일반 관람은 명 25 일부터 개관키로 되었다는데 관람료는 역시 10 전 균일의 대중경영으로 한다고 한다 .
정기적으로 필름을 교환하며 영화를 주요 프로그램으로 상영하는 영화상설관이 서울에 등장한 것은 경성고등연예관이 개관한 1910년이다. 초기 상설관은 대부분 황금정과 남대문통을 잇는 소위 ‘진고개’의 일본인 상권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남산골 딸깍발이’가 아니면 출입을 꺼릴 정도로 비가 오면 유난히 흙이 질었다는 진고개는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서울에서 가장 화려한 거리가 되었다. 미쓰이(三井) 상점, 히라다(平田) 상점, 미쓰코시(三越) 오복점 등 후에 백화점이 되는 진고개의 대형 잡화상점들은 양복, 포목, 과자, 기계류 등 없는 것 없이 다 갖춘 듯 했다. 흔히 남촌이라고 불렸던 이 거리는 서울에 사는 일본인들뿐 아니라 조선인들의 소비 욕망도 강하게 자극했다. 그래서 진고개에서 “입을 벌리고 정신 다 빠져서 헤엄치듯 걸어가는 조선부인들”은 “여기 물건만 몇 가지 사준다면 몇 번이든지 개가해 갈 것”이라고 빈정거림을 샀다. “일본말이 서투르니 물어보기도 힘들고 공연히 코 밑에 가져다 향내만 맡느라고 쭝긋쭝긋” 1 하는 양복 입은 조선신사가 우스워지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종로로 대변되는 북촌 일대는 남촌에 비해 상대적으로 황량하고 어둠침침해 보였다. 그러나 진고개에서 호기롭게 가게에 들어가 물건을 살 배짱이 없는 조선인들에게는 종로가 실질적인 유흥 공간이었다. 1916년부터 해마다 4월부터 10월까지 종로에서는 전등불이 켜지는 밤이 되면 시끌벅적한 야시(夜市)가 열렸다. 대략 오후 7시부터 12시 사이에 열리는 야시는 ‘싸구려, 싸구려’라고 외치는 소리와 ‘세계에서 가장 좋은 물건’이라는 소리가 한데 뒤엉켜 소란스러웠다. 상인들은 무조건 ‘만병통치약’이라고 외쳐대거나 물건들을 흔들어대면서 손님을 끌었다. 사주쟁이, 관상가, 작명가도 모여들고, 약장수와 장기꾼도 모여들었다. 고무신, 머릿기름, 참빗부터 지팡이나 구두, 만화경, 석유램프나 호롱 등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를 아우르는 다양한 상품이 길거리 좌판 위나 천막 아래 전시되었다. 시끌벅적하고 요란한 종로 야시에 구경 오는 사람들은 “살 것이 있거나 없거나 밤이면 이 거리를 한 번 거닐기 때문에 사람의 물결을 이루어 서로 헤치고” 다녔다. 2 남촌이든 북촌이든 서울의 극장은 도시의 여가와 유흥, 소비의 경험을 구성하는 핵심이었다. 그러나 남촌이 일본인 거리, 북촌이 조선인 거리로 이원화되어 있던 만큼 극장 공간의 경험은 식민지의 경험과 중첩될 수밖에 없었다. 초기 상설관에서는 일본인 변사와 조선인 변사가 번갈아가며 함께 해설하기도 했지만, 우미관, 단성사, 조선극장 등 조선인을 상대로 한 상설관들이 생겨나면서는 변사의 해설 언어와 관객의 종족적 구성, 그리고 흥행 프로그램이 긴밀하게 연관되었다. 영화상설관 시대에 ‘활동사진 구경 가기’는 문화의 경험인 동시에 ‘종족성(ethnicity)’의 경험이라 할 수 있었다. 먼지 많고 시끄러운 종로 야시의 구경꾼들이 조선인 변사의 해설로 영화를 관람하며 도시의 피로를 위무 받는 북촌 상설관의 관객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극장은 “중산계급의 사람들이 시달린 머리를 쉬이며 삶의 위안을 받는” 오락장이다. 1925년 여름, 서울의 밤거리에 나선 어느 기자는 종로 야시를 지나 “환희의 웃음과 갈채의 박수”가 문틈 사이로 새어나오는 극장을 취재하는데, 그곳에서 목격한 학생과 신사, 기생 등 각계각층의 관객들이 “하룻밤 놀이터”를 향락하는 “여유 있는 사람들”임을 잊지 않고 적어두었다. 3 그런 극장이 소위 ‘일반 민중’에게 완전히 문턱을 낮춘 것은 1926년에 관람료를 ‘최하 10전’까지 인하하면서이다. 그해 여름 극장가는 불경기에 시달린 끝에 파격적인 관람료 인하를 감행했다. 신문에는 관람료가 대인(大人) 30전, 소인(小人) 20전이라고 광고하면서도, 실제로는 극장 앞 호객이나 가두선전으로 ‘10전 관객 몰이’를 하는 식이었다. 극장들은 관람료 인하뿐 아니라 일주일에 한두 번씩 프로그램을 교체하면서 주말과 휴일에는 상영 횟수를 늘리는 전략으로 관객을 더 확보하려 애썼다. 상설관끼리 제 살을 깎아먹는 무모한 경쟁이라는 우려도 많았지만, 결과적으로 이 일시적인 이벤트가 ‘10전 관객’을 상설관의 새로운 관객층으로 흡수하면서 관객의 폭을 넓혔다. 조선총독부 경무국 도서과가 조사한 1926년 한 해 동안 경기도 영화상설관의 관객 수 통계를 살펴보면, 관람료가 인하되었던 8월부터 10월 사이에 관객이 몰리면서 상반기에 비해 관객이 급증한 것을 알 수 있다. 한참 적에는 그나마 상설관 서너 개가 문이 닫을 지경이라, 하는 수 없이 일금 10전 하니까 전에 못 보던 팬들이 우아~하고 몰려든다. 내가 어렸을 적에 돈 10전을 내고 구경해본 적이 있지만, 요즈막 와서 상설관에서 10전 받는다는 것은 아마도 이 지구 위에 조선밖에는 없으리라. 그러나 어쨌든 잘한 일이다. 다른 것, 모든 예술보다도 가장 민중과 가까운 의미를 가진 영화조차 일반 민중에게서 자꾸 멀어간다는 것이 좀 섭섭한 일이니까, 10전 받을 때 몰려들어온 새로운 팬! 그들이 정말, 영화의 팬인 것을 짐작해야만 될 것이다. 4 위의 글에서 최승일은 “다른 것, 모든 예술보다도 가장 민중과 가까운 의미를 가진” 영화가 ‘10전 관객’을 얻은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영화 제작비를 생각하면 10전이라는 관람료는 터무니없이 저렴하지만, 도시의 하층계급 노동자도 영화를 볼 수 있는 시대로 진입하는 것이야말로 조선에서 영화가 ‘대중오락의 패왕’이 되는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1926년 가을, 단성사에서 개봉된 나운규의 <아리랑>이 경이적인 흥행을 기록하며 ‘한 개의 획시대적 산물’로서 조선영화의 아이콘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영화 자체의 예술적 성취 때문만이 아니다. 6.10 만세 등 민족적 감정이 분기했던 당시의 사회 분위기, 그리고 ‘10전 관객’의 흡수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하다. <아리랑>은 이 ‘10전 관객’을 민족 혹은 ‘조선사람’이라는 이름으로 포괄함으로써 조선영화의 영역을 확고히 하는 계기를 마련했다고도 할 수 있다. ‘10전 관객 몰이’는 일시적이었을지라도, <아리랑>이 거둔 성공과 그에 대한 입소문은 수년간 <아리랑>이 조선 전역을 순회하며 관객을 끌게 했다. “일반 대중은 <아리랑>으로 하여 활동사진이란 것이 어떠한 것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5 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던 것이다. 1) 双S生, 「대경성광무곡」 『별건곤』 1929년 1월호, 82~3쪽. 2) 유광열, 「종로 네거리」 『별건곤』 1929년 10월호, 68쪽. 3) 「번화한 웃음소리에 박수성 높은 연극장」 《조선일보》 1925년 8월 27일자, 조간 2면. 4) 승일, 「라듸오·스폿트·키네마」 『별건곤』 1926년 12월호, 108쪽. 5) 안동수, 「영화수감(映畫隨感)」 『영화연극』 1939년 11월호, 45쪽. 상단 그림. 조선일보 기자의 서울의 밤 순례기 (사진은 극장의 관람석) 출처: 《조선일보》 1925년 8월 27일자, 조간 2면. <자료> ※ 이하 자료는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현대어 표기에 맞게 다시 썼다. 일부 표현은 문맥에 맞게 다듬었다. 1. 「번화한 웃음소리에 박수성 높은 연극장」, 《조선일보》, 1925년 8월 27일자 조간 2면. 서울의 밤은 오다. 때는 일곱 시 반! 종로 큰 거리에 군데군데 벌려 있는 각 극장, 활동사진관 등의 손[客] 끄는 유창한 주악(奏樂) 중에 서울의 밤은 어두워간다. 피리, 나팔, 북, 장구 등의 소리와 북악, 인왕의 산등성이를 넘어오는 서늘한 바람이 온종일 뜨거운 햇살에 시들고 시든 억만 장안 사람을 다시 삶의 무대로 불러들여 온갖 연극을 짓게 한다. 돈 있는 탕자는 기생을 다려 홍등녹주(紅燈綠酒)에 무르녹고 돈 없는 건달은 막걸리 한잔에 거리를 헤매며 야시(夜市)의 복판 공원의 벤치에도 사람의 물결이 이루기 비롯한다. 그리고 들려오는 흥겨운 주악을 따라 쏘는 듯한 등불 빛을 몸에 실으며 이곳저곳의 극장 문 앞으로 모여드는 사람들도 역시 수백수천을 이루어 그들의 자취가 끊일 여덟 시경부터는 문 닫힌 극장 안에서 오직 환희의 웃음과 갈채의 박수가 때때로 문틈을 새어 길거리로 흘러나올 뿐이다. 이것이 오직 서울 중산계급의 사람들이 시달린 머리를 쉬이며 삶의 위안을 받는 유일의 향락장이다. 아래위층 객석에는 수백수천의 각 계급 각 방면의 젊은 남녀가 희미한 전등 빛에 싸여 죽은 듯 고요히 앉아 있으나 그들의 날카로운 눈은 어둠에서 활약을 하고 까닭 없는 머리는 고요한 속에 음분(淫奔)을 짓는다. 무대와 스크린을 바라보고 좋아하고 웃는 학생이 있으면, 부인석의 아양피는 기생들을 건너다보고 어리석은 기쁨을 짓는 점잖다는 신사도 있다. 이리 하는 동안에 시간은 자꾸 간다. 아홉 시, 열 시! 지루한 중에 십분 휴식이 돌아온다. 기생 건너다보는 신사들은 일분일초라도 휴식을 더 늘이려 한다. 그러나 힘없는 어린이, 학생들은 휴식을 오히려 지루하다 소리친다. 이리하여 극장의 밤이 깊어가고 서울의 밤이 깊어간다. 최후의 일각. 닫혔던 극장 문이 후다닥 열리면서 봇물이 터지듯 사람의 물결이 밀려나온다. 그들의 머리에는 주마등 같이 지금 본 양극(洋劇)이 번듯번듯 거린다. 철없는 아이는 흉내를 내며 시시덕거리고 뜻깊은 젊은이는 머리를 기울여 묵상에 잠기면 탕자와 춘녀는 손에 손을 쥐어 “하상견지만야(何相見之晩耶)” [필자 주: “어찌 서로 만나기가 늦었던고.”, <운영전>의 한 구절] 를 부른다. 이리하여 여유있는 사람들 하룻밤 놀이터의 문이 닫힌다 2. 승일, 「라듸오·스폿트·키네마」 『별건곤』 1926년 12월호, 104~9쪽. (부분 발췌) -키네마- 사실상 영화는 소설을 정복했다. 왜 그런고 하니 그것은 대체상으로 소설은 지식적, 사색적이고, 영화는 시선 그것만으로도 능히 머리로 생각하는 사색 이상의 작용의 능력을 가진 까닭이다. 또한 경제상으로도 하룻밤에 3, 40전만 내던지면 몇 개의 소설–연출–직접 사건의 움직임을 보는 까닭이며, 또한 소위 바쁜 이 세상에서 짧은 시간을 가지고서 사건의 전적(全的) 동작을 볼 수가 있는 것이었다. 조선에서 우리의 힘으로(돈은 말고) 되는 영화가 있어온 지 햇수로는 삼 년도 못 되는데 벌써 기십종(幾十種)은 넘었으리라. 스튜디오도 없이 만들어내는 영화가 벌써 10개를 넘은 지 오래다. 날 흐린 날은 박지도 못하고 하늘만 쳐다보고 있다가, 해나 번쩍 나면 5전짜리 레프가 번쩍거린다. 5전짜리 레프가 사람의 몸뚱어리에 가로 벗기일 때 “자- 훌륭한 예술이오”, “박읍시다” 하는 소리가 산모퉁이 집 속, 길가에서 일어난다. 이리하여 돈 천 원이나 잡아먹은 조선의 영화가 단성사, 조선극장에서 봉절(封切)이 된다. 사람은 물밀듯이 들어온다. 그리하여 연극이 없는 불쌍한 이 우리 사회에서, 누구나 연극을 구경하는 셈으로 몰려들어 고개를 치켜들고 앉아 있다. 백의(白衣)가 영화면(映畵面)에서 펄펄 날린다. 이 얼마나, 가슴이 저리고도 회포 깊은 정경이냐? 민틋한, 아주 기운을 잃은 듯한 산모퉁이가 나오면서 여기저기, 어린 솔이 자라나는 것이 보인다. 그러나 한심한 일이다. 우리는 그 배경 속에서 무엇을 보았느냐? 2, 3의 고대 소설을 각색해낸 것 외에는 <장한몽>, <농중조>를 봤을 따름이었다. 그나마 감독이라는 이가 옷 한 벌을 못 얻어 입어 여름옷을 가을철에 입고 있으면서, 배우들은 점심 한 끼 똑똑히 못 얻어먹어서 눈이 퀑 들어가는 것을 당하면서 박아낸 것이다. 참으로 생각하면 필름에서 주림에 울던–피–눈물–탄식이 줄줄 흐른다. 그러나 그나마 자기들의 마음대로 똑똑한 것 하나 박아보지 못하고, 그 알뜰한 돈 천 원이나 내놓는 대자본가의 비위를 맞추느라고, 남이 다 구워먹고 남은 찌꺼기를 건져다가 또다시 구워내어, <장한몽>, <농중조>나 얻어 보는 꼴이라니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다. 또 보는 이들의 형편은 어떻고? 조선의 팬들의 주머니가 넉넉하기는 꿈에도 없을 일이다. 한참 적에는 그나마 상설관 서너 개가 문이 닫을 지경이라, 하는 수 없이 일금 10전 하니까 전에 못 보던 팬들이 우아~하고 몰려든다. 내가 어렸을 적에 돈 10전을 내고 구경해본 적이 있지만, 요즈막 와서 상설관에서 10전 받는다는 것은 아마도 이 지구 위에 조선밖에는 없으리라. 그러나 어쨌든 잘한 일이다. 다른 것, 모든 예술보다도 가장 민중과 가까운 의미를 가진 영화조차 일반 민중에게서 자꾸 멀어간다는 것이 좀 섭섭한 일이니까, 10전 받을 때 몰려들어온 새로운 팬! 그들이 정말, 영화의 팬인 것을 짐작해야만 될 것이다. 론 채니 [필자 주: Lon Chaney. <노틀담의 꼽추(The Hunchback of Notre Dame, 1923)>, <오페라의 유령(The Phantom of the Opera, 1925)> 등에 출연한 미국의 영화배우] 씨의 일주일 봉급만(1만5천원) 가지면, 적어도 우리 땅에서 그것 가지고 영화 다섯은 만들 만한, 이런 하늘과 땅의 차이, 어찌하여 요 모양일까? 그러나 여기에 한 개의 획시대적 산물이 있으니, 그것은 <아리랑>, <아리랑>이 그것이다. 공연히 학교에 다니다가 미쳤다는 주인공은 지금의 현실 속에 부대끼는 우리는 그가 왜 미쳤는가를 다시금 중언부설(重言復說)도 하기 싫다. 다 찌그러져 가는 초가집과 가판 장인 듯한 바깥 기둥에는 ‘청년회’라는 간판이 붙어 있다. 긴 두루마기 자락을, 써늘한 바람에 나부끼면서 일하려 다니는 농촌의 인텔리겐치아인 박선생. 서울 가서 공부하다가 귀향한 대학생이 양복에다 고깔을 쓰고 농민들과 같이 “풍년이 왔다네. 풍년이 왔다네~”를 부르고 춤추는 씬. 이것이 조선에서 조선의 모든 것을 배경으로 하고 우러난 영화다. 청년회의 깃발이 날리면서 회원들의 행렬이 보인다. 얼마나 그리운 이 장면이냐? 화려하고 정묘한 장면이 없는 대신에, 침울하고 비통한 오뇌(懊惱)의 못 견딤이 이 장면에 나타난다. 기교로 말해도 영화의 역사를 수십 년이나 가진 일본 영화의 그것보다 못지않다. 나는 일본의 소위 신(新)영화라는 것을 남 못지않게 보았지만, 이른바 일본이면 일본의 참된 냄새나는 영화를 일찍이 본 적이 없다. 다만 광선이 없고 세트가 없기 때문에 거기에는 우리가 양보할 수밖에 없다. 나는 단 2년 동안의 조선의 영화계에서 이런 수확이 있는 것을 못내 기뻐한다. 여하간 이 <아리랑>이란 영화는 과거의 조선의 영화를 모조리 불살라버리고, 돈 없고는 살 수 없고 한숨 많은 이 땅 위에서 슬피 대공(大空)을 울려그 무엇을 광호(狂呼)하는 한 개의 거상(巨像)이다. 어쨌든 더욱 조선에서 모든 것을 빨리 실어다가 우리들에게 보여줄 것은 다만 영화밖에는 없다. 오전짜리 레프야? 길이 활동하기를 바란다. 조선의 문화도 차차 영화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너 나 할 것 없이 영화, 영화 한다. 한 개다, 한 개. <아리랑> 한 개다. 또 이후에는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려느냐, 조선의 영화계여? 현대의 문명은 아무리 해도 라디오·스포츠·키네마이다. 언제나 이들의 문명(文明)도 우리와 거리가 가까워지려는고?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