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문사육방
- 감독
- 최우형
- 제작년도
- 1983
- 출연
- 유홍의, 국정숙, 강국강, 김수천, 후조성, 소기린, 진염충, 이진영, 김호철, 진류, 이경우, 김O일, 량상운, 최성규, 권세현, 이기ㅇ, 김학성, 박성식, 조문학, 김일중, 하인석, 오주계, 현길수, 김유행, 등초우
짝퉁 이소룡의 역사에서 가장 현기증 나는 대목은, 그들의 다채로운 영어이름이다. 이소룡의 ‘Bruce Lee’ 라는 원래 이름에서 ‘L’을 돌림자 삼아 이렇게나 많은 변형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놀랄 수밖에 없다. 나훈아 로부터 너훈아, 나운하, 나운아, 나윤아, 노훈아가 파생된 것처럼 말이다. 지난 회 < 일소일권 >으로 소개한 거룡은 ‘Bruce Lei’이고, 또 다른 짝퉁 이소룡 배우들인 하종도 는 ‘Bruce Lai’, 유가영은 ‘Bruce Lau’, 장정의는 ‘Bruce Lea’, 우양은 ‘Bruce Ly’, 그리고 이번에 소개할 여소룡 은 이러한 부동산 ‘알박기’ 경쟁에 뒤늦게 뛰어든 관계로 ‘Bruce Le’라는 어딘가 이름을 짓다 만 것 같은 소심한 이름을 썼다. 물론 유가영은 이후 자신의 독자적인 활동으로 더 유명해졌고, 거룡 의 경우 ‘Dragon Lee’라는 보다 멋진 이름을 함께 사용했다. 이미 포화상태인 ‘Lee’를 리모델링하느니 굳이 ‘Bruce’라는 단어를 고집할 필요가 없다는, 대한남아의 기개를 보여준 신선한 발상의 전환이었다. 물론 그들은 패티김 과 패튀김이 함께 활동했던 것처럼, 이소룡이 죽기 이전부터 짝퉁으로 활동했다. 여소룡 은 수많은 짝퉁들 중 가장 진짜와 닮았던 배우다. 쌍꺼풀이 없어서 클로즈업을 하면 곤란하지만, 멀리서 보면 전혀 분간하지 힘들 정도로 체격이나 움직임이 오리지널 이소룡과 판박이다. 쉽게 말해 ‘얼굴만 가리면’ 이소룡이다. 그런데 여소룡은 한국인이 아니다. 대만 출신으로 홍콩에서 활동하던 중, 역시 홍콩으로 건너가 쇼브라더스에서 활약했던 수많은 한국 액션배우들 중 하나인 남석훈 의 눈에 띄어 한국에서도 활동하게 된 것. 이수현 주연 ‘아시아 슈퍼히어로’ 영화 <중국초인>(1975) 등에 출연했던 그는 이소룡의 < 당산대형 >(1971)의 흥행에 힘입어 나열, 진혜민 등과 함께 그 아류작인 <당산제자>(1976)에 출연했고 이후 <용문비지>(1976), <충렬정무문>(1977), < 벽력용권 >(1978) 등 주로 강홍 감독의 영화에서 짝퉁 이소룡으로 활동했다. 바로 여기서 남석훈을 만나게 됐다. 한편 <황금첩혈>(1979) 등을 연출하는 등 나중에는 감독으로도 활동했다. 화천공사가 거룡을 발굴했다면, 여소룡 은 남아진흥공사에서 만든 남석훈 의 < 속 정무문 >(1977), 태창흥업에서 만든 최우형 의 < 십자수권 >(1978) 등에 출연했다. 역시 홍콩 액션배우 진성이 함께 출연한 <속 정무문>은 단성사에서 개봉해 6만 관객을 동원했으니 제법 성공을 거둔 셈이다(영상도서관 멀티미디어석에서 VOD로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요즘 식으로 말하면, 미국 메이저리그에 진입하지 못한 마이너리거가 한국 프로야구팀에서 와서 활동하는 경우랄까. 지금껏 한국 액션배우들이 홍콩으로 ‘수출’되기만 한 것으로 알지만, 그런 반대의 역사도 있었던 것이다. <십자수권>은 최우형 감독의 데뷔작으로 홍콩, 대만 등지로도 수출되어 <사망마탑>(死亡魔塔)이라는 제목으로 개봉했다. 그는 나름 ‘정통’ 무술영화를 만들려고 했던 감독으로 < 사형사제 >(1982), < 여걸 청나비 >(1983) 등을 만들었으며 < 기문사육방 >(1983)의 경우 유일하게 영상도서관 멀티미디어석에서 VOD로 관람 가능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쉰 살이 되기 전에 세상을 떴다. < 십자수권 >에서 여소룡 은 독립운동을 하다 죽은 한국인의 아들로 나온다. 그리고 돈에 팔려간 누이동생을 찾아 군벌들이 일본과 내통하여 혼란스러운 중국 땅에 나타나, 부패 군벌이 주관하는 무술대회에 출전한다. 한국식 ‘만주 웨스턴’ 장르에 < 용쟁호투 >(1973)와 < 사망유희 >(1978)가 적당히 뒤섞인 이 이야기에서 여소룡을 두고 이소룡과 가장 닮았다고 말하는 건, 바로 노란색 트레이닝복 ‘간지’가 그와 무척 흡사했기 때문이다. < 일소일권 >의 거룡의 노란색 트레이닝복, 혹은 역시 거룡이 출연했던 <쾌권괴초>(1979)에서 장일도가 입었던 노란색 트레이닝복이 지나치게 굵은 옆줄로 인해 동일시를 방해했다면, 여소룡은 정말 비슷하다. 하지만 같은 의상이라도 홍콩의 도심이 아닌 한국의 용인 민속촌을 배경으로 삼았기에, <속 정무문>에서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자와 눈 내리는 민속촌을 거닐며 담소를 나누는 모습은 다소 어안이 벙벙하다. 그나마 <십자수권>은 <사망유희>의 마지막 액션신이 펼쳐지던 5층 구조를 그대로 모방했기에 나름 실감나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런데 오리지널보다 더 강한 볼거리를 액션을 선보여야 한다는 강박 때문인지, 한 층에서 만난 정체불명의 고수는 수십 마리의 뱀을 내던지며 그 뱀으로 목을 조르며 싸우는 기괴한 장면을 연출하기도 한다. 액션 연출이 뛰어나건 어쨌건 간에 어쩔 수 없는 B급의 향기랄까. 그럼에도 다른 짝퉁 이소룡 영화들과 차별점을 갖는 부분이라면, 역시 ‘흑형’과의 대결이다. 사실 이소룡이 < 용쟁호투 >에서 실제 가라데 고수이자 배우인 짐 켈리, < 사망유희 >에서 카림 압둘 자바 등 흑형들과 싸우는 장면은 꽤 중요한 이미지다. < 십자수권 >에서 다채로운 권법을 사용하고 화려한 돌려차기를 구사하는 흑형과의 대결은 꽤 볼만하다. 가령 <쾌권괴초> 등에 등장했던 흑인 배우는 단지 구색 맞추기였을 뿐, 너무나 어이없는 무술 동작으로 실망만 안겨준 것에 비하면 상당한 퀄리티다. 이렇듯 왠지 서오릉으로 추정되는 장소에서 노란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중국인 여소룡 과 머리에 두건을 두른 흑형이 쿵푸 대결을 벌이는 기묘한 풍경에 괜히 숙연해진다. 오른쪽 칼을 든 사람이 양사 더 숙연해지는 이유는 당당한 체구의 배우 양사 때문이다. < 용쟁호투 >(1973)에서 이소룡과 대결을 펼쳤던 그는 < 십자수권 >에서는 여소룡 과 싸웠고, <쾌권괴초>에서는 장일도와 싸웠다. 급기야 < 용재강호 >(1986)에서는 이소룡의 아들 브랜든 리와도 싸웠다. 말하자면 이소룡과 그의 아들, 그리고 그의 아류들과도 다 싸웠다. B무비이기에 가능한 설정일 텐데, 세상 어디 그런 배우가 있을까. 또 하나, ‘백옥과도 같은’ 피부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미모로만 따지면 개인적으로 역대 한국 여배우 중 세 손가락 중 한 명으로까지 꼽고 싶은 여수진의 존재다. 박노식 의 < 광녀 >(1975)에서 박노식의 연인이었고, < 폭력은 없다 >(1975)에서 박형사(박노식)가 오랫동안 지켜봐온 광일(원선)의 연인으로도 등장한다. 그야말로 이런저런 B무비에서만 활동하다 사라졌던 안타까운 배우다. 여수진 여소룡 감독: 최우영 각본: 허진 개봉극장: 청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