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호의 야색
- 감독
- 변장호
- 제작년도
- 1982
- 출연
- 차화연, 신영일, 김동현, 윤일봉, 김지영, 박예숙, 이정애, 홍윤정, 최동애, 김기범, 윤일주, 최삼, 김수천, 김민규, 박종설, 박부양
강근식 구술을 통해 보는 1970년대 한국영화의 새로운 흐름 주지하다시피 1970년대 한국영화에서 가장 주목받고 연구가 많이 이루어진 분야는 <별들의 고향>(이장호, 1974)과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1975) 등으로 대표되는 영상시대의 영화들일 것이다. 이들의 영화는 시대를 반영하는 대표적인 영화들로 1970년대 한국의 정치‧사회적 분위기를 간접적으로 보여줄 뿐만 아니라 스타일의 측면에서도 새로운 인력의 구성을 통해 기존의 한국영화와는 구별되는 다양한 형식을 시도하며 시대의 흐름과 변화를 보여주었다. (그림1) <별들의 고향>(이장호, 1974) 포스터 (그림2)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1975) 포스터 특히 이 영화들은 1970년대 각광받기 시작한 다양한 대중문화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1960년대와는 달라진 새로운 청년세대의 등장을 강조하였다. 한국영화에서 새로운 세대의 등장은 매 시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1950년대에는 <자유부인>(한형모, 1956)에서 이민이 연기한 춘호가 전쟁 직후 미국문화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아프레게르’ 세대를 보여주었고, 1960년대에는 <맨발의 청춘>(김기덕, 1964)에서 신성일과 엄앵란이 연기한 두수와 요안나가 4.19 이후 새롭게 등장한 방황하는 ‘청춘’ 세대를 보여주었다. 이 영화들은 흥행 면에서 큰 성공을 거두며 한국영화산업의 변화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별들의 고향>에서 안인숙이 분한 경아와 <바보들의 행진>에서 신인 신분으로 파격적으로 기용된 윤문섭, 하재영과 아역배우 출신의 이영옥이 연기한 병태, 영철, 영자는 이들 세대와는 또 다르게 구별되는 새로운 세대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바로 세계적인 청년문화의 중심에 놓여있던 히피 세대의 등장이었다. <별들의 고향>과 <바보들의 행진>의 음악을 담당했던 강근식이 “히피 감성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했고, 서양의 그것과는 동떨어진 것이었다고 생각했다”고 해도 세계적인 유행은 다양한 대중문화의 흐름을 타고 한국의 콘텐츠에 녹아들었다. (그림3) <별들의 고향>(이장호, 1974)의 문오와 경아 (그림4)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1975)의 병태와 영자 다양한 분야에서 새롭게 유입된 인력들은 1970년대를 대표하는 이 영화들의 이야기, 연출의 스타일 그리고 음악에서 대중문화를 향한 젊은이들의 열망에 부응하는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강근식은 이와 같은 한국영화의 새로운 흐름에 합류한 대표적인 음악인이었다. 그는 일본문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고, 미국영화와 미국음악에 오롯이 영향을 받은 전후 세대를 대표하는 대중문화예술인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재즈와 사이키델릭 사운드에 영향을 받은 음악적 취향은 이들 영화를 동시대 세계적으로 유행한 영화와 음악 등의 대중문화 콘텐츠와 연관해볼 수 있는 흥미로운 지점을 만들어놓았다. 이렇듯 강근식을 비롯하여 당대 청년 세대에게 호응을 받은 소설가 최인호, 음악인 이장희, 송창식 등의 대중문화예술인들이 이장호, 하길종 감독 등과 협업으로 만들어낸 이 영화들은 특정 개인에 의한 예술작품이 아니라 1970년대 대중의 열망을 가장 적확한 방식으로 보여준 대중문화의 결과물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강근식의 프로필은 시대를 읽어내는 데 매우 유용하고도 흥미로운 지점을 제시한다. 청소년 시절, 역사의 큰 분기점인 4.19와 5.16을 겪고, 1960년대 중후반에는 미국음악에 심취해 학내 밴드로 음악활동을 시작하고, 1970년대에는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한 음악살롱에서 프로 음악인으로 성장하며 상업영화와 상업광고음악계까지 진출한 그의 음악 프로필은 1960~1970년대 변화하는 대중음악뿐만 아니라 대중문화 전반의 흐름까지 살펴보는 데 일조한다. 특히 1970년대 TV산업의 확장과 성장으로 동반 성장한 광고산업과 이에 따른 하위문화의 번성이 기존의 한국영화산업에 직‧간접적으로 어떠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지 가늠해보는 데 유용한 구술이기도 하다. 강근식의 구술을 통해 살펴볼 수 있는 1970년대 대중문화의 또 한 가지 중요한 특징은 ‘매체의 넘나듦’이다. 이 시기 영화와 TV 그리고 공연이 서로 영향을 받으면서 기존의 무대와 영화의 영향관계 내에서 활동한 기성세대와는 또 다른, 새로운 유형의 멀티 엔터테이너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소설가 최인호의 영화작업이 그러하며 (최인호는 자신의 원작이나 각색 영화에 항상 카메오 출연을 하기도 했으며 <걷지말고 뛰어라>(1976)를 직접 감독하기도 했다), 강근식을 비롯한 이장희, 송창식 등의 음악인들 또한 본업인 음악작업 외에도 영화음악과 광고음악을 넘나들면서 음악적 영향력을 확장했다. 이것은 영화사적으로는 TV 산업의 성장으로 기존의 한국영화산업이 급격히 쇠퇴한 단점으로 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매체의 경계에 영향을 받지 않는 새로운 세대들이 등장함으로써 매체 간의 영향이 다각화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 따라서 밴드음악과 영화음악 그리고 광고음악이 모두 포괄되어 있는 강근식의 구술은 1970년대의 대중문화를 이해하는 데 하나의 길잡이가 될 수 있다. (그림5)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1975) 최인호 출연 장면(아래 왼쪽) ‘평생 음악인’ 강근식의 음악이야기 이 부분은 『영화천국』Vol. 60에 실린 「구술로 만나는 영화인: 청춘의 음악 만들어낸 영원한 청년 음악인」을 수정·보완했다. 강근식은 1946년 평양 출생으로 한국전쟁 때 월남해 탄광촌인 강원도 상동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오락거리라고는 아무 것도 없던 환경에서 기타를 치던 형님들과 나무에 그린 피아노 건반으로 연습하는 누이를 보며 음악을 배웠다. 가수 활동을 하던 삼촌 손인호는 때때로 악극단 활동에 얽힌 무대 이야기를 해주었다. 변변한 악기 하나, 제대로 된 음반 한 장 없었지만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둘러싸여 생활한 덕에 그는 평생 음악을 업으로 하는 예술가가 되었다. (그림6) 홍대강당에서 이루어진 5인조 밴드 홍익캄보의 첫 공연. 왼쪽에서 두번째 기타연주자가 강근식. (그림7) 밴드 홍익깜보 시절 신입생 환영회. 가운데 기타연주자가 강근식 홍익대학교 도예과 재학 시절 학내 밴드인 홍익 캄보의 기타리스트로 음악 활동을 시작한 강근식은 ‘TBC 전국 남녀 대학생 재즈페스티벌’에서 수상하며 본격적인 음악인의 길로 들어섰다. 수상 후에는 당시 가장 인기 있던 음악프로그램 <TBC 쇼쇼쇼>에도 출연할 만큼 유명인사가 되었다. 이후 1970년대 청년문화를 대표하는 다양한 음악의 산실이라 부를 수 있는 오리엔트프로덕션 소속 뮤지션으로 활동하며 <이장희와 동방의 빛>, <조동진>, <현경과 영애>를 비롯한 다수의 음반 작업에 참여했다. <이장희와 동방의 빛>의 기타리스트로 이화여자대학교 강당에서 공연을 할 때는 디자이너 앙드레김이 직접 무대의상을 제작해줄 정도의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그림8) TBC 전국 남녀 대학생 재즈페스티벌 공연 사진. 2회 연속 그랑프리를 수상하였다. 당시에는 무대 모니터 시스템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아 밴드 공연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림9) <쇼쇼쇼> 출연 사진. 왼쪽부터 이장희, 진행자 곽규석, 강근식 (그림10) <동방의 빛> 공연 사진. 앙드레 김 선생이 맞춰준 옷을 맞춰입고 공연하였다. 이후 강근식은 1970년대 변화하는 대중문화의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기 시작했다. 1970년대 새롭게 등장한 음악인으로서, 새롭게 등장한 영화인들 그리고 광고인들과 협업하게 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과정이었을 것이다. 특히 음악과 영화에서 청년문화를 대표하는 오리엔트프로덕션과 화천공사의 만남으로 탄생한 <별들의 고향>과 <바보들의 행진>은 영화뿐만 아니라 음악적인 면에서도 신선한 충격과 파장을 끼쳤다. 당시로서는 흔치 않던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은 이 영화들이 현재까지 회자되는 데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림11) <별들의 고향>(이장호, 1974) OST (그림12) <바보들의 행진> OST 영화음악과 더불어 그가 작업한 광고음악은 음악인 강근식을 소개하는 데 중요한 프로필이 되었다. 김세환이 부른 “부드러운 껌”(<해태껌>)과 정훈희, 윤석화 등이 부른 “열두 시에 만나요”(<부라보콘>), 지금까지도 패러디되는 “멋진 남자 멋진 여자”(<트라이>) 등은 CM송을 넘어 시대를 소환하는 아이콘이 되었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30여 년 동안 광고음악을 창작하며 경험한 대중문화와 사회변화의 관계는 그의 구술을 통해 생생하게 전달된다. 1970년대 충무로가 영화의 거리에서 광고의 거리로 변화하는 모습, 영화가 아닌 광고를 통해 새로운 스타가 탄생하는 모습, 광고의 종류가 식료품 위주에서 전자기기로 변화하는 모습 등은 광고를 통한 한국사회의 변화를 잘 보여준다. (그림13) <부라보콘> 광고 (그림14) <부라보콘> 광고 (정윤희와 신일룡이 출연한 부라보콘 광고는 시리즈로 만들어졌다) 1970년대 화천공사와 오리엔트프로덕션의 시도로 탄생한 새로운 청년영화 강근식이 작업한 영화음악은 총 13편으로 데뷔작 <별들의 고향>을 필두로 1970년대 작업한 영화가 6편(<바보들의 행진>, <너 또한 별이 되어>(이장호, 1975), <미스 영의 행방>(박남수, 1975) <걷지말고 뛰어라>(최인호, 1976)(편곡), <내마음의 풍차>(김수용, 1976)), 영화음악으로는 마지막 작품인 1986년 작 <가슴을 펴라>(최원영)를 포함해 1980년대 작업한 영화가 8편(<하얀미소>(김수용, 1980), <강변부인>(최동준, 1980), <겨울로 가는 마차>(정소영, 1981), <도시로 간 처녀>(김수용, 1981), <별들의 고향 3>(이경태, 1981), <이별없는 아침>(이경태, 1985))이다. 그중 1970년대 작업한 6편은 한국 대중문화의 시대적 특징을 잘 보여주는 사례로 들 수 있다. 특히 <별들의 고향>과 <바보들의 행진>에서는 상기한 것처럼 1970년대 한국영화의 트렌드를 이끈 화천공사와 대중음악의 새로운 흐름을 선도한 오리엔트프로덕션의 협업을 주목해보아야 한다. 한국영화의 제작 시스템이 국가의 제도로 제약을 받고 있던 1970년대, 화천공사는 젊은 층을 공략하는 영화들을 통해 새로운 메이저 제작사로 등극했다. 이 영화들이 원작의 인기에 크게 힘입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각 분야에 새로운 인력을 영입해 활용한 것 또한 주효했다. (그림15) <별들의 고향>(이장호, 1974) 신문광고 (그림16)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1975) 신문광고 특히 음악은 기존의 영화들에 비해 현격하게 비중을 높임으로써 스타일적인 측면에서 차별화를 꾀했다. 화천공사는 도시 중심의 청년 세대에게는 절대적인 호응을 받았지만 대중 전체에게 어필했다 볼 수 없는, 밴드와 통기타를 기반으로 ‘젊은 음악’을 선보이는 오리엔트프로덕션과 협업했다. 이와 같은 시도는 이장호, 하길종, 최인호 등을 중심으로 한 인맥 기반의 우연한 기획이 아니라 영화와 음악의 협업을 통해 특정한 관객층을 공략하기 위해 세밀하게 계획된 작업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기획의 결과물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강근식이 구술에서 언급하는 <별들의 고향>의 음악살롱 장면이다.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가 연주되는 장면에서 관객석에 앉아있는 이들은 당시 강근식, 이장호, 최인호가 드나들었던 음악살롱 등의 아지트에 항상 자리하고 있던 대중문화예술인들이다. 이들 앞에서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를 부르는 이는 원곡의 가수인 이장희도, OST를 부른 김세환도 아닌 가수 백호빈이다.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한 곡을 부르는 장면에서 여러 명의 가창자가 동시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 장면은 실제 존재하는 대중문화 그룹에 가상의 가수와 극 중 인물들을 동시에 투입시킴으로써 허구와 현실을 함께 녹여내는 장면이라고 볼 수 있다. 관객은 허구의 인물들과 함께 그들의 아지트로 들어가 당대 새롭게 등장한 대중문화예술인 그룹을 직면하게 된다. (그림17) <별들의 고향>(이장호, 1974) 음악쌀롱 장면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를 부르는 백호빈) (그림18) <별들의 고향>(이장호, 1974) 음악쌀롱 장면 <바보들의 행진> 또한 비슷한 선상에서 파악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실제 대학생 신분인 배우들의 학교명을 광고에 활용하여 마치 이들의 실제 이야기인 것 같은 효과를 노린다. 경찰의 장발 단속을 피해 열심히 도망치는 병태와 영철의 모습이 송창식의 <왜 불러> 가사와 박자에 맞춰 편집된 장면은 이러한 효과를 배가시킨다. 이 장면은 인파 속에서 도망치는 병태와 영철과 시민들의 모습을 다양한 앵글과 교차 편집을 통해 현실감을 높인다. (그림19)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1975) <왜 불러> 장면 (장발단속 중인 경찰에게 붙잡힌 장면) (그림20)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1975) <왜 불러> 장면 (경찰을 피해 도망가는 장면) (그림21)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1975) <왜 불러> 장면 (경찰을 피해 도망가다 육교에 매달린 장면) 이처럼 영화의 대표적인 장면들에서 음악은 단지 배경이 아니라 영화와 관객의 거리감을 조절하는 주요 소재로 활용된다. 화천공사와 오리엔트프로덕션의 협업의 관계처럼 이 영화들의 장면 장면들은 이야기와 음악이 공동작업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두 편의 영화는 명확한 관객층을 대상으로 새로운 대중문화 콘텐츠를 시도해 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음악인 강근식 구술의 의의 강근식의 구술은 1970년대 <별들의 고향>, <바보들의 행진> 등 화천공사가 제작한 청년영화의 음악작업 배경을 확인할 수 있는 구술인 동시에 당시 청년문화를 직접 겪은 문화예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구술이다. 또한 1960년대 후반 대학생 밴드 활동과 이장희, 송창식, 조동진 등의 음악을 작업한 오리엔트프로덕션(사장 나현구)의 작업 방식과 회사의 분위기, 대중문화예술인과의 관계도 살펴볼 수 있는 구술이다. 말하자면 강근식 선생의 구술은 일본문화의 영향을 받지 않고 미국문화의 영향을 받아 새롭게 등장한 1960~1970년대 젊은 대중문화예술인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구술이라 할 수 있다. 더불어 그의 이력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광고음악의 역사를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대략적으로나마 파악할 수 있는 구술이기도 하다. (그림22) 쎄시봉의 현장. 왼쪽 아래에 안경낀 사람이 이백천. 이백천은 쎄시봉에서 '대학생의 밤'을 기획하였다. 더불어 음악활동에 영향을 준 대중문화의 경험과 초기 문선대의 공연 모습도 주목해보아야 할 부분이다. 1975년 첫 번째 대마초파동에 얽힌 뒷이야기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강근식은 이 사건에 엮여 고초를 받은 당사자로서 당시 대마초가 불법으로 지정되기 전후의 과정과 어느 날 갑자기 연행되어 물고문을 받고 정신병원에 수감된 상황을 상세히 묘사하고, 이 일로 인생의 목표 설정이 많이 변해버린 것을 담담하게 소회하기도 한다. 그리고 밴드음악부터 영화음악, 광고음악까지, 평생을 음악 ‘일’을 해온 백발의 노신사는 현업에서 은퇴한 후 다시 기타를 잡았다. 평생 음악과 함께한 음악인 강근식의 모습은 이제 무대 위 ‘기타리스트 강근식’으로 만나볼 수 있다. (그림23) 강근식
1980년대 중후반 한국사회와 영화계 1980년대 중반 한국 사람들에게 미국은 양가적인 대상이었을 것이다.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환상 그리고 반미 감정이다. 당시의 사회 분위기는 강준만 교수의 「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2권」에서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레이건의 재선 선거 전략과 맞물려 ‘광신적 애국주의’로 포장된 1984년 LA 올림픽은 한국의 신군부에도 매력적인 모델이 되었다. 또한 LA 올림픽이 보여준 미국 제일주의는 한국 사람들에게도 동일한 이데올로기를 심어주었을 것이다. 한국은 최고 우방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미국이 개최한 올림픽에서 10위에 오르는 대기록을 세웠고, 전 국민의 흥분은 극에 달했다. 전두환 정권은 올림픽이 끝난 이후에도 방송국을 동원한 국민 축제로 열기를 이어나갔고, 이는 1986년 아시안게임, 1988년 서울올림픽까지 연결되며 1980년대 중후반의 한국 사회 전체를 취하게 만든다. 전두환 정권이 추진한 일련의 올림픽 이벤트는 단순한 스포츠 행사가 아니라 통치 그 자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대중이 미국이라는 타자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사건들이 일어났다. 19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에 이은 1985년 서울 미문화원 점거 농성이 그것이다. 학생들은 광주민주화항쟁 5주년을 기해 학살의 책임자로 신군부를 지목하고 정권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하는 동시에 이를 지원한 미국 역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두환 정권은 이를 기회 삼아 학생운동을 국민 여론과 격리하기 위해 언론을 이용해 부각했지만, 이는 오산이었다. 일반 시민들이 광주학살과 미국의 관련성을 인식하게 만드는 예기치 못한 상황으로 흘러간 것이다. 더 이상 반미는 운동권 대학생의 구호에만 머물지 않았다. 제5공화국의 영화 정책 설계도 미국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었다. 전두환 정권은 절차적 정당성과 도덕성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인지 혹은 올림픽이라는 정권 차원의 과업 때문인지 특히 문화예술을 강조했고, 예산 지원과 규제 검열이라는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가동했다. 1984년 영화 시책부터 반영된 영화예술 및 영화산업 활성화 방안도 당시 문화 정책의 맥락에 놓여 있을 것이다. 제5차 영화법 개정(1984. 12. 31)으로 영화제작업은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전환되었고, 전격적인 독립영화 제작 제도까지 신설되었다. 표면적으로는 자유롭게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또한 검열제도 심의제로 이름을 바꿨고, 주체 역시 반관반민 기구인 공연윤리위원회로 이관되었다. 이 같은 한국영화 육성 및 자율화 정책의 추진 배경에는, 1985년 시작된 한미영화협상이 있었다. 미국영화수출협회(MPEAA)의 끊임없는 압력 끝에 한국영화는 전면적인 시장 개방이 예고된 상태였다. 결국 제6차 영화법 개정(1986. 12. 31)으로 1987년 7월부터 외국 영화사들이 한국에서 영업을 시작했고, 1988년 UIP의 < 위험한 정사 Fatal Attraction >(애드리안 라인, 1987)가 그 물꼬를 텄다. ‘한국의 스필버그’에서 미학적 야심가로 1953년생인 배창호 는 연세대 경영학과 재학 시절부터 자작 시나리오를 들고 충무로 영화사를 기웃거린 영화청년이었다. 당시 제작 명가 화천공사를 찾아가 자신을 기획실장으로 채용해주면 연간 3편 이상의 흥행작을 만들겠다고 호언장담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1980년 이장호 감독의 복귀작 < 바람 불어 좋은 날 >과 < 어둠의 자식들 >(1981)의 조감독으로 현장 경험을 쌓은 후 1982년 < 꼬방동네 사람들 >로 감독 데뷔의 꿈을 이뤘다. 그의 나이 29세였다. 이동철의 원작은 사회적 리얼리즘의 분위기가 강했지만, 영화는 문공부 검열 과정을 거치며 외견상 멜로드라마로 전향했고, 결과적으로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배창호 자신도 대중적 화법에 재능이 있음을 깨달은 계기가 되었다. 차기작인 < 적도의 꽃 >(1983)이 15만 관객 동원으로 흥행에 성공하며 충무로의 흥행 감독으로 등극했고, < 고래사냥 >(1984)의 40만 흥행에 이어, < 깊고 푸른 밤 >은 60만이 넘는 전대미문의 흥행 성공을 거뒀다. 지금이야 1천만 관객 흥행이 큰일도 아니지만, 당시 이 정도 흥행 성적은 어느 정도의 수준이었을까. 영화는 1985년 3월 1일 명보극장 한 관에서만 개봉해 7월 31일까지 무려 다섯 달 동안 상영했다. 매일 3,000명 이상의 관객이 들면서 50만 가까운 관객을 동원한 것이다. 그리고 스크린쿼터 때문에 다른 개봉관인 코리아극장으로 옮겨 최소 10만을 더 동원하게 된다. 이는 < 겨울여자 >( 김호선 , 1977)가 보유한 58만 기록을 깬 것이었다. 당시 그는 ‘한국의 스필버그’로 불렸는데, 대중적 화법의 스토리텔링에 능하다는 평가와 흥행 감독이라는 가치가 합쳐진 표현이었을 것이다. 1985년 < 고래사냥 2 > 역시 흥행에 성공했지만, 그는 불현듯 ‘왜 영화를 만드는가’라는 근본적인 회의에 빠지게 된다. < 황진이 > (1986)에서 시도한 탐미적 실험이 추석 프로를 기대한 관객에게 철저하게 충격을 주고 외면받은 후, 양식미는 유지하면서 서민의 일상을 따뜻하게 묘사한 < 기쁜 우리 젊은 날 >(1987)로 다시 대중의 선택을 받았다. 영화비평가 김영진의 표현처럼 배창호는 스토리텔링이 아닌 이미지로 승부를 거는 작가의 길에서 주춤거렸고, 흥행 감독의 명성은 조금씩 잊혀갔다. 1990년대 이후 그는 미학적 야심을 투영한 작가주의 영화와 대중영화, 또 저예산 독립영화와 상업영화를 오갔다. 전자는 < 꿈 >(1990)과 < 천국의 계단 >(1991), 후자는 < 러브 스토리 >(1996), < 정 >(1999)과 < 흑수선 > (2001)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한국영화의 가장 이상적인 모델이 관객과 평단 양쪽으로부터 골고루 지지받는 작품이라면, 1980년대의 그것은 배창호의 몫이었다. <깊고 푸른 밤>을 위시로 한 그의 1980년대 영화는 대중적 화법, 기술적 혁신 그리고 사회적 의미와 미학적 야심까지 모두 만족시키는 영화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의 성취는 그간의 한국영화가 기댄 멜로드라마의 상투성을 벗어난 것이었다. 황량한 풍경이 전하는 아메리칸 드림의 허상 영화는 미국 서부의 황량한 풍경을 배경으로 오픈카에 타고 있는 한 남자를 비추며 시작한다. 한 여성이 올라타자 차는 데스밸리로 향하는 고속도로를 달린다. 그리고 여자와 남자는 기이한 협곡의 구릉에 기대선 채로 관계를 가진다. 섹스가 끝난 후 남자는 돌변한다. 돈이 든 핸드백을 집어 든 그는 여자를 무자비하게 걷어차고 사막 한가운데 버려둔 채 떠난다. 이 남자는 바로 기회의 땅 미국에서 영주권을 받고 부자가 되려는 백호빈( 안성기 )이다. 임신한 애인을 한국에 남겨둔 채 멕시코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온 그는 영주권을 받아 그녀를 초청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LA 도심의 화려한 야경을 배경으로 ‘깊고 푸른 밤’이라는 타이틀이 보이고, 이제는 술집이다. 한 중년 여성이 동양인으로 보이는 여성 바텐더에게 다가가 위장 결혼을 권한다. 그녀는 더 이상 싫다고 거절하지만 한국 남자라는 말을 듣고 마음이 바뀐다. 그녀는 주한미군을 따라 미국에 왔다가 이혼한 후, 영주권을 받으려는 남자들과 위장 결혼해 돈을 버는 제인( 장미희 )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전혀 머뭇거리지 않고 속도감 있게 이야기를 전개한다. 둘은 라스베이거스에서 결혼식을 올린 후, 위장 결혼 생활을 시작한다. 전남편 마이클이 딸 로라를 무리하게 데려간 사건이 있던 밤, 호빈과 제인은 처음으로 관계를 가지고 제인은 점차 그를 사랑하게 된다. 한밤에 이민국 직원들이 들이닥쳐 둘의 관계를 추궁하지만, 제인의 도움을 받은 호빈은 결국 영주권을 받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한국의 애인을 불러올 생각에 들뜬 호빈은 제인의 집을 나서며 이혼을 요구하고, 그와 헤어지지 않으려는 그녀는 임신했다고 거짓말한다. 제인을 죽이려고 마음먹은 호빈은 그녀 역시 데스밸리로 데려가 폭행한다. 임신이 거짓말이었다는 제인의 말에 안심한 호빈은 이혼 여행을 떠나자고 제안하고, 차에 탄 그녀는 호빈의 애인이 보내준 테이프를 들려준다. 아이도 지우고 다른 남자와 결혼할 거라는 목소리에 호빈은 정신을 잃고, 제인은 그의 머리를 쏜 후 자신의 머리도 쏜다. 어떤 의미에서 <깊고 푸른 밤>은 한국영화사상 가장충격적인 장면으로 시작해 가장 충격적인 장면으로 끝나는 영화일 것이다. 데스밸리행 고속도로를 달리는 오픈카, 모래 계곡에서 벌이는 정사 등 작심한 듯 할리우드 영화의 질감으로 볼거리를 전시하던 영화는, 갑자기 여인을 무자비하게 발로 걷어차는 악마 같은 남자를 보여준다. 특히 오프닝의, 인물을 점처럼 두고 데스밸리의 전경(全景)을 잡아내는 압도적인 숏은 일품이다(촬영기사 정광석은 이 영화로 21회 시카고국제영화제 촬영상을 받았다). 영화의 엔딩 역시 데스밸리다. 호빈은 제인을 때리고 목을 조르며 모래산 밑으로 밀어 떨어뜨리려고 한다. 이때도 모래산 위의 두 남녀를 점처럼 잡아내며, 대자연에 비해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인간의 욕망을 보여준다. 신비로우면서도 황량한 모래 협곡과 사막은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지만 결국 파멸의 길을 걷게 되는 호빈과 제인의 내면을 형상화하는 것이다. 데스밸리로 상징되는 영화 속 미국은 이민자들의 꿈이 자랄 수 없는 불모의 땅일 뿐이다. 최인호 의 시나리오, 장미희의 호연 <깊고 푸른 밤>은 <적도의 꽃>에 이어 최인호가 직접 시나리오를 썼다. 오프닝 타이틀에 그의 소설 「깊고 푸른 밤」과 「물 위의 사막」을 원작으로 삼았다고 나오는데, 시나리오는 두 소설의 주요요소와 구성을 합친 것이다. 전자에서는 한국에서 터진 대마초 사건으로 미국에 온 가수와 선배 소설가가 자동차로 미국 서부를 여행하는 요소를 취했고, 미국 영주권을 얻기 위해 계약 결혼을 하는 남자의 이야기는 후자에서 가져왔다. 사실 최인호의 오리지널 시나리오는 극의 구성이나 인물의 성격 등 배창호의 영화 버전과는 꽤 다르다. 예를 들어, 데스밸리를 배경으로 한 사건은 시나리오의 엔딩에만 적용되고, 제인은 자신의 성적 욕망에 충실한 여인으로, 또 그녀와 호빈도 더 깊은 관계로 묘사된다. 하지만 영화는 제인을 차갑고 그늘이 있는 여성으로 묘사하는 등 둘의 관계에 거리를 만들고, LA와 라스베이거스의 화려한 야경과 데스밸리의 황량한 구도 속에 인물들을 배치해 공간과 분위기로 인물의 내면 풍경을 전하는 방식을 택한다. 영화 속 제인의 캐릭터가 매력적으로 빚어진 것은 무엇보다 장미희의 역할이 컸다. 영화평론가 신은실의 평가처럼 전작 <적도의 꽃>이 배우로서의 안성기가 장악한 영화였다면 <깊고 푸른 밤>은 장미희의 아우라가 지배한 영화였다. 1980년 9월부터 방송출연금지 연예인으로 묶여 있던 장미희는 스크린 작업만 이어가다 1983년 9월부터는 거의 잠적에 가깝게 미국에 머물고 있었다. 배창호의 끈질긴 설득으로 출연을 결심한 그녀의 요구 조건이, 미국 올로케이션과 동시녹음 등 기술적 투자였다는 것은 흥미로운 지점이다. 이 영화로 장미희는 <겨울여자>의 로리타 캐릭터를 넘어선 성숙한 매력의 여인으로 변신하며, 연기적 성장을 맞게 된다. 한국 대중영화의 주목할 만한 성취 당시 기사(「동아일보」 1985.10.14)는 <깊고 푸른 밤>이 관객의 주목을 받은 이유로, 소재의 참신성과 서구영화 같은 스타일을 든다. 특히 한국 사람들에게 동경의 대상이 되고 있는 미국 이민 사회의 내부를 적나라하게 묘사해 미국에 대한 환상을 깨뜨렸다는 것이다. 영화 매체의 강력한 영향력, 특히 현재 1천만 영화의 영향력을 생각한다면, 이 영화가 당시 한국 사회에 끼친 영향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관객들에게 외국영화 보는 기분을 맛보게 한 점”도 큰 매력이었다. 이 영화는 당시 한국영화 통상 제작비의 2~3배인 2억 5,000만 원가량의 제작비를 투입했고, 한국 배우는 4명만 출연시키며 미국 현지 올로케이션으로 진행됐다. 배창호의 감각적인 연출과 속도감 있는 전개도 매력적이었지만, 테크닉 면에서도 발군이었다. 기존의 한국영화와 달리 영화 전체를 동시녹음으로 진행했고, 배창호의 스타일적 인장으로 꼽히는 360도 촬영 등 인물들의 감정을 잡아내는 카메라의 유려한 움직임도 돋보였으며, 마치 재즈처럼 이미지와 조우하는 정성조의 세련된 영화음악도 효과적이었다. 당시 관객에게 서구영화를 보는 듯한 감각을 부여했다는 점은, 최신 렌즈의 카메라로 미국의 풍광을 담아낸 것이 이유였지만 할리우드 영화를 환기시키는 장면이나 분위기를 차용한 것이 주효했다. 여러 평론가가 언급하듯, < 차이나타운 Chinatown >(로만 폴란스키, 1974)의 필름 누아르적 분위기를 취한 것부터 <택시 드라이버 Taxi Driver>(마틴 스코세이지, 1976) 속 로버트 드 니로가 걷는 장면을 모방한 것도 그렇다. 하지만 당시 배창호의 언급처럼 미국영화에 대한 콤플렉스 차원이 아닌, 미국 현지에서 완성도 있는 대중영화를 만들어보겠다는, 1980년대 중반의 시도 자체가 평가의 방점으로 찍혀야 할 것이다. 새로운 변화의 예고 1980년대 후반의 제작 자유화 물결과 정치적 유화 국면을 타고 한국영화는 또 하나의 새로운 물결을 맞았다. 이장호와 배창호의 후예들이자 영화운동 세대라고 할 수 있는 장선우 , 박광수 , 이명세 , 정지영 등이 등장해,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에서 1987년 6월항쟁으로 이어지는 1980년대의 시대정신을 바탕으로 사회비판적 작품들을 내놓았다. 그리고 국내외 영화학자들은 그들의 작품 경향을 묶어 ‘코리안 뉴웨이브’로 명명했다. 특히 장선우는 한국식 자본주의를 우화적 표현으로 풀어낸 < 성공시대 >(1988)를 내놓으며, 1990년대를 휘저을 파격적인 행보를 예고하고 있었다.
유신체제기 청년의 정신병리 유난히 그 시대의 공기를 예민하게 흡습하고 있는 영화가 있다. 그것은 완성도나 흥행, 혹은 예술성과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대개 그런 영화들은 모순되고 부조리하며 치기와 센티멘털리즘이 넘치는 가운데 혼종성이 두드러지기도 한다. 무엇보다 당대에 수용되던 것과 후대에 이해되는 것의 차이가 커서 새롭게 발견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내장하고 있는 것 또한 그런 영화들의 특징이다. 걸작이 끊임없이 발견되고 새롭게 구성되어야 하는 것이라면 그런 영화들이야말로 영화사에서 먼저 주목해야 할 대상일 수 있다. 이장호 감독의 두 번째 연출작 < 어제 내린 비 >는 1970년대 중반을 대표하는 그런 영화다. 김홍준의 표현을 빌리자면 “겉으로는 우드스탁을 표방하는데 몸은 아직 청계천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그 당시의 절묘한 감수성을 잘 표현하고 있는” 1) 영화 중 하나이며, ‘청계천’ 2) 으로 제유될 수 있는 그 시대의 억압과 그로 인한 청년의 병리를 노출하고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3) 이 영화는 “< 별들의 고향 >으로 한국영화 흥행사상 최고기록을 세운 인기 작가 최인호 와 이장호 감독 콤비가 내놓은 제2탄”으로 개봉 전부터 주목받는다. 그리고 “대목 노린 설빔 영화”로 국도극장에서 개봉하여 약 15만의 관객을 동원하면서 1975년 ‘방화’ 흥행 3위에 오른다. 4) 그런데 이 영화는 가부장제가 공고했던 당시 한국 사회에서 상당히 부담스러울 수 있는 이야기, 한 여자를 사이에 둔 형제의 갈등을 다루고 있다. 대본 검열에서도 이것이 문제가 되어 “여주인공의 타락된 성도덕” 5) 이 지적되고, “근친상간의 인상을 주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 6) 하라는 개작 통보를 받았다. 그런데 오히려 그랬기 때문에 이 영화에 대한 관심은 ‘풍기(風紀)’ 쪽으로 집중되었고 당시 저널리즘에서도 이 영화는 “이복형제 사이에 끼어든 여인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삼각관계를 그리고” 7) 있는 멜로드라마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면서 큰 문제없이 개봉되고 소비되었으나, 이 영화가 반영 내지 은닉하고 있는, ‘풍기’의 잣대만으로는 발견할 수 없는 복잡한 이면이 제대로 독해될 기회를 잃기도 했다. 영후 주인공 영후( 김희라 )는 본처 자식보다 나이가 많은 사생아다. 그는 태생과 가정환경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는 깊은 절망과 패배의식을 지니고 있다. 달리기에 남다른 재능이 있음에도 대회에 나가면 제대로 승부하지 못하며, 머리맡에는 항상 교수대 밧줄을 걸어두고 때때로 자신의 목에 걸어보기도 하는 것은 그의 내면을 잘 보여준다.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그는 오히려 웃음을 띠며 명랑하게 행동한다. 그가 지니고 있는 장난감에서 나오는 과장스러우면서도 위악적인 웃음소리는 영후의 웃음, 나아가 이 영화에서 웃음이 지니는 의미를 함축한다. 그러한 그를 생모( 도금봉 )는 ‘멍텅구리’, ‘돼지새끼’라 부르며, “비위가 거슬리면 오히려 웃는, 웃을 때가 제일 무서운 새끼”라고 일컫는다. 이러한 영후가 장성하여 아버지( 최불암 )의 집으로 들어가면서 동생이자 적자인 영욱( 이영호 )을 만나게 된다. 영욱은 영후와 달리 합법적인 가정에서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지만 내성적이고 유약한 외동이다. 그는 어른들 뿐만 아니라 약혼녀에게조차 미성숙한 남성으로 간주된다. 영욱의 성격은 무구한 얼굴로 카페에서 기타를 치며 포크송을 부르는 것으로 상징된다. 영욱의 어머니는 영후에게 이러한 영욱을 ‘강하게’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다. 이에 영후는 영욱에게 웃는 것부터 배우라며 자신의 장난감을 선물하고, 무작정 달리게 하는가 하면 윤락가에 데려가 성매매를 종용한다. 여기에서 ‘강해진다는 것’은 마음에 없는 웃음을 지을 줄 알고 앞만 보고 뛰어가며 여자를 쉽게 취할 수 있는 남자로 만든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강한 남자’가 된다는 것을 이렇게 이해하고 동생에게 훈육하려 하는 영후 또한 그러한 남자는 못 된다. 그는 육상대회에만 나가면 뒤를 돌아보느라 결승점에 도달하지 못하고 중도 탈락하는 상습적 패자인 것이다. 민정과 영욱 영후가 영욱의 약혼녀 민정 (안인숙 )과 사랑에 빠지면서 형제는 갈등에 휘말린다. 여기에서 영후가 민정과 연인 관계가 되는 계기는 생모의 결혼이다. 아버지와 비합법적인 관계였던 생모는 영후보다 더 나이 많은 아들들이 있는 늙은 남성의 합법적인 아내로 새출발한다. 이로써 사생아로 태어난 영후가 돌아갈 수 있는 그나마 유일한 안식처가 없어지는 셈이다. 이는 “돼지새끼”, “멍텅구리 새끼”라 불리며 “우리 엄마 섹시하지?”라고 말할 수 있었던 영후와 생모 간의 원초적인 관계 또한 상실되었음을 의미한다. 이 영화에서 영후 생모의 결혼식 풍경이 가장 슬프게 다가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예복을 갖춰 입고 예식에 충실하면서도 문득 문득 노출되는 두 사람의 표정과 눈빛은 협소하고 강고한 틀 안에 스스로를 길들일 수밖에 없는 야생동물을 환기시킨다. 평소에 가장 우울한 처지이면서도 겉으로는 제일 명랑한 척했던 두 사람이기에 그들이 유발하는 서글픔은 배가된다. 이렇게 생모가 결혼하던 날 민정이 영후를 위로하면서 두 사람은 함께 밤을 보내게 된다. 이는 영후의 생모를 향했던 욕망이 민정에게 전이됨으로써 민정이 생모의 자리를 대체하게 되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영후는 이미 아버지의 질서로 들어가기로 결정한 인물이다. 더구나 민정은 동생의 약혼녀다. 따라서 영후는 민정과의 사랑을 부정하고 민정을 버릴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이미 이 삼각관계의 비극적 결말은 예비되어 있다. 영욱은 영후에게 애인을 빼앗겼음을 알게 되자 민정과 함께 죽으려고 한다. 그러나 민정이 영후의 아이를 임신한 것을 알고는 형을 찾아가 웃음소리 나는 장난감을 돌려주며 자신은 이제 명랑해졌으니 이 물건이 필요 없게 되었다고 말한다. 상영 당시 스크린 밖에서는 긴급조치가 발효되고 있고, 국가는 젊은이의 절망이 적을 이롭게 할 수 있다며 명랑하고 건전한 영화만을 권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형에게 애인을 빼앗긴 동생의 입을 통해 ‘명랑’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것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이는 < 바보들의 행진 > (하길종 , 1975)에서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가슴에는 하나 가득 슬픔 뿐”이어서 여자를 쫓아다니고 무의미한 스트리킹을 하며 시시덕거리는 청년들의 명랑과 상통한다. 결코 밝고 환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웃음마저 부정한다면 견뎌낼 도리가 없기에 쾌활을 가장이라도 해야 한다는 것, 영후는 원체 그것을 알고 있었고, 영욱은 믿었던 형과 애인의 배신을 통해 그것을 배우게 된다. 그런데 영욱은 민정이 형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 앞에서 민정을 포기하는데 반해 영후는 민정의 임신을 동생의 일로 미룬다. 여기에서 영후가 민정과의 관계를 부정하는 명분은 ‘우애’이다. 영욱과 함께 있는 민정에게 “네 까짓 × 죽는 건 괜찮아. 영욱이 살려 올라오란 말이야.”라고 소리치는 것은 영후의 선택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그는 여자에 대한 사랑 대신 동생과의 우애를 선택하여 아버지의 질서에 편승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엄연한 생물학적 아비로서의 책임조차 회피한 채 모든 책임을 적자인 동생에게 전가하고 스스로 가부장이 되기를 포기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는 뿌리 깊은 패배의식에서 비롯된 왜곡된 순응이자 부도덕한 아버지의 질서에 대한 수락이다. 여기에서 유신체제기에 살아남아야 했던 청년의 심리가 포착된다. 이 영화가 숨 쉬고 있었던 유신체제기는 유일한 가부장의 권력만이 고수되던 시대이기에 청년 세대에게 권력이 허용되지 않았던 시대이기도 하다. 이 시대의 현실 질서는 자율적 주체를 달가워하지 않았고 남성 주체의 성장 또한 막아섰다. 그래서 그들은 미완의 자아 상태에서 자살하거나, 현실 질서에 수용되지 못하고 죽임을 당하거나, 책임을 회피하고 현실질서와 타협하며 퇴행적 기성인으로 살아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여성을 타자화한 이기적인 주체로 비난받아왔으나 정작 그들 또한 (주어가 될 수 없었던) 시대의 타자들이었던 셈이다. 8) 영욱과 영후의 선택 아닌 선택은 그것을 보여준다. 영욱은 형의 궤변과 왜곡된 현실을 감당하지 못하고 결국 민정과 함께 자살함으로써 미성숙 상태로 남게 된다. 그들의 죽음을 조롱으로 애도하듯 영욱과 민정의 피투성이 시체 위로 영후가 준 장난감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리고 남겨진 영후는 홀로 터널을 달린다. 터널 밖으로 밝은 세상이 보이며 영후가 그쪽으로 뛰어가고 있는데, 경쾌한 음악까지 배경에 깔려 일견 희망찬 결말처럼 보인다. 그런데 영후는 계속 뒤를 돌아보고 코치( 박암 )의 목소리로 “돌아보지 마라!”는 외침이 반복되며 영화는 끝난다. 이러한 결말에 대해 나중에 이장호 감독은 “슬픔 다음에 금방 감정 변화를 해서 냉정하고 멋들어진 걸 연출”하려는 데서 비롯된 ‘쿨’한 엔딩이었다고 말한다. 9) 그러나 이 엔딩은 지금 봐선 냉정하고 세련되었다기보다 오히려 더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도저히 ‘쿨’해질 수 없는 상황에서 계속 뛰어간다는 것이 어쩌면 궁극적 좌절을 거부하는 몸부림으로 보이기도 하고, 뒤돌아보지 않아야 한다는 명령 속에서 계속 뒤돌아보는 영후의 모습이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모를 안쓰러움을 유발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어제 내린 비>는 명랑해지기 힘든 시대에 명랑을 강요받는 젊은이의 분열과 왜곡을 보여주고 있다. 씩씩함을 가장하지만 정작 할 수 있는 일은 없고, 뛸 수는 있으나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는 없으며, 욕망하면서도 책임은 질 수 없는 데서 비롯되는 절망과 비애를 웃음으로 위장할 수밖에 없는 정신적 상황이 드러나는 것이다. 또한 주인공들을 죽음 또는 극복할 길 없는 외상으로 이끄는 영화 속의 ‘가장된 명랑’은 국가가 강조했던 ‘명랑’과 겹쳐지면서 부조리한 강요 속에 무책임을 무한 긍정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 정신의 병리를 드러내기도 한다. 유신체제로의 드라이브가 시작되는 1968년, 검열 당국이 < 휴일 >( 이만희 )을 두고 주인공이 머리 깎고 군대에 가면 개봉을 허가하겠다고 한 데서 드러나듯이, 당시 정권의 영화 통제에서 내세우는 ‘건전’이나 ‘명랑’과 같은 기준은 그 적용 범위가 탄력적이고 자의적인 것이되 기본적인 원칙은 이분법에 의거해 재단(裁斷)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웃음 이면의 반어적 슬픔, ‘불륜 멜로’가 내장하고 있는 현실질서와의 부조화와 같이 양가적이고 부조리한 측면들은 검열에서 포착되기 어려웠다. 강고한 검열 아래에서도 동시대의 이야기를 하고자 했던 새로운 영화들이 명랑과 웃음을 내세우는 가운데 반어적 방식을 취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어제 내린 비>는 <바보들의 행진>과 더불어 그러한 표현 방식을 취한 대표적인 영화로 긴급조치기의 아이러니한 걸작이다. 아울러 파격적 불륜을 내세우고 명랑의 외피를 두르지 않고서 동시대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방식을 달리 상상하기 어려웠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유신체제기의 정신 상황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는 리얼리즘 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 10) 1) 김홍준은 <별들의 고향>에 대한 당시 소개 글을 인용하며 이 표현을 사용했다.-김홍준 대담, 「별들의 고향_1974」, 『이장호 감독의 마스터클래스』, 도서출판 작가, 2013, 72면. 2) 1958년부터 1977년까지 청계천 복개공사가 진행되어 광교에서부터 마장동에 이르는 총 길이 5.6㎞에 이르는 고가도로가 건설되었다. 이는 개발독재기 도시 근대화의 상징적인 사건이다. 3) 당시 영화평론가 이영일은 “특히 <별들의 고향>, <어제 내린 비>, <영자의 전성시대>, <바보들의 행진> 등 신인들이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 활력소 구실을 하고 있다.”고 평가하는데 이 영화들이 본고에서 말하고 있는 1970년대 중반의 대표작에 해당한다.-이영일, 「영화 연륜 따르지 못한 질적 향상」, 『동아일보』, 1975.8.18.,5면. 4)「참패 거듭 방화 흥행」, 『경향신문』, 1975.10.1.,6면. 5)「국산영화 <어제 내린 비> 대본 개작 통보 지적사항」, 문서번호: 영화 1733-8124, 문화공보부, 1974.7.3. 6)「국산극영화 <어제 내린 비> 대본 개작 통보 별첨」, 문서번호: 영화 1733-1434, 문화공보부, 1974.11.14. 7)「대목 노린 설빔 영화」, 『동아일보』, 1974.12.28.,5면. 8) 박유희, 「‘그녀’라는 거울 속 타자들: <겨울여자>의 남성인물 고(考)」, 『영화와 남성: 영화로 보는 한국사회와 남성』, 한국영상자료원, 2017, 123면. 9) 김홍준 대담, 앞의 책, 110면. 10) 박유희, 「박정희 정권기 영화 검열과 감성 재현의 역학」, 『역사비평』 99호, 역사문제연구소, 2012.5, 71-73면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