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시에 만납시다
- 제작년도
- 1982
- 출연
- 이계진, 오미희, 김동건
정광석은 1962년 데뷔해 2006년까지 170편의 한국영화를 촬영한 베테랑 촬영감독으로 <쇠사슬을 끊어라>(이만희, 1971), <땡볕>(하명중, 1984), <깊고 푸른 밤>(배창호, 1985),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박종원, 1992),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이명세, 1999) 등 다양한 작품에서 활약했다. 특히 그는 1980년대 주목받던 신진 감독들의 데뷔작에 단골 촬영감독으로 이름을 올렸는데, 당시 그는 신인감독이 야기할 수 있는 위험부담을 줄이고자 하는 제작자들의 신뢰를 얻을 만큼 빠르고 노련한 촬영으로 정평이 나있었다. 정광석 촬영감독은 1950년대 중반 <장화홍련전>(정창화, 1956)의 조명부로 영화계에 입문했다. <장화홍련전>에는 조명감독인 함완섭의 조수로 참여했는데 이때 임권택 감독은 이 작품의 제작부 막내 스태프로 소품을 맡고 있었다. (사진1) 1956년 4월 15일 <장화홍련전>의 촬영장 사진을 보면 가운데 한복을 입고 여장을 한 인물이 임권택 감독이다. 테스트 촬영을 위해 장난처럼 여장을 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 오른쪽이 서병수 조명감독, 왼쪽이 정광석 촬영감독이다. 후에 임권택 감독과는 <왕과 상노>(1965)에서 감독과 촬영자로 다시 만났지만 촬영감독으로서의 자의식과 자존심은 임권택 감독에게 뷰파인더를 허락하지 않았고 결국 둘은 작품에 대한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중간에 결별한 뒤 단 한 작품도 함께 하지 않았다. 정광석은 일본 유학파 출신 김영순 촬영감독의 권유로 촬영부 조수로 옮겨간다. (사진2) 1959년 <부부>(곽건, 1960)의 촬영 현장이다. 카메라를 잡은 이가 김영순 촬영감독이고 왼쪽에서 장갑을 끼고 렌즈의 포커스링을 만지는 이가 당시 촬영 제1조수 정광석이다. 삼각대 옆에는 여성 스크립터가 앉아서 기록을 위해 초시계를 잡고 있다. 당시 제1조수는 노출과 포커스를 책임졌고 흑백필름용 현상통을 가지고 다니며 촬영현장에서 테스트현상을 해야 했다. 2조수는 트래킹 쇼트 촬영에서 이동차 밀기, 제3조수는 촬영기자재 운반을 맡았다. 그나마 카메라 같은 고가장비는 제2조수가 운반했다고 한다. 이후 <비련의 섬>(정창화, 1958), <햇빛 쏟아지는 벌판>(정창화, 1960) 등의 작품에서 김영순, 이성휘를 비롯한 여러 촬영감독의 조수로 14편의 작품에 참여했다. 그리고 1962년 정광석은 이봉래 감독의 권유로 <새댁>을 통해 촬영감독으로 데뷔한다. <새댁>은 김영수 작가의 KBS 인기 라디오 연속극을 영화화한 것이다. 당시 신문에는 <새댁>의 원작료를 30만원으로 밝히고 있는데, 정광석은 이때 촬영감독을 포함한 촬영부 전원의 인건비로 8만원을, 즉 천자 분량의 필름 세통 값과 비슷한 비용을 받았다고 기억하고 있다. 경향신문 1963년 12월 14일자 기사를 보면 당시 영화제작비 평균 중 총 촬영료는 20~30만원으로 여기에는 촬영기자재비용 12만원이 포함되어 있다 하니 그의 기억과 대체로 일치하는 금액이다. 이 조차도 주로 어음으로 받아 몇 달을 수입없이 기다리거나 급할 때는 많은 수수료를 떼고서라도 현금화시켜야 했기에 당시 많은 스태프들은 늘 빚을 지고 사는 형편이었다. (사진3) <새댁>(이봉래, 1962)은 흑백 시네마스코프 작품으로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아리플렉스 카메라에, 공보부에서 비공식으로 빌린 250미리 줌렌즈를 장착해서 촬영했다. 당시 초점길이가 긴 줌렌즈는 신필름과 정부 홍보영화를 제작했던 공보부 국립영화제작소 밖에 없었기에 충무로 촬영감독들은 공보부에서 몰래 빌려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촬영 데뷔작인 <새댁>은 “물에 올라온 고기처럼 화면마다 생동이 퍼덕거리지만 시종 재미있다.”는 경향신문의 영화평처럼 3대의 대가족이 벌이는 에피소드들을 생동감 있게 묘사했다. <새댁>은 종로의 세운상가 3~5층에 위치했던 아세아극장의 개관작으로 1962년 12월 23일 개봉했다. 1965년에 그는 <성난 독수리>(김기, 1965)를 촬영한다. 이호영 공군 대령의 수기를 영화화한 작품으로 <빨간 마후라>(신상옥, 1964)가 대성공을 거둔 후에 만들어진 공군 전투영화이다. <빨간 마후라>는 비행장면 촬영을 위해 카메라를 전투기 동체에 부착시켜 촬영했으나 제작비와 지원규모가 그에 못 미쳤던 <성난 독수리>는 정광석 촬영감독이 전투기 뒷좌석에 탑승해 비행장면을 모두 촬영했다. (사진4) <성난 독수리>(김기, 1965) 포스터 (사진5) <성난 독수리>(김기, 1965)는 원작자인 이호영 대령의 도움을 받아 대구 비행장에서 촬영되었는데, 실제 한국전쟁 때 사용한 전투기 T33이 이용되었다.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정광석 촬영감독은 전투복에 헬멧을 착용한 뒤 아리플렉스 ⅡC카메라에 필름이 담긴 200자 매거진 세 개를 여분으로 가지고 T33 뒷좌석에 탑승해, 핸드 헬드로만 항공촬영 전 분량을 촬영했다. 이 촬영으로 정광석 촬영감독은 25시간이 넘는 비행기록을 갖게 된다. 촬영감독은 촬영에 들어가기에 앞서 감독과 함께 화면의 비율을 결정해야 한다. 1968년에 개봉한 <황혼의 부르스>(장일호)는 정광석 촬영감독의 주장으로 스탠다드 화면으로 촬영된 작품이다. <황혼의 부르스>는 일본을 배경으로 몰락한 일본귀족과 북한 간첩, 남한의 비밀요원이 자신의 정체를 알지 못하는 여인을 둘러싸고 벌이는 첩보 액션영화이다. 1960년대 영화계는 TV와의 경쟁을 와이드 스크린으로 극복하고자 가로의 비율이 넓은 시네마스코프 화면이 지배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스탠다드 사이즈로 이 영화를 촬영하기로 결정했다. 이유는 화려한 컬러의 색감을 보여주고 다양한 렌즈를 이용한 역동적인 화면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당시 시네마스코프 화면은 아나모픽 렌즈를 마스터 렌즈에 덧대어 구현했는데, 1960년대 후반 노후된 아나모픽 렌즈는 화면의 색감이나 선명도를 보장할 수 없었고 아나모픽 렌즈의 왜곡 때문에 사용 가능한 마스터렌즈의 구경이 제한적이었다. 게다가 파독광부 출신으로 독일에서 아리플렉스ⅡC 카메라를 구입해 온 신영필름 김태우 사장이 마침 정광석 촬영감독의 조수로 들어왔던 시기라 최신 카메라로 선명하고 깨끗한 화면을 만들어보고자 하는 의도 또한 더 해졌을 것이다. (사진6) 의사로 위장한 가네야마(오지명)기 여자주인공 시즈코(윤정희)를 도와 몰락한 일본 귀족인 가다키리 남작(박암)의 저택에서 도망치려는 장면이다. 망원렌즈로 인물들을 촬영해 전경의 배경을 흐리는 방식으로 인물에 집중하게 하는 것은 물론 윤정희의 심리적인 불안을 느낄 수 있도록 표현했다. (사진7) 이 영화에서 박암은 몰락한 일본 귀족임을 보여주기 위해 영화 내내 제대로 여미지 않은 유카타를 입고 있다. (사진8) 호텔 객실에서 윤정희는 원하지 않는 청혼을, 원치 않는 방식으로 받고 있다. 윤정희는 이유를 모른 채 남자들에게 결혼을 강요당하고 살인사건에 연류 되고 협박받는다. 이 모든 것은 그녀의 부친이 막대한 재산을 딸의 남편에게 주기로 했기 때문인데, 물론 그녀는 아버지의 존재도 모르고 있다. 오로지 ‘황혼의 블루스’라는 노래가 들리면 좋지 않은 일이 생길뿐이다. 컬러영화가 보편화되기 시작한 60년대 후반의 컬러 작품에는 화려한 색감을 보여주기 위해서인지, 언제나 세 가지 색으로 구성된 꽃꽂이가 탁자 위에 놓여있다. 이 작품에도 회사, 병원 등의 책상과 탁자 위에는 어김없이 삼색 꽃꽂이가 놓여있다. (사진9) 말끔한 양복에 뿔테 안경을 쓴 신사 오지명은 안경을 벗는 순간 북한간첩이 되어 윤정희 가족을 북송선에 태우려 한다. 심지어 오지명의 날카로운 두 눈을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보여줘 긴장감을 갖게 했다. (사진10, 11, 12, 13) 이 작품은 액션영화이다. 오지명의 정체가 드러나자 북한간첩단과 몰락한 일본 귀족의 하수인들이 총격을 벌이고 남한에서 온 공작원 장동휘와 오지명의 화려한 결투장면이 등장한다. 한 간첩단이 윤정희를 찾으러 온 귀족의 하수인들에게 총질을 해대는 장면은 피격당하는 인물들의 화려한 리액션이 다소 단순한 동선을 무마해준다. 심지어 오른쪽 인물은 총에 맞아 엎어져 있다가 다시 총을 맞고는 일어나 휘청거리는 연기를 보여준다. 발포할 때마다 총구에서 나오는 하얀 연기는 90년대 <투캅스>(강우석, 1993)까지 등장한다. 장동휘와 오지명의 화려한 액션장면 중 장동휘의 공격에 오지명이 360도 회전하며 쓰러지는 장면은 설정 상 어두운 실내에서 촬영되어 아쉬움을 남긴다. 1968년부터 정광석은 매년 10편 내외의 작품을 촬영했다. 현재로써는 상상하기 힘든 작품수인데 그는 두 가지의 이유에서 다작 촬영이 가능했다고 말한다. 첫째는 배우들의 겹치기 출연 따라가기. 신성일, 김지미, 남정임 등 당시 인기 있는 주연들의 작품을 촬영하면 두, 세 작품을 동시에 가케모치 즉 겹치기 촬영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제작자 또한 그런 겹치기 일정을 고려해서 주요 스태프를 고용했다고 한다. 두 번째 이유는 후시녹음으로 진행했기에 촬영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 후시 녹음이 미완의 영화를 어떻게 완성시켰는지에 대해서는 성우 고은정, 오승환의 구술을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정광석 촬영감독은 1970년대에도 이러한 다작의 흐름을 이어갔다. 1971년에 개봉한 <쇠사슬을 끊어라>(이만희, 1971)는 만주를 배경으로 한 액션영화이다. 물론 영화는 전편 다 국내에서 촬영되었다. (사진14) 이 영화의 주인공들인 애국지사와 갱 그리고 밀정이 처음 만나는 황량한 만주의 술집은 워커힐 호텔이 보이는 한강 상류의 모래밭 위에 세운 오픈세트이다. (사진15) 주인공들이 스키를 타고 일본군을 유인하는 만주의 눈밭은 강원도 횡계에서 촬영했다. 아찔하게 따라오는 일본군 스키부대원들을 찍기 위해 사각으로 기울기를 조정해서 촬영했다. (사진16) 위 장면을 찍기 위해 바닥에 바짝 붙인 카메라를 틀어 앙각으로 촬영하고 있다. 바닥에 누워 카메라를 잡고 있는 이가 정광석 촬영감독이고 그 바로 뒤에서 사진 밖 피사체를 응시하고 있는 이가 이만희 감독이다. 이만희 감독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영화인들이 기억하는 것처럼 정광석 촬영감독 또한 영화에 대한 감각이 아주 뛰어났다고 평가한다. “앞뒤가 이러니까 이런 사이즈로 간다. 이게 아니라 한번 쭉 시켜본 다음에 그냥 나눠서 가니까.” (사진17) 장동휘가 촬영 중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사고로 구르게 되자 이만희 감독은 즉흥적으로 커트를 나눠 촬영해 사고로 NG가 난 장면을 살렸다고 한다. 콘티나 모니터 없이 즉석에서 머릿속으로 편집이 가능한 감독이었던 것이다. 이만희 감독의 영화라면 기세가 등등한 배우들도 어려운 액션장면을 군말 없이 직접 연기했다. 물론 배우들도 인물을 줌렌즈로 당겨 찍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배우 황해가 한 겨울에 한강에서 옷을 벗어 던지고 장동휘가 오토바이에서 넘어지는 정도의 위험은 그리 과한 편이 아니었던 것 같다. 과거 그가 촬영조수로 참여한 <햇빛 쏟아지는 벌판>에서는 정창화 감독이 총격장면에서 실탄을 사용했고 이만희 감독 또한 대단한 사격실력으로 때로 배우 근처까지 직접 총을 쏘며 촬영을 진행 했다는 무용담 같은 증언을 종종 들을 수 있다. 리얼한 장면에 대한 욕심과 부족한 안전장치로 인해 배우와 스태프들이 위험을 감수해야 했던 아찔한 시기였다. 그가 촬영한 전쟁영화인 <전우가 남긴 한마디>(이원세, 1979)에서도 군용보트를 타고 도강하는 장면에서 강 밑에 묻어놓은 TNT폭탄 위로 배우 장혁이 탄 보트가 지나가며 폭파하는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다. 다행이 아무도 다치지 않아 며칠 쉬다 촬영을 재개했다고 한다. 정광석은 1960,70년대를 거치며 전광석화처럼 빠른 시간에 탁월하게 촬영을 끝낼 수 있는 노련한 촬영감독으로 자리 잡는다. 그러다보니 1980, 90년대 신인감독들의 데뷔작에서 그의 이름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곽지균 감독의 데뷔작 <겨울나그네>(1986), 박종원 감독의 <구로아리랑>(1989), 이현승 감독의 <그대안의 블루>(1992), 김성수 감독의 <런 어웨이>(1995), 김지운 감독의 <조용한 가족>(1998)등 이 시기 주목할 만한 감독들의 데뷔작에는 늘 그의 이름이 있었다. 특히 1980년대 코리안 뉴웨이브의 선두주자였던 배창호 감독과의 콤비로 유명한데 배창호 감독과는 <꼬방동네 사람들>(1982)부터 시작해 모두 8편의 작품에서 함께했다. <꼬방동네 사람들>은 판자촌의 모습을 리얼하게 담아 호평을 받았는데, 그는 성공적인 헌팅이 빛을 발한 작품으로 평가한다. 꼬방동네는 고척동 그러니까 당시 영등포에서 시흥으로 가는 길의 좌측 둑 너머 외딴 고지대에 있던 판자촌이다. 벌판 쪽에 우뚝 솟은 철탑, 저수지 같은 분위기를 내는 뚝방 등 그 동네 전부가 이 작품에 적절하게 맞아 떨어져 세트 없이 영화 전편을 그 곳에서 촬영했다. 스태프들은 인근 여관에 숙소를 잡고 2개월간 머물며, 동네 주먹들의 방해가 있으면 술값을 줘가며 밤낮으로 촬영했다. (사진18) 주석(안성기)이 검은 장갑(김보연)을 따라가며 꼬방동네의 좁은 골목길을 유려하게 훑는 장면은 스테디캠 처럼 느껴지지만 정광석 촬영감독이 광각렌즈를 사용해 핸드헬드로 촬영한 장면이다. (사진19, 20) 꼬방동네에서 열린 환갑잔치에서 공옥진 여사가 춤을 추는 장면이다. 이 장면 또한 사진처럼 정광석 촬영감독이 핸드헬드로 촬영했음에도 유려하고 안정적이다. 사진20번에 카메라를 든 이가 정광석이고 사진의 왼쪽 끝 안경을 쓴 이가 배창호 감독이다. 정광석 촬영감독이 배창호 감독과 한 작품 중에서 가장 애착을 느끼는 작품은 <적도의 꽃>(배창호, 1983)이다. 아파트에 혼자 살며 이웃들을 망원렌즈로 훔쳐보는 미스터M(안성기)은 맞은편 아파트에 이사 온 오선영(장미희)에게 반해 그녀를 스토킹 한다. 미스터M이 아파트를 훔쳐보는 도입부는 히치콕의 <이창>(1954)처럼 촬영되었다. (사진21,22,23,24) 미스터M(안성기)의 시점쇼트로 표현하기 위해 팬으로 앞 동 아파트 두어 가구를 훔쳐 보다 아래에 이사 오는 오선영(장미희)에게 시선이 닿는 흐름으로 이어지는데, 현장에서는 이 모두를 한 컷으로 촬영했다고 한다. 세트에서 촬영된 <이창>과 달리 <적도의 꽃>은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에서 여러 가구의 협조를 구하며 어렵게 촬영이 이루어졌다. 미스터M은 타락한 오선영을 구원하고자 그녀를 강으로 끌고 가 물에 빠트린다. 비정한 내용만큼이나 촬영 환경 역시 좋지 않았다. 구파발 근교의 일영에서 촬영이 이뤄졌는데 장마철에 물이 불어 있는 강에서 빗줄기가 잘 보이도록 역광으로 조명을 쳐야했다. 결국 조명 설치를 위해 10키로 조명기를 매고 강을 건너던 조명조수가 물에 휩쓸려 죽는 사고가 발생했다. 희생 속에서 만들어진 장면이자 작품이었다. <고래사냥>(배창호, 1984)은 2,3개월의 준비기간을 거쳐 1983년 11월에 촬영이 시작되었다. 삼영필름 명의로 제작자 황기성이 대명 제작한 작품이다. 병태 역할에 적합한 배우가 없어 고민하고 있을 때, 안성기가 김수철을 단성사 2층 다방으로 불렀다. 황기성 대표, 최인호 작가, 배창호 감독, 정광석 촬영감독 모두 그 자리에서 김수철을 병태로 캐스팅했다. 로드무비인 이 작품은 서울역 앞 사창가에서 시작해 과거의 창경원을 거쳐 대관령 너머 임계, 강릉 변두리 시장 등지에서 촬영되었다. 영하 20도 날씨에 염소차에서 내려 걷는 곳이 임계 읍내였고 춘자(이미숙)가 어머니에게 줄 안경을 훔치고 민우(안성기)가 이를 구출하는 곳은 강릉 변두리 시장이었다. (사진25,26) <고래사냥>의 강릉 변두리 시장 장면은 엑스트라 하나 없이 시장 사람들 그대로 촬영했다. 사진25의 오른쪽 하단 동그라미 친 부분에 안성기와 이미숙이 있다. (사진27,28) 춘자(이미숙)가 안경을 훔쳐 소동이 벌어지는 장면도 시장에서 엑스트라 없이 자연스럽게 촬영되었다. 주인공들이 포주일당에게 쫓겨 석탄차에 기어 올라가 기차를 타고 도망가는 장면은 카메라 한 대로 촬영이 이뤄졌다. 석탄차를 대여하지 못했기 때문에, 여유를 두고 여러 커트로 나눠서 촬영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사진29) <고래사냥>에서 석탄차를 타고 도주하는 시퀀스는 한 대의 카메라로 줌렌즈를 이용해 원경에서 접사까지 한 커트로 촬영을 끝내고 편집과정에서 여러 커트로 나눠서 사용했다. 물론 석탄차 위에서 안성기가 “잘 있거라 나는 간다.”포주들을 놀리는 장면도 접사에서 원경까지 한 커트로 촬영해 나눠서 사용했다. 과거 충무로 촬영감독이 갖춰야할 덕목 중 하나는 제작자의 입장에 서서 효율 좋게 촬영해 예산을 줄여주는 것이었다. 정광석 촬영감독은 자신의 작품 중 가장 의미 있는 장면으로 꼽는 것이 <땡볕>(하명중, 1984)의 한 컷이다. 시카고국제영화제에서 촬영상을 수상한 <땡볕>(하명중, 1984)은 일제강점기의 민족수난사를 다루고 있다. 무기력한 남성과 수탈당하는 여성의 신체가 수난의 알레고리로 영화 전편을 메우는데, 주인공 춘호가 죽어가는 순이를 지게에 지고 물길을 거슬러 가는 장면은 인물들이 아름다운 풍경 속에 배치되어 잔인한 운명에 얼마나 무력한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장면은 임계의 산중턱에서 오후 4시쯤 촬영을 끝내고 철수 하는 중에 정광석 촬영감독이 우연히 바라본 풍경에 영감을 받아, 하명중 감독에게 제안하여 만들어 낸 장면이었다. 이 작품으로 국내에서는 23회 대종상 촬영상을 수상했다. 다음해도 연이어 대종상 촬영상을 수상하는데 그 작품이 바로 배창호 감독의 <깊고 푸른 밤>이다. 미서부에서 단시일 안에 올로케로 촬영했고 흥행에서도 성공한 작품이다. 모든 화면이 감각적이고 할리우드 작품 같다는 평을 받았는데 배창호 감독 또한 미국 수준의 기술력만 받쳐준다면 할리우드 만큼의 영화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 작품이라 말했을 정도로 촬영기술과 감각을 강조한 작품이다. 그렇다고 대단한 제작비와 물량을 들이지는 않았다. 열다섯 명의 인원이 필름 4만 5천자로 라스베가스, 그랜드캐년, 데스밸리, 자브리스키 포인트, 산타모니카, 말리부에서 로케하며 40일 만에 촬영과 현상을 모두 끝내고 귀국한 작품이었다. 한때 배창호 감독의 전매특허였던 현기증 나는 360도 트래킹 쇼트도 할리우드에서 완성된다. (사진30) 호빈(안성기)과 제인(장미희)의 말리부 해변 키스씬을 360도 트래킹 쇼트로 촬영하기 위해 준비하는 현장이다. “그때만 해도 원형이동차 하나 제대로 된 게 없었어요. 제일기공사라고 청계천에서 반원형 그니까 160도, 180도 돌아가는 이동차를 쓰는 경우가 있었고. 360도가 꼭 필요하다고 감독이 생각하고 찍으려하면 다 핸드헬드로 찍는 수밖에 없었다고. 정밀하게 원형이동차로 돌아가는 차가 없었어요. 근데 막상 미국 가서 기재를 다 렌트해서 썼거든. 카메라를 BL2를 썼고 거기서 원형이동차 360도 돌아가는 걸 갖다 찍을 때 아주 정밀하게 제작이 돼 있더라고. <깊고 푸른 밤> 보면은 서울에 와이프한테 영주권을 땄다고 전화하는 장면을 원형으로 이동을 갖다가 360도 두 번은 돌아갔을 거야. 마구 빙빙빙. 업 되는 감정으로 전화하는 상태거든, 안성기가. 그거를 원형으로 돌아주니까, 찍는 나부터도 감정이 올라가더라고. 그리고 말리부 해변가에서 둘이 키스하는 장면을 원형으로 360도 원형으로 쓴 게, 저렇게 원형이 되는 구나하는 걸 처음 느꼈을 거야, 아마.” 1990년 작품인 <꿈>은 유난히 눈이 많이 내린 겨울에 촬영이 이뤄졌다. 낙산사 대웅전 촬영을 위해 강릉에서 양양으로 가는 길에 폭설에 갇혀 눈으로 허기를 채우며 20시간이나 걸려 촬영장소로 갔다. 폭설예보가 있었지만 스케쥴 미룰 경우 추가 경비가 발생하기 때문에 촬영을 강행할 수밖에 없었다. 아름다운 장면을 만들기 위해 인내와 순발력이 필요했다. 강릉과 낙산사 사이 삼팔선 경계가 있는 곳에 마치 해금강을 떠올릴 것 같은 해변에 조신의 판자집을 오픈세트로 만들었다. 2, 3일 동안 눈이 오기를 기다린 뒤 동트기 직전 약 한 시간 십분 사이에 여덟 컷을 찍어야 했다. (사진31) 조신(안성기)을 찾아온 모례아손(정보석)에게 조신이 용서를 비는 장면으로 동 트기 직전, 순발력있게 촬영한 장면이다. 정광석 촬영감독이 처음으로 전 편을 동시녹음으로 촬영한 작품은 <베를린 리포트>(박광수, 1991)이다. 신철이 기획을 했고 오정완이 제작부로 파리 촬영에 동참했다. 사실 촬영진이 모두 파리에 도착한 뒤에도 시나리오는 완성되지 않아 파리 현지에서 스태프들은 열흘 넘게 박광수 감독이 시나리오를 탈고하도록 초조하게 기다렸다. 촬영현장에 미리 가 시나리오를 토대로 최적의 동선을 파악하는게 몸에 배어있는 정광석 촬영감독과는 작업방식이 잘 맞지 않았다. 스테디캠 장면은 독일 현지의 스테디캠 오퍼레이터를 고용해 촬영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박종원, 1992)은 <구로 아리랑>(1989) 이후 박종원 감독과의 두 번째 작품이다. 대동흥업의 도동환 대표가 제작했고 대부분 강원도 정선에서 촬영이 진행되었다. 영화의 절반을 정선의 국민학교에서 찍었는데 오픈세트로 진행된 엄석대(홍경인)의 아지트는 미술팀을 정선으로 데려오는 비용을 절감하고자 스태프들이 공간을 채워 만들었다. 기차가 달려오는 교각의 철로에서 오래 버티기 내기를 하는 인물들을 촬영하는 장면은 아찔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기차가 달려오는 모습을 박진감 있게 잡기 위해서는 광각렌즈로 촬영해야만 했다. 누워있는 인물들의 시선에서 찍기 위해 교각으로 들어가 달려오는 기차를 핸드헬드로 촬영하는데 광각렌즈 특성상 피사체와의 거리감이 길어 보이니 기차가 바로 앞으로 올 때까지 버티며 촬영해야 했다. 그래서 달리는 기차에 옷깃을 스치는 긴박한 상황도 겪었다. (사진32,33,34) 달려오는 기차 앞에서 오래 버티는 내기를 하고 있는 엄석대(홍경인). 사진32와 33이 광각렌즈로 촬영한 커트이다. 1973년 정창화 감독의 <흑야괴객>촬영 현장에서 자동차 추격 장면을 가까이에서 촬영하다 질주하는 자동차에 부딪힌 삼각대에 머리를 맞고 결국 현장에서 숨을 거두고 만 최호진 촬영감독을 떠올릴 만하다. 1993년에 촬영한 <투캅스>(강우석, 1993)는 1990년대 코메디 영화의 부흥을 알린 신호탄이 된 작품이다. 제작은 이화예술필름이 시작해 어음으로 계약금을 받았으나 중간에 이화예술의 임상돈 사장이 제작을 포기한다. 그러다보니 제작경험이 있고 지방장사들과 안면이 있던 강우석 감독이 직접 제작을 진두지휘 하게 된다. 강우석 감독이 발행한 새로운 어음으로 계약을 진행하며 제작이 시작되었다. 이 작품의 촬영에 있어서 인상적인 장면은 악당과 투캅스가 싸우는 영화의 마지막 총격전이다. 몹씬이라 많은 엑스트라와 자동차, 경찰까지 동원되었고 TNT를 묻고 총기를 테스트 하는 등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장면이었다. 강우석 감독이 워낙 일을 빨리 하다 보니 하루에 120커트를 촬영하는 불가능한 일정으로 계획은 세웠으나 다음날로 촬영은 이어졌고 마침 폐공장인 촬영장소에 눈이 쌓이게 된다. 개봉날짜가 잡혀있고 촬영을 미루면 비용이 발생하고 어쩔 수 없이 모든 스태프가 눈을 쓸고 흙으로 묻어 촬영을 재개시켜 이틀간 총격씬 120커트의 촬영을 마쳤다. “왜 군에서는 무엇이든지 안 되는 게 없다고 하더니 영화인들도 마찬가지라고. 안 되는 게 없어들.” (사진35,36) 강형사(박중훈)와 조형사(안성기)가 악당들과 총격전을 벌이고 있는 장면 중 일부로 눈이 쌓인 현장을 스태프들이 모두 치우고 촬영한 장면이다. 눈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촬영감독 정광석은 1962년 데뷔해 열악한 기자재와 제작환경 속에서도 저비용으로 순발력 있게 다양한 장르의 영화 한편을 촬영해내는 능력을 길렀다. 1980, 90년대에는 새롭게 대두하는 젊은 감독들이 믿고 작품을 맡길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2000년대에는 당시 한국영화계에서 생소했던 DP시스템을 시도한 원로 촬영감독으로 이름을 남겼다. 그의 촬영담은 시대의 변화를 담아내며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작업의 연속이었다. 그가 촬영한 무수히 많은 작품들이 그 증거가 될 것이다. (사진37) 정광석 촬영감독이 아리플렉스 필름카메라를 잡고 있다.
사태가 대단히 복잡하지 않은가. 상징적인 것은 직접적인 것이고, 현전은 부재이며, 지연되지 않은 것이 지연되며, 희열은 죽음의 위협이다. 더구나 이런 체계, 대리보충의 이 이상한 경제에 추가되어야 할 특징이 하나 더 있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이미 판독할 수 있었다. 무시무시한 위협인 대리보충은 또한 최초의 가장 확실한 보호라는 점이다. 그 위협 자체에 대해서 말이다. 이 때문에 대리보충을 포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 이 말은 내가 아니라 데리다가 「그라마톨로지」의 제2부 두 번째 장 ‘이 위험한 대리보충...’에서 루소의 「참회록」을 설명하며 꺼내 든 것이다. 너무 유명한 문장이라 모두들 이미 잘 알고 있을지 모른다. 나는 구태여 대리보충(la supplement)에 대해서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지 않겠다. 다만 아주 제한적으로 이상하게도 우리를 막아서면서 환원 불가능하게 버티어선 그 흔적을 설명해보고 싶다. 왜냐하면 그 자리는 결정을 가로 막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인가, 저것인가. 결정의 망설임. 그 흔적이 무언가 더해진 잉여의 덧셈에 따라 보충된 것인지(le supplement) 아니면 다른 무언가와 바꿔치기 당한 다음 대리하는 것인지(la suppleance) 그저 하염없이 멈춰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장소. 물론 루소를 경유하여 데리다가 말하려는 것은 예술과 자연 사이의 대차대조표이다. 나는 거기서 물러나서 단지 이 텍스트 안에서 활동하는 저 텍스트가 왜 항상 환대받지 못하는지를 물어보고 싶다. 왜 스스로 충만하지 못한 채 그 틈새 사이에서 출몰하는 저것은 여기서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저 안의 외침. 바깥이라는 안. 안에 있는 바깥. 무엇이 부족함을 대신하고 그런 다음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일까. 「그라마톨로지」 사태를 좀 단순하게 만들고 싶다. 임권택 의 영화들, 그중에서도 불편한 영화들을 볼 때마다 영화를 구성하고 있는 참조 틀의 어딘가가 부서져 나갔다는 인상을 받는다. 내가 지금 하려는 이야기는 단지 1967년 그 어딘가에서 1977년 어디까지에 한정 지어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 욕망의 결산 >(1963), 혹은 < 달빛 길어 올리기 >(2009), < 신궁 >(1979), 그리고 < 아다다 >(1989). 단지 그 부서져 나간 표면의 범위를 따분하게도 바깥과의 대화라는 식으로 설명하는 것은 충분한 알리바이가 아니다. 여기에는 어떤 과정이 있을 것이다. 각자의 영화는 영화사에 대한 각자의 은유라고 고다르가 말했다. 그걸 단지 어디선가에서 빌려온 영향이라고만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반대로 처음부터 거기 있었기 때문에 안에서 생산되었을 뿐만 아니라 바깥에서 뛰어 들어왔을 것이다. 나는 이 논리를 좀 더 밀고 나아가고 싶다. (스피노자의 표현을 빌리면) 핵심은 안에서 긍정하기 위해 그것은 바깥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전도를 위해서 방법의 전위(轉位)와 그 수순에 따른 재평가의 결과로 나타난 영화에로 다시 되돌아가야 하는 요구를 순순히 따라야 한다. 여기서 왜 내가 까다로운 데리다의 전술적인 용어를 내세웠는지 받아들여 줬으면 좋겠다. 나는 임권택의 영화에서 이 불편함을 말할 때 종종 그 영화에 제한적으로 주어진 데서 설명을 시작하는 것이 잘못된, 아주 잘못된, 그래서 임권택의 진정한 시작의 지점을 놓치는 실패를 항상 가져온 것이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반대로 이것을 최종 결과의 효과라는 데서 시작해보면 안될까. 이유들의 순서에 종속되지 않은 대리, 그사이에 재빨리 끼어드는 보충. 우리는 올바른 시작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만 불편한 실패들 속에서 자기원인의 동어반복 안으로 이끌려 들어가는 악순환을 탈출할 수 있을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나는 임권택의 영화 안에서 진화론적인 모델을 거부한다. 그건 그 영화들 사이에 놓인 영향 관계를 과도하게 단순화시킬 뿐만 아니라 자꾸만 그 어딘가에서 어슬렁거리는 목적론적인 설명의 함정에로 이끈다. 나는 영화들 사이의 관계에서 서사를 만들어내고 싶지 않다. 임권택의 영화들은 내게 그런 설명이 결국에는 왜 불가능한지를 알려주는 목록이다. 월하의 검 (1970) < 월하의 검 >을 가장 단순하게 말하면 재난에 가까운 실패이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임권택 에게 의미 있는 실패라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 그는 여기서 무언가를 의식하고 있지도 않다. 그 어떤 것을 하려고도 하지 않았으며 그 무언가를 해본 것도 아니다. 1970년은 임권택에게 그런 해이다. 그 해에 임권택은 여덟 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 애꾸눈 박 > < 이슬 맞은 백일홍 > < 비내리는 선창가 > < 그 여자를 쫓아라 > < 밤차로 온 사나이 > < 속눈썹이 긴 여자 > < 비검 > 그리고 < 월하의 검 >. 어떤 일관성도 없는 영화들. 하지만 이 실패가 나에게는 의미가 있다. 사태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그것을 임권택의 무능력에로 돌리기에는 그에 앞선 영화들을 생각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그의 첫 번째 영화 < 두만강아 잘 있거라 >의 마지막 시퀀스 전부. 혹은 세 번째 영화 < 망부석 >. 나는 자꾸만 그의 실패한 영화들을 실패한 작품들이라고 부르기보다는 실패한 상황이라고 부르고 싶어진다. 그 영화들은 실패라는 조건 속에서 자기들의 방법으로 실존하는 중이다. 실패와 부딪쳐서 부서져 나가는 영화의 모습. 나는 그 모습을 지금 바라보는 중이다. 그때 부서져 나가는 참조 틀 사이로 드러나고, 재생산되고, 존재하는 잉여들의 혼란스러운 모방과 마주친다. 잠깐. 모방이라고 했나요? 물론이지요. 그건 다른 무언가가 이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서 거쳐야만 하는 과정이니까요. 그때 모방은 나에게 효과라는 최종 결과라는 모습으로 다가올 것이다. 나는 그것을 거기서 멈춰 세우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결과는 여기서 무엇보다도 과정이기 때문이다. 멈추지 않는 최종이라는 종착지. 임권택 은 공식적으로 자신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감독으로 언제나 정창화 를 이야기한다. 그는 정창화 밑에서 전형적이고 고전적인 의미에서 충무로 도제 수업을 받았다. 영화는 기계군의 활동이며 조직이다. 공장과도 같은 시스템. 그 안에서 개념의 추상화와도 같았던 이미지를 세계 안에서 찍은 다음 배열해야 한다. 여기에는 규칙과 문법이 있다. 그것을 쳐부순다고 말해도 그 안에서 진행되는 부정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임권택이 정창화를 말하는 것은 그 인정의 테두리 안에서이다. 그런 다음 (펠리니의) < 길 >과 네 명의 할리우드 영화감독, 존 포드와 빌리 와일더, 윌리엄 와일러, 조지 스티븐스를 언급했다. 나는 여기 세 명의 이름을 더하고 싶다. 임권택이 언급하지 않는 이름. 그의 영화 전체는 아니지만 우리들이 실패작이라고 부르는 영화들이 만들어지던 시기, 실패의 상황이라고 내가 명명한 조건 아래서 만들어진 영화에서 마주치는 그림자들의 이름. 셀지오 레오네와 끌로드 를루슈, 그리고 장철. 물론 그 이름들은 잠시 후에 임권택의 영화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실패의 상황 속에서 남과 여를 주연으로 한 영화들과 < 남과 여 >, 그리고 쇼 브라더스 영화들은 마치 그림 안의 그림처럼 거기 그림자로 남았다. 영화가 한참을 자신의 서사를 진행하면서 이야기하고 있을 때 나타나는 이미지들. 그것이 다시 나타날 때 종종 지나치게 실패해서 그것을 분간하기 어려워진다는 느낌을 받기조차 한다. 미처 예기치 않았던 출현. 주인공이 자기의 몰락을 향해 걸어가고 있을 때, 그가 놓여진 상황이 다른 영화 안의 반복을 향해 나가기 시작한다. 나는 여기에 약간의 주석을 달고 싶다. 셀지오 레오네는 이탈리안 네오리얼리즘이 끝난 다음, 그것도 거의 끝난 다음, 그래서 펠리니가 그 방법을 버린 다음, 안토니오니가 리얼리즘을 거의 추상에로 밀고 나아간 다음, 황무지에서 할리우드 영화의 장르에 대한 아이러니로 시작하였다. <길>을 자신의 거의 유일한 걸작이라고 말하는 (게다가 전형적인 한국 고전영화문법 안에서 배움을 얻어온) 이 사람은 < 석양의 무법자 >에서 무엇을 본 것일까. 정창화에게서 충무로의 영화문법을 배운 임권택의 영화에서 잠시 동안 <남과 여>에서 무차별하게 사용된 시네마 베리테의 촬영과 누벨바그의 데쿠파주에 대한 키치적인 활용이 홀연히 등장하는 순간을 몇 차례이고 반복해서 마주칠 때 나는 어떤 쇼크를 받았다. 구체적으로 <남과 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시기의 한국영화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하나의 경향이었기 때문이다. <남과 여>는 한 시기의 한국영화들을 거의 쑥밭으로 만들어 놓았다.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미처 < 히로시마 내 사랑 >과 < 비브르 사비 > < 어느 여름의 연대기 > <사촌형제> < 롤라 > < 활주로 > < 쥘과 짐 > <사자좌> < 5시에서 7시까지의 클레오 > < 파리는 우리의 것 > <아듀, 필리핀> <산타 할아버지는 푸른 눈을 가졌다>를 보지 못했다. 그저 < 네 멋대로 해라 >와 < 사형대의 엘리베이터 >를 보았을 뿐이었다. 그런 다음 그들의 경험은 중단되었다. 아마도 오직 김기영 만이 영화‘歷’사의 시간을 좇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김기영은 (인터뷰에 따르면) 1960년대 그 부근 언젠가부터 기회가 닿을 때마다 오로지 영화를 보기 위해서 도쿄에 방문했다. 풍문으로 누벨바그의 이야기를 듣기는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야기들은 일본을 경유하여 각색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시기의 글 자료들을 읽은 내 독후감은 그렇다. 그들은 말 그대로 무방비 상태였고, <남과 여>가 굉장한 영화라고 믿고 있었다. 왜냐하면 거의 법칙과도 같았던 고전영화 문법을 무시하면서 그저 그렇게 떠오르는대로 찍고, 연출하고, 편집하고, 그래도 괜찮은 영화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임권택은 거기서 어떤 자유를 느꼈을 지도 모른다. 자신을 지배했던 도제제도로부터의 해방. 그때 임권택은 모던 시네마의 방법에 가까이 다가갔다. 실패한 상황. 예기치 않은 보충, 혹은 무엇이 무엇을 대리하기 시작했을까. 이 위험한 대리보충. 어쩌면, 정말 어쩌면, 여기서 무언가 잘못되었다면 그의 영화가 모두 부서졌을지도 모른다. 임권택은 재빨리 다시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런 다음에도 방법의 흔적은 완전히 소멸되지 않고 다소 기형적인 양태로 분산되고 분할되어 머물렀다. 우리는 임권택 안에 들어서기 위해서 방법을 잘 따라야 한다. 무엇이 멈추자 무엇이 활동하기 시작했을까. 거기서 우리는 영화의 어떤 역량이 표현되기 시작했는지를 관찰해야 한다. 때로는 긍정적인 역량. 때로는 실패해버린 표현. 거기에 적합한 개념. 거기서 멈춰버린 기능. (위) 정창화 와 <길>, (아래)셀지오 레오네, 끌로드 를루슈, 장철 나는 여기서 세 번째 이름에 대해서 길게 설명할 생각이다. 장철. 張徹. 1968년 5월 23일 서울 파라마운트 극장에서 <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 >가 개봉하였다. 처음에는 이 영화가 그렇게 큰 대중적인 성공을 거둘 것이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홍콩 쇼 브라더스 무협영화는 한국 영화문화 안에서 하위 장르의 하위 장르이면서 동시에 재개봉관을 중심으로 컬트영화가 되었다. 임권택 은 이 이름에 대해서 단 한 번도 길게 언급하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그저 스쳐 지나갔다. 내 질문은 왜 그것을 받아들인 다음 버렸느냐는 것이다. 나는 이 시기의 임권택을 이야기하면서 그의 영화 안에서 장철을 수 없이 다시, 거듭해서 다시, 호명할 것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셀지오 레오네와 < 남과 여 >를 불러낼 것이다) 이것이 단지 불균등한 위계적 관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임권택은 장철과 셀지오 레오네, 그리고 <남과 여> 없이 더 나아갈 수 없었고, 아니, 차라리 그것들의 대리보충 없이 참조 틀을 부술 수 없었고, 그런 다음 거의 불순물과 다름없는 그것들을 버리지 않고서는 다시 나아갈 수 없게 되었다. 실패해버린 상황 속에서 다시 한 번 실패하기. 더 잘 실패하기. 위험한 명제. 임권택에게 그가 실패하고 있는 상황에서 충무로는 참을 수 없는 문법이었고, 그런 다음 부서져 가는 그의 영화 안에서 셀지오 레오네와 <남과 여>, 장철은 다시 견딜 수 없는 대가가 되었다, 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이 설명을 따분하게 변증법적 통일이라는 방식으로 도식화시키지는 말아주기 바란다. 내가 신기하게 생각하는 대목은 바로 여기이다. 갑자기 여기서 새로운 쟁점이 나타난 것이다. 임권택은 오류 안에 자기가 찾고 있는 진정한 목표가 있는 것처럼 다가가기 시작했다. 아니, 이렇게까지 말하고 싶어진다. 임권택은 오류 안에서만 견딜 수 있는 형식을 찾고 있는 중이(었을 것이)다. 그때 장철이 단지 쇼 브라더스 무협영화를 찍었다는 사실에서 멈추지 말고 그 영화들이 광동오페라의 영향 아래 만들어진 감상적인 멜로드라마의 판본 위에서 시작했다는 사실 안의 사실까지 거슬러 올라가야만 한다. 임권택과 장철이 공유하는 것은 무협활극이라는 표면적인 약속의 장르 사이에서의 트랜스 내셔널 네트워크가 아니라 피와 시체들, 복수의 정념과 의리의 도덕 뒤에 수줍게 숨어있는 감상적인 멜로드라마의 비극적 운명에 대한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매혹이다. 더도 덜도 아닌 매혹. 그 속에서 그들이 즐기는 기쁨. 바로 거기서, 마치 그것을 쥐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것을 참조했다기보다는 차라리 그것에 대한 참조라고 할 정도로 < 월하의 검 >은 장철의 영화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 그것도 아주 구체적으로 < 대협객(大刺客) >과 (부분적으로) < 심야의 결투(金燕子) >의 영향을 받았다. 심지어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몇몇 장면에서는 거의 같은 구도, 같은 활극동작을 빌려온 살진(殺陣)이 등장하기까지 한다. 여기서는 단지 오마주라거나 두 영화 사이에서의 상호 텍스트성이랄까, 이런 설명과는 완전히 다른 교차가 나타난다. 나는 실패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실패한 오마주라고 말해버리면 어떨까. 이 말을 잘 음미해주기 바란다. 오마주를 실패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효과로서 나타나 버린 오류라는 실패한 오마주, 그 안에서 이행의 대리보충을 붙잡아야 한다. 무언가 저 영화가 이 영화에 구멍을 내고 그 속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것은 단지 거기에 동의한다거나 혹은 이미 해놓은 것에 대해 가질 수밖에 없었던 감흥의 복종과는 다른 것이다. < 대협객 >(1967) < 심야의 결투 >(1967) < 대협객 >은 쇼 브라더스에서 장철이 왕우를 주연으로 하여 1967년에 만든 홍콩영화이다. 무협영화 팬들 사이에서도 상대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영화이다. 아마도 이 영화가 다른 장철 영화들과 달리 긴 드라마가 장황하게 이어진 다음 아주 잠깐, 그래서 너무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는, 하지만 몹시 인상적인 무협활극 장면이 나오는 절정의 클라이맥스를 맞이하고 나면 서둘러 끝나버리기 때문일 것이다. 서울에서는 1969년 10월 4일 종로 3가에 있었던 파라마운트 극장에서 개봉하였다. 이 이야기는 사마천의 <사기>에도 등장하는 자객열전 중의 하나이다. 춘추전국시대 제나라 백성이었던 섭정은 출중한 무인이었다. 그러나 그 재능을 시기한 동문 서식의 음모로 인해 스승은 당시 제나라와 적대관계에 놓인 나라의 첩자로 몰리고 무술 도장은 쑥밭이 된다. 이에 섭정과 그의 친구 두파는 복수를 한 다음 섭정은 모든 걸 포기하고 백정이 되고 두파는 옆 나라인 한나라로 피신하여 거기서 한나라의 충신 엄중자의 자식 무술 사범이 된다. 그런데 엄중자는 재상 한괴가 끊임없이 그를 음해하고 임금을 좌지우지하는 것을 보며 몹시 괴로워한다. 그러다 보다 못한 엄중자가 두파에게 도움을 청하자 그는 자기보다 훨씬 무술이 훌륭한 섭정을 추천한다. 제나라까지 찾아온 엄중자의 마음을 알고 그와 의형제까지 맺은 섭정은 다만 자기에게는 아직 병상에 누운 어머니가 살아계시고 누이가 있으니 기다려달라고 말한다. 몇 해 후, 어머니 상을 치루고 누이가 시집을 가자 섭정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혈혈단신으로 엄중자를 찾아온다. 그리고 하얀 백의에 백마를 타고 귀공자로 분장하여 혼자 수백 명의 병사들의 호위를 받는 한괴를 찾아가 그를 처단하고 자결한다. 나는 주변에 있는 섭정과 그의 연인, 그리고 누이와의 이야기는 모두 그냥 지나쳤다. 그런 다음 < 월하의 검 >. 이 이상할 정도로 기괴한 우울함으로 가득 찬 이야기가 임권택 이 직접 쓴 시나리오라는 점을 먼저 염두에 두고 읽어주기 바란다. 물론 임권택은 첫 영화를 만들 때부터 끊임없이 영화를 찍으면서 시나리오를 고쳤다. 그건 ( 송길한 이 시나리오를 쓴) < 만다라 >를 찍을 때도 그러했고 ( 이청준 이 시나리오를 쓴) < 서편제 >를 찍을 때도 그러했다. < 취화선 >을 찍을 때는 심지어 시나리오를 탈고한 다음에도 계속해서 매일 아침에 새로운 대사를 쓴 시나리오를 나누어주었다. 하지만 시나리오를 다시 고치는 것과 처음부터 쓰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여기서 임권택은 무얼 하고 있는 것일까. 물론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이야기에 뒤 이어 와서 그것을 닮은 다른 이야기가 이미 앞에서 포위하고 있을 때 그는 무얼 하고 있는 것일까. 하나가 다른 하나의 대리보충이 될 때 어느 쪽이 앞에 있고 무엇이 뒤에 있는지 그렇게 쉽게 분간할 수 있을까. 후렴구. 나는 지금 실패에 대해서 말하는 중이다. 아마도 조선 시대. 하지만 그런 다음 더 이상 어떤 것도 분명한 지표가 없는 사극의 무대. 유감스럽게도 당신은 < 월하의 검 >을 볼 방법이 없고 잘 정리된 줄거리도 없기 때문에 이 글을 먼저 읽을 수밖에 없다. (...) 임금은 무능하기 짝이 없을 뿐만 아니라 연화당 최씨의 미모에 빠져 헤어 나오지를 못한다. 그러는 동안 나라의 권세를 포도대장 최걸에게 모두 넘겨준다. 최걸은 자신을 비방하는 충신들을 모두 척살하기 위해 음모를 꾸민다. 그래서 빼어난 무술을 지닌 장무력을 고용하여 마치 연화당 최씨를 암살하기 위해 잠입한 것처럼 꾸민 다음 최씨를 지키는 호위무사 박필에게 붙들리는 계교를 꾸민다. 임금 앞에 잡혀간 장무력은 자신을 고용한 자들의 명단으로 충신들의 이름을 차례로 열거하고 곁에서 통곡을 하며 연화당 최씨는 그들을 모두 참해달라고 간곡하게 호소한다. (여기가 영화의 시작이다) 무자비한 탄압이 시작되고 이에 가까스로 살아남은 충신들은 심산유곡에 자리한 절로 피신하여 이제 남은 방법으로 연화당 최씨보다 더 빼어난 미모를 지닌 여인을 궁궐로 보내 임금의 총애를 받은 다음 진실을 알리고 간신배들을 벌할 것을 상소하자는 계획을 세운다. 그런 다음 이들은 이미 참수당한 충신의 딸 향아가 이에 적합한 미모를 가졌으며 그녀의 효성이 이를 받아들일 것이라는 데 합의한다. 문제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행방이 묘연한 향아를 찾는 것인데 우연히도 위험에 처한 그녀를 연화당 최씨의 호위무사 박필이 구하게 된다. 박필은 천애 고아로 어려서부터 최걸이 돌보면서 무술을 배우고 그 아래서 최걸의 자객이자 누이인 연화당 최씨의 호위무사가 된 몸이었지만 자신의 신세에 대해 처량함을 느끼며 그저 시간 날 때마다 조선팔도를 이리저리 떠돌며 그림을 그리면서 허송세월 나날을 보내고 있지만 무술만은 조선 최고라 부를 만한 것이었다. 박필은 향아의 정체도 모른 채 그녀를 보자마자 한눈에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변장을 하고 궁에 잠입한 향아를 보고 모든 계획을 깨달은 박필은 부디 이 위험하고 허망한 복수를 중단하고 자신과 멀리 떠나자고 말하지만 향아는 반대로 자신을 도와 복수를 이룬 다음 함께 멀리 떠나자고 부탁한다. 우여곡절 끝에 향아는 임금의 처소에 들고 그의 마음에 들지만 (여기서 나는 그사이에 향아의 정체가 탄로 나고 연화당 최씨의 인두질로 얼굴이 망가져 궁궐 바깥으로 내쳐지지만 심산유곡 절의 주지스님이 지극정성으로 치료한 묘약으로 미모의 얼굴을 고친 다음 다시 궁궐에 입궐한 사연을 둘러싼 대목을 건너뛰었다) 하룻밤 정사를 치르고 나서 증거가 없으니 연화당 최씨와 그 오빠를 벌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한편 최걸은 이제 유일하게 증언할 수 있는 장무력을 제거하면 모든 것을 용서하겠다고 박필에게 제안한다. 박필은 장무력을 찾아가 일대 결전을 벌이지만 막상막하의 실력을 갖춘 두 사람은 결국 승패를 가리지 못한다. 지친 두 사람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자신과 대결을 하면서도 결정적인 한 수를 쓰지 않는 박필의 마음속 진심을 본 장무력은 기꺼이 그를 위해 임금 앞에 가서 진실에 관한 증언을 하기로 마음을 바꾼다. 하지만 박필은 그 증언이 모두 끝날 때까지 바깥에서 임금의 처소를 향해 수 없이 몰려드는 병사들과 홀로 싸워야만 한다. 장무력이 모든 증언을 마쳤을 때 박필은 수백 명의 병사들의 시체 곁에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가는 중이다. 그 곁에 온 향아는 그를 비로소 여보, 라고 부르며 품에 넣어둔 극약을 먹고 그와 같은 운명의 선택을 한다. 그 시간에 연화당 최씨는 모든 비밀이 밝혀지자 자결을 한다. 무능하기 짝이 없는 임금은 홀로 남겨진다. 이 이야기를 읽고 난 다음 포스터에 있는 주연배우들의 명단을 보면서 당신은 포도대장 최걸을 허장강이 연기할 것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배역의 컨벤션이라는 약속. 하지만 김지미 는 향아가 아니라 악독하기 짝이 없는 연화당 최씨를 연기한다. 향아는 김명진 이 연기한다. 물론 배역은 일종의 수건돌리기 게임이다. 영화 바깥의 여러 가지 복잡한 변수가 있긴 하지만 누구든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다. 내가 여기서 하려는 질문은 이야기 안에서 이들 사이의 오류를 불편하게 만드는 문턱에 관한 것이다. 먼저 이 영화에는 어떤 카타르시스도 없다는 사실을 지적해야겠다. 아마 이 말이 당신을 당황시킬지 모른다. 그렇다고 무언가 정의가 실현되었다는 결말을 주지도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마지막 순간은 결말이 다가왔다기보다 무언가 종말을 맞이했다는 인상을 불러일으킨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투명하고 선악이 분명하며 우리가 누구 편에 서야 할지 따분할 정도로 잘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점점 그 경계는 희미해지기 시작한다. 그런 다음 마지막 시퀀스 전체는 우리를 혼란에 빠트린다. 무언가를 주장하기는커녕 오히려 우리를 비웃으면서 보편적인 믿음을 우스꽝스럽게 처리해버린다. 여기서 이 모든 등장인물들의 정박지인 임금은 단지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과도하리만큼 색욕에 빠져 있다. 그 역을 연기하는 김순철 은 다른 배우들과 전혀 달리 의도적으로 과장되고 어색한 코미디의 연기를 한다. 김순철은 단 한 장면에서도 다른 배우들과 어울리지 않는다. 심지어 김명진 과 침소에서 운우지정을 나눌 때조차 그러하다.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는 홀로 존재한다. 불편한 고정점. 나는 당신에게 임권택 이 영화 연출을 할 때 언제나 연기를 교정하는 것에서 그 인물의 형상화를 시작한다는 사실을 환기시키고 싶다. “ 정창화 감독은 나를 카메라 옆에 앉혀놓고 배우를 보라고 시키는 거예요, 어떤 배우도 유심히 들여다보면 약점이 보이는 거예요, 그게 내가 시나리오와 인물 사이의 오차 범위를 줄이는 방법이었어요.” (「임권택, 임권택을 말하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해야겠다. 임금은 만월이 뜨는 밤이면 내시 한 명을 데리고 홀로 비원에 행차해서 그 달을 보면서 술을 마신다. 이건 궁중의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며 그래서 향아는 임금이 혼자가 되는 그 시간에 그를 만나게 해달라고 박필에게 애원한다. < 월하의 검 >이라는 제목은 달빛 아래서 대결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시간에 거기에 가야만 하는 향아와 그녀를 거기에 보내야 하는 박필의 애처로운 사연의 알레고리이다. 하나의 시간. 만월의 밤. 세 개의 선. 임금과 향아와 박필. 서로 맞지 않는 정념들 사이에서 운명적으로 짜 맞춰져야 하는 매듭 사이로 벌어진 틈. 그 사이로 아슬아슬하게 이야기가 흘러가기 시작한다. 애초부터 그 자신들이 짓지도 않은 죄를 짊어진 상태란 무엇일까. 말하자면 비극의 수순. 그런 다음 매듭을 자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 임권택은 (장철과 마찬가지로) 결국에는 이 이야기가 죽음에로 귀결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박필은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들면서 역설적으로 스스로 운명 앞에서 수동적인 태도를 취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그녀의 간절한 소원. 하지만 그 소원이 이루어지면 내가 손 한 번 잡아보지 못한 저 사람은 임금의 침소에 들어 육욕의 대상이 될 것이며 그에게 벌거벗은 살을 내주어야 할 것이다. 임권택은 거의 기술적으로 감당이 안 되는 1970년의 한국영화 촬영기술을 바탕으로 무리할 정도로 반복해서 몇 번이고 만월(滿月)의 밤을 찍는다. 미첼 카메라의 둔중함과 값싼 아그파 필름, 그리고 조악한 조명은 한밤중에 만월을 찍는 것이 불가능한 장비들이다. 그래서 이 영화의 모든 만월의 밤은 한낮에 밤 장면을 찍었다. (day_for_night) 종종 잘못 색 보정된 다음 무성의하게 현상된 필름들은 이 만월의 밤 장면들이 낮에 촬영되었음을 잔인할 정도로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월하의 검>은 기술적으로 거의 재난에 가깝다. 그걸 임권택이 모를 리가 없다. 그는 자신이 여기서 실패할 것이라는 사실을 너무 잘 알면서도 그냥 그걸 지금 하고 있는 중이다. 나는 그걸 의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만일 그것이 의도라면 그건 나쁜 의도이다. 여기에는 처음부터 그래도 상관없다, 는 자포자기가 무겁게 내려앉는다. 나는 임권택의 심리적인 상태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 그걸 설명하는 것은 전기 작가의 몫이지 내가 할 임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임권택은 여기서 무엇을 따라가고 있는 것일까. <월하의 검>은 미학적 기준으로 무자비하게 설명하기를 단 한 순간도 망설일 필요 없는 영화이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을 하려다가 실패하기는커녕 그걸 먼저 알아차리고 실패라는 조건을 받아들인 다음 거기서 더 밀고 나아가기 시작할 때 우리는 기묘한 실패의 정식화를 끌어낼 수 있다. 그건 실패가 외재적 조건일 때 이미 내재적으로 존재하는 부정에 대한 긍정이라는 역설이다. 이때 영화는 임권택에게 일종의 자기 심문과 같은 것이 되어간다. 마치 영화가 자기의 속살을 내보이듯이, 정말 부끄럽게, 필름의 한계와, 촬영의 제한적인 조건과, 제작의 무성의한 진행에 관한 모든 과정을 적나라하게 노출하기 시작한다. 얼마나 끔찍할까. 속수무책으로 그것을 수수방관해야만 할 때, 그때 거기서 할 수 있는 방어의 기술이 전혀 없을 때, 임권택은 반대로 그냥 내버려두고 있다. 바로 거기서 위험천만한 상실이라고 할까, 그 자신의 영화의 내부적인 멜랑콜리가 불연속적인 질문을 반복해서 던지기 시작한다. 영화 안의 질문. 지금 이것은 그래도 성립되고 있습니까. <월하의 검>은 거의 부서진 영화이다. 그런데도 가까스로 버티고 선 무언가가 이 영화에 이상할 정도로 집요하게 그것을 방어하면서 성립시키고 있다. 재앙을 피해야만 해. 폭력으로부터 보호해야만 해. 여기서 나는 그럴 때마다 아무 상관도 없는 장철의 < 대협객 >이 유령처럼 출몰하는 것을 쳐다보게 된다. 그때 그건 영화라기보다 차라리 제도 바깥에서 나타난 부정성이다. 몹시 사악하고 거의 지켜지지 않는 규칙들. 강제적인 영화의 속도. 쇼 브라더스 영화의 처음 보는 기이한 문법. 거기서 섭정의 삶은 자유자재로 스튜디오 속을 거닐며 자기의 목표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간 다음 마지막 순간 중력을 무시하고 날아오른다. 그렇게 사람이 날아가도 상관없는 것일까. 새로운 동선. 영화에서의 새로운 선, 하지만 아주 특별하고 예외적인 선. 그 자신의 학습을 통해 얻어낸 경험을 앞지르는 건너편의 방법이 나타나서 부서져 가는 참조 틀 사이로 대리하고 보충하는 시간은 이 영화가 발작하는 순간들이다. 상감,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옵니다. 사실이옵니다. < 월하의 검 >을 보다가 누구라도 멈춰 서게 될 두 장면, 그런데 거의 마지막 장면, 그래서 이야기가 멈추는 두 장면을 먼저 이야기하고 싶다. 여기서 임권택 은 장르 안에서의 연쇄를 갑자기 끊어버린다. 그런 다음 이야기를 밀어내고 어떤 대체의 구조를 찾기라도 하듯이 인물에서 그것을 보충하려 든다. 어떤 절단. 그런 다음 그것을 떠안아야 하는 부담을 감수하기라도 한 듯한 결정. 장무력이 임금의 앞에 가서 진실을 고하고 나자 포도대장 최걸과 연화당 최씨를 불러 그 말이 모두 사실이냐, 라고 묻는다. 그러자 최걸은 그 모두가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로 시작하는 사극에서의 마지막 장면에서 만나는 상투적인 대사를 시작한다. 물론 악인들이 사악할 뿐만 아니라 비겁하기 짝이 없다는 강조할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사약을 내리기에 조금도 자비심이 필요 없다는 것을 확인시키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그때 최걸 의 말을 자르면서 연화당 최씨가 조금도 뉘우치지 않는 표정으로 모두 사실이옵니다, 라고 대답한다. 임금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본다. 왜냐하면 자기에게 생명을 구걸하는 요구를 거절하는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권리를 되찾는 동시에 권리와 정의를 일치시키는 제스처를 취하려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임금과 국가의 (상투적인) 변증법. 하지만 연화당 최씨는 이 일련의 자동적인 연쇄를 중단시킨다. 그런 다음 임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질문한다. 저년과 저, 둘 중에 누가 더 예쁜가요? 목숨이 걸려있는 순간에 이 질문은 적절치 않은 내기이다. 왜냐하면 임금의 대답은 어느 쪽을 선택해도 그녀의 목숨에 대한 결정을 바꾸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자신의 생명에 무관심한 듯한 질문. 하지만 이때 임금은 여기서 그 자신의 대답이 결정의 이해관계로부터 바깥에 놓이기 때문에 연화당 최씨의 질문은 임금의 자리로부터 그녀의 침소에서 몸을 탐했던 한 남자에로 임금을 추락시켜버린다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된다. 그런 다음 연화당 최씨는 임금으로부터 그건 물론 네가 더 예쁘긴 하지만, 이라는 대답을 듣자 거기서, 바로 그 대답의 거기서, 만족한 듯한 웃음을 짓고 옆에 서 있던 신하의 칼을 빼 들어 그 자리에서 자결한다. 대답이라는 패배. 대답을 통한 권리의 상실. 정의의 연쇄적인 추락. 자기 목숨에 대한 연화당 최씨의 스스로의 결정. 임금은 순식간에 결정에 대한 자기의 권리를 빼앗긴다. 그러므로 거기서 임금의 명령이 대상을 놓칠 때 그렇게 많은 희생을 요구하고 얻어낸 진실은 끝내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다. <월하의 검>에는 표면적인 결론과 달리 드라마의 효과가 만들어내는 사필귀정의 카타르시스가 없다. 주인은 자기의 권리를 빼앗기고 주인의 주인은 그 권리를 죽음으로 돌려준다. 바로 그 순간, 그러니까 연화당 최씨가 자살을 할 때 향아는 임금께 고하는 장무력의 고백을 위한 시간을 지키기 위해 수없이 밀려드는 병사들을 상대로 희망 없는 칼부림 끝에 죽어가는 박필에게 달려온다. 물론 이 장면은 장철의 < 대협객 >의 마지막 장면의 변주이다. 혹은 < 심야의 결투 >의 마지막의 마지막 장면, 그러니까 대결을 끝낸 다음에도 여전히 남아서 피를 흘려가며 끝없이 밀려드는 무사들과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필사적인 결투를 계속하는 은봉황이 어쩔 수 없이 떠오른다. 박필은 너무 많은 상처를 입었고 그가 입은 옷은 피로 범벅이 되어 계단에 쓰러진 채 죽어가는 중이다. 달려온 향아는 그를 껴안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를 여보, 라고 부르며 당신이 원하는 곳으로 가자고 말한다. 박필은 향아에게 이제는 만족하느냐고 묻는다. 그는 반복해서 향아의 복수를 말렸고 그녀의 희생이 얼마나 무의미한지를 설득했으며 단 한 번도 그녀의 결심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그녀를 도와 지금 이렇게 죽어가는 중이다. 그리고 향아는 복수에 성공했고 그녀는 마침내 원하는 것을 얻었다. 그때 향아는 박필의 질문에 대답한다. 저 탐욕한 무리들을 떠나 당신과 함께 떠나겠어요. 연화당 최씨의 대답과 마찬가지로 여기까지 향아의 동선을 쫓아온 당신은 갑자기 멈춰 설 것이다. 탐욕한 무리들. 그 대답에서 가리키는 탐욕한 무리들은 최걸과 연화당 최씨가 아니라 그들에게 희생당한 충신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향아를 궁궐에 보내 자신들의 억울함을 탄원해달라는 명령을 내렸던 아버지의 친구들. 대의를 위한 희생. 향아는 그 충신들을 최걸과 연화당 최씨 남매와 별 차이가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단지 그들은 서로 권력을 잡은 자와 잃은 자의 반대의 자리에 놓여있을 뿐이다. 향아는 자기가 바라는 것을 얻었고, 그런 다음 연화당 최씨가 자살을 한 그 빈자리, 임금의 옆자리에 가면 된다. 하지만 그녀는 그 말을 한 다음 품에서 언제나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만일의 경우를 준비한 독약을 아낌없이 자기 입에 털어 넣는다. 두 개의 자살. 즐비한 시체. 여기서 자살은 어느 쪽도 자포자기가 아니다. 그녀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자살을 선택하면서 무언가를 항의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임권택 의 영화에서 가장 반복적으로 대하는 행위는 자살이라는 것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길고 긴 영화의 목록 끝에 자신의 영화에 대한 철학적 정식화가 인본주의(人本主義)라고 말한 이 사람의 영화에서 끈질기게 자살이 반복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심지어 그 자신의 자서전이라고 부를만한 < 취화선 >에서조차 마지막 장면에서 오원 장승업은 그 자신의 예술에 대한 결론으로 자살을 선택한다. (그런데 장승업에 관한 전기에 따르면 그는 말년에 그저 실종되었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임권택의 영화에서는 각자의 이야기에서 살고 있는 각자의 주인공들이 살아온 삶의 결론에 이르러 각자의 죽음을 선택한다기보다는 그들이 어디서 시작했건 결국에는 자살이라는 어떤 (텅 빈 상태의 공허한) 중심에로 이끌려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을 가까스로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자기의 책임을 누군가에게 떠넘기는 것뿐이다. 이를테면 역사 그 자체. 나는 <취화선>에서 바로 이어지는 또 한편의 전기인 < 하류인생 >의 마지막 장면을 유심히 바라본다. 여기서 자기의 자리를 텅 빈 구멍으로 만들어버리는 행위는 무엇을 목표로 한 것일까. 나는 임권택에 관한 논의를 더 멀리 밀고 나아가기 위해서 실패한 선택으로서의 장철의 쇼 브라더스 영화를 경유할 필요를 느낀다. 거기서 시작했고, 거기 머물지 않기 위해서 비극적인 것에서 진정한 비극에로 점핑하면서 도약하는 과정이, 오로지 그 과정이, 임권택의 목록을 쫓아가는 내게 감동을 준다. 방법론으로서의 소용돌이의 심연. 무한정한 회의. 그 안에서 탄식하는 부자연스러운 매혹. 먼저 덧셈을 한 다음, 보충한 다음, 그다음은 빼내는 것이다. 거기서 원래의 자리를 차지해버린 대리를 다시 바꿔야한다. 대리보충에 대한 대리. (데리다의 표현을 빌려) 이중의 세션. 물론 모든 문제 안에는 대답이 포함되어 있다. 그때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미 얼마나 주어져 있는가. 이제까지 나는 < 월하의 검 >에 대해서 불만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에서 모든 장면들이 보고 난 다음 내곁에서 사라진 것은 아니다. 임권택 은 내가 보고 있는 이야기 안에서 어떤 장면을 종종 바늘처럼 찌르듯이 불쑥 내밀 때가 있다. 이건 바르뜨가 말하는 푼크툼과 전혀 다른 것이다. 나는 이야기 안에서, 라고 말했다. 그 장면을 따로 이야기에서 때어놓고 보면 별로 대단하지 않을뿐더러 이미지 자체가 훌륭한 것도 아닌데 정말 갑자기 그 장면이 이야기 앞으로 나올 때가 있다. 그때 이 장면을 이야기에 놀랍도록 적절하게 조응한다거나 혹은 이야기를 압도하면서, 라고 설명하는 것은 사태를 완전히 오해하는 것이다. 여기서 장면은 이야기에 대해 몹시 불길하고 축축한 외설성을 갑자기 드러내듯이 출현한다. 여기서 방점은 갑자기, 에 놓여있다. 그건 무언가 더 이상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는 것만 같은 불만에 빠졌을 때 그 이면에 감추어져 있던 장면이 앞에서 상연되는 것이다. 나는 상연, 이라고 말했다. 무언가를 의도적인 장면으로 보여주는 것. 누구에게? 우리에게. 왜 그런 상연이 필요해진 것일까. 그건 이야기의 표면만으로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한계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박필과 향아의 이야기는 어느 지점에 이르자 더 이상 진행되지 않고 제 자리를 맴돈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마침내 박필은 향아를 그녀의 원대로 한밤중에 비원으로 데려다준다. 비원에 깊은 밤이 오면 임금이 내시 한 명만을 대동하고 술을 마시며 이 시간을 홀로 즐기기 위해 나들이를 한다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아직 향아는 그 밤이 만월의 밤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녀는 한밤중의 비원에 홀로 앉아 오지 않을 임금을 기다리며, 아무도 듣는 이 없는 장소에서, 그 누구도 들을 리 없는 피리를 거기 없는 임금을 향해 불기 시작한다. 물론 여기까지는 이야기 안에서 오인의 청각 기호가 작동하는 중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밤은 깊어가고 아무리 기다려도 임금이 나타나지 않자 향아는 피리 불기를 중단한다. 이때 화면에서 향아가 중단을 했는데도 영화는 계속해서 피리를 분다. 그때 이 피리는 향아의 몸과 분리되어 이야기 바깥으로 나가버린다. 그런 다음 마치 장면의 사운드 트랙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거기 홀로 남은 향아를 위해서 영화가 불어주는 풍경으로서의 청각 기호가 된다. 이 이행의 순간은 순식간에 벌어져서 단지 실수가 아니라 마치 이야기 전체가 어떤 오작동을 일으킨 것만 같은 인상을 만들어낸다. 여기서 임권택은 텍스트라고 정의 내려진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으면서 거기에 마치 어떤 맹점(blind_spot)이 존재하기라도 한 것처럼 이야기의 가시성이 만들어내는 한계 가장 가까이에 다가간다. 우리는 이걸 단지 속임수라고 지나쳐버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에는 갑자기 이야기 바깥에서 운명이 찾아온 것만 같은 인상을 준다. 이야기 바깥에서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 이야기를 조정하는 끈. 이때 운명은 비극을 상연하기 시작한다. 왜 그런 장면이 필요해진 것일까. 임권택은 자신이 다루는 이야기에서 역사를 삭제하는 대신 역사 안의 실재적인 질서가 작동시키는 운명이 비극이라는 것을 고스란히 남겨놓는다. 여기서 조선 시대의 구체적인 배경은 알 수 없지만, 아니 차라리 그런 임금의 존재를 역대 왕조에서 누구로부터도 유추할 수 없지만, 이 이야기는 조선 시대가 아니라면 한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된다. 대리된 가상의 임금. 그 안에서의 광동 멜로드라마의 보충. 이때 임권택은 거의 초현실주의적인 상황에서 다시 이야기의 현실 안으로 되돌아올 때 소름 끼치게 무서운 장면을 준비해놓고 있다. 향아는 아무리 기다려도 비원에 임금이 나타나지 않자 실망하여 자기 방으로 돌아온다. 이때 향아가 방에 앉는 장면은 무언가 이상한 구도로 잡혀있다. 지나치게 멀리 물러난 카메라와 향아의 거리. 그녀를 둘러싼 어둠. 그런 다음 호롱불을 켜자 방 안이 밝아지면서 이제까지 그 방에서 기다리고 있던 연화당 최씨와 그녀의 궁녀들, 그리고 야경을 돌며 궁궐 안을 순찰하던 포졸들이 마치 유령처럼, 그림자처럼, 병풍처럼 향아를 둘러싸면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 장면이 우리를 경악(驚愕)이라는 공포의 상태로 몰아넣는 것은 세 가지 이유에서이다. 하나는 여기가 궁궐 안에서의 향아의 유일하게 사적인 공간이자 그 어떤 위험으로부터도 안전한 것처럼 여겨진 그녀의 방이기 때문이다. 임권택은 이 방을 마치 향아에게만 개인적으로 허락된 장소처럼 다루었기 때문에 우리들은 여기를 향아의 안전한 피난처처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연화당 최씨가 여기에 나타났을 때는 습격을 당했다기보다 갑자기 피난처의 베일이 찢어진 것처럼 느껴진다. 다른 또 하나의 이유는 여기에 이를 때까지 연화당 최씨는 향아의 행동반경에 대해서 거의 관심이 없거나 마치 그 둘 사이에 교집합이 없는 것처럼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두 개의 원. 각자의 운동. 그런데 가장 이상한 세 번째 이유가 남아있다. 여기까지 이야기의 진행이 향아와 연화당 최씨 두 인물에 대해서 거의 대부분의 진지함을 상실한 채 지나치게 나태했기 때문에 하나가 다른 하나의 동선 안으로 개입할 것이라고 거의 생각할 수 없었다. 이 순간이 의도된 연출이라는 가정을 하는 것은 이후의 진행을 생각하면 거의 희박한 가능성으로 남는다. 아니,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이 장면에서 깜짝 놀란 우리들은 그만 이 순간에 불쑥 찾아온 예기치 않은 방문객을 맞이한 심정이 되어 버렸을 것이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임권택은 그 효과를 잘 알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여기가 이 시기의 임권택의 마지막 방어선이었을 것이다. 그런 다음 영화는 다시 참혹한 기술적 수준의 장면들과 진부한 이야기에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이야기는 두 개의 자살을 향해서 앞으로 나아간다. 그 둘이 자살을 맞이할 때까지 다시 마주칠 일은 없을 것이다. < 월하의 검 >에서 그 두 사람의 죽음이 애처롭게 느껴지는 까닭은 이 영화가 ‘끝난 다음’의 이야기 속의 요지부동의 세상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수많은 죽음 끝에 정의가 이루어진 이후에도 사실상 이 영화의 무대가 된 존재한 적이 없는 조선 시대는 아무런 변화가 없을 것이다. 여전히 임금은 새로운 여자를 찾을 것이며, 그는 정사에 관심이 없으며, 충신들의 무리는 자신들의 복권에만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이루어진 다음에는 어떤 변화도 요구하지 않을 것이며, 세월은 그렇게 흘러갈 것이다. 임권택 은 그의 세 번째 영화 < 망부석 >에서 (각색을 거치긴 했지만) 사도세자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그런 다음 계속해서 조선 시대를 무대로 하여 사극을 만들었다. 구체적인 왕조와 역사적인 실록은 이야기에 개입하였으며, 실존했던 인물들은 자기의 자리를 버티고 앉았으며, 외세는 이 시대를 수수방관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임권택은 역사 안에서 자기의 이야기를 발전시켜야만 했다. 그때 그는 우아한 화면과 그 안에서 살아가야 했던 그 자신의 할머니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연출하였다. 우리는 임권택이 1934년에 전라남도 끝자락 아직 조선 시대의 향취가 남아있던 시대에 자라났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아마도 1965년에 만든 < 왕과 상노 > 혹은 그 무렵부터 실록 바깥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정확하게 이 시기부터 임권택의 영화가 부서지기 시작했다. 거기에 남은 것은 시대의 조건과 역사라는 이름으로 부여한 최소의 이치였다. 제도와 계급. 의상과 호칭. 마치 게임의 규칙처럼 되어버린 역사의 매트릭스. 역사는 형식이 되었으며, 그 안에서 임권택이 누린 것은 자유가 아니라 절망적으로 고립된 상황과 공허한 유교에 바탕을 둔 감상적인 남녀 사이의 희생과 반복적으로 마주하는 전근대적 향수의 눈물이었다. “그때 그 영화들을 만들면서 내 영혼이 다 부서지고 무언가 잘못되어간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내가 살아본 시대는 아니지만 이게 무어가 진짜고 무어가 가짜인지는 집안 어른들로부터 다 들어본 세상 이야기란 말이에요. 그리고 그런 어른들에게서 법도와 예절을 배웠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걸 내가 내 손으로 좋았던 유산을 다 부수고 있으니 만들면서 내내 참 몹쓸 짓을 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임권택, 임권택을 말하다」) < 월하의 검 >은 정확하게 그 말에 대한 대답이다. 임권택은 먼 길을 돌아와야 했으며 다시 역사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서 자기에게 강요된 조건을 수락해야만 했다. 그러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참으로 참혹하게도 임권택이 다시 역사 안으로 들어오게 된 것은 < 증언 >을 경유하여 그해 여름 한국전쟁을 마주 보면서, 다 부서져 버린 고향을 바라보면서, 흩어진 친척들을 찾아다니면서, 서로 총을 쏘고, 고발하고 신고하고, 죽고 죽이는 세상을 보면서, 그렇게 돌아왔다. 하지만 잠시만, 아직은, 아직은 좀 더, 나는 임권택의 그 시간에 머무를 생각이다. 그러므로... (계속) 1970년 108분 컬러 2.35 감독 임권택 제일영화주식회사 각본 임권택 촬영 최호진 조명 윤창화 편집 장현수 음악 황문평 김지미 윤양하 김명진
< 삼국대협 > 신문광고 다소 장황하긴 하지만 먼저 약간의 회고가 필요할 것이다. 나는 그때 몹시 비분강개하고 있었다. 1972년 가을. < 삼국대협 >이라는 영화 앞에서 보기도 전에 마음껏 비웃고 경멸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시절 나는 홍콩 쇼 브라더즈 영화의 열렬한 팬이었다는 사실을 먼저 염두에 두어주기 바란다. 이제 막 중학생이었던 소년은 호금전의 < 용문의 결투 >를 시작으로 장철의 <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 >, < 돌아온 외팔이 >,그리고 < 심야의 결투 >에서 절정에 달하고 있었다. <삼국대협>의 신문광고를 노려보듯이 쳐다보았다. “最後의 勝者는 누구냐! 映畵史上 類例없는 殘酷! 激情! 興趣! 의 크라이막스!! 中國의 외팔이, 日本의 盲俠, 韓國의 一枝梅가 한꺼번에 나온다!!” 나는 중얼거렸다. 이래도 괜찮은 것일까. 조건반사적으로 그해 여름에 본 < 외팔이와 맹협 >이 떠올랐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때 나는 트랜스 내쇼널 시네마를 알지 못했고 (알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런 영화적 개념 자체가 아직 등장하지 않았고) 그저 이건 쇼 브라더즈 ‘짝퉁’을 다시 ‘짝퉁’으로 한 번 더 버전 ‘다운(!)’시킨 것이라는 생각에 분노를 거의 참을 수 없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때 나는 막 열 살이 넘었을 뿐이다. 용돈은 충분하지 않았고 그래서 동네 극장에서 상영하기를 기다렸다. 오랜 교훈. (보기도 전에) 일단 적의가 생기면 영화는 어떤 장점에도 모두 눈이 멀어버리는 법이다. 물론 나는 이 자리에서 <삼국대협>이 저주받은 걸작이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보고 난 다음 나는 이전까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이상한 기분에 빠졌다. <삼국대협>은 영화 자체가 몹시 불쾌하다는 어떤 긴장의 유지랄까, 무언가 참을 수 없는 기분, 단지 이 영화가 형편없어, 라거나 나는 이 영화가 싫어, 라는 식으로 단순하게 내팽개칠 수 없는 예기치 않은 그 무언가의 방해에 맞닥트린 것만 같은, 그런 기묘한 거부감에 사로잡혔다. 그때 나는 그걸 잘 설명할 수 없었다. 어떤 장면이, 이를테면 과도하게 폭력적이거나 혹은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한 성적인 순간들이 돌발적으로 분출하는, 말하자면 그런 이미지나 쇼트, 혹은 대사가 문제된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등장인물들 사이에서 어린 소년이 받아들이기 힘든 심리적인 관계가 설정되었거나 숨겨져 있던 것도 아니었다. 이건 내가 미처 방어하지 못했기 때문에 문제된 것과는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이렇게 말하고 싶다. <삼국대협>은 (그것이 부정적이었다 할지라도) 내게 하나의 에너지로 등록되지 않았다. 좀 더 정확하게 나는 그것을 영화를 보면서 셈을 하는 항수(恒數)로 등록하는 데 실패했다. 대신 어떤 상처를 받았다. 잘못으로서의 세계. 속임수와 그 무언가 그 사이에 숨어버린 어떤 방법.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방법이다. 두 번째 만남은 이상하게 이루어졌다. 나는 < 삼국대협 >이 임권택 의 영화라는 사실을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은 시절에 보았다. 그때 나는 너무 어렸고, 게다가 임권택의 영화들은 전혀 주목받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 < 잡초 >조차 찍기 이전의 이야기이다. 1987년 그해 겨울, 임권택 감독님과 인터뷰를 위해서 작품 목록을 정리하는 과정 중에 거의 난데없이 이 영화 제목과 다시 마주쳤을 때 망연자실하다고밖에 달리 말할 수 없는 나의 심정을 한 번 상상해주기 바란다. 순서대로 인터뷰가 진행되었고 결국 이 영화에 대해서 질문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 왔다. 그때 임권택 감독님은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은 다음 “내가 그런 영화도 찍었어요?” 라고 반문했다. 처음에는 내가 잘못 정리한 줄 알고 다시 작품 목록을 찾아보았다. 그때는 인터넷이 없었고 일일이 신문광고를 찾아보아야만 했다. 물론 <삼국대협> 신문광고에는 ‘監督 林權澤’이라고 인쇄되어 있었다. 확인을 하고 다시 질문을 했을 때 한참을 들어보시더니 “전혀 기억이 안 나요”라고 고개를 내저었다. 어쩔 수 없이 질문은 거기서 끝났다. 정말 기억이 안 나시는 건지 아니면 기억을 안 하고 싶은 건지에 대해서 나는 알지 못한다. 1972년 그해에 임권택은 ( 변장호 , 최인현 과 함께 옴니버스 영화) < 명동 잔혹사 >와 < 돌아온 자와 떠나야 할 자 >, 그리고 <삼국대협> 세 편을 찍었다. 한 가지 더. 다소 의미심장하게 <삼국대협>은 임권택의 마지막 무국적 무협활극영화이다. 그는 < 장군의 아들 >로 ‘다찌마와리’ 장르에 돌아온 적은 있지만 두 번 다시 무협활극을 찍지 않았다. 그런 다음 2013년 부산영화제에서 다시 한 번 임권택 전작전을 (2010년 영상자료원 회고전에 이어 두 번째로) 하면서 이전에 공개된 적이 없는 <삼국대협>을 포함시켰다. 그제서야 나는 다시 한 번 이 영화를 볼 수 있었다. (국적을 가리지 않고) B무비의 열렬한 팬이자 (카이에 뒤 시네마의 편집장이었던) 칸 영화제 비평가 주간 감독인 샤를 테송은 뉴 커런츠 심사를 하는 바쁜 와중에도 달려와서 이 영화를 본 다음 앉아서 해설까지 듣더니 내게 기쁘게 악수를 청했다. 샤를 테송은 올리비에 아사이야와 함께 1984년 9월호 카이에 뒤 시네마 특집호 「홍콩 시네마」의 특집호를 만들었던 비평가이다. 아마 그는 토니 레인즈와 함께 홍콩영화에 매혹된 서방세계의 첫 번째 세대일 것이다. 이때 샤를 테송은 이미 소림사 영화의 계보를 썼으며, 쇼 브라더즈 영화사의 대표 런런쇼와 인터뷰를 했다. 물론 이 특집호에는 호금전과 장철의 인터뷰뿐만 아니라 (< 매트릭스 >가 등장하기 20년 전에) 무술감독 류가량과의 인터뷰와 무술 동작지도의 장면 분석(shot_by_shot)도 실려 있다. 말하자면 그는 <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 >의 존재를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일본 ‘찬바라’ 장르에 대해서도 충분히 알고 있는 비평가이다. 샤를 테송은 <삼국대협>을 본 다음 약간 흥분상태로 만면에 미소를 지으면서 “This is so funny lovely treasure!”라고 약간 외치듯이 말했다. 그는 마음에 들지 않으면 대답을 피하거나 아니면 자리를 떠나는 비교적 예의바른 프랑스 비평가이다. (대부분은 그 자리에서 그냥 맞받아치거나 구태여 물어보지 않았는데도 자기의 반대 의견을 반드시 전해서 기어이 그 자리를 망쳐놓는다.) 나는 이 말이 진심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갑자기 <삼국대협>이 내 앞에서 걸작으로 둔갑한 것은 아니다. 그건 그의 견해이다. 내 관심은 거기 있었던 것이 아니다. 영화를 본 다음 불쾌라는 기분, 너무 사소하게 느껴져서 이론이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이 질문에 대해서 나는 대답하고 싶어졌다. <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 >, < 돌아온 외팔이 > 포스터 22번째 ‘자토이치’ 연작 <신 자토이치, 물리쳐라! 당나라에서 온 검객> 다소 어색하더라도 먼저 < 삼국대협 >에 이르는 과정을 약간 추리소설처럼 생각해보자. 물론 가장 앞에 있었던 영화는 홍콩 무협활극 <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 >와 < 돌아온 외팔이 >일 것이다. 장철과 왕우. 과도할 정도로 커다란 성공. 이제까지 본 적이 없는 스타일. 고전주의적 규범들을 중단시킬 만큼의 어떤 단절감. 물론 이 장르를 열어놓은 사람은 < 용문의 결투 >의 호금전이었지만 장철은 그 방향을 완전히 틀어놓았다. 뭐랄까, 장철은 마치 이 장르에서 (제한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허락한다면) 셀지오 레오네가 서부극에 대해서 한 것과 같은 역할을 했다. 말하자면 장르 안에서 반칙으로서의 자기 순환의 에너지. 두 편의 ‘독비도(獨臂刀)’는 홍콩영화사를 다시 쓰게 만들었다. 하지만 세상의 이치 안에서 법칙은 단순하게 영화 안에서만 활동하지 않았다. 쇼 브라더즈는 일본 영화사들의 방식을 받아들였고 소속 영화인들을 월급제로 운영하였다. 왕우는 두 영화의 성공 이후 쇼 브라더즈를 떠났다. 우연의 일치. 쇼 브라더즈에서 경력을 쌓은 제작 프로듀서 레이먼드 쵸우(鄒文懷)도 마침 떠나서 새로운 영화사 골든 하베스트를 세웠다. 레이먼드는 영화사의 핵심은 스타라고 생각했고 재빨리 왕우와 새로운 계약을 맺었다. 골든 하베스트는 화어권 영화 극장 체인을 장악한 싱가폴 화교출신의 소씨(邵氏) 두 형제가 세운 쇼 브라더즈의 독과점 방식의 배급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야만 했다. 중국 본토는 문화혁명이 한창 진행 중이었고, 서방세계의 시장은 너무 멀었다. 아시아의 가장 활발한 영화시장 일본. 만일 동경을 점령할 수 있다면 홍콩영화를 들고 미국 시장을 두들겨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 골든 하베스트는 왕우라는 스타를 일본에 알릴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쇼 브라더즈는 초기 무협영화에서 무술 동작지도를 위해 일본에서 사무라이들의 활극장면 미장센을 연출하는 살진(殺陣) 감독들을 초대했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레이먼드는 비교적 일본 영화계의 인맥과 잘 알고 있었다. 골든 하베스트는 한편으로는 화어권 내에서의 새로운 ‘독비도’ 연작을 염두에 두면서 일본에서 자토이치(座頭市) 연작과의 합작을 타진하였다. 떠돌이 장님 안마사이자 (남들이 잘 알지 못하는) 뛰어난 검술을 지닌 자토이치는 아무런 보상도 요구하지 않으면서 막부시대를 배경으로 악인들을 물리치고 서민들을 돕는 정체불명의 협객이자 방랑자이다. 1962년에 시작한 ‘자토이치’ 연작은 단숨에 가츠 신타로를 스타의 반열에 올려놓았고, 눈이 먼 자토이치가 흰자위를 껌뻑거리면서 귀를 쫑긋 세우고 맹인 지팡이인 줄 알았던 막대기에서 불현듯 칼을 빼내 순식간에 그를 둘러싼 사무라이들을 물리치는 장면은 하나의 컨벤션이 되었다. 이 연작 중의 한 편도 보지 못한 분들은 기타노 다케시가 다소 패러디하듯 (그 자신의 인터뷰를 빌리면) “흉내를 내면서 리메이크한” < 자토이치 >의 활극 장면을 떠올리면 된다. 하지만 자토이치 연작은 너무 많이 만들어졌고 게다가 매번 귀신같은 칼 솜씨를 뽐내는 자토이치와 일대 일 막상막하의 대결 장면을 펼치기 위해서 다른 텍스트로부터 라이벌을 꺼내 들었는데 미야모토 무사시까지 등장했을 때 사실상 이 연작은 거의 끝난 것과 다름없었다. 그때 골든 하베스트의 제안은 자토이치 구미(組)에게도 흥미로운 제안이었(을 것이)다. 왕우가 누군지도 모르고 단 한 편의 ‘독비도’ 영화도 동경에 개봉하지 않았지만 절정의 무술을 지닌 장님과 중국 대륙에서 온 외팔이가 대결을 벌인다는 것은 대중들에게 색다른 (일본식으로 말하자면) ‘시리즈 번외편’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게다가 일본 영화산업으로서는 (이차세계대전 이후) 아시아 전역에서 일본영화가 수입 금지되거나 (한국도 그중 하나였다) 대부분의 국민들이 극심한 거부감을 지니고 있는 상황에서 홍콩 영화의 배급망을 통해 대표적인 일본 대중영화의 시리즈물이 알려지는 것은 여러모로 새로운 가능성을 타진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계산도 있었을 것이다. 야스다 기미요시가 감독을 하고 외팔이 검객 왕강이 혈혈단신으로 (쇼 브라더즈 버전의 외팔이 검객의 이름은 방강이며 아내가 있다) “단지 조용히 살고 싶어서” 일본을 찾아왔다가 그만 왕족 행렬에 휘말려 들어 우연히 만난 중국인 부부가 죽고 거기서부터 이런저런 이야기가 전개된 끝에 결국 오해에 오해가 반복되면서 자토이치와 최후의 대결을 벌이는 ‘자토이치’ 연작 22번째 영화 <신 자토이치, 물리쳐라! 당나라에서 온 검객(新 座頭市, 破れ!唐人劍)>이 만들어졌다. 이 영화는 화어권 개봉을 위해서 일본판과 홍콩판을 별도로 편집했고 각 버전은 각 나라의 주인공이 최후의 대결에서 승리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래서 홍콩판은 서증굉(徐增宏)이 다시 편집했고 제목은 <獨臂刀大戰盲俠>이다. 세 개의 후일담. 그 하나. 쇼 브라더즈로서는 황당무계한 상황을 맞이한 꼴이 되었다. 아마 장철의 입장에서도 망연자실했을 것이다. 나는 1971년 홍콩의 판권분쟁에 관한 정보를 갖고 있지 않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골든 하베스트의 왕우판 ‘독비도’ 제작을 막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대신 장철은 자신의 새로운 주인공인 (그때는 ‘깡따위’로 알려진) 강대위를 주연으로 이야기가 시작하자마자 오른팔을 자기 손으로 자른 다음 왼팔 검법을 익힌 주인공을 내세워 <신 독비도(新 獨臂刀)>를 연출하였다. 이 영화가 나쁘지는 않지만 (마지막 시퀀스 전체는 장관이다) 이 연작에 감돌던 그 어떤 매혹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장철도 그렇게 생각한 것 같다. 그는 더 이상 ‘독비도’ 연작을 찍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왕우는 온갖 변주를 만들면서 ‘외팔이’ 시리즈를 계속해서 제작하고 종종 연출도 직접하면서 주연 영화에 출연하였다. 장르와 연출과 스타의 삼각형 중 한쪽 꼭짓점이 괄호 쳐졌을 때 도형은 어떻게 견딜 수 있는가, 에 관한 하나의 사례. 후일담 그 둘. 일본 진출은 생각만큼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본 관객들은 이 영화를 홍콩에서 온 새로운 스타의 발견이라기보다는 ‘자토이치’ 연작의 외전(外傳) 정도로만 받아들였다. 오히려 전 지구적 DVD 마켓이 (말 그대로) 개방된 다음 좀 괴상한 경로를 거쳐서 (일부 서방세계 자토이치 ‘덕후’들의) 컬트영화의 반열에 올랐다. 진정한 의미에서 골든 하베스트의 꿈이 이루어진 것은 왕우의 다음 세대, 이소룡이 그들을 찾아왔을 때에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첫 번째 영화 < 당산대형 >, 그리고 < 정무문 >, 하지만 그건 이 글과 상관없는 후일담이다. 후일담 그 셋. 그런 다음 ‘자토이치’ 연작은 네 편이 더 만들어진 다음 거기서 끝났다. 다음 세대들이 각자 자기의 방식으로 새로운 ‘자토이치’를 연출했지만 그건 오마주거나 향수로만 반복되었다. 가츠 신타로 없는 ‘자토이치’는 아마도 왕우 없는 ‘외팔이’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 외팔이와 맹협 > 신문광고 이제 세 번째 이야기의 차례. 1972년 7월 30일 서울 단성사. 그때 일본영화는 아직 수입을 허락받지 못했다. 일본에 관한 대중적 상품들은 종종 적대적이거나 경멸을 담아서 (그리고 반민족적이라는 위협적인 어조로) 왜색문화로 불리었으며 영화와 대중음악은 모두 금지되었다. 금지는 근거 없는 소문을 만들었고, 소문은 덧칠이 된 전설을 만들었다. 들리는 풍문에 의하면 일본 사무라이 영화들은 화면에 피 칠갑을 하고 시체들은 칼바람에 사지 절단되어 온 사방에 뒹굴고 대결장면들은 너무나 눈부셔서 화면을 마주 보기도 전에 끝난다고 전해졌다. 그런데 갑자기 홍콩영화로 둔갑한 < 외팔이와 맹협 >이 개봉을 한 것이다. 모두들 말하진 않았지만 이 영화가 일본 사무라이 활극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심지어 중학생이었던 나도 알고 있었다. 맹렬하게 홍콩영화를 보던 나(와 내 친구들)은 하나의 사건으로 이 사태를 받아들였다. 정말로 불가능한 순간이 이루어진 화면을 보고 싶었다. 꿈의 영화. 당신은 내 마음을 이해할 것이다. 아주 가끔이긴 하지만 무엇을 상상하고 있어도 그보다 더 훌륭한 영화를 우리는 기적처럼 마주치곤 하지 않았던가. 각자의 비장의 목록들. 그러나 <외팔이와 맹협>은 나를 완전히 실망시켰다. 장철의 영화처럼 비장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미지의 영화가 만들어낼 수 있는 신비로운 비밀 따위도 없었다. 액션 시퀀스는 시시했고 왕우는 홍콩 쇼 브라더스 영화에 비해서 눈에 띄게 둔해 보였다. 게다가 가츠 신타로가 연기하는 맹협은 무언가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두 팔 중의 하나를 제거한 다음 던져진 제한적인 조건. 두 눈을 멀게 만든 다음 시각적인 암흑 상태에서 받아들여야 하는 세상의 청각 기호들. 두 개의 조건을 바탕으로 마주한 세상의 상이한 재구성. 나는 아직 육체의 권리를 놓고 신체훼손이라는 문제를 심각하게 질문할 나이가 아니었다. 하지만 <외팔이와 맹협>은 그해 여름 큰 성공을 거두었다. 나는 아무 정보도 없이 <외팔이와 맹협>이 ‘독비도’ 연작의 팬들을 능멸하는 영화일 뿐만 아니라 이런 영화가 성공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멋대로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해 추석, 9월 22일에 < 삼국대협 >이 개봉하고 말았다. 그렇게 쓸 수밖에 없다. 대중적 성공의 재생산. 이제 여기에 조선의 일지매를 더해서 ‘독비도’를 한국영화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황당무계한 전술적 배치. 그런데 여기에는 그나마 <외팔이와 맹협>에 출연했던 왕우도, 가츠 신타로도 없다. 물론 누구든 한쪽 팔을 숨기고 외팔이 검객 방강을 연기할 수 있으며, 흰자위를 드러내고 눈을 껌뻑거리면서 맹협 자토이치를 흉내 낼 수 있다. 하지만 배우가 장르 안에 들어가 고유한 스타가 된 다음 텍스트의 주인을 자처할 때 그 자리를 훔쳐내는 것은 단순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이미 주인의 자리에 들어선 고유한 상대와 사랑에 빠진 관객들의 연애감정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이 나타난 다음 그 사람이라고 허풍을 늘어놓기 시작할 때, 그건 정말이지 마치 같은 옷을 입고 나온 전혀 다른 상대와 데이트를 하라는 요구만큼이나 무례한 짓이다. 일단 연애감정이 발생하면 내가 사랑한 상대방이 왕우인지 외팔이 방강인지 그 경계선이 애매모호해진다. 흐릿해진 경계. 이때 경계를 두고 마술이 벌어진다. 그 둘은 서로를 교환하면서 매혹의 주체가 누구였는지를 시시각각 밀어내거나 끌어당기기 시작한다. 데이트는 미묘해서 아주 작은 부분들까지도 때로는 능동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하고 대부분 그냥 지나쳤을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된 것들이 그 어느 것보다도 힘들의 관계 안에서 (정감으로서의) 무드를 자아내거나 (가시적인 형식으로서의) 모드를 이룬다. <삼국대협>은 어린 내게 허풍 뒤에 나타난 거짓말처럼 보였다. 여기엔 물론 어떤 종합도 없고 마찬가지로 어떤 분화도 없었다. 하나가 다른 하나로 변주된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다시 그 안에서 같은 것 안의 새로운 것이 나타난 것도 아니다. 여기엔 우스꽝스러운 위장이 있을 뿐이었다. 그뿐이었다. 이 어처구니없는 줄거리. 1598년 선조 31년. 임진왜란이 끝나고 명나라 사신의 방문을 앞둔 조정은 중신들이 모여 의논하면서 “상감의 신표나 다름없는 귀중한 나라의 보물인 천하의 명검 천룡검마저도 왜놈들에게 약탈당했다는 사실이 탄로 나면 나라의 체면이 뭐가 되며 우리들은 무슨 면목으로 상감을 대할 수 있단 말이요”라며 탄식하자 다른 중신이 “그저 사생결단 하고 일본 땅으로 건너가 천룡검을 찾아오는 수밖에 어쩔 도리가 없는 줄 아오”라고 답한다. 그러자 “그렇다고 군사를 파병할 수는 없는 일...” 하자 “허나 지모를 겸한 고수급 검객을 한 사람 밀파한다면 일루의 희망은 있을 것 같소이다만...” 라고 덧붙인다. 구태여 길게 대사를 옮긴 것은 조정에서 중신들의 대화 장면이 녹음대본에는 남아있지만 현재 복원된 판본에는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극장 상영판본에 대한 기억이 희미하고, 현재 디지털 복원판은 이 씬이 녹음대본에만 있고 상영판본에서는 편집된 것이 아닐까, 라는 추론을 하게 만든다) 문제는 이 장면이 없기 때문에 (혹은 없다면) 일지매가 왜 일본까지 와서 악전고투 끝에 천룡검을 빼앗아 조선에 가져가야 하는지 잘 설명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외팔이 검객과 맹협의 사연은 플래시백으로 등장하면서 일지매만 어떤 과거의 장면도 없기 때문에 마치 신비한 인물처럼 감춰진다. (현재의 복원판본의) 첫 장면은 요란한 사운드트랙과 함께 느닷없이 검은 복면을 두르고 지붕에서 나타난 일지매가 자신의 무술을 뽐내듯이 뛰어내려 일당 수십 명의 검사(劍士)들을 추풍낙엽처럼 무찌른다. 그런 다음 거만하게 칼집에 칼을 꽂으며 복면을 벗으면 곁에 ‘일지매 신영일’이라는 자막이 뜬다. 두 번째 등장인물. 한쪽 팔이 없는 무사가 건물의 실내로 들어서자 기다렸다는 듯 열댓 명이 칼을 빼 들고 달려들자 순식간에 그들을 물리치고 마찬가지로 거만한 표정으로 내려다본다. 그러면 곁에 ‘외팔이 김기주’라는 자막이 오른다. 두 가지 지적. 이미 충분히 설명했지만 ‘독비도’는 왕우여야만 한다. 두 번째 불만. 아마도 임권택 은 <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 >를 보긴 했지만 (인터뷰에서 질문하자 이 영화를 재미있게 보았다고 대답했다) 주의 깊게 보지 않은 것 같다. 혹은 이 연작에 별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독비도’는 장철의 버전이건 ‘외전편’ < 외팔이와 맹협 >이건 언제나 ‘외팔이 검객’ 방강은 절반으로 동강난 칼을 사용하였다. 그건 하나의 약속이다. 왜냐하면 팔이 잘려진 후 새로 검법을 익히는 중에 온전한 검을 사용하면 균형을 잡기에 너무 무거웠기 때문에 반검(半劍)을 선택하였다. 이건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에 영감을 얻어 연출된 (아마도 최상의 리메이크 버전일) 서극의 < 칼 >에서도 지켜진다. 그러나 임권택 버전의 ‘외팔이’ 검객은 삼국의 협객 중 어떤 결함도 없는 가장 큰 칼을 사용하고 있다. 한 가지 더. 왕우 버전의 ‘외팔이’ 검객은 마치 단 한 벌의 옷을 지닌 것처럼 검은 옷만을 입었다. 임권택 버전의 ‘외팔이’는 단 한 번도 검은 옷을 입지 않는다. 장르 영화에서 옷은 기호 체계일 뿐만 아니라 신화를 구성하는 다소 복잡한 코드군(群)을 형성한다는 사실을 환기해주기 바란다. 어떤 의미나 상징이 개입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혹은 그 어떤 해석을 요구하지 않아도, 기능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거기서 만들어지는 즐거움이라는 유혹이 당신의 무언가를 건드리는 중이다. 무언가? 잘 설명되지 않는 쾌락. 그 안에서 오랫동안 기억에 머물고 있는 알 수 없는 섬세함. 어떤 비평적 시선도 거절하면서 거기서 비로소 온전하게 이 영화를 보는 관객과의 은밀한 유희가 시작된다. < 삼국대협 >은 이 유희를 처음부터 포기하고 있(거나, 혹은 모르거나, 아니면 무시하고 있)다. 세 번째 등장인물. 지팡이를 더듬거리면서 다리 위를 걸어오는 자토이치는 갑자기 나타난 사무라이들이 자기를 둘러싸자 언제 그런 걸음을 걸었나 싶게 재빨리 칼을 꺼내 순식간에 쓰러트린다. 그러면 곁에 ‘맹인 김희라’ 라는 자막이 등장한다. 포스터에도 ‘盲俠’이라고 소개하면서 정작 영화 자막에 ‘맹인’이라고 써 있는 것은 좀 어리둥절하다. 그런 다음 이야기는 일본을 무대로 해서 (물론 모두 한국에서 찍었다) 일지매와 외팔이 검객, 맹협이 서로의 이해관계 때문에 사소한 오해를 반복하다가 세 명이 힘을 합쳐 모두의 원수이기도 한 구로다 시게야쓰의 적진에 쳐들어가 함께 물리치고 천룡검을 되찾은 일지매는 일본을 떠난다, 는 줄거리이다. 나는 구태여 이야기의 디테일을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이렇게 말하긴 했지만 < 삼국대협 >의 모든 장면이 ‘독비도’와 무관한 것은 아니다. 나는 임권택 이 <삼국대협>을 연출하기 위해서 < 돌아온 외팔이 >를 보았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대나무 숲에서의 활극장면. 장철은 이 장면을 쇼 브라더즈 세트 안에서 찍었다. 외팔이 협객 방강은 대나무 숲에 숨어있던 적을 물리치기 위해 재빨리 경공술로 날아오른 다음 대나무를 베고 쓰러진 숲에서 모습을 드러내자 잘려나간 대나무를 밟아가면서 위에서 아래로 공격한다. 임권택은 대나무 숲에 가서 이 장면을 찍었다. 잠입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위장을 하여 구로다의 편에 선 일지매가 (그의 돈을 훔치려다가 그만 사랑에 빠진) 은월과 함께 대나무 숲을 거닐다 그를 찾던 (기다리던?) 외팔이 검객과 맹협을 마주친다. 하지만 이건 구로다의 무사들이 파 놓은 함정이었다. 대나무 숲에서 모두들 칼을 뽑고 활극이 펼쳐진다. 임권택은 진행을 하던 영화의 물리적 리듬이 갑자기 변주를 만들어내는 것을 즐기지 않는 감독이다. 그래서 101편의 영화에서 슬로우 모션을 마주치는 것은 이례적인 순간이다. 나는 1980년 < 짝코 >에서 슬로우 모션을 본 다음 임권택이라는 영화의 속도 안에서 두 번 다시 슬로우 모션을 보지 못했다. < 장군의 아들 >에서 김두한이 골목에서 학생 깡패 오찌아리를 물리칠 때의 짧은 스텝 프린팅, 그리고 <서편제>에서 동호가 누이를 떠올릴 때 이미 눈이 멀어 지팡이를 짚고 서성거리는 송화, 그런 다음 마지막 장면에서 눈 내리는 날 소녀의 손에 이끌려 떠나가는 송화를 보여주는 장면에서의 옵티컬 프린팅을 제외하면 영화의 이미지들은 질서정연하게 24분의 일초로 진행된다. 하지만 이 대나무 숲에서의 활극에서 활동하는 슬로우 모션은 아름답다. < 협녀 > 포스터 먼저 장소. 대나무 숲은 호금전이 < 협녀 >에서 빛과 안개, 바람으로 가득 채운 다음 동양화의 풍경으로 만든 공간이다. 무협영화 안에서 대나무 숲의 전통은 리안의 <와호장룡>과 장이모우의 <연인>에서 매너리즘의 대상이 되었다. 임권택 이 <협녀>를 보았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 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 영화는 서울에서 개봉한 적이 없고, 아직 DVD는 발명되지 않았으며, 1969년에 제작된 이 영화가 칸 영화제에 첫 상영된 것은 1975년의 일이다. < 삼국대협 >은 <협녀>에 지나치게 가깝게 있다. 여기서 임권택이 대나무 숲을 선택한 것은 풍경(이 만들어내는 빛과 그 나무를 건드리는 바람의 힘)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수직으로 서 있는 나무들의 방향과 칼로 베어 쓰러트릴 때 만들어내는 빗변의 대각선 운동 때문이다. 그런 다음 사방으로 서 있던 대나무들이 쓰러지면 새롭게 확보할 수 있는 시야의 확장과 활동 반경의 접선을 더 멀리 펼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다음 동선. 이 장면은 세 사람이 서로 대결하는 장면으로 시작하지만 구로다의 사무라이들이 일제히 공격을 시작하면서 살진(殺陣)은 세 개의 집합으로 분화된다. 여기에 일지매와 숲에 함께 온 여인 은월이라는 문제가 남는다. 그녀는 무술을 전혀 할 줄 모르기 때문에 이 집합의 어느 안으로도 들어갈 수 없다. 만일 구태여 끌어들이려면 일지매가 그녀를 보호해야 하는 상황을 연출해야만 한다. 재빠른 무술과 전혀 대결의 리듬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위험한 생명의 자리 사이의 불협화음이 만들어내는 긴장의 구도. 그런 다음 예정된 장르의 (따분한) 약속. 그 둘 사이에서 주인공은 희생을 무릅쓰고 자신의 리듬에 대한 제약의 조건을 받아들여야 한다. 물론 그녀는 그럴만한 가치가 있어야 한다. 임권택은 완전히 다른 방식을 택했다. 그녀를 세 개의 집합 바깥으로 내보내는 대신 이 삼각형의 구심점으로 활용한다. 대나무 숲에서의 활극 장면에는 지금 하나의 극(劇)을 바탕으로 한 기승전결이 없었을뿐더러 일지매와 외팔이 검객, 맹협은 각자 싸우고 있기 때문에 장소의 공집합 이외에 어떤 이접적 접합의 이음새도 갖지 못하고 마치 다 각자의 활동영역 안에 머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장면은 하나의 씬이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이들은 검의 활동 영역을 확보하기 위해서 시야 앞의 대나무를 계속 베어나간다. 그때 대나무는 어느 각도에서 베어도 은월을 향해서 쓰러져 내린다. 말하자면 은월은 이 씬에서 대나무들이 쓰러져 내리는 방향을 유도하면서 움직이는 자석의 미장센이다. 그래서 세 개의 집합의 쇼트들은 매번 은월을 중심으로 오가면서 왕복운동을 계속한다. 세 번째 문제. 이접적 종합을 위한 모멘트. 검의 활동. 대나무 숲 장면이 무심코 볼 때는 그저 살진(殺陣)의 교집합을 단순하게 변주시키면서 숲 안에서 이동하는 것에 불과한 것처럼 보이지만 (물론 그렇기도 하지만) 여기서 동선의 모멘트는 접촉의 괴상한 무효로 이루어져 있다. 분명히 이 장면은 그것이 일대 일이건, 일대 이건, 일대 다수이건 서로 검을 겨루면서 진행되는데 정작 검과 검이 서로 부딪치는 순간이 거의 없다. 끊임없이, 그리고 반복적으로 휘두르는 장면만이 서로의 검의 곡선을 그은 다음 그 반경 거리 안으로 들어가서 쓰러지거나 바깥에서 마주하는 거리를 유지하면서 진행된다. 무심결에 볼 때에는 그게 잘 보이지 않는다. 이유는 세 가지이다. 하나는 과도하게 사운드 효과를 사용하고 있어서 마치 검에서 어떤 힘(劍氣)이 반경거리를 확장한 것 같은 착시를 이용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단지 쇼트가 짧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 연결 지점 없이(match_cut) 어떤 생략의 순간들만으로 (jump_cut)으로 편집했기 때문에 칼과 칼이 부딪치는 순간이 없는데도 그걸 생략한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마지막 이유가 좀 기괴하게 보인다. 이 씬에서 검술 장면을 전개하면서 동작을 연출한다기보다는 마치 그 동작의 어떤 순간을 일시적으로 정지시켜서 찍은 것만 같은 순간들의 쇼트를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 슬로우 모션은 하나의 장치이다. 샘 페킨파는 액션의 방점을 찍기 위해서 갑자기 어느 순간을 멈추듯이 사용한다. 무엇보다도 < 와일드 번치 >. 몹시 인상적인 < 가르샤 (의 목을 가져와라)>. 장철은 할 수 있는 한 늦추기 위해서 시간의 확장으로 이용한다. 막상막하의 < 심야의 결투 >와 < 복수 >. 그리고 리듬의 인상주의라고 할 만한 왕가위의 < 화양연화 >. 임권택은 단락(短絡)의 순간에 갑자기 사용한다. 거의 카오스에 가까운 대나무 숲에서의 활극 장면들은 쇼트가 제각각일 뿐 아니라 사실상 검술 대결의 순간이 없기 때문에 쇼트들의 콜라주 같은 느낌마저 든다. 이렇게 되면 고전적 영화의 규칙 안에서 유기적 구성의 윤곽이 부서질 수 있는 순간을 서로 다른 리듬의 교차라는 불협화음의 몽타주로 해결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우리가 알고 있는 몽타주의 프로그램에서 이것은 매우 위험한 상태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장르의 대가들이 만들어낸 계보를 경유하여 만들어진 이 장면은 활극장면이기 때문에 우리와의 약속안에서 허용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이 씬 전체가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그건 열세 살의 나이에 볼 때도 그렇게 생각했다. 단지 지금은 그걸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장면의 디테일이 미학적으로 허락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곤궁에 처한 아름다움이다. 하지만 내가 정말 설명하려는 장면은 거기가 아니다. 알 수 없는 불쾌감. 무언가를 상실했다는 기분을 넘어서서 무언가를 건드리고 있다는 느낌을 불러일으켰을 때 나는 (여기서 서로 다르게 사용한 두 개의) 무언가에 대해서 대답하고 싶어졌다. 그것이 < 삼국대협 >을 간절할 정도로 다시 보고 싶게 만들었다. 여기엔 내가 미처 듣지 못한 소음과 같은 영화적 순간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마저 세우고 싶게 만들었다. 명백히 실패했는데 단지 그것만으로는 통과할 수 없게 만드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어떤 메아리랄까, 말하자면 내가 이제까지 다루어 온 것과는 전혀 다른 어떤 어둡고 축축한 불길함이 거기 버티고 있었다. 처음부터 다시 보면서 단지 그게 기분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시퀀스가 되었을 때 어떤 대답을 거기서 보았다. 구로다의 성에 붙잡혀 온 외팔이 검객과 맹협, 그리고 정체가 탄로 난 일지매는 감옥에 갇힌다. 여기에 목숨을 걸고 (일지매와 사랑에 빠진) 은월이 구하러 온다. 그들은 이제 힘을 합쳐 구로다의 사무라이들을 물리치고 마침내 구로다와 대결을 한다. 구로다는 명검 천룡검을 뽑아든다. 말하자면 <삼국대협>의 클라이맥스. 이때 어이없는 상황이 발생한다. 구로다가 천룡검을 휘두르자 이 세 사람의 칼이 모두 잘려나간다. 무시무시한 검. 게다가 구로다는 (영화 속의 설명에 따르면)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심복에 오른 장군 중의 한 명이다. 대결이 시작되자마자 칼이 모두 잘려나간 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때부터 미로처럼 이어진 일본식 다다미방의 방문 사이로 이리저리 도망 다니는 게 전부이다. <삼국대협>은 유머가 있긴 하지만 희극이 아니다. 이들이 구로다를 피해 도망 다닐 때 천룡검에 그만 바지가 찢겨져 나가 속옷 바람이 되고, 그나마 흘러내려 엉덩이를 보일까봐 두 손으로 치켜 올리면서 겅중겅중 뛰면서 칼을 피해 도망 다닌다. 구로다는 이들을 뒤따라 천룡검을 움켜쥐고 이 방 저 방 뛰어다닌다. 헛 칼질. 전혀 위험해 보이지도 않은 채 절대로 천룡검에 베이지 않을 것이 분명하게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도망 다니는 세 사람. 이때 약간 프레임의 속도를 빨리해서(slow_speed_shooting) 마치 슬랩스틱 코미디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왜곡되고 깨어진 표면. 잘못 작동되기 시작한 장르의 장치들. 나는 중얼거렸다. 아아, 이 노골적으로 잔인한 장면이여. <삼국대협>은 안티 클라이맥스의 영화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가 될 것이다. 나는 이미 대나무 숲에서의 활극 장면에 대해서 장황하게 설명했다. 임권택 은 이 장면을 장르에 충실하게 묘사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우리를 부분적으로나마 만족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무언가 자해하는 심정으로 스스로 장면 전체를 부숴버리고 있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왜 그런지에 대해서 대답할 수 없다. 그건 소설의 영역이다. 그 대신 여기서는 어떻게, 에 대해서만 쳐다볼 생각이다. 임권택은 일지매와 외팔이 검객과 맹협의 검술을 여기서 보여줄 생각이 없다. 그렇지 않다면 시작하자마자 그들의 검을 모두 잘라버려야 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고 여기서 구로다의 검술이 가히 절정이라는 것을 보여주어도 이미 잘려나간 상대방의 검 앞에서 달리 보여줄 수 있는 순간의 장면이 없다. 정말 이상한 것은 의도적으로 보여줄 게 없는 상황을 만들어버렸다는 것이다. 이때 이 말을 비틀고 싶다. 정말 보여주고 싶은 것은 이 상황이 우스꽝스럽다는 것이다. 이 씬의 중요한 특징은 갑자기 장르를 이동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제까지 왜곡되고 부풀려진 방식의 긴장을 갑자기 망쳐 버리면서 재빨리 지금까지 전혀 건드리지 않았던 (혹은 금지되었던) 상황으로 몰아넣은 다음 무언가를 교란시킨다. 무언가? 여기에서 저기에로, 혹은 저기에서 여기에로. 말하자면 도약. 아니, 그 말이 무언가를 떠올리게 한다면 단지 추락이라고 말해도 좋다. 이건 도약이자 추락이다. 내 대답은 의미 안에서 갑자기 그 자체의 효과를 무의미하게 만덫였模?어리둥절한 횡단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수평으로 이동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이 마지막 장면 전체를 기괴하게 만들어버린다. 여기에는 유머도 없고, 역설도 없고, 패러디도 없고, 어떤 냉소도 없다. 게다가 여기서 무언가를 하려다가 실패했다기보다 오히려 그 결과를 뻔히 알면서도 그냥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그걸 해버렸다는 것이다. 우스꽝스러엔옙실?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상황의 무의미. 내가 여기서 보는 것은 달리 말하기 힘든 우울증이다. 무언가를 없애버리고 싶어서 눈앞에 있는 것을 증오하면서 그것을 만들어내는 영화 자체를 나쁜 것으로 규정 내려 버리고 마는 이 이상한 감정 상태 앞에서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나는 임권택의 심정을 알지 못한다. 그럴 뿐만 아니라 알 수도 없다. 그 자신도 알지 못할 것이다. 내가 말하는 것은 영화의 규칙 안에서 자기가 펼쳐놓은 상황에 대해 쓸모없음을 탄식하는듯한 슬픈 웃음이다. 여기에는 자기 안에 들어온 나쁜 것과 저항하며 싸우는 대신, 혹은 달래며 자기편을 만드는 대신, 거기에 편승하는 대신, 거기에 의지하는 대신, 그저 상처받고 불안정한 상태에서 이미 벌어진 상황을 어쩔 수 없다는 듯, 마치 남의 일이기라도 한 듯, 그냥 아무것도 감추지 않은 채, 결점을 고스란히 드러내면서, 고통받고 있는 듯한 방법을 택하고 있다. 나는 비로소 알았다. 쇼 브라더즈 영화를 보면서 언제나 내가 즐긴 것은 (그것이 거짓이라 할지라도) 매번 비극의 영웅적 승화를 맛보는 순간이었다. <삼국대협>은 그 순간을 무의미와의 만남이라고 선언해버리듯이 만든 다음 어떤 불연속성의 자리에로 데려가 망쳐놓았다. 우울한 목소리. 거기엔 볼 것이 없어. 만일 멜라니 클라인이라면 훨씬 정교하면서 시적으로 내 마음의 상태를 설명했을 것이다. 거기서 내 즐거움은 토막 난 상태가 되어버렸다. 영화는 (그때라면) 미처 반격도 하기 전에, (지금은) 더 설명을 할 수 있기 전에 재빨리 끝난다. 나는 <삼국대협>을 다시 보면서 하여튼 대답을 찾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 대답은 나를 우울한 슬픔에 젖게 만들었다. 거기엔 임권택의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어떤 시행착오의 힘도, 무언가를 참고 견디면서 그 안에서 새로운 것을 다시 만들어내는 의지도, 아니 최소한의 영화에 대한 긍정도 잃어버린 것만 같은 기분을 내게 안겨 주었다. 그 마지막 장면의 순간에서 내가 본 것은 고통받는 시간뿐이었다. 하여튼 이 이야기를 마치기는 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 장면 없이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때 그 장면을 만들어내는 과정의 고통을 거기에 고스란히 남겨놓았다. 어떤 비장감도 없이, 지나칠 정도로 통속적인 상황 안에서, 그저 거기서 덧없다는 듯, 거기서 끝날 수 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영화가 끝난다. 나는 여기서 영화가 또 다른 의미에서 과정의 예술이라는 것을 배운다. 악순환은 중단되어야 하고 주사위는 다시 던져져야 한다. 임권택은 이듬해 < 잡초 >를 찍었다. (계속) 1972년 90분 컬러 2.35 감독 임권택 우진필름 각본 권용 촬영 최호진 조명 최입춘 편집 김희수 음악 황문평 신영일 ... 일지매 김기주 ... 외팔이 김희라 ... 맹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