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은 영원히
- 감독
- 전택이
- 제작년도
- 1960
- 출연
- 노경희, 전택이, 이민, 김지미, 이민자, 박암, 최남현, 황정순, 도금봉, 이대엽, 주선태, 최삼, 석금성, 복혜숙, 방수일, 성소민, 양일민, 김칠성, 추석양, 황남
[사진] <추억은 영원히>(전택이, 1960)에서 이민과 노경희 이민(李敏)은 1947년 서정규 감독의 <불멸의 밀사>(1947)의 이준 열사 역으로 영화계에 발을 디딘 후 한중영화사 제1회작인 강춘(江椿) 감독의 16밀리 시대극 <연화(蓮花)>(홍서량, 박양실 주연, 1948)와 반공영화 <화랑도>(염매리 공연, 1951) 두 편에 출연했다. <불멸의 밀사>는 이준 열사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한 전후 시기의 독립운동의 이면을, <연화>는 조선조 제25대 왕 철종 12년에 일어난 대교육자의 분기(奮起)와 기생 도화(道花)의 비련을 그린 것이다. (『민주일보』, 1948년 6월 27일, 광고) 배역 모두 2천여 명의 응모자 중에서 선발하였다. (『대동신문』, 1948년 7월 8일) [사진] 이준 열사 역을 맡은 이민의 첫 출연작 <불멸의 열사> (사진제공: 김종원) <화랑도>는 북한에서 월남한 청년이 헤어진 애인을 만나 반공전선에 나서는 얘기로, 촬영 중에 6.25를 만나 중단됐다가 피난지인 대구에서 완성한 것이다. 이런 내용의 특성상 <화랑도>는 개봉 후 상이군인들이 조직한 영화계몽반에 의해 남한 일대의 각 지역에서 상영되기도 (「상이군인들이 영화로 계몽운동」, 『조선일보』, 1952년 11월 13일) 했다. 그는 이렇게 일찍이 영화계에 발을 들여 놓았으나 한동안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다. <춘향전>과 <자유부인>의 히트 전후 1953년 휴전과 함께 정부가 서울로 환도한 후에도 대부분의 영화인들은 부산, 대구 등지에 남아 있었다. 그해 초겨울이었다. 대구의 자유극장 옆 단골다방에서 차를 마시고 있던 이민의 눈에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 들어왔다. <임자 없는 나룻배>(1932)와 <갈매기>(1948)로 유명한 이규환 감독이었다. 이민은 여종업원에게 차 한 잔을 시켜 보낸 뒤 의아한 표정을 짓는 그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이 일은 결국 이규환 감독의 <춘향전>에 기용되는 계기가 되었다. 남원의 기생 딸 성춘향(조미령 분)을 사랑하게 된 사또의 아들 이몽룡 역이었다. 이민은 연기뿐만 아니라 제작 진행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예정했던 남원 대신 촬영지로 선택한 경북 달성군 가창면 냉천동이란 마을은 로케 장소로는 적합했으나 기계를 움직일 동력이 없었다. 전력을 끌어오기 위해서는 가까이 있는 달성광산의 도움이 필요했다. 다행히 일이 쉽게 풀리느라 마침 그곳 광산소장이 이민의 경성제대 공과 시절 동기생이어서 전기를 끌어올 수 있었다. [사진] 이규환 감독의 <춘향전>, 여배우는 조미령 이렇게 필름 길이 1만 2천자, 상영시간 2시간 15분으로 완성한 <춘향전>이 1955년 1월 16일 서울 국도극장에 개봉되자 첫 날부터 초만원을 이루었다. 관객들이 서울 변두리는 물론 인천, 수원 등지에서까지 트럭을 동원하여 단체로 몰려들 정도 (이규환, 「남기고 싶은 이야기(50) ‘영화60년’」, 『중앙일보』, 1980년 2월 21일) 였다. 그 결과 <춘향전>은 20일 동안 10만 여명이 관람하여 당시까지 한국영화사상 최다 흥행 기록을 세웠다. 이에 따라 이민은 여주연인 조미령과 함께 일약 국민적인 스타로 떠올랐다. 여세를 몰아 <막난이 비사>(김성민, 1955), <단종애사>(전창근, 1956)와 <애인>(홍성기, 1956), <자유부인>(한형모, 1956) 등에 기용되었다. <막난이 비사>에는 조선조의 홍문관 정오품 벼슬인 교리(郊理)로 등장했다. 진사의 외동딸(이경희)을 소실로 삼으려다 반대에 부딪치자 그 아버지를 역적으로 몰아 목을 치게 하는 악역이었다. <단종애사>에는 세종대왕에 이어 등극한 후 재위 2년 만에 어린 단종을 신하에게 부탁하고 죽은 비운의 문종대왕 역을, 김내성 원작 <애인>에는 요정마담의 딸인 여대생(노경희)을 좋아하는 청년으로 나와 아프레게르적인 끼를 드러내었다. 그러나 이민에게 결정적인 돌파구를 열어준 것은 크레인 촬영을 시도한 정비석 원작 <자유부인>이었다. 가부장 중심의 유교적 인습사회에 외래문화가 들어오면서 변해 가는 여성들의 모습을 한 대학교수 부인(오선영: 김정림 분)을 통해 보여준 이 영화에 춤으로 그 부인을 유혹하는 건달 대학생 신춘호역으로 등장했다. 그는 ‘마담 익스큐즈 미' ‘알러브유’ 따위의 영어단어를 읊조리며 능란하게 대학교수 부인의 탈선을 부추겼다. 이 영화는 1956년 6월 9일 서울 수도극장(현재의 스카라)에서 개봉되었고, <춘향전>의 흥행을 무색하게 하는 대박을 터뜨렸다. [사진] <자유부인>의 이민과 안나영(오른쪽) 그는 잇따라 <실낙원의 별>(홍성기), <애원의 고백>(홍성기), <여성전선>(김기영), <찔레꽃>(신경균), <청실홍실>(이상 1957, 정일택) 등 5편에 이어 58년 <그 밤이 다시 오면>(노필), <꽃도 생명이 있다면>(홍일명), <낙엽>(박구), <느티나무 있는 언덕>(최훈), <모정>(양주남), <청춘비가>(이규환), <별만이 아는 비밀>(이선경), <별아 내 가슴에>(홍성기), <촌색씨>(박영환), <흐르는 별>(김묵) 등 12편에 출연했다. 주로 신문연재소설과 연속방송극을 원작으로 한 것이다. [사진] <청춘비가>의 이민과 김아미(오른쪽) (사진제공: 김종원) <청실홍실>에는 사장 딸(엄앵란)의 구애에도 전쟁미망인(이민자)을 사랑하는 운전기사로, <그 밤이 다시 오면>에는 잡지사 여사원(이빈화)을 임신시키고 회사 돈을 훔쳐 이용하려다가 실패하자 자취를 감추는 회사원으로, <청춘비가>에는 일찍이 고아가 돼 헤어졌던 여동생(김아미)을 혈육인 줄 모르고 사랑하게 되는 기구한 화전민 출신의 오빠로, <별아 내 가슴에>에는 대학생(김동원)과 기생(주증녀)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사귀는 여대생(김지미)의 양부가 자신의 아버지임을 모르는 출판사 사원으로, <흐르는 별>에는 아내를 두고 월남한 후 혼자 딸을 기르며 온갖 시련을 겪는 장님으로 각기 등장한다. [사진] <그 밤이 다시 오면>의 이민과 이빈화(사진제공: 김종원) 1959년에는 <가는 봄 오는 봄>(권영순), <꽃피는 시절>(최훈), <꿈이여 다시 한 번>(백호빈), <그 여자의 죄가 아니다>(신상옥), <내 사랑 그대에게>(하한수),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신상옥), <동백꽃>(정일택), <동심초>(신상옥), <밤마다 꿈마다>(이사라), <별은 창 넘어로>(홍성기), <비오는 날의 오후 세시>(박종호), <사모님>(최훈), <아내>(김묵) <애모>(신경균), <장마루촌의 이발사>(최훈) 등 27편으로 출연작이 증가된다. 태평양전쟁에 끌려갔다가 딸(전계현)을 남기고 죽는 <가는 봄 오는 봄>의 학도병, 6.25전쟁 때 작전을 수행하던 중 눈에 부상을 입고 국군병원으로 후송된 <꿈이여 다시 한번>의 육군 중위, 수절하는 전쟁미망인(이민자)을 사랑하는 <별은 창 넘어로>(홍성기)의 관상대 기사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 가운데 주목을 끈 것은 고아로 자란 한 여성(김지미)을 사랑하여 결혼 단계에 이르렀으나 전사했다던 그녀의 약혼자(최무룡)가 나타나면서 파국을 맞게 되는 <비오는 날의 오후 3시>의 미8군 소속 교포 2세 헨리 장 역이었다. 그는 이 영화에서 군복과 양복을 번갈아 입으며 때로는 양미간을 찌푸리는 특유의 표정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사진] <비오는 날의 오후 3시>의 이민과 김지미 최훈(9편)과 홍성기 감독(8편)의 단골배우처럼 나왔던 그가 신상옥 감독의 <그 여자의 죄가 아니다>,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 <동심초> 등 세편에 기용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미혼 여성(최은희)의 원치 않는 임신과 기혼 여성(주증녀)의 불행한 불임의 모순을 다룬 <그 여자의 죄가 아니다>의 너그러운 약혼자, 구한말 20세의 청년 이승만에게 개화학문을 배우라고 권하는 신긍우, 전쟁미망인(최은희)을 도우려는 친구에게 차용증부터 챙기는 <동심초>의 냉정한 증권회사 사장 신동일 역할이 그것이다. [사진] <그 여자의 죄가 아니다>에서의 이민과 최은희 이민은 이처럼 영화계에 진출한 뒤에 가장 바쁘고 화려한 시기를 보냈다.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할까, 이 기간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꿈이여 다시 한번>, <나는 고발한다>, <비오는 날의 오후 3시> 등 세편의 제작에 손댔다가 손실을 보기도 했다. 연극 경험 없는 명문대 출신 정상이 있으면 내리막길이 있는 법. 그의 독주는 얼마 못가 뒤에서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에 의해 위협받기 시작한다. 이미 <젊은 그들>(신상옥, 1955)로 주목받기 시작한 최무룡과 <피아골>(이강천, 1955)에서 두각을 나타낸 김진규의 도전으로 확고한 듯싶었던 인기의 성곽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러한 조짐은 1960년대에 이르면서 뚜렷이 나타난다. 60년 한 해 동안 출연 편수가 <애수에 젖은 토요일>(최훈), <추억은 영원히>(전택이), <투명인의 최후>(이창근), <햇빛 쏟아지는 벌판>(정창화) 등 10여 편으로 줄어들고 이마저도 예시한 네 편을 제외하고는 조연급에 밑도는 것이었다. <애수에 젖은 토요일>(1960)은 그동안 우리 영화가 즐겨 다뤄온 민족분단, 이산의 비극을 소재로 한 것이다. 6.25 때 헤어진 사람을 기다리다 지친 나머지 윤락가로 전락한 여자(김지미)가 죽은 줄 알았던 애인이 부상당한 군인의 모습으로 살아 돌아오면서 빚어지는 비극으로, 이민이 그 주인공 박경일 중위 역을 맡았다. <추억은 영원히>에는 6.25전쟁 중에 부모를 잃고 정신이상자가 돼 거리에서 방황하는 여자(김지미)를 간호하는 착한 운전기사로, <투명인의 최후>에는 부족한 능력 때문에 애인을 빼앗기고 음독자살을 기도했으나 죽는 대신 투명인간으로 변해 복수를 하는 끈질긴 캐릭터로 나타난다. 이후 이민은 62년 안현철 감독의 <그리움은 가슴마다>를 비롯한 <양귀비>(최훈), <여자의 일생>(신경균), <운명의 골짜기>(전창근) 등 5편과 63년 <돈바람 님바람>(김수용), <상처받은 두 여인>(이규환) <백마고지>(김수길) 등 3편, 64년부터 66년까지 <처녀성>(홍성기, 1964), <대석굴암>(홍성기, 1965), <눈물 젖은 왕관>(하한수, 1966)을 만들고 칩거에 들어간다. [사진] <여자의 일생>의 이민과 이민자(사진제공: 김종원) 그랬던 그가 10년 만에 장미희의 데뷔작 <성춘향전>(1976, 박태원)에 이몽룡의 아버지 이진사역으로 등장하여 관심을 끌었다. 19년 전 서른다섯 살 이몽룡이 이번에는 쉰여섯 그의 아버지가 된 것이다. 제작자의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렇게 이민은 1951년 <화랑도> 이후 4년여 동안의 공백기를 제외한 15년의 배우생활을 마쳤다. 그때까지 출연한 70여 편 가운데 <춘향전>(1955)을 비롯한 <막난이 비사>(1956), <단종애사>(1957),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1959), <양귀비>(1962), <대석굴암>(1965) 등 6편의 시대·역사극과 <햇빛 쏟아지는 벌판>(1960), <백마고지>(1963) 등 전쟁물을 제외하고는 60여 편이 넘는 작품이 멜로드라마였다. 그 후 영화계를 떠나 사업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던 이민이 17년 만에 홀연히 서울에 나타났다. 영화를 제작한다는 것이었다. 일흔 세 살 때였다. 한 도예공의 삶을 통해 장인정신을 기리는 <서편제> 유의 영화라고 했다. 자신이 시나리오를 쓰고 주연을 맡는다는 이 영화의 예산은 일화 5억 엔으로 학창시절 친구였던 일본아시아문예협회 키누가와 고오이치(衣川耕日) 회장이 부담한다고 했다.(⸀‘자유부인’ 플레이보이 이민 73세에 영화 찍는 인생」, 『부산일보』, 1998년 2월 6일) 그러나 일본과 중국의 합작을 꾀한 이 계획은 얼마 못가 무산되고 말았다. 이민은 1921년 2월27일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이시중(李時中)이다. 삼형제중 막내로 선비들과 어울려 시조창을 즐기고 사군자 치기를 좋아했던 아버지 때문에 어머니는 삯바느질로 생계를 꾸려야 했다. 그러나 춘천초등학교(1934년)와 춘천중학교를 졸업(1939년)하자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의 회고 (한국영상자료원 기획, 「이민」, 『한국영화를 말한다: 한국영화의 르네상스 1』, 도서출판 이채, 2005, 272~273쪽) 에 따르면, 벽이나 전주에 걸린 일본 시세이도(資生堂) 화장품의 선전을 위해 도자기로 만든 선전용 레이또 크림이나 눈에 넣는 와카모도라는 영양제 광고를 봐뒀다가 밤에 몰래 뜯어내 고철로 팔았다고 한다. 이렇게 3년 반 동안 모은 돈이 여비가 되었다. 1940년경이었다. 동경에서 가까운 사이타마현(琦玉県)의 우라와(浦和)고등학교에 들어가 아르바이트를 하며 1년 정도 다니다가 귀국했다. 이후 경성제국대학교(서울대 전신) 예과에 들어갔다. 그는 이 대학을 나올 무렵 길에서 발탁돼 영화와 인연을 맺게 된다. 스물여덟 살 때였다. [사진] <여성전선>(김기영, 1957)에서 이민과 조미령 1950년대 중반 이후 한때 최무룡, 김진규와 함께 삼각경쟁 구도를 이룬 이민에게는 당시의 일반적인 배우와는 다른 삼유삼무(三有三無)라는 특징이 있었다. 그것은 그만이 가진 세 가지 있음(三有), 즉 서울대학교(경성제대 후신)를 나온 명문대 출신이라는 점과 <춘향전>이나 <자유부인>과 같은 최다 흥행작을 일구어낸 광복 후 최초의 미국풍 댄디보이였다는 사실이다. 세 가지 없음(三無)은 연극 경험이 없는데다 본격적인 액션영화에 출연한 적이 없고 연기 외에는 대외 활동을 한 적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는 이 시기에 첨단적인 정장과 점퍼, 스웨터의 옷맵시로 여성들의 허영심을 자극한 대표적인 '니마이메(二枚目: 미남배우의 통칭)였다. *
한국영화의 또 한번의 꽃이 활짝 핀 1950년대 중반에 노경희 란 여배우의 위치는 든든했다. 흔히들 해방 후 1세대 글래머 스타가운데 노경희를 꼽지만 그는 역시 탄탄한 연기자로 평가되어야 한다고 본다. 노경희 는 뭐니뭐니 해도 < 피아골 >의 ‘노경희’이다. 1955년 이강천 감독이 만든 <피아골>은 지리산의 피아골을 무대로 하여 한 여자 빨치산을 둘러싸고 빨치산들 사이에 벌어지는 갈등, 그리고 빨치산의 귀순 과정이 사실적으로 그려진 작품이다.‘한국영화의 수작’으로 영화사적으로도 높이 평가 받고 있다. 이 <피아골>에서 노경희는 바로 여주인공인 여자 빨치산 ‘애란’역을 훌륭히 해냈다. 이 영화가 높은 평가를 받은 것은 작품성과 함께 연기진의 연기가 훌륭했기 때문이었다. 남자 주인공 김진규 는 이 작품으로 영화 데뷔를 했으며 이예춘도 이 작품으로 영화와 인연을 맺었다. 허장강 은 역시 이강천 감독의 < 아리랑 >으로 데뷔하여 뒤이어 이 작품에 출연했다. 노경희를 포함하여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가 악극단 출신 연기자들이라는 것이었다. 현직 경찰관이 각본을 쓴 이 ‘반공영화’ (당시 용어)는 빨치산의 생태를 너무나 사실적으로 묘사한 죄(?) 때문인지 한동안 용공성(容共性) 시비가 없지 않았다. 군부에서도 의견이 갈려 국방부 정훈국에서는 상영불가론, 육군본부 정훈감실에서는 우수작품론을 펼쳤었다. 신문지상에도 군인과 평론가의 논쟁이 있었다. 당시 문학평론가 임긍재는 다음과 같이 이 작품을 평가했다. “…< 피아골 >은 선전적 가치로 보나 영화예술성으로 보나 아직까지 한국영화로서는 볼 수 없었던 우수한 작품이다. 왜냐하면 이 <피아골>을 보면 공산주의자들이 얼마나 악독하고 잔인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까닭이다. 가령 부상공비 A가 무기를 버리고 왔다고 해서 대장 아가리는 총살을 명령하고 뒤이어 만수로 하여금 잔인하게 돌로 쳐 부셔죽이는 것이다…”(동아일보 1955·8·12)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회의적인 먹물 든 빨치산 철수( 김진규 )를 사랑하는 골수 공산주의자인 여자 빨치산 애란 역을 멋있게 해낸 노경희 는 이 < 피아골 > 한 작품으로 당당하게 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노경희 자신도 세월에 상관없이 이 작품에 대한 애착을 간직하고 있었다. “내가 가장 아끼는 영화는 < 피아골 >이지요. 대표작입니다.” 회갑을 1년 앞둔 87년 7월 노경희 (당시 영화인협회 연기위원회 부위원장)가 한 말이다. (주간조선 87.9.13) 노경희 는 10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였지만 피아골 다음으로는 < 춘향전 >(1955)과 < 망나비비사 > (1955)가 연기력을 평가받고 많은 화제를 남겼다. 한국영화사의 거목인 이규환이 생전 “각본 감독 편집을 손수 내 손으로 한<춘향전>은 나의 영혼이 깃든 작품이었다”(김화: 이야기 한국영화사)고 말한 작품. “…1월 설날 프로그램으로 개봉된 이규환 감독의 < 춘향전 >이 전국 흥행계를 강타했다. 해방 후 최초의 춘향전 영화이다. 춘향전은 한국영화사의 길목에 가끔씩 나타나 마치 구원의 여신과 같이 한국영화산업에 활기를 불어넣은 작품이다…”( 호현찬 : 한국영화 100년) < 춘향전 >은 노경희 의 연기 길목에도 큰 활기를 불어 넣어 주었다. 춘향= 조미령 , 이도령= 이 민 , 향단 = 노경희, 방자= 전택이 …. 당시로서는 다시 맞출 수 없는 ‘호화배역’이었다. 더구나 노경희·전택이는 부부사이었으니 향단·방자역을 얼마나 멋있게 해냈겠는가. 두 사람이 깡충깡충 뛰는, 활력 넘치는 장면들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흥행은 ‘대박’이었다. 개봉관인 서울의 국도극장 한 곳에서만 20일 상영에 1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다는 이야기이다. 당시 서울 인구가 2백여만 명 ( 이규환 감독의 기록)이었으니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춘향전>을 본 셈이다. 2년 동안 그야말로 전국 방방곡곡, 면소재지에서까지 상영되었다고 하니 향단이 노경희의 연기가 그만큼 평가되고 인기가 오를 수밖에 없었다. <춘향전>의 히트로 한국영화계에 사극 붐이 일었다. 김성민 감독의 < 망나니 비사 >도 만들어졌다. 이 영화에도 노경희는 남편 전택이와 함께 출연했다. 이 작품은 제목처럼 비사(슬픈 역사), 슬픈 이야기이다. 전택이가 망나니 ‘먹’역을, 노경희는 술집 작부‘달’로 분했다. “…얼굴 가득 불안스러움을 내비치며 그 특유의 빈정거리는 말투로 먹을 다루는 노경희는…”(여성영화인사전:여선정) 성격 배우로서의 역량을 한껏 발휘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글의 첫머리에서도 지적했듯이 노경희는 역시 글래머 스타라기보다는 단단한 연기자로 대접해야 한다고 본다. 노경희는 1955년 한해동안 < 피아골 >, <춘향전>, <망나니 비사> 3편의 작품에 출연하여 그 연기 능력을 충분히 인정받았다. 이 세 작품만으로 노경희의 연기자로서의, 배우로서의 위치는 굳혀진 셈이다. 노경희 는 1929년 12월 25일 강원도 화천에서 태어났다. 서울의 배화여고를 졸업했다. “…배화여고 시절 하루도 빠짐없이 극장에 다녔던 노경희는 친구들 사이에서 ‘극장대장’으로 통했다…”(여성 영화인사전) 노경희는 17세 때 감독 최인규와 배우 전택이 가 제작준비 중이던 <마의 산> 히로인 역에 음모하여 뽑혔다. 그러나 <마의 산> 촬영이 자금난으로 중단되자 노경희는 길을 잃었다. 전택이 선배를 찾아갔다. 그의 소개로 약초가극단 (단장 김해송)에 들어갔다. 이 가극단 동기생으로는 김진규 , 이예춘 , 허장강 이 있다. 신청년악극단에서도 활동하는 등 무대생활은 모두 6년이었다. 1948년 < 수우 >에도 출연한 기록이 없지 않지만 본인이나 한국 영화사 기록에서는 1950년의 < 흥부와 놀부 > ( 이경선 감독)을 노경희 의 본격적인 데뷔작품으로 꼽고 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 2편의 영화가 만들어져 서울에서 개봉되었는데 그중 1편이 바로 <흥부와 놀부>이다. 노경희는 한국전쟁 중 종군다큐멘터리 제작에 연기자로 참여했으며 1954년 홍성기 감독의 < 출격명령 >에 출연했다. 공군 조종사간 사랑의 삼각관계와 전우애를 그린 이 영화에는 전택이도 출연했다. 그리고 앞에서 특기한 < 피아골 > < 춘향전 > < 망나니 비사 > 3편이 1955년의 노경희를 빛냈다. 뒤이어 다음과 같은 작품에 출연했다. < 인생역마차 > < 자유부인 > < 애인 > < 여성의 적 > (이상 1956년) < 실락원의 별 > < 애원의 고백 > (1957년) < 산넘어 바다건너 > < 돈 > < 실락원의 별 2 > < 유혹의 강 > < 애정무정 > < 느티나무 있는 언덕 > (1958년) < 고바우 > < 내일 없는 그날 > < 백만장자가 되면 > < 별하나 나하나 > < 삼여성 > < 애련의 꽃송이 > < 젊은 안내 > < 푸른 날개 > < 황금의 상처 > (1959년) < 버림 받은 천사 > < 어느 하늘 아래서 > < 울지 않으련다 > < 청춘화원 > < 추억은 영원히 > (1960년) <애정행로> (1961년) < 양귀비 > <어딘지 가고싶어> <흑태양> (1962년) < 거지왕자 > < 검은 꽃잎이 질 때 > < 약혼녀 > < 연애주식회사 >(1963년) 노경희 가 출연한 100여 편의 영화를 여기 다 적을 수는 없다. 위에서는 주요 작품만 열거해 본 것인데 1950년대 중반이후 1960년대 초반에 걸쳐 한국 영화계에서 노경희가 얼마나 ‘맹활약’을 했는가를 알 수 있다. 당시 한국영화에는 주연이든 조연이든 노경희가 거의 출연하다시피 했다. < 자유부인 > < 애인 > < 실락원의 별 > < 느티나무 있는 언덕 > < 삼여성 >등은 연기면에서나 이야기거리로나 노경희의 이름을 기억하게 하는 작품들이다. 특히 <애인>에는 전택이가 주연으로 출연했는데 노경희는 이 작품을 ‘전택이의 대표작’으로 평가하곤 했다. <삼여성>에서는 당시의 스타 최은희 이경희 그리고 노경희 세 사람의 연기 대결을 보여주었다. 왕성하게 영화 출연을 하지 않게 된 뒤로도 노경희 는 선배로서 후배들의 연기지도 또는 영화인의 권익 옹호를 위하여 열심히 뛰어 다녔다. 회갑을 넘기고도 그의 왕년의 글래머 스타의 건강을 여실히 보여주었었다. 그러나 노경희에게는 지병이 복병처럼 숨어 있었다. 1995년 7월 17일 제헌절 날 새벽 서울 을지병원에서 노경희는 세상을 떠났다. 67세였다. 당뇨와 심부전증이 사인이었다. 당시 83세인 남편 전택이와 4남1녀를 남겨 두고 갔다. 전택이는 3년뒤인 1998년 3월2일 86세를 일기로 아내 노경희 곁으로 갔다. 두 사람은 영화계의 선배·후배로 만나 ‘사랑하는 사이’가 되고 전택이가 본 부인과 이혼한 뒤 1954년 정식으로 결혼했다. ‘…두 사람은 말년에도 잉꼬부부로 주위의 부러움을 샀다. ’(동아일보 1998·3·4) 신우식(영화평론가) / 2003년 <프로필> 본명 : 노숙진 1929년 12월 25일 강원도 화천 출생 배화고녀 졸업 1950년 이경선 감독의 < 흥부와 놀부 >로 데뷔 1995년 7월 7월 타계 <주요 작품> 인생 역마차 , 애인 , 삼여성 , 자유부인 , 망나니비사 , 실낙원의 별 등 <수상 경력> 1955년 < 망나니비사 > 제1회 금룡상 여우주연상 수상
오늘날 이민 (李敏)을 모르는 사람도 미국문화가 우리나라에 밀물처럼 밀려 들러와 미제라면 사죽을 못쓰던 시대, 그러나 분단 전쟁의 흔적들이 사회 곳곳에 남아 있던 시절에 만든 영화 < 자유부인 >(''56 한형모 감독)의 대학생 신춘호를 기억할 것이다. 약간은 덜렁대지만 뛰어난 춤솜씨를 미끼로 이웃의 대학교수 부인에게 춤을 가르치다가 자신의 입술이 상대의 볼에 닿자 '마담 익스큐즈 미'하며 사과할 줄도 아는 그런 배우이다. 비록 역할은 조연이지만 주연 몫까지 챙기는 인기로 1950년대 한국영화 팬들을 사로잡은 사나이. 김진규 , 최무룡 시대가 오기 전 스크린을 사로잡은 배우가 이민이다. 이민 은 자유주의 사상이 팽배하던 50년대 실존주의 철학이 유행병처럼 번지고 '보호받을 가치가 있는 정조만이 보호받을 자격이 있다'는 명판결을 낸 박인수 사건의 여파가 채 가시지 않은 시기에 떠오른 은막의 귀공자였다. 1956년 6월 9일 서울 수도극장(현재의 스카라)에서 개봉되 대학교수 부인이 춤바람으로 젊은 청년과 가까워진다는 내용이 폭발력을 지니면서 사람들을 극장에 끌어들이는 힘으로 작용하였다. 그 요인의 중심에 신춘호라는 인물을 성공적으로 소화한 이민이 있었던 것이다. 그의 역할에 특히 여성 팬들이 열광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유교적인 도덕관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일반적인 인물 패턴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폐쇄된 생활로 욕구 불만에 차 있던 여성들에게 그가 연기한 행동적인 청년상은 오히려 신선하기조차 했을 것이다. 그때 심어준 서구적 성향의 플레이보이 이미지는 이에 앞서 히트한 < 춘향전 >의 이도령이나 그 뒤의 어떤 작품보다도 강렬했다. 그윽한 눈빛과 세련된 매너로 한 시기를 누볐던 이민 은 1921년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이시중(李時中). 서울대학 전신인 경성제국대학 다닐 때 길에서 우연히 영화감독의 눈에 띄어 발탁된 것이 영화와 인연을 맺게 된 동기가 되었다. 1949년 강춘 (康椿) 감독의 <연화(蓮花)>( 민혜련 주연)가 바로 그 첫번째 영화계 신고작이다. <연화>에 이어 출연한 것이 같은 강춘 감독의 < 화랑도 >(1950. 염매리 공연)였다. 16밀리로 만들어진 이 영화에서 그는 북한을 탈출하여 반공 전선에 앞장 서는 애국청년으로 등장하여 시선을 끌었다. 촬영중 6.25 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중단됐다가 피난지인 대구에서 완성된 작품이다. 당시 활발하게 기획된 < 성벽을 뚫고 >, < 나라를 위하여 >(이상 1949)와 같은 반공물로 이 장르는 뒷날 정책적인 뒷받침 아래 성행하였다. 1953년 휴전이 성립되고 정부는 서울로 환도했으나 대부분의 영화인들은 부산,대구 등지에 남아 군관계 영화 일을 보고 있었다. 그해 초겨울 대구에 남아 있던 이민 이 자유극장 옆 단골다방에 나갔을 때였다. 차를 마시고 있는데 입구 쪽 한 구석에 앉아 생각에 잠긴 사람의 모습이 유난히 눈을 끌었다. 어디서 본 듯한 낯익은 얼굴이었다. 그때야 이민은 < 임자없는 나룻배 >의 유명한 감독 이규환 임을 알 수 있었다. 아가씨를 시켜 차 한 잔을 보냈다. 주문한 일도 없는 커피에 의아스런 표정을 갖는 그에게 아가씨는 다방 안쪽을 가리켰다. 이민은 그 앞으로 다가가 자신을 소개했다. 아직 일을 맡지 못해 어려웠던 이 감독은 그때서야 긴장을 풀고 반갑게 맞았다. 며칠 후 이 감독이 다시 다방에 들렀을 때 이민 은 곱살하게 생긴 한 젊은이를 인사시켰다. 얼마 뒤 이 감독이 조감독의 한 사람으로 발탁하여 감독이 되는 발판을 마련케 한 최훈 (崔薰)이었다. 그들은 선배 감독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되자 적극적으로 도왔다. 이런 가운데 이규환 감독이 < 춘향전 >의 메가폰을 잡게 되었다. 1954년 이른 봄, 완성된 시나리오를 들고 서울로 올라간 이규환은 제작자를 잡게 되자 이민을 주인공인 이몽룡 역으로 확정하고 상대역인 춘향에 조미령 을 기용하였다. 이민은 이 영화의 연기뿐만 아니라 제작을 적극적으로 도았다. 예정했던 남원 대신 촬영지로 선택한 경북 달성군 가창면 냉천동이란 마을은 로케 방소로는 안성마춤이었으나 기계를 움직일 동력이 문제였다. 전력을 끌어오기 위해서는 가까이 있는 광산이 협조를 받지 않으면 안되었다. 일이 쉽게 풀리느라 이민의 경성제대 공과 동기동창생이 이 달성 광산의 소장으로 있어 전기를 끌어들일 수 있었다. 광산에서 촬영장까지 전주를 세우는 토목공사 끝에 이루어진 결과였다. 촬영에 들어간 지 2주일 만에 장마를 만나 50여 명의 스태프들이 발이 묶이고 진행비가 바닥나는 어려움 속에서 10개월 만에 완성한 < 춘향전 >(1955)은 개봉되자 첫날부터 만원이었다. 상영시간 2기간 15분, 필름길이 1만 2천자, 이 분량은 그때까지 나온 한국영화 중 가장 긴 것이었다. 당시 서울 인구 2백여 만 명, 20일 상영에 10만 명의 관객 동원은 국도극장 개관 이래 최다 관객이었을 뿐 아니라 한국영화사상 최대의 흥행 기록이었다. 방자와 향단 역을 맡은 전택이 , 노경희 커플의 해학적인 연기에 밑받침된 이민 의 이몽룡 역은 이 영화를 장안의 화제로 끌어올리는데 결정적으로 작용하였다. 그의 열광적인 팬들은 앳된 소녀에서부터 40대 가정주부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했다. 잇달아 그는 통속 사극 < 망나니 비사 >(1955. 김성민 감독)의 교리(郊理 : 조선조 때 홍문관의 정오품 벼슬)로 출연했다. 고을의 진사 딸( 이경희 )을 좋아하지만 부친의 반대에 부딪치자 그 진사를 역적으로 몰아 야심을 채우려는 직권 남용과 도망간 진사 딸의 억울한 죽음을 그린 것이다. 이민 이 처음 맡은 악역인 셈이었다. 같은 해 < 불사조의 언덕 >( 전창근 감독)에서는 6.25 전쟁에 참전했다가 포로가 된 미군을 구출한 후 장렬한 최후를 맞은 용감한 군인 역을 맡아 < 화랑도 >에 이어 군복을 입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주연이라고는 하지만 후반부 망나니 전택이 와 진사 딸 이경희 의 비련(망나니 비사)에 눌려 크게 빛을 모지 못한데다 공보처의 계몽물이라는 성격 때문에 대중 동원에 한계(불사조의 언덕)가 았어 소강 상태을 면치 못했던 이민에게 결정적인 돌파구가 열린 것은 앞에서 언급한 < 자유부인 >(1956. 한형모 감독)이었다. ''익스큐즈 미'' ''아일 러브 유'' 따위의 영어와 외제 상품을 선호하는 국민들의 의식을 풍자한 '최고급품입니다'라는 유행어를 낳은 이 영화는 당시의 사회상을 예리하게 짚어낼 뿐 아니라 이민이라는 존재를 부각시키는데 결정적인 힘으로 작용하였다. 이 한편으로 1956년을 장식한 이민 은 작심한 듯 양적인 실적올리기에 시동을 걸었다. 57년 < 청실홍실 >( 정일택 감독), < 여성전선 >( 김기영 감독), < 찔레꽃 >( 신경균 감독), < 실낙원의 별 >( 홍성기 감독) 등 5편에서 58년엔 < 흐르는 별 >( 김묵 감독), < 별아 내가슴에 >( 홍성기 감독), < 그 밤이 다시 오면 >( 노필 감독), < 유혹의 강 >( 유두연 감독) 등 10편으로, 그리고 59년도에는 < 꿈이여 다시 한번 >( 백호빈 감독), < 비오는 날의 오후3시 >( 박종호 감독), < 애모 >( 신경균 감독), < 동백꽃 >( 정일택 감독) 등 무려 13편으로까지 솟아올랐다. 여기서 그의 주요 출연작을 살펴보면 한 가지 뚜렷한 현상이 나타났다. 55년 전창근 감독의 < 불사조의 언덕 >을 계기로 사극을 청산한 대신 완전히 멜로드라마의 주역으로 변신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는 라디오 연속극을 최초로 영화화하여 히트한 조남사 원작 < 청실홍실 >(1957)에서는 한창 뜨기 시작한 엄앵란 의 상대역인 운전기사 나씨 역으로 나와 발랄한 사장 딸의 구애을 받으면서도 전쟁 미망인( 주증녀 )을 사랑하는 행복한 사나이의 모습을 그려내었다. 김묵 감독의 데뷔작< 흐르는 별 >(1958)의 경우는 북에서 월남하다가 헤어진 아내( 문정숙 )을 찾아나선 사나이가 어렵게 상봉하게 되었을 때는 이미 장님이 된 이후였다는 비극을, < 별아 내 가슴에 >(1958)와 < 그 밤이 다시 오면 >(1958)은 독립운동가의 아내 손에서 자라나 양가의 규수( 김지미 )와 결혼하게 되는 청년과 부모없이 자란 고아 남매의 애환을 각기 보여 주었다. 최은희 와 공연한 < 꿈이여 디시 한번 >(1959)은 전선에서 눈에 부상을 입고 후방으로 호송된 병사가 간호장교의 헌신적인 치료 아래 완치되었을 때는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있던 여자는 사라지고 없었다는 이야기며, < 비오는 날의 오후 3시 >(1959)는 약혼자의 전사 통지서를 받고 재출발하려던 여자(김지미)가 죽은 줄 알았던 약혼자가 나타나면서 겪게 되는 비극을 소재로 삼은 것이다. 이민 은 두 영화에서 부상당한 병사 역과 김지미의 재출발 상대인 미국인 2세로 등장한다. 13편에 이르는 다작 출연이 말해 주듯이 이민은 이 시기에 영화계 진출 이후 가장 바쁘고 화려한 시기를 보냈다. 어느새 그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스타덤에 올라 있었다. 그러나 정상이 있으면 내리막 길이 있는 법, 그의 독주는 얼마 못가 뒤에서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에 의해 위협받기 시작했다. 이미 < 주검의 상자 >(1955. 김기영 감독)로 주목을 끈 최무룡 과 < 피아골 >(1955. 이강천 감독)에서 두각을 나타낸 김진규 의 도전으로 그의 확고한 듯 싶었던 인기의 성곽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러한 조짐은 1960년대에 이르면서 뚜렷이 나타났다. 60년 한해 동안 < 추억은 영원히 >( 전택이 감독), < 애수에 젖은 토요일 >( 최훈 감독) 등 4편으로 감량되는 현상이 이를 설명해 준다. 그리고 그 다음 해에는 단 한 편의 출연조차 없었다. <애수에 젖은 토요일>(1960)역시 당시 우리 영화가 즐겨 다루던 민족분단, 이산의 비극을 소재로 한 것이었다. 윤락가로 전략한 여자( 김지미 )가 6.25 때 헤어진 애인과 만나게 되자 죄의식을 느끼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내용으로, 애인을 잃는 군인 역을 맡아 열연하였다. 이처럼 그의 연기는 분단의 역사를 표현했지만 한국영화의 중흥기를 장식했다. 이후 이민 은 62년 한해 동안 < 슬픔은 나에게만 >( 안현철 감독)을 비롯하여 < 여자의 일생 >( 신경균 감독) 등 4편에 출연하는 재기의 의욕을 보였으나 1963년 < 상처받은 두 여인 >( 이규환 감독)에 이어 배역을 맡은 김수길 감독의 < 백마고지 >를 끝으로 14년 동안 여러편의 작품을 남기고 영화계를 떠났다, 그후 대중 앞에 나서는 일 없이 전성기의 화려한 이미지를 고수하는 철저한 자기 관리의 의지를 보여주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동안 영화제작에 손댔다가 실패하기도 하고 1998년엔 78세의 나이로 일본아시아문예협외의 지원 아래 제작, 각본, 주연으로 컴백을 시도했으나 뚯을 이루지 못했다. <프로필> 본 명 : 이시중 출 생 : 1921. 2. 27 / 강원도 춘천 데 뷔 : 1949년 강춘 감독 <연화> 주요작품 : < 춘향전 > 외 300여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