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가가 아니라 신부한테 고백할 기세
- 제작년도
- 2010
한국영화의 못다 한 이야기는 인물들이 살아가는 '도시 공간'에서 계속되기도 합니다. 조금의 시차는 있지만, 카메라가 남긴 이미지와 함께 그 이야기를 돌아봅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국어 시간에서 접했을 소설 『오발탄』(이범선, 1959). 1959년 발표된 이 작품은 출간 직후부터 뜨거운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이듬해인 1960년에 영화로 제작되어 1961년 봄 개봉되기에 이른다. 영화는 “레이션의 껍데기로 지붕을 이었다”라는 원작의 건조하면서도 날카로운 묘사가 보여주는 해방촌의 모습처럼, 전후 서울의 실상을 다큐멘터리적 시선으로 담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사실적 재현의 힘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빛을 발하며, < 오발탄 >(유현목, 1961)을 한국영화사의 걸작으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그러나 이 영화의 가치는 원작의 뛰어난 영화화라는 차원을 넘어선다. <오발탄>은 당대 서울의 도시 공간을 있는 그대로 포착함으로써, 도시사와 도시계획사 연구에 있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1961년 5.16 쿠데타 이후 서울은 국가 프로파간다의 수단으로서의 도시계획과 고도경제성장의 동력 속에서 매해, 아니 매달 철거와 신축이 반복되는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된다. 이러한 맥락을 감안했을 때, 1960년 하반기에 촬영된 <오발탄>은 6.25 전쟁과 일제강점기의 상흔이 생생히 남아있던 서울의 민낯을 참으로 절묘한 시점에 카메라에 담아낸 셈이다. 덕분에 6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전쟁 직후 서울의 모습을 마치 타임캡슐을 열어보듯 선명하게 마주할 수 있다. 이제 영화가 포착한 서울의 다양한 면모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철호의 판잣집과 계리사 사무실 영화 초반, 카메라는 주인공 철호( 김진규 )가 산비탈의 판자촌 사이를 걸어 나오는 모습을 비춘 뒤, 곧장 서울 도심의 계리사 사무실을 비추는 시퀀스를 보여준다. 사는 곳은 무너져가는 판잣집이지만, 일터는 시내 한복판의 말끔한 오피스 빌딩이라는 점에서, 당시 서울의 극단적인 빈부격차가 투영된 도시 공간을 관객들에게 전달하려는 감독의 의도를 읽어낼 수 있다. 철호의 계리사 사무실이 위치한 빌딩 입구에는 ‘대한상공회의소’라는 명판이 걸려 있는데, 2025년 현재까지도 상공회의소는 남대문 바로 옆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산비탈의 판잣집을 내려온 철호가 서울의 중심에서 일한다는 설정은, 그가 아침저녁으로 괴리감을 느낄 수밖에 없게 만드는 장치라 해석할 수 있다. 판잣집 사이로 내려와(상) 계리사 사무실(대한상공회의소 건물)로 들어서는 철호(하) 한국상업은행 남대문지점 1957년에 준공되어 현재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한국상업은행 남대문지점(現 흥국생명빌딩)은 영화에서 상당히 비중 있게 등장하는 건물이다. 카메라가 남대문을 잡으면 반드시 화각에 들어오는 탁월한 입지 덕분에, 1966년작 < 워커힐에서 만납시다 >에서도 남대문 주변 전경을 비출 때면 이 빌딩이 당당히 중앙을 차지한다. 건축가 나상진(1923-1973)이 정성 들여 설계한 오피스 빌딩으로, 지금 보아도 유선형 외관이 인상적이며, <오발탄> 촬영 당시에는 더욱이 초현대적이고 세련된 자본의 상징으로 주목받았을 것이다. 극중에서 철호의 동생 영호( 최무룡 )는 이 빌딩을 올려다보았다가, 후반부에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며 마침내 은행강도를 감행하는데, 이 두 시선의 대비를 통해 감독은 전후 제대군인들의 비극적 처지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오른 현대식 빌딩을 의도적으로 대조한 것으로 보인다. <오발탄> 중 한국상업은행 남대문지점 한국산업은행 남대문지점 터에 현재 자리한 흥국생명빌딩 (사진: 필자 제공) 철호가 내려다본 서울 러닝타임 63분경, 철호는 집에 들어가려다 노모( 노재신 )의 “가자, 가자” 소리를 듣고 발길을 돌려 남산 중턱에서 서울 전경을 내려다본다. 남산 중턱에는 판잣집이 들어서기 이전, 일제강점기부터 부유층을 위한 주택지가 조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주택지의 거주자들은 자동차를 타고 다녔고, 철호와 같은 판잣집 주민들은 언덕 한참 아래 한강로의 전차 정류장에서부터 집까지 걸어 올라가야만 했다. 그렇기에 철호가 내려다보는 서울의 전경은 부의 상징이 아닌 가난의 상징으로 기능한다. 부유한 이들이나 관광객이 전망대에서 경치를 감상하는 것과, 산비탈 빈민이 도심을 ‘마지못해’ 내려다봐야 하는 현실의 차이를 이 시퀀스는 절묘하게 포착해낸 것이다. 철호가 내려다본 서울 전경 영호의 도주 영화 후반, 은행강도를 감행한 영호의 도주 장면은 경찰 무선을 통해 실시간으로 중계된다. 종로2가와 청계천4가, 5가, 달리는 노면전차의 궤도, 그리고 종암동으로 이어지는 추격전은 당시 구간별로 진행 중이던 청계천 복개 공사 현장에서의 총격전까지 더해져 강렬한 긴박감을 자아낸다. 1930년대 후반 시작되어 전쟁 이후 1958년에 재개된 청계천 복개 공사는 자재와 예산 부족으로 부분적으로만 진행되었는데, 이는 영호와 같은 도망자가 복개된 지하 공간을 드나들 수 있는 개연성을 자연스럽게 제공했다. 더욱 주목할 만한 것은 전차를 타고 도망가는 영호의 모습 대신, 카메라가 어지럽게 뻗어나가는 전차 선로를 속도감 있게 포착해 낸 장면이다. 특히 쭉 뻗어나가던 선로에서 갈라져 나가는 분기점을 담아냄으로써, 감독은 영호의 돌이킬 수 없는 일탈을 은유적으로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복개된 청계천의 지하 공간 전차가 빠르게 달리는 와중 포착된 선로의 분기점 철호의 배회 영호는 결국 체포되고 부인은 출산 중 사망한 상황에서, 넋이 나간 철호는 서울 도심을 정처 없이 배회한다. 러닝타임 95분경, 딸에게 사주고 싶었던 신발을 바라보며 천천히 걸어가는 철호의 뒤로 반도호텔(1938년 준공, 1976년 철거)과 미도파백화점(現 롯데백화점 영플라자)의 세련된 외관이 드러난다. 당시 이 거리의 랜드마크였던 미도파백화점과 반도호텔 중 반도호텔은 롯데호텔로 재건축되며 그 흔적을 감췄지만, 미도파백화점은 리모델링을 거쳐 롯데백화점 영플라자로 남아있다. 덕분에 지금도 을지로입구역에서는 영화 속 장면과 동일한 구도로 <오발탄>의 의도를 마주할 수 있다. 극중 반도호텔이 등장한 자리의 현재 모습 (사진: 필자 제공) 극중 미도파백화점과 현재 롯데백화점 영플라자 명동본점 (사진: 필자 제공) 유현목 (1925-2009) 감독은 생전 인터뷰에서 영화 속 판잣집을 촬영하기 위해 직접 해방촌을 방문하여 영호네 집과 같은 실제 거처를 물색했다고 밝혔다. 감독은 원작에서 상대적으로 생략된 서울의 도시공간을 섬세하게 담아내면서, <오발탄>은 시간이 흘러도 당시 서울 시민의 대다수를 차지했던 빈민들의 삶에 깊이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이 되었다. 이는 마치 ‘서울의 도시 공간’이라는 이름 없는 배역이 뛰어난 ‘연기’를 선보인 것과 같다. 그리고 6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이 무언의 명배우의 연기를 다시금 주목하고 있다. 김영준 연구원이 들려주는, <오발탄> 속 서울에 관한 더욱 자세한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한국영화X공간] 영화 "오발탄". '욕망과 좌절의 거리 서울' 클릭! 김영준(도쿄대학 특임연구원) ㅣ일본 도쿄대학에서 일제강점기 서울의 도시계획사로 박사학위 취득 후, 연구원으로 일하며 ' 서울의 현대를 찾아서 '라는 필명으로 도시 경관을 기록해오고 있다. 영화의 또 다른 '등장인물'이라 할 수 있는 배경 속 도시 공간을 읽어내는 법을 계속해서 탐구한다. 『영화와 서울: 영화로 보는 도시 공간』(2022), 『새시각 #01 : 대전엑스포'93』(2021) 집필(공저).
사진: <0시(영시)>(이만희, 1972) 중 한국영화의 못다 한 이야기는 인물들이 살아가는 '도시 공간'에서 계속되기도 합니다. 조금의 시차는 있지만, 카메라가 남긴 이미지와 함께 그 이야기를 돌아봅니다. 영화를 볼 때, 첫 3분에서 5분 가량의 도입부는 그 영화의 인상을 결정짓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현대의 도시 공간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라면, 그 공간을 이미 경험해 본 관객에겐 “아 바로 저기!”라는 친근감과 그에 따르는 몰입감을 단박에 이끌어내는 장치로서도 기능한다. 앞선 칼럼들 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영화 속 배경이 배우에 버금가는 역할을 해내는 것이다. 나아가 지금과 같이 영상 기록 매체가 발달하지 않았던 20세기, 특히 1960~70년대의 우리나라의 도시 공간이라면 구도나 촬영 기법에 대해서 심도 있게 논의하기에 앞서서 당대의 도시 모습을 있는 그대로 관찰할 수 있는 1차 사료로서 더욱 크나큰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선에서, 도입부 에 담긴 도시 공간의 시퀀스가 특히 인상적인 영화를 살펴보도록 하자. 격변의 현장, 서울을 담다 먼저 살펴볼 영화는 1961년 작, < 서울의 지붕밑 >(이형표 감독)이다. 6.25 전쟁이 끝난 후 10년도 채 지나지 않았던 시기, 그것도 5.16 쿠데타 직후 혼란스러웠던 시절의 서울의 전경을, 초반 2분 동안의 도입부에 멋지게 담아낸 영화다. 50초 경부터 1분까지, 카메라는 8층 높이로 당대의 ‘고층 멋쟁이 빌딩’이라 불렸던 개풍빌딩, 광화문우체국, 종로소방서, 덕수궁 북쪽의 옛 화신백화점 연쇄점 창고를 훑는다. 개풍빌딩, 광화문우체국, 종로소방서가 한 컷에 담긴 타이틀 씬 1961년의 시선에서는 하나같이 ‘도회지스러움’을 발산하는 으리으리한 건축물들이었지만, 채 30년도 지나기 전에 이 건축물들은 모두 헐려 없어졌다는 사실을 상기해보면, 서울이 얼마나 급격한 변화를 거쳤는지 새삼 놀라게 된다. 이윽고 카메라는 1분 42초 경에, 제법 정성들여 꾸며진 서울시 1기 휘장(1947년 제정, 1996년 교체)의 팔각 모양 화단을 비춘다. (좌) 1947년~1996년까지 사용된 서울시 휘장 (우) 시민회관에서 내려다 본 서울시 휘장 모양의 화단 구도 상 아마도 시민회관의 옥상에서 촬영된 것으로 보이는데, “서울의 지붕밑”이라는 영화의 타이틀 답게, “서울”의 상징을 일부러 담고자, 분명히 감각적으로 의도된 씬이라 해석할 수 있겠다. 마침 1분 58초 당시 5.16 쿠데타 세력으로 구성된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청사(옛 문공부 청사, 現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파사드 또한 잠시 모습을 비추는데, 당대의 시대상이 은연중에 드러나는 컷이기도 하다. 영화가 촬영되던 바로 그 시점에 5.16 쿠데타 주도 세력이 입주해 있던 옛 문공부 청사(現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도입부의 서울 전경 시퀀스는 2분 20초 경, 지금의 통인동 일대를 비추며 끝이 나는데, 도시형 한옥이 빼곡히 늘어선 모습은 1978년 자하문로가 개통되면서 완전히 사라진 지 오래이다. 통인동의 도시형 한옥 밀집 지역. 자하문로가 개통되면서 오른편 상단의 자교교회 종탑 이외에는 이 시기의 흔적이 거의 대부분 사라졌다. 단 2분 만에, <서울의 지붕밑>은 ‘서울 도시경관 아카이브’로서 훌륭히 기능을 해 낸 셈이다. 서울의 하늘이 높아졌다 <서울의 지붕밑>으로부터 약 10년이 흐른 1972년에 제작된 < 0시(영시) >(이만희 감독) 또한 도입부에서 인상적인 시퀀스를 보여준다. 서울역 앞, 남대문 경찰서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인만큼, 초반 3분 동안 서울역과 고가도로, 건축가 김중업이 설계한 도큐호텔(現 단암빌딩), 남대문 너머 서소문 일대의(당대 기준으로는) 고층 오피스 빌딩군을 세련되게 잡아낸다. 1970년에 개통된 서울역 고가도로 사이로 담아낸 서울역의 모습 남대문 주변의 일제강점기 당시의 근대건축물과 서소문로의 고층 오피스 빌딩이 대비를 이루는 모습 1970년대 영화답게 총천연색으로 담긴 남대문 주변의 풍경은 의외로 50년이 흐른 지금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1960년대 후반부터 서울에서는 10층 내외의 ‘고층 오피스 빌딩’이 우후죽순 들어서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날로 높아져가는 서울의 하늘은 1971년, 바로 이 영화가 촬영되던 시점에 절정기를 맞는다. 1971년 건축가 김중업이 설계한 두 채의 꺽다리 빌딩(31층의 삼일빌딩, 그리고 이 영화에 등장한 25층의 단암빌딩)이 등장하면서 서울의 스카이라인을 완전히 바꿔놓은 것이다. 남대문 바로 옆의 25층짜리 빌딩을 역시 필름에 담지 않고는 못 배겼던 것일까, 카메라는 단암빌딩을 틸트 쇼트로 멋드러지게 잡아낸다. 한국 건축사에 길이 이름을 남긴 김중업의 작품이, 영화 속에 최초로, 그것도 우아하게 등장한 순간이 아닐까. 낯익은 그곳, 회현사거리 마지막으로 서울의 인구가 500만을 넘어서 700만 명을 바라보던 1975년에 제작된 < 바보들의 행진 >(하길종 감독)의 시퀀스를 들여다보자. 영화가 시작되고 9분 경부터 약 1분 동안 진행되는 장발 대학생 두 사람과 장발 단속 경찰의 추격씬은 이 영화의 명장면 중 하나이다. 두 명의 장발 대학생들은 명동 신세계 백화점과 제일은행 앞, 회현사거리를 누비다가 신촌로터리 앞 육교에서 결국 경찰에 잡히고 만다. 명동 신세계백화점 본점과 제일은행을 배경으로 호쾌하게 연출된 도보 추격씬 신촌로터리의 육교에서 담아낸 신촌로의 모습. 거꾸로 매달린 등장인물의 시선을 그대로 반영한 씬이다. 시가지 한복판에서 촬영된 시퀀스이니만큼, 버스 정류장에서, 인도에서, 육교 주변에서 촬영 현장을 구경하는 인파가 오롯이 담겨있으나, 마치 실제로 일어난 해프닝인 것 마냥, 인파들은 전혀 어색하지가 않다. 오히려 의도된 엑스트라로 보일 정도이다. 두 사람이 힘껏 질주하는 회현사거리-남대문로의 풍경은, 실은 1960~70년대 한국 영화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배경이기도 하다. 1961년 작 < 오발탄 >(유현목 감독)에서 주인공 철호가 미도파 백화점(現 롯데 영플라자) 앞을 거니는 씬, 1966년 작 < 워커힐에서 만납시다 >(한형모 감독)에서는 시골뜨기인 두 주인공이 대도회지 서울에 적응을 못하는 해학적인 시퀀스에서 회현사거리 일대는 약방의 감초처럼 제 역할을 톡톡히 해 낸다. 이상으로 세 편의 영화에 드러난 1960~70년대 서울의 도시경관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살펴보았다. 불과 5~10년 간격을 두고서, 서울의 하늘이 급격히 높아지고, 기록 매체 또한 흑백에서 총천연색으로 바뀌었다는 점에서 이 시기가 서울에 있어서 얼마나 격변의 시기였는지를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다음 칼럼에서는 보다 최근, 1980~90년대의 서울의 도시경관을 영화를 통해 들여다보고자 한다. 김영준(도시공학 연구자) ㅣ일본 도쿄대학에서 일제강점기 서울의 도시계획사로 박사학위 취득 후, 연구원으로 일하며 ' 서울의 현대를 찾아서 '라는 필명으로 도시 경관을 기록해오고 있다. 영화의 또 다른 '등장인물'이라 할 수 있는 배경 속 도시 공간을 읽어내는 법을 계속해서 탐구한다. 『영화와 서울: 영화로 보는 도시 공간』(2022), 『새시각 #01 : 대전엑스포'93』(2021) 집필(공저).
사진: "Lichtspiel Opus 1.", IMDb 세계영화사의 주목할 만한 사건과 개념을 포착하고, 그 의미를 조명합니다. 세계영화사를 뒤져나가면서 슬픈 순간과 마주하게 된다. 어떤 순간? 영화가 가졌던 하나의 가능성이 역사의 폭력 앞에서 어처구니없이 중단되었을 때. 이번에는 세계영화사의 슬픈 순간 중의 하나와 만날 차례이다. 아마 수없이 이런 순간과 다시 마주치게 될 것이다. 발터 루트만(Walter Ruttmann, 1887~1941)은 1887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나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다음 스위스 취리히에서 건축학을 공부했다. 타이밍이 좋았다. 그때 취리히는 제1차 세계대전을 피해 중립국으로 모인 다다이스트들의 도피처였다. 여기에 한스 리히터, 트리스탕 차라, 에미 헤닝스, 한스 아르프, 하여튼 셀 수 없는 다다이스트들이 있었다. 한때 제임스 조이스도 여기 머물렀고, 이웃 도시에 러시아의 동지들에게 문건을 보내던 블라디미르 레닌도 잠시 체류했었다. 아마 여기서 발터 루트만은 다다이스트가 되었을 것이다. 1909년에 독일로 돌아왔고, 뮌헨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파울 클레, 라이오넬 파이닝어와 교분을 맺었다. 잠시 파울 클레에게 시선을 돌려보자. 그때 파울 클레는 닥치는 대로 화가들을 만나고 있었다. 그중에서 누구보다도 바실리 칸딘스키와 프란츠 마르크가 중요할 것이다. 그리고 틀림없이 발터 루트만은 그들의 작품을 유심히 보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디서 그의 영화들 속의 이미지를 가져왔겠는가. (좌1) 발터 루트만 (사진: "Walter Ruttmann", IMDb ) (우2) 발터 루트만 연출 <빛의 유희, 작품 2번>(1922), <빛의 유희, 작품 3번>(1924) (사진: "LICHTSPIEL: OPUS II", MUBI / "Opus III", IMDb ) 발터 루트만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던 상황. 1919년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벨기에 아르 누보 미술가이자 건축가인 헨리 반 데 벨데가 바이마르 미술 공예학교와 바이마르 미술 아카데미를 통합하여 바우하우스(Bauhaus)를 세웠다. (하지만 바이마르 미술 아카데미는 바우하우스를 곧 탈퇴하였고, 독일인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가 초대 교장이 되었다. 여기에는 복잡한 이야기가 있지만 우리는 미술사를 논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나쳐 가기로 한다.) 이 학교는 예술의 창조와 20세기 테크놀로지의 ‘결합’이 교육 목표이자 학교의 정체성이며 바우하우스의 프로젝트라고 선언(하다시피)했다. 이 학교에 네덜란드에서 《데 스타일(De Stijl)》을 창간한 테오 반 두스뷔르흐가 방문했고, 러시아 구축주의 미술가 엘 리시츠키도 찾았다. 바우하우스의 방향을 결정한 사람은 헝가리 미술가 라슬로 모호이-너지였다. 바우하우스는 산업 디자인의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갔다. (좌) 바우하우스 (사진: "Chronology", Bauhaus Dessau ) (우) 1920년대 바우하우스 마스터 하우스에서, 라슬로 모호이-너지 (사진: "Biography", MOHOLY-NAGY FOUNDATION ) 발터 루트만은 화가로 시작했다. 처음에는 표현주의 그림을 그렸지만, 곧 추상주의 양식에 끌렸다. 그런 다음 영화를 끌어들였다. 이때 발터 루트만은 영화를 ‘새로운 예술’이라기보다는 미술을 위한 새로운 테크놀로지, 새로운 매체, 새로운 사이트(site)로 받아들였다. 이 과정에서 ‘예술에서의 보편언어’를 추구하는 테크놀로지와 추상의 형식을 서로 결합하는 미래를 선언하는 《데 스타일》의 ‘기계 미학’에 관한 논의에 일정한 영향을 받았다. 오늘날에는 발터 루트만이 선택한 길이 아방가르드 영화로 나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루트만 자신은 미술의 새로운 길을 개척한다고 믿었다. 좀 더 간단하게 스크린을 새로운 캔버스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 새로운 캔버스는 ‘시간의 움직임을 담아내는 매체’였으며 여기에 “우리 시대의 속도”를 그려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 첫 번째 작품이 <빛의 유희, 작품 1번(Lichtspiel; Opus 1)>(1921)이다. 영화 제목이라기보다는 회화 작품에 어울리는 제목. 상영 시간 11분 44초. 음악 막스 부팅. 검은 바탕 화면에 푸른색과 초록색 원이 번갈아 교차하면서 시작해서 끊임없이 새로운 도형이 나타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유리 위에 그림을 그린 이 작업은 명백히 칸딘스키의 영향 아래 놓인 것으로 보였다. <빛의 유희, 작품 1번>은 1921년 4월 27일 베를린 마르모르하우스에서 처음 공개되었다. 이 극장에서 한 해 전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로베르트 비네, 1919)을 공개했었다. 이 영화를 보고 비평가 베른하르트 디폴트는 《프랑크푸르터 자이퉁(Frankfurter Allgemeine Zeitung)》에 “루트만은 자신의 스피드를 미래주의자 캔버스의 영화적 돌진으로부터 가져왔다”라고 썼다. 영화와 미술은 표현주의 영화들과 다른 차원에서 다시 한번 친교를 맺었다. <빛의 유희, 작품 1번> 중 하지만 <빛의 유희, 작품 1번>에 가장 큰 관심을 보인 사람들은 상품 광고 아이디어를 찾던 쪽이었다. 긍정적으로 말하면 아방가르드와 비즈니스가 서로 결합했고, 부정적으로 말하면 예술은 다시 한번 돈이 되었다. 그들은 이 작품을 산업 디자인을 제시할 수 있는 애니메이션으로 받아들였다. 발터 루트만뿐이 아니라 많은 실험 영화 작가들이 새로운 제안을 받았고, 그들은 작업을 계속해서 할 수 있다는 이유로 받아들였다. 이 과정을 유심히 지켜본 곳은 바우하우스였다. 산업 디자인의 관점에서 영화라는 매체를 활용한 ‘예술과 테크놀로지 사이의 새로운 통합’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라슬로 모호이-너지는 영화라는 표현 대신 매체로서 ‘빛의 구성과 조립으로 이루어진 이 종합’에 관해 1922년 《데 스타일》에 ‘생산, 재생산’이라는 글을 썼다. 발터 루트만은 자신의 작업이 받아들여지는 과정에 별다른 거부감이 없었던 것 같다. 그는 왁스-커팅기에 관한 허가권을 얻은 다음 1926년에 로테 라이니거의 영화 < 아흐메드 왕자의 모험 >(1926) 오프닝을 위한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기도 했다. <아흐메드 왕자의 모험> 중 일시적으로 영화(와 미술 사이)의 또 다른 가능성에 다리를 놓았던 순간은 1933년 나치에 의해 바우하우스가 폐교하면서 갑자기 사라졌다. 발터 루트만은 추상적인 이미지의 ‘빛의 캔버스’를 버리고 산업 디자인 영화에 관심을 돌렸다. 1935년, 발터 루트만은 군중을 대상으로 자신의 ‘캔버스’를 실험할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나치당은 그가 1928년에 모스크바 여행을 다녀온 경력을 문제 삼으면서 “빨갱이”라는 딱지를 붙여 감독직에서 해고하고 그 자리에 레니 리펜슈탈을 지명했다. 그 영화가 < 의지의 승리 >(1934)이다. 발터 루트만의 경력은 여기서 끝났다. 오스카 피싱거는 나치 독일을 피해서 1936년에 미국으로 향했다. 그리고 로스앤젤레스에서 월트 디즈니의 < 환타지아 >(제임스 알가 외, 1940) 작업에 참여했다. 라슬로 모호이-너지는 1937년에 시카고에 머물렀고, 미국에 개교한 바우하우스의 교장이 되었다. 하지만 그 기간은 아주 짧았다. 한스 리히터는 작업을 중단하고 1940년 뉴욕에서 영화를 가르쳤다. ‘빛의 캔버스’는 그렇게 섬광처럼 빛을 발한 다음 순식간에 꺼져버렸다. 하나의 순간이 덧없이 지나가 버렸다. 정성일(영화감독, 영화평론가) l 매일 영화를 보고 종종 영화 평을 쓰고 가끔 영화를 만들고 때로 영화제 일을 한다.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2003) 인터뷰 진행,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2010), 『필사의 탐독』(2010) 비평집 집필. 첫 영화 < 카페 느와르 >(2009) 이후 < 천당의 밤과 안개 >(2015), < 녹차의 중력 >(2018), < 백두 번째 구름 >(2018) 연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