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희
- 감독
- 레이몬드 버나드
- 제작년도
- 1953
- 출연
- 미셰린 프레슬, 롤랑 알렉산드르, 기노 세비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과거에 만난 작품과 그로부터 얻은 영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오랫동안 입봉이 목표인 삶을 살았다. 입봉하면 천국, 입봉 못하면 지옥. 입봉하면 행복, 입봉 못하면 불행. 내 삶이 지금 지옥이고, 내가 불행한 것은 입봉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입봉만이 희망이었던 시간을 지나, 작년에 ‘입봉’이라는 목표를 이루었다. 이제 드디어 천국에 다다른 것인가 했는데, 막상 겪어 본 입봉 후 삶은 천국도, 행복도 아니었다. 입봉만 하면 천국일 줄 알았는데! 입봉만 하면 행복일 줄 알았는데! (‘뭥미’라고 쓰고 싶지만 영자원 원고이니 참기로 한다.) < 미술관 옆 동물원 >(이정향, 1998)은 미술관을 좋아하는 여자 춘희와 동물원을 좋아하는 남자 철수가 뜻밖의 동거를 시작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이다. 철수는 연인 다혜와 재결합하고자 하지만, 다혜는 다른 남자와 결혼을 앞두고 있다. 춘희는 보좌관 인공을 짝사랑하지만, 인공은 춘희에게 관심이 없다. 책상에 앉아 모니터 빈 문서의 깜빡거리는 커서를 바라보는 춘희를 보자마자 ‘춘희, 나랑 똑같네?’라고 생각했다(물론 얼굴이 ‘심은하’라는 것은 빼고 생각했다). 춘희처럼 나도 밥벌이를 하면서 틈틈이 시나리오 공부를 하고, 시나리오를 썼다. 춘희처럼 나도 내 시나리오 주인공들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그들과 같이 아파하고, 그들과 같이 기뻐했다. 같이 고민해주는 철수는 없었지만. ‘심은하 얼굴’과 ‘철수’만 빼면 그때의 나는 딱 춘희였다. 처음부터 ‘작가가 되겠다’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시나리오에 대한 호기심이 먼저였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시나리오를 쓰면 쓸수록 시나리오가 좋아졌다. 작품을 쓰면서 마음속의 생채기들이 하나씩 치유되는 느낌이었다. 시나리오는 영화의 설계도이다. 설계도는 건물이 완공되면서 비로소 완성된다. 시나리오는 영화가 상영되면서 비로소 완성된다. 아무리 많은 시나리오를 써도 컴퓨터 하드에 저장돼 있을 뿐인 시나리오는 온전히 완성될 수 없다. 그렇기에 꼭 입봉하고 싶었다. 내 시나리오가 스크린에서 살아 숨 쉬는 그 순간을 고대했다. ‘스물넷에 공부를 시작했으니, 서른 즈음 되면 길이 보이겠지.’ 착각이었다. ‘어려운 길이지만, 마흔 전엔 되겠지, 설마!’ 설마가 사람 잡았다. 이쯤 되니 그렇게 좋아하던 시나리오가 내 고통의 근원이 되고 말았다. 이제 정말 그만둬야 하는 것인가. 이 지옥을 언제까지 견딜 수 있을까. 매일매일 앞이 캄캄했다. 어떻게든 다혜를 다시 잡고 싶었던 철수는 이미 떠나간 다혜의 마음을 확인하고 좌절한다. 이제는 인공이 관심을 보여주리라 기대했던 춘희는 여전히 관심이 없는 그의 마음을 확인하고 실망한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해 좌절하고 기대한 것을 얻지 못해 실망하느라, 철수는 좋아하는 베개를 양보해주는 춘희를, 춘희는 욕을 먹어가면서 버스를 놓치지 않게 해주는 철수를 보지 못한다. 입봉을 하고 나서야, 입봉했지만 그곳도 천국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입봉을 하지 못해 좌절했던 그 시간들도 지옥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다만 원하는 것, 기대하는 것을 얻지 못했을 뿐. 그래서 미처 보지 못했을 뿐. 그때에도 내 곁에는 ‘지옥이 아닌’ 많은 것들이 있었다. 정반합(正反合). 본래 있던 것에 새로운 것이 다가와 충돌한다. 그리고 거기서 새로운 깨달음이 생겨난다. 본래 있던 주인공의 삶에 새로운 자극이 다가와 주인공의 삶이나 생각을 바꾸는 것. 그 과정이 시나리오의 1, 2, 3 장이다. 3장에서 변화한 주인공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제대로 된 설계도를 그린 것이다. 시나리오를 쓰는 내내 3장의 깨달음을 작품에 구현하는 것이 너무도 어려웠다. 대부분 그것은 불가능한 일처럼 느껴졌다. 할 수 있을까. 내가 그런 플롯을 구현할 수 있을까. 매일 부딪혔던 의문은 천국과 지옥, 행복과 불행이라는 양극단의 늪에서 빠져나오면서 조금씩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했다. 영화 같은 삶, 이라고 하지만 영화는 어디까지나 삶의 일부이다. 삶을 넘어서는 영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삶의 한 부분을 떼어내 재미있게 보여주는 것이 영화라고 생각한다. 이러한데 이분법의 세상에 갇힌 작가가 어찌 1장에서 2장으로, 2장에서 3장으로 변해가는 삶의 과정을 시나리오로 구현할 수 있을 것인가. 내가 원한 것은 선, 원하지 않은 것은 악으로 세상을 재단하는 사람이 어찌 천국과 지옥, 그 사이 어딘가에 있는 깨달음의 세상을 볼 수 있을 것인가. 처음 좋아한 이는 인공이었지만, 인공과 이루어지지 못해도 괜찮다. 인공과 다르지만, 그것이 또 좋은 철수가 있으니까. 그토록 그리워한 이는 다혜였지만, 다혜가 떠나갔다고 해도 괜찮다. 다혜와 다르지만, 그것이 또 좋은 춘희가 있으니까. 미술관에서 좋은 그림을 보고자 했지만, 막상 당도한 곳이 미술관이 아니라 해도 괜찮다. 동물원에서도 예상 못 한 즐거움을 만날 수 있으니까. 동물원에서 귀여운 동물들을 만나고자 했지만, 막상 당도한 곳이 동물원이 아니라 해도 괜찮다. 미술관에도 예상 못한 만남이 있을 수 있으니까. 앞으로도 뜻대로 되는 일보다는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더 많을 것이다. 가고자 한 곳에 가게 되는 일보다는 뜻밖의 장소에 당도하는 일이 더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는 다짜고짜 지옥에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일단 고개를 들어 표지판을 보자. ‘천국 옆 지옥’, ‘행복 옆 불행’이 아니라 ‘미술관 옆 동물원’이다. 양극단이 아닌 그 사이 어딘가, 그곳에 영화의 진짜 엔딩이 있다. 김정연(시나리오 작가) l 쓰는 것을 좋아하는 작가. < 비공식작전 >(김성훈, 2022), < 밀수 >(류승완, 2023) 각본. < 더 문 >(김용화, 2023) 각색.
영화 초반부 가족 구성원들은 도시적 삶 속에서 누릴법한 로맨틱한 순간을 선보인다. 막내딸은 버스에서 남학생과 눈이 마주치고, 여배우와 연애를 하는 큰아들은 멜로 영화를 찍고 있으며, 첫째 딸은 동물원 데이트를 즐긴다. 이러한 낭만의 중심에는 가장 ‘로맨스 빠빠’가 있다. 궁핍한 일상 속에서도 아름다움만은 포기할 수 없다는 양, 그가 매일 출근길에 잊지 않고 챙기는 것은 꽃다발이다. 평범해 보이지만 세상에 없을 듯한 이상적 가족이다. 홈드라마 < 로맨스 빠빠 >( 신상옥 , 1960)는 일반적으로 1960년대 한국사회가 요청한 서민 가족의 전범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돼왔다. 로맨틱한 가장과 개성 강한 자식 세대의 조화, 실직으로 인한 위기를 쾌활히 극복해나가는 어질고 고운 이야기는 폭넓은 관객들에게 사랑을 받아왔다. 작품은 오프닝에서부터 가족 구성원의 간명한 캐리커쳐를 제시한다. 탈세속적 로맨티스트 아버지( 김승호 ), 현실주의자 주부 어머니( 주증녀 ) 그리고 2남 3녀의 자식들로 구성된 서울 거주 가족이 모델이다. 매사에 반항적이고 도전적인 막내( 신성일 ), 서울깍쟁이 여고생 넷째( 엄앵란 ), 외모에 관심이 많은 여대생 셋째( 도금봉 ), 대학 자퇴 후 영화계에 투신한 자유주의자 둘째( 남궁원 ), 결혼적령기의 현모양처형 첫째( 최은희 )는 당대 청년층의 보편적 범주를 이루고 있으며, 특히 막내는 4.19를 선도한 신세대를 대변하고 있다. 여기에 과학자 맏사위로 김진규 가 측은한 도둑으로 주선태 가 등장하니 작품 자체가 1960년대를 이끌 배우들의 온상으로 보일 정도다. 당시 신필름 소속 신예 신성일은 이 작품을 통해 영화배우로 데뷔하였다. 등장인물을 통해 이성·지성·감성의 분배, 문화적 육체적 건전성의 조화, 공동체와 가족 윤리까지 고려된 인상이며 좀도둑까지 의리와 인정을 따지는 형국이니 참으로 다사롭고 호혜로운 소우주다. 김희창의 동명 인기 라디오 드라마를 각색하였으니 자연스레 영화의 전개는 에피소드식이다. 드라마틱한 갈등과 불화보다 소소한 상황 속 유머와 페이소스에 주목하고 있는 셈이다. 감독 신상옥이 다양한 영화형식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특히 영화 중반에 가족 모두가 안방에 모여 시나리오를 창작하는 장면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모더니즘, 신파 멜로, 사극 등 다양한 형식이 가족의 상상력에 동원되며 이는 실상 신상옥이 이전과 이후의 필모그래피를 통해 전개해간 작품들의 다양성을 이룬다. 신상옥은 이 작품을 전후로 해서 < 동심초 >(1959)나 <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1961)와 같은 가장 아름다운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로맨스 빠빠>는 각 캐릭터가 지닌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심성의 성좌를 선보이는데, 그 우아한 조화로움의 경지가 신상옥 영화의 형식적·감성적 스타일의 정점을 보여주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편 여러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지만 이를 유려하게 연결 짓는 것은 김승호가 맡은 로맨스 빠빠 캐릭터 탓이 크다. 김승호는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한국적 아버지의 전형적 표상이었다. 그가 담당한 한국적 아버지의 전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 돈 >(1958), < 박서방 >(1960), < 마부 >(1961)에서처럼 봉건적 가치관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하층민 가부장의 역할이 하나라면, 속물적 근대화의 조류를 반영한 < 인생차압 >(1958), < 삼등과장 >(1961), < 로맨스 그레이 >(1963) 등에서 최종적으로는 영악한 시대에 패배하고 마는 서글픈 샐러리맨의 모습이 다른 하나다. 보험회사 만년 계장으로 겨우 가족을 부양하는 <로맨스 빠빠>는 아마도 두 번째 경향과 비슷해 보일 것이다. 그럼에도 선뜻 영화 <로맨스 빠빠>에 ‘한국적’(근대화의 균열과 가부장주의를 동반한다는 뉘앙스에서)이라든가 ‘현실적’(4.19전후의 시대정신의 반영이라는 뉘앙스에서)이라는 레테르를 붙이는 데 주저하게 되는 건 왜일까. 오히려 <로맨스 빠빠>는 세계시민적 교양과 이상적 추동으로 가득해 보이지 않는가. 그 일차적인 이유는 김승호가 열연한 ‘로맨스 빠빠’ 캐릭터가 한국의 전형적 가부장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기 때문인 듯하다. 그는 꽃다발 든 샐러리맨이자 책을 즐겨 읽으며 자식들과의 일상적 대화에도 무심치 않은 다정한 중년이다. 영화 속 빛나는 장면들은 로맨스 빠빠의 낭만적 몰입과 상상을 통해 등장하곤 하는데, 가령 이러한 장면이 있다. 동네에 기생집이 들어섰다는 아내의 말을 듣고 로맨스 빠빠는 아내가 말로 일러주는 약도를 따라 골목골목을 상상으로 누빈다. 이는 기생에 대한 세속적인 욕망으로 발동된 상상적 모험이기보다, 이 마을 어느 골목엔가 있다는 어여쁜 기생아기씨라는 아름다움에 일반에 대한 상상적 지향인 셈이다. 또 이러한 장면도 있다. 아내와 사랑싸움 끝에 자식들이 부르는 합창곡을 받아 눈을 지그시 감고 부르는 세레나데 ‘기쁜 우리 젊은 날’이나 실직된 날 술집에서 부르는 ‘켄터키 옛집’과 같은 노래의 장면들 말이다. 서민 가족을 서술하는데 관습적으로 동반되는, ‘먹고살기 힘들었지만 인정만은 넘쳐나던 그때 그 시절’이라는 정서는 늘 공동체의 과거 기억과 맞닿아있다. <로맨스 빠빠>가 전달하는 가족은 서민적이고 온정 가득하지만 아직 한국 사회에 도래하지 않은 이상적 가족이자 미래의 상이다. 1960년 당시 자동차와 피아노가 집집마다 다 있다는 둘째 딸의 투정도 투정이거니와, 장성한 자식 전부가 남녀차별 없이 대학교육 이상의 문화적 수혜를 누리고 있으며 가족 구성원 모두 일정 수준 이상의 교양을 갖추고 있다는 점도 일반적이지 않다. 다시금 온 가족인 둘러앉은 시나리오 상상 장면으로 돌아가 보자. 각자의 입장에 따라 소환된 상상적 이야기들은 사실상 이러한 교양에 기반을 두고 있다. 둘째의 시나리오 버전은 <춘희>나 <안나 카레니나> 등에서 보암직했던 치정 서사를 전제로 정서적 모더니즘을 선보인다. 둘째의 이야기가 삼강오륜에서 벗어날 것이라며 경쟁에 나선 아버지는 초로의 남자와 젊은 여성과의 사랑을 이야기하는데, 이는 괴테의 <파우스트>처럼 절대적 진리와 아름다움의 추구를 바탕에 두고 있다. 어머니 버전은 어떠한가. 그녀는 값싼 연애물을 비판하며 <춘향전>과 같은 한국 고전에 나타난 정서와 윤리를 강조한다. 한편 실직당한 날 밤 바에서 술을 마시던 로맨스 빠빠는 맥주병 뚜껑을 머리에 뒤집어 얹고 왕관을 쓴 양 “오늘부터 난 자유의 왕자야”라며 외치는데 대사의 어조가 사뭇 셰익스피어답다. <로맨스 빠빠>는 1960년대 초 요청되었던 문화와 교양의 심상적 분배를 서민가족을 통해 제시하고 있는 작품이다. 위트 있고 관용적이며 낭만적인 분위기가 영화 전반을 휩싼다. 형식적으로는 다양한 장르를 경유하는 한편 정서적으로 서양과 동양의 고전을 바탕에 둔 문화적 국제주의에 기반을 둔다. 그런 점에서 <로맨스 빠빠>는 비슷한 시기 제작된 서민적 홈드라마인 <삼등과장>이나 < 서울의 지붕 밑 >보다 한국적 현실에 덜 긴박되어 있으며 세태풍자적 요소도 적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가피하게 영화 속에는 당대적 터치가 가미되었는데 투쟁과 반항을 고유한 개성으로 삼던 막내가 아버지 실직 후 기성세대와의 투쟁을 포기하고 협력을 택하는 모습이 그러하다. 저돌적 아들을 포함한 전 가족의 자력갱생으로 마무리되는 결말을 가부장의 복권과 명랑한 근대화의 지향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왕좌에서 물러나 권력을 잃은 아버지가 비로소 진정한 가족의 중심이 된다는 아이러니야말로 <로맨스 빠빠>가 영민하게 시대에 응답하는 한편 능청스레 시대를 넘어서는 지점일 것이기 때문이다. >> 로맨스빠빠 VOD 보러가기 <<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 대일본 레코-드 회사 문예부장 이서구 끽다점 「비-너스」 매담 복혜숙 조선권번기생 오은희 한성권번기생 최옥진 종로권번기생 박금도 빠-「멕시코」 여급 김은희 영화여우 오도실 동양극장여우 최선화 경무국장게 보내는 아등의 서 삼교경무국장 각하여 우리들은 이제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여 줍시사고 연명으로 각하에게 청하옵나이다. (하략)” 1) ‘서울에 딴스홀을 許하라’며 경무국장에게 편지를 보낸 장안의 내로라하는 문화계 인물 중에는 ‘끽다점 「비-너스」 매담 복혜숙(卜惠淑(馬利),1904~1982)’도 있었다. 한국의 대중문화, 연예계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면 예의 복혜숙으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연극, 영화, 방송에서의 연기 생활은 물론 가수와 성우 활동에 이르기까지 한국 대중연예사의 곳곳에서 그녀의 이름을 빼놓을 분야는 없기 때문이다. 연극 연기로 배우 활동을 시작한 그녀는 마호정, 이월화에 이은 세 번째 여성 영화배우로 이름을 올렸다. 일제강점기 조선영화계를 점령했던 예쁘장하고 다소곳하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여성 배우와는 거리가 멀었던, 배우 복혜숙은 초창기 조선영화에서 담대하고 현대적인 역할을 맡아 대중의 이목을 끌었다. 숨을 다하는 그날까지 복혜숙은 한국 대중연예사에 살아있는 성좌로, 원로 여성영화인으로 선구적인 역할을 해내며 60여년의 연기생활을 이어갔다. (사진1) 왼쪽부터 배우 전계현, 배우 복혜숙, 홍은원 감독 (사진2) 배우 최은희(가운데)와 함께 한 노년의 복혜숙 (오른쪽) 충청남도 대천에서 태어난 복혜숙은 서학을 공부해 기독교를 받아들인 아버지와 담대하고 영민한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어머니에게 한글은 물론 한학도 배워 당시 배우로서는 보기 드문 학식과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이화여자고등학교에 다니며 배운 수예에 흥미를 느껴 수예 선생이 될 요량으로, 16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요코하마 기예학교에 들어갔다. 정작 일본에서는 영화, 연극, 가부키에 마음을 빼앗겼다. 특히 <충신장 忠臣藏>에 감동을 받아, 그녀는 연기자가 될 생각에 수예학교를 나와 시와모리 모리노무용소에 입학했다. 하지만 딸을 찾아 나선 일본까지 건너온 아버지는 복혜숙을 자신이 관여하던 강원도 금화학교의 일본어 교사로 만들어 버렸다. 1920년, 배우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도망치듯 상경한 그녀는 단성사의 인기 변사 김덕경의 소개로 김도산을 알게 되어 신극좌에 입단했다. 이듬해 복혜숙은 <오! 천명>으로 첫무대에 서게 되었다. 복혜숙은 극단이 지방 공연을 다닐 때면 악대를 앞세우고 공연 홍보를 위한 거리행진(街廻り)을 도맡았다. 또 일본에서 여러 번 관람하여 대사를 기억하고 있던 <대위의 딸 大尉の娘>을 각색한 <누교 淚橋>를 직접 쓰고 주연까지 맡아 공연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사진3) 젊은 시절의 복혜숙 극단생활을 이어나가면서도 1925년에 복혜숙은 연기공부를 위해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현철이 세운 최초의 연기학교인 조선배우학교에 입학했다. 비슷한 시기 극단 토월회에도 입단했다. 토월회의 인기 배우 이월화를 대체할 배우로 복혜숙이 등장했던 것이다. 복혜숙은 토월회가 공연한 <춘향전>의 ‘춘향’ 역으로, <카쥬-샤>의 ‘카쥬-샤’ 역으로 이월화 이후 최고의 스타가 됐다. 2) 그 뒤에는 조선극우회와 중앙무대로 옮겨 무대에 섰다. 무대에서 인기를 얻은 그녀는 1926년부터는 최초의 방송국 경성방송국에서 시험용으로 내보낸 첫 방송극 <새벽종>(1926)에도 성우로 출연했다. 3) 또 복음성가를 잘 부르던 복혜숙이 음반도 냈다. 영화대본을 직접 연기하듯 읽어 녹음하는 영화극 음반인 <장한몽>(1929)이 그 시작이었다. 이어서 <쌍옥루>, <부활>, 그녀가 출연한 <낙화유수>에서 주인공의 비련의 운명을 담은 주제곡 ‘강남 달이 밝아서 임이 놀던 곳~’으로 시작되는 <강남달>을 선보였다. 그 후로도 <숙영낭자전>, <심청전>, <춘희> 등의 수많은 음반을 취입했다. 곧 1930년 <애(愛)의 광(光)>을 발표하고는 장안 최고의 재즈가수로 불리기도 했다. 4) 연기를 시작하면서부터 다재다능한, 명실공이 그녀는 ‘만능 탤런트’였다. 물론 그녀가 이렇듯 많은 재능을 발휘하게 된 데에는 한국 대중문화사 초창기의 한계적 특징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당시 대중문화에 투신했던 인원이 적기도 했거니와 연극배우, 영화배우, 성우나 가수 등의 역할 분할이 뚜렷하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복혜숙은 한국의 개척기 대중문화사에서 빛나는 공적을 쌓은 선구자이자 연예계의 지주로 살았다. 하지만 그녀의 주요 활동 영역은 영화였다. (사진4) 영화 <농중조>(이규설, 1926)의 현장. 복혜숙은 아버지의 엄한 감시 때문에 새장 속의 새처럼 집안에 갇혀 사랑을 이루지 못하는 여학생 화숙을 연기했다. 연극계에서는 이미 장안에 이름이 났던 복혜숙은 1923년 영화에도 출연을 시작한다. 첫 출연은 마호정과 함께 조선총독부가 계몽을 목적으로 제작한 것으로 윤백남이 연출을 맡은 위생 영화 <방역 防疫>이었다. 5) 출연료 2원을 받은 영화에서 그녀는 길거리에서 파는 레모네이드를 마시고 호열자(콜레라)에 걸려 눕는 주인의 딸 역할을 했다. 곧 극영화에도 출연하는데, 첫 출연작은 당시 인기 있었던 일본 제국키네마의 <농중조 籠の鳥>(松本英一, 1924)를 번안한 이규설의 <농중조 籠中鳥, 새장 속의 새>(1926)였다. 유교사상이 팽배했던 조선에서 젊은이들의 자유연애를 다루어 당시로서는 퍽 파격적인 작품이었다. 사랑을 쫓는 신여성 화숙으로 분한 복혜숙은 다리를 노출하기도 하고 안식(이규설)과 손을 잡는 러브신이 있어 인구에 회자되었다. 통속 신파 번역극이라는 비판 속에도, 남녀 학생들에게는 큰 환영을 받았다. 6) (사진5) <낙화유수>(이구영, 1927)의 한 장면. 이 영화는 단성사의 변사였던 김영환이 진주 기생이던 어머니의 일생을 극화한 <낙화유수>를 영화화한 것이었다. 복혜숙은 주인공 기생 역할을 맡았다. (사진6) <낙화유수>(이구영, 1927)에 참여한 스태프들 이듬해 복혜숙은 조선배우학교 시절 선생님이던 이구영이 연출하는 〈낙화유수〉(1927)를 찍었다. 배우학교의 동기생 이원용이 남자 주인공이었다. 이번에는 기생 역할이었다. 당시 단성사의 변사였던 김영환이 진주 기생이던 어머니의 일생을 극화한 <낙화유수>를 영화화한 것이었다. 기구하게 기생이 된 여인과 젊은 화가의 이루지 못할 사랑을 그린 이 신파극은 개봉 당시 장안의 기생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라며 치맛자락을 휘감고 구경들을 와 더 화제가 되었다. 7) 실연의 마음을 가누지 못해 여인이 투신하는 장면이 두고두고 회자되었는데, 장마철에 한강에 자살하기 위해 뛰어드는 장면을 회고하는 그녀의 말을 들어보면 알 수 있다. ‘오고가는 행인들이 여자가 자살한다고 구경이 났었던’ 것이었다. 이처럼 그녀는 대담한 연기를 선보였다는 점에서 당대의 다른 여배우와는 달랐다. 그녀는 연기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배웠다. 서예를 배우는가 하면 창과 러시아 댄스, 유도는 물론 자동차 운전을 배우는 데에 망설임이 없었다. 8) 그렇게 배운 솜씨들은 배우 생활을 하면서 충분히 활용할 수 있었다. (사진7) 감독이자 배우 이규설. 복혜숙은 이규설의 작품 <농중조>(1926), <홍련비련>(1927), <순정은 신과 같다>(1928)에서 주연으로 열연했다. 그 뒤 ‘현대학생극’으로 불리던 〈홍련비련〉(이규설, 1927) 9) 에서 복혜숙은 지극히 우정이 깊은 두 대학생 김일과 현진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여배우 편실 역할을 했다. 이어 이규설 감독과의 세 번째 작업은 <순정은 신과 같다>(1928)였다. 둘은 지주의 아들 이규설과 소작인의 딸 복혜숙로 만나 부부로 연기했다. 같은 해 <세 동무(세 걸인)〉(김영환, 1928)에서 복혜숙은 어부의 딸 역을 맡아 사랑에 빠지는 연기를 선보였고, 만주 현지 촬영으로 이월화와 함께 출연했던 〈지나(支那)가의 비밀(일명 흑진주)〉(유장안, 1928)에서는 중국인 거리에 인질로 납치된 조선 여자 송미례 역을 맡았다. 주연으로 활동하던 이 시절 ‘얼굴이 땡그랗’던 복혜숙은 쾌활하고 발랄한 왈가닥 ‘잇 걸(It girl)’로 불린 클라라 보(Clara Bow)를 닮았다는 말을 듣곤 했다. 10) 해방 이전은 배우 복혜숙의 전성기였다. (사진8) <세 동무(세 걸인)〉(김영환, 1928)의 한 장면, 복혜숙은 사랑에 빠지는 어부의 딸 역을 맡았다. (사진9) <지나 가의 비밀>(유장안, 1928) 신문 광고. 만주 현지 촬영을 감행한 이 영화에서 복혜숙은 질로 납치된 조선 여자 송미례 역이었다. 《동아일보》 1928년 5월 25일자 6면 하지만 배우 활동만으로 생활을 꾸려내기가 만만치 않았다. 그녀는 1928년부터 8년간 카페 비너스를 운영했고, 이때 결혼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곧 두 젊은이들의 사랑의 도피를 다룬 영화 박기채의 <춘풍>(1935)에 출연으로 영화계에 복귀했다. 안종화의 <역습>(1936)에는 살인자의 아내 역으로 출연하면서 카페 비너스를 제작 사무실로 제공하면서 실질적인 제작에 참여했다. 11) <반도의 봄>(이병일, 1941)에서는 배우가 되기 위해 서울로 올라온 정희와 함께 방을 쓰는 음반회사 직원으로 등장했다. 조선인들의 영화 제작이 힘들어진 식민지 말기에는 <감격의 일기 感激の日記>(신경균, 1943), <그대와 나 君と僕>(허영, 1944)를 비롯한 다수의 어용영화에도 출연했다. (사진10) <역습>(안종화, 1936)의 한 장면 (사진 11) <반도의 봄>(이병일, 1941)에서 음반회사 직원 모경숙 역의 복혜숙 1920년대 말 자유분방한 신여성의 아이콘이던 복혜숙이 연기를 전환하게 된 계기는 최인규의 <수업료>(1940)에 출연하면서부터였다. 동시녹음이 진행된 이 영화에서 30대 복혜숙의 목소리를 들어볼 수 있다. 그녀는 이 영화에서 자식 내외가 행상을 하러 도시로 나가자 소학교에 다니는 손자 영달을 돌보기 위해 넝마를 주우며 근근이 생활을 이어가는 할머니 역을 맡았다. 당시 그녀 나이 37세였다. 이 영화 이후 그녀는 노역을 주로 맡았다. 인자한 어머니, 억척스럽고 생활력 강한 상인, 유난스런 할머니 같은, 그녀는 연기력을 요구하는 조역으로 이후 300여 편의 영화에 얼굴을 비쳤다. 또 텔레비전 드라마 <아내의 얼굴>(KBS, 1962), <아씨>(TBC, 1970), <옛날 나 어릴 적에>(MBC 신년특집, 1981) 같은 작품에도 종종 출연하였다. (사진12) <수업료>(최인규, 1940)에서 복혜숙은 병상에 누워서도 어떻게든 손자 영달이의 수업료를 마련해보려는 애달픈 할머니를 연기했다. 해방 후 정치와 경제가 안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기자재와 필름이 부족해 영화제작이 열악했던 시기, 새롭게 시작하는 영화계에서 그녀 역시 주조연을 마다않고 성실히 한몫을 했다. 최인규의 <자유만세>(1946)에 간호사 혜자(황려희)의 어머니를, 〈똘똘이의 모험〉(이규환, 1946)에서는 똘똘이의 어머니를 맡았다. 또 〈죄 없는 죄인〉(최인규, 1948), 〈여명〉(안진상, 1948), 〈수우〉(안종화, 1948), 〈성벽을 뚫고〉(한형모, 1949)에도 작은 역이나마 출연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국방부 정훈국 문예중대에 입대해 공연을 하며 전장을 누볐고, 잠시 머물렀던 마산에서 촬영한 〈삼천만의 꽃다발〉(신경균, 1951)에서는 전선에서 실명한 아들(최현)에게 자신의 눈을 이식해주는 어머니로 분했다. (사진13) <여명〉(안진상, 1948) 신문광고 (사진14) <성벽을 뚫고>(한형모, 1949) 신문광고 (사진15) <삼천만의 꽃다발>(신경균, 1951) 광고. 아들에게 자신의 눈을 이식해 주는 어머니 복혜숙이 보인다. 전후 본격적으로 활기를 띠기 시작한 한국영화계에서 복혜숙은 전성기를 넘은 나이에도 활동을 이어나가는 거의 최초의 여성 배우였다. 더 이상 주연을 할 만한 시나리오가 없었지만 <청춘쌍곡선>(한형모, 1956), <아리랑>(김소동, 1957), <조춘>(유두연, 1959), <삼등과장>(이봉래, 1961), <청춘교실>(김수용, 1963), <여판사>(홍은원, 1963), 그리고 미공보원(USIS-Korea)이 제작한 문화영화 <황토길 Litany of hope>(양승룡, 1962)에서 어머니와 할머니 역할을 전담하면서 꾸준히 식지 않은 연기력과 열정 보여주었다. (사진16) <청춘쌍곡선>(한형모, 1956)에서는 가난한 환경에서 자란 중학교 교사 명호(황해)의 어머니로 분했다. (사진17) <삼등과장>(이봉래, 1961) 구소장(구봉서)의 어머니 역을 맡았다. (사진18) <황토길>(양승룡, 1962)에서 한센 병을 앓고 있는 시인 한하운(김웅)의 어머니로 출연한 복혜숙 (사진19) <청춘교실>(김수용, 1963)에서는 손녀 셋을 거느린 왈가닥 할머니로 등장했다. (사진20) <여판사>(홍은원, 1963)에서는 치매를 앓고 있어 우연히 독을 마시게 되는 시할머니 역할을 했다. 김수용 감독이 배우 복혜숙이 자신의 영화에서 열연했던 강렬한 장면을 회고한 적이 있다. 해방촌 빈민들의 군상을 그린 김영수의 희곡을 영화화한 <혈맥>(1963)에서 김덕삼(김승호)은 새로 얻은 아내가 자신의 돈을 훔쳐 달아나자, 중신을 선 대폿집 주인(복혜숙)에게 무작정 따지러 간다. 아내를 찾아내라는 어깃장을 놓는 덕삼과 이 어이없는 주장에 맞서는 꼿꼿이 맞서는 대폿집 주인 아낙의 대단한 육탄전이 펼쳐진다. 이 장면에서 복혜숙은 담배를 입에 물고 김승호와 몸싸움을 하면서 거칠게 대거리를 하는데, 그녀는 해방과 전쟁을 거치면서 생활 전선에 나서야했던 강단 있는 우리네 어머니의 모습을 몸소 보여준다. 김수용의 또 다른 영화 <사랑의 조건>(1979)에서 일흔이 넘은 복혜숙은 어린 손자를 데리고 필사의 힘으로 한 겨울 눈 내리는 대관령을 넘는 할머니로 특별출연을 했다. 이 영화에서 그는 모진 날씨 따위에는 아랑곳없던, 여전히 두 눈에서는 광채를 내뿜으며 서슬 퍼런 연기를 해내던 노년의 복혜숙을 잊지 못한다. 12) (사진21) <혈맥>(김수용, 1963) 중 김덕삼(김승호)과 대폿집 주인(복혜숙)의 육탄전 복혜숙은 평생을 배우로 무대 위와 또 카메라 앞에 있었다. ‘남들이 안하던 때에 배우로 입문해 연예계의 여러 방면에서 초창기 증인으로 또 산 역사 노릇’을 했다. 다방면에서 최고의 인기와 함께 여성으로서 선각자의 길을 걸었다. ‘복혜숙 여사의 연기생활 40주년 기념하는 스타의 밤’에는 많은 동료와 후배들이 기꺼이 함께 해줄 만큼 평생 한국영화를 지켜온 한국영화의 어머니로 평가를 받았다. 또 ‘뭐든 뒤로 미루지 못하는 성격 탓’에, 또 연예계를 통찰하는 식견을 갖춘 몇 안 되는 배우로 영화인들의 존경과 대우를 받으며 행복한 삶을 살았다. 13) 18세부터 연기해 온 그녀의 일대기가 특별드라마 <얼굴>(1981, KBS)로 만들어질 만큼 그녀의 생 그 자체가 한국 대중연예사이기도 했다. (사진22) <대한뉴스>(제 387호, 1962) 연예계 소식 중. 962년 10월 12일부터 2일간 시민회관에서 복혜숙의 연기생활 40주년을 기념하는 스타의 밤‘ 행사가 열렸다. 당시 이원우 공보부 장관이 복혜숙에게 표창을 수여하고 있다. 스크린 밖에서도 그녀는 영화계의 원로로서 업계의 권익을 위해서라면 발 벗고 나섰다. 1954년 한국영화 입장세 면세조치를 이끌어내기 위해 선봉에 섰고, 한국영화협회가 한국영화 40년을 기념하기 위한 영화회관 건립 기금을 위해 야심차게 기획된 영화 <애정삼백년>(윤봉춘, 1962)에도 앞장 서 힘을 보탰다. 1955년 대한영화배우협회를 창설해 10년간 초대 회장을 맡기도 했으며, 1962년부터 한국영화인협의의 연기분과 위원장으로 배우들의 뒷바라지에 힘을 쏟았다. 그녀의 은막 인생을 마지막으로 장식한 영화는 진용(박재호)의 할머니 역을 맡은 〈낮은데로 임하소서〉(이장호, 1982)였다. 하지만 78세의 그녀는 아직도 ‘못 다한 일 많아 은퇴할 생각이 없’ 14) 었다. (사진23) 한국영화 40년을 기념하기 위한 영화회관 건립 기금을 위해 야심차게 기획된 영화 <애정삼백년>(윤봉춘, 1962) 포스터. ‘윤봉춘 복혜숙 지휘’라는 문구가 보인다. (사진24) <낮은데로 임하소서>(이장호, 1982)에서의 복혜숙 1)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 《삼천리》 1937년 1월호 9권 1호, 162~166쪽. 2) “명우와 무대(7), 복혜숙 양의 『카쥬-샤』, 부활의 여주인공으로, 토월회 무대에”, 《삼천리》 제5권 4호, 1933년 4월, 11쪽. 4) 복혜숙의 생애는 다음 자료들을 참고해 요약 기술하였다. 『여성실화: 빛나는 성좌 복혜숙』, 명서원, 1976: 이영일, 「스크린을 빛낸 예도 60년-복혜숙」, 『한국영화인열전』, 영화진흥공사, 1982; 황문평, 「여성 연예계의 선구자 복혜숙」, 『삶의 발자국』(1), 선, 1988; 조영만, 「여배우 복혜숙의 활약」, 『30년대 문화예술인들: 격동기의 문화계 비화』, 범양사, 1988; 한국예술연구소 편, 「2장 복혜숙」, 『이영일의 한국영화사를 위한 증언록 : 김성춘·복혜숙·이구영 편』, 도서출판 소도, 2003, 이순진, 「복혜숙」, 이승희 외 지음, 『식민지시대 대중예술인 사전』, 도서출판 소도, 2006; .한상언, “한상언의 <한국영화스타>3 :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 한국영화의 어머니 복혜숙”, 오마이스타, 2004년 10월 13일, 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0214631 4) 이동순, “이동순의 가요이야기, 한국 최초 재즈가수 복혜숙의 노래를 들어보세요”, 조선Pub, 2013년 10월 18일, 조선Pub 홈페이지 http://pub.chosun.com 5) 복혜숙, 「나와 영화반세기 복혜숙 편」, 월간 《영화》 1974년 1월호, 53쪽; 복혜숙, “나의 교유록-원로여류가 엮는 회고 <83> 영화계 데뷔”, 《동아일보》 1981년 5월 6일 7면. 6) “영화평 농중조 조선키네마 작품”, 《동아일보》 1926년 6월 27일 5면. 7) 안종화, 앞의 책, 157쪽; 김남석, 「배우 복혜숙 연구」, 『인문과학연구』 13, 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05, 123~125쪽. 8) 복혜숙, “나의 교유록-원로여류가 엮는 회고 <81>”, 《동아일보》 1981년 4월 29일 7면. 9) KMDb에는 이필우가 감독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신문지상에는 이규설이 감독으로 명시되어 있다. “홍련비련”, 《동아일보》 1927년 2월 5일 5면. 10) 한국예술연구소 편, 「2장 복혜숙」, 앞의 책, 144쪽. 11) 복혜숙, “나와 영화반세기: 32세 때부터 노인역만”, 월간 《영화》 1974년 3월호, 68쪽. 12) 김수용, “서울국제여성영화제와 여성신문이 함께하는 “그리운 여배우” 1탄 복혜숙: 드라마 분위기 설정해가는 역광 같은 배우, 복혜숙”.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블로그, 2014년 2월 26일,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블로그 http://siwff.tistory.com/503 13) 복혜숙, “나의 교유록-원로여류가 엮는 회고 <97> 첫 TV드라마”, 《동아일보》 1981년 5월 26일 7면. 14) 복혜숙, “나의 교유록-원로여류가 엮는 회고 <100> 복혜숙 연예생활 60년”, 《동아일보》 1981년 5월 30일 1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