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랠라
- 감독
- 파노스 H. 코트라스
- 제작년도
- 2009
- 출연
- 미나 올파노우, 야니스 코키아스메노스, 미노스 테오해리스, 아키스 이오아노우, 아르기리스 카브비다스
작년 여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진행된 ‘해외 영화학자 초청 대중 특강’의 내용을 강연자의 시점에서 정리합니다. 영화와의 첫 만남과 학계 입문 과정에 얽힌 소소한 에피소드부터, 세계 속 한국영화의 위치, 최근 몰두하고 있는 연구 주제에 대한 학술적 분석까지. 한국영화를 향한 해외 영화학자 6인의 개성과 열정으로 꽉 채워졌던 2시간을 KOFA가 직접 기록한 특강노트 로 만나보세요. 안진수 교수 는 영화이론 전공으로 학계에 입문한 후 한국학의 관점에서 한국영화를 연구해왔다. 한국의 언어와 사회, 문화가 영화와 맺는 관계에 관심을 가지고, 언어의 사용을 통해 발휘되는 표현력을 중심으로 한국영화를 분석하고 있다. 현재 UC 버클리 동아시아 언어와 문화학과 부교수로 재직 중이며, 저서로는 한국영화에서의 일제강점기 재현 방식을 분석한 Parameters of Disavowal: Colonial Representation in South Korean Cinema(2018)가 있다. 영화학자에서, 한국영화를 연구하는 한국학자로 강연의 주제 중 하나이기도 한, 한국영화를 연구하게 된 계기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과거를 돌이켜보았다. 크게 세 가지 변곡점을 떠올렸는데, 첫 번째로는, < 레이더스(Raiders of the Lost Ark) >(스티븐 스필버그, 1981)를 중앙극장에서 처음 관람했던 시점을 들 수 있다. 아주 잘 만들어진 액션영화였고, 극중 트럭 추격씬에서 8분간 이어지는 존 윌리엄스(John Towner Williams)의 장엄한 음악이 당시 중학교 2학년이었던 나로 하여금 영화에 대한 생각을 멈추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이후에 동일한 제작자 조지 루카스(George Walton Lucas, Jr.)의 <스타워즈> 시리즈에 매료되었다. 일본 영화잡지 《스크린》과 《로드쇼》를 책방에서 구입해, 조지 루카스에게 쓴 영문 편지를 루카스 필름의 주소로 발송해보기도 했다(지금의 K-POP 팬들처럼). 그때 형성된 영화적 취향 때문에 지금도 여전히 역동적인 액션영화들에 이끌리는 것 같다. <레이더스> 중 / < 스타워즈 >(조지 루카스, 1977) 중 사진: " Raiders of the Lost Ark ", " Star Wars ", IMDb 고등학교를 마치고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하였고, 그곳의 생활에 적응하면서 지역 내 도서관이나 예술영화 상영관에서 꾸준히 영화를 봤다. 같은 시기 영화문화가 융성했던 1990년대 한국을 살아간 시네필들과는 다른 경로로 영화에 대한 관심을 키워나간 것이다. 그리고 UC 버클리에 영화 전공으로 입학해, 잡지나 책으로만 접했던 영화이론을 공부하였다. 특히 영문학 또는 영화학과의 교수님들로부터 ‘장르영화’를 분석하는 방법을 습득하고 배움의 범위를 대중적 영화의 영역으로 넓혔던 경험이 유익했다. 완성도는 떨어지는 작품이더라도 이를 문화 안에서 읽어내려는 시도를 이어간 ‘지성’이 무척 흥미롭게 느껴진 시기였다. 학부를 마친 후, 영화 공부를 조금 더 하고 싶다는 생각에 UCLA 영화이론과에 진학했다. 그리고 이때 서구의 영화이론과 한국영화 사이에 모종의 괴리가 존재함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다행스럽게도 당시 UCLA에는 지금까지 왕성히 활동 중인 한국학 연구자들이 공부하고 있었는데, 나는 이들과 함께 민족주의에 관한 세미나에 참여하고 관련 강연을 들으며 동아시아학과 한국학 담론을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박사논문의 주제로 ‘1950~60년대 한국 멜로드라마의 대중 논리’를 설정했다. 박사논문을 위한 자료 조사를 위해 1년 여간 한국에 머물렀는데, 이때 한국영상자료원(이하 ‘영자원’)을 자주 방문하여 한국고전영화를 보았다. 당시에는 연구자들이 한국고전영화를 보려면 영자원이 개최하는 ‘좋은 영화 보기’ 행사를 이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때는 개인이 영화를 선택하여 볼 수 있는 영상도서관을 아직 영자원에서 개관하지 않은 상태였다.) 나의 선택과 무관하게 주어진 옛날 작품을 무작위로 보면서 오히려 한국고전영화에 대한 일종의 ‘감각’을 얻게 되었다. 영화 역사가나 평론가에 의해 비중 있게 거론된 적이 없었던 좋은 작품들을 만나는 즐거움도 상당했다(예를 들어, 인공적 세트를 너무나 아름답게 활용한 < 그 여자의 일생 >(김한일, 1957)을 꼽고 싶다). <그 여자의 일생> 중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뉴욕대학 동아시아학과에서 박사후과정을 거쳤고, 이후 한국어 강사로 1년간 한국어를 가르쳤는데, 한국영화와 관련하여 오늘 말씀드릴 주제(영화 속 일상언어와 언술행위)를 연구하게 된 데도 당시의 경험이 영향을 미친 듯 싶다. 2007년부터는 홍익대 조치원 캠퍼스에서 영상영화전공 교수로 영화이론과 영화사, 그리고 게임을 중심으로 한 뉴미디어에 대해 강의했고, 2012년부터는 UC 버클리 동아시아 언어와 문화학과에서 한국학을 가르치게 되었다. 현재 미국 학계 안에서 한국영화는 한국학과 영화학, 미술사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를 통해 연구되고 있다. 하지만 동아시아학 전반이 그렇듯이 한국학에서도 ‘영화’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지다 보니, 한국영화는 앞으로 영화학보다 한국학 의 범주 내에서 더욱 활발히 연구되리라고 생각한다. 특히 한국학에서는 언어, 즉 소통의 수단을 넘어 특정 지역민들의 삶의 형태 전체를 배운다. 영화를 깊이 있게 연구하려면 영자원과 같은 아카이브에서 1차 자료를 접해야 하고, 이외에도 그 지역의 언어로 작성된 수많은 연구 성과를 익혀야 하므로, ‘언어’를 다루는 한국학은 한국영화 연구를 위한 유용한 방법론이 될 수 있다. 또한 한국영화에 관한 학술 활동이나 프로젝트를 지원하는 주체는 여전히 대부분 한국학 관련 기관이며, 한국 대중문화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한국학과에서 ‘한국어’ 수업을 수강하는 학생들의 관심이 자연스럽게 ‘한국영화’로 옮겨가는 현상도 자주 관찰된다. 다만 한국학과 같은 지역학의 관점에서 영화를 연구할 때 발생하는 한계도 있다. 한국영화를 한국사회와 역사의 단순한 반영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고, 많은 지역학 전공 학생들은 영화 문법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본격적인 강의 전에 이에 관한 개념을 먼저 교육할 필요가 있다. 한국영화에 관한 최근의 연구 주제 역시 다양한데, ‘감응’과 ‘정동,’ 달라진 미디어 환경에 집중한 (OTT와 같은) ‘플랫폼’의 문제, ‘재현의 정치,’ 요즘 들어 더욱 주목받고 있는 ‘포스트 휴머니즘’과 ‘신유물론’ 등을 예시로 들 수 있다. 또한 특정 지역의 영화를 보다 국제적인 관점에서 분석하는 간(間)국가적 영화제작 및 문화 연구도 이뤄진다. 나의 한국영화 연구 이력을 소개하자면, 먼저 한국영화에서 일제강점기가 어떻게 재현되었는지를 분석한 적이 있다( Parameters of Disavowal ). 그리고 지금은 영원히 매료될 만한 소재인, 김기영 감독의 영화를 연구하고 있다. 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이상한 느낌의 문어체 대사는 무척 흥미롭고, 이 주제에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를 고민하다가 그 생각이 번져 다른 한국영화들의 언술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Parameters of Disavowal: Colonial Representation in South Korean Cinema (2018) 말문이 트인 한국영화, 대중을 만나다 < 기생충 >(봉준호, 2019)이 보여줬듯이, 2000년대 이후 많은 한국영화들이 대중성과 예술성의 동시 달성이라는 유의미한 성과를 거뒀다. 요즘 주목받는 감독들의 작품들에서도 꾸준히 확인되고 있는 이러한 한국영화의 특성은 어떻게 자리 잡았을까? 지난 20~30년간 한국사회는 전면적이고도 급진적인 변화를 경험했다. 정치적으로는 독재정권의 권위주의 체제를 탈피하고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확립되었고, 경제적으로는 시장 주도의 신자유주의 체제가 들어섰다. 사회적 차원에서는 개인의 다양한 욕망이 자유롭게 표현되거나 분출될 수 있게 되었다. 미디어 환경 역시 인터넷 기반의 플랫폼을 중심으로 급격하게 변화했으며, 영화산업의 구조와 기술 또한 크게 바뀌었다. 이러한 환경의 변화와 함께 한국영화를 주도하는 세대 또한 교체되었다. 그간 많은 영화학자들이 이와 같은 한국영화의 변화에 대해서 두터운 지식과 논의를 생산해왔다. 예컨대, 1970~80년대 청춘영화에서 체제에 대한 젊은이들의 저항 정신을 읽는다거나 1990년대 뉴 코리안 시네마를 사회현실에 대한 비판적 리얼리즘과 연관지어 분석하는 경향을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1990년대 이후 한국사회 변화의 주된 양상 2000년대 한국영화의 특징이 형성된 계기는 앞선 시대의 것과는 조금 다르다. 당시 한국영화에게는 ‘ 대중성 ’ 확보가 가장 시급한 과제였는데, 동시에 새로운 표현력까지 갖추고자 노력한 모습이 엿보인다. 나는 이 대중성과 표현력을 모두 아우르는 변화의 단초를 신체와 언어의 표현 방식 에서 찾는다. 이는 앞서 이야기한 시간적 흐름에 따라 한국영화에서 차츰 다르게 반영되어왔다. 가령 < 바보선언 >(이장호, 1983)과 같은 작품은 무성영화와 흡사할 정도로 대사가 적다. 대신 관객은 <바보선언>의 마지막 장면이 보여주듯, 인물들의 억압된 몸짓에 응축되어 있는 상징적 의미를 두텁게 읽을 수 있다. 영화 속 언술을 감시하는 ‘검열’이 강력했던 시기인 만큼 영화에서 의미심장한 ‘말하기’가 진행되기 어려웠다는 점도 여기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 이후에도 < 파업전야 >(이은기, 이재구, 장동홍, 장윤현, 1990), < 그들도 우리처럼 >(박광수, 1990), < 이재수의 난 >(박광수, 1998) 등 말수가 적은 인물들이 등장하는 작품들이 지속적으로 선을 보였다. 영화를 이미지의 매체로 보려는 경향, 즉, 말이 없더라도 심도 깊은 주제로 소통이 가능하다는 믿음이 공유되었던 시대였다고 본다. 다만 2000년대 이후의 한국영화가 이룬 성취를 보았을 때, 더 이상 이러한 믿음이 통용되기는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말수가 적은' 한국영화 <바보선언>, <파업전야> (사진: 서울독립영화제 ) 1990년대에 들어서며 나타난 < 서편제 >(임권택, 1993)나 < 꽃잎 >(장선우, 1996)과 같은 진지한 예술영화들은 전통적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여성의 신체를 주변화하고 착취하며, 여전히 고통받는 이들의 목소리를 드러내지 않는다. 1990년대 후반이 되면서, 몇몇 작품들을 시작으로 한국영화에서 ‘말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 개같은 날의 오후 >(이민용, 1995), < 처녀들의 저녁식사 >(임상수, 1998), < 주유소 습격사건 >(김상진, 1999) 등이 그것이다. 독특한 말과 함께 욕설도 등장하는 < 넘버 3 >(송능한, 1997/이상한 말투로 화제가 된 송강호가 이 작품으로 스타의 반열에 오르기도 했다), 그리고 다양한 욕설을 십분 활용한 < 황산벌 >(이준익, 2003) 역시 인상적이었다. 극중 대사와 욕설의 비중을 늘린 대표적 한국영화 <넘버 3>와 <황산벌> 대사가 급증한 2000년대 이후 한국영화의 대중성을 ‘언어’의 사용에 초점을 맞춰, ‘ 말문이 트인 영화 ’라는 개념으로 분석하고 싶다. 먼저, 영화 속 언어와 관련된 몇 가지 전제를 언급하려고 한다. 영화는 문어가 아닌 구어, 즉 일상어 에 의해 진행된다. 언어의 의미는 실제로 ‘사용됨’으로써 습득된다는 일상언어철학의 관점을 따른다면, 언어의 특유한 의미는 인물들이 일상에서 대화를 나누는 맥락 속에서만 발견되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는 발화자의 ‘신체’를 볼 수 있는 매체라는 점에서, 영화의 언어는 신체와 결합 된 채 지각된다. 신체유물론을 주장한 테리 이글턴에 따르면 인간의 신체에는 외부와 관계를 맺고 역동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은 결과가 집합되어 있다. *주1 삶을 통해, 혹은 노동 및 관계의 형성과 마찰을 통해 얻은 감각은 이 복합적인 물질 덩어리인 신체에 매번 아로새겨진다. 영화는 인물의 신체와 결부된 언술 행위의 직접적인 의미작용을 통해 그와 같은 중층적인 신체의 의미를 강렬하게 환기시킨다. 권위주의 체제에서 신체의 의미를 알레고리와 같은 좁은 경로로 한정하여 표현했던 것과 달리, 2000년대 이후에 나온 한국영화는 다른 방식을 사용했다. 언어와 신체라는 두 가지 표현의 축을 비비고 충돌시키며 고유한 사실감각과 공감, 정서 를 일구어냈다. 또 다른 전제는 언어와 세상이 접착 되어있다는 점이다. 비트겐슈타인은 후기 철학에서 언어와 세상이 ‘직조’되어있다고 표현했지만, 나는 둘의 긴밀한 관계를 더 강조하고자 ‘접착’이라는 단어를 쓰고자 한다. 더불어, 역시 비트겐슈타인이 주장했고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언어의 의미는 문자화된 실험실에서가 아니라 그것의 ‘사용’을 통해서만 파악 될 수 있는 것이다. 2000년대 한국영화와 대사: 보고 듣는 재미의 본격화 나는 지금까지 나열한 이 전제들이 영화에서 자명하게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특히 2000년대 이후 한국영화에서는, 명민한 작가들에 의해 다채로운 방식으로 언어가 사용되며 표현력이 극대화되었고, 그로 인해 한국영화 고유의 현실감각과 주제적 심화를 달성할 수 있었다. 언어의 기발한 사용 방법이 한국영화에서 빛을 발한 몇 가지 순간을 소개하려고 한다. 각 작품 속 개별 장면들에 나타난 개성 가득한 언술이 얼마나 재치 있게 또는 날카롭게 현실감각을 끌어내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부당거래> 중 먼저 < 부당거래 >(류승완, 2010)의 그 유명한 명대사,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 줄 알아요” 를 보자. 극중 주양( 류승범 )은 타인에게 그리 호의적인 인물이 아님에도 이 대사 한 줄만은 유독 큰 관심을 받아왔다. 해당 언술이 사회 현실의 어떠한 측면을 덩어리째 노출했기에 관객이 그 사실성에 깊이 공감했다고 본다. 타인과의 관계 맺음에 내재된 근본적인 문제, 즉 예의와 선의를 다하면서도 타인에게 착취당하지 않는 방법을 고민해본 사람이라면, 이 대사에서 생생한 현실감각을 체험하게 된다. 영화의 대사에 당대 한국의 체험적 현실이 접착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베테랑> 중 류승완 감독은 액션들 사이에 묻어나오는 간결한 대사로 타자와의 관계 맺기에 관한 문제를 손쉽고도 재치 있게 해석한다. < 베테랑 >(2014)에서 범죄 현장에 나타난 서도철( 황정민 )을 본 중고차 매장 업주( 배성우 )가 “아까 낮에, 저기... 사장님?” 이라고 이야기하는 장면이 아주 유쾌하다. ‘사장님’을 명칭이 아닌 호칭으로 사용하고 있다. 또한 전 소장( 정만식 )은 경찰의 눈을 피해 도피하라고 권하는 최 상무( 유해진 )에게 “나도 듣는 귀가 있어요, 상무님아. 여기 배고프고 성실한데 겁 없는 애들 많아” 라고 받아친다. 상무님이라는 호칭에는 ‘님’이 붙어 존대의 의미가 있지만, 그 뒤에 손아랫사람이나 짐승 따위를 낮춰 부를 때 쓰는 ‘아’라는 호격조사가 붙어서 묘한 느낌을 준다. 사회적 관습으로서의 호칭과 개인의 폄하 감정이 섞여 있는 것이다. 류승완 감독은 이처럼 위계상 낮은 위치에 있는 인물의 말문이 트이도록 설정한다는 점에서 독특한 재미를 선사하고 있다. <살인의 추억> 중 인물의 특성이 명확히 나타나는 대사와 행동 <살인의 추억>(봉준호, 2003)에서 박두만( 송강호 )의 공중 발차기와 함께 들리는 “여기가 강간의 왕국이야?” 도 인상적이다. 극중 박두만이라는 인물의 특성을 대사와 행동으로 간명하게 드러내는 대목으로, ‘대답을 기대하지 않는 물음’만을 던지는 폭력적인 공권력의 현실을 한꺼번에 품고 있다. 봉준호 감독이 포착해 낸 1980년대 삶의 형태는 이 짧은 언술로 명확하게 전달되었다. 영화 속 언어의 사용 방식을 관찰하면서 참고할 만한 개념으로 ‘ 교감적 소통 (Phatic communication)’도 소개하고자 한다. 교감적 소통은 자신의 물음에 대해 상대가 실질적인 답을 전해주기를 요구하지 않고, 서로가 ‘소통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만을 확인할 목적으로 진행하는 소통을 가리킨다. 상대의 “안녕하세요”라는 인사에 자신 역시 동일하게 대답하는 상황, 사실 그가 정말 안녕한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지만 서로가 소통하고 있음을 인지하고자 행하는 언술이 예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종류의 소통은 사회에 깊이 스며든 관습이기도 한데, 이를 영화에서 평상시와는 다른 맥락으로 사용하여 색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가 있다. < 친절한 금자씨 >(박찬욱, 2005)에서 출소한 금자( 이영애 )에게 전도사( 김병옥 )는 두부를 건넨다. 평범한 상황이라면 금자 씨는 자신을 맞아준 이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을 것이다. 하지만 금자 씨는 “너나 잘 하세요” 라는 도발적 언술로 교감적 소통의 암묵적 규칙을 위반한다. 두부가 떨어지자마자 이어지는 심벌즈 소리와 전도사의 리액션 숏, 그리고 금자의 대사 직전에 트래킹되어 그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카메라는 “너나 잘 하세요”의 위반적 함의를 충격적인 반응으로 담아내었다. 금자의 언술 앞에서 전도사는 어떻게 반응할지를 모른다. 비틀어진 언어가 인물 간의 관계에 얼마나 깊은 자장을 낳는지를 보여준다. <친절한 금자씨> 중 2003년 개봉작인 < 올드보이 >와 < 살인의 추억 >에 나타난 언어에 대한 사유를 좀 더 깊게 들여다보자. 일단 두 작품 모두 ‘ 소문 ’을 집중적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언어가 사회적 산물이듯, 소문은 제한된 정보를 공유하는 공동체를 구획 짓는다. <올드보이>에서의 소문은 수아( 윤진서 )의 상상 임신으로 이어졌고, 이에 대한 복수로 우진( 유지태 )은 언어를 사용한 ‘최면’을 택한다. <살인의 추억>에서도 소문은 수사 진행의 직접적인 단서로 작용하며, 의문이 들더라도 믿지 않을 수 없는 모종의 힘을 발휘한다. 그리고 두 편 모두에서 ‘ 매체 ’를 경유한 언술이 등장한다. <올드보이>에서 오대수( 최민식 )는 오랜 기간 투옥되었다보니 신조어를 잘 모른다며 텔레비전은 이를 가르쳐주지 않는다고 언급한다. 그리고 오대수에 대한 최면술이 끝날 때는 오디오 매체가 작동하는데, 이는 최면술사 형자( 이승신 )의 태도에 대한 박찬욱 감독의 관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형자는 우진과 오대수의 감금을 모의한 자임에도 그의 편지를 읽는 장면에서 “솔직히 내가 선생을 도울 이유는 없죠” 라며 자신은 이 사건과 무관한 독립적 주체임을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오대수를 구원한다는 명목으로 행해지는 그녀의 최면술이 그런 인간적인 배려 이면의 ‘기계적’인 과정이라는 감독의 인식이, 음성 기록 매체가 작동하는 모습과 연결되어 제시되고 있다. 오디오 기록 매체는 <살인의 추억>에서도 중요한 소재이다. 범행 목격 사실을 진술하는 백광호( 박노식 )의 녹음된 육성은 그대로이지만, 추후에 이를 다시금 들어본 형사들의 해석은 변화했다. 이들은 트라우마를 겪은 목격자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자백을 강요했지만, 결국 다시 ‘듣는 행위’를 통해 비로소 그 언술의 진실에 가까워진다. 영화는 타자의 언술을 듣는 행위가 지닌 두터운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 <살인의 추억> 중 오디오로 녹음되는 백광호의 음성, 이를 다시 듣는 박두만 마지막으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언술 장면을 보여드리며 발표를 마치고 싶다. < 우리들 >(윤가은, 2016)에서 친구와 다투다가 상처를 입은 동생 윤( 강민준 )에게 누나 선( 최수인 )은 맞은 만큼 다시 때려야 한다는 점을 강조해서 말한다. 하지만 윤은 “또 때렸어야지”라고 나무라는 누이 선에게 이렇게 대꾸한다. “그럼 언제 놀아?” 그에게는 보복보다 ‘놀기’가 우선하기 때문이다. 이 간명한 언술은 그 화자가 어린 아이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세계에서 놀이가 어떤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지를 직설적으로 드러낸다. 여기에는 별다른 해석이 요구되지 않는데, 자신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즉 그의 삶의 형태가 그대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청자인 선의 당황스런 그러나 진지한 반응을 통해, 영화는 노는 것이 실존적인 행위임을 강조한다. 영화 속 언술이 지닌 위력을 보여주는 탁월한 사례이다. <우리들> 중 영자원의 기관지 《아카이브 프리즘》의 2023년 12호 의 주제는 ‘대사’였다. 현재(2024년 7월 당시) 한국영화박물관의 기획 전시 역시 “대사극장: 한국영화를 만든 위대한 대사들”이라는 주제로 진행되고 있다. 오늘 말씀드린 내용과도 맞닿는, 한국영화를 수식하는 아주 적절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랜 시간 강연을 들어주셔서 감사드린다. * 질문과 답변 * (질문1) <살인의 추억> 속 대사 “밥은 먹고 다니냐?” 를, 개인적으로는 “그런 짓을 하고도 감히 밥이 넘어가냐?”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선생님의 해석을 듣고 나니 교감적 소통의 일부로서 인물의 특성과 한국사회의 관습성을 암시하는 매개체로도 이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흥미로웠다. 또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점은, < 아가씨 >(박찬욱, 2016)나 < 헤어질 결심 >(박찬욱, 2022)과 같은 최신 한국영화의 대사에 외국어가 사용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는 것이다. <헤어질 결심> 중 한 장면을 예로 들자면, 송서래( 탕웨이 )의 중국어 대사가 통역기에 의해 “그 친절한 형사의 심장을 가져다주세요” 로 변모한다. 그가 사용한 중국어 단어는 ‘마음’을 의미하는데도 통역기에 의해 ‘심장’으로 오역되었는데, 중국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관객이라면 이러한 언어의 미끄러짐을 포착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한국영화이므로, 외국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한국인으로서 이러한 한국영화들 속 외국어 대사의 함의 는 어떻게 파악할 수 있을지가 궁금하다. (워싱턴대학교 아시아언어문화학과 교수 김응산) <살인의 추억> 중 / <헤어질 결심> 중 (답변) 10여 년 전부터, 관객들은 한국영화의 ‘명대사’를 열렬히 기억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의미를 심층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 이 적극적으로 뒤따르지는 못했던 것 같다. “밥은 먹고 다니냐?”에 대해서 역시 마찬가지인데, 나는 그러한 노력이 더욱 활성화되었으면 좋겠다. 흥미로운 해석을 덧붙여 주셔서 감사드린다. 두 번째 질문의 경우, 영화에 등장하는 다른 언어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번역 작업 을 진행하시는 분들의 각별한 도움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오늘 강연의 내용과 연관 지어서는 섣불리 답을 드리기 어려울 듯하며, 관련 주제로 지속적으로 고민해보야아 할 것 같다. (질문2) 언어가 내러티브 진행 이상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음을 보여주신 점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다만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 줄 알아요” 라는 대사가 한국사회의 현실을 드러낸다고 말씀해주셨는데, 그렇게 되면 특정 대사가 한국사회의 반영에 불과하다는 납작한 논의가 발생할 우려도 있어 보인다. (답변) <부당거래> 속 대사는 한 가지 공통의 삶의 형태를 반영하고 있다기보다, 관객 각자가 개별적으로 현실을 경험하며 느낀 무언가 를 포착해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정치, 사회, 경제와 같은 거시적인 틀로 논의될 수 있는 한국사회가 반영된 것이 아니라, 여기에 포함되지 않은 관객 각자의 경험적인 요소들이 위 대사를 통해 건드려진 것 아닐까 싶다. 아마 인류학 연구가 이러한 요소를 조명하는 데 기여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코멘트1) 선생님께서 분석해주신 2000년대 초반의 한국영화 속 대사는, 매체가 폭발적으로 확장되며 대사가 영화에서 분리되어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변화 할 수 있게 된 시대적 배경과도 연관 지어 해석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한국영화의 대사가 영화 바깥에서 활발히 유통되는 양상에서 어떠한 특징을 발견할 수 있을지, 이렇게 재생산되는 언술들은 ‘영화’의 대사라고만 인식할 수 있을지 에 대해서도 고민해보면 좋을 것 같다. (코멘트2) 2000년대 초반, 장르적 특색을 띤 채 대중성을 얻은 한국영화에서 언어적 사실성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알려주셨다. 이때 한국영화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언어적 표현 중 하나가 ‘욕설’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욕설은 말씀해주신 것처럼 경험적 현실을 포착하는 대사로 기능하다가도, 어떤 장르(조폭 코미디 등)에서는 단순히 장르적 클리셰의 일환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욕설이 아닌 다른 종류의 언어적 표현도 마찬가지인데, 이렇게 특정한 언술이 장르적 관습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 현상 도 눈여겨 볼만 하다. (영화저널리스트 김형석) (답변) 좋은 지적 감사드린다. 조폭 영화에서는 특히 언어적 코미디가 부각되는 것 같다. 또한 앞서 보여드린 류승완 감독의 영화에서 나타나는 유쾌한 언술들 역시 ‘대중성’ 확보의 수단 으로 작용하는 효과가 있으리라고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질문3) 2000년대 한국영화의 중요한 특성으로서 언어와 신체의 표현성을 강조해주셨고, 저 역시 말씀해주신 관점에 동의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특성이 본격화된 시점 이 언제인지, 어떠한 작품들을 보면서 이를 실감하셨는지를 여쭈어보고 싶다. 더불어, 한국영화가 그렇게 ‘말문이 트이게 된’ 원인 으로 파악하신 바가 있으신지 역시 궁금하다. (한국영상자료원 학예연구팀 조준형) (질문4) 앞의 질문과 겹치는 내용이 있어 함께 문의드리고 싶다. 말씀해주신 대로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중반까지의 한국영화가, 시나리오 작성 단계에서부터 창작자들이 여러 방면으로 공을 들여 ‘말문이 트이는’ 방향으로 변화했다. 다만 이 변화에 기여한 요소로 사회문화적 영향, 영화를 제작하는 기술적 조건의 변화 등도 고려하실 예정이실지를 여쭈어보고자 한다. 당시 한국영화계에서는 동시녹음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감독들이 대사의 중요성을 더 강조하기 시작했다. 창작에 관한 아이디어 역시 다방면으로 발생했는데, 듣기로는 <살인의 추억>의 “밥은 먹고 다니냐?” 라는 대사가 봉준호 감독이 설계한 대사들 사이의 빈 공간을 송강호 배우가 애드리브로 채운 결과라고 한다. 이렇게 배우를 포함한 여러 창작자의 공동의 노력이 가능해진 환경 으로의 변화가 한국영화의 말문이 트이는 데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도 살펴보실 계획이 있으실지가 궁금하다. (한국영상자료원 학예연구팀장 정종화) (답변) 아직 구체적으로 고려하지는 못했지만, 논의의 발전을 위해 함께 고민해야 할 대목이다. 말씀해주신 대로 이 시기에는 동시녹음과 더불어 < 타이타닉 >(제임스 카메론, 1997)의 국내 개봉과 함께 돌비 시스템이 갖춰지는 등 소리의 청량함을 더하는 기술적 변화 가 나타났다. 그보다 이전에 또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더 연구해보고 싶다. 언어적 실험으로 한국영화의 표현력을 확장하는 최근의 감독들 , 예를 들어 박찬욱 감독이나 봉준호 감독(<기생충>에서 인물들이 갑작스럽게 북한 아나운서의 흉내를 내는 언술), 나홍진 감독(< 곡성 >에서 ‘대화’가 지닌 중요성) 등의 작품으로, 영화가 지닌 가치를 ‘ 한국어 매체 ’의 측면에서 더욱 드높일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다. *** 주1. 테리 이글턴, 『유물론』, 전대호 역, 갈마바람, 2018, pp. 27~28.
우리는 정보화 시대를 살고 있다. 물질과 비물질을 가리지 않고 여타의 지식과 자료는 거의 모두 정보로 가공되며 정보에의 접근성이 획기적으로 용이해지고 정보 자체가 중요한 경제적 가치가 되는 시대다. 이러한 정보적 전환의 핵심적 기제는 디지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영화 이미지와 서사 역시 정보로 환원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혹은 영화는 정보화된 시각적 질료를 어떻게 영화 이미지로 창조할 수 있을까? 2012년 개봉해 독립 다큐멘터리로서는 이례적으로 관객 수 7만을 넘으며 돌풍을 일으켰던 < 두 개의 문 >은 재난사건을 중심으로 폭발적으로 급증한 정보 이미지를 영화화 하며 정치적 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줬다. <두 개의 문>은 2009년 용산 재개발 지역에서 농성을 벌이던 철거민 5명과 경찰 1명이 경찰의 무리한 진압과정에서 화재로 사망한 참사를 다룬다. <두 개의 문>은 파운드 푸티지(found footage) 다큐멘터리이다. 당시 철거민들이 농성을 위해 망루를 지었던 남일당에는 수많은 카메라가 있었다. 채증을 위해 농성 현장을 기록하던 경찰의 카메라, 진보적 성향의 언론과 정당에서 실시간 인터넷 스트리밍 방송을 위해 나온 비디오 저널리스트들의 카메라, 도로현황을 보여주기 위해 거리 전체를 조망하던 하이앵글의 CCTV 카메라가 있었다. <두 개의 문>은 이렇게 스트리밍되고 기록된 시청각 자료들을 활용해 망루가 세워지던 낮부터 화재가 일어난 새벽까지 사건을 시간 순서대로 재구성한다. 그리고 변호사, 활동가, 인터넷 방송 비디오 저널리스트와 같은 전문가들의 인터뷰, 재판에서 제시된 여러 증거와 증언이 교차편집으로 덧붙여진다. 다큐멘터리는 짐짓 법정영화 혹은 탐정 느와르의 서사적 관습을 따라간다. 여섯 명이 죽은 현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어떻게 참사가 벌어지게 된 것인가? 그리고 누가 그랬는가? 무리하게 진압작전을 벌이며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몬 경찰과 이후 국가폭력에는 눈 감은 채 농성현장에 있던 철거민과 연대자들을 공동정범으로 규정한 검찰 역시 동일한 서사 프레임을 공유한다. 영화는 철거민들을 범죄자로 규정한 검경의 프레임을 회피하기보다는 그 프레임을 적극적으로 차용하며 이 질문을 검경에게 되묻는다. 국가는 과연 시민에게, 사람들에게 무슨 일을 저질렀는가? 왜 자신의 생존을 위해 분투하는 사람들을 사지로 내몰아야했는가? 이에 질문하고 답하기 위해 영화가 사용한 파운드 푸티지들은 정보 이미지로서 흥미로운 성격을 갖고 있다. 사용된 파운드 푸티지를 만든 주체는 영화의 제작진이 아니다. 영상을 만든 이들은 서로 다른 목적을 갖고 현장에서 동시에 기록을 하며 정보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교통 흐름을 관리하기 위한 서울시의 행정용 CCTV 카메라, 모든 시위와 농성을 불법으로 예단하며 시민들의 행동을 채증하는 경찰의 카메라, 현장을 실시간으로 중계하며 정보의 왜곡을 방지하고 농성 철거민들을 국가폭력으로부터 보호하는 기능도 하는 비디오 저널리스트들의 카메라가 함께 영화를 만든다. 이 영상을 만든 주체들은 사전 협의도 없고 정치적 관점도 목적도 다르지만 정보의 네트워크에서 각자 위치에서 거의 사각지대 없이 사건현장을 촬영했다. 이제 어떤 사건과 현장도 정보의 제공을 위한 시청각적 기록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그렇게 촬영된 영상은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가 제작될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사이즈와 앵글의 영화 이미지를 제공했다. 이 영화를 가능하게 만든 것은 개인 혹은 집단의 주체적 숙고와 협의보다는 네트워크된 제도와 기본적으로 모든 사건이 시청각적으로 정보화 되는 시대의 효과라고 할 수 있다. 관객 역시 영화 이미지를 정보로 받아들인다. 실시간 영상의 사건 재구성이라는 영화적 형식은 관객들이 현장에 있는 것과 같은 경험을 제공한다. 여기서의 현장은 두 종류로 나뉜다. 하나는 사건이 일어난 현장이고, 다른 하나는 법정이다. 이 영화에 사용된 파운드 푸티지들은 재판에 증거로서 제공된 이미지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관객은 사건이 일어난 현장에서 카메라의 시점을 실시간으로 따라간다는 경험을 제공받기도 하지만, 변호사, 검사, 판사의 위치에서 법정에서 증거로 제시된 증거-이미지를 취합하고, 비교하고, 판단하는 체험을 한다. 관객들은 누가 옳고 그른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에 대한 해석과 결론이 이미 내려진 관점을 제공받기 보다는, 날 것의 정보 이미지를 제공받고 스스로 판단하기를 원한다. 그 정보를 검토하는 일은 제작진이 편집을 하는 과정과 유사하다. <두 개의 문>은 관객들이 그러한 판단을 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일종의 내비게이터 역할을 한다. 여기서 영화(의 질료) 이미지, 정보 이미지, 증거 이미지는 구분되지 않는다. 이렇게 <두 개의 문>은 이미 정보화된 사건의 성격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관객들이 정보를 직접 탐색하고 검토하는 것과 같은 경험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정보와 관객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건이 발생하면 접근할 수 있는 정보들이 급증하게 되고, 그리고 얼마든지 줌-인해 정보를 상세히 살필 수 있고, 관객들은 정보를 읽어낼 충분한 능력을 갖췄으며, 그렇게 하면 진실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말이다. 실제로 영화는 그러한 과정을 통해 경찰이 왜 평소와 달리 급하게 협상을 포기하고 망루에서의 농성이 시작된 지 7시간 만에 테러를 진압하는 목적을 가진 특공대를 투입하게 되었는지, 망루가 지어진 남일당 옥상에 출입구가 두 개라는 것조차 알지 못한 채 위험하게 진압작전을 수행했는지를 밝혀낸다. 시민의 안전과 통제를 방패막이로 삼은 경찰이 스스로는 법과 규칙을 지키지 않고, 또 다른 시민인 철거민과 말단 경찰의 안전은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읽어내지 못할 정보가 없는 것처럼 주어진 자료들을 거침없이 탐색하며 사건을 재구성하던 영화는 마침내 그 사건의 마지막 순간, 불타오르는 망루 앞에 서게 된다. 그리고 더 이상 접근하지 못한다. 검경은 망루 안에 인화물질이 있었고 그 때문에 불이 나게 된 것이라며 참사를 철거민들의 잘못으로 몰아갔지만, 실제로 그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정확히 아는 것은 어렵다. 화재는 단 하나의 원인으로 일어난 것이 아닐 것이다. 애초에 경찰이 무리하게 진압작전을 벌이지 않았더라면 화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사건현장과 법정을 누비던 카메라와 관객은 ‘여기 사람이 있다’라고 부르짖는 불타는 망루 앞에서 더 들어가지 못하고 멈춰 선다. 카메라의 접근 불가능성은 ‘죽음의 스펙터클’이 될 수밖에 없는 이미지 정보의 한계와 농성 철거민의 현실에서 기인한다. 망루 내부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증언해줄 이들은 <두 개의 문>이 제작되던 당시 사망했거나 입원 중이거나 수감됐기 때문이다. 멈춰 선 카메라와 접근 불가능성은 정보로 환원할 수 없는 이미지가 있음을 예증한다. 이 정보로의 환원 불가능성, 죽음 이미지의 접근 불가능성이야 말로 <두 개의 문>에 이어 출소한 농성 철거민들의 트라우마를 다룬 < 공동정범 >(김일란, 이혁상, 2018)의 제작이 필요했던 이유였을 것이다. <공동정범>은 바로 그 불타오르는 망루를 다시 짓고 허물고 또 다시 지으며 트라우마와 기억의 문제를 다룬다. 그들을 더 이상 정보로 다루지 않을 때 이미지에 접근 가능해진다. 정보에의 줌인과 탐색이 이미지의 해상도를 반드시 높여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동우의 < 셀프-포트레이트 2020 >(2020)은 우정의 영화화를 시도한다. 영화는 아침부터 술에 취해 이동우에게 20만 원을 요구하는 이상열의 모습에서 시작된다. 보들레르의 말을 말라르메의 말로 착각하는 그는 오즈 야스지로나 하길종 같은 영화감독의 이름을 중얼거린다. 그의 정체는 2000년 단편영화 <자화상 2000>(2000)을 통해 베니스국제영화제 등에 진출했던 영화감독이다. 하지만 뒤이어 벌어진 여러 불행으로 인해, 이동우를 만난 2017년의 시점의 그는 알코올 중독과 조울증을 앓고 있는 노숙자가 되었다. 이동우는 영화 속 자막을 통해, “집 앞에서 이상열을 처음 만난 날 그는 나에게 자기만큼 멋지다고 말을 걸어왔다. 심심했던 나는 그를 집으로 데려왔다.”라고 이상열과의 첫 만남을 밝히고 있다. 한때 유망한 영화감독이었던 이와 현재 주목받고 있는 감독의 만남은 순전히 우연에 의한 것이었다. 이후에도 몇 차례 이상열과 우연한 만남을 반복하던 이동우는 카메라를 들고 그와 동료 노숙자들을 만나게 된다. 이상열이 영화감독이었음을 알게 되는 것은 그즈음의 일이다. 영화 만드는 것을 도와주겠다는 이동우의 말에 이상열은 동료 노숙인을 스탭과 배우로 캐스팅하여 영화를 만들려 한다. 하지만 이는 반복하여 좌절된다. 조울증은 갈수록 심각해지고, 이상열은 구치소에 오가게 된다. <셀프-포트레이트 2020>은 이 과정을 담아낸다. 이동우는 첫 영화 < 노후 대책 없다 >(2016)에서 자신과 펑크 동료들을 비슷한 방식으로 담아낸 바 있다. 영화제작을 의도하고 촬영된 것이 아닌 푸티지들을 편집하여 만들어진 이 영화에서, 카메라는 이동우 감독을 대리한다기보단 현장을 경험하는 또 하나의 인물로서 존재하는 것처럼 다가온다. 무엇보다 <노후 대책 없다>의 카메라는 이동우만의 것이 아니다. 영화의 크레딧에는 이동우와 박수환, 두 명의 이름이 올라가 있다. 크레딧에 정확하게 담겨 있지는 않지만, 카메라가 두 사람 외에도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쳤을 것임을 영화 속 여러 장면을 통해 어렵지 않게 짐작해볼 수 있다. 반면 <셀프-포트레이트 2020>의 크레딧에는 촬영이 따로 명시되어 있지 않다. 이동우 감독은 ‘연출’ 크레딧으로만 엔드크레딧에 올라가 있다. 이는 곧 촬영과 편집을 비롯해 엔드크레딧에 기재되지 않은 대부분의 역할을 수행했음을 알려준다. 크레딧에 자신을 단순히 ‘연출’ 역할로만 표기했다는 점은 이 영화 속 카메라의 사용을 떠올렸을 때 흥미롭게 다가온다. <노후 대책 없다>의 카메라가 ‘펑크 공동체’라 할 수 있는 곳에 속한 또 하나의 인물과, 다시 말해 관객을 자신들의 공동체에 초대하는 것과 같았다. 반면 <셀프-포트레이트 2020>의 카메라는 촬영 크레딧을 따로 기재할 필요를 느끼기 어려울 정도로 이동우 자신과 결부되어 있다. 이 영화 또한 전작처럼 영화제작을 염두에 두고 촬영된 것은 아니다. 이 영화의 카메라는 이상열과 함께한 이동우의 시간에 관한 단순한 기록만을 수행하고 있을 뿐이다. “영화를 만들기 위해 온 것보다 같이 약속을 하고 시간을 보내러 왔다는 생각이 더 많이 들었다" 1) 는 이동우 감독의 말처럼, 그 기록을 재구성하여 지금의 영화로 만드는 것은 그것이 촬영된 순간과는 별개의 사안으로 다가온다. 적어도 이 영화에 한정해서는. <셀프-포트레이트 2020>은 이상열의 < 자화상 2000 >으로 시작하고 끝난다. 이상열이 비디오로 소장하고 있던 15분가량의 <자화상 2000>과 메이킹 영상, 영화제 현장 영상은 이 영화 전체에 흩어져 삽입되어 있다. 특히 이상열이 구치소에 있던 2019년의 분량 대부분이 이상열의 영화와 영상들로 채워져 있다. 마치 이상열의 부재를 이상열이 찍었고 이상열의 과거가 담겨 있는 영상들로 대체하려는 것처럼 말이다. 이나라 평론가의 말처럼, <셀프-포트레이트 2020>의 구조는 “이상열의 영화가 이동우의 영화를 감싸 안고” 2) 있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동우의 카메라가 찍을 대상을 잃어버렸을 때조차, 이상열의 영화는 그의 다른 분신처럼 이동우 앞에 놓여 있다. 3시간에 가까운 영화 전체에서 이동우와 이상열이 한 프레임 안에 들어오는 순간은 단 두 번이다. 하나는 이상열이 이동우의 집에 찾아온,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순간이다. 다른 하나는 출소한 이상열이 이동우와 함께 편의점 테이블에 만나 금주의 방법을 이야기하는 영화의 마지막 순간이다. 영화의 부제 “나는 나를 바라보는 나를 바라본다”는 <자화상 2000>의 부제 “나는 나자신을 바라보는 나를 바라본다”를 잘못 말한 이상열의 말에서 따온 것이다. 이동우의 카메라는 두 사람이 함께 담긴 그 장면을 기록했고, 이동우의 영화는 두 개의 영화를 함께하는 영화로 만들었다. 영화의 부제는 단순히 이동우가 이상열의 지금을 자신의 미래처럼 느껴, 그를 일종의 반성적 거울로 여긴다는 말이 아니다. “나”와 “너”의 지칭이 뒤섞이는 순간, 카메라 앞의 대상이 모두 “나”이면서 “너”가 되는 순간을 향해 이 영화는 흘러간다. 그 순간 이 영화는 우정의 기록이나 증거가 아닌, 우정 자체를 관객 앞에 제시한다. 하지만 이동우 감독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이 사람이 나 때문에 더 힘들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3) 이 말 한마디로 이동우가 <셀프-포트레이트 2020>과 영화 이후의 이상열에 관해 가진 생각을 갈음할 수는 없다. 다만 그의 신작 < 사갈 >(2022)을 통해 그것을 얼핏 엿볼 수 있을 뿐이다. 사갈(蛇蝎)은 뱀과 전갈이라는 뜻으로, “남을 해치거나 심한 혐오감을 주는 사람”을 뜻한다. <사갈>은 이동우가 영화과 동기인 박건호를 오랜만에 만나는 것으로 시작된다. 사채업자이자 도박중독자인 그는 돈을 버는 족족 술과 도박으로 탕진한다. 성실하게(?) 사채 일을 하며 빚을 갚아 다른 생활을 꾸릴 수 있는 상황이 충족되는 순간에도 그의 손은 도박을 향한다. <셀프-포트레이트 2020>이 우정의 순간이라는 찰나를 담아내기 위해 168분의 시간을 동원했다면, <사갈>은 156분 동안 박건호와 그 주변 인물들의 끝없는 실패를 담아낸다. 사채업자라고는 하지만, 박건호가 수금해야하는 돈은 대부분 100만원이 채 되지 못하는 작은 돈이다. 5만원, 10만원, 20만원가량의 빚들은 불법도박으로, 돌려막기로, 또 다른 샛길들로 사라진다. 이는 사채를 쓴 채무자뿐 아니라 박건호 본인에게도 해당하는 말이다. <사갈>에 담긴 박건호와 그 주변 사람들의 상황은 그야말로 빠져나올 수 없는 무간지옥이다. 박건호가 재기할 수 있을 것 같은 상황이 영화에 등장하는 순간, 그는 어김없이 추락한다. <사갈>은 러닝타임 내내 그 과정을 반복하여 보여준다. 이 영화의 외형은 이동우의 다른 영화들과 유사하다. 격렬하게 흔들리는 카메라, 길거리에서 적당히 촬영한 인터뷰, 상황을 설명하는 작은 폰트의 자막. 흥미로운 것은 이동우 감독의 존재 자체다. 세 편의 영화에서 이동우는 점차 자신의 출연을 줄여간다. <사갈>에서 이동우가 프레임 속에 들어오는 장면은 박건호의 본가에서 식사하는 그의 뒷모습 정도다. 박건호 등과 대화할 때 그의 목소리가 영화에 담기긴 하지만, 그의 모습 자체는 전작들에 비해 극히 적은 순간에만 등장한다. 반면 자막을 통한 이동우의 발화는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다. <사갈>은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자막으로 시작해서 "이 영상이 내가 만드는 마지막 다큐멘터리였으면 좋겠다"는 자막으로 끝난다. 전작이 이상열의 이야기였던 만큼이나 그와 함께하는 이동우의 이야기였다면, <사갈>은 박건호의 이야기를 담아내지만 다큐멘터리 자체에 관한 이동우의 복잡한 생각을 그대로 끄집어낸 이야기다. 영화 중반 즈음의 자막은 박건호를 왜 찍기 시작했는지 까먹었다고 고백한다. 그와 더불어, 이동우는 자신의 영화 때문에 박건호가 불행해지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와 함께 영화는 잠시 <셀프-포트레이트 2020> 이후의 이상열을 잠시 보여준다. 이동우는 이상열이 영화 촬영 이후 조울증이 심해지고 구치소를 들락거리며 살고 있음을 이야기하며, 자신의 다큐멘터리가 헛된 희망을 심어준 것 같다는 죄책감을 토로한다. 그 죄책감은 <사갈> 전체에 맴돌고 있다. <사갈>의 이동우는 이상열을 만날 때와 마찬가지로 카메라를 들고 박건호를 찾고, 박건호를 찍는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의 이동우가 박건호에게 갖는 거리감은 관찰적 다큐멘터리라기엔 너무 가깝고, 참여적 다큐멘터리라기엔 너무 멀다. “이동우의 카메라가 이상열을 찍지 않았다면…”이라는 가정이 무의미한 것처럼, “박건호를 찍지 않았다면…”이라는 가정 또한 무의미하다. 하지만 이동우는 이 무의미한 가정을 토대로 누적된 죄책감을 토로하고 있다. “남을 해치거나 심한 혐오감을 주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제목을 다시금 떠올려보자. <사갈>은 우정의 순간을 포착하여, 우정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관객 앞에 펼쳐 놓는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이 사람과 우정을 나누는 것은 불가능하겠다는 판단을, 끔찍하게도 자기파괴적인 죄책감을 수반하는 그 판단을 고백하는 영화다. 이동우의 고백대로, 그가 처음 카메라를 들고 박건호를 만났을 때 떠올렸던 생각은 그도 관객도 알 수 없다. 그러한 지점에서 <사갈>은 꽤나 비겁한 영화다. 이동우 감독의 생각을 옮긴 자막들을 보고 있자면 그가 박건호라는 ‘사갈’을 수단삼아 자신의 죄책감을 토로하고 있을 뿐이라는 느낌을 준다. 혹은, 그러한 박건호를 찍어 다큐멘터리로 제작하고 있는 자신을 ‘사갈’이라 지칭하는 것만 같다. <셀프-포트레이트 2020>이 촬영된 ‘함께’의 순간을 ‘우정’으로 만들어가는 영화였다면, <사갈>은 어느 순간 ‘함께’일 수 없는 이와의 동행을 담아낸다. 우정이 불가능함을 깨달은 이후에도 이동우는 카메라를 들고 박건호를 찍었다. 그렇다고 <사갈>이 절교를 찍은 영화라고 할 수는 없다. 관객은 이 영화 이후의 박건호를 모른다. 관객이 볼 수 있는 것은 이동우가 박건호와, 이상열과, 동료 펑크들과 보낸 시간들이다. 관객은 영화 이후의 그들을, 그들과 이동우의 관계를 알 수 없다. 다만 우리는 가능한 우정의 순간과 우정이 불가능해지는 순간을, 그 순간을 찍고자 그 순간과 뒤엉켜버린 영화를 보고 있을 뿐이다. 때문에 이동우의 영화들을 보고 난 뒤에 이러한 질문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당신과 나 사이에 놓인 카메라는 우리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는가?” *** 1) 2021 제12회 부산평화영화제/기록문 <셀프-포트레이트 2020> GV, 「부산평화영화제 아카이브」 2021.12.31, https://bpff.tistory.com/entry/셀프-포트레이트-2020-GV 2) 이나라, [무주산골영화제 영화평론가상 수상작 비평 전문] <셀프-포트레이트 2020> : 불타는 우정의 자화상, 「씨네21」, 2021.10.12, cine21.com/news/view/?mag_id= 98724 3) 앞의 글, 「부산평화영화제 아카이브」 2021.12.31, https://bpff.tistory.com/entry/셀프-포트레이트-2020-G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