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취권
- 감독
- 원화평
- 제작년도
- 1979
- 출연
- 성룡(청룽), 원소전, 황정리, 원신의, 림영
전세계의 노동자여, ‘감각’으로 단결하라 간결한 묘비명, Bruce Lee 1940-1973. 번쩍 번개가 화면을 가로지른다. 죽은 브루스 리=이소룡이 무덤에서 뛰어오른다. 그 위로 프레임을 가득 채우며 뜨는 사각의 타이틀. 브루스 리, 무덤에서 돌아오다(Bruce Lee Fights Back from the Grave). 묘비 앞의 브루스 리가 죽음의 천사를 향해 그 특유의 포즈로 주먹을 불끈 들어보이고 있다(왜인지 모르겠지만 죽음의 천사 발치에는 반라의 여성이 놓여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묻지 말도록 하자). 어쨌건 이쯤에서 우리의 기대치는 구체적 형태를 띠게 된다. 무덤에서 돌아온 브루스 리가 죽음의 천사와 맞서 싸울 것이다! 빠르고 강력한 비트 사운드가 계속되는 가운데 거대한 비행기가 화면 중앙을 가득 채우며 날아간다. LA 공항, 선글라스를 낀 젊은 남자가 공항을 나선다. 그는 누구인가? 브루스 K. L. 레아(Bruce K. L. Lea). 그야말로 죽음으로부터 돌아온 브루스인가? 비록 브루스 리가 아닌 브루스 레아지만…. 아마도 당신이 이런 영화들에 익숙하다면 수다한 ‘브루스’들에 대해 잠시 숙고해볼지도 모르겠다. 이를테면 Bruce Li(何宗道), Bruce Le(呂小龍), Bruce Leung(梁小龍), Bruce Lei(혹은 Dragon Lee, 巨龍), Bruce Lai(張一道), Bruce Thai(張正義) 등. 브루스 K. L. 레아, 당신은 누구인가? 그런데 이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는 저 강렬한(!) 오프닝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브루스 리, 무덤에서 돌아오다>의 본편이라 할만한 것을 채우는 것은 이두용의 < 아메리카 방문객 >이다. 1976년 ‘최초의 태권 미국 올로케 감행작품’으로 합동영화사에서 제작한 이 영화는 그러나 영어 더빙을 통해 전혀 다른 이야기로 탈바꿈되어 있다. 형의 복수를 위해 라스베이가스에 온 한국인 ‘한욱’(정준)의 이야기(그러니까 저 브루스 K. L. 레아는 정준이다)는 친구이자 스승인 위대한 무도인의 죽음을 파헤치는 홍콩인 웡핸의 이야기로 바뀐다. 물론 인종적 구도는, 당연한 말이지만, 계속해서 살아남는다. 아시안 남성은 왜인지 알 수 없지만 젊은 백인 여성의 흠모를 받는다. 젊은 백인 여성은 아시안 남성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고, 아시안 남성은 백인, 흑인, 멕시칸으로 구성된 악당들을 처치한다. 그럼에도...나는 지금 ‘본편이라 할만한 것’이라고 애써 모호하게 말하고 있는 중이다. <브루스 리, 무덤에서 돌아오다>가 실은 <아메리카 방문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씬을 추가하고 전혀 새로운 사운드를 입히고 더빙을 한 자들의 노고는 어떻게 자리매김되어야 하는 것일까? 참고로 홍콩의 양츠 프로덕션(Yangzte Production)이 제작사로 명기되어 있는 <브루스 리, 무덤에서 돌아오다>의 예고편을 참조컨대 이 영화는 1978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브루스 리의 죽음 이후 5년, 그가 무덤에서 돌아온다!” 이소룡은 알다시피 1973년에 죽었다). 또 <브루스 리, 무덤에서 돌아오다>의 몇몇 언어 버전은 감독 Umberto Lenzi로 명기되어 있기도 한데, 움베르토 렌치가 한때 유럽 B급 영화시장을 석권했던 이탈리아 지알로 영화의 대표적 이름이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이 바꿔치기는 이런 영화들이 전세계의 어떤 시장에 소구하는 것이었는지를 명료하게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으리라. <아메리카 방문객>-<브루스 리, 무덤에서 돌아오다>와 같은 사례, 편집 버전에 따라 이름이 교체되거나 씬의 추가와 더빙을 거쳐 지역에 따라 다른 이야기로 변환되는 사례는 소위 브루스플로이테이션이라고 이름붙여진 영화들의 세계에서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이 영화들은 도작과 도용, 자르기와 이어붙이기 1) 로 악명 높다. 사실 이소룡의 유작이라고 선전된 < 사망유희 > 조차 그가 살아 생전 찍었던 단 10퍼센트의 필름 푸티지와 그의 대역들(이미 소개했다시피 그중 한명은 당룡이라는 예명으로 알려진 한국 출신의 김태정이다)을 써서 찍은 필름들, 그리고 여타 영화 필름의 짜깁기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도작과 도용이라는 관점으로 원본과 아류의 위계를 정한다는 것은 이미 무리가 있는 이야기인지 모르겠다. 이 세계는 가능한 적은 비용으로 더 많은 이윤을 얻고 싶어하는 장사치들의 세계다. 몇 가지의 예들. Joseph Velasco라는 이름이 디렉터로 명기된 <My Name Called Bruce>는 한국영화 <왕도>로 확인되며, 감독은 이혁수이다. Joseph Velasco에 대해 한마디 덧붙이자면 이 이름은 아마도 이런 류의 영화들에서 가장 빈번히 마주치는 이름 중 하나일 터인데, Joseph Velaco 또는 Joseph Cong이라고도 불리는 이 다작의 ‘작가’는 1년에 평균 3편에서 4편을 만들고, 자신의 영화 거의 대부분의 시나리오를 썼으며, 틈틈이 프로듀서로도 활동하였다. 또 유행에도 대단히 민감하여 ‘Bruce’가 들어가는 제목의 영화들을 1970년대 내내 찍다가 70년대 후반 소림사(Shaolin) 영화들이 붐을 일으키자 브루스와 소림사를 섞고(<Bruce Shaolin Bronzemen>), 성룡의 <취권 Drunken Master>(1978)이 흥행에서 성공한 이후에는 곧바로 <Drunken of Fire>라는 제목으로 거룡(브루스 레이)의 술 취한 권법을 선보인 바 있다. 홍콩영화 데이타베이스(HKMDB)와 인터넷 무비 데이터베이스(IMDB)에 따르면 Joseph Velasco는 대만 출신의 강홍(江洪)이다. 그렇다면 Joseph Velasco의 영화들은 이 이름의 ‘본명’인 강홍의 작품인가? 이미 눈치챘겠지만, Joseph Velasco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많은 영화들은 도작이거나 도용이거나 짜깁기이다. 마찬가지로 Joseph Velasco의 또 한편의 영화 <Ninjas VS Bruce Le aka Condor Of Bruce Lee>의 첫 화면은 Ocean Shores라는 회사가 카피라이트를 가지고 있음을 명시한다. 그런데 1986년을 제작년도로 명기하고 있는 이 영화는 <My Name Called Bruce>(1978)와 <Return of Bruce aka Dragon Returns>(1977), <Enter the Game of Death aka Bruce the King of Kung Fu>(1978) 등 최소한 세 편 이상의 영화를 이어 붙여 만든 것이다. 한국에 마약수사를 하러 온 홍콩 수사관은 영화의 1/3 지점에서 뜬금없이 인신매매 조직을 소탕하기 위해 필리핀으로 ‘순간 이동’을 하는데, 일련의 대결씬을 끝내고 ‘홀연히’ 한국으로 돌아온다. <Enter The Game Of Death>의 영어 버전에서 감독은 James Nam으로 명기되어 있다. James Nam은 1960년대 후반부터 쇼브라더스에서 활동했으며, 1970년대 이런 영화들의 감독이자 배우로 나왔던 남석훈(또는 Nam Gung-Fan)에게 자주 쓰이던 예명이다. 이 영화는 한국에서 전혀 다른 편집 버전의 한국영화 < 십자수권 >으로 개봉되었다. <십자수권>의 크레딧에 명기된 감독 이름은 최원형이다. 남석훈의 또 다른 영화 < 속정무문 >은 <Bruce And Shaolin Kung Fu>라는 제목의 다른 편집 버전으로 옮겨졌을 때, Joseph Velasco의 이름으로 변경되었다. 그런데 이 영화는 또 <Bruce and Shaolin Kung Fu 2>와 관련있다. 한국에서는 < 신정무문 >이라는 제목의 한국영화로 개봉했고, 남기남이 감독한 것으로 되어 있는 <Bruce and Shaolin Kung Fu 2>는 버전에 따라 James Nam과 Alberto Golango라는 서로 다른 이름이 감독으로 명기되어 있다. 너무 번다하다고? 그럴지도. 이런 영화들의 세계 안에 들어서면 이런 일은 비일비재해서 무엇이 오리지날이고 무엇이 도작과 도용인지를 밝혀내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무망해 보인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전지구적 시장에서 유통되는 상품의 경로에 올라선 순간(이를테면 <아메리카 방문객>의 경우) 이 영화들에는 감독, 배우, 제작자 등의 특정 이름들이, 한 편의 영화를 규정짓는 최저치의 조건이라 할 수 있을 닫힌 체계로서의 작품(work)이라는 개념이 차례로 사라진다. 요컨대 이 영화들은 국적뿐만 아니라 제작 주체마저 불분명해진 채 시장을 떠도는데, 어떤 영화는 이미 존재하는 복수의 영화들의 재편집으로 만들어졌으며 그 위에 각각의 지역의 유통업자들은 각자 자신들이 (더 정확히는 자신의 관객들이) 선호하는 언어로 더빙해서 판매했다. 그렇다면 이런 영화들을 한국영화사라는 맥락으로 복원시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아니, 과연 그것이 가능하기나 한 걸까?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해보자. 여기서는 내셔날 시네마가, 내셔날 시네마를 이루어내는 감독, 배우, 제작자 등의 특정 이름들이, 한 편의 영화를 규정짓는 최저치의 조건이라 할 수 있을 닫힌 체계로서의 작품(work)이라는 개념이 차례로 사라진다. 만약 근대예술이 소유권(나아가 지적재산권)과 개인의 확립, 이를 뒷받침하는 근대 국민국가의 성립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면 이 영화-상품들로 저 세 가지 개념들이 사라질 때 보이는 것은 무엇인가? 이 영화상품들은 1970년대 이소룡의 사후 아시아 각 지역에서 양산되었으며 1980년대 이후 비디오 시장에서 가장 싼 염가의 상품으로 전지구적으로 공급, 유통되었다. 그 속에서 한국, 홍콩, 대만, 필리핀 기타등등 여타의 장소들에서 만들어진 영화들은 ‘아시안’이라는 기표로 수렴되었으며, ‘아시안 마샬아츠 필름’으로 명명되었다. 이 영화들이 국적과 만든 자들, 완결된 체계로서의 작품이라는 개념에 그토록 무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영화들을 보는 자들이 여기에 대해 거의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들은 계급적으로, 젠더적으로, 세대적으로 명확하게 분할된 장소들, 도시 변두리의 재개봉관, 소극장, 그라인드 하우스에서 가장 지속적으로 소구되었다. 이 장소들을 채운 것은 한국, 홍콩, 대만, 필리핀 등지에서 값싸게 만들어진 영화들이었다. 1970년대 이 지역에서 만들어진 염가의 상품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싼값에 도시 하위계층 젊은 남성들에게 소구되었다. 아마도 이 지점이야말로 이 거대한 쓰레기 더미와 같은 영화들이 더없이 흥미로워지는 순간일 것이다. 저 영화들은 이 지역의 영화가 거의 최초로 ‘글로벌’하게 소비된 사례이다. 할리우드가 생산하는 고급 생산품들의 반대편에 놓인 가장 싼 상품으로서. 싼 값에 더 많은 이윤을 얻고자 하는 자본가들에 의해 잘라지고 이어붙여지는 것을 대가로. 전세계의 하위계층 남성들에 의해 주도되는 이 플랫한 소비 속에서 이 영화들은 상품의 형태를 얻은 순간 비로소 세계성의 획득에 성공하였다. 이것은 매우 아이러니한 순간이다. 왜냐하면 전세계 노동자들의 (무의식적인) ‘감각적’ 단결과 전세계 자본의 순환이 함께 거기에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 한국 상품은, 다른 아시아의 상품들처럼 저임금 노동의 값싼 상품이라는 점에서 ‘경쟁력’을 지녔다. *** 1) 아시안 마샬 아츠 필름의 팬사이트인 Kung Fu Fandom의 한 팬은 이런 류의 영화들에 대한 사랑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나는 그들의 ‘자르고 이어붙인(cut and paste)’ 영화들을 정말로 사랑해요” http://www.shaolinchamber36.com/kungfufandom/index.php?/topic/2543-my-man-godfrey-ho-the-ifd-appreciation-thread/&tab=comments#comment-21806 (관련글) 1. 비행기의 시선, 무정한 시선 - 2021.04.30. 2. 액션영화의 한 기원, 안중근과 무협 - 2021.05.3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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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표는 1960~70년대에 활발한 작품 활동으로 한국영화의 전성기를 수놓았던 흥행 감독이며, 그의 이름 앞에는 항상 ‘최초’라는 수식이 붙어다닌다. 1922년 황해도 출생으로 서울 효재국민학교 입학(1930), 경성사범학교에 진학(1937)하여 서울대 사범대학 영문과를 졸업(1949)했다. 미술에 재능을 보여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1943)하고 김기림, 김순남, 이인성 등으로부터 문화, 예술 전반에 걸친 소양을 얻는다. 대학 졸업 후, 그는 USIS(주한 미공보원 영화과)의 영화 제작 보좌관으로 입사하여 미국 문화영화의 자막 번역을 맡으며 처음으로 영화계를 접하게 된다. 이윽고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서울에서 조선미술가동맹 일원으로 김일성과 스탈린의 초상화를 그리며 인민군 점령 시기를 견뎠다. 그러나 이 사실이 문제가 되어 경찰서에 끌려가 고초를 겪고, 미공보원을 떠나게 된다. 이후 유엔으로 자리를 옮겨 한국재건단(United Nations Korean Reconstruction Agency: UNKRA, 운크라)에서 뉴스를 비롯해, 홍보영화 <고집>(앨프리드 웨그(Alfred Wagg), 1952), <한국에서의 만남 Encounter in Korea>(리차드 배글리(Richard Baegley), 1952) 등의 제작에 참여한다. (사진1) <고집>(앨프리드 웨그(Alfred Wagg), 1952) 뒷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배글리, 이형표, 코넌트, 여자주인공 기순, 촬영조수였던 임병호 (사진2) <고집>(앨프리드 웨그(Alfred Wagg), 1952) 촬영 현장에서 이형표(맨 왼쪽), 카메라를 잡고 있는 임병호 <고집>에서 이형표는 통역 겸 연출 조수를 맡았는데, 녹음기사로 참여한 미국 영화인 테드 코넌트(Theodore Conant, 1926~2015)를 통해 처음으로 자기녹음기(마그네틱 레코더)를 접하는 기회가 되었다. 또한 이형표는 미국 파라마운트사가 제작한 3D 입체영화 <휴전 Cease Fire>(오원 크럼프(Owen Crump), 1953)의 통역 겸 조연출로 일하면서 남보다 먼저 할리우드 특수영상 제작 현장을 경험한다. 다큐멘터리 제작에 활발하게 참여하던 시기에, 이형표가 조력자의 입장에서 제작 주체로 거듭나는 데에는 동료였던 테드 코넌트의 영향이 컸다. 테드 코넌트 1) 는 1952년 유엔 한국재건단(UNKRA) 영화팀원으로 한국에 와서 1960년경까지 약 8년간 전쟁 및 전후 복구 중인 한국의 모습을 기록하는 한편 이형표와 돈독한 우정을 쌓으며 협업 창작 활동을 했다. 또한 코넌트는 한국영화계에 많은 기여를 했는데, 1956년 유네스코와 운크라가 한국 정부와 공동으로 설립한 신생활교육원에서 시청각 교육을 담당했고, 1958년에 미 국무부 산하 국제협조처가 한국 영화인 교육 및 영화제작소 설립을 지원하기 위해 시라큐스 대학과 맺은 ‘시라큐스 컨트랙트’에 참여하여 공보실 영화과의 사운드 분야 인력 교육을 담당했다. 이형표는 테드 코넌트와의 교류를 계기로 외교 파우치를 통해 들어온 서구 문화를 다양하게 흡수하고, 코스모폴리탄적인 문화 체험을 바탕으로 공동 다큐멘터리 작업을 시작한다. 이는 이후 이형표의 영화 창작 세계를 구축하는 데 단단한 초석이 된다. 1953년부터 그는 대한민국 공보처 영화과에서 대한뉴스를 비롯해 공보처에서 주관하는 기록영화 제작을 전담하게 된다. 영화 <한국의 시각 Korean Perspective>(1953)과 <낙원 제주>(1953) 등이 이형표가 감독한 기록 영화들이다. 이 두 작품들은 천연색 코닥크롬(Kodakchrome)으로 촬영한 컬러 영화이고, 한국의 자연경관과 명승고적을 소개하는 <한국의 시각>은 한형모 감독이 촬영을 맡았다고 한다. 앞서 언급한 단편영화 <한국에서의 만남>(1952)에서 조연출을 했던 이형표는 이 이야기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은 것으로 보이는 장편 시나리오 <불사조의 언덕>을 썼고 2) , 공보처에서 이를 영화화한다. <불사조의 언덕>(전창근, 1955)에는 감독 전창근, 조연출 김한일, 촬영 한형모, 조명 김흥만, 스크립터 홍은원 등의 영화인들이 참여했다. (사진3) <불사조의 언덕>(전창근, 1955) 제작진들, 둘째줄 왼쪽 두번째부터 이형표, 전창근, 홍은원, 배우 나애심 또한, 이형표는 테드 코난트와 함께 다큐멘터리 <한국의 환상 Korean Fantasy>(1955), <한국의 예술가(Korean Artist)>(1955), <위기의 아이들(Children in Crisis)>(1955)을 만든다. <한국의 환상>은 전후 한국의 폐허와 재건 및 전통문화 등을 다뤘고, 화가로서의 이형표 자신이 출연한 다큐멘터리 <한국의 예술가 Korean Artist>(1955)는 1956년 제1회 마닐라 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위기의 아이들>은 한국전쟁 고아를 비롯한 전후 어린이들이 어렵게 생계를 이어가는 열악한 생활상을 담았다. 이 작품은 나레이션을 배제하고 녹음기를 사용하여 현장음만으로 상황을 전달하는 다이렉트 시네마(direct cinema) 형식의 새로운 시도를 선보인다. 이형표는 당시 전후 서울의 아이들을 보여주는 많은 장면을 직접 촬영했는데, 콘덴서 마이크로폰(condenser microphone)을 사용하여 레코더를 군용 트럭에 숨겨둔 채 거리 촬영을 진행했기 때문에 매우 생생한 거리의 소리들을 담아낼 수 있었다고 한다. 3) 작품 후반부에는 ‘북진통일’ 관제 데모와 전체주의적 교육에 동원되는 학생들 역시 ‘위기의 아이들’로 보여주면서 이승만 정부를 비판하는 태도를 취한다. 4) 이 때문에 이형표는 한국전쟁 중 부역 전력으로 고초를 겪은 바 있는 자신의 신상을 염려하여 스스로 공동연출자로서의 크레디트를 포기했다. 실제로 이 영화는 이승만 정권 측으로부터 ‘공산주의적’이라는 항의를 받기도 했지만 제5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이와 같이, 그는 당시로서는 드문 다수의 제작 경험을 통해 한국 영화제작기술의 열악함을 통감하고, 유엔 한국재건단(UNKRA)에서 원조를 받아내 공보처에 영화 기자재를 들여온다. 더불어 이를 기반으로 스튜디오를 지어 활용하도록 하는 등, 전후 한국영화의 제작 기반과 환경을 조성하는 데 큰 공헌을 한다. 1950년대 중반까지 다큐멘터리 활동을 하는 동시에, 화가로서의 정체성도 유지하며 그림을 그리던 이형표는 신상옥 감독과의 인연을 시작으로 극영화계에 본격 뛰어들게 된다. 신상옥은 이형표가 영화제작 과정과 기술 전반에 대해 해박한 지식과 경험을 갖춘 점을 간파하고 <젊은 그들>(신상옥, 1955), <무영탑>(신상옥, 1957)의 각색 및 <동심초>(신상옥, 1957) 등의 제작에 이형표를 참여하도록 한다. 이윽고 이형표는 신필름 기술부장으로 입사하여, 1961년 장안의 화제였던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에서 촬영을 맡는다. 그는 이 영화에서 컬러 영화 제작을 위한 기술 전반에 관여하며 직접 분장까지 맡는다. 이형표는 이미 천연색 다큐멘터리를 제작해본 경험이 있는 바, 이번엔 코닥 이스트만 필름을 사용하여 국내 최초로 컬러 시네마스코프 극영화를 촬영함으로써 한국 극영화계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는 데 큰 몫을 해낸 것이다. 같은 해 그는 신상옥이 제작자로 나선 <서울의 지붕밑>(1961)으로 감독 데뷔한다. 이 작품은 조흔파의 소설 『골목 안 사람들』을 영화화한 것으로 당대 최고의 스타였던 김승호, 황정순, 김희갑, 허장강, 최은희, 도금봉, 김진규 등을 초호화 캐스팅한 도시 서민 코미디로 관객과 평단의 큰 호응을 얻으며 성공한다. “대표작이 될 것”이라는 신상옥의 예견이 적중한 것이다. 기성 세대 한의사인 김승호가 자녀의 결혼 문제를 계기로 젊은 세대를 대변하는 산부인과 의사 김진규와 각을 세우며 시의원 선거에도 나서보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자녀 세대와 조화를 이루는 모습을 낙천적으로 그려냈다. (사진4) <서울의 지붕밑>(이형표, 1961) 촬영 현장 빌리 와일더나 윌리엄 와일러의 작품 세계를 동경했다는 이형표의 바램대로, 미워할 수만은 없는 인간적인 결함을 가진 인물들의 애환을 가슴에 와닿는 코미디로 완성했다. 또한 <서울의 지붕밑>은 독특한 구도와 새로운 카메라 기법을 이용하여 서울의 다양한 풍경들을 담아낸다. 각각의 쇼트들에는 화가가 되고자 했던 이형표 감독의 미적 감각과 영화 테크니션으로서의 실력이 유감 없이 발휘되었다. (사진5) <대심청전>(이형표, 1962)의 용궁 장면 (사진6) <대심청전>(이형표, 1962)의 세트 촬영장에서 제작진들. 뒷줄 가운데가 이형표 이듬해, 그는 고전 심청전을 컬러 시네마스코프로 영화화한 <대심청전>(1962)을 연출한다. ‘미러 워크’라는 특수 효과를 한국영화사상 처음으로 시도하였고, 일본에서 촬영한 용궁 수중 장면 등의 특수 촬영이 압권이다. (사진7) <아름다운 수의>(이형표, 1962) 촬영 현장, 주연 배우 태현실 옆에 앉아있는 이형표 (사진8) <아름다운 수의>(이형표, 1962) 촬영 현장, 카메라에 손을 올리고 있는 이형표 1960년대 청춘영화의 시초격으로 불리는 영화 <아름다운 수의>(1962)는 주역을 신인 배우들만으로 구성하였고 배우 태현실, 최난경, 한문정, 트위스트 김 등의 영화 데뷔작이다. 이 작품은 “이형표 감독의 쾌적한 템포, 유려한 카메라 구사, 재치있는 커팅이 인상적” 4) 이라는 평을 받았다. 이후 그는 연달아 청춘물 <말띠 여대생>(1964), <연애졸업반>(1964), <백발백중>(1966) 등을 연출한다. (사진9) <말띠 여대생>(이형표, 1963)포스터 (사진10) <말띠 여대생>(이형표, 1963)의 한 장면 (사진11) <연애졸업반>(이형표, 1964) 제작진. 둘째줄 왼쪽 세 번째부터 조감독 김기풍, 배우 엄앵란, 이형표 감독, 배우 남미리 <말띠 여대생>(1963)은 개봉 후 대학 측으로부터 그런 학생이 어디 있느냐는 항의를 받는 등 영화의 리얼리즘 문제를 놓고 공방이 펼쳐지기도 했으나, 당시 외화만 보던 젊은 세대 관객들까지도 끌어들일만한 경쾌한 템포와 시원한 전개로 흥행에 성공한다. 이어 속편 <말띠 신부>(김기덕, 1966), <말띠 며느리>(이형표, 1979)가 제작되어 한국영화 최초의 시리즈물이 된다. 이형표는 1963년 무렵 신필름 전속을 그만두고 한양영화사, 극동흥업, 합동영화사 등을 오가며 청춘영화, 문예영화, 통속 멜로, 변장 코미디, 하이틴 영화 등 다양한 장르의 상업영화를 만들며 대중과 소통한다. (사진12) <아름다운 눈동자>(이형표, 1965)의 주연 배우 엄앵란과 김용연, 각각 청룡여우주연상과 청룡특별상(아역상)을 수상했다. <아름다운 눈동자>(1965)는 순박하지만 당찬 식모와 애정결핍인 주인집 아들이 훈훈한 정을 나누는 이야기로, 감독의 안정되고 세심한 연출력이 돋보인다. 웃음이 터지는 박자를 놓치지 않는 센스 있는 템포와 면밀한 씬 구성, 정확한 콘티뉴이티가 관객을 편안하고 즐겁게 몰입하도록 한다. 식모 역할을 맡은 배우 엄앵란은 출산 후 컴백하여 연기생활 11년만에 처음으로 자신의 목소리로 녹음하는 열의를 보였으며, 제 3회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이형표의 다방면에 걸친 박식하고 해박한 소양은 영화 기술적인 성과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취하는 영화 소재나 그것을 이야기로 풀어가는 방식에도 묻어난다. <애하>(1967)에서는 인공수정이라는 당시에는 낯선 소재를 삼각관계가 얽힌 미스터리한 구성으로 대담하게 전개한다. 획기적인 참신함으로 주목 받았던 이 작품은 제6회 대종상 각본상(이형우)과 남우조연상(윤일봉)을 수상한다. 또한 성(性)을 주제로 한 다수의 섹슈얼한 문예영화들 <밤은 무서워>(1968), <너의 이름은 여자>(1969), <방의 불을 꺼주오>(1970) 등을 통해 젊은 남녀의 내밀한 심리 세계를 긴장감 있게 표현한다. (사진13) <회전의자>(이형표, 1966) 촬영 현장에서 카메라 옆에 이형표 (사진14) <밤은 무서워>(이형표, 1968) 포스터. 위에서부터 배우 남궁원, 윤정희, 박노식 일체의 편견과 고정관념을 거추장스럽게 여긴 이형표 감독의 자유로운 사고 방식은 그의 주특기 장르인 코미디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언니는 좋겠네>(1963), <청색 아파트>(1963), <심술각하>(1966), <오대 복덕방>(1968), <산에 가야 범을 잡지>(1969), <내 것이 더 좋아>(1969), <염통에 털난 사나이>(1970), <방자와 향단이>(1972), <맹물로 가는 자동차>(1974) 등의 작품들에서 세태 풍자와 함께 권위를 조롱한다. 또한 웃음에 야박하고 저급하다고 폄하하는 기존의 시선을 가볍게 뛰어넘어 넌센스 코미디, 슬랩스틱 코미디까지 자유자재로 시도한다. 특히, 연기자 서영춘을 기용해 여러 작품을 만들었던 이형표는 당시 그의 뛰어난 희극 배우로서의 재능이 ‘저속 코미디언’으로 분류 되어, 높이 평가받지 못했던 점을 안타까워했다. (사진15) <청색아파트>(이형표, 1963) 오른쪽부터 배우 이대엽, 이형표 (사진16) <소문난 여자>(이형표, 1966) 촬영장에서 연기 연출 중인 이형표와 배우 고은아 (사진17) <내 것이 더 좋아>(이형표, 1969) 주연 배우 구봉서와 서영춘(오른쪽) (사진18) <염통에 털난 사나이>(이형표, 1970) 왼쪽부터 배우 서영춘, 구봉서, 김희갑 1970년대 TV 보급시대에도 이형표는 누구보다 빨리 변화하는 관객의 감성에 적응해갔으며, 당대 인기 배우들을 기용한 그의 청춘영화들은 꾸준히 인기를 누렸다. “이형표 감독을 잡으면 돈을 번다”는 말이 당시 제작자들 사이에서 회자될 정도로, 이형표는 경제성 있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으로서 대중이나 제작자 모두가 요구하는 탁월한 상업영화 감각을 유지했다. 이는 그가 영화는 오락이고 유행이라고 생각하며, 그 유행에 맞춰 관객과 상호 작용하는 유연함을 스스로 즐길 줄 알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진19) <모범운전사 갑순이>(이형표, 1972) 포스터 (사진20) <리칭의 여선생>(이형표, 1972) 촬영장에서 이형표 감독과 중국 배우 리칭(오른쪽) 6) (사진21) <리칭의 여선생>(이형표, 1972) 포스터 (사진22) <너무 너무 좋은 거야>(이형표, 1976) 포스터. 주연 전영록, 임예진 1970년대 중반에는 하이틴 영화의 붐을 타고 <이런 마음 처음이야>(1976), <너무 너무 좋은 거야>(1976), <제7교실>(1976), <괴짜만세>(1977) 등을 연출했고, 1980년대 한국영화 침체기에도 이형표는 성룡의 <취권>(1978)을 패러디한 코미디물 <애권>(1980)을 흥행시키며, <여애권>(1982), <애권(신)>(1982), <소애권>(1983) 등의 속편을 연달아 연출한다. (사진23) <아가씨 참으세요>(이형표, 1981) 포스터 그는 1980년대에 계속되는 저예산 흥행영화 제작 와중에, 구로공단 노동자들의 삶의 애환을 담은 일상서민극 <젊은 시계탑>(1984)을 연출하기도 한다. 이형표는 1986년 작품 <먼 여행 긴 터널>을 끝으로 극영화 연출 활동을 마치고, 국내 최초의 360도 서클 비전 영화 <내사랑 금수강산(1990)>을 제작하여 전시 영상이라는 새로운 분야에 도전한다. 이후 몇 년간 전시 영상 분야에서 새로운 영상에 대한 끊임없는 개척정신을 보이는 활동을 이어갔다. (사진24) <젊은 시계탑>(이형표, 1984) 촬영 현장. 오른쪽부터 배우 송승환, 이형표 감독, 배우 김현주 이형표의 영화 인생은 한국영화 제작 기술 발전사와 궤적을 같이 한다. 그는 전후 폐허에서 출발하는 1950년대 한국영화계를 위해 영화 기자재 도입에 앞장 섰고, 그 제작 기술을 안내하고 활용하는 데 있어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1960년대 한국영화 전성기뿐만 아니라 1970년대를 거쳐 80년대에 이르기까지 변모하는 세태에 뒤쳐지지 않고, 항상 새롭게 대중의 감수성을 포착해내고 섭취하는 감독이었다. 이렇듯 대중의 기호와 관심에 부응한 결과, 그의 영화 연출작들 대다수가 준수한 흥행 성적을 거두었다. 이형표는 예술가라는 자의식을 발현하기보다는, 영화라는 매체의 본질을 이해하고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유쾌하게 향유할 수 있는 영화 만들기를 추구했다. 그는 영화는 사람을 즐겁게 하는 예술이어야 한다는 엔터테인먼트 기능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특유의 낙천적인 개성으로, 가족 드라마 <서울의 지붕밑>(1961)부터 코믹 액션물 <아가씨 참으세요>(1981), 한국판 뱀파이어물 <관 속의 드라큐라>(1982) 등과 같은 기발한 재미와 웃음을 선사했다. "그림을 아는 스타일리스트" 7) 이형표는 다양한 장르에서 편협한 시각을 벗어내고, 규범을 해체하는 데서 생겨나는 통쾌한 오락으로 대중과 함께 하는 감독이었다. *이 글은 필자가 쓴「관객과 함께 웃는 영화 패셔니스타(Fashionista), 이형표 감독」, <서울의 지붕밑> DVD 소책자, 한국영상자료원, 2008을 참고해 재구성하였다. 1)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사연구소 엮음, 『이방인이 기록한 전후 한국, 영화_시어도어 코넌트 컬렉션』, 한국영상자료원, 2015 참고. 2) 앞의 책, 297쪽 참고. 3) 앞의 책, 293쪽 인용. 4) 앞의 책, 292쪽 참고. 5) 「[신영화] 병든 청춘의 풍속도/ 이형표 감독 <아름다운 수의>」, 《한국일보》, 1962년 11월 18일. 6) “톱감독과 톱스타 계보 (제4회)/이형표 편”,《영화잡지》통권116호, 1973년 5월, 190쪽. 7) 「[새영화] ‘스케치북’ 넘기는 재미/ 이형표 감독 <연애졸업반>」, 《서울신문》, 1964년 6월 17일
이 영화에는 세대를 넘어서는 ‘하도'가 있다 누군가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가족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이젠 기타노 다케시의 명언을 그만 써먹을 때가 됐다고 말이다. “가족이란 누가 보지 않을 때 버리고 싶은 존재"라는 다케시의 명언은, 옳다. 이제는 좀 지겨울 때도 됐다. 하지만 가족에 대한 영화를 만들면서 이 놀랍도록 진부하게 재생산된 명언을 그냥 지나치는 건 힘든 일이다. < 서울의 지붕밑 >(1961) 역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가족의 이야기를 중심축으로 둔 1961년 작 코미디 영화다. 아니, 로맨틱 코미디라고 해도 좋겠다. 한의사 김학규 김학규의 딸 미용사 현옥 산부인과 의사 최두열 김학규 아들 현구와 점례 내용은 간단하다. 한의사인 김학규( 김승호 )는 요즘 좀 화가 나 있다. 골목 건너편에 생긴 산부인과로 동네 손님들이 너무 많이 몰려서다. 게다가 산부인과 의사인 최두열( 김진규 )는 김학규의 딸이자 이혼하고 돌아와서 한의원 2층에서 미장원을 운영하는 현옥( 최은희 )과 호감을 느끼고 있다. 김학규는 그것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들도 문제다. 취업 전선에서 번번이 좌절하는 아들 현구( 신영균 )은 말 많고 탈 많은 동네 주막 주인( 황정순 )의 딸( 도금봉 )과 몰래 연애를 하다가 임신을 시키고 말았다. 도대체 김학규는 이 많은 자식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 문제들이 어떻게 해결될 것인지는 매우 분명하다. 오프닝에서 나오는 내레이션은 이렇게 선언을 한다. “새로운 시대와 낡은 시대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시대"라고 말이다. 여기에는 구세대와 신세대가 있다. 김학규는 구세대의 어떤 모델이고, 최두열은 신세대의 상징이다. 전자는 한의, 후자는 양의라는 설정은 도식적으로 명확하거나 명확하게 도식적이다. 두 캐릭터 중 누가 고개를 숙이고 모든 갈등이 해결될 것인지는 이미 정해져 있다. 지금 와서 보자면 고리타분해 보이는 이 설정에도 불구하고 <서울의 지붕밑>은 60여 년 전 관객들이 극장을 떠나가게 웃었을 유머 감각을 그대로 이 시대에 옮기는 데 성공한다. 생각해보면 그건 깜짝 놀랄만한 일이다. 한국 고전영화는 세대의 단절을 치열하게 겪었다. 60년대 대중영화의 감정이 2010년대의 관객들에게 전달되는 일은 드물다. 지금의 미국 관객들은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1960)나 <뜨거운 것이 좋아>(1959) 같은 영화들을 보며 여전히 웃을 수 있다. 한국 관객들이 같은 시기 한국영화를 보며 영화가 의도한 장면에서 웃으리라는 보장은 거의 없다. <서울의 지붕밑>은 지금의 관객이 보면서 1961년의 관객과 같은 마음으로 웃을 수 있는 드문 고전이다. 영화는 몇 가지 스테이지를 늘어놓고 마치 TV 가족 드라마처럼 전개된다. 세대의 전쟁이라는 큰 그림 위에 여러 캐릭터들이 펼치는 각각의 에피소드들을 계속해서 열었다 닫는다. 그리고 감독은 마치 작은 단편 꽁트처럼 각 에피소드에 일종의 펀치 라인들을 집어넣는다. 특히 한의사 김학규가 젊은 연인이 “당신에게 제 하트를 드리지 않았어요?”라고 밀담하는 것을 엿듣고는 딸에게 “하도가 무슨 뜻이냐?”고 묻는 장면은 백미다. 딸이 “하트는 심장이에요"라고 답하자 그는 “심장이라니 염통 말이냐?”라고 되물은 뒤 “사랑이라는 뜻도 된다는 말"에 능글능글하게 웃는다. 이 장면은 시대가 지나도 늙지 않는 코미디인 동시에, 세대의 급격한 변화라는 영화의 주제와도 근사하게 맞물린다. “당신에게 제 하트를 드리지 않았어요?” "하도..?" 물론 <서울의 지붕밑>이 도무지 낡아 보이지 않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스타들의 존재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서울의 지붕밑>은 조촐한 배경과는 달리 당대의 신필름과 지속적인 작업을 하던 최고 인기 배우들이 모조리 모여 있는 당대의 블록버스터다. < 마부 >로 당대 한국인의 배우가 된 김승호, 부인 역할의 한은진 , 딸 역할의 최은희, 산부인과 의사역의 김진규는 물론, 김승호의 아들 역할은 신영균이 맡았다. 신영균과 결혼하는 점례 역할은 도금봉이고 그의 어머니는 황정순이 연기한다. 허장강 과 김희갑 , 구봉서 의 기막힌 코미디 연기는 물론, 젊은 신성일 의 깜짝 출연도 <서울의 지붕밑>을 배우의 영화로 만든다. 사실 이형표 감독을 잃어버린 거장이라고 말하는 건 좀 무리일 것이다. 그는 < 말띠 여대생 >, < 아가씨 참으세요 >나 < 남자 가정부 > 같은 코미디 장르의 영화들을 지속적으로 만들었다. 홍콩 영화 <취권>의 성공에 힘입어 졸속으로 만든 < 애권 > 시리즈의 감독이기도 하다. 80년대 영화를 기억하는 관객에게는 82년작인 < 관속의 드라큐라 >가 먼저 떠오를게다. 그는 오랫동안 많은 대중 영화를 만들었지만 데뷔작인 <서울의 지붕밑>을 능가하는 영화를 만들지는 못했다. 그러나 <서울의 지붕밑>이 시대를 어느 정도 무사히 뛰어넘은 영화가 된 것은 신필름 출신으로 < 동심초 >와 한국 최초 컬러 시네마스코프 영화였던 < 성춘향 >의 촬영을 담당했던 이형표의 덕이기도 하다. 훌륭한 테크니션으로서의 이형표의 능숙한 설계는 영화 전체에 깃들어 있다. 특히 그는 서울 중심에 위치한 것으로 보이는 큰 골목길을 중심으로 양쪽에 한의원과 산부인과를 배치한다. 그 골목길은 세대의 단절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동네 사람들이 오가며 가십을 퍼뜨리고 몰래 연애를 하는 일종의 연극적 무대다. 이형표 감독은 로케이션 촬영과 세트 촬영을 적절하게 섞어서 각각의 무대를 감정적으로 잘 이어붙일 줄 안다. 특히 그의 테크니션적인 솜씨는 좁은 골목을 무대로 이후 등장할 모든 캐릭터들을 세련되게 소개하는 첫 장면에서 가장 멋지게 드러난다. 모든 한국 고전영화가 그렇듯이 <서울의 지붕밑>은 서울이라는 도시에 대한 예찬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서울의 옛 모습은 여전히 낯설다. 우리는 할리우드 고전영화에서 등장하는 맨하탄의 모습이나 오즈 야스지로 영화 속 동경의 모습에 묘한 향수를 느끼면서도 도무지 서울의 옛 모습에는 익숙하지가 않다. 그건 어쩌면 당대 한국 영화를 접할 수 있는 계기가 압도적으로 적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서울의 지붕밑>은 (아마도 남산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서울의 전경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그 순간 ‘아!’하고 낮은 탄성을 내지 않을 도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