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스트와 같이 놀자! ‘집앞 카니발’
- 제작년도
- 2010
고백하자면 나는 게임을 좋아하지만 잘 못한다. 반응속도가 느려 적을 처치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릴 뿐 아니라 방향치에 지도 독해력까지 떨어져 게임 공간에서도 길을 잃고 헤매기 일쑤다. 연결/협력 플레이도 선호하지 않아 다중접속롤플레잉 게임들은 피하고 콘솔용 싱글 플레이에 집중해왔다. 선호하는 게임 장르도 편협하다. 게임 자체에 깊은 재미를 느껴서라기 보단 디지털 영화 연구의 연장선에서 게임을 시작해 그런지 게임 목록은 주로 ‘영화적인’ 스펙터클의 체험을 제공하는 오픈 월드 어드벤처나 영화적 장르를 적극적으로 차용한 롤플레잉 장르로 한정된다. 게임도 잘 못하고 좋아하는 게임도 많지 않은데 도대체 무슨 재미로 플레이 하냐고 묻는다면 난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고독을 즐기기에 게임 세계만큼 좋은 장소는 없다.’ <폴 아웃>, <엘더 스크롤>, <레드 데드 리뎀션> 시리즈 같은 오픈 월드 어드벤처 게임을 할 때 (자의든 타의든) 이곳저곳을 헤매다 어느 새 미션은 잊고 압도하는 자연 풍경 속에서 디지털 시뮬레이션이 만들어 놓은 햇빛과 바람을 맞으며 서 있을 때면 평온하면서도 비로소 고독할 수 있다고 느낀다(그런 점에서 지나치게 디테일한 미션이 많은 <레드 데드 리뎀션 2>는 개인적으로 불호였다). 특히 주요한 서사적 장소 혹은 필수적인 미션 수행의 장소가 아님에도 개발자와 디자이너들이 공들여 만든 곳에 할 일 없이 내가 플레이 하는 아바타를 그저 존재하게 할 때면 더욱 그렇다. 아바타는 거기에 어떤 목적 없이도 존재한다. 그렇다고 플레이어와 아바타 간의 연결이 완전히 끊긴 건 아니다. ‘거기 있음’이라는 액션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게임 플레이의 수많은 다른 순간들과 달리 목적 없는 순간은 아바타와 그 아바타에 연결된 플레이어의 존재의 감각을 고조시킨다. 여기에는 두 가지 모순된 감정이 있다. 다수는 아닐 테지만 어느 플레이어든 그 장소를 방문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제에서 개발자와 디자이너들이 공들여 만든 창조적 노동의 호의가 한편에 있다면, 그 세계가 물리적 세계와 마찬가지로 ‘나’와 상관없이 존재할 것이라는 디지털 객체의 존재론적 감각이다. 디지털 세계와 물리적 세계는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분리되어 있고, 인공적이면서도 자연적이다. 지나치게 사실적인 흔들리는 갈대, 나의 움직임에 상호작용하는 부서지는 햇빛들, 너른 지평선 같은 자연풍경속에 서 있을 때면 낯선 친숙함, 언캐니(uncanny)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지평선을 바라볼 때면 그 세계가 무한으로 연장될 수 있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 ‘트루만 쇼’의 바로 그 벽, 즉 게임에서 늘 더 이상 접근 불가능한 바다, 넘어갈 수 없는 높은 산과 절벽들에서 버둥거려 본다. 이번에 선정한 ‘사사로운 리스트’에는 작품성이나 영화적 쟁점에 있어 < 니트 아일랜드 >보다 뛰어난 영화들이 다수 있다. 그럼에도 이 다큐멘터리가 정말 사사롭게 나의 어떤 마음을 정확하게 건드렸기에 리뷰를 쓰기로 결심했다. 이 다큐멘터리는 내가 디지털 게임의 가상 세계에서 느꼈던 그 존재론적 외로움을 발화하다. 장편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 <니트 아일랜드>의 감독은 세 명의 프랑스 청년, 에키엠 바르비에, 길렘 코스, 캉탱 렐구아크이다. 이들의 영화제작 현장은 <DayZ>(Bohemian Interactive, Dean Hall, 2013)라는 멀티플레이어 온라인 생존 게임의 가상세계이다. 가상의 소비에트연방 공화국, 체르나루스가 배경인 게임 세계는 플레이어가 자유롭게 공간과 사물에 접근할 수 있는 오픈 월드로 구성되어 있고 필수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미션이나 주요한 서사진행이 많지 않아 높은 자율성을 보장한다. 제작팀은 전작에서는 <Grand Theft Auto 5>(록스타, 2013)의 게임 플레이 장면을 녹화하고 편집해 단편 <말로위 드라이브>(2017)를 만든 바 있다. 이 경험을 바탕삼아 좀비 아포칼립스 장르인 <DayZ>를 963 시간 플레이하며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엔딩씬을 제외한 모든 장면이 게임 내의 플레이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다른 플레이어들을 만나기 위해 긴 거리를 떠돌아다닌다. 당연하게도 실시간 게임 플레이와 결과물로서의 영화는 다르다. 최종적으로 영화에 무엇을 담았는가를 생각해보면 오히려 이 영화는 ‘게임적인 것’이 아니라 ‘영화적인 것’에 집중했음을 알 수 있다. 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그들은 963 시간을 플레이하기 위해 좀비와 싸우거나, 다른 생존자와 전투를 벌이거나, 아이템을 찾거나, 때로는 죽어서 게임이 초기화되는 과정을 여러 번 겪었을 것이다. 실제로 죽음의 위기에 처하면 점진적으로 흑백으로 변하고 죽고 나면 기본 아이템만 소지한 채 해변으로 돌아와 처음부터 게임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한 인터뷰에서 감독들은 가상 카메라로 촬영하면서 화면이 흑백으로 변하지 않게 생명력을 적절하게 관리하는 것이 제일 힘들었다고 말한 바 있다. 일종의 카메라 뒤의 장면, 즉 그 세계에 살아남기 위해 플레이했던 게임적 순간들은 편집되어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제작팀은 가능한 사살되지 않기 위해 ‘PRESS’라고 적힌 조끼를 입고 카메라를 들고 인터뷰 대상을 찾아다닌다. 좀비로 인해 인류가 멸망해 가는 아포칼립스 세상에서 뿔뿔이 흩어져 생존해 있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듣고 기록한다. 국가를 비롯한 기존의 사회 체제가 사라진 세계에서 개인 혹은 부족은 자기들만의 삶의 모습과 가치를 만들어 간다. 아포칼립스의 그리스 어원은 ‘덮개를 걷어내다(uncovering)’라는 뜻을 갖고 있다. 우리의 정체성과 관계를 반강제적으로 제한하고 정의하는 기존의 체제가 무너질 때 우리는 오히려 자신들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회와 관계를 만들기를 원하는지, 아니면 사실 그다지 원하는 바가 없는지를 알 수 있다. 더불어 인터뷰 대상과 세계가 제작자들에게 생존의 위협이 될 수 있는 상황에서 다큐멘터리의 제작 조건을 새삼 고심하게 된다. 제작팀은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좀비나 적대적인 생존자들에게 언제든 살해당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필수적인 물과 음식, 의류, 의료 용품, 무기 등의 보급품을 수색하고 채집해야 한다. 물리적 환경에서도 강도는 다르지만 다큐멘터리를 제작할 때 이 조건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영화는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신념과 생존방식을 취하는 부족들에 대한 민족지적(ethnographic) 호기심 그리고 비의미의 풍경으로서의 지평선을 조명한다. 제작팀은 처음부터 신뢰를 얻을 수는 없기에 우선은 ‘PRESS’ 뱃지에 의존해본다. 그들에게 카메라는 그들을 보호하는 무기가 된다. 그들은 자신들을 영화제작팀이라 밝히고 죽이지 말라고 요청한 후 플레이어들에게 다가간다. 900 시간이 넘는 긴 여정에서 약탈적인 갱단, 자기들만의 신과 교리를 만들고 사마리아 윤리를 따르는 종교적인 집단, 호박을 키워 자급자족하는 사람들, 사람이 거의 없는 광활한 자연 속에 자기만의 비밀 아지트를 만들고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 호기심 많은 방랑자들을 만난다. 특히 오프닝에서 제작팀과 관객은 윤리적인 충격에 직면한다. 카니발리즘으로 악명 높은 갱단 ‘다크 에즈 미드나잇’의 리더 아이리스는 게임에서 현실에서라면 하지 못할 짓을 마음껏 하며 플레이 한다. 제작팀의 눈앞에서 보란 듯이 ‘장난감’이라 부르는 죄수를 말 그대로 가지고 놀다가 총으로 쏘아 죽인다. 선정적인 이 장면은 다큐멘터리 제작의 윤리적 갈등을 드러낸다. 아이리스는 카메라, 즉 제작팀이 있기 때문에 더 위악적으로 행동했을 수 있다. 제작팀은 이미 아바타의 삶과 죽음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이 상황은 게임이기 때문에 그다지 심각하지 않을 수 있다. 아이리스와 그녀의 무리들이 인간의 형상을 한 아바타를 포박하고 죽이면서 노는 것을 기록하고 보여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것이 게임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픽션은 아니다. 오픈 월드에서 그들이 자율적으로 선택한 행동들이기 때문이다. 특히 충격과 두려움, 호기심과 경외가 뒤섞인 제작팀의 가상 카메라의 움직임과 마이크를 통해 전달되는 제작진의 실제 숨소리는 이 상황이 현실의 삶과 완전히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낸다. 이 장면은 관객들을 혼란스럽게 만들며 디지털 시대에 다큐멘터리 윤리가 어떻게 새롭게 정립될 수 있는지 질문한다. 이처럼 게임 플레이와 영화제작, 현실과 가상세계는 구분되지 않고 서로에게 침투한다.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로 분류될 수 있을 만큼 감독들과 다큐멘터리 등장인물들은 게임 속 아바타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우리는 현실에서의 그들의 외양과 정체성을 알 수 없다. 성별, 인종, 패션 등은 아바타를 꾸미기 나름이다. 하지만 아바타의 움직임은 플레이어들에 의해 조종되고 행동되어진다. 더 중요하게는 마이크를 통해 플레이어들의 실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대화뿐 아니라 마이크를 통해 현실에서 들려오는 앰비언스 사운드는 실제 삶의 레이어를 중첩적으로 드러낸다. 사운드가 다큐멘터리에서 리얼리티를 뒷받침 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음을 예증한다. 많은 이들이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라고 꼽는 장면 중 하나는 아이를 재우고 밤에 게임을 하는 여성 플레이어와의 만남이다. 이 플레이어는 지하에 있는 방에서 게임을 하는 시간이 양육에서 벗어나 유일하게 쉬는 시간이라고 말하는데 그 순간 넘어져 우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며 현실의 삶이 게임에 깊숙이 들어온다. 플레이어는 양해를 구하고 아이를 돌보러 잠시 컴퓨터 앞을 떠난다. 플레이어의 컨트롤이 해제된 아바타는 말 그대로 시체처럼 널브러져 있다. 흔적이나 유령 같은 몸은 외로워 보인다. 이 장면은 두 세계가 나눠져 있지 않으며, 오히려 그의 신체가 현실에도 가상세계에도 분주하게 분유되어 있음을 각인한다. 영화는 뒤로 갈수록 생존을 위한 투쟁이나 위악적인 기행보다는 다른 감정과 가능성들에 집중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가 제작되는 중간에 코로나19가 발발한 것과 연관이 깊을 것이다. 유럽을 비롯한 지구의 일부 지역들은 봉쇄되었고 고립된 그들은 그들의 아포칼립스 세계를 닮아가고 있는 현실을 벗어나 게임공간에서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우정과 공존의 실마리를 찾는다. 특히 하늘에서 헤엄칠 수 있게 디자인된 자신들의 비밀 아지트에 초대해준 부부 플레이어, 채소를 키우고 자립생활을 하는 농부 플레이어들, 고립된 이들을 받아주는 종교적인 단체, 밤에 함께 캠프파이어를 하고 음악을 듣는 사람들은 지친 현실을 위로한다(DJ가 된 플레이어들이 현실에서 음악을 재생하고 마이크를 통해 공유한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가장 강렬하게 남기는 감정은 실존적 외로움이다. 현실의 봉쇄에 지친 이들은 함께 게임세계의 끝으로 모험을 떠나기로 한다. 하염없이 몇날 며칠을 지평선을 향해 걸었지만 광활한 공간 뒤에는 다시 광활한 공간이 나올 뿐이다. 끝이 있다는 것을 알긴 하지만 얼마만큼 가야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코로나19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우울감에 빠졌던 것처럼, 누군가는 그저 함께 하는 것에 흥미를 느끼지만 다른 누군가는 끝이 보이지 않는 것에 절망하고 게임 속에서 자살한다. 자살한 후 남겨진 아바타 주위에 모여 그를 애도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뭉클한 감정을 자아낸다. 그들은 외로움을 공유한다. 부재와 상실을 애도하는 순간(사실 플레이하는 동안 현실의 일부를 잃고 게임에 몰입한다는 점에서 게임하기는 반드시 상실을 동반한다), 지평선을 바라보는 장면, 끝이 어디인지도 모른 채 하염없이 걷는 사람들, 의미를 넘어선 ‘거기-있음’, 그저 함께 있음을 즐기는 사람들, 바다에 다다라 유유히 헤엄치던 종교집단의 리더인 카우보이 스톤 목사가 그의 현실 이름을 말하며 “나는 프랭크일 뿐이에요”라고 나직하게 고백하는 장면은 모두 외로움과 상실의 감정을 자아낸다. 이 장면들은 오히려 대립되는 세계라고 여겨지는 현실과 가상이 모두 물질적으로 절실하게 촉지되는 순간들이다. 간격이 있지만 그럼에도 내 신체를 매개삼아 레이어링되는 두 세계의 물질성은 오히려 외로움을 느끼게 한다. 그 외로움은 세계가 내가 있든 없든 존재한다는 진실이다. 그것이 실제 삶이든 게임의 가상세계든 말이다. 저기 어딘가에 내가 모르는, 혹은 지금은 보고 있지 않은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그것은 소외가 아니며 오히려 부재이고 상실을 통한 강력한 실존적 감각이다.
한국에서 공포영화를 좋아하기란 많은 난관이 있다. < 티탄 >으로 칸영화제 그랑프리를 받은 쥘리아 뒤쿠르노의 데뷔작 <로우>(Raw, 2016)는 칸을 비롯한 많은 영화제에서 수상한 화제작이고 부천판타스틱영화제에도 초청되었으나 결국 수입되지 않았고, 넷플릭스를 통해 뒤늦게 공개됐다. 아마도 카니발리즘이라는 소재 때문이 아닐까. 올해 아카데미 주요상을 휩쓴 <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 >와 < 더 웨일 >을 만든 제작사 A24의 영화는 언제나 독특하다. < 유전 >과 < 미드소마 >, < 더 위치 >, < 잇 컴스 앳 나잇 >, < 램 > 등 A24가 만든 공포영화들도 장르적으로는 아쉽다 말할 수 있어도 개성이라는 면에서는 모두 탁월하다. A24의 2022년 작품인 티 웨스트의 < X >는 비평가와 관객 모두에게 호평을 받았고, 약 1천 5백만 달러의 수익을 올린 성공작이다. A24는 프리퀄인 < 펄 >(Pearl, 2022)을 바로 제작하여 작년 9월 개봉했고, 시퀄인 <맥신>(MaXXXin)도 제작 중이다. 그러나 오락성과 작품성 모두 뛰어난 공포영화 <X>는 한국에 수입되지 않았다. 1979년을 배경으로 시골 농장에 포르노 영화를 찍으러 갔다가 학살당하는 내용인데, 역시 ‘포르노 영화’라는 소재가 불편하기 때문이 아닐까. 데미안 레온의 <테리파이어>(Terrifier, 2016)는 3만 5천 달러의 초저예산으로 만들어진 슬래셔 영화다. 2016년부터 여러 영화제에서 상영하다가 2018년 개봉한 <테리파이어>는 ‘아트 더 클라운’라는 개성적인 살인마 캐릭터와 신랄한 고어 장면이 찬사를 받으며 컬트영화가 되었다. 데미안 레온은 2편 제작을 위해 5만 달러 펀딩을 시작했고, 목표를 훨씬 초과 달성하여 총 25만 달러를 모금했다. 상영시간 2시간 18분의 고어 슬래서 영화 <테리파이어 2>는 작년 미국에서 개봉하여 1천 5백만 달러의 극장 수익을 올렸다. 제작비는 약 25만달러. <테리파이어> 1, 2편은 한국에 수입되지 않았다. 수입한다 해도 고어 장면이 노골적인 영화라 많은 장면이 잘려나갈 것이다. 온전하게 한국의 극장에서 <테리파이어2>를 볼 방법은 영화제를 통하는 것밖에 없다. 1970, 80년대의 슬래셔 영화를 리부트하는 감각으로 만들어진 화끈한 호러 영화 <테리파이어 2>를 극장에서 볼 수 없다는 현실이 참 안타깝다. 호러영화에서 ‘캐릭터’는 대단히 중요하다. 살인마의 캐릭터를 잘 잡으면 시리즈가 끝없이 이어진다. < 할로윈 >의 마이클 마이어스, < 나이트메어 >의 프레디. < 13일의 금요일 >의 제이슨, <헬레이저>의 핀헤드 등은 호러 장르의 아이콘이다. 데미안 레온이 창조한 아트 더 클라운도 그들의 뒤를 이을 자격이 충분하다. 아트 더 클라운은 데미안 레온의 첫 번째 단편영화 <9번째 서클>(The 9th Circle, 2008)에 조역으로 등장했고, 단편 <테리파이어>(Terrifier, 2011)에 초자연적 존재로 등장하여 존재감을 드러냈다. 데미안 레온은 두 편의 단편을 활용하여 장편 <올 할로우스 이브>(All Hallow’s Eve, 2013)를 연출한다. 할로윈에 캔디를 받으러 나갔던 아이의 주머니 안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비디오테이프가 들어 있다. 베이비시터는 비디오를 틀었고, 아트 더 클라운이 등장하는 단편영화들을 보게 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 데몬스2 >의 악마가 TV 브라운관을 통해 현실에 나오듯, 클라운이 베이비시터를 바라보고 다가와 브라운관을 두들기다가 현실로 들어온다. 데미안 레온은 <올 할로우스 이브>에서 아트 더 클라운의 가치를 충분히 깨달았고, 효과적으로 사용했다. 장편 <테리파이어>는 오로지 아트 더 클라운을 위한 슬래셔영화다. 할로윈 밤, 광대 코스튬을 입은 남자가 두 여성을 쫓아간다. 그리고 만나는 모든 이들을 살육한다. 제한된 장소에서 벌어지는 살육은 85분의 러닝타임 동안 효과적으로 이루어진다. 저예산이기 때문에 장소와 인물의 제한은 필연적이다. 주인공은 몇 번이나 위기에서 도망치면서 아트 더 클라운을 죽이지 않는다. 클라운이 쓰러지거나 정신을 잃으면 그대로 두고 도망치다가, 다시 공격당한다. 80년대 슬래셔 영화의 클리셰를 너무 반복해 사용하는 탓에 약간 지루한 감도 있다. 스토리에서 비판을 많이 받았지만, <테리파이어>의 참신한 고어 장면들과 아트 더 클라운의 섬뜩한 매력은 호러영화 마니아를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테리파이어>는 호러의 컬트가 되었다. <테리파이어 2>는 1편의 성공으로 자신감을 가진 데미안 레온이 작정하고 만든 영화다. 자신이 좋아하는 모든 것, 보여주고 싶은 모든 것을 아낌없이 2시간 18분에 담았다. 호러 그것도 고어 영화를 2시간 넘게 본다는 것은 마니아들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데미안 레온은 하고 싶은 것, 보여주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다. 창의성이 넘치는 감독이 공식에 충실한 영화를 걸작으로 만들어 성공했을 때, 속편의 기회가 주어지면 자의식이 충만하다 못해 가득 넘치는 영화를 만들어내는 경우가 있다. 팀 버튼의 < 배트맨2 >(Batman Returns, 1992), 길예르모 델 토로의 < 헬보이2 >(Hellboy 2: The Golden Army, 2008)가 그렇다. <배트맨>과 <헬보이>는 모두 걸작이지만, 철저하게 슈퍼히어로 영화의 공식 안에서 자유롭게 상상력을 전개했다. 그러나 <배트맨2>와 <헬보이2>는 슈퍼히어로 영화의 경계선을 가볍게 초월해 버린다. <배트맨2>의 히어로는 배트맨이 아니라 캣우먼과 펭귄이고, 추방된 자들의 부활을 다룬다. 크리스토퍼 월킨이 연기한 빌런 맥스 슈렉의 존재는 스리슬쩍 지워진다. <헬보이2>는 길예르모가 애착을 가진 기형의 존재, 신묘한 기계장치, 뒤틀린 신화와 전설 그리고 저주까지 모두 등장하여 헬보이의 모험을 보여주는 판타지다. <테리파이어 2>를 <배트맨2>, <헬보이2>와 같은 반열에 올려놓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데미안 레온의 야심만은 인정할 수 있다. <테리파이어 2>는 80년대 하이틴 슬래셔 영화 풍의 오프닝 크레딧으로 시작한다. 주인공도 10대의 남매다. 시에나는 자살한 아버지가 만들었던 검을 든 천사 코스튬으로 할로윈 파티에 가고 싶어한다. 동생 조나단은 아버지가 남긴 엽기적인 그림들이 아트 더 클라운과 관련있다고 믿는다. 1년 만에 다시 나타난 아트 더 클라운은 어쩐 일인지, 시에나와 조나단 남매에게 집착한다. 친구 앨리와 시에나의 어머니를 죽인 아트 더 클라운은 조나단을 납치한다. 최종적으로 시에나와 아트 더 클라운의 맞대결이 벌어진다. <테리파이어>는 심플한 슬래셔영화였다. 에필로그를 제외하면, 아트 더 클라운도 초자연적 존재로 묘사되지 않는다. 쫓고, 죽이고, 절단하는 장면을 긴장감 넘치게 구성하는 것에만 집중하여 작지만 확실한 성공을 거두었다. <테리파이어 2>는 <나이트메어>를 연상시킨다. 부활한 아트 더 클라운은 초자연적인 괴물이고, 꿈과 현실을 넘나든다. 시에나와 조나단은 꿈속에서 클라운을 만나고, 깨어나자 현실에서도 상처가 지속된다. 학교의 환상 장면은 확실한 <나이트메어>의 오마쥬다. 그런데 묘하다. 죽음 직전까지 몰린 시에나는 환상적으로 되살아나 마치 게임 캐릭터처럼 클라운과 최종 보스 대결을 벌인다. 영락없는 게임 판타지의 엔딩이고, 검을 든 여전사의 각성이 메인 플롯이 된다. <테리파이어 2>의 초점은 아트 더 클라운보다 시에나에게 맞춰져 있다. <테리파이어 2>는 데미안 레온의 야심이 넘쳐 장르도, 스토리도 마구 넘쳐난다. 단점에도 불구하고 <테리파이어 2>가 성공적인 속편이 된 이유는 데미안 레온의 창의적이고 현란한 고어 장면들 때문이다. 시에나의 친구인 앨리의 집에 찾아 간 아트 더 클라운이 그녀를 잔인하게 죽이는 장면은 아주 길고 자세하게 묘사된다. 이 장면 하나만으로도 <테리파이어 2>는 호러영화 마니아에게 기억될 영화로 남는다. 조나단을 찾아 시에나와 함께 테마파크에 간 친구 브룩과 남자친구 제프가 아트 더 클라운에게 공격당하는 장면 역시 아이디어가 넘친다. <테리파이어2>는 데미안 레온의 야심으로 장황하고 호사스러운 속편이 되었지만, 하이틴 슬래셔 호러의 매력이 무엇인지를 정확하면서도 강렬하게 그려낸 작품이 되었다. 공포와 긴장감, 살육 그리고 유머와 에로틱까지 겸비한, 21세기를 대표할 하이틴 슬래셔 영화다.
한 평생 타인의 이야깃거리가 되는 삶이란 어떤 걸까? 그리고 나의 삶을 규정하는 무수한 명명과 논평들을 뚫고 나와 이야기의 주도권을 잡으려면 어떤 물질적 조건과 태도가 필요할까? 다큐멘터리 < 나와 부엉이 >(박경태, 2003), < 아메리칸 앨리 >(김동령, 2008), < 거미의 땅 >(김동령·박경태, 2012)을 통해 동두천 기지촌 여성의 삶의 서사화와 그 재현 미학을 지속적으로 고민해 온 김동령·박경태 감독의 최신작 <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 >(2019)는 바로 이 질문을 던진다.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의 주인공이자 영화 속 판타지 서사의 공동 창작자이기도 한 박인순은 소위 ‘양공주’로 칭해져온 ‘미군 위안부’였다. ‘미군 위안부’의 생애는 전쟁과 탈식민, 젠더와 섹슈얼리티, 계급과 지역 같은 한국사회의 주요 쟁점들을 교차하고, 저간의 소문과 험담, 의회와 법정의 증언록, 뉴스보도, 학술저작, 소설·연극·영화 같은 예술매체 등에서 명명되고 의미지어지고 해석되어 왔다. 그러는 동안 정작 당사자들은 각기 다른 서술자들의 관점과 입맛에 맞게 자신들의 삶이 맞춰 깎여나가고 조형되는 것을 목도해왔다. 이렇게 풀려나온 다수의 이야기들은 ‘미군 위안부’에 대한 정형화된 형상을 반복해온 측면이 있다.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는 그러한 이야기들의 한복판에서 살아남은 박인순이 마침내 자신이 원하는 장르와 형식으로 이야기를 서술해 나갈 방도를 찾도록 돕는다. 한평생 다른 이들의 이야기에 휘둘려온 박인순은 적어도 죽음만은 자신의 의지와 방식대로 선택하고자 한다. 사실 ‘미군 위안부’에게 있어 죽음조차도, 특히 비극적인 사건이 된 죽음들은 다른 쟁점을 선동하는 도구가 되거나 자극적인 이야깃거리가 되기 십상이었다. 박인순은 적어도 죽음의 방식만은 포기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이며 죽음의 메신저들과 대면한다. 영화는 박인순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전에 화면 사이즈와 내레이터를 바꿔가며 그녀에 대해 이야기 해온 화자들이 누구인지를 드러낸다. 그 화자들에는 김동령과 박경태 감독도 포함된다. 두 감독은 기지촌 여성들을 지원하는 시민단체 ‘두레방’에서 미술치료에 참가한 모습부터(<나와 부엉이>)부터 매일같이 황량한 산등성이와 동네골목을 휘젓고 다니며 미국에 남겨두고 온 딸에게 부치지 못한 편지를 낭독하는 풍경까지(<거미의 땅>) 박인순과 20년 가까이 함께 영화작업을 해왔다. 그렇기 때문에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는 자신들의 기존 작업 혹은 다큐멘터리에 대한 메타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 오프닝에서 박경태 감독은 스스로 다큐멘터리 감독을 연기하며 국가배상소송을 위해 실태조사를 하는 교수(변중희)와 영상촬영을 담당한 신진 미술작가를 박인순에게 소개해주기 위해 데려가고 엔딩에서는 산을 올라가는 박인순을 뒤따르는 카메라 뒤의 목소리로 두 감독이 등장하며 박인순이 서사를 함께 만들긴 했지만 이 영화 또한 두 감독의 프레임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도입부의 안내자 역할을 하는 박감독은 교수와 미술작가와 함께 차를 타고 마을로 들어가며 미군기지가 이전된 이후 수년 동안 마을이 재개발되면서 일어난 변화와 여전히 남아있는 것들-박인순과 그녀의 동료들, 이름도 적혀있지 않은 여자들의 무연고 비석, 산과 들판 등-에 대해 설명한다. ‘뺏벌’이라 불리는 그곳은 ‘배밭’에서 기원했다는 사료가 있지만 또한 여자들 사이에선 “한번 들어오면 빼도 박도 못하고, 죽어서도 나가지 못하는 곳”이란 의미로 통용되기도 했다. 셋은 마을 어귀에서 오래된 당산나무를 만나게 되고 그에 대해 이야기한다. 오랜 시간 뺏벌을 지켜봐 온 당산나무는 재개발에 뽑혀나가거나 굿이 금지되어 당산나무로서의 역할을 못하게 될 위기에 처해있다. 당산나무는 액자 속의 액자로, 이야기 속의 이야기로 들어가는 입구의 표지가 된다. 변교수는 법정증거로 제출할 ‘미군 위안부’의 피해기록을 박인순에게서 얻어내려 하지만 박인순의 구술은 일관성이 없고 시간대가 잘 들어맞지 않으며 이름도 명확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한 기록은 제도권에서 인정받기 힘들다. 교수는 기지촌 여성들의 피해를 보상받기 위해 노력하지만 제도권 내에서 일하며 사용가능한 이야기와 그렇지 않은 이야기를 가르고 걸러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전시를 준비하는 젊은 미술작가는 어떨까? 박인순의 이야기에 매료된 그는 이후 홀로 뺏벌을 방문한다. 그는 언어대신 사람들이 버리고 간 현장의 이미지들을 자신의 예술적 질료로 사용하려 한다. 미술작가는 폐허가 된 클럽의 사진을 찍고 버려진 컵, 미러볼, 낙서된 전단지 등의 소품을 전시에 사용할 요량으로 챙긴다. 그는 남아있는 것들에 매혹되지만 정작 그 공간과 소품들의 주인이기도 한 꽃분이의 유령이 나타나자 공포에 질려 도망친다. 미술작가는 그녀들의 이야기를 들으려하기보다는 이미지와 소품들을 맥락에서 떼어내 자신의 전시공간에 맞춰 놓으려 한다. 다큐멘터리 감독, 실태조사를 하는 교수, 기지촌 여성에 관심이 있는 미술작가는 모두 좋은 의도를 갖고 있지만, 자기들만의 틀에 박인순을 맞추려 한다. 여러 화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만드는 것에 공조해주던 박인순은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들지 않자 마침내 직접 스토리텔러로 나서게 된다. 이승에서 배회하는 유령들을 소멸시키고자 저승사자들이 나타나자 박인순도 그들도 함께 동네를 배회한다. 박인순은 어린 나이에 부모에게 버려져 자기의 이름과 나이도 모른 채 포주인 수양엄마에게 팔려왔다. 클럽에서 일하려면 ‘패스’라 불렸던 보건증이 필요했기 때문에 포주는 동네 죽은 여자의 신분을 사서 박인순에게 줬다. 그녀를 가리키는 이름과 나이 자체가 누군가의 이야기 짓기로 구성된 것이다. 화자의 존재 자체가 논픽션과 픽션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지표가 된다. 꽃분이를 비롯한 젊은 여자 유령들은 박인순의 젊은 시절인 동시에 죽은 그녀의 동료들이다. < E.T >, <드라큘라>, < 엑소시스트 >를 좋아한 박인순의 취향에 맞게 장르는 호러와 코믹 판타지를 오고간다. 박인순은 자기 죽음의 서사를 원하는 대로 써내려가고자 한다. 방해가 없는 것은 아니다. 감독, 교수, 미술작가가 사라지고 난 후에도 전지적 시점의 내레이터와 저승사자들은 그녀의 이야기에 끊임없이 끼어들어 그리스 비극의 코러스들처럼 논평을 해댄다. 거기에 꽃분이를 찾아온 미군까지 등장한다. 꽃분이와 미군이 ‘윤씨 종친 무덤’에서 함께 잠을 자면서 박인순이 그린 그림의 제목이기도 한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가 연극처럼 상연되기도 한다. 박인순은 로맨틱한 구원자로 자신을 포장하려는 미군의 목을 꽃분이와 함께 잘라 복수를 하고 그의 목을 끌고 직접 저승길로 향한다. 내레이터는 읇조린다. “저승으로 가는 아홉 고개를 넘기 위해 그들은 남편의 살과 뼈를 고아 감쪽같이 먹어치우고 머리만 끌고 가기로 했다. 잘린 머리는 저승의 문지기에게 뇌물로 바치기로 했다. 저승사자는 이 무모하고 자신만만한 여자들을 비웃었다. 하지만 나는 인순이와 꽃분이가 비웃음에 굴하지 않으며 아홉 고개를 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내레이터는 그 동네를 지켜보던 당산나무일 수도 있다. 기품 있는 옷을 지어 입은 박인순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씩씩하고 당당하게 활보하며 저승으로 향한다. 박인순은 시작은 그렇지 못했더라도 결말은 자신의 의지대로 맺고자 한다. 박인순의 이야기는 비참에서 비장으로("그런 이유로 나는 죽음을 비장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증언에서 판타지로, 잔여에서 초월로, 운명의 피해자에서 운명의 대결자로, 치유에서 복수로, 이야기 소재에서 이야기하는 자로, 진부하고 교환가능한 피해자의 이야기에서 단독자 영웅의 극적인 이야기로(“인순은 반복되는 지루한 이야기를 참을 수 없었다”) 이동한다. 그러는 동안 영화는 다큐멘터리와 극영화 그리고 미술, 연극, 영화, 연구조사 등의 미학형식을 오고 간다. 혼란스러운 비연대기적 기억은 환상성 속에서 예민한 실재적 감각으로 살아나며 재현 불가능한 것을 재현 가능하도록 만든다. 영화는 더 나아가 기존 페미니즘 미학에서 금기시되어왔던 것을 가시화하는 전략을 취한다. 페미니즘 미학은 잘 들리지 않고 주변화 되어온 존재 양식을 재현하기 위해 유령, 잔여, 지나간 역사, 재현불가능한 트라우마의 미학을 고안해 왔다. 하지만 이러한 미학적 형식은 반복되면서 때때로 매너리즘에 빠져 그 현존과 물질성이 의도치 않게 지워지기도 했다. 박인순은 여기서 스스로를 통제되지 않고 비규범적이며 제멋대로 구는(unruly) 자신의 신체성을 스펙터클로 내어준다. 카메라는 구석구석 꼼꼼히 씻어 내려가는 목욕하는 나체를 촬영한다. 그 몸은 적당히 살집과 주름이 있어 그 물질성을 묵직하게 감각하게 한다. 성판매를 하며 돈을 벌었던 몸이기도 하다. 박인순의 몸은 단순히 고통과 피해의 증거나 온갖 말들의 전장을 넘어서 팔을 크게 움직이며 동네를 휘젓고 성큼성큼 걸어 다니고, 그림을 그리고, 돈을 벌고, 목욕하는 몸이다. 그것은 더 이상 부인할 수 없는 신체적 현존이다. 유령들은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고 과거부터 현재까지 지속된 것 혹은 침전 중인 것이다. 그런 이유로 유령과 저승사자들도 어떤 효과도 없이 뻔뻔하게 보통 인간과 다를 바 없이 표현되고 구분 없이 돌아다닌다. 심지어 동네 여자들은 저승사자에게 쫓기는 옛 친구를 숨겨주기까지 한다.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는 미군에게 끔찍하게 살해된 윤금이의 살인 현장 사진을 사용한다. 미국의 식민주의를 비판하고 분노를 야기하기 위한 수단으로 진보진영은 한때 윤금이 살인 현장 사진을 공론장에서 사용해왔다. 페미니스트들은 이 사진의 사용은 여성의 피해사실을 선정적 스펙터클로 전시하는 2차 가해라고 비판해왔다. 그것은 타당한 비판이었고 페미니스트 예술은 피해 사진을 스펙터클화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해왔다. 그러나 이 영화는 거꾸로 그 사진을 스크린에 가시화하며 기존의 관점에 도전한다. 여전히 정치적이고 미학적인 판단에 있어 혼란스러운 측면이 있음에도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에서 한국 페미니스트 예술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 사진의 사용은 고통의 전시가 아닌 이미지 정보 과잉의 시대에 거꾸로 그 여성의 고통의 대면과 물질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결말에서 박인순은 마침내 죽음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저승사자와 대적한다. 신체성의 감각이 첨예화되는 이 장면은 그로테스크와 어이없는 코믹함이 혼란스럽게 뒤섞인다. 촛불이 쭉 늘어선 동굴의 연극적인 미장센을 배경으로 “아무도 널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며 “죽어라”라고 명령하는 저승사자에게 박인순은 기합소리 뒤에 갑자기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인공적인 기이한 웃음소리를 낸다. 그것은 시원하게 터트리는 통쾌한 웃음도 아니도 그렇다고 소리 없는 비웃음도 아니다. 출처도 알 수 없고 누구의 것인지도 알기 어려운 웃음, 입에서 나오는 것인지도 의문인 웃음이다. 잌히히히, 앜하하—아앜알, 잌히히키키알앜흐으, 으흐크아하하크오호호. 그러자 화면 밖에서 다른 여자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박인순과 윤금이와 그녀의 동료들이 웃고 운다. 그것은 신체들을 깨우는 오염성 짙은 통제할 수 없고 비규범적이며 제멋대로이고 즉흥적인 웃음이다. 으흐흑아하학, 아하하흑, 이이킥이익. 때로는 울음소리, 분노의 비명소리와 구분되지 않는다. 캐스린 로위는 『제멋대로인 여자: 젠더와 웃음의 장르』(1995)에서 뤼스 이리가레이와 엘렌 시수를 경유해 미하엘 바흐친이 그로테스크의 예시로 든 ‘망령 나서 웃고 있는 임신한 노파 조각상’을 재해석한다. 노파는 왜 웃었을까? 로위는 노파는 공공장소에서 자신의 몸을 “부적절하게” 노출시켜 “그들 자신을 스스로 스펙터클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라는 오래된 금기를 파괴한다고 말한다. 그 웃음은 소수 집단의 기존 권위와 체제를 향한 분노이다. 그 웃음은 기존의 권위와 체제를 위반하며 공간을 자기들의 방식으로 점유하고 신체들을 재배치한다. 그것은 천진난만한 때 묻지 않은 웃음이나 남자들에게 반응해주는 수동적인 웃음과는 다르다. 그녀들의 웃음은 “카니발적인 사회적 실천”이며 자기를 향한 응시를 함께 웃을 수 없는 상대방에게 돌려버리는 공격의 웃음이다. 그로테스크한 웃음으로 체제들을 무너트린 박인순에 대해 내레이터는 말한다. “여자는 혼자 영화관에 가는 것을 좋아했다. 어둠속에서는 누구도 그녀를 알아보고 창녀라고 손가락질하지 않아 좋았다. 모두가 거대한 환영을 바라보기 시작하면 자신도 사람들 중 일부가 된 것 같아 그제야 편안히 쉴 수 있었다.” 그렇게 그녀는 스스로를 이야기이자 스펙터클로 만들며 사각의 프레임 속으로 들어가 영화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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