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사노바
- 감독
- 페데리코 펠리니
- 제작년도
- 1976
- 출연
- 도날드 서덜랜드, 티나 오몽, 클라라 아그란티, 시슬리 브라운, 다니엘라 가티, 마가렛 클레멘티
난 그런 거 몰라요 아무 것도 몰라요 괜히 겁이 나네요 그런 말 하지 말아요 난 정말 몰라요 들어보긴 했어요 가슴이 떨려 오네요 그런 말 하지 말아요 난 지금 어려요 열아홉 살인걸요 화장도 할 줄 몰라요 사랑이랑 처음이어요 웬일인지 몰라요 가까이 오지 말아요 떨어져 얘기해요 얼굴이 뜨거워져요 엄마가 화낼 거에요 하지만 듣고 싶네요 사랑이란 그 말이 싫지만은 않네요 - <나는 열아홉살이에요>: 윤시내 노래, 이장희 작곡: < 별들의 고향 >(이장호, 1974)의 주제가 한국영화의 여성상은 참으로 많은 부침을 겪었다. 감히 시대에 앞선 욕망을 추구하는 여자는 처참히 몰락해야 했으며 *주1 산업화가 이루어지는 7-80년대의 도시에서 순진무구하나 배운 것 없는 소녀는 기필코 사창가로 전락했다. 90년대 이후, 새로운 서사로 한국전쟁을 그려낸 수작들에는 발달장애가 있는 여성들이 단골로 등장한다. 머리에 꽃을 달고 마을을 내달리는 그녀들은 동화 같은 공동체에 폭력이 소개되는 순간, 가장 먼저 죽어야 하는 탄광의 카나리아들이다. *주2 이 중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누린 여성상은 단연코, 몰락하여 사창가로 들어가는 여성들이다. < 영자의 전성시대 >(김호선, 1975), <별들의 고향>을 필두로 가히 하나의 장르로 자리잡은 7-80년대의 “호스티스 멜로” 영화들. 한국만큼 순수한 여성의 추락 서사에 집착하는 나라가 또 있을까. 비비안 리를 주인공으로 한 < 애수 >(Waterloo Bridge, 마빈 르로이, 1940)가 한국에서만 유독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한국에서 <애수>는 < 벤허 >(윌리엄 와일러, 1959)나 < 아라비아의 로렌스 >(데이빗 린, 1962)만큼이나 “주말의 명화”의 단골 레퍼토리였다. 그러나 정작 영어권에서 이 영화를 본 사람은 한국영화를 연구하는 사람들 외에는 단 한 명도 만나보지 못했다. 파란 눈의 동료교수들은 유독 한국에서만 주목받은 이 영화가 도대체 어떤 내용이냐고 내게 묻는다. <별들의 고향> 중 거울 앞에서 기도하는 경아 20세기 한국영화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죄목은 대개 둘 중 하나다. 너무 많이 알거나, 혹은 너무 모르거나. 아는 여성은 많이 아는 죄로 응징을 당하고, 모르는 여성은 배운 것 없는 무식의 죄로 몰락한다. <별들의 고향>에서 “난 그런 거 몰라요, 아무것도 몰라요, 엄마가 화낼 거예요”라고 노래하는 천진난만한 경아( 안인숙 )의 죄는 아무것도 모름, 즉 순진함이다. 너무 순진해서 신마저도 그녀를 버린다. 여관으로 끌려가 반 강제적 성관계를 하기 전, 필요한 것은 콘돔과 녹음기, 변호사였겠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경아는 거울 앞에 서서 기도하는 것으로 이 모두를 대신한다. “저를 행복하게 해 주소서, (이 남자가) 저를 버리지 않게 해주소서”라고 화장실에서 기도한 그녀의 간절함은 어디에도 가 닿지 않았다. 당연하다. 이 모든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 자신의 잘못이다. 세상은 그 사실을 경아에게 끊임없이 주지시킨다. 스스로에게 타락한 여자라는 굴레를 씌우고 죄의식과 수치심의 선악과를 베어 문 여자의 추락은 끝이 없고, 그런 그녀를 놓아두고 세상은 세상의 질서대로 묵묵히 발전해 나갈 뿐이다. < 가여운 것들 >(요르고스 란티모스, 2023)을 보는 내내 윤시내가 청순하고 앳된 목소리로 데뷔 전 부른 <별들의 고향>의 주제가가 내 머릿속에 울려 퍼진 것은 그래서였을 것이다. 메리 셸리적인 *주3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죽은 모체의 몸에 모체의 태내에 있던 태아의 두뇌를 장착한 벨라(엠마 스톤)는, 두뇌는 아기이나 몸은 성인 여성이다. 경아의 후예로 21세기의 한국에 등장한 베이글녀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얼굴은 해맑은 어린이이되 몸은 글래머인 성인 여성 -- 베이비와 글래머를 합성한, 어원부터 심상치 않은 포스트휴먼 냄새를 물씬 풍기는 여성상. 걷는 것조차 서툴던 벨라는 외부의 자극에 명민하게 반응하며 구강기-항문기-성기기를 꼭꼭 다지며 (두뇌만) 알차게 성장하여 끝없는 성욕을 가진,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아름다운 여성이 된다. 여기까지는 이성애자 남성의 편의대로 주물(鑄物) 할 수 있는 완벽한 대상으로 보인다. <가여운 것들> 포스터 하지만, 그녀에게는 기억과 트라우마가 없다는 반전이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은 맞지만, 그런 무지로 인해 일어나는 각종 사고와 사건들은 그저 재미있는 삶의 경험일 뿐, 벨라에게 죄의식이나 수치심을 주입하지 않는다. 수치심과 죄의식에 태생적 면역을 가지고 있는 벨라의 모습은 유아성욕의 묘사에서 첨예하게 드러난다. 마치 곤충의 다리를 하나씩 절단하며 관찰하는 어린아이의 천진한 호기심처럼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벨라의 성욕은, 최은미의 단편소설 「라라네」(2015, 『목련정전』, 문학과 지성사)에 등장하는 긴머리의 소녀 라라를 닮았다. 최은미의 소설 속 라라는 애정결핍으로 끊임없이 자위행위를 하고, 그의 엄마는 저주에 가까운 말로 겨우 유치원생에 불과한 라라에게 수치심과 죄의식을 주입한다. 그러나 벨라에게는 그렇게 할 엄마도 없다. 그녀를 저지하는 것은 “벨라 백스터”라는 의학적 프로젝트의 성장을 기록하기 위해 고용되었지만 후에 그녀와 사랑에 빠지고 약혼자가 되는 맥스(라미 유세프) 뿐이다. 그는 단호하고 진지하게, 남들 앞에서 자위행위를 하는 것은 예의바르지 못한(not polite) 행동이라고 훈육한다. 벨라에게 사회 속에서의 예의라는 개념은 이렇게 처음 뿌리를 내린다. 자신이 내키는 대로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경계를 억압이 아닌 타인에 대한 배려, 예의라는 개념으로 배운 셈이다. 이후 벨라의 삶은 어떤 상황에서도 스스로를 단죄하지 않고, 과거에 얽매이지 않는 여성이 나아갈 수 있는 길의 극한을 보여준다. 집과 실험실 밖의 세상을 보여주겠다는 뻔한 거짓말로 자신을 유혹하는 던컨(마크 러팔로)의 속마음을 알면서도 벨라는 그의 리스본 여행 제안을 받아들인다. 지능발달로만 보면 엄연히 어린 아이인 그녀와 “성난 점핑(furious jumping)”이라고 명명되는 섹스를 질펀하게 즐기는 이 관계는 그러나 착취로 귀결되지 않는다. 한계치를 벗어나는 그녀의 욕망을 채우지 못하는 것은 던컨 쪽이며, 무료해진 벨라는 휴식을 취하는 그를 혼자 놓아두고 표표히 외출을 감행한다. 식음료의 냄새와 맛, 도시의 강렬한 비주얼과 소음 등, 오감을 자극하는 세계를 하나씩 맛보며 벨라의 두뇌는 유아기와 소년기의 모든 징후를 짧은 시간 안에 축약적으로 드러내며 성장한다. 바야흐로 청년기를 맞은 그녀의 두뇌는 어느 순간, 성욕을 지식에 대한 욕구로 환원시킨다. 책 읽는 것을 “성난 점핑”보다 좋아하게 된 그녀에게 던컨은 불만을 토로하지만 그녀의 지식에 대한 갈망은 이미 발사된 로케트처럼 궤도를 착실히 따르며 더 큰 우주로 나갈 뿐이다. 유람선에서 만나 벨라의 짧은 생에 처음으로 친구가 되어 주는 정갈한 매너의 청년 해리(제러드 카마이클)는 그런 그녀의 호기심에 촉매제 역할을 한다. 해리의 손에 이끌려 배에서 내려 난생처음으로 세상의 부조리와 불평등을 본 그녀는 연민이라는 감정에 휩싸여 역시 난생처음으로 번민을 맛본다. 유람선의 카지노에서 번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그녀의 행위는 세상을 근원적으로 바꿀 수 없는 낭만적이고 어리석은 행위일지언정, 그 진정성을 의심받을 수는 없다. 그러나 벨라의 철없는 자선행위는 던컨과 그녀를 파산으로 내몰고 둘은 호화 유람선에서 내쫓기고 만다. 어찌어찌 파리에 도달한 두 사람은 자산도 생산수단도 없이 살아남아야 한다. 자본주의에 정면으로 도전해야 하는 이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벨라의 “선택”은 유일한 생산수단인 자신의 몸을 이용하는 것이다. 선택이란 참으로 희한한 단어이다. 소녀에서 여인으로 발돋움하는 젊은 여성에게 선택이란 단어는 대학에 진학하거나, 결혼을 하거나, 유학을 가거나, 가업을 잇거나, 직장을 갖거나 하는, 동등한 비중의 장단점을 가진 옵션들 중 개인이 자신의 가치관에 맞추어 고르는 것이다. 거리에서 굶어 죽는 것과 매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것은 선택이 아니다. 어떤 자살은 타살이듯, 이미 더러워진 몸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매춘밖에 없다는 가스라이팅을 당한 젊은 여성이 스스로의 삶을 놓아버리는 결과인 매춘 행위를 “선택”이라고 명명할 수는 없다. 이렇게 사용된 선택이란 단어는 고장 난 시스템에 면죄부를 주고 개인에게는 가장 큰 폭력이 된다. 인권이 부재한 경제개발이라는 한국사회의 고장 난 시스템 안에서, 경아에게도 영자에게도 매춘은 결코 자발적 “선택”이 아니었으며 암묵적 합의에 의해 일어나고 방관되는 사회적 폭력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벨라는 이 사회적 폭력마저도 스스로 선택한 삶의 실험으로 만들어버린다. 자발적 성매매라는 위험천만하고 논쟁적인 설정은 관객들의 반감을 사기도 하고, 그녀의 실험적 태도를 입증하기 위해 그렇게 많은 정사씬이 필요했을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이 모든 상황의 중심에는 삶의 권태와 자신의 성적 판타지를 충족시키기 위해 자발적 성매매자가 되는 벨드쥬르, 세브린느 *주4 처럼 자신의 삶에 대한 멈출 수 없는 벨라의 실존적 갈증이 있다. 이처럼 벨라의 실험은 극한으로 치달으며, 삶은 또 다른 국면을 맞는다. 같은 직장에서 일하는 성노동자 뚜와넷(수지 벰바)의 이끌림으로 사회주의를 접하며 자신의 고민들을 단순한 낭만적 연민 이상의 의식(意識)으로 쌓아나가는 것이다. 휴일을 이용해 사회주의 전당대회에 나가는 그녀들 앞에 런던으로 돌아간 줄 믿었던 던컨이 다시 나타난다. 벨라에게 청혼을 거부당한 던컨이 창녀라고 소리 지르자 뚜와넷은 자신들은 “자립적인 생산수단을 가진 자”라고 친절히 정정해준다. 사실 이 모든 모험의 연대기와 별도로, 벨라는 이미 맥스와 약혼한 사이며 그 사실에 나름 놀랍도록 충실하다. 이미 알고 있는 던컨과의 관계는 물론, 매춘 경험에 대해 담담하고 정직하게 약혼자에게 이야기 하는 벨라를 맥스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세상에 대한 무조건적인 관용을 가진 벨라가 동등한 관용으로 보답 받는 셈이다. 두 사람의 결혼식 장면은 영화의 다른 장면들에 비해 덜 선정적이지만, 주체적 선택권을 가진 여성이라는 벨라의 면모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아름다운 순백의 드레스를 입고 아버지 갓윈(윌렘 데포)의 손을 잡고 식장에 들어간 벨라는, 던컨이 데리고 온 처음 보는 남자에게 결혼을 저지당한다. 자신의 육체에 다른 사람(어머니)의 두뇌가 들어있을 때 함께 살던, 일종의 전남편, 알피(크리스토퍼 애봇)다. 솟구치는 호기심 반, 모호한 책임감 반으로, 벨라는 아버지와 약혼자의 만류를 무릅쓰고 알피를 따라간다. <별들의 고향>에서 정신적/신체적 건강을 잃고 상품성을 잃어버린 경아의 존재는 두 남자 사이에서 물건처럼 떠넘겨 지지만(버거우니 당신이 대신 좀 맡아주시오), 벨라는 자신을 추종하는 남성들 사이를 스스로 선택하며 자유롭게 횡단하는 것이다. 더 이상 매춘조차 할 수 없는 경아가 수면제를 먹고 눈밭에서 동사한다는 설정으로, 한 인간의 영혼과 육신의 완전한 파괴로 마감되는 근현대 여성잔혹사 <별들의 고향>과 달리, <가여운 것들>에서 파괴되는 것은 벨라를 착취하려 했던 남성들뿐이다. 희대의 카사노바 던컨은 그녀를 성적으로 착취하려 했지만 그녀에 대한 집착으로 스스로 파괴되고, 할례수술을 통해 벨라를 자신의 자손을 생산하는 자궁으로 축소하려 했던 알피는 염소의 두뇌를 갖게 된다. 인류의 역사 속 너무나 오랫동안 여성상의 두 축을 이루었던 창녀와 어머니라는 전형성은 이렇게 산산조각 난다. “아무것도 모르는 너의 잘못”이라는 가스라이팅에서 살아남은 벨라는 이렇게 자신의 삶을 오롯이 받아들이고, 즐기고, 도전하고, 성취한다. 세상의 부조리와 자신을 착취하려는 주변인물들을 가뿐히 넘어서며 자신의 세계를 확장해 나가는 그녀의 비밀은 무엇일까? 죄의식과 수치심이 없는 그녀에게는 맥스에게 교육받은 “예의”와, 해리를 통해 깨닫게 된 세상의 불행에 대한 “연민”이 있다. 맥스는 예의 바른 사람이지만 경계를 넘어선 세상을 꿈꾸는 상상력이 부족하고, 해리는 세계의 모순을 설명하는 일관되고 세련된 언어를 가지고 있지만, 결국 “세상을 두려워하는 소년”일 뿐이다. 반면 벨라는 자신과 타인에 대한 무모하고 무조건적인 관용을 지닌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과학실험의 대상으로 자신을 탄생시킨 아버지를 용서하게 만들고, 세상의 부조리와 폭력에 저항하는 사람으로 그녀를 성장시킨다. 그녀는 오직 자신의 본능에 따라 행동할 뿐이지만, 자아와 타자를 아우르는 자유에 이르는 길은 어쩌면 벨라처럼 인간에 대한 예의와 연민이라는 두 대의 등대를 따라서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느긋한 오후,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칵테일을 마시며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해부학 공부를 하는 벨라. 그녀가 “아무것도 모르는” 소녀의 노래를 다시 부른다면 이런 가사가 나올 것이다. 난 그런 거 몰라요 아무 것도 몰라요 괜히 신이 나네요 그런 말 더 해 주세요 난 정말 알고 싶어요 더 배우고 싶어요 심장이 세게 뛰네요 그런 말 더 해 주세요 난 지금 어려요 열아홉 살인걸요 화장은 필요 없어요 이 모든 게 처음이예요 웬일인지 몰라요 가까이 와 주세요 더 만지며 얘기해요 온몸이 뜨거워져요 엄마는 죽고 없어요 뭐든지 알고 싶어요 사랑이란 그 말도 가끔은 재미지네요 <별들의 고향> 중 경아와 <가여운 것들> 중 벨라 다시 경아의 세상으로 돌아가보자. 벨라가 경아처럼 대한민국의 70년대를 살아갔다면 어떨까? 일찌감치 데이트 살해를 당해 세상에서 사라지는 위험만 넘어설 수 있다면 경계가 없는 꿈을 꾸는 큰사람이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아, 아니다. 정신병동에 감금되거나 감옥에서 평생을 살아야 하는 경우의 수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사회는 이 모든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너의 잘못이라고 끝없이 세뇌했을 것이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벨라를 산산이 부수어 뜨리는 것으로 응징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벨라의 존재는 그레이의 소설과 란티모스의 영화 속에서나 이루어질 수 있는 터무니없는 꿈이고 동화라고 말해도 좋다. 하지만. 이미지는, 언어는, 아직 도달하지 못한 현상(現象 phenomonon)일 뿐이다. 벨라의 말처럼,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입증하기 전까지 지구는 평평했고, 전기가 발견되기 전까지 세상은 어두웠다. “그것이 다다르기 전까지 세상은 그 이전의 상태가 영원할 것이라 믿었다.” 그녀의 언어는 도발이 아닌 혁명이다. 주1. < 하녀 >(김기영, 1960), < 자유부인 >(한형모, 1956) 등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주2. < 그 섬에 가고싶다 >(박광수, 1993), < 웰컴 투 동막골 >(박광현, 2005) 등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주3. 최초의 SF작가로 인정받는 영국의 여성 작가. <가여운 것들>은 메리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의 여성주의적 해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더 흥미로운 것은 『프랑켄슈타인』의 설정과 제재는 물론, 작가인 메리 셸리의 삶의 궤적까지도 <가여운 것들>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메리 셸리의 결혼 전 성(姓)은 메리 갓윈 Godwin이다. 갓윈은 영화 속에서 벨라 아버지의 이름(first name)으로 차용 되고, 벨라는 그를 갓(God)이라는 애칭으로 부른다. 실제로 당대의 진보적 정치사상가였던 메리의 아버지 윌리암 갓윈은 일찌감치 어머니를 여읜 딸에게 당시 여성으로 받기 힘든 양질의 교육을 선사했다. 교육을 위해 딸을 급진주의 사상가 친구 집에 보내기도 하는데, 그 친구의 성(姓)이 영화 속 벨라의 성(姓)인 백스터(Baxter)이다. 메리는 백스터의 집에서 그의 네 딸들과 자매처럼 지내며 작가로서의 감수성을 발전시킨다. 메리 갓윈은 이후 아버지의 사상을 추종하는 유부남 퍼시 셸리와 사랑에 빠진다. 벨라처럼 도주하여 퍼시와의 유럽여행을 감행하는 메리 갓윈은 퍼시의 아내가 죽은 후 그와 결혼하여 마침내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 메리 셸리가 된다.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던 메리 셸리의 삶을 영화 속에서 찾아내는 것도 <가여운 것들>을 보는 큰 재미다. 주4. < 벨드쥬르(세브린느) >(Belle de Jour, 루이스 부뉴엘, 1967). 사랑하는 의사남편과 유복하고 여유로운 생활을 하는 세브린느는 완벽해 보이는 삶에도 불구하고 공허감을 이기지 못한다. 우연한 기회로 알게 된 고급 요정에서 남편의 근무시간인 낮에만 성매매를 하는 세브린느에게 마담은 벨드쥬르라는 애칭을 부여한다. 조세프 케셀의 동명 소설(Belle de Jour)을 원작으로 한, 논쟁적인 설정에도 불구하고 여성 주인공의 시선으로 이어지는 몽환적 서사와 부뉴엘 감독 특유의 아이러니와 검은 유머가 가득한 역작이다. 김진아 (UCLA 영화과 교수, 감독) l < 그 집앞 >(2003), < 두번째 사랑 >(2007), < 파이널 레시피 >(2013) 등 다섯 편의 장편영화와, 미군위안부3부작 < 동두천 >(2017), < 소요산 >(2021), < 아메리칸 타운 >(2023) 등을 연출. 미국 UCLA대학 교수로 시각예술의 재현 윤리, 초국가적 영화론을 가르치고 연구한다.
조선극장은 1922년 11월 6일 개관하여 1936년 6월 11일 화재로 소실되기까지 인사동 입구에 위치했던 영화관이다. 조선극장의 설립자는 명월관 지배인 황원균(黃源均)이다. 그는 3.1운동 직후인 1919년 11월, 독립운동 진영에 합류하기 위해 상해로 떠나려던 의친왕(義親王)의 행적을 일제경찰에 밀고하여 의친왕의 상해 망명을 좌절시킨 장본인이었다. 이 사건으로 경찰부장으로 승진한 치바 료(千葉了)는 의친왕의 행적을 제보하여 대동단(大同團) 단원들을 체포하는데 도움을 준 황원균에게 평소 바라던 극장 신설 허가를 내주었다. 뿐만 아니라 요코하마에 근거지를 둔 동양생명보험의 경성지사장 야자와 긴지로(矢澤近次郞)를 통해 극장 설립 자금까지 융통할 수 있게 도왔다. 황원균의 조선극장 설립 허가는 강점 이후 조선인에게 주어진 첫 번째 경우로 일제에 협력한 대가로 얻어낸 그 자체로 대단한 특혜였다. 황원균은 과거 연흥사가 있던 자리에 공사비 5만여원, 총비용 14만원으로 지상 3층 건물을 짓고 이름을 조선극장이라 정했다. 이렇게 완공된 조선극장은 총 8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으며 객석 내부에는 박스석을 설치하고 엘리베이터를 설비했으며 옥상에는 레스토랑까지 갖추었다. 1922년 11월 6일 개관된 조선극장에서는 개관공연으로 윤백남이 연출한 만파회의 <장발장>과 경성 다섯 권번 기생들의 공연, 명창 이동백의 독창, 그리고 몇 편의 서양영화가 상영되었다. 개관식이 있은 후 황원균은 쇼치쿠영화사, 다이카츠(大活, 大正活映)영화사와 특약을 맺어 프로그램을 충실히 하는데 애썼으며 서양영화 수입사를 운영하던 알렌상회에게 잠시 극장운영을 위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채권자인 요코하마 동양생명보험의 야자와는 개관 3개월 후부터 원금 상환을 독촉했고 원금을 상환할 수 없었던 황원균은 야자와에게 조선극장을 빼앗기게 된다. 야자와는 조선극장을 부동산회사인 도쿄건물회사에 매각한다. [자료] 조선극장 개관피로 광고(《동아일보》, 1922.11.7.) 도쿄건물회사가 소유하게 된 조선극장을 운영한 주체는 한때 황금관과 유락관을 경영한 바 있고 1923년 <춘향전>을 만들어 큰 성공을 거둔 하야가와 마쓰타로(早川增太郞)의 동아문화협회(東亞文化協會)였다. 동아문화협회에서는 1924년 7월 13일 내부공사를 마치고 조선극장을 활동사진관으로 활용하였다. 특히 하야가와는 그 사이 <비련의 곡>, <흥부놀부> 등을 제작하여 조선극장에서 상영하였다. 조선극장의 운영권을 인수한 하야가와는 1925년 9월 예전 자신이 운영했던 황금관의 운영권까지 획득하여 조선 내 두 군데의 영화관을 운영하는 수완을 보였다. 하지만 1920년대 중반 불어 닥친 극심한 불황과 1926년 실시된 「활동사진필름검열규칙」에 의거하여 부과된 검열수수료로 인한 경영난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여기에 건강까지 악화되자 하야가와는 결국 조선에서의 생활을 접고 일본으로 건너가 1928년 7월 30일 교토에서 사망했다. 1926년 9월부터 하야가와를 대신해 조선극장을 운영한 이는 변사 김조성(金肇盛)이었다. 그는 하야가와가 세운 동아문화협회에서 활동하면서 동아문화협회에서 제작한 영화 <춘향전>의 이도령으로 출연했던 인물로 조선극장 경영에서 물러난 하야가와를 대신해 조선극장을 맡았다. 그는 공격적인 영업으로 업계에 파장을 일으켰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자금 유용을 이유로 운영자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 1926년 12월에는 차영호(車泳鎬)가 조선극장의 새로운 운영자가 되었다. 상설관 운영 경험이 없던 그는 1927년 2월 나운규의 <풍운아>를 상영하면서 김조성을 주임변사로 다시 불러왔으며 1927년 6월에는 현철(玄哲)과 김영식(金榮植)을 공동경영자로 끌어들였다. 현철을 중심으로 잡지발간, 배우양성, 영화제작을 도모했지만 공동운영자들의 경영 미숙과 운영자와 관원들 사이의 갈등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성과 없이 문을 닫게 된다. 1927년 9월부터 조선극장은 주임변사 김조성이 이태진을 공동 경영자로 끌어들여 운영되었다. 단성사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안정적인 운영을 이어오던 조선극장은 1928년 12월 주임변사이자 공동경영자인 김조성이 필름 임대업자인 임수호에게 210원에 필름을 임대해 놓고 이태진에게 370원의 돈을 이중으로 받아 160원을 착복한 사건이 발각되면서 다시 복잡한 상황으로 빠지게 된다. 결국 조선극장은 문을 닫았고 이태진은 조선극장의 운영권을 안봉호에게 인계하였다. 안봉호는 1929년 8월 신용희를 지배인으로 두고 극장운영을 시작했는데 신용희는 기존의 영화 상영만 이루어지던 영화관에 재즈밴드단과 여성무용단을 조직하고 영화상영 사이에 레뷰 공연을 넣어 다른 영화관이 갖지 못한 경쟁력을 갖추려 노력했다. 하지만 조선극장에서 제작하던 영화 <젊은이의 노래>에 대해 악단장 윤창순이 저작권을 위배했다며 항의하는 사건이 발생한 후 조선극장 측에서는 악단을 해산하고 레코드로 반주를 하게 된다. [자료] 화재를 당한 조선극장(《동아일보》, 1936.06.12.) 신용희가 지배인으로 영업을 책임진 이후 조선극장은 점차 안정을 찾아 갔다. 이에 따라 1931년 7월 조선극장을 중심으로 자본금 8만원의 조선흥행주식회사가 설립된다. 사장은 정완규, 전무취체역 전현국, 상무취체역 신용희, 정은규, 취체역 정현성, 김찬영, 감사역으로는 정현용이 선임되었다. 조선흥행주식회사는 최신의 토키설비를 구비하고 고급의 토키영화를 상영하여, 조선극장은 일명 토키영화의 전당이라 불리게 된다. 하지만 조선흥행주식회사 간부들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여 급기야 1932년 10월 조선흥행주식회사가 극장 지배인 신용희를 해고해버리는 사태가 발생한다. 그러자 건물주인 도쿄건물회사에서는 신용희와 계약한 흥행권만을 인정한다며 극장사용을 중지해 버렸고 조선흥행주식회사는 조선극장에 설치한 토키 설비를 뜯어 단성사로 옮겨 영화상영을 계속하였다. 1932년 12월부터 기신양행의 김찬영과 손잡은 신용희가 조선극장을 운영하게 된다. 운영자 김찬영, 지배인 신용희 체제에서 조선극장은 김찬영이 소유한 영화배급회사 기신양행을 통해 안정적으로 필름을 공급받았다. 하지만 비싼 토키필름 가격에 비해 줄어든 관객으로 인해 극장 경영은 어려움이 많았다. 이때 신용희는 서울무대라는 극단을 조직하여 프로그램의 일부를 연극으로 채울 생각을 하였다. 1933년 조선극장의 추석 프로그램에서 공연된 서울무대의 <등대>에서 배우가 대본에 없는 대사를 했다는 이유로 공연이 정지되었고 관객들이 항의하는 일명 조선극장사태가 발생했다. 이 사건의 배경은 임석경관의 횡포에 변사 성동호가 상부에 투서함으로써 발생한 것이었다. 결국 변사 성동호가 구속되면서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김찬영과 신용희 체제의 조선극장은 결국 1934년 12월 김찬영이 영화업에 손을 떼면서 끝나고 만다. 1934년 12월, 종로 5가에 위치한 제일극장 소유자 미나토 큐기치(港谷久吉)가 조선극장의 소유권과 흥행권 일체를 약 10만원의 자금을 들여 인수하게 된다. 새로운 경영자의 등장으로 기존 조선극장 관원들이 구조조정의 대상이 될 것을 염려하자 경기도 경찰부에서는 이들의 고용을 유지하라고 권고하여 대부분의 관원들이 그대로 극장운영을 이어갔다. 하지만 미나토 큐기치가 운영하던 조선극장은 1936년 6월 11일 방화로 전소되어 이후 복구되지 못했다. 조선극장은 잦은 운영자 교체로 인해 경영이 불안했음에도 불구하고 극장을 운영하던 이들 대부분이 서양영화의 배급사와 직간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기에 “서양영화의 전당”이라 불릴 정도로 호평을 받았다. 특히 조선인극장과 일본인극장을 통틀어 조선극장은 단성사와 더불어 서울에서 서양영화를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장소로 인식되었을 뿐만 아니라 신극운동의 효시라 할 수 있는 토월회의 공연이 개최되면서 한국연극운동에 있어서도 중요한 장소로 기록되고 있다. 참고문헌 《동아일보》, 《매일신보》, 《조선중앙일보》, 《중외일보》 이승희, 「조선극장의 스캔들과 극장의 정치경제학」, 『대동문화연구』 72호, 2010. * [사진](상단) 조선극장 낙성 광고(《매일신보》, 1922.11.03) [자료] 《 매일신보 》 , 1922.11.7. 조선극장의 개관식 , 작일 오후 ᄒᆞᆫ시부터 셩대하게 거ᄒᆡᆼᄒᆡᆺ다 이번에 셔로 건츅한 부내 인사동 됴션극장 ( 朝鮮劇場 ) 은 예뎡한 바와 갓치 작 륙일 오후 한시부터 동 극쟝에서 ᄀᆡ관식을 거ᄒᆡᆼ하엿ᄂᆞᆫ바 인사동 드러가ᄂᆞᆫ 어구로브터 극장ᄭᆞ지ᄂᆞᆫ 만국긔와 오ᄉᆡᆨ긔며 뎐등으로 챤란하게 장식하엿고 극장 안에는 칠ᄇᆡᆨ여명의 ᄅᆡ빈이 상하층에 가득하였더라 . 관쥬 황원균 ( 黃元均 ) 씨의 ᄀᆡ관식사와 여러 변사와 극가의 예슐과 극장에 대한 말이 잇셧고 그 후에ᄂᆞᆫ 경셩 오번권 기ᄉᆡᆼ의 가무와 밋 셔양츔이며 현대 일류 명창 리동ᄇᆡᆨ ( 李東伯 ) 의 독창과 현대극계의 권위인 만파회 ( 萬波會 ) 의 신극 츌연이 잇엇고 계속하야 활동사진을 영사하야 ᄅᆡ빈의 이목을 즐겁게 하고 동 오후 네시에 폐회하얏ᄂᆞᆫ대 ᄅᆡ빈에게는 기념품까지 쥬엇는바 극쟝에 장관스러운 설비와 챤란한 쟝치ᄂᆞᆫ 조션에 쳐음이라 하겟다더라 . [자료] 《 매일신보 》 , 1922.11.7. 신축낙성 ( 新築洛城 ) 當 本月 六日 개장 ( 開場 ) … 프로그람 … ◎ 경성 오권번 ( 五券番 ) 의 가무 음곡 ( 音曲 ) 급 ( 及 ) 서양댄스 ◎ 일류 명우 ( 名優 ) 이동백 ( 李東伯 ) 군의 독창 ◎ 현대극계의 권위 만파회 ( 萬波會 ) 의 출연 ◎ 태서 ( 泰西 ) 저명한 고급 활동사진 이상 반도 유수 ( 半島 有數 ) 의 대극장 조선극장의 개장 경성부 인사동 전화 本局 三六二 ○番 [자료] 《 중외일보 》 , 1926.12.19. 영화 · 연예 《 나는 영웅이다 》 ( 全七卷 ) 조선극장 (18 日 봉절 ) ◇ 원명 …… ᄲᅥᆼ커 - 대왕 ◇ 원작 …… 레온 윌손 씨 ◇ 감독 …… 하리 ᄲᅩ - 몬 씨 --- 캬스트 --- ◇ ᄲᅥᆼ커삔 …… 마트 무어 씨 ◇ ᄲᅳ리드 …… 죠지 니콜스 씨 ◇ 카사노바 부인 …… 노라 세실 양 ◇ ᄲᅡ사쟐 대선생 …… 푸랑크 레이 씨 --- 이하 략 ( 畧 ) --- 사람 좋은 《 ᄲᅥᆼ커삔 》 은 그의 동무들이 그를 가리켜 《 나폴레옹 》 의 재생이니 혹은 녯날 《 애급 》 나라의 임금의 후신이니 하야 가면서 놀리는 것도 모르고 그것이 정말인줄만 알고 가진 공상을 다하고 있었다 . × 그리하여 한번만 그 공상하는 병이 시작되기만 하면 그는 중대한 재긔 회사의 일도 돌아보지 않고 천금을 아끼지 않고서 《 미 - 라 》 를 사오고 ᄯᅩ 그 외에 무엇 무엇 쓸대업는 것을 구해다 노코서 공상을 하기에 가진 진기한 사건은 다음에서 다음으로 생긴다 . 그는 확실히 자긔가 영웅인 것이나 가티 생각하는 것이었다 . × 그러나 결국 그는 자긔 애인인 사장의 딸과 야구선수들의 도움에 의하여 간신이 본정신을 차리고 공상에서 ᄭᅢ어서 견실한 생활을 하기에 이르렀다하는 것이 이 재미있고 우스운 사진의 이야기입니다 . ( 사진은 《 나는 영웅 》 의 한 장면 ) ◇ 조선극장 개관 일시 경영 곤란으로 폐관하였든 시내 인사동 조선극장은 다시 유지들의 활동으로 《 조선키네마회사 》 제공 《 풍운아 》 ( 風雲兒 )( 全 7 卷 ) 과 《 나는 영웅이다 》 ( 全 7 卷 ) 기타 희극 등 재미잇는 프로그램을 가지고 십팔일 밤부터 개관하게 되엇는데 료금 등은 종전과 같다더라 . [자료] 《 매일신보 》 , 1927.7.26. 조극개관기 ( 朝劇開館期 ) 아즉도 멀어 부내 인사동 ( 仁寺洞 ) 죠션극장 ( 朝鮮劇場 ) 은 지난 륙월 삼십일에 돌연히 폐관한 후 수십여명 관원ᄭᅡ지 젼부 해산을 식히고 경영자의 한사람인 현텰 ( 玄哲 ) 씨는 내지로 건너갓는대 그동안 관원들은 경영자 측에 대하야 휴관하여 잇는 동안에는 극장을 관원에게 빌려쥬워 관원의 손으로 당분간 영업을 계속하야써 관원의 생활을 보샹케 하여 달라하야 양방의 타협이 진행즁이더니 그것도 결국 파열되야 관원 일동의 ᄇᆡᆨ여명 식구는 목하 생활 곤난을 당하고 잇는 즁인바 동 극쟝은 ᄅᆡ월 십삼일경에나 이르러 젼 경영자의 경영 하에 개관될 모양이라더라 .
“주인공들이 너무 가여워요” 봉준호 , 임권택 을 생각하(면서 자기 영화들을 돌아보)다 이렇게 말을 꺼내들고 싶다. 봉준호 는 CJ가 아니다. 그와 똑같은 의미에서 봉준호는 홍상수 가 아니다. 어쩌면 이런 표현이 당신을 불편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게 읽었다면 당신은 내 의도를 오해한 것이다. 점점 CJ 영화를 보는 것은 마치 대중적 흥행을 염두에 두고 정교하게 (엉성하게?) 작성된 매뉴얼을 검토하는 일처럼 느껴진다. 홍상수 영화를 보는 일은 이야기를 만든 다음 그게 희미하게 보일 때까지 물러나서 남은 인상만을 가지고 엉성하게 (정교하게?) 그려낸 재빠른 스케치를 약간 아슬아슬하게 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봉준호가 영화 제작에 돌입할 때 장르를 다루는 것인지, 매뉴얼을 작성하는 것인지 약간 모호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종종 영화 앞에서 그가 만들어놓은 콘티가 영화를 보는 내게는 매뉴얼처럼 보일 때가 있다. 일사불란한 영화적인 기계 기호들의 운동. (< 살인의 추억 >) 일단 시작되면 멈추지 않을 것만 같은 쇼트들의 접합과 그 안의 변화. (< 설국열차 >) 그러나 그 도표는 대중적 흥행과 아무 관계가 없다. (< 마더 >) 이때 그의 매뉴얼은 그 자신의 매우 사적인 영화(歷)사의 (그 자신에게만) 명장면에 관한 다소 기형적인, 어쩌면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변태적으로 구부러트린 집합처럼 보인다. (< 괴물 >) 그게 일정한 순열로 놓여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안에 무언가 일정한 규칙에 따라 배열된 것처럼 보이는 리듬 사이에서 삑사리의 순간들이 섬광처럼 나타날 때마다 이 영화를 하나의 집합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라고 질문하고 싶게 만든다. 이상할 정도로 봉준호의 영화는 매번 그 안에 완전히 소속되지 않는 (그래서 여전히 설명하기 까다로운) 분리된 또 하나의 집합이 공존하고 있다. 그것이 둘 사이에서 교집합을 이루고 있지만 그렇게 연쇄망을 이루는 그 고리를 따라 가다보면 어떤 집합들은 중심과 완전히 공집합을 이룬 채 영화 안에서 마치 독립변수처럼 활동하는 쇼트를 만날 때가 있다. 그리고 이 잉여의 공집합은 잘 눈에 띄지 않은 채 조금씩 늘어가고 있다. 이를테면 <마더>에서의 나무. 아마도 21세기 한국영화에서 가장 불길하고 아름다운 나무. 이제 막 살인을 저지른 ‘마더’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저 홀로 서서 마치 우주의 복판에 서 있는 것만 같은 나무. 그 나무를 하나의 점으로 하여 이미지가 회전을 시작할 때 거기서 만들어지는 것은 사건을 기다리는 사건이라는 간접화법의 (미처 닫히지 않은) 원을 그려내는 운동이다. < 마더 > 그 다음. 홍상수 와의 대차대조표. 먼저 순열에 대해서 말해야 할 것이다. 종종 홍상수를 말하기 위해서 시간을 말하지만 그건 차라리 등식으로 이루어진 순열과 집합의 게임이다. 숫자가 매겨진 영화들. < 오! 수정 >, < 생활의 발견 >. 그리고 < 옥희의 영화 >. 만일 그것을 시간이라고 부른다면 오로지 그것은 영화를 보고 난 다음 당신의 머릿속에서 순열의 조립 과정을 따라 벌어진 거짓 운동일 것이다. 그 안에서 이제 어떻게 접느냐의 문제가 남는다. 무엇이 무엇에 속하는가. 그런 다음 그 안에서 정렬될 수 없는 변수들은 어떻게 셈할 것인가. 이번에는 더할 수 없이 마치 조각조각 찢어버리듯이 변수를 나누(고 나서 뒤섞)었다. < 자유의 언덕 >. 13개로 이루어진 편지. 나는 여기서 뒤섞는다기보다는 무언가 매번 고통스럽게 씬 사이를, 그 사이 안의 쇼트를, 찢어버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 다음 아마도 어떻게 셈하느냐에 따라 하나, 혹은 둘을 더하거나 뺄 수 있을 것이다. (다시 한 번 더) 그런 다음 거기서 잃어버린 편지 한 장을 셈해야 한다. 무엇이 무엇에 귀속되는가. 거기서 무엇이 무엇 앞에 있는가. 내 생각이 틀리지 않다면 홍상수가 (그 스스로의 예술적 스승이라고 부른) 세잔에게서 배운 것은 그 순간의 균형 감각이다. 순열 사이의 균형. 집합의 균형. 그 안의 정지 감각(의 균형). 그 어느 그림보다도 나는 세잔이 1890년에 시작해서 이 년간 매달린 두 점의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에서 그 배움을 본다. (이상할 정도로 홍상수가 사람을 세워놓을 때 이와 비슷해지는 것은 그저 우연일까) 그때 그것이 하나의 집합이 된다는 것 말고는 그 안의 대상들 사이의 운동을 분별하기 힘들어진다. 심지어 점점 그렇다. 그래서 희미해져가는 것을 누군가는 셈해보고 싶어 하지만 물론 그건 불가능하다. 그때 꿈은 유리한 알리바이이다. 반대로 봉준호 는 일단 시작하면 되돌아가는 법이 없다. 도미노처럼 처음 하나만 쓰러지면 갑자기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차례로 쓰러져간다. 마치 사연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처럼 시작하면 그저 앞으로만 나아간다. 하지만 이 운동이 괴상해지는 것은 그게 사방팔방으로 쓰러져나가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걸 붙잡으러 뛰어가는 인물의 동선조차 자기가 쫓아가는 게 누구인지 몰라 여기저기를 뒤지기만 할 뿐이다. 잃어버린 동선. (< 살인의 추억 >) 그래서 이상할 정도로 산만하게 보인다. 영화가 시작한 지 55분 만에 풍비박산 나듯이 흩어지는 가족들이라는 점들. 그 점이 만들어내는 동선. (< 괴물 >) 혹은 찾아갈수록 점점 자기가 붙잡으려는 대상으로부터 멀어진다. (< 마더 >) 심지어 모두가 한 열차에 타서 한쪽 방향으로만 나아갈 때조차 그렇다. (< 설국열차 >) 이때 그는 직선을 온갖 방법을 써서 곡선처럼 보이게 만들고 싶어 한다. 봉준호의 영화에서 진행되는 운동에 대한 가장 명징한 이미지는 직선으로 달려가는 열차가 철로를 따라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기 시작할 때 거의 절반처럼 거의 접히다시피 하면서 맞은 편 열차 칸에서 형 프랑코가 절반의 이쪽 칸의 남궁민수를 향해 총을 쏘는 장면이다. 직선 속의 곡선. 선들 사이에서 이루어진 유기체와도 같은 하나. 수많은 형태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결국 직선이다. 그런 다음 모든 것을 하나로 수렴하는 점. 개. 시체가 발견되었던 구멍, 괴물, ‘마더’. 엔진. 잠깐! < 설국열차 > 나는 빨리 임권택 에게로 돌아와야 한다. 원래의 자리. 처음 이 자리에 봉준호 를 초대했을 때 나는 둘 사이의 도표를 그리고 있었다. 물론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 그릴 것이다. 모든 영화감독(들)은 동시에 그가 이 자리에 오기까지의 영화(歷)사의 감독들이다. 그러므로 나는 두 개의 역사 사이의 교차로를 찾을 것이며, 그러는 동안 나를 따돌리고 그 사거리에서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시간이 매번 또 다른 교통의 질서를 만들어낼 것이다. 누군가는 거기서 옮겨 탈 것이며 또 누군가는 거기서 내릴 것이다. 영화는 그렇게 서로에게 이어질 것이다. 나는 여러 차례 임권택 감독님이 봉준호(의 서로 다른 영화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하지만 그건 사적인 자리에서 한 이야기들이다. 그러므로 그걸 구태여 여기서 이야기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나는 이번에는 반대로 듣고 싶었다. 물론 내가 여기서 청해 들으려는 것은 (그 뻔한) 의례적인 존경과 찬사가 아니다. 그 둘은 어디서 서로를 지나쳐 간 것일까. 우발적인 만남. 아마도 그 사이에 얽혀들게 될 한국영화사. 물론 봉준호의 주변에서 어른거리는 이름은 김기영 이다. 그 자신도 그렇게 (자주) 말을 했고 구태여 그 말을 빌리지 않아도 나는 < 마더 >를 보는 내내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하지만 더 자주 떠올린 것은 < 붉은 살의 >의 이마무라 쇼헤이였다) 나는 여기서 무리를 해가면서 임권택과 봉준호를 묶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가능한 일도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는 말할 수 있다. 이따금 임권택의 영화중의 무언가가 봉준호의 영화에서의 어떤 순간을 만져본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반대로 어디에선가 봉준호의 쇼트가 임권택의 어떤 영화의 장면에 대한 연인처럼 여겨질 때가 있었다. 이런 설명이 비평의 자리에서 바람직하지 않은 길 사이 바깥으로 빠져나간 이탈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게다가 몹시 위험한 자리에 들어섰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 가정을 더 밀고 나가고 싶다. 그런 다음 그 가운데서 무언가가 서로를 밀쳐낼 때 그 둘 사이에는 그것을, 말 그대로 그것을, 잠재운다는 인상이 남는다. 저기서 깨어있는 것이 여기서는 잠들고 있다. (내게 조금만 관용을 베풀어준다면) 나는 그걸 공존의 경제학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쪽에서 초과해버린 부분이 저쪽에서 부족하면서 겨우 균형을 맞춘 기묘한 교환. 마치 저쪽에서 그래버렸기 때문에 내 쪽에서는 이래도 괜찮아, 라고 그냥 긍(정해버렸다고 가)정된 거래. 하지만 이 비유적인 느낌을 내게 탓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 둘 사이에서 내가 느끼는 거리는 딱 그 정도에서 멈춰 섰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그것이 아직 서툴긴 하지만) 용기를 내어 21세기에 들어선 한국영화 안에서 선물의 경제학이라는 네트워크로 이루어진 모델을 제시해보고 싶다. 우리가 희망의 원리를 비평 담론에서 망설여야 할 어떤 이유가 있단 말인가. < 살인의 추억 > < 악의 손길 > 약간의 잡담. 봉준호 를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내게 누군가 말하기를 봉준호의 영화에는 그걸 의도한 게 아닌데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 어떤 장면에서 영화사의 한 순간에 대한 향수를 느껴보게 만들 때가 있어요, 라고 건드렸을 때 잠시 돌아본 적이 있었다. 영화 안에 있는 영화에 대한 기억. 그것이 이야기 안에서 아무런 기능을 하지 않으면서도 그 자체로 영화를 기묘하게 앞뒤로 오가게 만드는 장치가 된다. 그리고 이상할 정도로 봉준호를 설명하면서 왜 어떤 비평가도, 어떤 시네필들도 그런 희한한 운동에 대해서 건드리지 않는 것일까. 여기서 받는 감동은 마치 암호와도 같은 것이다. 하나의 예. 박두만 형사가 시체가 발견된 현장에서 범인의 흔적을 찾기 위해 논두렁 위아래를 오르내릴 때, 그 뒤를 따라 카메라가 뒤따라가는 긴 롱 테이크의 운동에서, 논둑길을 뛰어 올라와 발자국을 밟지 말라고 저 멀리 오는 경운기를 향해 사선으로 달려가는 장면에서(< 살인의 추억 >), 문득, 말 그대로 문득, 마크와 이제 막 결혼식을 끝내고 신혼여행을 온 수잔을 따라 카메라가 뉴멕시코의 작은 마을의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함께 만나고 헤어지면서 또 하나의 동선을 만들어내는 다이너마이트를 실은 캐딜락 오픈카를 어처구니없게도 떠올리면서(< 악의 손길 >), 롱 테이크에 감탄하는 대신 그 ‘럭셔리한’ 캐딜락이 ‘촌스럽기 짝이 없는’ 경운기로 바뀐 모습에서 깔깔 대고 웃는 극장 안의 그 누군가에게, 나도 지금 함께 극장에서 당신과 영화를 보고 있다는 공감을 가져보고 싶어진다. 우리들 사이의 웃음이라는 인사. 말하자면 그런 의미에서의 기록을 찾아보았다. 봉준호는 2012년 영국 영화잡지 사이트 앤 사운드(Sight & Sound)에서 앙케이트 한 ‘영화사상 탑 10 영화’에 응답했다. 이 잡지는 1952년부터 10년 단위로 앙케이트를 했고, 2002년부터는 비평가(와 학자, 문화이론가, 영화제 프로그래머)와 영화감독을 분리하였다. 그런 다음 2012년 9월호에 결과를 발표했다. 사이트 앤 사운드 편집진에 따르면 지구상에 활동하는 358명의 감독이 앙케이트에 응했으며, 그 중 100명을 잡지에 게재했고 전체 명단은 온 라인으로 발표했다. 봉준호의 명단은 알파벳 순서에 따라 63페이지에 실렸다. 별다른 설명은 없고 그저 짧게 “Ten films that the biggest impact on my own personal view of cinema”라고 명단 앞에 덧붙였다. 그런 다음 10편의 제목은 (순서대로) 다음과 같다. < 비정성시 >(후 샤오시엔), < 큐어 >(구로사와 기요시), < 하녀 >(김기영), < 파고 >(코엔 형제), < 싸이코 >(알프레드 힛치콕), < 성난 황소 >(마틴 스콜세지), < 악의 손길 >(오손 웰즈), < 복수는 우리가 한다 >(이마무라 쇼헤이), < 공포의 보수 >(앙리-조르주 클로조), < 조디악 >(데이빗 핀처). (물론 알파벳 순서이다) < 플란다스의 개 > < 괴물 > < 설국열차 > 이 명단에 기대어 봉준호 는 홀수의 영화가 있고 짝수의 영화가 있다고 다소 익살스럽게 말하고 싶어진다. 먼저 홀수의 영화. < 플란다스의 개 >와 < 괴물 >. 두 영화는 외양으로 볼 때 완전히 다른 것처럼 보인다. 그냥 간단하게 규모가 다르다. 누군가는 둘 사이의 차이를 먼저 지적하고 싶을지 모른다. 하지만 두 영화는 당신의 상상보다 훨씬 가깝게 있다. 무엇보다 개와 괴물. 그 둘은 어떻게 대상에 주인공들이 애절하게 가닿으려고 애를 쓰는지를 보여준 다음 거의, 아마도 거의, 그 근처에 다가갔을 때 비로소 그것이 실패한 목표라는 것을 깨닫는지에 대한 어처구니없는 상실감을 안겨준다. 그들 사이의 기기묘묘한 교환. 종종 봉준호의 슬로 모션에서 운동의 쾌감을 맛보는 대신 허우적거린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부정적인 운동의 고통을 바라보게 되는 것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많은 영화들이 증후에 시달리는 동안 봉준호는 충동의 계략을 꾸미는 중이다. 나는 < 설국열차 >를 보았을 때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열차는 어딘가를 향해서 가는 중이 아니다. 모두들 열차 맨 앞 칸에서 벌어진 일에 매달렸다. 그런 다음 뫼비우스의 순환에로 빠져들었다. 그때 봉준호는 아니오, 라고 대답한다. 여기서 목표는 열차의 맨 앞 칸이 아니라 열차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충동의 순환궤도를 멈추지 않고 빙빙 도는 것이 핵심이다. 빙빙 돈다는 것. 앞은 끝을 잡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끝은 앞의 힘으로 달아나는 중이다. 그러므로 <설국열차>의 마지막 장면에서 봉준호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환상을 붕괴시키는 순간 현실을 상실한다는 것이다. 패러독스의 세계. 여기서 봉준호는 마침내 영화와 만화가 하나가 되는 일체감을 맛보았을까. 물론 그걸 내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설국열차>보다 <괴물>이, <괴물>보다 <플란다스의 개>가 훨씬 만화에 가깝게 보인다. 만화라는 캐리커처의 예술. 여러 자리에서 봉준호는 자기가 얼마나 만화를 사랑하는지 공공연하게 선언하다시피 했다. 물론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말을 전적으로 믿지는 않는다. 차라리 이 말은 봉준호의 예술적 야심이 때로 영화가 가 닿을 수 없는 어떤 지점을 목표로 한 표현이 아닐까, 라는 의심을 품게 만든다. 영화의 블랙홀은 어디일까. 그때 만화는 어디에 있을까. 봉준호는 종종 영화만이 가능한 순간에 과도하게 집착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영화로는 불가능한 지점이 어디인지를 탐색한다. 이 암흑지점의 이미지를 만날 때 영화 안에서 비-영화를 엿보는 괴상한 순간과 만나게 된다. 그 순간 영화의 감각이 일시적으로 멈추고 때로 어떤 구조가 붕괴되는 것을 감지하게 된다. 여기서 봉준호는 현실을 고립시킨 다음 그 속에 불가능한 존재를 집어던졌을 때 사실들이 어떻게 견디고 부서져나가는지, 라는 사건을 만들고 싶어 한다. 아마도, 역시 아마도, (잠시 머뭇거린 다음 소리 내어 읽어주기 바란다) 그래서 봉준호의 웃음은 불길하다. 오고 가며 봉준호 를 여러 번 마주치기는 했지만 앉아서 작정을 하고 이야기를 나눈 것은 < 마더 >를 찍고 난 다음, 혹은 < 설국열차 >를 준비하고 있을 때 였다. (“봉준호는 지금 다시 시작 한다” _씨네21_800호_20110419/0426) 그때 (함께 씨네 산책을 진행하던) 허문영에게 봉준호에게서 결정적으로 우리가 질문해서 얻어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라고 그 자리가 시작되기 전에 묻자 슬그머니 웃으면서, 물론 (영화 속에서 날뛰는) 리비도의 비밀이지요, 라고 대답했다. 그 대답이 오랫동안 남았다. 그때 우리의 이야기는 <설국열차>에 모아졌고 영화는 그의 두뇌 속에서 이미 만들어진 상태였다. 그러므로 이야기는 다소 이상하게 진행됐다. 우리는 미처 보지 못한 영화에 대해서 하듯이 질문했고 봉준호는 마치 이미 만들어진 영화에 대해서 설명하듯이 대답했다. 이 신기한 불균형. 나는 이 대답 속에 가려져있는 정념의 신호들을 읽는다. 물론 만들어진 영화는 말하여진 영화와 차이가 있었다. 누군가는 그것만으로도 뇌의 영화와 퍼포먼스로서의 영화 사이에 놓인 간극에 관한 흥미로운 논의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미안하지만 나는 그런 문제에 관심이 없다. 오히려 그 둘을 하나로 합치는 대신 그 둘을 각자 존재하는 두 편의 영화라고 가정해볼 수는 없는 것일까. 좀 더 느슨하게 말해도 괜찮다면 두 대의 기차가 한 궤도 위에서 달리고 있다. 물론 지금 한 대는 눈 밭 위에 쓰러져있고 다른 한 대는 아직도 달리는 중이다. 그런 다음 좀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봉준호는 제작의 자리로 물러 난 다음 (< 살인의 추억 >에서 연출부를 한) 심성보 를 연출자로 내세운 < 해무 >를 제작했다. 물론 지금 많은 감독들이 영화를 제작하고 있다. <설국열차>는 박찬욱 이 제작한 영화이다. 그러나 이 영화를 봉준호의 공백이라고 부르기에는 어딘지 적절치 않은 회색의 베일이 그 앞에 드리워져 있다. 어떤 터치라는 문제. 봉준호의 터치. 나는 봉준호의 연출에 대해서 설명해야 할 때마다 이상하게 (어디선가, 텔레비전에서 했던) 이 대답이 떠오른다. 그 자신이 막 영화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난 다음 한동안 (그의 표현을 빌리면) ‘지리멸렬’하게 지낼 때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죠, 제가 찍은 결혼식 테이프를 갖고 계신 분도 계실 거예요, 근데 아마 모르실 거예요, 제가 찍고 편집한 지는, 잘 찍었어요, 게다가, 신부 엄마 울 때는 딱, 클로즈 업 들어가고, 절대 안 놓치죠, 그런 순간은, 주례사도 끊기면 안 되고, 또 우는 하객들 찍고, 신랑의 과거 여자친구 같아 보이는 사람 또 괜히 막 가까이 찍고(...)” 처음에는 그냥 시작했다. 그러면서 눈을 돌려 신부의 엄마가 흘리는 ‘눈물’을 “절대 안 놓칠”뿐만 아니라 클로즈업으로 다가가서 바라본다. 물론 주례사도 끊기면 안 된다. “우는 하객들” 그런데 여기는 장례식장이 아니다. 하객들이 왜 우는 것일까. 너무 기뻐서? 이건 두 사람의 몰락이니까? 슬퍼서? 무엇이 슬퍼서? 신부의 남자 친구도 여기에 와 있는 것은 아닐까? “신랑의 여자친구 같아 보이는 사람”을 그냥 찍는 게 아니라 “괜히 막 가까이 찍”을 때 봉준호는 이미 이 결혼식장에 관한 또 다른 시각적인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 중이다. 거기에 보이는 풍경. 풍경 속의 이면의 풍경. 이 결혼식장은 봉준호의 친구 혹은 선배의 결혼식장이 아니다. 심지어 지금 이건 이 비디오테이프를 봉준호가 찍었는지도 모르는 사람을 위한 아르바이트였다(고 한다). 그날 온 하객들은 봉준호가 그날 처음 본 사람들이다. 아니, 그날 결혼식을 올리는 신랑 신부를 처음 보았을 것이다. 이때 봉준호는 두 가지를 따라간다. 하나는 결혼식 장면의 법칙이고, 다른 하나는 그 법칙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음란한 외설적 이면의 얼룩이다. 그때 여기에는 봉준호의 원근법이 잘 설명되고 있다. 나는 진심으로 이 비디오테이프들이 보고 싶다. 그리고 할 수만 있으면 그의 필모그래피에 포함시키고 싶다. 말하자면 그런 의미에서 <해무>를 나는 비스듬히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 베일을 열어보는 것은 이 자리에서 할 일이 아니다. 물론 이 영화를 셈에 포함시키기는 했지만 나는 미스터리를 그냥 내버려두기로 하였다. 여기서는 방점을 옮겼다. 오늘 만나서 진행한 이 대화는 지난 대화의 속편이 아니다. 우리 둘 사이에서 나누고 싶었던 것은 임권택 이라는 영화를 어떻게 통과해갈 것인가, 라는 질문의 세션이다. 여기서는 질문을 서정적으로 만들 생각이 없다. 마찬가지로 나는 낭만적인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다. 단지 그 안에서 영화가 던진 체험을 어떻게 견디는지, 어떻게 즐기는지, 그 안에서의 참을성에 대해서 들어보고 싶었다. 참을성? 진정한 참을성. 그것은 매혹에 사로잡힌 우리들이 그 안에서 몸부림친 대가로 얻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영화는 결국 매혹당한 시선이 바라보게 되는 진실이 될 것이다. 물론 알고 있다. 니체는 예술에서 진실에 속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러므로 나는 의도적으로 산만하게 질문했다. 매번 봉준호 는 질문 안에서 자신이 놓인 부재의 조건을 차례로 열거했다. 우리들의 임권택이라는 체험 속의 움직임. 그것이 움직이는 장소. 이때 봉준호는 대답을 하면서 몇 차례이고 영화 속의 인물을 향해서 가엽다, 라는 말을 썼다. 임권택의 영화를 보면서도 그런 말을 썼고 자기 자신의 영화를 향해서도 그 말을 썼다. 나는 자꾸만 이 말 앞에 멈춰 서게 된다.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는 그 말의 원래 뜻 안에 머물면서도 그 말을 다르게 쓰는 경우가 있었다. 한번만 더 내게 비교를 허락해준다면, 이를테면 그건 마치 (잘 알려진 대로) 홍상수 가 예쁘다, 라는 말을 쓰는 것과 같은 어법처럼 들렸다. 물론 홍상수는 언제나 자기의 주인공들을 예쁘게 바라본다. 그러나 가끔 그 주인공에게 지나치게 가깝게 다가갈 때 무시무시할 정도로 잔인해진다. 똑같은 의미로 봉준호가 가여운 주인공에게 지나치게 가깝게 다가갈 때 변태스러울 정도로 기괴해진다. 그들은 그런 의미에서 거리 조절의 시네아스트들이다. 여기서 나는 봉준호에 대해서만 생각할 참이다. 그러므로 질문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정성일 _ 설명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이 자리는 한국영화에서 지금 활동 중인 감독들을 차례로 만나면서 2014년이라는 시간에, 자기의 자리에서 어떻게 임권택 감독님을 바라보는지, 언제 (영화적으로) 만났는지, 거기서 어떻게 헤어지는지, 말하자면 지도를 그려보고 싶은 바람에서 이야기를 듣고 싶어 마련한 자리입니다. 초대에 응해주셔서 참 감사합니다. 저는 한편으로는 임권택 감독님의 전작을 차례로 써나가면서 수직선을 그어나가면서 다른 한 편으로 차례로 이야기를 청해 들으면서 수평선을 그어보면 한국영화의 씨줄과 날줄에 관한 하나의 기록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습니다. 작년 부산영화제에서 임권택 감독님의 전작 회고전을 하면서 한국영화 감독들에게 백지수표를 나눠주었습니다. 봉준호 감독께서는 < 아제아제 바라아제 >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때 저는 그 자리의 관객석에 앉아 첫 사랑과 이 영화를 본 사연을 감명 깊게 들었습니다. (웃음) 오늘은 임권택 감독님에 대한 봉준호 감독의 생각뿐만 아니라 동시에 21세기 평행으로 진행된 봉준호 감독님의 영화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질문할 생각입니다. 그래서 서로 다른 두 영화가 공존할 때 어떻게 서로 다른 성질의 영화가 함께 한국영화라는 구도의 집을 세우는지 보고 싶습니다. 봉준호 _ 지금 임권택 감독님 102편 중 몇 편을 볼 수 있는 상황인가요? 정성일 _ (현재 다시 보고 쓸 수 있는 편수는) 75편입니다. 봉준호 _ 생각보다 많네요. 반 정도인 줄 알았는데 꽤 많네요. < 인플루엔자 > 정성일 _ 제 소망은 이런 것입니다. 임권택 전작을 놓고 진행한 이 연재가 끝나면 누군가는 봉준호 감독의 전작을 쓰겠다고 그러겠죠.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저는 뒤늦게 (전주영화제 삼인삼색 중의 하나로 만들어진) 중편 < 인플루엔자 >를 봤어요. 그 영화가 정말 좋았어요. 그냥 이건 걸작이었어요. 그런데 왜 아무도 이 영화에 대한 글을 쓰지 않는지 의아할 따름이었어요. 말하자면 모든 영화는 친구를 가지고 있어야만 외롭지 않을 거예요. 그렇게 모든 영화에 대해서 하나 이상의 글이 쓰여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어떤 영화는 친구가 많지만 어떤 영화는 그저 외롭게 영화 혼자서만 시간을 기다리는 영화들도 있으니까요. 오늘 드릴 질문에는 약간 불편한 이야기도 있고, 아마 그럴 것입니다, 그리고 궁금한 질문도 있습니다. 재미없는 질문도 있고, 미루어둔 질문도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 결심은 하고 있습니다. 일단 봉준호 감독과 이야기를 하려면 내가 주도권을 빼앗기면 안 된다! (웃음) 그렇게 되면 봉준호 감독이 자기 페이스로 진행하게 되니까 정신을 차려야 한다, 그런 결심, 왜냐하면 제가 이미 3년 전에 ( 허문영 씨와 함께) 긴 인터뷰를 해본 실전 경험이 있으니까요 (웃음) 그래서 몹시 정신 사납고 산만하게 진행할 생각입니다. 봉준호 _ 제가 정서가 산만해서(웃음) 정성일 _ 무조건 산만하게 얘기를 진행해야겠다, 는 결심 (웃음) 봉준호 _ 국정원에 끌려온 느낌입니다. (일동 웃음) 정성일 _ 우리들의 지난 번 이야기는 < 설국열차 >로 끝났으니까 이번에는 <설국열차>부터 시작해보겠습니다. 모든 면에서 작년 여름 <설국열차>의 소용돌이로부터 정확히 일 년이 지났고 지금은 그 사이 제작을 한 < 해무 >가 있습니다. 제가 임권택 감독님과 인터뷰를 할 때에도 그 영화를 막 마쳤을 때와 그로부터 어느 정도의 거리를 지니게 된 다음 일 년이 지나고 나면 같은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달라지는 것을 경험하곤 했습니다. 혹은 적어도 방점이 달라진다고 할까요. 게다가 그 영화가 큰 영화일수록 감독들은 마케팅의 전략 안에 놓여진 전술이 되어 수 없는 자리에서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다보면 인터뷰 자체를 반복하는 학습의 과정을 겪는 것처럼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개봉 당시에는 같은 얘기 또 하고 또 하고, 정말 지겨운 상태에 놓인 달까요. 봉준호 _ 저도 개봉시기가 항상 제일 싫습니다. 이상한 이슈에 끌려 다녀야 하고, 참, 정성일 _ < 설국열차 > 프로젝트를 처음 들은 것은 < 괴물 > 직후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괴물> 직후에 <설국열차>를 만들 줄 알았는데 그 사이에 < 마더 >가 끼어든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봉준호 _ 저는 < 살인의 추억 > 직후에 김혜자 선생님과 약속을 해놨던 상태였어요. 정성일 _ 영화의 규모나 이야기의 태도, 게다가 열차라는 폐쇄공간으로 시종일관 진행하는 사실상 450억 원 실험영화 < 설국열차 >를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봉준호 감독의 숙원의 영화라고 생각했습니다. 개봉하고 이제 1년이 지났는데 돌아보니 <설국열차>는 자신에게 어떤 영화였나요? 봉준호 _ 아직 완전히 과거형은 아닙니다. 미국과 핀란드에서 개봉중이고, 그래서 지금 극장에 걸려있고, 또 개봉 준비 중입니다. 지금 8월인데, (잠시 생각) 지난 6월 말에서 7월 초에 북미 프로모션을 하다 온 거여서, 미국 프로모션 할 때 정말 지겨웠죠. 거의 인터뷰가 500개, 무대인사 100개, 관객과의 Q&A 50개를 넘어가니까 사람의 멘탈이 이제 너덜너덜해졌어요. 그렇게 하고 온 직후라서 아직도 완전히 객관적으로 보이지는 않아요, 얼마 전 작년에 영상자료원에서 < 살인의 추억 > 10주년 행사를 해주셔서 옛날 배우들이 모여 큰 프린트로 봤는데, 그건 정말 그 영화를 지나왔구나, 라는 기분이 있는데, < 설국열차 >는 그 정도의 느낌은 당연히 아니구요, 지금은 <설국열차>는 철도 레일에서 이제 막 벗어나서 뛰어내리려는 그런 상황이고, 요즘 < 해무 >도 개봉했고, 다음 작품 시나리오도 열심히 쓰고 있지만. (잠시 생각) 아직도 완전히 마무리된 느낌은 안 들어요. 미국판 DVD가 나와서 진열장에 꽂으면 그때 딱 마무리가 되는. (웃음) 제가 소유욕이 강해서, 손에 만져지는 물건화 돼서 나와 책장에 꽂으면 끝날 거 같아요. 아마 다음 그 다음 달에 미국 DVD가 나오면 (마음속에서) 종료될 거 같아요. 미국이 제게 별 의미가 있는 거 아니지만 가장 늦게 개봉한 나라고, 어쨌든 영어 영화였으니까요. 질문은 <설국열차>가 제게 어떤 의미인가였는데 일단 영화 외적으로 너무 과열된 상태로 개봉이 돼서... (망설이다가) 그렇게 흥분할 영화가 아닌데 그게 좀 부담스러웠고, 그리고 제게는 SF 장르를 본격적으로 했다는. 물론 그 전에 < 괴물 >이 있었지만 사실 그 영화는 괴생물체 존재만 제외하면 소시민적인 세팅이었고 여기서는 하나의 세계 전체를 창조하는 거잖아요. 여기서는 기차라는 세계였는데, 그런 것이 SF의 매력인 거잖아요. 골수 SF 팬은 아니지만 정면으로 SF 장르를 다뤄봤다는 것이 제게는 보람이었다. (<설국열차>는) 다섯 번째 영화인데 지금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영화를 함께 준비하고 있지만 그 영화가 저에게 어떤 전환점이 되거나 분기점이 되었는지는 아직 모르겠어요. 그건 좀 더 시간이 지나봐야 알 수 있을 거 같고, 지금 여섯 번째 영화로 쓰고 있는 시나리오도 <설국열차> 전에 2010년에 구상했어요. 그러니까 영화들이 서로 계속 디졸브 되면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SF 장르를 도전해서 해봤고, 그런데 거기서는 한국적인 좌표에서 벗어나 보았죠. (그 전에는) 한국적인 로컬리티가 있거나 시공간적인 좌표를 갖고 항상 영화를 해왔는데, 한강에 괴물이 나오고, 80년대 화성이 등장하고, 이것은(<설국열차>) 거기서 완전 벗어난 영화입니다. 다국적 사람들이 기차라는 공간에 있고, 그야말로 ‘사이-파이(Sci-Fi)’ 영화죠. 맥락들은 다른 것 같은데 미국에서 ‘사이-파이’영화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는 게 제일 보람 있는 부분이에요. 거의 손익분기점에 도달하고 있다는 게, IP_TV에서 연말까지 수금을 하면, 그런데 러시아 배급사 애들이 아직 돈을 안준다는데(웃음) 그렇게 <설국열차>는 전 세계 배급의 험난한 길을 걷고 있는 거 같아요. 프랑스나 일본처럼 점잖게 제때 돈을 주는 나라만 있는 게 아닙니다. 남미 및 러시아 배급사와 사투를 벌이고 있는 직원 분들께 응원의 한마디를 보내고 싶습니다. (웃음) 정성일 _ 나라마다 영화 문화가 서로 다르지 않습니까? 그렇게 많은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인터뷰하고 또 관객들과 만나보면서 감각적으로 느껴보기에 < 설국열차 >를 봉준호 감독이 원래 시도하려했던 연출의 뜻에 가장 가깝게 잘 받아들이고 있는 나라는 어디였습니까? 그저 극장에서 느껴보기에는 한국에서 이 영화는 흥행의 결과와 또 달리, 뭐랄까, 잘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상할 정도의 저항에 부딪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봉준호 _ (잠시 생각) 만든 입장에서 얼마나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지 모르겠구요. 각 나라마다 다른 정체성이 있는 거 같아요. 한국에서는 여름철 개봉하는 제일 대작 블록버스터야, 그렇게 먼저 전제를 하니까, 봉준호 의 울트라 초 블록버스터 대작이 되어야 하고, 제가 원하든 원치 않든 그런 십자가가 지워져 있잖아요. 근데 막상 보니 마이클 베이 영화 같지 않고, 변태적이고 잔인한 부분이 있기도 하고 초등학생을 데려갔더니 애가 경기를 일으키기도 하고(웃음). 기대한 것과 다른 부분이 있는 것 같고. 그런데 미국에서는 < 트랜스포머 4 >와 같은 날 개봉을 하면서 오히려 훨씬 더 이상하고 유니크한 영화로 받아들여졌어요. 이 영화를 보면 왠지 젊은 애들 틈에서 좀 더 쿨한 사람인 것처럼 잡지에서 나오기도 하고, 그쪽에서 평가는 훨씬 더 유니크하고 이상할수록 더 점수가 높아지는 상황이었어요. 트랜스포머와 반대말일수록 더 좋아하는 거죠. 로튼 토마토 점수가 상상이상으로 95점, 97점 높이 치솟은 것도 한국에서와 이 영화를 받아들이는 기준이 다르구나, 라고 생각했어요. (인터뷰를 정리하고 있는 2014년 9월 6일자 rottentomatoes.com 의 신선도는 95퍼센트이다) 정성일 _ 한국에서 진행된 인터뷰를 읽으면서 왜 아무도 이 질문을 하지 않을까 궁금했습니다. 마음속에 품고 있는 최고의 열차 영화가 무엇입니까? < 설국열차 >를 찍는다고 했을 때 사실 저에게 즉각적으로 든 생각은 그 열차에 어디에선가 영화사 속의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와 만날 것이라는 제 멋대로의 상상이었습니다. 우리들에게는 영화가 거기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열차를 보면 마음이 두근거리지 않습니까? 봉준호 _ 미국 프로모션 때는 미국 평론가나 기자는 그런 질문을 많이 하셨었어요. 한국에서는 영화 역사를 짚어가며 질문하는 분이 많이 없거나 없어지는 추세라서 안타깝기는 하지만... 당연히 (< 설국열차 >를 준비하면서) 구로사와 아키라 각본의 (<눈(雪)>을 영화로 옮긴 할리우드 영화) < 런어웨이 트레인 > 같은 거는 다시 꺼내서 봤죠. <폭주 기관차 Runaway Train> 정성일 _ (< 런어웨이 트레인 >을 연출한 안드레이) 콘찰로프스키의 영화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봉준호 _ 그 분의 영화는 < 탱고와 캐쉬 >도 못 봤습니다. 별로 본 게 없습니다. ‘돌아온 탕자’와 같은 감독이다, 라고 누가 얘기 하시더라구요. 막상 본 거는 별로 없어요. < 런어웨이 트레인 >하고,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 마리아스 러버 >가 그 분 영화였나? 나스타샤 킨스키가 나온, 그런데 그거는 청소년기적인 관점에서 접근한 영화라, 시네필적인 관점하고 상관없이 흰 속옷 같은 걸 입고 나스타샤 킨스키가 잡지 광고에 아주 야하게 나왔던 게 기억이 나네요. 진짜 예뻤죠. (웃음) 원래 얘기로 돌아오면 <런어웨이 트레인>이라든가, (로버트 알드리치의) < 북극의 제왕 > 이라고, 어네스트 보그나인하고 리 마빈. 되게 남성적인 중년 마초들이 무식한 무기들을 들고 싸우죠. 제일 좋아하는 열차 영화를 꼭 하나만 꼽으라면 존 프랑켄하이머의 흑백영화 < 트레인 >이었던 거 같아요. 나치들이 프랑스 미술품을 빼돌리려고 하려는 데, (두 손을 치켜들고) 기차를 계속 끌고 가려는 나치들과 휴전 협정 전에 기차를 멈추려는 버트 랭커스타의 싸움이 되게 긴박하게 펼쳐지는데 손에 땀이 나게 재밌게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 영화에서 보여지는 카메라 워크와 인물들의 우아한 동선에 매혹되었습니다. 거기서 1페니 짜리 동전으로 기차를 못 가게 하는 디테일도 나오는데, 그 영화는 정말 좋았습니다. 그런데 < 설국열차 >의 텍스트로 삼으려는 영화는 별로 없었습니다. 기차 자체에 사람들이 계급별로 나누어져 있고 그 안에 온 사회를 압축해서 쑤셔 넣은 것은 이 그래픽 노블밖에 없었어요. 오히려 (디즈니_픽사의) < 월-E >같은 애니메이션 후반부, 또는 거기서 우주선에서의 생활상이 <설국열차>와 비슷한 거 같아요. 우연히 아들 때문에 봤는데 거기 사람들이 비만상태가 되고 그러잖아요. 그리고 < 2001 오딧세이 >를 응용한 패러디 장면이 나와서. 아마 그런데서 더 영감 받았던 거 같아요. 기차로만 보면 구로사와 아키라의 < 천국과 지옥 >에서 딱 한 시퀀스지만 기차 시퀀스가 나와요. 구로사와 아키라는 기차를 잘 다루는 감독인거 같아요. 그리고 이마무라 쇼헤이의 < 붉은 살의 >를 보면 이 여자의 집이 기찻길 옆에 있고, 거기서 기차를 타고 남자가 가는데, 별로 힘주어 찍지 않아도 기차의 가장 강렬한 장면이 나와요. 보면서 제일 싫었던 기차 영화는 < 폴라 익스프레스 >(웃음) 거의 달디 단 제과점 음식을 삼시 세끼 계속 먹어야하는 기분. 눈이 오고 기차 나오니까 한번 보게 되는데 반면교사로 삼았달까요. 아, 저러면 안 되겠다. 싫다. (일동 웃음) 정성일 _ < 설국열차 >에 관해서 영화계 사람들에게 파다하게 퍼져나간 이야기의 공약수는 봉준호 감독의 악전고투였습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이끌고 끝까지 갈 수 있게 만든 가장 매혹적인 힘이랄까, <설국열차>에서 가장 매혹되었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봉준호 _ (단호하게) 기차였죠. 여기 말하는 기차는 하위 장르로써의 기차가 아니라 영화가 두 시간 내내 달리는 기차에서 펼쳐지고, 그 안에 사회와 모든 것이 압축되고, 인간군상이 고농도로 압축된 상태에서 그것을 물리적으로 봤을 때, 달리는 기차 안에서 두 시간 내내 모든 희로애락을 내가 연출한다, 내가 언제 이것을 또 할 수 있겠냐, 아마 다른 감독들도 안할 것이다, 어찌 보면 끔찍한 조건이니까, 잠수함 영화 이상으로, < 설국열차 >를 만든다는 건 그런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해외 나가면 사실 고생하는 건 다 마찬가진데 그게 (거기서) 한국에 들어오는 소문은 과장된 게 많습니다. 우여곡절은 많았지만 그래도 재미있게 찍었습니다. 정해진 일정 안에서 다 찍었고, 촬영자체는 큰 어려움이 없었어요, 촬영에 들어가기까지 오래 걸렸지만 그건 역설적으로 그만큼 준비를 많이 했다는 얘기이고, 촬영기간은 굉장히 짧았어요. 다 찍는데 석 달도 안 되었어요. < 괴물 >의 절반도 안되는(셈을 하더니) 2개월과 4주, < 플란다스의 개 > 다음으로 제 영화 중 가장 짧게 찍었죠. 90퍼센트 이상이 스튜디오 촬영이니까 날씨도 상관없고, 최대한 효율적으로 다 스토리보드대로 찍은 거고 여기에 관여했던 미국 라인 프로듀서들은 역사상 제일 쉽게 찍은 영화라고 기억할 거예요. 저는 그런 것들을 지켜내면서 괴로움도 있었고, 통으로 다시 찍고 싶은 것도 있었지만 일반화시키면 원래 늘 그러니까요. 준비기간이 무척 길었지만 촬영 프로덕션은 계획대로 순조롭게 잘 끝났습니다. 외국 배우들과 계약 조건도 그럴 수밖에 없었고 제가 제임스 카메론도 아니니까(웃음) 미국적 관점에서 보면 독특한 저예산 사이-파이 영화고, 크리스 에반스도 그렇게 얘기하고 다녔어요. 그는 마블 영화를 주로 하는 배우인데 < 어벤져스 >는 2억불이 넘는 영화잖아요. 그의 관점에서는 < Snowpiercer >라는 작지만 괜찮은 영화를 찍는다, 고 토크쇼에 나가서 얘기를 해요. 하지만 한국에서는 역대 최대 제작비니까 두 가지 정체성이 혼란스럽게 하는 면이 있었죠. 원래 질문으로 돌아가면 이건 정말 독특한 영화다. 기차 안에서 이렇게 모든 공간과 인물과 운동이 담긴, 저는 (영화에서) 운동이나 움직임을 몹시 좋아합니다. 기차도 움직이지만 그 안에 사람도 달린다. 그런 흥분이 있었기 때문에 끝까지 해나갈 수 있었습니다. < 해무 > 정성일 _ 저는 지난 겨울에서 봄까지 임권택 감독님의 < 화장 >현장에서 다큐를 찍고 있었습니다. 그때 이 영화에 < 해무 >에서 넘어온 스태프들이 꽤 있었고, 게다가 영화 현장은 한 다리만 건너면 모두가 식구 아닙니까. 그때 <해무>에 대한 얘기도 많이 들었습니다. (웃음) 좋은 이야기도 있고 과장된 이야기도 있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해무>가 신인감독의 악전고투 신고식이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제가 궁금한 건 21세기 한국영화의 새로운 현상 중의 하나는, 홍상수 감독에서 박찬욱 감독에 이르기까지, 많은 감독들이 직접 제작사를 차리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 설국열차 >도 박찬욱 감독이 제작한 것인데, 봉준호 감독이 제작사를 차린다는 것의 가장 큰 긍정적인 의미에서 목표, 욕심이 있었다면 무엇입니까? 봉준호 _ 강제규 감독님이나 강우석 감독님과 같은 분들은 비즈니스 모델, 사업을 하실 수 있는 성격과 스케일이 있다고 생각해요. 보스 기질도 있고. 하지만 저는 제일 반대지점에 있는 사람으로서 지속적으로 제가 제작사를 운영하면서 다른 감독의 작품을 제작할거라는 계획이 처음부터 있었던 건 아니고 일회성으로 그칠 거라고 예상도 했고, < 해무 > 작업하면서 실제 그렇게 마음을 먹었고요. <해무>가 제 마지막 제작 작품이 될 거 같다고 인터뷰 때도 이미 한번 얘기했습니다. 제작은 저와 안 맞고 남은 인생은 연출에만 집중하겠다고 이미 명확히 했어요. 과정이 좀 복잡하긴 한데, (잠시 허공을 쳐다보더니) <해무>를 기획했던 이유는 저를 제외한 공동 제작을 한 다른 두 명이 < 괴물 >때 같이 일했던 프로듀서들인데 < 설국열차 >를 같이 하기로 했다가 못하게 된 사람도 있습니다. <설국열차>는 준비기간이 굉장히 길어졌죠. <설국열차> 다음 작품, 여섯 번째 영화를 같이 하기로 한 친구들인데 (그 영화가 끝날 때까지) 한참 기다리고 있는 게 미안했습니다. 그런 미안함과, 그리고 <해무>라는 훌륭한 연극 원작을 2008년에 보고, < 마더 > 캐스팅 과정에서 (그 연극을 보고) 송새벽 씨를 발견했는데, 좋은 스토리라 저걸 누가 영화화 하겠구나 생각했는데 아무도 안 하더라구요. 그래서 기다리고 있는 프로듀서 후배들과 내가 기획자로 이 좋은 작품을 맺어주면 좋은 작품이 세상에 나오겠구나. 이왕이면 < 살인의 추억 >때 연출부였고 시나리오를 서포트했던 심성보 감독이라면 또 좋은 신인 감독이 입봉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기획의 이유입니다. 체코에서 <설국열차>를 준비할 때 화상회의로 투자사 분들과 <해무>를 얘기했습니다. <해무>라는 원작을 한국에서 재공연할 때 가서 보시게끔 제가 원격조정으로 어레인지한 거고 그래서 그 작품이 탄생하게 된 거고, 음, 체코에서 (<설국열차>를 다 찍고) 돌아왔을 때는 심성보 감독이 시나리오를 많이 썼고, 저는 <설국열차> 후반작업을 하면서 <해무>의 시나리오 마지막에 도움을 줬습니다. 제가 오야붕이고(웃음) 제작자인데 촬영 현장에 가면 얼마나 싫겠어요, 그래서 거의 한 달간 제가 촬영 현장에 안 갔는데 그때 많은 일이 있었어요. 그건 노코멘트 하겠습니다. 어쨌든 무사히 개봉하게 돼서 기쁘고 저도 거기에 책임을 져야할 입장이고 그것에 일조한데 만족하고 있습니다. <해무>가 마지막 제작 작품입니다. 더는 없습니다. 정성일 _ < 해무 >에서 제일 좋아하는 장면은 어디입니까? 봉준호 _ 오프닝 씬을 제일 좋아합니다. 모든 사건이 시작되기 전에 선원들의 일상이 나오는데 거기 모든 배우들의 느낌이 제일 좋고. 그리고 영화 뒷부분에 이희준 씨가 거의 발정난 수캐가 되어 사상초유의 전자발찌 캐릭터죠. (웃음) 우리끼리는 전자발찌라고 불렀는데 거기서 막 뛰어다닐 때 이희준 씨 장면 좋아하고, 그리고 김윤석 씨가 밀항을 제의받는 장면이 있어요. 사료에서 시계 꺼내고 그때 뱀장어가 왔다 갔다 하고, 그 씬에서 김윤석 선배님의 연기가 참 좋았습니다. 존경할 만한 배우라는 생각도 들고, 그런 순간들이 좋았습니다. < 마더 > (흑백버전) 정성일 _ 지난 겨울 서울 시네마테크에서 < 마더 >의 흑백버전을 상영했는데, 그 말은 <마더>의 감독 버전이 흑백버전이라는 뜻입니까? 저는 두 개가 별개의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봉준호 _ 2008년도에 그 영화를 처음 기획할 때 저나 홍경표 촬영감독이 < 마더 >는 흑백으로 하고 싶었는데, 그때 인더스트리적 조건으로 그게 좌절되면서 컬러로 바꿨다 그런 건 아니었어요. 그냥 컬러로 만들었는데 <마더>를 개봉하고 어떤 시점에서 둘이 좋아하는 서로의 흑백영화 로망에 대한 얘기를 하다가 코엔 형제의 <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 >도 컬러 네거티브로 찍은 거를 개봉은 흑백으로 했고 컬러, 흑백 버전 두 가지로 DVD가 나왔다는 얘기를 했었습니다. 그때 둘이서, 우리도 한번 해보자, 돈이 그렇게 많이 들지 않는다, 라고 그렇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흑백에 대한 로망을 얘기하다가 나중에 흑백버전을 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그래서 디지털 상태에서 충분히 할 수 있고, 그걸 쇼트 단위로 다 조절한 거예요. 저희도 궁금한 거죠. 같은 사운드, 같은 편집, 같은 퍼포먼스인데 흑백으로 바꿀 때 뭐가 바뀔까, 저희도 흥미로워하면서 저랑 홍경표 촬영감독과 강성표 컬러리스트가 작업을 한 거죠. 재개봉은 안했지만 DVD도 나왔고 해외에서도 틀고 있고 올 가을에 부산에서도 틀 거 같은데. 김혜자 선생님도 모시고 봤죠. 다들 나름의 감상이 있어요. 정성일 _ 흑백 버전을 봤었을 때 저는 이쪽이 감독 버전이라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처음 < 마더 >를 보았을 때 몇몇 장면들에서 표현주의 영화의 느낌이 들었습니다. 밤이 되었을 때 그림자로 이어지는 골목 장면들이나, 혹은 의도적으로 벽을 찍은 정면으로 찍은 쇼트들 경우 의도적으로 화면을 만든 것 같은 장면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영화는 프릿츠 랑 영화의 자장권 아래 있다는 인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분을 컬러가 약화시키고 있다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첫 장면을 흑백으로 봤을 때 굉장히 압도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흑백버전을 영화를 처음 보면서 상상해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영화 전체를 흑백으로 진행하다가 해가 저물가면서 햇살이 쏟아지는 고속버스 장면만을 칼라로 하면 어떨까, 라는 상상, 그런데 그 기대감이 충족되었을 때의 만족감이랄까, <마더>가 CJ에서 제작될 때, 그때 저는 시네마 디지털 서울 영화제에서 일하면서 가끔 CJ 사람들과 회의를 해야 했는데 휴식 시간에 제작중인 영화를 이야기하면서 모두들 <마더>에 대한 기대가 컸습니다. 하지만 그 기대는 대부분 산업적인 것이었고, 가장 기억에 남는 이야기는 우리가 < 괴물 > 천만 기록을 깰 겁니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까지 CJ는 천만 영화가 없었다) 그래서 <마더>를 보았을 때 마지막 장면의 칼라를 위해서 결국 모든 장면을 칼라로 보아야하는 거야, 라는 의문이 들었고, 그런 다음에는 다시 흑백 버전을 보게 되었으니 좀 이상한 기분이 들었어요. 가상적인 상상의 가정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실현되는 가는 것을 본 달까, 봉준호 _ CJ에서 제작할 때 < 마더 >에 대한 간섭은 전혀 없었습니다. 100퍼센트 다 제가 할 수 있도록 하게 해주셨습니다. 흑백으로 한 건 개봉 후에 떠오른 아이디어였고. (잠시 생각을 하다가) 만약 이상한 법이 생겨, 두 작품 중 하나만 남겨놓으라고 한다면 저는 흑백 버전을 남겨놓을 거 같아요. 마지막에만 햇볕이 퍼질 때 컬러가 폭발하는 그 버전을 남겨놓을 거 같아요. 영화란 것이 의도를 향해서만 돌진해야하는 건 아니지만, 내가 보여주고자 했던 것들, 심지어 배우의 연기조차도 흑백으로 봤을 때 더 오롯하게 다가오는 부분이 있는 거 같아요. 그래서 역으로 돌아봤을 때 우리가 흑백 고전에서 느끼는 매혹들 있잖아요. 크라이테리온에서 다시 출시된 펠리니의 흑백 영화나 이마무라 쇼헤이의 영화 같은 것을 봤을 때 느껴지는. 처음 그 영화가 흑백으로 개봉했을 때 아직 프린트가 손상 안 되었을 때 극장에서 보는 느낌. 반대로 그 영화들에 컬러를 넣어서 생각해본다면 뭔가 흐트러트리는 느낌이 있어요. 그래서 만약 영상자료원에서 한 작품만 남겨달라고 한다면 흑백만 남겨 주십사, 말할 거 같고 (그렇게) 선택하겠습니다. 같은 영화인데 다른 영화인 거 같아요. 김혜자 선생님 얼굴이나 눈빛도 흑백에서 더 좋았고. 정성일 _ 저는 봉준호 감독 인터뷰 중에서 21세기 첫 10년을 회고한 카이에 뒤 시네마 특집호(Cahiers du Cinema_652호_201001)에서 구로사와 기요시와 대담한 것이 가장 재미있었습니다. 구로사와 기요시도 미국영화광이기도 하지만. 두 사람이 만나서 미국영화를 예찬한 것이 감동적이었습니다. 물론 후반부에 < 아바타 >를 앞에 두고 제임스 카메론 영화를 보는 게 두려워 그런 말도 있었지만(웃음) 구로사와에게는 영화청년시절을, 그리고 당신에게는 영화소년시절을 통과하면서 70년대 3명의 할리우드 감독이 인상적이라고 얘기했습니다. 스필버그. 드 팔마. 존 카펜터. 봉준호 감독께 그런 의미에서 미국 영화란 어떤 겁니까? 이를테면 박찬욱 감독의 미국영화에 대한 애정은 상당히 유보적이죠. 계속 유럽영화와 밸런스를 갖고 싶어 한다고 할까요. 구태여 호명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만 어떤 감독은 명단을 보고 있노라면 시네필이라고 믿기 난처한 허풍도 있고(웃음), 봉준호 감독의 미국 영화에 대한 애정을 듣고 있으면 특별한 애정이라는 생각이 있어요. 물론 봉준호 감독 이전 세대의 감독 중에도 영화에 대한 시네필의 애정을 갖는 감독들이 있죠. 하지만 그런 감독들은 이상할 정도로 밸런스를 유지하고 싶어 하는 측면이 있어요. 이런 말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그런 의미에서 봉준호 감독은 한국영화에서 미국영화를 사랑하는 첫 번째 세대라고 불러보고 싶어집니다. 저는 영화는 결국 미국 영화라는 생각이 있어요. 영화의 문법은 여기서 나왔고, 우리들이 질문하는 영화의 투명성이라는 것도 이 영화들을 보면서 배운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먼저 그리피스, 그 중에서도 존 포드와 하워드 혹스라는 이름, 얼마든지 불러 볼 수 있습니다. 킹 비더, 라울 월쉬, 니콜라스 레이, 더글라스 서크, 안소니 만, 어떤 의미에서 서로 다른 나라들은 미국 영화를 받아들이는 과정만으로 그 나라의 영화사를 다시 쓸 수도 있습니다. 이건 긍정의 의미입니다. 그게 프랑스 영화이건, 일본 영화이건,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시아 영화를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하스미 시게히코와 아오야마 신지의 대담을 읽은 적이 있는데 거기서 하스미가 지나치듯이 말하면서 봉준호 감독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이 사람의 영화는 한국 영화 감독으로는 드물게 미국영화의 순혈(純血)을 받고 있다, 라는 구절을 읽으면서 멈춰 선 적이 있습니다. 봉준호 _ 저도 제 자신에 대해 얘기하는 거는 늘 민망한데(웃음) 나는 오늘날 도대체 어쩌다 이렇게 됐나, 나는 뭘 봤나, 어릴 때 자라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죠. 아마도 여러 번 얘기했지만 저는 TV를 시네마테크로 삼았기 때문에 선배님들 세대처럼 프랑스, 독일 문화원을 출입한 세대는 아니었으니까, TV에서 한 영화는 70퍼센트는 미국 영화가 많았고, 저는 특히 AFKN 보는 걸 좋아했기 때문에 주한미군영상에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거기서 B급영화도 많이 방영했었구요. 존 포드, 하워드 혹스 얘기를 많이 하셨는데, 일본 영화를 얘기할 때 오즈를 말한다거나 프랑스 영화를 얘기할 때 르누아르를 얘기한다거나, 그런 맥락은 제게 없는 거 같아요. 미국 영화 중에서도 약간 반 발짝 사이드로 빠지거나 B급 영화를 더 좋아했던 거 같아요. 존 카펜터나, 그 사람이 윌리엄 와일러같은 대접을 받지 않잖아요. (웃음) 유럽의 이상한 애들이 더 좋아하고, 스필버그가 < 죠스 >로 블록버스터의 이름을 만들기는 했지만, 그가 이상한 영화를 많이 만들기도 했고, 느끼해지기 전, 여유가 생기기 전의 스필버그를 좋아하는 거고, 드 팔마도 사실, 프랑스에서도 저에게 좋아하는 감독은 클로드 샤브롤의 범죄 영화를 얘기했습니다. 그래서 유럽에서도 미국 영화를 좋아하는 유럽 감독을 좋아하는 구나 생각했어요. 셀프 진단이라 정확하진 않겠지만(웃음). 클로드 샤브롤이 히치콕에 대해 쓴 책이나 트뤼포의 「히치콕과의 대화」도 재미있게 읽었고. 구로사와 기요시도 미국 영화를 좋아하는 일본 감독이고, 그래서 카이에와의 대담도 그렇게 성립될 수 있는 거 같고, (잠시 생각) 미국 영화란 제게 깔려있었던 거 같이요. 대학교 다닐 때, 거기서 학교 영화 동아리를 할 때 대만 뉴웨이브에 동조된 시기가 있었는데 그게 그렇게 길게 가지 않더라구요. 다음 달 10월에 마침내 크라이테리온에서 (에드워드 양의) < 고령가 소년 살인 사건 >이 블루레이로 나온다고 해서 프리 오더로 예약해놓고 기다리고 있어요. (웃음) 너무나 그 영화를 좋은 화질로 다시 보고 싶고.. 대만 영화의 아름다움, 한국 영화가 저러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삶과 역사가 다 있고.. 그런 생각했다. 나는 영화 동아리니까, 시네필이니까 저런 영화 다 봐야해. 그런 생각을 했어요. 허우샤오시엔 영화를 다 볼 거야. < 비정성시 > 보면서 양조위가 참 안됐다, 왜 저렇게 어깨가 좁을까, (웃음) 그런 생각도 들고. 그 마음은 여전함에도 불구하고 하지만 그게 제 본령은 아니었던 거 같아요. 저의 뼈와 살을 이룬 건 미국 영화라고 저 스스로도 생각이 들구요. 덧붙여 시네필이 된 후에 완전히 매혹된 김기영 감독이나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 스스로 제 멘토라고 믿고 싶어지는 감독님들은 미국이나 대만 뉴웨이브 사이 어디에 자리매김해야할지 모르겠지만. 그분들에 대한 광적인 마음은 굉장히 오래 지속되는 거 같아요. 대만 뉴웨이브에 대한 매혹이나 그 당시 처음 KINO 창간될 시 베스트 10을 꼽으면 그런 영화들이 들어가곤 했는데 그건 일시적이었던 어느 한 시기였던 거 같아요. 정성일 _ 2012년 사이트 앤 사운드에서 앙케이트에서 부탁한 10편의 영화를 뽑아서 보내면서, 전제는 나의 창조적인 생각에 가장 임팩트를 준 10편의 영화라고 단서를 달았고, 기억을 환기시켜 드리자면 알파벳 순서대로 허우샤오시엔의 < 비정성시 >, 구로자와 기요시의 < 큐어 >, 김기영 의 < 하녀 >, 코엔형제의 < 파고 >, 히치콕의 < 사이코 >, 마틴 스콜세지의 < 성난 황소 >, 오손 웰즈의 < 악의 손길 >, 이마무라 쇼헤이의 < 복수는 우리가 한다 >, 앙리 조르주 클루조의 < 공포의 보수 >, 데이비드 핀치의 < 조디악 >. 이렇게 열 편이었습니다. 봉준호 _ 저는 항상 연쇄 살인 특별 우대합니다. (웃음) 항상 서너 편이 들어가 있어요. 정성일 _ 어떤 영화를 선택하느냐는 그 사람의 취향이고 태도이기 때문에 저는 명단에 우위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명단을 보면서 즉각적으로 드는 생각은 이른바 이야기하는 모더니즘 영화에 전혀 관심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누구나 명단에서 얘기하는 로베르 브레송이나 고다르, 브뉘엘, 이런 이름이 없었습니다. 개인적으로만 말하면 봉준호 감독의 영화들을 보면 후기 펠리니 영화가 있었을 거 같은데, 이를테면 < 카사노바 >나 < 사티리콘 >같은 영화가 있었을 것만 같은데, 아니면 베르히만의 과도한 바로크적인 영화, 이 영화가 취향이 아닐 수도 있지만 < 마더 >의 흑백버전을 보고 나면 왠지 <침묵>이나 <마술사>, < 처녀의 샘 > 같은 영화들, 그런 모더니즘 영화들. 열편 안에 들어오지 못할 만큼, 이 영화들은 20위권 바깥에 있어, 라고 한다면 그건 그런 영화들과 멀어, 라는 선언처럼 읽힙니다. 봉준호 _ 네, 먼 것 같습니다. 특별히 그런 질문을 해본 적 없지만, 고다르 영화를 본 건 영화 동아리 때가 전부였습니다. < 비브르 사 비 >는 라스트 씬이 굉장히 흥미로웠던 기억이 생생히 있지만 DVD를 사서 모은 이후에 고다르 영화의 DVD를 산 적이 없습니다. < 미치광이 피에로 > 블루레이를 산적은 있지만 사놓고 안 봤습니다. (웃음) 2년 됐는데, 패키지가 너무 예뻐서 샀는데 손이 안가요. 이미 본 < 피아니스트를 쏴라 > 이런 걸 한 번 더 본다거나 아니에스 바르다를 본다거나 그러기는 하지만 고다르 영화는 손이 안 가는 것 같습니다. 취향이 아닌 것 같습니다. 만드는 입장에서 그런 영화를 잘 할 수 있는 분들은 따로 있다는 생각을 하구요. 제 친구 중 그런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그만 영화계를 떠났어요. 영화아카데미 11기 동기 중에 허재영이라는 친구가 그런 영화를 굉장히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청어람에서 데뷔를 할 뻔 하다가 못했어요. 그 친구의 < 모자 >라는 졸업 작품이 있는데 제가 촬영을 했어요. 그 친구가 한국의 고다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영화계를 떠났습니다. 그 친구와 저는 많이 다르다, 는 생각을 늘 했습니다. 취향이나 식성까지도(웃음). 고다르 영화를 보는 것보다 이마무라 쇼헤이나 끌로드 샤브롤 영화를 한 번 더 보는 쪽으로 항상 손이 더 가는 거 같습니다. 정성일 _ 좀 더 산만하게 진행해보겠습니다. (웃음) 임권택 감독님 영화로까지 다가가는데 좀 더 시간을 갖고 싶습니다. 첫 번째 영화 < 플란다스의 개 >를 보기 전에 이른바 영화 커뮤니티 안에서는 이미 봉준호 라는 이름은 기대의 명단에 들어있었습니다. 아카데미 졸업 작품인 < 지리멸렬 >때문일 텐데 흥미롭다는 생각은 했지만 저는 이 영화를 연출한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플란다스의 개>를 처음 보았을 때 봉준호 감독에 관해서 전혀 모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저는 영화잡지 키노를 만들고 있었고, 창간 일 년 후에 <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이런 첫 번째 영화를 다시 보기는 힘들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예상대로 아류들이 쏟아져 나오거나 아니면 미처 이해하지 못한 채 여전히 고전적인 방식의 영화에 머물러 있거나 둘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러다가 불현듯 <플란다스의 개>를 보게 되었을 때 살짝 쇼크에 빠졌습니다. 뭐랄까, 이 영화는 갑자기 나타난 UFO 같았습니다. 우리가 만나기 전, 그러니까 며칠 전 이 영화가 막 나왔을 때 키노를 다시 펼쳐서 인터뷰를 읽어보았습니다. 사실 모든 감독들은 첫 번째 영화를 찍고 나서의 인터뷰가 가장 솔직합니다. (웃음) 무언가 이해받고 싶어 한달까요. 봉준호 감독은 여기서 여러 차례 만화적 프레임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모델의 위기에 대한 영화였습니다. 이 위기가 영화 안에서 한번 작동을 시작하자 멈추지 않고 달려간다, 는 그 느낌이 신나는 영화입니다. 비탈을 달리는 그 아슬아슬한 느낌.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플란다스의 개>는 시장에서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 살인의 추억 >은 무언가 후퇴한 느낌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우아하긴 하지만 고전적인 모델로 되돌아가버렸을 때 저는 이 영화에 대해서 어떤 적개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웃음) 뭐랄까, <플란다스의 개>와 <살인의 추억> 사이에는 어떤 블랙홀이 있는 느낌입니다. 이제는 그 둘 사이에 놓인 블랙홀을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이 된 게 아닐까요? 봉준호 _ 네, 강을 건넜습니다. < 플란다스의 개 >가 좀 모던해보일 수 있는 건, (잠시 생각) 그것을 만들었을 당시 제가 가졌던 불안한 상태가 있고 편집이 순탄치 않았습니다. (편집기사였던) 이은수 씨와 계속 불협화음이 있었습니다. 음악으로 보면 텐션노트 상태로 편집에 반영되는 것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구요. <플란다스의 개>를 제가 부끄럽게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만 제가 그 당시 할 수 있는 건 다 했고, (제작자였던) 차승재 대표가 전혀 터치를 하지 않았어요. 완성한 편집본을 들고 차승재 대표 집에 갔던 게 생각납니다. 같이 편집본을 보자고 해서 마음속에 준비를 하면서 갔어요. 이 씬을 빼자고 하면 이렇게 반박해야지, 저 씬을 빼자고 하면 저렇게 반박을 해야지 하고, 온갖 경우의 수를 준비해서 갔는데 딱 보고 아, 고생했다 이제 술 먹자, 해서 아무 관심 없구나, 결국 역시 이건 버리는 영화군, 하고 상처를 받았죠. (웃음) 한편으로는 행복했죠. 그대로 개봉할 수 있겠다. 한번 엎어졌다가 다시 살아나면서 여러 가지 우여곡절이 있었죠. 우노 필름이라는 (예전) 싸이더스의 한구석에서 적은 예산으로 아무 간섭 받지 않고 영화를 찍을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기도 했었는데, 그런데 그 영화를 찍고 흥행뿐 아니라 비평에도 미지근하게 별 반응이 없었고, 개봉하고 일 년 반이 지나면서 홍콩이나 뮌헨 영화제에서 상을 수집하면서 씨네21에서 다시 새롭게 쓰는 리뷰가 나오고 그랬지만 개봉하고 1년은 굉장히 쓸쓸했습니다. 나에게 질문을 했죠. 이 영화를 내가 어떻게 생각해야하나. <플란다스의 개>의 이성재 심리와 굉장히 비슷해져 버렸어요. 거기서 성인들의 세계, 룸살롱에서 비즈니스를 하고. 많이 마신 술로 구토를 하는 그런 세계로 들어갈락 말락 하고 있잖아요. 이성재가 어떤 경계선에 서서. 내가 충무로 감독인가? 그때는 그런 고민을 많이 했어요. 인디 장편을 찍어야하나? 아니면 단편을 계속 할까? 당시 말하는 충무로 35미리 상업영화 감독이 될 수 있을까, 또 되는 게 옳을 것일까 질문을 하면서 갈팡질팡하고 있었고 그런 것이 주인공 이성재가 케이크에 돈다발을 넣어갖고 교수에게 먹이러 가잖아요. 그것도 지하철을 타고. 그 심리와 비슷한 상태였어요. 거기서 막 요동을 치면서. 또 싸이더스라는 굉장히 큰 회사에 일하고 있었던 거잖아요. 아무도 나에게 강요하진 않았지만, 내 나름의 순결주의가 있었습니다. 이게 4번째 영화여야 한다는 강박. 단편 3개를 찍었는데 비록 길이가 1시간 30분이 되었지만 내 독립적으로 단편을 찍던 때와 똑같아야만 해. 누가 충무로 영화와 같지 않다. 단편을 늘린 거 같다는 건 내게 찬사야. 현장 스태프들은 되게 이상하게 생각했죠. 그 영화를 보면 행인이 없어요. 왜 저 감독 영화에는 엑스트라가 없나, 협회 엑스트라가 싫었어요. 다 빼! 주인공만 걸아가! 길에 행인이 없을 수도 있잖아! 이건 나의 네 번째 영화여야하고 첫 충무로 상업영화라고 생각하지 않을 거야. 시나리오 써서 주변 선배들에게 보여주면, 너 정말 이 영화로 데뷔하려고 하냐, 차승재 제정신이냐, 이야기가 왜 이렇게 조잡 하냐,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더 오기가 생겨서 무말랭이 하나로도 드라마에 반전을 끌고 올 수 있다는 걸 보여주마. 더 세세하고 작고 쪼잔한 것에 더 집착하게 된 게 <플란다스의 개>였습니다. < 살인의 추억 >은 그 결과에 대한 나 스스로의 반작용이 있었습니다. 역시 누군가 강요하지 않았지만. 반대로 이번에는 굉장히 큰 사건으로 정면대결하고 싶어졌습니다. 사건의 바다로 내가 다이빙 하고 싶다. 그게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이었죠. 그때는 인터넷이 없었기 때문에 국회도서관에 출근하다시피 했었어요. 국회도서관의 거대한 자료들. 거기서 내가 좋아하는 영화들, 취향은 접어놓고 그 당시 중앙일보, 경향신문, 다 보면서. 나는 아주 조그맣고 이 사건은 이렇게 거대한데, 그 사건에 80년대라는 더 거대한 것까지 포함되어 있고, 아주 작은 내가 거기에 다이빙한다, 사건 자체를 존중한다, 사건에 대한 내 입장을 정하고 그것을 영화로 표현하자. 나는 어차피 충무로 감독이 됐다. 쫄딱 망했지만 그런 경계선의 갈등도 없어졌고. 이게 세 번째 네 번째 상관없이 나는 직업감독이 됐다. 안도감 플러스 실망감이 믹스된 거죠. 그렇게 되니까 마음이 편해지면서, 그 사건에 되게 심하게 몰입을 했어요. 나중에는 진짜 제가 범인을 잡을 줄 알았다니까요. 관련 주민들을 만나고 심성보 감독이랑 하도 많이 돌아다녔죠. 나중에는 범인의 생각을 알 거 같은 거예요. 그 사람 생각을 하도 많이 해서. 그렇게 접근한 결과물이 <살인의 추억> 이었던 거 같아요. 처음 얘기하지만 그런 마음도 있었어요. (잠시 생각) 이런 심정도 있었죠. <플란다스의 개>를 만들었을 때 다들 나를 무시했었지 이런 이상한 앙심도 있었습니다. 촬영 김형구, 조명 이강산 감독님처럼 당대 최고의 아티스트. 약간 중년남자가 찍는 압도적인 완성도의 영화? 왠지 대종상에서도 환영받을 것 같은 향취의 영화를 찍어서 너희 모두를 압도해주마 이런 앙심도 있었습니다. (웃음) <플란다스의 개>는 재기발랄하고 영화 동아리를 갓 졸업한 애의 영화라면, 이번에는 이런 복수심도 있었어요. 내가 이런 영화도 찍을 수 있다는 것도 보여주마. 좌 형구, 우 강산으로 모시고 송강호란 배우가 정면에 있는 상태에서 그런 삐뚤어진 마음도 있었던 거 같아요. 정성일 _ 봉준호 감독에게 프로페셔널이라는 게 특별한 의미였던 거 같아요. 봉준호 _ 충무로 직업감독이 된다, 직업감독이 된다는 데 동경도 있었지만 공포도 있었어요. 내 성격에 될 수 있을까. 그걸 하는 과정에서 인간이 병신이 되지 않을까하는 두려움도 있었어요. 그런 사람들을 보면 잘났고 기가 세고, 무시무시한 사람이 너무 많은 거예요. 차승재 대표님도 그렇고, 소위 영화를 하신다는 사람들에게 경외심과 두려움이 있었어요. 내가 과연 저걸 할 수 있을까. 연기영화과를 지원했다가 포기할 때도 그런 생각했습니다. 참가번호를 달고 와서 면접관 앞에서 오열도 할 수 있고 탭댄스도 할 수 있는 애가 오십 몇 대 일로 올 텐데, 나는 변태 샌님인데 교수님 앞에서 춤추고 그럴 수 있을까. 그런 공포감이 항상 있었고, 그래서 연영과를 포기하고 영화 동아리를 했는데 그런 어정쩡함이 계속 남아 있었습니다. 나는 영화판에 적응할 수 있을까. 조감독을 할 때도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십 년 베테랑인 사람에게 나는 매일 깨질 거야. 조감독인 저 사람이 보면 나는 되게 병신 쪼다일거야. 임권택 감독님이 소품 일부터 시작하셨나요? 현장에서의 모든 걸 짊어지고 출발해서 감독의 자리에 오르시거나. 예를 들면 임권택 감독님의 조감독 출신인 김영빈 감독님처럼 남성적이고 카리스마적인, 감독은 그래야만 할 거 같고, 근데 관심 있는 건 영화밖에 없고, 또 만화를 좋아하니까 장면을 그려서 찍고 싶고 충무로 직업 감독으로서 형상은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많이 다르고 그게 계속 지속되었어요. 근데 < 살인의 추억 >을 하면서 좌 형구 우 강산을 모셔놓고 그런 것을 극복했었던 거 같아요. 강호 형님과 새벽 4시까지 나도 술 마실 수 있다. 그러면서 많이 편해졌던 거 같아요. (웃음) 정성일 _ 영화 아카데미를 입학할 때 롤 모델이었던 한국영화 감독은 그 당시 누구였나요? 이제 이 학교를 들어온 건 고민은 끝났고 한국에서 영화감독이 되느냐, 마느냐만 남는다는 자기 선언 같은 것이니까요. 그때 내가 열심히 하면 저기까진 할 수 있어, 라는 꿈같은 것이라고 할까. 봉준호 _ 나는 유영길 촬영감독님과 일하는 감독이 되고 싶었어요. 故 유영길 촬영감독 정성일 _ 유영길 촬영감독님의 어떤 영화가 마음을 끌었나요? 봉준호 _ 많습니다. 극장에서 본 ( 박광수 의) < 그들도 우리처럼 >. 장선우 감독님의 < 너에게 나를 보낸다 >. 제가 아카데미에 입학한 게 94년도인데, (박광수의) <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 ( 허진호 의) < 8월의 크리스마스 >는 훨씬 뒤였고. ( 정지영 의) < 남부군 >. 김유진 감독의 <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도 유영길 감독님이죠. 유영길 감독님이 나를 감독으로 인정해주고, 같이 쇼트에 대해서 얘기할 수도 있고 그러면 나도 충무로 감독인 게 아닌가. 유영길 감독님은 성품도 점잖으시고, 게다가 젊은 감독들이나 새로운 시도를 하려는 감독에게 잘해주신다, 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곤조도 안 심하시고. (웃음) 당시 아카데미 동기였던 조형기 촬영감독이 유영길 감독님의 조수생활도 잠시 했었고. 유영길 촬영감독님에 대한 동경이 있었죠. 그런데 제가 입봉하기 3-4년 전에 98년에 돌아가셨죠. 그리고 90년대 장선우 감독님 영화를 되게 좋아했어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도 참 아름다운 영화고 <그들도 우리처럼>도 아름다운 영화라고 생각했었는데, 마음적으로 더 끌렸던 건 장선우 감독님 영화였어요. <너에게 나를 보낸다>나 < 경마장 가는 길 >은 정말 좋아했었고. < 우묵배미의 사랑 >은 거의 대사를 외우다시피 했었죠. 집에 비디오를 아직도 갖고 있는데, 아, 그 영화는 블루레이가 나와야되는데. 그때 삐삐 시절에 인사말에 <우묵배미의 사랑>의 대사를 입력하고 다녔어요. 지금 생각하면 유치하지만 (음성을 흉내 내면서) “혹시 백일도 선생 아니십니까?” 이대근 씨와 박중훈 씨가 논에서 만났을 때 그 대사. (웃음) 박중훈 선배님과 별로 친하지 않았는데 작년 부산에서 만나서 새벽까지 술 마시면서 <우묵배미의 사랑> 시절을 직접 들었어요. 거의 포장마차의 Q&A같은. <그들도 우리처럼>도 하셨잖아요. 박중훈 선배님께 직접 듣는 두 영화에 관한, 그 두 작품은 똑같이 90년도에 나왔지만 전혀 다른 영화잖아요. 장선우 감독님이 <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으로 인해서 그렇게 되신 건 굉장히 안타까운 일인 거 같아요. 더 많이 작품을 하시면 좋았을 텐데. < 우묵배미의 사랑 > 정성일 _ 약간 우회를 하고 싶습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를 따라가면서 영화 안에서 차례차례 한국을 지워간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시작할 때는 동시대 한국을 찍었고, 그런데 두 번째 영화에서 동시대 한국을 버려두고 뒤로 물러나서 86년에서 91년 화성으로 옮겨갔습니다. 게다가 여기서 화성은 시간의 지표가 텔레비전과 라디오가 아니라면 잘 잡히지도 않습니다. 다시 한강으로 돌아왔다고 하지만 괴물이 나타나면서 한국의 풍경 자체를, 말하자면 불길하게 만드는 거죠. 거기 있을 수 없는 어떤 잉여가 나타나면서. 그리고 나서 이상한 < 마더 >가 있습니다. 아주 이상한 영화. 이 영화는 한국의 불가능한 지리학에 관한 영화입니다.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거기가 어딘지 알 수 없는. 그 동네 사는 사람도 저 골목이 우리 동네가 아닌데. 우리 동네는 저렇게 이어지지 않는데, 라면서 가상의 동네가 성립하는 영화입니다. 그리고 < 설국열차 >까지 오면 자기 영화 안에서 한국 자체를 블랙홀 안으로 계속 밀어 넣어버린다고 할까, 여기서 구체적인 한국 자체가 사라져간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봉준호 감독이 종종 구멍이라는 말을 쓰는데 이 부분이 미학적이거나 정치적 구멍이라는 블랙홀이라는 느낌에 멈추지 않고 무언가 다른 표현을 쓰고 싶어집니다. 저는 아직 그것을 표현할 개념을 찾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자기 영화 속에서 사라져가는 한국에 대해 어떤 생각이 있는 지 궁금합니다. 약간 과도하게 단순하고 과격하게 말하고 싶습니다. 한국을 부숴버리고 싶다는 생각. 봉준호 _ (잠시 생각) < 플란다스의 개 >는 심지어 제가 살던 아파트에서 찍었습니다. 신혼 생활을 했던 아파트와 제가 결혼 전에 살던 아파트 지하에서 찍고. 그 영화는 세트가 없었어요. < 살인의 추억 >은 아주 명확한 시공간 좌표가 있어요. 86년 화성에서 시작하는. < 괴물 >은 한강이 나오고. 글쎄, 어렸을 때 한국이나 한국 로컬리티와 아무 상관이 없을 수 있지만, 사진에 관한 아주 단순한 책에서, 바르트의 「밝은 방」 이런 책이 아니고, 사진 잘 찍는 법 이런 책이었는데 어린 제게 마음에 남은 것은 사진 잘 찍는 사람은 어떤 사람을 찍을 때 그 사람에게 점점 다가간다. 그 사람의 눈과 얼굴을 향해서. 점점 하나씩 빼면서. 못 찍는 애는 점점 뒤로 물러난다. 나무도 넣어야지, 저런 것도 넣어야지, 이렇게. 어린 마음에 그게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괴물>을 만든 후에 제가 초등학생 때 읽었던 그 문구가 떠올랐어요. <괴물>은 한강에 괴물이 나오지만 한 발 물러서면 못난 가족이 있고, 더 한 발 물러서면 한국 사회가 있고, 더 빠져 나오면 미국이 있다. 그런 식으로 물러났던 게 아닌가. 물론, 더 버라이어티하고 풍자의 전시장을 더 좋아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왠지 그런 작업은 한 번으로 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점점 사람을 향해 다가간다. 그게 김혜자 선생님의 얼굴이었던 거 같아요. 다 지우고 싶은 거예요, 다른 것들은. 그때 < 마더 >를 준비할 때 그런 충동이 있었어요. 김혜자의 눈을 찍는 영화다. 다가가자, 더 다가가자. 영화에 핸드폰이 나오긴 하지만 시대가 뭔지 애매하게. 핸드폰이 나오지만 로케이션은 80년대인 거 같기도 하고, 도시인거 같기도 하고, 시골 같기도 하고, 또 그 언저리인거 같기도 하고. 그렇게 하나씩 지울수록 김혜자 선생님의 얼굴에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나서 <마더>의 흑백 버전에서는 컬러마저 지워버린 거죠.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애초의 의도가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버전만 남겨야 한다면 흑백을 남기겠다고 말한 겁니다. 어쨌든 <괴물> 이후 <마더> 때 한국을 블랙홀에 밀어 넣는다, 이전에 그런 단순한 충동이 있었던 거 같아요. 사진을 찍을 때 점점 그 사람의 눈을 향해 다가간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처럼요. 그렇게 <마더>를 찍었다고 자평했었거든요. 그래서 < 설국열차 >에 맘 편하게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온갖 나라 사람을 모아놓고 기차라는 용광로에 쑤셔 넣어서. 무대 자체가 이동하는 거잖아요. 단순 추상화된 기차라는 섹션, 이 섹션에 좌표가 없는 거죠. 송강호 , 고아성 한국 캐릭터가 나옴에도 불구하고. 사실 지금 개봉하는 핀란드 관객들은 그 사람이 한국어를 안 하면 그들이 한국 사람인지도 모를 거예요. 우리가 노르웨이어와 스웨덴어를 구별 못하는 것처럼 한국어와 중국어를 구별 못하는 북유럽 사람들이 보면 송강호, 고아성이 한국말을 하는지 한국배우인지 모를 거란 말이에요. 그런 느낌을 원했거든요. 일부러 송강호 씨가 김치 얘기를 한다거나 태권도 얘기를 하지 않게 했어요. 한국이 아니라 동양인이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봤습니다. <살인의 추억>이나 제가 살았던 아파트에서 찍었던 <플란다스의 개>를 보면 정말 멀리 돌아온 거죠. 정성일 _ 산만하게 질문한다고 했으니 다시 산만하게 돌아오겠습니다. (웃음) 봉준호 감독에게 한국영화는 김기영 입니다. 여러 차례 김기영 감독님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셨습니다. 이를테면 다른 자리에서 다른 감독들로부터 자주 호명되는 유현목 , 이만희 , 하길종 , 이장호 의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봉준호 감독에게 임권택 은 무엇입니까? 봉준호 _ 김기영 감독님을 한국 영화다, 한국 영화는 김기영이다 라고 생각해보지 못했습니다. 이마무라 쇼헤이나 신도 가네토나 (아르튀르) 립스타인 같은 분들 중 한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김기영 감독님이 한국적이다, 한국 영화. (잠시 생각) 이를테면 일본 영화는 오즈다, 라는 식의 접근으로 김기영 감독님을 선택한 적은 없다고 생각해요. 그냥 너무 재밌는 거예요. 나를 미치게 하는 요소가 있어요. 이장호 감독님의 영화들, < 바람 불어 좋은 날 > < 바보선언 >이나 < 과부춤 > 이런 것도 엄청나게 좋아합니다. 김기영 감독님의 영화 팬으로서, 팬심 이런 거는 압도적으로 큰 거는 사실입니다. 그분에 관해서 많이 수집했고 책이건 비디오이건. 하지만 김기영 감독님이 한국 영화고 충무로다. 일본 영화의 오즈다, 라고는 한 번도 생각 못했어요. 임권택 감독님은 뭐랄까, 동경하는 부분, 존경과 또 다르죠. 물론 존경하지만 내가 정말 할 수 없는 것들만 다 하실 수 있는 분. (잠시 생각) 그 분이 갖고 계신 스타일이나 경지 같은 거는 제가 이해하거나 손에 안 잡히는 부분들이 많아요. 그리고 임권택 감독님은 몇 편 안되지만 제 영화를 어떻게 보셨을까 이런 게 항상 두려운 마음으로 궁금하죠. 저는 임권택 감독님 영화에서 훔쳐다 쓴다, 존경의 의미에서의, 그런 게 저에게는 불가능 한 거 같아요. 스타일이나 스케일이나 하시는 방식이 아름답고 동경의 대상이지 제가 어떻게 할 수 없어요. 새끼발가락 하나라도 걸치거나 오마주하거나 응용하거나 그런 건 아닌 거 같아요. 제가 가장 최근에 본 건 (작년) 부산영화제에서 < 아제아제 바라아제 >와 오늘 아침에 < 짝코 >를 봤어요, 영상자료원의 DVD로. 그게 되게 좋아했던 임 감독님 영화인데 아주 옛날에 방송에서 해줬던 거라 제대로 된 프레임으로 본 건 오늘 처음 이었습니다. 다시 한 번 느끼는 거지만, 모르겠어요,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를 보고 항상 느끼는 감정은, (한참 생각) 관객으로서가 아니라 새까만 후배로서 영화를 찍는 거리라고 해야 하나, 사건이나 인물이나 어떤 감정이나 되게 시니컬하고 냉소적이고 차가운 거리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떤 감정을 강요하는 관객을 특정 위치로 몰아넣는 것도 아니고 특유의 선선한 느낌? 선선한 바람을 쐬는, 분명 아무것도 어떤 방향으로 몰고 가거나 관객을 푸시(push)하지 않는데 감독님이 세팅한 대로 두 시간을 따라가다 보면 가랑비에 옷 젖듯이 감정에 푹 젖게 되는, 그런 게 재밌잖아요. 객관적이고 냉소적인 거리 또는 주관적이고 감정을 저킹(jerking, 갑자기 낚아채버리기도)하는, 그 양쪽 다 아닌 거 같아요. 그 느낌이 어떻게 나오는지 모르겠어요. 아무리 상상을 해도. 예를 들어 관객을 되게 몰입되게 몰고 가다가 쇼트를 바꿔서 어떤 의도된 디스탠스(distance)를 주면서 관객들을 긴장하게 만드는 그런. 삑사리의 장난을 저는 칠 수 있지만 임권택 감독님께서 축적되고 쌓는 느낌을 저는 모르겠어요. 어떻게 가능하고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는지. 작품마다 상대적인 차이가 있겠죠. < 길소뜸 >의 언덕배기에서 마지막 걸어가는 장면에서 상대적으로 더 서늘한 장면이 있겠고, < 서편제 >에서 오정해가 울면서 김수철 씨의 음악이 확 덮어버릴 때처럼 상대적으로 덜 들어가는 것 같은 것도 있겠지만. 임 감독님의 선선한 거리가 있는 거 같아요. 요즘 저녁의 선선한 날씨처럼. 선선하면서도 그 친구가 참 안됐어. 그 사건이 참 슬퍼. 그러면서도 전혀 울고 짜고 하는 건 아닌데, 묘한 거리가 분명히 있는 거 같구요. 두 번째로 놀랍고 신비로운 것은 오늘 <짝코>를 보면서 다시 느꼈지만, <아제아제 바라아제>를 보면서 또 느꼈지만 세월의 두께. 두 시간의 러닝타임 안에서 늘 영화라는 게 시간이 비약하거나 점핑하기도 하고 시간이 확장되기도 하고. 그걸 다루는 게 감독의 일이지만 영화 전체의 스케일에서 시간이 흘렀다, 세월이 흘렀다, 개인이 세월을 감당한다는 느낌을 임권택 감독님처럼 표현할 수 있는 분은 유일무이한 거 같아요. 예를 들어 < 시네마천국 >에서 영화 초반 보여주다 말았던 키스 씬들을 라스트에서 다 보여주고 엔니오 모리꼬네 음악이 엄청 높은 볼륨으로 막 커지면서 관객들 다 울고, 물론 좋죠. 그것도 세월의 거리가 있고 알프레도는 지금 없고 그 사람이 모아둔 키스 씬 자투리만 남았지만 거기서 표현되는 영화의 시대, 광장에서 영화를 보던 시대, 알프레도의 시대는 갔고 극장은 허물어지고 온갖 것을 열나게 박아놨지만 거기서 느껴지는 세월의 거리와는 게임이 안 된다고 생각해요 훨씬 작은 단위의 시퀀스에서도 임 감독님은 놀랍게 그것을 표현하시던데 그 비밀이 뭔지 모르겠어요. 미국식 에픽, 소위 서사. 오늘 <짝코>를 보니까 베르톨루치의 < 1900 >도 생각이 나더라구요. (로버트) 드니로와 (제랄) 드파르디유가 애기 때부터 십년에 걸친 얘기잖아요, 지주와 소작농의. 최근 디스크 두 개짜리의 확장버전도 봤지만, 거기서도 드니로가 머리 허옇게 바르고 나오지만, 임권택 감독님만큼 세월의 두께를 표현하지 못하는 거 같아요. 나이든 분장을 잘하고 못하고가 아닌 거 같아요. 영화 전체 리듬을 어떻게든 본능적으로 컨트롤하시기 때문에 그런 느낌이 있는 거 같아요. < 취화선 >에서 최민식 아저씨랑 안성기 선배님이 재회하는 장면, 눈발이 날리면서 갯벌에서 멀리서 찍잖아요. 그때 울컥하고 올라오는 감정은 최민식 분장했네. 안성기 선배 머리 분칠했네. 롱 쇼트에서 서로 껴안네, 이런 게 아니라 저는 거기서 되게 실제 세월의 감정이 느껴져요 <아제아제 바라아제>에서 강수연 선배가 먼 길을 돌아서 원래 멘토인 스님 앞에서 돌아왔을 때의 느낌들. 그 모든 일들을 섬에서부터 탄광에서 부터해서 그런 두께의 느낌이 전해오거든요. 유인촌 , 한지일 , 그리고 안병경 님을 거쳐 거쳐 오거든요. 그 모든 세월을 겪고 돌아오는 느낌. 그 느낌의 비밀을 저는 잘 모르겠어요. <서편제>에서도 과거와 현재의 플래시백. 오늘 다시 본 <짝코>에서도 김희라 선배와 최윤석 씨가 다 늙어서 갱생원 옷을 입은 채 서울시내로 나오잖아요. 학생 때는 못 느꼈는데 되게 이상한 카메라 워크가 있더라구요. 요즘 젊은 사람이 아무도 시도하지 않는. 두 인물 노인네가 얽혀서 싸우는데, 이 말도 웃긴데, 이 사람은 망실공비요!!, 그러면서 소리쳐도 경찰들은 “후 캐어즈(who cares)?” 라며 무심하게 지나가잖아요.(웃음) 노인네 둘이 엉켜 싸우는데 두 주인공이 카메라 밖으로 나가버려요. 도시를 지나가는 차를 잡고 있다가 카메라가 가만히 있으면 이 두 사람이 알아서 프레임 안으로 (다시) 들어와요. 두 노인이 엉키고 있는 모습이 묘한 세월의 두께가 느껴지거든요. 금가락지를 발에서 빼고 임신한 여자를 데리고 산에서 김희라가 뛰어내리고 그 시간들과 단순히 노인분장이 아니라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 다른 평론가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예전부터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궁금했었어요. 유난히 세월의 긴 폭을 다룬 영화도 많이 하셨잖아요. < 씨받이 >처럼 집중된 스팟(spot)의 영화도 했지만 저는 세월의 폭이 되게 넓은 임 감독님 영화를 좋아하는데요. <취화선>도 그랬고, <아제아제 바라아제>도 그랬고, <짝코>도 그랬고. <서편제>도 포함이 되나요? 데이빗 보드웰의 개론서를 보면 스크린 듀레이션(duration), 플롯 듀레이션, 스토리 듀레이션으로 이렇게 기계적으로 3가지 듀레이션을 나눠놓고 서양 애들 식의 분석의 세계를 임 감독님은 이미 넘어서 있으신 거 같고, <짝코>나 <서편제>처럼 시간대가 막 왔다 갔다 하고 <짝코>는 플래시백에 또 플래시백이 있고 그렇잖아요, 그걸 벽돌을 쌓듯 축조하는 듯한. 세월의 몇 십 년, 두 사람이 걸어온 것. 베르톨루치의 <1900>보다 훨씬 더 세월의 두께가 깊게 느껴지는 거 같아요. 그 마술을 저는 잘 모르겠어요. 만나면 물어보고 싶은데 싫어하실 거 같아요. (웃음) 정성일 _ 임권택 감독님은 봉준호 감독이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영화를 찍어 오신 분이니까 당연히 영화를 보면서, 그러니까 봉준호 감독께서 영화를 하겠다고 결심하기 훨씬 이전부터 만들어왔으니까, 계속해서 무심하게 지나가다가 어느 순간 만나게 되었을 것입니다. 도대체 이 사람은 누구일까, 라고 임권택이라는 이름을 유심히 보기 시작한 영화는 언제부터입니까? < 씨받이 > 봉준호 _ < 씨받이 >. 87년 개봉작인 <씨받이>입니다. 그 영화를 비디오로 출시했을 때 대여해서 봤습니다. 극장에서 못 봤어요. (그 영화가 개봉한) 87년은 고3 때였습니다. 제가 88학번이니까요. 하지만 임 감독님의 명성은 이미 신문에서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이미 < 만다라 >를 하셨으니까요. 사실 강수연 누나 때문에 보게 된 거죠. 동경해 마지않던. 중고등학교 발정기 때 보게 되었습니다. (웃음) 제 꿈과 로망이었던 강수연 선배를 이제는 실제 몇 번 뵙고 얘기도 나눠봐서 지금 이렇게 얘기하려니 되게 쑥스럽네요. 강수연 선배덕분에 임 감독님 영화를 보게 된 거죠. <씨받이>에는 분명 야한 장면이 있을 거야, 씨를 받으려면 분명 야할 거야. 야한 장면 없이 씨를 받지 않겠지, 라는 아주 고등학생인 마인드로.(웃음) 집에 아무도 없을 때 빌려봤는데 별로 야하지 않았고, 다른 의미에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때는 아직 박광수 , 장선우 감독님이 등장하기 이전이었고, 제가 김기영 감독님에 빠지기도 훨씬 전이었고. 정성일 _ 저는 그 영화를 임권택 감독님과 인터뷰를 한 직후, 그때는 남산에 있던 영진공(영화진흥공사) 지하 시사실에서 박광수 감독과 함께 보았습니다. 남산에서 보고 나서, 그때 박광수 감독이 이장호 감독님의 조감독을 하던 시절이었는데 사무실이 종로 3가에 있어서 남산에서 보고 천천히 걸어갔습니다. 그때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무 말이 없이 그냥 걷기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박광수 감독이 혼잣말처럼 말했습니다. 딴 감독들은 다 자신이 있는데, 아직도 이 감독하고는 아직 안되겠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이 사람 앞에서 여전히 아이로 남아있는 기분이 드는구나. 봉준호 _ 박광수 감독님은 영화를 격투기처럼 생각하시나 봐요. 대결 같은. (웃음) 정성일 _ 진짜 말없이 걸어가다가 갑자기 그 얘기를 했어요. 그리고 그 마음은 진심이었고 아마 평생을 담아두신 것 같아요. 결혼하면서 임 감독님을 주례로 모시고 지금도 매년 새해가 되면 세배를 하러 오시니까요. 봉준호 _ 저도 강수연 의 뭔가를 영접하는 마음에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틀었다가 어, 하고 되게 놀랐어요. 첫째, 메시지가 그렇게 강렬할지 몰랐었어요. 조선시대 양반사회에 대한 얘기가 굉장히 직접적이지 않나요, 시작부터. 마당에서 강수연 언니가 뭘 하는데 안에서 사대부 양반들이 모두 모여 제사나 그런 걸 길게 논하고 있잖아요. 그런 사람들이 살아가는 집이 시각적으로 강력하게 형상화되어서 보여질 때, 이 집의 기와집의 기하학적 패턴들, 생각나는 게, 그 장면에서 기와지붕들이 구중모 기사님의 렌즈로 포착되었을 때 아지랑이가 막 피어오르잖아요. 아마 렌즈 밑에서 버너 같은 걸로 뭘 피우셨던 거 같아요. 그런 비주얼도 처음 보는 거 였구요. 완전 다른 영화구나! < 씨받이 >를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강수연 님이 별로 야하게 안 나왔다는 실망감을 압도하는. (웃음) 그때부터 임권택 감독님 영화를 봐야한다. 그래서 < 아제아제 바라아제 >도 서울극장에서 개봉할 때 가서 봤던 거고, <씨받이>와 <아제아제 바라아제> 사이에 있던 < 아다다 >는 극장에서 놓쳤는데 대부분 극장에 가서 봤어요. < 개벽 >, < 서편제 >, < 태백산맥 >, < 장군의 아들 > 전부 다. 그리고 대학 때 제일 큰 취미가 황학동 가서 비디오 사는 거였는데, 동대문운동장 지나서 4호선 역에서 내려가서 개봉하는 영화들뿐만 아니라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죠. < 길소뜸 >, < 티켓 > 이런 작품들 비디오로 봤습니다. 거기 사인도 받았는데 플라스틱이 아니라 비닐 케이스 밑으로 커버를 빼는. < 천년학 > 행사 뒷풀이 때 거기 종이 케이스에 사인도 받았습니다. <티켓> 마지막 장면에서 김지미 여사가 품에서 달걀을 꺼내듯이 (임 감독님의 비디오 자켓을 꺼내들면서) 슬그머니 다가가서 저기 너무 실례지만, (하고 인사를 드리니 임 감독님이) 자네 < 괴물 > 신기해, (라고 하셨을 때 개의치 않고) 아, 저기 (여기에 사인을 좀) 이러니까 굉장히 좋아하시더라구요. (웃음) <길소뜸>, <티켓>, < 만다라 >는 테이프로 구했었죠. 영상자료원이나 회고전할 때 본 것도 있고, <씨받이>가 어쨌든 출발점이었던 거 같아요. < 장군의 아들 > 정성일 _ < 씨받이 >로 임권택 감독님 영화를 시작했다면 전혀 다르지만 뒤이어 만나게 된 < 장군의 아들 >을 보았을 때 느낌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봉준호 _ 이분이 어렴풋하게만 듣던(건데) 옛날에 장르 마스터였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 액션 그런 걸 한 번도 못 봤었거든요. < 만다라 >, < 씨받이 >만 머릿속에 있고. 근데 이 분이 한때 일 년에 4편씩 다찌마와리를 찍었다니! 그러다가 < 장군의 아들 > 보니 너무 재밌는 거예요. 특히 박상민이 싸울 때 직부감(vertical_high_angle)으로 찍은 쇼트들. 벽을 밟(고 뛰어올라 걷어차)는 장면. 미국 영화나 홍공 무술영화와 너무 다르고, 너무 재밌고 흥분되는데 동시에 6, 70년대 이분 액션영화는 어땠을까 추측해봤죠. 그때 그 가닥을 보여주시는 거구나 생각했어요. 재밌었어요. 장르 마스터였을 때 어떠했을까 추측해보게 되더라구요. 류승완이랑 얘기도 많이 해봤습니다. 자기도 벽 밟는 거 흉내내봤다고 하더라구요. (웃음) 인상적이었어요. 그 분이 <길소뜸>이나 <짝코>나 < 아제아제 바라아제 >나 그분 특유의 롱 테이크라든가 아주 유연하고도 마술 같은 리프레이밍(reframing)이라 해야 하나, 관객이 느끼지도 못하는 사이에 프레임을 새로 잡는데 조잡한 트래킹이나 줌에 의지하지 않고. 표준렌즈나 단렌즈(wide-lens)를 끼운 상태에서 굉장히 절묘하게 리프레임 되면서 모든 미장센이 완벽하다고 느껴지는 그런 굉장히 마술적인 순간이 많았거든요. 근데 액션을 찍을 때는 이 분이 그런 걸 어떻게 하시려나. 빠른 편집으로 그걸 또 하시더라구요. 반대로 막 싸우는데 겹쳐진 상태에서 (인물들 사이의 동선이) 하나도 엉키지 않고, 액션을 저렇게 찍으실 수도 있는 거구나. 심지어 아주 옛날부터 저렇게 찍으셨나보다. 아직도 임 감독님이 6, 70년대 찍으신 액션 영화를 못 봤어요. 하나만 추천해주시면 보고 싶어요. 어떻게 그렇게 하셨고 뭐가 같고 다른지. 정성일 _ 그렇다면 역시 저라면 < 원한의 거리에 눈이 나린다 >를 먼저 추천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제게 부탁의 기회를 주신다면 저는 봉준호 감독의 사극을 한번 보고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액션영화뿐만 아니라 임 감독님의 60년대 사극영화를 보신다면 몹시 흥미롭게 보실 수 있으실 거 같아요. 봉준호 _ 저는 임 감독님의 사극은 유인촌 , 김진아 의 < 연산일기 >만 보았을 뿐입니다. 60년대 사극영화도 보고 싶네요. < 망부석 > 정성일 _ 추천한다면 저는 세 번째로 찍은 < 망부석 >이라는 영화를 먼저 고르겠습니다. 약점도 동시에 있지만 이미 세 번째부터 이 사람은 완성된 영화를 만들고 있었구나, 라는 당혹감마저 불러일으킨다고 할까요. 31살에 만든 신상옥 규모의 영화라고 할까. 봉준호 _ 컬러인가요? 정성일 _ 흑백으로 찍었습니다. 임권택 감독님의 첫 번째 컬러 영화는 67년에 찍은 < 요화 장희빈 >입니다. 이 영화도 사극입니다. 봉준호 _ 말씀하시는 거에 제가 동의하는 것은 마술적인 순간들이 임 감독님 영화에, 이런 말은 외람되지만, 임 감독님의 별로라고 하는 영화에도 꼭 한두 번 씩 있는 거 같아요. 정성일 _ 심지어 저렇게 포기한 영화에서조차도 이런 장면에서는 이렇게!! 봉준호 _ 빈손으로 돌아가시진 않는구나(웃음) (2부에 계속) (註)_ 인터뷰 중의 대화는 가능하면 오가던 이야기의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그래서 일부 어휘들이 영어 단어가 사용되는 경우에도 옮기지 않고 그냥 고스란히 남겨 놓았다. 그 까닭은 의미는 옮길 수 있으나 대화의 문맥에서 그 단어가 가지는 ‘뉘앙스’를 상실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또한 대화중의 일부가 두 사람 사이에서 서로 충분히 다시 설명해야 할 필요가 없어서 마치 점프 컷처럼 진행될 때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괄호를 치고 보충설명을 덧붙였다. 일부독자들에게는 필요치 않을 수 있지만 이 점 이해를 바란다. 또한 서로에게 약간의 어색한 표현들도 대화의 ‘라이브’한 무드를 돕기 위해 수정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