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리어
- 감독
- 조셉 안소니
- 제작년도
- 1959
- 출연
- 딘 마틴, 안소니 프란시오사, 셜리 맥클레인, 캐럴린 존스, 조안 블래크먼, 로버트 미들톤, 도나 더들라스, 재리 패리스, 프랭크 맥휴, 척 워실, 매리 트린, 유키 시모다, 앨런 휴윗, 마조리 버넷, 에딧 앤골드
청주 – 대구 – 케임브리지로 그들 각자의 터전이 분리됨으로 말미암아 스카이프(Skype)를 통해서만 만날 수 있는 삼총사 정희(김주아), 민영(윤아정), 수산나(손다현)는 이 썰렁한 재회를 통해 그들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새삼 확인하게 된다. 저들 사이의 간극은 청주 – 대구 – 케임브리지로 분리된 세 장소의 지리적 거리감만큼이나 벌어져 있다. 여고 시절을 동고동락한 세 친구가 스무 살이 되면서 변화해가는 역동성을 묘사하는 < 성적표의 김민영 >(2022)은 물리적 거리감을 실재적이고 심리적인 차원으로 은유하는 이야기이다. 누구나 한번쯤 겪어봤을 우정이라는 감정을 고요하고 섬세하게 담아내는 이 영화는 ‘김민영’을 평가 대상으로 집중하여 관찰하는 제3자의 시선으로 진행된다. 환상과 추억으로 일상을 확장하는 내러티브의 궤적은 청소년기의 종말에 대한 가볍고 우울한 자화상을 따라간다. 도입부는 임박한 시험을 앞두고 삼행시 동아리를 작파하기로 결정한 세 친구의 마지막 회합을 보여준다. 이날 이후 세 친구의 길은 갈라진다. 몽상가 기질의 정희는 수능을 보던 날 시계를 지참하지 않아 불안해하는 소년 정일(임종민)에게 손목시계를 주고 창밖을 보며 시간을 흘려보냄으로써 경쟁적인 교육 시스템과 작별한다.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하고도 태평해 보이는 정희는 우연히 정일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청주 나달 테니스클럽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는데 누구도 가치 있다고 말해주지 않는 이상한 상상을 소중히 여기면서 자신의 세계를 쌓아간다. 집과 테니스클럽 사이를 벗어나지 않은 좁은 활동반경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부지런한 모습을 보이며 심지어 테니스클럽 홍보를 위해 자신의 그림 재능을 활용하기도 한다. 한편 여고 시절부터 모임 결성을 즐겼던 민영은 대구의 대학에 진학하여 교내 청자켓 동호회 대표로 바쁜 나날을 보낸다. 아이비리그 중 하나인 하버드 대학에 입학한 수산나는 모두가 탐내는 자리를 확보하여 옛 친구들과 연결되기 어려워진다. 여름방학 동안 민영이 머무는 서울 집을 방문한 정희는 친구를 초대한 뒤 그 자신의 일에만 몰두해있는 민영에게 어색함을 느낀다. 민영의 마음은 서울의 더 나은 대학으로 편입하는데 보탬이 될 성적(학점)에만 집중되어 있다. 성적에 집착하는 대학생이 된 민영과의 재회는 정희에게 명령으로 가득 찬 사회에서의 성공에 대해 조용한 자각을 준다. 뚜렷한 근거 없이 학점 교정을 탄원하는 시시한 대학생이 되어 친구를 투명인간 취급하는 민영에게 성적표를 남기고 정희는 돌아선다. <성적표의 김민영>은 스무 살을 지나갔거나 곧 지나갈 관객들에게 위로가 되길 바라면서 우정이 서서히 해체되는 과정을 세심히 관찰한다. 느린 서사의 진행은 다소 우울한 분위기를 강조하지만, 곳곳에 뿌려진 건조한 유머는 안도감을 제공하면서 몽상가이자 예술가로서의 정희의 본성을 포착하는 것을 돕는다. 이재은, 임지선 공동감독은 각자의 삶을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가려던 두 친구의 나란했던 자리가 조금씩 이지러지는 순간들을 제시하면서 한동안 마음에 남는 애틋한 순간들을 보여준다. 보드게임, 햇반, 배드민턴 라켓이 담긴 캐리어를 끌고 상경한 정희의 재회에 대한 상상은 슬프게도 현실에 부응하지 못한다. 앉은뱅이 책상과 노트북을 떠나지 않는 민영은 정희가 더 나은 교육의 기회를 져버렸다고 비난하지만 그 자신의 소홀했던 학업성취를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보상하려 한다. 점차 한국적으로 변해가는 민영의 위선에 비해 정희의 상상의 나래는 실제 우정 장면과 상상의 우정 장면을 하나의 그림으로 엮는다. 홀로 남겨진 정희는 민영의 일기와 개인 영상을 발견하고 민영의 우정을 새로운 시각으로 재검토하게 된다. 이는 여고 시절의 친우(親友)가 멀어져가는 상황을 받아들이게 하고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도록 이끈다. 현대 사회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자아의 희생을 의미하는가? 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운 서울집에서 두 사람의 차이가 표면화되는 상황의 장면 연출은 탁월하다. 민영이 단 하루로 시한을 한정하였으나 정희의 목적은 옛 시절처럼 민영과 ‘룸메이트’가 되는 것이다. 여고 시절 기숙사 방과 군에 간 민영의 오빠 자취방은 미묘하게 대조된다. 여고 시절 기숙사에서 나란했던 정희와 민영의 침대는 일치된 이상을 향하고 있던 존재의 조건을 묘사한다. 민영은 한국에서 가장 보수적이라는 정평이 난 도시인 대구가 너무 한국적이어서 지루하기 때문에 서울에 있는 대학에 편입하고 싶다고 말하지만 사회적 관습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길을 개척하기로 결정한 친구 정희에게는 냉담하다. 자취방에서 두 사람의 배치와 자세, 카메라 위치는 엇갈리는 두 친구의 관계를 시각적으로 기술한다. 문과 거울, 방바닥을 어지럽히는 잡동사니들, 신체적 제스처 따위가 교착된 관계를 보여주면서 두 인물을 분리하는 촉매가 된다. 민영의 과업에 동참하여 교수에게 탄원 메일을 작성하는 것을 돕는 정희에겐 나의 친구가 좀 유치해진 것은 아닌지 걱정하는 마음이 공존한다. 한편, 민영은 정희의 선택을 무시하며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더 현실적이 되어야함을 강조한다. 한국에서 청소년 성장 서사의 상투형은 경쟁적인 입시 제도로부터 비롯되어 성인이 되어서까지 이어지는 학위, 직업, 가족을 형성해야 하는 현실 사이의 괴리이다. 사회적 기준이 제시하는 표준적 삶으로부터 벗어나는 인생의 고충은 성장 서사의 단골 레퍼토리이다. 이는 <성적표의 김민영>의 주제이기도 하나 이 영화는 관습적이고 억압적인 사회에 저항하는 상상의 힘을 지지하며 성인이 되기까지의 험난한 길을 묘사하는 무미건조하고 유머러스한 스타일을 창안해냄으로써 통상의 성장담과 다른 길을 간다. 눈치조차 성공의 덕목으로 간주될 수 있는 한국에서 정희는 사회적 관습을 완전히 무시하지 않는다. 다만 그런 삶을 사는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받지 못했을 뿐이다. 바쁜 대학 생활을 보내고 있는 민영과의 멀리 떨어진 거리에도 불구하고 공감은 피어날 수 있을까? 두 공동감독은 점차적으로 서로 분리되어가면서 세상을 헤쳐나가는 젊은 여성들의 내면적 삶을 유머와 솔직함, 연민으로 다룬다. 시트콤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 풍으로 상상된 제주 여행 삽화는 진부한 공간을 현실의 기억과 상상의 장면들로 채우는 정희의 기질을 잘 보여준다. 소원과 애정 사이를 오가는 순간들은 섬세한 연출력 덕분에 잘 다루어지고 있으며 스토리를 따라가는 캐릭터의 성장과 변화를 신뢰하게 한다. 정희에게서 우리는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관찰할 수 있고, 환상과 오류의 차이를 평가할 수 있으며, 자신의 정체성을 브랜드화하기보다 현실화하는 데 관심이 있는 사람을 만난다. 학력 중심의 소비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한국 사회에서 사회적인 평판에 기대지 않고 주체적으로 삶을 영위하는 스무 살의 모습을 본다. 정희는 민영의 우월한 태도에 상처를 받지만 우정을 회복하여 즐거운 하루를 보내기 위해 민영이 그녀를 계속 무시하는 동안에도 온건한 태도를 유지한다. 정희를 혼자 남겨둔 채 떠나는 민영의 일기는 낮은 자존감과 미래에 대한 불안을 암시하며, 친구에게 자신의 불안을 투사하는 소녀의 감정을 보여준다. 친절한 태도와 타인에 대한 관대함을 바탕으로 정희는 친구의 더 나은 자질을 칭찬하는 동시에 민영의 위선과 결점을 가감 없이 지적하는 성적표를 작성한다. 정희는 ‘한국인의 삶’에 F를 주면서, 좁은 땅에서 바쁜 일상을 보내며, 남의 눈치를 보면서 안정된 삶을 쫓는 사람들보다 덜 한국적이 되어야 한다고 충고한다. 그녀의 불안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 사회적으로 억압적인 문화에 대한 온건한 비판을 제시하는 이 사려 깊은 드라마는 일탈적인 공상의 강렬함을 소유한 자유로운 영혼의 정희가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받아들이기로 작정한 성숙한 인간이라고 설득한다. 완전했던 세계의 파괴, 우정의 몰락을 형상화하기 위해 용의주도하게 이야기를 쌓아가는 공동 감독은 ‘삼(3)’이라는 숫자를 통해 이를 암시한다. 숫자 삼(3)의 논리는 무엇인가? 수비학(數秘學)에서 지혜와 이해, 창의의 수로 간주되었던 삼(3)은 과거, 현재, 미래로 구획된 시간의 세(3) 축, 탄생, 삶, 죽음으로 이어지는 생의 삼(3) 주기로 약호화된다. ‘조화’와 ‘일체감’, ‘통일성’을 상징하는 삼(3)은 세(3) 개의 꼭짓점을 연결한 삼(3)각형처럼 삼위일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인생에서 호재와 악재는 세(3) 단계를 거쳐 온다고 하며, 가장 이상적인 스토리의 구성은 삼(3)막의 행위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되곤 한다. 내쳐 <성적표의 김민영>은 삼(3)의 해체, 몰락에 관한 스토리라고 할 수도 있다. 삼(3)행시 짓기 동아리로 하나가 되었던 세(3) 친구의 분리는 삼(3)행시 모임을 중단하게 되면서 시작된다. 삼(3)행시는 단어를 이루는 세(3) 음절을 모체로 하나의 문리(文理)를 조형해내는 행위인 바, 그 결과는 단어의 본래적 의미를 벗어나 새로운 문맥을 창조하게 된다. 문학적 깊이마저 지니게 되는 저들의 삼행시는 그저 말을 지어내는 놀이를 넘어 진짜 ‘시’를 닮게 된다. 하나로 뭉쳐 삼(3)행시를 짓던 세(3) 친구는 세(3) 도시로 흩어지며 셋(3)으로 난 각자의 길을 가게 된다. 생은 따라야 할 목록, 결의안의 지침처럼 간단하다. 문제는 그렇게 살기로 결정하고 그것을 실행하는 것이다. 정희가 관리하는 테니스 코트의 경기로 환원하자면 이재은, 임지선 감독은 완강한 완력으로 라인을 타고 공을 보내기 위해 공격적으로 라켓을 휘두르는 대신 담장 바깥에서 담장 안 가까운 곳으로 보내야 하는 테니스공들처럼 스핀이 많이 걸린 스트로크를 구사한다. 겸손하고 소박한 <성적표의 김민영>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다가 점진적으로 그 깊이를 체감하게 하는 감정을 드러내면서 조금씩 스며드는 환멸을 묘사한다. 감춰진 감정들이 많은 이 영화는 이별은 감상적일 수 없으며 매우 가혹하지만 필요하다는, 희소성 있는 주제를 다룬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그런 곳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깊고 그윽한 숲속 어딘가, 정희가 그린 곳에서 살고 싶었던 마음처럼, 우리들의 친구가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그곳에 혼자 있으리라는 사실만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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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분( 정은경 )은 같이 살던 남자가 병으로 죽은 뒤, 고향 태백으로 돌아와 모텔에서 청소 일을 하며 지낸다. 필라테스 강사로 일하는 한희( 장선 )는 이 적막한 마을에서 수강생을 모으는 일에 어려움을 느낀다. 어느 날 밤, 한희는 강습소 앞에서 기웃거리는 영분과 마주하고 둘은 곧 강사와 수강생으로 만나는 사이가 된다. 혼자 사는 영분과 고아인 한희는 어쩐지 모녀 관계처럼 서로에게 애틋하고 다정해 보인다. 영화는 영분이 오래전 버린 딸이 한희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숨길 생각이 없다. 한희 또한 어느새 홀로 그 사실을 깨닫는다. 그러나 한희는 긴장감 때문인지 영분과의 강습시간에 숨이 차올라 꺽꺽대며 괴로워하는데, 그 모습에 충격을 받은 영분은 자리를 뜨고 만다. 이제 영분은 고향마저 떠나려 하고 한희는 그런 영분을 붙잡으려 한다. 그리고 둘은 영분이 한희를 위해 필라테스 학원 광고지를 잔뜩 붙여놓은 다리 위에서 엄마와 딸로 대면한다. 바로 이 한 장면의 힘에 이끌려 이 글을 쓴다. “네가 미워. 너 때문에 나는 훨훨 날아다니며 다 할 수 있었는데 못했어. 아, 끔찍해. 아, 갑갑해”라고 영분은 소리치고 “난 한 번도 안 미웠어. 어떻게 미워하는지도 모르겠어. 나 낳을 때 어렸잖아. 난 어른이야”라고 한희는 설득한다. 이 장면은 딸을 버린 엄마와 버려진 딸이 몇십 년 만에 진실을 대면하는 순간이지만, 여기에 우리가 떠올릴 법한 감정, 표정, 대사는 나오지 않는다. 용서를 비는 엄마와 원망하는 딸의 상투적인 형상은 여기 없다. 이 장면에서 영화의 목적은 단 하나처럼 보인다. 그것은 사과와 화해, 혹은 자기변명과 자기연민의 극적인 재현이 아니라, ‘나’를 부정하지 않는 두 얼굴의 교차, 두 얼굴의 서로에 대한 리액션 뿐이다. 영화는 다른 장치 없이 오직 영분과 한희의 얼굴 클로즈업만을 투박하고 간결하게 오가면서 이들의 지난 세월이 꾹꾹 눌러 담긴 목소리와 눈빛을 통해 둘의 과거와 현재, 심지어 불투명한 미래까지 한 장면에 응축시킨다. “나도 살고 싶다”는 엄마와 “나는 잘 살아왔다”는 딸. 통념적인 모성 서사의 구도를 뼈대로 삼으면서도 이 영화가 그 틀 안에서 보존하려는 건 엄마와 딸의 구구절절한 사연이 아니다. 엄마와 딸의 관계에 앞선 한 인간의 개별성을 이 장면은 주시하고 존중한다. 박석영 의 전작인 < 들꽃 >(2014), < 스틸 플라워 >(2015), < 재꽃 >(2016)은 버려진 소녀들에게 천착한 세계였다. <들꽃>에서 세 친구는 위태롭게 길 위를 방황하다 모텔에 감금됐고, <스틸 플라워>에서 이들 중 한 소녀는 친구마저 사라진 낯선 곳에서 남들이 버린 음식물을 주워 담으며 연명했으며, <재꽃>에서 그 소녀는 살아남지만, 이번에는 부모를 찾아온 어린아이가 소녀 주변을 맴돌았다. 박석영은 3부작을 통해 생존과 자립의 과정을 거친 소녀를 위로하고 싶었다고 말했고 <재꽃>은 확실히 앞의 두 영화와는 차별화된 세계로 보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3부작이 가족으로부터, 사회로부터 고립된 어린 여자들을 매번 가혹한 궁지로 밀어 넣어 이들의 생존력을 시험하며 이들의 버려진 상태를 얼마간 대상화하고 있다는 인상 또한 지우긴 어려웠다. 하지만 마침내 <바람의 언덕>에서 박석영은 버려짐의 상태를 전시하는 대신 그것을 남겨짐의 서사로, 남겨진 자의 시선으로 전환한다. 무엇보다도 그는 이제 버려지고 방치된 소녀의 상황이 아니라 떠난 여인의 심정 또한 헤아린다. 무사히 어른이 되어야만 하는, 안전한 어른이 되고 싶어 하는 세계가 아니라, 이미 어른인 세계. 그 세계는 여전히 험난하지만 적어도 솔직하고 성숙하다. <바람의 언덕>은 그렇게 다가온다. 다리 위에서 영분은 울먹이는 딸을 내버려 두고 떠난다. 그러나 영분이 딸에게 쏟아낸 거친 말들과 캐리어를 끌고 돌아서는 뒷모습이 위악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앞서 영화가 영분에게 선사한 한 장면에 대한 기억이 우리에게 남아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영분은 우연히 알게 된 택시기사 윤식( 김준배 )과 막걸리를 마시는 장면에서 술에 취해 자신의 인생을 되돌리고 싶다는 고백을 한다. 남자는 그런 영분을 바라보다 담담하게 말한다. “억울하긴 뭐가 억울해. 그 나이 때에도 다 진실이 있어요.” 허름한 주점의 고요함은 이내 영분이 부르는 노래로 깨어나고 카메라는 그 모습을 영분의 뒤에 서서 가만히 지켜본다. 이 장면의 깊이를 경험한 우리로서는 딸을 또다시 버려두고 “나도 살고 싶다”며 떠나는 영분의 발걸음을 무책임하다고 탓하지도, 멈춰 세우지도 못한다. 그러니 영분과 한희가 재회하는 에필로그가 이들에게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 확신하기는 어렵다. 바람 부는 황량한 겨울의 자연 속에서 마침내 둘이 나란히 앉은 모습,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바라보며 두려움을 고백하는 목소리는 이들의 해결되지 않은, 모순과 갈등이 진행 중인 내면의 상태인지 모른다. 이 영화의 포스터에는 겨울의 흔적이 사라진 따스한 풍경을 배경으로 영분과 환희가 꼭 끌어안은 모습이 담겨있다. 그 풍경의 평화로운 온기는 ‘바람의 언덕’에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 같다.
2015년에 만들고 2018년에 개봉한 첫 장편 < 파란 입이 달린 얼굴 >(2015)을 두고, 김수정 감독은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보고 싶은 것만 열심히 본다. 여기서 본다는 것은 눈의 기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르고 붙이고 나누는 내 머리 속의 활동을 말한다. 그렇게 열심히 보다 보면 그것이 ‘전부의 세계’가 돼버린다.” 인용문의 ‘나’를 관객의 응시를 지정하는 카메라로, ‘전부의 세계’는 카메라가 본 것을 편집 테이블에서 자르고 붙이고 나눈 뒤 투사하는 뇌 속의 스크린과 같은 ‘프레임’으로 바꿔 읽어도 문제는 없을 터다. <파란 입이 달린 얼굴>의 카메라는 (앙드레 바쟁 같은 이가 영화의 중요한 존재론을 구성한다고 여겼던) ‘프레임’의 안과 밖을 오가며, 주인공 서영과 그녀 밖의 세계 그리고 서영의 자아와 타자를 규정하는 경계를 오가는 모든 ‘비존재’들을 빼어나게 가시화한다. 그리고 김수정 감독은 신작 < 해변의 캐리어 >(2017)를 상재했다. 사전제작지원한 2017년 부산독립영화제 개막작으로 처음 상영된 다음, 2018년 11월에 열린 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 ‘독립영화여성감독전’에서 다시 보여졌다. “바다를 떠나는 여자와 바다에 도착한 남자의 맹렬한 하루”라고 간략히 소개된 <해변의 캐리어>(2017)는, ‘연극성’을 영화적 효과로 채용한다. 영화에서 ‘연극성’이란 무엇인가. 앙드레 바쟁은 『영화란 무엇인가』 중 「연극과 영화」 편에서, 연극과 영화의 관계는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오래되고 친밀하며, <햄릿><헨리 5세><맥베스> 같은 희곡의 영화화에 국한되지 않는다고 했다. 바쟁에 따르면, 영화의 ‘연극성’은 대사에 종속되는 각색, 또는 희곡을 사진처럼 복제하는 작업과는 다르다. 연극과 다른 영화만의 정체성을 만드는 차이로 바쟁이 꼽았던 두 가지 요소는 ‘배경’과 ‘데쿠파주’였다. 인간이 개입해야 성립하는 연극에서 세트가 하는 역할은 “극이 펼쳐지는 장소”일 뿐이다. 반면, 연출 행위가 적극 개입해야 존재하는 영화의 배경은 카메라가 움직이는 덕에 성립할 수 있다. 연극의 무대장치는 무대건축 구조의 한 요소로 머물기에 “물리적으로 폐쇄되어 있고 한정되어 있으며, 경계가 쳐진 장소”다. 한편, <해변의 캐리어>의 부산 광안리 바다와 그곳을 굽어보는 창이 있는 노래방의 낮과 밤은 연극적 표현주의의 효과가 극대화되는 무대인 동시에, 실재하는 자연과는 다른 특권적 자연, 즉 영화의 프레임이라는 세계를 이루는 상상적 공간이며 미학적 소우주다. 데쿠파주에 있어서도 김수정 감독은 발군의 창의력을 보여준다. <해변의 캐리어>의 프레임은 “주변 존재를 끊임없이 감지하는 현실의 일시적 결정”을 화편화한다. 자신의 퍼포먼스를 보았던 관객과 재회한 여자(김다인 분)가 나누는 대화와 포옹, 바다가 보이는 방을 찾는 남자(박종환 분)가 방문한 부동산 직원이 겨누는 총, 노래방을 방문한 손님들과 사장이 창출하는 리듬은, 관객이 연극 무대를 눈앞에 둔 듯 사건이 표출하는 희비극의 에너지에 공명하게 한다. 이러한 힘은, 장 콕토에게서 바쟁이 발견한 데쿠파주의 역량처럼, 쇼트-리버스 쇼트 촬영이 배우의 몸과 대사를 새롭게 분할하는 상상력에서 온다. 결국, <해변의 캐리어>에서 마주한 남녀 주인공의 “상호의식에 바탕을 둔 연극은, 연기가 현실과 대립하고, 공모가 무관심과 대립하며, 전례가 실익의 비속함과 대립하듯 세계의 다른 부분과 대립함을 필요로 한다. 의상이나 가면, 분장이나 언어양식, 또는 풋라이트 같은 것이 이와 같은 구별에 협력하고 있”다. 여기서 구별의 가장 분명한 징표는 무대인데, 대다수 프레임의 배경인 노래방과 바다가 분할된 몸과 대사를 구별하게 하는 무대다. “우리는 다만 공간이라는 단 한 가지 현실을 제외하고는, 영화의 영상으로부터 모든 현실을 퇴거시킬 수 있다”고 하면서, 바쟁은 다음과 같이 부연했다. 자연을 일절 고려하지 않은 공간 재현이란 있을 수 없으며, 스크린이라는 세계는 우리의 세계와 나란히 존재할 수 없고 우리의 세계와 대치하고야 만다. 기실 세계라는 개념 자체가 배타적인 공간이기 때문이다. “시간에 관해서도, 영화는 세계이며 우주요,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자연이기도 하다.” 역시 바쟁에 따르면, 인간이 드라마의 주요한 원천임을 부인할 이유는 없으며 그런 연유로 영화는 연극과 겹쳐질 수도 있다. ‘자연’과 ‘무대’, 이른바 ‘사실주의’와 ‘표현주의’의 경계를 자신의 몸과 목소리로 교란하는 두 주연 배우의 호연 덕에, <해변의 캐리어>는 연극적인 동시에 영화적이기도 하다. 어떤 “전부의 세계” 또는 우주를 ‘상연’하는 <해변의 캐리어> 속 바다와 카메라는, “일단 커다란 짐 가방을 다 풀고 보자”는 연극연출가 출신 감독의 의도를, 배우들과 더불어 한 시간 남짓한 자연으로 형상화한다. 올 가을 개봉 예정이다. *바쟁의 『영화란 무엇인가』 인용문은 ‘시각과 언어’가 출간한 1998년 한국어판(박상규 역)을 바탕으로 했으며, 필자가 일부 번역을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