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장미소녀 캔디
- 감독
- 이마자와 테츠오
- 제작년도
- 1976
- 출연
- 마츠시마 미노리, 최방란, 이노우에 카즈히코, 이도련, 코야마 마미, 박소현, 미츠야 유지, 윤지하, 키모츠키 카네타, 김용식, 이노우에 마키오, 이규연, 토미야마 케이, 나성균, 카와시마 치요코, 서영애, 나카타니 유미, 송도영, 코미야마 키요시, 이영달
유신에서 신군부 독재로 이어지는 1970~80년대에 대해 ‘한국영화 암흑기’라는 레이블을 붙이는 건 정설처럼 보인다. 사실이었다. 영화는 TV에 밀리고 있었고, ‘반공’과 ‘새마을 운동’을 내세운 국책 영화에 얽매인 영화계는 점점 뒤틀려 갔으며, 사전 심의와 사후 검열 속에서 크리에이티브는 서서히 증발했다. 산업적 토대의 붕괴, 불합리한 제도, 미학적 고갈이 동시에 진행되었던 이 시대는 몇몇 감독들의 개인기로 돌파하기엔 너무 어두웠다. 시스템이 붕괴될 때 가장 대표적으로 드러나는 현상은 무분별한 트렌드 추종이다. 1980년대는 그 정점이었다. 멜로드라마와 문예 영화와 스타 시스템을 토대로 1960년대에 황금기를 구가했던 한국영화는 1970년대에 서서히 무너졌고 1980년대에 난장판이 되었다. 멜로는 여전히 만들어졌지만 예전 같은 힘을 잃었다(진부한 신파의 클리셰에 빠져 있었다). 그 개념은 조금 모호하지만 ‘양질’의 문학 작품을 스크린에 옮겼던 ‘문예 영화’는 더 이상 영화화할 만한 소스를 구할 수 없었다(대신 1970년대부터 최인호나 조해일 같은 새로운 작가가 등장했다). 과거의 스타들은 일거에 물러났지만 그 공백을 채울 만한 스타는 도착하지 않았다( 안성기 가 유일한 희망이었던 시대였다). 1. 한수산 원작의 <거리의 악사>(정지영, 1987) 2. 이문열 원작의 <레테의 연가>(장길수, 1987) 3. 김홍신 원작의 <인간 시장>(김효천, 1983) 4. 미우라 아야코 원작의 <빙점 81>(고영남, 1981) 가장 심각한 건 ‘소스 부족’이었다. 1960년대엔 근대 단편 소설들이 ‘문예 영화’라는 이름으로 애용되었다(여기엔 ‘우수 영화’에 외화 수입 쿼터가 주어지는 현실적 이해관계도 작용했다). 라디오 연속극도 각광 받았고, 때론 일본 영화 시나리오를 그대로 가져온 경우도 있었다. 1970년대는 서서히 재료가 떨어졌고 1980년대에 오면 바닥을 드러낸다. 새로운 광산이 채굴되어야 했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방식의 하이브리드 현상이 나타난다. 심하게 말하면, ‘돈 될 만한’ 건 뭐든지 끌어다 썼던 1980년대였다. 여전히 ‘문학’은 가장 중요한 원천이었다. 1970년대 최인호와 조해일에 이어 1980년대엔 한수산 이외수 이문열 박범신 등이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영화계의 중요한 원천이 되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1980년대엔 훨씬 더 대중적인 콘셉트가 강화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시장』 시리즈의 김홍신은 대표적이었으며 김성종 유홍종 백시종 김병총 등의 작가들도 가세했다. ‘시대정신’이었던 에로티시즘도 영향을 미쳤다. 외설 시비에 휩싸였던 염재만의 소설 『반노』가 대표적. <빨간 앵두> (박호태, 1982)도 최희숙의 소설이 원작이며, <매춘> (유진선, 1988)은 『매춘: 전국 사창가와 창녀 실태』라는 사회학 서적에서 온 것이었다. 전통의 부활도 있었다. 한동안 맥이 끊어졌던 문예 영화의 흐름은 에로티시즘을 통해 재등장했고 나도향과 김유정이 소환되었다. 일본 소설도 영화화되었다. 미우라 아야코 원작의 <빙점 81>(고영남, 1981)은 큰 흥행을 거두었고 호즈미 타카노부의 <수렁에서 건진 내 딸>(이미례, 1984), 하시다 스카코의 <오싱>(이상언, 1985), 나쓰키 시즈코의 <W의 비극>(김수형, 1985형) 그리고 이쿠시마 지로의 <한쪽 날개의 천사>(이성민, 1987) 등이 이어졌다. 1960년대 한국영화가, 당시 문화 교류가 없던 일본 소설이나 시나리오를 가져가 음성적으로 번안해 영화화했다면 그 원천을 밝혔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모습이다. 미즈키 교코 원작의 만화 『캔디 캔디』도 영화화되었다. 1. <이장호의 외인구단>으로 최재성은 최고의 청춘스타가 되었다. 2. <신의 아들>은 최민수의 데뷔작이다. 3. 강철수 원작의 <팔불출> 4. 한희작 원작의 <한희작의 러브러브>. 가장 강력한 소스는 만화였다.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을 영화화한 <이장호의 외인구단>(이장호, 1986)이 장안을 뒤흔들기 전, 1980년대 초부터 꾸준한 시도가 있었다. 그 시작은 길창덕 화백의 <순악질 여사>(김수형, 1980)였다. 이야기보다는 ‘순악질 여사’라는 캐릭터를 가져온 면이 강하며, 장미희가 주인공을 맡았다. 이후 1980년대에 약 20편가량의 만화 원작 영화가 등장하는데, 스포츠 신문 연재나 만화 가게나 당시 쏟아지던 만화 주간지를 통해 대중적 인지도를 쌓은 터에 흥행성이 꽤 괜찮았다. 이현세를 주로 이야기하지만, 이 시기 만화 원작 영화의 주요 인물은 강철수였다. <팔불출>(고응호, 1980)의 원작자였던 그는 이후 영화 쪽에 큰 관심을 보이며 <사랑의 낙서>(심재석, 1988)엔 아트 디렉터로 참여했고, 1989년엔 <발바리의 추억>으로 직접 메가폰을 잡는다. <가루지기>(1988)의 고우영 감독도 만화가에서 영화감독으로 잠시 업종 전환을 한 케이스인데, 1980년대의 만화는 충무로에 원작뿐만 아니라 인력도 공급한 셈이다. 그리고 <이장호의 외인구단>이다. 당시 프로야구 열풍과 이현세의 만화에 대한 컬트적 반응을 힘입은 이 영화는 영화 제목에 ‘공포’가 들어가선 안 된다는 당시의 심의 규율 때문에 『공포의 외인구단』에서 <이장호의 외인구단>으로 개명해야 했는데, 이것이 액땜이 되었는지 서울에서 약 28만 7,000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빅 히트를 기록한다. ‘까치’ 오혜성 역을 맡았던 최재성은 당대 최고의 청춘스타가 되었으며, 동네 전파사마다 정수라가 부른 주제가 ‘난 너에게’(“난 네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가 흘러나왔다. 프로야구의 인기, 이장호 감독의 흥행력 등 이 영화의 성공 원인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핵심은 이야기였다. 당대 한국영화와 비교해볼 때 이 영화가 지닌 극적 요소는 두 배 정도는 셌다. 강한 승부욕, 목숨을 건 순애보. 팽팽한 긴장 관계, 뼈를 깎는 극기 정신…. 떡볶이로 치면 고추장이 아닌 캡사이신 맛이었고, 그 강렬함에 젊은 관객들은 반응했다. 이 영화의 성공으로 일련의 스포츠 원작 영화가 등장하는데, 박봉성의 『신의 아들』, 이현세의 『지옥의 링』, 허영만의 『카멜레온의 시』 등 복싱 소재 만화들이 영화화되었다. 1980년대 ‘복싱’은 여전히 있기 있는 스포츠였고, 여기에 혹독한 트레이닝과 청춘의 고독과 비극적 로맨스가 결합되었다. 안타까운 건 원작을 따라가지 못했던 인기였는데 완성도가 문제였다.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트렌드는 역시 ‘에로티시즘’이며 스포츠 신문 연재를 통해 성인 만화의 흐름을 이끌었던 한희작과 배금택은 주역이다. <서울 손자병법>(김현명, 1986)이 한희작의 원작이 지닌 지명도에 기대 제목 정도만 가져 왔다면, <한희작의 러브러브>(윤석태 김정진, 1991)은 아예 제목에 작가의 이름을 드러낸다. 당대의 섹시 아이콘인 강리나는 만화 캐릭터를 별 위화감 없이 소화하는데, 이후 배금택 원작의 <변금련>(엄종선, 1991)에서도 캐릭터와의 높은 싱크로율을 보여준다. 하지만 만화 원작 영화의 흐름은 1990년대엔 뜸해진다. 이현세가 직접 연출을 맡은 <아마겟돈>(1996)이나 김수정의 <아기공룡 둘리>(1996) 등 극장용 애니메이션 쪽에서 성과를 냈고, 이현세의 『카론의 새벽』을 옮긴 <테러리스트>(김영빈, 1995)와 허영만 원작의 <비트>(김성수, 1997)가 흥행했지만 1980년대만큼의 양적 성과를 내지 못한다. 다시 그 붐이 일게 된 건 2000년 이후. 여기엔 웹툰의 등장이 큰 역할을 했다. 1. <멋대로 해라>의 혜은이와 김동현. 그들은 이후 부부가 된다. 2. <너무 합니다>의 원작자이자 주인공인 김수희. 3. 박남정 주연의 <새앙쥐 상륙 작전> 4. <담다디>의 이상은과 민규. 최근 한국영화계에서 아이돌 출신 연기자들의 활약이 돋보이긴 하지만, 가요계와 영화계의 크로스오버 현상은 이미 198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이전 1960년대부터 주제가는 영화 흥행의 중요한 요소였고, 남진이나 나훈아 같은 슈퍼스타들이 은막에 진출하기도 했지만, 1980년대는 남달랐다. 지금으로선 상상할 수 없지만, 이 시기엔 당대의 히트곡 제목을 그대로 딴 영화들이 쏟아졌다. 그 노래를 부른 가수가 출연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 영화 내용도 노래 가사와 대부분 무관했다. 오로지 노래 제목의 인지도를 이용한 경우들인데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와 ‘비련’, 와일드 캣츠의 ‘마음 약해서’, 심수봉의 ‘그때 그 사람’, 윤시내의 ‘난 모르겠네’와 ‘열애’, 이정희의 ‘참새와 허수아비’, 김현준과 민해경의 ‘내 인생은 나의 것’, 임수정의 ‘연인들의 이야기’, 주현미의 ‘비 내리는 영동교’, 최진희의 ‘사랑의 미로’, 이선희의 ‘J에게’, 최성수의 ‘풀잎 사랑’ 등 수많은 히트곡들이 그 제목을 충무로에 빌려주었다. 물론 가수가 직접 영화에 출연한 경우들도 있었다. 지난 연재에서 이야기했던 전영록이나 송골매, 김형용 같은 청춘 영화의 스타들은 대표적인 경우. 이외에도 <나를 보러 와요>(이유섭, 1980)의 방미, <슬픈 계절에 만나요>(박남수, 1981)의 백영규, <잊혀진 계절>(이형, 1984)의 이용, <담다디>(김응천, 1989)의 이상은, <울고 싶어라>(배해성, 1989)의 이남이, <앗싸! 호랑나비>(원정수, 1989)의 김흥국 등은 노래의 주인공이 직접 카메라 앞에 서는 경우들이었다. <너무 합니다>(남석훈, 1984)은 김수희의 자전적 이야기로, 그녀는 원작자이자 주연 배우로 참여한다. 노래와 상관없이, 가수 자체의 인기로 영화계에 진출하는 경우도 많았다. <아낌없이 바쳤는데>(박호태, 1980)의 심수봉, <멋대로 해라>(김정현, 1980)의 혜은이(1970년대부터 배우 활동), <그 사랑 한이 되어>(이형표, 1981)의 조용필, <날마다 허물 벗는 꽃뱀>(강대선, 1982)의 이은하, <흑녀>(강대선, 1982)의 인순이, <졸업 여행>(오성환, 1985)의 김범룡, <새앙쥐 상륙 작전>(김정진, 1989)의 박남정 등이다. 연기력을 인정받진 못 했지만, 당시 이 영화들은 그 화제성으로 이슈가 되었다. 당시 가요계와 영화계의 끈끈한 관계는, 가요 쪽의 붐에서 기인했다. 트로트 중심이었던 한국 대중가요는 1980년대 완전히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며 대중문화의 중심이 되었고, 아이돌 문화를 형성했다. 이 시기 침체기를 지나던 영화계는 가요계의 호황을 이용하려는 수많은 기획을 시도했고, 그 결과 수많은 ‘가요적 영화’들이 등장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영화들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그 흐름은 한국영화가 자생력을 서서히 지니기 시작하는 1990년대가 되면 사라지기 시작했다. 1980년대 충무로가 수혈받았던 또 하나의 원천이 있었다면 바로 TV의 코미디언과 개그맨이었다. 이전에도 영화와 방송을 겸하는 수많은 희극인들이 있었고 그 전통은 이주일로 이어졌다. 특히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김수형, 1980) <조용히 살고 싶다>(김수형, 1980) <얼굴이 아니라 마음입니다>(이형표, 1983) 등의 ‘유행어 영화’는 작은 트렌드를 이뤄 <웬일이니>(김종성, 1983) <난 이렇게 산다우>(남기남, 1985) 등으로 이어졌다. 이것 역시 대중문화의 인기를 영화로 끌어오려는 기획이었다. 새로운 경향은 개그맨들의 진출이었다. ‘아동용 SF 액션’에 대한 지난 연재에서 언급했듯, 1980년대의 수많은 개그맨은 SF 프랜차이즈의 중심이 되었는데, 그들은 아이들 영화를 벗어나 성인용 영화에도 종종 출연했다. 이외에도 서세원 주병진 김명덕 김형곤 김병조 등 당대의 인기 개그맨들은 대부분 영화계와 만났으며 전유성은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비디오 영화를 직접 연출하기도 했다. 1.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의 이주일. 2. <회장님, 우리 회장님>(엄종선, 1988)은 개그 프로그램을 영화화했다. 3. 주병진과 이미숙이 주연을 맡은 <가슴 깊게 화끈하게>(김수형, 1981) 4. 리메이크 영화인 <미워도 다시 한번 1980 - 1부>(변장호, 1980). 1980년대는 침체를 벗어나기 위한 강렬한 생존 욕구로 인해 숱한 하이브리드 현상이 일어났던, 용광로 같은 시기였다. 대중 문학계든 가요계든 만화계든 희극계든, 노래 제목이든 유행어든, 대중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요소가 있다면 주저하지 않고 접목시켰으며 그 중엔 적잖은 성공도 있었고 대부분의 실패가 잇따랐다. 수많은 속편 영화들이 있었고 리메이크도 적잖았으며 애교(?) 섞인 표절도 종종 있었다. 아무튼 살기 위해 모든 것을 했던 시절이었다. 새삼 던져보는 질문. 1980년대는 과연 한국영화의 침체기였나? 표면적으로는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이면을 살짝 엿보면 이 시대만큼 역동적이었던 시대도 드물다. 장르적으로 매우 다양했고, 영화 이외의 분야와 끊임없이 접점을 만들어갔다(그런 점에서 2000년 이후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생존을 위한 분투. 1980년대는 천박한 상업주의와 여기에 저항하는 힘, 과거의 관습을 지속하려는 의지와 돌연변이 같은 존재들이 뒤엉켜 기묘한 연대기를 써 가던 시대였다. 이 시대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은 이유는, 어쩌면 이토록 미로처럼 뒤얽힌 상황 때문일 것이다.
우리영화의 사극 분야에서 일가견을 지녔던 <카메라의 황소>. 고 최인현 감독은 90년 11월11일 타계했다. 영화계의 커다란 대들보 하나를 놓친 셈이 됐다. 인생 무상이 새삼 느껴지는 것은 그가 불과 62세의 나이로 세상을 등진 것. 단단한 체격에 늘 머플러를 둘러 메고 싱긋 웃음을 먹으면서 충무로를 거닐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신필름의 전성기였던 60년대 초부터 75년 이 회사 메이커 허가가 취소 될 때까지 영화 인생 모두를 신상옥 감독과 콤비로 일관한 그는 궁중의 복잡 미묘한 예의 범절은 물론 의상 소품에 이르기까지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이때를 영화계에서는 신상옥을 주축으로 좌최인현 우 이형표 라고 불렀을 정도. 최감독은 이때 이같은 모든 사극에 관한 것을 노트에 빼곡히 정리, 지니고 다녔는데 아마 지금은 후배이자 콤비였던 이은수 감독이 갖고 있을 것이다 임금 면전에서 물러 날 때는 뒤 돌아서지 않고 마주 한 채 뒷걸음으로 나가야하며 수행할때는 절대로 그림자를 피해 3보 뒤에서 따르되 지위에 따라 좌우로 갈라 서야 한다는 것은 그가 찾아낸 고증이다. 이밖에도 수없이 많으나 요즘 가끔씩 제작되는 사극영화나 TV드라마를 보면 엉터리가 자주 튀어 나와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1962년 < 눈물어린 발자국 >으로 데뷔한 최감독이 활짝 꽃피운 것은 64년 본격적인 홍콩 합작으로 만든 < 달비 >. 중국 발음으로 <달기>라고 개봉한 이영화는 대히트, 대만 홍콩에서도 난리 법석을 피웠다. 당시 약1천만원 (현재 약1백억 추산)으로 신필름이 제작하고 홍콩이 배급을 맡았으며 일본 촬영기사를 데려다 만들었다. 주연은 신영균 과 당시 홍콩의 세계적 스타였던 린 다이 ,그리고 최은희 김승호 가 공연했다. 달기라하면 중국에서 가장 미녀였던 왕비 4명 중 하나로 진나라 때 인물. 반정에서 구사 일생한 왕자가 성장한 후 왕좌 복귀에 성공하지만 사랑하던 공주는 끝내 불에 산화한다는 얘기로 당시로서는 엄청난 성곽 세트 등을 지어 불 태움으로써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곤 했다. 이 작품으로 명성을 날리기 시작한 최감독은 < 태조 이성계 >(1965) < 태조 왕건 >(1970) < 이조상노비사 >(1974) < 홍길동 >(1976) < 집념 >(1976) < 관세음보살 >(1978) < 세종대왕 >(1978) < 소명 >(1984) 등의 작품을 내놓았다. 평생 만들어 낸 영화64편 중 사극만 30여 편이나 된다. 이같은 사실은 학계나 평단에서 깊이 연구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 <태조 이성계>는 얼마전 KBS TV 드라마 < 용의 눈물 >로 공전의 히트를 한 모태이며 < 태조 왕건 >역시 같은 상황이다. 두 작품 모두 신영균과 김지미가 주연 했다는 것은 당시가 그 들의 전성기 때문이었을 게다. 그러니까 TV에서 이성계를 연기했던 유동근 이나 왕건 역의 최수종 이 모두 신영균 의 남성미로 그려졌었다. 그는 생전에 자신이 아끼고 싶어하는 작품으로 < 李箱의 날개 >(1968)와 < 집념 >을 꼽곤 했다. 마지막 작품은 타계하기 6개월전 끝내고 9월달에 개봉한 < 친구야 친구야 >. 그러니까 마지막 작품을 마치고 세상을 떠났다. 참으로 드라마틱 하지 않은가. 영화계에서는 그의 대표작으로 <집념>을 꼽는다. 동의보감이라는 제목으로 TV에서 방영했던 것을 원작자이자 각본도 썼던 이은성 씨가 '다시 깊이 있게 만들어 보고 싶다'고 말하는 바람에 극적으로 제작하게 됐었다. 당시 최 감독은 허 준의 초상화까지 입수하여 사실적 묘사에 애를 썼으며 주인공을 맡았던 이순재 에게 이 같은 이미지를 계속 요구하는 바람에 애를 먹기도 했다는 게 추억담으로 남아있다. 이 작품은 76년 대종상에서 우수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촬영상, 편집상등 5개 부문을 휩쓸었다. 최감독은 당시 '사람이 뜻을 세우고 한 가지 일에 몰두하여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소신을 성취하는 인물상을 그리는 게 영화감독의 사명'이라고 말하곤 했다. 영화에 대한 해박한 현장 이론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결코 내색치 않았으며 평소 넉넉한 품새로 일관, 생활이 어려워 고양군으로 이사를 한 말년에도 낡은 차이지만 자가용을 운전하고 다니곤 했다. 그는 평소와 달리 현장에서는 호랑이로 돌변, 한치의 착오도 용납치 않았다. 특히 수백 명의 엑스트라가 동원되는 몹신(군중 장면)에 일가견을 가져 동료 감독들이 지원을 요청하면 흔쾌히 현장에 달려 가는 의리파이기도 했다. 80년이던가. 동남아 취재를 끝내고 마지막으로 일본에 머무를 때일 게다. 느닷없이 최감독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지금 서울에서는 TV만화 <캔디 캔디>가 어린이들 사이에서 대인기인데 만화가를 만나서 영화화 권을 얻어다 줄 수 없느냐는 것이었다. 그럽시다 라고 말을 해놓고 보니 그게 어디 그게 쉬운 일인가. 단지 무기가 있다면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가 국제 저작권 연맹에 가입이 되지 않아서 거절하면 일방적으로 만들겠다고 얘기만 하면 될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작가 찾기에 나섰다. 물어물어 작가와 통화를 하니 여자가 아닌가. 만나서 자초지종을 얘기하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작가는 자기이지만 판권은 출판사와 만화 영화사 어디에 속해 있는지 잘 모르겠다는 얘기였다. 결국 레스토랑 저녁 식사 대접에 근사한 외국인 전용 스탠드바에까지 가며 설득 끝에 다음날 판권을 얻어냈지만 자신을 꼭 촬영 현장에 초청해달라는 부탁이 첨부됐다. 귀국해서 보니 웬걸. 최감독과 스텝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만든다는 전략이었다. 당시는 우리 영화사상 드물게 흥행이 안되던 시기. 이를 어린이영화로 뚫어 보자는 기획이었으나 첫날만 인산인해를 이루었을 뿐 파리를 날렸다. 겨우 본전 조금 넘겨 막을 내렸는데 이때 주연을 한 배우가 나중에 탤런트가 된 최선아이다. 물론 일본 작가에겐 전화로나마 사정해서 빌 수밖에. 그런데 그 작가가 오히려 위로를 하는게 아닌가. 일본에서 이미 조사를 했던 것이다. 그후 그녀는 친구처럼 되었는데 90년 이후 신문사 간부가 된 이후로는 일본에 들러도 하루 이틀만에 돌아오니 짬을 낼 수가 없었다. 이제 그녀도 슬하에 자식을 둔 할머니가 됐으리라.. 최감독은 1928년 10월 24일 생이니 생존했으면 75세이다. 경남 진주 태생으로 집안이 부호였다. 진주 농대를 나와 고등학교 교편 생활을 하다가 영화계에 입문한 , 당시로서는 엘리트였다. 모두 고인이 된 소설가 이병주씨, 테너 섹스폰의 달인이었던 이봉조 씨와 동문이기도 하다. 사극 전문이니 그럴 법 할 것이라고 들 생각하겠지만 작가 신봉승 씨와의 우정은 너무 각별하다. 영화 평생을 함께 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마지막 작품이 된 < 친구야 친구야 >도 신봉승씨의 오리지널 작품이다. 출감한 운동권 학생의 사랑과 우정, 배신과 의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염원 등을 다룬 이 영화는 범작 수준이었다지만 60이 넘은 세대로 고통의 세월을 산 젊은이들 얘기를 다루면서 시대를 읽고 싶어했을 것이다. 전영록 이 주연한 이 영화의 흥행 성공을 위해 그는 아픈 몸을 이끌며 이리 뛰고 저리뛰고 했으리라. 술만 들어가면 '진주라 천리길'을 굵직한 목소리로 불러 제키던 최인현 . 한때는 흥행 성공으로 서울 삼청동의 고래등같은 기와집에 살며 장안에서 몇대 되지도 않던 지프차를 타고 다니던 호기도 잇따른 제작 실패로 가정의 파국까지 불러왔으며 이 때문에 재기하려고 몸부림 쳤는지 모르겠다. 최감독의 타계가 안타까운 것은 그 동안 영화계의 의례로 상사 때마다 치러져 왔던 영화인장이나 영협 감독위원회장조차 마련하지 못하고 소문 없이 가족장으로 묻힌 것 일게다. '허 허'하는 호걸풍의 웃음에 말술을 마다 않던 황소 같은 대인 최인현 감독도 덧없이 사라져 갔다. 김량삼 (영화평론가) / 2003년 <프로필> 1928. 10. 24일 경남 진주 출생 1950. 6 경남 진주 농과대학 졸업 1950. 9 육군 제11사단 제9연대 정훈공작대장 근무 1951. 4 경남 대곡중학교 교사 근무 1990. 11. 16 향연 62세로 타계 <주요 경력> 1956. 10. 영화계 입문( 김소동 감독 극영화 < 아리랑 > 조감독) 1968. 4. < 삼현육각 >(전남일보 주최 백상영화제 수상작) 1968. 10. 최인현 프로덕션 설립 1970. 4. < 삼호 탈출 > 제10회 대종상영화제 감독상 수상 한국연극영화예술대상 작품 대상 수상 1986. 8. 공연윤리위원회 전문 심사위원 1989. 10. 은성영화주식회사 대표이사 취임 <작품 연보> 1962 피어린 발자국 1963 쌍검무 1964 비련의 왕후 달기 / 사자성 1965 태조 이성계 / 정조성 / 한많은 대동강 1966 오복문 / 너와나 / 양반전 1967 천도화 / 총각원님 / 나그네 임금 / 풍운 삼국지 / 칠부 열녀 / 상감마마 미워요 / 두 나그네 1968 언니의 일기 / 백야 / 자주댕기 / 삼현육각 / 오월생 / 로맨스 마마 / 암굴왕 / 방랑대군 / 이상의 날개 / 순덕이 / 내 생애 단 한번만 1969 인의 여검객 / 부각하 / 동경의 왼손잡이 / 젊은이의 태양 / 춘원 이광수 / 만고강산 1970 일요일밤과 월요일 아침 / 굿바이 동경 / 엑스포 70 동경작전 / 삼호탈출 / 황금70 홍콩작전 / 동경의 무정가 / 태조 왕건 / 한없이 기다려도 / 극동의 무법자 1971 미워도 정 때문에 / 기러기 남매 / 암흑가의 공포 / 타이페이 3만리 / 고향을 묻지마라 1972 인간 낙제생 / 명동잔혹사(2화) / 어머님 용서하세요 / 아빠라 부르는 연인 1973 열궁녀 / 출발 1974 숙녀 초년생 / 이조상노비사 1975 소림사의 결투 1976 홍길동 / 집념 1977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 1978 관세음보살 / 세종대왕 / 안개 속의 여인 1979 영원한 유산 1981 캔디-캔디 1982 고통의 멍애를 벗으려고/ 젊음의 광장 1983 후송열차 / 사랑하는 전우야 1984 소명 / 자동차 오늘과 내일 그리고 미래 1985 쌍용 사람들 1987 마지막 선물 1988 우리 하나 되어 1990 친구야 친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