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캘리포니아 주지사 아놀드 슈워제네거 방한 공식행사
- 제작년도
- 2010
<축제> 중 (사진: 영화방) 박광수 감독의 < 칠수와 만수 >(1988)의 후반부에는 안성기 배우와 박중훈 배우가 연기한 두 주인공이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 우뚝 솟은 거대한 광고판 꼭대기에 앉아 있는 장면이 나온다. 원래는 광고판 도색 작업을 해야 했지만, 두 사람은 작은 저항의 의미로 그곳에 올라 소주를 마시며 도시를 내려다본다. 도색 작업을 하며 우연히 만난 이 두 남자는 함께 일하는 동료가 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가장 고통스러운 좌절감과 굴욕감만은 서로에게 숨겨왔다. 이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사회로부터 외면받았으며, 안정적인 삶을 구축할 공정한 기회조차 거부당한 처지였다. 그러나 광고판 꼭대기에 올라서서야 칠수(박중훈)는 처음으로 마음 깊은 곳에 담아두었던 진심을 털어놓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이 실패자이며, 지금까지 했던 모든 자랑이 거짓이었음을 만수(안성기)에게 고백한다. 그리고 “나 희망 없는 놈이에요”라고 말한다. 칠수가 말을 이어가는 동안, 안성기의 얼굴에는 서서히 변화가 일어난다. 턱은 굳게 다물어지고 눈빛은 무언가에 집중한 듯 강렬해지는데, 말 한마디 하지 않더라도 그 표면 아래에서 감정의 폭풍이 거세게 휘몰아치고 있음을 우리는 느낄 수 있다. 동료를 향한 연민과, 사회적 불평등을 견디며 오랫동안 참아온 분노를 동시에 포착해내는 연기를 이토록 훌륭히 해낼 수 있는 배우는 그리 많지 않다. 잠시 후, 그는 일어서서 발 아래 도시를 향해 외친다. “야! 서울에 있는 높은 놈, 배운 놈, 잘난 놈, 있는 놈, 모두 다 내 얘기를 들어봐라! 나도 말 좀 해야겠다! 이 높은 데 있을 때 큰소리 좀 쳐보자!” 이 장면은 1980년대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매우 상징적인 순간이다. 만수와 칠수는 대중적인 주류 영화에서 대개 주목받지 못하는, 억압받고 소외된 인물들을 대변한다. 그들은 발 아래 도시를 향해 자신들의 좌절과 분노를 외침으로써, 문자 그대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찾고’ 자신들의 관점을 드러내며 말할 권리를 주장한다. 유사하게, 1980~90년 세대의 영화인들은 주류 사회가 망각 또는 묵살해버리는 인물들에게 목소리를 부여하려는 열망에 이끌려 창작에 돌입하곤 했다. 안성기는 만수 역을 맡기에 더할 나위 없는 적임자였다. 그는 인물 특유의 단단하면서도 씁쓸한 결연함을 설득력 있게 그려내는 한편, 그 내면에 자리한 부드럽고 연민 어린 면모를 은연중에 드러냈다. 사실 안성기는 그 시기 한국영화에 등장한 여러 명의 주인공을 맡기에도 아주 적합했다. 그는 특정한 유형의 인물만을 연기하는 배우가 아니었고, 전형적인 “무비스타(movie-star)”로서의 외모나 뚜렷하게 고정된 스크린 이미지를 지니지도 않았다. 하지만 관객으로 하여금, 그가 연기한 배역 속에서 자신들을 발견하게 만드는 데 어떤 배우들보다 탁월했다. 그는 평범한 사람들의 꿈과 두려움, 야망, 나약함, 그리고 미덕을 스크린 위에 충실히 구현해냈다. 캘리포니아로 건너가 아메리칸 드림을 좇는 < 깊고 푸른 밤 >(배창호, 1985)의 능수능란한 사기꾼, < 기쁜 우리 젊은 날 >(배창호, 1987)의 수줍은 대학생, < 투캅스 >(강우석, 1993)의 부패한 경찰에 이르기까지, 그는 각 인물을 공감 가능한 생생한 존재로 그려냈다. 1950~60년대에는 배우 최은희 가 이러한 방식으로 관객들과 연결되었는데, 한 세대의 여성들은 그녀가 연기한 다양한 역할 속에서 자신과 자신의 경험을 발견하며 성장했다. 1980~90년대에 그 역할을 완벽히 수행한 배우는 단연 안성기였다. 세월이 흐르며 영화계 안에서 그의 위치는 달라졌지만, 중요성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그의 존재 자체가 이야기에 즉각적으로 무게감을 더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상대 배우에게서도 최상의 연기를 끌어내도록 했기에, 감독들은 그와의 작업을 고대했다. 조연부터 주연까지 폭넓은 역할을 소화했으며, 대형 블록버스터부터 저예산 독립영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작업에 참여했다. 신인 감독이나 상대적으로 주목 받지 못하는 프로젝트와의 작업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배우 생활 전반에 걸쳐 수많은 감독과 생산적인 협업 관계를 맺었다. 그중 단 25명의 이름만 꼽아보더라도 김기영 , 임권택 , 배창호 , 이장호 , 이두용 , 유현목 , 이원세 , 정지영 , 강우석 , 이명세 , 박광수 , 박종원 , 장선우 , 이현승 , 류승완 , 김성수 , 오승욱 , 이정향 , 이준익 , 김지훈 , 신연식 , 장률 , 김주환 , 박흥식 , 그리고 김한민 의 영화에 출연했다(여기에 언급하지 못한 수많은 분께 양해를 구한다). <고래사냥>, <기쁜 우리 젊은 날> 중 (사진: 영화진흥위원회, 양기주) 그는 영화계 내부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한국영화배우협회 회장을 역임하며 스크린쿼터 제도 수호에 앞장섰고, 부산국제영화제 부위원장 및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서 책임을 다하기도 했다. 영화계 내에서의 이러한 위상과 배우로서 이룬 독보적인 성취에도 불구하고, 그를 직접 대면한 이들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그의 겸손함과 너그러움이었다. 그는 스타로서의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었음에도 결코 유명 스타처럼 행동하지 않았다. 나긋한 목소리로 조용히 행동하며 스포트라이트를 찾아나서지 않았음에도, 그는 영화계의 기둥이자 많은 이들이 우러러보는 리더였다. 영화계의 여러 행사에서 그가 지녔던 존재감은 동료 영화인들에게 깊은 그리움을 자아내겠지만, 다행히 한국영화 속 그의 연기는 여전히 누구나 접하고 즐길 수 있다. 그가 남긴 수많은 상징적인 역할 중 몇 가지만 고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중 지극히 주관적으로 선정한 일부 목록을 아래에 적어보고자 한다. 물론 그의 경력이 시작하는 지점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한국영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김기영 감독의 < 하녀 >(1960)에서 보여준 아역 연기를 마주하게 된다. 그보다 전에 김기영 감독과 호흡을 맞췄던 < 10대의 반항 >(1959)은 샌프란시스코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었고 안성기는 이 작품으로 소년 특별연기상을 받았지만, 작품의 필름이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이 무척 안타깝다. 그는 1960년대에 5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하며 주로 작은 역할들을 맡아 활동을 이어갔다. 하지만 성인 배우로서의 도약은 1980년대 초에 이뤄졌는데, 이장호의 < 바람불어 좋은 날 >(1980), 이원세의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 >(1981), 임권택의 < 만다라 >(1981), 배창호의 < 꼬방동네 사람들 >(1982)이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각 감독의 명성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주요 작품들이다. 특히 배창호 감독과 함께하며 가장 큰 상업적 성공을 거뒀는데, 따뜻한 마음을 가진 노숙인을 연기한 < 고래사냥 >(1984), 폭발적인 흥행을 기록한 <깊고 푸른 밤>(1985), 그리고 청춘의 성장과 관계를 다룬 <기쁜 우리 젊은 날>(1987)이 대표적이다. 이후 20여 년간 국제적인 명성을 쌓게 된 임권택 감독 역시 < 안개마을 >(1982)부터 < 태백산맥 >(1994), < 축제 >(1996), < 취화선 >(2002), 그리고 감독의 마지막 작품인 < 화장 >(2014)에 이르기까지 그와 지속적으로 작업했다. (상) <하녀>, <바람불어 좋은 날> / (하) <안개마을>, <화장> (사진: 한국일보, 백영호)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에 데뷔한 사회의식 있는 감독들, 이른바 ‘코리안 뉴웨이브’로 불리는 창작자들 역시 안성기와 작업하기를 간절히 원했다. 앞서 언급한 <칠수와 만수>와 박광수 감독의 또 다른 주요작인 < 그 섬에 가고싶다 >(1993) 외에도, 자본주의를 풍자한 장선우의 < 성공시대 >(1988), 이명세의 파격적인 데뷔작 < 개그맨 >(1988), 그리고 날카로운 정치적 통찰을 보여준 정지영의 < 남부군 >(1990)과 < 하얀전쟁 >(1992)이 있었다. 동시에 그는 강우석의 메가 히트작 < 투캅스 >(1993)를 통해 자신의 코믹 연기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기도 했다. 감독들은 그를 신뢰했기에, 때로 이례적이거나 의외의 역할에 캐스팅하기도 했다. 이정향의 로맨틱 코미디 < 미술관 옆 동물원 >(1998)에서의 엉뚱하고 유쾌한 모습이나, 이명세의 < 인정사정 볼것 없다 >(1999) 속 잔인한 살인마로의 등장, 전만배 감독의 < 피아노 치는 대통령 >(2002)에서의 대통령 연기가 그 예다. 또한 오랜 동료인 박중훈과 호흡을 맞춘 가슴 따뜻한 음악 드라마 < 라디오스타 >(2006), 정지영의 법정 드라마 장르인 < 부러진 화살 >(2011)에서의 강렬한 변신, 그리고 한국영화사 최초의 천만 관객 영화인 강우석의 < 실미도 >(2003)에서 보여준 군 지휘관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경력의 후반기에 접어들어서도 그의 독특한 목소리는 대규모 흥행작인 < 타워 >(2012), < 한산: 용의 출현 >(2022)부터 저예산 독립영화인 < 필름시대사랑 >(2015), < 아들의 이름으로 >(2020), < 카시오페아 >(2022) 등 영화계 전반에 걸쳐 친숙하게 자리했다.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작품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대담하고 창의적인 태도를 잃지 않았다. 안성기는 영화라는 예술을 사랑했다. 그가 여러 번 직접 언급해서가 아니라, 수십 년에 걸친 그의 행보가 한국영화를 향한 깊은 헌신을 분명히 보여줬기에 알 수 있다. 그가 별세하면서 한국영화계는 길을 밝혀주던 등불 하나를 잃었으며, 그가 없는 이곳은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성공시대> 중 (사진: 정기성) 달시 파켓(Darcy Paquet / 영화평론가·번역가) l 영화평론가이자 강연자, 번역가, 그리고 영화제 컨설턴트로서 25년 넘게 한국영화를 지켜봐 왔다. 저서로는 New Korean Cinema: Breaking the Waves (2010)가 있다. * 위 원고는 필자가 영문으로 작성한 아래 원고의 국문 번역본입니다. Remembering Ahn Sung-ki There is a moment towards the end of Park Kwang-su’s 1988 film Chilsu and Mansu when the two lead characters – played by Ahn Sung-ki and Park Joong-hoon – are sitting on the top of a giant billboard at the Express Bus Terminal in Gangnam. They are supposed to be painting the billboard, but in a small act of defiance, they have instead gone up to drink soju and look out over the city. These two men, who met by chance on painting jobs, have become work partners, but nonetheless they have hidden their most painful frustrations and humiliations from each other. Each of them for various reasons have been shunned by society, and denied a fair shot at building a stable life for themselves. But atop the billboard, Chilsu (played by Park Joong-hoon) starts to speak honestly from his heart for the first time. He confesses to Mansu that he’s a failure, that the bragging he has been doing up to now has been lies. “I’m a hopeless guy(나 희망 없는 놈이에요),” he says. As Chilsu is speaking, a slow transformation takes place on Ahn Sung-ki’s face. His jaw locks, his eyes take on a focused intensity, and although he doesn’t say a word, we can see a storm brewing just beneath the surface. Not many actors could have done this so well, capturing both the compassion he feels for his colleague and his long-suffering outrage at society’s inequities. A moment later, he stands up and shouts to the city below: “All you upper-class, educated, well-off bastards of Seoul, listen to me now! I'm going to speak out too, from this high place here!” "야! 서울에 있는 높은 놈, 배운 놈, 잘난 놈, 있는놈, 모두 다 내 얘기를 들어봐라! 나도 말 좀 해야겠다! 이 높은 데 있을 때 큰소리 좀 쳐보자!" This is an iconic and deeply symbolic scene for 1980s-era Korean cinema. Mansu and Chilsu represent the kind of downtrodden, disenfranchised characters that are usually overlooked by popular mainstream cinema. By shouting their frustrations and complaints to the city below, they are quite literally “finding their voices,” expressing their point of view and insisting on their right to speak. In a similar way, a whole generation of filmmakers in the 1980s and 1990s were motivated by the desire to give a voice to the sort of characters that mainstream society forgets or simply ignores. Ahn Sung-ki was the perfect choice to play Mansu. He convincingly portrays the hard, bitter determination of his character while giving hints of a softer, compassionate side underneath. But actually, Ahn Sung-ki was the perfect choice to play many of the protagonists of that decade’s cinema. He wasn’t known for playing one particular character type. He didn’t have movie-star looks, or a clearly-defined screen image. But what he did better than anyone else was to make audiences see themselves in the roles he played. He took the dreams, fears, ambitions, weaknesses and virtues of ordinary people, and represented them faithfully on the screen. Whether it was the smooth-talking grifter moving to California and pursuing the American Dream in Deep Blue Night , the shy university student in Our Sweet Days of Youth , or the corrupt policeman in Two Cops , he portrayed each character in a manner that made them vivid and relatable. In the 1950s and 1960s, it was the actress Choi Eun-hee who connected with audiences in this way: a generation of women grew up seeing themselves and their experiences in the many different roles that she played. But in the 1980s and 1990s, the actor who did this best of all was Ahn Sung-ki. As he grew older, his position within the film industry changed, but not his importance. Directors loved to work with him, since his presence in a film immediately gave the story more weight, and he could bring out the best in his co-stars as well. He took on a wide variety of roles, from supporting to leading characters, and worked on everything from major blockbusters to low-budget independent films. He didn’t shy away from working with new directors or less prestigious projects. Over the course of his career, he formed productive working relationships with a huge number of directors. To choose just 25 names, he appeared in films by Kim Ki-young, Im Kwon-taek, Bae Chang-ho, Lee Jang-ho, Lee Doo-yong, Yu Hyun-mok, Lee Won-se, Chung Ji-young, Kang Woo-suk, Lee Myung-Se, Park Kwang-su, Park Jong-won, Jang Sun-woo, Lee Hyun-seung, Ryoo Seung-wan, Kim Sung-soo, Oh Seung-wook, Lee Jeong-hyang, Lee Joon-ik, Kim Ji-hoon, Shin Young-sik, Zhang Lu, Kim Ju-hwan, Park Heung-sik, and Kim Han-min(with apologies to the many other names I’ve excluded). He also played important roles in the film community, serving as chairman of the Korean Film Actors Association, advocating for the Screen Quota system, serving as Deputy Director of the Busan International Film Festival, and as Festival Director of the Asiana International Short Film Festival. And yet despite his stature in the industry and his unmatched accomplishments as an actor, the quality that most impressed people who met him in person was his modesty and generosity of spirit. He didn’t behave like a famous star, even though he possessed a star-quality charisma. Soft-spoken and never seeking the spotlight, he was nonetheless a pillar of the film community, looked up to as a leader. His presence at film events will be sorely missed by fellow filmmakers, but thankfully his performances in Korean films can still be accessed and enjoyed by anyone. Making a list of his most iconic roles is difficult, because there are so many of them to choose from. But I will attempt to make a partial, highly subjective list below. Of course, going back all the way to start of his career, we have his performance as a child actor in one of the most famous Korean films of all time, Kim Ki-young’s The Housemaid (1960). It’s truly regrettable that a copy no longer exists of his previous collaboration with Kim Ki-young, Defiance of a Teenager (1959), which screened at the San Francisco International Film Festival, and where Ahn Sung-ki won a special award for his acting. He would go on to act in more than 50 films in the 1960s, often in small roles, but his breakthrough as an adult came at the start of the 1980s in works such as Lee Jang-ho’s Fine Windy Day (1980), Lee Won-se’s A Dwarf Launches a Little Ball (1981), Im Kwon-taek’s Mandala (1981), and Bae Chang-ho’s People in a Slum (1982) – all major films that helped to establish the reputation of their directors. It was with Bae Chang-ho that he would enjoy some of his biggest commercial successes, especially in Whale Hunting (1984) where he played a kind-hearted beggar; the smash hit Deep Blue Night (1985) and the coming-of-age relationship story Our Sweet Days of Youth (1987). Director Im Kwon-taek, who became internationally recognized over the next two decades, often worked with Ahn Sung-ki as well, from films like Village of Haze (1982) to The Taebaek Mountains (1994), Festival (1996), Chihwaseon (2002) and the director’s final film Revivre (2014). The group of more socially-minded directors who debuted in the late 1980s and early 1990s – often referred to as the Korean New Wave – were just as eager to work with Ahn Sung-ki. Aside from the aforementioned Chilsu and Mansu and another important work by Park Kwang-su, To The Starry Island (1994), there was Jang Sun-woo’s capitalist satire Age of Success (1988), Lee Myung-Se’s groundbreaking debut film Gagman (1989), and Chung Ji-young’s politically incisive North Korean Partisans in South Korea (1990) and White Badge (1992). At the same time, Ahn showcased his comic abilities in Kang Woo-suk’s smash hit Two Cops (1993). Directors trusted Ahn Sung-ki enough to cast him in somewhat unusual or surprising roles, such as his whimsical appearance in Lee Jeong-hyang’s romantic comedy Art Museum by the Zoo (1998), his turn as a vicious killer in Lee Myung-Se’s Nowhere to Hide (1999), playing the nation’s president in director Jeon Man-bae’s Romantic President (2002), his role opposite longtime collaborator Park Joong-hoon in the heartwarming music drama Radio Star (2006), his powerful turn in Chung Ji-young’s court drama Unbowed (2011) and his unforgettable role as a military commander in Kang Woo-suk’s Silmido (2003), the first Korean film to sell 10 million tickets. Even to the later stages of his career, his distinctive voice was a familiar presence in big-budget hit films such as Tower (2012) or Hansan: Rising Dragon (2022), to low-budget indie features like Love and… (2015), In the Name of the Son (2020) and Cassiopeia (2022), and everything in between. He was daring and creative in choosing films up to the very end. Ahn Sung-ki loved the art of cinema. We know this not because he said it in so many words, but because over decades, his actions demonstrated his deep commitment to Korean cinema. With his passing, the film industry has lost one its guiding lights, and it will not be the same without him. Darcy Paquet(film critic/translator) l As a film critic, lecturer, translator and film festival consultant, I have been following Korean cinema for over 25 years. Author of New Korean Cinema: Breaking the Waves (2010).
장철과 호금전의 무협에서 이소룡과 성룡의 쿵푸 액션으로. 오우삼과 서극, 왕가위에 이르는 뉴웨이브까지. 20세기 중·후반 홍콩영화는 각기 다른 색깔의 ‘신드롬’을 일으키며 한국에 스며들었다. 대만, 싱가포르, 중국 등 중국어권 영화 전반 역시 (정치, 외교, 경제 정책에 따른 변함은 있더라도) 예술과 산업의 측면에서 한국영화와 인연을 맺으며 그간 서로가 아시아영화의 한 종류로 자리 잡는 데 영향을 주고받았다. 한국영화가 중국어권 영화와의 상관관계 속에서 어떻게 초국적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이를 영화에 반영했는지를, 홍콩 시티대학교(City University of Hong Kong)와 한국영상자료원(이하 ‘영자원’)이 공동으로 개최한 컨퍼런스 ‘ 목적지 홍콩: 한국과 중국어권 영화와의 조우(Destination Hong Kong: South Korean Cinema’s Encounter with Chinese-Language Cinemas) ’에서 되짚어보았다. 홍콩 시티대 이상준 교수와 한국영상자료원 정종화 학예연구팀장이 공동 의장을 맡았으며, 2025년 5월 16일과 17일, 다양한 세대로 구성된 각국의 연구자 및 아카이브 관계자들이 발표를 위해 홍콩 시티대를 찾았다. 중국어권과의 영화 교류의 흐름을 조망하는 자리가, 한·홍 합작의 주요 결과물 제작에 기여한 제작사 쇼브라더스의 설립자 런런쇼(Run Run Shaw)가 건립을 지원한 (홍콩 시티대 내) 런런쇼 창의미디어센터에서 진행되어 더욱 뜻깊었다. 시티대 이상준 교수는 “1950년대부터 21세기에 이르기까지, 홍콩, 대만,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중국 등과의 초국가적 및 초지역적 네트워크 속에서 한국영화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알아본다”라는 컨퍼런스의 목적을 밝혔다. 초청 강연자로 함께 한 한국영상자료원 김홍준 원장은 “기관의 대표자일 뿐만 아니라 홍콩영화의 오랜 팬으로서 이 자리에 참석하게 되어 더욱 감회가 깊다”라면서, “이번 행사는 한국영상자료원이 해외 학술기관과는 처음으로 공동 개최하는 컨퍼런스일 텐데, 관련 주제를 연구하는 작은 한 걸음이 위대한 도약의 발판이 되기를 바란다”라며 응원을 건넸다. 정종화 학예연구팀장 역시 본 컨퍼런스를 “한국과 중국어권, 특히 홍콩 간 영화적 교류에 대한 연구를 진작하는 특별한 기회”라고 평가했다. 또한 “이번 컨퍼런스를 계기로 이상준 교수와의 협업을 지속하며 더욱 의미 있는 프로그램을 주최할 수 있기를 바란다”라며 컨퍼런스 이후에도 관계 기관과의 협력을 이어가며 연구 성과를 가다듬는 데 대한 의지를 밝혔다. 1950~60년대 한국과 중국어권 간 합작 사례부터 양국 21세기 감독들의 화제작까지, 시대나 장르에 제한을 두지 않고 이어진 양일간의 열띤 발표와 토론 내용을 기록한다. 먼저, 두 패널의 발표가 진행된 컨퍼런스 1일차 현장을 담았다. * 컨퍼런스 '목적지 홍콩: 한국과 중국어권 영화와의 조우' 개최 개요 및 프로그램 북( 링크 ) <패널 1> 한국과 중국어권 영화 간 전후(戰後) 합작 1950년대 이후의 전후 한국영화계에서 중국어권과의 합작이 시도된 배경과 방식, 그리고 결과의 함의를 다뤘고, 홍콩 침례대학교 김신동 교수가 이끌었다. 한국영화인 강범구를 통해 본 1960년대 한국-대만 영화 교류사 (한국영상자료원 정종화 학예연구팀장) 정종화 학예연구팀장은 1960년대 액션 장르 흥행을 이끌었던 강범구 감독의 작품이 한국영화 최초로 대만에 수출되거나 대만과의 합작을 통해 제작된 과정에 집중했다. 1960년대 한국과 대만의 영화 합작에 관한 첫 번째 학술적 연구다. 냉전 시기 동아시아 정세를 반영한 대만의 정치적 상황과 반일 감정이 한국 영화산업의 현실과 맞물리며 두 국가의 영화적 교류의 토대가 마련되었는데, 흥미롭게도 과거 양국과 식민지-제국 관계였던 일본의 영화기술이 필요한 현장이었음을 포착한다. 영자원이 2009년부터 2014년까지 강범구 감독을 면담해 기록한 구술채록문과 작품별 심의서류, 합작 계약서 등이 근거가 되었다. 전후 냉전 상황 속 동아시아에서 지정학적, 산업 및 기술적 요소가 상호작용하던 도중, 영화산업을 매개로 세 국가의 관계가 형성되는 한 지점을 재발견하는 연구였다. 강범구 감독은 1950년대 신상옥 감독의 현장에 촬영보조로 합류하며 영화계에 입문했고, < 지옥화 >(신상옥, 1958) 등의 작품에서 촬영감독으로 활약했다. 제작자 최관두 가 속한 한흥영화사와 협력하면서부터는 액션 스릴러에 초점을 두고 연출 활동을 시작해 독특한 액션 연출 및 촬영 기법으로 주목받았지만, 한국영화사에서는 아쉽게도 주변부 인물로 비춰지는 데 그쳤다. 그런데 그가 세 번째로 연출한 < 안개낀 거리 >(1963)는 1963년, 한국영화로서는 최초로 대만에 수출된 후 놀랍게도 흥행을 기록했다. 강범구 감독은 구술채록 당시 이러한 흥행의 비결이, (대만 역시 냉전 시기를 통과 중인 동아시아의 일부였음을 감안할 때) 상업적 장르영화의 문법을 따르면서도 전후 사회적 현실을 비판적으로 묘사 한 데 있었다고 회고했다. 게다가 양국 간 외교적 긴장을 야기한 지정학적 요인 [1] 의 영향으로 대만은 일본영화의 수입을 일시적으로 금지하는 조치를 내리기도 했다. <안개낀 거리>는 이때 대만에 수출되면서 현지 관객으로부터 공감을 얻고 일본영화의 빈자리를 메꿔 보다 쉽게 흥행을 달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1964년 6월, 대만의 일본영화 수입이 재개되면서 그러한 이점의 효력이 상실되었고, 대만에서 한국영화의 입지는 다시 변방으로 밀려났다. 강범구 감독과 박상호 감독 / <안개낀 거리>, <탈출명령> 포스터 하지만 1965년, 한국과 대만은 강범구 감독을 필두로 최초의 합작을 시도한다. 그의 액션 연출을 인상 깊게 바라본 대만의 감독 겸 제작자 가오 런허(Gao Renhe)의 제안을 시작으로 제2차 세계대전 배경의 전쟁·액션 영화 < 탈출명령 >(1966) 제작을 위해, 대영영화주식회사와 대만 중흥영업유한공사(Chung Shing Films Corporation)가 합작했다. 계약서상 한국은 각본, 연출, 캐스팅을, 대만은 주로 재정 지출을 담당했음이 나타난다. 두 국가 간 최초의 합작은 한국의 창작적 리더십과 대만의 투자가 결합 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탈출명령> 합작 과정에서 국내 영화인들의 작업 편리성이 일본 영화산업 의 기술을 통해 향상되었을 여지도 발견된다. 강범구 감독은 푸티지를 매일 일본 도요랩(Toyo Laboratory)으로 운송해 최신 기술을 바탕으로 현상·편집했으며, 본 합작을 계기로 일본의 영화 기자재와 소품용 총기가 항공편을 통해 본격적으로 국내에 수입되기 시작했고, 촬영 현장에 중국어 통역사가 동반했음에도 일본 관계자가 소통을 도왔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그러나 결과는 아쉬웠다. 제작비 규모가 계획한 예산을 초과해 대만 중흥영업유한공사의 재정적 부담이 컸는데, 박스오피스 성적은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것이다. 흥행 불발에 더해 한국과 대만의 최초 합작 사례이다 보니 제도적 지원 역시 부족했던 터라, <탈출명령>은 한 번의 실험적 합작 시도의 결과물로만 남고 말았다. 하지만 정종화 팀장에 따르면, 해외 영화 수입 비율 충족을 위한 위장 합작이 만연했던 당시, 양국의 영화적 역량과 자본을 충실히 투입한 작업이었다는 점에서 위 사례는 재조명될 가치가 있다. 정치, 외교, 기술적 측면에서 세 국가의 역할이 교차하며 쓰인, 동아시아 영화사의 독특한 협업 역사로도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한·홍 합작 멜로 속 여성 캐릭터의 민족 수행: <이국정원>과 <사랑의 스잔나>를 중심으로 (한국영상자료원 학예연구팀 윤서연 연구원) 윤서연 연구원은 한국과 홍콩이 합작한 멜로드라마 영화의 여성 인물이 민족성이나 국적을 수행의 방식으로 전환하는 현상을 소개했다. 나아가 동 시기 한국 정세의 영향으로 극중 인물들의 젠더가 국적을 대변하는 양상을 띠는 점 역시 짚었다. 이렇게 제2차 세계대전(한국의 경우 6.25 전쟁 포함) 후 한국과 홍콩의 역사·문화적 의식이 인물을 통해 알레고리화되는 합작 멜로드라마 중에서도, 윤서연 연구원은 주인공의 부모가 국적이 다른 남녀의 이성 교제를 허락하는 구조를 띤 < 이국정원 >(전창근, 도광계, 와카스기 미쓰오, 1957)과 < 사랑의 스잔나 >(김종용, 송존수, 1976)에 대해 설명했다. 두 작품에는 홍콩 출신 여성 인물이 한국문화를 경험하며 국적이나 민족성을 ‘유동적으로 수행’ 하는 모습이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2] <이국정원>에서는 한복에 가깝게 디자인된 주인공 방음(우민)의 의상이, 그의 민족성 수행을 암시하는 전략적 수단으로 활용된다. 방음의 모친 역시 과거에 교제했던 한국인 남성과 찍은 사진에서 한복을 입은 모습이다. [3] <사랑의 스잔나>에서 국휘( 이승용 )와 추하(진추하) 두 사람은 민속촌을 방문해 한국의 전통 혼례식이 치러지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고, 그 순간 국휘는 추하에게 청혼한다. 홍콩 출신 여성 인물과 한국의 민족성 간 격차를 좁히고 여성 인물의 적극적인 민족성 수행을 가능하게 하는 대목이다. 윤서연 연구원은 메리 앤 도안(Mary Ann Doane)의 “ 여성 가면(Female masquerade) ”이라는 개념을 빌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계기를 설명했다. 메리 앤 도안에 따르면, 영화 속 여성 인물들은 의상이나 몸짓을 통해 소위 ‘여성적인’ 특성을 과도하게 강조함으로써, 가부장적 사회 체계 안에 자신을 위치시키는 생존 전략을 추구한다. [4] 한·홍 합작이라는 특수한 맥락에서 이 생존 전략은 타국의 문화적 맥락에 적응 하는 데 필요한 의상과 몸짓을 선보이는 홍콩 출신 여성 인물들에 의해 연기된다. (좌) <이국정원> 중 과거 교제한 한국인 남성과 촬영한 사진에서 한복을 입고 있는 방음의 모친 (우) <사랑의 스잔나> 중 추하와 국휘 그렇다면 왜 한·홍 합작 멜로에서는 대부분 한국인이 남성으로, 홍콩 출신이 여성으로 설정되어있을까? 윤서연 연구원은 한국과 남성을, 그리고 아시아의 타국과 여성을 연결해 한국이 국가적 남성성(National masculinity)을 회복 하려고 했다는 이영재의 주장을 인용했다. 이영재는 한국인 남성이 외국인 여성과 교제하는 구도(이를 반영한 멜로드라마 영화의 합작에 한국영화계가 투자한 이력 포함)를, 식민 지배에서 벗어난 전후 한국사회가 문화적 영향력을 분출함으로써 권력을 지닌 가부장적 개념의 남성성을 회복하려는 시도라는 점을 언급했다. [5] 국가로서의 주권을 되찾고 전쟁까지 거친 후, 아시아의 패권 다툼에서 소외되지 않으려는 열망이 극중에서는 젠더를 통한 국적 은유의 방식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외에도 남성 인물의 한국적 민족성과 경제적 능력 보장 여부에 따라 결말이 달라지는 양상도 언급하면서 인물과 내러티브가 설정된 맥락을 주제와 연관 지어 더욱 구체화했다. 가부장제의 한계를 반영한 젠더적 수행과 국가적 권력에 대한 당시 한국의 시각을 포착해, 한·홍 합작의 결과물로서는 깊이 분석된 적이 드문 멜로드라마 장르를 다각도로 관찰하는 계기를 마련한 연구였다. ‘자유의 꾀꼬리’ 정형의 스타덤: 1960년대 영광영업공사의 한·홍 합작 영화 네 편을 중심으로 (홍콩 링난대학교 디지털아트·문화산업학부 연구 조교수 제시카 시우인 여웅) 제시카 시우인 여웅(Jesscia Siu-yin Yeung) 교수는 1960년대 광둥어권 지역의 영광영업공사를 중심으로 제작된 한·홍 합작 영화의 흥행을, 네 편의 작품에서 배우 정형(Ting Yang)의 역량과 연관 지어 설명했다. 그간 만다린어권이나 일본에 비해 충분한 조명을 받지 못한 광둥어권 아시아 여성 배우 연구의 필요성을 제기하며, 리처드 다이어(Richard Dyer)의 스타 이론을 비롯해 정형 출연작을 다수 제작한 제작자 황척한(Wong Cheuk-hon)의 회고록, 그리고 각 작품의 전단을 참고했다. 정형은 황척한이 설립한 만다린어권 제작사 자유영업공사의 1960년대 작품에서 사실적이고 섬세한 연기력을 인정받으며 활약했다. 이후 황척한이 작품 심의 및 개봉 기준이 비교적 유연한 광둥어권에 영광영업공사를 세웠고, 영광영업공사 제작 작품 여러 편에도 주연으로 발탁돼 흥행에 기여하면서 스타덤에 오른다. < 서유기 >(김수용, 1962)의 경우 당시 한국에서 박정희 정부가 지원한 한양영화공사가 자유영업공사의 막 웡 헤이 감독과 협업하면서 김수용 감독이 연출에 나선 작품이다. 광둥어권에서는 이스트만 컬러 필름과 테크니컬러의 와이드스크린 포맷, 그리고 일본의 특수효과를 최초로 이용해 촬영한 작품이기도 하며, 이 작품에서 정형은 칠선공주로 분해 열연했다. 다음 합작 결과물인 < 에스 오 에스 홍콩(SOS 홍콩) >(최경옥, 1966)은 당시 아시아에서 열풍을 일으킨 제임스 본드 시리즈와 유사한 첩보 액션 장르로 합작하기를 신상옥과 최은희 가 황척한에게 제안해 신필름과 영광영업공사와의 협업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정형은 이 작품에 주연 백민( 박노식 )을 돕는 요원 마리나를 연기했는데, 이때 배포된 전단을 보면 ‘대역 없이 정형 스스로 공중의 헬리콥터를 타고 오르는 모습에 주목해라’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제시카 교수는 주·조연 여부와는 관계없는 정형의 열연이 담긴 이러한 기록을 바탕으로, 소규모 독립영화사로서의 영광영업공사을 대표하는 여성 배우 로서 그가 최선을 다해 연기했음을 보인다. 세 번째 작품은 멜로드라마 < 조용한 이별 >(정창화, 1967)이다. 정형은 이 작품에서 주연 정예화를 연기했고, 함께 연기한 남정임 은 당시 한국 최고의 여성 배우였음에도 불구하고, ‘홍콩 최고의 여성 배우 정형을 보고 배울 수 있는 기회임을 감안해 조연을 연기하라’라는 동료 배우 최은희의 조언에 설득되어 출연을 결심했다고 제시카 교수는 전했다. 마지막으로, 전쟁 블록버스터 < 장렬 509 대전차대 >(김동학, 1967)는 다른 배역들의 캐스팅은 황척한이 바라는 대로 진행하되, 주연으로는 반드시 신영균 과 정형이 캐스팅되어야 한다는 조건으로 제작되었다. 정형은 남매를 찾기 위해 군대에 합류한 간호장교 임수랑 역을 맡았고, 제시카 교수는 추운 날씨와 열악한 현장에서 노고가 많았다고 전한 정형의 발언을 강조했다. <에스 오 에스 홍콩(SOS 홍콩)> 중 마리나(정형) / <장렬 509 대전차대> 중 신성호(신영균)와 임수랑(정형) 광둥어권 관객을 타겟으로 작품을 제작하는 소규모 독립영화사로 시작한 영광영업공사. 이를 이끈 황척한은 다른 대형 제작사에 대항해 경쟁력을 갖추고자 정형의 스타덤을 동원했다. 뿐만 아니라 이스트만 컬러 필름이나 테크니컬러의 와이드스크린 포맷, 일본의 특수효과를 도입하는 등 최첨단 영화 제작 기술까지 뒷받침되었음을 보이며, 제시카 교수는 영광영업공사가 1950~60년대 중국어권 영화계에서 정형을 필두로 차별화되기 위해 노력한 역사를 되짚었다. <반혼녀>와 신상옥·최은희의 기구한 운명: 홍콩 속 영화적 모험 (홍콩 침례대학교 영화과 조교수 케니 응) 케니 응(Kenny NG) 교수는 신상옥 감독과 최은희 배우가 홍콩 영화계에 입문하고 합작을 시도하게 된 계기를 해설했다. 신상옥은 1960~70년대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감독 중 하나로서 제작사 신필름을 운영했으며, 첩보, 액션 스릴러, 멜로드라마는 물론 초자연적 소재까지 다루면서 다양한 장르에 걸쳐 연출을 이어간 유능한 창작자였다. 하지만 국내 영화검열의 강도는 1970년대 중반까지 매우 높은 수준으로 유지되었고, 영화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주제와 표현 방식의 폭이 매우 좁아진 터라 한국영화의 질적 완성도는 저하될 수밖에 없었다. 다양한 장르에 도전하고자 했던 신상옥 감독에게는 불리한 환경이었으며, 그가 운영하던 신필름도 1975년에 폐업하기에 이른다. 이런 상황에서 신상옥 감독은 홍콩 제작사 쇼브라더스와 합작을 시작했다. 쇼브라더스가 제작한 작품에 한국인 배우들이 출연하도록 하는 ‘ 위장 합작(Counterfeit co-production) ’의 방식이었는데, 케니 응 교수는 이것이 신상옥 감독으로 하여금 제작 과정에서의 경제적 부담을 덜고 양국 영화산업의 역량을 개발하는 데도 기여했다고 설명했다. [6] <반혼녀> 중 한도령(이승용)과 연화(리칭) 한편, 신상옥 감독이 시대적 한계를 지닌 사회 제도로 인해 고통받는 여성과 그를 에워싼 금기시된 사랑을 묘사하는 과정에서, 케니 응 교수는 당시 검열을 비롯한 사회적 권력의 억압에 의해 억눌리고 은폐된 욕망이 분출되는 양상 을 관찰했다. 특히 한·홍 합작 영화 < 반혼녀 >(신상옥, 1973)에서, ‘유령’이라는 초현실적 소재가 죽음을 초월한 사랑을 추구해 상대를 끊임없이 갈망하는 내러티브에서 이 점이 잘 드러난다고 봤다. 거액의 돈을 가지고 연인 연화(리칭)에게 가려고 했던 한도령(이승용)은 산적에게 기습을 당하고, 한도령과 만나지 못한 채 생을 다한 연화가 유령이 되어 그를 찾아와 사랑을 이어간다는 이야기이다. 케니 응 교수는 유령과 인간 사이의 사랑이라는 설정 자체가 사회적 통념에 반하려는 시도이며, 여기에 호러와 코미디 요소가 섞여 극의 완성도를 높였다고 말한다. 또한 성과 폭력에 관한 묘사가 비교적 엄격히 규제되었던 1970년대의 시대적 한계를 그만의 예술성으로 극복한 방식 역시 인상적이라고 덧붙였다. [7] 신상옥 감독과 쇼브라더스 간 이와 같은 협력을 기점으로, ‘유령이 등장하는 로맨스’가 아시아 영화에서 장르로 인식되고 활발히 제작되는 데 기여했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 토론 * 패널 1의 발표자 4인이 발표한 후, 홍콩 링난대학교 디지털아트·문화산업학부 연구 조교수 에녹 이욕 탐(Enok Yee-Iok Tam)이 아래와 같이 질문했고, 발표자들이 답변했다. Q. 제시카 시우인 여웅 교수에게 (질문1) 본 연구에서 정형만큼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은 홍콩 자유영업공사와 영광영업공사의 설립자 황척한 이다. 그가 활동하던 당시 한국과 홍콩의 합작이 활성화될 수 있었던 지정학적 요인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또한 영광영업공사 는 소규모의 독립영화 제작사에 가까웠음에도, 한국은 어떻게 이들과 합작을 고려하게 되었을까? (답변) 냉전 시기 홍콩과 대만, 한국(남한), 일본,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은 아시아의 반공 지역으로 구분되었고, 황척한은 이들 중 대만과 일부 동남아시아 국가의 영화시장에 진입을 시도했지만 결과가 성공적이지 않아 다시 홍콩으로 돌아왔다. 그러다가 <서유기>가 흥행하면서 제작자로서 그의 명성이 한국에 전해지고 합작 대상으로 부상하는 계기가 된 것 같다. 그리고 당시 개최되어오던 아시아영화제도 아시아 국가들 간의 합작을 매개하는 장으로 기능했을 수 있다. (질문2) 한·홍 합작이 활성화되던 시기 아시아에서 ‘ 007 시리즈 ’가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다고 말씀하셨다. 007 시리즈 열풍을 중심으로 한 당시 첩보 액션의 인기가 황척헌과 한국영화계의 합작에 미친 영향이 궁금하다. (답변) 007 시리즈는 비슷한 시기 여러 문화권에 의해 이용된 영화적 트렌드였다. 세계 각지에서 제작된 작품들이 유사한 그림을 연출하고 싶어 했고, 헬리콥터 액션 신 촬영에 동참한 정형 역시 이 트렌드에 합류하는 배우로 인식되려는 의지를 지녔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다른 국가들 역시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던 이 시리즈와 유사한 장르에 안착해, 박스오피스 흥행을 보장하고 상업적 성공을 이룩하려고 했으리라고 본다. Q. 정종화 팀장에게 (질문1) 위에서 제시카 교수가 언급하셨듯이, 팀장님께서도 007 시리즈 개봉과 더불어 첩보 액션 장르의 인기가 합작 영화의 장르 설정 및 제작에 영향을 미쳤다고 말씀해주셨다. 그렇다면 이로부터 영향을 받은 한국형 첩보 액션이 냉전이 진행 중이던 당시 대만 관객으로부터 호응을 얻은 배경을 더욱 자세히 알고 싶다. (답변) 한국에서 개봉한 첫 007 시리즈는 러시아를 배경으로 한 < 007 제2탄 – 위기일발 >(테렌스 영, 1963)이었다. 국내 개봉 연도인 1965년 박스오피스에서 1위를 기록했을 정도로 엄청난 흥행 성과를 거뒀고, 당연히 한국 스타일의 첩보 액션 장르가 확립되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한국에서는 특히 북한을 적대자로 설정하는 반공 기조의 내러티브가 결합되었다. 또한 스파이 출신의 여성과 한국 남성 요원이 연인으로 거듭나는 과정, 이국적인 공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스릴 넘치는 모험 등 여러 대목에서 007 시리즈의 흥행 공식을 발견할 수 있다. 이렇게 007 시리즈의 자장 아래 제작된 작품들은 당시까지 제작 및 개봉된 한국영화에서는 관찰되지 않은 특징들을 지니고 있다. 강인하고 생기 넘치는 남성 주인공 이 등장하며, 서구의 007 시리즈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가족’에 대한 강한 집착 을 보여주기도 한다. 대만을 포함한 해외 국가에서 제작된 작품들과 대만 박스오피스에서 경쟁해야 했던 강범구 감독의 관점에서, 007 시리즈 첩보 액션의 이러한 특징들은 대만 관객을 사로잡는 데 유용한 기회로 작용했다. 그는 장르영화에 관한 새로운 미학 을 추구하고, 빠른 편집 을 시도했으며, 현대적이면서도 한국적인 액션 내러티브 를 고안했다. 그 결과, 같은 시기의 대만 장르영화들에 비해 그의 작품이 국제적 감각을 지녔다고 평가받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코멘트_패널 체어 김신동 교수) 개인적으로, 007 시리즈는 첩보 액션 스릴러임과 동시에, 세계 각지의 생활 모습을 노출하며 낯선 지역의 풍경을 매혹적인 소재로 소비하는 이국주의(Exoticism)의 관점에서 제작된 관광 영화 (Tourism film)에 가깝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당시 한국영화계 역시 이러한 시각적 즐거움이 전시된 영화를 만들 기회를 찾고 있었던 것 같다. 다만 1960~70년대에는 멀리 위치한 해외 국가에 접근하기가 여의치 않았고, 홍콩을 비롯해 일본의 오사카, 필리핀의 마닐라, 대만 정도가 그들이 지리적 배경으로 선정할 수 있는 ‘외국’의 범위에 포함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홍콩은 그중에서도 한국영화계와 관객 모두가 매력을 느낀 공간이었다. <패널 2> 아시아 영화 속 경계 허물기 일본 교토대학교 김수현 연구원이 이끈 패널로, 동시대 중국어권 영화가 서로 다른 국적이나 지역성, 젠더 등의 ‘경계’를 사유 또는 표현하는 방식을 분석했다. 중국어권 동아시아의 ‘악센트 차이니즈 시네마’: 장률의 <야나가와> 등 트랜스내셔널 영화 제작을 이론화하기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 동아시아언어문화학과 박사 수료자 클로이 원셴 장) 클로이 원셴 장(Chloe Wenxian Zhang)은 영화 속에서 관찰되는 억양과 방언이 작품의 형식과 미시적 담론, 그리고 인물들의 자기 정체성 인식의 측면에서 어떤 영향력을 발휘하는지를 연구했다. 한국에서 영화감독으로 활동하는 재중동포 3세로서 국가나 민족의 경계에 관한 ‘트랜스내셔널 시네마’를 선보였던 장률 감독의 < 야나가와 >(2021)를 텍스트로 선정했다. 장률 감독은 ‘국적’을 주제로 디아스포라 감성을 일깨우는 비주류 독립영화, 하나의 문화에 국한되지 않고 ‘경계를 가로지르는(Border-crossing)’ 영화를 발표한 초국가적 작가(Transnational auteur)로 알려져 있다. 클로이는 장률이 대사의 ‘ 억양(Accent) ’을 사유하는 방식을 통해 본 작품이 색다른 트랜스내셔널 시네마가 될 수 있음을 보였다. <야나가와>에서 주인공 아추안, 그리고 형제 리동과 리천은 보편적이고 이상적인 표준 중국어로 인식된 ‘부동화’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차별을 경험했고, 이에 대한 인물들의 기억은 작품 전체를 관통한다. 같은 중국인이더라도 표준 중국어인 부동화를 구사하지 못하는 이는 소외되도록 하는 관습으로서의 ‘내부 타자화(Internal othering)’를, 클로이는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의 ‘ 타자의 단일언어주의(Monolingualism of the Other) ’ 개념을 적용해 설명했다. 데리다는 인간은 오직 한 가지의 언어를 모국어로 습득하지만 이는 본래 ‘타자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타자는 권력을 바탕으로 그의 언어만을 말하도록 교육하거나 강요하고, 이러한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인간은 언어를 배우고 소통하게 된다는 것이다. 베이징 방언을 사용하던 아추안이 부동화를 선호하는 다수로서의 ‘타자’가 지닌 권력에 의해 소외되자, 그가 공동체 안에서 존립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리동이 자신 역시 베이징 방언을 사용하지 않는(타자가 강요한 언어에 따르기로 결심하는) 것처럼 말이다. <야나가와> 중 아추안과 리동 한편, 클로이는 억양이 단순히 누군가의 정체성을 재단하는 지표가 아니라, 그 자체를 실존하는 행위 로 인정할 수 있음을 보였다. 억양이 무언가를 욕망하거나 열망하고, 그에게 친밀감을 표현하는 방식을 가리킨다고 설명한 문화비평가 푸자 라간(Pooja Ragan)을 인용했다. <야나가와>의 후반에 아추안과 일본인 여성이 서로 다른 언어로 대화하지만 상대의 이야기를 ‘느낄’ 수 있다고 표현한 장면과, < 후쿠오카 >(2019)에서 한국인과 중국인(만다린어 구사), 일본인이 단어가 아니라 발화의 톤과 몸짓을 통해 소통하는 모습이 그 예다. 단어가 무너지면, 삶의 방식으로서 실존하는 억양과 몸짓 등이 비로소 언어를 초월해 공명을 일으키고, 장률의 작품에서처럼 아시아 국가 간의 친밀감을 도모하는 데 기여하게 된다. 클로이는 <야나가와>를 내셔널, 트랜스내셔널 시네마라는 개념의 이분법을 바탕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대신 작품이 선택한 ‘억양’의 색다른 의미를 철학적 차원에서 발굴해 장률 작품 세계의 새로운 지평을 소개했다. 내러티브를 매개하고 인물들의 감정을 증폭하는 핵심 요소로서, 그리고 언어로는 극복할 수 없는 서로 다른 화자 간의 장벽을 친밀감으로 허무는 행위 그 자체로서 ‘억양’을 상정한다. 언어의 형태가 아니면서도 영화에서 인물 간 본연의 소통을 돕는 실천적 행위로서 ‘억양’의 지위를 재정립하려는 의미 있는 시도였다. 소속감의 한계를 질문하기: 동시대 한국영화 속 화교 인물 연구 (홍콩대학교 현대언어문화학과 방문 교수 김소혜) 김소혜 교수는 동시대 한국영화가 화교 또는 조선족 출신 인물을 묘사하는 방식을 관찰하고, 한국영화가 인물들의 다양한 정체성을 재현하는 데 여전히 한계를 보임을 지적한다. 화교와 조선족은 내/외국인을 가르는 이분법에 도전하고, 민족적 동질성에 관해 일부 한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통념을 흔든다. 이렇게 국적이나 민족 인식에 관한 긴장을 논의하는 장이, 2000년대 이후 한국영화를 통해 마련되기 시작했다. 김소혜 교수는 화교를 이주 시점을 기준으로 두 종류 [8] 로 구분하고, 그중에서도 < 고양이를 부탁해 >(정재은, 2001)와 < 극한직업 >(이병헌, 2018), 그리고 < 신세계 >(박훈정, 2012)를 사례로 연구했다. 인천에서 살아가는 젊은 여성 다섯 명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는 <고양이를 부탁해>에서, ‘낙후된’ 지역으로 묘사되는 인천은 번화한 서울과 극명하게 대조된다. 동시에 화교 인구가 이주한 공간이라는 이미지도 덧붙여지면서 작품 전반에 ‘소외’의 분위기가 조성된다. 더불어, 인물 다섯 명 중 화교의 후손으로 설정된 일란성 쌍둥이 비류( 이은실 )와 온조( 이은주 )는, 다른 인물들과 달리 개성을 지닌 주체로 비춰지지 않는다. 일란성 쌍둥이라는 인물 설정에서 나타나듯, 독립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개인’으로서의 캐릭터는 그들에게서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인물들 모두가 불확실한 미래를 찾아 떠나고, 그들이 함께 돌보던 고양이가 유일하게 인천에 남은 비류와 온조에게 건네진다는 내러티브 역시, 두 인물이 인천에게 입혀진 ‘소외된 지역’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징함을 암시한다. 비류와 온조는 다른 인물들과 같이 몸소 성장을 경험하는 주체가 아닌 그들의 성장에 기여하는 주변적 인물 로만 그려진다. 2000년대 이후 화교 인물은 특유의 언어적, 문화적 유동성을 바탕으로 한국과 더욱 광범위한 중국어권 사회 사이의 소통을 매개하는 존재로 묘사되는데, 이 과정에서 한국문화에 더욱 잘 동화된 ‘ 안전한 비주류 ’로서의 화교 인물이 형성된다. 배우 진선규 는 매우 폭력적이고 무자비한 인물로 그려진 전작 < 범죄도시 >(강윤성, 2017)에서의 역할과 다르게, <극한직업>에서는 전직 유도 국가대표이자 현직 경찰로 등장하며 유순하고 정직한 이미지를 표방한다. 한국인 여성 장 형사( 이하늬 )와의 로맨스까지 등장하면서 그가 민족적 배경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 내 위치를 점한다는 인식이 강화된다. <신세계>에서 이자성( 이정재 )은 화교 출신 인물이지만 이를 이용해 폭력 조직에 잠입하며 한국 경찰로서의 임무를 수행한다. 반면, 이 작품에서 정청( 황정민 )이 일시적인 폭력 행사를 위해 불러들인 조선족 인물들은 의상과 말투 등에서 한국인과 크게 대비되도록 설정되어있다. 게다가 후반부에는 이자성마저도 끝내 경찰 조직으로부터 버림받은 후 폭력 조직에 동화되고, 한국의 공식적인 사회 구조가 아니라 스스로 진입한 지하세계에서 소속감을 획득한다. 한국영화에서 화교 인물이 배경으로만 소비되지 않고 존재감을 드러낸 사례임을 인정하더라도, <극한직업>과 <신세계>와 같은 동시대 작품은 그들을 ‘한국에 동화되기 쉬운 덜 잔인한 비주류’라는 이미지로 재단한 후에 소환하려고 한다. 김소혜 교수는 이러한 설정이, 화교 인물들을 한국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기를 주저하는 태도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라고 주장한다. 화교 인물들에 대한 가시성은 확보되었지만, 한국사회의 다양성 담론의 한계와 더불어 한국영화가 긴 시간 침묵을 강요받은 비주류 공동체를 재현하는 데 여전히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경계 위의 여성 동성애: <녹야>와 <블루 송> 속 한·중 퀴어의 조우 (네덜란드 암스테르담대학교 미디어학과 박사 수료자 앤디 주) 앤디 주(Andy K. Zhu)는 중국 퀴어영화에서 한국과 중국의 퀴어적 조우가 발생하는 맥락을 설명한다. 특히 최근 발표되는 중국 퀴어영화 중 다수가 랴오닝, 지린, 헤이룽장 성을 아우르는 중국 북동부의 ‘ 동북(Dōngběi) ’ 지역을 배경으로 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9] 여기에 퀴어 연구를 접목해, 이분법적인 사고로부터 탈피해서 국적과 젠더 등에 관한 복잡한 질문을 사유하는 공간으로서 동북이 지닌 가능성 역시 제안하고, 관련 영화로는 < 녹야 >(한슈아이, 2023)와 <블루 송>(경즈한, 2023)이 언급됐다. 중국의 퀴어영화의 배경으로 동북이 부상한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 앤디는 영화의 본질이자 단어 자체에도 반영되어있는 ‘ 움직임 (Kino)’의 개념을 퀴어에 적용했다. 그는 다수의 퀴어영화가 인물들의 퀴어한 욕망을 바탕으로 발생하는 국경을 초월한 ‘움직임’에 기반한다는 점에서, 퀴어영화 연구에 필요한 방법론으로 ‘ 키노정치학 (Kinopolitics)’을 선택한다. 나아가, 두 작품에서 특히 돋보이는 퀴어한 인물들의 움직임을 규정하는 개념으로 “ 경계 위의 여성 동성애 (Bordering lesbianism)”를 소개했다. 국가의 중심지로부터 소외된 지역에서 역시 공동체로부터 소외된 여성 퀴어 인물들이 관계를 맺고 특유의 움직임을 실천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녹야> 중 중국인이지만 한국으로 이주해 공항에서 세관 직원으로 근무하는 진샤(판빙빙)는 가정폭력과 불안정한 사회적 위치로 고통 받던 중에 초록머리 여자( 이주영 )를 만난다. 두 사람이 공항 보안 검색 중 처음 만나게 되는 장면에서, 이방인이자 이주 노동자인 진샤에게 한국인인 초록머리 여자는 그를 유혹하듯이 미소를 지으며 가깝게 다가온다. 퀴어적 접촉의 시도 이후, 두 인물은 서로를 위협하는 존재들을 제거함으로써 국경, 젠더, 권력의 경계를 넘나들며 폭력에 저항하고 연대하는 움직임을 함께 실천한다. 작품에서 인천·서울은 공동체에 소속되지 못한 이주 노동자와, 마약 밀매에 연루되며 불안정한 삶을 지속하는 한국인이 동시에 머무는, 역시나 역동성이 가득한 공간으로 표현된다. <녹야> 중 <블루 송>에서는 북한과 중국의 접경 지역인 하얼빈에 거주하며 서로 다른 민족적 정체성의 공존으로 인해 혼란을 겪는 소녀 루시엔이, 조선족 소녀 밍메이를 만나며 퀴어한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극중 루시엔은 교내 공연을 준비하며 한복을 입어야 하는 장면에서 그가 입을 차례가 되자 여성용 한복이 모자라 남성용 한복을 입게 되고, 한복 자체의 질감에 불편함을 느끼기도 한다. 한국의 민족성을 상징하는 한복에 익숙하지 않은 것과 여성용 한복에 접근하지 않는 설정은, 국적과 젠더의 측면에서 루시엔의 정체성이 고정되어있지 않음을 드러낸다. 또한 루시엔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사진관에서 만나 그와의 관계를 이어나가는 밍메이는 하얼빈에서 조선족이 머무는 공간으로 루시엔을 안내하며 또 다른 민족성의 경험을 유도하기도 한다. 두 작품은 퀴어적 인물에 대해 널리 각인된 이미지를 재확인하지 않는다. 대신 장르적 혼종성(네오 누아르인 <녹야>, 성장과 멜로를 섞은 <블루 송>)과 언어와 의복의 뒤섞임, 키노정치학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역동적 공간에서 한국인과 중국인이 조우하는 장면을 짚으며 이들 작품의 ‘악센트 시네마(Accent cinema)’로서의 면모를 강조한다. 특히 동북과 한국, 북한의 경계에서 퀴어한 관계가 형성되는 과정을 설명함으로써 퀴어영화를 지리적 공간과 연결했다는 점이 독특했다. 이러한 지리적 경계가 지닌 영화적 가능성을 향후 중국어권 퀴어영화에 대한 연구에서 주목할 주제로 남겨두기도 했다. * 토론 * 패널 2의 발표자 3인이 발표한 후, 홍콩 링난대학교 디지털아트·문화산업학부의 박지희 조교수가 아래와 같이 질문했고, 발표자들이 답변했다. Q. 클로이 원셴 장에게 (질문1) <야나가와>의 배경이 되는 일본 후쿠오카현의 야나가와시는 국제적으로 활동한 일본의 예술가 오노 요코의 고향이자 일제강점기 조선의 윤동주 시인이 생을 마감한 지역으로, 제2차 세계대전과 제국주의 역사의 상흔이 남아있는 장소 이다. 이를 배경으로 극중 인물들이 중국어의 암묵적 위계와 그로 인한 차별, 차별이 낳은 상처와 분투한다는 설정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있을까? 이러한 배경 설정이, 클로이가 언급한 ‘악센트 시네마’가 경계를 가로지르는 작품이 되는 데 기여하는 것일까? (답변) 시간 관계상 장률이 야나가와를 식민지의 상흔을 간직한 역사적 공간으로서 어떻게 사유해냈는지를 다루지 못했다. 오노 요코와 윤동주 시인에 관한 이야기를 비롯해 역사적 또는 언어학적으로 참고할 만한 자료들이 많았다. 주목할 점은, 장률의 작품은 언어학적, 영화적, 역사적으로 풍부한 의미를 지닌 기호들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특히 ‘억양(악센트)’은 그러한 측면을 이해할 수 있는 이론적·역사적 핵심 주제가 되어준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 세계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꼭 적용하고자 하는 개념이다. Q. 김소혜 교수에게 (질문1) 한국영화에서 화교 인물들은 말씀해주신 대로 배경의 일부 또는 단일민족주의에 관한 고정관념을 연상시키는 객체로 소비되기도 한다. 하지만 ‘ 장르영화 ’의 문법 속에서 이들은 또 다른 종류의 매력이나 잠재력 을 발휘하기도 한다. 예시로 드신 작품들에서도 이러한 측면을 발견하셨을지 궁금하다. (답변) 본 연구에서는 화교 인물들이 그간 작품의 주요 인물의 뒤편으로 물러서는 존재로 묘사되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말씀해주신 대로 그들은 한국의 역사와 지역성을 깨닫는 기회를 마련함으로써 다른 종류의 잠재력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성장 장르라고 할 수 있는 <고양이를 부탁해>에서 비류와 온조를 일란성 쌍둥이로 설정해 서로를 거울에 비춘 대칭적 이미지로 제시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이주의 역사와 급변하는 한국사회의 단면을 성찰할 수 있도록 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신세계>에서 역시 화교에 대한 편견을 답습하는 장면이 많이 발견되지만, 이자성의 경우 화교 출신이자 한국 경찰로 근무하는 양가적 정체성을 지닌 인물로 설정되어, 갱스터 누아르·언더커버 장르의 문법 안에서 모종의 자율성(또는 모호성)을 띤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기존의 경향을 전복할 만큼의 위력을 지녔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추후 화교 인물의 재현을 시도한 다른 작품들의 사례에서 지속적으로 확인해봐야 할 것 같다. <신세계> 중 *** [1] 1963년 10월 7일 발생한 주홍칭 사건이 대표적인 예다. 도쿄에서 주홍칭(周洪景)이라는 인물이 정치적 망명을 위해 대만 입국 허가를 요청했지만 일본 정부가 그를 중국 공산당으로 보내면서 대만과 일본 사이의 외교적 긴장이 발생했다. [2] 이는 다른 작품에서 여성 인물에 대한 한국인 남성 인물의 기대로도 표출된 바 있다. < 비련 >(정창화, 1967)에서 양일환( 남궁원 )이 한국 여성의 옷은 아름답고, 상대 여성에게 잘 어울릴 것이라고 언급하거나, < 조용한 이별 >(정창화, 1967)에서 이상현( 신성일 )이 극중 유학생인 정예화(정형)와 창덕궁에서 만나 한복을 입도록 하고 시부모님께 절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장면이 예가 된다. [3] 하지만 모친은 현재 다른 남성과 결혼해 홍콩에 정착했는데, 이렇게 중년 여성 인물은 현 가정의 평화를 추구하기 위해 다른 국적의 남성과 과거에 맺은 연인 관계를 숨기는 경향이 짙다. < 나는 비밀이 있다 >(김용덕, 1963)에서도, 차경녀( 주증녀 )는 홍콩에서 결혼한 적이 있지만 이내 한국으로 넘어와 한국인 남성과 결혼하며 홍콩에서 낳은 자녀의 존재 역시 부정한다. [4] Doane, M.A., Film and the masquerade: Theorising the female spectator , Screen, 1982. [5] 이영재, 『아시아적 신체』, 소명출판, 2019. [6] 대표적으로 < 대폭군 >(임원식, 1966)이 있다. 한국어 버전에는 최은희가, 중국어 버전에는 리리화가 출연했다. 컬러로 촬영되었으며 홍콩 쇼브라더스 스튜디오와 서울 교외 지역 모두를 로케이션으로 하여 약 25,000여 명이 촬영에 임했다. 제작에는 오백만 홍콩 달러라는 대규모 자본이 투입되어, 양국 영화산업의 역량을 적극적으로 동원한 사례로 평가받는다. 이외에도 < 보은의 구름다리 >(최경옥, 1963), < 달기 >(최인현, 악풍, 1964) 등 신필름과 쇼브라더스가 합작한 작품들도 여기에 해당한다. [7] 이외에도 < 꿈 >(신상옥, 1955)은 전후 한국 여성이 맞닥뜨린 사회적 제약을 조신( 황남 )과 달례( 최은희 )의 금기시된 로맨스, 그리고 클로즈업과 몽타주 등의 장치를 통해 효과적으로 표현했다. 승려와 여성 간의 사랑과 성적 욕망을 다루며 사회적 금기에 도전한 1950년대 영화적 실험 사례로 꼽히기도 한다. [8]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중국 산둥 성에서 조선으로 이주한 중국인을 ‘구화교’로, 중국이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1992년에 한국과 수교를 맺은 뒤 한국으로 대거 이주한 한국계 민족, 즉 조선족을 ‘신화교’로 칭했다. [9] 동북은 1990년대부터 국영 공장들의 폐쇄로 중국에서 쇠퇴와 폐허의 상징이 됐지만, 앤디는 영화를 통해 과거의 기억을 되살려 수십년간 중국사회의 변천사를 반추하게 하는 공간으로 이 지역을 재조명한다.
사진: " Oldboy ", IMDb 올 여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진행된 ‘해외 영화학자 초청 대중 특강’의 내용을 강연자의 시점에서 정리합니다. 영화와의 첫 만남과 학계 입문 과정에 얽힌 소소한 에피소드부터, 세계 속 한국영화의 위치, 최근 몰두하고 있는 연구 주제에 대한 학술적 분석까지. 한국영화를 향한 해외 영화학자 6인의 개성과 열정으로 꽉 채워졌던 2시간을 KOFA가 직접 기록한 특강노트 로 만나보세요. 김규현 교수 는 근•현대 일본과 한국의 역사를 중심으로 연구하며, 일본 대중문화(특히 만화)와 한국영화에도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왔다. 한국영화 리뷰 사이트 “Koreanfilm.org”에 20여 년이 넘게 한국영화에 대한 리뷰를 기고할 만큼, 그는 열렬한 영화 팬이자 장르영화 ‘덕후’라고 할 수 있다. 저서로는 The Age of Visions and Arguments: Parliamentarianism and the National Public Sphere in Early Meiji Japan(2008)이 있고, “The politics of national language and wartime mobilisation of everyday life in late colonial Korea, 1937-1945”(2016), “Pak Chan-wook’s Thirst: Body, Guilt and Exsanguination”(2013) 등의 논문을 집필했다. 현재 박찬욱 감독의 작품에 대한 연구서 출판을 기획 중이며, UC 데이비스대학교에서 역사학과 일본-한국 전공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글로벌 코리안 시네마의 숨은 주역, 대중문화의 소매상과 중개인 ‘한국영화’에서 ‘글로벌 코리안 시네마’로의 변화라는 중심 주제를 상기하면서 강연을 시작하고 싶다. 근대화가 시작된 이후 한국영화는 계속 발표되어왔고, 이때부터 한국인들은 단 한 번도 한국영화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다. 일제강점기 영화사 관련 문헌 자료만 봐도 이를 알 수 있다. 다만 이제는 한국영화를 인식하는 지역의 범위가 전 세계로 확대되었고, 이에 걸맞게 세계 영화 팬들은 ‘글로벌 코리안 시네마’라는 새로운 영역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한국인에게도 익숙지 않은 이 영역은 어떻게 정의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작품의 텍스트를 직접 분석하거나, 작품을 문화산업의 측면에서 정치•경제적으로 고찰하고 문화•사회사 이론을 적용해 해석하는 등 각기 다른 방법으로 구해질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영화학을 전공하지 않았고 엄밀히 말하면 영화를 꾸준히 사랑해온 한 명의 ‘영화 팬’에 더욱 가깝기에, 이번 시간에는 이러한 학술적인 관점을 가지고 답을 찾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 일본만화 덕후이자 컬트영화 팬이었던 내가 대학 입학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하고, 지금까지 동아시아 역사 연구자로 살아오면서 한국 대중문화, 그중에서도 한국영화의 재발견을 거듭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야기하고 싶다. 타인의 부추김이 동반되곤 하는 ‘공부’와 다르게, 소위 말하는 ‘덕질’은 내가 좋아하는 무언가에 스스로 열중하게 만든다. 그 에너지는 실로 강력해서 덕질을 이어가다보면 자연스럽게 그 소재를 ‘공부’하게 된다. 공부의 의의나 성취를 타인이 인정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나는 1960~70년대 한국에서 유년기를 보내면서 만화 덕후로 지냈다. TV에서 <마징가 Z>를 본 후 명동으로 가서 원작 만화를 찾아 읽으며 나가이 고라는 작가를 알게 되고, 『바벨 2세』(1970)를 보고 요코야마 미츠테루가 60여 권이 넘는 방대한 『삼국지』 시리즈를 그리기도 했다는 사실에 놀라는 등의 흥미진진한 추억이 가득하다. 그렇게 일본문화에 익숙해지고 흥미를 붙인 끝에 일본 역사를 전공해 박사 학위까지 취득하는 데 이르렀다. 또한 역사 연구자인 내가 수많은 영화에 대한 학술 논문을 내놓고, 바야흐로 박찬욱 감독 작품의 연구서를 집필하려는 의지를 다지게 된 데 역시, 타인의 인정을 애써 요구하지 않는 애호의 마음이 작용했다. 한국영화가 글로벌 코리안 시네마로 불리기까지 실질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지만 학술적 논의를 통해서는 상대적으로 주목 받지 못한 요인이 있다. 바로 ‘덕후’로서 그 애호의 마음을 발휘해온 ‘대중문화의 소매상들과 중개인들(retailers and brokers of popular culture)’이다. 이는 정식 학술 용어는 아니며, 일명 ‘컬트영화 팬’을 지칭하기 위해 내가 사용하기 시작한 단어이다. 그리고 나 자신도 여기에 속한다. 특정 장르의 만화나 영화에 열광해 자발적으로 펼쳐온 활동이, 한국영화의 세계화에 기여하는 대중문화 중개인으로서의 역할에 부합하고 있었다. ‘한국영화 르네상스’와 그레이 마켓, 그리고 광학 매체 2023년, < 올드보이 >(박찬욱, 2003)가 개봉 20주년을 맞아 미국에서 재개봉되었다. 나도 캘리포니아주 에머리빌의 한 극장에서 관람했다. 놀랍게도 흥행 성적이 훌륭했다. 재개봉 첫날 전미 박스오피스 9위를 기록했고, 2005년 북미 극장 개봉 당시에는 약 70만 7천 달러였던 수익이 이때는 약 170만 달러로 2배가 되었다. 개봉 직후에는 대중이 충분히 호응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몇몇 작품은 세월이 지나며 결국 그 가치를 인정받음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이런 한국영화들이 탄생하는 배경이 된, 즉 1990년대부터 한국영화의 발전이 본격화되는 데 기여한 몇몇 조건들이 있다. 먼저, 민주화 운동이 진행되고 검열이 완화되며 영화가 다룰 수 있는 정치적 이슈나 성적 묘사 등을 포함한 소재와 그에 대한 표현 방식이 다양해졌다. 그리고 영화를 공부한 ‘영화학도’들이 현장에 참여하면서, 각자의 관점에서 모범으로 삼는 영화를 참고해 작품세계를 구상하는 활동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한편, 인터넷 등이 발달해 정보의 송수신이 용이해져 전문가의 비평 언어가 널리 공유되었고, 특수 메이크업 효과와 프로덕션 디자인 등 작품의 완성도를 한층 끌어올릴 수 있는 기술도 (특히 호러나 필름 누아르와 같은 장르에서) 발전했다. 2000년대 초 제작된 <장화, 홍련>(호러), <지구를 지켜라!>(SF) 개인적으로는 한국 근•현대사의 성격이 1987년을 기점으로 나뉜다고 생각한다. 민주화와 경제 발전, 세계화, 정보통신기술의 사회문화적 영향력이 복합적으로 발현된 1987년 이후의 한국사회는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특히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영화에 관한 담론이 보다 넓은 계층에게까지 공유될 수 있었고, 이는 한국을 대표하는 ‘국민영화’를 제작해 해외에 선보이고 싶다는 국내 영화계의 오랜 과제가 수행되는 데 추진력을 더했다. 여기에 불법 비디오의 유통으로 ‘영화 덕후’들의 감상 스펙트럼이 확장되는 한편, 1990년대 시네필 문화를 바탕으로 영화평론은 학구적 색채를 띠기 시작해, 두 가지 경향 사이에서 진동하는 영화 글쓰기가 가능해지는 특별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여러분께 여쭤보고 싶다. 한국영화가 세계적으로 ‘떴음’이 분명해진 것은 언제부터라고 생각하는가? 물론 정답은 없고, 나 역시 주관적인 의견을 가지고 있을 뿐이지만, 아마 <올드보이>, < 살인의 추억 >(봉준호, 2003), < 장화, 홍련 >(김지운, 2003), < 지구를 지켜라! >(장준환, 2003) 등이 개봉한 2003년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2003년에 한국영화에 열광한 이들과는 조금 다른 종류의 관객이, 그 이후부터 등장한다. 준-불법 비디오 시장인 이른바 ‘ 그레이 마켓 ’이 융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서는 비디오 유통 체인점이 잘 다루지 않는 블록버스터 등을 접할 수 있었고,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영화제와 어느 정도는 연계된 유통망을 구축해놓기도 했다. 또한 DVD 라는 매체가 출시되며 영화문화에 혁명적 변화가 일어난다. VHS는 매체 특성상 좋은 화질과 음질로 감상되기 어려웠지만, DVD는 ‘복원된’ 영상과 음성 소스를 수록할 수 있기에 같은 작품이더라도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차원의 감상 경험을 제공했다. 게다가 (당시 일본과는 다르게) 한국영화 DVD에는 대부분 영어자막이 탑재되어있어 해외 시장에서 유통되기도 쉬웠다. 이러한 시류에 힘입어, ‘고상하지 않지만 매우 재미있고 폭력적인’ 일본 시대극들처럼 그간 그레이 마켓에서 주로 관심 받던 작품들의 대열에 한국영화가 합류하면서, 한국영화가 각지의 로컬 컬트영화 팬들로부터 각광 받는 길이 열린다. 이때 한국영화의 세계적 유통에 컬트영화 팬들이 미치는 영향력을 체감하게 해준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유명했던 비디오점 “Le Video”에 가니, 당시 내가 온라인에 게시했던 <올드보이> 리뷰가 가게의 전시창에 붙어있었다. 할리우드나 기타 영화 전문업계에서 생산한 평론보다, 실제 ‘덕후’가 남긴 리뷰를 통해 또 다른 ‘덕후’들의 관심과 공감을 불러일으켜 비디오 유통을 촉진하는 것이 이 가게의 전략이었던 것 아닐까? DVD 시장에서 출발한 작품의 흥행이 ‘대중문화의 소매상들과 중개인’의 활동에 상당 부분 의지했음을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 악령의 밤 2 >(마리오 바바, 1977), < 서스페리아 1977 >(다리오 아르젠토, 1977) 블루레이 (사진: Amazon) 사실, 역사적으로도 DVD와 블루레이 시장 자체가 대개 장르영화들에 의해 개척되었다. 북미 지역에서 높은 명성을 자랑하는 값비싼 복원판 디스크 제작의 트렌드가 마리오 바바나 다리오 아르젠토와 같은 감독들의 컬트 이탈리아 호러 영화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것처럼 말이다. 북미 영화 팬들은 그간 극장의 개봉작들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웠던 해외 장르영화들에 대한 접근성이 광학매체의 유통과 함께 눈에 띄게 높아진 데 열광했다. 그리고 영상 복원 기술은 고전 호러, SF, 필름 누아르 등의 장르영화 디스크의 소스가, 제작자들이 의도한 느낌에 가까운 영상으로 팬들에게 전해지는 데 기여했다. DVD, 블루레이라는 매체에 의해 새로운 영화문화가 조성되는 첫 단계가 바로 장르영화를 바탕으로 진척된 것이다. 이들 특유의 감성과 스펙터클은 북미 주류 사회의 ‘정치적 공정함’과 ‘고상한 취향’에 도전한다고 여겨져 흥미를 불러일으켰고, 팬들의 관심은 홍콩과 일본, 동남아시아 등에 이어 한국영화로도 향했다. *주1 그러다가 2010년대 후반, 넷플릭스 등의 OTT 스트리밍 서비스가 VOD 시장을 지배하면서 위의 그레이 마켓을 무대로 번영한 비디오 가게들, 즉 ‘대중문화 소매상’들의 활동은 쇠퇴했다. *주2 하지만 2017~2018년부터 벌써 넷플릭스에 등록된 한국어 콘텐츠의 양이 상당했다는 데서 볼 수 있듯이, 한국 장르영화에 대한 관심은 식지 않아 여전히 여러 OTT 플랫폼의 주요 타깃이 되고 있다. 서구 장르영화를 닮은 글로벌 코리안 시네마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이끈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박찬욱과 봉준호의 작품들은 왜 북미 영화계 종사자들에게 친근감을 주는 것일까? 박찬욱 감독에 집중해 설명하자면, 그의 작품이 전 세계 장르영화의 계보에서 점하고 있는 위치를 파악해볼 필요가 있다. 특히 <올드보이>는 < 현기증 >(알프레드 히치콕, 1959), < 차이나타운 >(로만 폴란스키, 1974), < 강박관념 >(브라이언 드 팔마, 1976) 등 서구 장르영화 걸작의 기조를 이은 것으로 보인다. 금기시된 사랑, 공허한 허구에 대한 집착 등의 소재도 반복되지만, 무엇보다 ‘ 서스펜스 ’라는 요소의 활용이 돋보인다. 서스펜스(Suspense)는 ‘매달리다’라는 의미의 “Suspend”에서 비롯된 용어인 만큼, 영화에 쓰일 때는 떨어지기 직전의 존재가 무언가에 매달린, 즉 아직 불씨가 당겨지지 않은 감정이 터지기 일보 직전으로 응어리져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히치콕은 그 요소를 작품에 기막히게 배치하는 거장으로 불리고, 비슷한 경향이 박찬욱 감독의 작품에서도 엿보인다. 이렇게 추락하기 직전에 매달려있는 인물을 볼 때 관객이 느끼는 감정의 정체는 즉각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보다 복잡한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박찬욱은 서스펜스를 통한 감정의 이 복합성을 이전 세대 장르영화 감독들로부터 멋지게 계승했다. 인물의 선과 악이 뚜렷한 평면적인 스릴러에 나타난 윤리적 지형을 벗어나, 관객이 왠지 모를 불편함을 감지하면서도 여기서만 경험할 수 있는 복합적 감정 을 느끼러 영화를 다시 찾게 만드는 힘을 가졌다. <파업주동자>와 <올드보이> 속 추락 직전의 인물 (사진: (좌) " 1000 Frames of Saboteur (1942) - frame 974 ", The Alfred Hitchcock Wiki / (우) " Oldboy ", IMDb) 일례로 히치콕의 < 파업주동자 >(알프레드 히치콕, 1942)에서 악당 프라이가 추락사하는 장면을 살펴보자. 추락 과정의 부감숏과 일그러진 얼굴의 클로즈업을 통해, 관객은 악당의 파멸을 지켜보고자 하는 가학적 욕망과 동시에 추락하고 있는 그와 동일시함으로써 발생하는 공포라는 두 가지 감정을 모두 체험한다. <올드보이>에서 수아( 윤진서 )의 추락사도 유사하다. 악당 이우진( 유지태 )의 시점에서 수아는 추락 직전의 상태로 비춰지고, 관객은 이우진이 악당임을 알면서도 누나의 추락 과정을 지켜보는 그의 죄책감을 공유하게 된다. 이는 인물이 뒤늦게 사건의 전모를 알게 된 후에 벌어지는 아이러니를 다룬다는 필름 누아르 장르의 특성과도 연결되는데, 박찬욱은 그만의 현대적 언어로 이를 훌륭하게 재현해낸다. 극중 진실의 탐구자(Investigator of the truth)로 상정된 오대수( 최민식 )가 자신의 믿음은 거짓이고 진실은 따로 있음을 깨달았을 때, 그의 윤리적 세계와 작품의 서사적 자기 완결성은 모두 괴멸해버린다. 예기치 못한 이 괴멸을 지켜본 관객은 복합적인 감정의 늪에 빠지지만, 그로써 영화에 더욱 젖어든다. < 박쥐 >(2009)에서 송강호가 창문으로 향해 비상하는 장면에서 역시, 카메라의 시점에 따라 인물의 움직임이 추락으로도, 비상으로도 보이도록 연출해, 관습적 인식의 작동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영화적 순간을 어김없이 직조해냈다고 볼 수 있다. <올드보이>를 대표하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는 ‘장도리 액션씬’도 마찬가지이다. 이 장면을 보고 여러분은 어떤 느낌을 받으셨을지 궁금하다. (관객) “아프겠다” “웃기다” “너무 리얼하다” “처절하다” “주인공이 아무리 맞고 찔려도 쓰러지지 않자 악당들이 공포스러워하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진다” 맞다. 주인공의 멋진 모습이 부각되는 보통의 액션영화에서의 장면과는 확실히 다르다. *주3 데이비드 보드웰은 저서에서, 홍콩 무술영화의 매력은 ‘발레’처럼 ‘합이 맞는’ 액션이 설계된 데서 찾을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올드보이>의 ‘장도리 액션씬’은 액션을 정교하게 설계하기를 거부하고, 논리적으로는 도저히 함께 발생하지 못하리라고 판단되는 감정들이 육감적이고 정서적으로 동시에 발생하도록 놓아둔다. 맞고 때리는 사람의 피곤함이 그대로 전해지는 ‘육체적’ 액션이자, 누구도 승리하지 못할 것처럼 보이는 싸움을 왜 하고 있는지에 대해 인물들이 실존적 질문을 던졌을 법하다는 추측도 하게 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장면이 현실성을 부각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나름의 미적 성취를 거둔 ‘멋있는’ 장면으로 기억된다는 점이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오대수를 연기한 최민식과 다른 배우들의 육체에서 발산되는 피로감에 관객이 공감하는 과정이 그 성취의 결정적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배우의 육체가 작동하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관객이 관찰했기에 이런 공감이 가능해진다. 보통 예술영화에서는 장면이 시각적으로 정교해지는 데 기여하는 장치들을 일부러 노출해 영화의 작위성을 드러내며 관객으로 하여금 소격 효과를 체험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장도리 액션씬’에서는 정반대이다. 액션의 기술과 구성 모두 허술하지만, 관객은 그들의 싸움에 집중하며 정신적으로, 심리적으로 깊이 연루된다. ‘내가 이 장면을 보고 왜 이렇게 반응했는지’를 신기하게 느낄 만큼. 최소한의 장치로 특정한 효과를 극대화하려는 ‘효율성의 시네마’를 지양하고, 감각적•감정적으로 다양한 반응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촬영된 장면이라는 것이 나의 해석이다. 또 다른 작가에 대한 질문으로 옮겨 가보자. 봉준호 감독의 < 기생충 >(2019)은 어떻게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하고 북미 영화계의 관심을 받을 수 있었을까?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감독상을 수상한 그의 소감에서 연유를 확인할 수 있다. 그는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라는 말을 가슴에 새길 수 있게 해준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 미국에서 ‘봉준호’라는 작가에 대한 인지도가 매우 낮을 때였음에도 좋아하는 영화 리스트에 매번 그의 작품을 꼽아준 쿠엔틴 타란티노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특히 본인이 “학교에서 마티(마틴 스코세이지)의 영화를 보며 공부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며, 텍사스 전기톱으로 트로피를 5등분해 나눠 가지고 싶을 만큼 함께 후보에 오른 영미권 출신 감독들(마틴 스코세이지, 샘 멘데스, 쿠엔틴 타란티노, 토드 필립스)도 존경한다고 밝혔다. 자신을 장르적 개성에 완성도를 더한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계승자 중 하나로 인식하고, 이 계보를 함께 이어나가고 있는 동료와 기쁨을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 읽힌다. 재치있게 언급된 < 텍사스 전기톱 학살 >(토비 후퍼, 1974)이라는 작품 역시, 뉴욕현대미술관에 역사상 가장 훌륭한 미국영화 중 한 작품으로 영구보존되어있고, 영화 매거진 Sight and Sound 선정 2012년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영화 250편 중 183위로 이름을 올린 바 있다. 일부 마니아층만 찾는 고전호러영화이자 장르영화라고 생각할 법한 작품도, 할리우드의 영화적 계보 상에서 영화사적 가치와 작품성을 인정받은 것이다. 봉준호 감독은 이 흐름을 따라 현재까지 활동을 지속하는 영미권 영화감독들과 동료 관계를 형성했고, 그 역시 그러한 계보의 연장선에서 ‘뉴 코리안 시네마’의 적자로서 독특한 작품세계를 구축하며 서구를 포함한 전 세계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한국영화가 ‘글로벌 코리안 시네마’로 거듭날 수 있었던 이유는, 비주류의 영역에서 탄생했을지라도 그만의 매력으로 세상 밖으로 나온 (특히 북미 관객이 열광하는) ‘덕후들의 장르’의 경향에 수렴해서, 즉 ‘좋아할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것을 만들어서’가 아닐까? 과거의 한국사회가 천대한 문화가 지금은 당당히 한류의 주축이 된 것처럼, 걸작도 한때는 쓸모없고 천박한 영화로 치부되곤 했다. 소수에게만 환영 받는다고 해서 가능성을 함부로 판단해 작품의 존재를 숨기지 말자. 이전에도 그랬듯이, 누군가(가령 대중문화의 소매상과 중개인)는 계속 찾고 있을 그 작품을 영화 팬으로서 계속 지지하고 싶다. * 질문과 답변 * (질문1) 불법 비디오 중심의 그레이 마켓이 크게 위축된 오늘날의 OTT 시대 에는 말씀하신 ‘대중문화의 소매상과 중개인들’이 어떤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가? (답변) 넷플릭스를 보면, 전 세계 관객에게 접근할 수 있는 장르적 문법을 사용했는데도 여전히 대중의 관심 밖에 있는 작품들(예를 들어 동유럽이나 남미 등지에서 제작된 호러영화들)이 너무 많다. 이들은 단순 B급 호러영화로 오해될 수 있지만, 사실 굵직한 역사적 사건을 다루고 있거나 높은 장르적 완성도를 자랑하는 경우가 많다. OTT 플랫폼이 아니라면, 그리고 장르영화에 대한 관심으로 그 플랫폼에서 이들을 발견해내는 불특정 다수의 애호가들이 아니라면, 이런 작품들이 대중에게 모습을 드러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동시대 영화 제작의 기술적 수준은 빠른 속도로 평준화되고 있으므로, 앞으로는 영화 제작과 감상이 (국가나 문화권 단위가 아니라) 특정 취향을 매개로 뭉친 애호가들 (예를 들어, ‘오대수 그룹’과 같이!)에 의해 활성화되는 경향이 크게 두드러지리라고 예상한다. 이처럼 영화를 향한 ‘대중문화의 소매상과 중개인’의 열정은 OTT 시대에도 가려진 걸작들을 발견하는 데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기에, 당분간은 OTT 산업이 그들의 활동을 무력화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보다 먼 미래까지 추측하기는 어렵지만. (질문2)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이끈 박찬욱과 봉준호 감독이 널리 인정받게 된 계기에 대해 설명해주셨다. 저만의 기우일수도 있지만, 이렇게 미국 장르영화의 계보를 잇는 작가들이 향후 한국영화계에서 다시 등장할 수 있을지 가 궁금하다. 혹시 교수님께서 이들의 뒤를 이을 감독으로 눈여겨보신 이가 있으신지, 혹은 유사한 인물이 더는 출현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고 보시는지를 여쭤보고 싶다. (영화저널리스트 김형석) (답변) 나도 그렇고, 많은 분들께서 이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박찬욱과 봉준호 감독은 1980~90년대 한국 현대사를 지나며 민주화, 정보통신기술의 발전, 영화학의 도입과 시네필 문화의 융성 등의 특수한 상황을 경험한 세대이다. 그래서 이후 세대의 감독들이 보여줄 작품의 형식과 내용도 그들의 작품에서와 같이 복합적일지에 대한 우려가 드는 것은 사실이다. 다만 한 가지 의문점은 제기하고 싶다. 바로 한국영화 내 ‘작가주의’의 지속성 에 대해서이다. 작품의 예술성을 좌우하는 주체는 감독이라는 인식은 여전히 한국영화계에서 널리 공유되고 있고, 연출과 제작 과정의 상당 부분은 감독 개인의 결정에 맡겨진다. 이러한 작가주의적 경향이 지속될 수 있을지가 조금 궁금하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영화에 관한 지식이 편재하게 되면서 작품의 기술적 완성도가 평준화된 오늘날, 오히려 영화에 관심을 가진 이들로 구성된 다양한 집단(각기 다른 특징을 지닌 영화애호가 집단 등)이 영화 제작과 유통, 감상을 주도할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영화를 다각도로 바라보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작가주의의 점진적 소멸이 그리 부정적인 현상이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 역시도 본 질문에 대해 계속 고민하고 있다. 20세기 후반 정치와 경제, 문화의 소용돌이 속 한국사회의 형성을 목도한 세대 이후의 감독들은 무엇을 어떻게 보여줘야 할까? 막막하게 느껴질 수 있다. 반면, 최근 국내 장르영화의 문법이 독창적으로 발전하려는 신호가 보인다는 점은 고무적이다. 박찬욱과 봉준호 감독과는 다른 종류의 작품을 레퍼런스로 삼은 연상호 감독의 행보, 한국사회의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난 < 오징어 게임 >(황동혁, 2021) 등의 작품은, 한국 영상 콘텐츠의 장르적 언어가 새로운 발전 방향을 모색하는 단계에 있음을 나타내는 듯하다. 전망이 그렇게 어둡지만은 않다. < 지옥 >(연상호, 2021)과 <오징어 게임>(황동혁, 2021) (질문3) 박찬욱과 봉준호 감독과 달리 할리우드의 계보 바깥에 위치하면서도 ‘한국적’ 특색을 선보임으로써 북미 관객으로부터 관심을 받는 감독 또는 작품이 존재할까? (답변) 두 사람도 한국 고유의 문화를 보여준다. 이들은 할리우드의 문법을 모사하지 않으면서 한국사회의 일면을 효과적으로 영화화한다. 할리우드마저도 이들의 연출 방식을 모방하는 현상을 보면, 둘의 작품세계가 지닌 독창성이 널리 인정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영화 한 편으로 ‘한국 고유의 문화’를 보여주기는 어렵다. 문화에서 ‘고유’의 영역을 분리해낼 수는 없듯이, 한국문화는 곧 한국인들의 총체적인 삶의 모습 이다. 여기에는 미처 분석하기 어려운 갖가지 요소들이 뒤섞여있고, 상호 모순적으로 보였던 요소들이 정체 불명의 통일성을 띤 채 놀랍게도 공존함이 드러나면서 한국문화의 위대한 성취가 엿보인다. 한국인들의 삶에서 녹아있는 이 혼잡한 뒤섞임과 공존을 어떻게 영화 한 편으로 압축해 선보일 수 있겠는가? (질문4) 교수님께서는 영화인이 공유하는 공통 언어로서 ‘장르’를 인식하고 계신 것으로 이해했는데, 교수님께서 영화의 ‘장르’를 정의하시는 방법 을 여쭤보고자 한다. 한편, VHS와 DVD가 영화에 미친 영향의 차이를 설명해주셨던 것처럼, 영화의 텍스트는 매체로부터 영향을 받아 변화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스트리밍’ 매체가 영화에 대해 지닌 영향력 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시는지 궁금하다. 마지막으로, 혹시 가능하시다면, 교수님의 VHS 경험에 대해 더 듣고 싶다. (답변) 첫 번째 질문에 대해 답하자면, 나는 사실 주류영화도, 예술영화도 아닌 영화들을 ‘장르영화’로 분류하고 있다. 그래서 딱히 ‘장르’라는 용어의 정의를 전제하고 있지는 않으며, 이에 대한 관점은 애호가 또는 연구자별로 다양하다. 그런데 사실 장르는 예술의 종류와 관계없이 오래 전부터 적용되어온, 많은 이들이 익숙해져있는 개념이다(에드가 앨런 포가 집필한 대부분의 소설이 호러 또는 미스터리로 여겨지는 것처럼). 작품의 종류를 상업적 필요에 따라 분류한다거나 그 개념을 둘러싼 관습이 서서히 누적되는 과정을 추적해 개념의 정의에 접근하는 일은 관련 분야 연구자들이 수행할 것으로 기대한다. 두 번째 질문과 관련해서는, 스트리밍 시스템이 영화 텍스트에의 접근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데는 분명히 한계가 있다 고 이야기하고 싶다. 만약 그 반대라면 크리스토퍼 놀란의 < 오펜하이머 >(2023) 의 범세계적인 흥행이 설명될 수 없다. 스트리밍 맞춤형 콘텐츠만 환영 받는 환경이라면, 러닝타임 3시간 동안 인물들이 대사를 주고받는 장면으로만 대부분 구성된 이 작품이 어떻게 인기를 얻을 수 있겠는가? 극중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얼굴 근육이 움직이는 모습은 노트북이나 태블릿이 아니라 스크린으로 봐야 한다. 작품의 극장 상영의 가치가 충분하고 극장의 관객이 이 점을 공감했기에 가능한 흥행이었다. 이런 작품들의 인기가 스트리밍 시장에서 흥행하는 콘텐츠에 비해 밀릴 수는 있다. 하지만 절대 사라지지는 않는다. 마지막 질문에 답하자면, 나는 사실 VHS와 애증의 관계를 맺고 있다. 매체에 대한 접근성 은 아주 높기에 국외 작품일지라도 더빙판 등이 복사된 자료를 보며 감상의 스펙트럼을 넓힐 수 있었다. 하지만 DVD는 접근성에 더해 수록된 영상의 품질까지 담보해준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광학 매체의 발전이 4K UHD 블루레이까지 이어진 것을 보면, 여전히 누군가는 고품질 홈비디오를 찾고 있음을 추측해볼 수 있다. 나 역시 < 죠스 >(스티븐 스필버그, 1975) 의 4K UHD 판본을 보면서, 1970년대에 극장에서 이 영화를 처음 감상하며 받은 느낌이 그대로 재현됨을 발견하고 무척 놀랐다. 이렇게 감상자 개인에게 높은 수준의 화질과 음질 경험 을 선사한다는 점에서, 이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지 않는 한 광학 매체 시장 역시 사라지지는 않으리라고 본다. 아직까지도 1930~40년대 필름 누아르 장르의 영화들을 수록한 DVD가 무수히 많이 발매되고 있다 (고전기 할리우드의 대표적인 여성 영화감독 아이다 루피노의 작품 등). 스트리밍 시장에서 주목받기 어려운 이 같은 작품들은 계속 해서 홈비디오의 형태로 마니아들에게 찾아온다. 따라서 나는, 어릴 적 영화에 대한 접근성을 높여준 VHS라는 매체에게 감사하지만, 그립지는 않다. 그보다 뛰어난 영화적 경험을 제공하는 홈비디오의 가능성이 이미 전 세계에 열려있으므로. (질문4-1) 선생님께서 아직 버리시지 못한 VHS가 있는지 궁금하다. (한국영상자료원 학예연구팀장 정종화) (답변) 물론 있다. 한국영화이다. 박찬욱 감독의 < 3인조 >(1997). < 달은…해가 꾸는 꿈 >(1992)은 DVD로 발매되어 반갑게 구매했지만, <3인조> DVD는 아직 발매되지 않았다. (질문5) 영자원 역시 한국고전영화를 스트리밍할 수 있는 VOD 채널( 유튜브 , KMDb , 네이버TV )을 운영 중이고, 구독자 대부분은 해외 국가 출신이다. 본 채널에서의 서비스 품질 향상 방법을 고민하다가 기관이 직접 복원한 영상을 4K 해상도 로 게시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조회수 증가 속도가 이전보다 눈에 띄게 높아져, 광학 매체를 통해 대두된 ‘화질’의 중요성이 스트리밍 분야에서도 유효함을 깨달았다. 관련하여, 위에 말씀드린 영자원의 VOD 채널이 교수님께서 계신 미국 내 영화학자나 한국영화 팬들에게 얼마나 알려져있는지, 그들에게 본 채널이 주는 도움에 대해 체감하신 바가 있으신지 궁금하다. (한국영상자료원장 김홍준) 유튜브 채널 '한국고전영화' 중 4K 리마스터작 재생목록 (답변) 지금이라도 한국영화를 찾아보고 싶어하는 미국인들에게 화질과 음질의 수준은 매우 중요하다. DVD라는 광학 매체가 처음 발매된 지 20여 년이 지났고, 이에 대한 시청각적 경험이 그만큼 많은 미국인들에 의해 학습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전 한국영화는 촬영 기술, 사회적 통념, 미학적 스타일 등의 측면에서 시대적 한계를 지녔더라도 대중에게 매력적인 작품으로 수용될 가능성이 충분하다. 그런데도 국내에서 고전영화는 물론 장르영화에 대해서도 밀도 높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 점이 안타깝다. 기회만 있다면 이들도 대중과 호흡할 수 있는데 말이다. 앞선 질문에 답변한 내용에서처럼, 실체가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은 한국의 ‘대표성’을 보여주려는 강박에서 벗어나, 고전영화는 물론이고 한국영화의 장르적 매력을 소개하려는 노력 이 필요하다. 따라서 고전영화를 고해상도로 경험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영자원의 작업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는 두말할 필요도 없고, 어떤 상황에 있어서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싶다. (질문6) 오래 전부터 “ koreanfilm.org ”에 올리신 리뷰를 통해 교수님을 알게 되었고, 저 자신도 여기에 글을 남기며 교수님과 인연이 닿았다. 당시 ‘한국영화’에 대해 쓰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신 계기가 있나? (영화번역가 달시 파켓) (답변) 단순하다. 영화 팬으로서 멋있고, 아름답고, 가슴을 울리는 한국영화를 보고 감동해서 쓰기 시작했다. ‘한국’영화라서 좋아하게 된 것은 전혀 아니다. 영화 팬인 내가 좋아하는 작품을, 한국영화계가 갑자기 만들기 시작했다. 한국이 아닌 다른 국가에서 제작한 작품이더라도, 독특한 매력으로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면 얼마든지 ‘덕질’할 것이다. 그러한 면에서 동시대 한국영화계가 발표하는 작품들의 완성도에서는 충분히 희망이 보인다. 중소 규모의 제작사에서 만든 한국영화들을 다른 문화권의 작품들과 비교해보아도 손색이 없다. 그러고보니 조금 역설적인 측면이 있다. 나는 역사 연구자임에도 영화를 사회적 사상이나 이념의 반영으로만 바라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오히려 영화 연구자분들께서 그와 같은 ‘사상적-이념적’ 관점으로 연구하시는 경우가 많다. 흥미로운 역설이다. (코멘트) 비디오 리터러시 또는 시네마 리터러시라는 용어가 있듯이, 만약 ‘ 장르 리터러시 ’라는 용어도 성립 가능하다면 영화산업과 아카이브 모두에게 유용한 개념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영자원도 현재 같은 방면으로 노력하고 있기는 하지만, 필름 아카이브로서 장르적 가치를 발견하고, 그 가치가 세계 또는 한국영화사의 어떠한 맥락과 닿아있는지를 관객에게 더욱 열심히 알려 대중의 장르 리터리시 신장에 기여하고 싶다. (한국영상자료원 학예연구팀장 정종화) (답변) 맞다. 김기영 감독의 재발견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장르에 관심 있는 관객이라면 지역에 관계 없이 김기영 감독의 작품에 접근하고자 할 것이고, 이렇게 조성된 관문을 통해 관객의 시야가 넓어짐과 동시에 한국고전영화의 가치도 더욱 전파되리라 기대한다. *** 주1. 물론 이 과정에서 아시아 장르영화가 과도한 폭력과 성적 묘사를 강조한 “익스트림 시네마(Extreme Cinema)”라는 프레임으로만 인식되는 부작용이 생긴다는 비판도 있다. 주2. 그러나 넷플릭스도 실상 그 기원을 따라가면 광학 매체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그들은 초반에 ‘연체료를 내지 않아도 되는 DVD 렌탈 서비스’를 표방했고, 방대한 양의 소장자료를 자랑하며 그 어디에서도 감상할 수 없었던 작품들을 비디오 및 디스크 대여 서비스로 제공한다는 점으로 차별화를 시도했다. 주3. 기술 발전에 힘입어 세련되게 촬영된 액션영화들에서도 <올드보이>의 영향을 발견할 수는 있다. 넷플릭스 <데어데블> 시리즈 중 고정된 카메라 앞에서 인물들이 프레임 안팎을 오가며 싸우도록 한 인상적인 복도 액션씬이 대표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