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라
- 감독
- 소니 라구나
- 제작년도
- 2023
- 출연
- 펠리시아 라이랜더, 토마스 레논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화와 비평 사이에서 고민해온 시간을 들려줍니다. 그러다가 떠오른, 한국영화에 대한 감상도 꺼내봅니다. (한국 영화평론가가 '한국'영화를 대하는 법) 이 원고를 청탁받은 날, 나는 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KOFA에서 열리는 대담에 참여했다. “ 1990s 시네마테크의 필름들 ” 기획전의 일환으로 진행된 “1990s 시네필 대담 part 2”라는 제목의 대담이었다. 하길종 의 < 화분 >(1972)의 상영 뒤, 1990년대 사설 시네마테크를 운영했던 시네필과 1990년대생 영화평론가 사이의 대화를 만들고자 했다. 준비해 간 질문 중 하나를 옮겨보자. “이번 기획전 상영작을 보고 있자면 90년대 비디오테크에서 상영된 영화들이 지금은 영화사의 ‘정전’으로 다뤄지는 영화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타르코스프키, 고다르, 파스빈더, 앙겔로풀로스 뿐 아니라 데이비드 린치나 그리너웨이, 오시마 나기사처럼 당시엔 일정 부분 ‘컬트’로서 소화되던 감독과 영화들도 지금의 관점에서는 영화역사의 만신전에 오른 이름들이라고 생각되는데요. 오늘 대담과 붙여서 상영된 하길종의 <화분>은 하나의 예외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중략) 이번 기획전에 <화분>이 포함된 것은 90년대 시네필들이 단순히 영화 교과서에 수록된 정전들을 직접 감상하는 것을 넘어 적극적으로 영화를 (재)발굴 혹은 (재)발견하려 시도했음을 드러내는 것만 같습니다.” 기획전의 라인업을 보며 느꼈던 의문 중 하나를 옮긴 질문이라 할 수도 있겠다. 나만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타르코프스키, 고다르, 파스빈더 등의 이름과 함께 하길종을 배열하는 것은 어딘가 어색하게 느껴진다. 상영작이 꼭 <화분>이었기 때문은 아니다. 저 자리에 < 바보들의 행진 >(하길종, 1975)을 놓았더라도, 이만희 의 < 휴일 >(1968)이나 김기영 의 < 하녀 >(1960)을 놓았더라도 어딘가 어색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한국어로 글을 쓰며 한국어로 말하고 한국영화를 상대하는 한국의 영화평론가로서, 한국영화는 어딘가 이상한 존재처럼 다가온다. 한국영화라는 이름 뒤에 무엇이 따라붙든 간에 그것을 어색하지 않게 납득하는 것은 아마 이뤄지지 않은 일일 것이다. 한국영화란 무엇일까? 한국에서 만들어진 영화? 한국인이 만든 영화? 한국 자본이 투입된 영화? < 패스트 라이브즈 >(셀린 송, 2023)에서 노라(그레타 리)는 남편에게 해성( 유태오 )을 설명하며 “Korean”이라는 단어를 아홉 번 사용한다. 그의 대사 속 한국인은 “평범한 직업과 평범한 삶을 사는 어른이 여전히 부모님과 함께 사는 것”이고, 한국계(Korea) 친구와는 다른 한국인(Korean) 친구인 한국인-한국인(Korean-Korean)이다. 이 대사에서 느껴지는 뭔지 모를 반발감 혹은 어색함이 한국영화를 대하는 나, 동료 평론가들, 그리고 온라인상의 무수한 글로써 존재하는 시네필들이 한국영화에 대해 갖는 어떤 공통감일지도 모른다. <패스트 라이브즈> 중 대담으로부터 일주일 뒤 한국영상자료원의 ‘ 한국영화 100선 ’ 발표가 있었다. ‘영화를 보는 사람’ 171명과 ‘영화를 만드는 사람’ 69명이 참여한 이 리스트를 통해 한국영화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까? 순위가 공개된 10편의 영화 중 절반이 21세기 영화이며, 봉준호 , 박찬욱 , 이창동 이라는 세 명의 이름뿐인 이 리스트를 두고 한국영화가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물론 리스트에 오른 100편의 영화를 전부 본다고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 또한 10편의 영화 를 적어서 보냈지만, 그 영화들이 한국영화에서의 ‘한국’을 구성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영화들은 한국의 파편들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며, 한국영화라는 전체는 그 파편들의 집합을 통해 구성될 수밖에 없다. 케이팝을 필두로 무분별하게 난발되고 있는 접두사 “K-”가 결국 그 모든 파편의 집합일 수밖에 없는 것처럼. 영화평론가의 일상과 비평에 관한 생각을 터놓는 지면에서 갑자기 왜 한국영화 이야기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한국의 시네필들이 한국에 별로 관심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건 나의 자기반성이기도 하다. 단지 영화제에서 한국영화를 후순위로 미뤄두고, 극장에 걸리는 한국영화들을 해외 영화들만큼 열심히 챙겨보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한국영화에서 한국이 무엇으로 구성되고 재현되는지, 그것은 항상 이야기 바깥에 놓여 있는 것이었다. 함연선 마테리알 편집인의 “ 비천한 영화를 위하여, 그중에서도 한국영화 ” 발표 녹취록을 보고 있자면, 그리고 그 위에 2024년 버전의 ‘한국영화 100선’을 겹쳐 놓는다면, 한국영화는 마치 과거에 존재했다가 사라진 뒤 봉준호와 박찬욱에 의해 부활한 것만 같다. 그리고 무수한 ‘비천한’ 영화들이 누락되어 사라진다. 나는 이 ‘비천한’ 영화들, 함연선의 발표에서 등장한 <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 >(곽재용, 2004)와 < 달마야 놀자 >(박철관, 2001)를 포함한 일련의 조폭 코미디를 포함해, < 마파도 >(추창민, 2005), < 중천 >(조동오, 2006), < 고사: 피의 중간고사 >(창, 2008)처럼 지금은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을 영화들이 나의 ‘비천한’ 한국영화의 리스트를 채우고 있다. 이 영화들이 얼마나 비천하고 구리며 지루하건 간에, 이 영화들은 한국을 담아내는 것으로서 보였다. 한국영화라는 하나의 장르 속에서, 한국은 영화적 장소로 기능할 수 있었다. 그것이 설령 불쾌함을 자아내는 것일지라도. 지금의 한국영화들은 그것의 반대로 향하고 있다. 작년과 올해 개봉한 영화들을 떠올려 보자. < 밀수 >(류승완, 2023)는 극 중 등장하는 지도상 군산을 배경으로 삼고 있음이 명백함에도 ‘군천’이라는 가상의 지명을 사용한다. 소재만 바뀐 같은 영화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 모가디슈 >(류승완, 2021), < 교섭 >(임순례, 2020), < 비공식작전 >(김성훈, 2022)은 한국의 바깥에서 한국을 찾아내려는 기묘한 시도를 선보인다. 이들 영화에서 소말리아, 아프가니스탄, 레바논이라는 각기 다른 중동 국가는 한국에서 폐기된 것처럼 느껴지는 ‘야만성’을 간직한 곳으로서, 한국과 대비되는 야만의 땅으로서 묘사될 뿐이다. 아예 지구 바깥으로 향하는 < 더 문 >(김용화, 2023)이나 국가 자체의 구분이 무의미한 미래를 그리는 < 정이 >(연상호, 2022)와 같은 영화들은 한국이라는 장소에 영화가 묶여있고 싶지 않다는 의지 표명에 가까워보인다. <중천>, <모가디슈> 중 <경마장 가는 길>, <괴물> 중 ‘한국영화 100선’의 리스트를 작성하며, 나는 두 편의 영화에 다음과 같은 코멘트를 덧붙였다. “한국영화가 한국을 찍는 방법,” "충무로가 한국을 영화적 장소로 대했던 마지막 순간." 전자는 장선우 의 < 경마장 가는 길 >(1991)이고, 후자는 봉준호의 < 괴물 >(2006)이다. <경마장 가는 길>을 보며 우리는 90년대 서울의 풍경을, 붉은 십자가로 가득한 야경과 무너지기 이전의 삼풍백화점과 사람으로 가득해 “산책이 노동이 된” 길거리를 목격할 수 있다. <괴물>을 보며 여의도 한강공원의 풍경을, 합동분향소와 한강의 매점을, 일상의 풍경이 순식간에 장르적 장소로 변화하는 순간을 목격할 수 있다. 한국영화의 장소가 해외 로케이션으로, 그린스크린으로 옮겨감에 따라 사라진 풍경들, 길을 걷고 뛰는 사람들. 물론 지금의 영화들에 그런 풍경이 사라졌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 여름날 >(오정석, 2019)의 거제도, < 아워 미드나잇 >(임정은, 2021)의 서울, < 아워 바디 >(한가람, 2018)의 한강공원, < 썬더버드 >(이재원, 2021)의 정선과 같은, 여전히 사람들이 걷고 대화하며 싸우고 도망치고 뒤따를 수 있는 영화적 풍경으로서의 한국은 여전히 발견할 수 있다. 다만 충무로가 그것을 잊어버렸다는 인상을 반복해서 주고 있을 뿐이다. 물론 한국에서 활동하는 영화평론가이기에 한국영화에 관해 말해야 한다는 의무가 존재한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내셔널 시네마의 기획을 재차 가져와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한국에서 살아가며 한국어를 사용하는 사람으로서, 내가 발 딛고 살아가는 공간을 담아내는 영화를 보고 싶다는 단순한 욕망이 있다. 앞서 언급한 영화들과는 다른 예시일지도 모르지만, 엄태화 의 < 콘크리트 유토피아 >(2023)는 포스트 아포칼립스라는 장르적 틀 안에서 서울의 이미지를 드러내는 데 일정 부분 성공한다. 이것은 마치 “더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 2”(2020)나 “호라이즌 제로 던”(2017)과 같은 포스트 아포칼립스 게임에서 시애틀이나 샌프란시스코라는 도시의 흔적을 발견하는 것과도 유사하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지진 이전의 서울을 아주 짧게만 보여준다. KBS의 아카이브 다큐멘터리 <모던 코리아> 제작진이 참여한, 한국 아파트의 역사를 짧게 보여주는 푸티지 영상은 아파트로 뒤덮인 서울의 풍경으로 이어진다. 이윽고 저 멀리서부터 마치 밭이 갈리듯 땅이 뒤집히기 시작한다. ‘도큐먼트’로서의 아파트 이미지와 CGI로 그려진 아파트 숲의 연결은, 비록 그것이 완전한 폐허를 그려낼 뿐인 그린스크린 촬영의 결과물일지라도 연속성을 지닌다. 아주 짧게만 등장하는, 민성( 박서준 )이 대지진을 목격하는 장면을 떠올려 보자. 그곳은 지하철 3호선 금호역과 약수역 사이의 도로로, 실제 도로의 건물들을 스캐닝하여 제작되었으며, 저 멀리서 장충체육관의 건물이 날아오는 것을 볼 수도 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 중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그려내는 세상은 모두 세트와 그린스크린 촬영을 통해 제작되었으며 로케이션 촬영이 사실상 없다시피 하다. 따라서 이 영화를 두고 ‘영화의 다큐멘터리적 기능’을 이야기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이 영화는 <경마장 가는 길>이 그러한 것처럼 1990년대 초 종로의 길거리와 서초동의 모습을 담아내지도, <괴물>이 그러한 것처럼 2000년대 중반의 한강공원을 담아내지도 않는다. 다만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실제의 지리적 공간을 끌어와 장르적 장소로 재가공한다. 물이 말라버린 한강 바닥에 넘어져 있는 동호대교, 금호동의 황궁아파트에서 한강을 건너 마주한 압구정의 백화점, 아파트에서 도망친 민성과 명화( 박보영 )의 뒤로 보이는 구 서울역과 그들이 도착한 명동성당. 물론 이 이미지들은 (서울역 정도를 제외하면) 명시적인 이미지로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그 공간들을 익히 알고 있으며 서울의 지리정보를 알고 있는 사람에게만 그 공간들이 드러날 뿐이다. 당장 비슷한 (그리고 같은 세계관을 공유한다고 처음엔 알려졌었던) < 황야 >(허명행, 2023)를 떠올려보면,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작동하는 지리학이 보다 구체적임을 감지할 수 있다. 나아가 지난 몇 년 간 재개발 이슈가 존재해온 금호동의 맥락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 황궁아파트의 생김새 자체가 익숙한 이미지로서 다가오기도 한다. 지난 60년 동안 아파트는 한국영화의 중요한 장소였다. *주1 아파트는 성공의 트로피이자 욕망의 대상이었으며, 중산층 거주 형태의 기본형이자 일상의 장소였고, 종종 비밀스럽고 두려운 사건들이 발생하는 장르적 장소였다. 영화 속 아파트의 모습, 아파트가 그려지는 방식을 상상하는 것은 한 편의 영화가 그려내는 시대상을 압축적으로 묘사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포스트-아파트-아포칼립스라 부를 수 있을법한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오래된 아파트와 신축 아파트가 바로 옆에 붙어 공존하는 서울의 특수성을, 실제의 지리학 위에 펼쳐냄으로써 ‘한국’이라는 맥락을 획득한다. 나는 이 영화가 대단한 걸작이거나 수작이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영화가 아파트로 상징되는 한국의 부동산 자본주의를 너무 단순하게만 바라본다고 생각한다. 다만 < 해운대 >(윤제균, 2009)나 < 곤지암 >(정범식, 2018)에서 실제의 지역을 분리해 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콘크리트 유토피아> 또한 그렇게 하고 있을 뿐이다. 가상의 지명을 내세우고선 실제의 지도 위를 가리킨다거나 한국의 바깥에서 한국성이라는 것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영화들과 달리, 어쨌거나 한국을 영화적 토양으로 삼아보려는 ‘한국형 블록버스터’라는 점에서 흥미로울 뿐이다.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비춘 아파트 그러니까 이 글은, 결국 한국영화가 뭔지 여전히 모르겠는데도 ‘한국의 영화평론가’라는 이름표로 활동하고 있는 누군가가 스스로에게 재차 질문하는 글이다. “K-”라는 접두사가 붙은 일련의 영화들 속에서, 한국형 블록버스터라는 이름 아래 한국을 벗어나고자 하는 영화들 사이에서, 이 비천한 영화들 안에서, 우리는 어떻게 한국을 발견할 수 있을까? *** 주1. 『아카이브 프리즘』 vol. 13, 한 국영상자료원, 60~82쪽. 박동수(영화평론가) l 보고 듣고 읽고 쓰는 일을 반복하는 사람. 2021년 독립영화비평상 당선. 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 회원. 『영화 카페, 카페 크리틱』(공저) 집필.
< 윤희에게 >는 서간체 형식의 영화다. 오타루에 사는 수의사 쥰(나카무라 요코)의 고모 마사코(키노 하나)는 조카가 부치지 못하고 책상에 놓아둔 편지를 몰래 우체통에 넣어준다. 아마도 그 편지는 오래 그 책상 위에 놓여 있었을 것이다. 고모는 ‘Yun Hee’라는 수신자의 이름을 쥰을 대신해 불러준다. 그리고 그 편지는 윤희(김희애)의 딸 새봄(김소혜)이 제일 먼저 발견하게 된다. 쥰과 윤희의 호명과 응답은 각자의 자리에서 반복해 불리고 쓰였지만 오랫동안 상대방에게 가닿을 수 없는 환경에 있었다. 마사코와 새봄은 하염없이 눈이 내리는 오타루의 겨울에 20년 넘게 만나지 못하던 쥰과 윤희가 재회할 수 있는 세계의 조건을 만들어 간다. <윤희에게>의 눈 내리는 하얀 오타루, 가닿지 못한 안부 묻기, 부치지 못하거나 잘못 도착한 편지, 필름사진, 상실의 감각, 오래 간직한 사랑은 어쩔 수 없이 < 러브 레터 >(이와이 슌지, 1999)의 노스텔지어를 떠올리게 한다. 상실한 것으로 회귀하려는 운동은 과거에의 고착과 언뜻 구분되지 않을 수 있다. <윤희에게>는 분명 오래 전에 떠나보내야 했지만 그럴 수 없었던 사랑에 대한 그리움을 그린다. 그러나 <윤희에게>는 비록 시간이 오래 걸리긴 했지만 서로의 편지에 응답하면서 쥰과 윤희 모두가 과거에 머물지 않고 성장의 한 걸음을 내딛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보내고 받는 것에 시차가 발생하거나 어긋날 확률이 높은 편지, 촬영 속도가 늦고 인화의 과정이 필요한 오래된 필름 카메라, 오해가 발생하거나 이해가 늦을 수 있는 일본어와 한국어의 번역과정은 단순히 아날로그적인 노스텔지어의 감성을 부추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쥰과 윤희는 어린 시절 사랑하는 사이였으나 가족에 의해 강제로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가족의 폭력은 사랑의 실패를 넘어서 자신의 욕망과 정체성을 부인당하는 삶을 살게 했다. 윤희는 가족에게 ‘쥰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한 이후 정신병원에 갇히고 이른 나이에 오빠 친구와 반강제로 결혼한다. 사진 찍기를 좋아했지만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혀 대학도 가지 못한 윤희에게 엄마는 카메라를 선물한다. 새봄은 그러한 엄마의 서사를 모른 채 엄마의 오래된 필름 카메라로 풍경과 사물 사진을 찍는다. 카메라는 뒤늦게 새봄에게서 제 정체성을 찾는다. 이렇게 뒤늦은 시차의 발생이야말로 한국의 퀴어한 시간성이라고 할 수 있다. 윤희는 자신의 욕망을 부인당한 후 자신을 고립시키면서 주변 사람들도 외롭게 만든다. 그는 소통의 가능성을 닫는다. 쥰은 윤희에게 쓴 편지를 매번 부치지 못하기 때문에 편지의 시작을 동일한 내용으로 반복할 수밖에 없다. 윤희는 자신의 세계 내에 누구도 들이지 않으려는 고집스러움을 온 몸으로 외치고, 쥰은 성적 정체성과 한국·일본 혼혈이라는 국적 정체성을 가능한 숨기며 안으로 파고든다. 둘의 시간은 제자리에서 맴돈다. 부인당한 욕망과 정체성은 앞으로 나아가기 힘들다. 윤희의 아버지와 오빠는 윤희의 삶에 폭력적으로 개입하고 통제하려 들고 쥰의 아버지는 냉담함으로 일관한다. ‘아이 하나를 키우기 위해선 마을 하나가 필요하다’는 옛 말처럼 ‘두 사람이 만나려면 공동체의 지지와 포용적 환경이 필요하다.’ 로맨스는 개인적이거나 이자적인 것이 아니다. 윤희와 쥰은 가부장 남성들 때문에 헤어졌지만, 새봄과 마사코라는 또 다른 가족이 꾸며준 조건 속에서 재회한다. 윤희와 쥰은 가부장들과 결별을 선언하고 나서야 새로 시작할 기회를 얻는다. 폭력적 상황은 어긋나고 도달하지 못한 소통과 시차를 만든다. 하지만 마사코와 새봄이 만든 삐끗한 송수신과 시차가 또한 둘을 재회하게 만든다. 마사코는 쥰의 편지를 대신해 부치고 새봄은 그 편지를 받고 오타루로 엄마를 데리고 여행을 온다. 영화사적으로 보면 이 영화는 제작 및 개봉 기록이 남아있는 한국 최초의 레즈비언 영화라 알려진 < 질투 >(한형모, 1960)의 한참 늦은 응답 혹은 후일담처럼 여겨진다. 현재 <질투>는 필름 프린트는 소실되었고 시나리오만 확인 가능하다. <질투>에서 동성애자인 재순(문정숙)은 의붓 여동생 금이(전계현)를 좋아하고 둘은 실제로 연애 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금이가 남자를 만난 후 재순의 욕망은 금이를 포함해 모두에게 부정 당한다. 재순의 욕망은 한국 전쟁 중 당한 성폭행으로 인한 남성혐오로 인한 부작용으로 취급되고 결국 정신병원에 갇혀 교정치료를 받는다. 당당하고 논리적으로 제 할 말 다하던 재순은 결말 장면에서 병원에서 나오며 가족들과 지인들에게 둘러싸인 채 “꿈에서 깬 것 같다”고 말한다. 기이할 정도로 급작스럽고 밝게 묘사되는 이 장면에서 텅 빈 인형처럼 묘사되는 재순은 거의 공포영화의 주인공 같다. <윤희에게>에서 윤희는 재순처럼 정신병원에 가지만 살아남는다. 그리고 다른 가족들의 도움으로 쥰을 재회한다. 한편, 2000년대 < 연애소설 >(이한, 2002), < 주홍글씨 >(변혁, 2004). < 끝과 시작 >(민규동, 2009) 같은 영화들에서 여성 동성애 로맨스는 이성애 로맨스에 앞선, 10대의 원초적이고 순수했던 과거의 기억으로 고착화 된다. 그러나 결국 동성애 로맨스는 이성애 로맨스에 포획되고 봉합되며 과거의 것으로 영원히 남는다. <윤희에게>는 과거에서 맴도는 시간에서 벗어나 그 다음을 상상한다는 점에서 이전 영화들과 다르다. 이 영화 전체의 형식이기도 한 편지는 이름을 부르면서 시작한다. ‘윤희에게’ ‘쥰에게’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중요하다. 임대형 감독은 한 시상식에서 이 영화는 분명히 ‘퀴어영화’라고 호명하기도 했다. 하나의 단일하고 고정된 정체성을 가정하는 것도 문제지만, 이름 부르기를 두려워하고 뭉개는 것 또한 소수자들을 배제하는 방법이 될수 있다. 차별금지법의 제정조건으로 자꾸 ‘성소수자’라는 이름을 빼려는 시도들처럼 말이다. 늦었지만 이름을 부르고 그에 응답해야 한다. 새로운 퀴어 시간성을 만들어야 한다. 한국 영화사에서 퀴어영화라 불릴 수 있는 영화들은 많지 않다(물론 ‘퀴어영화’라는 범주는 여전히 많은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한국영화에서 작품성과 대중성을 고루 갖춘 퀴어영화가 나오려면, 두 사람이 만나기 위해서 공동체가 노력하고 바뀌어야 했던 것처럼 수많은 조건이 필요하다. 차별금지법도 그러한 조건 중의 하나가 될 수 있다. 현실과 영화는 거리가 있지만 또한 서로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영화는 당장 가시적으로 현실에 보이는 것 이상을 표현할 수 있다. 영화는 잠재된 현실, 보이지 않고 가려진 현실, 환상성, 꿈을 그려낼 수 있다. 쥰과 윤희가 각자의 꿈에서 잊지 않고 만나왔던 것처럼 말이다. (관련글) 1. 소진과 이상한 기운 - <아워 바디>(2018), 2021.04.23. 2. 의심의 씨앗과 취약한 영웅들 - <도희야>(2013), 2021.05.21. 3. 여름밤 초록색 전구불빛이 가만히 당신을 응시할 때 - <남매의 여름밤>(2019), 2021.06.18. 4. 당신의 안녕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 - <내가 죽던 날>(2019), 2021.07.16. 5. 피해와 가해의 알레고리 - <소리도 없이>(2019), 2021.08.13. 6. 돌봄의 정동 - <우리집>(2019), 2021.09.10. 7. 유년과 재난 - <벌새>(2018), 2021.10.22. 8. 목격의 시간 - <휴가>(2020), 2021.11.19. 9. 한평생 이야깃거리가 된 삶을 찢고 나온 웃음소리 -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2019), 2021.12.17. 10. 이름을 불러 닿는 시간 - <윤희에게>(2019), 2022.01.14. 11. '혼자'의 정동 - <혼자 사는 사람들>(2021), 2022.03.15. 12. 억압의 체제와 닫혀있는 여자들의 세계 - <궁녀>(2007), 2022.04.13. 13. 소원성취, 환상, 실재 사이의 어딘가에서 - <팬지와 담쟁이>(2000), 2022.05.18. 14. 몫과 값 그리고 경계물 - <82년생 김지영>(2019), 2022.06.24. 15. 실종의 감각과 징크스의 미학 - <오마주>(2022), 2022.07.21. 16. 레즈비언 편집술, 혹은 시계가 된 여자 - <연애소설>(2002), 2022.08.19. 17. 탐정-엄마의 각성하는 모성 - <비밀은 없다>(2016), 2022.09.16. 18. 시간과 정념의 지층을 찾아서 - <누에치던 방>(2018), 2022.11.04. 19. More or Less - <모어>(2021), 2022.12.09. 20. 이름을 지우고 살아남기 - <안나-감독판>(2022), 2023.01.09. 21. 우리에겐 따뜻한 국물과 유머가 필요하다 - <수프와 이데올로기>(2021), 2023.02.07. 22. 아직 끝나지 않은 - <미망인>(1955), 2023.03.10.
고전영화와 현대영화를 가르는 기준은 육체다. 아아. 저 한마디 뱉는 순간 벌써부터 무수한 항변과 반론들이 들려온다. 기실 땅바닥만 찍지 않는 이상(헤어조그가 그런 적이 있었다고 재반론하고 싶지만 참는다) 육체를 찍지 않는 영화는 100년 동안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육체의 범위를 문자 그대로(“corpus”) ‘물체’로 조금만 확장하면 카메라를 들이대는 순간 모든 피사체가 이미 육체다. 심지어 카메라도 육체이고, 그걸 찍고 보는 작가도 관객도 죄다 육체다. 하지만 고전적 육체와 현대적 육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물론 그들 모두가 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이미지의 변화를 표현하는 주인행세를 함에는 어떤 차이도 없겠지만 말이다. 고전적 육체는 정신의 담지자로서 먼저 나타난다. 고전적 육체는 정신적 가치보다 더 앞설 수 없다는 의미다. 물론 드레이어와 베리만의 영화에도 육체가 있다. 하지만 그들이 하얗게 지워져서 지금이라도 얼른 복원되어야 할 정신의 심도보다 먼저이진 않다. 그저 정신이 심도를 복원할 때까지 느릿느릿 움직여주고, 그에 필요한 말씀(<오데트>)을 전달해주면 그만이다. 고전육체는 정신의 수단인 셈이다. 반면 현대적 육체는 (신을 잃어버려서 그런지) 비틀거리고 넘어질 때 나타난다. 즉 진짜 육체는 피 흘리고 다칠 수 있는 육체다. 진짜 육체는 죽을 수 있는 힘으로 정의된다. 팔다리만 있다고 육체가 아니다. 팔다리가 떨어져 나갈 수 있어야, 그에 비명 지르고 펄쩍 뛸 수 있어야 진짜 육체다. 프레이밍에 의해 가려져 있던 잔 다르크의 가멸력을 화형대로 옮겨놓은 브레송은, 그런 의미에서 현대적 육체에 한 걸음 더 다가갔다고 말할 수 있다. 정신의 심도? 뜨거워 죽겠는데 무슨 심도 타령일까. 온몸의 신경이 화염에 불타오를 때 심도보단 비명이 먼저다. 요컨대 고전적 육체가 불멸의 정신적 가치(정의ㆍ믿음...)를 위한 수단에 불과할 때, 현대적 육체는 소멸의 물질적 가치를 위한 수단이자 목적이 된다. 누구 말을 빌리면, 진짜 육체는 가멸성의 “순수수단”이다. 표표히 사라지는 서부극 인물 죽을 수 있는 육체만이 진짜 육체라고 한다면, 고전 서부극엔 육체가 없다. 아무리 역마차의 속도가 빨라 봤자 그 종착지는 아메리카의 정의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셰인과 링코 키드는 죽지 않는다. 그저 표표히 사라질 뿐(물론 죽은 거나 진배없다는 추가해석이 가능하지만). 더욱 결정적인 사례는 종교영화들의 경우다. 종교적 상황들을 다루었던 고전시대극들에서 육체는 바리새인이나 유대인 할 것 없이 모두 휘황찬란한 의상들로 가려져 있다. 드밀과 와일러의 영화에서 육체보다 색깔이 먼저인 이유는 다시 색깔이 정신의 심도를 방해하거나 도와주는 역할을 맡기 때문이다. 로마제국의 테크니컬러 총천연색에 모세의 남루한 넝마주이 패션이 극한의 대조를 이룰 때, 우리의 영혼은 더더욱 가열차게 기도 모드에 돌입할 수 있음이다. 즉 고전종교영화에서 의상은 정신의 척도만을 내어주지, 육체의 척도를 내어주지 않는다. 심지어 로마 군인들이 바닷물에 휩쓸려 죽는 것마저도 그나마 파도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건 육체가 죽었단 사실이 아니라, 로마제국과 그의 폭정이 죽었단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가장 육체의 출현을 방해하던 고전적 문법은 클로즈업이라고 할 수 있다. 얼굴 한 방이면 세계의 모든 것이 거기서 표현되고 있었다. 베리만은 이걸 한껏 즐겼다. 클로즈업은 육체의 죽을 수 있는 능력을 영혼의 가속도로 대체한다. <잠입자Stalker> (1972) 반대의 상황들로 가보자. 웨스턴을 지나 네오웨스턴으로 가보면, 거기엔 육체가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육체가 있어도 너무 육체만 있다. 정의감이나 신념 따위는 개나 줘버리고 금 한 덩이 차지하기 위해서 동물적 본능만 남은 네오웨스턴의 육체들은 가히 ‘사막의 좀비들’이라 할 수 있다. 페킨파의 < 와일드 번치 >에 한 총잡이는 기관총 드립에 사망하여 널부러진 한 시체에서 금니를 캐내려고 한다. 이것은 모세의 정신적 넝마주이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동물적 넝마주이다. 심지어 페킨파는 육체의 가멸성이 충분히 강조되지 않을까 슬로우모션으로 죽는 순간을 찍어댔고, 많은 평론가들에게 상욕을 들었다. 페킨파의 슬로우모션은 클로즈업이 표현하던 영혼의 가속도와 대비되는, 영혼이 육체를 떠나는 가속도다. 헐. 현대의 신학영화는 그렇지 않을 거야! 여전히 신학은 정신이다, 육체가 아니라! 라고 울부짖는 그대에게 일독을 권장하는 영화는 타르콥스키의 영화다. 비록 그가 인터뷰에서 열심히 “영성”과 “희생”에 대해서 말하지만, 정작 그의 이미지들을 보라. 거기엔 안개와 유황 가스를 뒤집어쓰고 어쩔 줄 몰라하는 육체, 자신의 존재를 잊을까 봐 초원 위에 마치 비디오데크가 고장 난 것처럼 일시 정지된 상태로 몇 분이고 서 있는 육체, 무엇보다도 공중부양하는 육체가 있다. 이른 결론으로 건너뛰자면, 정신성의 회복을 위해 타르콥스키에게 먼저 고양되어야 할 것은 영혼이 아니라 육체인 것이다(물론 이건 인간의 육체만은 아니다). 그런 이유에서 타르콥스키는 클로즈업을 마뜩잖아 했다. 클로즈업이 보고 싶나? 말씀을 쏟아내던 입이 삭제된 뒤통수 클로즈업이나 봐라(< 스토커 >). 현대적 육체는 클로즈업을 경멸한다. 얼굴은 죽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몇몇 예외가 있다. 얼굴들을 겁나게 이어 붙여서 줄줄이 비엔나로 엮어낸 후 맥놀이 하듯 겁나게 흔들면 다시 육체가 나타난다. 이것이 카사베티스의 경우이고 그의 독특성이었다. 천의 얼굴은 하나의 육체와 맞먹는 셈이다(<얼굴들>). 오발탄 (1961) “가자...가자..” 요컨대 고전영화와 현대영화를 가르는 기준은 ‘고통’이다. 고통이 없는 모든 영화를 고전적이라고, 고통이 있는 모든 영화를 현대적이라고도 부를 수도 있을 터다. 현대 신학영화는 이 기준의 반대급부이기는커녕, 이 기준을 가장 먼저 밀고 나갔던 고통의 첨병들이었다. 유현목 의 영화들이 타르콥스키보다 이른 현대적 신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거기엔 고통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천근만근의 짐짝”에 짓눌릴 때의 압사의 통각이고, “가자...가자..”의 환청에 고막이 찢어지는 통각이다(< 오발탄 >). 아무리 클로즈업과 의상으로 가려봐도 이 고통의 파동은 사라지지 않는다. 얼굴 안에 충치는 하나쯤 박혀있기 마련이고, 파동은 육체의 신경과 힘줄에 직접 작용하기 때문이다. < 막차로 온 손님들 >에서 도마질 소리에서 괘종시계 소리로의 이행을 들어보라. 모세가 듣는 신의 목소리는 노래방 마이크에서와 같은 에코라도 걸려 있었다. 그러나 유현목의 세계는 노래방이 아니다. 십계현판이라는 마이크도 없는데 울려 퍼지기 때문이다. 그 마이크는 내 뇌 속에, 내 신경 속에 이미 있다. 이건 거의 고막의 화형식이다. 너는 죽는다. 육체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이에 대한 통각 없이 아무것도 아니다. 신은 압력이 되었다(타르콥스키는 “시압time-pressure”이라 불렀던 그것). 이것이 유현목이 진정 말하고자 하는 바다. < 순교자 >에서 신부를 휘어 감는 문제는 신이 있냐 없냐가 아니었다. 그건 신은 없는데, 어떻게 십자가가 있느냔 것이다. 저기에 우뚝 서서 이 폐허를 압박하고 있는 파동의 중심으로서의 십자가가. 이 모든 측면들이 유현목을 한국최초의 육체적 작가로 만든다. 유현목이 영화는 “체험”이라고 강조함을 잊지 않았다. 말 그대로 몸의 경험인 것이다. 고통으로만 존재하는 신념의 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