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 코스프레
- 감독
- 타나다 유키
- 제작년도
- 2012
- 출연
- 타바타 토모코, 나가야마 켄토, 하라다 미에코, 미우라 타카히로 , 긴푼쵸, 마사타카 쿠보타
'스포츠 엔터테인먼트'라고 일컬어지는 프로레슬링은 독특한 형태의 공연 예술이며, 로마의 검투사 대결에 비견할만한 남성성의 신화를 과시하는 이벤트이다. 연행자와 청중이 합의한 사이비 스포츠이자 대중문화의 한 갈래로서 프로레슬링을 통해 전달되는 전언은 ‘남자다움’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확실한 암시를 준다. 영화 < 반칙왕 >(2000)은 이 같은 프로레슬링의 함의 안에 IMF 경제위기가 야기한 여파를 깔아두고 직업인으로서 이중생활을 하며 평범한 생활 방식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소심한 은행원을 소재로 한 이야기이다. < 조용한 가족 >(1998)으로 한국 장르 영화의 지형에 변화를 몰고 온 김지운 감독이 얼마나 창의적인 이야기꾼이었는가를 입증하는 색다른 블랙코미디였다. 주인공 임대호(송강호)는 위기의 남자이다. 일상생활의 굴욕과 권태로부터의 안도와 더 큰 굴욕을 겪을 기회를 동시에 찾는 이 사내는 직장에서의 전망이 그리 밝지 않고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의욕도 없다. 실적을 쌓아서 연명해야 하는 직업적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고, 은행의 부지점장(송영창)은 저조한 실적을 빌미로 그를 괴롭히며, 여자들은 그를 무시하고, 아버지는 그가 실패한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때로는 엉뚱하고 유치한 이 남자의 성격이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반칙왕>의 핵심 서사는 자존감을 가진 어른이 되기 위한 대호의 여정에 동행하는 과정을 따라간다. 현대적이고, 고도로 엄격하며, 궁극적으로 온유한 금융의 세계에 견주었을 때 프로레슬링은 저급하고 극단적인 천박함으로 가득 차 있다. 마스크를 쓰고 레슬링을 하는 대호가 추구하는 남성다움의 시뮬라크르는 내러티브 안에서 양극화되는 것처럼 보인다. 한편으로 그는 은행 고객들의 비위를 맞추는 복종적인 감성의 소유자이나 마스크를 쓰고 링에 올랐을 때에는 약속과 규율을 위반하는 반칙 레슬러이다. 대민 봉사 및 사무 조력에 익숙한 일상의 대호는 자신의 옛 영웅인 울트라 타이거 마스크 가면을 쓰고 반칙왕이 됨으로써 내성적인 패배자에서 폭력적인 무법자로 변신한다. 새로운 페르소나의 가면을 쓴 그가 열광적인 대중들의 반응을 끌어내는 과정에서 그 자신도 알지 못했던 정체성을 발견하게 된다. 평소에는 소심하고 싸움을 기피하는 성격인 반면 반칙왕으로써 대호는 호전적인 싸움의 신이 된다. 헤드락을 걸고, 손가락으로 눈을 찌르면서 자신의 남성성을 과시하는 대호의 이중생활은 한 장면에서 엘비스 프레슬리 코스프레를 하며 링 위에 선 모습으로 형상화되기도 한다. <반칙왕>의 흥미로운 지점은 이 완벽한 시뮬라르크의 세계에서 프로레슬러들이 배우가 하는 일과 비슷한 과업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끊임없는 경쟁의 과정에 본래 정체성으로부터 빠져나와 자신의 이미지를 철저하게 가꾸고 가상의 시나리오에 따라 연기를 해야 한다. 이는 허구의 드라마 안에서 배우가 자신의 캐릭터를 발전시키는 과정에 비견할만하다. 마스크 퍼포먼스가 대호의 성격 전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묘사하는 김지운의 서술은 흥미롭다. 그의 나약하고 무기력하며 굴욕적인 일상과 비교했을 때 반칙 레슬러로의 변신은 자존심과 자존감을 향상시킨다. 따라서 개인은 현실 안에서의 열성 페르소나보다 영향력이 있는 수행적 페르소나를 선호하게 된다. 이러한 요소는 <반칙왕>의 코미디 코드에서 핵심이 된다. 가면이나 변장이 왜소한 자아를 방어하는 심리적 보호막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정립된 심리학의 가설이지만, 일상에서 자신감이 떨어지는 대호는 링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마스크를 쓰고 코치의 딸 민영(장진영)과 데이트할 때조차도 마스크의 힘을 빌린다. 이야기의 밑그림을 제공하는 시나리오에서 은행 부지점장은 비열한 수단을 통해 관객에게 두려움과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려는 악한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는 노골적으로 규칙을 위반하고, 경기 범위 밖에서 상대를 공격하고, 의도적인 부상을 입히고, 때로는 청중을 위협하기도 한다. 부지점장은 이 모든 악행, 내지는 그 이상의 악행을 저지르는데, 김지운은 이를 ‘공포의 헤드락’으로 묘사하며 악한의 시그니처 동작을 서사의 메타포로 만든다. 그의 독재적인 행동과 타인을 괴롭히는 신체적 억압은 비즈니스에 대한 냉혹한 통찰력. 자유로운 개인에 대한 잔인하고 굴욕적인 처벌을 특징으로 하지만 현실 세계에서의 반칙은 합당한 대가를 치르지 않는다. 대호에 대한 부지점장의 억압적인 처우는 스토리에 완전히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이는 <반칙왕>이 세기 전환기 한국의 경제위기를 바탕으로 한 우화적인 코미디임을 일깨워준다. 주지하다시피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가장 큰 위기에 봉착한 업종 중 하나는 금융 업계이며, 이 환란의 시기 동안 은행 직원들은 실적과 과업에 과도하게 집착했을 뿐 아니라 오래되고 부패한 규칙들을 군말없이 따라야 했다. 현대화로 인해 국가는 새롭고 대안적인 문화적 이상을 환영할 수 있지만 은행과 같은 해묵은 기관은 여전히 검증된 계층적 비즈니스 문화 형태를 고수해 왔다. 이러한 코드 하에서 개인이 경영진의 억압에 저항하기 시작할 만큼 자아가 충분히 발달하면 조직에 역효과를 낳고 따라서 조직의 기능에 해를 끼치게 된다. 부지점장으로 특정된 악한의 성격화는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여 대호와 부지점장의 갈등 구도를 TV 레슬링 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영웅 vs 악당의 구도로 치환한다. 대호는 적어도 승리하기 위해 세상의 악에 맞서 싸우는 영웅적인 약자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반칙왕>의 파괴적 에너지는 반칙의 황제가 가장 위대한 싸움을 위해 링으로 향하는 종결부에서 절정에 오른다. 사각의 진혼곡’으로 이름 붙여진 영화의 마지막 챕터로 진입하기 전, 우리는 어어부밴드가 부르는 노래 ‘사각의 진혼곡’을 듣는다. “저기 왼쪽 구석에 주전자 바라보다, 일그러진 자신을 보네, 샌드백 흔들리고 흩날리는 먼지를, 혀에다 듬뿍 바르네 ... (중략)... 오버 액션 구경꾼 오버 액션 레슬러, 울트라 썬더 파워 붐 그의 이름은 레슬링 스타”로 이어지는 가사는 초라하고 내성적인 한 남자가 울트라 썬더 파워를 뿜어내는 레슬링 스타로 변신하는 과정을 예찬한다.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20분 동안 김지운은 스파게티 웨스턴에 등장할법한 상투적인 음악과 함께 대호와 유비호(김수로)의 긴장된 대결을 연출한다. 상황을 기술하는 쇼트의 기능에 관련하여 이 시퀀스는 다양한 옵션을 구사하는 연출의 능력을 확인할 수 있다. 탈의실과 복도를 가로지르는 화려한 스윕 쇼트, 신체 연기를 통해 슬랩스틱의 터치를 부여한 배우 송강호의 경이적인 육체 액션은 프로레슬링의 운동성을 인상적으로 묘사하면서 대미를 장식한다. 대호는 주먹을 치켜들고 앞으로 돌진하여 오랜 시간 수련한 백 드롭 기술을 시전하면서 링 너머에 사뿐히 착지한다. 이 비장한 순간조차 슬랩스틱을 유지했다면 영화의 진성성이 의심받았을 수 있었지만 여기엔 참된 레슬링 기술이 전시되어 있다. 텔레비전에서 보는 레슬링은 증폭된 신체 타격과 현란한 카메라 워크로 감각적 과부하를 제공하지만 여기서는 좀 더 절제되고 위엄 있는 안무를 선호한다. 이 신의 하이라이트는 유비호에 의해 대호가 쓴 가면이 찢기고 두 대결자가 링 바깥으로 굴러떨어져 계획하지 않은 난투극을 벌이는 장면이다. 합을 맞추지 않은 마구잡이 싸움이 끝난 뒤 대호의 얼굴 위로 다시 한번 어어부밴드의 ‘슬픈 대호’가 흐른다. 가는 선율이 고통을 가르고 우울의 가면이 벗겨진 대호의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었다. 자신만의 공간으로 만들고자 한 링 위에서 사력을 다하는 대호의 페르소나는 무참스런 모양으로 벌거벗겨진다. 익살과 페이소스가 가득한 <반칙왕>은 진실된 삶 혹은 자신이 바라는 모습대로 살지 못하는 삶을 전제로 한 만큼 표층과 심층의 합일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원적 열망을 다룬다. 마스크를 쓰는 행위를 통한 자아의 완성에 관한 이야기에서 가면은 그 안에 진짜 얼굴을 감춘 은폐의 도구이지만 숨겨진 야성을 되찾는 데 도움을 준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대호는 말끔한 정장을 입고 은행으로 출근하는 길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고, 이제 막 만개한 이중생활에 만족하며, 억압으로부터 해방된 그의 카타르시스적인 여정은 직업적 세계의 속박을 초월하려는 소시민의 헛된 시도와 규율의 지배로부터 탈주하는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 안에서 울트라 썬더 파워의 가능성을 찾아낸다. (관련글) 1. 2000년 1월 1일 0시, 거꾸로 가는 기차 - <박하사탕>(1999), 2021.04.16. 2. 넥타이로 총을 겨누었을 때 - <올드보이>(2003), 2021.05.14. 3. 요리사는 어디로 가는가? - <오!수정>(2000), 2021.06.04. 4. 고반장은 이렇게 말했다 - <논픽션 다이어리>(2013), 2021.07.09. 5. 머리를 자르고 새 옷을 입는다고 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 <무산일기>(2010), 2021.08.10. 6. 엄마의 침통은 죄를 기억한다 - <마더>(2009), 2021.09.03. 7. 수인동성동형론(獸人同性同形論)에 따르면 -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 2021.10.15. 8. 유능한 이야기꾼은 진실이 거기 없다는 것을 잊도록 하는 이야기를 지어낸다 - <버닝>(2018), 2021.11.12. 9. 죽음의 한 연구(硏究) - <파산의 기술>(2006), 2021.12.10. 10. 사마귀가 사마귀를 먹다 - <춘천, 춘천>(2016), 2022.01.07. 11.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 사랑한다면 그때는 우리 이러지 말아요 - <극장전>(2005), 2022.03.08. 12. 철없는 엄마와 파란만장한 남자들, 그리고 엔카 가수 - <그때 그사람들>(2004), 2022.04.06. 13. 도무지 집중이 안 되는 이야기 - <형사 Duelist>(2005), 2022.05.24. 14. 철의 신이 수장(水葬)시킨 고래의 추억 - <철의 꿈>(2013), 2022.06.16. 15. 골목길을 저절로 움직이는 자전거 - <풍경>(2013), 2022.07.14. 16. 일자로 아뢰리다 - <춘향뎐>(2000), 2022.08.11. 17. 연결연결, 믿음의 벨트 - <기생충>(2019), 2022.09.08. 18. 아마도 악마가 - <곡성>(2016), 2022.10.20. 19. 말도 안돼 기분 나쁜 그 제목은 나쁜 영화 - <나쁜 영화>(1997), 2022.11.25. 20. 황야의 울부짖는 개 - <복수는 나의 것>(2002), 2022.12.14. 21. 숟가락을 구부리는 것은 의미가 없어 보일 수 있죠. 하지만 그러한 힘을 가지고 이 세계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겁니다 - <88/18>(2018), 2023.01.04. 22. 완전하고, 만족스러운 진실은 없다 - <파수꾼>(2010), 2023.03.03. 23. 이미지의 확실성과 증거력에 대한 회의 - <김군>(2018), 2023.04.05. 24. 범죄의 요소 - <괴물>(2006), 2023.05.17. 25. 투명인간이 되는 법 - <빈집>(2004), 2023.07.05. 26. 어차피 우리는 유령이 될 거예요 - <후쿠오카>(2019), 2023.08.30. 27. 생라면, 참치 통조림, 라이터, 휴지, 그리고 사시미칼 - <넘버3>(1997), 2023.10.05. 28. 풍등(風燈)은 날아가고 - <해피엔드>(1999), 2023.10.18. 29. 504호, 고아, 사라진 애, 시체... 이제 마지막 남은 얘기 하나 - <소름>(2001), 2023.11.06. 30. 열여덟, 바람의 색깔 - <회오리 바람>(2009), 2023.11.20. 31. 가면고(假面考) - <반칙왕>(2000), 2023.12.11. 32. 문은 두 방향으로 나 있다 - <두 개의 문>(2012), 2023.12.28. 33. 지옥의 복도 - <아수라>(2016), 2024.01.08. 34. 삼(3)의 몰락 - <성적표의 김민영>(2021), 2024.02.05.
‘기차 영화’ < 오리엔트 특급살인 >처럼 기차를 무대로 한 영화들은 하나의 장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공간 자체가 내용을 장악한다. 출발과 도착, 한 방향으로 계속 달리는 기계, 체인으로 연결된 차량들, 사건이 벌어지고야 마는 화장실, 마지막 칸, 물러설 수 없음, 절대로 왔던 길(과거)로 돌아갈 수 없음. 기차 영화는 대개 불온하다. 스릴, 총싸움, 살인, 범인 잡기……. 기차 밖도 마찬가지다. 나가봤자 허허벌판이다. 좁은 공간에서 무기는 효율성이 다르다. 어떤 무기가 유리할까. 분명한 것은 기차 칸에서는 ‘대륙 간 탄도 미사일(ICBM)’이 필요 없다는 사실이다. 전통 국제정치학에서는 “전쟁은 결국 무기전”이라고 하지만, 기차 안에서는 첨단 무기가 승부를 결정짓지 않는다. 코앞의 단도나 야구 방망이는 말할 것도 없고, 모든 소지품이 무기가 된다. 인간의 역사에서 기차의 가장 큰 의미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변화시켰다는 데 있다. 철도와 기차는 근대 자본주의의 기본 인프라이자 근대성을 상징한다. 기차는 물자 수송과 인간의 이동, 산업 발전을 이끌었다. 기차 시간은 정확해야 한다. 승객은 제시간에 기차에 승차해야 한다. 10초도 늦어서는 안 된다. 숨이 차도록 기차와 함께 달리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고 우리 자신도 경험했다. 비행기의 지연 출발, 착륙은 흔한 일이지만 기차는 그렇지 않다. 기차를 놓쳐본 이들은 알 것이다. 인간이 아직 하늘을 정복하지 못했지만, 지상은 장악 가능했음을 의미한다. 기차 시간의 정확성은 한 사회의 발전과 기술, 질서를 의미한다. 에릭 홉스봄이 적었듯이 “무솔리니가 집권하자 기차가 시간에 왔다”(나중에 이 말은 ‘사실’ 여부를 두고 논란이 되었다). 오리엔트 특급살인 기차로 시작된 근대 근대 전쟁의 또 하나의 특징은 절멸전(絶滅戰), 대량 학살인데, 이는 인간의 의지(will)가 인간성을 어디까지 변형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히틀러가 자살 직전 마지막에 한 말은 “이것이 내 의지다!”이었다. 우리의 개발 독재 시대의 슬로건 역시 “하면 된다.”였다. 지금도 “하면 된다”고 하는 이들이 없진 않지만, 인간의 의지는 질주하는 자본주의 구조 앞에서 고개를 조아리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안다. 인생은 해도 안 되는 일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을. 인간의 의지, 불굴의 의지, ‘그놈의 의지’……. 나는 인간의 의지가 개인과 사회를 망친다고 생각한다. 그저, 사는 만큼만 생각하면 된다. 홀로코스트. 하나의 질서만 유일한 진리가 되는 보편성(uni/versal)의 폭력이 실제로 실현된 대량 학살이다. 프리모 레비의 시 「기차는 슬프다」는 이를 정확히 표현한다. 첫째 연이다. “단 하나의 목소리와 단 하나의 노선으로 / 정해진 시간에 떠나야 하는 기차보다 / 더 슬픈 게 있을까? / 그 어떤 것들도 이보다는 더 슬프지 않다.” 자본주의 체제는 인류 역사 전체로 보면 짧은 기간이지만, 인간 생활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근대적 사고방식의 가장 큰 특징은 시간 개념과 인간의 능력에 대한 과도한 믿음이다. 인간(백인 남성)은 이 둘을 하나로 연결하여 미래를 지향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서구에서 시작된 자본주의적 진보(progress)의 개념이다(한국 사회에서 통용되는 ‘진보’와는 다르다). 단수(單數)의 시간. 과거-현재-미래라는 직선적 시간관과 단수의 주체가 시간의 기준을 제시한다. 개별적 인간의 상황마다 ‘10분’의 의미가 다를 수 있는데, 백인 남성 비장애인의 시계를 중심으로 삼아 객관적 시간 개념이 설정된 것이다.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것처럼 행복한 시간과 지루한 시간은 그 길이가 다르다. 고문당하는 10분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이 같겠는가. 시간은 척도가 아니라 경험이다. 농촌의 시간과 도시의 시간은 다르다. 장애인의 시간과 비장애인의 속도는 다르다. 이런 차이가 무시되고 누군가의 시간이 기계적으로 설정되고(시계), 사람들은 속도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발전, 추격, 100미터 달리기, 문명과 야만, 최연소의 성취... 물론 가장 끔찍한 ‘야만’은 역사적 시간의 공간화(the spatialization of historical time). “한국은 미국의 80년대다.”라는 식으로 각 지역의 발전 차이를 문명화의 기준으로 보는 것이다. 서구를 기준으로 놓고 ‘선진국과 후진국’이라는 국제 사회의 위계를 만들어, 이는 인종적 민족주의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이다. 설국열차 근대성의 교과서, < 설국열차 > 봉준호 감독이 타고난 재능과 훈련, 지성을 모두 갖춘 예술가라는 데 이견을 달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다작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영화 만들기를 ‘마스터’했다는 느낌이 든다. 나는 그의 첫 장편영화 < 플란다스의 개 >를 가장 좋아한다. <플란다스의 개>는 무정형의 영화다. 패턴이 없다. 걸작이라는 얘기다. 영화는, 그 영화에서 화제가 되었던 ‘김뢰하처럼’ 생겼다. 이후 < 살인의 추억 >, < 괴물 >, < 마더 >, <설국열차>, 레오 카락스, 미셀 공드리와 함께 한 옴니버스 영화 < 도쿄! >(일본의 히키코모리를 다루었다)까지, 봉준호는 소위 작품성과 대중성을 모두 인정받았다. 그는 위 영화들에서 근대성의 주제들을 섬세하게 공들여 변주한다. 좌우를 초월한 남성 연대(그런 면에서 <살인의 추억>과 <설국열차>가 가장 비슷하다), 괴물적 모성, 오염 메타포, 우연처럼 보이지만 실은 구조적 파국. 특히 숙주(宿主)와 기생충. <괴물>의 영어 제목은 ‘The Host’였다. 2019년 <패러사이트(para/site, 영어 어원으로는 같은 장소에 있다는 의미, 우리말은 ‘기생충’)>를 개봉할 예정이라고 하니, 연작의 완성인 셈이다. 숙주와 기생충은 대립하는 생물이 아니라 공존 관계다. 앞서 말한 그의 영화들은 모두 근대성의 공식에 충실하다. 원작 탓일까. <설국열차>가 가장 노골적이다. 나는 그 영화를 어떤 ‘어른’을 모시고 봤는데, 옆자리에서 나는 다음 장면을 중계했다. 한 장면만 빼고, 다 ‘맞추었다’. 그는 내가 “천재”이거나 영화를 두 번 보았다고 주장했다. 나는 단백질 바(bar)의 원료가 바퀴벌레인 것도 알았다. 바퀴벌레는 영양이 풍부하고, 깨끗하며, 물 한 방울만으로도 몇 달 동안 생존이 가능한 강력한 생명체다. 단지, 먹을 것을 찾아 돌아다니기 때문에 오염의 매개체여서 사람들이 질색할 뿐이다. 내가 예상치 못한 장면은 공동체와 리더십에 대한 부분이었다. 이는 한국사회의 부정의와 연관이 있다. 커티스(크리스 에반스 분)에게 지도자의 역할이 요구되자, 그는 사양한다. 공동체를 위해 투쟁하다 장애인이 된 사람도 있는데, 온몸이 멀쩡한 자신은 지도자로서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는 반대다. 이곳은 기회주의자들의 나라다. ‘상이용사’든 ‘민주화 운동의 피해자’든 공동체를 위해 희생한 이들에 대한 존경심이 없다. 그들은 ‘재수 없는 피해자’이거나 ‘나는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를 다짐케 하는 반면교사이거나 ‘민주화 운동 경력을 팔아 국회의원을 노리는 이들’이다. 반민특위서부터 일상화된 한국의 부정의한 일상의 근대사다. 한국은 살아남는 것, 더 잘사는 것이 유일한 가치인 나라다. <설국열차>의 마지막 생존자는 소녀, ‘흑인’ 소년, 동물(곰)이다. 이들은 근대 자본주의에 오염되지 않은 희망을 상징한다. 지구의 미래는 이들에게 달려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지구를 망치는 데 앞장선 이들이 아니다. 다시 말해, 이들이 미래의 희망으로 제시된다는 사실은, 현재를 주도하는 주체의 타자라는 얘기다. 한국의 녹색당에서 비슷한 논쟁이 있었다. “미래의 아이들을 위해 탈핵을!”이라는 구호에 대해 고등학생 당원들이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어른’ 당원들은 그들의 ‘분노’를 이해하지 못했다. 고등학생들은 왜 자신들을 현재의 동반자가 아니라 어른의 관점에서 ‘미래’로 정의하느냐며 항의했다. 그들이 말하는 올바른 구호는 “지금, 당장, 우리 모두를 위해 탈핵을!”이다. 자신들을 타자화하지 말라는 얘기다. <설국열차>나 녹색당의 ‘어른’들은, 타자를 정의하고 보호하는 주체는 성인 남성임을 자임한다. 그들은 재현의 주체이지, 재현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10대들은 말한다. “우리는 당신의 미래가 아니야, 당신의 관점에서 우리를 정의하지 마” MB 시대의 ‘조현오’가 만들어낸 좀비, < 부산행 > 스티브 연이 출연한 미국 드라마 <워킹 데드(걸어 다니는 시체)>는 내게 난독 증을 일으킨다. 우울증 환자의 증상을 지칭하는 말 중에, ‘리빙 데드(living dead, 살아 있는 시체)’가 있는데, 죽을 만큼 고통스러우나 죽지 못하는, 그래서 자살만이 치료인 이 병의 특성을 표현한 단어다. 우울증과 좀비 상태는 삶과 죽음의 중간에 존재한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좀비는 그 자체로 악이 아니라 고통받는 인간의 반영이다. 괴로운 상태지만 죽지는 않는. 이보다 더 고통스럽고 끔찍한 상태는 없다. ] 써티 데이즈 오브 나이트 아름다운 좀비 영화도 많다. 나는 좀비 영화 중에서 조시 하트넷이 나오는 2007년작 < 써티 데이즈 오브 나이트 (30 Days of Night)>를 가장 좋아한다. 아메리카 최북단 도시인 알래스카의 배로우는 매년 겨울이면 30일 동안 해가 뜨지 않는다. 화면은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어둠과 추위 때문에 더욱 아늑해 보이는 도시, 카페들, 좀비가 나타날 때마다 흰색 눈 위에 뿌려지는 선연한 붉은 피, 눈 내리는 거리의 가로등……. 영화를 보다 보면 30일이 지나서 해가 뜰까 봐 걱정일 정도다. 그런데 대개의 좀비 영화는 신체 변형의 공포를 활용한다. 피와 근육이 질척인다. 좀비를 두 종류로 나뉜다면 무한 증식하는 좀비와 그 숫자가 그대로 유지되는 좀비다. 감염, 오염, 흡혈 따위로 증식하는 좀비 영화에서는 극소수만 남게 된다. 최근 좀비 영화를 신자유주의 체제의 생존 법칙과 연결하여 분석하는 소위 ‘좀비 사회학’이 인기인데, 인간은 모두 좀비가 되었다는 주장이다. 연상호 감독의 <부산행>을 보면서 이명박 시대를 이렇게 비판할 수 있는 영화가 또 있었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산행>에서 좀비가 되는 방식은 오염이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살아남기 위해 타인을 짓밟는 것이 아니라 - 그럴 힘도 없다 - 상대방을 나랑 같은 처지로 만드는 것이다. MB 시대의 정신을 체화한 ‘MB 캐릭터’는, 이 영화의 최고 악역( 김의성 분)이 아니다. 그는 평범한 생존자다. 문제는 그 이상(以上)을 추구하는 존재들이다. MB 시대의 대표적 모델은 전 서울 경찰청장 조현오 씨다. 그가 저지른 용산 참사, 쌍용차 사태 등은 MB가 ‘지시’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아는 MB는, 아예 그런 문제에 관심조차 없는 사람이다. 이 사건들은 조현오 개인의 과잉 충성의 결과였다. MB 캐릭터의 특징은 최소한의 근대적 인간관을 갖추지 못한 데다, 실력은 없으면서 셀럽 욕망이나 권력욕에 미친 사람들이다. 진보 진영과 페미니스트도 마찬가지다. 무식과 뻔뻔함은, 이들이 장착한 최고의 만능 아이언맨 슈트다. 신자유주의 사회는 실력이 있으면 굳이 비윤리적이지 않아도 되는 능력주의 사회다. 이들은 실력이 없으므로 한편으로는 피해자 코스프레를, 한편으로는 극도로 긍정적 사고방식으로 살아간다. 이들에게 죄의식이나 수치심은 인생의 낭비다. 이 시대는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이 보편적 윤리가 아니라 약자가 사는 방식이 되었다. 한국사회의 최고의 자살률은 수치심을 버린 자들이 휘두른 자상의 결과다. 인사불성(人事不省) 상태에서 부끄러움 없는 사람의 활기(活氣)는, 그 자체로 흉기다. 한 마디로, 지금 이곳은 ‘나쁜 놈들의 전성시대’다. 정의는커녕, 의리마저 찾아보기 힘들다. 이런 세상에서는 착한 사람, 평범한 사람도 오염된다. 오염되지 않으면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연상호 감독은 한국 사회를 기차 안에 압축해 두고 모두가 나쁜 사람이 되는 과정을 묘사한다. 평범한 사람들이 ‘조현오’가 되는 과정이 이보다 현실적일 수 있을까. 다시 쓴다. 이 영화는 보통 사람들이 ‘조현오’가 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과정을 그린, 몸서리쳐지는 영화다. 다른 선택은 없다. 오염의 주체만이 존재할 뿐이다. 주인공 공유 나 마동석 도 구원받지 못하며, 나쁜 세력의 승리에 제단에 바쳐진다. 이 영화에서도 부정의에 오염되지 않을 두 명만 남겨준다. 역시 여성( 정유미 )과 아이( 김수안 )다. 이 영화를 부성 영화로 보는 것은 넌센스다. 스테이션 에이전트 < 스테이션 에이전트 >의 ‘난쟁이’ 그는 타자인가, 진정한 친구인가 <스테이션 에이전트(The Station Agent>(2003)의 주인공 핀은 내가 꿈꾸는 삶을 산다. 동네에 버려진 기차 한 칸이 그의 집이다. 관리해야 할 물건이 없는 간소한 삶. 우리에게도 익숙한 할리우드의 대표적인 ‘장애인(난쟁이)’ 배우, 피터 딘클리지(Peter Dinklage)와 폴 벤저민(Paul Benjamin), 퍼트리샤 클라크슨(Patricia Clarkson)이 나온다. 토머스 매카시(Thomas McCarthy) 감독의 <스테이션 에이전트(역장)>는 그해 선댄스 영화제에서 각본상(감독이 직접 썼다)과 관객상을 받았다. 조용한 마을, 평범한 사람들은 이러저러한 사연을 갖고 있다. 그들은 모두 핀을 좋아한다. 그와 차를 함께 마시고, 그에게 비밀을 털어놓고, 가족과 싸우고 연인과 헤어지고 갈 곳 없는 이들이 간혹 그의 기차 칸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기도 한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나 두려움 같은 것은 전혀 없다. 핀은 마음씨 좋은 신부님, 의지할 수 있는 마을의 상담자다. 나는 이 영화를 여러 번 보았다. 왠지 나는 성별과 ‘외모의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과 역할에 강하게 동일시했다. 나는 꼭 그였다. 나도 핀과 마찬가지로, 마을 사람들과 ‘같지 않다’. 그는 마을의 살짝 외곽, 숲 근처에 살고 있다. 그의 존재는 궤도 밖에 있다. 마을 사람(여성)들은 그를 좋아하지만 ‘사랑’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들이 먼저 그를 찾지, 그가 먼저 원하는 경우는 없다. 만일 그가 먼저 사람들을 원한다면, 관계의 법칙은 깨질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무언가 결핍이 있는 존재이고, 스스로 그것을 알고 있고, 또한 그 사실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누군가를 부러워하거나 동경해 본 적이 없다. 주변 지인들은 내가 타인에 대한 관심이 없기 때문이라고 ‘분석해준다’. 그러나 영화 속으로 들어가 보면 사람들의 생각은 다르다. 나는 그들과 동급이 아니다. 나 역시 어떤 부분에서 ‘장애인’이어서, 그들 인생의 경쟁 상대가 아닌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핀(역장)을 편하게 생각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싫어하지는 않지만, 자신과 같을 수는 없는 사람들, 자기 기준에서 ‘차이(모자람)’가 있는 사람은 자신을 위협하지 않는다. 그래서 논외이며, 편안한 것이다. 우리는 이런 이들을 타자(他者, the others)라고 부른다. 타자는 억압받기도 하지만, 유사 종교적 존재로 존중받기도 한다. 지배와 피지배, 속(俗)과 성(聖), 중심과 주변의 관계에서 모두 후자이되, 긴장이 덜하다. 그는 ‘오리엔탈리즘’이 만든 타자지만, 사람들은 그를 낭만화하고 신비화한다. 주인공은 자신의 처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타자의 위치에서 탈출하려고 하지 않는다. 마을 사람들과 주인공의 관계 원리는 ‘나는 너와 다르고, 그것은 내가 결정한다’이다. 장애인으로 규정당한 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어느 정도는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영역이 있다. 그들의 규범에 괴로워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을 수도 있다. 그들과의 차이의 문제를 글로 쓸 수도 있다. 내 입장에서는, ‘그들이 나와 다른 것’이니까. 감독들은 왜 다들, 그토록 주체인가 근대성이라는 기차는 처음부터 균불등 발전을 의미했다. 이제는 불균등 발전은 극단의 양극화를 넘어, 지구 자체가 망하게 생겼다. 트럼프 같은 인간도 패닉 룸(반공호)을 잃을 판이다. 기존의 근대성을 고수하면 모두가 망한다는 진실이 눈 앞에 펼쳐지고 있다. 자국의 쓰레기를 버리기 위해 아프리카 땅을 마구 사들이는 중국, 전쟁주식회사는 의뢰인에게 돈 대신 받는 원주민들의 땅을 빼앗는다. 가만히 앉아서 물과 식량을 잃는 사람들, 매일 매일의 내전, 피 묻은 다이아몬드, 녹아버리는 거대한 빙하, 죽은 고래 몸 앞에 든 80킬로그램의 비닐, 바다 위에서 사라지지 않은 스티로폼 부표, 고용 없는 성장……. 이제 기차는 계속 달릴 수 없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술가들은 이제까지 근대의 주체가 아니었던 여자, 아이, 자연, 장애인들을 기차 밖에 살게 하거나 생존자로 만든다. 그렇다면 이 타자들은 진정 인류를 구원할 수 있을까. 여성과 아이, 동물은 오염되지 않았는가? 하지만, 내게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감독 자신이, 예술가 자신이 스스로 타자가 될 생각은 왜 하지 않는가. 그들은 왜 항상 주체이고, 주체를 구원할 수 있는 대상조차 지정할 수 있는 조물주인가. 여성이고 아이들이라고 해서 ‘착하다’고 생각하지 말기를. 새로운 주체는 기차 밖에 있다고 해서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기존의 주체는 스스로 ‘꺼지면’ 안 되는가. 자리에서 내려오라. 주체의 전복과 파괴, 변형이 상상력이다. 작품마다 자신을 부수는 소설가 정찬은 그의 걸작 「슬픔의 노래」에서 이렇게 말했다. “강을 건너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지요. 배를 타는 것과 스스로 강이 되는 것. 대부분의 작가들은 배를 타더군요. 작고 가볍고 날렵한 상상의 배를.” ※ 외부 필진의 원고는 영화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IT 기술’의 플랫폼과 ‘교양’의 문제 최근(2017년 12월) 필자의 관심사는 인터넷이 대중화되면서 기술(IT)적인 ‘플랫폼’(≒미디어, 매체)이 세계화(글로벌화)되어 발생되는 고전적인 ‘교양’의 ‘해체’라고 불러야 할 상황에 대해 주로 기울어져 있다. 그 때문에 요즘 몇 번 출판계에 기고할 기회가 생길 때마다 마침 이 플랫폼(전자서적이나 웹툰, 웹 소설 등)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하게 되었다. (출판전문지 「기획회의」 2017년 12월 5일 453호 및 곧 출간 예정인 단행본 『한국의 논점 2018』 등.) 인터넷을 통한 각종 ‘플랫폼’은 주로 ‘IT 계열’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기 마련이고 (주요 플랫폼 기업이라고 한다면 아마존, 애플, 구글, 우버, 에어비앤비, 텐센트, 국내에서는 네이버와 카카오를 들 수 있을 텐데 보다시피 대부분 IT 기업으로 출발했다), 그에 따라 종래의 대량생산을 기반으로 했던 대중(mass)의 ‘매체(media)’의 대표 격인 ‘출판’이 가지고 있던 인문학적 속성과는 조금, 문화랄까 습성이랄까 배경에 차이가 있다고 여겨지는 상황이다. 일본의 평론가 오쓰카 에이지는 이런 상황에 대해 설명할 때 주로 ‘구(舊) 교양’이라는 말을 쓰곤 하는데, 말 그대로 출판 시절의 매체는 ‘과거의 교양’을 바탕에 둔 것이었으나 현대 인터넷 기반의 IT 플랫폼은 그렇지 않은 측면이 많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이런 상황이다. 일본을 방문한 트럼프한테 아베 정권이 당당하게 내보였던 일본문화가 트럼프 손녀딸이 좋아한다는 피코타로였고, 하지만 정작 그 손녀딸은 삼자경과 당시(唐詩)를 암송하는 동영상을 시진핑한테 보여주는 모습을 보고, 작년에 카와카미 노부오가 현대 일본의 교양은 이미 『소년 점프』가 되었다는 구태의연한 지적을 했던 것을 다시금 통감했다. 카와카미는(중략) ‘지적(知的)인 웃음’을 표현하고자 할 때 인용되는 것이 더 이상 고전이 아니라 『소년 점프』라는 사실을 간파했다. 하지만, 그러한 서브컬처는 트럼프에게조차도 교양으로 치부되지 못한다. 트럼프조차도, 교양이란 곧 고전이란 사실을, 어리석긴 해도 나름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는 말이다. 『소년 점프』나 피코타로가 ‘오타쿠 문화’라고 할 수 있는지 ‘서브컬처’라고 해야 할지, 그런 세세한 정의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지만, 아베 마리오 코스프레까지도 포함해서 그것들을 한 묶음으로 하는, 지극히 경솔한 무엇인가를 체현시킨 것이 현 시점의 이 나라에선 문화이자 교양이라고 하는 사실이, 아베 정권에 접어든 이후 계속해서 가속되고 있다는 사실은 다들 이제 슬슬 느끼고 있지 않은가. 아소 타로의 교양이 ‘만화’였다는 것을 이젠 더 이상 아무도 화제로 삼지 않게 되었고, 이시바 시게루, 마에하라 세이지 등과 같은 차세대 국방족 의원들의 ‘교양’은 프라모델 만들기나 철도 오타쿠라는 것이야말로 이 나라 안전 보장에 있어서 최대의 문제라고 아무도 느끼지 않고 있다. 선거전 종반에 여당 당수가 연설 대상으로 했던 유권자는 아키하바라에 모인 사람들이었지 신주쿠 서쪽 출구의 샐러리맨이 아니었다. 논단에서도 젊은 학자나 논객의 ‘취미’가 아이돌에 관한 논의가 되어 있는 정도로는 ‘서브컬처’든지 ‘오타쿠 문화’이든지의 ‘교양화’는 확실하게 진전되었다. ‘오타쿠 문화’ 그 자체는 이제 와선 무한하게 세분화되었지만, ‘쇼와의 끝 무렵’ 시절에는 대략적으로 히라가나 표기의 ‘오타쿠(おたく)’란 단어 주변에 있던 것들(미야자키 쓰토무의 방에 있던 만화는 ‘모에’ 만화가 아니라 극화지와 『젊은 아내의 속옷』이었고, 수천 편의 비디오 컬렉션은 롤리타 포르노가 아니라 CF와 아이돌, 프로레슬링과 애니메이션에 야구 방송 녹화 등, 헤이세이 시대 이후로는 세분화되어버린 ‘오타쿠의 각 소비 영역’을 얕고 넓게 대강 대충 커버하고 있던, 도저히 ‘컬렉션’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이 이 나라의 중심이라고까지는 말하지 않겠으나, 교양만이 아니라 정치나 경제나 미디어에서도 분명히 그 일각을 점거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오쓰카 에이지, 「아베의 교양과 어디에도 없는 장소의 ‘오타쿠 문화’」, 『최전선』 편집부 블로그, 2017년 12월 7일) 참고로 약간의 해설. 이 글에서 나온 피코타로는 ‘PPAP’란 곡으로 유튜브를 떠들썩하게 했던 일본의 가수이고, 카와카미 노부오는 일본의 동영상 플랫폼 ‘니코니코동화’를 만들었고, 지금은 대형 출판사인 카도카와쇼텐과 합병하여 만들어진 KADOKAWA(카도카와)란 회사의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 인물이다. 카와카미는 스튜디오 지브리로부터도 인정을 받아 지브리에서 미야자키 하야오와 타카하타 이사오 감독을 보좌해온 베테랑 프로듀서 스즈키 토시오의 ‘제자’로서 미야자키 감독 작품인 < 바람이 분다 >와 타카하타 감독 작품인 < 가구야 공주 이야기 >에 ‘프로듀서 견습생’으로 크레디트되기도 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런 그에 대해서도 오쓰카 에이지는 매번 날카로운 지적을 해왔다. (실제로는 오쓰카 에이지는 카와카미와 친분이 있고, 니코니코동화가 주최하는 이벤트나 방송에도 자주 출연하고 있다.) 그리고 ‘아베 마리오’ 코스프레는 일본의 아베 총리가 2016년 리우 올림픽 폐막식에서 2020년 도쿄 올림픽을 홍보하기 위해 슈퍼 마리오 코스프레를 하고 등장했던 것을 가리키는, 일본 매스컴의 유행어(?)이다. 아소 타로는 일본의 전직 총리이자 현재에는 재무대신, 부총리 등을 역임하며 아베 정권의 일각을 담당하고 있다. 이시바 시게루는 자민당 간사장을 맡으며 아베파의 일각이었으나 현재는 거리가 멀어지면서 당내의 라이벌처럼 된 정치인이고, 마에하라 세이지는 야당인 민주당 당수였다가 그 뒤를 이은 민진당의 대표를 맡았다가 야당을 깨버리고 상당히 우익적인 행동을 하고 있는 일본 야권의 유력 정치인이다. ‘아키하바라에 모인 사람들’이란 표현은 젊은 오타쿠층(2010년대 일본의 젊은 층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보수·우익적이다), 즉 ‘프리터’(프리랜서나 아르바이트 정도를 하고 있는, 사실상 무직인 층)라든지 니트(NEET), ‘넷우익’과 친화성이 강한 층을 지칭하는 것이고, ‘신주쿠 서쪽 출구의 샐러리맨’이라 함은 한국에서 말하자면 ‘여의도나 명동의 회사원들’이란 식으로, 좀 더 상대적으로 ‘일반적인’ 회사원층을 뜻한다. (이 회사원들이 보수파가 아니라는 의미는 아니다. 보수나 진보와 무관하게 그냥 말 그대로의 ‘일반인들’을 지칭한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쇼와 시대는 1989년에 끝났으므로 ‘쇼와의 끝 무렵’이라 함은 1980년대 중후반을 가리킬 것이고, 미야자키 쓰토무는 1989년에 도쿄·사이타마 연속 유아 유괴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체포되어 사형 판결을 받고 집행된 인물이다. 그가 당시에 ‘오타쿠’를 대표하는 것처럼 매스컴에서 보도되는 바람에, 그 당시에 코믹마켓 등에 동인지를 내거나 애니메이션을 대량으로 시청하는 소위 ‘오타쿠’ 계층에 대한 일본 사회의 ‘왕따’와도 같은 분위기가 돌았던 적이 있었다. 그때 미야자키 쓰토무를 ‘오타쿠’라고 보도했던 주된 원인은 그의 방에 수천 개의 비디오테이프가 있었고 만화잡지를 포함한 책들도 꽤 있었다는 이유였는데, 실제 그 비디오테이프 중에는 불법적인 포르노도 없었고(일본에선 정상적으로 발매되었던 성인용 비디오는 있었지만, 당연하게도 유아 대상의 롤리타 계열도 아니었고 전부 ‘합법적인’ 성인물이었음) 대부분은 CF나 아이돌이 출연한 TV 프로그램과 TV 드라마, 프로레슬링 및 야구 시합의 녹화 비디오였다는 사실이 21세기에 들어 새롭게 주목받은 바 있다. 그 중에 포함되어 있던 애니메이션도 당시 ‘오타쿠’들이 즐기던 작품이라기보다는 < 우주전함 야마토 > <게게게의 키타로> < 요술공주 샐리 > 등 상당히 ‘일반인 취향’의 애니메이션이 대부분이었다는 것이다. 드라마 역시도 당시 대중적으로 인기 있던 작품이 많았다. 하지만 역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보다는 오타쿠에 가까웠던’ 그가 1980년대 당시 ‘세분화된 특정 장르’에 치우친 것이 아니라 이처럼 폭넓게 ‘오타쿠 문화 혹은 서브컬처’를 섭렵하고 있었다는 점을, 오쓰카 에이지는 현재의 ‘세분화된 오타쿠 문화 혹은 서브컬처’와 비교하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오타쿠 계층에서는 미야자키 사건이 있었던 당시 일본 TV에서 대형 동인지 판매전인 코믹마켓을 배경으로 “여기에 10만 명의 미야자키 쓰토무가 있습니다!”라고 옐로 저널리즘스럽게 보도했다는 것이 마치 정설처럼 오랫동안 이야기되었지만, 실제로는 그런 보도가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 올해 밝혀지기도 했다. 참조:「‘10만 명의 미야자키 쓰토무’는 있었는가?」, 야후재팬 뉴스 개인(dragoner/블로거), 2017.09.29) 아무튼, 서브컬처가 ‘교양’이 되어버린 시대에 플랫폼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다시 한번 오쓰카 에이지를 인용해보겠다. ‘오타쿠 문화’, ‘서브컬처’는 카도카와 쓰구히코 등과 같은 인물이 말하는 소위 ‘에코 시스템’(이 사회 속에서 말하는 ‘에코’란 ‘에콜로지’(환경)라기보다 ‘이코노미’(경제) 아니겠는가?), 즉 플랫폼 기업은 사람들이 투고나 2차 창작을 자발적으로 행하도록 만들고 있는데, 동시에 그것을 각자 본인의 의지나 자기표현이라고 만족할 수 있도록 해주는 시스템을 갖춰놓고 있다. (중략) 하지만 이제 와서 거기에 모이는 사람들한테 당신들은 착취당하고 있다고 설명해주어봤자 마르크스주의 등장 이전의 노동자들한테 당신들은 소외당하고 있다고 설명하는 것과 비슷하고, 하물며 아무래도 ‘혁명’을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는 듯하니 더 이상 설명해줄 기분도 들지 않는다. 2차대전 이후 출생 세대인 구 ‘오타쿠’들은 ‘내용’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차세대인 카와카미 노부오나 히로유키로 대표되는 정보공학계 오타쿠들은 플랫폼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위에서 오타쿠 문화가 경제나 문화의 중추로 편입될 수 있는 시스템이 만들어졌다. 그 의미와, 그 결과 초래될 것이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조금 더 진지하게 생각해두는 편이 좋다는 것만큼은 경고해두고자 한다. (중략) 어쨌거나 ‘오타쿠’는 이젠 플랫폼 안에 기관의 일부로서 편입되어, 플랫폼 그 자체에 위화감을 느끼지도 않고 회의(懷疑)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이 나라 ‘보수’의 기조(基調)라고 할 만한 것이라면, 요즘엔 그런 것들 안에서나 찾아야 할 것이다. (오쓰카 에이지, 위와 동일) 다만 오쓰카 에이지는 이런 식의 구세대 ‘오타쿠 교양’의 붕괴에 대해 “한탄도 찬미도 할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일본에서 몇몇 오타쿠 평론가들 사이에 유행했던 ‘오타쿠 세대론’(세대 차이론)을 주장하는 듯이 받아들여지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그것은 오쓰카의 다른 최근 책에서도 여러 번, 분명한 사례를 들면서 강조되고 있으니 실제로 진심일 것이다.) 즉 과거의 오타쿠들은 내용(contents)을 만들어내었으니 훌륭하고 요즘 IT 계열 오타쿠들은 플랫폼밖에 만들지 못했으니 뒤떨어진다는 식의 논의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 글에서 오쓰카가 언급한 ‘내용’이란 단어는 영어 단어로 보자면 ‘콘텐츠(contents)’에 해당하는데, 이는 서적에서 ‘차례’를 보통 ‘contents’라고 표기하는 것처럼 바로 ‘서적의 본문 내용’을 가리킨다. 또 플랫폼이라는 것은 종이책에서라면 바로 그 ‘종이’, 제본되어 한 권 한 권 묶여진 책의 본체 그 자체를 말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내용(콘텐츠)과 종이(플랫폼) 사이에 어떤 ‘우열’이 존재한다고 말하기는 어렵지 않겠는가. 플랫폼이 없이는 우리가 콘텐츠를 접할 방도가 없으니 말이다. 오쓰카가 문제로 삼는 것은 그런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라, 과거에는 ‘콘텐츠’를 만들어냈던 오타쿠들이 (세대는 바뀌었을지언정 결국 똑같은 ‘오타쿠’이니까) 지금은 플랫폼 안에 그 구조물의 부품처럼 편입되어 버렸고 심지어 그 상태를 불편하게 느끼거나 회의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함을 느끼며 안심하고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오타쿠들은 인터넷 시대 이후 PC통신의 채팅실에서, MSN메신저와 네이트온과 카카오톡 같은 인터넷 메신저에서, 블로그에서, 그리고 지금은 트위터와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등 SNS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 PC통신 시절에는 모두가 글을 쓸 수 있는 ‘게시판’으로 시작했다가 ‘가입’한 회원만이 글을 볼 수 있는 ‘동호회’란 것이 만들어졌고 그 뒤에는 동호회로부터 ‘소모임’이란 것이 생기는 등 갈수록 ‘좁은 문’을 선택했다. 또한 채팅실에서는 ‘강퇴’(강제퇴장)를 시켰으며, 블로그에선 ‘서로이웃만 보기 기능’을, SNS에선 ‘페친’과 ‘블락’과 ‘뮤트’를 통해서 점점 더 ‘자기가 보기 편한 환경’을 계속해서 추구해왔다. 이것이 바로 ‘플랫폼 안에 부품처럼 편입되어 버렸고 심지어 그 상태에 오히려 편안함과 안심감을 느끼는 상태’라는 말이다. 이는 ‘어떤 장르든지, 창작이든 패러디든지, 만화든 소설이든 평론이든 굿즈든’ 어떤 것에든지 개방된 상태에서, 또한 모두가 다 같은 ‘참가자’일 뿐 누구도 ‘주인’이거나 ‘손님’이지 않은 ‘열린 환경’을 추구해왔던 코믹마켓의 이념과는 정반대인 셈이다. 당초에는 인터넷의 이념도 바로 그러한 ‘개방성’에 있었을 텐데, 실제로 그 인터넷상에서 추구되는 것은 ‘끼리끼리 모일 때의 편안함’이 아닌가 하는 말이다. 당초에는 발언의 자유를 위해서 시작되었던 인터넷의 익명성조차도, 실제로는 수많은 ‘딥 웹’ 방식의 ‘초보자나 타인의 참여를 기피하는 익명성 커뮤니티’를 보게 되면 오히려 ‘자유’를 ‘제한’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곤 한다. 실제로 한국의 익명성 커뮤니티에서는 소위 ‘닥눈삼’, 즉 ‘닥치고 눈팅 삼 년’이라 하여 해당 장소의 분위기 파악을 하기 전까지는 상당한 장기간 동안 글을 쓰지 말고 읽기만 하라는 분위기가 유행했고, 일본에서도 익명 기반의 게시판 2ch(2채널)에서는 ‘ROM’(리드 온리 메모리의 약칭)이라 하여 한국과 똑같이 우선은 글을 쓰지 말고 읽기만 하고 있으라는 분위기가 존재했던 것을 보면, 그런 의심이 들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일본 인터넷에서 말하는 소위 ‘공기를 읽어라’(분위기 파악을 하라)는 말은 곧 ‘플랫폼에 적응하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플랫폼 안에서 ‘유저’들이 ‘손님’으로서 편안함을 느끼고 싶다는 욕망에 따라서 만들어진 분위기인 것이다. 미국에서 ‘망 중립성’을 폐지한다고 하던 뉴스 역시도, 바로 이런 ‘인터넷 속에서 벌어지는 자유의 제한’의 상징적인 조치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더 나아가서 생각해보자면, 사회의 방향성이 ‘콘텐츠’에서 ‘플랫폼’으로 변경된 것에서 그다음 단계로, ‘플랫폼’으로부터 더더욱 기술적인 ‘네트워크’로 가버리고 있는 것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 정도이다.) 플랫폼과 유저 마인드의 문제 오타쿠층의 ‘현재’가 과거의 ‘교양’ 시대, 즉 콘텐츠를 창출해내고자 했던 모습에서 지금의 플랫폼을 중심으로 한 시대로 움직인 것 아닌가 하는 오쓰카의 이 지적은 흥미롭다. 실제로 과거의 오타쿠들은 일본에서나 한국에서나, 시대의 차이는 있을지언정(일본에서의 ‘1세대 오타쿠’와 한국에서의 ‘1세대 오타쿠’의 시기가 달랐던 것처럼) 초기에는 미야자키 쓰토무와 같이 ‘얕고 넓게’ 다방면의 ‘오타쿠 장르’를 섭렵하던 모습이었는데, 점점 갈수록 자기 자신만의 취향에 기울어져 세분화되어 왔다. 이 ‘세분화’를 나는 ‘파편화’라고 불렀는데, 말하자면 과거엔 오타쿠라면 TV에서 일본애니메이션도 보고 극장에서 디즈니 애니메이션도 보고 LD나 비디오로 일본의 OVA도 보았다. 새로운 게임이 나오면 관심을 가졌고 주브나일과 판타지 소설에서 유래한 ‘라이트노벨’이란 것이 인기를 끌게 되면 소설도 읽었다. 또 남자라도 TV에서 『들장미소녀 캔디』를 보았고 동호회에서 화제가 되는 작품이라면 (여성 취향의) CLAMP 만화나 『나의 지구를 지켜줘』나 『그 남자! 그 여자!』(카레카노)도 읽었다. 여자들도 『슬램 덩크』를 열심히 읽었으며(여성향 동인지 신(scene)에서 항상 최대의 장르였던 것은 『슬램 덩크』나 『테니프리』 『강철연』 『쿠로바스』 등과 같은 소년만화였다), 차세대 게임기가 나오거나 온라인게임의 유행에도 적극적이었다. 남자가 구체관절인형을 사고 여자가 건프라를 사는 모습이 드물지 않았고, 그것이 지금까지도 한국에서 완구 판매의 어떤 한 특징으로서 자리잡고 있다는 분석은 그리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다가 콘텐츠에서 플랫폼 쪽으로 ‘메인스트림’의 중심이 옮겨가면서 더 이상 ‘얕고 넓은’ 것은 오타쿠층의 ‘기본 소양’이 아니게 되었다. 바로 그 점을 지적했던 것이 ‘얕고 넓은’ 오타쿠 세대의 대표 주자 중 한 명이었다고 할 수 있을 ‘오타킹’ 오카다 토시오(가이낙스 전 대표)가 2006년부터 말해왔던 ‘오타쿠의 죽음(「오타쿠 이즈 데드」)’의 내용인 것이다. (이와 관련되어 2008년에 『오타쿠는 이미 죽었다』란 제목으로 단행본이 출간되었다. 다만 오카다 토시오는 이에 관해 블로그에서 ‘첫 번째 저작 『우리들의 세뇌사회』 때부터 일관적으로 내 입장은 〈닥쳐오는 시대를 거부하지 않는다〉였다. 나는 지난번 이벤트 때에 한 마디도 “요즘 오타쿠는 안 되겠다”, “요즘 애니메이션은 재미가 없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옛날 같은 오타쿠가 줄어든 것은 당치도 않다”라고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받아들인 사람이 있다면 그건 그 사람의 〈이해의 한계〉인 것이지, 그에 대해서 반발하든 찬동하든 나로선 곤란할 뿐이다’고 답변한 바 있다. [오카다 토시오 블로그 2006.05.27]) 따라서 오쓰카 에이지든 오카다 토시오든, ‘그 좋았던 옛날(벨 에포크 Belle Époque)’에 대한 향수로서 구세대의 오타쿠를 긍정하고 현세대의 오타쿠를 비판하기 위해 이런 말(옛날 오타쿠들은 넓은 분야를 즐겼는데 요즘은 파편화되었다는 지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다만 오타쿠의 세대론과 무관하게, ‘교양이 존재하지 않는(존재할 필요가 없는) 플랫폼’의 등장과 함께 모든 사람들이 그 플랫폼의 ‘유저(손님)’로서 자기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정의하게 되었다는 점을 오쓰카는 지적했던 것이다. 이 부분은 내가 오랫동안 한국 오타쿠층의, 나아가서는 한국 대중의 ‘손님 마인드’에 관해 지적했던 것과도 연결되는 문제의식이다. 내가 손님 마인드라고 부르는 것은, 말하자면 본인을 항상 ‘손님’의 위치에 두고 타인이 자신한테 ‘서비스’를 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태도를 뜻한다. 소위 ‘감정 노동’의 문제도 결국은 이 손님 마인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겠는가. 물론 실제의 업체-고객의 관계에서도 ‘손님 마인드’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손님 마인드를 모든 방면에 적용시키면서, 스스로를 약자, 피해자 입장에 놓고 타인을 공격하고자 하는 태도인 것이다. 예를 들어 직접적으로 지불하는 금액은 없고 기껏해야 ‘트래픽을 통한 광고’를 보아줄 뿐이면서도 스스로를 ‘손님으로 대접받아야 하는 입장’에 놓고서 연예인이나 웹툰 작가 등한테 심한 악플을 달거나 고자세를 취하는 것이 심각한 사건으로 비화되는 일이 있지 않은가. 물론 돈을 냈더라도 ‘감정 노동’을 하게 되는 종업원 등에 대해 심각할 정도의 안 좋은 태도를 취하는 것도 문제일 테니, 단순히 돈을 내고 안 내고에 달린 문제라고만은 할 수가 없겠지만 그나마 돈을 직접 지불하지도 않은 상황이라면 아무래도 제 3자 입장에서 볼 때에는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다. 과거의 오타쿠들은 ‘모두가 똑같은 참가자일 뿐, 판매자와 구매자 사이에 업주-고객 관계는 없다’라는 코믹마켓의 정신을 필두로 하여, ‘내가 좋아하는 장르에 작품이 없다면, 내가 스스로 만들겠다’라는 식의, 말하자면 일종의 ‘참여 의식’이 있다 보니 상대적으로 나를 손님으로 대해달라, 나를 ‘유저(user)’로 대해달라고 하는 마인드가 지금보다는 적었다는 ‘설명’을, 오쓰카를 필두로 한 몇몇 1세대 오타쿠 출신 평론가·연구자들이 지금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유저가 유저 입장에서 ‘유저 마인드’를 갖는다는 것 자체가 나쁘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어쨌든 과거와 달리 오타쿠라는 사람들에게 그러한 변화가 일어났다는 분석 자체는 분명히 의미가 있다고 본다. 특히 전 세계가 글로벌화되고 인터넷으로 연결되면서 대부분의 국가에서 유사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 속에, 국내에서도 오타쿠층, 혹은 인터넷 사용자들 사이의 세대 분화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분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