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틴
- 감독
- 프란시스 로렌스
- 제작년도
- 2004
- 출연
- 키아누 리브스, 레이첼 바이스, 샤이아 라버프, 틸다 스윈튼, 프롯 테일러 빈스, 지몽 운스, 게빈 로스데일, 피터 스토마이어, 맥스 베이커
근래 전 세계 영화제에서 가장 크게 주목받은 러시아 애니메이션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 콘스탄틴 브론지트 감독의 <우주 없이 못살아 We Can’t Live without Cosmos>이다. 2008년 <화장실 러브스토리>로 아카데미 단편 애니메이션 후보에 올랐던 감독이 그 후 6년 만에 발표한 작품이다. <우주 없이 못살아>는 2015년 5월에 열린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 단편 우수상과 관객상을 동시에 받으며 한국 관객의 마음을 얻었고, 같은 해 6월에 열린 자그레브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와 안시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에서도 단편 부문 대상을 받으며 세계 관객의 마음을 재차 확인했다. 수많은 영화제와 시상식을 사로잡은 <우주 없이 못살아>의 주인공은 우주인 훈련생들이다. 작품은 건장한 청년들이 마주 서 침대 위를 뛰는 장면으 로 시작한다. 바깥은 별이 가득한 밤. 성긴 눈발이 사선으로 날리는 매서운 계절이다. 1203, 1204 나란히 이어진 번호를 받고 같은 방을 쓰는 두 사람은 유모차 타던 시절부터 단짝이다. 그러니까 우주인 흉내를 내며 침대 위를 뛴 것도 하루 이틀은 아닐 것이다. 2015년 3월, 나는 모스크바에서 하룻밤 묵었다. 러시아 작가들이 휴양처럼 생각한다는 오픈애니메이션페스티벌 행 버스가 다음날 출발할 예정이었다. 페스티벌이 제공한 호텔 이름은 코스모스(호텔 클럽 이름은 솔라리스)였다. 3,600명을 수용할 수 있다는 어마어마한 규모지만 객실은 소박했다.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을 대비해 세운 건물인데 내부 장식도 그때 그대로가 아닌가 싶었다. 호텔 창밖으로 보이는 공원에는 은빛 탑이 예리하게 솟아 있었다. 거대한 호텔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공원을 산책했다. 하늘은 아침부터 무척이나 새파랬고 눈이 부실만큼 번쩍이는 탑 꼭대기에는 로켓이 놓여있었다. 거기서 유리 가가린의 조각상을 발견했다. 인류 최초로 우주 궤도 비행에 성공했다는 사람. 그곳은 모스크바 우주 박물관이었다. 대한민국 최초의 우주인 이소연 씨가 훈련받은 가가린훈련센터도 모스크바에서 멀지 않다. 러시아 어린이라면 장래희망으로 우주인 정도는 한 번쯤 쓰겠구나 싶었다. 밤마다 함께 우주를 나는 꿈을 꾸던 두 친구는 서로 끌어주고 밀어주며 일상적인 체력단련과 수영, 구토를 유발하는 원심력 훈련까지 해낸 끝에 우주인과 예비 우주인으로 선발된다. 1203을 태운 로켓이 흐린 하늘을 지나 별이 빛나는 우주에 다다르자 센터 사람들과 모니터로 지켜보던 1204는 박수치며 환호한다. 그러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그만 교신이 끊긴다. 1990년 일본 최초 우주인의 통역사로 소련을 찾은 요네하라 마리는 바이코누르 우주기지에서 “이카로스들의 묘”를 만난다. 1) 그녀의 기억에 언론은 1961년 우주 비행에 성공한 가가린을 소비에트의 이카로스라고 불렀다. 그녀는 넓은 기지 한구석의 비석을 보며 야심 찬 성공의 그늘에 가려 적막한 죽음을 맞은 이카로스가 한둘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친구가 떠난 까만 하늘, 가만히 가득한 별들이 흰 눈이 되어 쏟아진다. 지상에 슬픔이 두껍게 쌓여도 삶은 멈추지 않는다. 훈련센터 관리자는 곧장 1203의 기록에 줄을 긋는다. 1204는 이제 다음 차례 우주인이다. 하지만 혼자 남은 그에게 꿈은 더는 같은 의미가 아니다. 엔딩 크레디트가 오르기 전 이 영상 편지의 수신인이 뜬다. TO OUR FRIENDS <우주 없이 못살아>는 별이 가득한 우주와 우주비행사를 꿈꾸는 두 친구 이야기다. 둘은 어릴 때부터 수없이 함께 우주를 이야기하며 자랐을 것이다. 우주 없이는 못산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작 그들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은 꿈을 나눈 친구가 아닐까. ‘우정 없이 살 수 있을까.’ 소중한 친구들에게 보내는 감독의 메시지를 부디 확인하시길 바란다. 주1. 요네하라 마리, 「이카로스와 가가린」, 『교양 노트』, 마음산책, 2010
일 년여 전에 본 < 눈의 마음: 슬픔이 우리를 데려가는 곳 >을 다시 떠올리게 된 것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잊을 수 없는 몇몇 이미지들 때문이었다. 그중 하나는 천산의 이미지다. 영화는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 힘든, 온통 눈으로 새하얀 카자흐스탄 알마티의 길 위에서 시작한다. 한참 넋을 놓고 있노라면 지평선 너머로 벽처럼 솟아오른 천산의 모습이 보인다. 극장에 앉아있다는 사실을 잊게 할 만큼 초현실적이고 아름다운 설경. 그러나 알마티를 지나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한국의 안산을 오가던 영화가 1937년 강제이주의 모습이 담긴 푸티지를 보여준 후 다시 알마티로 돌아오면, 전혀 다른 모습의 천산이 보인다. 1937년 강제로 이곳으로 끌려온 사람들은 천산을 마주하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어느 방향에서든 철벽처럼 서 있는 천산을 보며 자신의 가혹한 운명과 닮았다고 느끼지는 않았을까. 영화에는 세 가지 죽음이 암시된다. 고려인들의 죽음, 김정 감독의 아버지를 비롯한 감독의 가까운 지인들의 죽음, 세월호가 앗아간 죽음이 그것이다. 1937년 당시 17만 5천여 명의 고려인 강제이주자 중 이주 도중에 사망한 인원만 1만 1천여 명으로 알려져 있다. 고려인 1세들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며, 영화에 나오는 최 예브게니아 할머니처럼, 고려인 2세들 역시 죽음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는 나이이다. 돌아가신 김정 감독의 아버지, 고 김열규 교수는 감독에게 볼셰비키로 활동한 한인 최초 여성공산주의자 김 알렉산드라 페트로보나의 이야기를 들려주어 그녀를 이 먼 곳, 중앙아시아로 이끌었다. 안산에 사는 김 알렉스 씨를 비롯한 고려인들은 세월호의 소식을 듣고, 늦은 밤 단원고등학교 운동장에서 학생들과 함께 촛불을 들고 있었다. 이 무수한 죽음들을 감당하기 위함일까. 중앙아시아의 희고 황량한 풍경들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 눈의 마음: 슬픔이 우리를 데려가는 곳 >은 애도를 위한 한 편의 여정, 의식과 같은 느낌을 준다. 잊히지 않는 또 다른 이미지는 송 라브렌티 감독의 식탁 풍경이다. 송 라브렌티 감독은 고려인 2세로, 모스크바 국립영화학교를 졸업하고 카자흐스탄에서 영화감독으로 활동했다. 그는 김정 감독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여 중앙아시아에서 보낸 유년시절의 기억들을 들려주고 자신이 만든 영화의 테이프를 꺼내 보여준다. 따뜻한 차와 꿀이 있고 포근한 주황빛이 감도는 식탁에서, 잊혀져왔던 기억/역사를 보고 듣는 이 장면은 그 이야기를 듣기 위해 먼 길을 날아 중앙아시아로 온 여행객들의 추운 몸과 설레는 마음을 달래주기에 충분해 보였다. 그의 집을 떠나기 전 카메라는 잘 가꾸어진 화초들이 놓인 창가를 비춘다. 꽃이 핀 싱싱한 화초들은 가꾼 이의 정성을 느끼게 하고, 추운 바깥 날씨를 생각하면 성스럽게까지 느껴진다. 이 정성과 성스러움은 영화 내내 반복하여 등장하며 제의와 애도로 이어진다. 한식(寒食)날 유가이 콘스탄틴 가족이 지내는 제사, 진열대 안의 과일들이 얼어붙지 않게 하기 위해 놓여있는 비쉬켁 시장의 촛불들, 최 예브게니아 할머니가 고이 간직하고 있는 당신의 수의, 단원고 운동장에 모여 촛불을 들고 기도하는 사람들, 새해 첫날 키르기스스탄 알라 아르차 계곡에서 돌아가신 아버지께 올리는 김정 감독의 제사까지. 이렇듯, 오래되고 가까운 죽음들 그리고 미래의 죽음들까지 애도하는 < 눈의 마음: 슬픔이 우리를 데려가는 곳 >의 긴 여정은 카자흐스탄 출신 고려인 가수 빅토르 최의 노래와 달리는 차 안에서 바라다보이는 천산의 풍경으로 마무리 된다. 하나의 예술작품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비극들을 담고 있는 <눈의 마음: 슬픔이 우리를 데려가는 곳>이 한 편의 영화로 가능했던 것은, 한 많은 세월을 담담한 어조와 목소리로 표현한 빅토르 최의 노래 ‘슬픔’처럼 이 죽음의 기억/역사들을 눈물이나 절규 대신 고요하고 온화한 애도들로 채워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2001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받았던 울리히 사이들의 < 개 같은 나날 Hundstage >을 대변하는 하나의 이미지가 있다. 똑같이 생긴 서민 주택들이 늘어선 모습을 후경으로, 한 남자가 작열하는 태양 아래 누워 있다. 그의 육중하다 못해 기괴하기까지 한 살덩어리 위로는 보는 이조차 질식하게 만들 질척한 땀줄기가 흘러내린다. 성냥갑 같은 모습으로 길게 늘어선 주택들과 서구 영화에서 익히 보기 힘든 거대한 육체성의 조합은 앞으로 이 감독, 울리히 사이들이 전개할 영화적 세계를 함축하는 이미지가 되었다. 울리히 사이들은 오스트리아의 90년대에 등장한 ‘뉴 오스트리아 영화’ 혹은 ‘앙팡테리블’의 대표주자였다. 우리에게 알려진 미카엘 하네케나 예시카 하우스너 조차도 오스트리아 영화를 예민하고 날카로운 감성의 어떤 것이라고 인식하게 만들 만큼 개성 강한 존재들이지만 울리히 사이들은 거기서 더 나아간다. 1990년대 < 상실시대 Mit Verlust ist zu rechnen >, <애니멀 러브 Tierische Liebe> 등의 다큐멘터리 작품으로 시작된 그의 영화 이력은 줄곧 이민 노동자, 섹슈얼리티, 육체성, 계급, 소외 등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해부하였고, 2001년 < 개 같은 나날 >을 계기로는 극영화에 본격적으로 투신한다. 그러나 그의 영화에 대해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의 범주를 구분하는 것이 의미 없을 정도로 그의 작품 세계는 실재하는 현실의 요소와 카메라 앞에서 인공적으로 직조된 삶을 정교하게 직조하는 것이었다. 주인공들은 지속적으로 함께 하는 몇몇 전문 배우를 제외하고 이민 노동자, 요양원 노인, 아프리카의 실업자 등 실제 그러한 삶의 이력을 지닌 이들을 캐스팅하였고, 촬영의 장소 역시 다큐멘터리처럼 현장성을 중시했다. 울리히 사이들의 최근작은 ‘파라다이스’ 연작으로 만들어진 세 편의 영화이다. 2012-3년 사이에 만들어져 각각 칸, 베니스, 베를린에서 소개된 이 작품들은 러브, 신념, 희망의 세 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정작 모두 지옥과도 같은 현실의 잔혹함과 파괴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욕의 문제가 인간에게 어떻게 작동되고 있는지에 천착한 영화들이다. 그리고 그가 다시금 정색하고 작업한 다큐멘터리 영화가 2014년에 만들어진 < 지하실에서 Im Keller >이다.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도 상영된 이 작품은 상영 중 가장 많은 관객들이 불편함을 못 견디고 극장을 빠져나가게 만든 영화이기도 하며, 울리히 사이들의 날카로운 문제의식이 가장 극단적으로 관객의 관음증, 그중에서도 스스로를 교양주의자라고 믿고 있는 부르주아적 윤리 의식의 소유자들의 보는 행위를 공격하고 자극하는 작품이기도 하였다. 영화는 울리히 사이들의 호기심에서 시작된다. 오스트리아 도심의 중산층 저택의 지하실들. 그 지하실에서는 도대체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하는 것이다. 1층이 주방과 거실로 이어지는 접대의 공간(다른 이들에게 보여지는 공간, 사회적인 시선이 개입된 공간)이라면 지하실은 흔히 남들에게 내보이지 않는, 주택 소유자의 은밀하고 사적인 취향이 실현되는 공간일 것이라 그는 생각했다. 정신분석학의 용어를 빌리자면 리비도의 공간이고, 장르 영화의 상상력을 동원하자면 범죄와 은폐가 벌어지는 공간일 것이다. 울리히 사이들은 그러한 호기심으로 오스트리아 중산층 저택의 지하실을 찾아다니기 시작하였다. 뜬금없이 아무 집이나 찾아가 지하실을 보여달라고 했고, 선뜻 호의를 베푸는 사람들 중에서도 아주 독특하거나 기괴한 취향을 가진 이들은 직접 캐스팅하였다. 그래서 만들어진 작품이 < 지하실에서 >라는 다큐멘터리이다.(이 작품의 촬영과정은 콘스탄틴 울프의 다큐멘터리 <울리히 사이들: 작업중의 감독>(2014)에 기록되어 있다) 지하실에서 누군가는 불법 수렵한 동물들을 박제해 박물관처럼 전시해 놓았으며, 또 누군가는 또래 아이들과 록 그룹을 결성해 생활한다. 그러나 역시 이 영화의 가장 논쟁적인 상황들은 성과 정치에 관한 풍경들이다. 과거 나치 친위대원이었을 법한 한 노인은 지금도 지하실 전체를 히틀러와 나치에 대한 향수 및 충정을 담아 엄청난 애장품들로 꾸며놓았다. 그는 카메라 앞에서 당당하게 나치 제복을 입고, 히틀러를 숭배한다. 검붉은 나치의 유물들과 마네킹으로 재현된 나치 친위대 병사들의 모습들은 언캐니한 금기와 공포의 풍경들이다. 사상적으로 금지된 이 공간은 관객들에게 생경하지만, 그와 그의 브라스밴드 친구들에게는 너무도 일상적이고 편안한 여가의 공간이다. 그들은 누구도 이 공간을 정치적으로 문제 삼지 않으며, 평범한 도시 노동자의 여흥을 풀어낸다. 그러나 역시 관객들을 가장 아연질색하게 만드는 순간들은 역시 부르주아 윤리를 공격하는 성에 관한 에피소드들이다. 이 영화는 각각의 지하실 풍경과 그 속에서 내밀하게 벌어지는 주인들의 성적 취향들을 적나라하게 담아내는데, 누군가는 그곳에서 매춘을 하고, 누군가는 스스로를 결박한 채 가학-피학적 성행위를 한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가장 많은 할애를 하는 지하실은 주인과 노예 게임을 하는 한 부부의 모습이다. 육중한 육체를 가진 남자(왜 아니겠는가!)는 일터에서는 평범하면서도 듬직한 관리인이지만, 집 안으로, 특히 지하실로 들어서는 순간 그는 발가벗은 노예가 된다. 짐승처럼 포박되는 것은 기본이고 그의 성기에는 주인(아내)이 쇳덩어리 종을 달아놓고 고문을 하거나 일을 부리는 수단으로 사용한다. 그 밖에 영화에서 벌어지는 많은 순간들은 도저히 언어적인 묘사가 불가능할 정도로 가혹한 복종 게임과 적나라한 성적 유희들이다.(이들 커플이 묘사되는 순간 전주의 관객들이 상당수 극장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이 장면들을 보고 있노라면 여러 가지 의심들이 올라온다. 첫 번째 질문은 내가(관객이) 왜 이것을 봐야 하는 것인가 혹은 감독은 왜 이것을 관객들로 하여금 보도록 강제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이 영화 < 지하실에서 >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소위 ‘정상성’의 범주에서 벗어난 기이한 존재들처럼 간주된다. 성적으로 도착되어 있으며, 불온한 정치적 신념을 종교적으로 숭상하며, 자신이 도살한 짐승들을 박제하며 그는 그 짐승들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들은 때로는 지나치게 희화화되거나 포르노그래피화 된다. 그러나 영화적 흐름 속에서 이 이미지들이 건조하고 무심한 방식으로 반복될 때, 관객들을 끊임없이 불편하게 했던 ‘시선의 윤리’와 ‘대상의 착취’라는 문제의식들은 점점 뒤로 밀려난다. 자본주의 질서 내에서 규정된 ‘정상성’과 그 용어가 억압하고 있는 사람들의 내밀하고 근원적인 욕망들은 그들만의 사적이고 은폐된 공간인 지하실에서 역동적으로 꿈틀거린다. 억압된 것은 사라지지 않고 어떠한 방식으로든 존재하며 인간의 욕망을 여전히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두 번째 질문. 이것이 과연 다큐멘터리인가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이것이 과연 실제의 삶인가 하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다큐멘터리 특유의 현장에서 발생하는 즉흥성과 우발성은 배제되어 있다. 모든 카메라 앵글 및 인물들의 시선 그리고 억제된 대사들은 감독의 통제하에 연출된다. 울리히 사이들이 연출했던 극영화들에서 빈번히 보았던 타블로 샷(극 중 인물들이 무표정한 얼굴과 부동의 자세로 마치 액자 속에 들어간 듯한 앵글로 카메라를 직시하는 장면들)들은 말할 것도 없고 행위들은 어딘지 부자연스럽다. 이 기괴한 영화적 모드는 울리히 사이들에 관한 다큐멘터리 <울리히 사이들: 작업 중의 감독>에서 설명된다. 울리히 사이들은 주인들을 관찰하고 설득하고 그리고 카메라 앞에 세운 뒤, 그는 그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을 연기하도록 지시한다. 지하 공간에 존재했던 소품들은 그의 카메라 앞에서 다시금 배치되고, 심지어 인물들의 의상과 행위 동선, 시선까지도 매우 섬세하게 지시된다. 이 영화가 다큐멘터리임에도 극영화적 양식으로 구성된 것은 그들의 일상적 삶과 취향, 욕망 모두 카메라 앞에서 다시금 가공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과정 속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영화 속 인물들의 욕망이 기괴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카메라 앞에서 가감 없이 그것을 연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울리히 사이들의 괴력은 여기서 발휘된다. 그들은 카메라를 들고 자신의 지하실로 침투해 들어온 이방인들에게 금기된 열정을 내보이고 촬영을 허용한다. 언제나 검은 정장을 입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대화를 이어나가는 감독은 얼핏 유머러스하고 온화한 듯하지만, 사실 그 조용한 목소리와 시선 속에서 대상들이 거부하지 못할 단호함을 지니고 있다. 정작 지하실의 주인이자 자신의 삶의 주인이기도 한 인물들은 마치 감독과 주인-노예의 게임을 하듯 명령에 복종하고 자신들의 삶을 가감 없이 연기하는 것이다. 기이한 카리스마와 괴이한 통찰력으로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시선과 인간의 성욕, 계급, 노동의 문제를 피력하는 울리히 사이들의 영화들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사람들이 내 영화를 오락거리로 보지 않길 바란다. 내 영화가 관객과의 삶을 연결하는 창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 창을 통해 극장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모습을 대면했으면 좋겠다.”(울리히 사이들) PS: 국내에서 소개된 그의 극영화는 발가벗은 육체들을 감추느라 블러 처리되어 제대로 감상할 수 없게 만들었던 < 파라다이스 러브 Paradies: Liebe >(2012), 영화의 20여 분을 아예 심의 삭제하여, 훼손된 상태로만 소개됐던 < 수입, 수출 Import/Export >(2006) 정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