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나물
- 감독
- 윤가은
- 제작년도
- 2013
- 출연
- 김소진, 양유정, 마찬미, 정옥광, 조진우, 김형중, 하민영, 엄기성, 해리, 김은영, 박상희, 서승연, 이연제, 정지윤, 지은하, 김종숙, 장혜미, 정태경, 박영, 손석배, 이은지, 황유진, 손효인, 정의영, 강한주, 이은진, 성민우, 방현우, 김수안, 이다령, 홍지수, 윤가원, 유정곤, 지효섭, 이옥석, 김수복, 신경숙, 전순천, 이영혜, 오동주, 차주동, 김세훈, 박태영, 신희주, 김영옥
윤가은 감독은 2016년 여자아이들의 우정을 역동적으로 그려낸 < 우리들 >로 큰 주목을 받으며 장편 데뷔를 했다. 이미 단편 < 사루비아의 맛 >(2009), < 손님 >(2011), < 콩나물 >(2013)에서 여자아이들의 감정과 모험을 다룬 윤가은 감독은 최근작 < 우리집 >(2019)에서도 각자 집에 해결할 문제를 안고 있는 하나와 유미·유진 자매를 통해 집과 우리의 의미를 묻는다. 이렇게 여자아이들의 다양한 관계와 삶을 다룬 연작으로 윤가은 감독은 ‘우리 유니버스’라고 칭해지는 하나의 세계를 구축한 새로운 세대의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우리 유니버스’는 10대 여자아이들의 삶이 얼마나 영화적이고 스펙터클한지, 그리고 얼마나 할 이야기가 많은지를 증명한다. <우리들>의 오프닝 장면을 보자. 블랙 스크린이 지속되는 첫 쇼트는 여러 아이들이 각자 자기 팀이 될 멤버를 뽑기 위해 가위바위보를 하는 소리를 들려준다. 서로 자기를 먼저 뽑아달라는 대사와 뽑히지 못해 아쉬워하는 한숨소리가 뒤섞인다. 그리고 이어지는 두 번째 쇼트에서 관객은 불안과 긴장으로 가득한 선의 얼굴을 만난다. 더티 싱글의 롱테이크로 연출된 이 클로즈업 쇼트는 선의 얼굴 주변 배경으로 프레임 인 & 아웃과 포커스 인 & 아웃이 반복되며 시끄럽게 장난치는 다른 아이들의 무신경함과 말없이 눈치만 보는 선을 대비시킨다. 아이들은 선을 대놓고 따돌리진 않지만 굳이 한 팀이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선은 속상하지만 티내지 않으려 안간힘을 쓴다. 화면 밖에서 마지막 가위바위보가 이뤄지고 선은 끝까지 이름이 불리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선을 데려가게 된 아이는 선을 다른 아이와 바꿔달라고 부탁하기까지 한다. 이 장면은 자존심 상하고 주눅 들지만 끝내 무너지지 않으려는 10대 여자아이의 변화무쌍한 감정을 정확하고 강렬하게 그려낸다. 단 두 개의 쇼트로 구성된 이 오프닝 장면은 10대 여자아이가 은근하게 따돌림 당하는 환경과 감정, 배경과 인물, 외면과 내면을 모두 가시화하며 한 여자아이의 미묘한 감정의 변화를 단숨에 드라마틱하고 스펙터클한 사건으로 만들어 버린다. <우리집>도 이와 유사하게 오프닝을 연다. 블랙 스크린으로 시작한 오프닝 장면은 불안하게 숨을 몰아쉬는 소리, 한숨소리, 밥 먹는 소리, 매미소리가 레이어를 만들며 점점 사운드가 쌓여가는 가운데 그 꼭지점에서 엄마아빠가 싸우는 소리와 함께 주인공 하나의 얼굴이 클로즈업으로 등장한다. 이 장면은 온전히 어찌할 바 모르는 하나의 불안한 감정과 수심에 가득 찬 얼굴에 집중하고 있지만 동시에 아이들이 얼마나 주변의 상황에 예민하게 반응하는지를 보여준다. <우리들>이 두 여자아이의 우정에 대한 영화라면 <우리집>은 여자아이들에게 돌봄과 ‘우리’라는 공동체가 무엇인지를 질문하는 영화다. 이 영화는 10대 여자아이를 통해 돌봄이 고단한 노동일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주변을 살피는 관찰의 제스처이며, 친밀감, 공동체 구성을 통한 안정감, 문제해결의 성취감, 선행의 인정욕구, 서로를 간섭하는 데서 오는 짜증, 자기 욕망과 강제된 성별역할 사이의 혼란 등 다양한 상태와 감정을 포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들>에서도 사용되었던 사운드로 화면 안과 밖을 끊임없이 연결하고 서로가 서로를 간섭하고 영향 받는 영화적 연출형식은 돌봄의 제스처와 정동을 체화한다. <우리집>의 주인공 하나는 나이는 어리지만 학교에서 선행상을 받을 뿐 아니라 방학숙제로 요리책을 만들고 실제로 타인을 위해 요리해주는 것을 즐긴다는 면에서 돌봄 능력이 뛰어나다. 하나는 자신의 재능을 발휘해 뿔뿔이 흩어지기 직전의 가족을 다시 ‘하나’로 만들고자 한다. 하지만 아무리 성숙한 하나라도 어른들에게 영향을 미치기란 쉽지 않다. 하나가 할 수 있는 건 밥을 차려 같이 먹자고 반복적으로 요청하거나 좋았던 시절의 추억을 살려 가족여행을 가자고 조르는 정도이다. 하지만 그조차 매번 실패한다. 그래서 하나는 유미와 유진 자매를 발견한다. 대형마트에서 하나는 꼼꼼한 관찰력으로 유미와 유진 자매에게 어른들의 일상적인 돌봄이 부족함을 알아챈다. 길을 잃어버린 유진을 찾아주며 친분을 맺은 하나는 화목해 보이는 유미와 유진의 집에도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된다. 큰 경제적 어려움 없이 아파트에 사는 하나와 달리 옥탑방에 사는 유미와 유진이네 집은 잦은 이사를 다녀야 하는 처지이다. 이혼직전의 부모가 문제인 하나와 안정적인 거주조건이 부족한 유미는 서로의 집을 부러워한다. 셋은 <열차의 이방인>(1951)의 인물들처럼 서로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기로 한다. 하나는 자신의 문제 해결이 힘들어질수록 유미와 유진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더 집착한다. 하나가 자매를 돌봐주는 데서 오는 기쁨과 만족감은 단순하지 않다. 부차적이긴 하지만 하나는 자매를 돌보고 문제를 해결해주는 데서 영향력과 능력의 성취감을 느끼며 자신의 가족 내에서 느끼는 무력감을 어느 정도 상쇄한다. 우여곡절 끝에 하나의 부모는 가족여행을 가기로 약속하지만, 하나는 곧 그것이 부모의 이혼여행임을 알게 된다. 역설적이게도 부모는 이혼 합의에 이르러서야 지난한 싸움을 멈춘다. 그러나 이혼이 가족의 해체로 이해되는 하나는 이 결말을 받아들일 수 없다. 하나는 가족여행 직전에 가출해 유미와 유진 자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여행을 떠난다. 엄마 아빠를 만날 기쁨에 셋이 함께 모은 상자로 만든 된 집을 등에 진 어린 유진과 무력함과 상실감에 빠진 하나, 그리고 그 둘 모두를 걱정하며 돌보는 유미는 자매의 부모가 일하는 보리해변으로 떠난다. 길을 잃고 어딘지 알 수 없는 해변에 도착한 셋은 갈등이 폭발하고 유진이 갖고 온 상자집을 발로 짓이겨 부숴버린다. 오랜 시간 공들여 함께 만든 집을 부수고야 셋은 서로에 대한 비난을 멈추고 서로를 돌아보게 된다. 파괴가 오히려 새로운 우리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자매의 집의 부동산 계약이 성사되지 않게 하기 위해 방문객들에게 아이들이 집에 대한 악평을 하고 방을 어지르는 해체적 방식을 썼던 것처럼 그들은 정형화된 집을 부수고 나서야 자기들만의 집을 찾는다. 하나는 마침내 새로운 집을 만들기 위해선 때로 해체와 파괴도 필요하다는 것, 집은 하나의 모양과 속성을 갖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돌봄에 대해서도 하나는 자신이 일방적으로 유미와 유진을 돌봐주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유미 역시 계속 하나의 기분을 살피고 하나가 언니(리더)의 역할을 잘 할 수 있도록 돌봐주고 있음을 알게 된다. 돌봄에는 여러 결과 각도가 있다. 하나의 엄마는 직장과 가사 일을 모두 잘하는 수퍼맘이 되어야 한다는 부담감과 가부장제적 압박에 지쳐 하나의 돌봄 행위가 가부장제가 강요하는 성별역할을 벗어난 다른 결과 감정이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한다. 하지만 하나가 성별고정관념 때문에 돌봄을 순순히 여자아이의 역할로 받아들이거나 문제해결을 돌봄을 통해서만 하려는 건 아닌지를 고민하고 걱정하는 하나 엄마의 감정 또한 여자아이와 관련된 돌봄의 정동이다. 집을 지키고 서로를 돌보고자 하는 세 여자아이의 모험은 집을 고정된 것이 아니라 이동과 모험의 공간으로 변모시킨다. 고전 주류 서사는 끊임없이 여성을 집(돌봄)과 일치시키면서 공간화화하고 정주시키며 모험을 떠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반면 남성은 모험을 떠난 길 위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며 리더십을 시험하고 개인 영웅으로서의 성장서사를 만든다. <우리집>은 집과 길, 정주와 모험, 유지와 성장 중 양자택일을 강요하지 않는다. <우리집>은 집과 돌봄의 주제, 그와 관련된 감정과 관계를 버리지 않으면서 여자아이들의 모험의 서사를 만든다. 그를 위해 집을 트랜스포머처럼 이동시키고 해체하고 모험의 공간으로 만들며 때로 추상화한다. 유진의 상자집처럼 말이다. 셋이 해변가에서 우연히 만난 캠핑장의 텐트처럼 집은 얼마든지 모험적인 소재와 주제가 될 수 있다. ‘길 위의 집’의 모험을 통해 하나는 ‘우리’를 다양하게 구성할 수 있게 되는 성장을 한다. 하나는 엄마아빠가 이혼해도 다른 모양의 가족을 구성할 수 있음을 받아들이고, 자기 가족 외에 우정으로 이어진 ‘우리’를 소중히 여기며, 물리적 공간이나 제도적 구속력이 ‘우리’를 떠받치는 유일한 조건이 아님을 알게 된다. 하나는 마지막까지 가족들에게 밥을 차려주며 새로운 ‘우리’를 만들어갈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하자고 제안한다. 그 모험의 여정에서 하나는 돌봄의 가치를 완전히 버리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리더십을 시험하고 ‘우리’를 다양하게 구성하며 성장서사를 이끌어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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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re or Less - <모어>(2021), 2022.12.09. 20. 이름을 지우고 살아남기 - <안나-감독판>(2022), 2023.01.09. 21. 우리에겐 따뜻한 국물과 유머가 필요하다 - <수프와 이데올로기>(2021), 2023.02.07. 22. 아직 끝나지 않은 - <미망인>(1955), 2023.03.10.
2010년대 한국 영화에서 새로운 이야기에 대한 하나의 가능성이 있다면 그것은 여성 서사일 것이다. 어쩌면 애초에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남성 서사에 경도되어 영화를 하리라 마음먹었을지 모르는 나조차 이런 생각을 마땅히 한다. 지금 여성 서사는 우리가 마주한 시대정신이다. 2000년대 이른바 한국 영화 르네상스가 도래하기 이전의 옛날 옛적 20세기에, 8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우리 방화(邦畫)를 주로 지배한 장르는 ‘에로’였다. 90년대만 해도 나는 한국 영화란 아무 맥락 없이 여자 옷이나 벗기려고 애쓰는 덧없는 이야기가 전부라고 생각했다. 이 한국형 착취 장르의 기원에는 70년대 ‘호스티스’ 영화가 있었고, 그 대중적 효시가 된 한 작품을 오랫동안 원흉으로 생각했다. 나의 이런 편견과 오해가 깨진 것은 미니홈피가 아직 유행하던 시절의 어느 날 밤 EBS에서였다. 영화란 직접 보기 전에 규정하고 떠들면 안 되는 것이었다. 70년대의 밤, 아기 업은 엄마를 조용히 뒤따르는 아이의 뒷모습과 연탄 쌓인 여인숙 골목길을 비추며 영화는 시작한다. 김밥을 파는 행상의 구성진 목소리가 주술같이 들리고, 봉고를 두들기는 재즈 퍼커션 사운드트랙이 깔리면, 어느 여인이 골목에 숨어있다 갑자기 나타나 허연 눈과 이빨과 손톱을 번뜩이며 귀신처럼 화면에 달려든다. 그리곤 경찰들이 어둔 골목의 여성들을 마구잡이로 잡아 끌고 간다. 윤락행위 단속에 걸려 속옷 차림으로 팔다리를 바동거리는 여인들 중에 우리의 주인공이 있다. 볏짚 거적 뒤에 숨었다가 들켜선 “난 잘못한 게 없다”는 그녀에게 경찰은 외친다. “잘못한 게 없는데 왜 숨어?” 새빨간 비닐 재킷을 입고 경찰을 향해 관객을 향해 세상을 향해 가까이 오지 말라는 듯 손을 뻗는 그녀의 얼굴 위로 주인공의 이름을 담은 빨간색 제목이 뜬다. ‘이젠 그만 가야지, 이젠 정말 가야지, 날이 새기 전에, 미련 없이, 돌아보지 말고 가야지’ 하는 노래와 함께 오프닝 크레딧이 흘러가는 이 영화가 바로 < 영자의 전성시대 >( 김호선 , 1975)다. 영자, 영자, 영자. 영화를 보고 나면 이 이름이 한동안 가슴에 사무친다. 월남 파병을 갔다 온 청년 창수( 송재호 )는 간밤의 일제 단속에 걸려 파출소에 갇힌 영자( 염복순 )와 3년 만에 재회한다. 창수는 친오빠인 척 영자를 철창에서 꺼내주고, 영자는 창수에게 혀를 메롱 내밀며 살짝 깨무는 시그니처 표정을 지어준다. 헤어지기 전에 창수는 철공소 노동자 막내였고, 영자는 사장 집에 갓 상경한 어린 식모였다. 현재 시점과 교차편집으로 보여주는 둘의 과거 속, 순진무구했던 영자는 비록 식모살이 처지라도 자존감과 자기 주관이 뚜렷한 소녀였다. 반말로 “넌 뭐니? 이름은 뭐니? 고향이 어디니?” 짹짹 물어대는 창수에게 영자는 “서울사람들은 아무한테나 반말하나요?” 하고 받아친다. 창수가 먼저 자기 이름을 밝히고 “나도 시골 놈이야” 고백하고 나서야 영자는 창수 얼굴에 고추장이나 묻혀주며 약간 마음을 연다. 영자가 좋아진 창수는 매번 자기만 꿍해서 “넌 나를 어떻게 생각하니?” 묻지만 영자는 창수가 그냥 귀찮다. 입대를 앞두고 3년만 기다려 달라고 매달리며 낑낑 우는 창수에게 영자는 “나는 서울에 돈 벌려 왔지 연애하러 온 게 아니”라고 똑 부러지게 말한다. 이도저도 안되면 억지로라도 안아보겠다고 달려드는 창수지만 적어도 영자가 싫다고 하면 곧바로 멈출 줄은 알았다. 그러나 피고용인 여자애가 NO라고 한들 멈출 줄도 모르고 멈출 필요도 없는 사장 아들이 영자를 겁탈하고, 이 일로 되레 영자만 쫓겨나면서 영자의 팔자는 기구한 쪽으로 향한다. 영자의 꿈은 돈을 버는 것, “기술을 배워서 평생 혼자 사는 것”이었다. 남성 중심으로 돌아가던 엄혹한 시대에 자신만의 기술을 가지려던 영자의 꿈은 이미 진취적이고 주체적이었다. 문제는 기술을 배우려면 우선 돈이 들고, 아직 세상은 기술을 갖고자 하는 여성의 의지를 비하할 뿐이었다. 서울에서 유일하게 의지할 아는 언니조차 “여자가 기술 가져봐야 팔자만 드셀 뿐, 그저 제일 좋은 기술은 그럴듯한 놈팡이 하나 골라잡는 것”이라며 영자의 꿈을 무시한다. 봉제공장 일용직으로 밤새도록 미싱을 돌리며 매일이 고단한 영자는 언니가 집에 남자를 데려오는 날이면 근처 여인숙에 가서 몇 푼을 내고 주인아주머니네 방구석에서 쪽잠을 자야한다. 온종일 재봉틀을 돌려 번 월급은 외상값을 제하고 나자 동전 몇 푼만 달랑 남는다. 정직한 노동의 대가는 황당하리만큼 적었지만, 이때만 해도 영자는 절망하기보단 깔깔 웃었다. 택시를 모는 여성 기사를 보고 운전을 배우리라 마음먹은 영자는 언니를 따라 홀에 나가지만 곧 그만둔다. 언니 말대로 아무리 “돈이 문제”라지만, 아버지뻘 남자들이 추근거리면서 운전 공부를 한다고 하니 집에 가서 밥이나 지으라고 비웃는 곳에 있기 싫다. 그래서 영자는 버스 안내양이 되지만, 매일 콩나물시루 같이 승객들을 미어터지도록 태운 버스에 위태롭게 매달리다 어느 날 불의의 사고로 왼팔을 잃고 만다. 나는 이 장면을 처음 봤을 때 충격이 잊히질 않는다. 그녀의 팔은 말 그대로 슝―하고 하늘 저편으로 날아가 버렸다! 70년대 일본의 ‘도에이 핑키 바이올런스’ 영화 따위나 찾아보며 낄낄거렸던 나는 이 한국영화의 표현주의 앞에서 깜짝 놀랐다. 나는 <영자의 전성시대>의 이 씬보다 더 잔인무도한 신체 절단 장면을 알지 못한다. 기술을 배우려던 젊은 여자에게 세상은 팔을 앗아간 값으로 달랑 30만원 보상금을 내어주며 “너무 비관 말고 용기 있게 살아가라”는 헛소리나 지껄인다. “고맙습니다” 말하고 돌아서는 그녀에게 언니는 이 돈으로 미장원을 차리자고 바람을 넣지만 영자는 그 돈을 모두 고향의 늙은 어머니와 동생들에게 보낸다. 자살 시도에 어이없이 실패하고 돌아와서, 없는 팔이 쑤시고 아파 약을 소주에 타 마시는 영자. 그녀가 지금껏 자신을 지탱해온 최소한의 자존과 존엄을 내려놓는 때는, 고통과 슬픔에 지친 나머지 그가 누구든 사람 품에 따뜻하게 안기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다. 여인숙 주인의 은밀한 제안에 결국 응한 영자는 이 가난하고 더러운 골목에서 ‘밀로의 비너스’로 거듭난다. 도시괴담에 나오던 팔 없는 매춘부. 그녀가 바로 영자였다. 전역 후 목욕탕 보일러실 구석에서 숙식하며 세신사로 일하는 창수는 다시 만난 영자를 이렇게 내버려둘 수 없다. 김씨 아저씨(최불암)는 네 장래나 걱정하라지만, 창수는 영자의 미래를 진심으로 걱정한다. 영자의 성병 치료비를 내고 병이 나을 때까지 손님을 안 받고 술도 못 마시도록 일이 끝나면 매일같이 그녀를 찾는다. 영자 말대로 “남자는 절개, 여자는 배짱”이다. 김씨 아저씨의 군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창수는 영자와 같이 살 생각이다. 살림 차릴 최소한의 조건인 전세방 구할 돈은 아직 없지만 창수는 손수 의수를 만들어 영자의 빈 팔에 달아준다. 한쪽의 무조건적인 사랑은 숭고하지만, 받는 쪽은 마지막 남은 자존심과 의리 때문이라도 이 사랑을 마냥 받기만 할 순 없다. “하나 더하기 하나가 둘이 되는 관계도 있지만, 하나 빼기 하나가 0이 되는 관계도 있다”는 김씨 아저씨의 말에 영자는 “마이너스 1”이 아니라 “보태기 1”이 되겠다고 나름대로 발버둥 친다. “두 사람 간신히 같이 끓여먹고 잠 잘 수 있는 방”만이라도 창수 손을 안 빌리고 자기 힘으로 마련하고 싶다. 영자에게 팔 병신 운운하는 녀석에게 주먹을 날린 창수가 구치소에 갇히고, 집행유예를 받아 풀려나기로 한 날. 꼭 오겠다고 한 영자는 끝내 나타나지 않는다. 창수도 영자가 왜 안 나타나는지 알 것 같아 가슴이 찢어진다. 둘이 다시 헤어지기 전에 영화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장면이 있다. 창수가 한밤중 문 열기 전의 목욕탕에 몰래 영자를 불러 씻기고 때를 밀어주는 장면이다. 창수는 “이 때 좀 봐” 하며 영자의 등을 밀고, 창수에게 몸을 내맡긴 영자는 새삼스레 ‘창피함’에 대해 생각한다. 이 세상을 살면서 항상 당당하고 창피한 건 없었던 영자는 창수를 만난 이후 이상하게 모든 게 걸핏하면 창피하다. 창수는 영자에게 또 묻는다. “넌 나를 어떻게 생각하니?” 영자는 “고마운 사람”이라고 답하고, 창수는 바라는 대답이 아니라 조금 실망한다. 나는 이 장면을 다시 볼 때마다 인간에 대한 어떤 예의를 발견한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그저 내가 욕망하는 대상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 깨닫는 순간이 있다. 내 옆에서 고단한 숨을 내뱉으며 자는 이 사람이 여자나 남자 따위가 아니라 이 세계를 역시 힘겹게 살아가는 같은 존재일 뿐이라고 깨닫는 순간이다. 그이와 내가 잠시나마 서로 지친 몸을 기댈 수 있다는 것은 그래서 얼마나 기적인가. 조선작의 원작 소설에서 영자는 불에 타죽지만, 김승옥이 각색한 시나리오는 영자를 위한 영화 나름의 다른 결말을 마련했다. 비록 그 시절의 한계가 있는 결말이지만 영화적 진실로서 더할 나위가 없고, 나는 영화가 끝날 때마다 흐르는 눈물을 훔친다. 내가 이 작품의 가치와 아름다움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방법은 이렇게 누군가를 향해 마냥 영화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뿐이지만, 결말만큼은 쓰지 않겠다. ‘두 눈을 꼭 감고 두 손을 맞잡고 하고픈 말들은 너무 많아요’ 마지막 삽입곡의 이 가사처럼, 어떤 이야기는 말이나 글로 전하기엔 한계가 있다. <영자의 전성시대>는 인간을, 여성을 착취하려고 만든 영화가 아니다. 여성 주인공을 통해 자본주의가 파괴하고 소외시킨 인간성을 내밀하게 들여다보는 영화였다. 그러나 이후 이 작품의 대중적 성공을 따라 복제, 재생산하며 유행하기 시작한 호스티스 영화들은 에로 장르로 급속히 변화하면서 도중에 인간과 여성에 대한 예의를 대놓고 빼먹기 시작했다. 나는 이들 장르의 영화 속에서도 날카로운 문제의식과 인간성을 잃지 않았던 몇몇 작품들이 오늘날 따로 불리어지기를 바란다. 여성 서사의 기준과 범위에서도 이러한 작품들이 적극적으로 포용될 수 있길 희망한다. 마지막으로, 나는 영자 역할을 한 염복순 배우의 얼굴이 개인적으로 현대 여성의 외모처럼 느껴져 영화를 볼 때마다 매번 새롭다. 그의 얼굴은 (우리가 백치미라고 왜곡하는) 죄가 없는 순백의 표정에서 세상을 향한 환멸까지 변화무쌍하지만, 내내 자신만의 고고함을 잃지 않는다. 그가 아니었더라면 <영자의 전성시대>는 한 시대의 중요한 작품으로 한국 영화에 남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한국 영화 속 여성 서사의 역사에 ‘영자’의 이름이 오래 남아 빛나길 바란다. 그리고 2020년대에는 새로운 여성 화자(들)의 진정한 ‘전성시대’가 도래하길. >> 영자의 전성시대 VOD 보러가기 <<
2004년 | 튜브픽쳐스 감독, 각본: 김수현 | 각색: 김소정 김봉훈 | 제작: 황우현 황재우 | 촬영: 김철주 | 미술: 박혜성 | 음악: 이병훈 CAST 순이: 예지원 | 963: 김석훈 | 뭐시기: 정재영 | 개코: 박선우 | 장수로: 장선우 | 막내: 박희순 사연은 이렇습니다. 박수무당인 장수로(장선우)는 자신을 찾아온 여인네들에게 씨를 퍼트렸고, 그래서 배다른 형제들이 탄생합니다. 퀵서비스맨 963(김석훈), 레카차 드라이버 개코(박선우), 그리고 조폭인 뭐시기(정재영). 여기에 순이(예지원)이 가세하며 가족을 이룹니다. 순이는 길에서 뻥튀기를 팔다가 우연히 개코를 만나 가족이 되었고, 장수로는 젊은 순이에게 연정을 품죠. 이처럼 < 귀여워 >는 어느 콩가루 가족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의 현장 공개는 실외와 실내 모두 이뤄졌습니다. 실외는 2002년 11월, 실내는 2003년 1월이었는데요, 영화 개봉이 2004년 11월이었던 걸 감안하면 꽤 간격이 큽니다. 원래는 2003년 5월 개봉이었는데 계속 미뤄졌기 때문이죠. 공개된 장면은 뭐시기가 아버지 장수로를 찾아온 신입니다. 동네 평상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는데요, 딱 봐도 건달기가 줄줄 흐릅니다. 역할을 위해 실제 건달과 합숙하면서 연기를 준비했는데 단 며칠 만에 완벽하게 ‘조폭화’되었다고 하더군요. 뭐시기를 바라보는 장수로 역의 장선우입니다. 후줄근한 옷차림에 파와 콩나물 봉지를 들고 있죠. 사실 <귀여워>의 가장 놀라운 캐스팅은 장선우입니다. 김수현 감독은 장선우 감독의 < 너에게 나를 보낸다 >(1994) < 꽃잎 >(1996) < 나쁜 영화 >(1997) 연출부 출신인데요, 자신의 데뷔작에서 스승을 배우로 모셔온 셈이죠. 원래는 한진희 씨가 맡을 예정이었는데 일정이 지연되면서 무산되었고, 이때 튜브픽쳐스의 황우현 대표가 ‘장선우 캐스팅’이라는 아이디어를 냈다고 하네요. 그런데 의외로 주변 반응이 나쁘지 않았고, 역할 제안을 하게 되었으며, 처음엔 난처해하던 장선우 감독은 농담처럼 “한번 망해보자”며 승락했다고 합니다. 뭐시기가 앉아 있는 평상 근처의 풍경입니다. 황학동 철거촌 주변 아파트죠. 김수현 감독은 말합니다. “철거는 서울의 천민자본주의적 속성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죠. 황학동 아파트는 60년대 후반 강남의 주상복합 아파트처럼 부의 상징이었는데 10년도 못 가 철거가 거론됐어요. 서울이라는 공간이 갖고 있는 독특한 성격인데요, 끊임없이 변화가 이뤄지지만 실상 아무것도 바뀌는 것은 없어요. 세우고 부수기만 반복할 뿐이죠.” <귀여워>는 지금은 사라진 폐허의 풍경에 카메라를 들이댄 영화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2000년대 초반 서울에 대한 기록의 측면에서도 가치를 지닙니다. <나쁜 영화> 연출부를 끝내고 일란성 세쌍둥이가 겪는 정체성의 혼란에 대한 이야기를 구상하던 김수현 감독은, 장수로와 순이라는 캐릭터를 만들어내면서 이야기가 쉽게 풀렸고 그 결과물은 <귀여워>가 됐습니다. 963의 퀵서비스나 개코의 레카차 운전사는 모두 감독이 직접 경험했던 직업이라고 하는데요, 생계를 위해 그런 일을 하다 보니 자연히 길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야생적 느낌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네요. 이 영화로 백상예술대상 신인감독상을 수상했습니다. 이 시기 예지원은 < 생활의 발견 >( 홍상수 , 2002) 이후 독보적인 아우라를 지니게 된 배우였죠. 그녀에게 ‘순이’는 이보다 더 적절할 수 없는 안성맞춤 캐릭터였습니다. 좁은 아파트 복도에서 촬영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집안 실내 장면은 양수리 세트에서 촬영되었습니다. 2003년 1월에 개봉된 세트 촬영 현장입니다. 밖에서 돌아온 아버지를 둘째 개코가 발톱을 깎으면서 맞이합니다. 이 역할을 맡은 배우가 왠지 낯익다고 느껴지신다면… 맞습니다. ‘하얀 겨울’이라는 노래로 유명한 남성 듀오 ‘미스터 투’의 멤버 박선우입니다. 김수현 감독의 동국대학교 영화과 후배인데요, 파격 캐스팅을 통해 이 영화로 데뷔해 신인답지 않는 노련한 연기를 보여주었습니다. 사실 박선우는 영화음악을 맡기는 줄 알고 연락을 받자마자 김수현 감독에게 달려왔다고 하는데요, 기다리는 건 ‘개코’라는 캐릭터였습니다. 이날 963은 오토바이에 순이를 태우고 질주하다가 함께 집에 들어오는데요, 순이를 자신의 여자라고 생각하는 장수로는, 아들에게 순이를 빼앗겼다는 생각에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느냐”며 아들의 뒷통수를 갈깁니다. 약간은 비뚤어지고 냉소적이면서 내성적인 963은 어쩌면 이 영화에서 연기하기 가장 까다로운 역할일 텐데요, 김석훈은 기존의 이미지를 벗고 역할을 해냈습니다. 집안 벽에 구멍이 뚫려 있는 구조가 매우 특이합니다. 철거촌에 있는 집인데. 집 안도 철거되어 있는 셈이죠. 좁은 세트 안에서 앵글을 만들어내기 위해 구조를 조금씩 바꿔가며 촬영을 했습니다. 당시 예지원의 매니저는 지금은 고인이 된 하용수 였습니다. <귀여워> 시나리오를 읽고 “혹시 예지원이라는 배우를 잘 알고 쓴 시나리오냐?”고 물을 정도로 적역이었다고 하네요. 배우 역시 순이와 자신이 많이 닮았다고 생각해서인지, 준비 과정부터 남다른 애정을 보여주었고 현장에서 감독에게 가장 힘이 되어 준 배우였다고 합니다. 당시 정재영은 < 킬러들의 수다 >( 장진 , 2001) < 피도 눈물도 없이 >( 류승완 , 2002)로 조금씩 주연급 배우로 발돋움하며 거친 마초 연기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말끝마다 “뭐시기”라는 말을 붙이는 뭐시기는 철거반을 이끄는 건달인데요, 정재영은 거의 완벽하게 역할을 해냅니다. 장수로의 부스스한 헤어스타일도 섬세한 작업의 결과물이었습니다. 장선우의 연기에 대해 현장 스태프들은 “연기와 연기 아닌 것의 경계에 서 있는 묘한 느낌의 연기”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현장에서 김수현 감독은 매우 꼼꼼한 스타일이었습니다. 감독은 <귀여워>가 결국은 “네 남자가 순이의 사랑을 받기 위해 애쓰는 영화”라며, 남자들의 그 귀여운 모습이 <귀여워>라는 제목의 이유라고 설명했습니다. 이후 감독은 < 창피해 >(2011) < 우리 손자 베스트 >(2017) 등을 내놓았습니다. 김수현 감독은 말합니다. “남자들은 무엇인가 계속 이뤄내려고 하죠. 세상이든 자신이든 끊임없이 변화시키려고 하는데, 정작 되는 일은 아무 것도 없어요. 반면에 순이는 진지한 구석이라고는 없는 가벼운 사람인 것 같지만 그녀의 행동과 사고방식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요. 그녀는 변화를 주도하지 않고, 상대에 반응하면서 변화를 이끌어내죠. 남자들이 뭔가 이루려고 아등바등해서 세상이 더 힘들어진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자연에 동조하며, 말 그대로 ‘자연스럽게’ 살 수 있는 대안을 보여주는 모델이 순이죠.” 이미지 디지털화 지원 NAVER